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모음 - ㅂ
◎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ātimoksa, pātimokkha)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ātimoksa, pātimokkha)란 비구·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의 조문을 모아 놓은 것. 계율의 조문 하나하나를 학처(學處, sikkhāpada)라고 하며, 이 학처들을 모아 놓은 조문집을 바라제목차라 한다. 바라제목차(波羅帝墓叉)라고도 음사하며, 계본(戒本)·계경(戒經)·해탈계경(解脫戒經), 혹은 조문 하나하나가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인 살생·도둑질·음행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행인 양설·악구·기어·망어로 부터 벗어나 번뇌를 멸하고 해탈을 얻는데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별해탈(別解脫)·처처해탈(處處解脫)이라 한역한다. 각 부파의 율장마다 조문 수에 차이가 있는데, 『사분율(四分律)』의 경우에는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이다. 비구 250계는 사바라이(四波羅夷,pārājikā), 십삼승잔(十三僧殘, samghādisesā), 이부정(二不定, aniyatā), 삼십사타(三十捨墮, nissaggiyā pācittiyā), 구십바일제(九十波逸提, pācittiyā), 사바라제제사니(四波羅提提舍尼, pātidesaniyā), 백중학(百衆學, sekhiyā), 칠멸쟁(七滅諍, adhikaranasamathā)으로 이루어지며, 비구니 348계는 8바라이, 17승잔, 30사타, 178바일제, 8바라제제사니, 100중학, 7멸쟁으로 이루어진다.
◎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ātimoksa)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ātimoksa)는 별해탈(別解脫)·처처해탈(處處解脫)·별처해탈(別處解脫)·수순해탈(隨順解脫)·해탈생사(解脫生死)·보득해탈(保得解脫) 등으로 번역하며, 계율을 말한다. 이것은 몸과 입으로 범한 허물을 따로따로 해탈하는 것이므로 별해탈이라고 한다.
◎ 바라이(波羅夷, pārājika)
바라이(波羅夷, pārājika)는 계율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 비구의 250계 중 처음의 4조항으로, 오편칠취(五篇七聚)의 제1科. 단두(斷頭)·타불여(墮不如)·퇴몰(退沒)·타법(墮法)·악법(惡法)·타락(墮落)·타승(他勝)·기무여(棄無餘) 등으로 한역한다. 이 죄를 저지르면 교단으로부터 추방과 같은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며, 다시 비구가 될 수 없다.
◎ 바꿀라(Bākula) 존자
바꿀라(Bākula) 존자는 꼬삼비(Kosambī)의 한 부유한 상인의 집에 태어났다. 그가 갓 난 아이였을 때 보모가 야무나 강에서 목욕을 시키다가 떨어뜨려 큰 고기가 삼켰다고 한다. 그 고기는 잡혀서 와나라시의 상인 집에 팔려갔는데 아이는 다치지 않고 산채로 뱃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로 삼고 키우겠다고 우겼고 왕은 두 가문에서 공동으로 그를 자식으로 삼으라고 판정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두 가문에 속하는 자(ba-kkula)라는 뜻인 바꿀라(Bākul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80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출가한지 8일째 되던 새벽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그를 병 없이 장수하는 자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하셨다.(AA.ii.596)
◎ 바라밀(pāramī)
‘바라밀’이라 번역한 빠라미(pāramī)는 pāram(~넘어서=깨달음)+ī√(가다)의 합성어이다. 즉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는 것‘ 이라는 뜻이다. 혹은 빠라미타(pāramitta)라고도 하는데 같은 뜻으로 쓰인다. 중국에서 바라밀(波羅密)로 음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perfection이라 한다. 성불의 수기(授記)를 받은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윤회(saṃsāra)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닦아야 하는 덕성으로 후기 주석서에서 10가지 바라밀(dasa-pāramiyo)로 정리되었다.「짜리야삐따까(小行藏, Cariya-piṭaka)」에 근거하여 이러한 10가지 바라밀을 살펴본다.
(1) 보시(dāna): 관대함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나누어 줌으로써 사물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나누어 주는 집착 없음으로 표현되고 근접 원인은 시물(施物)이다.
(2) 지계(sīla): 몸과 말로 하는 선한 행위를 유지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불선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몸이나 말의 행동을 제어한다. 그것은 언행이 청정해짐으로써 표현된다. 근접원인은 잘못을 두려워함(hiri)과 도덕적 두려움(ottappa)이다.
(3) 출리(nekkhamma): 감각적 쾌락을 버려서 존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감각적 쾌락과 존재의 위험스러움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는 것으로 표출되고, 근접원인은 사려 깊은 두려움으로 감각적 쾌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4) 지혜(paññā): 참된 성질로 사물을 보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감각의 모든 대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혼동하지 않음으로 표출되고, 근접원인은 집중(samādhi)이다.
(5) 정진(viriya) : 부지런함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분발하게 하는 것이다. 끈질김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과 부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사려 깊은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긴박감이다.
(6) 인욕(khanti): 참을성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싫어함이나 좋아함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극도로 성을 돋우는 상황에 처해서도 참는 것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7) 진실(sacca): 말로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보거나 아는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다. 감미롭고 상냥한 언어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모든 중생들에 대한 연민어린 상냥함이다.
(8) 결의(adhiṭṭhāna): 바라밀을 완성하기 위해 공덕행을 하고자 하는 결심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자신의 길에 놓인 모든 반대와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기 입장을 확고히 함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바라밀을 수행할 때 보시와 같은 매우 공덕이 되는 행위이다.
(9) 자애(mettā): 다른 중생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다른 중생의 행복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 도움을 주려는 태도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다른 이들의 좋은 점만을 보는 것이다.
(10) 평온(upekkhā): 칭찬과 비난에 직면해서 평등심을 유지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감정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 놓는 것이다. 공평함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자신의 과거행위에 대한 사려 깊은 지혜이다.
◎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에 따르면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는 (1) 업이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kammasakata-sammādiṭṭhi), (2) 선정의 바른 견해(jhāna-sammādiṭṭhi), (3) 도의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 (4)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 (5) 과의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의 다섯 가지가 있다
◎ 바른 사유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는 다음의 세 가지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1) 출리의 사유(nekkhamma-saṅkappa)출리로 옮긴 네까마(nekkhamma)는 nis(밗으로)+√kram(건너 뛰다)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벗어남’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출가(出家), 출리(出離)’를 뜻한다. 영어로는 renounciation이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출가나 출리는 감각적 욕망이나 갈애 등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여 전통적으로 이 단어는 kāma(감각적 욕망)이 없음(nis+kāma)으로 해석해왔다. 그래서 바른 사유란 첫째가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생각, 사유, 의지라는 것이다.
(2) 악의 없음(abyāpāda)의 사유악의 없음으로 옮긴 아브야빠다(abyāpāda)는 부정접두어인 a+byāpāda/byāpāda(악의)로 분해된다. vyāpāda/byāpāda는 vi(분리하여)+ā(향하여)+√pad(가다)의 명사형으로 ‘나쁘게 만들다, 해치다’의 의미에서 악의로 번역하였다. 악의는 마음의 작용 중에서 성냄(dosa)과 일치하는데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적의(paṭigha)로 나타난다.
(3) 해치지 않음의 사유(avihiṃsā-saṅkappa)해치지 않음으로 옮긴 아힘사(avihiṃsā)는 a(부정접두어)+vihiṃsā(해코지, 잔인함)으로 분해된다.
한편 hiṃsā는 vi(분리하여)+√hiṃs(해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 남을 해치고 괴롭히려는 욕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사유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과 의지, 적의나 악의를 갖지 않으려는 생각과 의지, 비폭력, 혹은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과 의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사유는 4가지 무량한 마음인 사무량심(四無量心, appamaññā)과도 연결된다 할 수 있다. 이 사무량심은 4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인 사범주(四梵住, brahma-vihāra)라고도 하며, ➀ 자애(慈, mettā), ➁ 연민(悲, karuṇā), ➂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④ 평온(捨, upekkhā)이 있다. 이 사무량심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이들을 단순히 행동원칙이나 숙고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치지 말고 체계적인 명상의 주제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명상을 ‘4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는 수행(四梵住修行, brahma-vihāra-bhāvanā)’이라 한다. 이 수행을 하는 실제적인 목적은 이들 4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에 힘입어 선정(禪定, jhãna)이라는 고도의 정신집중 단계를 성취하는 데 있다. 자애나 연민, 더불어 기뻐함에 대해 명상을 할 경우에는 모두가 4가지 선정 중에서 3선정까지 성취할 수 있는데 반해, 평온을 주된 요소로 명상을 하면 4선정까지 도달할 수 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장소, 어떤 때에도 항상 출리와 악의 없음과 비폭력이라는 정사유를 가져야한다는 부처님의 간절한 메시지가 팔정도의 두 번째 구성요소에는 들어있다.
◎ 바왕가(bhavaṅga)
바왕가(bhavaṅga)는 bhava(有, 존재)+aṅga(分, 요소, 부분)의 합성어로, 한 존재의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즉 존재를 지속시키는 마음이다. 중국에서는 유분(有分)이나 유지(有支)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the factor of being, sub-consciousness, life-continuum 등으로 옮기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하고 알시 어려운 마음으로,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나 기절했을 때에도 지속되는 마음이다. 서양 심리학의 용어로는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여섯 감각기관(六根, indriya)으로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바왕가의 심찰나가 계속 흐른다. 우리의 인식과정(vīthi-citta)은 모두 이러한 바왕가를 거쳐서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간다. 즉 인식과정에서 특정한 대상을 대상으로 일어난 마음들은 일련의 인식과정을 거치고 난 뒤 사라진다. 그러면 바왕가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서 어떤 대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 전개될 때 까지 계속된다.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재생연결식의 대상을 대상으로 한 바왕가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바왕가가 지속되다가 한 대상이 나타나면 바왕가는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을 ‘바왕가의 동요(bhavaṅga-calana)’라 부르고 움직인 바왕가는 바왕가의 상태에서 동적인 마음으로 전환된다. 이것을 ‘바왕가의 끊어짐(bhavaṅga-uppaccheda)’이라고 한다. 이렇게 바왕가가 끊어지면 마음(意, māno)은 대상으로 전향을 하는 데 이것이 바로 ‘전향(āvajjana)’이다. 그리고 감각의 대상이 일어나 감각의 문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에 하나의 바왕가가 흘러 들어가 버리게 되는데 그것을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ṅga)’라고 한다.
◎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은 한 개체의 존재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즉 존재지속심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life-continuum으로 옮기고 있고 중국에서 유분(有分), 유분심(有分心), 유분식(有分識)으로 한역하였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아주 미세하고 수동적인 마음으로 서양 심리학의 용어로는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이 없어 보이는 깊은 잠속이나 기절했을 때도 이 바왕가는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바왕가는 항상 강이나 흐름에 비유되며 바왕가의 흐름이란 뜻의 바왕가소따(bhavaṅga-sota), 또는 바왕가산따띠(bhavaṅga-santati)란 말이 주석서에 많이 나온다. 모든 마음은 대상 없이 일어나지 않듯이 이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도 임종직전 나타나는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jāti-nimitta) 중의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지고 흘러간다.
◎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ṅga-pahāna)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이라 번역한 따당가 빠하나(tadaṅga-pahāna)는 5가지(또는 3가지) 버림(phāna) 중의 하나이다.「청정도론」(Vis.XXⅢ.1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마치 밤에 켜놓은 등불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위빠사나의 한 부분인 지혜의 구성요소로 그와 반대되는 버려야할 법들을 버림이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이다. 즉, (1) 정신과 물질을 분석함으로써 유신견을 버린다.(2)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무인론(無因論)을 가지는 것으로 거짓 원인을 주장하는 견해와 의심의 때를 버린다.(3) 깔라빠를 명상함으로써, ‘나’, ‘나의 것’이라는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4) 도와 도 아님을 구분함으로써 도 아닌 것이 도라는 인식을 버린다.(5) 일어나는 것을 봄으로써 허무하다는 견해를 버린다.(6)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영원하다는 견해를 버린다.(7) 공포가 나타남으로써 두려움을 가진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인식을 버린다.(8) 위험을 봄으로써 안락하다는 견해를 버린다.(9) 해탈하기를 원함으로써 ‘해탈을 원치 않음’을 버린다.(10) 깊이 숙고함으로써 ‘깊이 숙고하지 않음’을 버린다.(11) 평온으로 ‘평온하지 않음’을 버린다.(12) 수순으로 ‘진리에 어긋나는 이해’를 버린다.”
