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모음 - ㄱ
◎ 가띠까라(Ghaṭikāra) <초전법륜경> 제1장 86쪽
가띠까라(Ghaṭikāra)는 대범천(Mahā-brahmā)들 가운데 하나이다. 까사빠(Kasapa) 부처님 시대에 웨하링가(Vehaliṅga)에서 옹기를 구워 팔던 사람이었다. 늙고 앞 못 보는 부모님을 봉양하느라 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이미 아나함이 되어 있었으며,(DhA.i.380) 고결한 행실과 장한 믿음으로 까싸빠 부처님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또한 아나함이라는 자신의 성위가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다고 한다.(AA.i.44)
어느 날 까싸빠 부처님께서 그의 집에 탁발을 가셨으나 마침 그는 출타 중이었다. 아들이 어디 갔는지를 묻는 부처님께 일이 있어 나갔음을 알리고 그 부모님들은 그릇 속에 있는 음식들을 얼마든지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밖에서 돌아와 부모님들로부터 그날 일어난 일을 듣고 난 가띠까라는 부처님께서 자기가 있었다면 당연히 보시했을 것이라고 믿으실 정도로 자신을 신뢰하고 계신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의 기쁨과 행복감은 보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의 부모님들의 기쁨과 행복감 또한 이레 동안이나 줄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까사빠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사원의 지붕이 새기 시작했다. 새기 시작하는 지붕에 덮을 짚을 구하려고 까싸빠 부처님이 몇몇 비구들을 가띠까라에게 보냈는데 그날도 그는 집에 있지 않았다. 비구들은 빈손으로 돌아와 지붕에 얹은 짚단 밖에는 덮을 것이 없었다고 말씀드리자 부처님은 그것이라도 가져오라고 이르셨다. 지붕을 벗겨내는 비구들에게 가띠까라의 노부모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정을 알고 난 그 부모는 “모두 가져가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가띠까라는 부처님께서 그토록 자신을 신뢰하고 계신 것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의 마음속에 일어난 그 기쁨과 행복감은 보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부모님들의 기쁨과 행복 또한 이레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석 달 동안이나 가띠까라의 집은 지붕도 없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빗물이 그 집을 적시지 않았다고 한다. 가띠까라의 장한 신심과 너그러움은 이와 같았다.
「날라빠나 자따까(Nalapāna Jātaka)」에 따르면 그의 집이 있던 곳은 지금의 겁이 지속하는 동안은 절대로 비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J.i.172)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수행하면서 일절 돈을 주거나 받지 않고 자신이 만든 옹기를 다른 사람의 물건과 맞바꾸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고따마 부처님은 그때 젊은 바라문 죠띠빨라(Jotipāla)였는데 가띠까라와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죠띠빨라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자만심으로 까사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가띠까라는 그러한 죠띠빨라를 억지로 까사빠 부처님에게 데리고 가서 설법을 듣도록 했다. 그렇게 까사빠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된 죠띠빨라는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가띠까라는 죽은 뒤 무번천(無煩天, Avihā)에서 아나함과를 얻은 대범천으로 재생하였다. 그리고 싯닷타 태자가 출가할 때 아노마 강으로 내려와 황색가사를 비롯한 여덟 가지 필수품을 제공하였고,(J.i.65; SnA.ii.382; BuA.236; VvA.314) 그 뒤에도 고따마 부처님을 친견하러 여러 차례 지상에 내려온다.(Sn.i.60, M.ii,45)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맛지마 니까야, 「가띠까라경(Ghaṭikāra-sutta)」(M81)에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능(根.근.indriya)
근(根)에 해당하는 말인 'indriya'는 원래 '인드라(神.indra)'를 뜻하는 말이며, 기본적인 의미 또한 '인드라 신이 지닌 힘'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즉 '절대적인 힘'의 의미로서, 단순한 '감각기관'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indriya'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유래하여, '통제원리'. '지각능력'. '기능'등의 의미로 확장된 개념인데,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부류의 중심적인 쓰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눈의 근(眼根.안근. cakkhundriya)' 이라 할 때의 여섯가지 '감각능력'을 가리키는 경우와, '믿음의 근(信根.신근. saddhindriya)' 등이라 할 때의 다섯가지 '수행의 기능'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경우에 사용되는 indriya 는 동일한 내용성을 지닌 까닭에 달리 구분해서 풀어 번역할 근거가 없으며, 그러한 만큼 포괄적이라 하겠다.
◎ 간답바(gandhabbha)
간답바(gandhabbha)는 중국에서 건달바(乾達婆)로 음역되었고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노는 자를 뜻하는 건달이라는 우리말도 여기서 나왔다. 일반적으로 빨리 삼장에서 간답바는 세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1)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mahārājika)에 있는 신들이다. 이들은 가장 하위계급의 천인들로 천상의 음악가이다. 이들은 사대왕천의 동쪽에 거주하며 대국천왕(待國天王, Dhataraṭṭha)의 통치를 받는다. 본문에 나오는 간답바는 바로 이 천상의 음악신을 가리킨다.
(2) 향기(gandha)나는 곳에 사는 신을 뜻한다. 상윳따 니까야(S.iii.250f)에 따르면 간답바의 신은 나무의 뿌리나 껍질이나 수액이나 꽃의 향기에 거주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 잉태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 즉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다. 주석서와 복주서에서는 문법적으로 이 간답바를 간땁바(gantabba)로 설명한다.
여기서 간답바는 동사 어근 √gam(가다)의 미래수동분사(Grd)이다. 그래서 그 의미는 ‘가야만 하는 (것, 자)’가 된다. 중생들은 업에 의해서 죽은 다음에 반드시 재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자)’ 즉 ‘잉태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 간답바를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라고 설명한다.
◎ 간탐(慳貪, mātsarya-mala)
간탐(慳貪, mātsarya-mala)이란 재물과 법에 인색하여 사람에게 주지 않으며탐욕스럽게 구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는 것.
◎ 갈마승(羯磨僧, karma-samgha, kamma-sangha)
갈마승(羯磨僧, karma-samgha, kamma-sangha)이란 네 명 이상의 구족계를 받은 비구가 같은 결계(結界, sīmā-bandha) 안에 머물면서 갈마작법을 행할 때 이것을 갈마승이라고 한다. “출가한 사람 중에서 구족계를 받은 네 명 이상의 비구가 범부와 성인을 가릴 것 없이 같은 구역 안에 살면서 백일갈마(百一羯磨)의 작법을 함께 준수하여 어기지 않으면 이들을 갈마승이라고 한다.”고 하였다.『대승의장(大乘義章)』 7권(大44 p.608c9-11) “出家之中, 具足比丘, 四人已上, 不簡凡聖, 在一界內, 於彼百一羯磨之法, 同遵不乖, 名羯磨僧.”
◎ 갈애
‘갈애(渴愛)’라 번역한 딴하(taṇhā)는 √tṛṣ(목마르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PED에서 ‘lit. drought, thirst; figuratively, craving, hunger for, excitement, the fever of unsatisfied longing.’이라 설명되듯이, 문자적으로 타는 목마름이나 갈증을 뜻하며 비유적으로 쓰여서 ‘자극에 대한 갈망과 갈애, 채우지 못한 열망의 열병을 뜻한다. 즉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을 때 의 강렬한 욕구와 유사하게 감각대상들을 애타게 구하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하며, 끊임없는 재생을 일으키는 마음의 상태이다.
12연기에서는 여섯 감각기능(六根, indriya)들이 외부의 감각대상(六境, visaya)들과 맞부딪쳐 감각접촉(phassa)이 일어나고, 이러한 감각접촉에서 느낌(vedanā)이 일어나고 이러한 느낌에서 이 갈애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갈애는 다시 집착(upādāna)을 불러일으킨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처음으로 선포하실 때(S.v.420 ff; Vin.i.10) 괴로움의 근원인 갈애는 성스러운 도로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출세간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 마치 육체적인 갈증이 일어날 때 이 갈증을 채워주고, 없애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듯이, 정신적인 갈애도 완전히 뿌리 뽑고, 없애지 않으면 열반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러한 갈에는 중생을 윤회(saṃsāra)의 사슬에 묶어놓아 계속해서 나고 죽는 과정을 반복하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은 아라한과 즉 열반을 얻어 갈애가 종식될 때 까지 반복된다.
갈애는 일어나는 형태에 따라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 ②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vibha-taṇhā), ③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의 셋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눈, 귀 등의 일어나는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18가지가 되고 안팎의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18가지가 되고 안팎의 각각으로 36가지가 되고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모두 108가지가 된다. 연기의 구성요소들 가운데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갈애이다. 그래서 사성제(四聖諦)에서도 고의 원인을 밝히는 집성제(集聖諦)에서 갈애를 괴로움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주석서에서는 세 가지 갈애(taṇhā)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란 다섯 가지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이 함께 하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선정(jhāna)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다.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는 것은 단견이 함께 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DA.iii.800).
◎ 갈애를 부숨
15. 맛지마 니까야, 「애진소경(愛盡小經, Culataṇhāsankhaya-sutta)」(M37)의 관련 경문은 다음과 같다."간략하게 말해서 어떻게 하면 비구는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출세간의 삶(brahma-cariya)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천인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되는가? 천인의 왕, 제석이여, 이 세상에서 비구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배운다. 만약 비구가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배운다면, 그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서,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안다.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나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한다. 그는 이러한 느낌들에 대해서 무상함을 알아차리며, 사라짐을 알아차리며, 소멸을 알아차리며, 버림을 알아차리면서 세상에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반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출세간의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태어나는 일이 없다.' 라고 분명히 안다. 천인의 왕, 제석이여, 간략하게 말해서 이렇게 하면 비구는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출세간의 삶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천인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된다.”(M37).
