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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실론섬 2008. 8. 1. 15:26

[첫번째 이야기]

대승경전의 하나인 [범망경]에서 노사나불이 설한 "보살심지계(菩薩心地戒)"란 다시 말해서 보살의 심지(心地)인 계(戒)란 의미이다. 즉 보살 수행심의 바탕이 되는 계를 설한다는 의미이다. 경문(經文)에 의하면 "일체만물은 땅에 의지해 살 수가 있듯이 계(戒)는 일체선법이 머무는 곳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계를 땅(대지)에 비유하여 심지(心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대지가 만물을 양육하고 성장시키듯이 계는 마음 속에서 선(善)을 성장시킨다. 심지란 마음속에서 생기는 심리적 힘이며 그것이 기반이 되어 그 위에 다른 심리작용이 활동할 수 있다. 계는 마음속에 있는 일종의 힘이며 마음의 땅이어서 선한 마음을 성장 시킨다.

 

이를테면 불음주계(不飮酒戒)를 받으면 금주(禁酒)를 서약하는 것이므로 이 서약의 힘이 마음에 준비된다. 그러므로 누가 술을 권하더라도 이 서약의 힘의 저지로 술을 마실 수가 없다. 이렇게 악을 누르는 힘, 억제력이 계이다.

 

계를 받으면 이와같은 억제력이 몸에 생긴다. 이 계력(戒力)은 일종의 심리적 힘이며 마음속의 다른 심리작용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것을 심지(心地)라 하고 이 심지 위에 다른 선한 마음이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계를 받을때에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입장에서 선을 행할 것을 서약한다. 자기가 선을 행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에게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결심 아래 계를 받는다. 이를테면 스스로 살생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타인이 살생하려는 것을 보면 그것을 제지시키려고 한다.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선의 힘이 몸에 생긴다.

 

이처럼 계를 받으면 선의 힘 다시말해서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힘"이 생기는데 이를 계체(戒體) 라고 하며 이를 심리적인 힘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일체의 보살과 범성(凡聖)의 계는 모두 마음으로 바탕을 삼는다. 이 때문에 마음이 다하면 계 역시 다한다. 그러나 마음이 다함이 없는 까닭에 계 또한 다함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보살의 계는 마음으로서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은 계체(戒體)가 심리적인 것(의지)이라는 얘기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뢰아식이 금생에서 다음생으로 이어져 간다고 보니까 윤회의 삶을 계속하는 한 마음도 다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또한 계를 받을 때는 '성불할 때 까지 지킨다'라고 서약을 한다. 이것은 수많은 윤회전생을 반복하면서 이 계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또 '마음 또한 다함이 없기 때문에 계 또한 다함이 없다'라고 하거나 '보살계는 수법(受法)만이 있을 뿐 사법(捨法)은 없다'라고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즉 계는 이 세상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잃어 버려서는 안되고 성불할 때까지 존속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

범망경에서는 계체(戒體)를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으로 보고 있다.

 

중생의 마음은 번뇌로 더렵혀져 있다. 질투와 교만심, 탐욕과 분노 등 보기 싫은 심리적인 힘으로 마음이 동요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번뇌로 더렵혀진 마음 깊숙이 더렵혀지지 않은 청정한 마음이 있다. 그것이 즉 '양심'이다. 이 양심은 어떠한 나쁜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악을 저지를 때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마음에 알려주는 것이 양심이다. 마음이 악 일색으로 뒤덮혀졌을 때도 자기가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즉 양심은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악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커다란 악을 저지르면 그럴수록 양심의 가책도 심히다. 세상에는 선심(善心) 이란 한 조각도 없는 듯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어떤 순간에 잠자고 있던 양심이 깨어나서 아주 착한 사람이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악에 강한 사람은 선에도 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같이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주 착한 마음이 있다. 이 선심은 우리의 마음 전체가 악으로 물들여진다 하여도 악에 오염되지 않는다. 순수청정하고 반짝이는 선심, 그래서 이것을 '자성청정심'이라고 한다. 여기서 '청정'이란 눈부시게 빛난다는 의미이며 순백한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우리들 마음에서 선과 악은 불가사의한 관계에 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이란 착한 마음(善心)과 악한 마음(惡心)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즉 선악불이(善惡不二)의 관계에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선인인 동시에 악인이라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착한 사람에 대해서는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나쁜 사람도 나쁜 사람에 대해서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착한 사람도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누구라도 어느 정도의 악은 가지고 있다. 때문에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하나라로 되어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안간에게는 선악불이(善惡不二)의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은 선과 악을 분명히 나누고 있다. 우리들 심중에는 악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선을 긍정하고 악을 부정하는 강한 힘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있다. 도덕을 지지하는 마음은 어떤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마음에 기인하고 있다.

 

이와같이 인간의 마음은 선악불이의 면과 악과 선을 구별하는 힘이 혼재되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그런데 계체(戒體)로 하고 있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마음의 밑바닥에 있으면서 항상 선을 탄생시키고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본성이라고 보고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보배 구슬(寶珠)'라고 한다. 마음 깊은 곳에 있고 번뇌로 가리어져 있지만 반짝이고 있는 청정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이런 보배 구슬을 발견해야 한다. 즉 우리가 이런 청정심을 잃지 않도록 하고 다 이 마음을 강화시키도록 노력하는 일이 계(戒)의 의미이다. 계는 서약으로서 생기는 것이므로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더욱 강화 되도록 서약을 세우는 일이 보살계다.

 

이러한 자성청정심은 항상 활동하고 있는 것이어서 마음이 잠들어 있을 때에도 장성청정심은 잠자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불할 때 까지 선(善)의 성질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범망경]에서는 "중생이 불계(佛戒)를 받으면 곧 부처님의 위치에 든다. 위치(지위)는 대각(大覺)과 같다. 참으로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자식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노사나불의 말씀으로서 "그대는 앞으로 성불할 부처님이고 나는 이미 이루어진 부처님이다. 항상 이와같은 믿음을 가지면 계품(戒品)은 이미 구족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말은 자신가 '이제부터 성불할 부처님'이라는 신념을 가질 때 계체(戒體)가 얻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