◎ 받아들이는 마음(sampaṭicchana-citta)
‘받아들이는 마음(sampaṭicchana-citta)’에서 받아들임으로 옮긴 삼빠띠짜나(sampaṭicchana)는 saṁ(함께)+paṭi(대해서)+√iṣ(보내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로 문자 그대로 이쪽으로 향해 보내는 의미에서 ‘받아들임’의 뜻이 되었다. 영어에서는 receiving으로 정착되었다. 대상을 잘 확인하여 받아들이는 작용이다. 이 받아들임과 조사함(santīraṇa)과 결정함(voṭṭhapana)은 오직 오문전향을 통해서, 즉 눈, 귀, 코, 혀, 몸의 전오식(前五識)을 통해서 일어나는 오문인식과정에만 나타나며 의문전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문전향은 마음의 작용을 그 대상으로 하므로 받아들이고 조사하고 결정하는 역할 없이 즉각적으로 자와나가 일어난다.
◎ 배움
'배움'으로 번역한 수따(suta)는 √suṇāti(듣다)의 과거분사로 쓰였다. 여기서 이 suṇāti의 의미를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냥 ‘들었다’로 이해하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바라문교나 자이나교 등 고대 인도의 전통에서는 듣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듣는다는 의미 이상으로 배웠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모든 가르침은 문자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모두 스승의 입에서 제자들에게로 구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제로 빨리 경에서 다문(多聞)의 의미로 많이 나타나는 바후수따(bahussuta)는 영어로도 ‘very learned’라고 번역되듯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보다는 많이 배워 지식과 학문과 수행과 인격이 고상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빨리 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는 말이 ‘assutavā puthujjano’인데 ‘배우지 못한 범부’라고 번역되듯이 많이 배워서 향상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반대되는 개념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sutavā ariyasāvaka)’로서 부처님의 제자를 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사와까(sāvaka)라는 말 자체가 성문(聲聞)으로 번역하고 있는 술어인데 이 단어 역시 √śru(듣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부처님의 금구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분들이라는 의미이다.
◎ 버림
‘버림’이라 번역한 빠하나(pahāna)는 ‘버리다, 떠나다, 포기하다, 제거하다, 떠나 보내다, 없애다’라는 뜻의 동사 pajahati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PED에서 ‘giving up, leaving, abandoning, rejection’으로 설명되듯이, 문자적으로 ‘버리고, 떠나고, 포기하고, 거부함’을 뜻한다. 「청정도론」(Vis.XXII.108)에는 3가지 버림이, 다른 주석서들(DhsA.351; SnA.8)에는 5가지 버림이 각각 열거되고 있다. (1)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bhana-pahāna): 선정을 통하여 5가지 장애를 일시적으로 억누르는 것이다.(2)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nga-pahāna): 마치 밤에 켜놓은 등불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위빠사나의 한 부분인 지혜의 구성요소로 그와 반대되는 버려야할 법들을 버리는 것이다.(3)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 마치 번개에 맞아 타버린 나무처럼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통하여 족쇄와 다른 삿된 법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4) 편안히 가라않음에 의한 버림(paṭipassaddhi-pahāna): 도에 들어서는 입구에서 족쇄들이 사라지고 나면, 과(phala)를 얻는 시점부터 족쇄들이 영원히 사라지고 잠잠해지는 것이다.(5) 벗어남에 의한 버림(nissaraṇa-pahāna): 소멸(nirodha)이나 열반(nibbāna)과 동의어이다.(Ps.M.i.27)중국에서 사단(捨斷)이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abandoning, overcoming이라고 한다.
◎ 버림의 이해
‘버림의 이해’라고 옮긴 빠하나비싸마야(pahānabhisamāya)는 pahāna(捨斷, 버림)+abhisamāya(現觀, 통찰, 관통, 이해)의 합성어이다. ‘버림으로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사단현관(捨斷現觀)으로 옮겼으며, 영어권에서는 보통 knowing the Truth of Origination by abandonment라고 하는데, 원문에서는 knowing samudāya by abandonment라고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의 samudāya는 일어남의 진리, 즉 집제(集諦)를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삼마야(abhisamāya)는 abhisameti(도착하다, 분명히 이해하다, 꿰뚫다)라는 동사에서 남성명사이고, 이 동사는 abhi(~에 대하여)+sam(완전히)+√i(가다)+a로 분해된다. 그래서 아비삼마야는 문자적으로는 ‘완전히 감, 완전한 도착’이란 뜻이다. PED에서 ‘insight into, comprehension, realization, clear understanding, grasp, penetration.’라고 설명되듯이, 통찰, 분명한 이해, 깨달음, 파악, 꿰뚫음’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 과거에 현관(現觀)으로 번역했는데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이 말은 현대 중국의 백화체(白話體)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고어(古語)이고 한국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한역어 만을 가지고 빨리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요즘의 중화권 불교계에서는 통찰(洞察)이나 ‘이해하다, 깨닫다, 납득하다’라는 뜻의 영회(領會) 등으로 일상어에 가깝게 새로 번역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영어권에서는 특별히 정해진 번역어가 없다. 이 아비삼마야는 특히 주석서 문헌에서 주로 사성제(四聖諦)를 꿰뚫는 문맥에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Vis.XXⅡ.92)에서는 ‘두루 아는 지혜(pariññā)를 관통하여 괴로움을 이해한다. 버림(pahāna)을 관통하여 일어남을 이해한다. 수행(bhāvanā)을 이해하여 도를 이해한다. 실현( sacchikiriya)을 이해하여 소멸을 이해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 번뇌
'번뇌(煩惱)'로 옮긴 낄레사(kilesa/Sk.kleśa)는 √kliś(괴롭히다) 또는 kilissati(더럽히다, 물들이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본다. 산스끄리뜨어의 kleśa는 kliś(괴롭히다)에서 파생된 말인 듯하며,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의 해석은 이에 의거하고 있다. 즉 ‘몸과 마음을 들볶아서 괴롭게 하는 까닭에 번뇌라고 부른다. 이것이 곧 수면(隨眠, anuśaya)이다’(T28:984a)라고 언급되어 있듯이, 몸과 마음을 교란하여 고요함을 방해하는 것이 번뇌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상좌부에서는 kilissati(더럽히다, 물들다)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청정도론」과 주석서의 해석도 이에 의거하고 있다. 즉「청정도론」에서는 ‘스스로 오염되어 있으면서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번뇌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PED에서 ‘stain, soil, impurity, fig. affliction; in a moral sense, depravity, lust. Its occurrence in the Piṭakas is rare; in later works, very frequent, where it is approx. tantamount to our terms lower, or unregenerate nature, sinful desires, vices, passions.’라고 설명되듯이, 그 일차적인 의미는 ‘때, 더러움, 오염물’이지만 비유적으로 쓰여서 도덕적인 의미의 사악, 탐욕 등의 번뇌(煩惱)를 나타낸다. 경장에서는 드물게 보이지만 후기 주석서에서부터 ‘저열하고 삿된 본성, 사악한 욕망, 악덕, 애욕’과 대체로 같은 말로 아주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번뇌(煩惱)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defilement, mental impurity라고 번역한다.
「위방가(Vibhanga)」(Vbh.385)에서는 ⓛ 탐욕(lobha), ② 성냄(dosa), ③ 어리석음(moha), ④ 자만(māna), ⑤ 사견(diṭṭhi), ⑥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⑦ 해태(thīna), ⑧ 들뜸(uddhacca)의 8가지 번뇌가 열거되어 있으며,「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i)」에서는 여기에 ⑨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음(ahiri), ⑩ 도덕적 두려움 없음(anotta)이 추가된 10가지 번뇌가 열거되어 있다. 그래서 상좌부 불교에서는 후세에 이르기까지 번뇌를 이렇게 총 10가지로 정형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담맛타상가하(Abhidhammattha Saṅghaha)」에서는 번뇌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4가지 번뇌(漏, āsava), 4가지 폭류(暴流, ogha), 4가지 속박(軛, yoga), 4가지 매듭(繫, kāyagantha), 4가지 집착(upādāna), 5가지 장애(五蓋, nīvarana), 7가지 잠재성향(隨眼, anusaya),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가 열거되어 있다. 이것들은 경장(經藏)이후의 번뇌를 정리하는 방식을 망라해서 밝힌 것이다. 이 들 중에서는 ‘아사와(漏, āsava)’가 가장 일찍부터 사용되었는데, 번뇌는 마음속의 더러운 것이 외부로 누출되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흐르는 것’을 뜻하는 아사와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kilesa와 비슷한 술어로는 ‘더러움, 오염물, 부정물’로 번역되는 우빠낄레사(upakkilesa)가 있다.
번뇌는 그 정도와 세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행동으로 표출되는 번뇌(違犯煩惱, vītakkama-kilesa)몸과 말로 하는 행동으로 표출되어 계를 어기도록 하는 거친 단계의 번뇌이다. 이러한 번뇌는 계율(戒, sīla)로 제거할 수 있다.
(2) 마음을 속박하는 번뇌(繫縛煩惱, pariyutthāna-kilesa)감각적 욕망, 성냄, 적의 등과 같이 마음을 속박하는 중간 단계의 번뇌이다. 이러한 번뇌는 집중(定, samādhi)으로 제거할 수 있다.
(3) 잠재하는 번뇌(隨眠煩惱, anusaya-kilesa)내면에 잠복해 있어서 표면적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적당한 대상이 출현하면 바로 발현하는 매우 미세한 단계의 번뇌이다. 이러한 번뇌는 성스러운 도의 지혜인 통찰지(慧, paññā)로 제거할 수 있다.
◎ 번뇌(āsava)
'번뇌'로 옮긴 아사와(āsava)는 ā(향하여)+√sru(흐르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원래는 나무와 식물에서 흘러나오는 분비물이나 취하는 성분이 함유된 추출물, 또는 술의 원액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흐르는 것’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마음속의 해로운 상태나 더러움이 외부로 표출된다’는 뜻으로 정착이 된 것이다. PED에서 ‘in psychology, technical term for certain specified ideas which intoxicate the mind (bemuddle it, befoozle it, so that it cannot rise to higher things)’라고 설명되듯이, 마음을 취하게 하고, 마음을 더럽혀서 마음이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어떤 특정한 상태를 지칭하는 심리학적 전문용어다. 또한 주석서들(Asl.48)에서는 존재하는 것으로는 최고로 높은 세상까지 흘러가고 법(현상)으로는 고뜨라부의 영역에까지 흘러들기 때문에 아사와라고 설명한다. 중국에서는 루(漏), 유루(有漏)로 옮겼고, 영어권에서는 influx, canker, taint 등으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번뇌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 kāmā-āsava),
(2) 존재의 번뇌(有漏, bhava-āsava),
(3) 사견의 번뇌(見漏, diṭṭhi-āsava),
(4) 무명의 번뇌(無明漏, avijjā-āsava).
그리고 이 네 가지 번뇌는 ‘네 가지 폭류(暴流, ogha)’와 ‘네 가지 속박(軛, yoga)’이란 이름으로도 경과 주석서에 종종 등장한다.
낀나사와(Khīṇāsava)는 ‘번뇌를 모두 여읜 자’, ‘번뇌가 다한 자’란 뜻으로 성자, 즉 아라한을 가리킨다. 그리고 육신통(六神通, abhiññā) 중의 하나인 누진통(漏盡通, āsavakkhaya-ñāṇa)은 위빠사나를 통한 통찰의 힘으로 이러한 모든 번뇌를 부순 지혜를 가리킨다.
◎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 7가지
맛지마 니까야, 「삽바아사와경(一切漏經, Sabbāsava-sutta)」(M2)은 어떻게 번뇌(漏, āsava)를 단속하고 이를 소멸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주제를 다룬 경으로 번뇌를 다음의 일곱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관찰(dassanā)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들
② 단속(samvarā)으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들
.③ 수용함(patisevanā)으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들.
④ 인내(adhivāsanā)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들.
⑤ 피함(parivajjanā)으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들.
⑥ 버림(vinodanā)으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들.
