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디가 니까야

D9. 뽓타빠다 경 (Potthapādasuttaṃ)

실론섬 2014. 4. 8. 23:06

potthapadaparibbajakavatthu (서언)

 

40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뽓타빠다 유행승은 삼백명 정도의 많은 유행승의 대중과 함께 띤두까 나무로 에워싸여 있고 하나의 강당을 가진 말리까 숲에 있는 강연장에 머물고 있었다. 

 

*'제따 숲'은 Jetavana의 역어이다. 제따(Jeta)는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의 왕자 이름으로 '승리자'라는 뜻이고, vana는 '숲'을 나타낸다. 그래서 '제따왕자 소유의 숲'이라는 의미이다. 
제따 왕자(Jeta-Kumara)는 빠세나디 왕과 끄샤뜨리야 공주인 와르시까(Varsika)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위두다바가 사꺄를 침략하여 살육하는데 동참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배다른 형제인 위두다바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가 한다.(Ibid.121) 
그의 이름이 제다(Jeta, 승리자)가 된 이유는 그는 적들을 정복했기 때문에, 혹은 아버지인 빠세나디 왕이 적들을 정복할 때 태어났기 때문에, 혹은 이런 이름이 그에게 길상하기 때문(mangalakamyataya)이라고 주석서에서는 설명하고 있다.(MA.i.50;UdA.56;KhpA.111 등)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자신의 고향인 사왓티에다 승원을 만들려고 이 땅을 구입하기 위해서 수많은 수레 가득히 황금을 가져와서 땅에 깔았고 그래서 그 신심에 감격한 왕자가 공동으로 기증해서 승원(arama)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나타삔디까 승원'의 원어는 Anathapindikassa arama이다. anatha는 '무의탁자'를 뜻하며 pinda는 조그만 덩어리로 뭉쳐진 음식이나 과자류를 뜻한다. 여기에 접미어 '-ika'를 붙이면 '~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전체는 '무의탁자에게 음식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급고독(給孤獨) 장자로 번역되었다.  
아나타삔디카 장자가 세존을 처음 친견한 것은 세존께서 성도하신 다음 해에 그가 사업상 라자가하를 방문했을 때라고 한다.(Vin.ii.154ff;SA.i.240ff 등) 아나타삔디카 장자의 원래 이름은 수닷따(Sudatta)였다고 하는데 그는 무의탁자(anatha)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아나타삔디카(Anathapindika, 무의탁자에 음식을 베푸는 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AA.i.208;MA.i.50)
이 아나타삔디카 장자가 제따 왕자와 함께 승단에 기증한 사원의 이름이 바로 아나타삔디카 승원이다. 이것은 세존 성도후 21년째 되는 해의 일이다. 이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카 승원은 기원정사(祈園精舍)로 한역되었으며 세존께서는 말년의 19년간을 여기서 보내셨다고 한다.(DhA.i.3;BuA.3;AA.i.314) 사왓티의 동원림(녹자모 강당)에 머무신 것을 합치면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만 24년 정도를 보내셨다. 동원림이 완공된 후에는 낮에는 동원림에 머무시고 밤에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무시는 등으로 번갈아가면서 계셨다고 한다.(SnA.i.336)
세존께서 아난다 존자를 시자로 삼으신 것도 여기 머무실 무렵이었다. 깨달으신 후 세존의 45년 간의 생애 가운데서 전반부 20여 년은 인도 전역을 다니시면서 전도에 역점을 두셨고 나머지 25년 시간은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무시면서 사리뿟따 존자를 위시한 제자들과 불법을 체계화 하는데 역점을 두셨다고 볼 수 있다.

*빠세나디 왕의 말리까 왕비의 정원이며 꽃과 과일이 풍부한 숲을 만들었기 때문에 말리까(향기로운) 숲이라 한다.(Ibid)
말리까는 화한을 만드는 자의 딸이었으며 16세 되던 해에 세존을 처음 뵙고 죽을 공양 올렸는데 세존께서는 그녀가 왕비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고 한다.(Ja.iii.405;SA.i.110ff) 바로 그날에 빠세나디 왕은 아자따삿뚜에게 패하여 그곳으로 가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DhpA.iii.121f). 이렇게 세존과 왕을 한꺼번에 만난 인연을 가진 그녀는 그 후로 세존의 독실한 재가 신도였으며 그녀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는 다수의 경전들이 있다.    
*하나의 강당의 원어는 eka-salaka이다. '이곳에는 처음에 하나의 강당(sala)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존경받는 많은 유행승들이 머물면서 계속해서 강당을 지었다. 그래서 처음에 있었던 하나의 강당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의 강당을 가진 곳이라 부른다.(Ibid)
'강연장'이라고 옮긴 원어는 samaya-ppavadaka이다. '이 장소에서 짱끼, 따룩카, 뽁카라사띠 등의 유명한 바라문들과 니간타들과 나체수행자들과 유행승등의 출가자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밝힌다고 해서 이 숲을 강연장이라 부른다.'(DA.i.365)

