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아난의 출가문제 고찰

실론섬 2016. 7. 25. 20:37

『불교학연구』 제23호(2009. 8.)

아난의 출가문제 고찰

염중섭/동국대학교

 

Ⅰ. 序論

Ⅱ. 아난의 출가

    1. 석가족의 출가 양상

    2. 아난의 특수성

Ⅲ. 아난의 和尙

    1. 화상으로 열거된 인물들

    2. 붓다일 개연성

Ⅳ. 아난과 관련된 왜곡 검토

    1. 제바달다와 관련된 왜곡

    2. 붓다와 관련된 왜곡

 

Ⅴ. 結論

 

[요약문]

아난은 붓다의 수제자인 사리불과 더불어 초기불교에서 가장 중

요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아난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살펴지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아난의 출가와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할 문제에는 붓다의 카필라

귀향 때의 ①석가족 집단 出家時에 아난이 함께 출가하고 있음에도

아난의 화상이 유독 다르게 상정되고 있다는 점, ②아난이 붓다의 直

弟子가 아닌 再傳弟子일 가능성에 관한 점, ③아난의 화상으로서 개

연성이 높은 인물에 관한 점이 있다.

아난이 초기불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출

가에 관한 기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난의 출가 기록에 특수한 상

황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특수성의

원인을 먼저 형인 제바달다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의한 악영향의 관

점에서 검토하여 그 타당성을 모색해 본 후, 아난의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의한 측면을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접근

에서 아난관련 기록들에서 나타나 보이는 왜곡양상을 활용하여 그

요약문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시도하였다.

아난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의 특수성은 아난이 붓다의 재전제자

이면서도 초기교단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가

아닌 재전제가가 되는 것은 붓다 당시의 유연하고 폭넓은 사승관계

에 기초하여, 아난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는 양상에서 기

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난의 화상과 관련해서는 총4인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중 가장 개연성이 높게 상정되는 것은 十力迦葉이라고 할 수가 있

다. 이는 십력가섭이 5비구 중의 한 명으로 석가족의 귀족 출신이자

인격이 훌륭하다는 점에서 타당한 설득력을 확보한다고 하겠다.

즉, 아난의 출가에서 보이는 특수성은 단순한 기록상의 혼란이 아

니라, 역사적인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서 사실을 변형시키려는 이해

관계자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나타난 왜곡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

 

이다.

 

Ⅰ. 序論

 

아난은 붓다의 수제자인 사리불과 더불어 초기불교에서 가장 중

요한 인물이다. 사리불이 붓다 보다 연배가 높아 붓다 재세시에 열

반에 드는 것에 비해서 아난은 붓다 보다 많이 어릴 뿐만 아니라 장

수하여 붓다의 열반 이후 교단안정과 발전에 혁혁한 기여를 하게 된

다. 그런데 아난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에는 아난만의 특수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문제점들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아난의 출가와 관련된 문제에는, 붓다의 카필라 귀향 때의 ①석가족 

집단 출가시에 아난이 함께 출가하고 있음에도 아난의 화상이 유독 

다르게 상정되고 있다는 점, ②아난이 붓다의 직제자가 아닌 再傳

弟子일 가능성에 관한 점, ③아난의 화상이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

어 있다는 점이 있다.

 

이와 같은 3가지 문제점은 공히 아난의 출가와 관계되며, 또한 하

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은 아

난출가의 특수성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 것이다.

 

아난의 출가에 관한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 기록에

특수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특수

성의 원인을 먼저 형인 제바달다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의한 악영향

의 관점에서 검토하여 그 타당성을 모색해 본 후, 아난의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의한 측면을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접근에서 아난관련 기록들에서 나타나 보이는 왜곡양상을 활용하여

그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시도하였다.

 

아난은 혈연적으로 붓다의 지친이며, 25년간 붓다의 시자로 활동

한 인물인 동시에, 붓다의 열반 이후에는 1차 결집과 2차 결집에 가

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즉, 붓다와 초기불교 승단의 이해

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아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난

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는 붓다 재세시와 초기불교의 승단을 이해

하는데 선행되어야 할 필연적인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Ⅱ. 아난의 출가

 

1. 석가족의 출가 양상

아난의 출가는 붓다께서 성도 후 6년에 가비라로 귀향하는 시점1)

에서 다수의 석가족들의 출가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난의

출가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석가족의 출가양상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1) 붓다의 歸鄕을 成道 후 약 6년으로 잡는 근거는 成道 때에 출생한 羅睺羅가 붓다의 歸鄕時 6세
   (혹은 7세)였기 때문이다. 붓다의 歸鄕 시기에 관해서는 成道 후 6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외에도 成道 후 이듬해(渡邊 照宏 著,『 新釋尊伝』, 東京: ちくま學藝文庫, 2005, p. 305)와 
   12년이라는 설도 있다. 이와 같은 혼란상은『 佛本行集經』을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 佛本行集經』55,「 羅睺羅因緣品第五十六上」『( 大正藏』3, 906b), “其羅睺羅. 
   如來出家六年已後.始出母胎. 如來還其父家之日. 其羅睺羅. 年始六歲爾時如來. 至迦毘羅婆蘇都城.” ;
   『 方廣大莊嚴經』12,「 轉法輪品之二」『( 大正藏』3, 562a ~ 564c), “耶輸陀羅攜羅睺羅年已七歲.
   來至佛所稽首佛足.瞻對問訊而白佛言. 久違侍奉曠廢供養. 諸眷屬皆有疑心. 太子去國十有二載. 
   何從懷孕生羅睺羅.” ;『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12,『( 大正藏』24, 159a), “若佛世尊六年苦行. 
   成覺之後更住六年. 滿十二歲重還於此. 我令諸人目驗虛實.” ;『 佛本行集經』55,「 羅睺羅因緣品第五
   十六上」『( 大正藏』3, 910a), “然佛世尊.已證阿耨多羅三藐三菩提. 過十二年. 然後方還迦毘羅城.
   欲於眷屬現憐愍故.”

 

석가족의 출가에 대해서는『 사분율』·『오분율』·『빨리율』 등의

광율을 위시해서 다수의 전적들에 그 내용이 전하고 있다. 특히 여

기에는 당시 석가족의 王(Rāja)이었던 跋提(Bhadrika)2)를 阿那律이

종용해서 출가하는 내용3) 및 優波離의 석가족에 앞선 선행출가와 이

러한 우바리에 대해서 발제가 예배하는 모습4)이 전후에 기록되어 있

다. 이로 인하여 이는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부분이 된다.

2) 붓다가 淨飯王의 권유로 귀향하고, 淨飯王이 釋迦族 자녀의 출가를 勅令으로 반포했다는 

   전승들이『 佛說衆許摩訶帝經』 卷13 등에서 다수 보이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釋迦族은 공화제국가로 首長은 王이라기보다는 Rāja이며, 이는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역임했는데, 붓다가 귀향했을 때의 Rāja는 정반왕이 아닌 跋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淨飯王이 개인적인 신분으로 귀국을 종용했을 수는 있지만 이는 王, 혹은 
   Rāja라는 공적인 신분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釋迦族의 출가도 자발적인 
   것으로 그 숫자는 다수이긴 하지만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붓다의 귀향 당시 
   跋提가 Rāja였다는 가장 신뢰할만한 자료는『 五分律』권3이나『 빨리율(Vinaya)』, 
   7破僧犍度,p. 181과 같은 율장의 기록들이다. 그리고 釋迦族이 輪番制로 Rāja가 되었음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佛本行集經』권58「( 婆提唎迦等因緣品中」,『 大正藏』3, 921a·b) 
   등을 통해서 살펴진다고 하겠다.
3)『四分律』4,「 十三僧殘法之三」『( 大正藏』22, 591a) ;『 五分律』3,「 第一分之二第」
  『( 大正藏』22, 17a) ;『 빨리율(Vinaya)』,「 cullavagga」, 7破僧犍度, p, 182 ;『 佛本行集經』
   58,「婆提唎迦等因緣品中」『( 大正藏』3, 918a ~ 921a·b).
4) 優波離가 釋迦族들에 비해서 먼저 出家한 것에 관한 내용은『 四分律』 권4와『 五分律』
   권3에도 등장하지만, 釋迦族의 귀족들이 먼저 出家한 優波離에게 出家 때 예배하는 대목은 
   후대의『 破僧事』나『 衆許摩訶帝經』에만 등장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破僧事』9, 
   『( 大正藏』24, 146a) ;『 佛說衆許摩訶帝經』13,『( 大正藏』3, 974c ~ 975a) ;
   『 佛本行集經』58,「 婆提唎迦等因緣品中」『( 大正藏』3, 923a).

