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두라 대논쟁 - 네 번째 논쟁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가 행한 대론
(1873년 8월 28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이번 대론은 오늘 저녁으로서 끝마치게 되므로 여러분들은 잘 들어주시고 잘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앞 8월 26일 오후 4시부터 5시 사이에 불교측의 스님은 저를 '적대자(위룻다카라야)'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님을 반대로자라고 부른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같은 '반대론자(위룻다카라야)'라고 부른 것은 결코 굴욕적인 언사로서 사용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이 언사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친구인 스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짐승들에게 비유했다고 그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기독교의 성서를 인용했습니다만, 결코 그것은 입증될 수 없는 불필요한 노력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짐승(축생)이 모두 늙고 죽는 것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한 예는 결코 그릇된 비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는 여러분에게 불교의 연기설을 해명했습니다. 이러한 연기설의 해명은 대단히 훌륭한 붓다고사도 명확한 이해를 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듯 붓다고사 선생도 해명할 수 없는 연기설의 해석을 하려고 했던 저의 친구인 스님은 붓다고사 선생보다도 위대한 자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도 난해한 연기설에 대해서 약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기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식(識)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생기며, 몸과 마음(명색)에 의해서 감각이 생긴다. 6개의 감각에 의해서 접촉이 생긴다. 이와같이 진행되어 출생이 생기므로 생존 또는 윤회가 생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인식(認識)이라고 함은 눈.귀.코등을 의미합니다. 또 연기설은 감각은 의식에 의해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6개의 감각이라 함은 눈.귀.코 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가르침이 이외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연기설은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이 태어나고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가 태어나는 것과 같이 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의 친구인 스님이 그러한 사실을 마치 성경에 모순점이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은 성경의 "삶을 얻으리라"라는 성스러운 말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불교의 무색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에 관한 가르침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 스님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기독교의 영혼설에 대해 스님이 우리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바로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는 경.율.론 삼장이라고 불리우는 불경은 불타가 생존하던 시대에도 나뭇잎(폐엽)에 기록했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러한 사실을 입증할 만한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의 성전과 많은 주석서들은 암기해서 전승되어 오다가 불타가 죽은 450년 후에 그것을 책으로 편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외면하는 그의 답변은 도대체 신용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이와 같은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암기해서 전승된 불교 성전이 지금 현재의 성전중에 그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나를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스님은 모세를 살인자였다고 하고, 그가 그와 같은 살인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은 신성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살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제자가 되기 그 전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모세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세가 행한 범죄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마음에 걸릴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히려 불교측에 있습니다. 예컨데 불교에서 그들이 숭배하는 성인중의 한 사람인 앙굴리말라(angulimala)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999명의 인간을 죽였습니다. 불타는 그에게 그 즉시 계를 받게 하여 출가시켜 성직자로서 허락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도를 깨친 성스러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알라바카(Alavaka)라는 자가 4,300명 이상의 인간을 12년 사이에 죽여서 그들의 인육을 먹었으면서도 그는 성현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러한 알라바카마저도 성현으로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보살행의 수행으로서 베산타라 왕으로 태어났을 때 자기 부인을 어떤 바라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대론자는 보살행 중인 왕이 자기 부인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론자 불교측 스님의 종교인 불교 경전 소부경전을 볼 것 같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횟수를 당신은 나를 타인의 부인으로 넘겨주곤 하였지만 나는 한 번도 싫다고 생각하지 않고 참고 견디었습니다."
라고 석가의 부인이었던 아수다라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대론자는 불교의 전문가들에게 둘러 쌓여 있기 때무에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명확한 의미를 왜곡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또 "어서 오라. 무엇이든지 걸실에 응하겠노라"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구걸하러 온 모든 걸식인들에게 자신의 머리, 피, 눈, 부인, 어린애까지도 주었다고 하며, 불타는 보시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명확한 형태로 그들의 불전에서 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무엇을 논쟁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저는 불타가 되는 종자(붓단쿠라, buddhankura)의 본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안쿠라(ankura)라는 것은 "허약한 묘목"을 의미합니다.
불타가 될 수 있다는 본성(불성)을 명기하고 있는 <본생경>에서 약간 말씀드리겠습니다. <파란타파 본생경(Parantapa Jataka)>을 볼 것 같으면 주인공인 보살은 붓단쿠라(Buddhankura)라고 하는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왕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부왕은 파란타파(Parantapa)라고 하는 시종과 함께 산속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산속 생활중에 파란타파 시종은 왕비와 육체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시종은 사악한 인간으로 변질되어 왕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시종과 왕비 사이에 낳은 아들이 그의 아버지인 파란타파를 살해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인 보살 붓다쿠라의 반역적인 행위로 인해서 이와 같은 불상사, 즉 잔혹하고 부도덕한 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가 성불을 하려고 하는 자들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수손디야(Susondiya)라는 본생경의 아귀에 대한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보살은 가루다(Garuda. 힌두교의 신 이름. 전설의 큰 새)라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도박을 하러 왕궁으로 놀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 왕궁의 왕비와 눈이 맞아서 왕비와 함께 도망했다 합니다.
