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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나의 모음 - 2. 계속해서 생각함 품(Anussati-vagga. AN11.11-21)

실론섬 2014. 9. 16. 15:41

제2장 계속해서 생각함 품 Anussati-vagga (AN 11.11-21)

 

paṭhamamahānāmasuttaṃ (AN 11.11-마하나마 경1)

11.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사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삭까족 마하나마는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그f러자 삭까족 마하나마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삭까족 마하나마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머뭅니다. 이 가운데 저희들은 누구의 방식대로 머물러야 합니까(다른 머묾에 의해 머무는 그들 가운데 저희는 어떤 머묾에 의해 머물러야 합니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마하나마여. 마하나마여, ‘그들은 서로 다른 다른 방식으로 머뭅니다. 이 가운데 저희들은 누구의 방식대로 머물러야 합니까?’라고 여래에게 와서 질문을 하는 것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마하나마여, 믿음 있는 자는 완성하고(성취하고), 믿음 없는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성취하지 못한다). 열심히 정진하는 자는 완성하고, 게으른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마음 챙김을 확립한 자는 완성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린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삼매에 든 자는 완성하고, 삼매에 들지 못한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자는 완성하고, 어리석은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마하나마여, 그대는 이런 다섯 가지 법에 굳게 서서 다시 여섯 가지 법을 더 닦아야 한다.   

 

여기서 마하나마여, 그대는 여래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스며들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여래에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으로 이끄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자는 몸이 평안(평온)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탐.진.치로] 고요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 고요함을 얻은 자로 머문다. 성냄과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냄이 없는 자로 머문다. 법의 흐름을 증득한 자로서 불(佛. 부처님)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함(기억함)을 닦는다.’라고 한다.

 

다시, 마하나마여, 그대는 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으며,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있는 이는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법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법에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으로 이끄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자는 몸이 평안(평온)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고요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 고요함을 얻은 자로 머문다. 성냄과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냄이 없는 자로 머문다. 법의 흐름을 증득한 자로서 법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다.’라고 한다.  

 

다시, 마하나마여, 그대는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 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으 저 네 쌍의 분들, 여덟 단계에 계신 분들이다. 이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승가에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으로 이끄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자는 몸이 평안(평온)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고요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 고요함을 얻은 자로 머문다. 성냄과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냄이 없는 자로 머문다. 법의 흐름을 증득한 자로서 승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다.’라고 한다.

 

다시, 마하나마여, 그대는 ‘깨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현자들이 칭찬하고, 움켜지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자신의 계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계를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계에 대해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으로 이끄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자는 몸이 평안(평온)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고요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 고요함을 얻은 자로 머문다. 성냄과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냄이 없는 자로 머문다. 법의 흐름을 증득한 자로서 계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다.’라고 한다. 

 

다시, 마하나마여, 그대는 자신의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인색함에 오염된 사람들 가운데 인색함의 오염을 떠난 마음으로 아낌없이 보시하고, 보시하는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하며 재가에 산다. 이것은 참으로 내게 이득이다. 이것은 참으로 내게 큰 이득이다.’라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보시에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으로 이끄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자는 몸이 평안(평온)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고요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 고요함을 얻은 자로 머문다. 성냄과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냄이 없는 자로 머문다. 법의 흐름을 증득한 자로서 보시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다.’라고 한다. 

 

다시, 마하나마여, 그대는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사대왕천의 신들이 있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있고, 야마천의 신들이 있고, 도솔천의 신들이 있고, 화락천의 신들이 있고,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있고, 범신천의 신들이 있고, 그보다 높은 천의 신들이 있다. 이런 신들은 믿음을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 이런 신들은 계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계가 있다. 이런 신들은 배움을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이런 신들은 보시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보시가 있다. 이런 신들은 지혜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라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천신에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으로 이끄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자는 몸이 평안(평온)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고요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 고요함을 얻은 자로 머문다. 성냄과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냄이 없는 자로 머문다. 법의 흐름을 증득한 자로서 천신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다.’라고 한다."

