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불(肉身佛) -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석두 희천스님의 속성은 진(陳)씨이며 광동성 단주(端州)의 고요현(高要縣) 출신으로 어머니가 태기가 있으면서 부터 마늘을 먹지 않았으며 심심을 정결하게 하고 편안히 가지는 등으로 태교에 힘썼다. 나면서 그 모습이 빼어나고, 어려서부터 그 뜻이 고매(高邁)하였으며 어질고 협기가 있어 바르지 않는 것을 보면 원수처럼 여겼다.
스님의 출생지인 고요현은 오령산맥(五嶺山脈) 대유령(大庾嶺) 서남의 변두리로 유명한 깊은 산중이다. 이 산 가운데에는 묘요(苗僚)인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 있어서 풍습이 아주 토속적이고 미신적이었다. 특히 그들은 황소을 잡아 신에게 제물을 바치곤 했었는데, 스님이 10세때에 죽기 직전의 황소를 빼앗아 살려주었으므로 진씨 일가와 묘요족 사이에 시비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15세 되던해에 육조 혜능대사가 같은 광동성에 있는 소주 곡강현(韶州 曲江縣) 조계산(曹溪山)에서 불법을 크게 떨치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동북쪽을 향해 험한 산과 물을 건너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조계산 보림사(寶林寺. 육조스님이 계셨던 도량)에 도착 했다.
보림사에 도착한 15세의 소년은 "육조대사에게 불법을 배우려 한다"고 청했는데 그의 체구가 장대하여 20세 청년으로 보았다고 한다. 15세 소년이 조계산으로 육조대사를 찾아 간 날짜는 713년의 초여름으로 육조대사가 입멸하시기 2개월전에 불과 했다. 즉 육조대사의 입멸일이 713년 8월 초삼일 이었으므로 그해 여름 6월경에 체격은 다자란 어른과 다름없었지만 실제로는 15세 소년인 석두희천은 육조대사를 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해 7월중, 육조대사가 "신주(新州. 지금의 廣東(광동)의 新興縣(신흥현))에 돌아가 입적 하겠다"는 예언을 하심으로 대중이 모두 그 뒷 일을 묻고 분분하게 들떠 있었으므로 사미희천은 육조대사에게 나아가 "화상께서 입적하시고 나면 희천은 장차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까" 하고 사뢰자 육조대사는 눈을 들어 한번 보고 눈을 감으면서 "심사거(尋思去.즉 생각 思(사)자를 찾는 것)하는 것이 좋겠다" 했다.
사미 희천은 생각 사(思)자를 깊이하 관(觀)하고 그 뜻을 생각 하라는 말로 잘못 알고 매양 외지고 조용한 곳을 찾아 단정하게 앉아 사(思)자만을 생각 했다. 어느날 수좌(首座)가 그러한 사미희천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희천 사미는 스승께서 이미 입적 하셨는데 그렇게 앉아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 하는가?"
"스승님으로 부터 심사(尋思. 찾을 심. 생각 사)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 사(思)자를 붙들고 있습니다."
수좌화상은 그 말을 듣자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네가 잘못 안 것이다. 너희 사형(師兄) 가운데 행사(行思)가 있는데 그를 찾으라는 말씀이다. 지금 강서성 청원산(江西省 靑原山)에 계시니 그대의 인연은 거기에 있다. 조사의 말씀은 매우 올바르거늘 그대 스스로가 미혹했을 뿐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저는 곧 행사 사형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희천 사미는 너무나 골똘하게 사(思)자를 생각하여 정신이 피곤할 대로 피로하여 사(思)자를 생각하던 마음을 푸는 것과 동시에 정신이 몽롱한데 떨어져 꿈인듯 생시인듯 황홀한 상태에 들었는데, 홀연히 한 사람의 모습이 아득히 나타나면서 손을 흔들어 자신을 부르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희천은 정신을 차리면서 똑바로 보는 순간 깜짝 놀라 "오시는 어른은 스승님 육조대사가 아니십니까"라고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육조대사의 모습이 더욱 분명해 졌다.
"희천사미, 희천사미, 이리 오너라. 내가 너를 갈 곳으로 데려다 주리라"
희천 사미가 스승의 면전에 다다르니 육조대사는 손으로 이끌어 함께 큰 뚝에 이르렀다.