◎ 감각장소
‘감각장소’로 옮긴 아야따나(āyatana)는 ā(이리로)+√yat/yam(뻗다, 움직이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중국에서 ‘이쪽으로 온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하여 입(入)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장소란 의미로 쓰이므로 처(處)라고 옮기기도 하였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sense-base로 옮기고 있다. 보통 12연기에서는 육입(六入)으로, 12처와 공무변처(空無邊處)등의 4처는 처(處)로 옮기고 있다. 본서에서는 감각작용과 관계된 육입이나 12처를 감각장소로 옮겼다. 이 12가지 감각장소[十二處]는 ① 눈의 감각장소(眼處, cakkhāyatana), ② 귀의 감각장소(耳處, sotāyatana), ③ 코의 감각장소(鼻處, gahanāyatana), ④ 혀의 감각장소(舌處, jivbhāyatana), ⑤ 몸의 감각장소(身處, kāyāyatana), ⑥ 마음의 감각장소(意處, manāyatana), ⑦ 형상의 감각장소(色處, rūpāyatana), ⑧ 소리의 감각장소(聲處, saddhāyatana), ⑨ 냄새의 감각장소(香處, gandhāyatana), ⑩ 맛의 감각장소(味處, rasāyatana), ⑪ 감촉의 감각장소(觸處, phoṭṭhabbāyatana), ⑫ 법의 감각장소(法處, dhammāyatana)이다. 앞의 ①에서 ⑥까지를 안의 감각장소[內處]라 하고 ⑦부터 ⑫까지를 밖의 감각장소[外處]라고 하여 여섯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入], 또는 12가지 감각장소[十二處]라고 한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12가지 감각장소[十二處] 안의 감각장소(內處, ajjhattikāyatana) 밖의 감각장소(外處, bāhirāyatana)
①눈의 감각장소(眼處, cakkhāyatana)
②귀의 감각장소(耳處, sotāyatana)
③코의 감각장소(鼻處, gahanāyatana)
④혀의 감각장소(舌處, jivbhāyatana)
⑤몸의 감각장소(身處, kāyāyatana)
⑥마음의 감각장소(意處, manāyatana)
⑦형상의 감각장소(色處, rūpāyatana)
⑧소리의 감각장소(聲處, saddhāyatana)
⑨냄새의 감각장소(香處, gandhāyatana)
⑩맛의 감각장소(味處, rasāyatana)
⑪감촉의 감각장소(觸處, phoṭṭhabbāyatana)
⑫법의 감각장소(法處, dhammāyatana)
중생은 매순간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각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곳을 감각장소(處, āyatana)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이는 기능이 있고 귀에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감각기능(根, indriya)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 cakku-dvāra)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 cakkhāyatana)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 cakkhu-indriya)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 감각의 육문(六門)
‘감각의 육문(六門)’에서 문(門, dvāra)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6가지 감각기관(根, indriya)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식(識, viññaṇa)이 대상을 인지하는 통로 혹은 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眼識, cakkhu-viññaṇa)은 눈(cakkhu)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고, 신식(身識, kāya-viññaṇa)은 몸(kāya)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한다. 같은 방법으로 의식(意識, mano-viññaṇa)은 마음(意, mano)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는데 이때 의문(意門, mano-dvāra)은 구체적으로 바왕가(bhavaṅga)이다. 이처럼 마음, 즉 의문(意門)은 정신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의문(意門)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법이라 불리는 대상은 감성 물질, 미세한 물질, 과거의 마음, 52가지 마음의 작용, 열반, 개념 등이다. 그리고 이 여섯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때 이 여섯을 아야따나(āyatana)라고 하며 중국에서 육처(六處)나 육입(六入)이라고 번역했다. 각각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는 그것을 인드리야(indriya)라고 부르며 중국에서 육근(六根)이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말한다. 그리고 마음(意, mano)은 정신적 대상을 아는 감각기능(根, indriya) 또는 감각장소(處, āyatana)이다. 눈(眼, cakku)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이나 색깔(色, rūpa)이라는 대상에 대한 안식(眼識, cakku-viññaṇa)이 일어나고 귀(耳, sota)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聲, saddha)라는 대상에 대해 이식(耳識, sota-viññaṇa)이 일어나듯이 마음(意, mano)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意識, mano-viññaṇa)이 일어난다. 이처럼 마음은 정신적인 대상을 아는 감각장소 또는 기능이다. 즉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음은 정신적인 감각장소다. 그리고 감각대상이란 식(識)이 일어날 때 의지하는 물질의 토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은 눈이라는 감성 물질을 토대로 하고 이식은 귀를, 비식은 코를, 설식은 혀를, 신식은 몸이라는 감성 물질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의식은 모두 심장의 물질(hadaya-rūpa)을 토대로 한다. 여기서 요점을 간추리면 전오식(前五識)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은 모두 문과 토대가 같다. 즉 안식은 눈이라는 물질을 그 문으로 하고 눈이라는 감성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모든 의식에는 반드시 마음(意, māno)이라는 문이 있다. 즉 모든 의식은 반드시 심장의 물질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의식은 그 문이 다르다. 그러므로 눈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눈을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을 토대로 한다. 귀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귀를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의 물질을 토대로 한다. 의문(意門)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모든 의식(意識)은 마음을 문으로 하고 심장을 토대로 한다.
◎ 감각접촉
‘감각접촉’이라 번역한 팟사(phassa)는 phusati(닿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PED에서 ‘contact, touch (as sense or sense-impression, for which usually phoṭṭhabba.). It is the fundamental fact in a senseimpression, and consists of a combination of the sense, the object, and perception.’이라고 설명되듯이, 감각기능(根, indriya)과 대상(境, visaya), 식(識, viññaṇa)의 세 가지가 어우러진 감각적인 인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팟사는 물리적 접촉이 아니고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중의 하나이고,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에 속한다. 또한 감각접촉의 음식(觸食, phassa-āharā)이라 하여 모든 중생의 생존에 필수적인 네 가지 음식(āhāra)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촉(觸)이라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contact, 또는 그 의미를 좀 더 살려 정확성을 기하고자 할 때에는 sense impression이나 mental impression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 감각접촉(파싸, phassa)
‘감각접촉’이라 번역한 파싸(phassa)는 대상이 몸에 물질적으로 부딪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의 육문(六門)을 통해서 나타난 대상을 정신적으로 ‘만지는 것’을 뜻하고 그로 인해 모든 인식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의도’로 번역한 쩨따나(cetanā)는 아비담마에서 고무하고 격려하고 자극하는 마음의 성질을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어 있다. 그리고 ‘주의 기울임’이라 번역한 마나시까라(manasikāra)는 대상에 마음을 향하게 하거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감각접촉(phassa), 느낌(vedanā), 인식(saññā), 의도(cetanā), 집중(ekaggatā), 생명기능(jīvitindriya), 주의 기울임(manasikāra)의 7가지는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임을 명심하면 좋다.
◎ 감성(感性)
‘감성(感性)’으로 번역한 빠사다(pasāda)는 pra(앞으로)+√sad(앉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써 경에서는 깨끗한 믿음을 뜻하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이 깨끗함의 의미를 여섯 감각기관에서의 맨 느낌을 나타내는 전문술어로 쓰인다. 그래서 빠사다는 각각의 감각기관에 위치하여 대상을 감지하는 특정한 기능을 가진 물질이다. 이를 감성의 물질(pasāda-rūpa)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눈의 감성(cakkhu-pasāda)은 형상이나 색깔을 감지하는 기능을 가진 물질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을 지탱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감각기관(根, indriya)이다. 5가지 감성은 다음과 같다.
(1) 눈의 감성(cakkhu-pasāda)
(2) 귀의 감성(sota-pasāda)
(3) 코의 감성(ghāna-pasāda)
(4) 혀의 감성(jivhā-pasāda)
(5) 몸의 감성(kāya-pasāda)
◎ 감촉
‘감촉(觸)’으로 옮긴 뽀따바(phoṭṭhabba)는 몸의 기능(身根, kāyindriya)의 상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는 감촉을 지地, 화火, 풍風 셋 중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지대地大는 딱딱함이라 설명되는데 이것은 딱딱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인식되며 화대火大는 덥거나 차가움으로 느껴진다. 풍대風大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 한편 수대水大는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은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의문(意門, mano-dvārā)으로만 느낄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touch, bodily impression, tactile impress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각접촉’으로 번역되는 팟사(phassa)는 ‘닿음’을 뜻한다. 12연기 중 하나의 각지로 알려진 술어이다. 여기서 닿음이란 대상이 몸에 물질적으로 부딪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것을 통해서 나타난 대상을 정신적으로 ‘만지는’것을 뜻하며 그로 인해 모든 인식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감각접촉은 경에서도 기능(根, indriya), 대상(境, visaya), 식(識, viññaṇa)의 세 가지가 맞부딪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마음을 대상과 맞부딪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도 이 phassa의 의미를 좀 더 살려 정확성을 기하고자 할 때에는 sense contact 외에도 sense impression 이나 mental impression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감촉(phoṭṭhabba)은 물질(rūpa)에 속하고 감각접촉(phassa)은 마음의 작용(cetasika)에 속한다.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처(六處, saḷāyatana)에서 촉(photthabba)은 물질이고 12연기에서의 촉(phassa)은 마음의 작용이다. 이렇듯, phoṭṭhabba와 phassa는 중국에서 둘 다 촉(觸)으로 옮겼지만, 완전히 다른 술어이다.
◎ 개구리 천인
[청정도론](Vis.Ⅶ.52)에 이 개구리 천인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온다. 부처님께서 짬빠의 주민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한 개구리가 부처님의 목소리 표상에 취해있었다. 바로 그때 한 목동이 막대기에 기댄 채 그의 머리를 누르면서 서있었다. 막대기에 눌려 고통을 당했지만 개구리는 법에 대한 환희심으로 울부짖지도 않고 죽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삼십삼천의 황금 궁전에 태어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그곳에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업을 살펴보다가 전생에 개구리였을 때 부처님의 목소리 표상을 취한 것 외에는 없음을 알고는 부처님께로 가서 법문을 듣고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한다
◎ 개념(槪念)
개념(槪念)으로 번역되는 빤냣띠(paññatti)는 √pajānāti(분명히 알다, 꿰뚫어 알다)의 사역형태인 paññāpeti에서 파생된 명사로 ‘알게 하다, 선언하다, 지적하다, 인정하다, 정의하다’등의 뜻에서 ‘알게 하는 것 = 개념, 정의, 이름’등을 뜻하게 되었다. 아비담마의 근본주제가 아닌 세속적인 개념이나 명칭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시설(施設)로 번역되었고 영어로는 concept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개념(paññātti)과 반대가 되는 것이 바로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과 같은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이다.
◎ 검증
‘검증’으로 옮긴 위맘사(vimaṃsā)는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iddhi-pādā)과 네 가지 지배(四增上, adhipati) 가운데 하나이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면밀히 사유하는 것을 말하며, 영어로는 investigation, inquiry, pondering이라 한다.
