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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나의 모음 - 1. 의지처 품(Nissaya-vagga. AN11.1-10)

실론섬 2014. 9. 16. 13:43

제1장 의지처 품 Nissaya-vagga (AN 11.1-10)

kimatthiyasuttaṃ (AN 11.1-어떤 목적 경)
1. 그 무렵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유익(有益)한 계(戒)들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유익한 계들의 목적은 무엇이고, 이익은 무엇입니까)?”

“아난다여, 유익한 계들에게 뉘우침 없음의 목적과 뉘우침 없음의 이익이 있다(유익한 계들의 목적은 뉘우침 없음이고, 이익은 뉘우침 없음이다).”

 

“세존이시여, 뉘우침 없음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뉘우침 없음에게 환희의 목적과 환희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환희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환희에게 희열(기쁨)의 목적과 희열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희열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희열에게 고요함의 목적과 고요함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고요함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고요함에게 행복(즐거움)의 목적과 행복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행복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행복에게 삼매의 목적과 삼매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삼매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삼매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목적과 '있는 그대로 봄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있는 그대로 봄'에는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있는 그대로 봄'에게 염오(厭惡.싫어하고 떠남)의 목적과 염오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염오에게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염오에게 '탐욕의 사라짐'의 목적과 '탐욕의 사라짐'의 이익이 있다.”


“세존이시여, '탐욕의 사라짐'에는 어떤 목적과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아난다여, '탐욕의 사라짐'에게 해탈지견의 목적과 해탈지견의 이익이 있다.”


이처럼, 아난다여, 유익한 계들에게 뉘우침 없음(후회 없음)의 목적과 뉘우침 없음의 이익이 있다. 뉘우침 없음에게 환희의 목적과 환희의 이익이 있다. 환희에게 희열의 목적과 희열의 이익이 있다. 희열에게 고요함의 목적과 고요함의 이익이 있다. 고요함에게 행복의 목적과 행복의 이익이 있다.
행복에게 삼매의 목적과 삼매의 이익이 있다. 삼매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목적과 있는 그대로 봄의 이익이 있다. 있는 그대로 봄에게 염오의 목적과 염오의 이익이 있다. 염오에게 탐냄의 사라짐과 탐냄의 사라짐의 이익이 있다. 탐냄의 사라짐에게 해탈지견의 목적과 해탈지견의 이익이 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유익한 계들은 점점 최상의 경지로 나아간다.”

 

cetanākaraṇīyasuttaṃ (AN 11.2-의도적으로 행해져야 함 경)

2. “비구들이여, 계를 중시하고 계를 구족한 자는 ‘나에게 뉘우침 없음이 생기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계를 중시하고 계를 구족한 자에게 뉘우침 없음이 생기는 것은 법다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뉘우침이 없는 자는 ‘나에게 환희가 생기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뉘우침이 없는 자에게 환희가 생기는 것은 법다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환희하는 자는 ‘나에게 희열이 생기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는 것은 법다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희열을 느끼는 자는 ‘내 몸이 편안하기를(고요하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이 편안한 것은 법다운 것이다.

 

비구들이, 몸이 편안한 자는 ‘내가 행복을 느끼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몸이 편안한 자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법다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행복한 자는 ‘나의 마음이 삼매에 들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행복한 자의 마음이 삼매에 드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자는 ‘나는 있는 그대로 보게 되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자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있는 그대로 보는 자는 ‘나는 염오하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자가 염오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염오하는 자는 ‘나에게 탐욕이 사라지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염오하는 자에게 탐욕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탐욕이 사라진 자는 ‘나는 해탈지견을 실현하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탐욕이 사라진 자가 해탈지견을 실현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탐욕의 사라짐은 해탈지견의 목적과 해탈지견의 이익이 있다. 염오는 탐욕의 사라짐의 목적과 탐욕의 사라짐의 이익이 있다. 여실지견은 염오의 목적과 염오의 이익이 있다. 삼매는 있는 그대로 봄의 목적과 있는 그대로 봄의 이익이 있다. 행복은 삼매의 목적과 삼매의 이익이 있다. 편안함은 행복의 목적과 행복의 이익이 있다. 희열은 편안함의 목적과 편안함의 이익이 있다. 환희는 희열의 목적과 희열의 이익이 있다. 뉘우침 없음은 환희의 목적과 환희의 이익이 있다. 유익한 계들은 뉘우침 없음의 목적과 뉘우침 없음의 이익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오직 법들이 법들을 생기게 하고, 오직 법들이 법들을 완성한다.