이러한 나쁜 행동 또한 불성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불성을 가지고 성불하기 위한 보살들의 행위라 하면 불타의 전지전능은 그만 두고라도, 오늘날 어린 학생들이 상식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지식도 불타에게는 없었던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불타의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일층 명확하게 말해 주는 한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증일아함경)에 있는 "사푸타 수리요드 가마나 경전(Saptta Suriyod gamana Sutra)" 에
"팔만 사천 유순(인도의 거리 단위. 멍에를 황소 수레에 걸고 하루의 길을 가는 여정을 말하며 보통 40리에 해당)의 높이와 8만4천 유순 정도의 넓이의 대수미산(Mahamera)이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산이 존재한다."
고 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에서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날 일곱개의 태양이 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만4천 유순의 거대한 산이 8만4천 유순의 넓이와 깊이의 바다에 의해서 덮혀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지구상에 그렇게 거대한 산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와 같은 거대한 산이 존재한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그것이 발견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지구의 기구를 보이면서) 이 지구의 원주는 2만5천마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식인이라면 그 누구도 모두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거대한 산이 이 조그마한 지구상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몇 주일 동안이라도 지구를 일주하면서 그 거대한 산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지구를 몇 번인가 일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거대한 산을 목격한 적도 또한 발견한 조그마한 증거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무지한 말을 하는 불타가 전지전능한 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자를 전지전능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타라(Matara)라는 스리랑카 남부지방에서, 범천에 태어나기 위해서 불교의 승려 몇 명인가가 정신없이 명상에 잠겨 결국에는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는 정신이상자들에게 적당한 교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현명한 사람들을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전의 하나인 <파라지카(Parajika.바라제)> 성전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생존시대에도 그의 제가들이 많은 나쁜 죄를 범했다는 것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나쁜 행동들인가에 관해서는 저의 입으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 책 중의 "맛카티 밧투(Makkati Vatthu)>라는 곳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떤 비구가 공동묘지에 가서 아직(새나 동물이) 쪼지 않은 시체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그 시체와 성행위를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이 같은 부분은 목사가 지적한 부분에는 없고 다른 부분에 있음).
그리고 불타의 죽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겟습니다. 불타의 제자 춘다(Cunda)라고 하는 수행자(경전에 의하면 춘다는 수행자가 아닌 재가 신자임)가 공양을 올린 돼지고기(sukara maddava)를 먹고서 심한 이질을 일으켜 그것이 원인이 돼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불타는 돼지고기를 먹은 것으로 인해 심한 이질 설사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며 가는 곳마다 수행을 멈추며 휴식을 취하고 이윽고 쿠시나라(Kusinara. Kusinagara)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신통력도, 그를 수호한다고 하는 모든 신들인 범천등도 그의 고통을 멈추게 해주지 못했던 것이 명확합니다.
이와 같은 명확한 사실로 보아 불타에 관해서 기술된 것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기술된 넌센스의 책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우리들은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우리들이 저지른 죄악을 위해서 그 괴로움으르 대신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만인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린 많은 의문점을 그 어느 하나도 저의 대론자가 만족스럽게 대답을 하지 못한 것과,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의 모든 것을 제가 남김없이 답변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께서는 주목해 주시기 바라면서 저의 대론을 마칠까 합니다.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에 의한 반론을 구나난다 스님이 대론
(1873년 8월 28일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목사께서는 앞전 대론때 저를 "적대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제가 잘못 된 견해를 지적함으로 인해서 그는 저를 "친구"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즉,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치 않겠습니다.
이 앞에 화요일 오전 그의 대론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불교 경전에서는 인간을 동물과 똑같이 취급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는 그러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인간과 짐슴을 비유한 것은 불교가 아니고 오히려 목사들 자신들이 신앙하는 기독교에서 그 비유을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앞에서도 저는 기독교 성경에서 그와 같은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새로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신 분들도 계시는 것 같기도 해서 다시 한번 그 실제 예를 들어 그것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구약성서 전도서 제3장 제19절에 의할 것 같으면
"인생들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이 모두가 동일한 호흡을 하며 이들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로다."
