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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의 모음 - 9. 장로 품(Thera-vagga. AN10.81-90)

실론섬 2014. 9. 5. 16:34

제9장 장로 품 Thera-vagga (AN 10.81-90)

 

bāhunasuttam (AN 10.81-바후나 경)

81. 한 때에 세존께서는 짬빠에서 각가라 호수의 언덕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바후나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바후나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몇 가지 법들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뭅니까?”
“바후나여, 여래는 열 가지 법들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어떤 열 가지인가?
“바후나여, 여래는 물질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형성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태어남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늙음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바후나여, 여래는 번뇌들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예를 들면, 바후나여,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물에서 생겨나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 위로 솟아 올라 물에 젖지 않고 피어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여래는 이러한 열 가지 법들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한계가 없다(vimariyadi-kata)'는 것은 오염원들의 한계를 부수어 한계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AA.v.55)

 

ānandasuttaṃ (AN 10.82-아난다 경)
82.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참으로 아난다여, 믿음이 없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계를 경시하는(계를 지키지 않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적게 배운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훈도하기 어려운(완고한)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나쁜 친구를 사귀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게으른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놓아버린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만족함을 모르는(만족하지 못하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삿된 바람(악한 원함)을 가진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삿된 견해를 가진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이런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믿음이 있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계를 중시하는(지키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많이 배운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훈도하기 쉬운(유연한)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좋은 친구를 사귀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열심히 정진하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한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만족함을 아는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올바른 바람(원함이 적은)을 가진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바른 견해를 가진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이런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라고.

 

puṇṇiyasuttam (AN 10.83-뿐니야 경) 

83. 그 무렵 뿐니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뿐니야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어떤 때는 여래께서 법을 설하시고, 어떤 때는 법을 설하지 않으십니까?”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지만 여래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지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경의를 표하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지만 귀 기울여 법을 듣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들으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지만 들은 뒤 법을 호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지만 들은 뒤 법을 호지하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들은 뒤 법을 호지하지만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하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하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 하지만 주석서(뜻.의미)를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여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가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하고 주석서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여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으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하고 주석서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여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지만 선한 말을 하고 선한 말씨를 가졌고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하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하고 주석서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여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지만 선한 말을 하고 선한 말씨를 가졌고 예의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했지만, 청정범행을 닦는 동료 비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지 않으면, 여래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뿐니야여, 비구가 믿음이 있고, 여래에게 다가가고, 경의를 표하고,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들은 뒤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하고, 주석서를(뜻.의미) 이해하고 삼장을 이해하여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고, 선한 말을 하고 선한 말씨를 가졌고 예의 바르고 명확하고 흠이 없고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언변을 구족하고, 청정범행을 닦는 동료 비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뿐니야여, 이러한 열 가지 법을 갖추면 여래는 법을 설한다.”

 

byākaraṇasuttaṃ (AN 10.84-선언 경)
84.
거기에서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구경의 지혜를 선언합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다.’라고. 그런 그에게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합니다.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대화하면 그는 황량해지고 당황하고(우물쭈물하게 되고) 곤경을 겪고 불행을 겪고 곤경과 불행을 겪습니다.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무슨 이유로 이 비구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다.’라고 분명히 안다고 구경의 지혜를 선언하는가?’라고.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 차립니다.

‘이 존자는 분노하는 자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분노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앙심을 가진 자이다. 앙심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앙심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저주하는 자이다. 저주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격분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원한을 가진 자이다. 원한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원한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질투하는 자이다. 질투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질투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인색한 자이다. 인색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인색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속이는 자이다. 속임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속임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교만한 자이다. 교만함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교만함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삿된 바램을 가진 자이다. 삿된 바램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삿된 바람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더 해야 함이 있을 때 작은 특별함의 성취에 의해 도중에 포기해 버린다. 도중에 포기해버림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 열 가지 법을 제거하지 않고서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 열 가지 법을 제거한 뒤에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우는 있습니다.”

 

katthīsuttaṃ (AN 10.85-자랑 경)
85. 한 때에 마하쭌다 존자께서는 쩨띠에서 사하자띠에 머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마하쭌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마하쭌다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자신의 증득에 대해서 이렇게 자랑하고 허풍을 떱니다.

‘나는 초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제2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제3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제4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공무변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식무변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무소유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 나는 상수멸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라고.  

그런 그에게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합니다.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대화하면 그는 황량해지고 당황하고(우물쭈물하게 되고) 곤경을 겪고 불행을 겪고 곤경과 불행을 겪습니다.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무슨 이유로 이 비구가 ‘나는 초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 나는 상수멸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라고 성취에 대해서 자랑하고 허풍을 떠는가?'라고.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 차립니다. 