◎ 겁(劫)
‘겁(劫)’이라 번역한 깝빠(kappa/Sk.kalpa)는 고대 인도에서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이다. 이 겁에는 ➀ 중간겁(中間劫, antara-kappa), ➁ 아승지겁(阿僧祗劫, asaṅkheyya-kappa), ➂ 대겁(大劫, mahā-kappa)이 있다. 인간의 수명이 열 살에서 8만 4천 년으로 증가하였다가 다시 열 살로 감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중간 겁이라 한다. 이 중간 겁의 20배에 해당 하는 기간이 아승지겁이며 이 아승지겁이 넷이 모이면 대겁이다. 한 대겁의 기간을 부처님은 사람이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한 유순(由旬)이 되는 큰 바위를 백 년에 한 번씩 비단 옷자락으로 스치고 지나가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비유하셨다.(S15:5/ii.181-82) 중국에서 겁(劫)이라 음역했고, 영어권에서는 world cycle, aeon이라고 한다.
◎ 견도(見道, darśana-mārga)
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도(無學道)의 세 가지 도 가운데 한 개. 여기서 도(道, mārga)란 번뇌의 심상속(心相續)의 구생(俱生) 관계를 단절시켜 열반과 해탈로 나아가는 길을 뜻한다. 견도는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는 과정이고, 수도는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는 과정이며 무학도는 견소단·수소단의 번뇌를 모두 끊었을 때 나타나는 경지이므로 엄밀하게 수행의 과정[道]이 아니라 그 목표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번뇌를 끊는 수행과정은 견도와 수도이다. 처음으로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사제(四諦)를 현관(現觀, abhisamaya)하고 그 이치를 비추어 수행하는 지위이다. 견도에 도달하기 이전은 범부이고, 견도에 들어간 뒤는 성자이므로 견도·수도·무학도를 성도(聖道)라고 한다. 수도는 견도 다음에 다시 구체적인 사상(事象)에 대처하여 되풀이하여 수습(修習)하는 단계이므로 견도와 수도를 합하여 유학도(有學道,śaiksa)라고 한다. 이에 대해 무학도는 무학위(無學位)·무학과(無學果)·무학지(無學地) 등 이라고도 하며, 이미 궁극적 최고의 깨달음에 들어가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 지위이다.
◎ 견박(見縛, drsti-krta-bandhana)
견박(見縛, drsti-krta-bandhana)은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미혹(迷惑), 삼계의 견혹(見惑)이다. 우리를 속박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하므로 박(縛)이라고 한다.
◎ 견청정(見淸淨, diṭṭi-visuddhi)
[청정도론」(Vis.ⅩⅧ.2)에도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견청정(見淸淨, diṭṭi-visuddhi)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온 대로 이 경지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vavaṭṭhāna-ñāṇa)’라고 한다. 즉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정신과 물질로 분석해보고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청정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견청정이라 하는 것이다.
◎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에서 결정으로 옮긴 옷타빠나(voṭṭhapana)는 vi(분리해서)+ava(아래로)+√stā(서다)의 사역형 중성명사이다. 문자적으로 ‘굳게 세운다’는 뜻에서 ‘확립, 확정’의 뜻이 있다. 이는 대상을 조사해서 결정하는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전문술어이다. 영어로는 determination이라고 한다.
◎ 결집
‘결집(結集)’으로 번역한 상가띠(saṁgīti)는 함께 모여서 암송한다는 것이 그 원의미로 합송(合誦)이라고도 한다. 즉, 경의 내용을 함께 암송하여 공인하고 교리상의 논란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모임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로는 ‘승가대회’라는 뜻의 상가야나(sanghāyanā)라고도 한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지금까지 총 6차례의 결집이 이루어졌다. (1) 제 1차 결집불멸후 첫 번째 우기(雨期)에 라자가하(Rajāgaha)의 칠엽굴(七葉窟, Sattapaṇṇi-guhā)에서 개최되었다. 마하까사빠(Mahā-kassapa) 장로의 주도로, 율장(律藏)의 편집은 우빨리(Upāli) 장로의 책임으로 이루어졌고, 경장(經藏)의 편집은 아난다(Ānanda) 장로의 책임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500명의 아라한이 함께 승인된 내용을 암송하였다. (2) 제 2차 결집불멸후 100년경 웨살리(Vesāli) 비구들이 주창한 10가지 조목으로 인한 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웨살리에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다수가 웨살리 비구들의 10가지 조목에 반대하였으므로 뜻을 관철하지 못한 소수의 비구들은 분리하여 새로이 대중부(大衆部, Mahāsaṅghika)라는 부파를 형성하였다. 당시 논란의 대상이 된 10개 조목은 소금의 저장, 규정된 시간 외에 식사를 하거나 탁발을 하는 것, 스승의 행위를 선례로 삼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 금과 은을 보시로 받는 것 등이었다. 또한 이 분열에는 아라한 특성에 대한 교리상의 차이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중부의 시조(始祖)로 일컬어지는 마하데바(大天, Mahā-deva)는 아라한에게도 아직 무지와 의혹이 남아 있다는 등 아라한의 깨달음을 낮추어 보는 5가지 주장을 내세웠다고 한다. (3) 제 3차 결집BC 247년경, 즉 아소까(Asoka)왕 재위 기간 중에 왕국의 수도였던 파탈리뿟따(Pāṭaliputta)에서 개최되었다. 이무렵 외도(外道)들이 승가의 물질적 풍요를 탐하여 승가에 들어와 자신들의 교설을 퍼뜨리는 등 승가의 계율과 수행이 문란해졌다. 그 때문에 승가에 싸움이 일어나 월례행사인 포살(uposatha)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승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가 아소까왕의 지원을 받아 불교를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이라고 말한 사람은 불교도이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하여 승가에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 교설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책이 아비담마 칠론 중 하나인「까따왓투(論事, Kathāvatthu)」였다. 그 후 목갈리뿟따띳사는 1,000여명의 아라한을 선발하여 9개월에 걸쳐 3차 결집을 완성하였다. 이 결집에서 논장이 추가되어 지금 현존하는 형태의 삼장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4) 제 4차 결집서력기원 전(B.C)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왓따가미니 아바야(Vattagamini Abhaya)왕의 후원으로 스리랑카의 알루 위하라(Alu vihāra)에서 개최되었다. 이 결집의 특징은 그간 합송으로만 전해오던 경이 최초로 패엽(貝葉)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5) 제 5차 결집1871년 4월 15일부터 9월 12일까지 미얀마 민돈(Mindon)왕의 후원으로 만달레이(Mandalay)에서 열리게 되었다. 당시 결집된 빨리 삼장은 729개의 돌비석에 새겨져 지금도 만달레이 언덕 아래의 쿠도도 파고다(Kuthodaw Pagoda)에 잘 보존되어 있다. (6) 제 6차 결집불멸 25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미얀마 정부 주도로 1954년 5월~1956년 5월 양곤에서 열렸다. 인도, 스리랑카, 네팔,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등지에서 온 비구들은 이때 빨리 삼장의 전체원문을 검토하고 암송하였다. 이 결집에서 마하시 사야도(Mahāsi Sayādaw)는 결집을 이끌어가는 질문자 역할을, 삼장법사인 밍군 사야도(Mingun Sayādaw)는 질문에 답변하는 역할을 담당하셨다.
◎ 경(經)
‘경(經)’으로 옮긴 숫따(sutta/Sk.sutra)의 기본 의미는 ‘실, 줄’이다. 주석서에서는 목수가 나무를 자를 때 길이를 재는 등의 요긴한 도구를 뜻한다고도 하며 후대에서는 실로서 경을 묶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앗타살리니」(Asl.50)와 디가 니까야 주석서(DA.45)에서는 (1) 부처님의 가르침이 의미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2) 잘 설명되었기 때문에, (3) 잘 방출하기 때문에, (4) 잘 보호되기 때문에, (5) 실 줄과 흡사하기 때문에 숫따라고 불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흔히 쓰는 경전(經典)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한 용어이다. 왜냐하면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자가 아닌 암송을 통하여 구전되어 왔기 때문이며, 전(典)이라는 글자에는 책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BC 1세기 이후부터 비로소 구전 되어온 부처님 가르침이 문자로 정착이 되고 나무껍질이나 대나무 등에 문자로 책의 형태로 기록되어 전승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전(典)자를 함께 사용해서 경전(經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경을 숫딴따(suttanta)라고도 하는데 숫따(sutta)와는 동의어이다. 이 suttanta는 sutta(경)+anta(끝)로 분해가 되는데 ‘경의 끝’이라 직역된다. 즉 ‘-anta’가 붙어서 ’최종적으로 경으로 확정된 것이란 뜻을 나타내는 일종의 강조용법이다. 실제적인 측면으로는 목수가 목재를 대패로 깎거나 톱으로 자르려면 실로 기준선을 긋듯이 우리가 출세간의 길을 걸으려면 경으로 우리의 행동에 기준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미를 숫따는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 경구죄(輕垢罪, dusk-ārta, dukkata)
경구죄(輕垢罪, dusk-ārta, dukkata)는 바라이죄(波羅夷罪)의 상대어. 돌길라(突吉羅)라고도 한다. 청정행(淸淨行)을 더럽히는 허물이 비교적 가벼운 죄. 『범망경(梵網經)』 보살계의 58항목 중 무거운 죄에 속하는 10조항을 바라이죄라 하고, 가벼운 죄에 속하는 48항목을 경구죄라고 한다.
◎ 경계(輕戒)
경구계(輕垢戒)의 약칭으로 십중대계(十重大戒)나 사바라이(四波羅夷)보다 허물이 가벼우므로 교단에서 쫓겨나지 않고 참회하면 곧 용서를 받아 계상(戒相)을 완전하게 회복할 수 있는 계(戒)이다. 마치 때 묻은 옷을 세탁하여 새 옷이 되게 하는 것과 같다. 곧 십중계(十重戒)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조적인 의미를 가지며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증장시키려는 것이다. 법장(法藏)의 『보살계본소(菩薩戒本疏)』 4권(大40 p.634b6)에 사십팔계를 제정한 뜻 여섯 가지를 밝히고 있다. “初制意者, 諸佛何故, 制此輕戒? 謂一爲護世間起譏嫌故, 二光顯菩薩出世道故, 三微細情塵悉制斷故, 四調伏三業制三毒故, 五方便遠護十重戒故, 六增長菩薩三聚戒故.”
◎ 계율과 의식[戒禁]
계율과 의식[戒禁]으로 옮긴 실라밧따(sīlabbata)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례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례와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열 가지 족쇄(結, saṃyojana) 가운데 세 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upādāna) 중의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수다원도에 들면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과 같은 족쇄와 함께 뿌리가 뽑힌다.
◎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으로 옮긴 실라밧따파라마사(sīlabbata-parāmāsa)는 sīla(계)+vata(서계, 서원)+parāmāsa(집착, 고수)의 합성어이다. 즉 종교적인 금계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 가운데 세 번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取, upādāna) 가운데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수다원도(sotāpatti-magga)에 들면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과 같은 족쇄와 함께 모두 뿌리 뽑히게 된다. 중국에서 계금취(戒禁取)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attachment to mere rules and rites 등이라 한다.
