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디가 니까야

대인연경(大因緣經. Mahanidana sutta. D15)

실론섬 2014. 4. 11. 00:00

대인연경(大因緣經. Mahanidana sutta. D15)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꾸루에서 깜마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꾸루(Kuru)는 인도 16국 중의 하나였다.주석서에서는 이 지역에 살던 왕자의 이름을 따서 꾸루라고 불렀다고 하며(DA.ii.481) 지금의 델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깜마사담마(kammasadhamma) 꾸루의 한 마을이다. 본경과 대념처경(D22) 맛지마니까야의 아넨자 사빠야 경(M106)등의 경전들이 여기서 설해졌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랐습니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최고로 심오하고 이 연기(緣起)는 심오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이 연기는 심오하고 심오하게 드러난다. 아난다여, 이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꿰뚫고 통찰함)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혀있고, 실타래처럼 헝크러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고통스러운  곳, 불행한 곳, 험난한 곳,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2.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노사.老死)이 있습니까?' 라는 이런 질문이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태어남(생.生)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生)이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이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존재(유.有)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이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집착(취.取)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이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갈애(애.愛)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느낌(수.受)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감각접촉(촉.觸)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이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정신·물질(명색.名色)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정신·물질이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이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정신·물질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의식(의.識)의 조건으로부터 정신·물질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습니까?'라고 이런 질문이 있으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해진다면 '정신·물질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3. "아난다여, 이와 같이 정신.물질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다. 의식의 조건으로부터 정신.물질이 있다. 정신.물질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다.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다.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다.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이 있다. 이와 같이 이 모든 괴로움 덩어리의 일어남이 있다. 

 

4.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태어남의 조건으로부터 늙음·죽음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신들이 신으로, 간답바들이 간답바로, 약카들이 약카로, 존재들이 존재로, 사람들이 사람으로, 네발 달린 것들이 네발 달린 것으로, 새들이 새로, 파충류들이 파충류로 등과 같은 태어남이 없다면, 그때 이런저런 중생들에게 그것을 위한 태어남은 없을 것이다. 모두로부터 태어남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태어남의 소멸로부터 늙음.죽음을 선언할 수 있는가(이처럼 태어남이 소멸해버려 태어남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늙음.죽음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늙음.죽음에게 오직 태어남이 원인이고, 태어남이 인연이고, 태어남이 일어남이고, 태어남이 조건이다. 

 

5.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태어남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욕계의 존재, 색계의 존재, 무색계의 존재등과 같은 존재가 없다면, 모두로부터 존재가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존재의 소멸로부터 태어남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태어남에게 오직 존재가 원인이고, 존재가 인연이고, 존재가 일어남이고, 존재가 조건이다."

 

6.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등과 같은 집착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집착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집착의 소멸로부터 존재를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존재에게 오직 집착이 원인이고, 집착이 인연이고, 집착이 일어남이고, 집착이 조건이다."

 

7.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형상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법(마음현상)에 대한 갈애등과 같은 갈애가 없다면, 모두로부터 갈애가 없을 때, 그렇다 해도 갈애의 소멸로부터 집착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집착에게 오직 갈애가 원인이고, 갈애가 인연이고, 갈애가 일어남이고, 갈애가 조건이다."

 

8.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느낌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형상에 닿아서 생긴 느낌, 소리에 닿아서 생긴 느낌, 냄새에 닿아서 생긴 느낌, 맛에 닿아서 생긴 느낌, 감촉에 닿아서 생긴 느낌, 법에 닿아서 생긴 느낌등과 같은 느낌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느낌의 소멸로부터 갈애를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갈애에게 오직 느낌이 원인이고, 느낌이 인연이고, 느낌이 일어남이고, 느낌이 조건이다."

 

9. "아난다여, 이렇게 느낌의 조건으로부터 갈애가 있다.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구함(추구)이 있다. 구함의 조건으로부터  얻음이 있다. 얻음의 조건으로부터  분별(판별)이 있다. 분별의 조건으로부터  욕탐(欲貪)이 있다. 욕탐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간직함(거머쥠)이 있다. 간직함의 조건으로부터  인색이 있다. 인색의 조건으로부터 지킴이 있다. 지킴의 조건으로부터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들고, 싸우고, 분쟁하고, 서로서로 이간하고, 거짓말하는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불선법.不善法)들이 생겨난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9가지는 실제로 현실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애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윤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갈애가 어떻게 현실속에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것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samudacara-tanha)라고 표현하고 있다.(Ibid)