 

석가족의 출가양상에 관한 내용 중 아난과 관련된 측면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NO        전적                                                                   내용                                                                               

1     『 四分律』 권4. 5):                                        阿那律·跋提·難提·金毘羅·難陀·跋難陀·阿難陀·

                                                                           提婆達의 8인의 석가족들이 출가할 때, 6인은 붓다에 의해

                                                                           출가하고, 아난다는 毘羅荼에 의해서 발난타와 제바달다는

                                                                           다른 上座들에 의해 출가함.                                                   

2     『 彌沙塞部和醯五分律』 권3. 6):                  跋提·阿那律·阿難·難提·調達·婆婆·金鞞盧의 7인

                                                                           의 석가족들이 출가할 때, 이들 모두가 붓다에 의해 출가함.

3    『 빨리율(Vinaya)』                                         cullavagga7): 釋氏跋提王·阿那律·阿難·婆咎·金毘羅·提婆達

                                                                           多의 6인의 석가족들이 출가할 때, 이들 모두가 붓다

                                                                            에 의해 출가함.                                                                       

4    『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권9. 8):     賢王釋種과 無滅, 및 天授 등의 500석가족이 白四羯                                        

                                                                           磨를 통해서 출가함.                                                             

5 『 佛本行集經』 권58. 9):                                  釋王婆提唎迦·摩尼婁陀·跋涪婆·宮毘羅·難提迦·阿

                                                                           難·提婆達多 등의 석가족들이 출가할 때, 모두 붓다에 의

                                                                           해 출가하고 제바달다와 아난만 거부됨. 제바달다와 아난은

                                                                           跋㖿瑟吒僧伽에 의해 출가함.                                                 

6 『 佛說衆許摩訶帝經』 권13. 10):                     정반왕은 賢王·阿儞嚕馱·提婆達多 등의 500 석가족                                        

                                                                          의 출가를 고시함. 이들의 출가에 관해서는 따로 기록이 나오

                                                                          지 않음.                                                                                  

7 『 舍利弗問經』 전1권. 11):                              跋提·難提·金毘羅·難陀·跋難陀·阿難陀·提婆達多의

                                                                          7인의 석가족들이 출가할 때, 上座 毘羅茶에 의해서 아난

                                                                          과 아난다가 출가하고 上座 婆修羅에 의해서 제바달다와

                                                                          발난타가 출가했다고 나옴.                                                   

5)『 四分律』4,「 十三僧殘法之三」『( 大正藏』22, 591a·b).

6)『 五分律』3,「 第一分之二第」『( 大正藏』22, 17a·b).
7)『 빨리율(Vinaya)』,「 cullavagga」, 7破僧犍度, pp, 182 ~ 183.
8)『 破僧事』9,『( 大正藏』24, 145a ~ 146a).
9)『 佛本行集經』58,「 婆提唎迦等因緣品中」『( 大正藏』3, 922b ~ 923a).
10)『 佛說衆許摩訶帝經』13,『( 大正藏』3, 974b).
11)『 舍利弗問經』全1卷,『( 大正藏』24, 902c).

 

이상의 관련 전적에 나타나 있는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먼저 ‘석가

족 출가자 전체가 붓다에 의해 출가되었다는 측면(2·3)’과 ‘후일 승

단 내에서 문제를 야기하는 提婆達多와 跋難陀(Upananda)같은 경

우는 별도의 화상에 의해 출가하게 된다는 이중구조를 보이고 있는

전적(1·5·7)’의 두 가지 층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가 있게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경우 이외에도『 파승사』와『 중허마하제경』과

같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후대의 가치가 소급된 측면(4)12)과

구체성이 확보되지 않은 경우(6)이므로 본 논의에서는 제외하고자

한다.

12)『 四分律』34,「 受戒揵度之四」『( 大正藏』22, 809c ~ 810a) ; 睦 楨培,「 受戒犍度의 一考」,
   『 佛敎學報』 제16호(1979), pp. 110 ~ 116 ; 白 道守,「 比丘의 出家에 대한 硏究」,
   『韓國佛敎學』 제34집(2003), pp. 435 ~ 436.

 

즉, 석가족의 출가양상과 관련하여 우리는 ‘붓다에 의한 출가’와

‘붓다와 다른 화상에 의한 출가’의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가 있

다. 그런데 아난은 후일 ‘파승가의 주역이 되는 제바달다’와 ‘6군비구

중 1인이 되는 발난타’13)와는 달리 전혀 문제가 없는 인물임에도 불

구하고 이중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즉, 다른 석가족 출가

자들과는 차이를 보이는 아난만의 특수성이 목도되고 있는 것이다.

13) 六群比丘에 관해서는 관련전적들에 따른 이견의 편차가 존재한다.平川 彰 著, 釋 慧能 譯,

   『 比丘戒의 硏究Ⅰ』, (서울: 民族社, 2002), p. 409.

 

2. 아난의 특수성

아난이 전혀 문제가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난의 출가가 특

수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아난의 출가 기록에 모종의 문제점이 내

포되어 있음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아난은 師子頰王의 4째 아들인 甘露飯王의 次子14)로 붓다의 종제

15)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석가족의 출가 때 보이는 발제와 아나율

역시 각각 白飯王과 斛飯王의 차자가 되는 붓다의 종제들이다.16) 즉,

같은 종제들의 출가 안에서 2중 구조가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난의 특수성을 우리는 먼저 제바달다와 관련하여 고찰

할 수 있다. 제바달다는 아난의 형이지만, 출가 후 붓다의 만년17)에

이르러서는 붓다를 상대로 파승가를 시도하는 불교에서의 최고의

악인이다.18) 이로 인하여 제바달다는 석가족의 출가양상 속에서도

발난타와 더불어 별도의 화상을 통해서 출가하는 측면으로 나타나

보이고 있는 것이다.

14) 석가족의 가계에 관한 측면은 廉 仲燮의「 ‘4男 8子’의 順序에 관한 고찰」,『 佛敎學硏究』 
    제18호(2007), pp. 183~213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15) 아난이 붓다의 종제라는 것은 北傳의 일반론이다. 그러나 南傳의『 大史』에 의하면 아난과 
    제바달다가 공히 善覺(Suppabuddha)의 아들로 야소다라(Yasodhara)의 동생이라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廉仲燮이「 阿難의 나이에 관한 고찰」,〈 1. 아난의 종족〉,『 佛敎學硏究』 제19호(2008), 
    pp. 293~98을 통해서 정리해 놓았다.
16) 廉 仲燮,「 ‘4男 8子’의 順序에 관한 고찰」,『 佛敎學硏究』 제18호(2007), pp. 212~213.
17)『 善見律』에 阿闍世王이 즉위하고 8년 후에 붓다가 入滅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붓다의 
    入滅을 보편적인 견해에 의거하여 80으로 잡고, 阿闍世의 즉위년에 提婆達多의 破僧伽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면 이때 붓다의 春秋는 72~73세 무렵이 된다『. 善見律毘婆沙』2, 
   『( 大正藏』24, 687a), “爾時阿闍世王.登王位八年佛涅槃.” ; 장 부아슬리에著, 이 종인 譯,
   『 붓다-꺼지지 않는 등불』, (서울: 時空社, 2004), p. 95.
18) 廉仲燮,「 律藏의 破僧事 硏究」, (서울: 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2007), 參照.