⑦ 수행(bhāvanā)으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인내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를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인내로써 제거해야 할 번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서 비구는 숙고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인내한다.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파리, 모기, 바람, 햇빛 파충류에 닿음과, 받아들이기 힘든 나쁜 말들과, 몸에 생겨난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심하고 좋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느낌들을 인내한다. 비구들이여, 인내하지 않으면 그에게 속상하고 참을 수 없는 번뇌가 일어날 것이다. 인내하면 그러한 속상하고 열 받는 번뇌들이 없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인내로써 제거해야할 번뇌라 한다."
◎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은 존재들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방식을 드러낸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회전은 번뇌의 회전이다. 무명(avijiā)으로 눈멀고 갈애(taṇhā)로 인해 내몰려서 사람은 여러 가지 불선업과 선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회전이 업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 업이 성숙하면 그것은 다시 과보로 익게 되고 그래서 업의 회전은 과보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들 과보에 대한 반응으로 이미 무명에 휩쓸려있는 사람은 더 즐거운 경험을 즐기려는 갈애에 압도되어 자기가 이미 가진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과보의 회전은 또 다른 번뇌의 회전을 낳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회전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무명이 위빠사나 지혜와 출세간의 도로 제거될 때까지 쉼 없이 계속 돌아간다. 「청정도론」(Vis.XVII)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여기서 행(行, saṅkhāra)과 존재(有, bhava)는 업의 회전이고, 무명(avijiā)과 갈애(taṇhā)와 집착(upādāna)은 번뇌의 회전이고, 식(識, vinñāṇa),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 āyatana), 감각접촉(觸, phassa), 느낌(受, vedanā)은 과보의 회전이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번뇌의 회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
◎ 범보천(梵輔天, brahmapurohita)
범보천(梵輔天, brahmapurohita)은 초선정(初禪定)을 닦아서 태어나는 색계천(色界天)인 초선천(初禪天) 가운데 하나이다. 초선천은 범중천(梵衆天, Brahma-pārisajjā)과 범보천(梵輔天, brahmapurohita)과 대범천(大梵天, Mahā-brahm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나함과를 얻으면 감각적 욕망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육욕천(六欲天)에 속하는 삼십삼천(三十三天)에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곧바로 색계천으로 올라간다.
◎ 범부
‘범부凡夫’로 번역한 뿌투쟈나(puthujjana)는 PED에서 ‘an ordinary, average person, a common worldling, a man of the people, an ordinary man.’이라고 설명되듯이, 평범한 사람, 범부중생, 보통 사람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천인과 인간,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아직 중생을 윤회계에 묶어두고 있는 족쇄(結, saṁyojana)를 끊지 못한 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반면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은 성자(ariya-puggala)라 부르고 수다원 이상의 성자의 경지에 들지 못한 모든 중생을 통틀어 범부라고 한다. 주석서(DA.i.59)에서는 “개개인의 여러 가지 형태의 번뇌를 생기게 하기 때문에 범부라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눈먼 범부와 선한 범부로 나누고 있는데 무더기(蘊, khandha), 장소(處, āyatana), 요소(界, dhātu) 등을 호지하고 반조하지 못하는 자를 눈먼 범부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자를 선한 범부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DA.i.59) 범부를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놓는 족쇄에는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➃ 감각적 욕망(kāma-rāgā), ➄ 적의(paṭigha), ➅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➆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➇ 자만(māna), ➈ 들뜸(uddhacca), ➉ 무명(無明 avijjā)의 10가지가 있다. 그리고 ①부터 ➄까지는 5가지 거친 족쇄(orambhāgiya-saṃyojana)인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 하고 ➅부터 ➉까지는 5가지 미세한 족쇄(uddhambhagiya-saṃyojana)인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한다. 수다원은 ①에서 ③을, 사다함은 ➃와 ➄를, 아라한은 나머지 ➅에서 ➉까지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낸다.
◎ 벽지불( 辟支佛)
‘벽지불(辟支佛)’이라 번역한 빳쩨까붓다(pacceka-buddha)에서 빳쩨까(pacceka)는 paṭi(~에 대하여)+eka(하나)가 합성된 단어로 ‘각각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별도로, 홀로’의 뜻이다. PED에서 ‘one enlightened by himself, i. e. one who has attained to the supreme and perfect insight, but dies without proclaiming the truth to the world.’라고 설명되듯이, 부처님의 교법이 사라진 시대에 나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깨달아서 세상에 법을 선포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분이 바로 벽지불이다. 즉 깨달았다는 뜻에서는 부처님과 같지만 중생들에게 법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부처님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과도 다르다. 중국에서 벽지불(辟支佛), 독각(獨覺), 연각(緣覺)으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Slient Buddha, Private Buddha, Solitary Buddha, Independently Enlightend one이라 한다. 상좌부 불교에 따르면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에는 부처님(Buddha), 벽지불(pacceka-buddha), 아라한(arahat)의 세 가지가 있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제자, 즉 성문(聲聞, sekha)이라고 한다. 성문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상수제자, 아누룻다와 마하까사빠와 아난다 등의 대제자, 그리고 일반 제자로 다시 나뉜다. 부처님, 벽지불, 아라한은 모두 깨달은 분들이지만 깨달음의 자질은 서로 다르다. 부처님은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할 수 있지만 벽지불은 홀로 지내는 부처님들이어서 원칙적으로 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다. 아라한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긴 하지만 부처님처럼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이 세 부류의 성자들이 바라밀(pāramī)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이루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차이가 많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4, 8 또는 16아승지겁과 10만겁 동안 열 가지 바라밀을 완성시켜야 한다. 하지만 벽지불의 경우에는 2아승지겁과 10만 겁만이 필요하다. 성문 가운데 상수 제자는 1아승지겁과 10만 겁, 대제자의 경우에는 10만 겁이 필요하고, 일반적인 제자의 경우에는 한 생이나 백 생 또는 천 생 또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벽지불은 남에게 법을 전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얻은 깨달음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꾼 꿈에 비유된다. 그리고 벽지불의 지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보다도 낮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J.iv.341) 또 재가자인 채로 벽지불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즉시 재가자의 표식이 사라지고 출가자의 위의를 갖춘다고 한다. 또한 한 시기에 오직 한 분만 출현하는 부처님과는 달리 출현하는 벽지불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은 히말라야에 있는 간다마다나(香醉山, Gandhamādana)산이다.
◎ 보살(菩薩)
‘보살(菩薩)’이라 번역한 보디삿따(Bodhisatta/Sk.Bodhisattva)는 bodhi(覺, 깨달음)+satta(유정, 중생, 존재)의 합성어이다. 본래 의미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해서 부처라고 불리기 이전의 상태를 보살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 산스끄리뜨 원음 보디사뜨와(Bodhisattva)를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음역한 것을 다시 보살(菩薩)로 줄여서 부른다. 그리고 이 개념은「자따까」에서 금생만을 보살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모든 전생을 다 보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보살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겁(劫)동안 윤회를 반복하며 10가지 바라밀(dasa-pāramiyo)을 닦아야 한다. 이 10가지 바라밀에는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출리(出離, nekkhamma), ④ 지혜(智慧, paññā), ⑤ 정진(精進, viriya), ⑥ 인욕(忍辱, khanti), ⑦ 진실(眞實, sacca), ⑧ 결의(決意, adhiṭṭhāna), ⑨ 자애(慈愛, mettā), ⑩ 평온(平穩, upekkhā)이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보살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1) 빤냐디까(Paññādhika): 지혜의 보살로 외부대상에 대한 숭배보다는 지혜를 개발하고 명상을 닦는데 더 힘을 쏟는다. 이러한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4아승지와 10만겁이 필요하다. 고따마 부처님이 이러한 보살에 해당된다.
(2) 삿다디까(Saddhādhika): 믿음과 확신이 주가 되는 보살로 믿음을 동반자로 하여 깨달음을 성취한다. 이러한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8아승지와 10만겁이 필요하다.
(3) 위리야디까(Viriyādhika): 정진의 보살로 언제나 중생을 위해 활동적으로 봉사하려고 한다. 명예나 평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봉사의 정신으로 열심히 중생을 돕는다. 이러한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16아승지와 10만겁이 필요하다. 미래의 멧떼야 부처님(彌勒, Metteyya Buddha)이 이러한 보살에 해당된다.
◎ 보시(布施)
‘보시(布施)’로 옮긴 다나(dāna)는 관대함이 그 특성이다. 그래서 영어에서 almsgiving, offering 외에도generosity라고도 번역한다. 보시는 부처님의 차제설법(次第說法)의 첫 번째 주제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세 가지 공덕행의 토대(puññā-kiriya-vatthu)나 네 가지 섭수하는 토대(四攝法, saṅgaha-vatthu), 그리고 열 가지 바라밀(dasa-pāramī)에서도 항상 첫 번째 덕목으로 꼽힌다. 보시는 세 가지 불선의 뿌리(akusala-mūla)의 첫번째인 탐욕(lobha)을 극복하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모든 선행을 일으키는 시발점이다. 그리고 보시는 가진 것을 편한 마음으로 놓아버리고 그것들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습성을 키운다.
◎ 보살장(菩薩藏)
보살장(菩薩藏)은 성문장(聲聞藏)과 보살장(菩薩藏)으로 구분하는 이장(二藏)의 하나이다. 삼장(三藏)의 분류는 가장 오래된 분류이나 이 외에도 사장(四藏)·오장(五藏)·팔장(八藏)·십장(十藏)의 다양한 불전의 분류가 있다. 사장(四藏)은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잡장(雜藏) 또는 경장(經藏)·율장(律藏)·대법논장(對法論藏)·명주장(明呪藏)이며 오장(五藏)은 『대승이취육바라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에서 말한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반야바라밀다장(般若波羅蜜多藏)·다라니장(陀羅尼藏)과 법장부(法藏部)에서 말하는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주장(呪藏)·보살장(菩薩藏)과 대중부(大衆部)에서 세운 경(經)·율(律)·논(論)·잡집장(雜集藏)·금주장(禁呪藏)과『성실론(成實論)』 권14 「악각품(惡覺品)」에 의거한 경(經)·율(律)·론(論)·잡장(雜藏)·보살장(菩薩藏)이다. 팔장(八藏)은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 권7 「출경품(出經品)」의 태화장(胎化藏)·중음장(中陰藏)·마하연방등장(摩訶衍方等藏)·계율장(戒律藏)·십주보살장(十住菩薩藏)·잡장(雜藏)·금강장(金剛藏)·불장(佛藏)과 대소승(大小乘) 각각을 경(經)·율(律)·논(論)·잡(雜)의 사장(四藏)으로 분류하는 경우이다. 최근 대만 불광산사(臺灣 佛光山寺)에서 아함장(阿含藏)·선장(禪藏)·반야장(般若藏)·정토장(淨土藏) 등을 단계적으로 간행하고 있는데 신수대장경에서 부(部)로 분류한 것을 장(藏)으로 분류하여, 불전 분류(佛典 分類)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puggala)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puggala)는 인간 또는 모든 인간 행위의 주재자·담당자 등으로 여겨지는 자아(自我)를 지칭하는 총체적인 개념. 부특가라(富特伽羅)·불가라(弗伽羅)·복가라(福伽羅) 등이라고도 음사하고, 한역어는 인(人)·중생(衆生)·삭취취(數取趣)·중수(衆數)·중수자(衆數者) 등이 있다. 보특가라는 먼저 외도(外道)의 16지견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이 16지견은 모두 자아의 여러 가지 속성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입장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십육신아(十六神我)라고도 한다. 16신아 중 하나인 보특가라는 특히 중수자(衆數者)로 한역되었는데, 중생(衆生)·인(人) 등의 한역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중생·인 등도 또한 16신아 중 하나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중수자로서 한정된 보특가라란, 오온(五蘊)·십이입(十二入)·십팔계(十八界)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법수(法數)를 시설하여, 이것들의 집합으로서 설정한 자아를 일컫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말함으로써 ‘보특가라’가 실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편의상 사람을 거짓 ‘보특가라’라고 부르는데 불과하다고 한다. 다만 부파불교 중 독자부·정량부·경량부에서는 이것을 인정한다.
