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마라(Mara)의 악몽

실론섬 2014. 3. 17. 03:09

마라(Mara)의 악몽

-불교경전에서 마라의 역설적 해석을 중심으로-

원혜영(대진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차례

1. 서론

2. 불교 텍스트에서 보인 마라의 성장

3. 넛지 효과로 본 마라의 궤적(軌跡)

4. 마라의 군대, 그리고 아이러니한 요소들

5. 결론


<국문요약>

붓다의 위대함을 인정하듯이, 마라가 가진 악마성을 인정하는 것은 일반화되어 이해하기 쉽다. 전통적인 불교 경전에서 붓다와 마라의 관계를 위장하거나 완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마라와 관련된 예전의 전설이나 많은 지식을 가볍게 전달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악마성을 가진 모든 것들은 무절제하고 거침없이 퍼붓는 잔인함이 크게 작용한다. 불전에서 보인 마라의 매복성과 공격은 악마적 기질을 가진 다른 종교에서,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대상들과 차이가 있다. 붓다와 마라는 서로를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우하는 듯이 느낄 정도로 불전의 텍스트에서 그들의 대화는 점잖다. 마라의 무절제성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악마와 인간 사이의 문제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여러 다른 종교의 에피소드에 비하면 불전에 나타난 마라는 다른 흥미로운 시각을 열어둔다.


붓다라는 상징을 뒤로 하고 마라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 역할을 한다. 불전에서 마라가 의미하는 이미지, 상징은 다양하다. 유혹하거나 방해하거나 죽음을 의미 하는 것 등이며, 다각적인 방법 안에서 마라는 붓다에 의해 한편으로는 부각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절된다.


필자는 그런 일반적인 이미지에 긍정하면서 마라에 관련된 다른 해석을 해보자 한다. 정면으로 바라본 마라가 아니라 다층적으로 바라본 마라는 흉하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불전에서 인간은 마라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포로가 아니라, 부분적 성향을 가졌거나 인간 외부의 존재하는 것으로 각인된다. 마라는 대중이 생각하는 것보다훨씬 광범위하게 세상에 관여하며 우리 정신에 깊이 침투해 있다. 불교경전에서 마라의 존재에 관련한 상정은 인간이 선과 악에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임을 밝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마라는 그를 극복하려는 마음먹음이 있으면 자유롭게 마라에게서 해방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마라의 의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라의 입장에서 보면, 만족스럽고 점잖게 그 위치를 드러낼 수 있기에 흡족했을 것이다. 이런 관계를 전진적으로 바라보면서,필자는 붓다와 수행자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 마라라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자 한다.


Ⅰ. 서론

마라와 붓다라는 대비적인 인물의 산출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상황과 의미들은 피할 수없는 운명처럼 극적이다. 특히 이런 구성은 심사숙고적인 성격을 띠며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전승된 텍스트에 입각한 인식의 구조는 차츰 변질되어가더라도 무게 있는 인물인 마라가 잊혀질리 만무하다.


마라는 광범위한 인도 텍스트와 불교 텍스트에서 성장통을 겪었다. 붓다의 설법이 우주로 확산되는 커다란 그물망에서 성장하듯이, 마라도 나름대로 그 맥락에 편승하면서 신화적인 존재에서 인격화된 존재로 커나갔다. 어원적인 분석은 마라의 존재감에 무게를 두게 하기 위해서이다. 불교 텍스트에서 보인 마라의 성장은 마라를 다각적인 각도로 분석하게 한다. 이 논문의 소제목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초기 경전에서 붓다나 수행자들이 마라의 유혹에서 벗어나 완전한 수행의 길로 들어서는 많은 사례들이 돋보인다. 마라를 이긴 것은 붓다나 수행자들의 마음 안에 흔들림 없는 성역의 경지가 있음을 나타내려 한 것이기도 하지만, 수행에서 우월한 감정, 긍정적인 감정으로 악한 감정을 제압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제시한 경우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필자는 다른 시각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한다. 이 논문은 마라를 비난하거나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 마라를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붓다와 마라의 관계는 상상하는 것보다 서로 밀접한 관계로 맺어졌다. 필자는 넛지 효과를 통해 마라의 보인 행위가 긍정적이고 선택적이게 붓다와 수행자들의 행위를 이끌었고 주장할 것이다.


