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小乘戒와 大乘戒의 兩立에 관한 問題

실론섬 2015. 10. 29. 01:08

小乘戒와 大乘戒의 兩立에 관한 問題

李 秀 昌(摩聖)/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강사

(이 글은 2006년 2월 한국불교학회 동계 Workshop에서 발표한 것이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소승계와 대승계의 차이점

Ⅲ. 대승계의 성립과 전개과정

Ⅳ. 대ㆍ소승계의 양립에 따른 문제점

Ⅴ. 중국과 한국의 계율전승

Ⅵ. 맺음말


Ⅰ. 머리말


필자는 ‘동화사 계율수행대법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한국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은 대승불교이지만, 계율은 부파불교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은 형식적으로는 「사분율」에 근거하여 구족계를 받고 있지만, 종단은 율장의 규정에 의해 운영되지 않으며, 승려 개인은 종헌ㆍ종법의 규제를 받고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계에서 『梵網經』의 보살계, 즉 十重四十八輕戒를 재가자들에게 설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이 법회의 토론과정에서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재가자를 위한 보살계, 즉 『優婆塞戒經』의 受戒品 제14에 나오는 六重二十八輕戒가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한국불교계에서 출가자가 「사분율」의 구족계를 받고, 다시 『범망경』의 보살계를 받는 것은 사상적으로 모순된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대승불교적 시각에서 소승계라고 폄하하는 「사분율」의 구족계와 대승계라고 자부하는 『범망경』의 보살계가 양립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현재 한국의 승려는 먼저 사분율의 구족계를 받고, 나중에 다시 『범망경』의 보살계를 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수계 전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원경 스님(송광사 전통강원 강사)은 “상식적으로 소승은 소승계를, 대승은 대승계를 호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 등 대승불교권에서는 왜 대ㆍ소승계를 모두 수지하는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 그러니까 출가교단의 수계 작법은 「사분율」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사상적으로는 『범망경』에 기초한 대승계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엄격히 분석해 본다면 소승(계)과 대승계 사이에는 분명한 이념적 차이에 따른 구분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틀 안에 두 이질적 체계를 섞어놓다 보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선종에서는 청규(淸規)로써 해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계율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소승계와 대승계는 사상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분율」의 구족계와 『범망경』의 보살계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나온 계율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왜 대승불교권에서는 소승계와 대승계를 함께 받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이 논문에서는 우선 소승계와 대승계의 차이점을 살펴보고, 대승계의 성립과 전개과정, 대ㆍ소승계의 양립에 따른 문제점, 그리고 중국과 한국의 계율전승에 대하여 차례대로 살펴볼 것이다.


Ⅱ. 소승계와 대승계의 차이점


현존하는 六部의 律藏은 각 부파에서 傳持해 온 것이다. 이를테면 ① 上座部의 「빨리율」, ② 法藏部의 「四分律」, ③ 化地部의 「五分律」, ④ 說一切有部의 「十誦律」, ⑤ 大衆部의 「摩訶僧祇律」, ⑥ 根本說一切有部의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등이다. 이 율장들은 각기 자기 부파의 교리와 사상에 맞도록 점차 改變되거나 增減된 것이다. 그래서 각 율장마다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율장은 모두 붓다가 직접 제정한 계율을 바탕으로 각 부파에서 전승해 온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은 부파불교의 율장에 언급된 戒와 律을 小乘戒 혹은 小乘律이라고 貶稱하였다. 이러한 폄칭 자제가 대승계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나위없다. 엄격히 말해서 현존 율장의 波羅提木叉는 聲聞(sāvaka, Sk. śrāvaka, 佛弟子)들이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菩薩戒의 반대 개념으로 聲聞戒 혹은 聲聞律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대승계의 반대 개념으로 소승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대승불교는 기존의 부파불교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살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대승불교를 보살의 불교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개념을 빼버리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만큼 ‘보살’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지키는 계를 대승계 혹은 보살계라고 부른다. 또한 대승불교의 보살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로 구분된다. 출가보살이 지키는 계를 출가보살계라 하고, 재가자가 지키는 계를 재가보살계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승계라고 하면, 이른바 大乘戒經이라고 일컫는 여러 경전에 수록된 계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대승계는 부파불교에서 전승한 여러 율장과는 그 성립 배경과 계통이 전혀 다르다. 원래 대승불교는 별도의 율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승계경에 나타난 대승계는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를테면 『菩薩地持經』의 四重四十二犯事, 「瑜伽師地論」의 四重四十三輕戒, 『優婆塞戒經』의 六重二十八失意戒, 『菩薩內戒經』의 四十七戒, 『梵網經』의 十重四十八輕戒, 『菩薩善戒經』의 八重四十八輕戒 등이다. 