 

407.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가셨다. 그때 세존께 이런 생각이 떠오르셨다. '지금 탁발을 위해서 사왓티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시간이 이르다. 나는 이제 하나의 강당만 있는 말리까 숲으로 뽓타빠다 유행승을 만나러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래서 세존께서는 띤두까 나무로 둘러 쌓여 있는 하나의 강당만 가진 말리까 숲에 있는 강연장으로 가셨다.

 

408. 뽓타빠다 유행승은 많은 유행승의 대중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시끄럽고 큰 목소리로 여러 가지 하챦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즉 왕에 대한 이야기, 도둑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 대한 이야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상에 대한 이야기, 화환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척에 대한 이야기, 탈 것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도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도로에 대한 이야기, 우물에 대한 이야기, 전에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 잡다한 이야기, 세계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대한 이야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들이었다.

 

409. 뽓타빠다 유행승은 멀리서 오고 있는 세존을 보았다. 본 뒤에 자기의 모임을 정돈하며 조용히 하도록 했다.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사문 고따마가 오고 있습니다. 저 존자는 조용함을 좋아하고, 조용함으로 길들여져 있고, 조용함을 칭송합니다. 만약 우리 대중이 조용한 것을 알면 그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대중은 침묵하였다.

 

410. 세존께서는 뽓타빠다 유행승에게 다가가셨다.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오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잘 오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에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준비된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뽓타빠다 유행승도 역시 다른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뽓타빠다 유행승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무슨 이야기를 위해 여기에 함께 모여 앉았습니까? 그대들 간에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411. 이렇게 말씀하시자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앉아서 하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냥 두십시오. 그 이야기는 세존께서 나중에라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근래에 며칠간 여러 외도 사문·바라문들이 토론 장소에 모여서 함께 자리를 했는데 그때 '존자들이여, 어떻게 해서 인식의 소멸은 있게 됩니까?'라고 인식의 소멸에 대한 이야기가 생겼습니다.

 

*'인식의 소멸에 대한'으로 옮긴 원어는 abhisannanirodha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abhi는 단지 접두어일 뿐이다. 인식의 소멸이란 마음(citta)의 소멸이다. 순간적인 소멸(khanika-nirodha)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다."(DA.ii.369) 햔편 복주서는 "그들은 완전한 소멸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고 논의의 대상으로 하지 않았기 대문에 순간적인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라고 주석하고 있다.(DAT.i.475)

 

거기서 어떤 자들은 '존자들이여,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합니다. 일어날 때에는 인식하는 자가 되고, 소멸할 때에는 인식 없는 자가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인식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른 자는 '존자들이여,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인식이야 말로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것은 다가오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합니다. 다가올 때에는 인식하는 자가 되고, 물러갈 때는 인식 없는 자가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인식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른 자는 '존자들이여,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큰 신통과 큰 위력을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인식을 집어 넣기도 하고 빼내기도 합니다. 집어 넣을 때에는 인식하는 자가 되고, 빼낼 때에는 인식없는 자가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인식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른 자는 '존자들이여,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큰 신통과 큰 위력을 가진 신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인식을 집어넣기도 하고 빼내기도 합니다. 집어 넣을 때에는 인식하는 자가 되고, 빼낼 때에는 인식없는 자가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인식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제게는 세존께 대한 기억이 일어났습니다. 

'오, 참으로 세존이 계시는구나. 참으로 선서(善逝)께서 계시는구나. 그분이야말로 이러한 법들에 아주 능숙한 분이시다.'라고.

세존께서는 인식의 소멸에 대해서 능숙하시고 그 궁극적인 성질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어떻게 해서 인식은 소멸합니까?

