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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의 모음- 6. 자신의 마음 품(Sacitta-vagga. AN10.51-60)

실론섬 2014. 9. 1. 20:51

                                     

제6장 자신의 마음 품 Sacitta-vagga (AN 10.51-60)

sacittasuttaṃ (AN 10.51-자신의 마음 경)
51.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따삔띠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약 남의 마음의 길에 능숙하지 못하다면 거기서 ‘나는 나의 마음의 길에 능숙해질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만약 비구가 남의 마음을 잘 관(觀)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자기 마음부터 잘 관찰하여야 한다. 응당 닦음도 이렇게 해야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의 길에 능숙한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은 물로 가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는, 젊고 혈기 있고 장식을 좋아하는 여자나 남자가 있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면 그 티끌이나 때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지 못하면 그는 ‘나는 얻었다. 나에게 깨끗함이 있다.'라고 만족해한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선법들에 대한 돌이켜 살펴봄을 많이 행한다.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무는가, 간탐하지 않으면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며든 채  많이 머무는가,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무는가,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무는가, 성내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는가, 몸이 편안한 상태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무는가,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면든 채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많이 머물고,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오직 그 옷과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할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 악한 불선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지 않고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분노하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머물고, 나는 편안한 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선법들에 굳게 선 뒤 더 나아가 번뇌들을 소멸하기 위해 닦아야 한다.”

 

sāriputtasuttaṃ (AN 10.52-사리뿟따 경)
52.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만약 비구가 남의 마음의 길에 능숙하지 못하면 거기서 ‘나는 나의 마음의 길에 능숙해질 것이다.’라고, 도
반들이여, 이렇게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 길에 능숙합니까?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은 물로 가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는, 젊고 혈기 있고 장식을 좋아하는 여자나 남자가 있습니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면 그 티끌이나 때를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지 못하면 그는 ‘나는 얻었다. 나에게 깨끗함이 있다.’라고 만족해합니다. 그와 같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선법들에 대한 돌이켜 봄을 많이 행합니다.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무는가, 간탐하지 않으면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며든 채 많이 머무는가,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무는가,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무는가, 성내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는가, 몸이 편안한 상태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무는가,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라고.

 

도반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면든 채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많이 머물고,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옷과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그 악한 불선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지 않고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분노하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머물고, 나는 편안한 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선법들에 굳게 선 뒤 더 나아가 번뇌들을 소멸하기 위해 닦아야 합니다.”

 

ṭhitisuttaṃ (AN 10.53-정체 경)

53. “비구들이여, 나는 선법들에 대한 정체도 칭송하지 않으니, 퇴보는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선법들에서의 향상을 칭송한다. 정체와 퇴보는 아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선법들에서 정체도 아니고, 향상도 아니고, 퇴보하는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느 정도의 믿음과 계(戒)와 배움과 베풂과 지혜와 이해를 가지고 노력하는 비구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법들은 정되지도 않고 향상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을 선법들에서 정체도 아니고, 향상도 아니고, 퇴보라고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선법들에서 정체도 아닌, 향상도 아닌, 퇴보가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선법들에서 퇴보도 아니고, 향상도 아니고, 정체되는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느 정도의 믿음과 계(戒)와 배움과 베풂과 지혜와 이해를 가지고 노력하는 비구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법들은 퇴보하지도 않고 향상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을 선법들에서 퇴보도 아니고, 향상도 아니고, 정체라고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선법들에서 후퇴도 아닌, 향상도 아닌, 정체가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선법들에서 정체도 아니고, 퇴보도 아니고, 향상하는 것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느 정도의 믿음과 계(戒)와 배움과 베풂과 지혜와 이해를 가지고 노력하는 비구가 있다. 그에게 이러한 법들은 정체되지도 않고 퇴보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을 선법들에서 정체도 아니고, 퇴보도 아니고, 향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선법들에서 정체도 아닌, 퇴보도 아닌, 향상이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남의 마음의 길에 능숙하지 못하다면 거기서 ‘나는 나의 마음의 길에 능숙해질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의 길에 능숙한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은 물로 가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는, 젊고 혈기 있고 장식을 좋아하는 여자나 남자가 있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면 그 티끌이나 때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지 못하면 그는 ‘나는 얻었다. 나에게 깨끗함이 있다.'라고 만족해한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선법들에 대한 돌이켜 살펴봄을 많이 행한다.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무는가, 간탐하지 않으면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며든 채  많이 머무는가,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무는가,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무는가, 성내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는가, 몸이 편안한 상태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무는가,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면든 채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많이 머물고,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오직 그 옷과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할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 악한 불선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지 않고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분노하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머물고, 나는 편안한 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선법들에 굳게 선 뒤 더 나아가 번뇌들을 소멸하기 위해 닦아야 한다.”  