 

후일 파승가의 주체가 되는 제바달다를 붓다가 출가시킨다는 것

은 붓다의 완성된 明智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초래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붓다가 애초에 제바달다의 출가를 승인하지 않았다면, 승

단의 일원이 아닌 제바달다에 의한 파승가는 자체로 존재할 수가 없

기 때문이다.19)

19)『 十誦律』37,「 雜誦中調達事之二」『( 大正藏』23, 267a), “佛言.一切比丘皆能破僧.
    唯除擯人.不能破僧.”

 

실제로 제바달다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 중『 파승사』 권9. 20)와『 중

허마하제경』 권13. 21)에는 제바달다가 출가하지 않을 경우 석가족의

왕이 되어 더 많은 해악이 발생하게 되므로 출가시켜서 문제를 최소

한으로 축소시켜야 했다는 제바달다의 출가에 대한 변증이 존재하

고 있다. 이외에도『 增壹阿含經』 권47에는 제바달다가 붓다께 출가

하기를 여러 번 간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자 마침내 스스로 머리

를 깎고 출가했다는 기록22)도 있다.

20)『 破僧事』9, 『( 大正藏』24, 145a).
21)『 佛說衆許摩訶帝經』13, 『( 大正藏』3, 974a·b).
22)『 增壹阿含經』47,「 放牛品第四十九今分品-九」『( 大正藏』2, 802b).

 

이와 같은 제바달다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붓

다와 제바달다를 분리시키려는 노력이 승단에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제바달다는 아난의 형이 되는 인물이다. 즉, 같이 출

가하는 형제를 연결시켜 기술하다 보니, 제바달다를 분리하려는 측

면이 아난에게까지도 미쳐서 아난 역시 다른 사촌들과는 달리 화상

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석가족의 출가양상과 관련해서 아난의 화상으로 지목되는
인물은『 사분율』의 毘羅荼와『 사리불문경』의 毘羅茶, 그리고『 불본
행집경』의 跋㖿瑟吒僧伽이다. 이 중 毘羅荼와 毘羅茶를 동일인물로
본다면,23) 아난의 화상으로 주장되는 것은 비라다와 발야슬타승가 2
인이 된다. 그런데 발야슬타승가가 언급된『 불본행집경』에는 발야
슬타승가가 공히 제바달다와 아난의 화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제바달다의 영향에 의한 왜곡의 개연성이 목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난의 화상과 관련해서 우리는 비라다나 발야슬타승가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이는 아난
의 화상문제가 비단 제바달다와 붓다를 분리시키려는 의도의 영향
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23) 毘羅荼와 毘羅茶를 동일인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오분율』 권9와 권28을 통해서 추론 
    가능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五分律』9,「 第一分之五第六十四事」『( 大正藏』22,71a) ;
   『 五分律』28,「 第五分之七調伏法」『( 大正藏』22, 184b).

 

Ⅲ. 아난의 和尙

 

1. 화상으로 열거된 인물들

발야슬타승가가 아난과 제바달다의 화상이라면, 비라다는 아난만

의 화상이다. 따라서 아난과 제바달다는 동일인을 화상으로 삼았거

나 각기 다른 인물을 화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 발야슬타승가는『 불본행집경』 권58·59의 아난과

제바달다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 이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

에 그의 인물적인 특징이나 정체성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또한『 불

본행집경』이 후대에 불전관련 기록들이 집취된 문헌이라는 점과 발

야슬타승가가 다른 전적들에서는 전혀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은 이러한 전승의 신뢰도에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초기불교와 부파

불교시기에 아난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은 2차 결집 과정에서의 10事

非法을 판단하는 장로 8명 중 6명이 아난의 제자라는 것24)과 아소카

왕의 공양을 가장 많이 받는 불제자가 아난이라는 것25)을 통해서 확

인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난의 화상에 대한 기록이『 불

본행집경』이라는 단 한 경전에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전적의 신뢰

도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24)『 五分律』30,「 五分律第五分之十七百集法」『( 大正藏』22, 193a) ;『 大唐西域記』7,
   「 吠舍釐國」『( 大正藏』51, 909b).

25)『 阿育王經』2,「 見優波笈多因緣品第二」『( 大正藏』50, 138c).

 

이에 비해서 비라다의 경우는『 사분율』이라는 신뢰도가 높은 전

적에 그 명칭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비라다 역시『 사분율』과『 사

리불문경』 이외에는『 오분율』 권9·28에 등장할 뿐26)인데, 이 마저

도 비라다의 창병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일 뿐이어서 이 인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에는 어려움이 있다.

26)『 五分律』9,「 第一分之五第六十四事」『( 大正藏』22, 71a), “佛在舍衛城.爾時毘羅荼比丘.
    體生癰瘡膿血流溢.衣服著瘡脫時剝痛.佛行房見.問彼比丘.汝病小差苦可忍不.答言.病不差苦不可忍.
    衣服著瘡脫輒剝痛.” ;『 五分律』28,「 第五分之七調伏法」『( 大正藏』22, 184b), 
    “毘羅茶私呵比丘身生五百癰瘡.癰瘡潰爛不可視.”

 

그런데『 오분율』과 관련하여 주목될 점은『 오분율』에 비라다가

언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분율』의 석가족 출가와 관련된 대

목에서는 아난이 석가족들과 함께 붓다에 의해 제도되는 것으로 기

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오분율』에서는 비라다를 언급하고 있

지만 비라다를 아난의 화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는

『사분율』과『 오분율』 간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하

겠다.

 

현존하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사분율』의 비라다와『 오분율』

의 비라다가 동일 인물인지 자체도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을 다른 인물로 단정할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를 동일인으로 가

정한다면, 우리는『 사분율』과『 오분율』 간의 내용이 상충하는 문제

에 직면하게 된다.『 사분율』이 초기의 전승을 간직하고 있는 신뢰도

가 높은 문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오분율』에서도 공히 해

당될 수 있는 측면이며,『 사리불문경』과 같은 경우『 사분율』의 기록

을 지지하고는 있지만, 경전의 비중상 이를 근거로 비라다의 개연성

을 높게 상정할 수만은 없는 측면이 있다. 즉, 비라다가 화상이라는

『사분율』의 기록에는『 오분율』과의 충돌로 인한 석연치 않은 측면

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난의 화상과 관련하여 석가족의 출가에 관한 기록에는 등장하

지 않지만, 다른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로 Belaṭṭhasīsa와 十

力迦葉(Daśabala-kāśyapa)이 더 있다. 이 중 Belaṭṭhasīsa는『 빨

리율』에 언급되어 있는데,27) 이 역시 이와 관련되어서만 단편적으

로 드러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그

런데『 빨리율』의 석가족 출가와 관련된 부분에는 아난 역시 다른

석가족들과 함께 붓다에 의해 제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같은 율장 안에서도 충돌을 나타내는 것으

로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케 할 수가 있는 측면이 된다. 즉,

Belaṭṭhasīsa 역시 미진함이 있는 것이다.