마라는 괴팍하고 어두운 인물이지만 초기경전에서부터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살아남는 힘을 가졌다. 마라 군대라는 공식화된 숫자로 그룹 짓는 일은 기억의 편의상 필수적인 표현이다. 특징적인 마라의 군대와 붓다를 유혹하는 아름다운 딸들이야 말로 기억에 특별한 도움을 주며 전승된 텍스트에서 집중하게 된다.


마라는 반 영웅적이지만 경탄할 만큼 불교 경전의 극적인 요소를 가져오게 한다. 마라에 대한 통제는 붓다마저 그 세계를 장악하지 못하게 한다. 붓다에 의해 제압되고 붓다의 내면이 흔들렸는가는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없겠지만, 마라가 붓다의 수행을 방해한 것은 사실이다. 마라의 방해는 텍스트 속의 대중이나 텍스트를 읽고 있는 현재의 독자에게 나 붓다를 응시하게 한다.


마라의 소리는 효과적인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교묘하게 수행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대승 경전에서 마라는 수행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수면, 탐욕, 게으름 등의 일종의 번뇌로 수행을 방해하는 마음으로 자리매김 한다. 초기경전과 동일한 역할을 하지만 인격화되고 신격화된 대상이 아니라 수행자의 마음에 자리 잡은 오염된 마음이 되었다.


구술로 전승된 텍스트가 문자화되면서 마라의 존재는 충분히 알려진 셈이다. 마라를 나타내는 표현의 특징들 모든 부분은 인간의 심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분리되고 토막 난 사고의 일부이며, 내면화 된 고결한 인격성의 흠집 내기였다. 마라는 자연적 도태됨이 아니고 붓다가 입멸하고 확산되어간 붓다의 정신만큼이나 변이를 통해 붓다를 전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붓다와 마라의 관계를 영원한 딜레마로 볼 것인가, 긍정적이고 선택적이게 하는 라이벌 관계로 볼 것인가는 순수하게 독자들의 판단에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전통적인 견해를 뒤로 하고 마라가 붓다와 수행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긍정적인 해석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Ⅱ. 불교 텍스트에서 보인 마라의 성장

기억의 용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판에 밝힌 인물의 등장은 영웅적이고 확실히 신뢰받는 인물을 대비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기억의 대상에서 가장 기념비적이고 잊기 어려운 인물의 등장은 독자들을 주의 깊게 하고 그 인물이 의미하는 상징성에 관하여 심사숙고하게 한다. 마라는 붓다의 위상에 도움을 주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마라에 관련된 전승들을 살펴보고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가에 관해 알아보자. 니까야(Nikāya)가 구술로 전승된 토대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대체로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마라의 이야기를 텍스트를 통해 거론한다.


마라에 대한 이야기는 우주적인 신화에 기초한다. Digha Nikāya 27,Agganna Suttā에 의하면, 어떻게 인간 존재가 신과 같은 존재로부터 발달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이 혈통의 시작은 '그 존재들은 바다표면에 떠 있으면서 태고의 자양분이 되는 필수품을 맛보고, 조잡한 신체를 발전 시켰다'고 전한다.