 

samathasuttaṃ (AN 10.54-사마타 경)
54. ““비구들이여, 만약 남의 마음의 길에 능숙하지 못하다면 거기서 ‘나는 나의 마음의 길에 능숙해질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의 길에 능숙한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은 물로 가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는, 젊고 혈기 있고 장식을 좋아하는 여자나 남자가 있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면 그 티끌이나 때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지 못하면 그는 ‘나는 얻었다. 나에게 깨끗함이 있다.'라고 만족해한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선법들에 대한 돌이켜 살펴봄을 많이 행한다.
‘나는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얻었는가, 나는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얻지 못했는가, 나는 위빠사나의 높은 지혜를 얻었는가, 나는 위빠사나의 높은 지혜를 얻지 못했는가?’라고.

 

만약, 비구들이여,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었지만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는 얻지 못했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안으로 마음의 삼매에 굳게 선 후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는 나중에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게 되고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도 얻게 된다. 

 

만약, 비구들이여,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는 얻었지만 마음의 사마타는 얻지 못했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에 굳게 선 후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닦아야 한다. 그는 나중에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도 얻게 되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게 된다. 

 

만약, 비구들이여,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지 못했고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도 얻지 못했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오직 이러한 유익한 법들을 얻기 특별한 열의와 정진과 노력과 분발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옷에 불이 붙고 머리에 불이 붙은 사람은 오직 그 옷과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 특별한 열의와 정진과 노력과 분발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할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그 사람은 선법들을 얻기 위해 특별한 열의와 정진과 노력과 분발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그는 나중에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게 되고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도 얻게 된다.

 

만약, 비구들이여,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었고 위빳사나의 높은 지혜도 얻었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이러한 선법들에 굳게 선 후 더 나아가 번뇌들을 소멸하기 위해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가사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탁발음식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거처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을과 성읍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지방과 지역(국가)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람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부류로)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가사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는가?

만약 거기서 가사에 대해 ‘이 가사를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증장하고, 선법은 사라진다(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가사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거기서 가사에 대해 ‘이 가사를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사라지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가사는 가까이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가사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탁발음식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만약 거기서 탁발음식에 대해 ‘이 탁발음식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증장하고, 선법은 사라진다(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탁발음식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거기서 탁발음식에 대해 ‘이 탁발음식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사라지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탁발음식은 가까이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탁발음식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거처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만약 거기서 거처에 대해 ‘이 거처를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증장하고, 선법은 사라진다(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거처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거기서 거처에 대해 ‘이 거처를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사라지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거처는 가까이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거처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을과 성읍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만약 거기서 마을과 성읍에 대해 ‘이 마을과 성읍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증장하고, 선법은 사라진다(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마을과 성읍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거기서 마을과 성읍에 대해 ‘이 마을과 성읍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사라지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마을과 성읍은은 가까이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을과 성읍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지방과 지역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만약 거기서 지방과 지역에 대해 ‘이 지방과 지역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증장하고, 선법은 사라진다(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지방과 지역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거기서 지방과 지역에 대해 ‘이 지방과 지역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사라지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지방과 지역은 가까이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지방과 지역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람도 가까이해야 하는 자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만약 거기서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증장하고, 선법은 사라진다(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사람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거기서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을 가까이 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사라지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사람은 가까이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람도 가까이해야 하는 것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parihānasuttaṃ (AN 10.55-퇴보(쇠퇴) 경)