27)『 빨리율』에서는 아난의 화상으로 Belaṭṭhasīsa가 등장하고 있다(Vinaya. Vol. Ⅳ, p.86).
    平川 彰 著,『 インド佛敎史上』, (東京: 春秋社, 2006), p. 116.

 

이에 비해서 십력가섭은 상대적으로 언급된 전적들도 다수이고,

인물에 대한 묘사도 보다 분명하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

 

십력가섭이 아난의 화상이라는 내용의 관련기록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NO      전적                                                                                      내용                                                   

1      『 十誦律』  권60. 28):                                       장로 십력가섭은 아난의 화상으로 (염부제의) 3번                                        

                                                                                째 상좌이다.                                                            

2     『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권14. 29):              ‘ 십력가섭파는 성품이 속이지 않고 진실을 말하며,                                        

                                                                                (또한)내 아우인 아난의 화상이다.                               

3     『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권13. 30):     붓다께서 십력가섭에게 고하였다. “네가 응당 이                                          

                                                                                아난동자를 법답게 제도하라” 십력가섭이 붓다의 분부를 받                                          

                                                                                들어 제도하고 구족계를 주었다.

                                                          권13. 31):      저 상좌(십력가섭)는 곧은 마음에 속임이 없으며,                                        

                                                                               (또한)내 아우 아난다는 저 십력가섭의 상좌이다.        

28)『 十誦律』60,「 五百比丘結集三藏法品第一」『( 大正藏』23, 446a), “長老十力迦葉阿難和
    上第三上座.”.
29)『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14,「 破僧違諫學處第十」『( 大正藏』23, 700c), “時提婆達多便
    生此念. 十力迦攝波性無諂誑所言眞實. 是我家弟阿難陀鄔波馱耶.”.
30)『 破僧事』13,『( 大正藏』24, 165b), “佛告十力迦葉. 汝應與此大歡喜童子如法度之. 
    十力迦葉旣奉佛命. 卽便度之爲受具戒.”.
31)『 破僧事』13, 『( 大正藏』24, 168b), “復念. 如是何有能敎我聖道神通. 當時十力迦攝波.
    在王舍城先尼迦窟中. 我詣彼處.彼上座直心無諂. 及我弟阿難陀. 親敎彼十力上座. 能敎我聖道神通.”

 

이 중『 십송율』에서의 和上은 和尙과 같은 것이며, 또한 十力迦葉

波는 십력가섭과 동일인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아난의 화상이 십력가섭이며, 아난과

제바달다의 화상이 서로 상이하다는 추측을 할 수가 있다. 이는 발

야슬타승가나 비라다와는 다른 경우이지만, 비라다에서와 같은 아

난과 제바달다의 화상 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다. 즉, 이를 통

해서 우리는 최소한 아난과 제바달다의 화상이 서로 다를 개연성을

보다 높게 확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십력가섭이 아난의 화상이라는『 십송율』의 기록은 1차 결집

과 관련된 부분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이 부분에서는 굳이 십력가섭

이 아난의 화상이라는 측면을 기록할만한 필연성이 없다. 이는 의도

적인 왜곡의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십력가섭을 아난의 화상으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자세

히 고찰해 보면, 십력가섭이 자체로 대단하다는 의미보다는 십력가

섭이 ‘위대한 아난의 화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는 아

난에 의해서 십력가섭의 위상이 상승하고 있는 기록인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기록이 아난이 교단 내에서의 위상을 충분히 확보

하고 있었을 당시의 것이라는 것을 상정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난은 붓다의 제자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십력가섭의 제자로 나

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난에 의해서 십력가섭의 위상이 상승하는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십력가섭을 아난의 화상이라고 적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난이 실제

로 십력가섭의 제자였을 개연성을 증대시켜 준다. 그리고『 십송율』

에는 다른 광율들과는 달리 석가족의 출가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

지 않는다. 이는『 빨리율』에서와 같은 自語相異의 모순이『 십송율』

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송율』의 기록은『 빨리율』에서의 자체적인 모순이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사분율』에서와 같은 다른 광율과의 충돌도 없다. 그

러면서도『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와『 파승사』의 지원을 받고 있

다. 이는 아난의 화상으로 십력가섭이 가장 높은 개연성을 갖게 한다.

또한 십력가섭은 아난의 화상으로 열거되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

리 그 출신과 위상을 정확하게 확인해 볼 수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십력가섭은 녹야원 5比丘 중의 한 명인 婆敷32)를 의미한

다.33) 天台智者는 十力迦葉을『 妙法蓮華經文句』 권1에서 淨飯王의

친척으로 기록하고 있는데,34) 이는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2)『 翻譯名義集』1,「 度五比丘篇第七」『( 大正藏』54, 1063a), “十力迦葉.亦名婆敷.”
33)『 中本起經』上,「 轉法輪品第一」『( 大正藏』4, 147c) ;『 佛所行讚(Buddhacarita)』3,
   「 佛所行讚轉法輪品第十五」『( 大正藏』4, 29b).
34)『 妙法蓮華經文句』1,「 序品第一」『( 大正藏』34, 8b), “太子棄國捐王入山學道.父王思念
    遣五人追侍.所謂拘隣頞鞞.亦云濕鞞.亦阿說示.亦馬星跋提.亦摩訶男.十力迦葉.拘利太子.二是母
    親三是父親.”

 

5비구에 대해서는 석가귀족의 자제를 정반왕이 취하여 보낸 것이

라는 설35)과 붓다가 優陀羅羅摩子(Udraka-rāma-putra)의 문하에

서 수행할 때 뜻을 같이 해서 붓다를 따르게 된 인물들36)이라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이 중에서 앞의 설이 보다 더 보편적이고 유력하

다. 그러므로 앞의 설을 취하여 5비구도 석가족으로 본다면, 아난이

십력가섭의 상좌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왜냐하면, 십력가섭

과 아난이 공히 석가족이라는 점은 두 사람 사이에 사적인 관련이 있

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십력가섭은 성품이 정직한 인물로 나

타난다. 이는 십력가섭이 아난의 화상이 되기에 문제가 없는 인물이

라고 이해될 수가 있다. 즉, 아난의 화상으로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

에 비해서 십력가섭의 개연성이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5)『 修行本起經』下,「 出家品第五」『( 大正藏』3, 468a) ;『 中本起經』上,「 轉法輪品第一」
   『( 大正藏』4, 147c) ;『 佛說太子瑞應本起經』上, 『( 大正藏』3, 476a) ;『 佛說普曜經』4,
   「告車匿被馬品第十三」『( 大正藏』3, 509b) ;『 方廣大莊嚴經』5,「 出家品第十五」『( 大正
    藏』3, 578b) ;『 異出菩薩本起經』1, 『( 大正藏』3, 619c) ;『 過去現在因果經』3, 『( 大正藏』
    3, 637a)
36) 渡邊 照宏 著,『 新釋尊伝』, (東京: ちくま學藝文庫, 2005), p. 144.

 

그러나 이를 통해서는 십력가섭이 왜 아난만의 화상이며, 제바달

다의 화상은 아닌가에 대한 답변을 구할 수는 없다. 즉, 십력가섭이

아난의 화상일 개연성은 높지만, 아난과 제바달다가 형제관계임에

도 불구하고 아난만이 십력가섭에 의해 제도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는 이상의 자료적인 접근에서는 더 이상의 명확성을 확보할 수는 없

는 것이다.

