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인도 스투파 신앙의 변천과 그 영향/권기현

실론섬 2017. 5. 29. 13:49

[동아시아불교문화]28집

인도 스투파 신앙의 변천과 그 영향

권 기 현/위덕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Ⅰ. 들어가는 말

Ⅱ. 인도 stūpa의 연원

   1. caitya와 stūpa의 연원

   2. 부처님 재세시 조탑 내용

Ⅲ. stūpa의 성립과 신앙형태

   1. 부처님 열반 후 예배·공양 대상

   2. 아쇼카왕의 8만4천탑과 공덕신앙

   3. 슝가왕조의 탑경전신앙

Ⅳ. stūpa와 대승신앙의 변천

   1. 불탑신앙과 대승 구원신앙

   2. 불탑신앙과 불상신앙

   3. 불탑의 만다라설계와 오불신앙

Ⅴ. 나오는 말

 

<국문초록>

본 논문은 인도에서 불탑신앙의 시대적 변천과정을 문화사적 배경 속에서

분석해 stūpa의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또한 불탑과 관련된 신앙형태

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새롭게 정립하여 당시 불교도들의 불탑신앙에 대한

실존적 지평을 재고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도 불탑의 역사를 7단계로 구분하여, ①고대

인도, ②부처님 당시, ③불타 이후, ④마우리야왕조, ⑤슝가왕조, ⑥기원전후,

⑦굽타와 팔라왕조시대로 나누었다. 이 각각의 시대에 대한 근거자료로는

①인더스문명 유적과 베다경전, ②6종류의 탑, ③근본 8탑, ④8만4천탑, ⑤산

치 Ⅱ탑과 Barhut stūpa, ⑥Gandhara and Mathura 조각, ⑦Ajanta and Ellora 유

적과 남인도 불탑 등을 근거로 하였다.

 

이상의 시대와 근거를 통해 나타나는 stūpa의 신앙형태는 ①성단(聖壇), ②

분묘(墳墓), ③예배와 공양의 대상, ④공덕(功德)신앙, ⑤탑경전(塔經典)신앙,

⑥구원(救援)신앙, ⑦오불(五佛)신앙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인도에서 탑신앙은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그 의미와 상징성

이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신앙형태는 앞 시대의 신앙

형태가 후대에 사라지고 새로운 신앙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시대가 변화해도 앞선 유행이 일정부분 유지되었고, 각 시대마다 위와 같

이 특징적 유행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Ⅰ. 들어가는 말

 

문화라는 용어는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의 특성상 매우 다양하게

정의된다. 그러나 종교 사회학적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후천적․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외면적․내면적 생활

양식의 체계로서 집단의 전원 또는 특정한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것”1)으로

정의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불교문화’를 정의한다면, ‘상가라는 사회집단

안에서 학습되고 전승된 바의 사회구조 및 사유방법, 종교적 관념과 의례를

통한 예술활동, 생활관습을 포함한 총체적 생활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불제자들의 깨달음이나 사고체계 및 생활방식

등도 불교문화의 범주에 둘 수 있겠다.

1) A. L. Kroeber and C. Kluckhohn, “Culture: A Critical Review of Concepts and Definitions”, in:
   Papers of the Peabody Museum of American Archeology and Ethnology, Harvard, vol. 47, p.34.

 

불교문화는 불교도들의 공동체 속에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불타 이전의

브라만교적 문화요소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힌두 사회와의 유기

적 관계를 통해 문화의 질적 변화를 꾀하였다. 따라서 불탑과 관련된 모든 종

교형태와 그것을 통한 상징 및 신앙요소도 불교발생 이전부터 시작된 다양

한 인도의 문화적 토대에 기인한다.

 

불교문화의 역사적 자료 중에서 그 양과 질, 양면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

는 것은 단연 탑과 불상이다. 이 점은 탑과 불상이 예배 대상으로서 불교도들

의 신앙과 정성이 모두 이 두 곳에 집결되어 있는 불교문화의 핵심이었기 때

문이다. 탑은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건

립되었고, 이후에 나타난 다양한 불상은 탑보다 좀 더 직접적 의미의 예배를

올리는 대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불탑에 관해서는 미술사적 연구에 집중되었고 불탑과 더불어 나

타난 새로운 불교적 신앙형태의 변천과정에 대한 연구2)는 미미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인도에서 나타난 불탑신앙의 시대적 변천과정을 문

