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두라 대논쟁(Panadur Vadaya) 서문
편역자 해설
이 책의 일본어판 제목은 『기독교인가 불교인가 - 역사의 증언』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책 내용에 의한 제목이며,『The Panadura Controversy』(F.Katukolihe; Panadura Vaday, 1948,
Lankaputhra 출판사, Colombo)의 완전 번역이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 1873년 8월 26일.28일 당시 실론(현재 스리랑카)의 파나두라(Panadura) 마을에서 불교도와 기독교인 사이에 교리 논쟁이 행해졌다. 이미 네덜란드 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영국 지배(1796-1948)에 돌입한 시대였다. 복잡한 역사적 경위가 있지만 식민지 지배와 결합해 선교하는 기독교인과 자신들의 아이텐티티를 불교에서 구현하는 싱할라인은 이 논쟁을 통해 격돌했다. 싱할라인은 고래로부터의 스리랑카 주민으로서 오늘날에도 총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도이다.
이 논쟁의 모습은 당시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신문인「실론 타임즈」의 존 캄퍼(John Capper)씨에 의해 상세히 보도되었고, 이것이 뒷날 더욱 상세하게 신문사 편집인의 손에 의해 싱할라어 단행본으로 발행되게 되었다. 이것을 또 많은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서 카투롤리히(Katukolihe)씨가 영역한 것이 이 책자의 원본이다.
이 책은 편집인 서문, 이 논쟁을 행하기 위하 불교.기독교 양측이 조인한 협정서, 그리고 이틀간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하루에 4시간 종합 8시간에 걸쳐, 각자 상호 한 번에 1시간씩 종합 4회.4시간씩 자신의 시간을 갖고 논쟁한 것을 상세학 기록한 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번역에는 『Panca Maha Vadaya(5대논쟁)』(T.S.Dhammabandhu; Anula Press 1955) 싱할라판을 상시 참조했다. 내용 중 빠알리 불교 성전 인용문은 빠알리 성전협회(PTS)의 원전과 조회 확인했다. 성경 인용문은 재단법인 대한 성서공회刊 「성경전서」 1960년 번역서를 사용했다.
1873년 8월 26일과 28일 양일간 1만명의 군중들 앞에서 행해진 이 종교적 논쟁은 '대화(對話)'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론(對論)'이며 '논쟁(論爭)'이다. 승부를 다툰 것으로서 그 결과는 불교측의 승리로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논쟁 당시 우연히 스리랑카에 왔던 미국의 학자 J.M. 피블스(Peebles)박사가 뒷날 저술한 「The Great Debate, Buddhism and Christianity, Face to Face」(Colombo 1955)의 서문에서 "(불교.기독교)양측 모두 자신들의 지원자를 가지고 있어 언제나와 같이 양방이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다. 공평하고 객관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보이는 사람들에게 각종으 인상을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불교측 승려는 인성과 태도가 훌륭한 대론자이며 그리고 일반 민중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하고 군중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일부 기독교인이 논쟁 결과에 불만족이었던 것은 확실하다"라고 설하고 있음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H.R. 페라라(Perera)는 "논쟁이 불교측 승리로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Buddhism in Ceylon; Kandy1966, p69)
그 승패의 판정은 별도로 한다 해도, 이 논쟁은 스리랑카인에게 불교도로서의 긍지와 자신을 불러 일으켰으며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감명을 주었다. 뒷날 인도의 불교 성지.불교 부흥 운동을 지도한 마하보디 소사이어티(Mahabodhi Society)를 창설한 A.다르마팔라(Dharmapala)도 말석에 앉아 젊은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 논쟁이 역사적으로 스리랑카를 불교국에서로서의 명맥을 명실상부하게 유지하고 현대 테라와다 불교, 즉 남방 상좌부 불교의 재생에 공헌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책을 번역 간행함에 있어 종교적인 의미와 의의도 또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불교와 기독교의 '대론', 그것도 교리의 우열을 다투는 '논쟁'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종교뿐만 아니라 세계 각 종교의 세력 분포는 거의 고정되어 있어, 대규모적인 개종이나 포교의 가능성은 얼마 없다. 그리고 또 서로 다른 종교간의 교리상의 논쟁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종교적 논쟁은 결국 논쟁을 위한 논쟁과 대론에 지나지 않으며 전진적이고 건설적인 것은 그 무엇하나 산출해 내지 못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1963년 이후 기독교측의 제종교 융화 자세가 보인다. 불교 전승에서는 원래 타종교가 무엇을 하던간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며, 방해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기질과 역사가 있어 적극적으로 남을 비판하며 논파 척결시키는 자세는 특별한 교리와 교단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일신교는 체질적으로 배타성이 강하지만 그래도 시대는 크게 변화되어 불교와 기독교에 관한 한 이미 '대론'이나 '논쟁(Controversy)'이 아니고 '대화(Dialogue)' 시대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사실 종교계에서나 학계에서도 대화를 위한 제반 사항의 노력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1800년대의 스리랑카에서는 그 상황이 달랐다. 원래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왕실의 보호 하에 있었으며 국교로서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왕령(舊王領)을 영국 왕실에 양도한 1815년의 캔디조약 제5조에는 "불교 불가침.보호"가 기록되어 있다. 