 

2. 붓다일 개연성

석가족의 출가를 적시하고 있는 기록 중『 오분율』과『 빨리율』에

는 이들 모두가 붓다에 의해서 제도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럴 경우

아난의 화상은 자연히 붓다가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붓다의 10대 제자를 일컬음에서 10번째에

多聞第一 아난을 배정한다. 또한『 증일아함경』 권3「 弟子品」에는

“나의 성문 중 제1비구로서, 時를 알고 物에 밝아 판단이 뛰어나고

기억한 것을 잊지 않으며, 다문하여 앎이 넓고 어른을 잘 섬기는 이

는 바로 아난비구이다.”37)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은 분

명 아난의 화상이 붓다일 개연성을 증대시켜 주는 측면이라고 하겠다.

37)『 增壹阿含經』3,「 弟子品第四-七」『( 大正藏』2, 558a), “我聲聞中第一比丘.知時明物.
    所至無疑. 所憶不忘.多聞廣遠.堪任奉上.所謂阿難比丘是.”

 

붓다의 종제이자, 가장 근실한 25년간의 시자38)로서 8만 4천 법장

의 암송자39)라는 측면은 분명 붓다에게 아난만큼 밀접한 인물이 없

다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독 아난의 화상문

제에 여러 異論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난이 단순히 붓다의 직제자

(上座)가 아닐 수 있다는 점에 무게를 실어준다.

38)『 中阿含經』8,「 (三三)未曾有法品侍者經第二(初一日誦)」『( 大正藏』1, 471c~475a) ;
   『佛般泥洹經』下, 『( 大正藏』1, 169a) ;『 Thera-gāthā(長老偈)』,「 1039~1043」 ;
   『 大智度論』2,「 初品總說如是我聞釋論第三(卷第二)」『( 大正藏』25, 68a).
39)『 Thera-gāthā(長老偈)』, “1024:나는 붓다로부터 8만 2천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수행자들로부터 2천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8만 4천의 가르침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아난과 같은 경우는 붓다와의 친밀관계 이외에도 아난이 시

자가 되는 붓다 55세 무렵부터 1차 결집과 2차 결집에 이르는 긴 기

간 동안 사리불과 더불어 불교교단 최고의 인물로 인정받는 대제자

이다. 아난의 업적은 주지하다시피, 붓다의 열반 이후 경장을 송출40)

하고 서방을 교화41)했으며, 특별히 장수42)하면서 대가섭 이후로 교단

의 수장이 되어43) 교단을 안정시킨 것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러한 아

난의 역할로 인하여 2차 결집 때는 아난의 세력이 교단의 완전한 주

류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40)『 四分律』54,「 集法毘尼五百人」『( 大正藏』22, 966a~971c) ;『 五分律』30,「 第五分
    之九五百集法」『( 大正藏』22, 190b~192a) ;『 十誦律』60,「 五百比丘結集三藏法品第一」
   『( 大正藏』23, 445c~453b) ;『 摩訶僧祇律』32,「 明雜跋渠法之十」『( 大正藏』22,489c~493a) ;
   『 빨리율(Vinaya)』,「 cullavagga」, 11五百犍度, pp. 284~293.
41) 히라카와 아키라 著, 이 호근 譯,『 印度佛敎의 歷史上』, (서울: 民族社, 1994), p. 109,
    “아난은 기꺼이 서방을 교화했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서 서방으로 진출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42) 申 星賢,「 初期佛敎 敎團에서 迦葉과 阿難의 關係」,『 佛敎學報』 제36호(1999), p.256,
    “(아난은)『 法句經註』에 의하면 120세에 돌아갔다고 한다.”
43)『 阿育王傳』4,「 摩訶迦葉涅槃因緣」『( 大正藏』50, 114b), “尊者迦葉以法付囑阿難而作
    是言.長老阿難佛以法藏付囑於我.我今欲入涅槃以法付汝.汝善守護.阿難合掌答尊者言唯然受敎.”

 

그리고 이와 같은 영향력으로 인하여 아난은 Gaṅgā江에서의 열

반44) 이후 바이샬리와 마가다에 각각 사리탑을 두게 되는데, 바이샬

리의 사리탑은 불탑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

다. 또한『 잡아함경』 권18 등에서는 불제자들 중 아소카왕으로부터

가장 많은 보시를 받는 인물로 아난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45)

44) 阿難의 入寂 장소는 Magadha와 Vaiaśālī 사이 Gaṅgā江의 船上에서라고 전하며, 그 시기는 
    兩國의 전쟁 때였다고 한다『. 大唐西域記』7,「 吠舍釐國」『( 大正藏』51, 909c) ;『 大唐西域記』
    9,「 摩伽陀國下」『( 大正藏』51, 922b).
45)『 雜阿含經』18,「 弟子所說誦第四品-六○四」『( 大正藏』2, 168b), “王卽捨百億兩珍寶.
    而供養其塔.” ;『 阿育王經』2,「 見優波笈多因緣品第二」『( 大正藏』50, 138c), 
    “時阿育王以十萬金供養阿難塔.”

 

아난의 이와 같은 붓다와의 친밀관계와 업적에도 불구하고, 유독

아난에게 화상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는 것은 아난이 붓다의 직제

자가 아니라는 한 방증이 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아난이 붓다에 의해 제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오분

율』과『 빨리율』 중『 빨리율』과 같은 경우는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

이 같은 율장 안에 아난의 화상이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 부분에 어떠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가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또한 10대 제자에 대한 측면도 이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10대

제자의 배정이 『維摩經』의 「弟子品」46)에 의한 것으로 초기의 전승

이 아니며, 또한 10대 제자 안에는 라후라와 같은 再傳弟子도 끼어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아난이 직제자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

다. 주지하듯이, 라후라의 경우는 붓다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출가

하게 되는 인물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사리불에 의해서 제도된다.47)

즉, 라후라는 붓다의 가장 가까운 지친이지만, 직제자가 아닌 재전제

자이며 그럼에도 10대 제자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이 붓다와 밀접한 관계의 인물이며, 10대 제자로 일컬어지고 있

다고 해서 곧 붓다의 직제자라고는 수가 없는 것이다.

46)『 維摩詰所說經』1,「 弟子品第三」『( 大正藏』14, 542a) ;『 佛說維摩詰經』上,
   「 弟子品第三」『( 大正藏』14, 523b) ;『 說無垢稱經』2,「 聲聞品第三」『( 大正藏』
    14, 564a).
47) 일반적으로 羅睺羅는 불교교단 최초의 沙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치적으로는『 四分律』 권34 등에 의거하여 羅睺羅가 
    최초의 沙彌가 되는 것이 옳으나,『 五分律』 권17에는 羅睺羅 보다 빠른 周那라는 
    沙彌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四分律』34,「 受戒揵度之四」『( 大正藏』22, 
    809c ~ 810a) ;『五分律』17,「 第三分初受戒法下」『( 大正藏』
22, 116c), “羅睺羅馳下趣佛.頭面禮足立佛影中.白言.是影甚樂願佛與我父餘財.佛語言.
    汝審欲得不.答言欲得.佛便將還所住告舍利弗.汝可度之.舍利弗白佛.世尊先制不得畜
    二沙彌.我已有周那不復得度.佛言.今聽如汝等能敎誡者畜二沙彌.”

 

그리고『 증일아함경』 권3「 제자품」에는 아난 말고도 석가족 출가

당시 인사들인 釋王(跋提)과 아나율도 있지만, 또한 라후라도 등장

하고 있다.48)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도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라는 측

면은 성립될 수가 없다.

48)『 增壹阿含經』3,「 弟子品第四-二 ~ 七」『( 大正藏』2, 557b ~ 558a), “天眼第一.
    見十方域.所謂阿那律比丘是.·不毁禁戒.誦讀不懈.所謂羅雲比丘是.·我聲聞中第一比丘.
    豪族富貴.天性柔和.所謂釋王比丘是.”