화사적 배경 속에서 통시적 분석을 통해 불탑의 바른 이해와 더불어 그것과

관련된 신앙형태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새롭게 정립하여 당시 불교도들의 불

탑신앙에 대한 실존적 지평을 재고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2) 인도 불탑에 대한 연구는 A. Cunningham의 대표저작인 The Stupa of Bharhut,(London, 1879)에
   서 시작하여, J. Marshall and A. Foucher의 The Monuments of Sāñchī, 3 vols.(Delhi, 1940)으로
   이어졌다. 이후 B. M. Barua의 Barhut 3 vols.(Calcutta, 1934)과 H. Lüder, A. K. Coomaraswamy,
   V. S. Agrawala, 등의 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이들은 고고학․
   미술사적 연구 중심이었다. 그러나 平川彰, ?初期大乘佛敎の硏究?(春秋社, 1968), 高田修 등
   을 비롯한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불교교학을 바탕으로 한 불탑연구와 미술사적인 연구가 진
   행되었고, 이와 동시에 杉本卓洲의 ?インド佛塔の硏究?(東京, 1984)로 문화사적 초점에서 불
   탑연구를 새롭게 조망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J. S. Strong의 Relics of the Buddha(New Jersey,
   2004) 등의 뛰어난 연구가 있다. 이외에도 상세한 선행연구에 관해서는 杉本卓洲, ?インド佛
   塔の研究?,pp.32~45, 第三節 硏究略史에서 불탑연구에 대한 서구와 일본의 연구성과가 잘
   정리되어 있다. 국내연구도 불탑에 관해서는 미술사적 연구 중심이었다. 신앙적 연구를 포함
   하고 있는 것은 우인보의 박사학위논문을 교정해 출판한 ?탑과 신앙?(해조음, 2013)이 유일하
   나 이것 또한 인도 중심이 아니고 한문경전을 텍스트로 한 한국 탑파 중심의 연구이다. 

 

Ⅱ. 인도 stūpa의 연원

 

1. caitya와 stūpa의 연원

현재 인도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고대 탑은 불교와 관련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상 그 기원은 불타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인도의 불탑에

대한 어원으로는 caitya와 stūpa가 가장 대표적인 용어이며 이 둘은 불탑을 지

칭하는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어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

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적 종교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한 신성한 장소

로 확인되는 유적이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 중

에서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올리고 불을 피운 흔적이 남은 곳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토단(土壇)을 쌓아 올리고 사람들이 모여 나무로 불을 밝히고 기

도하면서 homa와 유사한 pūjā를 행했던 곳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토단을

caitya라 불렀는데 이 경우에는 ‘성단(聖壇)’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3)

3) S. M. Monier Williams, 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402.

 

이후 이 제티야의 의미는 약간 변형되어 위대한 종교적 수행자나 왕이 죽

으면 토단을 쌓고 그 위에서 나무로 화장하였는데 화장이 끝나면 화장한 그

장소를 흙으로 덮어 조성한 원분(圓墳)을 제티야라고 불렀다. 이점은 caitya

의 어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cit라고 하는 ‘화장목(火葬木)’ 즉 화장할 때

사용한 나무장작에서 기원한다. 불을 일으키는 나무자체를 신성하게 생각했

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차용되어 불탑을 지칭하는 말로 사

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탑의 가장 대표적인 용어인 stūpa의 어원은 2가지가 있는데 √

stū ‘응고 혹은 응집’되다와 √stūp ‘위로 쌓다 혹은 건립되다’의 의미에서 유래

된 것이다4). 이외에도 팔리어 thūpa(아쇼카왕의 비문에는 thube, thubo로 표

기되어 있음)와 더불어 인도유럽어족의 tumba에서 나온 것으로 tumba는 영

어의 tumb, 불어로는 tombe이다. 이것은 초기 아리안들의 용어로 사후 화장

을 하지 않고 땅에 시신을 매장하고 흙이나 돌, 벽돌 등으로 쌓아 만든 분묘

을 지칭했다5).

4) Ibid, p.1260.
5) 杉本卓洲,「インド佛塔の研究」, pp.47~49.

 

이와 같이 caitya와 stūpa는 불을 통한 장례 이후의 자리나 무덤과 같은 단

순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티야는 고대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에

비해 stūpa는 고대 인도의 최고 문헌인리그베다에서부터 언급된다. 이것

을 스기모토 다쿠슈는 아래와 같이 4가지로 분류하여 그 상징적 의미를 아래

와 같이 정리6)하고 있다.

6) 위의 책, pp.51~69.

 

① 바루나신의 찬가7)에 나오는 가지는 아래로 뻗고 뿌리는 위로 향하는

   ‘신성한 나무의 모자’(vanasya stūpaṁ)를 상징

7) R. N. Dandekar, Vedic Bibliography, vol. I, (Ṛig-vedic hymn, 24. 7), p.45.

② 태고 때 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래 위 두 개의 나무(남여를 상징)를 이

   용해 마찰력으로 만든 ‘붉은 불씨’(aruṣa stūpa)를 의미하며 나아가 인간과 하

   늘의 신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상징

③ Āprī찬가에 나오는 지상의 화신(火神) 아그니와 태양신인 수리야의 합

   일의 상징으로 즉, 지상의 불꽃이 하늘에 도달해 태양 빛과 결합되었을 때 스

   투파는 하늘과 땅을 결합하는 ‘천지의 축[우주축]’으로서 역할을 상징

④ 우주적 생명을 발산하는 불기둥인 지상의 화신인 Aṅgiras(Agni의 별칭)

   의 후손으로 불리는 ‘황금의 언덕’(hiraṇya-stūpa)가 천상에 빛나는 최고의 불

   꽃을 의미하는 화신인 Savitā신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불과 동

   일한 색을 띤 황금은 ‘생명의 씨(prāṇa)’로 생각했고 Hiraṇya-stūpa는 개인적 혹

   은 우주적 입장에서 존재하는 ‘생명의 원칙’ 즉 ‘생명 자체’를 상징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나타나기 전 고대 문헌에서 나타나는 스투파

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인 상징적 의미는 불을 피우는 나무

와 그 나무에서 일어나는 불꽃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축으로 생각해

그 속에서 생명의 탄생으로 상징한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위의 ③④번의 상

징적 의미를 연결해 인도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V. S. Agrawala은 마하푸루

사와 관계 지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하였다.