⊙본생담(본생경)
'자타카'는 '본생(本生)', '본생경(本生經)', '본생담(本生譚)', '생경(生經)', '본생설화(本生說和)' 라고도 한다. 'jataka(자타카)'라는 말의원래 뜻은 '태생(胎生)', '생애(生涯)'이다. 이것은 불교의 교리를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의하나로 불타와 그 주변 사람들의 전생(前生)의 경험을 말하고 , 그것으로 현재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넓은 뜻에서 자타카는 각기 모양이 다른 여러 경전의 삽화로도 발견되면, 그 결집도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한역, 티베트어역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불교미술의 소재로 각국에 남아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자타카는 남방불교권의 성전인 팔리어 삼장(三藏)의 경장(經藏) 중 소부(小部)에 포함된 경전의 하나로 22장 547개의 설화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불타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前生)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타가깨달음을 얻기 전에 수행자로 있을 때의 모습을 'bodhisatta(보살)'라든가 또는 'mahasatta(大士)'라고 부른다. 따라서 자타카는 보살이나 대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과거세(過去世)에서 어떠한 성행을 하고 공덕을 쌓았기에 현재세(現在世)에서는 불타로 태어날 수 있었던 가에 대한 인과(因果)를 이야기한다. 자타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현재세 이야기로 불타가 어떠한 인연에 근거하여 과거세의 일을 이야기하였는가에 대한 유래를 설한다.
둘째는 과거세 이야기로 현재세의 일을 일으키니 원인이 되는 과거세의 유래를 설한다. 이것이 본생설화의 주요 부분이다. 그 속에서 많은 시가 담겨 있다. 본래는 이 시 부분만이 성전으로서 소부 중에 포함되었고, 나머지는 그 시에 대한 설명이고 주석이다. 남방의 불교도는 시의 부분만을 집성한 성전만을 갖고 있다.
셋째는 결합구로 현재세의 등장인물과 과거세의 그것을 결합하여 인과관계를 명확히 하는 결론적인 부분이다.
자타카의 본론 부분은 과거세의 이야기인데,보살이 다양한 모습을 취하여 등장한다. 보살은 과거의 오랜 세월 동안 윤회전생을 반복하였는데, 그 때마다 인간뿐 아니라 귀신이나 동물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명을 거친다. 이야기 가운데에는 그러한 보살이 어떤 때에는 주인공이 되고 또 어떤 때는 보조역이나 방관자로서 활약하기도 한다.
과거세의 이야기는 대체로 민족의 구비(口碑)나 일반의 민간설화를 불교 문학으로 바꾼 것이다. 불타 자신이 자타카의 형태로 설법한 것도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후계자들가운데에서 설법자(dhammakathika)들이 일반 신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 민화에서 뽑아 자타카 설화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자타카에는 인도의 설화, 웅화, 야담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세계 설화문학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불교의 수행승들은 재미있고 교훈적인 자타카 이야기를 통해 일반 민중을 친숙하게 교화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바르후트의 석탑을 비롯하여 산치의 불탑, 아잔타 석국 등에 자타카를 제재로 한 미술품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바르후트의 부조상() 가운데 30개 정도가 현존하는 팔리본(本)설화와 일치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팔리어로 된 자타카는 현악기인 비나의 반주와 더불어 음영되었던 것 같으나, 5세기 이후에는 목소리로만 음영되었다. 이 유풍은 지금도 동남아 지역에 남아 있다.
자타카 설화의 대부분은 고대 인도의 민화에서 따온 것이다. 불타 생존시의 것과 그 이전에 북인도에 널리 퍼졌던 민화도 많으며, 후세로 내려와서는 5세기경의 남인도의 것도 들어있다.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로부터 허구로 꾸민 설화 등 그 내용도 가지각색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고대 인도의 사회생활. 정치. 경제. 풍속. 습관 등 수많은 사실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타카는 불교의 교훈과 민화의 풍부한 주제 외에도 고대 인도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복주서(復註書)
복주서(復註書)는 빨리어 띠까(ṭīkā)의 역어이다. 띠까는 √ṭīk(설명하다, 분명하게 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빨리성전 즉 삼장(三藏)은 빨리(Pāli)라 하고, 성전에 대한 주석서를 앗타까따(aṭṭhakathā)라 하며 이러한 앗타까따에 다시 주석을 단 책을 띠까라고 한다. 또한 삼장에 속하지 않는 장외전적(藏外典籍)에 대한 주석서도 띠까라고 한다. 그래서 복주석서 문헌이라 함은 삼장의 주석서에 대한 복주석서와 삼장에 속하지 않는 서적에 대한 주석서 모두를 포함한다. 대부분의 복주서는 싱할리어 문자로 패엽(貝葉)에 필사본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12세기에 쓰인 일부 띠까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더 오래된 자료에서 가져온 매우 귀중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 「청정도론」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하여 모두 11개의 띠까가 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삼장의 복주석서
저자 주석서
Vajirabuddhi-ṭīkā
Vajirabuddhi Samantapāsādikā
Sāratthadīpanī
Sāriputta Samantapāsādikā
Vinayatthamaiijusa
Mahākassapa of Cola Samantapāsādikā
Vimativinodanī
Buddhanāga Kaṇkhāvitaraṇi
Dīghanikāya-ṭīkā
Dhammapāla Sumaṅgalavilāsini
Majjhimanikāka-ṭīkā
Dhammapāla Papañcasudanī
Saṁyuttanikāya-ṭīkā
Dhammapāla Sāratthappakāsini
Sāratthamañjusā
Sāriputta Manorathapūraṇi
Linatthapada-vaṇṇanā
Ānanda Vanaratanatissa Atthasālīnī
Linatthavaṇṇanā
Culla-Dhammapāla Linatthapada-vaṇṇanā
Paramatthamañjūsā
Dhammapāla Visuddhi-magga
이외에 삼장에 속하지 않는 장외전적에 대한 띠까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장외전적에 대한 띠까는 복주석서가 아니라 빨리 원전에 직접 근거하여 해설을 단 주석서라는 점이다. 그리고 복주에 대한 주석인 복복주서(復復註書)는 아누띠까(anuṭīkā)라고 한다.
◎ 부낭(浮囊, tara-puta)
부낭(浮囊, tara-puta)은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니는 기구로 경론에서는 계율의 공능(功能)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로 쓴다. 곧 보살이 계율을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지킴으로써 생사고해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 바다에 익사하지 않기 위하여 지니는 부낭과 같다는 뜻.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권 7(大54 p.1170a24)과 『오분율(五分律)』(大22 p.145a11)에는 “지금부터 모든 비구에게 부낭을 지니도록 허용한다.”고 하였고, 『사분율』 권1(大22 p.568a24)에서도 “계율은 마치 사람이 강을 건너려할 때 손과 부낭을 사용하여 비록 깊은 물이라 하더라도 걱정 없이 건너편 언덕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불자도 계율을 굳게 지키면 결코 삿된 번뇌의 불길에 휘말리거나 생사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권11권(大12. p.432b4)에는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부낭을 지니고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 나찰이 그 사람을 따라 다니며 부낭을 달라고 하자 ‘내가 지금 그에게 부낭을 준다면 반드시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끝에 ‘나찰이여 차라리 나를 죽일지언정 부낭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보살마하살이 계율을 지키는 것도 이와 같이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 부낭을 아끼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대지도론』 권6(大25. p.107a20)에는 “오직 보살만이 진실 그대로 뛰어난 방편으로 저 언덕을 건널 수 있다. 비유하자면 사공 한 사람은 부낭과 뗏목으로 건네주고 다른 한 사람은 큰 배로써 건네주는 것과 같은데 이들의 차이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
◎ 부동분상(不同分相)
부동분상(不同分相)은 부동분심(不同分心, visabhaga-citta)을 의미하며, 같이 나눌 수 없는 마음이다. 무루의 34념과 종류가 다른 유루의 마음이라는 뜻이다.『구사론』에서 제시하는 부동류심(不動類心)과 같은 말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153권(大27 p.780b7-10)에서 “부동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보살이 부동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러나 보살에게도 부동분심이 있다. 설사 이렇게 주장하더라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며, 주장하는 본래의 하고자 하는 의요(意樂)와도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問, 云何非起不同分心? 答, 彼說, 誰言 菩薩不起不同分心? 然菩薩有不同分心. 設有此言, 亦不違理, 不違所立本意樂故.”라고 하였다. 또 『유가사지론』53(大30 p.592c7-8)권에 “마땅히 알라 부동분심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선근이 끊어지기 때문에 중동분을 버리게 되며 부동분심을 받은 다음에 다시 버리게 된다. 當知, 由起不同分心故, 善根斷故, 棄捨衆同分故, 受已還捨.”라고 하였다.
◎ 부동분심(不同分心, visabhāga-citta)
부동분심(不同分心, visabhāga-citta)이란 같이 나눌 수 없는 마음. 무루의 34념과 종류가 다른 유루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구사론』에서 제시하는 부동류심(不動類心)과 같은 말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권153(大27 p.780b7-10)에 “부동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보살이 부동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러나 보살에게도 부동분심이 있다. 설령 이렇게 주장하더라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며, 주장하는 본래의 하고자 하는 의요(意樂)와도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問, 云何非起不同分心. 答, 彼說. 誰言菩薩不起不同分心. 然菩薩有不同分心. 設有此言, 亦不違理, 不違所立本樂故.” 또 『유가사지론』 권53(大30 p.592c7-8)에는 “마땅히 알라 부동분심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선근이 끊어지기 때문에 부동법을 받은 다음에 다시 버리게 된다. 當知, 由起不同分心故, 善根斷故, 棄捨衆同分故, 受已還捨.”고 한다.
◎ 부동분상(不同分相)
부동분상(不同分相)은 부동분심(不同分心, visabhāga-citta)을 의미하며, 같이 나눌 수 없는 마음이다. 무루의 34념과 종류가 다른 유루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구사론』에서 제시하는 부동류심(不動類心)과 같은 말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153권(大27 p.780b7-10)에서 “부동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보살이 부동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러나 보살에게도 부동분심이 있다. 설사 이렇게 주장하더라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며, 주장하는 본래의 하고자 하는 의요(意樂)와도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問, 云何非起不同分心? 答, 彼說, 誰言 菩薩不起不同分心? 然菩薩有不同分心. 設有此言, 亦不違理, 不違所立本意樂故.”라고 하였다. 또 『유가사지론』53(大30 p.592c7-8)권에 “마땅히 알라 부동분심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선근이 끊어지기 때문에 중동분을 버리게 되며 부동분심을 받은 다음에 다시 버리게 된다.當知, 由起不同分心故, 善根斷故, 棄捨衆同分故, 受已還捨.”라고 하였다.
◎ 부정에 관한 수행
‘부정에 관한 수행’이라 번역한 아수바 바와나(asubha-bhāvanā)는 a(부정접두사)+subha(淨, 깨끗한)+bhāvāna(수행, 명상)으로 분해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더러움을 관찰하는 명상’이란 뜻이다. 이는 사마타 수행의 일종으로, 문맥에 따라 부정관(不淨觀, asubha-dassana), 부정에 대한 수행주제(不淨業處, asubha-kammaṭṭhāna), 부정의 인식(不淨想, asubha-saññā)이라고도 한다. 「청정도론」(Vis.VI)에 따르면 이는 묘지에 대한 관찰(sīvathika)을 일컫는다. 하지만 「기리마난다경(Girimānanda-sutta)」(A.X.50)에 따르면, 몸의 32가지 부분을 관찰하는 신수념(身隨念, kāya-gatā-sati)을 가리킨다. 이러한 부정수행은 감각적 욕망(kāma)의 장애(nīvaraṇa)와 더러운 것을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전도(vipallāsa)를 치유하는 해독제의 역할을 한다.
◎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라 번역한 붓다누사띠(buddhānussati)는 buddha+anussati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아누사띠(anussati)는 다시 anu(~를 따라서)+sati(念, 알아차림)으로 분해된다. PED에서 ‘remembrance, recollection, thinking of, mindfulness.’라고 설명되듯이, 이 아누사띠는 ‘기억, 회상, 생각함, 주의 깊은 알아차림’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10가지 대상들에 대한 공덕이나 특성 등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사마타 수행법 중 하나이다.「청정도론」(Vis.Ⅶ.1)에서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숙고를 들고 있다.