‘이 존자는 계에 대해서 오랫동안 깨지고, 끊어지고, 결점이 있고, 얼룩(오점)이 있다. 일관되게 행위하지 못하고 일관되게 머물지 못한다. 이 존자는 계를 경시하는 자이다. 계를 경시하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배움이 적다. 적게 배움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훈도하기 어렵다. 훈도하기 어려운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나쁜 친구를 사귄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게으르다. 게으름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렸다. 마음챙김을 놓아버리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계략을 꾸민다. 계략을 꾸미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대화하기 어렵다. 대화하기 어려운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지혜가 없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라고.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친구가 그의 친구에게 ‘벗이여, 자네가 돈이 필요하면 내게 말하게. 내가 자네에게 돈을 주겠네.’라고 말합니다. 그 후 그의 친구는 어떤 일로 돈이 필요하여 그 친구에게 ‘여보게, 돈이 필요하네. 돈을 좀 주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여보게, 그렇다면 여기를 파보게.’라고 말합니다. 그의 친구는 거기를 팠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자 친구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는 여기를 파보라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헛소리를 했네.’ 그러자 친구는 ‘나는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속이지 않았네. 그렇다면 여기를 파보게.’라고 말합니다. 그의 친구는 다시 거기를 팠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자 친구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는 여기를 파보라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속였네.’ 그러자 친구는 ‘나는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속이지 않았네. 그렇다면 여기를 파보게.’라고 말합니다. 그의 친구는 다시 거기를 팠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자 친구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는 여기를 파보라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속였네.’ 그러자 친구는 ‘나는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속이지 않았네. 나는 단지 혼미했고 마음이 산란했을 뿐이었다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비구는 자신의 증득에 대해서 이렇게 자랑하고 허풍을 떱니다.

‘나는 초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제2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제3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제4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공무변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식무변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무소유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 나는 상수멸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라고.  

그런 그에게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합니다.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대화하면 그는 황량해지고 당황하고(우물쭈물하게 되고) 곤경을 겪고 불행을 겪고 곤경과 불행을 겪습니다.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무슨 이유로 이 비구가 ‘나는 초선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 나는 상수멸을 증득하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라고 성취에 대해서 자랑하고 허풍을 떠는가?'라고.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 차립니다. 
‘이 존자는 계에 대해서 오랫동안 깨지고, 끊어지고, 결점이 있고, 얼룩(오점)이 있다. 일관되게 행위하지 못하고 일관되게 머물지 못한다. 이 존자는 계를 경시하는 자이다. 계를 경시하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배움이 적다. 적게 배움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훈도하기 어렵다. 훈도하기 어려운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나쁜 친구를 사귄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게으르다. 게으름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렸다. 마음챙김을 놓아버리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계략을 꾸민다. 계략을 꾸미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대화하기 어렵다. 대화하기 어려운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지혜가 없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열 가지 법을 제거하지 않고서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열 가지 법을 제거한 뒤에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우는 있습니다.”

 

adhimānasuttaṃ(AN 10.86-자부심 경)
86. 한 때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마하깟사빠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마하깟사빠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구경의 지혜를 선언합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다.’라고. 그런 그에게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합니다.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대화하면 그는 황량해지고 당황하고(우물쭈물하게 되고) 곤경을 겪고 불행을 겪고 곤경과 불행을 겪습니다.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무슨 이유로 이 비구가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다.’라고 분명히 안다고 구경의 지혜를 선언하는가?’라고. 

그런 그를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 차립니다.

‘이 존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자다.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얻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행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증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증득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과대평가로 인해 다음과 같이 구경의 지혜를 설명한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다.'라고 분명히 안다고 구경의 지혜를 선언한다.

 

다시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무슨 이유로 이 존자는 과대평가하는 자가 되어,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행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증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증득했다는 인식을 가져서, 과대평가로 인해 다음과 같이 구경의 지혜를 설명하는가?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선언하는가?'라고.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게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마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 차립니다.

‘이 존자는 많이 배운[多聞] 자다. 배운 것을 잘 호지하고 배운 것을 잘 정리한다.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범행을 드러내는 가르침들이 있으니, 그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호지하고 말로써 실천하게 되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꿰뚫는다. 그래서 이 존자는 과대평가하는 자가 되어,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얻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행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증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증득했다는 인식을 가져서, 과대평가로 인해 다음과 같이 구경의 지혜를 설명한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다.’라고 분명히 안다고 구경의 지혜를 선언한다.