◎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사견[戒禁取見]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사견[戒禁取見]’으로 옮긴 실라바따 빠라마사 딧티(sīlabbata-parāmāsa-diṭṭi)는 sīla(계)+vata(서계, 서원)+parāmāsa(집착, 고수)+diṭṭi(견해)로 분해된다. 종교적인 금계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금계와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중국에서 계금취견(戒禁取見)으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wrong belief in the practise, 또는 attachment to mere rules and rites 등이라 한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 가운데 세 번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 중의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수다원도에 들면 유신견, 의심과 같은 족쇄들과 함께 모두 뿌리가 뽑히게 된다.
◎ 고뜨라부(gotrabhū)
고뜨라부(gotrabhū)는 종족의 성을 뜻하는 gotra와 √bhū(되다)에서 파생된 bhu가 합성된 단어이다. 그래서 고뜨라부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성(姓)을 가지게 되는 경지’이다. 중국에서는 문자적인 뜻을 살려 종성(種姓)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한역에만 의지해서는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PED에서 ‘a technical term used from the end of the Nikāya period to designate one, whether layman or bhikkhu, who, as converted, was no longer of the worldlings (puthujjana), but of the Ariyas, having Nibbana as his aim.’라고 설명되듯이, 경장 후기부터 사용된 말로, 비구나 재가자를 불문하고, 범부에서 벗어나 성자가 되어 열반을 지향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다. 아비담마에서는 근접집중에서 근본집중으로, 즉 욕계에서 색계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의 마음을 나타내는 전문술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계통을 바꾸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정을 증득한 경우에 이것은 욕계의 ‘범부혈통’에 속하는 마음을 드디어 극복하고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고뜨라부라고 하고 첫 번째 도의 경우, 이 순간에 범부의 혈통에서 성자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고뜨라부라고 한다. 이렇게 그 경지가 바뀌는 순간의 마음을 고뜨라부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고뜨라부 냐나(gotrabhū-ñāṇa)'라고 하는데, 수행자의 지혜가 도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뜻에서 ‘성숙의 지혜’라고 번역된다.
◎ 고뜨라부냐나(gotrabhū-ñāṇa, 성숙의 지혜)
‘성숙의 지혜’라고 번역한 고뜨라부냐나(gotrabhū-ñāṇa)에서 고뜨라부(gotrabhū)는 종족의 성을 뜻하는 gotra와 √bhū(되다)에서 파생된 bhu가 합성된 단어이다. 그래서 고뜨라부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성姓을 가지게 되는 경지’이다. 중국에서는 문자적인 뜻을 살려 종성(種姓)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한역에만 의지해서는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PED에서 ‘a technical term used from the end of the Nikāya period to designate one, whether layman or bhikkhu, who, as converted, was no longer of the worldlings (puthujjana), but of the Ariyas, having Nibbana as his aim.’라고 설명되듯이, 경장 후기부터 사용된 말로, 비구나 재가자를 불문하고, 범부에서 벗어나 성자가 되어 열반을 지향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다. 아비담마에서는 근접집중에서 근본집중으로, 즉 욕계에서 색계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의 심찰나를 나타내는 전문술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계통을 바꾸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정을 증득한 경우에 이것은 욕계의 ‘범부혈통’에 속하는 마음을 드디어 극복하고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고뜨라부라고 하고 첫 번째 도의 경우, 이 순간에 범부의 혈통에서 성자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고뜨라부라고 한다. 이렇게 그 경지가 바뀌는 순간의 마음을 고뜨라부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고뜨라부냐나(gotrabhū-ñāṇa)’라고 한다. 이 지혜는 수행자의 지혜가 도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뜻에서 ‘성숙의 지혜’라고도 한다.
◎ 고삐까(Gopikā)
고삐까(Gopikā)는 여성명사이고 이것의 남성명사가 고빠까(Gopaka)이다. 그녀가 삼심삼천의 남신이 되었으므로 이름을 남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 고요함에 대한 숙고(寂靜念, upasamānussati)
고요함에 대한 숙고(寂靜念, upasamānussati)는 「청정도론」(Vis.Ⅶ.245~251)에 나오는 열 가지 숙고 중의 하나로, 열반의 평화를 숙고하는 수행법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오는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형성되었거나 형성되지 않은 법들이 있는 한 그들 가운데서 탐욕의 빛바램이 최상이라고 불리나니. 그것은 바로 허영심의 분쇄요, 갈증의 제거요, 집착의 근절이요, 윤회의 멸절이요, 갈애의 파괴요, 탐욕의 빛바램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A.ii.34)
◎ 고유한 성질 (사바와. sabhāva)
‘고유한 성질’로 번역한 사바와(sabhāva)는 sa(자기 자신, 스스로)+bhāva(존재)의 합성어이다. PED에서 ‘state (of mind), nature, condition, character, disposition, behaviour, truth, reality, sincerity’라고 설명되듯이, ‘특정 법이 지니는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뜻한다. 예를 들면 탐욕(lobha)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탐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을 탐하고 거머쥐는 탐욕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냄(dosa)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성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적개하고 밀쳐내는 등의 성냄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고유한 성질을 가진 법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자성(自性)이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individual essence라고 한다.
◎ 고행(苦行)
‘고행(苦行)’으로 옮긴 타포(tapo/Sk.tapas)는 √tap(태우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글자 그대로 태운다는 의미이다. 이 타포는 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1) PED에서 ‘torment, punishment, penance, especially religious austerity, self-chastisement, ascetic practice. This was condemned by the Buddha.'라고 설명되듯이, 인도의 사문 전통에서 행하던 수행법으로, 이미 지은 악업을 청산하고 다음 세상에 태어날 악업을 막아 천상 등의 좋은 과보를 기대하면서 몸을 학대하는 고행을 말한다. 이러한 고행은 두 가지 극단적인 수행법 중 하나로써, 부처님께서 비난하신 것이다. 그리고 atta-kilamathānuyoga는 ‘자기학대에 몰두함’이란 뜻으로, 「초전법륜경」(S56:11)에서 고행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2) PED에서 ‘mental devotion, self-control, abstinence, practice of morality (often= brahmacariyā. &saṃvara); in this sense held up as an ideal by the Buddha.'라고 설명되듯이, 마음수련, 금욕수행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로는 종종 출세간의 삶(brahma-cariya)과 절제(saṃvara)의 동의어로 쓰이며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수행법이다.
◎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 ā-abhisaṅkhāra)
[청정도론](Vis.ⅩⅦ.60)에 따르면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여덟 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cetanā)와 수행으로 생긴 다섯 가지 색계의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불선한 의도이고,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는 수행으로 생긴 네 가지 무색계의 선한 의도이다. 이처럼 세 가지 상카라는 29가지 의도이다.”
◎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vattu)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vattu)는 경에서 보시로 이루어진 공덕행(dāna-maya-puñña), 지계로 이루어진 공덕행(sīla-maya-puñña), 수행으로 이루어진 공덕행(bhāvanā-maya-puñña)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반면 「앗타살리니(Atthasālini)」와 같은 주석서들에서는 이를 좀 더 세분하여 다음의 10가지를 들고 있다.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수행(修行, bhāvanā), ④ 공경(恭敬, acāyana), ⑤ 봉사(奉仕, veyyāvacca), ⑥ 회향(廻向, pattidāna), ⑦ 더불어 기뻐 함(隨喜, pattānumodana), ⑧ 법을 가르침(說法, desanā), ⑨ 법을 들음(聞法, savana), ⑩ 자기 견해를 바로잡음(diṭṭhujjukamma).
◎ 공화(空華, khapuspa)
공화(空華, khapuspa)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을 말한다. 본래 실체가 없는 곳에서 헛된 견해를 일으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눈병이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마치 꽃이 있는 듯이 오인하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불설대승수전선설제법경(佛說大乘隨轉宣說諸法經)』 1권(大15 p.774c1-5)에 “선남자야 세간의 일체중생의 묘명원심이 본래 청정하여 모든 더
러움이 없어서 시방에 원만하여 담연 적정함이 마치 허공에 본래 티끌이 없이 적연 청정하지만 중생이 눈에 병이 나면 공화가 생기는 것과 같아서 공화가 일어나고 공화가 사라지는 것이 병든 눈으로 보는 바라 눈병이 나으면 공화 또한 소멸하여 청정한 허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으니 묘명원심도 또한 이와 같나니라. 善男子, 世間一切衆生, 妙明元心, 本來清淨, 無諸垢染, 圓滿十方湛然寂靜, 猶
如虛空本無塵翳寂然清淨, 衆生眼病空華發生, 華生華滅病眼所見. 眼翳既消, 空華亦滅, 清淨虛空, 本來不動, 妙明元心, 亦復如是.”라고 하였다.
◎ 과보의 마음(vipāka-citta)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에서 vipāka는 vi(분리해서)+√pac(무르익다, 성숙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달리 익는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살려서 중국에서는 ‘이숙(異熟)’으로 옮겼다. 또는 과일이 익어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과보(果報)로 옮기기도 한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vipāka는 거의 대부분 vipāka-citta(과보의 마음)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 과보의 마음은 업을 짓는 마음이 있으면, 그 업의 과보로 일어나는 마음이다. 그리고 업과 과보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마음이 있는데 오문전향과 의문전향이라는 대상으로 전향하는 일종의 기계적인 마음이다. 이것을 작용만 하는 마음(kiriyā-citta)이라 부른다. 물론 아라한이 일으키는 좋은 마음도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일으키는 좋은 마음은 그 과보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업을 짓는 마음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연기의 식(識)은 재생연결식도 되고 당연히 삶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나는 과보의 마음도 된다. 식이 조건이 되어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 여섯 감각장소(六入, āyatana), 감각접촉(觸, phassa), 느낌(受, vedana)은 모두 이러한 과보의 마음인 식과 함께 일어나는 물질과 마음의 작용법이다.
◎ 관통 (아비삼마야. abhisamaya)
‘관통’이라 번역한 아비삼마야(abhisamaya)는 ‘꿰뚫음, 확실한 이해, 실현, 파악, 관통’ 등의 뜻을 가진 말인데 여기서는 문맥에 따라 관통(貫通)이라 번역했다. 「청정도론」(Vis.XXⅡ.92)을 비롯한 주석서에서는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을 이렇게 아비삼마야(abhisamaya)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 관행(觀行)
관행(觀行)이란 자신의 마음 본성을 관하는 관심수행(觀心修行)을 말하는 것이다. 관행을 통하여 일곱 가지 재물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칠성재(七聖財), 칠덕재(七德財)라고도 하며 이로써 마침내 성과(聖果)를 얻게 된다. 칠재(七財)는 신재(身財)·계재(戒財)·참재(慚財)·괴재(愧財)·문재(聞財)·사재(捨財)·혜재(慧財)이다. 『유마경』, 『구사론』, 『사석집(沙石集)』 참조.