 

즉, 라후라를 통해서 우리는 붓다의 제자라는 개념이 곧 직계 화상

에 의한 제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은 모든 제자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금 아난이 붓다의 직

제자가 아니라고 해도 라후라와 같이 붓다의 제자처럼 기록될 수가

있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 볼 수가 있게 된다.

 

아난이 붓다의 제자이면서도 붓다의 제자가 아닌 것처럼 기록될

수 있는 개연성은 형인 제바달다와 관련된 측면 뿐이다. 즉, 후일 붓

다를 상대로 해서 파승가를 단행하는 제바달다를 붓다와 격리시키

기 위해서 동생인 아난까지도 붓다의 제자가 아닌 재전제자로 기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후대의 불전인『 불본행집경』에서만 제

한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아난과 같이

초기불교에서 중요한 인물이 제바달다로 인해서 붓다와의 관계가

깨지고, 그 자리에 다른 제자가 들어올 정도로까지 내용적인 변화가

초래될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미심적은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에서 아난의 막대한 영향력은 아난의 지지세력이 대단했음

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아난을 붓다와 유리시키는 왜

곡이 쉽게 발생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아난이 일개 무명의 석가족 비구였다면, 제바달다의 영향에

의해서 아난이 좋지 않은 왜곡을 맞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초

기불교에서 아난의 위치는 이러한 영향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정도, 내지 그 이상의 가치를 충분히 내포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아난의 화상문제를 단순히 제바달다의 영향에 의한

왜곡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난의 화상문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측면은 제바달다의 악

영향 보다는 라후라가 아닌가 한다. 라후라가 붓다의 직제자가 되지

못하고 사리불의 제자가 되는 이유는 라후라가 상대적으로 너무 어

렸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중허마하제경』 권6과 같은 경우는 아난을 라후라와 동갑

이라고까지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49) 물론 라후라는 출가시에 사

미로 출가하고 있는데 비해서 아난은 비구로 출가하고 있으므로 라

후라와 아난이 동갑일 정도로까지 아난의 나이가 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아난은 다른 석가족

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어렸던 것이다.

49)『 佛說衆許摩訶帝經』6, 『( 大正藏』3, 950c), “甘露飯王生其一子.耶輸陀羅亦生一子.”

 

아난의 나이에 대해서는 붓다와의 차이를 平川彰이 20~30세 정도

로 추정하고 있고,50) 水野弘元은 30세 정도를 주장하고 있다.51) 그리

고 廉仲燮은「 아난의 나이에 관한 고찰」 속에서 24~27세 정도로 정

리하고 있다.52) 이렇게 될 경우 아난의 출가 연령은 대략 15~18세 정

도가 된다.53)

50) 平川 彰 著,『 原始佛敎とアビダルマ佛敎』, (東京: 春秋社, 1991), p. 151.
51) 水野 弘元 著,『 釋尊の生涯』, (東京: 春秋社, 1960), p. 257.
52) 廉 仲燮,「 阿難의 나이에 관한 고찰」,『 佛敎學硏究』 제19호(2008), p. 319.
53) 사미의 판단기준은 본래 성인이냐, 아니냐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후일 20세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난은 20세 미만이었어도 당시 기준으로는 성인의 최소연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어 비구로 출가하게 되는 것이다.廉 仲燮,「 阿難의 나이에 관한 고찰」,『 佛敎學硏究』 
    제19호(2008), pp. 302~308.

 

붓다의 귀향과 석가족의 출가시기에 붓다에게는 이미 3迦葉兄弟

(Uruvilvā·Nadī·Gayā-Kāśyapa)와 사리불·목건련 등의 나이

많은 제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이 많은 사람들이

다수 출가할 개연성이 충분한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너무 어린 사람

을 직제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

분히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불교교단은 보통 夏臘(法臘)을 통한 座次라고 일컬어지는 출가순

서에 따른 서열을 가진다.54)

54)『 四分律』50,「 房舍揵度初」『( 大正藏』22, 940a·b) ;『 佛說衆許摩訶帝經』13, 
    『( 大正藏』3, 974c) ; 伽山智冠 著,『 韓國佛敎戒律傳統-韓國佛敎戒法의 自主的 傳承』, 
    (서울:伽山佛敎文化硏究院, 2005), pp. 107~109.

 

우바리와 발제(賢王·釋王)의 경우에서와 같이 늦게 출가한 발제

는 당시 석가족의 王(Rāja)의 신분에까지 있었던 인물이지만, 자신

이 부리던 하인인 우바리의 발에 예를 갖추었고 이것은 매우 희유하

면서도 바람직한 경우로 관련전적들에는 기록되어 있다.55) 그러나

이와 같은 측면들은 사람에 따라서는 대단히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

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신분에 의해서도 발생되기도

하지만, 또 때에 따라서는 나이에 의해서도 성립될 수가 있다.56)

55)『 破僧事』9, 『( 大正藏』24, 146a) ;『 佛說衆許摩訶帝經』13, 『( 大正藏』3, 974c 
    ~ 975a) ;『佛本行集經』58,「 婆提唎迦等因緣品中」『( 大正藏』3, 923a).
56)『 大唐西域記』9,「 摩伽陀國下」『( 大正藏』51, 923c), “王更深信捨國出家.出家既
    已位居僧末.心常怏怏懷不自安.我昔爲王尊居最上.今者出家卑在衆末.尋往白僧自述情事.
    於是衆僧和合.令未受戒者以年齒爲次.故此伽藍獨有斯制.”

 

즉, 너무 나이 어린 사람이 윗자리에 있게 되면, 그 밑으로 들어오

려는 사람들의 사기에 문제가 발생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沙

彌의 경우에는 출가 순서보다도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을 통해

서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확보될 수 있는 바라고 하겠다.57)

57) 沙彌는 僧侶가 아니며, 沙彌가 僧侶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이다. 그
    러므로 沙彌 같은 경우에는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出家問題에서
    부당함으로 인식될 여지도 존재하게 되는데,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는 僧團의
    話頭가 되고 있다『. 四分律』50,「 房舍揵度初」『( 大正藏』22, 940b).

 

아난 같은 경우에는 사미에까지는 속하지 않으면서도 나이가 어

린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로 인하여 붓다가 아난을 의도적

으로 승단의 서열에서 비껴 세웠을 개연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만일 십력가섭이 석가족의 귀족이었다면 이의 개연성은

더욱더 증대된다고 할 수가 있다.

 

라후라의 화상이 되는 사리불은 붓다의 수제자인 동시에 붓다에

게 가장 신망을 많이 받은 제자이다.58) 이런 제자에게 라후라를 맡긴

다는 것은 충분한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아난

의 화상은 사리불과 목건련 같은 신망이 두터운 제자가 아닌 십력가

섭과 같은 인물이 맞게 된다. 이것은 이러한 인물이 석가족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일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해준다. 그리고 십력가

섭이 정반왕의 친척이라는 점은 이러한 추론의 타당성을 증대시켜

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게 된다.

58)『 雜阿含經』45,「 一二一二」『( 大正藏』2, 330b), “譬如轉輪聖王.第一長子應受灌
    頂而未灌頂.已住灌頂儀法.如父之法.所可轉者亦當隨轉.汝今如是.爲我長子.鄰受灌頂而
    未灌頂.住於儀法.我所應轉法輪.汝亦隨轉.得無所起.盡諸有漏.心善解脫.如是.舍利弗.我
    於汝所.都無見聞疑身·口·心可嫌責事.” ;『 長阿含經』1,「 (一)第一分初大本經第一」
   『( 大正藏』1, 3a).