 

dutiyamahānāmasuttaṃ (AN 11.12-마하나마 경2)
12.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사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삭까족 마하나마는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그f러자 삭까족 마하나마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삭까족 마하나마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머뭅니다. 이 가운데 저희들은 누구의 방식대로 머물러야 합니까(다른 머묾에 의해 머무는 그들 가운데 저희는 어떤 머묾에 의해 머물러야 합니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마하나마여. 마하나마여, ‘그들은 서로 다른 다른 방식으로 머뭅니다. 이 가운데 저희들은 누구의 방식대로 머물러야 합니까?’라고 여래에게 와서 질문을 하는 것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마하나마여, 믿음 있는 자는 완성하고(성취하고), 믿음 없는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성취하지 못한다). 열심히 정진하는 자는 완성하고, 게으른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마음 챙김을 확립한 자는 완성하고, 마음 챙김을 놓아버린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삼매에 든 자는 완성하고, 삼매에 들지 못한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자는 완성하고, 어리석은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마하나마여, 그대는 이런 다섯 가지 법에 굳게 서서 다시 여섯 가지 법을 더 닦아야 한다.   

 

여기서, 마하나마여, 그대는 여래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여래를 의지하여 청정해진다. 마하나마여, 여래를 의지하여 청정해진 마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주석서를 의지하여 생긴 희열과 환희를 얻고, 성전을 의지하여 생긴 환희를 얻으며,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기쁨이 생기고, 기쁨을 느끼는 자는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즐거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는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마하나마여, 이런 세존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그대는 길을 갈 때에도 닦아야 하고, 서있을 때에도 닦아야 하고, 앉아있을 때에도 닦아야 하고, 누워있을 때에도 닦아야 하고, 일에 몰두할 때에도 닦아야 하고, 자손들로 복잡한 집에서 살 때에도 닦아야 한다.

 

다시, 마하나마여, 그대는 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 자신의 계들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 자신의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사대왕천의 신들이 있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있고, 야마천의 신들이 있고, 도솔천의 신들이 있고, 화락천의 신들이 있고,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있고, 범신천의 신들이 있고, 그보다 높은 천의 신들이 있다. 이런 신들은 믿음을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 이런 신들은 계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계가 있다. 이런 신들은 배움을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이런 신들은 보시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보시가 있다. 이런 신들은 지혜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내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라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천신에 대해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얻는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으로 이끄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자는 몸이 평안(평온)하며, 몸이 편안한 자는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든다. 마하나마여, 이런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그대는 길을 갈 때에도 닦아야 하고, 서있을 때에도 닦아야 하고, 앉아있을 때에도 닦아야 하고, 누워있을 때에도 닦아야 하고, 일에 몰두할 때에도 닦아야 하고, 자손들로 복잡한 집에서 살 때에도 닦아야 한다.”

 

nandiyasuttaṃ (AN 11.13-난디야 경)
13.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사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세존께서는 안거를 지내기 위해 사왓티로 가고자 하였다. 삭까 사람 난디야는 세존께서 안거를 지내기 위해 사왓티로 가고자 한다고 들었다. 그러자 삭까 사람 난디야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나도 안거를 지내기 위해 사왓티로 가야겠다. 거기서 생계를 영위하면서 때때로 세존을 친견하여야겠다.’라고. 세존께서는 안거를 지내기 위해 사왓티로 떠났다. 삭까 사람 난디야도 안거를 지내기 위해 사왓티로 떠났다. 거기서 생계를 영위하고, 때때로 세존을 친견하였다.

 