 

paṭhamaupanisāsuttaṃ (AN 11.3-조건 경1)

3. “비구들이여, 계를 경시하고 계를 파한 자에게 뉘우침 없음은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후회 없음이 없을 때 후회 없음이 없는 자에게 환희는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환희가 없을 때 환희가 없는 자에게 희열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희열이 없을 때 희열이 없는 자에게 편안함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편안함이 없을 때 편안함이 없는 자에게 행복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행복이 없을 때 행복이 없는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있는 그대로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는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염오가 없을 때 염오가 없는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가지와 잎이 없는 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잘 여물지 못하고, 껍질도 잘 여물지 못하고, 백목질도 잘 여물지 못하고, 심재(心材)도 잘 여물지 못한다.

 

계를 경시하고 계를 파한 자에게 뉘우침 없음은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후회 없음이 없을 때 후회 없음이 없는 자에게 환희는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환희가 없을 때 환희가 없는 자에게 희열은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희열이 없을 때 희열이 없는 자에게 편안함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편안함이 없을 때 편안함이 없는 자에게 행복은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행복이 없을 때 행복이 없는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있는 그대로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는 조건을 상실해버린다. 염오가 없을 때 염오가 없는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 버린다.

 

비구들이여, 계를 중시하고 계를 갖춘 자에게 후회 없음의 조건은 갖춰졌다. 후회가 없을 때 후회가 없음을 갖춘 자에게 환희의 조건은 갖춰졌다. 환희가 있을 때 환희를 갖춘 자에게 희열의 조건은 갖춰졌다. 희열이 있을 때 희열을 갖춘 자에게 편안함의 조건은 갖춰졌다편안함이 있을 때 편안함을 갖춘 자에게 행복의 조건은 갖춰졌다. 행복이 있을 때 행복을 갖춘 자에게 바른 삼매의 조건은 갖춰졌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조건은 갖춰졌다. 그대로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의 조건은 갖춰졌다. 염오가 있을 때 염오를 갖춘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의 조건은 갖춰졌다. 탐욕의 사라짐이 있을 때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의 조건은 갖춰졌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가지와 잎을 갖춘 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잘 여물고, 껍질도 잘 여물고, 백목질도 잘 여물고, 심재(心材)도 잘 여문다.

 

계를 중시하고 계를 갖춘 자에게 후회 없음의 조건은 갖춰졌다. 후회가 없을 때 후회가 없음을 갖춘 자에게 환희의 조건은 갖춰졌다. 환희가 있을 때 환희를 갖춘 자에게 희열의 조건은 갖춰졌다. 희열이 있을 때 희열을 갖춘 자에게 편안함의 조건은 갖춰졌다. 편안함이 있을 때 편안함을 갖춘 자에게 행복의 조건은 갖춰졌다. 행복이 있을 때 행복을 갖춘 자에게 바른 삼매의 조건은 갖춰졌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조건은 갖춰졌다. 그대로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의 조건은 갖춰졌다. 염오가 있을 때 염오를 갖춘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의 조건은 갖춰졌다. 탐욕의 사라짐이 있을 때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의 조건은 갖춰졌다.

 

dutiyaupanisāsuttaṃ (AN 11.4-조건 경2)
4.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계를 경시하고 계를 파한 자에게 뉘우침 없음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뉘우침 없음이 없을 때 뉘우침 없는 자에게 환희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환희가 없을 때 환희가 없는 자에게 희열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희열이 없을 때 희열이 없는 자에게 편안함은 조건을 상실해 버립니다. 편안함이 없을 때 편안함이 없는 자에게 행복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행복이 없을 때 행복이 없는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염오가 없을 때 염오가 없는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가지와 잎이 없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잘 자라나지 못하고, 껍질도 잘 여물지 못하고, 연한 목재도 잘 여물지 못하고, 심재도 잘 여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를 경시하고 계를 파한 자에게 뉘우침 없음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뉘우침 없음이 없을 때 뉘우침 없는 자에게 환희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환희가 없을 때 환희가 없는 자에게 희열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희열이 없을 때 희열이 없는 자에게 편안함은 조건을 상실해 버립니다. 편안함이 없을 때 편안함이 없는 자에게 행복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행복이 없을 때 행복이 없는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염오가 없을 때 염오가 없는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도반들이여, 계를 중시하고 계를 갖춘 자에게 후회 없음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후회가 없을 때 후회가 없음을 갖춘 자에게 환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환희가 있을 때 환희를 갖춘 자에게 희열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희열이 있을 때 희열을 갖춘 자에게 편안함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편안함이 있을 때 편안함을 갖춘 자에게 행복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행복이 있을 때 행복을 갖춘 자에게 바른 삼매의 조건은 갖춰졌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그대로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염오가 있을 때 염오를 갖춘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의 조건은 갖춰졌다. 탐욕의 사라짐이 있을 때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가지와 잎을 갖춘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잘 여물고, 껍질도 잘 여물고, 백목질도 잘 여물고, 심재(心材)도 잘 여물 것입니다.