"희천 사미야, 내가 이제 뚝 밑에 저 연못에 너와 함께 노닐 것이다"
하고 말하는 순간 푸르고 맑은 수면위로 큰 거북의 머리가 드러나더니 육조대사 앞에 이르러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혀 공경하는 모습으로 절을 하고는 네 다리는 물 속에 감추고 등을 드러내고 있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한 발로 거북이 등을 타시고 사밋희천을 이끌어 오르게 하셨는데 처음에는 불안 했지만 점차 안정이 되어 큰 바다를 일엽편주(一葉片舟)로 마음대로 오고가듯 시원하게 다니었다.
"희천사미, 희천사미, 졸고 있는가. 많이 고단한 모양이다"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 가운데 체험한 일이 너무나 역력하여 생시와 같았다.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상권에는 '그 신령한 거북은 지혜를 뜻하고, 깊은 못은 성품의 바다(性海)를 뜻하는 것이니, 석두희천이 조사와 함께 신령한 지혜를 타고 성품의 바다를 노닌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희천사미는 육조대사 탑에 참배하여 이별을 고하고 동북으로 나아가 강서성 길주(吉州) 청원산 정거사(靜居寺)에 계신 행사선사를 참배한다. 희천 사미가 청원산 정거사에 이르니 소임을 가진 스님이 희천사미의 신상에 대한 자세한 것을 물어 행사스님에게 사뢰었다. 행사스님은 희천사미에게 물었다.
"네가 어디서 왔는가?"
"영남 조계로 부터 왔습니다."
"네가 영남 조계로 부터 어떤 물건을 가지고 왔느냐?"
"제가 한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또 이것은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 입니다."
"네가 언제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냐?"
"조계에 가기 전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얻으러 왔는가?"
"조계에 가지 전에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 조계에는 무엇하러 갔는가?"
"조계에 가지 않았던들 제가 어찌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은 줄을 알았겠습니까?"
행사선사는 사미희천의 이 대답이 비상함을 보고 기쁨을 금하지 못했다. 어느날 희천사미가 행사선사에게 물었다.
"조계(육조)대사께서 화상님을 아셨습니까?"
"네가 지금 나를 아느냐?"
"아는데 또 어찌 알려 하겠습니까?"
"여러 짐승의 뿔이 많지만 기린뿔 하나로 만족한다."
이것은 문도가 많이 있지만 석두희천이 기린같은 상수(上首)가 됨을 뜻한 말이다.
또 어느때 희천 사미가 물었다.
"화상께서 조계를 떠나 오신지 얼마나 되십니까?"
"나는 모르겠다. 너느 떠나온지 얼마나 되는가?"
"희천사미는 조계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가 온 곳도 안다."
"화상이 덕이 높고 인망이 두터운 어른이신데 너무 서둘러 말씀하지 마십시요."
다른날 행사선사가 희천사미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다 했지?"
"조계에서 왔습니다."
행사선사가 불자(佛子)를 세워 들면서 말했다.
"조계에도 이런 것이 있던가?"
"조계뿐 아니라 천축(인도.부처님 세계)에도 없습니다."
"네가 일찌기 천축에 다녀 왔던가?"
"만일 갔었다면 있었을 것 입니다."
"맞지 않으니 다시 말하라."
"화상도 하나 만은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 학인을 속이지 마십시요."
"너에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뒷사람이 알아듣지 못할까 걱징이다."
"알아듣지 못하지는 않겠지만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행사선사는 갑자기 불자로 내리쳤다. 찰라에 희천사미는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불자를 가지고 이렇게 법을 쓰는 선기(禪機)는 실로 행사선사의 이것이 처음이다.
이렇게 해서 희천사미는 청원 행사선사의 법을 잇게 된다.
청원산 행사선사는 장차 육조의 선법을 부흥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차대한 임무를 석두희천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희천 스님이 청원산 정거사에서 행사선사의 문하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더욱 정진하고 있던 어느 날 행사선사가 희천스님을 불러 "여기 이 서신 한 통을 호남 형산(湖南 衡山)에 가서 회양(懷讓)선사께 드리고 오너라. 그 어른은 나의 사형이시다."
하면서 서신 한통을 주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당부했다.
"이 서신을 전하고 속히 돌아오너라. 나에게 묵은 도끼가 하나 있는데 그대에게 주어 산에서 살게 해 주겠노라."
희천스님이 남악에 가서 채 서신을 바치기 전에 물었다.
"여러 성인들을 사모하지도 않고 자기의 신령함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는 어떠 합니가?"
회양스님이 대답했다.
"그대는 너무 도도하다. 어찌하여 아래를 향해 절실한 현실문제를 묻지 않는가"
희천이 말했다.