식민지 지배의 실권을 얻은 영국도 처음에는 불교승단을 보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에 대해 영국 기독교 교단은 스리랑카 및 영국 본토 내에서 모두 입을 모아 항의를 해, 기독교 정부가 불교의 전통을 인정함은 대단한 잘못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기독교측의 강력한 압력은 19세기 중반에는 총독 J.A. Stewart ckennzie(1837-1841)로 하여금 대 나야카 테로(Maha Nayake Thero)의 승인을 거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Maha YaYaka Thero 란 불교 교단의 최고의 지위로서 종정직에 속하며, 실질적으로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권위를 보유하는 직위이다. 이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음은 불교의 공적인 지위를 부인함에 연결되는 것이다. 이같은 경향이 점차로 강해져 정책면에서 기독교가 우선권을 갖게 되었다. 근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동조해 상호보완하고 있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은데 여기 스리랑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교의 활동은 제한되고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강제화 되었다. 예컨데, 출생한 아기는 세레를 받지 않으면 주민으로서 등록할 수가 없었으며,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기회를 통해 기독교는 원조를 받았으며, 불교의 포교.교육은 소외되게 되었다. 불교도로서의 자존심은 손상되고 자립성도 잃게 되었다. 기독교의 선포는 종교상의 문제가 아니고 스리랑카인의 문화와 아이덴티티에 관계되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인도 자신들의 종교를 단지 정책이라고만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야말로 유일하고 절대적 신앙이라고 마음속으로부터 믿고 있었으며,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기독교 를 넓히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앙을 넓힘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이 식민지 정책과 병합하게 되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시각에서 보면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일체가 사이비 종교이며 그 신자는 비천한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영국 국교회 히바 사교(司敎)가 지은 다음의 유명한 '실론찬가'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향기로운 바람이 스쳐가니
향기로운 향내음을 날라주어
실론(스리랑카)의 섬을 덮어주네
행복이 충만한 가운데
낮고 천박한 것은 오직 인간들뿐
사랑의 마음이 흘러 넘쳐서
하나님만이 은혜의 말씀을 설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눈먼 사교도들은
나무와 돌에다 엎드려 머리를 숙이며 절을 하네
(Bhiksu Sangharakshita; Anaganka Dharmapala)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불교도들이 위기감을 갖게 됨은 당연한 것으로서, 자신들의 전통을 재검토하고 불교도로서의 자각을 촉구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기독교인을 상대로 교리의 옮고 그름, 옳고 그름을 논하는 대론도 행해졌다. 1865년 밧데가마에서의 논쟁, 1866년 우단비타에서의 논쟁, 1871년 감폴라에서의 논쟁등이 그것이며 이런 여러 논쟁의 귀결이 파나두라에서의 논쟁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의 승리는 당시 스리랑카 불교도들에게 불교도로서의 긍지를 되찾게 해주고 대단한 자신감과 기쁨을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독자들께서 이 책을 읽으신 후 혹 교리 논쟁의 공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대화'시대에 생존하고 있다. 불교도이건 기독교인이건 각자가 자신의 신앙을 깊게 해 실천해감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 각자의 신앙의 근저에 있어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종교인만이 서로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이 '대화'라 함일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처음으로 서로 다른 신아과 세계관을 갖는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며 경의를 표하고 마음으로부터 손을 맞잡을 수가 있다. 오늘날 갖가지 형태로 '대화'는 현실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금후에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서로 다른 종교 신도들간의 상호 불신과 근거없는 멸시와 중상 그리고 불화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갖가지 역사적인 경위와 시행착오의 결과로서 '대화'는 익어 왔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파나두라 대논쟁은 '대론'이 '대화'로 발전하는 역사의 귀중한 증언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의의를 아는 것이 '논쟁'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확인하고 '대화'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함에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현대에 있어서도 불모의 논쟁과 중상이 불교와 기독교인들간에 행해지고 있다. 필자는 조계종에 적(籍)을 두고 있는 승려로서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 야기되고 있는 종교적 편견으로 인한 불화와 압박은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예를 들면, 1987년 충남 천안에 독립 기념관이 세워진 것이 주지하는 바이다. 이 기념관 앞 정원 설계를 의뢰받은 한국 예술계 원로가 정원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련(白蓮)을 심고자 해서 몸소 나서서 멀리 지방에까지 내려가 어렵게 구해다 심었다고 한다.