 

sahetukasannuppadanirodhakatha (인식(상.想)은 원인과 함께 생기고 소멸함)

    

412. "거기서 뽓타빠다여,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합니다(원인도 조건도 없이 사람에게 인식은 생기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라고 말하는 사문·바라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틀렸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뽓타빠다여,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합니다.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413. "그러면 닦음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여기, 뽓타빠다여, 아라한[araham]이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며, 깨달은 분(buddho)이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인 여래가 세상에 출현 합니다. ··· 이런 성스러운 계의 조목(계온.戒蘊)을 갖춘 그는 안으로 피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뽓타빠다여, 비구는 계를 갖춘 자입니다. ··· 이런 다섯 가지 장애의 버려짐을 자신에게서 관찰하는 그에게 환희가 생깁니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기쁨)이 생깁니다. 희열하는 마음에게 몸은 편안합니다(진정됩니다). 편안한 몸은 행복을(즐거움) 느낍니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어집니다. 그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에게 이전의 감각적 쾌락의 인식이 소멸합니다. 그때 분리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훌륭하고 진실된) 인식이 있고, 그때 오직 분리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이것이 닦음입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미묘하고 참된 인식'으로 옮긴 원어는 sukhuma-sacca-sanna이다. 주석서는 '미묘한 인식(sukhuma-sanna)은 참되다(sacca), 즉 진실하다(bhuta)는 뜻이다. 혹은 미묘하고 그리고 진실하기 때문에 참된 산냐라고 해서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라 한다."(DA.ii.372)
범부들의 인식은 대상에 따라 촐랑대고 바뀌지만 여기 초선 이상의 삼매의 경지에서 생긴 인식은 그 삼매가 지속되는 한 바뀌지 않고 훌륭하고 진실되기 때문에 훌륭하고 진실된 인식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주서는 "[특정한 禪에 들어 있을 때] 다양한 인식과 부딪힘의 인식에 대해서 현명하여 미묘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미묘한 인식은 진실한다고 한다. 미묘한 궁극적인 성질(paramatthabhava)이기 때문에 그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aviparitasabhava)는 말이다."라고 주해하고 있다.(DAT.i.480)   

 

"다시, 뽓타빠다여, 비구는 거친 사유(尋)과 미세한 사유(伺)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에게 이전의 분리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인식이 소멸합니다. 그때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 있고, 그때 오직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이것이 닦음입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뽓타빠다여, 비구는 기쁨이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에게 이전의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인식이 소멸합니다. 그때 평정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 있고, 그때 오직 평정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이것이 닦음입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뽓타빠다여, 비구는 즐거움도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에게 이전의(이전에 있었던) 평정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 소멸합니다. 그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 있고, 그때 오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이것이 닦음입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뽓타빠다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고, 장애(부딛힘)에 대한 인식을 소멸하고, 잡다한 인식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에게 이전의 물질에 대한 인식은 소멸합니다. 그때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 있고, 그때 오직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이것이 닦음입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뽓타빠다여,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에게 이전의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은 소멸합니다. 그때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 있고, 그때 오직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이것이 닦음입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뽓타빠다여,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 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며 머뭅니다. 그에게 이전의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은 소멸합니다. 그때 무소유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이 있고, 그때 오직 무소유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닦음을 통해 소멸합니다. 이것이 닦음입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414. 뽓타빠다여, 비구는 [이처럼] 여기서 [초선의 경지에서] 고유한 인식을 가진 자가 되는데, 그때 그는 그 경지로부터 다시 [제2선이라는] 다른 경지로, 다시 [제3선이라는] 다른 경지로 이렇게 점차적으로 인식의 구경(究竟)을 체험하게 됩니다(인식의 끝에 닿습니다). 인식의 구경에 머무는 그는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고,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약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업을] 형성한다면 나에게 이 인식들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들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아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도 않습니다. 의도하지 않고 형성하지 않는 그에게 그 인식들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소멸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뽓타빠다여, 점진적인 높은 인식의 소멸에 대한 바른 지혜의 증득이 있습니다.   

 

*'고유한 인식을 가진 자'로 옮긴 원어는 saka-sanni이다. 주석서는 초선에서부터 시작해서 제2선, 제3선, 제4선 등으로 올라가면서 네 가지 禪과 공무변처 등의 각각의 세 가지 장소에서 각각의 경지에 해당하는 자기 고유의 인식을 가진다고 이 문단을 설명하고 있다.(DA.ii.373)  
*주석서는 무소유처가 바로 인식의 구경(sannagga)이라 설명한다. 왜냐하면 무소유처는 세간적인 것 가운데 증득해야 하는 구경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무소유처까지 언급이 되며 이런 인식의 구경인 무소유처를 통해서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도 증득한다고 설명한다.(DA.ii.373)  
그리고 비상비비사처는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아주 미세한 경지이므로 인식의 항목에서 언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비상비비상처는 인식의 소멸을 설하는 본경의 주제와는 잘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인식에 관한 한 세존께서는 무소유처를 구경으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소멸을 체험한다(nirodham phusati)'는 것은 상수멸(sannavedayitanirodha)을 체험한다, 얻는다, 증득한다는 뜻이다."(DA.i.374)
*'점진적인 높은 인식의 소멸에 대한 바른 지혜의 증득'으로 옮긴 원문은  anupubba-abhisanna-nirodha-sampajana-samapatti이다. 그러므로 '점진적으로(anupubba) 인식의(abhisanna) 소멸을(nirodha) 알아치리는(sampajana) 증득(samapatti)'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러한 인식이 소멸하는 증득은 상수멸의 증득을 말하는 것이다. 즉 4선-4처-상수멸의 순서대로 소멸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그대는 이전에 이런 점진적인 높은 인식의 소멸에 대한 바른 지혜의 증득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말씀을 이렇게 잘 이해하겠습니다.