◎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또 부처님은 상윳따 니까야, 수상응(受相應) (S36: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괴로운 느낌에 접하더라도 결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인 느낌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은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화살 하나 맞은 괴로운 느낌만을 겪는다. 괴로운 느낌에 접했다 해서 그는 그것에 저항(하고 분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겐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 그 괴로운 느낌에 밀려 감각적 즐거움을 향유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감각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감각적 즐거움을 향유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에겐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이 느낌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러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이 느낌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에 대해서도,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 그가 (이처럼)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을 경험할 때 그는 그 각각의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괴로움, 절망에 매이지 않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 한다. 그는 결코 괴로움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 괴로움
여기서 보듯 고성제(苦聖諦)에서의 괴로움(dukkha)은 단순한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이나 괴로운 느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어권의 일부 학자들은 이 둑카(dukkha)를 suffering(괴로움), pain(고통)으로 옮기는 대신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로 옮기기도 한다. 그리고 고성제의 핵심은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이다.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중생계의 모든 물질과 정신(nāma-rūpa)은 반드시 집착(upādāna)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존재하는 모든 것(오온=오취온=일체유위법)은 반드시 집착을 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세한 집착은 아나함에 이르기까지 남아있으며 그래서 아나함과를 증득한 사람들은 정거천(淨居天)이라는 색계천(色界天)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오취온의 괴로움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 교(憍, mada)
스스로를 존대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자기의 재산·지위·재능·학력 등을 믿고 오만(傲慢)한 것을 말한다. 『구사론』에서는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의 하나로 분류하고, 유식학파에서는 수번뇌(隨煩惱) 중 소수혹(小隨惑)의 하나로 분류한다. 만(慢, māna)은 타인을 의식해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교(憍)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도 일어나는 것이다.
◎ 교법(敎法)
‘교법(敎法)’이라 번역한 사사나(sāsana)는 PED에서 ‘order, message, teaching'이라고 설명되듯이, 일차적으로 ‘명령, 메시지, 전갈'의 뜻이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구분교(九分敎, navaṅga-sāsana)를 지칭한다. 경장(經藏)으로 완성되기 이전의 교법을 서술의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분류하던 방식이었다. 주석서들에 따르면 율장과 논장도 이러한 구분교에 포함된다고 한다. (1) 계경(契經, Sutta): 경 가운데 장행 내지 산문의 부분.(2) 중송(重頌, Geyya): 먼저 산문으로 서술한 후 다시 운문으로 읊고 있는 경의 부분.(3) 수기(授記, Veyyākarana): 주석(註釋). 수역(授譯) 또는 별기(別記)라 번역. 불제자들의 생사인과를 적거나 불법의 심의(深意)를 분명히 적은 부분.(4) 고기송(孤起頌, Gāthā): 운문체의 경문.(5) 감흥어(感興語, Udāna): 질문을 받지 않았는데도 부처님 스스로 감흥이 일어나 설한 시의 문구.(6) 여시어(如是語, Itivuttaka):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경으로 감흥어와 유사하다. 이는 주로 부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7) 본생담(本生譚, Jātaka): 부처님의 전생담을 실은 경.(8) 미증유법(未曾有法, Abbhuta-dhamma): 부처님의 공덕의 위대함을 찬탄한 부분. 또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미증유의 일들을 기록한 부분.(9) 교리문답(方廣, Vedalla): 인명(因明), 정리(正理)에 의거, 불법의 깊은 뜻을 자세히 설한 부분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에서는 아주 초기의 분류법인 구분교(九分敎)를 채택한 반면, 다른 부파들 특히 대승불교 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12분교(十二分敎, dvādasāṇga-dharma-pravacana)를 채택했다. 12분교로 분류할 경우는 여기에 (10) 인연담(因緣譚, Nidāna), (11) 비유(譬喩, Apadāna), (12) 논의(論議, Upadesa)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사사나(sāsana)는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교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종교적 체계로서의 불교를 뜻한다.
◎ 구족계
‘구족계(具足戒)’라 번역한 우빠삼빠다(upasampada)는 upa(위로)+saṃ(함께)+pad(가다)의 합성어이다. PED에서는 ‘(in special sense) taking up the bhikkhuship, higher ordination, admission to the privileges of recognized bhikkhus.’라고 설명되듯이, 승가에 입문하여 비구(bhikkhu) 또는 비구니(bhikkunῑ)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받아 지녀야 하는 계율이다. 상좌부의 비구계는 227가지, 비구니계는 311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미 또는 사미니가 받는 10계와 비교하여 계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중국에서 구족계(具足戒)라고 번역한 듯하다. 현재 상좌부 전통에서 행하고 있는 이 구족계 수계의식은 부처님 당시와 거의 같다. 구족계를 받으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즉 나이는 20세가 넘어야 하고,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병역에서 면제되어야 하고, 부채가 없고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 것 등이다. 구족계 수계의식은 우기(雨期)의 하안거 기간(vassa)을 제외하고는 길일(吉日)이라고 생각되는 어느 때라도, 그리고 이미 구족계를 수지한 승려가 참석한 신성한 장소라면 어느 곳에서라도 행할 수 있다. 다만 구족계를 받을 때에는 특별한 수계작법이 있다. 즉, 삼사칠증(三師七證:삼사는 계율을 직접 설하는 수계아사리, 계율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교수아사리 그리고 갈마아사리를 말하는 것이며, 칠증은 수계의식이 원만히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증명해주는 법사 7명)을 모시고 위의를 갖추어 설하게 되어 있다.
◎ 굿띨라(Guttila)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AA.i.16f)에 나오는 굿띨라(Guttila)는 「굿띨라 자따까(Guttila Jātaka)」(J.No.243)에 나오는 굿띨라와는 아마도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따까에 나오는 굿띨라는 눈먼 노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일부러 결혼하지 않은 악사(樂士)로 나오기 때문이다.
◎ 궁극적 실재
‘궁극적 실재’라고 번역한 빠라맛타(parama-attha)는 빠라맛타 담마(paramattha-dhamma)라고도 하는데, parama(최고의, 최상의)+attha(이치, 뜻)로 분석된다. 그래서 ‘최고의 이치’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승의(勝義)라고 직역했고, 영어권에서는 ultimate realitiy로 번역한다. 이러한 궁극적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 dhamma)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빨리 경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의미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부처님의 가르침(Buddha-dhamma)으로서의 법불·법·승 삼보(三寶)에 포함되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고유명사 취급을 해서 Dhamma로 표기한다. (2) 존재일반(sabbe-dhamma)으로서의 법영어권에서는 이를 일반명사 취급하여서 dhamma로 표기한다. 이 법은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와 개념(施設, paññātti)으로 나뉘며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➀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하며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 등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을 ‘고유한 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고유의 특성이란, 특정 법이 가지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탐욕(lobha)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탐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을 탐하고 거머쥐는 탐욕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냄(dosa)이라는 심리현상을 성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적개하고 밀쳐내는 등의 성냄만의 고유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법과 성냄이라는 법은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탐욕이 가지는 거머쥐는 성질과 성냄이 가지는 밀쳐내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다른 것은 그 고유한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아비담마는 설명한다. ➁ 개념(施設, paññātti)빤냣띠(paññātti)는 아비담마의 근본주제가 아닌 세속적인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가설(假說), 방편설(方便說)이란 의미의 시설(施說)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concept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ññātti)개념들이 전달하는 뜻을 말한다. 예를 들면 책상, 의자 등의 용어나 명칭을 뜻한다. (2) 이름으로서의 개념(名施設,nāma-paññātti)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ññātti)을 통해 전달되는 대상이나 사상을 뜻한다. 이를 삿다 빤냣띠(sadda-paññatti)라고도 한다.
◎ 궁극적 실재(빠라맛타, paramattha)
아비담마에 의하면 존재에는 인습적인 것(sammuti)과 궁극적인 것(paramattha)의 두 가지가 있다. 인습적인 것은 보통의 개념적 생각(pannatti)66)과 인습적 표현(vohara)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중생, 사람, 남자, 여자, 동물 등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분석적이지 못한 밑그림을 구성하는, 외관상 견고하게 남아 있는 산, 바위, 나무, 집 등 여러 대상들이 모두 인습적인 것에 포함된다. 이런 개념들은 궁극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나타내는 대상은 그들 자체로는 더이상 분해할 수 없는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대문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것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아비담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고유한 성질(사바와, sabhava)을 가진 실재가 아니다. 여러 궁극적인 것들이 모여져 이루어진 것들을 편의상 각각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을 뿐이다. paramattha(빠라맛타)는 parama(최고의, 최상의)+attha(이치, 뜻)로 분석된다. '최고의 이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勝義'라고 직역했고 여기에다 진리(諦)를 뜻하는 삿짜(sacca)를 첨가해서 빠라맛타삿짜(paramattha-sacca)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며 그래서 勝義諦라고 옮기기도 하고 진제(眞諦)라고도 옮겼다. 역자들은 본서에서 궁극적 실재라고 옮기고 있다. 한편 이와 반대되는 세간에서 통용되는 진리는 sammuti-sacca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俗諦로 옮겼다.
궁극적인 것은 그와는 반대로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sabhava)을 가진다. 이것은 최종적인 것이요, 더이상 분해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성분이며, 경험을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로서 존재하는 구극의 단위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 한다.67) 이런 궁극적인 것들은 더이상 분해되지 않고 이들 자체가 다양한 경험으로 뭉뚱그려진 개념적 존재들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요 실재이다.