55.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퇴보에 빠진 사람, 퇴보에 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퇴보에 빠지지 않은 사람, 퇴보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퇴보에 빠진 사람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고, 어떤 것이 퇴보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존자시여,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해서 저희들은 멀리서라도 사리뿟따 존자의 곁으로 와야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에게서 듣고 비구들은 명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반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어떤 것이 퇴보에 빠진 사람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배우지 못한 법을 배우지 않고, 배운 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전에 마음에 와 닿은 법들은 남아있지 않고, 알지 못했던 것은 알지 못합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퇴보에 빠진 사람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것이 퇴보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배우지 못한 법을 배우고, 배운 법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마음에 와 닿은 법들은 남아있고, 알지 못했던 것은 압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퇴보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도반들이여, 만약 비구가 남의 마음의 길에 능숙하지 못하면 거기서 ‘나는 나의 마음의 길에 능숙해질 것이다.’라고, 도반들이여, 이렇게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 길에 능숙합니까?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은 물로 가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는, 젊고 혈기 있고 장식을 좋아하는 여자나 남자가 있습니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면 그 티끌이나 때를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거기서 티끌이나 때를 보지 못하면 그는 ‘나는 얻었다. 나에게 깨끗함이 있다.’라고 만족해합니다. 그와 같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선법들에 대한 돌이켜 봄을 많이 행합니다.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무는가, 간탐하지 않으면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며든 채 많이 머무는가,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무는가,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무는가, 성내지 않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는가, 몸이 편안한 상태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무는가,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무는가?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무는가?’라고.

도반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면서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에 찬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이 스면든 채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하는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성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된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몸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많이 머물고, 나는 게으름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지 않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옷과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그 악한 불선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만약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나는 간탐하지 않고 많이 머물고, 나는 악의 없는 마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해태와 혼침을 벗어나서 많이 머물고, 나는 들뜨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의심을 건넌 자로 많이 머물고, 나는 분노하지 않음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많이머물고, 나는 편안한 몸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열심히 정진함으로 많이 머물고, 나는 삼매를 닦는 자로 많이 머문다.’라고 알게 되면,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선법들에 굳게 선 뒤 더 나아가 번뇌들을 소멸하기 위해 닦아야 합니다.”

 

paṭhamasaññāsuttaṃ (AN 10.56-인식 경1)
56. “비구들이여, 열 가지 인식을 닦고 많이 익히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무엇이 열인가?

부정(不淨)에 대한 인식, 죽음에 대한 인식,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 무상(無常)에 대한 인식, 괴로움에 대한 인식, 무아에 대한 인식, 버림에 대한 인식, 탐욕의 사라짐에 대한 인식, 소멸에 대한 인식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 가지 인식을 닦고 많이 익히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dutiyasaññāsuttaṃ (AN 10.57-인식 경2)

57. "비구들이여, 열 가지 인식을 닦고 많이 익히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무엇이 열인가?

“무상(無常)에 대한 인식, 무아에 대한 인식, 죽음에 대한 인식,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 해골이 된 모습에 대한 인식, 벌레가 우글거리는 모습에 대한 인식, 검푸르게 변색된 모습에 대한 인식, 절단되어 흩뿌려진 모습에 대한 인식, 부풀어 오른 모습에 대한 것의 인식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 가지 인식을 닦고 많이 익히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mūlakasuttaṃ (AN 10.58-뿌리 경)
58. “비구들이여, 만일 외도 유행승들이 묻기를 ‘도반들이여, 모든 법은 무엇을 뿌리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법은 어디로 모이며, 모든 법은 무엇을 으뜸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법은 무엇을 최상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을 핵심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으로 스며들며, 모든 법은 무엇으로 종결됩니까?’라고 한다면 그대들은 외도 유행승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방금 말씀하신 이 뜻을 직접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잘 듣고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설할 것이다. 듣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약 외도 유행승들이 ‘도반이여, 모든 법은 무엇을 뿌리로 하고, 모든 법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법은 어디로 모이며, 모든 법은 무엇을 으뜸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법은 무엇을 최상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을 핵심으로 하며, 모든 법은 무엇으로 스며들며, 모든 법은 무엇으로 종결됩니까?’라고 묻는면,비구들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들은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야 한다. 