'뽓타빠다여, 비구가 여기에서 자신의 인식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각각의 경지에 고유한 인식을 가진 자가 되는데), 그는 거듭 거기로부터 점진적으로 인식의  구경을 체험하게 된다(그가 어떠한 경지로부터 다른 경지로, 이렇게 점차적으로 인식의 구경(究竟)을 체험하게 된다). 인식의 구경에 머무는 그는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고,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약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형성한다면 나에게 이 인식들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들이 일어날 것이다.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아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도 않습니다. 의도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도 않는 그에게 그 인식들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소멸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뽓타빠다여, 점진적인 높은 인식의 소멸에 대한 바른 지혜의 증득이 있습니다.'라고 이해합니다."

“그렇습니다, 뽓타빠다여.”

 

415.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오직 하나의 인식의 구경을 천명합니까, 아니면 개별적인 인식의 구경도 천명합니까?"

"뽓타빠다여, 나는 하나의 인식의 구경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인식의 구경도 천명합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떤 하나의 인식의 구경을 천명하고, 개별적인 인식의 구경을 천명합니까?"

"뽓타빠다여, 소멸을 체험할 때마다 나는 인식의 구경을 천명합니다. 이렇게 나는, 뽓타빠다여, 하나의 인식의 구경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인식의 구경도 천명합니다."

 

*"유행승은 세존께서 무소유처를 인식의 구경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러면 그것만이 인식의 구경인가 아니면 다른 증득(등지)에서도 인식의 구경이 있는가라고 생각한 뒤 세존께 이렇게 질문을 드리고 세존께서는 해결해주셨다. 여기서 개별적(puthu)이란 '많은(bahu)"이란 뜻이다.(DA.i.374∼375)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4선-3처의 각각의 증득(등지)에서 얻어지는 인식도 인식의 구경이라 할 수 있고, 무소유처의 인식 하나 만을 인식의 구경이라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인식의 구경은 하나라고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인식의 구경도 천명한다.'고 말씀하신다.

 

416. "세존이시여, 인식이 먼저 일어나고, 지혜가 나중에 일어납니까, 아니면 지혜가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인식이 일어납니까, 아니면 인식과 지혜가 전도 후도 없이(동시에) 일어납니까?"  

"뽓타빠다여, 인식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지혜가 일어납니다. 또한, 인식이 일어날 때 지혜가 일어납니다. 그는 '참으로 이것을 조건으로 나에게 지혜가 일어난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인식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지혜가 일어난다. 또한, 인식이 일어날 때 지혜가 일어난다.'라는 방식으로, 뽓타빠다여, 이것이 알려져야 합니다."

 

*여기서 인식과 지혜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식과 지혜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로 인식과 지혜를 규정한다.(DA.ii.375)  
첫째 방법: 인식이란 禪의 인식(jhanasanna)이고 지혜란 위빳사나의 지혜(vipassananana)이다. 
둘째 방법: 인식이란 위빳사나의 인식이고 지혜란 도(道, magga)에 대한 지혜이다.
셋째 방법: 인식이란 도의 인식이고 지혜란 과(果, phala)의 지혜이다.
즉 본경의 문맥에서 보듯이 적어도 4선-3처와 그 이상의 경지에서의 인식과 지혜라는 말이다. 
 

 

saññāattakathā (인식(想)과 자아(我)의 이야기)

 

417. "세존이시여, 그러면 인식이 사람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
"뽓타빠다여, 그대는 자아를 무엇이라고 압니까?"
"세존이시여, 물질(色)을 지녔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구성되었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는 거친 자아를 압니다."
"뽓타빠다여, 만약에 그대에게 물질을 지녔고, 네 가지 근본물질로 구성되었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는 거친 자아가 있다면,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있습니다(참으로 그대에게 인식과 자아는 다를 것입니다). 뽓타빠다여, 그때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이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 알려져야 합니다. 뽓타빠다여, 물질을 지녔고, 네 가지 근본물질로 구성되었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는 거친 자아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다른 인식이 일어나고 다른 인식이 소멸합니다. 뽓타빠다여,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이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합니다(이런 방식으로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되고 만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뽓타빠다는 외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외도들이 결코 놓아 버리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세존께서 4선-3처에서 증득되는 '특출하고 참된 인식'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는 이런 경지야말로 궁극적인 실재인 자아가 아닐까 하고 세존께 질문 드린다. 