어원적으로 본다면, 빨리어와 산스끄리뜨어에서 ‘pāpa’는 ‘악’을 의미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Pāpimā’는 마라(Māra)의 이름에 적용되는 가장 일상적인 상용어처럼 쓰이고 있다. 고대 인도의 종교적 표현으로 친숙한 ‘Pāpimā’는 마라 그 자체이다. 브라만에서 하나의 표상으로 알려진 ‘죽음의 악마’라고 불리는 ‘Pāpimā’ Mṛtyuḥ와 ‘Māra Pāpimā’는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다. 산스끄리뜨 문헌에서 ‘Pāpimā’는 남성 명사로 ‘악마, 불행과 죄’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것뿐 만아니라 객관적으로 불행, 슬픔, 고통 등을 가리킨다. 더 오래된 산스끄리뜨 문헌에서 ‘Pāpimā’는 ‘Mṛtyu’와 유사한 男神처럼 인격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초기 불교문헌에서는 ‘Pāpimā’와 ‘마라’는 완벽하게 동일시되고 있다. Pāpimā는 마라의 애칭처럼, 또는 마라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식어처럼 텍스트에서 언급되고 있다. 텍스트에서 Pāpimā는 마라와 분리되어 홀로 언급되지 않고 악의 애칭처럼 수식되며 사용된다.


마라는 불교 텍스트 밖에 있는 인도 문맥에서 “Namuci”라는 고유명사로 종종 사용되어 마라를 대신해서 상기된다.7) 또한 마라는 Yama와 Kāma에 관계한다. 베다 신화에서 “Namuci”는 ‘물에 손대지 못하는’ 목마른 귀신으로 비에서 해방되기 위해 인드라의 격렬한 위협에 의해 고통 받게 된다. 죽음을 초래하는 행동은 쉽게 마라와 연결된다. 베다 신화에서 절망적이고 고통 받는 귀신의 이야기가 불교전통에서는 절망을 주고 고통을 주는 마라로 입장 차이를 보인다. 베다신화에서는 인드라가, 불교전통에는 붓다가 마라를 제압한다. 마라 자체는절망과 고통의 근원이며 그것에서 파생되면서 불행한 이미지를 전파한다.


Atharvaveda(Ⅳ, 93)에서 Mṛtyu Yama는 무시무시한 파괴적인 죽음의 신으로 서술되었고 선택적으로 불교 텍스트에서 마라가 그 개념을 완벽하게 가져왔다.


Kāma는 베다 전통에서 신들의 감각적 사랑과 즐거움으로 사용되었고 불교 전통에서 마라의 이명(異名)처럼 되어 죽음과 세상에 대한 욕망으로 동일시되었다. Kāma는 분명하게 불교적 의미로 남게 되었다.11)베다에서 신들만의 유희적 감각은 불교에서 부정적이고 수행을 방해하는 욕구로 변화된다. 마라가 가진 요소 속에 Kāma의 독특한 성향은 수행자가 신들이 느끼는 감각적 사랑과 즐거움에 마음을 흔들리고 그 자체가 방해 기제로 불교적 정통으로 이행한다.


자따까에서 언급되는 귀신(demon)은 악마적 성향으로 사악하고 악의적인 경향을 의미한다.(각주1) 악을 대변하는 등장인물은 초기불교 텍스트에서 선택적으로 다양하게 칭하지만, 마라는 지배적 위치를 가진다. 비록 이들 용어 대부분이 베다, 브라만, 그리고 우빠니샤드 시대의 전후관계 문맥을 통해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라는 기본적으로 불교적

인 상징을 가졌다. 인도신화에서 불교 텍스트에서 보인 마라를 능가할만한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


[각주 1]"夜叉(Yakkhas, yakṣas), 羅叉(rakkhasa, rākṣasas), 毘舍遮(pisacas, piśācas)은 불교 문헌인 빨리 텍스트와 산스끄리뜨 텍스트에서 가장일상화 된 악마이다. 이것들은 불교 텍스트에서 서로 호환가능하게 사용되어 서로를 구별할 수 없기도 하다."