 

다시 여래나 혹은 선정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마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 차립니다. 

‘이 존자는 간탐하고, 간탐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간탐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성냄을 가지고 성냄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성냄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해태와 혼침이 있고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힌 많이 마음으로 머문다.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산만하고 들뜸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들뜸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의심하고 의심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의심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세간적인 일하기를 좋아하고 세간적인 일하기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세간적인 일하기를 좋아함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말하기 좋아함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잠자기를 좋아하고 잠자기를 좋아함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많이 머문다. 잠자기를 좋아함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짓기를 좋아함에 사로잡힌 많이 마음으로 머문다. 무리짓기 좋아함에 사로잡힘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 

이 존자는 더 해야 함이 있을 때 작은 특별함의 성취에 의해 도중에 포기한다. 도중에 포기하는 것은 여래가 설하신 법과 율에서 퇴보를 뜻한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열 가지 법을 제거하지 않고서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들이여, 그 비구는 이런 열 가지 법을 제거한 뒤에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우는 있습니다.”

 

nappiyasuttaṃ (AN 10.87-사랑스럽지 않음 경)

거기서 세존께서는 깔라까 비구와 관련하여 "비구들이여" 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대중공사를 일으키기를 좋아하고, 대중공사를 가라앉히는 것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대중공사를 일으키기를 좋아하고, 대중공사를 가라앉히는 것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닦음과 익힘을 좋아하지 않고, 닦음과 익힘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닦음과 익힘을 좋아하지 않고, 닦음과 익힘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삿된 바람을 가졌고, 삿된 바람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삿된 바람을 가졌고, 삿된 바람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분노하고, 분노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분노하고, 분노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저주하고, 저주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저주하고, 저주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속이고, 속이는 것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속이고, 속이는 것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사기를 치고, 사기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사기를 치고, 사기의 떠남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법들을 관찰하는 부류가 아니고, 법들의 주의 깊은 관찰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법들을 관찰하는 부류가 아니고, 법들의 주의 깊은 관찰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한적한 곳에 홀로 머물지 않고, 한적한 곳에 홀로 머묾을 칭송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한적한 곳에 홀로 머물지 않고, 한적한 곳에 홀로 머묾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동료 수행자들에게 친절하지 않고,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동료 수행자들에게 친절하지 않고, 친절함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그를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게 하고 닦음을 익지 못하게 하고(향상)과 참다운 사문이 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전일한 상태로 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들에게는 ‘참으로 동료 수행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기를!’이라는 이런 바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동료 수행자들은 그를 존경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동료 수행자들은 삿된 불선법들이 그에게서 제거되지 않았음을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길들여지지 않은 말에게 ‘참으로 사람들이 나를 혈통 좋은 말의 지위에 두고, 혈통 좋은 말의 음식을 먹게 하고, 혈통 좋은 말을 돌보듯이 돌봐주기를!’이라는 바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혈통 좋은 말의 지위에 두지 않고, 혈통 좋은 말의 음식을 먹게 하지 않고, 혈통 좋은 말을 돌보듯이 돌봐주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그의 간교함과 속임수와 기만과 거짓들을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들에게 ‘참으로 동료 수행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기를!’이라는 바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동료 수행자들은 그를 존경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동료 수행자들은 삿된 불선법들이 그에게서 제거되지 않았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대중공사를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중공사를 가라앉히는 것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대중공사를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중공사를 가라앉히는 것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닦음과 익힘을 좋아하고, 닦음과 익힘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닦음과 익힘을 좋아하고, 닦음과 익힘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바라는 것이 적고, 바라는 것이 적음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바라는 것이 적고, 바라는 것이 적음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분노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분노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저주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는 것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저주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는 것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속이지 않고, 속이는 않는 것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속이지 않고, 속이지 않는 것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사기치지 않고, 사기치는 않는 것을 떠난 것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사기치지 않고, 사기치지 않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법들을 관찰하는 부류이고, 법들의 주의 깊은 관찰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법들을 관찰하는 부류이고, 법들의 주의 깊은 관찰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한적한 곳에 홀로 머물고, 한적한 곳에 머묾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한적에 곳에 머물고, 한적한 곳에 머묾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동료 비구들에게 친절하고, 친절함을 칭송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동료 비구들에게 친절하고, 친절함을 칭송하는 것도 그를 사랑받게 하고 존중받게 하고 닦음을 익게 하고 참다운 사문이 되게 하고 [마음이] 단일한 상태가 되게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들에게 ‘참으로 동료 수행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기를!’이라는 바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 수행자들은 그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동료 수행자들은 삿된 불선법들이 그에게서 제거되었음을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혈통 좋은 말에게 ‘참으로 사람들이 나를 혈통 좋은 말의 지위에 두고, 혈통 좋은 말의 음식을 먹게 하고, 혈통 좋은 말을 돌보듯이 돌봐주기를!’이라는 바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혈통 좋은 말의 지위에 두고, 혈통 좋은 말의 음식을 먹게 하고, 혈통 좋은 말을 돌보듯이 돌봐준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사람들은 그 간교함과 속임수와 기만과 거짓이 제거되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들에게  ‘참으로 동료 수행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기를!’이라는 바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 수행자들은 그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동료 수행자들은 삿된 불선법들이 그에게서 제거되었음을 보기 때문이다.”  