(1)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 buddhānussati)
(2) 법에 대한 숙고(法隨念, dhammānussati)
(3) 승가에 대한 숙고(僧隨念, sanghānussati)(
4) 계에 대한 숙고(戒隨念, sīlānussati)
(5) 보시에 대한 숙고(布施念, cāgānussati)
(6) 천인에 대한 숙고(天隨念, devatānussati)
(7) 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 maraṇasati)
(8) 몸에 대한 알아차림(身隨念, kāyagatā-sati)
(9)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出入息念, ānāpānasati)
(10) 고요함에 대한 숙고(寂靜念, upasamānussati)
그리고 이러한 열 가지 숙고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사마타 수행대상(samatha-kammaṭṭhāna)에 속한다.
(1) 열 가지 까시나(kasiṇa): 땅,물, 불, 바람, 푸른색, 노란색,빨간색,흰색,광명,한정된 허공.
(2) 열 가지 더러움(不淨, asubha): 부었고, 검푸르고,곪고, 끊어지고,갈아먹고,흩어지고,난도질하여 뿔뿔이 흩어지고,피가 흐르고,벌레가 버 글거리고,해골이 됨.
(3) 열 가지 숙고(隨念, anussati): 부처님, 법, 승가, 계, 보시, 천인, 죽음, 몸, 들숨날숨, 고요함.
(4) 네 가지 무량(appamaññā):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더불어 기뻐함(muditā), 평온(upekkhā)의 사범주(四梵住, brahma-vihāra).
(5) 한 가지 인식(saññā):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paṭikūla-saññā).
(6) 한 가지 분석(vavatthāna): 사대(四大)를 분석하는 것.
(7) 네 가지 무색(ārupa):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 분명한 앎
'분명한 앎'으로 옮긴 삼빠쟌나(sampajañña)는 saṃ(함께)+pra(앞으로)+√jñā(알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 그대로 ‘충분하고 분명하게 앎’이란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clear comprehension, full awareness등이라 한다. 수행과 관련된 경에서 사띠(sati)와 삼빠쟌나(sampajañña)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난다. 사띠(sati)가 정해진 대상에 마음을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면 삼빠쟌나(sampajñña)는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은 sati-sampajñña처럼 함께 쓰이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이 둘을 한데 묶어 정념정지(正念定知)라고 번역했다.
◎ 불가지론(不可知論, amarāvikkhepikā-vada)
불가지론(不可知論, amarāvikkhepikā-vada)이란 초경험적(超經驗的)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적인 입장을 가리킨다. 인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añjaya)가 주장한 학설 이였는데 마하시 사야도는 아마도 아지따로 혼동하신 듯하다. 아무튼 산자야는 내세(來世)가 존재하느냐, 선악의 과보는 존재하느냐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하여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확정적인 대답을 피하였다. 그는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와 목갈라나(Moggallāna) 존자의 옛 스승이었다.
◎ 불공의 지혜(不共智, asādhāraṇa-ñāṇa)
불공의 지혜(不共智, asādhāraṇa-ñāṇa)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이나 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공덕과 자질이다.
◎ 불교의 믿음
불교의 믿음과 관계된 빨리어 술어는 다음과 같다.
(1) 빠사다(pasādā): ‘깨끗한 믿음’으로 번역되는 빠사다는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즉 ‘고요함, 편안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런 고요함처럼 깨끗한 믿음을 뜻한다. 오까빠나(okappana)와 동의어이다.
(2) 삿다(saddhā):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는 전통적으로 srad(가슴)+√dha(놓다)로 분석한다. 그래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고 삼보에 귀의할 때 생긴다. 하지만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조사와 탐구를 통한 합리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확신을 뜻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faith, belief보다는 confidence로 많이 번역한다. 전통적으로 이 삿다는 모든 선법(kusala-dhamma)의 씨앗이라 불린다.(Sn.V.77) 주석서의 설명에 따르면, 그이유는 깨끗한 믿음(okappana/pasāda)과 신해(adhimokkha)가 마음에 일어나도록 고무하여 윤회의 폭류를 건너기 위한 여정(pakkhadhana)을 떠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 중의 하나이다.
(3) 아디목카(adhimokkha): ‘확신, 결단, 결심’으로 번역되는 아디목카는 adhi(향하여)+√muc(벗어나다. 해탈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해탈을 향한다는 것’이 그 기본의미이다. 즉 불·법·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곧 해탈로 향하는 기초가 완전히 다져졌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삿다(saddhā)와 빠사다(pasādā)에 기초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혜(信解)라고 옮겼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와서 보라(ehipassika)’는 것이지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와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빨리 경 도처에서는 깨달음을 일컬어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겼다.(S.V.423)'라고 묘사하고 있고, 지혜인 냐나(ñāṇa)와 봄(dassana)의 합성명사인 냐나-닷싸나(智見, ñāṇa-dassana)라는 용어가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信行)의 출발로 삼고 있다.
◎ 불사(不死)
‘불사(不死)’로 옮긴 아마따(amata/Sk.amṛta)는 a(부정접두어)+√mṛ(죽다)에서 파생된 과거분사이다. 이 아마따는 불교뿐 아니라 베다를 비롯한 인도의 여러 문헌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 술어로 마시면 죽지 않는다는 신들의 음료수이다. 중국에서는 불사(不死), 감로(甘露), 감로수(甘露水)로 옮겼고, 영어권에서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타나는 Ambrosia, Nectar로 옮기기도 하고, 풀어서 water of immortality 등으로도 옮긴다. 그리고 열반(nibbāna)이야말로 불사의 경지이기 때문에 열반을 형용하는 술어로 자주 쓰인다.
◎ 불선(不善, akusala)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심리 현상들을 선(善, kusala), 불선(不善, akusala), 무기(無記, avyākata)로 나누고 있다.
(1) 선(善)으로 옮기는 꾸살라(kusala)는 PED에 ‘1. clever, skilful, expert; good, right, meritorious. Especially. applied in moral sense (=puñña), whereas akusala is practically equivalent to pāpa. 2. a good thing, good deeds, virtue, merit, good consciousness.’라고 설명되듯이, 원래의 의미는 ‘유익한, 숙련된, 능숙한, 이로운’ 등으로 기본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하고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반대어인 아꾸살라(akusala)는 ‘악’이라 번역되는 빠빠(pāpa)와 실제로 같은 말이다. 「앗타살리니(Atthasālini)」(Asl.39)에서는 이 꾸살라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ku(나쁜)+√sal(흔들다. 파괴하다) 나쁘고 삿된 법들을 흔들어 버리고, 동요하게 만들고, 떨게 만들고, 쓸어버린다고 해서 꾸살라이다.
② kusa+√lu(자르다) 꾸사(kusa)는 ku(나쁜)+√si(눕다)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꾸사는 나쁘게 누어있는 법을 뜻하며 kusala는 이러한 삿된 법을
잘라내는 것을 뜻한다.
③ a. ku(나쁜, 사악한)+√su(줄이다) 지혜로써 악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이 꾸사이다. b. kusa+√la(취하다, 갖다, 알다) 이런 꾸사로 얻어져야
한다, 생겨야 한다라고 해서 꾸살라이다.
④ 꾸사풀이 자신을 거며 쥐는 손의 양면을 베어버리듯이 이미 생겼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번뇌를 모두 베어 버린다. 그러므로 꾸사풀처럼 베어 버린다고 해서 꾸살라이다.
중국에서는 꾸살라(kusala)를 선(善)으로 아꾸살라(akusala)를 불선(不善)으로 옮겼다. 하지만 꾸살라를 단지 ‘착한’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꾸살라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을 뜻하기는 해도 원 의미는 ‘유익한, 숙련된, 능숙한, 이로운,좋은’ 등의 여러 의미를 내포하기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비담마에서 꾸살라는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아꾸살라는 그와 반대 되는 것이다.
(2) 불선(不善)으로 옮기는 아꾸살라(akusala)는 이와 반대로 도덕적으로 불선하고 해탈과 열반에 해로운 것이다.
(3) 무기(無記)로 옮기는 아비야까따(avyākata)는 ‘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못하는, 결정하지 못하는’의 의미다. 즉 선과 불선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심리현상을 뜻한다. 마음(citta)과 마음의 작용(cetasika)에서 무기는 과보의 마음(vipāka-citta)과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이다. 과보로 나타났을 뿐이므로 무기이고, 단지 작용만 하므로 역시 무기인 것이다.
◎ 불선한 마음(akusala-citta)
아비담마에서는 불선한 마음(akusala-citta)을 먼저 불선한 마음의 가장 강력한 뿌리(mūla)인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을 통해서 분류하고 있다.
◎ 불선한 마음의 소멸
‘불선한 마음의 소멸’이란 열반(nibbāna)을 뜻한다. 여기서 출세간의 마음(lokuttara-citta)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출세간의 마음이란 성자들이 열반의 상태(과의 증득)에 든 마음, 정확히 말하면 ‘열반을 대상으로 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출세간의 마음에는 수다원 이상의 성자들이 최초에 열반을 체득하는 마음인 도의 마음(magga-citta)과 그 후에 열반의 상태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과의 마음(phala-citta) 밖에 없다. 도의 마음은 최초로 열반을 체험하면서 수다원 등의 성자가 되는 마음을 뜻하고 과의 마음이란 수다원 등의 성자가 된 사람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모두 해소된 열반의 경지에 드는 마음을 뜻한다. 그래서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 불수념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라 번역한 붓다누사띠(buddhānussati)는 buddha+anussati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아누사띠(anussati)는 다시 anu(~를 따라서)+sati(念, 알아차림)으로 분해된다. PED에서 ‘remembrance, recollection, thinking of, mindfulness.’라고 설명되듯이, 이 아누사띠는 ‘기억, 회상, 생각함, 주의 깊은 알아차림’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10가지 대상들에 대한 공덕이나 특성 등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사마타 수행법중 하나이다.「청정도론」(Vis.Ⅶ.1)에서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숙고를 들고 있다.
(1)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 buddhānussati)
(2) 법에 대한 숙고(法隨念, dhammānussati)
(3) 승가에 대한 숙고(僧隨念, sanghānussati)
(4) 계에 대한 숙고(戒隨念, sīlānussati)
(5) 보시에 대한 숙고(布施念, cāgānussati)
(6) 천인에 대한 숙고(天隨念, devatānussati)
(7) 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 maraṇasati)
(8) 몸에 대한 알아차림(身隨念, kāyagatā-sati)
(9)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出入息念, ānāpānasati)
(10) 고요함에 대한 숙고(寂靜念, upasamānussati)
그리고 이러한 열 가지 숙고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사마타 수행대상(samatha-kammaṭṭhāna)에 속한다.
(1) 열 가지 까시나(kasiṇa): 땅,물, 불, 바람, 푸른색, 노란색,빨간색,흰색,광명,한정된 허공.
(2) 열 가지 더러움(不淨, asubha): 부었고, 검 푸르고,굶고, 끊어지고,갈아먹고,흩어지고,난도질하여 뿔뿔이 흩어지고,피가 흐르고,벌레가 버 글거리고,해골이 됨.
(3) 열 가지 숙고(隨念, anussati): 부처님, 법, 승가, 계, 보시, 천인, 죽음, 몸, 들숨날숨, 고요함.
(4) 네 가지 무량(appamaññā):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더불어 기뻐함(muditā), 평온(upekkhā)의 사범주(四梵住, brahma-vihāra).
(5) 한 가지 인식(saññā):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paṭikūla-saññā).
(6) 한 가지 분석(vavatthāna): 사대(四大)를 분석하는 것.
(7) 네 가지 무색(ārupa):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 비구(Bhikkhu)
‘비구(比丘)’로 음역한 빅쿠(bhikkhu/Sk.bhikṣu)는 √bhikṣ(구걸하다)에서 파생된 술어로 ‘걸식자’를 말하며 일절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서 수행에만 전념하는 불교의 스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에서 비구(比丘), 또는 필추(苾芻)로 음역되었는데, 비구는 빨리어 bhikkhu의 음역어고, 필추는 산스끄리뜨어 bhikṣu의 음역어인듯 하다. 그리고 비구니(比丘尼)는 빅쿠니(bhikkhuni/Sk.bhikṣuni)의 음역으로 승가에 입문한 여성 수행자를 말하는데 현재 상좌부에는 정식 비구니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청정도론」(Vis.Ⅰ.7)에서는 “윤회에서(saṁsāre) 두려움을(bhayaṁ)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고 정의하고 주석서에서는 “비구라는 것은 수행(paṭipatti)을 성취할 사람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물론 천인들이나 인간들도 도를 이를 수 있지만 비구가 되는 것이 도를 닦는데 가장 수승하다고 보기 때문에 ‘비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그리고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해서도 비구의 신분을 보기 때문에 비구라고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자는 천인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DA.iii.755)라고 의미심장한 설명을 하고 있다. 상좌부 불교의 비구가 되기 위해서는 부채, 질병, 군역 등의 결격사유가 없는 20세 이상의 남자가 삼사칠증(三師七證)의 조건하에서 227조항(비구니의 경우 311조항)의 구족계(具足戒, upasampada)를 받아야 한다.