 

즉,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가 되지 못한 것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

이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으며, 여기에는 당시 불교교단의 사승관계

가 보다 유연하고 폭넓은 측면을 확보하고 있었던 배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할 경우 아난의 화상은 석가귀족 출신의

십력가섭일 개연성이 가장 높게 추론되어지게 된다고 하겠다.

 

Ⅳ. 아난과 관련된 왜곡 검토

 

1. 제바달다와 관련된 왜곡

아난이 파승가의 주체인 제바달다를 형으로 두고 있다는 것은 붓

다와 제바달다를 분리하는 관점에서는 자칫 아난에 관한 측면 역시

왜곡될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상과 관련하여 우리는

석가족의 출가 기록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

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아난과 제바달다 사이의 왜곡양상에서 대표적인 것은 아난과 제

바달다의 형제관계에 순서에 관한 것이다. 석가족의 가계를 전하는

전적은 총13종으로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彌沙塞部和醯五分律』, 卷15. 59)

②『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卷2. 60)

③『 佛本行集經』, 卷5. 61)

④『 佛說衆許摩訶帝經』, 卷2. 62)

⑤『 佛說十二遊經』, 全1卷 63)

⑥『 起世經』, 卷10. 64)

⑦『 起世因本經』, 卷10. 65)

⑧『 大智度論』, 卷3. 66)

⑨『 彰所知論』, 卷上 67)

⑩『 釋迦譜』, 卷1. 68)

⑪『 釋迦氏譜』全1卷 69)

⑫『 佛祖統紀』, 卷1.70)

⑬『 釋氏稽古略』, 卷1. 71)

59)『 五分律』15,「 第三分初受戒法上」『( 大正藏』22, 101b).
60)『 破僧事』2, 『( 大正藏』24, 105a).
61)『 佛本行集經』5,「 賢劫王種品下」『( 大正藏』3, 675c) ;『 佛本行集經』11,「 姨母養育品第十」
   『( 大正藏』3, 701c).
62)『 佛說衆許摩訶帝經』2, 『( 大正藏』3, 937c).
63)『 佛說十二遊經』全1卷, 『( 大正藏』4, 146c).
64)『 起世經』10,「 最勝品第十二之餘」『( 大正藏』1, 364a·b).
65)『 起世因本經』10,「 最勝品下」『( 大正藏』1, 419b).
66)『 大智度論』3,「 共摩訶比丘僧釋論第六」『( 大正藏』25, 83b·c).
67)『 彰所知論』上,「 情世界品第二」『( 大正藏』32, 231b).
68)『 釋迦譜』1,「 釋迦內外族姓名譜第七(出長阿含經)」『( 大正藏』50, 10a).
69)『 釋迦氏譜』全1卷, 『( 大正藏』50, 86c ~ 87a).
70)『 佛祖統紀』1,「 敎主釋迦牟尼佛本紀第一之一明本跡」『( 大正藏』49, 139c ~ 140a).
71)『 釋氏稽古略』1,「 釋迦文佛宗派祖師授受圖略(本正宗記)」『( 大正藏』49, 739a).

 

이상의 13종 전적에 의거하여 아난과 제바달다의 형제관계를 정

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바달다를 장자로 기록하고 있는 전적 ②·⑤·⑧·⑪·⑫·⑬ 총6전적

아난을 장자로 기록하고 있는 전적 ①·②·③·④·⑥·⑦·⑨·⑩ 총8전적

 

이를 단순히 빈도수에 의거해 판단하면, 우리는 아난이 제바달다

의 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붓다의 귀향시 출가하는

석가족 중 아난이 가장 어린사람이라는 점과 아난이 제바달다의 파

승가 과정에서 형으로서의 행동을 전혀 취하지 못하고 있는 점, 그리

고 율장을 위시로 하는 여러 단편전적들에서 아난이 제바달다의 동

생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들은 아난이 형이 아니고 제바달다가 형

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준다. 이와 같은 문제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廉仲燮의「 ‘4男 8子’의 順序에 관한 고찰」,〈 Ⅲ. 제바달다와 아난의

형제관계〉72)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즉, 제바달다의 악영향

에 의해서 아난이 나쁜 쪽으로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제바달다의 악

영향과 아난의 긍정적 영향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오히려 아난이 형

으로 왜곡되고 있는 양상이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제

바달다와 관련된 아난의 왜곡이 부정의 왜곡이 아닌 긍정의 왜곡양

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72) 廉 仲燮,「 ‘4男 8子’의 順序에 관한 고찰」,『 佛敎學硏究』 제18호(2007), pp. 193 ~ 197.

 

이와 같은 왜곡방식은 아난을 제바달다로부터 분리시키는 쪽으로

작용할 수는 있을지언정, 붓다와 분리시키는 방향으로는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제바달다의 영향에 의한 왜곡은 붓다와 아난의

관계를 재규정하는 것과는 무관한 측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가 아니라는 여러 전승이 왜곡이 아닌

사실에 기초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증대시킨다. 아니 최소한 아난

과 제바달다의 형제관계 왜곡양상을 통해서 우리는 제바달다에 의

한 악영향이 붓다와 아난과의 관계에서 재규정으로는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아난이 붓다의 직

제자가 아니며, 재전제자일 개연성에 무게를 실어주는 측면이 된다

고 하겠다.

 

2. 붓다와 관련된 왜곡

아난의 왜곡양상에는 제바달다와 관련된 측면 이외에도 붓다와

연관된 측면도 있어 주목된다. 그것은 아난이 붓다의 성도시에 출생

 

했다는 아난의 나이와 관련된 왜곡이다.

 

아난이 붓다의 성도시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전적은 불전

중에서『 파승사』 권13. 73)과『 중허마하제경』 권6. 74)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붓다의 성도를 35세로 수용할 경우 우리는 붓다와 아난의

나이차이가 35세나 되는 문제점에 직면하게 된다.

73)『 破僧事』13, 『( 大正藏』24, 105a), “爾時世尊在菩提樹下.降伏三十六俱胝魔軍.
    證得無上正遍知覺.時魔卽往劫比羅城於虛空中.告淨飯王及諸宮人群臣百姓曰.沙門
    喬答摩今夜已死.時淨飯王聞之.心懷懊惱悶絶擗地.及諸宮人群臣百姓亦皆如是悲泣
    懊惱.時淨居天觀察下方.乃見斯事卽下空中.告迦比羅城國王人衆曰.喬答摩不死.今
    在菩提樹下.證得無上正遍知道.時淨飯王及宮人國臣.忽聞此言踊躍歡喜.當此之時.
    甘露飯王誕生一子.以諸衆人歡喜日生故.因號此兒.名曰阿難陀.”
74)『 佛說衆許摩訶帝經』6,『( 大正藏』3, 950c), “爾時魔衆卽皆退散.復告淨飯王曰.
    悉達多太子.於金剛座上而得無常.王旣聞已與諸眷屬悲啼懊惱迷悶倒地.時有天人告
    淨飯王.太子已成無上菩提.王聞是語心大歡喜.及奏王云.甘露飯王生其一子.耶輸陀
    羅亦生一子.王諸眷屬皆大踊躍”

 