 

계를 중시하고 계를 갖춘 자에게 후회 없음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후회가 없을 때 후회가 없음을 갖춘 자에게 환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환희가 있을 때 환희를 갖춘 자에게 희열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희열이 있을 때 희열을 갖춘 자에게 편안함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편안함이 있을 때 편안함을 갖춘 자에게 행복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행복이 있을 때 행복을 갖춘 자에게 바른 삼매의 조건은 갖춰졌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그대로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염오가 있을 때 염오를 갖춘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의 조건은 갖춰졌다. 탐욕의 사라짐이 있을 때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tatiyaupanisāsuttaṃ (AN 11.5-조건 경3)
5. 거기에서 아난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계를 경시하고 계를 파한 자에게 뉘우침 없음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뉘우침 없음이 없을 때 뉘우침 없는 자에게 환희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환희가 없을 때 환희가 없는 자에게 희열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희열이 없을 때 희열이 없는 자에게 편안함은 조건을 상실해 버립니다. 편안함이 없을 때 편안함이 없는 자에게 행복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행복이 없을 때 행복이 없는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염오가 없을 때 염오가 없는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가지와 잎이 없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잘 자라나지 못하고, 껍질도 잘 여물지 못하고, 연한 목재도 잘 여물지 못하고, 심재도 잘 여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를 경시하고 계를 파한 자에게 뉘우침 없음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뉘우침 없음이 없을 때 뉘우침 없는 자에게 환희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환희가 없을 때 환희가 없는 자에게 희열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희열이 없을 때 희열이 없는 자에게 편안함은 조건을 상실해 버립니다. 편안함이 없을 때 편안함이 없는 자에게 행복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행복이 없을 때 행복이 없는 자에게 바른 삼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바른 삼매가 없을 때 바른 삼매가 없는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없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이 없는 자에게 염오는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염오가 없을 때 염오가 없는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탐욕의 사라짐이 없을 때 탐욕의 사라짐이 없는 자에게 해탈지견은 조건을 상실해버립니다.

도반들이여, 계를 중시하고 계를 갖춘 자에게 후회 없음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후회가 없을 때 후회가 없음을 갖춘 자에게 환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환희가 있을 때 환희를 갖춘 자에게 희열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희열이 있을 때 희열을 갖춘 자에게 편안함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편안함이 있을 때 편안함을 갖춘 자에게 행복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행복이 있을 때 행복을 갖춘 자에게 바른 삼매의 조건은 갖춰졌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그대로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염오가 있을 때 염오를 갖춘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의 조건은 갖춰졌다. 탐욕의 사라짐이 있을 때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가지와 잎을 갖춘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의 새싹도 잘 여물고, 껍질도 잘 여물고, 백목질도 잘 여물고, 심재(心材)도 잘 여물 것입니다.

계를 중시하고 계를 갖춘 자에게 후회 없음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후회가 없을 때 후회가 없음을 갖춘 자에게 환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환희가 있을 때 환희를 갖춘 자에게 희열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희열이 있을 때 희열을 갖춘 자에게 편안함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편안함이 있을 때 편안함을 갖춘 자에게 행복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행복이 있을 때 행복을 갖춘 자에게 바른 삼매의 조건은 갖춰졌다. 바른 삼매가 있을 때 바른 삼매를 갖춘 자에게 있는 그대로 봄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그대로 봄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봄을 갖춘 자에게 염오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염오가 있을 때 염오를 갖춘 자에게 탐욕의 사라짐의 조건은 갖춰졌다. 탐욕의 사라짐이 있을 때 탐욕의 사라짐을 갖춘 자에게 해탈지견의 조건은 갖춰졌습니다.”