이러한 대승계의 특징을 한마디로 三聚淨戒(trividhāni śīlāni)라고 할 수 있다. 삼취정계란 三種淨戒ㆍ三聚淸淨戒ㆍ三聚戒라고도 하는데,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녀야 할 세 가지 계를 말한다. 이른바 攝律儀戒ㆍ攝善法戒ㆍ攝衆生戒가 그것이다. ① 攝律儀戒란 악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한 모든 금지 조항을 말한다. ② 攝善法戒란 선행을 실천하는 계를 말한다. ③ 攝衆生戒(혹은 饒益有情戒)란 선을 행하면서 중생에게 이익을 베푸는 계를 말한다.


대승불교권에서 출가자를 위한 보살계는 예로부터 두 가지가 널리 유행되었다. 하나는 『梵網經』에 설해진 十重四十八輕戒(多羅戒本)이고, 다른 하나는 『菩薩地持經』(瑜伽論의 本地分中菩薩地) 등에 설해진 四重四十三輕戒(達磨戒本)이다. 이 두 가지 보살계 중에서 현재 한국불교계에서는 『범망경』의 보살계를 채택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 승단에서는 부파불교에서 전승해 온 성문계(소승계)와 대승불교에서 전승해 온 보살계(대승계)를 동시에 받고 있다. 그런데 “성문계와 보살계는 상호 배치되는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성문계와 보살계는 어떤 차이점이 있기에 그와 같은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 목정배 교수는 소승계와 대승계의 相違點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⑴ 소승계는 본래 자기의 수행해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自利的이다. 이것에 반하여 대승계는 보살자비의 정신을 주로 하므로 利他的이다. 따라서 同一條文에 대해서도 이것을 지키는 정신적인 동기가 다르다.


⑵ 소승계는 소극적으로 止惡을 주로 하지만, 대승계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行善을 주로 한다. 소승계는 대승계에서 말하는 攝律儀戒이며 攝善法戒, 攝衆生戒가 아닌 것이다.


⑶ 소승계는 형식적 條文主義이며, 대승계는 정신적이다. 소승계는 身ㆍ口를 주로 하지만 대승계는 意를 주로 한다. 이 점에서 대ㆍ소승계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소승계에서는 四波羅夷의 하나를 범하면 비구로서의 자격을 잃고 승단에서 추방되지만, 대승계에서는 가령 살인을 하고 음욕을 행하였어도 그 동기가 자비심에 있다면 계를 범하였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공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승경전에 難火猛惡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보살이 그 부인이 되어 婬을 행하는 것을 설명함과 같은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⑷ 소승계는 특정한 사정을 緣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隨犯隨制). 따라서 그 사정의 변화에 수반하여 계율에도 변동할 필요가 생겨 끊임없이 開遮가 생기기에 이르렀지만, 대승계는 특수사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보편적이며 時處位의 여하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 불제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이것은 형식주의와 정신주의의 차이에서 생긴 당연한 결과이다.