**"[물질이 아닌 정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무더기들 가운데 어떤 것은 일어나고 어떤 것은 멸하기 때문에 (즉 이전에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에, nanu uppadapubbako nirodha-DAT.i.488) 어떤 인식은 생기고 어떤 인식은 멸한다"(DA.ii.376) 그러므로 인식이란 생멸(生滅)하기 때문에 영원불변의 자아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418. "세존이시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수족과 뼈마디와 온전한 감각기능(根)의 자아를 저는 압니다."

"뽓타빠다여, 만약에 그대에게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이 온전하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가 있다면,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또한 있습니다. 뽓타빠다여, 그때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이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합니다. 뽓타빠다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수족과 뼈마디와 온전한 감각기능으로 이루어진 자아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다른 인식이 일어나고 다른 인식이 소멸합니다. 뽓타빠다여,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이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선(禪)의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DAT.i.488) 그러므로 이것은 초선부터 4선까지의 색계선의 경지이다.

 

419. "세존이시여, 물질이 아니며(無色), 인식으로 구성된 자아를 저는 압니다."

"뽓타빠다여, 만약에 그대에게 물질이 아니며, 인식으로 구성된 자아가 있다면,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또한 있습니다. 뽓타빠다여, 그때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이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합니다. 뽓타빠다여, 이 물질이 아니며, 인식으로 구성된 자아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다른 인식이 일어나고 다른 인식이 소멸합니다. 뽓타빠다여,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될 것이라는 이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무색계의 경지다. 유행승은 차례대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자아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의 인식은 변하기 때문에 인식은 자아가 아니라고 설명하신 것이다. 특히 4선(색계) - 3처(무색계) 각각의 경지에서 생기는 인식이 아무리 미묘하고 참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경지에 머물 때에만 해당된다. 그 경지에서 나오면 그런 인식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인식은 아무리 특출하고 진실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영원불변의 자아는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420. "세존이시여, 인식이 인간의 자아다.'라거나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다.'라는 이것을 제가 알 수 있습니까?"

"뽓타빠다여, 다른 견해를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가르침을 좋아하는, 다른 방법으로 닦는, 다른 스승을 따르는 그대가 '인식이 인간의 자아다.'라거나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다.'라는 이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무언가 궁극적 실재나 영원불변의 실재를 상정하는 그런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코 세존 자신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세존이시여, 다른 견해를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가르침을 좋아하는, 다른 방법으로 닦는, 다른 스승을 따르는 제가 '인식이 인간의 자아다.'라거나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다.'라는 이것을 알기는 어렵다면, 세존이시여,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입니까?"

"뽓타빠다여,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입니까?"

"뽓타빠다여,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은 유한하다는 ···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는 ··· 생명과 몸은 같은 것이라는 ··· 생명과 몸은 다른 것이라는 ···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는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입니까?"

"뽓타빠다여,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존의 설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뽓타빠다 유행승은 계속해서 상주하는 존재론적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세존께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으십니까?

"뽓타빠다여, 참으로 이것은 이익을 주지 못하고, 법으로 이끌지 않고, 범행의 근본으로 이끌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법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은 9가지 출세간 법(lokuttara-dhamma)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홉 가지 출세간 법은 예류도에서 아라한도까지의 네 가지 도와 예류과부터 아라한과의 네 가지 과와 열반을 말한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명하십니까?"

"뽓타빠다여,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나는 설명합니다. 뻣따빠다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나는 설명합니다. 뽓따빠다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나는 설명합니다. 뽓따빠다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나는 설명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것을 설명하십니까?" 

"뽓타빠다여, 참으로 이것은 이것은 이익을 주고(의미로 이끌고), 이것은 법으로 이끌고, 이것은 범행의 근본으로 이끌고, 이것은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끕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이것을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세존이시여, 이제 세존께서는 때를 생각하십시오(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존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셨다.

 

421. 그 유행승들은 세존께서 돌아가신지 오래지 않아 뽓타빠다 유행승에게 일제히 비난과 험한 말들을 퍼부었다. 