 

10. "'지킴(수호.보호)의 조건으로부터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들고, 싸우고, 분쟁하고, 서로서로 이간하고, 거짓말하는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불선법.不善法)들이 생겨난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지킴의 조건으로부터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들고, 싸우고, 분쟁하고, 서로서로 이간하고, 거짓말하는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겨난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지킴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지킴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지킴의 소멸로부터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들고, 싸우고, 다투고, 분쟁하고, 서로서로 이간하고, 거짓말하는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겨남‘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들고, 싸우고, 다투고, 분쟁하고, 서로서로 이간하고, 거짓말하는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겨남'에게 오직 지킴이 원인이고, 지킴이 인연이고, 지킴이 일어남이고, 지킴이 조건이다."

 

11. "'인색의 조건으로부터 지킴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인색의 조건으로부터 지킴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인색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인색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인색의 소멸로부터 지킴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지킴에게 오직 인색이 원인이고, 인색이 인연이고, 인색이 일어남이고,  인색이 조건이다."

 

12. "'간직함의 조건으로부터 인색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간직함의 조건으로부터 인색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간직함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간직함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간직함의 소멸로부터 인색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인색에게 오직 간직함이 원인이고, 간직함이 인연이고, 간직함이 일어남이고, 간직함이 조건이다."

 

13.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간직함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집착의 조건으로부터  간직함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집착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집착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집착의 소멸로부터 간직함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간직함에게 오직 집착이 원인이고, 집착이 인연이고, 집착이 일어남이고, 집착이 조건이다."

 

14. "‘욕탐(欲貪)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욕탐의 조건으로부터 집착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욕탐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욕탐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욕탐의 소멸로부터 집착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집착에게 오직 욕탐이 원인이고, 욕탐이 인연이고, 욕탐이 일어남이고, 욕탐이 조건이다. 

 

15. "‘분별의 조건으로부터 욕탐(欲貪)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분별의조건으로부터 욕탐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분별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분별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분별의 소멸부터 욕탐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욕탐에게 오직 분별이 원인이고, 분별이 인연이고, 분별이 일어남이고, 분별이 조건이다. 

 

16. "‘얻음의 조건으로부터분별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얻음의 조건으로부터 분별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얻음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얻음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얻음의 소멸로부터 분별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분별에게 오직 얻음이 원인이고, 얻음이 인연이고, 얻음이 일어남이고, 얻음이 조건이다. 

 

17. "‘구함의 조건으로부터 얻음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구함의 조건으로부터 얻음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구함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구함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구함의 소멸로부터 얻음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얻음에게 오직 구함이 원인이고, 구함이 인연이고, 구함이 일어남이고, 구함이 조건이다. 

 

18.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구함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갈애의 조건으로부터 구함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욕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유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무유애.無有愛) 등과 같은 갈애가 없다면, 모두로부터 갈애가 없을 때, 그렇다 해도 갈애의 소멸로부터 구함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구함에게 오직 갈애가 원인이고, 갈애가 인연이고, 갈애가 일어남이고, 갈애가 조건이다.

아난다여, 이렇게 이 두 개의 법들은 이처럼 두 가지 부분으로 느낌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한 쌍의 수(受)에 의한 하나의 합류점이 된다.

 

*여기서 두 가지 법들이란 윤회의 뿌리가 되는 갈애(vattamula-tanha)와 바로 위 주해에서 설명한 벌어지고 있는 갈애(samudacara-tanha)를 뜻한다.(DA.ii.500)
*'이것은 집착의 원인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이다.'라고 설한 '윤회의 뿌리가 되는 갈애'와 '갈애를 연하여 구함이 있다'라고 설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갈애'라는 이 두가지는 갈애라는 특징으로 하나의 성질을 가졌으며 느낌이라는 하나의 귀결점을 가지게 되니 느낌이라는 공통된 조건의 하나의 조건을 가진다는 뜻이다.(Ibid)

윤회의 뿌리가 되는 갈애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갈애, 둘 모두 여섯 감각장소에서 기인한 느낌을 조건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갈애는 느낌이라는 하나의 조건을 가진다.