예를 들면 '사람' '남자' '여자' 등은 인습적인 것이지 구극의 단위가 아니다. '사람'이란 지.수.화.풍의 사대와 그에서 파생된 물질인 눈.귀.코.혀.몸 등과 마음, 이 마음과 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작용(마음부수)들이라는 최소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땅의 요소나 물의 요소, 감각접촉, 느낌, 의도 등은 더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 궁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것은 인습적인 존재의 영역에 속하며 땅의 요소 등은 궁극적인 길재라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아비담마의 분석적 도구를 가지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보면 이런 '인간' 등의 개념 그 자체는 궁극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정신-물리적(名色, nama-rupa)인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정신-물질적인 과정들은 모두 최소단위들이 매순간 특정한 조건하에서 서로 조합되어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런 그들 자신의 고유한 성질(sabhava)을 가진 최소단위(dhamma)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혹은 구경법)라 한다. 이러한 궁극적 실재는 정신-물리적인 현상의 구체적 본질로서 존재하지만 너무 미세하고 심오해서 훈련이 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개념(pannatti)들로 뒤덮여 있어서 궁극적 실재를 보지 못한다. 대상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요니소 마나시까라, yoniso manasikara, 如理作意)으로써 인간은 개념을 넘어서 보게 되고 궁극적 실재를 앎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는 최상의 지혜(智)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네 가지 궁극적 실재아비담마에서는 마음(citta), 마음부수(cetasika), 물질(rupa), 열반(nibbana)의 네 가지 궁극적 샐재를 설한다. 여기서 마음은 1가지이고 마음부수는 52가지이며 물질은 18가지이고(10가지 추상물질은 제외) 열반은 1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모두 72가지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이 있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존재나 개인을 오온(五蘊, 다섯 가지 무더기, panca-khandha)으로 분석하신다. 물질의 무더기(色蘊,rupa-khandha), 느낌의 무더기(受蘊, vedana-khandha), 인식의 무더기(想蘊, sanna-khandha), 상카라들의 무더기(行蘊, sankhara-khandha), 알음아리이 무더기(識蘊, vinnana-khandha)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식온은 아비담마의 마음(心)과 일치하고, 수온, 상온, 행온, 은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색온은 물질(18가지 구체적인 물질)과 일치한다.69)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마음, 마음부수, 물질에다 열반(Nibbana)을 포함하여 모두 네 가지 궁극적 실재를 설한다. 열반은 오온에는 포함되지 않으며 형성된 것들에 내재한 괴로움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탈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음, 마음부수, 물질은 유위법(有爲法, sankhata-dhamma, 형성된 것들)이라 하며 열반은 무위법(無爲法, asankhata-dhamma, 형성되지 않은 것)이라 부른다.
아비담마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런 궁극적 실재들이야말로 이 모든 세상 즉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부터 출세간의 경지에까지 항상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이다. 존재를 이런 최소의 단위, 구극의 단위로 분해하고 분석하고 해체하여(vibhajja)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가 없다고 설하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는 빤냣띠(개념)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이 궁극적 실재인 법(dhamma)들의 특징과 역할 등을 분석하여 규명하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인연취산(因緣聚散)을 거듭하고 있는지에 더 중점을 둔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근본적인 관심이다.
법을 궁극적 실재라고 하면 혹자는 "그것은 제법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사상과 상치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 아비담마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고유한 특징(sabhava-lakkhana)과 보편적 특징(sammana-lakkhana) 두 가지 측면으로 법을 고찰한다. 각각의 법들은 모두 그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는 있지만 무상. 고. 무아라는 보편적인 특징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열반은 형성된 것(sankhata)이 아니므로 무상과 고를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아는 그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라고 표현하며 "모든 법들은 자아가 없다(諸法無我)"라고 무아를 가르치고 있다.70) 이 諸法(sabbe dhamma)에는 열반도 포함된다.71) 열반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열반은 탐.진.치가 소멸된 경지라서 이런 모든 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 궁극적 실재라고 한다 하여 불변하는 어떤 존재론적인 특정한 것을 상징하려든다면 이는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빠라맛타(paramattha)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근기(根機)
사람이 가진 종교적인 소질이나 능력을 뜻하는 말로 근(根)은 근본이 되는 힘이고, 기(機)는 발동하는 능력이다. 근기는 사람마다 타고난 정도가
다르므로 사람에 따라 교법을 이해하는 수준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 근본물질[四大]
‘근본물질’로 옮긴 부따루빠(bhūta-rūpa)는 경과 주석서에서 마하부따(mahābhūta)라는 용어로 나타난다. 이 마하부따(mahābhūta)는 mahā(큰)+bhūta로 분해된다. 여기서 bhūta는 √bhū(되다)의 과거분사로서 기본적인 의미는 ‘된 것, 생긴 것, 존재하는 것’이라는 기본 뜻에서 ‘존재하는 것, 진실, 사실’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 = 기본 요소 = 지∙수·화·풍’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중국에서 사대(四大), 혹은 사대종(四大種)이라고 번역하였다. 기본이 되는 요소라는 측면에서 이 마하부따는 다뚜(界, dhātu)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대(四大)라 할 때는 mahābhūta로 주로 나타나지만 구체적으로 말할 때는 네 가지 요소란 의미의 cataso-dhātuyo라는 말로도 자주 나타난다. 특히 각각의 요소를 나타낼 때는 대부분 다뚜(dhātu)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지대(地大)는 paṭhavi-bhūta라는 말 대신 paṭhavi-dhātu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 다뚜(dhātu)라는 말은 √dhā(지탱하다, 유지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인데 주석서에 ‘자기의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요소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계(界)라고 한역되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인데 이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들이 여러 형태로 조합되어 작은 것은 미진에서부터 큰 것으로는 큰 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을 구성한다. 이들 요소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땅의 요소(地大, paṭhavi-dhātu): 거칢, 조악함, 반드러움, 부드러움, 딱딱함, 견고함을 특징으로 하며 몸의 감촉(phoṭṭhabba)으로 느낄 수 있다. (2) 물의 요소(水大, āpo-dhātu): 점착성, 유동성, 촉촉함,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며 몸의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으로만 느낄 수 있다. (3) 불의 요소(火大, tejo-dhātu): 뜨거움, 차가움, 따스함을 특징으로 하며 유기체를 성숙하고 숙성하게 한다. 흰 머리카락, 이가 빠짐, 주름살, 기타 노화의 징후가 생기는 것은 바로 몸의 열 때문이다. 이 열이 많으면 성숙의 과정은 더욱 더 빨라진다. 역시 몸의 감촉으로 느낄 수 있다. (4) 바람의 요소(風大, vāyo-dhātu): 팽창, 압박, 움직임을 특징으로 하며 역시 몸의 감촉으로 느낄 수 있다.
◎ 금강보좌
‘금강보좌(金剛寶座)’라 번역한 와지라사나(Vajirāsana)는 vajira(金剛, 번개)+āsana(座, 자리)의 합성어이다. 견고하고, 깨지지 않는 금강과도 같은 자리라는 의미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서 도를 닦을 때 앉으셨던 자리이다. 여기서 금강(vajira)은 부처님의 위대한 지혜를 상징한다.
◎ 기쁨의 정원
‘기쁨의 정원’이라 번역한난다와나(Nandavana)는 난다나(Nandana)라고도 한다. 삼십삼천(Tāvatiṁsa)에 있는 제석(Sakka)의 네 개 정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을 찾는 천인들에게 기쁨(nanda)을 준다(J.v.158)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에서 환희원(歡喜苑), 희림원(喜林苑)이라고 번역되었다. 이곳에 제석이 사는 에까뿐다리까 천궁(Ekapuṇḍarīkā-vimāna)이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천인은 삼십삼천의 난다와나(기쁨의 정원)를 모하와나(미혹의 정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천녀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이고, ‘아라한과의 토대가 되는 위빠사나를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의도를 가지고 세존께 이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SA.i.85~87)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세존께서는 그 천인에게 공함을 드러내는 위빠사나(suññatā-vipassanā)를 설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올곧음(ujuka)’이라 한 것은 팔정도의 도(magga)는 몸이 비뚤어짐(vaṅka) 등이 없기 때문에 올곧음이라 부른다. ‘그 방향은 두려움은 없다(abhayā nāma sā disā)’는 것은 열반을 두고 한 말씀이다. 거기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기 때문이다. ‘마차는 삐걱거리지 않음(ratha akūjaha)’이라는 것도 팔정도를 두고 한 말씀이다. 일반마차는 차축이 부서지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너무 많은 사람이 타면 삐걱거리고 덜컥거리지만 성스러운 도는 그렇지 않다. 팔정도라는 마차는 팔만사천의 생명들이 동시에 타더라도 삐걱거리지 않기 때문에 ‘삐걱거리지 않음’이라 부른다. ‘법륜이 달려있다(dhammacakkehi saṁyuto)’는 것은 몸과 마음의 정진(kāyika-cetasika-vīriya)이라 불리는 법의 바퀴가 달려있다는 뜻이다.”(SA.i.87)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여기서의 ‘법(dhamma)'이란 출세간의 도(lokuttara-magga)를 말한다. ‘바른 견해가 앞서 달린다(sammā-diṭṭi-purejava)’는 것은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ī)가 앞서 간다는 말이다. 마치 왕의 측근들이 왕이 나오기 전에 먼저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면 왕이 나오는 것처럼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가 오온(五蘊) 등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하여 [도를]청정하게 만든 뒤에 도의 바른 견해(magga-samma-diṭṭhī)가 존재의 토대를 얻은 윤회(bhūmī-laddha-vaṭṭa)를 철저하게 알면서 일어나는 것이다.”(SA.i.88)
◎ 긍가사겁(殑伽沙劫, gangā-vāluka-kalpa)
긍가사겁(殑伽沙劫, gangā-vāluka-kalpa)은 갠지스강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은 겁이라는 말이다. 곧 무량무변한 시간을 가리킨다. 항가사겁(恒伽沙劫) 또는 항하사겁(恒河沙劫)이라고도 한다.
◎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는 중인도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āvatthi) 남쪽 1.6 km 지점에 있던 제따태자 소유의 동산에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장자가 지어 승가에 헌납한 정사이다. 세존께서는 말년 22년간을 여기서 보내셨다. 세존이 아난다(Ānanda) 존자를 시자로 삼으신 것도 여기에 계시기 시작 무렵이었다. 많은 경들이 이 기원정사에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나며 특히 맛지마 니까야와 상윳따 니까야의 반 정도가 이곳에서 설해졌다.
◎ 기질
‘기질’로 옮긴 짜리따(carita)는 원래 √car(옮기다)의 과거분사로 ‘옮기는, 가는’ 등의 뜻인데 중성명사로 쓰이면 ‘행동, 성향, 처신, 기질’등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중생이 가지는 성벽이나 기질을 뜻한다. 영어로는 disposition, nature, character라고 한다. 중생의 기질은 그들의 전생의 업이 다양하기 때문에 다르다. 주석가들은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의 생산업(janaka-kamma)에 따라 기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청정도론」(Vis.Ⅲ.74~102)에서는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의 여섯 가지 기질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 까꾸산다(Kakusandha)
까꾸산다(Kakusandha) 부처님은 과거 일곱 부처님 중 한분이고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에 첫 번째로 출현한 부처님이다. 과거의 부처님은 무수히 많지만 불전에서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출현하신 일곱 부처님과 행운의 겁에 출현하신 네 분의 부처님을 과거불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고 이러한 부처님들의 일대기를 모은 것이 바로 「붓다왐사(佛種姓經, Buddhavaṃsa)」이다.