그후 백련이 잘 크는지 보기 위해 가 보았더니 그 연못에는 한 포기의 백련도 없이 빈 못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 까닭을 알아봤더니 놀란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독립 기념관에 새로 부임해 온 관리 책임자가 왜 이런 곳에 불교의 꽃을 심어 놓았느냐고 화를 내면서 당장 뽑아 치우라고 해서 그리됐다는 것이다. 지금도 안내판에는 '백련못'이라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8천평 가까운 그 백련못에 연은 한 포기도 없다.
이런 현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결코 독립 기념관만이 아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다.
불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조선왕조 때 심어서 가꾸어져 몇 세기를 아름답게 피어왔던 연꽃이 뽑혀 나간 이 수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양식있는 지식인들은 탄식하고 있다. "꽃에게 물어보라. 꽃이 무슨 종교의 예속물인가. 불교 경전에서 연꽃을 비유로 드는 것은 어지럽고 흐린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다. 불교 신자들은 연꽃보다 오히려 백합이나 장미꽃을 불전에 더 많이 공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아! 연못에서 연꽃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동아일보 칼럼. 1993.7.25)
다음과 같은 실화도 있다. 육군의 어떤 지휘관이 군 법당의 불상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법당을 철거하게 한 사건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에 찬동했고 일시적이나마 이에 격노한 불교도들과의 사이에 종교 분쟁이 일어날 상황 직전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후 (1993.6)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군 지휘관이 공식 사죄해 표면적으로는 일단락 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후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대두되고 있다. 그래서 국방부 육해공군 군정감 및 실무자들은 1993년 6월 17일 상기의 사건과 관련해 모임을 갖고 ① 타종교에 대해 비방및 방해등의 금지 ② 신자 획득을 위한 개종 강요 행위 금지 ③ 종파간 의견 존중등을 결의하게 되었다.(한국일보 1993.6.18)
이러한 결의를 하게 되지 않으면 안되었떤 것은 군 내의 상황이 결코 상기한 사건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일반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실례를 일일이 소개함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은 종교적 편견과 그로 인한 부정의(不正義)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의 오늘날의 상태가 식민지 시대의 스리랑카의 사회 현상과 그렇게 다를바가 없음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로 기독교측에서의 불교 교리에 대한 잘못된 선전과 중상의 현실이 파나두라 논쟁에서의 대론과 흡사함에도 주목하지 않으며 안된다.
이것은 앞 세기 스리랑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할 종교가 일방적으로 중상 모략함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파나두라 논쟁을 거론한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 상호 관계사의 한 토막으로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오늘날의 종교가들의 반선 재료로서도 이 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실은 1987년에 한국어판으로 출판하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필자는 이 책의 내용과 의의를 상세히 설명했으며 위에서 말한 정신도 피력했다. 출판사도 원고를 충분히 검토한 후 기꺼이 계약을 마쳤던 것은 같은 해 봄이었다.
그러나 1개월 후 계약은 출판사측이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 같은 과격한 논쟁을 출판할 수 없다. 지금은 대화시대이므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필자는 낙담천만이었다. 이에 일본 유학이래 공사 모든 면에 지도를 주시는 나카무라 하지메 박사님께 상의를 드렸다. 박사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그와 같은 사정이 있다면 이 중요한 책을 한국어뿐만 아니라 일본어로도 상세한 소개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일반 출판사에서 출판에 문제가 있다면 동방학원 연구논문집 「동방(東方)」에 실으면 어떻겠는가?"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리하여 「동방」 제3호(1987년)부터 제8호(1992년)까지 6회에 걸쳐 연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연재 제1회에서는 박사님의 귀중한 '서문'을 실어 주신 영광을 받을 수 있었다. 상기 「동방」에 연재를 끝냈을 때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단행본으로 출판할 것을 나카무라 박사님께서 추천해 주시고 출판사까지 몸소 선택하여 출판사 사장에게 추거(推擧)해 주셔서 지난 1995년 9월 동경의 "산키보 불서림"에서 일어판을 출간할 수 있었다. 또한 나카무라 박사님께서는 이 책의 감수까지도 쾌히 승낙해 주시고 명문의 감수 말씀까지 실어 주셨다. 그리고 이번 한국어 출판에 있어서도ㅗ "한국 독자 여러분께"라는 극히 과분한 서문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박사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필설로서 표현이 불가능하다. 오직 만감(萬感)이 심경뿐이다.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햇볕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도서출판 운주사 김시열님의 인본주의와 진리 탐구에 힘을 다하시는 열의, 그리고 스텝진 여러분의 헌신적인 진력(䀆力)에 의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번 한국어판 출판에 있어서 많은 조언과 다방면에 걸친 은혜를 주신 전 법보신문 주필 박경훈 선생님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 강혜원 박사님, 원광대학 사범대학의 김철 박사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를 올린다.