⑸ 소승계는 수계의식 때 三師七證이라는 실제의 僧을 요구하지만, 대승에서는 佛菩薩이 戒師가 되고 阿闍梨가 되어 수계하는 것이며, 또 소승계에서는 계율이 僧의 조건이 되므로 하나의 계라도 어기면 엄밀하게 말해서 僧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다. 특히 四波羅夷를 범하면 추방된다. 그러나 대승계에서는 一戒를 얻으면 약간의 破戒가 반드시 불제자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비교 자체가 대승계 우위의 시각에서 나온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다만 위 인용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승계와 대승계는 사상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계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구족계의 僧殘法에는 摩觸女人戒가 있는데, 이것은 비구들이 여인의 피부에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이 계가 있기 때문에 비구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여인의 피부에 접촉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물에 빠진 여인이 있는 경우, 여인을 구조하려고 한다면 여인의 피부를 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 결국 계를 犯하는 것이 된다. 구족계에서 승잔죄는 무거운 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三聚淨戒에 따르면, 摩觸女人戒보다도 더 무거운 四波羅夷에 해당되는 不婬戒를 범했다할지라도 중생에게 이익을 베풀기 위한 것이라면 破戒가 아닌 적극적인 善行 혹은 慈悲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승계와 대승계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계율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르다. 그러면 왜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계를 대승불교권에서는 동시에 수지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대승계의 성립과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Ⅲ. 대승계의 성립과 전개과정


대승불교의 계율은 대승불교 興起의 源流와 깊은 관계가 있다. 즉 敎團史的으로 대승불교가 어떻게 성립하여 전개되어 왔는가를 알면, 대승불교의 계율이 어떻게 성립하여 전개되어 왔는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대승불교의 보살이 어떤 계를 지키고 있었는가를 알면, 대승불교 교단의 실체를 가름해 볼 수 있게 된다. 대승불교의 사상과 그것을 실천하는 교단의 계율은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흥기의 원류와 그 발전 단계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대승불교는 어느 한 부류가 주도적으로 전개한 사상운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승불교는 여러 부류에서 일어난 대승적 생각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사상체계로 정리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오끼모또 가쯔미(沖本克己)도 “대승불교의 원류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사상운동의 총칭이다”라고 말했다.


초기대승불교의 계율

초기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어떤 계를 지녔을까? 초기대승경전에 속하는 『반야경』과 『십지경』 등에 의하면 초기의 대승불교도들은 十善戒를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 『아함경』에서 ‘十善’은 ‘十善業道(dasa kusalakammapathā)’라고 불렸지만 아직 戒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십선업도’는 ‘십악업도’와 함께 도덕의 덕목ㆍ선악의 기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십선도가 초기대승불교에서는 戒波羅蜜의 戒로써 중요시되었다. 즉 초기대승불교에서는 아함의 十善道를 十善戒로 전환시킨 것이다.


처음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재가자 중심이었지만, 곧바로 형식적으로나마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기대승불교에서의 ‘출가보살’은 부파불교의 율장 규정에 비추어보면, ‘출가’라 하기에는 곤란하며, ‘재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초기대승불교 시대에는 부파불교의 ‘聲聞僧伽’와는 별도로 대승불교의 ‘菩薩敎團’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으나, ‘部派敎團’과 ‘菩薩敎團’ 사이에는 사상적ㆍ시각적 차이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十地經』의 주석서로 알려져 있는 「十住毘婆沙論」에 의하면, 대승불교의 출가집단은 ‘聲聞僧伽’와는 별도로 ‘보살가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보살가나’에 속한 출가보살의 종교적 실천은 성문의 계와 율, 즉 250계와 다른 ‘보살가나’의 독자적인 波羅提木叉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바라제목차가 聲聞律의 戒經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보살가나’도 和尙(upādhyāya)과 阿闍梨(ācārya)제도를 갖고 있었으며, 바라제목차에 따라 說戒ㆍ布薩ㆍ安居ㆍ自恣 등도 실시되었고, 法臘에 의해 상ㆍ하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華嚴經』 전체에 나타난 보살계는 十善戒이지만, 『화엄경』 안에서도 보살계는 좀 더 발전된 개념이 도입되었다. 화엄의 계는 「離世間品」의 十種戒와 十種淸淨戒, 「十無盡藏品」의 十種戒藏, 「十地品」의 十善道 등이다. 이 가운데 십종계의 두 번째에 ‘聲聞ㆍ緣覺地를 여의는 戒’ 혹은 ‘二乘地를 멀리 여의는 계’가 있다. 이것은 분명히 보살이 성문과 연각의 교리와 수행을 버리는 결의를 지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戒란 결의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만일 보살이 성문의 구족계를 수지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십종계 가운데에 열거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  「이세간품」에 언급된 계는 성문의 계와는 다른 내용이었을 것이다. 