과거 칠불은
➀ 위빳시 부처님(毘婆尸佛, Vipassi Buddha),
➁ 시키 부처님(尸棄佛, Sikhi Buddha),
➂ 웻사부 부처님(毘舍浮佛, Vessabhu Buddha),
④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 Kakusandha Buddha),
⑤ 코나가마나 부처님(拘那含牟尼佛, Konagamana Buddha),
⑥ 까사빠 부처님(迦葉佛, Kassapa Buddha),
⑦ 고따마 부처님(瞿曇佛,Gotama Buddha)이다.
이 중에서 현겁에 출현하신 부처님은 ④ 까꾸산다 부처님, ⑤ 코나가마나 부처님, ⑥까사빠 부처님, ⑦ 고따마 부처님의 네 분이다. 그리고 현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래에 오실 부처님은 멧떼야 부처님(彌勒佛, Metteyya Buddha)이다. 주석서(DA.ii.410)에 따르면 멧떼야 부처님을 포함하여 다섯 분의 부처님들께서 출현하시어 장엄하시는 멋진 겁이요 핵심이 되는 겁이라고 세존께서 칭찬하셨기 때문에 현재의 겁을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겁보다 출현하시지 않는 겁이 훨씬 더 많은데 현재의 겁에는 무려 5분의 부처님들이 출현하셨고 또 출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까따왓투(Kathāvatthu)
[까따왓투(Kathāvatthu)]는 아비담마 칠론 중에서 부처님이 설하지 않으신 것으로 전승되어온 책이다.
다른 부파의 견해를 논파하고 상좌부의 견해를 천명하기 위해서 쓰인 책으로 부파불교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BC 247년경, 즉 아소까(Asoka)왕 재위 기간 중에 외도(外道)들이 승가의 물질적 풍요를 탐하여 승가에 들어와 자신들의 교설을 퍼뜨리는 등 승가의 계율과 수행이 문란해졌다. 이러한 승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가 아소까왕의 지원을 받아 불교를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이라고 말한 사람은 불교도이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하여 승가에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 교설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책이 바로「까따왓투(Kathāvatthu)」이다.
한역으로는 논사(論事)라고 하며, 1915년에 영국의 PTS에서 미얀마의 쉐 잔 아웅(S.Z.Aung)과 리스 데이비스 부인(Mrs.Rhys Davids)에 의해 「Point of Controversy」라는 이름으로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 까삘라왓투(Kapilavatthu)
까삘라왓투(Kapilavatthu)는 부처님의 고향이자 히말라야에 가까운 곳에 있는 석가족의 수도이며, 까삘라(Kapila) 선인의 충고로 옥까카왕의 왕자들이 터를 닦은 도시이다. 그래서 까삘라왓투라고 이름 지었다.(DA.i.259) 부처님 당시에는 숫도다나를 왕으로 한 공화국이었다.
◎ 까사빠(Kassapa) 부처님
까사빠(Kassapa) 부처님은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에 출현한 과거 네 분의 부처님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으로 고따마 부처님의 바로 전대에 출현하신 부처님이다.
◎ 까시나
까시나(kasiṇa)는 ‘전체의, 모든’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청정도론」에서도 전체(sakala)라는 뜻에서 까시나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이 까시나는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특정한 형태의 도구로 중국에서는 변(遍)으로 옮겼다. 이러한 도구를 까시나라 부르는 이유는 이러한 도구에 마음을 집중할 때 이런 도구의 특정부분만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도구의 전체에 집중해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Vis.IV.119)에 해당하는 복주서에서도 "전체라는 뜻이란 앞서 설한 방법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었거나 혹은 자연적인 흙의 원반에 대해 그것의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다(sakala-ārammaṇa-karaṇa)는 뜻이다. 그 원반의 어느 한 일부분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Pm.75)”라고 설명하고 있다.
까시나에는 다음의 열 가지가 있다.
(1) 흙의 까시나(pathavīka-karaṇa)
(2) 물의 까시나(āpo-karaṇa)
(3) 불의 까시나(tejo-karaṇa)
(4) 바람의 까시나(vāyo-karaṇa)
(5) 푸른색의 까시나(nīla-karaṇa)
(6) 노란 색의 까시나(pīta-karaṇa)
(7) 붉은 색의 까시나(lohita-karaṇa)
(8) 흰색의 까시나(odāta-karaṇa)
(9) 허공의 까시나(ākāsa-karaṇa)
(10) 광명의 까시나(āloka-karaṇa)
◎ 까시나 수행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훈련이므로, 먼저 마음을 집중시킬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상좌부불교의 이론서인 『청정도론』(제1권)에는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모두 40가지가 열거되어 있다. 그중 네 가지는 무색계선의 대상이고, 나머지는 색계선의 대상이다. 전자는 후자를 성취한 다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나머지 36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에는 붓고, 검푸르고, 문드러진 등의 더러운 모습[부정상(不淨相)] 열 가지, 불·법·승·죽음·호흡 등 계속해서 생각할 대상 열 가지,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하나의 대상만이 두루 가득한 까시나(kasin.a[遍處, 遍滿]) 열 가지 - 그것은 땅·물·불·바람[地水火風]의 네 가지 근본 물질, 청·황·적·백의 네 가지 색깔, 광명, 허공이다 - 등이 있다.
수행자가 집중할 대상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 위 이론서에는 수행자의 기질에 탐하는 기질, 성내는 기질, 어리석은 기질, 믿는 기질, 지적인 기질, 사색적인 기질의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하고, 그 기질에 맞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본 『구사론』(제1권)에서는 오직 더러운 모습을 관찰하는 것[不淨觀]과 호흡을 관찰하는 것[持息念]의 두 가지 문(門)만이 있을 뿐이라고 단언하면서 전자는 탐하는 기질[貪]에게 적합하고, 후자는 이지적인 기질[尋]에게 적합하다고 단순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명을 보면 수행자가 어떠한 대상을 선택해 수행하는가에 따라 성취가 빠르기도 하고 어렵기도 함을 알 수 있다. 경전에도 대상의 선택이 잘못되어 수행의 성취를 보지 못하는 사례가 언급되어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보게 될 간화선에서 화두(話頭)를 선택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것을 자신의 기질을 알아볼 수 있는 스승에게서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간략히 살펴본다. 대상을 『구사론』이 제시하는 두 가지 방법 중의 하나로 선택하면 좋겠지만, 그 편보다는 까시나 쪽이 설명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쉬우므로, 대상을 청색의 까시나로 해서 설명한다.
먼저 수행자는 청색의 까시나를 마련해야 한다. 『청정도론』에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청색의 원반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북같이 생긴 원형 위에 푸른 천을 덮어씌운 직경 30cm가량의 원반을 만들어 바닥에서 60cm가량 높이의 벽에 건 다음, 1~1.5m가량 떨어져 앉아 이를 주시한다. 더 멀면 까시나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더 가까우면 까시나의 결점이 드러나서 좋지 않다고 한다. 두 눈을 적당하게 뜨고-보통 이것을 반쯤 뜬다고 해서 반개(半開)라고 표현한다- 주시해 표상을 취하는데, 너무 크게 뜨면 눈이 쉬 피로해지고, 너무 작게 뜨면 표상이 분명해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처음에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 푸른 원반에 집중해 주시하는 것을 익혀야 한다. 주시할 때에는 ‘푸름’, ‘푸름’이라고 마음에 새기면서 주시하고, 주시에 의해 그 푸른 표상이 뚜렷해지면 눈을 감고 마음만으로 그 푸름에 집중하다가 약해지면 다시 눈을 뜨고 주시하기를 반복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면 어느 때엔가 눈을 감아도 눈을 뜨고 볼 때와 같이 분명한 푸름의 표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를 ‘익힌 표상(uggaha-nimitta)’이라고 한다.
이것이 일어나면 서서히 수행의 장애들이 제압되고 가라앉는다고 한다. 수행자는 이 익힌 표상을 지속적으로 주시하다가, 표상이 분명치 않게 되면 종전의 수행을 되풀이해 다시 익힌 표상을 출현시켜 주시하는 훈련을 반복한다. 그러면 언젠가 ‘마치 익힌 표상을 부수고 나오는 것처럼 그보다 백배, 천배 더 청정해’ 순수하고 결점이 없는 표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를 ‘닮은 표상(pat.ibha-ga-nimitta)’이라고 한다. 이것이 나타나면 반드시 장애는 억압되고 가라앉으며, 근접삼매[근분정(近分定)]를 거쳐 본삼매[근본정(根本定)]에 들게 된다고 한다.
본삼매란 닮은 표상에 대한 집중이 지속되면서 선정의 구성 요소들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이름 그대로의 본삼매를 말하는데, 앞에서 설명된 초선(初禪)부터가 이에 해당한다. 근접삼매란 닮은 표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표상이 사라져버리므로 다시 그것을 일으켜야 하는 등 아직 선정의 구성 요소들이 견고하지 않은 단계를 말한다.
수행자는 본삼매에 들고, 머물고, 나오고 하는 것이 자유자재하게 되도록 수행을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자유자재하게 되면 초선에 대해서, 이것은 다섯 가지 장애와 가깝고, ① 사유[尋]와 ② 숙고[伺]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가 거칠어서 결점이 크다고 보고, 이들을 가라앉힌 집중을 닦아 제2선에 든다. 그런 다음 다시 제2선에 대한 자유자재를 얻은 후 다시, ③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림에서 오는 기쁨[喜]이라는 구성 요소를 버린 제3선으로, 다시 마찬가지 방법으로 ④ 정신적·신체적 즐거움[樂]이라는 구성 요소를 버려서, ‘평온하고 새김이 청정[捨念淸淨]한 제4선’에 들게 되는데, 여기에서 최고 수준의 집중이 성취된다. 그리고 이 제4선을 기초로 해서 무색계선에 드는 수행도 할 수 있게 된다.
수행자가 이와 같은 선정을 성취하면, 앞에서 본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비롯한 초월적 정신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등 많은 유익함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의식의 분별을 떠난 집중력의 성취에 의해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가 굳건해진다는 것이다.