그때 그곳 사왓티에서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삭까 사람 난디야는 많은 비구들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나실 것이다.’라고. 그때 삭까 사람 난디야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삭까족 난디야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많은 비구들이 ‘석달 안거가 끝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 유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의 가사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머뭅니다. 이 가운데 저희들은 누구의 방식대로 머물러야 합니까(다른 머묾에 의해 머무는 그들 가운데 저희는 어떤 머묾에 의해 머물러야 합니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난디야여. 난디야여, ‘그들은 서로 다른 다른 방식으로 머뭅니다. 이 가운데 저희들은 누구의 방식대로 머물러야 합니까?’라고 여래에게 와서 질문을 하는 것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난디아여, 믿음 있는 자는 완성하고(성취하고), 믿음 없는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성취하지 못한다). 열심히 정진하는 자는 완성하고, 게으른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마음챙김을 확립한 자는 완성하고, 마음챙김을 놓아버린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삼매에 든 자는 완성하고, 삼매에 들지 못한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자는 완성하고, 어리석은 자는 완성하지 못한다. 난디야여, 그대는 이런 여섯 가지 법에 굳게 서서 다시 다섯 가지 법들에 대해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여기, 난디야여, 그대는 여래를 게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이렇게 그대는, 난디야여, 여래에 대해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다시, 난디야여, 그대는 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으며,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있는 이는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그대는, 난디야여, 법에 대해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다시, 난디야여, 그대는 선우(善友)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참으로 내게 이득이고, 참으로 나에게 잘 얻어진 것이다.! 나에게 늘 연민하고, 이익을 바라고, 조언하고, 격려하는 좋은 친구가 있다.'라고. 이렇게 그대는, 난디야여, 선우에 대해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다시, 난디야여, 그대는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인색함에 오염된 사람들 가운데 인색함의 오염을 떠난 마음으로 아낌없이 보시하고, 보시하는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하며 재가에 산다. 이것은 참으로 내게 이득이다. 이것은 참으로 내게 큰 이득이다.’라고. 이렇게 그대는, 난디야여, 보시에 대해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다시, 난디야여, 그대는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덩어리 음식을 먹는 신들의 동료를 넘어서서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다시 태어난 신들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한 것을 다시 반복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예를 들면, 난디야여, 확실하게 해탈한 비구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한 것을 다시 반복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덩어리 음식을 먹는 신들의 동료를 넘어서서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다시 태어난 신들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한 것을 다시 반복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라고. 이렇게 그대는, 난디야여, 천신에 대해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난디야여, 이런 열 한가지 법을 갖춘 성스러운 제자는 삿되게 선하지 않은 법들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난디야여, 거꾸로 놓인 항아리 위에다 물을 부으면 흘러내리기만 할 뿐 그곳에 담아지지 않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마른 풀숲에 불을 놓으면 활활 타면서 번져 나가지 이미 타버린 곳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다. 이렇게, 난디야여, 이런 열한 가지 법을 갖춘 성스러운 제자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다.”

 

subhūtisuttaṃ (AN 11.14-수부띠 경)
14. 그 무렵
수부띠 존자가 삿다 비구와 함께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부띠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띠여, 이 비구는 누구인가?”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믿음을 가진 청신사 수닷따의 아들인 삿다인데,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였습니다.”

“그러면 수부띠여,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청신사 수닷따의 아들인 이 삿다 비구는 믿음의 특징들 위에 있는가?”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적절한 시기입니다. 선서이시여, 지금이 세존께서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을 설명하여 주실 바로 적절한 시기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 비구가 믿음의 특징들 위에 있는지 아닌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부띠여,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수부띠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수부띠여, 비구는 계를 잘 지킨다.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문다. 받아들인 뒤 학습계목들 위에서 닦는다. 수부띠여, 비구가 '계를 잘 지킨다. ··· 받아들인 뒤 학습계목들 위에서 닦는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잘 호지하고(명심하고), 배운 것을 잘 정리한다.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내는 가르침들을 많이 듣고 만족하고 말에 의해 익숙해지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통찰한다. 수부띠여, 비구가 '많이 배우고 ··· 견해로써 잘 통찰한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벗을 가졌다. 수부띠여, 비구가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벗을 가졌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자(유연한 자), 원만하게 하는 법들을 갖춘 자, 인내하는 자, 이어지는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는 자이다. 수부
띠여, 비구가 '가르침을 잘 받아들디는 자, 원만하게 하는 법들을 갖춘 자, 인내하는 자, 이어지는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는 자인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동료 수행자들이 행해야 하는 여러 가지 어떤 일들에 대해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할 수 있고, 시킬 수 있을 만큼 방법을 조사해서 갖춘다.
수부띠여, 비구가 동료 수행자들이 행해야 하는 여러 가지 어떤 일들에 대해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할 수 있고, 시킬 수 있을 만큼 방법을 조사해서 갖춘 것도 믿음을 가진 자을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법을 탐구하고(좋아하고), 법담을 나누기를 좋아하고, 아비담마(對法)와 아비위나야(對律)에 대해 크나큰 환희심을 가진다. 