쌍윳따 니까야에서 마라는 붓다가 우주의 왕이 되어 위대한 평화의 제국을 건설하도록 재촉한다는 예외적인 문구도 보인다. 붓다의 사후, 일부 불교도들은 붓다가 신통력을 통하여 우주의 大劫(kappa)에 걸쳐 세상에 머물 수 있다고 믿었다.(각주 2)


[각주 2] "안양규, 「붓다의 神格化와 反神格化-그의 수명과 수명 연장 능력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제6집(서울: 서울대종교문제연구소, 2000), 245-265면;안양규, 「붓다의 반열반에 관한 고찰」, ?인도철학? 제10집(서울: 인도철학회,2000), 10면. 또한 대반열바경에서도 악마 빠삐만과의 대화 그리고 아난다의 수명연장 간청등에서도 붓다의 수명 연장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다." 


마라는 붓다가 7년 동안 고생할 때도 쫓아다니며 괴롭힌다.15) 붓다가 베나레스에서 설법할 때도 나타난다. 라자가하르에서 홀로 수행할 때도 나타난다. 붓다가 정각(正覺)에 들 때 방해했던 마라가 사라지자, 마라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 간주했던 상황은 역전되었다. 마라는 붓다의 정각 직후 그에게 다가가 바로 입멸할 것을 요구한다. 마라는 붓다에게 애절하게 구걸하듯이 열반에 들도록 부축이며 재등장했을 때의 극적 상황은 경전을 읽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붓다 입멸이라는 비극적 상황과 맞닿아있는 세상은, 다시 말해서그의 존재를 모르는 대중은 마라의 권청으로 인해 그를 인식했다.


애초의 존재 탐·진·치를 이끄는 음탕한 마음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뒤로 하고 신화적인 마라의 등장이 먼저인 것은 악마성에 더 집중적이다. 마라는 붓다와 다른 사람들 앞에 다가가서 그 상황과 장소를 아주 강하게 인식시킨다. 대부분의 경우가 다 그렇다고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마라가 출현한 장소와 정황은 결과적으로 붓다의 굳은 의지와 승리를 대부분 알려준다.


마라의 생각에 의하면, 붓다 입멸이 의미하는 것은 붓다와 우리 중생들과의 영원한 단절이다. 마라의 목적은 붓다가 중생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법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다. 붓다는 마라가 원하고 있는 것을 예견하고 자신의 가르침이 제자들에 의해 확립되기 전까지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마라와 붓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붓다가 일단 반열반에 들면 그는 더 이상 중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붓다가 열반에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의 중생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열반경과 붓다고사의 견해에 의하면, 입멸한 붓다는 더 이상 그의 제자들에게 접근가능하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의 무주처열반의 개념과 매우 대조적이다. 무주처열반에 의하면 붓다는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윤회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또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위해 입멸하지 않고 구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열반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대승불교에서 붓다의 자비와 힘은 매우 위대하다고 믿어지게 되어 그는 아직도 최후의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을 도우면서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마라와 붓다의 이미지는 신화적인 인물과 실존하는 인물 사이에서 불교도들의 생각 속에 자리했고, 더 나아가 외연을 넓히는 이미지로 변모한다. [대반열반경]에서는 불설(佛說)과 마설(魔說)로 구분하여, 대립관계의 역학구조를 이용하면서 정보 전달자가 거론하는 진위에 촉각을 세우도록 환기시키고 있다. 경과 율에 근거한 정보라면 불설(佛說)이고 그렇지 않다면 위설이기 때문에 마설(魔說)로 표현하고 있다.


대승의 성향이 강한 이 경전에서 마라와 붓다의 영향은 경전의 진위 여부까지 외연을 넓히고 있다. 경전들에서 마라를 다양하게 강조하고 다른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학파와 경전의 집필자에 따른 개인적인 차이로 인정되지만, 경전의 진위여부의 구별에도 적용될 만큼 마라와 붓다의 영향력은 컸다.