"차라리 영원한 겁을 생사에 헤매일지언정 모든 성인들의 해탈한 일을 쫓지 않겠습니다."
희천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회양스님은 다시 더 말하지 않았다.
희천스님이 청원산 정거사로 돌아오니 대사가 말했다.
"그대가 떠난지 오래지 않았는데 그다지 빨리 오는가?" 글은 전달했는가?"
"소식도 통하지 않고 글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가?"
희천스님이 앞의 말을 자세히 보고하고는 이어 말했다.
"떠날 때에 화상께서 무딘 도끼를 주마 하셨는데 지금 주십시요."
대사가 발 하나를 쭉 뻗어 드리우니 희천스님이 문득 절을 했다. 그리고 스승 행사선사에게
작별을 고하고 남악형산(南嶽衡山)으로 갔다.
희천선사가 청원산 행사선사의 문을 두드린 것은 713년이었고 남악 남사(南寺)로 간 것은 742년이므로 행사스승에게 법을 익힌 기간은 29년이나 된다. 그리고 행사선사의 입적은 740년 이므로 희천선사는 스승이 입적하고 3년상을 청원산에서 마친 뒤에 남악으로 갔음을 연대상으로
알 수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희천선사가 남악 형산에 들어감으로 부터 석두(石頭)라는 호를 얻게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형산에 남사(南寺)를 지었으니 이 절 동쪽에 큰 대 모양을 한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 위에 암자를 맺었으므로 사람들이 석두화상이란 호를 부르면서 우르러 존경했다.'
뒤사람들은 이 절을 남대사(南臺寺)고쳐 불렀고 지금도 그 자리가 뚜렷하여 예배를 하기도 한다.
희천선사는 여기서 764년까지 장장 22년간을 주석한다.
등은봉(鄧隱峰)선사는 무애자재한 신통을 보인 선지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직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마조스님과 석두스님 사이를 몇번이나 왕래하면서 법을 묻곤 하다가 마침내 마조스님에 의해 그 법을 잇게된다. 하번은 등은봉 스님이 마조 스님께,
"석두에 좀 다녀 오겠습니다."
"석두의 길은 미끄러우니라"
"염려 마십시요. 제게 간목(竿木. 주장자)이 있으니 알아 할 것 입니다."
석두 스님께 가서 선상(禪床)을 한바퀴 돌고 석장(錫杖)을 한번 흔들며
"이것이 무슨 종지(宗旨) 입니까"
했더니 석두 스님은
"창천.창천(蒼天. 슬프고 슬프도다)."
하셨다. 등은봉은 말을 못하고 돌아와서 마조스님께 그대로 여쭈었더니, 마조스님 말씀이
"다시 가서 창천이라 하거던 허허(噓噓. 웃긴다)라고 해 보아라."
하였다. 등은봉이 다시 석두스님께 가서 전처럼 하고 묻기를
"이것이 무슨 종지 입니까?"
했더니 석두 스님께서 이번에는
"허허"
라고 하시는지라, 등은봉은 말 못하고 돌아오니, 마조스님 말씀이
"석두의 길은 미끄럽다고 하지 않더냐"
하셨다.
어느 날 등은봉 스님이 석두화상에게 물었다.
"어찌하여야 도에 계합하겠습니까?"
"나도 도(道)에 계합하지 못했다."
"마침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대가 그것에 속은지가 얼마이던가?"
또 어느 날 석두화상이 풍르 베는 등은봉 스님이 그 왼쪽 곁에서 손을 모르고 서 있었다.
석두스님이 낫끝을 등은봉스님 쪽으로 돌려 풀 한 포기를 베었다. 그러자 은봉 스님이 말했다.
"화상은 겨우 이것만을 깎으시고 저것을 깎지는 못하셨습니다."
석두스님이 낫을 들어 올리니 은봉스님이 받아 가지고는 베는 시늉을 했다. 석두스님은 곧 말했다.
"그대가 그것만을 겨우 베고 저것은 벨줄 모르는가?"
은봉스님은 더 대꾸가 없었다. 그뒤 은봉스님은 마조도일 스님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 그 법을 이었다.