"이 뽓타빠다 존자는 이렇게 사문 고따마가 말하는 것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라고. 우리는 사문 고따마가 설한 확실한 법을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같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뽓타빠다 유행승은 그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들이여, 나도 사문 고따마가 설한 확실한 법을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사문 고따마는 사실이고, 옳고, 참되며, (출세간)법에 굳게 서고, (출세간)법에 확고부동함을 갖춘 닦음을 천명합니다. 사실이고, 옳고, 참되며, 법에 굳게 서고, 법에 확고부동함을 갖춘 닦음을 천명하는 사문 고따마의 잘 설해진 법에 대해, 잘 설해진 것 때문에 나와 같은 현명한 사람이 어떻게 감사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cittahatthisariputtapotthapadadavatthu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와 뽓따빠다)

 

422. 몇일이 지난 뒤에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다와 뽓타빠다 유행승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다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때 세존께서 나가신지 오래되지 않아서 그 유행승들은 제게 일제히 비난과 험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이 뽓타빠다 존자는 이렇게 사문 고따마가 말하는 것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라고. 우리는 사문 고따마가 설한 확실한 법을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저는 그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존자들이여, 나도 사문 고따마가 설한 확실한 법을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사문 고따마는 사실이고, 옳고, 참되며, (출세간)법에 굳게 서고, (출세간)법에 확고부동함을 갖춘 닦음을 천명합니다. 사실이고, 옳고, 참되며, 법에 굳게 서고, 법에 확고부동함을 갖춘 닦음을 천명하는 사문 고따마의 잘 설해진 법에 대해, 잘 설해진 것 때문에 나와 같은 현명한 사람이 어떻게 감사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주석서에 의하면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Citta Hatthisariputta)는 사왓티에 사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이었으며,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일곱 번이나 출가와 환속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생에 환속하려는 비구에게 재가의 삶을 칭송하면서 환속하라고 권했기 때문에 금생에 일곱 번이나 환속하는 이와 같은 과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서로 미세하게 다른 단어들의 뜻에 대해서 능통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 환속은 마하꼿티따(Maha-Kotthita)장로가 아비담마를 설할 때 끼어들어 반론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환속하여 이삼 일 후에 뽓타빠다를 찾아갔고, 뽓타빠다는 본경에서처럼 그를 데리고 세존께로 왔다고 한다.(DA.ii.379) 본경에서 보듯이 그는 세존의 설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다시 출가 하였으며 다시는 환속하지 않았고 곧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Ibid) 

  

423. "뽓타빠다여, 그 유행승들은 모두 눈이 멀었고 눈이 없습니다. 그대만이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가진 자입니다. 뽓타빠다여, 나는 (하나의) 확실한 법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확실하지 못한 법들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의 확실한 법들'로 옮긴 원어는 ekamsika dhamma이다. 복주서는 "전적으로 열반을 실현하기에 확실한 것(ekantika nibbanavahabhavena nicchita)"이라고 설명하고 있다.(DAT.i.492)  

 

그러면, 뽓타빠다여, 나는 어떤 것이 확실하지 못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까? 나는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것은 확실하지 못한 법이라고 설명하고 천명합니다. ··· '세상은 유한하다.'라는 것은 ···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라는 것은 ··· '생명과 몸은 같다.'라는 것은 ···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것은 ···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라는 것은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는 것은 ···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확실하지 못한 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뽓타빠다여, 왜 나는 이러한 것은 확실하지 못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까?  참으로 이것은 이익을 주지 못하고, 법으로 이끌지 않고, 범행의 근본으로 이끌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것은 확실하지 못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다.

 

424. 그러면, 뽓타빠다여, 나는 어떤 것이 확실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까? 나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는 것은 확실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나는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는 것은 확실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다나는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는 것은 확실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다나는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것은 확실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뽓타빠다여, 그러면 왜 나는 이러한 것은 확실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까? 참으로 이것은 법으로 이끌고, 이것은 범행의 근본으로 이끌고, 이것은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것은 확실한 법들이라고 설명합니다.   

 

425. 뽓타빠다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자아는 죽고 난 후에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며 병들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 존자들이 '자아는 죽고 난 후에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며 병들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견해를 가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렇게 물어서 그들이 '그렇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면 그들에게 나는 '그런데 그대 존자들은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뭅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하루 낮과 하루 밤이나 반나절이라도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는 자아를 인식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법이며, 이것이 닦음이다.'라고 알기나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착한 사람들이여,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잘 길을 닦으십시오. 착한 사람들이여, 우리도 이와 같이 길을 닦아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뽓타빠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이러하다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분명히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맙니다."  