 

우주가 생성할 때 나오는 ‘Agni의 빛’이라고 하는 거대한 빛 덩어리를

stūpa라고 하였고, 이 stūpa의 빛은 중심에서 밖으로 퍼지는 형태의 모습으

로 비유되면서 철학적 상징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은 따라서 인도

에서 불교가 나타나기 전의 Stūpa는 ‘빛의 덩어리, 황금의 언덕’의 화신(化

身)으로 이루어진 인격신인 마하푸루샤(Mahāpurusha)의 생명과 관련된 기

념물로서 받아 들여졌다8)

8) V. S. Agrawala, Studies in Indian Art, pp.77-78. 인도 신화에 의하면 마하푸루샤 또는 Prajāpati
   는 원래 우주를 몸 안에 담고 있던 위대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세계가 시작될 때 스스로를
   희생으로 삼아 몸을 나눔으로써 모든 존재를 탄생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인도의 신화적 사고는 자연에 있는 태양도 Hiraṇya-stūpa의 변화
된 모습으로도 생각하였다. 이러한 빛과 불의 신화적, 종교적 관념들이 포함
된 장례용 구조물이나 토단과 화장 시 일어나는 불꽃의 의미가 함축된 stūpa
가 등장하자 본래 별개의 용어로 사용되던 caitya와 동의어로 받아들여 둘 다
성스러운 장소[성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불타시대 직전의 caitya와 stūpa의 형태적 모습은 흙으로 된 단순

한 원분의 묘지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상징적 의미를 보태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흙으로 된 원분 주위를 벽돌과 돌을

덮어 쌓아 외관상은 거대한 석탑의 모습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은 기원 전 2세기의 바르후트와

기원 후 1세기에 건립된 산치의 대탑에서도 일치9)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9) 宮治 昭,インド美術史, p.16.

 

2. 부처님 재세시 조탑 내용

부처님 열반 이후 조성된 근본 8탑과는 별개로 부처님 재세시에도 많은 탑

이 조성되었다는 내용들이『자타카대반열반경등을 종합하면 대표적으

로 다음 6가지로 정리10)된다. 

10) E. B. Cowell, Jātaka Stories, vol. Ⅲ, Kāliñgabodhi Jātaka, pp.142~143. 각묵스님 옮김,「부처님
    의 마지막 발자취 대반열반경」,(초기불전연구원, 2007), pp.145~146. 그러나 우인보,「탑과
    신앙」,(서울: 해조음), pp. 19~39. 여기서는 3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① 과거칠불의 열반 후 조성된 탑

② 부처님 전생시와 재세시 조성된 벽지불탑

③ 부처님 부친인 정반왕 사후 조성된 묘탑

④ 부처님 재세시 입멸한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사리탑

⑤ 부처님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봉안한 봉안탑

⑥ 부처님 태자시절 이적을 기념해 조성한 기념탑

 

그러나 이 탑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불탑이라고 부르기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stūpa의 기원으로는 손색이 없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무실 때 아난에게 보리수 숭배에 관해 설하는 장면에서 stūpa

와 동일한 의미로 cetiya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머무실 때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법을 설하시고

있을 때 사람들이 예배대상으로서 부처님의 처소에 꽃을 올릴 수 있도록 부

처님의 상징물을 만들기를 청원했다. 그때 부처님은 3가지 형태의 제티야에

대해 그 중요도에 따라 설하셨다.

 

① 사리탑(Sārīrika-cetiya): 붓다나 아라한의 유골을 담고 있는 탑으로 처

   음에는 화장 후 남은 뼈와 치아를 모신 것이었으나, 깨달은 존재의 유골과

   동격의 의미를 지닌 머리카락, 손톱, 발톱 등을 포함해 세운 탑.

② 유품탑(Pāribhogika-cetiya): 바루와 가사처럼 붓다가 직접 사용하던 것

   들이나 이에 준하는 유품 또는 붓다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장소로

   후에 순례지가 된 곳 등에 세운 탑.

③ 봉안탑(Uddesika-cetiya): 처음엔 유품탑에 모셔지는 숭배물을 모신 것

   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붓다의 유품들을 더 이상 구하지 못할 때 불

   상이나 경전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상징물을 봉안하고 세운 탑11).

11) E. B. Cowell, op. cit., p.142.

 

이와 같이 불타시대 이전에도 많은 탑이 존재하고 있었음은 사실로 확인

되며, 탑 중에서도 사리탑이 으뜸이며, 사리나 치아, 모발, 손톱, 발톱 등을 구

하지 못할 경우에 다른 것으로 대치해 다양한 탑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러

나 유품탑이나 봉안탑의 출현에 관해 약간의 의문을 제시12) 하는 경우도 있

지만 석존의 제자 사리불과 목련 등의 사리탑과불설정반왕열반경13)에 나

타나는 정반왕의 탑 등은 부처님 열반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

적이다.