어느 날 석두희천 선사가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법문은 선대로 부터 부처님께서 전해주신바로서 선정과 정진을 말하지 않고, 부처의 지견(知見)을 통달하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인 소식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보리와 번뇌는 이름은 다르나 본체는 하나이다.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자기 심령의 본체는 단상(斷常)을 떠난 것으로써 성품이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라, 담연하고 원만해서 범부와 성인이 가지런하고 응용하매 끝이 없어 마음과 의식을 여의었도다. 3계 6도가
오직 내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니, 물속의 달과 거울의 그림자가 어찌 생멸이 있으랴. 그대들이 알기만 하면 갖추지 못한바가 없으리라."
이때 한 제자가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해탈 입니까?"
"누가 너를 묶었더냐?"
"어떤 것이 정토 입니까?"
"누가 너를 더렵혔느냐?"
"어떤 것이 열반 입니까?"
"누가 너에게 생사를 갖다 주었느냐?"
이때 또다른 제자 도오(道悟)가 물었다.
"조계의 뜻을 누가 얻었습니까?"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느니라."
"스님께서도 얻으 셨습니까?"
"나는 불법을 모르느리라."
석두스님이 다시 묻기를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강서에서 왔습니다."
"마대사(馬大師. 마조도일 스님을 칭함)를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석두스님이 마른 나무토막 하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마대사와 저것과는 어떻든가?"
도오가 대답을 못하고 돌아가서 마대사께 말하니, 마대사가 말했다.
"그대는 그 나무토막이 얼마나 크게 보이는가?"
"굉장히 크게 보였습니다."
"그대는 매우 힘이 세구나."
"왜 그렇습니까?"
"그대가 남악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지고 여기까지 왔으니, 어찌 힘이 세지 않는가?"
어떤 스님이 석두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 입니까."
"돌 기둥에게 물어 보아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태전(太顚)이 대사께 물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면 두 가지 비방이 된다 했으니, 스님께서 제거해 주시시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제거하랴."
대사가 도리켜 물었다.
"목구멍과 입을 막고 말해 보라."
태전이 대답했다.
"그런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문 안에 들어 올 수 있겠다."
도오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
"몰라서는 안될 일이다."
"향상(向上)의 길에도 전신(轉身)할 곳이 있습니까?"
"넓은 하늘은 흰 구름이 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어떤것이 선 입니까?"
"벽돌이니라"
"어떤 것이 도 입니까?"
"나무토막이니라."
석두 희천이 수법(受法)한 후에 남사에 주석한 이후로 당시 "강서의 마조와 호남의 석두를 뵙지 않은 자와는 더불어 선을 이야기 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니 천하의 선학자가 강서와 호남에서 몰려 왕래가 끊이지 않아음로 강호제현이라는 말도 생겼다.
석두희천 선사는 입적을 앞두고 유명한 [참동계(參同契)]를 짓는다. 이 참동계는 뒷날 조동종의 근본 종지를 이루게 되는데 그 표현은 현학적이지만 내용은 정통선의 진수를 간직하고 있는 명저이다. 790년 12월 25일에 세속의 나이 91, 법랍 63세에 입적 하시니, 제자들이 남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우고 그 법을 길이 추앙했다.
석두화상의 종리를 계승발전 시킨 동산양개(洞山良价)의 정편오위설(正偏五位說)은 다시
공훈오위(功勳五位)의 철학이라 하여 이것에 의해 선학자들의 수도완성을 기했던 것이다.
이 동산의 제자가 조산본적(曹山本寂)선사인데, 이 정편오위의 철학을 더욱 발전대성시켰으니
여기에서 동산과 조산에 의해 수립된 선종의 체계를 [조동종]이라 칭하게 되었다.
현재 석두화상의 등신불은 일본 조동종의 양대 본산의 하나인 총지사(總持寺)에 모셔져 있다.
1,200여년전 조동종의 시조이신 석두화상의 육신상이 어떻게 해서 일본 총지사에 모셔지게 되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1911년 중국의 신해(辛亥)혁명 당시 야마사끼라는 일본인 치의사가 중국 호남의 석두화상을 모신 절에서 대사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혁명군들이 그 절을 소각해 버리는 것을 야마사끼씨는 불 속에 뛰어 들어 대사의 육신상을 모셔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야마사끼는 미쓰이 물산의 상해 지점장이었던 숙부에게 부탁을 하여 선편으로 일본까지 모셔지게 되었다. 그후 친지인 히라노씨등이 이 등신불을 모시고 있다가 아들인 쟁이찌로우라는 사람에 이르러 일본 미이라 연구소에서 인수하여 연구실에 있던 것을 조동종의 총지사와 수많은 사람들이 교섭을 여러차례 하여 마침내 총지사에 영구 보존케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1930년 6월 18일 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