수부띠여, 비구가 법을 탐구하고, 법담을 나누기를 좋아하고,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에 대해 크나큰 환희심이 있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불선법(不善法)들의 제거를 위해, 선법들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정진하면서 머문다. 선법들에 대해 열정적이고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자이다.
수부띠여, 비구가 '불선법들의 제거를 위해, 선법들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정진하면서 머문다. 선한 법들에 대해 열정적이고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자이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높은 마음에 속하고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인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얻는다. 수부띠여, 비구가 ‘높은 마음에 속하고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인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얻는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수부띠여, 비구가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특징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 수부띠여, 비구가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어감, 태어남, ···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린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다시, 수부띠여,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수부띠여, 비구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는 것도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믿음의 특징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수부띠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이런 믿음의 특징들을 이 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비구도 이러한 특징들 위에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계를 잘 지킵니다.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뭅니다. 받아들인 뒤 학습계목들 위헤서 닦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잘 호지하고 배운 것을 잘 정리합니다.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고,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내는 가르침들을 많이 듣고 만족하고 말에 의해 익숙해지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통찰합니다(꿰뚫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벗을 가졌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유연한 자, 원만하게 하는 법들을 갖춘 자, 인내하는 자, 이어지는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은 자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동료 수행자들이 행해야 하는 여러 가지 어떤 일들에 대해 능숙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할 수 있고, 시킬 수 있을 만큼 방법을 조사해서 갖췄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법을 탐구하고, 법담을 나누기를 좋아하고, 아비담마(對法)와 아비위나야(對律)에 대해 크나큰 환희심을 가집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불선법들의 제거를 위해, 선법들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정진하면서 머뭅니다. 선법들에 대해 열정적이고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자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높은 마음에 속하고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인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얻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다.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특징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믿음을 가진 자를 위한 이런 믿음의 특징들을 이 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비구는 그것들 위에 있습니다.”라고.

“훌륭하고 훌륭하다, 수부띠여. 그렇다면 수부띠여, 그대는 이 삿다 비구와 함께 머물러야 한다. 수부띠여, 그대가 여래를 친견하기를 원할 때, 그대는 이 삿다 비구와 함께 여래를 만나러 와도 좋다.”

 

mettāsuttaṃ (AN 11.15-자애 경)
15. “비구들이여, 자비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졌을 때 열한 가지 공덕을 기대할 수 있다. 무엇이 열하나인가?
편안하게(즐겁게) 잔다. 편안하게 깨어난다. 악몽을 꾸지 않는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여러 신들이 보호한다. 이러한 사람은 불이나 독이나 칼이 해치지 못한다. 마음이 빠르게 삼매에 들어간다. 안색이 맑아진다. 미혹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한다. 나아가 꿰뚫지 못하더라도 범천의 세상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자비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졌을 때 이러한 열한 가지 공덕을 기대할 수 있다.”

 

aṭṭhakanāgarasuttaṃ (AN 11.16-앗타까나가라 경)

16. 한 때에 아난다 존자는 웨살리의 벨루와가마까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앗타까나가라의 다시마 장자가 어떤 할 일이 있어 빠딸리뿟다에 도착했다. 앗타까나가라의 다시마 장자는 꾹꾸다 승원에 머물고 있는 어떤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아난다 존자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저는 아난다 존자를 친견하고 싶습니다."
"장자여, 그분 아난다 존자는 웨살리의 벨루와가마까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러자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빠딸리뿟다에서 할 일을 끝내고 나서 웨살리의 벨루와가마까로 아난다 존자에게 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

*벨루와가마까(Beluvagamaka) 혹은 벨루와가마(Beluvagama,벨루와 마을)는 웨살리의 남쪽 방향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MA.iii.12) 벨루와 마음은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D16)'에서 세존께서 반열반하시기 석 달 전에 중병에 걸리신 곳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곳이다. 
*빠딸리뿟따(Pataliputta)는 지금 인도 비하르 주의 주도인 빠뜨나(Patna)이다.
*꾹꾸다 승원(Kukkutarama)은 꾹꾸다 상인이 지은 승원이라고 한다.(AA.v.84;MA.iii.13). 빠뜨나에는 지금도 꾹꾸다 승원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한 곁에 앉아서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 아난다시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어디에서든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고,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고,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열반)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이 있습니까?" 
"장자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어디에서든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고,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고,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열반)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이 있습니다." 
"존자 아난다시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어디에서든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고,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고,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열반)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은 무엇입니까?"   