이와 같은 성경의 구절은 사람을 짐승들과 비유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좋은 증거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과 축생을 똑같이 취급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목사가 주장했습니다만, 위에서 제가 인용한 성경 구절은 그렇게 주장하느느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증명해 준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연기설의 난해함을 손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밧투캄모 아함 앗자(Vattukamo aham ajja)"라는 계문을 해설했습니다. 그것은 이 가르침은 대단히 섬세 미묘하다는 취지로서 인용한 것이지 결코 저 자신이 붓다고사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는 취지에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 자신이 붓다고사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목사께서는 제가 붓다고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비꼬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것은 아마도 저의 대론자 목사께서는 제가 그에게 파알리어의 지식이 부족함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대단한 불쾌감을 느끼고 이렇게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는 또 다시 연기설을 설명하기 위해서 조리 없는 길고 긴 연설만을 나열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 목사님의 논설을 그 누구 한 사람도 이해치 못했음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연기설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을 혼돈시키는 크나큰 모순투성이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지만 연기설은 그가 주장하듯 결코 우리 인간들을 혼돈시키며 크게 모순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또 선천적인 의식과 후천적, 즉 감각의 움직에 의한 의식의 구별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이 구별을 이해했다면 불교의 연기설은 인간들을 혼돈시키고 모순된 가르침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앞전에 제가 그 누구도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충분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는 연기설이라는 불교 교리가 아버지는 아들에 의하여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만, 저는 여기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말할 때는 원형(rotunidity)의 탄생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야말로 이러한 탄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됐다고 했을 때 여호와는 마리아의 아버지가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여호와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은 마리아의 태내에 임신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정리하면 여호와는 마리아의 아들이 되며, 마리아는 여호와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호와는 마리아의 남편이 되며, 마리아는 여호와의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때로는 여호와의 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며 또 때로는 그의 부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탄생 과정은 언어도단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하는 말도 되지 않는 비유를 가지고서 불교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옳은 행동이라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논리는 오히려 불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에 가장 적합하며 그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그의 반론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끝낼까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천구게서 살고 있는 것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이라고 그 어느 종교도 철학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이 이 목사님의 생각은 새로운 표현의 사고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영혼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여행을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넌센스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이것은 그들의 미신성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의해서, 우리들의 논리는 오히려 그들의 비정당성을 밝힌 결과가 된 것을 여러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 바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설명이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애당초 기독교 측의 이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만약에 영혼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면 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겠느냐?"는 저의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할 수 없었으므로 목사께서 자기 멋대로 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신앙하는 종교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론을 전개하겠습니까?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들께서 더욱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천국에는 강력한 신들만이 존재하고 그곳에는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삶을 얻으리라"라는 말을 제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말들을 저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제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명에 관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성경을 펴 보일 필요가 없겠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지구상의 생명체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구원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써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목사께서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인 천국으로 가는 영혼의 형상과 모습은 아주 정교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영혼이 그렇게 정교하다면 그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무색계에 태어나는 인간들의 본질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설명할 시간적이 여유가 없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저의 친구 목사께서는 무색계인 범천에 태어나는 영혼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범천이 존재하고 있는 것조차 그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가 말하는 영혼을 범천의 본질과 비유한 것은 크나큰 모순점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목사님께서는 오늘 오전 중에 대론한 전도사 사리만나씨의 연설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이 두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불타가 돌아가신 뒤 450년 후에 불타의 가르침을 책으로 엮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 앞에서의 대론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만약에 더 듣고 싶으시다면 <사마야 산그라하(Samaya Sangraha)>라는 잡지 제4절에 그 설명을 상세히 게재하고 있습니다.(그는 참고 잡지를 기독교도들에게 전해 주었다)