Ⅲ. 넛지 효과로 본 마라의 궤적(軌跡)

넛지(Nudge) 효과는 ‘팔꿈치를 슬쩍 찌른다’는 의미를 가졌다. 시카고 대학의 카스 선스타인(Cass Sunstein) 하버드 로스쿨 교수의 공저 ‘넛지’에서 유명해진 개념이다. 이 책에서는 넛지에 관련된 많은 사례들을 보이고 있다. 강요에 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선택을 이끄는 힘이 효과가 있음을 보인다. 그릇의 크기를 줄여서 자연스럽게 조금 먹을 수 있게 하거나, 몸에 좋은 채소와 과일을 잘 보이도록 테이블 위에 놓아두는 것 등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연스러운 선택을 유도하게 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효과가 크다. 같은 상황아래서 넛지를 가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련된 사례들은 예상했던 결과를 초월할 만큼 성공적이다. 우리 사회의 작동원리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택하게 만들고 있으며 외면적으로 드러난 영향력은 대단하다.


초기 정전의 텍스트에서 마라와 붓다, 마라와 수행자들 간의 대화나 상황을 살펴보면서 넛지 효과를 떠올리게 된다. 붓다와 수행자들이 마라의 유혹과 방해로 인해 결과적으로 수행과 정진에서 커다란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부축이고 외부에서 오는 유혹은 자연스럽게 올바른 선택으로 이끄는 힘을 낳았기 때문일 것이다.


배척과 적대감의 상징이 된 마라의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마라의 이미지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일반적으로 마라는 부정의 이미지를 지녔지만, 그것은 더 큰 긍정의 힘과 커다란 효과를 낳는 힘이 되었다. 고무줄을 잡아당기는 힘만큼 그 반대로 튕겨져 나가는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마라가 가진 공포와 황폐, 악마적인 성향, 가증스러움은 붓다와 수행자들에게 마라의 권력에 편중하지 않으려는 넛지 효과의 작용일 수 있다. 마라는 끝없는 위험인물로 간주되면서 전설이 되고, 역사적인 대사건에 당당히 등장하며 모든 악덕까지도 흡수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매번 불교 텍스트에서 거론되지 않더라도 그 한정된 횟수에서 보이는 어휘와 이미지는 적절하게 넛지 효과를 보인다.


서성원은(각주 3) 마라의 신화가 우리에게 이 세상은 무섭고 어두운 음울한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끝없는 유혹과 매혹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욕망을 부정한다기보다는 욕망의 혼란을 문제 삼고 그것을 어떻게 잘 극복하여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고 보았다.


[각주 3]"서성원, 「魔女經과 Sattavassāni-Dhītaro에 대하여」, ?인도철학? 창간호(서울: 인도철학회, 1990), 58면."


보수적인 경향의 불교 텍스트에서 마라의 존재가 손상되지 않고 유지시킨 이유는 인간 존재의 행동, 그리고 내면화된 감정을 인정하고 그 핵심이 넛지 효과에 의해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이 클 수 있다. 붓다가 성스러움을 대변한다면 마라는 세속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며 동전의 양면을 인정하는 것처럼, 불교 텍스트 전통에서 마라의 존재 자체는 붓다의 성향을 긍정적으로 이끌 수 있게 하는확실한 기능을 발휘한다.


인간이 가진 탐욕과 욕망은 마라의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에 슬쩍 팔꿈치로 찔림으로 인해 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 탐욕과 욕망을 가진 인간은 긍정적이고 밝은 기운을 향해 자연스럽게 선택의 길에 들어선다. 마라가 붓다와 수행자들을 방해하고 유혹했다는 해석에 벗어나 마라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이유는 중요한 순간에 마라의 출현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전통적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으로 마라를 바라보는 것 또한 현대 수행자들에게 마라의 존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수행의 열정으로 삼기 바라는 의도가 있기도 하다.


최초의 문제는 ‘붓다와 수행자들 자신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붓다와 수행자들은 현명하여야 했다. 붓다는 마라가 유혹하는 탐욕을 조절해야하고 공평무사하게 수행을 완성해야 하며, 마라의 성급한 권유에서 유연한 통제로 자신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로 인하여 대중들은 마라의 성향을 명쾌하게 파악하게 된다. 마라는 붓다를 세련된 경험과 권력 행사의 자체로 경전에서 뿐 만 아니라그 대비적 관계로 인해 효과적으로 만들었다.