​"여기, 장자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초선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숙고하고 철저하게 압니다. 거기에 선 그는 번뇌의 소멸을 얻습니다. 만약 번뇌의 소멸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 법을 좋아하고 이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들이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에 [정거천에] 화생하고,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하니,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존재(不還者.불환자)입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어디에서든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고,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고,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열반)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다시, 장자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제2선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은((瑜伽安穩)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장자여, 다시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제3선은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장자여, 다시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제4선은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다시, 장자여, 비구는 자비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비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는 '이 자비를 통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 자심해탈]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숙고하고 철저하게 압니다. 거기에 선 그는 ···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다시, 장자여, 비구는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는 '이 평정을 통한 해탈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숙고하고 철저하게 압니다. 거기에 선 그는 ···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다시, 장자여,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공무변처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숙고하고 철저하게 압니다. 거기에 선 그는 ···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다시, 장자여,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식무변처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숙고하고 철저하게 압니다. 거기에 선 그는 ···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다시, 장자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무소유처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숙고하고 철저히 압니다. 거기에 선 그는 번뇌의 소멸을 얻습니다. 만약 번뇌의 소멸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 법을 좋아하고 이 법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들이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에 [정거천에] 화생하고,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하니,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존재(不還者.불환자)입니다. 

장자여, 이것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어디에서든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비구에게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고,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고,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유가안온은 성취되는' 하나의 법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면 존자 아난다시여, 단지 한 곳의 감춰진 보물창고의 입구를 찾는 어떤 사람이 한꺼번에 열한 개의 감춰진 보물창고의 입구를 발견할 것입니다. 이처럼, 존자시여, 하나의 불사(不死)의 문을 찾던 저는 한꺼번에 열한 개의 불사의 문을 얻었습니다. 예를 들면, 존자시여, 어떤 사람의 집에 열한 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 집에 불이 났을 때, 그는 각각의 문으로 자신의 피난처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존자시여, 이 열한 개의 불사의 문들 가운데서 각각의 불사의 문으로 저의 피난처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존자시여, 외도들은 이것에 의해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댓가를 얻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아난다 존자께 공양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앗타까나가라의 다사마 장자는 빳딸리뿟따와 웨살리에 머무는 비구 대중을 초대하여 맛있고 먹기 좋은 음식을 직접 손으로 충분히 대접하고 만족시켜드렸다. 그리고 각각의 비구들에게 한 벌의 가사를 공양하였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에게 삼의(三衣. 세 벌의 가사)를 공양하였다. 또한,  아난다 존자ㅔ게 오백명이 머물 수 있는 승원을 지어 드렸다.

 

gopālasuttam (AN 11.17-소치는 사람 경) 

17. "비구들이여,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소치는 사람이 소떼를 돌보고 늘릴 수 없다. 어떤 열한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소치는 사람이 ①물질을 모르고 ②특징에 능숙하지 못하고 ③(진드기등의) 해충을 제거하지 않고 ④상처를 잘 싸매지 않고 ⑤[외양간의 파리와 모기등이 들끓을 때] 연기를 피우지 않고 ⑥건널 자리를 모르고 ⑦마실 물인지 [못 마실 물인지] 알지 못하고 ⑧[안전한 길인지, 안전하지 않은 길인지] 길을 모르고 ⑨방목지에 능숙하지 못하고 ⑩남기지 않고 우유를 짠다. ⑪소들의 아버지요, 소 떼를 이끄는 황소를 위해 더 헌신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소치는 사람이 소떼를 돌보고 늘릴 수 없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비구는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수 없다. 어떤 열한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①물질을 모르고 ②특징에 능숙하지 못하고 ③(진드기등의) 해충을 제거하지 않고 ④상처를 잘 싸매지 않고 ⑤[외양간의 파리와 모기등이 들끓을 때] 연기를 피우지 않고 ⑥건널 자리를 모르고 ⑦마실 물인지 [못 마실 물인지] 알지 못하고 ⑧[안전한 길인지, 안전하지 않은 길인지] 길을 모르고 ⑨방목지에 능숙하지 못하고 ⑩남기지 않고 우유를 짠다. ⑪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한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을 위해 더 헌신하지 않는다."