12) 中村元 저, 김지견 역,「불타의 세계」,(서울: 김영사), p.356. “사체를 화장하는 관습은 물론
    불교 이전의 것이지만, 화장한 유골을 스투파 속에 모시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관습이 불
    교 이전의 것이라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석존이 입멸하여 화장한 다음, 그 유골이 수투파에
    모셔져 숭배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3)『대정장』권14,『불설정반왕열반경』, p.782.

 

이에 대한 근거로는 부처님께서 직접 stūpa를 조성해 기릴만한 사람을 제

시하기도 한다.

 

아난다여 네 사람의 탑은 조성할 만하다. 어떤 것이 넷인가? 여래, 아라

한, 정등각의 탑은 조성할 만하다. 벽지불의 탑은 조성할 만하다. 여래의 제

자의 탑은 조성할 만하다, 전륜성왕의 탑은 조성할 만하다14)

14) 각묵스님, 앞의 책, p.145. 

 

이 내용은 위의 ⑤봉안탑과 ⑥기념탑을 제외한 ①~④의 탑과 일치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Ⅲ. stūpa의 성립과 신앙형태

 

1. 부처님 열반 후 예배·공양 대상

앞서 언급했지만 불교경전 중에서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

을 눈앞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그려낸 경전이다. 여기에 불탑

건립과 관계된 기록에서, 아난이 석존의 사후 여래의 사리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묻자 다음과 같이 탑을 세우라고 설하고 있다.

 

너희들은 사리에 대한 예배를 염려하지 말라...... 여래에 대해 믿음을 갖

고 있는 현명한 왕족, 바라문, 장자들이 여래의 사리를 예배할 것이다......

그들은 전륜성왕을 위해 세우는 탑과 같이 네거리에 여래를 위해 탑을 세워

야 할 것이다15).

15) 위의 책, pp.143~144.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 스스로

광명으로 하고 법을 광명으로 삼아, 남을 광명으로 삼지 말라. ......모든 생

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16).

16) 위의 책, pp.161~167.

 

는 유훈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이 유훈에 따라 쿠시나가라 말라족의 재가

신자들은 향과 꽃다발과 온갖 악기를 가지고 사라나무 주위에 모여 노래와

음악 그리고 향으로 석존의 유체를 공경하며 만다라화를 바치고 6일 동안 공

양했다고 한다. 그리고 석존의 시신을 깨끗한 천으로 번갈아 오백 겹으로 둘

러싸고 북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갔다가 동문을 통해 나와서 화장터로 향해

상수제자인 가섭의 도착을 기다려 향나무로 다비되었다고 전해진다.

 

석존의 입멸 소식이 타국으로 전해지자 마가다국의 왕인 아자타사트루와

베살리의 리차비족들은 석존의 사리 일부를 요구하지만 말라족은 이를 거부

한다. 이리하여 석존의 불사리 분배를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날 상황에서, 도

나존자에 의해 중재되어 크샤트리야 계급인 일곱 왕과 한 브라만에게 8등분

으로 나뉘어져 세워진 8기의 사리탑과 추가로 병탑과 재탑을 세웠다는 사실

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볼 때도 부처님 열반 직후 조성된 stūpa는 ‘유골을 안장한 단순

한 분묘’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으며 부처님 역시도 육신에 대한 생각보다도

수행자들에게는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경과한 후 육신이 사라진 스승에 대한 추모의

성격이 급진적으로 일어나 많은 신자들은 불탑을‘예배와 공양’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배의식으로는 스승에게 생전에 행하던 모습으로 오체투지와 탑돌이를

행했고, 화(花), 향(香), 당(幢), 번(幡), 음악, 춤 등 다양한 공양물 등을 탑에

올리는 의식이 줄을 이어 행해졌다17). 이 점은 이후 건립된 탑의 부조물들과

경전에 나타난 공양의식 등을 종합하면 불탑 앞에서 행해진 예배와 공양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 위의 책, pp.175~176. 

 

2. 아쇼카왕의 8만4천탑과 공덕신앙

세월이 흐르면서 이 근본 8탑들은 예배와 공양의 대상에서 서서히 숭배와

귀의처로서 신앙이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빛을 주고 깨

달음의 경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 주신 스승의 육신은 이미 지상에 존재하

지 않자 화장 후 남은 육신의 흔적인 유일한 사리를 모신 불탑은 숭배의 대상

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스승에 대한 추모의 염원이 불자들로 하여금 어

디에선가 숭배와 귀의의 대상을 구하고자 하였음을 뜻한다. 따라서 불탑은

자연발생적으로 숭배와 귀의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곧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필연적 모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우리야 시대에 접어들 무렵 불탑에 대한 숭배는 점차 일반화, 대중화 시

대를 맞게 된다. 기원전 270년 아쇼카 대왕이 즉위하고, 그는 후에 불교로 개

종하면서 불탑신앙의 대중화에 부응하기 위해 기존 8기 불탑 중에서 7기를

헐어 발굴한 불사리를 모아 이것들을 다시 나누어 인도 전역과 국외까지를

포함해 8만4천개의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인도 전역에

서 불교도들 사이에 불탑신앙이 완전히 정착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부터 출가자는 불탑에 관여하지 말라는 부처님 유교를 벗어나

재가신자뿐만 아니라 출가자들도 일부 불탑신앙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단순한 존경과 추모의 예배, 공양의 표시가 아니라 불탑신

앙의 공덕이 조금씩 나타나 공양과 예배가 공덕을 쌓게 한다는 통속적 관념

들이 복합된 종교적인 의미가 부여되면서 탑은 불교문화의 핵심을 형성하게

된다18).