 

*병들지 않음이란 항상함(nicca.常)을 말한다.(DA.i.119)

 

426. "예를 들면, 뽓타빠다여, 어떤 사람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사랑하고 갈망한다.'라고. 그러면 그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여,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끄샤뜨리아인지 바라문인지 와이샤인지 수드라인지 알기는 하는가?'라고. 이렇게 물으면 그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그에게 다시 말할 것입니다, '그대여, 그대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사랑하고 갈망하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그 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피부가) 검은지 흰지 황색인지, 어떤 마을이나 성읍이나 도시에 사는지 아는가?'라고. 이렇게 물으면 그는 다시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에게 다시 말할 것입니다, '그대여,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여인)을 사랑하고 갈망하는가?'라고. 이렇게 물으면 그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뽓타빠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이러하다면 그 사람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분명히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면 그 사람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뽓타빠다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자아는 죽고 난 후에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며 병들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 존자들이 '자아는 죽고 난 후에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며 병들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견해를 가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렇게 물어서 그들이 '그렇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면 그들에게 나는 '그런데 그대 존자들은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뭅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하루 낮과 하루 밤이나 반나절이라도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는 자아를 인식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법이며, 이것이 닦음이다.'라고 알기나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착한 사람들이여,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잘 길을 닦으십시오. 착한 사람들이여, 우리도 이와 같이 길을 닦아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뽓타빠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이러하다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분명히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맙니다."  

 

427. "예를 들면, 뽓타빠다여, 어떤 사람이 누각에 오르기 위하서 큰 사거리에서 사다리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그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그대는 누각에 오르기 위해서 사다리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 누각이 동쪽 방향에 있다고 아는가? 아니면 남쪽 방향이나 서쪽 방향이나 북쪽 방향이나 위나 아래나 가운데 있다고 아는가?'라고. 이렇게 물으면 그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 다시 말합니다. '이 사람아, 그대는 그대가 알지도 못하고 지도 못하는 그런 누각에 오르기 위해서 사다리를 만드는가?.'라고. 이렇게 물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뽓타빠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이러하다면 그 사람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분명히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면 그 사람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뽓타빠다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자아는 죽고 난 후에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며 병들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 존자들이 '자아는 죽고 난 후에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며 병들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견해를 가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렇게 물어서 그들이 '그렇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면 그들에게 나는 '그런데 그대 존자들은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뭅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하루 낮과 하루 밤이나 반나절이라도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는 자아를 인식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법이며, 이것이 닦음이다.'라고 알기나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착한 사람들이여,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잘 길을 닦으십시오. 착한 사람들이여, 우리도 이와 같이 길을 닦아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뽓타빠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이러하다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분명히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부적절한 말을 한 것이 되고 맙니다."  

 

428. "뽓타빠다여, 이런 세 가지 자아의 획득이 있는데, 거친 자아의 획득,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입니다.

그러면 뽓타빠다여, 무엇이 거친 자아의 획득입니까? 물질로 되었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졌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는 이것이 거친 자아의 획득입니다. 무엇이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입니까? 물질로 되었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이 온전하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입니다. 무엇이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입니까?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인식으로 이루어진 이것이 무색의 자아의 획득입니다.

 

*①거친 자아의 획득이란 무간지옥에서부터 타화자재천에 이르는 욕계의 존재를 말씀하신 것이다. ②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란 초선의 경지로부터 색구경천의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색계의 존재를 말씀하신 것이다. ③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란 공무변처의 세상에서 부터 비상비비상처의 세상까지의 존재를 말씀하신 것이다.(DA.i.380)

 

429. 뽓타빠다여, 나는 거친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닦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깨끗한) 마련인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러나,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괴롭게 머문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염의 법들을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입니다. 환희와 희열과 편안함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게 될 것이고, 즐겁게 머뭅니다.

 

*오염된 법들(samkilesika dhamma)이란 12가지 해로운 마음(akusala-citta)의 일어남이다.(DA.ii.380)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vodaniya dhamma)이란 사맛타와 위빠사나이다.(DA.i.380)

 

430. 뽓타빠다여, 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닦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깨끗한) 마련인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러나,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괴롭게 머문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염의 법들을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입니다. 환희와 희열과 편안함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게 될 것이고, 즐겁게 머뭅니다.   

 

431. 뽓타빠다여, 나는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닦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깨끗한) 마련인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러나,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괴롭게 머문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염의 법들을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입니다. 환희와 희열과 편안함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게 될 것이고, 즐겁게 머뭅니다.   

 

432. 뽓타빠다여, 만일 남들이 우리들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자아의 획득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자아의 획득입니다.'라고.