*'물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의 소떼가 몇 마리인지 숫자를 헤아리거나 혹은 어떤 색깔을 가졌는지를 통해 그 물질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AA.v.87)
*'건널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건널 곳이 평탄한지 아닌지, 악어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는 건널 곳이 아닌 곳에 소떼들을 몰고 간다. 평탄하지 않은 곳에서는 돌부리에 걸려서 발이 부러지고, 악어가 살고 있는 곳에 소떼들을 몰고 갈 때 악어는 소떼를 낚아챈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은 이만큼의 소가 죽었고, 오늘은 이만큼이다.'라고 말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AA.v.89)
*'방목지에 능숙하지 못하다'라는 것은 5일이나 7일이 지난 다음에 그고슬 다시 풀을 먹이러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 방향으로 소떼를 몰면 다시 다음 날에는 그곳으로 몰아서는 안된다. 큰 무리의 소떼가 지나간 곳은 마치 북의 표면처럼 깨끗하여 풀이 없고 물도 역시 흐리다. 그러므로 5일이나 7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그곳으로 몰아야 한다. 이만큼이 지나야 풀도 다시 자라고 물도 깨끗해진다. 그러나 목동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날마다 안전한 장소에서만 소떼를 방목한다. 따라서 소떼는 푸른 풀을 먹지 못하고 마른 풀만을 먹고 흙탕물을 마시게 된다.(AA.v.91)
*남김없이 우유를 다 짠다'라는 것은 현명한 목동은 젖먹이 송아지가 있으면 그들을 위해 한두 개의 젖꼭지는 남겨두고 젖을 짜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목동은 송아지를 위해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젖을 다 짜버린다. 젖먹이 송아지는 젖에 목말라 비실비실하다가 몸을 지탱할 수 없고 어미 소 앞에서 쓰러져 죽는다. 어미는 새끼를 보고 '내 새끼가 젖을 얻지 못했다.'라고 생각하면서 새깨에 대한 슬픔때문에 풀도 먹을 수가 없고 물도 마실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젖꼭지에서 우유가 말라버린다.(AA.v.91)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물질을 모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물질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모두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과 그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所造色.소조색)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물질을 모른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특징에 능숙하지 못한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업의 특징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어리석은 자의 특징도 그의 행위에 의한 것이고), 업의 특징 때문에 현명한 자가 된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특징에 능숙하지 못하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해충을 제거하지 않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떠오른 감각적 쾌락의 생각을 받아 들이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  떠오른 성냄의 생각을 ··· 떠오른 해코지(폭력)의 생각을 ··· 거듭 생겨나는 악한 선하지 않은 법들을 받아 들이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해충을 제거하지 않는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상처를 잘 싸매지 않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그 형상을 보면서 그 표상[相]을 붙잡고, 뒤따르는 부분상[受]을 붙잡는다. 만약 그가 눈의 근[眼根]이 보호되지 않은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간탐과 고뇌)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또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지 않는다.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을 인식하면서 그 표상을 붙잡으며,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는다. 만약 그가 마음의 근[意根]이 보호되지 않은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또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상처를 잘 싸매지 않는다.

"'그 표상(nimitta)붙잡지 않으며'라는 것은 여자라든지 남자라든지 하는 표상이 아름답다는 표상 등 오염원의 바탕이 되는 표상을 붙잡지 않는 것이다. 단디 본 것에서만 그친다. 세세한 부분상(anuvyanjana)을 붙잡지도 않는다'는 것은 손, 발, 미소, 이야기, 앞으로 봄, 옆으로 봄 등의 형태를 붙잡지 않는 것이다. 그런 형태는 오렴원들을 더 상세하게 하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는 단지 있는 그대로 그것을 붙잡는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연기를 피우지 않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상세하게 남에게 설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연기를 피우지 않는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건널 자리를 알지 못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많이 배웠고, 가르침을 계승하고, 법을 호지하고, .율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하는 장로 비구들을 적당한 때에 자주 다가가서 '존자들이시여, 어떻게 이것이 있습니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 존자들은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지 않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심되는 법에 대해 의심을 없애주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건널 자리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실 물인지 알지 못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설해질 때, 의미에 대한 앎을 얻지 못하고, 법에 대한 앎을 얻지 못하고, 법에 수반되는 환희를 얻지 못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실 물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을 모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을 모른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방목지(영역)에 능숙하지 못한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방목지에 능숙하지 못하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남기지 않고 우유를 짜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믿음을 가진 장자들이 가사와,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가져가도록 비구를 초청한다. 그때 비구는 수용하기 위한 적당한 양을 모른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남기지 않고 우유를 짠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한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을 위해 더 헌신하지 않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한 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에 대해, 함께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몸으로 자애로운 행위를 하지 않고, 함께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말로 자애로운 행위를 하지 않고, 함께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마음으로 자애로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한 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을 위해 더 헌신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수 없다.