18) B. M. Barua, Barhut Ⅰ,Ⅱ,Ⅲ, p.56.

 

탑의 양식도 이 시기에 와서 많이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아래 부분에는 기

단을 쌓고, 위에 기존의 원분을 올려 복발탑신을 안치하고, 꼭대기는 다시 평

평하게 하여 사각의 평두과 산개를 구비한 거대한 탑으로 발전한다.

 

건축 후 중앙의 탑을 cetiya 혹은 stūpa라 명명했고 탑 주위의 탑문과 울타

리들은 cetiyavaṭṭa라고 불러 둘을 구분하였는데 울타리 밖과 안의 차이는 성

속의 세계를 구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날 산치탑에서

볼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탑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탑을 조성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어떤 이익이 있기 때문에 여래, 아라한, 정등각의 탑은 조성할 만한가?

이것은 그 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의 탑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은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진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몸

이 무너져 죽은 뒤 선처,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이런 이익이 있기 때문에 여

래, 아라한, 정등각의 탑은 조성할 만하다......19)

19) 각묵옮김, 앞의 책. pp.145~146.

 

인용문의 뒤에는 벽지불, 여래의 제자 경우에는 는 동일한 이익을 설하고

있으며, 전륜성왕에 대해서는 ‘정의로운 분이며 법다운 왕’이라고 평가만 다

를 뿐 공덕에 관해서는 같은 내용이 중첩된다. 따라서 탑을 조성하는 목적은

탑을 참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청정한 믿음과 생천의 공덕’이 있다는 내용

이다. 청정한 믿음을 바탕으로 생천(生天)사상 결합된 공덕신앙이 점차 강해

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다.

 

3. 슝가왕조의 탑경전신앙

마우리야 왕조의 왕중왕이자 전륜성왕으로 일컬어졌던 아쇼카대왕의 사

후 제국은 급격한 쇠퇴로 40여 년만의 짧은 기간에 멸망하고 말았다. 마우리

야 왕조를 멸망시킨 사람은 이 왕조의 장군이었던 푸시야미트라 슝가(기원

전 180~144 경)로, 새로 건립된 왕조는 그의 이름을 따 슝가왕조라 불린다.

불멸후에 조성된 탑은 흙과 돌 및 벽돌 등 소박한 재료로 건립되었던 탑이

마우리야와 슝가 시대를 거치면서 매우 화려한 모습으로 거듭난다. 특히 뛰

어난 조각기술을 동원해 탑을 둘러 싼 울타리와 사방의 탑문 등에 수많은 대

리석 부조로 장식했다.

 

남아 있는 슝가시대 대표적 탑으로는 기원전 2c 경에 건립된 산치 Ⅱ탑을

비롯해 바르후트, 아마라와티(안드라 왕조), 나가르쥬나 콘다, 사르나트의 대

탑 등 거의 모든 곳에서 유사한 양식과 절차를 거쳐 건축되었음은 근대의 고

고학적 발굴을 통해 알려졌다 20).

20) J. Marshall and A. Foucher, op. cit., vol. 1, p.83.

 

이전과 다르게 이 탑들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점은 탑문과 울타리의 조

각으로 약시나 약사, 쿠베라 등 베다시대 자연신들을 의인화해 불법의 수호

신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각종의 식물문양, 터번을 쓴 왕족과 귀족들이 부조

되어 있다. 불교적 내용으로는 수많은 전생담과 부처님의 생애 및 가르침이

설해진 장소와 관련된 조각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무불상 시대의 전형적 양

식인 법륜이나, 보리수, 대좌, 불족적 등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내용들을 탑에 조각한 이유는 단순한 장식적 효과를 보

여주기 위한 것보다 당시 불교의 사상이나 교리 혹은 글을 알지 못하는 일반

순례자들을 위한 시각적 교화 자료로서의 기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점

에 대해 아그라왈은,

 

탑에 부처님의 전생담이나 생애와 관련된 모습의 조각들은 탑의 종교적

내용인 설화적 근거를 제공한다. 따라서 불탑은 삼장(三藏) 그 자체처럼 의

미 깊고 살아 있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21).

21) V. S. Agrawala, op. cit.,, p.147. “...A Stūpa was a dynamic conception profound and living like
    the Tripiṭakas themselves”.

 

라고 하여 탑의 부조물들을 처음으로 또 하나의 불교경전으로 해석하고 있

음을 볼 수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지적인데 당시 탑 주위에서는 참배객

들을 위해 탑을 관리했던 탑관리자(업관리자:kammādhiṭṭhāyaka)들이나 재가

법사들이 오늘날의 슬라이드 강의처럼 사진과 같은 부조 그림을 통해 부처

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텍스트 즉 ‘탑경전’의 효과를 통해 불법을 전달하고

탑자체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처럼 신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와서 불탑에 대한 종교적 의식인 ‘탑돌이(thupapadakkhiṇa)’가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 의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의식이 없는 신앙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은 일반적 이다. 마

우리야 시대까지만 해도 양식 면에서 지금 같은 완성된 형태를 띠지 못했던

탑문과 울타리를 만자(卍字:svastika) 형태로 설계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신

분적 위계에 따른 3단계의 탑돌이 의식이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2).