◎ 빈랑(檳榔)나무 잎
빈랑(檳榔)나무 잎은 주로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같은 남방의 기호품이다. 빈랑나무의 잎사귀 속에 각종 열매와 첨가제 등을 넣어서 만드는데, 흥분과 각성작용이 있고 담배처럼 중독성이 있다. 이 잎을 씹고 나면 치아가 빨갛게 물들고 눈이 충혈 되기도 한다. 영어로는 Betel leaf이라 하고, 미얀마어로는 꽁(Kun) 또는 꽁야(Kun ya)라고 한다.
◎ 빔비사라(Bimbisāra)왕
빔비사라(Bimbisāra)왕은 15세에 왕위에 올라서 52년간을 왕위에 있었고, 부처님보다 5살이 위였다고 한다. 주석서(SnA.ii.386)에 따르면 빔비사라왕은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면 제일 먼저 라자가하를 방문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세존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 머물도록 지은 최초의 절이 죽림정사(竹林精舍, Veḷuvana)이다. 이렇게 빔비사라왕은 세존이 깨달음을 증득하신 때부터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에게 시해될 때까지 37년간을 부처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불교가 인도 중원에 정착하는데 큰 기여를 한 왕이다. 하지만 부처님을 해코지하려는 데와닷따(Devadatta)에게는 이러한 빔비사라왕은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를 사주하여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도록 사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대신들은 아자따삿뚜와 데와닷따 무리를 처단할 것을 빔비사라왕에게 강력히 권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아자따삿뚜가 왕위를 탐내고 있음을 듣고는 순순히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데와닷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지따삿뚜에게 빔비사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계속 종용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무기로도 왕을 해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자따삿뚜는 왕을 굶겨 죽일 작정으로 뜨거운 감방에 가두어 두고 왕비(아자따삿뚜의 모친)외에는 아무도 방문할 수 없게 했다. 왕비가 갖가지 방법으로 음식물을 반입하자 마지막에는 그녀마저 왕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왕은 방안에서 경행을 함으로써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자따삿뚜는 이발사를 보내서 왕의 발바닥에 상처를 내고 거기에 소금과 식초를 뿌렸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빔비사라는 곧 죽어서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mahārājika)에서 비사문천(毘沙門天, Vessavaṇa)을 모시는 자나와사바(Janavasabha)라는 야차(yakkha)로 태어났다.
◎ 빛바램 (위라가. vi āga)
‘빛바램’이라 번역한 위라가(virāga)는 vi(분리)+rāga(탐욕)의 합성이다. PED에서 ‘absence of rāga, dispassionateness, indifference towards (abl. or loc.) disgust, absence of desire, destruction of passions; waning, fading away, cleansing, purifying; emancipation, Arahantship.’이라고 설명되듯이, ‘탐욕의 부재, 탐욕의 빛바램, 공평무사함, 혐오에 대한 평온, 청정해짐, 해탈, 아라한과’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욕(離慾)이라 번역했다.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열반(nibbāna)은 하나지만 그 이름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이름과 반대되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이다. 즉 남김없이 빛바램(asesavīrāgo), 남김없이 소멸함(asesanirodho), 버림(cāgo), 놓아버림(paṭinissago), 벗어남(mutti), 집착없음(anālayo), 탐욕의 멸진(rāgakkhayo), 성냄의 멸진(dosakkhayo), 어리석음의 멸진(mohakkhayo), 갈애의 멸진(taṇhakkhayo), 취착없음(anuppādo), 생기지 않음(appaṭisandhi), 표상없음(anupapatti), 태어날 곳이 없음(agati), 태어나지 않음(ajātaṁ), 늙지 않음(ajaraṁ), 병들지 않음(abyādhi), 죽지 않음(amataṁ), 슬픔없음(asokaṃ), 비탄없음(aparidevaṁ), 절망없음(anupāyāsaṁ), 오염되지 않음(asaṁkiliṭṭhaṁ)이다.”(DA.iii.801)
◎ 박(縛, bandhana)
박(縛, bandhana)은 번뇌의 다른 표현으로 중생의 마음을 속박하여 자재(自在)하지 못하게 한다. 구사(俱舍)·유식종(唯識宗)에서는 모든 번뇌를 결(結, sam-yogana)·박(縛, bandhana)·수면(隨眠, anuśaya)·수번뇌(隨煩惱, upakleśa)·전(纏, paryavasthāna) 등 여러 가지로 부른다. 이 중에서 ‘박(縛)’이란 번뇌가 중생들로 하여금 오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선행을 지으려는 욕구를 막는다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박(二縛)·삼박(三縛)·사박(四縛) 등으로 구분된다.
(1) 삼박(三縛)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을 가리킨다. 이것들이 고, 락, 사(苦 樂 捨)의 삼수(三受)를 따라 증가하면서 중생을 번뇌의 세계에 속박시키므로 ‘삼박(三縛)’이라 한다.
(2) 이박(二縛)은 두 종류가 있는데 ① 상응박(相應縛)과 소연박(所緣縛)이다. 상응박이란 번뇌가 마음과 동시에 상응하여 일어나 마음 자체를 구속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소연박이란 번뇌가 마음을 대상에 집착하게 만듦으로써 대상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② 상박(相縛)과 추중박(麤重縛)을 이박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각 논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제7말나식이 아상(我相)에 집착하는 것을 상박(相縛)이라 하고 제6의식의 번뇌를 추중박(麤重縛)이라 하기도 하며, 객관의 대상인 모든 경계의 상에 집착하는 것을 상박(相縛)이라 하고 그 번뇌의 종자를 추중박(麤重縛)이라 하기도 한다.
『구사론』 권21(大29 p.109a27-28)에는 탐박(貪縛)·진박(瞋縛)·치박(癡縛)의 삼박(三縛)이 보이고, 『유가사지론』 권89(大30 p.802b4-8)에도 기술되어 있다.
◎ 방일(放逸, pramāda)
방일(放逸, pramāda)은 욕망이 일어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부지런히 선(善)을 닦지 않는 마음의 상태.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 중 하나로서 일(逸)이라고도 하며, 방자(放恣)·나타(懶惰)·태타(怠惰)·부주의(不注意) 등과 통하는 개념으로 산만하여 선한 행위에 몰두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 번뇌장(煩惱障, kleśa-āvarana)
번뇌장(煩惱障, kleśa-āvarana)과 소지장(所知障, jñeya-āvarana)의 이장(二障)이 있는데 이 가운데 번뇌장은 혹장(惑障)이라 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 곧 성도(聖道)를 방해해서 열반을 얻지 못하게 하는 번뇌를 뜻한다. 『구사론』 권17(大29 p.131b22-c9), 『구사론』 권25(大29 p.131c11-16)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가 생기는 것을 방해하여, 혜해탈(慧解脫)을 얻지 못하게 하는 번뇌를 번뇌장이라고 하고, 번뇌장을 여의어 혜해탈을 얻어도 멸진정 얻는 것을 방해하여 구해탈(具解脫)을 얻지 못하게 하는 장애를 해탈장(解脫障)이라고 한다. 또 『성유식론』 권9(大31 p.48c6-11)에서는, 중생의 신심을 교란시켜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번뇌를 번뇌장이라 하고 업을 일으키어 삼계에 나게 하는 작용이 없지만, 알아야 할 대상을 덮어서 바른 지혜가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번뇌를 소지장이라고 한다. 이 이장은 어떤 것이나 살가야견(薩伽耶見)을 비롯해서 128가지의 근본번뇌와 20가지의 수번뇌(隨煩惱)를 체(體)로 한다. 그 가운데 ‘실체의 사람, 실체의 중생이 있다’고 하며 나를 집착하는 아집(我執)을 번뇌장이라 하며, ‘사물의 실체가 있다’고 하여 법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을 소지장이라 한다. 그러므로 번뇌장은 아집을 근본으로 하고, 소지장은 법집을 근본으로 한다. 그 작용에 대해서 말하면 번뇌장은 열반을, 소지장은 보리를 장애한다고 할 수 있다.
◎ 범망(梵網, bramma-jāla, brahman-jāla)
범망(梵網, bramma-jāla, brahman-jāla)의 ‘梵’이란 주체인 범왕(梵王, 大梵天王) 또는 부처님. ‘網’이란 중생을 포섭하는 가르침을 그물에 비유한 말. 또는 범왕이 지닌 망라당(網羅幢, 그물에 걸린 깃대)의 그물코를 비유로 삼아 세계와 중생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만큼 많다는 뜻을 나타낸다.
◎『범망경』
『범망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은 2종이 있다. 하나는 초기경전에 속하는 것으로서, 팔리어로 씌어진 남방 상좌부의 경장(經藏)인 장부(長部)니까야의 제1경인『범망경(梵網經, Brahmajala-sutta)』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의 번역으로 되어 있는 『범망경』(大24-997)이다. 이 경은 보통 『범망보살계경(梵網菩薩戒經)』 혹은 『보살계본(菩薩戒本)』으로 불리는데 정확한 제명(題名)은 『범망경』 「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제십(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十)」이다. 이러한 제명(題名)이 붙은 이유는 “『범망경』의 광본(廣本)에서 보살의 계위(階位)와 계율에 관한 제십보살심지(第十菩薩心地)의 1품만을 송출(誦出)한 것이 이 경이다.”라고 하는 라집역(羅什譯) 『범망경』 서문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전의 이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록(經錄)인 승우삼장(僧祐三藏)의『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권11에 수록된 작자 미상(未詳)의 「보살바라제목차후기(菩薩波羅提木叉後記)」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천축(天竺)의 구마라집 법사가 이 계본(戒本)을 송출한 점, 그리고 이것이 『범망경』 중에 수록되어 있는 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라집 역(羅什譯) 『범망경』은 대승보살계를 설한 경전으로서 대장경 중에서는 대승율부(大乘律部)에 속하며, 상하(上下) 2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서는 십발취(十發趣), 십장양(十長養), 십금강(十金剛), 십지(十地) 등 보살수도(菩薩修道)의 사십위(四十位)가 설해지며, 하권에서는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經戒)가 설해지고 있다. 법장(法藏) 등이 모두 이 하권(下卷)을 인용하여 주소(註疏)를 지은 것은 본경(本經)의 주된 취지가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 범망계(梵網戒)의 특성은 재가와 출가 모두에게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며, 자기의 불성을 개발하려는 불자(佛子)의 자각에 입각하여 보살도 실천을 기본으로 하는 불성계(佛性戒)이다. 본 계법은 가정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중생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유리되지 않으나 다만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한 가지 측면에서 볼 때는 소극적인 자리행(自利行)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범망경』 하나하나는 대승계의 진면목인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 등 삼취정계(三聚淨戒)의 본의를 구비하고 적극적인 작선(作善)을 강조하며 타인을 교화하려는 대방편의 참된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법륜승(法輪僧, dharmacakra-samgha)
법륜승(法輪僧, dharmacakra-samgha)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는 스님이라는 뜻. 부파불교의 대표적 학파인 설일체유부에서 특히 견도위(見道位)에 도달한 스님을 법륜승이라 하는데, 이것은 법륜이 세간에서 사용되는 전륜성왕의 윤보(輪寶)와 다섯 가지 측면에서 동일한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다섯가지란 다음과 같다.① 빠르게 나아간다. 견도의 15心은 각각 한 찰나에 해당되
는데, 이것은 마치 전륜성왕의 윤보가 빨리 스쳐가는 것과 같다. ②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이 있다. 견도에서 고제(苦諦)의 경계를 버리고 집제(集諦)의 경계를 취하는 것이, 마치 전륜성왕이 앞의 윤보를 취하고 뒤의 윤보를 버리는 것과 같다. ③ 아직 조복시키지 못한 것을 조복시킨다. 견도에서는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을 능히 보고 아직 끊지 못했던 것을 능히 끊는다. ④ 이미 조복시킨 것을 진압한다. 견도에서 미혹을 끊되, 다시 미혹에 의해 물러나지 않을 만큼 확고하게 조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⑤ 위 아래로 돌아간다. 견도에서 먼저 하고(下苦)를 관찰하고 나중에 상고(上苦)를 관찰한다. 이 밖에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부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별도의 교단을 세운 것과 같은 것을 파법륜승(破法輪僧)이라하고, 동일 교구에서 포살이나 갈마작법의 규칙을 달리함으로 인하여 분열되는 것을 파갈마승(破?磨僧)이라 한다.