byasanasuttaṃ (AN 11.6-불행 경)

6. “비구들이여, 동료 비구들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비구, 성자를 모욕하는 비구가 열한 가지 불행 중 어떤 불행을 겪을 것이라는 것은 경우가 있고, 여지가 있다(어떤 재난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다) .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한다. 얻은 것으로부터 퇴보한다. 정법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 정법들에 대해 오만해진다. 범행을 닦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어떤 오염된 잘못을 저지른다. 범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혹독한 병에 걸린다. 마음이 혼미해진다. 미혹한 상태로 죽는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동료 비구들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비구, 성자를 모욕하는 비구가 열한 가지 불행 중 어떤 불행을 겪을 것이라는 것은 경우가 있고, 여지가 있다.

 

비구들이여, 동료 비구들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비구, 성자를 모욕하는 비구가 열한 가지 불행 중 어떤 불행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경우가 없고, 여지가 없다.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한다. 얻은 것으로부터 퇴보한다. 정법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 정법들에 대해 오만해진다. 범행을 닦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어떤 오염된 잘못을 저지른다. 범행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혹독한 병에 걸린다. 마음이 혼미해진다. 미혹한 상태로 죽는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동료 비구들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비구, 성자를 모욕하는 비구가 열한 가지 불행 중 어떤 불행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경우가 없고, 여지가 없다."

 

saññāsuttaṃ (AN 11.7-인식((想) 경)
7.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상.相)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숙고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숙고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숙고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이러한 인식을 가진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는 이러한 인식을 가진다. 아난다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공경의 의미로 세존의 오른쪽으로 돌아 사리뿟따 존자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두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 아난다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이러한 인식을 가집니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도반이여. 놀랍습니다, 도반이여. 으뜸가는 구문에 대해 참으로 스승과 제자의 뜻과 뜻이, 표현과 표현이 동일하고 일치하고

모순되지 않으십니다. 

도반이여, 방금 저는 세존께 찾아가서 이 뜻에 대해 질문드렸습니다. 세존께서도 사리뿟따 존자가 설명한 것처럼 이런 단어와 이런 표현으로

그 뜻을 설명하셨습니다. 경이롭습니다, 도반이여. 놀랍습니다, 

도반이여. 으뜸가는 구문에 대해 참으로 스승과 제자의 뜻과 뜻이, 표현과 표현이 동일하고 일치하고 모순되지 않으십니다.”

 

manasikārasuttaṃ (AN 11.8-주의를 기울임 경)
8.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비구가 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이치에 맞게 마음을 내지 않고), 형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냄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맛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감촉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바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식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소유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비상비비상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그러나 마음에 주의를 기울임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비구가 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이치에 맞게 마음을 내지 않고), 형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냄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맛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감촉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바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식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소유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비상비비상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않지만, 그러나 마음에 주의를 기울임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이치에 맞게 마음을 내지 않고), 형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냄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맛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감촉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바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식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소유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비상비비상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그러나 마음에 주의를 기울임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아난다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이치에 맞게 마음을 내지 않고), 형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냄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맛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감촉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바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식무변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소유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비상비비상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그러나 마음에 주의를 기울임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saddhasuttaṃ (AN 11.9-삿다 경)

9. 한 때에 세존께서는 냐띠까에서 벽돌집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삿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삿다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삿다여, 좋은 성품을 가진 자처럼 삼매를 하라. 낮은 성품을 가진 자처럼 삼매를 하지말라. 삿
다여, 그러면 낮은 성품을 가진 자는 어떻게  삼매를 하는가? 삿다여, 낮은 품종의 말은 먹이통 근처에 묶여 있을 때 오직 ‘먹이, 먹이’이라고만 생각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삿다여, 낮은 품종의 말은 먹이통 근처에 묶여 있을 때 ‘오늘 말 조련사는 내게 어떤 일을 시킬까? 나는 거기에 어떻게 대처할까?’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먹이통 근처에 묶여 있을 때 오직 ‘먹이, 먹이’이라고만 생각한다. 그와 같이, 삿다여, 여기 어떤 낮은 성품의 사람은 숲으로 가서도 나무 아래로 가서도 빈 장소로 가서도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쾌락에 압도되어 머물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는 감각적 쾌락을 안에 품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속해서 숙고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마음이 성냄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는 성냄을 안에 품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속해서 숙고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마음이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는 해태와 혼침을 안에 품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속해서 숙고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마음이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히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는 들뜸과 후회를 안에 품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속해서 숙고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마음이 의심에 사로잡히고 의심에 압도된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는 의심을 안에 품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속해서 숙고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삿다여, 그는 땅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물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불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바람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공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식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무소유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비상비비상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이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저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숙고한 것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삿다여, 낮은 성품을 가진 자는 이렇게 주의를 기울인다.