이 책의 원본인 싱할라어판 및 영역본을 비장본(秘藏本)임에도 불구하고 쾌히 제공해 주신 마에다 에가쿠 박사님의 은헤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천학(淺學)인 필자를 위해 이 논쟁을 위시한 제반에 걸쳐 친절하고 정중한 지도를 아끼지 않으신 나라 야스아키 박사님의 자비의 은혜가 없었던들 이 책의 집필이 어려웠을 것이다. 마음속 깊이 감사를 올리는 바이다.
그리고 이 책 가운데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멋진 삽화를 그려 주신 니시무라 고오쪼 선생님의 심은(深恩)에 깊이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책 번역에 있어서 항상 예리한 견해와 조언으로 협력을 아끼지 않으신 법우 수마나사라 스님(Thero Aluboulle Sumanasara)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일본 유학 이래 전인격적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신 김교성 선생님, 성도행(成道行) 여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또 본 원고의 정서에 힘써 주신 전 주일 한국 대사관 국방 무관실 이선우님에게 이자리를 빌어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상과 같은 많은 반연의 은혜로 인해서 일본어 출판시에는 불교서적 베스트셀러의 순위를 유지했으며,「일본경제신문」, 「산케이신문」, 「추가이닛보」, 「불교타임스」 등 일본의 각 언론에 특종기사로 보도되어 지금 현재도 화재의 책으로서 군림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반연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올리는 바이다.
2001년 10월 10일
석오진(釋悟震) 삼가 기록함
편역자 석오진
서울 출생.
1986년 동경 고마지와 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인도 불교학 전공 석사.
1990년 상기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3년 문학박사(불교학)
1997년 스리랑카 국립 페레데이야 대학 객원 연구원
2000년 스리랑카 국립 루후나 대학 객원 연구원
1999년부터 현재 동경대학 동야문화 연구소 강사, 동경 동방학원 강사, 재단법인 동방연구회 연구원, 동경대학 동양문화 연구소 협력 연구원, 일본 인도학 불교학회 정회원
일본어와 한국어로 출판된 주요 역 : 저서로 <붓다 알면 알수록>, <종교와 사회윤리>, <비교종교 사상론>, <불교와 인간>, <기독교인가 불교인가-역사의 증언>, <불교의 말 삶의 지혜>, <석존과의 대화>, <불교요설>, <붓다가 남기고 싶었던 말>, <원시불교와 기독교>등이 있다.
+++
머리말
스리랑카 불교의 세혁이 그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신들이 신앙하는 기독교/카톨릭을 이 나라 전역에 걸쳐 전파하는 것이었으며, 이 시기가 스리랑카 불교의 함흑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유럽의 지배자들은 스리랑카의 유지들에게 종교의 선택에 따라 지위와 권력, 계급을 주었으며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심에서 기독교를 신봉했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생활과 이득을 위해서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당시 스리랑카 전역에 걸쳐 극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유럽인들의 이러한 편중적인 정책으로 인해서 스리랑카의 많은 유지들에게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가일층 많은 개종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불교 철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논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모든 철인(哲人)들이 불교 철학의 중요성을 익히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영국인들은 기독교의 전파를 위해 많은 힘을 썼지만 기독교 세력은 스리랑카 해안 주변 일부에 그쳤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당시 수도였던 콜롬보시에서 불교도는 자신이 불교도라는 걸 말할 수 없었으며 콜롬보시 안에서는 승려들의 탁발도 금지되었다.
이것은 스리랑카 불교도들에게는 역사상 경험치 못했던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암흑시대였다. 이와 같은 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한 스님이 한 분 계셨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Mohottiwatte Gunananda. 1823-1890)라고 하는 스님이었다. 그는 분기(奮起)해 1871년 6월 9일과 10일, 감폴라(Gampola)라는 지방의 한 학교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파나두라(Panadura), 밧데가마(Baddegama), 우단위타(Udanwita), 그리고 와라고다(Waragoda)에서 기독교인들과 공개 토론을 했다.