 

19. "‘감각접촉(觸)의 조건으로부터 느낌(受)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감각접촉의 조건으로부터 느낌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모두에게 형상에 대한 감각접촉, 소리에 대한 감각접촉, 냄새에 대한 감각접촉, 맛에 대한 감각접촉, 감촉에 대한 감각접촉, 법에 대한 감각접촉 등과 같은 감각접촉이 없다면, 모두로부터 감각접촉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감각접촉의 소멸로부터 느낌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느낌에게 오직 감각접촉이 원인이고, 감각접촉이 인연이고, 감각접촉이 일어남이고, 감각접촉이 조건이다.

 

20."‘정신.물질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물질의 조건으로부터 감각접촉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정신(名)의 무리의 개념을 있게 하는 상태(성질), 특징, 표상(相), 개요가 없을 때, 그렇다 해도 물질(色)의 무리에 대해 이름을 초래하는 감각접촉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물질(色)의 무리의 개념을 있게 하는 상태(성질), 특징, 표상(相), 개요가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정신(名)의 무리에 대해 부딛힘으로 초래하는 감각접촉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정신(名)의 무리와 물질(色)의 무리의 개념을 있게 하는 상태(성질), 특징, 표상(相), 개요가 없을 때, 그렇다 해도 이름을 초래하는 감각접촉이나 부딛힘을 초래하는 감각접촉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정신.물질의 개념을 있게 하는 상태(성질), 특징, 표상(相), 개요가 없을 때, 그렇다 해도 감각접촉을 선언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감각접촉에게 오직 정신.물질이 원인이고, 정신.물질이 인연이고, 정신.물질이 일어남이고, 정신.물질이 조건이다.

 

21. “‘의식(識)의 조건으로부터 정신.물질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의식의 조건으로부터 장신.물질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의식이 모태(母胎)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정신.물질이 모태에서 공고해지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의식이 모태에 들어온 뒤에 잘못되었는데도 정신.물질이 (오온을 구족한) 그런 상태를 생기게 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의식이 어린 남녀 아이일 때 잘못되었는데도 정신.물질이 증장하고 향상하고 충만하게 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정신.물질에게 오직 의식이 원인이고, 의식이 인연이고, 의식이 일어남이고, 의식이 조건이다.”

 

22. “‘정신.물질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물질의 조건으로부터 의식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알려져야 한다. 아난다여, 의식이 정신.물질에 머묾을 얻지 못했는데도 미래에 태어남과 늙음.죽음이라는 괴로움(고.苦)의 자라남의 생겨남을 선언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오직 정신.물질이 의식의 원인이고, 정신.물질이 의식의 인연이고, 정신.물질이 의식의 일어남이고, 정신.물질이 의식의 조건이다.

아난다여, (정신.물질이 의식(識)의 원인이고 ~ 조건인) 그 범위에서 태어나거나, 늙거나, 죽거나, 윤회하거나,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 범위에서 이름이 적용되고, 그 범위에서 언어가 적용되고, 그 범위에서 개념이 적용되고, 그 범위가 지혜의 영역이고, 그 범위에서 금생(今生)의 선언을 위한 윤회가 있다. 즉 의식과 함께 정신.물질의 서로 조건 됨이 존재 안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23. "자아(我)를 선언하는 자는, 아난다여, 어디까지 선언하는가?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유한하다’라고 선언한다.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라고 선언한다.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라고 선언한다.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라고 선언한다.

 

24.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여기(금생)에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에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다여, 그는 ‘자아는 물질을 가지고 있는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여기(금생(今生)에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에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다여, 그는 ‘자아는 물질을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여기(금생.今生)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다여, 그는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여기(금생.今生)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다여, 그는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아를 선언하는 자는, 아난다여, 여기까지 선언한다."

 

25.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아난다여, 어디까지 선언하지 않는가?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유한하다.'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26.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여기(금생.今生)에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에서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다여, 그는 '자아는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여기(금생.今生)에서 물질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에서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다여, 그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여기(금생.今生)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다여, 그는 '자아는 물질을 지니지 않은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는 자는 여기(금생.今生)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선언하지 않거나,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내생(來生)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가 될 것을 선언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아는 물질을 지니지 않은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자아를 선어하지 않는 자는, 아난다여, 여기까지 선언하지 않는다."

 

27. "아난다여, 자아를 관찰하는 자들은 어떻게 관찰하는가? 

아난다여, 느낌에서 자아를 관찰하는 자는 '느낌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한다(자아로 간주한다). '나의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자아를 관찰하는 자는 이렇게 관찰한다.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된다(느낀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아난다여, 자아를 관찰하는 자는 이렇게 관찰한다. 