같은 『화엄경』 안에서도 「淨行品」에서는 대승보살도 성문의 250계를 받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테면 출가를 기술한 뒤에, 비로소 화상을 청하는 것을 설하고 다음에 구족계를 받는 것을 설하고 있다. 이 출가와 구족계를 구분하는 점도 성문의 수계 순서와 같다. 『60화엄』ㆍ『80화엄』 모두 ‘구족계’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티베트역에서도 bsñen par rdsogs pa, upasampanna로 되어 한역과 일치한다. 『화엄경』의 「정행품」은 한역 네 가지와 티베트역을 더하여 다섯 가지 번역이 현존하고 있다. 같은 「정행품」에서도 내용적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는 계율의 면에서 대승교단은 점차 부파교단의 律에 동화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중기대승불교의 계율

중기 이후의 대승경전은 크게 如來藏系 경전과 唯識系(瑜伽系) 경전으로 나눌 수 있다. 여래장계의 대표적인 경전인 『涅槃經』, 유식계인 『解深密經』ㆍ『菩薩善戒經』ㆍ『菩薩地持經』ㆍ『瑜伽師地論』의 ‘本地分中菩薩地’ 등에 대승불교의 계율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러한 중기대승경전에 나타난 보살계의 특징은 한마디로 三種淨戒라고 할 수 있다. 이 삼종정계 사상은 중국ㆍ한국ㆍ일본의 대승계 사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삼종정계는 이미 『십지경』에 그 선구가 보인다. 『화엄경』에 “능히 스스로 삼종의 계법을 구족하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삼종의 계를 구족하게 한다.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三聚淨戒에 안주하게 한다”고 했다. 또한 『해심밀경』에 “계에 삼종이란 첫째 轉捨不善戒, 둘째 轉生善戒, 셋째 轉生饒益有情戒이다” 『해심밀경』의 다른 번역인 『深密解脫經』에는 “離諸惡行戒, 修諸善行戒, 利益衆生戒”라고 했다. 이것이 삼종정계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라고 한다. 원래 『해심밀경』과 『화엄경』은 사상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화엄경』의 삼종정계가 더 원형이라고 한다. 『화엄경』 「십지품」에서 최초로 십선계를 삼취정계의 형식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삼취정계’의 용어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 말은 「십회향품」에서 비로소 사용되고 있다. 즉 진역 『화엄경』 권18 「금강당보살십회향품」에서는 ‘種戒, 三種戒法’, ‘三種淨戒’, ‘三聚淨戒’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삼종정계 사상은 「유가사지론」에서 절정을 이룬다.  「유가사지론」의 삼종정계 사상은 같은 계열인 『보살선계경』과 『보살지지경』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유가사지론」은 두 경전보다 뒤에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 언급된 삼종정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보살의 일체계인가. 일컬어 보살계는 요약하면 2종이 있으니, 첫째는 在家分戒, 둘째는 出家分戒이다. 이것을 일체계라고 이름 한다. 또 곧 이 재가와 출가의 二分淨戒에 따라서 간략히 3종으로 설한다. 첫째는 律儀戒, 둘째는 攝善法戒, 셋째는 饒益有情戒이다. 율의계는 모든 보살이 수지해야 할 七衆의 別解脫律儀이다. 곧, 苾芻戒(比丘戒), 苾芻尼戒 (比丘尼戒), 正學戒, 勤策男戒(沙彌戒), 勤策女戒(沙彌尼戒), 近事男戒(優婆塞戒), 近事女戒(優婆夷戒)이다.


위에서 인용한 「유가사지론」 삼종정계의 제1 율의계의 해석은 파격적이다. 여기서는 율의계를 七衆의 戒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보살계에 성문계(소승계)를 포함시킨 것이다. 즉 소승계를 보살계 속에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瑜伽戒의 특징이다. 물론 「열반경도」 소승계를 섭취하고 있지만, 「유가사지론」의 ‘보살지’에서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보살계 속에 정착시키고 있다. 이 점이 가장 특이한 사항이다. 