마라는 이미 예전부터 수행자들을 방해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충실한 수행자의 특성에 관해서 정통했을 것이다. 편리하게 생각해 볼 점은 조금씩 조건은 달랐어도 마라가 수행자들을 취급하는 방식은 대체로 동일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수행의 단계는 단순하고 깊이 있는 일관된 과정이라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해하는 패턴도 유사했을 것이다. 이 단순하고 깊이 있는 일관된 과정조차도 불교 텍스트에서는 상당한 분량과 의견들로 꽉 채워져 있다. 수행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마라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붓다가 보인 정진의 힘이 지배적이라 마라의 힘은 무력했다고 보는 견해와 같다. 이 같은 성향의 해석은 불전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에게 뇌쇄적으로 강요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전문적인 수행의 단계 과정을 여기서 언급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마라에 관련된 일반적인 의견을 내놓는 것에 집중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직 마라와 수행자의 관계 설정에서 오래된 발전의 궤적에 접근하고자 할 뿐이다. 그 접근의 방식은 일반적인 견해와 다른 해석이다. 마라와 수행자의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적대적이지도 않았다고 본다. 


붓다와 수행자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때 마라가 나타나서 방해한 것이 아니라, 마라는 붓다와 수행자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청정한 삶으로 선택하게끔 자연스럽게 이끈다. 불교 정전에 마라의 존재는 억눌리고 암울한 긴 터널 속에 갇혀 있다. 그 곳을 나오고 싶어 하는 희망, 열정은 붓다와 수행자들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 마라가 극적인 상황에서 나타나 강도 높은 공격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마라가 붓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보는 관점에 비해 더 비극적으로 마라의 입장을 대변한 의미 있는 해석이 될 수도 있겠다. 마라는 붓다 또는 수행자들의 의식의 흐름, 적절하게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을 불교 문학에서 보여주고 있다. 초기 경전뿐만 아니라 대승의 경전에서도 그 요소는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않는다.


붓다와 마라는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독자적인 일체성이 각각 존재 하면서도 마라의 목소리는 물리적인 상태로 이행해서 인간 내부에서 생겨나는 의식을 반영한 것, 다시 말해서 인격화된 인간의 한 단면을 표명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승의 경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대승경전에서 마라는 수행자의 마음 안에 있는 오만하고 게으른 마음 등으로 표현되며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중에도 그 마음은 고개를 처 든다. 초기 경전의 신화적이고 인격화된 마라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탐심으로자리한 것이다.


마라는 정형화된 존재이다. 두려운 존재에서 실없는 인물로 만들어 가는 것도 불전 텍스트 자체의 몫이었다. 불교 텍스트에 언급된 마라는 고정화되었다. 마라는 불교 전반의 텍스트에서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하지만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확실하다. 출가를 결정하기까지 번민하거나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수행자 앞에 선 마라는 출가를 확정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마라는 잘못된 선택을 권하지만 그의 권유는 그러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독려한다. 이런 마라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 자체가 마라에게는 악몽일 수 있겠다.


Ⅳ. 마라의 군대, 그리고 아이러니한 요소들

마라는 욕계(欲界)의 지배자로, 때로는 마라의 군대와 딸들과 함께 붓다를 여러 번 공격했다. 마라는 비구와 비구니들의 공공연한 유혹자이며 붓다를 용서 못 할 적으로 간주한다. 마라는 붓다와 정각을 자리를 다투었고 붓다의 전도(傳道)를 반대하였으며 두 번이나 붓다에게 열반에 들 것을 권유한 인물이다.


‘마라의 군대’는 마라의 세력을 확장함을 의미한다. 군대라는 이미지는 마라의 전성기를 뜻한다. 마군(魔軍)은 긴장감 있는 구성을 갖게 하기도 하고 마술적이면서 팽팽한 구도를 추구한다. 초기불교 텍스트에서 ‘마군’라는 이름은 지배적인 힘이 붙여지며 필사 문자나 활자 문자 속에서도 지칭하는 이름으로 인해 눈에 보이듯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마라에 대한 장황스러운 언급은 악마성을 의미하면서 마음 안에 있는 오염된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이미지에 단단하게 매어 있다. 