 

akkosakasuttaṃ (AN 10.88-모욕 경)
88. “비구들이여, 동료 수행자들에게 거친 말(욕설)과 비방을 하는 비구, 성자를 헐뜯는 비구가 열 가지 재난
가운데 어떤 재난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다. 무엇이 열인가?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하고, 얻은 것으로부터 퇴보하고, 계∙정∙혜라 불리는 정법이 그에게 깨끗하게 드러나지 않고, 정법들에 대해서 오만해지고, 청정범행을 닦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다른 오염된 범계(犯戒)를 저지르고, 혹독한 병에 걸리고, 미치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혼미한 채 죽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동료 수행자들에게 거친 말과 비방을 하는 비구, 성자를 헐뜯는 비구가 이러한 열 가지 재난 가운데 어떤 재난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다.”

 

kokālikasuttam (AN 10.89-꼬깔리까 경) 
89. 그 무렵 꼬깔리까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꼬깔리까 비구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주석서에 의하면 본경의 꼬깔리까 비구(Kokalika bhikkhu)는 데와닷따의 제자이고 바라문 출신이며 꼬깔리까 지방의 꼬깔리까 도시에 사는 꼬깔리까 상인의 아들이며 쫄라꼬깔리까(작은 꼬깔리까)라고 불리는 비구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지어준 승원에서 머물렀다고 한다.(AA.v.56-57)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삿된 바램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삿된 바램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마음을 청정히 하라.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온후하고 원만함을 갖춘 자들이니라.”
두 번째로 꼬깔리까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삿된 바램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삿된 바램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마음을 청정히 하라.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온후하고 원만함을 갖춘 자들이니라.”
세 번째로 꼬깔리까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삿된 바램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삿된 바램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서 마음을 청정히 하라.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온후하고 원만함을 갖춘 자들이니라.”


꼬깔리까 비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세존의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물러간지 오래지 않아서 꼬깔리까 비구에게는 겨자씨 크기의 종기가 온 몸에 생겼다. 그것은 처음에는 겨자씨 크기였다가 녹두 콩 크기가 되었고, 녹두 콩 크기였다가 완두콩 크기가 되었고, 완두콩 크기였다가 대추씨 크기가 되었고, 대추씨 크기였다가 대추 크기가 되었고, 대추 크기였다가 아말라까 열매 크기가 되었고, 아말라까 열매 크기였다가 익지 않은 빌바 열매 크기가 되었고, 익지 않은 빌바 열매 크기였다가 익은 빌바 열매 크기가 되었고, 익은 빌바 열매 크기였다가 터져서는 고름과 피가 흘러나왔다. 마치 독을 마신 물고기처럼 그는 까달리(파초) 잎사귀들 위에 누워있었다.
그때 뚜두 벽지 범천이 꼬깔리까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허공에 서서 꼬깔리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꼬깔리까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마음을 청정하게 하시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온후하고 원만함을 갖춘 자들입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누구입니까?”

“나는 뚜두 벽지 범천입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세존께서 불환과를 얻었다고 설명하셨는데 어떻게 여기에 왔습니까? 그러니 그대의 잘못이나 보십시오.”

 

그러자 뚜두 벽지 범천은 꼬깔리까 비구에게 다음 게송을 읊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입에 도끼가 함께 생겨나서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로 자신을 찍는다.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을 칭송하거나

칭송받아 마땅한 것을 책망하는 자는

입으로 최악의 패를 모은 것이니

그런 최악의 패로는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한다.


도박에서 자기의 모든 재산을 잃고 자기 자신까지 잃는 자

의 최악의 패는 오히려 하찮은 것이다  

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더럽힌 자  

그의 최악의 패는 아주 낭패스러운 것이 된다.
성자들을 비난하는 자는 말과 마음으로 악을 지어  

10만과 36니랍부다 동안 그리고 5압부다 만큼 더 지옥에 떨어진다.'