◎ 법(法, dhamma)
법(法, dhamma)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부처님의 가르침(desanā) 혹은 교학(pariyatti)으로서의 법과 여기에서처럼 존재일반(물질적, 정신적 현상)으로서의 법이다.
◎ 법계(法界. dharma-dhātu)
모든 사물의 근원을 뜻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종교적인 본원을 의미하며, 여기에 경계라는 의미의 ‘계’를 붙여 진리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래서 법계는 진여(眞如)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진리 자체로서의 부처, 즉 법신불을 뜻하기도 하며, 화엄(華嚴)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 법륜(法輪, dhamma-cakka)
주석서에서는 법륜(法輪, dhamma-cakka)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법륜에는 꿰뚫는 지혜(paṭivedha-ñāṇa)와 가르침의 지혜(desanā-ñāṇa)가 있다. 사성제에 대해서 생겨난 열두 가지 형태의 꿰뚫음의 지혜와 이시빠따나에 앉으셔서 열두 가지 형태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에 의해서 굴려진 가르침의 지혜, 이들을 법륜이라고 한다. 이들은 열 가지 힘(十力, dasa-bala)을 갖추신 부처님의 가슴에서 굴려지는 지혜(pavatta-ñāṇa)이다. 안냐 꼰단냐 장로와 1억 8천만의 범천들이 수다원과에 확립되기 전까지는 세존께서는 법륜을 굴리시는 것이었고, 확립되었을 때는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을 때’라고 한 것이다.”(SA.iii.297) ◎ 베나레스 베나레스는 와라나시(Vārāṇasi), 바나라시(Bārāṇasi)라고도 하며, 부처님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 하나였던 까시(Kāsi)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베나레스를 까시라고도 하며, 부처님 당시에는 꼬살라(Kosala)로 합병되어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베나레스는 강가 강 옆에 있었기 때문에 수로의 요충이었으며 예로부터 이곳에서 생산되는 비단이 매우 유명했다.
◎ 법성(法性, dharmatā)
법성(法性, dharmatā)은 법의 체성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지니고 있는 진실불변한 본성을 말한다. 진여법성, 진법성, 진성이라고도 하고, 진여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일반적으로 법성을 여래장과 구별하여 일체법의 실성(實性)이라는 넓은 뜻으로 사용한다.
◎ 법처색(法處色)
법처색(法處色)은 극략색(極略色)·극향색(極逈色)·수소인색(受所引色)·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이다.
◎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인(人)·중생(衆生)·수취처(數取趣)·중수자(衆數者) 등으로 번역한다. 태어나서 죽어가는 주체를 말한다. 외도의 16지견 가운데의 하나로 아(我)의 다른 이름이라 한다. 무아(無我)를 말하는 불교에서는 태어나고 죽는 주체로서의 보특가라(승의의 보특가라)가 실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편의상 사람을 거짓 보특가라(세속의 보특가라)라고 부르는데 불과하다고 한다. 부파불교의 독자부·정량부·경량부에서는 이를 인정한다.
◎ 부(覆, mraksa)
부(覆, mraksa)는 가리는 것, 덮는 것을 뜻하며, 부처님의 은덕이 시방세계의 유정과 무정들을 두루 덮는 것이나 무명에 의해 밝은 마음이 가리어지는 것, 죄나 허물을 은폐하는 것 등에 모두 쓰이는 말이다. 아비달마에서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중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에 속하는 열 가지 법 중의 하나. 유식설(唯識說)에서는 오위백법(五位百法)중 수번뇌(隨煩惱)에 속하는 스무 가지 법 중의 하나이다. ‘부(覆)’는 두 학파에서 모두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는 심리작용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 복전(福田)
복전(福田)은 복덕(福德)을 심는 밭이란 뜻의 복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부처님과
성인(聖人), 승중(僧衆)은 경전(敬田), 스승, 부모는 은전(恩田), 병자 걸인 등은 비전(悲田)이라 한다. 경전(敬田) 가운데 불(佛), 성인(聖人), 승(僧)의 세 가지와 은전(恩田) 가운데 화상, 아사리, 아버지, 어머니의 네 가지와 비전(悲田)의 병자를 더하여 팔복전(八福田)이라고도 한다.
◎ 북취(北趣)
북취(北趣)는 북구로주(北俱盧洲), 즉 사주(四洲) 가운데 즐거움이 가장 수승하므로 고통이 없어 불법을 만나지 못하므로 오히려 도에는 장애가 되는 곳이다.
◎ 분단생사(分段生死)
분단생사(分段生死)는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범부들의 생사로 분단생사(分斷生死)라고도 한다. 유루(有漏)의 선악업(善惡業)을 인(因)으로 하고 번뇌장(煩惱障)을 연(緣)으로 하여 삼계 내에서 거친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수명의 장단(長短)과 신체의 대소(大小) 등 일정한 한계를 갖기 때문에 분단(分段)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단신(分段身)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한
다. 변역생사(變易生死)와 함께 이종생사(二種生死)로 불린다. 『대승의장(大乘義章)』 권8(大44 p.615c3)에 의하면 “두 가지 생사(生死)는 『승만경(勝鬘經)』에서 나온 말인데 하나는 분단생사(分段生死)라 하고 다른 하나는 변역생사(變易生死)라 한다. 분단생사(分段生死)란 육도(六道)의 과보(果報)가 삼세(三世)로 나뉘어 다르게 되는 것을 분단(分段)이라 하며 분단(分段)의 존재가 처음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마지막 흩어지는 것을 사(死)라고 한다. 二種生死, 出勝鬘經. 名字是何. 一分段生死, 二變易生死. 言分段者, 六道果報, 三世分異, 名爲分段. 分段之法, 始起名生, 終謝稱死.”라고 하였다.
◎ 분별기(分別起)
분별기(分別起)는 후천적으로 일으키는 번뇌. 분별기로 발생하는 번뇌장(煩惱障)·소지장(所知障) 등 두 가지 장애를 견혹(見惑)이라 한다. 반면에 태어남과 동시에[俱生] 갖추어지는 선천적인 번뇌[俱生起, 任運起]에도 번뇌장 소지장의 두 가지 장애가 있으며 이 두 가지 장애는 수혹(修惑) 또는 사혹(思惑)이라 한다.
분별기의 번뇌는 견도위(見道位)에서 끊어지는데 이것은 주로 잘못된 교설이나 스승 또는 그릇된 사유 등에 의하여 유발되는 분별에 따라 발생하므로 후천적이라 한다. 곧 『유가사지론』 권58(大30 p.621b8-10)에는 “분별기는 여러 외도들이 헤아려 일으킨다. 分別起者, 諸外道等, 計度而起.”라고 하고 있으며 또 『성유식론(成唯識論)』 권9(大31 p.48c26-29)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장애를 분별기는 견도위에서 끊을 대상으로 포섭하고, 임운기는 수도위(修道位)에서 끊을 대상으로 포섭한다. 이승은 다만 번뇌장만 끊을 뿐이며, 보살은 두 가지 모두 끊으며, 영원히 두 종류를 끊는 것은 오로지 성도(聖道)일 뿐이다. 如是二障, 分別起者, 見所斷攝, 任運起者, 修所二斷攝. 二乘但能斷煩惱障, 菩薩俱斷, 永斷二種, 唯聖道.”라고 했다.
◎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는 삼수(三受)인 고수(苦受)·락수(樂受)·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하나이며 수(受)란 대상을 받아 들여 괴로움이나 즐거움, 혹은 괴로움이나 즐거움도 아닌 것을 느끼는 정신작용이다.
◎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은 이리저리 억측(臆測, 주변계탁) 한다는 뜻이며, 계탁(計度)은 자기의식의 작용으로서 선악의 여러 가지 사물을 헤아리고 분별하는 차별적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이 집착은 일체 사물에 대하여 주관적 색채를 띠고 보는 것이므로 주변(周遍)이라 한다. 소집(所執)은 변계(遍計)에 의하여 잘못 보이는 대상, 곧 주관의 눈으로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항상 잘못 분별하는 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한다.
◎ 별청(別請)
별청(別請)이란, 차례를 뛰어 넘어 특정인을 따로 지명하여 청하는 일. 『비구응공법행경(比丘應供法行經)』과 『거사복전경(居士福田經)』에 ‘만일 나의 제자 가운데 별청을 받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은 결정코 일과(一果) 이과(二果) 삼과(三果) 사과(四果)를 잃을 것이니 비구라고 할 수 없다. 이 사람은 국왕의 땅을 밟고 다닐 수도 없고 나라의 물을 마실 수도 없으며 5백명의 큰 악귀가 그 앞을 가로 막을 것이다. 이 비구는 7겁을 두고 부처님을 보지 못할 것이며 단월의 물건을 받지 못할 것이며 오천명의 큰 귀신들이 항상 그 뒤를 따르며 불법 가운데 큰 도적이라고 할 것이니, 모든 비구는 별청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 빠두뭇따라(Padumuttara) 부처님
빠두뭇따라(Padumuttara) 부처님은 과거 24불 가운데 10번째 부처님이다. 태어나는 순간과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 1만세계에 연꽃의 비가 내렸기 때문에 빠두뭇따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부처님이 계셨을 때에는 외도(外道)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아난다(Ānanda) 존자를 위시한 고따마 부처님의 제자들 대부분이 빠두뭇따라 부처님 당시에 고따마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처음 세웠다고 한다.
◎ 빠따짜라(Patacara) 장로니
빠따짜라(Patacara) 장로니의 이야기는 「법구경」의 주석서(DhA.ii.260) 등에 나온다. 그녀는 원래 사왓티(Sāvatthi)의 한 부유한 집의 딸이었는데 집안의 하인과 눈이 맞아서 부모 몰래 도망쳐 나와 가정을 꾸리고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나중에 남편의 눈을 피해 몰래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부모를 만나러 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를 뒤 쫒아 나선 남편은 길에서 독사에 물려죽고, 강변에 먼저 건네 두고 온 아이는 독수리가 와서 낚아채가고, 그 와중에 한 아이는 강물에 휩쓸려가고, 그나마 친정집에 와보니 부모님들은 한밤중에 폭우가 쏟아져 모두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이러한 연속적인 불행에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빠따짜라는 옷도 걸치지 않고 울부짖으며 사방을 헤매다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곳으로 우연히 오게 되었고 부처님의 다음 게송을 듣고는 곧바로 수다원과를 얻었다. “아들도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아버지도 친척들도 또한 그러하다.죽음의 압박에 시달리는 자에게혈육은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Dhp.81)
◎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는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의 수도인 빠뜨나(Patna)이다. 디가 니까야,「대반열반경」(D16)에는 빠딸리 마을(Pāṭaligāma)을 확장하여 빠딸리뿟따가 건설되는 것이 언급되고 있으며 세존께서는 이 도시는 번창한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세존의 예언대로 그후 빠딸리 마을은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로 불리게 되며 마우리야(Maurya) 왕조, 굽따(Gupta) 왕조 등 역대 인도 통일국가의 수도로 그 이름을 떨쳤다.