너의 첫째 군대는 탐욕이고, 둘째 군대는 증오이며, 셋째 군대는 기갈, 넷째 군대는 애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는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허영과 고집이다. 내가 문자 풀을 입에 물 것 같은가?(Suttanipata. v443)


붓다는 탐욕, 증오, 기갈, 애착, 권태와 수면, 공포, 의혹, 허영과 고집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했다. 마라가 가진 이런 성향들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뜻은 ‘문자 풀을 입에 물지 않겠다’는 답변으로 대신한다. 붓다의 자비나 신의 권능을 비인간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만 맹신하려는 사람들은 마라와의 대화를 통해 솔직한 내심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신(神)도 세상 사람들도 너의 군대를 꺾을 수 없지만,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깨뜨린다. 마치 굽지 않은 흙 단지를 돌로 깨뜨려 버리듯이.(Suttanipata. v443)


군대(senā)라는 용어는 ‘구속하다. 묶는다. 포박하다’라는 어근에서 나왔다. 경전이 표현한 마라의 군대는 사람을 구속하는 힘을 가졌다. 마라의 군대는 마라의 의지를 결속하고 형성하는데 일체를 포함한다. 마라의 군대가 무너지고 재차 붓다와 마라가 재회하는 이야기가 시작할 때까지는 마라의 역량은 회복되지 않았다. 마라의 등장과 그렇지 않는 평온의 상황은 분리된다. 마라는 붓다에게 ‘말을 거는’ 존재로 붓다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존재로, 수행에 방해되는 특별한 것, 일종의 달콤한 인생이 쾌락을 맛보길 권유한다. 그렇지만, 마라 안에 있는 철학적 입장과 종교적 위치를 설명할 만한 어떠한 의견도 내세우지 않는다.


유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다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붓다와 마라의 입장은 그들이 호흡하고 말하는 시기와 방법에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붓다의 사고(思考)는 구전 텍스트를 매개로 깃들어 있어 소리의 세계와 시각적인 상징성을 모두 갖추었다. 마라의 생각은 붓다로 인해 유명해 지고 구전에서 문자화된 텍스트를 통해 전해지나 표면적인 표시 이상이 되었기에 아이러니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붓다가 위대해 지면 질수록, 마라도 그 악명을 함께한다.


마라는 붓다가 호색한이길 바라며 민중 속에 퍼진 여론에 휘둘리길 원했으며 붓다 자신이 변질되어 온 세계가 혼란으로 가득 차길 원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미 전체대중의 틀 안에 온전하게 동일한 인물, 일관된 인물로 대규모의 깨달음의 세계를 대중들에게 열게 한다. 붓다는 마라의 군대를 납득시키려고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마라의 사고나 행동을 무시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었다.


인생에서 쾌락의 즐거움을 외면하기가 너무나도 쉬워보이게 경전들은 설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멍에를 떨쳐버리고 모든 권위를 전복시키려는 충동은 용기 그 이상이다. 마라는 관능적인 쾌감과 감각의 기쁨과 도취를 상징하며 이런 것들은 사실상 생명이 가득한 곳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감정이건만 죽음으로 인도되고 허망한 것으로 치부된다.


마라는 붓다에게 음탕함을 일깨우기 위해 딸들을 이용했고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다. 붓다를 여인의 품에 안기게 하는 것도 실패하였고 패배의 쓴 맛을 본 마라의 군대는 대승의 텍스트에서 인간의 마음 안으로 숨는다. 특히 마라의 딸들은 붓다를 유혹하는 인물들로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독창적인 환상이 작용되어 불전에서 긴장감을 준다. 우리의 사악한 이성이 만들어낸 창작물인 마라의 교만함이다. 마라의 딸들에 관한 전설에 여러 가지 유사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사실 관계는 알 수 없다. 교활한 아부나 끈질기게 사랑을 애원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다는 증거는 마라의 딸들이 가진 유혹이나 교태에서 나타난다. 