 

28. "거기서, 아난다여, '느낌은 나의 자아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들, 괴로운 느낌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입니다. 그대는 이 세 가지 느낌들 가운데어떤 것을 자아로부터 관찰합니까?'라고.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때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경험한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때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을 경험한다.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때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경험한다(느낀다)." 

 

29. "즐거운 느낌도, 아난다여,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유위.(有爲)이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고(연기(緣起)된 것이고) 다해 없어지는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탐냄을 떠난 법이고 소멸의 법이다. 괴로운 느낌도, 아난다여,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고 다해 없어지는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탐냄을 떠난 법이고 소멸의 법이다. 괴롭지도 즐겁지 않은 느낌도, 아난다여,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고 다해 없어지는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탐냄을 떠난 법이고 소멸의 법이다.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그에게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즐거운 느낌의 소멸로부터 '나의 자아는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그에게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괴로운 느낌의 소멸로부터 '나의 자아는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그에게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소멸로부터 '나의 자아는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느낌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지금여기에서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여있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에서 자아를 관찰하는 자로서 관찰한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느낌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옳지 않다." 

 

30. "거기서, 아난다여, '나의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러면 도반이여, 경험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이것이 나다(내가 있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아닙니다. 존자시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옳지 않다." 

 

31. "거기서 아난다여,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된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런데 도반이여, 만약 모든 종류의 느낌이 모든 것에 의해서 모두 것에게 모든 방법으로 모든 것에게 남김없이 소멸한다면, 느낌이 완전하게 없을 때 느낌의 소멸로부터 거기에서 '이것이 나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아닙니다. 존자시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경험된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옳지 않다.

 

32. "아난다여, 비구가 '느낌을 자아이다.'라고 관찰하지 않고, 경험되지 않는 자아를 관찰하지 않고, '나의 자아는 경험된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도 관찰하지 않을 때, 이렇게 관찰하지 않는 그는 세상에서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을 때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은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다.  

아난다여, 이렇게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에 대해 어떤 사람이 '그는 여래는 사후에 있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있지 않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사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름까지, 이름의 범위까지, 언어까지, 언어의 범위까지, 개념까지, 개념의 범위까지, 지혜까지, 지혜의 영역까지, 윤회의 범위까지, 그것들에 대해 비구는 완전한 지혜에 의해서 해탈했다. 그것들에 대해 완전한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비구에게 '그 비구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라는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33. "아난다여, 일곱 가지 의식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가 있다. 어떤 일곱가지인?

아난다여, 여러 몸과 각기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아난다여, 몸은 여럿이되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다.

예를 들면 초선을 닦아서 죽은 뒤 범신천에 태어난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아난다여, 몸은 동일하되 각기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아난다여, 동일한 몸과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아난다여,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부딛힘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아난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아난다여,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아난다여, 그리고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가 있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가 두 번째이다."

 

34. "거기서 아난다여, 여러 몸과 각기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첫 번째 의식의  거주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몸은 여럿이되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이 세상에서 초선을 닦아서 죽은 뒤 태어난 범중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번째 의식의 거주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몸은 동일하되 각기 다른 지가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 번째 의식의 거주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동일한 몸과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네 번째 의식의 거주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섯번째 의식의 거주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섯 번째 의식의 거주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의식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 번째 의식의 거주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를 철저히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맛을 철저히 알고 그것의 잘못됨을 철저히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비구는 일곱 가지 의식의 거주처(識處)와 두 가지 장소(處)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서 해탈했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지혜로써 해탈한 자(慧解脫者).혜해탈자)라고 불린다."

 

35. "아난다여, 이런 여덟 가지 해탈이 있다. 무엇이 여덟인가?

여기 비구는 빛깔(의 영상)을 지니고서 빛깔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여기 비구는 안으로 빛까에 대한 지각을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 밖으로 빛깔을 본다.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여기 비구는 깨끗하다(淨)고 확신한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여기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라고 하면서 식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여기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여기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여덟 가지 해탈이다."

 

36. "아난다여, 비구가 이런 여덟 가지 해탈을 순서대로도 증득하고, 역순으로도 증득하고, 순서대로와 역순으로도 증득한다. 그리고 그는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증득하기도 하고 출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 ]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라고 불린다. 

아난다여, 이 양면해탈과는 다른 더 높고 더 수승한 양면해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아난다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찬탄하였다. 

 

 

대인연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