목사님께서는 모세가 특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많으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것으느 유감스럽게도 전혀 무의한 결과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자기 나라에서 살인죄를 범하고 자기 나라로부터 도주한 범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만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쭉 범죄자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결코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듯 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와 같은 범죄자가 기록한 성경을 읽고 또한 그 가르침을 믿고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짜서 기름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목사님의 주장은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었음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또 다른 많은 사실을 대조해 보았을 때 기독교는 결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지상 최대의 종교로 믿고 있는 기독교도들은 지금 당장 그 삿된 신앙을 버리고 올바른 종교에 귀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목사께서는 불교의 앙굴리마라 존자가 살인자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거짓입니다. 앙굴리마라 존자는 결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미 한 마리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목사께서는 자신이 말한 것을 불교 성전에서 입증해 보이려고 했습니다만 성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목사께서 찾고 있던 살인자 앙굴리마라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가 전 본명은 아힘사카(Ahimsaka). 어느 바라문의 제가가 되어 수행 중, 용모 단정하고 재능을 구비한 그에게 스승의 아내가 연정을 품고 유혹했으나 거절하자 그녀가 남편에게 아힘사카에게 강간당했다고 모략했다. 그러자 그의 스승은 분노해 거짓 가르침을 주었다. 즉 나에게서 배울 것은 더 이상 없으니 밖에 나가 1000명을 죽여서 그들의 손가락 하나씩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바치면 너에게는 더없는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열리리라고 한 것이다. 스승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어 그것을 실행하던 중, 마지막 한 명이 남았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숨어 버리고 아들의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으로 나타났다. 고민 끝에 자신의 어머니마저 죽이려 할 때 불타가 가로막고 설법하니 불타의 위덕과 위업에 감명받아 그 길로 출가, 앙굴리말라(Angulimala)라는 법명을 받고 자신의 사악한 죄에 대한 깊은 참회와 용맹 정진의 결과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앙굴리마라라는 이름은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의 이름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존경하며 숭배하는 것은 불타께 귀의해 깨침을 얻은 뒤의 앙굴리말라 존자인 것입니다. 출가하지 전에 죄를 지은 자는 앙굴리말라 존자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것은 앙굴리말라 존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반 재가인으로 있던 그를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란티카(Harantika, 도둑), 알라바카(Alavaka, 살인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목사님께서는 베산타라 왕의 보시 행위에 대해서도 비난을 했습니다만 이 역시 오늘 아침 전도사 시리만나시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에게 말씀드린 대답이 목사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적합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보살이 자기 부인을 타인에게 기부(보시)한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테리 아파다나(Theri Apadana. 비구니의 비유)의 설문 중에서 "네카 코티 사하사니 바리얏타야 다아시맘(neka koti sahassani bhariyatthaya dasi mam)" 등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문 속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입증할 만한 곳이 전혀 없습니다. 바라문으로 위장하고 온 사크라(sakra.제석천) 천신에게 베산타라 왕이 자기 부인을 기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바리얏타야 다아시맘(bahriyatthaya dasi mam)"이란 말의 뜻은, "당신은 타인인 나에게 부인을 넘겨주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천신은 맛디이(Maddi)왕비를 자기 부인으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베산타라 본생경>에 의하면 베산타라 왕이 자기 부인을 사크라 천신에게 보시를 했으나 사크라 천신은 즉시 그녀를 베산타라 왕에게 돌려보냇습니다.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설문은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 주장하는 바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명확히 입증하고 싶다면 보살의 부인이 언제 어디서 누구의 부인으로 있었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는 그러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음은 이미 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상의 대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하 목사님께서는 "아가타가타남(Agatagatanam)" 이라고 하는 파알리어 문장을 들추어 이 문장이 불교 성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장을 우리들은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문장이 기록되어 있는 불교 성전이 존재한다면 그 경전을 인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께서 그 같은 경전을 명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보살이 수행 중 그의 보살행으로서 눈.머리.육신과 혈액. 부인과 어린애를 원하는 타인에게 주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보시행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정도의 열성과 정열이 없으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안락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도 충분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파란타파와 수손디야(본생경)을 인용하면서 불도를 수행하는 보살도 죄를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타에 대한 비난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교 혹은 불타 그 어느 쪽도 그의 언동에 의해서 명예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번뇌에 오염된 중생들이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번뇌에 오염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번뇌를 끊어 버린 불타에게 불명예가 되지 않습니다. 십바라밀을 완성한 보살들은 잘못을 저지를리가 없다고 우리들은 단언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깨달음의 경지에 든 후로는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일상 귀의하며 존경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이러한 불타이지 십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께서 그러한 보살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구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붓단쿠라(buddhankura)"라는 의미를 "허약한 묘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넌센스를 말한 것은 그의 지식이 부족한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불타가 전지전능한 자가 아니며, 어린애들의 평균적인 지식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미산이 존재한다는 의미이 "시네루 비카베 팝바타 라아자(Sineru bhikkave pabbataraja)"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말했습니다. 수미산이라는 산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는 지리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지리학을 만든 사람은 이삭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을 비판해서 모리슨(R.K. Morrison)이라고 하는 천재적인 영국의 학자가 저술한 책을 저는 여기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 의할 것 같으면 뉴턴의 지리학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인용하여 도움을 청한 뉴턴의 지리학에 의하면 밤(야간)은 지구의 자전에 연휴함이라 합니다. 그러나 모리슨의저술에서는 태양이 회전하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현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국의 과학자들 자신조차도 결코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리학을 가지고서 불교의 교리를 옳지 못하다고 반박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목사님에 의해서 여러분들께 보여진 지구 모형을 여러분들은 보셨을 것입니다. 이 지구 모형은 뉴턴의 지리학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가 반론으로 던진 볼을 이제 다시 그에게 돌려 보냅니다. 모리슨 역시 영국의 과학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지구가 회전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의 저술에서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모리슨의 저술을 기독교 측에 전해 주었다)