마라의 세 딸들의 호칭에는 마라가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는 인간의 삶 전체를 넓게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愛欲(Taṇhā), 愛念(Arati), 愛樂(Ragā)으로 불리는 마라의 딸들이 붓다를 유혹하는 장면들은 갈애 또는 애욕이 인간들을 윤회의 세계에 묶어두는 지배적인 힘이라는 것을 수 없이 되풀이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죽음 자체는 욕망 또는 애욕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다름아닌 바로 이 욕망 또는 애욕이 죽음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물을 공급한다. 마라의 유혹은 시각적이면서 자극적으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 등을 통해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게 한다.


마라가 붓다에게 패배했다고 함은 마라를 얕잡아 보는 것이기 보다는 마라의 위치를 중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라는 수행자 내적인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마라’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코드화 된 "악’의 상징으로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마라는 그의 군대처럼 모든 주제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성’이라는 공통의 논거를 제공한다고 여겨질 때, 상용구처럼 경전에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초기 경전에서부터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텍스트에서 항상 그 주제를 정의하고 있고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살아있다. 붓다가 현재 우리 앞에 존재하듯이, 마라도 대조적 성향을 띠지만 틀림없이 존재한다. 마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외적인 존재라고 할지라도 붓다와 대립의 상황에서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경향은 극적일 수밖에 없다.


Ⅴ. 결론

이 논문은 기독교의 선과 악, 불교의 선과 불선의 비교 등을 거론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마라의 권위가 강화되었다고 할 수고 있고 변질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라는 공간적으로 이동을 꾀했는데, 이것은 시간적인 텍스트의 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마라의 영향이 환원되는 순간에 여러 방식의 불교 텍스트에 전환이 있어왔다. 빨리 전통이 먼저일 것이고 다음으로 산스끄리뜨 전통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사실의 기술에서 논쟁의 역사로 발전되고 철학적이고 대중적인 시간에

부합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식의 개입이 있었다.


붓다와 마라의 관계에서, 붓다는 지배자의 지위에 있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어도 언제나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경전들은 완곡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 붓다와 마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대립되는 강자와 약자로 관찰되는 것만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정형적이다.


우리는 언제나 세계를 실재 또는 상상 속에 구별되는 자기만의 경계선으로 따로 재단하여 왔다. 마라의 영역은 인간의 악마적인 내부의 요소이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오는 어떠한 영향력에서 오는 강자의 위치, 그 어디쯤이라고 생각해도 흥미를 끌 수밖에 없다. 방대한 불교 문헌에서 마라가 불교의 학문의 발전과 더불어 이용되고 형성되어 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라는 비합리적이고 결국에는 붓다에 비하여 열등하며 타락했다. 부정적인 마라의 이미지를 강조하면 할수록 생명력이 길어진다. 마라는 이질적이긴 하지만 조직된 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힘으로 붓다의 세계를 날조하기 위해 존재한다.


구실을 붙이는 기술도 탁월한 마라는 붓다와 마찬가지로 인도 고대생활 속에서 고도로 발달된 신화를 존재로 생명을 이어가며 대승경전에까지 등장한다. 두 인물은 평화가 아닌 치열한 내면의 전쟁 속에서 서로를 저울질 하면서 분명한 자신들만의 자신감의 극단을 텍스트에서 보여준다. 초기 경전의 텍스트에서 대승 경전의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전통이란 이름으로 문학이란 이름으로 상상력을 부여한다. 


마라와 붓다, 두 인물에서 인간적인 소재를 찾으려하며 그들을 하나의 지위체계로 인정하려는 시도는 매우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단순하게 선과 악이라는 테두리를 떠나서 전통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야망이 큰 두 인물임에 틀림없다. 또한 붓다를 부각시키고 있는 마라의 꿈은 악몽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