◎ 빠띠목까(pātimokkha)
빠띠목까(pātimokkha)는 praṭi(각각,~에 대하여)+√muc(해탈하다, 벗어나다)의 사역형 동명사에서 파생된 중성 명사로 간주한다. 중국에서는 어원의 뜻올 살려서 별해탈(別解脫)이라고 옮기기도 하거나, 음역하여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라고도 하거나, 계본(戒本)이나 계목(戒目)이라 하기도 하였다. 영어권에서는 code of discipline이라 한다. 이것은 비구와 비구니들의 행동가짐을 단속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계의 목록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빠띠목카란 학습계목의 계율(sikkhāpada-sīla)을 뜻한다. 이것은 이것을 보호하고(pāti) 지키는 사람을 해탈케 하고(mokkheti), 나쁜 세계(惡趣, apāya) 등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빠띠목카(pāṭimokkha)라고 한다.”(Vis.I.43) 상좌부 불교의 빠띠목카는 227조항(비구니의 경우 311조항)으로 되어 있으며, 상좌부불교의 스님들은 보름마다 열리는 집회인 포살(布薩, uposatha)에서 이 빠띠목카 전체를 암송한다.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산스끄리뜨 율전(律典)에서는 250조항(비구니의 경우는 348조항)을 규정하는데, 이 전통이 북방불교권에서 통용되었다. 중국에서 번역된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률(十誦律) 등은 이 전통을 따른 문헌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전통을 따르는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는 지역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계목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수행규범 즉 청규(淸規)로 대체하였다.
(1) 바라이(波羅夷, pārājika) - 가장 무거운 죄이다. 이것은 ➀ 사음, ➁ 도둑질, ➂ 사람을 죽이는 것, ➃ 깨닫지 않았는데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의 4개조로 이것들을 범하면 승가로부터 영원히 추방된다.
(2) 승잔(僧殘, saṅghādisesa) - 13조(비구니는 17조 내지 19조)로서 성性에 관한 죄나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려고 한 죄,남을 바라이 죄로 비방한 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것을 범하면 현전승가의 앞에서 참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7일 동안 근신(別住, mānatta)을 하고,그 다음에 출죄갈마에 의해 죄가 사면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것은 바라이 다음가는 중죄이다. 바라이와 승잔을 범하려다가 미수로 끝난 경우를 ‘투란차죄(偸蘭遮罪, thullaccaya)’라 한다.
(3) 부정(不定, aniyata) - 2조(비구니는 없음)인데, 이것은 비구가 여성과 자리를 함께 한 경우의 죄로서 증인의 증언에 의해 죄가 결정 되므로 ‘부정’ 이라고 한다.
(4) 사타(搖塵, nissaggiyapācittiya) - 30조(비구니 30조)인데, 소유가 금지되어있는 물건을 소지한 경우의 죄 이다. 예컨대 의복은 삼의일발(三衣一拔)만 소유할 수 있다. 여분의 가사를 얻었을 경우는 일정 기간 동안만 소유가 허락된다. 이 밖에 좌구(坐具), 우의(雨衣), 식초, 약 등에 대해서도 소유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으며,갖가지 보물의 소유나 매매는 금지 되고 있다. 사타죄에 저촉되면 그 물건을 버리고 참회해야 한다.
(5) 파일제(波逸提, pācittaya) - 90조 내지 92조(비구니는 141-210조)이다. 이것은 거짓말, 사나운 말 등의 가벼운 죄를 모아 놓은 것이다. 이것을 범하면 참회를 해야 한다.
(6) 회과(悔過, pātidesaniya) - 4조(비구니는 8조) 이다. 이 것은 받아서는 안되는 음식물을 받아 먹은 경우의 죄 로서 가벼운 죄이다.
(7) 중학(衆學, sekhiyā) - 75조 내지 107조(비구니도 마찬가지임)이다. 이것은 식사, 걸식, 설법 등의 행의작법(行義作法)을 규정한 것 이다. 이 규정을 어겼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참회하면 된다. 이 죄를 악작(惡作), 또는 돌길라(突吉羅, dukkaṭa)라고 한다. 또한 이로부터 악설(惡舌)이라는 죄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8) 멸쟁(滅諍, adhikaraṇa-samatha) - 7조(비구니도 마찬가지임)이다. 승가에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승가는 이 멸쟁을 적용하여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을 위반하면 악작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이상의 바라이, 승잔, 바일제, 회과, 돌길라를 ‘오편죄(五篇罪)’라 하며,여기에 투란차와 악설을 더한 것을 ‘칠취죄(七聚罪)’라고 한다.
◎ 빠띠빠띠(paṭipatti-sāsana)
여기서 ‘수행’이라 번역한 빠띠빠띠(paṭipatti-sāsana)는 paṭi(~대하여)+√pad(가다)에서 파생된 여성형 추상명사이다. PED에서 ‘means of reaching a goal or destination, path, way, means, method, mode of progress, course, practice, in pregnant sense The path (of the Buddha), leading to the destructions of all ill &to the bliss of Nibbāna.'라고 설명되듯이, '모든 괴로움의 소멸과 열반의 지복에 이르는 도, 수단, 과정, 도닦음, 길, 행도(行道), 수행’등의 여러 의미를 지닌다.
◎ 빠띠삼비다막가(Paṭisambhidā-magga)
[빠띠삼비다막가(Paṭisambhidā-magga)」는 경장의 쿳다까 니까야의 12번째 경이다. 한역으로 무애해도(無碍解道)라고 한다. 같은 쿳다까 니까야 소속의 닛데사(義釋, Niddesa)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로 되어 있다. 비록 경장에 속하긴 하지만 기존의 경장과 율장의 아비담마의 개념들을 분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경장과 논장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경이다. 이렇게 성격상 논장에 포함되어야 할 「빠띠삼비다막가」가 경장의 쿳다까 니까야에 포함된 것은 「빠띠삼비다막가」가 결집되었을 때는 이미 논장이 닫혀 칠론으로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열려있던 경장의 쿳다까 니까야에 넣은 것이다.「빠띠삼비다막가」는 대품(Mahā-vagga), 유간다품(Yuganaddha-vagga), 지혜품(Paññā-vagga)의 세 가지 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품에는 10개의 경이 들어 있다.
「청정도론」의 주요 설명 특히 혜품, 그 가운데서도 위빠사나를 설명하고 있는 18장부터 22장까지는 대부분이 「빠띠삼비다막가」를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빠띠삼비다막가」는 상좌부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주석서이다.
◎ 빠리자나띠(parijānāti)
빠리자나띠(parijānāti)는 pari(두루)+√jña(알다)에서 파생된 동사이다. PED에서 ‘to know accurately or for certain, to comprehend, to recognise, find out.'이라고 설명되듯이, ‘꿰뚫어 알다, 철저하게 알다, 두루 알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명사가 ‘두루 아는 지혜’로 번역되는 빠린냐(pariñña)이다.
◎ 빠세나디(Pasenadī)
빠세나디(Pasenadī)는 꼬살라(Kosala)국의 왕이기 때문에 보통 빠세나디 꼬살라(Pasenadī-Kosala)로 불린다. 그는 마하꼬살라(Mahā-kosala)왕의 아들이었다. 그 당시 인도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교육도시로 알려진 딱까실라(Takkasilā)로 유학하여 릿차위(Licchavī)의 마할리(Mahāli)와 말라(Malla)의 반둘라(Bandhula) 왕자 등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여러 학문과 기술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하꼬살라왕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DhpA.i.338) 그는 선정(善政)에 힘썼으며 뇌물과 부패를 청산하려고 애썼다고 한다.(SA.i.109) 그의 정비는 말리까(Mallikā)였는데 부처님께 크나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녀가 기증한 정사도 있었다. 그는 부처님과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하며, 그래서 일찍부터 부처님과 교분을 맺었으며 죽을 때까지 헌신적인 부처님의 신도였다. 그가 얼마나 부처님을 존경하고 흠모하였는지는 맛지마 니까야,「법탑경」(M89)등 여러 경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러 문헌(DhpA.i.339; J.i.133; iv.144 등)에 따르면 그는 석가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부처님과 인척관계를 맺고 싶어 하였다. 자부심이 강한 석가족은 마하나마(Mahānāma)와 하녀 사이에 난 딸인 와사바캇띠야(Vāsabhakhattiyā)를 보냈으며, 이들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위두다바(Vīdūdabha) 왕자이다. 위두다바 왕자가 커서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였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였고, 그래서 후에 위두다바는 석가족을 정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살육을 하였다고 한다. 이 위두다바는 빠세나디 왕의 총 사령관인 디가까라야나(Digha-kārāyana)의 도움으로 모반을 일으켜 왕이 되었으며, 빠세나디는 마가다(Magadha)로 가서 아자따삿뚜(Ajātasattu)의 도움을 청하려 하였지만 그가 라자가하(Rājagaha)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성문은 닫혀 있었다. 노후한 몸에 피로가 엄습한 그는 성 밖의 객사에서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하며 아자따삿뚜가 그의 시신을 잘 수습하였다. 이에 아자따삿뚜는 위두다바를 공격하려다가 대신들의 조언으로 그만 두었다고 한다. (M.ii.118; MA.ii.753; DhpA.i.353; J.iv.150) 그에게는 브라흐마닷따(Brahmadatta)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문하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며(ThaA.i.460) 그의 여동생 수마나(Sumanā) 공주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제따 숲을 기증한 제따(Jetā) 왕자도 그의 아들이었다. 부처님께서 후반부의 24여년 간을 사왓티(Sāvatthi)에서 머무실 정도로 꼬살라와 부처님과는 인연이 많은 곳이며 상윳따 니까야의 꼬살라 상응(Kosala-saṁyutta)은 모두 빠세나디왕과 관계된 가르침일 정도로 부처님과는 가장 인연이 깊었던 왕이었다. 후대 주석서인「아나가따왐사(Anāgatavaṁsa)」에 따르면 빠세나디는 4번째 미래불이 될 보살이라고 한다.
◎ 빤냐(paññā)
빤냐(paññā/Sk.prajña)는 pra(앞으로)+√jñā(알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PED에서 ‘intelligence, comprising all the higher faculties of cognition, "intellect as conversant with general truths", reason, wisdom, insight, knowledge, recognition.’라고 설명되듯이, 인식, 사유, 지혜, 통찰, 지식, 이해의 모든 높은 기능들로 이루어진 지성을 뜻하는 전문술어이다. 즉 네 가지 과의 증득을 가져오는 통찰지혜로 모든 유위법(有爲法)의 무상·고·무아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뜻한다. 또한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수행체계인 삼학(三學, ti-sikkha)에서 가장 높고 마지막 단계인 혜온(慧蘊, paññā-kkhanda)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반야(般若)로 음역하거나 혜(慧)라고 번역했으며, 영어권에서는 wisdom, insight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 빤냐띠(paññātti)
‘개념’이라 번역한 빤냐띠(paññātti)는pra(앞으로)+√pajānāti(알다)의 사역형 동사인 paññāpeti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이다. ‘(남들이) 잘 알게 하다’는 뜻에서 ‘선언하다,선포하다,알리다,지적하다,지목하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빤냐띠는 ‘알게 하는 것’ 이란 의미에서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시설(施設)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concept라고 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두 가지 빤냐띠(paññātti)가 있는데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 sadda-panññatti)과 이름으로서의 개념(名施設, attha-panññatti)이 있다. 뜻으로서의 개념은 개념이 전달하는 뜻을 말하며 의미로서의 개념은 그 뜻을 전달하는 이름이나 명칭을 말한다.
◎ 뽀놉바위까(ponobhavikā)
뽀놉바위까(ponobhavikā)는 pono(다시)+bhavikā(존재하게 하는 것)의 합성어로,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것', 또는 ‘재생을 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술어는 갈애(taṇha)가 있는 한 윤회는 다시 태어남(jāti)을 일으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청정도론」(Vis.XVI.61)과 「대념처경」주석서(DA.iii.800)에서는 이 뽀놉바위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뽀놉바위까(ponobhavikā)’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 ‘다시 태어남을 만든다’는 뜻이 ‘뿌놉바와(punobbhava)’이고, ‘습관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이 ‘뽀놉바위까(ponobbhavikā)’이다.”(DA.iii.800)
◎ 뿌리
‘뿌리’라 번역한 물라(mūla)는 hetu(원인)이라고도 하며, 의도(cetanā)라는 실제적 업의 질 및 그것과 결부되는 마음(citta)과 마음의 작용(cetasika)을 결정짓는 조건이다. 뿌리에는 모두 6가지가 있는데 그 중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세 가지는 불선한 뿌리이고, 탐욕 없음(alobha), 성냄 없음(adosa), 어리석음 없음(amoha)의 세 가지는 선한 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