22) 히라가와 아키라, 이호근 옮김,「인도불교의 역사」, p.292.

 

당시 불탑 순례자들에게 탑은 새로운 경전적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점은

오늘날 스리랑카를 비롯해 남방불교계에서는 재가법사들이 사찰벽화를 이

용해 참배객들에게 벽화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포교하고 있는 장면들과 무관

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현재에도 많은 버마의 불탑인 파고다는 비구들이 관

리 주체가 아니라 재가신자들이 위원회를 만들어 관리운영과 탑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탑돌이 의식은 신분

에 따라 차등을 두는데 탑 위의 요도에는 승려들만 올라가 돌거나 의식을 집

전하기도 한다.

 

또한 탑돌이 의식을 통해 기도하면 생천뿐만 아니라 현세에서 이루고자

하는 세속적 소망이 이루어지고 풍요가 올 것이라는 매우 현실적 공덕사상

도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탑에 꽃이나 음식

등 많은 공양물들이 보시되었고, 불탑에 보시된 불물(佛物)들은 불탑을 위해

서만 사용될 수 있었다. 이때까지도 불물과 승물(僧物)에 대한 엄격한 구분

이 있었고, 불탑에 대한 공양이 늘어나면서 일부 불탑이 없는 사원들은 경제

적 어려움을 겪게 되는 곳도 생기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근거로 일부 승려들

이 ‘탑신앙은 공덕이 적다’든지 ‘탑원(塔院)에 대한 공양은 공덕이 적으며, 부

처님께 보시하는 것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 있다’는 말로 탑

에 대한 보시의 불만을 표출하면서 불탑의 공덕신앙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경우도 많았다고 전한다 23).

23) 위의 책, pp.292~293.

 

그러나 불탑신앙에 대한 승가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탑과 동떨어져

있던 출가자들도 불탑공덕에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불탑조성에 보시를 하고

구체적으로 현실적 소원을 탑문이나 울타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불탑에

남긴 사실로 볼 때 이들도 탑공덕에 일부지만 편승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교리적으로는 시·계·생천론이 공덕신앙의 기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교단적 분위기에 급기야는 탑을 조성하는 공덕을 설하는조탑공

덕경, 인간의 가장 현실적 바램인 수명연장의 공덕을 다루고 있는조탑연

명공덕경, 탑돌이의 공덕을 설하고 있는우요불탑공덕경등의 경전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사리를 구하지 못했을 때 가장 대표적으로 탑

에 경전을 모셔 경탑을 조성한 것도 탑경전신앙에 대한 관념이 적용된 것으

로 보인다.

 

Ⅳ. stūpa와 대승신앙의 변천

 

1. 불탑신앙과 대승 구원신앙

기원전후에 나타난 대승불교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사회 경제학적 추론을 통해 설득력을 갖는 내용이 바로 평천창에 의한 탑경

제 중심의 해석이다.

 

불탑신앙은 대승 흥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초기 대승경전 뿐만 아니

라 뒤에 나타나는법화경이나아미타경등에서도 불탑신앙은 매우 중

요시 되고 있으며. 대승불교에서 중요한 구원불신앙은 불탑에서 유래되었

다24).

24) 平川彰,「初期大乘佛敎の硏究」, p.149.

 

이 주장의 근거는 대승불교의 시작은 재가불교였고,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재가보살 중심의 교리가 많이 설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재가불교가 점차 출

가불교로 바뀌게 되었는데 재가자는 계율을 엄격하게 준수하기 어려웠고, 선

정수행이나 법의 가르침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제를

바란다면 불타의 대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법’중심에서 ‘불’

중심으로 귀의처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가자의 필요에 따라 불타의

구제를 설하는 가르침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화경에 부처님의 대자비를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삼계는 무안(無安)하여 마치 화택과 같고 갖가지 괴로움으로 충만되어

있다. 지금 이 삼계는 모두 아유(我有)이며, 그 안의 중생은 모두가 나의 자

식이다 25).

25)『대정장』9,『법화경』, p.14c.

 

이와 같이 부처님은 진리로 인도하는 스승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아버지

같은 구원불로 등장해 괴로움으로 가득 찬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원을 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구원의 희망이 싹터도 구체적 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서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공간을 비구들과 함께 한다

면 독립적 사상의 발전은 꾀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상 정

립의 장소가 바로 불탑이었고, 불탑은 초기부터 재가자들이 관리해 왔기 때

문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출가자들은 보지도, 듣지도, 같이 할 수도 없었

던 화, 향, 당, 번, 음악, 춤 등의 공양의식이 행해졌던 불탑 주위에는 처음부

터 접근 할 수 없었기에 불탑 주위는 늘 재가자들의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이

러한 현실적 모습은 지속적으로 재가자들에 의해서 발전시켜 왔다.

 

이때 대승경전들이 나타나면서 앞 시대부터 활발했던 공덕신앙이 대승경

전들의 출현과 더불어 종교적 의미가 더해져 구원신앙으로 변모한다. 공덕

신앙과 구원신앙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공덕신앙은

시·계·생천론을 기반 한 초기적 타력신앙 형태를 말하는 반면, 여기서의

구원신앙은 정토사상과 미륵사상 등의 대승철학을 토대로 한 절대적 타력신

앙으로 큰 선업이나 수행을 하지 않고도 세속적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불탑의 신앙유형은 대승경전들과 더불

어 공덕신앙에서 구원신앙으로의 전환하게 된다.