비구들이여,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소치는 사람은 소 떼를 돌보고 소 떼를 늘린다는 것은 가능하다. 어떤 열한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①물질을 알고 ②특징에 능숙하고 ③해충을 제거하고 ④상처를 잘 싸매고 ⑤연기를 피우고 ⑥건널 자리를 알고 ⑦마실 물을 알고 ⑧길을 알고 ⑨방목지에 능숙하고 ⑩남겨 놓고 우유를 짠다. ⑪소들의 아버지요, 소 떼를 이끄는 황소를 위해 더 헌신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소치는 사람은 소 떼를 돌보고 소 떼를 늘릴 수 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비구는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수 있다. 어떤 열한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①물질을 알고 ②특징에 능숙하고 ③해충을 제거하고 ④상처를 잘 싸매고 ⑤연기를 피우고 ⑥건널 자리를 알고 ⑦마실 물을 알고 ⑧길을 알고 ⑨방목지에 능숙하고 ⑩남겨 놓고 우유를 짠다. ⑪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환 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을 위해 더 헌신한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물질을 아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물질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모두 네 가지 근본물질과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물질을 안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특징에 능숙한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업의 특징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업의 특징 때문에 현명한 자가 된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특징에 능숙하다.

​어떻게, 비구들여, 비구는 해충을 제거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떠오른 감각적 쾌락의 생각을 받아 들이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떠오른 성냄의 생각을 ··· 떠오른 해코지(폭력)의 생각을 ··· 거듭 생겨나는 악한 선하지 않은 법들을 받아 들이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해충을 제거한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상처를 잘 싸매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으로 그 형상을 보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가 눈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보면서 ··· 여기 비구는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그 표상을 붙잡지 않으며, 뒤따르는 부분상을 붙잡지도 않는다. 만약 그가 마음의 근이 보호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서, 길들이기 위해서,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닦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상처를 잘 싸맨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연기를 피우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상세하게 남에게 설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연기를 피운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건널 자리를 아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많이 배웠고, 가르침을 계승하고, 법을 호지하고, 율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하는 장로 비구들을 적당한 때에 자주 다가가서 '존자들이시여, 어떻게 이것이 있습니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고 묻는다. 그에게 그 존자들은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의심되는 법에 대해 의심을 없애준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건널 자리를 안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실 물을 아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설해질 때,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수반되는 환희를 얻는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실 물을 안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을 아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을 안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방목지(영역)에 능숙한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방목지에 능숙하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남겨놓고 우유를 짜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믿음을 가진 장자들이 가사와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가져가도록 비구를 초청한다. 그때 비구는 수용하기 위한 적당한 양을 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남겨놓고 우유를 짠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한 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을 위해 더 헌신하는가(공경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한 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에 대해, 함께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몸으로 자애롭게 행위하고, 함께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말로 자애롭게 행위하고, 함께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마음으로 자애롭게 행위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승가의 아버지요, 승가를 이끄는, 출가한 지 오래되어 고참인 장로 비구들을 위해 더 헌신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한 가지 요소를 갖춘 비구는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수 있다."  

paṭhamasamādhisuttaṃ (AN 11.18-삼매 경1)
18.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지각)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는 이러한 인식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dutiyasamādhisuttaṃ (AN 11.19-삼매 경2)
19. 거기에서 세
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의 뜻을 직접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으로부터 듣고 마음에 잘 호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는 이러한 인식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tatiyasamādhisuttaṃ (AN 11.20-삼매 경3)
20.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는 이러한 인식을 가집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catutthasamādhisuttaṃ (AN 11.21-삼매 경4)
21.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 사리뿟따이시여, 우리는 이런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해서 멀리서라도 사리뿟따 존자의 곁으로 올 것입니다. 그러니 사리뿟따 존자께서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로부터 듣고 잘 호지할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들으십시오.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설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 사리뿟따 존자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부서짐이요, 탐욕의 사라짐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는 이러한 인식을 가집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땅에 대해 땅이라는 인식이 없고, 물에 대해 물이라는 인식이 없고, 불에 대해 불이라는 인식이 없고, 바람에 대해 바람이라는 인식이 없고, 공무변처에 대해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식무변처에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없고, 무소유처에 대해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없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해 이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저 세상에 대해 저 세상이라는 인식이 없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지만, 그러나 인식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2장 계속해서 생각함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