붓다의 카필라 귀향 때, 사미로 출가하는 라후라는 붓다의 출가직
전 탄생했다는 기록과 ‘6年 入胎說’에 의해서 붓다의 성도시에 탄생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75) 그런데 아난이 붓다의 성도시에 탄생
하게 될 경우 아난은 라후라 보다도 6살이 어리거나, 혹은 동갑이 된
다. 이는 석가족의 출가시에 아난은 어린비구로 출가하는 반면, 라
후라는 사미로 출가하는 양상과는 너무 판이한 측면이 된다. 그러므
로 이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후대의 고의적인 왜곡으로 밖에는 생
각되지 않는다.
75) 羅睺羅의 탄생시점에 관해서는 여러 전적들의 전체적인 내용을 검토해 볼 때, 붓다의 
    成道 무렵이라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납득하기 대단히 
    난해한 ‘6年 入胎說’을 수용해야만 하는 애로점이 발생하게 된다. ‘6年 入胎說’에 
    대해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이는 본 논의와는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羅睺羅의 ‘6年 入胎說’에는 항상 羅睺
    羅가 붓다의 親子가 아닐 개연성이 내재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후대에는 붓다의 出家 
    이전에 羅睺羅가 탄생했다는 설이 제기되기에 이른다. 이 같은 혼란을 반영하듯
    『 佛本行集經』 안에는 羅睺羅의 탄생에 대한 붓다의 出家 이전과 成道時의 두 가지가 
    아울러 등장하고 있어 이 같은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 佛本行集經』55,「 羅睺羅因緣品第五十六上」『( 大正藏』3, 909a ~ 909c), “爾時世尊.
    告諸比丘.作如是言.汝諸比丘.我於今者.令羅睺羅.捨家出家.遣舍利弗.以爲和上爾時諸比丘.
    作如是念.世尊昔日.曾告我等.作如是言.若有年歲不滿二十.不得爲受具足禁戒.而羅睺羅.
    今始十五.我等爲當依佛昔敎.爲當更復別有.所以作是念.時卽將前事.具白世尊爾時佛告
    諸比丘言.汝諸比丘當知.十五而出家者.可爲沙彌.時諸比丘.蒙佛敎已.卽令出家.請舍利
    弗.以爲和上… 然其五師.或有異說.作如是言其羅睺羅.生二年後.菩薩爾時.方始出家.
    苦行六年.然後成道.成道七歲.方始來向迦毘羅城.如是次第.數羅睺羅出家之日.正年十五” ;
    『 佛本行集經』51,「 尸棄本生品下」『( 大正藏』3, 888b), “爾時耶輸陀羅.於其宮內.
    聞是太子苦行已徹.猶望不久必應還來當受王位.政國治民.作轉輪王.便生是念.太子若作轉
    輪聖王.我卽當作第一妃后.如是念已.歡喜踊躍.遍滿其體.不能自勝.持種種香塗其身體.卽
    著種種無價寶衣.及諸瓔珞.而自莊飾.食諸妙饌.眠寢寶床.柔軟臥具.作如是事.豫待太子.
    時羅睺羅.過六年已.盡其往業.耶輸陀羅.卽以種種資物食飮.而自供養.以是因緣.其羅睺
    羅.便卽出生.”

 

아난의 탄생을 붓다의 성도시점에 배치한 것은 붓다와 아난을 보

다 밀접하게 연관시키려는, 아난을 지지하는 측에 의한 의도된 왜곡

으로 사료된다. 이는 아난이 송출한 교법의 정당성에 종교적인 가치

를 더하려는 의도와 붓다의 열반 이후 교단의 실력자가 되는 아난에

대한 추존의 의미를 아울러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여

기에는 아난을 붓다의 정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아난이 전한 교

법의 신성성, 혹은 아난에 대한 존숭 강도를 높이려는 의도가 내포되

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아난의 나이를 무리하게 왜곡시키면서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역으로 아난과 붓다의 연결고

리에 약한 측면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케

한다. 즉,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였다면 굳이 아난의 나이를 왜곡하

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러한 내용을 유포할 필연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였다면 아난 교법의 정당성

은 그 자체로 문제가 전혀 없으며, 이는 곧 아난의 정당성으로도 직

결된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왜곡의 한 배경에는 아난의 특별한 장수가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아난을 라후라와 같거나 아래

로 설정하는 것은 무척이나 대담한 측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가 아닌 재전제자라면, 이는 승단분열이 가

속화되는 후대에서는 이러한 측면이 반대파에 의해서 아난의 정통

성에 시비를 초래할 수도 있는 부분이 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즉, 붓

다 당시의 사승관계와 후대의 사승관계에 대한 인식적 차이로 인해

서 아난의 정통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이를 아난 측에서 보완하기 위

해 붓다 성도시의 아난 출생이라는 대안의 방어기재를 설정했다는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외에도『 파승사』 권13과 같은 경우에

는 아난이 붓다의 동생이 되고 大總持를 획득하게 되는 본생담이 설

해져 있는데,76) 이와 같은 본생담을 통한 강조도 아난과 붓다를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노력의 한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76)『 破僧事』13,『( 大正藏』24, 167c), “時辟支弟.今阿難陀是.緣過去世供養辟支迦.當發願言.
    未來世中與佛作弟.親承供養多聞總持.所以今時爲我毘季聰明第一.若水注甁時.”

 

붓다와 아난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결국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가 아닌 재전제자였을 가능성만을 보다 더 증대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직제자에 대한 측면의 주장이 아닌 다

른 면에서의 강조는 도리어 양자의 유리된 관계만을 부각시키는 경

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양상들이 목도되

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관점들이 피력될 때에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

가 아니라는 보편적인 인식이 승단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의 주체가 아난을 지지하

는 세력들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아난의 화상이 붓다가 아닐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

 

Ⅴ. 結論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아난의 출가관련 기록에서 보이는 특수성

에 관한 측면을 검토해 보았다.

 

아난의 출가와 관련된 특수성은 아난이 붓다의 재전제자이면서도

초기교단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

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난이 붓다의 직제자가 아닌 재전

제가가 되는 것은 붓다 당시의 유연하고 폭넓은 사승관계에 기초하

여, 아난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는 양상에서 기인하는 것

이다.

 

그리고 아난의 화상과 관련해서는 비라다와 발야슬타승가, 그리

고 Belaṭṭhasīsa와 십력가섭 총4인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중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은 십력가섭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는 십력가섭이

5비구 중의 한 명으로 석가족의 귀족 출신이자 인격이 훌륭하다는

점에서 타당한 설득력을 확보한다고 하겠다.

 

아난이 붓다의 재전제자라는 것은 붓다 당시의 사승관점에서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후일 사승관계가 보다 고

착화되고, 부파가 첨예화되면서 이 부분은 아난 지지세력에게 방어

논리가 필요한 측면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 결과 붓다와 아난을 보

다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노력들이 승단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으

로 이해된다. 즉, 아난의 출가에서 보이는 특수성은 단순히 기록적

인 혼란이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나타난 왜곡상

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논리의 접근과정들 속에서 붓다를 상대로 파승

가를 단행한 제바달다의 악영향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부정적인 왜곡이 있지 않다는 것만을 확인해 볼 수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아난에게서 나타나 보이는 왜곡의 주체가 아난

의 지지세력들에 의한 아난을 위한 왜곡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붓다가 귀한 것은 그 진리, 즉 법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난

은 이를 가장 가까이서 향유한 지근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아난의 위대한 존귀성을 유감없이 나타내 주는 측면이다.

그러므로 아난이 직제자가 아니라고 해도 아난에 의해 전수된 진리

의 위대성이나 아난의 존귀성이 결코 폄하된다고 할 수는 없다.

 

법은 계승관계 속에서 귀한 것이 아니라, 傳道라는 전개과정에서

의미가 확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의 법’이 아닌 ‘법의 아난’이

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난이 재전제자라는 측면은 전혀 문제가 없

다고 하겠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아난을 재전제자로 배속한 붓다의

유연한 진리적 입각점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