이 저술은 당신이 저에게 공격의 무기로 던진 볼을 다시 당신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영국의 과학자및 <태양의 법칙>등의 책을 저술한 범어학자들간의 지리학에서도 아직은 확실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의 과학들 사이에서도 지리학에 관한 의론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학으로서 인정되지 않은 지리학을 가지고 불교를 공격하려고 생각한 것은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었으며 어리석은 행동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북쪽에 수미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증거가 있음을 보여 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나침반입니다. 이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북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침반을 그 어느쪽으로 움직인다 해도 결코 다른 방향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북쪽에서는 자석을 끌어 당기는 그 무엇인가의 물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은 4대륙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석을 끌어당기는 것은 수미산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나침반의 자석 바늘 역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침반의 바늘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항상 북쪽만을 가리키는 것은 북쪽에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들은 수미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수미산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왜 북쪽으로 향해 있는가를 영국의 과학자들이 납득이 될 수 있게 설명한 것이 있습니까? 지금까지도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명료하게 설명한 과학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그 어느 분들도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실 분은 단 한 사람도 안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수미산보다 거대한 산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께서는 수미산과 같이 거대한 산, 즉 약 2만5천마일(약 4만킬로미터)의 원주를 가진 산이 이 작은 지구에 존재할리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주장 또한 전혀 무의미한 노력에 불과했음을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원주는 뉴턴의 논리에 의해서 계산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의 크기에 대해서는 뉴턴의 타당하지 못한 과학에 따라서 생각되어진 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른 과학자들도 그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길이의 단위인 유순(Yojana)의 정확한 기리를 본 고장인 인도의 학자들도 알지 못하며 여러 학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한 길이를 목사님이신 당신께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수미산에 관한 목사님의 반론에 대해서 저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있으리만큼 충분히 답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미산이 존재함을 입증하기 위한 저의 증거는 가장 적절했고 논리적이었으며, 수미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목사의 반증은 전혀 비논리적이며 효과적인 증거가 되지 못했음을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다음으로 귀신에 들려서 미친 정신이상자 승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불교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한 승려가 병에 걸린 것은 병든 그 자신의 불명예는 될지언정 불교 전체의 불명예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 경전 속에서 부도덕하고 무지한 인간에게 명상법을 지도하고 그것을 실천케 하면 그 사람의 정신에 혼동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불교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목사께서는 불타 생존시에 불타를 존경하지 않고 신심이 없는 어느 한 승려가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불교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악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단언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에도 죄를 저지르는 승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불교 전체의 불명예로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불타가 악행을 한 승려에게 처벌을 한 것은 계율을 만들어 놓은 뒤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계율을 만들기 전에는 그러한 승려를 처벌한 적이 없습니다.
한 예로서, 만약에 누군가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에 의해서 그에게 왕이 처벌을 내렸다고 합시다. 그러나 법률이 제정 성립되기 전에는 처벌할 수가 없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타가 계율을 만들기 전에 죄를 지은 자에게 처벌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불타는 죄를 지은 자에게 처벌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사님의 지식은 상식적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장에는 어떠한 승려가 어떠한 죄를 지어 어떠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얼마나 순수하게 명철한 종교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목사님께서 승려들의 죄를 나열. 지적한다고 해도 불교를 비판하는 재료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께서는 이 앞 대론에서, 계율을 기록한 율장에 의하면 어떤 승려가 어느 여인에게 임신이 중절되도록 지도한 죄로 인해서 불교 교단으로부터 파문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론자께서는 그 악행을 자행한 승려가 다만 처벌을 받은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장에서는 그의 발언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 있는 것은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은 있다고 하는 이 목사의 발언은 불교의 그 어느 부분에도 불명예를 초래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목사께서는 춘다라고 하는 불교 승려가 불타에게 돼지고기를 제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춘다라고 하는 재가 신자가 수카라맛다바(sukara Maddava)라는 반찬과 함께 음식을 불타가 돌아가시기 전날에 대답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음식을 드신 것으로 인해서 불타가 병에 걸리게 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대덥을 받지 않았어도 그 이튿날은 불타께서 대열반에 드시기로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만 불타의 최후의 식사로서 기록되고 있을 따름이지, 불타가 이 식사로 인해서 병환이 났다고 말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불타가 다른 음식을 드셨다고 한다면 그 음식에 의해서 돌아가셨다고 이 목사님께서는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답변을 해 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상으로 목사님께서 반론한 것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아침에 말씀하신 전도사의 반론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삼귀의 문제, 구족계에 대한 논쟁 문제,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라 라마풋타라는 선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는 불타가 이미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그에게 귀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불타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전혀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바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는 불타의 죽음에 관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불타의 죽음은 3단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죽음은 번뇌의 죽음(Klesa Parinirvana)이며, 두 번째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Skandha Parinirvana), 세 번째 죽음은 불사리(붓다의 유골)의 죽음(Dhatu Parinirvana)인 것입니다.
첫 번째 죽음은 불타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우침을 성취했을 때였으며, 두 번째 죽음은 말라바(Mallava)왕국의 사알라(Sala)라고 하는 마을 숲 속에서 육체의 5가지 구성부분(색수상행식)이 끝났을 때, 즉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며, 세 번째 죽음은 불타의 사후 5천년 뒤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불타의 사후 5천년 후에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불타의 모든 사리가 그가 깨우침을 얻었던 인도의 보리수가 있는 곳으로 저절로 집결되어 생전에 불타의 육신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천신들에게 극히 짧은 시간에 법을 설하고 불사리 그 자신이 화장되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2500년 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때까지 불사리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불타가 완전히 죽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타가 이미 죽어 없어져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전도사의 의견은 결코 올바른 의견이 아닙니다.