 

삿다여, 좋은 성품을 가진 자는 어떻게 삼매를 하는가? 삿다여, 혈통 좋은 멋진 말은 먹이통 근처에 묶여 있을 때 오직 ‘먹이, 먹이’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삿다여, 혈통 좋은 멋진 말은 먹이통 근처에 묶여 있을 때 ‘오늘 말 조련사는 내게 어떤 일을 시킬까? 나는 거기에 어떻게 대처할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먹이통 근처에 묶여 있을 때 오직 ‘먹이, 먹이’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삿다여, 혈통 좋은 멋진 말은 회초리를 받는 것을 빚처럼 보고, 족쇄처럼 보고, 손실처럼 보고, 패배처럼 생각한다. 그와 같이, 삿다여, 그와 같이 여기 성품 좋은 사람은 숲으로 가서도 나무 아래로 가서도 빈 장소로가서도 감각적 쾌락 사로잡히지 않고 감각적 쾌락에 압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성냄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냄에 압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성냄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해태와 혼침(졸음과 혼침)에 사로잡히지 않고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들뜸과 후회(들뜸)에 사로잡히지 않고 들뜸과 후회에 압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의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의심에 압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는 땅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물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불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바람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식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소유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주의를 기울인다. 삿다여, 이렇게 생각하는 좋은 성품의 사람을, 제석천이 함껳고 범천과 함께하고 빠자빠띠와 함께 하는 신들이 멀리서 귀의할 것이다.

 

'그대 놀라우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그대 최상이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그대가 대상으로 삼아 주의를 기울이는 그것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산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좋은 성품의 사람은 어떻게 주의를 기울입니까? 땅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물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불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바람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식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소유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대상으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의를 기울입니다.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는 좋은 성품의 사람에게 제석천이 함께하고 범천과 함께하고 빠자빠띠와 함께하는 신들이 멀리서 귀의합니까?

 

'그대 놀라우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그대 최상이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그대가 대상으로 삼아 주의를 기울이는 그것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여기, 삿다여, 좋은 성품의 사람은 땅에 대해 땅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물에 대해 물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불에 대해 불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바람에 대해 바람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식무변처에 대해 식무변처라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의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숙고한 것에 대한 인식을 존재하지 않게 한다. 이렇게, 삿다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성품 좋은 사람은, 삿다여, 땅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물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불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바람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식무변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소유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 세상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숙고한 것을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주의를 기울인다. 삿다여,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성품 좋은 사람에게 제석천과 함께하고, 범천과 함께하고, 빠자빠띠와 함께하는 신들이 멀리서 귀의할 것이다."

 

'그대 놀라우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그대 최상이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그대가 대상으로 삼아 주의를 기울이는 그것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moranivāpasuttaṃ (AN 11.10-공작 보호구역 경)
10.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공작 보호 구역에 있는 유행승들의 숲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무학의 계온, 무학의 정온, 무학의 혜온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

비구들이여, 다른 세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신통에 의한 이적,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이적, 가르침에서의 이적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

비구들이여, 다른 세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바른 견해, 바른 지혜, 바른 해탈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명지(명.明)와 실천(행.行)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두 가지 법을 구족한 비구는 완전한 끝(구경의 완성)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안온에 이른 자이고, 완전한 범행을 갖춘 자이고, 완전한 완성에 이른 자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다. ​

비구들이여, 사낭꾸마라 범천이 이런 게송을 읊었다. ​

'가문을 의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끄샤뜨리야가 으뜸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는 명행족(明行足), 그가 으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사낭꾸마라 범천이 말한 이 게송은 잘 말해진 것이지 잘못 말해진 것이 아니다. 의미를 갖춘 것이지 의미를 갖추지 않은 것이 아니다.그리고 나도 동의한다. 비구들이여, 나도 이렇게 말한다.​

‘가문을 의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끄샤뜨리야가 단연 으뜸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는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자[明行足]가 단연 으뜸이다.’라고.

 


제1장 의지처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