『화엄경』의 섭율의계와 「유가사지론의 율의계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화엄경』의 섭율의계는 十善戒를 내용으로 할 뿐, 아직 성문의 구족계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瑜伽師地論」의 율의계는 성문의 구족계를 수용하고 있다. 똑같은 ‘삼취정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계의 내용과 입장이 전혀 다르다. 『화엄경』은 「유가사지론」보다 먼저 성립된 것이다. 「유가사지론」은 다른 초기대승경전보다 약 300년 뒤에 성립되었다. 이 「유가사지론」에서는 『화엄경』의 십선계를 성문의 七衆戒로 대체하였다. 즉 ‘섭율의계’에 성문의 구족계를 배당한 것이다. 이것은 ‘大乘敎團의 部派敎團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대승교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오끼모또 가쯔미(沖本克己)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대승불교도 인도라는 토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유가사지론」의 삼취정계에 따르면, 보살은 율의계에서 섭선법계로, 다시 요익중생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율의계는 소승계일 뿐 대승계가 아니기 때문이며, 섭선법계와 요익유정계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보살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七衆의 율의계는 대승계에 오르기 위한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율사들도 이러한 유가계의 해석에 따라 “소승계는 대승계에 오르는 사다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분율」의 구족계는 출가자가 되기 위한 요식행위 혹은 형식에 지나지 않고, 대승의 출가보살은 「유가사지론」의 보살계나 『범망경』의 보살계를 수지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Ⅳ. 대ㆍ소승계의 양립에 따른 문제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가사지론」의 삼취정계는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문계와 보살계는 같은 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후에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을 비교해 보면 서로 모순되거나 상충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혜능 스님은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43위범의 제5는 타인이 신심으로 금ㆍ는ㆍ마니ㆍ진주ㆍ유리 등 훌륭한 재물을 공양하면 보살은 그것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분명히 성문의 250학처와 모순된다. 250계 중 사타법에는 ‘금ㆍ는 보물을 받아서 비축하지 말라’라는 계가 있어서 금ㆍ는 보물을 받아 이것을 소지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두 계를 동시에 수지하는 것을 맹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보살계 제8조에는 보살과 성문에게 일치하는 계도 있으나 일치하지 않는 계도 있다. 성문이나 보살도 自利를 꾀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합치하는 계도 있다. 그러나 이타를 꾀하는 점에서는 성문과 보살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보살과 성문은 필연적으로 다른 학처를 가진다. 보살은 타인의 선업의 달성을 돕기 위하여 보시력이 있는 사람의 처소에서는 많은 의복을 구하고, 많은 발우를 구하고, 실을 구하여 친척이 아닌 이에게 짜게 하고, 많은 좌와구를 구하여 비축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옷을 가지는 것, 여러 벌의 발우를 가지는 것, 실을 구해서 가지는 것, 친척이 아닌 이에게 옷을 짜게 하는 것, 많은 좌와구를 가지는 것 등은 모두 250계의 사타법에서 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보살의 학처를 지키겠다는 맹세와 250계를 지키겠다는 맹세는 모순되는 것이다.


또 보살계 제9조에는 악인이 무간업을 지으려고 할 때에는 그 악인을 죽여도 좋다고 하고 있다. 또한 유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망어, 이간어, 추악어, 기어 등을 하여도 좋다고 하고 있다. 또 재가보살은 자만심을 가지면서 비범행을 하여도 좋다고 한다(다만 출가 보살에게는 이것을 금하고 있다). 이와 같이 특정한 경우라 하더라도 살인, 도둑, 망어, 비범행 등을 허락하는 것은 250계에는 없다. 특히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살인을 허락하는 것은 율장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다만 이 조문은 지지경에는 없다). 이것으로 보아도 성문율과 보살계가 내용적으로 서로 거리가 있는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계라는 것은 규칙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고자 하는 결심과 맹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상호 배치되는 내용을 가지는 성문계와 보살계를 동시에 받는 것은 불가능함은 분명하다. 설령 받는다하더라도 내실적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것이 실천의 지도 원리가 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성문계와 보살계를 병행하여 드는 유가론의 방법이 지극히 관념적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혜능 스님은 성문계와 보살계가 양립할 수 없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내용을 간추려 소개할 수도 있지만, 혜능 스님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율사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글을 한 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였다. 혜능 스님이 지적한 것 외에도 많은 성문계와 보살계는 사상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이 때문에 예전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인도에서 저술된 계율 관련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보살계를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 바로 『梵網經』과 『菩薩瓔珞本業經』이다. 이 두 경전에 나타난 계율사상은 중국ㆍ한국ㆍ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범망경』과 『보살영락본업경』은 모두 중국에서 찬술된 僞經임이 이미 밝혀졌다. 『범망경』과 『보살영락본업경』은 『화엄경』과 사상적으로 관련이 있는 경전이다. 먼저 『보살영락본업경』에 나타난 보살계 사상부터 살펴보자. 