그리고 불타께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타가 생존시와 똑같ㅇ이 선근공덕을 쌓아 불타을 안치하고 있는 사리탑에 공양하고 불상이 모셔저 있는 곳에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며, 이 같은 실천 행위는 불교 신도로서 극히 당연한 것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불타에 대한 존경심을 언제나 새롭게 하며 공양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자에게는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그의 마음속에서 늘 살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법(Dhamma)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경에 귀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불타의 가르침이며, 그 법은 불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실행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그것에 의해서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승가에 귀의한다는 함은 혀재 존재하고 있는 승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승가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승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리야(Ariya. 성스러운 성자)승가이며, 두 번째는 삼무티(Sammuti) 승가입니다. 아리야 승가라고 하는 것은 4가지 과를 증득한 수행승들을 가리키며, 삼무티 승가는 4가지 계율의 방법에 따른 구족계의 의식에 의해서 비구승의 한 사람이 된 자를 의미합니다.
승가에 귀의하는 우리들은 아리야 승가에의 귀의인 것입니다. 아리야 승가를 숭배하고 믿고 의지함으로써 우리들은 무한한 선근공덕을 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말에는 이상과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구족계에 관해서 전도사는 <라크리비키리나(Lakrivikirana)>라고 하는 신문에 게재되어 있던 구족계에 대한 논쟁을 인용했습니다.
이 논쟁의 참가자는 샴파(시암파)와 버어파의 두 명의 승려라고 전도사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존쟁에는 이 두 파 어느 쪽의 승려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논쟁에 참가한 그들은 가명으로 출석한 야심에 찬 이들이었습니다. 이 논쟁에 참가한 두 명의 가명의 승려가 거기에 참가한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참 구족계에 관한 대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어떤 야심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들의 그와 같은 계획을 증명해 달라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제가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족계에 관한 논쟁은 그곳에 참가한 두 명의 승려의 문제이지 우리 불교 전체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불교 전체의 명예를 손상시키려고 하는 것은 전도사의 빈약한 지식을 명확히 할뿐입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도사가 반론을 제시한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 카라마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밧데가마(Baddegama. 스리랑카 남부의 한 지방)와 이전에 행해진 다른 지방의 대론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여겨집니다. 그 당시의 다른 내용이 담긴 출판물을 지금 여기에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 한권을 기독교도들에게 전해 주면 그것에 관한 충분한 대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직도 약간 남아 있기 때문에 몇 말씀을 보충해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불타가 갖고 있는 천안의 지혜는 언제나 사물을 보는 지식이 아닙니다. 불타는 단지 그가 보길 원하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만 그의 지혜를 움직여서 그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불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물론, 우리들 육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예로서, 우리들 인간들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눈을 뜨고 있을 때에만 사물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눈을 가지고 있다해도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보이질 않는다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것만으로 우리들 인간들이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불타께서 성도후 알라라 칼리마와 웃다카라 풋타에게 설법하려고 했을 때는 불타 자신이 천안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어떤 천신이 그들이 죽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불타께 보고했습니다. 그때에 불타가 천안의 지혜를 발휘해서 두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느 세상에 다시 태어났는가까지를 통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생전시부터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설법을 하려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르 항상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지옥과 같은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타에게 그러한 지옥의 눈의 지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나쁜 일들, 예를 들어서 인간들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 혹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을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과 비유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괴로움은 불타에게는 없습니다. 언제나 일체 사물을 항상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불타는 항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항상 사물을 관찰할 수 있는 여호와의 지혜의 눈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필요로 할 때만 그 지혜를 발휘해서 관찰할 수 있는 불타의 지혜의 눈은 대단히 행복한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알라라 칼리마와 웃다카 라마풋타에 관한 문제는 이상으로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기독교인 친구들이시여!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기독교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주의 깊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성도들은 천지 창조자가 그 누구인가를 잘 모르고 계십니다. 그러한 증거가 기독교 성경 자신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1장 제2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물위에 떠 있어 운행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물 표면에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것도 창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지금 말씀드린 사실을 여러분들께서 확신할 수 있도록 중요한 증명을 해 보이겠습니다.
야자수 열매가 1년간 야자나무 위에서 매달려 있습니다. 이 야자수 열매 속에는 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 물에는 1년이 지나도 벌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야자 열매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놓으면 몇 일도 지나지 않아 벌레가 나고 맙니다. 구멍을 뚫지 않았을 때는 설혹 1년이 지나도 벌레가 나질 않았는데 왜 구멍을 뚫자마자 몇 일도 지나지 않아 벌레가 났을까요?