◎ 깔라(Kāḷa)
깔라(Kāḷa)는 마하깔라(Mahā-kāḷa)라고도 하며, 만제리까 나가바와나(Mañjerika Nāgabhavana)에 사는 용왕이다. 원래 깔라(kāḷa)는 ‘시간’이란 뜻이다. 보살이 수자타(Sujāta)가 바친 우유죽을 들고 나서 발우를 네란자라(尼連禪河, Neranjarā)강에 띄워 보내자, 발우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네란자라강 밑의 용왕의 처소에 가라않아서 이미 와 있던 세 분의 과거 부처님의 발우들과 맞부딪쳤다. 이를 본 용왕은 과거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또 한분의 부처님이 나오셨다고 기뻐했다. 용왕은 1겁이라는 아주 긴 시간을 살기 때문에 고따마 부처님을 위시한 현겁(賢劫)의 네 분 부처님을 모두 친견할 수 있었다. 훗날 아소까(Asoka)왕이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자, 깔라 용왕은 32상과 80종호를 갖춘 완벽한 불상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 깔라빠(kalāpa) 깔라빠(kalāpa)는 무리, 더미, 무더기, 적집이란 뜻으로 아비담마에서 물질의 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마음이 항상 마음의 작용들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는 것처럼 모든 물질도 단독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항상 무리지어서 일어나고 멸하는데 이런 무리를 깔라빠라고 한다. 이 깔라빠는 (1) 땅(地, pathavī), (2) 물(水, āpo), (3) 불(火, tejo), (4) 바람(風, vāyo), (5) 물질(色, rūpa), (6) 냄새(香, gandha), (7) 맛(味, rasa), (8) 영양분(ojā)의 8가지가 있다. 이 8가지는 물질의 무리를 이루는 최소의 구성요소로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인 아위닙보가(avinibbhoga)라고 한다. 그래서 8가지로만 구성된 깔라빠를 ‘순수한 팔원소(suddhaṭṭhaka)’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깔라빠는 이들 여덟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그 깔라빠의 특성에 따라 다른 물질을 더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다 다른 하나가 더 붙으면 구원소(navaka)가 되고 다시 하나가 더 붙으면 십원소(dasaka)가 되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9원소는 8가지 아위닙보가에다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이라는 물질이 하나 더 붙어서 9원소가 되는 것이다. 이 아위닙보가는 물질의 무리인 깔라빠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위빠사나에서 깔라빠가 중요한 이유는「청정도론」(18장 후반부와 19장 전반부)에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시작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최소단위로서의 법으로 존재를 살피지 않고 개념으로서만 존재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라 정의하는 위빠사나는 반드시 이러한 개념적 존재를 분석해서 법으로 환원해서 살펴야한다. 그리고 물질은 정신적 현상(수-상-행-식)보다 거칠고 그래서 살피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다 보니 위빠사나의 시작도 바로 이러한 물질의 깔라빠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깔라빠를 관찰하거나 명상한다함은 이러한 물질을 개념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을 떨쳐내고 땅, 물, 불, 바람, 물질, 냄새, 맛, 영양분 등의 적집으로 본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중에도 우리는 이러한 무수한 개념으로 무의식 중에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버리고 법의 조합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깔라빠로 보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깊은 수행일지라도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거나 아니면 다른 엉뚱한 현상에 놀아나면서 그것을 수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시작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 깔랄라(kalala)
주석서에 따르면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아는 다섯 단계를 거쳐 성장하고 태어난다고 한다. 이를 태내오위(胎內五位)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1) 깔랄라(kalala): 임신 직후부터 1주까지의 태아로, 세 가닥의 양모로 이루어진 실타래의 끝에 놓인 기름방울 크기이다.(2) 압부다(arbuda): 임신 2~3주의 태아로 고기 씻은 물의 색깔을 띠고 있다.(3) 뻬시(pesi): 임신 3~4주의 태아로 용해된 주석모양이며 연분홍색깔을 띠고 있다.(4) 가나(ghana): 임신 후 4~5주의 태아로 달rif 모양을 하고 있다.(5) 빠사카(pasākhā): 임신 후 6주 이상의 태아로 두 팔, 두 다리, 머리의 기초가 되는 다섯 개의 돌기가 생겨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머리카락, 몸 털, 손발톱은 42주가 지나야 생겨난다.
◎ 꼬살라(Kosala)왕
꼬살라(Kosala)왕은 빠세나디(Pasenadī)왕을 가리킨다. 빠세나디는 꼬살라국의 왕이기 때문에 빠세나디 꼬살라(Pasenadī-Kosala)라고도 불린다. 그는 마하꼬살라(Mahā-kosala)왕의 아들이었다. 그 당시 인도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교육도시로 알려진 딱까실라(Takkasilā)로 유학하여 릿차위(Licchavī)의 마할리(Mahāli)와 말라(Malla)의 반둘라(Bandhula) 왕자 등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여러 학문과 기술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하꼬살라왕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DhpA.i.338) 그는 선정(善政)에 힘썼으며 뇌물과 부패를 청산하려고 애썼다고 한다.(SA.i.109) 그의 정비는 말리까(Mallikā)였는데 부처님께 크나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녀가 기증한 정사도 있었다. 그는 부처님과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하며, 그래서 일찍부터 부처님과 교분을 맺었으며 죽을 때까지 헌신적인 부처님의 신도였다. 그가 얼마나 부처님을 존경하고 흠모하였는지는 맛지마 니까야,「법탑경」(M89) 등 여러 경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러 문헌(DhpA.i.339; J.i.133; iv.144 등)에 따르면 그는 석가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부처님과 인척관계를 맺고 싶어 하였다. 자부심이 강한 석가족은 마하나마(Mahānāma)와 하녀 사이에 난 딸인 와사바캇띠야(Vāsabhakhattiyā)를 보냈으며, 이들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위두다바(Vīdūdabha) 왕자이다. 위두다바 왕자가 커서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였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였고, 그래서 후에 위두다바는 석가족을 정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살육을 하였다고 한다. 이 위두다바는 빠세나디 왕의 총 사령관인 디가까라야나(Digha-kārāyana)의 도움으로 모반을 일으켜 왕이 되었으며, 빠세나디는 마가다(Magadha)로 가서 아자따삿뚜(Ajātasattu)의 도움을 청하려 하였지만 그가 라자가하(Rājagaha)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성문은 닫혀 있었다. 노후한 몸에 피로가 엄습한 그는 성 밖의 객사에서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하며 아자따삿뚜가 그의 시신을 잘 수습하였다. 이에 아자따삿뚜는 위두다바를 공격하려다가 대신들의 조언으로 그만 두었다고 한다. (M.ii.118; MA.ii.753; DhpA.i.353; J.iv.150) 그에게는 브라흐마닷따(Brahmadatta)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문하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며(ThaA.i.460) 그의 여동생 수마나(Sumanā) 공주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제따 숲을 기증한 제따(Jetā) 왕자도 그의 아들이었다. 부처님께서 후반부의 24여년 간을 사왓티(Sāvatthi)에서 머무실 정도로 꼬살라와 부처님과는 인연이 많은 곳이며 상윳따 니까야의 꼬살라 상응(Kosala-saṁyutta)은 모두 빠세나디왕과 관계된 가르침일 정도로 부처님과는 가장 인연이 깊었던 왕이었다. 후대 주석서인「아나가따왐사(Anāgatavaṁsa)」에 따르면 빠세나디는 4번째 미래불이 될 보살이라고 한다.
◎ 꼰단냐 (Koṇḍañña) 존자
꼰단냐(Koṇḍañña) 존자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 근처에 있는 도나와투(Doṇavatthu)라는 곳의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다. 그는 고따마 싯닷타 태자가 태어났을 때 관상을 보기 위해서 온 8명의 바라문 가운데 한명이었다. 관상학의 대가였던 그는 태자가 정등각자가 될 것을 예견하고 출가하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네 명과 함께 출가하였으며 이들을 다섯 비구(pañcavaggiyā-bikkhū)라고 한다. 그는 인간들 가운데서는 제일 먼저 법에 눈을 뜬 사람이며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기쁨을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aññasi vata bho koṇḍañño)”라고 두 번이나 외치셨다. 그래서 그는 안냐꼰단냐(완전하게 안 꼰단냐)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지 5일 뒤에 「무아상경(無我相經, Anattalakkhaṇa-sutta)」(S22i59:iii,66f)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Vin.i.13~14) 그는 “ehi, bhikkhu.(오라, 비구여)”라는 정형구로 구족계(具足戒, upasampada)를 받은 첫 번째 비구이며 전체 비구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구족계를 받았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 일집(AⅠ:14:1-1)에서 ‘구참비구 제자들 가운데서 으뜸’으로 불리고 있다. 꼰단냐 존자는 혼자 한거하기를 좋아하여 대중처소에는 아주 드물게 나타났으며, 부처님보다 먼저 히말라야의 찻단따숲(chaddanta-bhavana)에서 반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 꿰뚫음
‘꿰뚫음’으로 번역한 빠띠웨다(paṭivedha)는 PED에서 ‘literally piercing, i.e. penetration, comprehension, attainment, insight, knowledge.'라고 설명되듯이, 출세간의 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주석서에서는 법(Dhamma)을 빠리야띠(pariyatti), 빠띠빠띠(paṭipatti), 빠띠웨다(paṭ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빠리야띠란 붓다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ṭaka)을 공부하는 교학을 말하고, 빠띠빠띠란 계·정·혜 삼학을 닦는 수행을 말하며, 빠띠웨다란 이러한 빠리야띠와 빠띠빠띠를 통하여 출세간의 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 꿰뚫음의 의미(pativedhattho)
'꿰뚫음의 의미(pativedhattho)'에서 '꿰뚫음(pativedha. 통달. 通達)' 이란 'pathivijjhati'의 명사형으로 'pativvyadh'에 기원을 둔 말이다. 본래의 의미는 '꿰뚫다'인데 '진입하다'. '획득하다'. '체득하다', '이해하다'등으로 그 뜻이 확장된 말이다. 주석서인 빠디삼비다막가에는 '꿰뚫음의 의미로 밝음(明)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pativedhatthena vijjha abhinneyya)' 라는 구절이 있고, '완전한 앎에 의한 꿰뚫음으로 꿰뚫어 고통의 진리를 끊는다. 끊음에 의한 꿰뚫음으로 꿰뚫어 일어남의 진리를 끊는다. 겪어 앎에 의한 꿰뚫음으로 꿰뚫어 고통의 소멸의 진지를 끊는다(dukkhasaccam parinnapativedham pativijjhanto pajahati. samudayasaccam pahanappativedham pativijjhanto pajahati. nirodhasaccam sacchikiriyapativedham pativijjhanto pajahati)' 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