 

433. 뽓타빠다여, 만일 남들이 우리들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묻는 그들에게는 우리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된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입니다.'라고.

   

434. 뽓타빠다여, 만일 남들이 우리들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된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물질이 아닌 아의 획득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묻는 그들에게는 우리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된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입니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이런 경우는 사실에 입각하여 말해진 것이 아닙니까?” 

“세존이시여, 참으로 이런 경우는 사실에 입각하여 말해진 것입니다.”

 

435. "예를 들면, 뽓타빠다여, 어떤 사람이 누각에 오르기 위하서 그 누각 밑에서 사다리를 만들 것입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보시오람아, 오르기 위해서 그대가 사다리를 만들고 있는 그 누각에 대해 동쪽 방향에 있는지, 남쪽 방향에 있는지, 서쪽 방향에 있는지, 북쪽 방향에 있는지, 높은지, 낮은지, 중간인지 그대는 압니까?'라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오르기 위해서 그 누각의 밑에서 내가 사다리를 만들고 있는 그 누각입니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이런 경우는 사실에 입각하여 말해진 것이 아닙니까?”
“세존이시여, 참으로 이런 경우는 사실에 입각하여 말해진 것입니다.”

 

436. "그와 같이, 뽓타빠다여, 만일 남들이 우리들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자아의 획득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자아의 획득입니다.'라고.

뽓타빠다여, 만일 남들이 우리들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묻는 그들에게는 우리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된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입니다.'라고.    

뽓타빠다여, 만일 남들이 우리들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된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물질이 아닌 아의 획득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묻는 그들에게는 우리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된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하기 마련인 법들은 증장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해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입니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이런 경우는 사실에 입각하여 말해진 것이 아닙니까?”
“세존이시여, 참으로 이런 경우는 사실에 입각하여 말해진 것입니다.” 

 

437. 이렇게 말씀하시자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거친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은 의미가 없고(거짓된, 허망한),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거친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됩니다.  

세존이시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은 의미가 없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됩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은 의미가 없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됩니다."   

 

"찟따여, 거친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이름)도 얻지 않고,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찟따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찟따여,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명칭(이름)'으로 옮긴 원어는 sankha인데 주석서에서는 '언어(nirutti), 이름(nama), 인습적 표현(vohara)이라는 동의어를 나열한다.(DA.ii.382)

 

438. 찟따여, 만약 그대에게 '그대는 과거에 존재했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대는 지금 존재하고 있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이렇게 질문한다면, 찟따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그대는 과거에 존재했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대는 지금 존재하고 있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이렇게 질문하신다면, 세존이시여,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저는 과거에 존재했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존재하고 있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찟따여, 만일 그대에게 '자아의 획득이 있었던 과거의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미래는 의미가 없고 현재도 의미가 없습니까? 자아의 획득이 있을 미래의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과거는 의미가 없고 현재도 의미가 없습니까? 자아의 획득이 있는 지금 현재의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과거는 의미가 없고 미래도 의미가 없습니까?'라고 이렇게 질문한다면, 찟따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저에게 '자아의 획득이 있었던 과거의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미래는 의미가 없고 현재도 의미가 없습니까? 자아의 획득이 있을 미래의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과거는 의미가 없고 현재도 의미가 없습니까? 자아의 획득이 있는 지금 현재의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과거는 의미가 없고 미래도 의미가 없습니까?'라고 질문하신다면, 세존이시여,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자아의 획득이 있었던 과거의 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미래는 의미가 없고 현재도 의미가 없습니다. 자아의 획득이 있을 미래의 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과거는 의미가 없고 현재도 의미가 없습니다. 자아의 획득이 있는 현재의 저에게 그 자아의 획득은 진실되고 과거는 의미가 없고 미래도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439."그와 같이, 찟다여, 거친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이름)도 얻지 않고,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찟따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찟따여,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440. "예를 들면, 찟따여,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가 됩니다. 우유가 있을 때에는 응유(응고된 우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생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우유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응유가 되었을 때는 ··· 생버터가 되었을 때는 ··· 정제된 버터가 되었을 때는 ··· 최상의 버터가 되었을 때는 우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응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생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와 같이, 찟따여, 거친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이름)도 얻지 않고,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찟따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찟따여,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이것들이, 찟따여, 세상의 명칭이고, 세상의 언어이고,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입니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441. 이렇게 말씀하시자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법)을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목숨이 있는 날까지 귀의한 청신사로 받아 주십시오." 

 

442. 그러자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법)을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비구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찟따는 자아와 세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심이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느 해탈.열반의 성취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여덟 번째로 출가를 하게 된다.

  

443.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고 홀로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위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뽓타빠다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