만약 야자수 열매에 뚫린 구멍에 공기가 통하지 못하도록 봉해 버린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결코 벌레가 생기질 않습니다. 물이라 하는 것은 대기의 공기와 통하게 되면 반드시 그곳에 미생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왜냐함ㄴ 공기, 불 그리고 물의 요소들은 상호 합성되면 그 무엇인가 미생물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물 위에 떠 있어 운행하신다"라고 기록한 성경의 저자는 다른 의미가 아니고, 만물이 탄생하는 원인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물은 공기, 불, 물의 세 가지 요소가 존재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천지의 창조자는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의 요소, 즉 공기, 불, 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의 구제자도 수호신도 이상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요소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보편적으로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편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처음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틀린 논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항상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기의 요소 속에서 불과 물이 항상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일체라고 말하는 것도 옳은 말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소의 명칭들도 기독교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인 것입니다. 또 이 세 가지 요소들을 그들의 하니님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Brahma), 비수뉴(Visunu), 마헤슈바라(Mahesvar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명칭은 어찌되었건 이것들은 모두 조물주인 것입니다. 이 외에는 조물주 혹은 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기독교의 신자들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금단의 나무 열매, 그 나무 열매를 먹는 것, 그리고 뱀이 아담을 속여서 과일을 먹게 하는 것, 과일 따먹는 아담을 처벌한 것등입니다. 만약 이러한 긋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신이라고 기독교 신자들은 결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는 것, 그리고 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라고 그들이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계시지 못한 이러한 것들을 지금 여기서 제가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금단의 나무 열매는 아담이며, 뱀은 성적인 음욕이며,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성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 열매를 먹는 이브에게 내린 처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임신과 출산이었습니다. 그녀가 받은 처벌 때문에 이브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의 그 괴로움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그 나무 열매를 먹은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성경 작성자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에 의해서 탄생된 것과, 아담과 이브의 성교에 의해 출산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는 이유로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처벌로서 부과한다고 정했을까요? 그것은 마치 스리랑카에 "호박 도둑은 그의 어깨에 남은 자국을 보면 안다"는 말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속담과 같이 현명한 사람들은 이브에게 가해진 처벌을 보고서 금단나무 그리고 뱀과 과일을 따먹은 의미를 충분히 히해가도 남을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 생장하고 있는 호박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어깨에 메고 운반하며, 표면이 하얀 맥분에 쌓여 있어서 만지면 하얗게 묻어난다; 옛날 가난한 농부가 식량 대용으로 하기 위해 호박을 심었는데 어느 날 도둑이 호박을 훔쳐가 버렸다. 농부는 마을 촌장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현명한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서 "호박을 훔친 사람은 그 사람의 어깨를 보면 금새 알 수 있다"고 말하자 어느 한 사람이 당황해서 자신의 어깨를 털었다. 이렇게 호박 도둑을 잡게 된 데서 유래한 속담)
기독교 신자 여러분! 당신들께서는 인간의 생식에 관한 성경의 우화를 이해하지 않은 채 창조신이 있다고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충분한 자료의 입증으로서 기독교인 여러분들께서는 지금까지의 환상에서 탈필 할 수 있을 것이며,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 인간들이 고뇌와 고통 속에서 구제 받기 위해서 신앙할 필요가 있는 종교가 아님을 적어도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 바입니다.
아직도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몇 분 남아 있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불교가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인가를 몇 가지만 더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최후를 장식하는 저의 견해이므로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더욱더 자기 자신들이 고차원적이며 정신적 양식인 일상생활의 중교문제에 대해서 재고해야 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진정 보람있는 삶을 보냈다고 자부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은 올바른 종교에 귀의하여 그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선근공덕을 쌓고 노력하지 않는 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교, 진리의 종교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컨데 황금의 장신구를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것을 사기 전에 황금 세공인에게 그 금이 순금인가 아니면 18금인가 등의 가치를 판단해 받은 다음에 사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나하면 그 가치를 모르고 18금을 순금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사고나면 손해를 볼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도 그 선택에 있어서 현인들에게 묻고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예전의 현인들은 이 지구의 대지와 같은 무한의 지혜와 선견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수행뿐만 아니라 세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학문, 기술, 예술등 각 분야를 완전히 습득하여 인망과 덕망을 겸비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인들은 예전의 현인들이 걸어온 발자취에 몇만 분의 일도 지혜와 덕망을 겸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날의 현인들이라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없는 모든 지혜와 덕망은, 그들이 이미 존재치 않으나 예전의 현인들이 남겨 두었던 우수한 저서들 속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들에 의해 기록된 주옥과 같은 저서를 보고서 진정한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들의 저서는 베다(veda), 푸라나(purana), 의학, 천문학등 지혜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에 저는 베다비야사(vedavyasa)라고 하는 현인에 의해 저술된 <바가바타푸라나(bhagavathapurana)>라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계문이 실려 있습니다.