‘도반들이여, 모든 법은 열의를 뿌리로 하며, 모든 법은 마음에 주의를 기울임을 근원으로 하며, 모든 법은 감각접촉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법은 느낌으로 모이며, 모든 법은 삼매를 으뜸으로 하며, 모든 법은 마음 챙김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법은 지혜를 최상으로 하며, 모든 법은 해탈을 핵심으로 하며, 모든 법은 불사(不死)로 스며들며, 모든 법은 열반으로 종결됩니다.’라고 그대들은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야 한다.”

 

*불사로 스며든다'는 것은 유여열반을 말했고, 열반으로 종결된다는 것은 무여열반을 말했다. 무여열반을 얻은 자는 모든 법들이 종결됨을 얻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AA.v.42)

 

pabbajjāsuttaṃ (AN 10.59-출가 경)
59.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처음 출가할 때처럼 굳건하게 되기를, 일어난 악한 불선법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않기를, 우리의 마음이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우리의 마음이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우리의 마음이 부정(不淨)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우리의 마음이 위험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세상의 선행과 악행을 알아서 우리의 마음이 이것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세상의 번영과 재앙을 알아서 우리의 마음이 이것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서 우리의 마음이 이것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우리의 마음이 버림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우리의 마음이 탐욕이 사라짐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 우리의 마음이 소멸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기를.’이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처음 출가할 때처럼 굳건한'은 yatha-pabbajja-paricitam을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는 yatha pabbajjanuripena paricitam(출가에 걸맞도록 익힌, 실천한)으로 풀이할 수 있다. 누구든지 출가할 땐 모두 다 아라한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아라한과를 얻기 위해 익고(paricita) 굳건히 한(vaddhita) 그 마음을 '처음 출가할 때처럼 굳건한'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하고 닦아야 한다.(AA.v.42)

 

비구들이여, 비구의 마음이 처음 출가할 때처럼 굳건하게 되고, 일어난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않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부정(不淨)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위험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세상의 선행과 악행을 알아서 우리의 마음이 이것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세상의 번영과 재앙을 알아서 우리의 마음이 이것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서 우리의 마음이 이것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버림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탐욕의 사라짐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소멸의 [관찰로 생긴] 인식에 굳건하게 되면, 그에게 지금·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거나, 집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과.不還果]를 성취하는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예상된다.”  

 

girimānandasuttaṃ (AN 10.60-기리마난다 경)

60.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따삔띠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기리마난다 존자가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기리마난다 존자(ayasma Girimananda)는 마가다의 빔비사라 왕의 궁중제관의 아들이었다. 세존께서 라자가하에 오신 것을 보고 환희심이 생겨 출가하였다. 그는 시골에 거주하였는데 하루는 세존을 친견하러 라자가하로 왔다가 빔비사라 왕이 후훤을 해주겠다며 라자가하에 남아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수락하였으나 왕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노지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어떤 천신이 그 이유를 알고 토굴을 지어줬으며 거기서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ThagA.ii.38) 그와 관계된 게송이 테라가타(장로게)에 기록되어 있다.(Thag.vv.325-329)

 

“세존이시여, 기리마난다 존자가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연민하는 마음을 내시어 기리마난다 존자를 직접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아난다여, 만약 그대가 기리마난다 비구에게 가서 열 가지 인식에 대해 말해준다면, 기리마난다 비구는 열 가지 인식에 대해 듣자마자 병이 즉시 가라앉게 될 것이다. 무엇이 열인가? 무상(無常)의 인식, 무아의 인식, 부정(不淨)의 인식, 위험의 인식, 버림의 인식, 탐욕의 사라짐의 인식, 소멸의 인식, 온 세상에 기쁨이 없다는 인식,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한 무상의 인식,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 챙김이다.