 

2. 불탑신앙과 불상신앙

간다라 지역을 무대로 한 쿠샨왕조의 제3대 카니쉬카왕이 즉위(144년)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을 무렵부터 불상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대

에 마투라 지역에서도 표현양식은 달랐으나 불상이 출현하게 되었다. 두 곳

의 불상 출현은 불탑의 출현과 더불어 불교역사상 가장 큰 변혁을 가져 온 사

건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대표적으로 ①부처님의 신

격화, ②불신관 발전에 의한 다불(多佛)신앙, ③기원전 2세기 Bhakti신앙의

기반으로 조성된 힌두신상의 영향, ④헬레니즘의 신상영향 등으로 부처님의

조형화는 둑이 무너지듯 전개되었다.

 

불탑에서 불상이라는 새로운 신앙대상의 출현은 전 인도를 넘어 세계적으

로 급속히 퍼져 나가면서 대중화되었다. 이 점은 당시 불상 출현이 불교도들

사이에 얼마나 갈망했던 것임을 반증하는 증거이다.

 

그러나 새로운 신앙대상이 출현했다 하더라도 500여년의 전통이 곧바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융화와 조화의 차원에서 긴밀하게 협조하여

큰 불탑의 정면이나 옆면에 불상을 조성하다 서서히 독립적 불상으로 나타

났다. 불탑과는 다른 새로운 귀의대상에 따른 예배의식도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했다. 불상의 예배의식은 후대 밀교의궤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때부터 사원건립의 문제에 있어서도 탑과 불상 중에서 어느 것을

중심으로 건립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인도문화권의 경우는 새로운 사원을 건립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유명한

사원들은 탑중심으로 존재해 있었기에 쉽게 불상중심의 사원을 건립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오늘날도 인도문화권에서는 불상보다 탑

신앙이 좀 더 비중 있게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고

고학적 발굴로 드러나는 대부분의 사원유적들이 탑중심으로 설계된 것도 이

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이 약했던 다른 지역에서는 탑중심의 사원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좀 더 관대했다고 생각된다. 불교의 전파경로와 기후라

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이 문제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스리랑카나 동남

아 같은 남방은 기후적으로 인도와 비슷해 연중 야외활동에 큰 불편이 없지

만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전파된 북방 지역은 추위 때문에 연중 오랜 기간 동

안 야외활동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방은 야외에 불탑을 조성

하고 불탑신앙의 전통을 이어 가기에 불편이 없어 오늘날까지 불탑신앙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북방은 불탑이 전래된 초기에는 전통에 따라 불탑

을 중요시 하였으나 불상이 출현한 이후 불상은 실내에 봉안하고 불교 행사

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불상신앙으로의 급격한 이동이 일어났다

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북방지역에서는 탑의 본질적 의미가 점차 약해지

고, 급기야는 탑의 기능을 논할 때 ‘사원장엄’이라는 표현도 나타나게 될 정도

로 불상에 비해 불탑의 신앙가치가 현격히 낮아졌다.

 

3. 불탑의 만다라설계와 오불신앙

6세기경 굽타왕조 말기 불교계는 현세이익적 의례와 주술적 요소가 깨달

음으로 나아가는 수행법으로 승화되는 새로운 교리가 등장했다. 이것이 밀

교이다. 밀교는 대승불교의 양대 철학인 중관, 유식사상을 융합하고 수행법

으로는 흔히 3M이라고 불리는 mudra, mantra, maṇḍala와 더불어 비로자나불

을 포함한 오불(五佛)신앙 등을 기반으로 신비주의적 새로운 사상과 실천체

계를 확립했다. 여기서 불탑과 관련을 가지는 것은 탑 조성의 설계적인 면에

서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구현하는 만다라와 오불신앙이 대표

적이다.

 

밀교시대 조성된 불탑은 만다라적 설계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힌두 사원 설계의 원형인 Vāstu-puruṣa-maṇḍala에서 잘

드러난다. vāstu란 ‘머무르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원형 √vās에서

유래되어, 만다라 주위로 한정된 시간과 공간이 동연(同延)하는 우주적 터로

‘머무르는 장소, 건물’을 뜻한다. puruṣa란 리그베다에서 나오는 우주창조를

설명하는 원리로서의 ‘원인(原人)’을 말하며, maṇḍala는 maṇḍa와 la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maṇḍa는 ‘본질, 정수’라는 뜻이고, la는 ‘갖는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Vāstu-puruṣa-maṇḍala란 ‘우주적 존재 안에 내재하는 정신적 본질을 가

진 장소’를 의미한다 26).

26) A. Snodgrass, The Symbolism of the Stupa, pp.107~109.