"현대적인(이 문헌 서술 시대에서 본) 시대가 되면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미혹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불타라고 하는 성인이 쿠카테테스(kukatesu)라는 곳에 탄생할 것이다."
현 시대를 카리유가(Kariyuga)라고 하고 그 이전의 시대를 드바파라유가(Dvaprayuga)라 하며, 이 드바파라 시대에 생존했던 선인이 이것을 저술한 것입니다. 드비파라 시대의 선인이 위헤서 말씀드린 계문 속에서 현대적인 시대가 오면 현재 인도의 붓다가야라는 곳에 불타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가 성도하기 수천년 이전에 벌써 선인들이 불타의 탄생을 예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가바타푸라나>는 불교 관계의 책이 아닌 선인들의 말들을 기록한 저술입니다. 그러므로 불타의 출현을 예언한 것은 불교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종교의 선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선인들이 예언 한 것들 중에서, 이 세상에서 여호와라고 하는 창조신이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제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와 그리스도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육식을 좋아하는 자들이 기록한 것과 같이, 살해한 비둘기, 양, 염소, 가축등의 수를 기록한 성경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패된 성경을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 누구도 신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한 서양의 학자들도 선뜻 신아하려고 하지 않는 기독교를 왜 전통적인 불교국인 우리가 믿어야 합니까? 우리들은 이와 같은 기독교를 결코 신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기독교를 신앙했던 여러분들도 지금 당장 기독교를 멀리 던져 버리십시오.
그리고 의학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해와 같은 자비심으로써 고대의 선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과학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학은 고대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전해 오는 아류르베다를 의미함)
유명한 의학서적의 하나인 <바이삿자 칼파(Baisajja Kalpa)에 불교의 위대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계문에 의하면
"핏팔리(Pipphali), 바이사(Vasa), 부루(Bullu), 슌티(Sunthi), 카삼빌리야(Kasambiliya), 이 5가지 나무 열매및 약초를 푹 달여 마시면 기침병과 열병이 치료되는 것은 마치 불교를 실천해서 윤회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전적인 의학관계서의 고문에서도 불교의 수승한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외에 자연과학에 관한 고서에서도 불교의 수승한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천문학은 세계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고대의 성현들이 만든 천문학의 일부인 점성학에서도 그러한 점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점성학에서는 점성도로써 그 별의 위치를 보고 각 개인의 전생에서의 선악의 행위 여하에 의한 결과로서 현세에 그 사람의 인생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만약에 점성도에 토성이 출생좌에 위치하고 용의 머리가 사자와에 있으면, 이 사람은 전생에 그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도둑질을 해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며, 또 현세에서 죄를 짓고서 내세에 라우라바(Ranurava)라고 하는 지옥으로 가는 운명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증거로서도 (점성학에 의해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게는 전생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교리가 틀리지 않는 올바른 종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명 전생이 없다고 부정하는 기독교는 참 종교가 아닌 그롯된 종교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사쿠마라차리타(Dasakumaracarita)라는 시를 지은 당대의 시성 단딘(Dandin)의 저술인 <카비야다르샤(Kavyadarsa)>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말씀은 오직 진리뿐이며, 추호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교를 찬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행무상이라고 불타가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닌 분명한 진리이다." 라고 하며, 이것을 주석해서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멸하고 생한다는 진리는 불타의 가르침이다"라고 불교의 참 진리성을 찬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그 어느 종교보다도 수승한 종교임을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타 문헌에서도 얼마든지 증명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월등히 수승한 진정한 종교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으로서 불교와 기독교를 이해하시는 데는 충분한 자료와 논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기독교를 버리고 진정한 진리의 종교인 불교를 신앙하시고 실천수행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께서는 불교의 수미산설에 관해서, 세계를 항해하는 항해자가 수미산과 같은 거대한 산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수미산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사께서 말씀하듯이 우리들 인간의 육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금단의 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세계를 여행하는 탐험자들이 "금단의 나무"가 생식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한 일은 문헌에서도 소문에서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문헌이나 새 소식이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수미산이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논리는 성립되지 않았음이 명백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앞에서 저는 아트만(atman. 영혼)과 푸라마(prana. 생명)등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만, 그것은 특별히 어려운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 일상 생활 중에서 극히 일반적으로 사용했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의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참된 종교인 불교를 신앙하시어 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멀리 떠나 열반이라고 하는 안락한 세곙서 생활하도록 노력 정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는 바입니다.
모호티왓테 그나난다 스님의 대론이 끝나자 1만여 명의 불교, 기독교 신자들이 일제히 사두, 사두, 사두(Sadhu)라고 소리 높여서 제창했다. 어느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동에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불교인들, 기독교인들 그어느 쪽에서도 소동과 난동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평온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과 목사님이 청중들에게 정숙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군중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때 불교 신자들은 대단한 기쁨에 차서 집회에서 해산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불만이 끓어올라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한 기분으로 집회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