고깔리까 비구는 그 병으로 죽었다. 꼬깔리까 비구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증오심을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지옥에 떨어졌다. 그러자 사함빠띠 범천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멋진 모습을 하고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찾아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사함빠띠 범천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꼬깔리까 비구는 그 병으로 죽었습니다. 꼬깔리까 비구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증오심을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사함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을 드린 뒤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거기서 사라졌다.

 

세존께서는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지난밤에 사함빠띠 범천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멋진 모습을 하고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내게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내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사함빠띠 범천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꼬깔리까 비구는 그 병으로 죽었습니다. 꼬깔리까 비구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증오심을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지옥에 떨어졌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사함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 뒤 내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거기서 사라졌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홍련지옥의 수명은 얼마나 깁니까?”

“비구여, 홍련지옥의 수명은 참으로 길어서 몇 년이라거나 몇 백 년이라거나 몇 천 년이라거나 몇 십만 년이라고 숫자로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유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비구여, 그것은 가능하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비구여, 꼬살라에 20카리[4말(72리터) 정도] 분량의 참깨를 실은 수레가 있는데 사람이 백 년이 지날 때 한 알의 참깨를 주워간다 하자. 꼬살라에 있는 20카리 분량의 참깨가 이런 방법으로 다 소진되고 다 없어지는 것이 하나의 압부다 기간보다 더 빠를 것이다. 비구여, 20압부다 지옥이 1니랍부다의 지옥의 기간과 같고, 20니랍부다 지옥이 아바바 지옥의 기간과 같고, 20 아바바 지옥은 1아하하 지옥의 기간과 같고, 20아하하 지옥은 1아따따 지옥의 기간과 같고, 20아따따 지옥은 1수련지옥의 기간과 같고, 20수련지옥은 1소간디까 지옥의 기간과 같고, 20소간디까 지옥은 1청련지옥의 기간과 같고, 20청련지옥은 1백련지옥의 기간과 같고, 20백련지옥은 1홍련지옥의 기간과 같다. 비구여 꼬깔리까 비구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증오심을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지옥에 떨어졌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서이신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사람이 태어날 때 입에 도끼가 함께 생겨나서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로 자신을 찍는다.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을 칭송하거나  

칭송받아 마땅한 것을 책망하는 자  

입으로 최악의 패를 모은 것이니  

런 최악의 패로는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한다.
  

도박에서 자기의 모든 재산을 잃고 자기 자신까지 잃는 자

그의 최악의 패는 오히려 하찮은 것이다  

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더럽힌 자  

그의 최악의 패는 아주 낭패스러운 것이 된다.
  

성자들을 비난하는 자  

말과 마음으로 악을 지어  

10만과 36니랍부다 동안  

그리고 5압부다 만큼 더 지옥에 떨어진다.'

 

khīṇāsavabalasuttaṃ (AN 10.90-번뇌 다한 자의 힘 경)
90.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번뇌 다한 비구는 어떤 힘들을 가져서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하는가?”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열 가지 힘을 가져서 ‘나의 번뇌는 다했다.’라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무엇이 열가지 입니까?

 

세존이시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는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분명하게 봅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모든 형성된 것들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분명하게 보는 이것이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라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감각적 쾌락을 숯불구덩이와 같다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분명하게 봅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감각적 욕망을 숯불구덩이와 같다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분명하게 보는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의 마음은 멀리 떠남을 향하고, 멀리 떠남으로 기울고, 멀리 떠남에 기대고, 멀리 떠남에 머물고, 출리를 기뻐하고, 모든 곳에서 번뇌를 일으킬만한 법들을 없애버립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의 마음이 멀리 떠남을 향하고, 멀리 떠남으로 기울고, 멀리 떠남에 기대고, 멀리 떠남에 머물고, 출리를 기뻐하고, 모든 곳에서 번뇌를 일으킬만한 법들을 없애버리는 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힌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네 가지 바른 노력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힌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네 가지 성취수단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힌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다섯 가지 근[五根]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다섯 가지 근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힌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다섯 가지 힘[五力]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다섯 가지 힘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힌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를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힌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八支聖道=팔정도]를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가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잘 닦았고 완전하게 익힌 이것 역시 번뇌 다한 비구의 힘입니다. 그 힘을 가져서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세존이시여, 번뇌 다한 비구에게는 이러한 열 가지 힘이 있어서, 그 힘을 가진 번뇌 다한 비구는 ‘나의 번뇌는 다했다.’고 번뇌의 소멸을 천명합니다."

 

 

 

제9장 장로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