 

아난다여, 무엇이 무상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물질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인식은 무상하다. 형성은 무상하다. 의식은 무상하다.’라고. 이처럼 이들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 오취온]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무상(無常)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무아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눈은 무아이고 형상은 무아다. 귀는 무아이고 소리는 무아다. 코는 무아이고 냄새는 무아다. 혀는 무아이고 맛은 무아다. 몸은 무아이고 감촉은 무아다. 마음은 무아이고 법(마음현상)은 무아다.’라고. 이처럼 이들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에 대해 무아를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무아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부정(不淨)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이 몸은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을 가득 차 있음을 관찰한다.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치아∙피부∙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늑막∙비장∙허파∙창자∙장간막∙위장∙배설물∙담즙∙∙고름∙피∙땀∙기름∙눈물∙비계∙침∙콧물∙관절활액∙오줌이 있다.’라고. 이렇게 이 몸에 대해 부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부정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위험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이 몸에는 많은 괴로움과 많은 위험이 있다. 이 몸에는 여러 가지 병이 생기나니, 눈병, 귓병, 콧병, 혀의 병, 몸살, 두통, 바깥귀의 병, 입병, 치통, 기침, 천식, 콧물감기, 발열, 열병, 위장병, 기절, 설사, 격통, 콜레라, 나병, 종기, 피부병, 폐결핵, 간질, 피부염, 가려움, 딱지, 습진, 개선(疥癬, 옴), 황달, 당뇨병, 치질, 부스럼, 궤양, 담즙에 기인한 병, 점액에 기인한 병, 바람에 기인한 병, 합병증, 환절기로 인한 병, 자세의 부조화에 기인한 병, [다른 이로부터 받은] 상해(傷害)로 생긴 병, 업의 과보로 생긴 병, 차가움, 더움, 배고픔, 목마름, 대변, 소변이다. 이처럼 이 몸에서 위험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위험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버림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일어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일어난 성냄에 찬 생각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일어난 해코지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불선법들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없앤다. 이것이, 아난다여, 버림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탐욕의 사라짐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그것은 바로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열반이다.’라고. 이것이, 아난다여, 탐욕이 사라짐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소멸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간 비구는 이렇게 숙고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그것은 바로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이것이, 아난다여, 소멸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세상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런 마음의 결심과 집착과 잠재적 성향들을 제거하고 기뻐하지 않고 붙잡지 않는다. 이것이, 아난다여,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한 무상의 인식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이것이, 아난다여,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에 대한 무상의 인식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무엇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 챙김인가?

여기, 아난다여,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간 비구는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 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 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 차린다,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라고 알아 차린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 차리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알아 차린다. 

③ ‘온 몸을 느끼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온 몸을 느끼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④ ‘몸의 작용[身行]을 가라앉히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몸의 작용을 가라앉히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⑤ ‘희열(기쁨)을 느끼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희열을 느끼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⑥ ‘행복(즐거움)을 느끼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행복을 느끼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느끼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마음의 작용을 느끼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⑧ ‘마음의 작용을 가라앉히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마음의 작용을 가라앉히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⑨ ‘마음을 느끼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마음을 느끼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 익힌다. 

⑫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⑭ ‘탐욕이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탐욕이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익히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익힌다.
이것이, 아난다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이들 16항목에서, 처음의 넷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에 속하고, 두 번째 넷은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에 속하고, 세 번째 넷은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에 혹하고, 마지막 넷은 '법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에 속한다.

아난다여, 만약 그대가 기리마난다 비구에게 이러한 열 가지 인식에 대해 말한다면, 기리마난다 비구는 이러한 열 가지 인식에 대해 듣자마자 병이 즉시 가라앉게 될 것이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이러한 열 가지 인식을 받아 지니고 기리마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기리마난다 존자에게 이러한 열 가지 인식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기리마난다 존자는 이러한 열 가지 인식에 대해 듣자마자 병이 즉시 가라앉았고, 기리마난다 존자는 병석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기리마난다 존자는 그 병에서 완쾌되었다.

 

 

제6장 자신의 마음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