“이제 모든 보살을 위해 一切戒의 근본을 맺는다. 소위 三受門이다. 攝善法戒는 소위 8만4천의 법문이며, 攝衆生戒는 소위 慈悲喜捨의 다른 모습이니 일체중생은 모두 안락을 얻는다. 攝律儀戒는 소위 十波羅夷이다.”   


또한 “계에는 三緣이 있다. 하나는 自性戒, 둘은 修善法戒, 셋은 利益衆生戒이다.” 이 외에도 이 경에서는 三種淨戒思想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섭율의계를 十波羅夷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바라이란 ① 불살(不殺), ② 불도(不盜), ③ 불음(不婬), ④ 불망어(不妄語), ⑤ 불설죄과(不說罪過), ⑥ 불고주(不沽酒), ⑦ 불자찬훼타(不自贊毁他), ⑧ 불간(不慳), ⑨ 부진(不瞋), ⑩ 불방삼보(不謗三寶) 등이다. 이것은 구족계의 살(殺)ㆍ도(盜)ㆍ음(婬)ㆍ망(妄)과 공통되며, 十善道를 포함한 모든 계와도 공통된다. 특히 섭율의계에 성문의 구족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 ?범망경? 보살계의 섭율의계는 순전히 대승의 율의계로 지목되고 있다. 


그리고 이 十波羅夷는 『梵網經』의 십바라이와 동일하다. 따라서 두 경전은 보살계 사상에 있어 상호 밀접한 내적 연관 관계에 있으며, 두 경전을 합함으로써 삼종정계의 이념과 그 구체적 學處(계율)인 十重四十八輕戒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 두 경전에 나타난 보살계 사상은 『화엄경』의 대승계 사상을 再興한 것이며, 「유가론」의 삼취정계와는 그 내용이 다르다. 현재 한국불교계에서는 이 『범망경』의 보살계를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범망경?은 인도 찬술이 아니고 중국에서 만든 위경이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大野法道는 그의 저서 「大乘戒經の硏究」에서 『범망경』이 중국에서 찬술된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① 形相不整, ② 用語奇異, ③ 中國思想, ④ 史料不信, ⑤ 성립시기 등이다. 


『범망경』에 나타난 戒學의 基調는 『열반경』ㆍ『화엄경』ㆍ『보살지지경』ㆍ『반야경』 등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계율의 조목[戒條]인 十重禁界는 『보살선계경』ㆍ『우바새계경』 등에서, 四十八輕戒는 『菩薩內戒經』ㆍ『仁王般若經』을 비롯한 律法을 總攝하고, 다시 독자적으로 약간을 가미하여 대승계의 정신을 드높이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범망경』의 보살계에서는 大乘經律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48경계 중 12계에서 대승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 소승계와 상충하는 네 가지 戒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8 背正向邪戒(背大向小戒) : 대승의 올바름에 배반하고 外道小乘의 잘못됨에 향하는 것을 금함. 제15 法化違宗戒(僻敎戒) : 대승의 법으로써 가르쳐야 할 것에 宗이 달라서 外道小乘의 법을 가르치는 것을 금함. 제24 怖勝願劣戒(不習學佛戒) : 대승의 수승함을 두려워하고, 소승의 열등함에 따르는 것을 금함. 제34 退菩提心戒(暫念小乘戒) : 보리심이 후퇴하는 것을 금함(소승계를 잠시라도 생각하는 것을 금함).