이와 같은 공개 논쟁이 있었음을 알게 된 그 당시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국인 육군 대령 올코트(Olcotte)와 같은 기독교인이며 동조자인 메덤 브라받스키(Blavasky)는 불교에 감명 받아 불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스리랑카에 입국해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러한 논쟁들 중에서도 파나두라 마을에서 행해진 『파나두라 논쟁』은 그 시대적 상황을 볼 때 과히 획기적이라 하겠다.
이 논쟁의 모습은 <실론 타임즈(Tiems of Ceylon)>신문의 존 캅퍼(John Capper)씨에 의해 상세히 보도되었고 이것이 뒷날 더욱 상세하게 같은 신문사 편집인 손에 의해 싱할라어 단행본으로 발행되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싱할라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이 역사적인 논쟁을 보다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또한 존경할 수 있는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영문으로 번역해 줄 것을 의뢰받아 이 글을 번역했다.
이 논쟁은 1873년 8월 26일과 28일에 걸쳐 '파나두라'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행해졌다. 그것은 1만명이 넘는 불교도들과 기독교들이 모인 가운데에 행해졌으며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은 불교를 대표해서, 데이비드 데실바(Davith Desilva)목사와 시리만나(Srimanna) 전도사는 기독교를 대표해서 논쟁이 행해졌다.
그 자리에는 당시 스리랑카 불교를 대표했던 힉카두웨(Hikkaduwe)의 수망갈라(Sumangala)스님을 필두로 파나두라의 구나라타나(Gunaratana)스님, 와스키두웨(Waskaduwe)dml 수부티(Subuti)스님, 웰리가마(Weligama)의 수망갈라 스님이 배석했다.
기독교를 대표해서는 S.런던(London)목사, R.타브(Tab)목사, S.촐스(Cauls)목사, C.자야싱하(Jayaisngha)목사, P.로드리고(Rodrigo)목사 그리고 시리만나(Sirimanna)전도사와 자야싱하(Jayasinha)변호사, 무다리야르(Mudaliyar), S.데 소이사(De Soysa)등 그밖의 여러 인사들이 배석했다.
이 논쟁의 결과 불교와 기독교 그 어느쪽이 옳고 그릇되었는지 판단하기 이전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 답은 자연히 당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출판에 즈음하여 이 책을 영역해 주신 핀칸다 도단두와(Pinkanda Dodanduwa) 의 칸투코리헤(F. Kandukorihe)씨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그리고 이 책을 깨끗하게 출한해 주신 랑카푸트라(Lankaputra)출판사의 스텝진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 책의 출판권은 본인에게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모호티왓테(Mohotiwatte)
바라피티야(Balapittiya)에서 구나와루다나(Gunawardana)가 머릿말을 기록함
+++
논쟁의 조건불교와 기독교 양측에서 승인한
1. 논쟁은 구술(口述)로써 행해야 한다.
2. 논쟁은 양측에서 기록한 다음, 기록자는 자신의 서명을 한 뒤 대담자에게 그 기록문의 인정 서명을 받아야 한다.
3. 대담자는 인용하는 책과 논문의 명칭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
4. 한 사람의 대담 시간은 1시간으로 한다.
5. 첫 시간은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것.
그 다음 시간은 불교 측에 부여하고 불교 측은 불교의 허위성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필히 변론한 후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해 반론해야 한다.
6. 이 논쟁ㅇㄴ 8월 26일, 28일에 행한다.
7. 논쟁은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행한다.
8. 양측 어느 쪽도 논쟁 중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책임져야 한다.
9. 논쟁 중 논쟁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협정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청중들이 평온하고 냉정을 기하도록 그 책임을 부여한다.
10. 파나두라 팟티야(Panadura Pattiya) 마을의 돔바가하왓타(Dombagahawatta)라는 곳에 이 논쟁을 위해서 특별히 일층 건물을 지을 것을 인정한다.
이 협정서는 불교를 대표해서 쿠루쿠라수리야(Kurukulasuriya), 코렐리스(Cornelis), 페레라(Perera), 아푸하미(Appuhami), 그리고 기독교를 대표해서 마테스(Mathes), 수와리스(Suwaris), 구나와르다나(Gunawardana)씨가 협정했음.
위의 관한 조건을 인정 확인 후 양측에서 1873년 7월 24일에 조인했음.
+++
스리랑카 남서해안의 작은 마을 파나두라
구나난다 스님
근대 스리랑카 불교 부흥 운동의 선구자 다르마팔라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스리랑카에서 불교도가 되어 헌신한 올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