 

Vāstu-puruṣa-maṇḍala에서 큰 사각형은 인도 우주관에 입각한 방위에 맞추

어 작은 사각형으로 나누어 설계되었다. 각각의 작은 사각은 사원의 계획된

배치, 모셔진 상의 성격 및 특징, 기증자의 카스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

을 고려해 각각에 맞게 상징을 일치시켰다. 이것은 만다라의 배치형식과 동

일한 기하학적 배치를 가지고 있는데 큰 사각에 등차급수와 같이 그노몬

(gnomon, 평행사변형에서 그 한 각을 포함한 닮은꼴을 떼어 낸 나머지 부분)

형식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 사각 내에서 한 만다라의 배치에서 시작해 점

차 증가해 8×8=64, 9×9=81, 32×32=1.024 개의 사각형으로까지 전개되고 있는

데 64와 81의 형태가 일반적이다.27) 이 설계방법이 탑을 건립할 때도 적용되

었던 것이다.

27) 힌두교의 우주관에서 숫자 64와 81은 춘추분의 세차를 의미한다. 8×8에서 8은 완성의 상태
    및 모든 가능성을 상징하고, 9×9에서 9는 구천[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생각]으로 지고
    의 영적인 힘을 상징. G. Michell, The Hindu Temple, p.21.

 

밀교에서는 ‘우주적 존재 안에 정신적 본질’을 본초불인 비로자나불로 해

석했다. 그래서 탑의 중심을 동사 √nabh(팽창하다, 퍼지다)에서 나온 nābhi

(배꼽, 바퀴의 축) 28)라 불렀고, 그곳에 있는 비로자나불이 빛으로 변하여 육

방(六方)으로 퍼지고, 역으로 여기로 수렴되는 것이 비로자나불의 세계라 설

명했다.

28) S. M. Monier Williams, op. cit., p.527.

 

이러한 설계와 철학을 바탕으로 밀교시대의 탑은 그 형태에서 복발탑으로

대변되는 전자들과는 다른 큰 변화가 나타난다. 탑의 사방에 사불(四佛)을

모시고 (직접 비로자나불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지만) 중앙은 드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으로 간주해 오불을 완성하여 불탑의 신앙형

태는 오불신앙으로 발전되었다.

 

비로자나불에 대한 사상체계로는대일경에 기초한 태장만다라는 비로

자나불의 절대적 세계를 나타내고,금강정경에 기초한 금강계만다라는 중

생이 이미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세계라고 설명해 온 세계는 그대로 깨달음

의 현현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도상이나 조형에서는 비로자나불의 사방에 사불을 배치하는데 이

는 별개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대 생명인 금강 자체 그대로

인 대일여래가 그 자신의 권화 즉, 생명, 가치, 자비, 창조의 4가지로 열어 사

불인 아촉불, 보생불, 아미타불, 불공성취불의 모습으로 개현된 것이 오불이

다. 따라서 밀교에서의 불탑신앙은 만다라 구조 안에 오불을 배대하고 그 오

불을 신앙하는 것이다. 그러나 밀교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 해서 밀교라

한다. 드러나는 것은 탑이지만 그 속에 드러나지 않은 다섯 부처님의 비밀스

러운 가지력을 신앙대상으로 삼았던 특징이 있다.

 

이후 이 오불신앙은 五部(오부), 五智(오지), 五臟(오장), 五方(오방), 五輪

(오륜) 등의 신앙과 수행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밀교의궤를 만들어 내는데, 호

마작법을 비롯해, 치병작법, 기우작법, 제불공양작법, 行像(행상)작법 등 여

러 가지 현실적 기원성취 작법들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불탑과 관련된 이러

한 밀교적 요소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되는 팔라왕조의 마지막까지

도 지속되었다.

 

Ⅴ. 나오는 말

 

이상으로 인도에서 전개된 불탑의 기원과 변천과정에 따른 신앙형태에

관해 문화사적 입장에서 고찰해 보았다. 불탑신앙의 역사적 전개를 밝히는

데에 가장 큰 난관은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학적 자료의 시대적 불일치를 어

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고고학 자료는 어느 정도 시대별로 분

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반면, 문헌 자료는 혼재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

무리 초기 경전이라고 하더라도 오랜 구전 끝에 문자화되어 편집된 내용이

기에 후대 경전 속에서도 초기 불탑에 관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밝혀진 인도의 역사를 통해 최대한 좁혀 간극의 접점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도출한 인도 불탑에 대한 신앙의 변천과정을 결론적으로

제시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시대별 불탑신앙의 변천과정>

시기                                 불탑의 종류                                 신앙형태

고대                               인도 하라파․모헨조다로 유적           성단

부처님 재세시                6종탑                                                분묘

열반 이후                       근본 8탑                                           예배·공양

마우리야 아쇼카왕         8만4천탑                                          공덕신앙

(즉위년 B.C. 270)                                                                                       

슝가왕조                        산치 Ⅱ탑·바르후트 대탑                   탑경전신앙

(B.C. 2C.)                                                                                                       

카니쉬카 왕조의 불상     간다라·마투라 조각,                         구원신앙

출현 시기(기원전후)       산치 Ⅰ탑(1c 초)                                                         

굽타왕조 및 팔라왕조     아잔타·엘로라,                                 오불신앙

(A.D. 4~9C.)                    사르나트, 남인도 불탑                                               

 

그러나 위의 표를 잘못 해석하면 탑의 기능과 신앙형태는 전대에 있었던

모습이 후대에 사라지고 새로운 신앙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

다. 시대가 변화해도 탑이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앞선 신앙형태도 지속적으

로 유지되었고, 다만 여기서 분류한 신앙형태의 차이는 각 시대마다 나타난

특징적 유행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