위 계율들에 의하면, 대승의 보살은 소승의 가르침을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전개되어 오는 과정에서 대승의 보살이라고 해서 聲聞律이나 阿含과 阿毘達磨를 완전히 배척한 것은 아니다. 「십주비바사론」에 따르면, 출가보살 중에는 持律者ㆍ讀修多羅者ㆍ讀摩多羅迦者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승보살이지만 부파교단의 律ㆍ經ㆍ論의 전문가들이었다. 실제로 「십주비바사론」에서는 초기경전에 해당하는 아함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으며, 아함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범망경』에서는 초기대승불교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聲聞의 가르침과 聲聞戒(소승계)를 철저하게 배척하고 있다. 그리고 「유가사지론」에서는 섭율의계에 구족계를 포함시켰지만,  『범망경』에서는 섭율의계에 十重戒 즉 十波羅夷를 포함시켰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분율」의 구족계와 『범망경』의 보살계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범망경』의 보살계에 충실한다면, 아함이나 아비달마를 배워서는 안 되며, 위빠사나 수행 등도 행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현재 臺灣에서는 『범망경』의 보살계를 버리고, 「유가사지론」의 보살계를 채택하고 있다.


Ⅴ. 중국과 한국의 계율전승


중국ㆍ한국ㆍ일본불교에서는 대승보살이라 하더라도 출가하여 비구가 될 때에는 성문과 똑같은 具足戒(upasampadā)를 받아야 비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道宣(596-667)의 「四分律行事鈔」에 있어서 “律儀의 一戒는 성문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말에 의해 단적으로 보여 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ㆍ한국ㆍ일본불교에 이러한 인식이 있었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며, 또 도선이 이렇게 말했던 것은 玄奘(600-664)이 번역한 「유가사지론」의 ‘삼취정계’에 대한 설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한 「大智度論」에서도 출가보살은 비구ㆍ비구니임을 나타내는 문장이 발견된다. 즉 “보살에게는 2종이 있다. 혹은 출가, 혹은 재가이다. 재가보살은 모두 우바새ㆍ우바이 가운데 존재한다. 출가보살은 모두 비구ㆍ비구니 가운데 존재한다고 설한다. 지금, 무엇 때문에 별도로 설하는가.” 이러한 문헌들의 영향 탓인지, 중국불교에서는 옛날부터 계율에 관해서는 대승과 소승 사이의 구별은 없다고 보고 있었다. 중국불교에서 대승의 출가자가 부파불교의 율에 의해 구족계를 받는 것이 어느 때부터 행하여졌는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인도의 대승불교도 이와 같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인도불교는 중국과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李智冠 스님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 불교가 전래(67)된 이후 최초의 수계는 漢明帝永平14년(71)에 개최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三師二證(변방은 5인 이상의 비구가 있으면 구족계를 설할 수 있다는 규정에 의함)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재가자는 三歸依와 五戒만 받고, 출가자는 沙彌十戒만 받았다. 그 후 약 1백년까지도 비구계를 받는 제도는 정착되지 않았다. 중국불교에서 최초로 靈帝의 建寧1년(168)에 北天竺에서 支法領ㆍ支謙ㆍ竺法護ㆍ竺道生ㆍ支婁迦讖 등 다섯 스님이 漢나라에 들어오면서 三師二證의 조건이 갖추어져 比丘戒를 授受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구니계는 三師二證으로 줄 수 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수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漢末 魏初(220년 전후)에 이르러 東天竺國으로부터 두 비구니가 長安에 도착하여 보니, 비구니들은 비구 처소에서 五戒와 十戒만 받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본국으로 돌아가 15명의 비구니를 모시고 오는 도중 5명이 죽고 10명이 魏나라에 도착하여 비구니계를 설했다. 인도비구니로부터 수계한 후 다시 吳나라 비구의 三師七證 앞에서 다시 수계[二重受戒]하였으니, 이것이 중국불교에 있어 二部僧授戒法會의 始初라고 한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인도의 부파불교와 대승불교가 뒤섞여 들어왔다. 다시 말해서 두 가지 형태의 불교가 함께 전해진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불교에서 부파교단의 전통에 따라 인도의 승려를 초청하여 三師二證을 갖춘 뒤 여법한 수계 작법에 의해 구족계를 받은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大乘戒經에 나타난 보살계를 수지한 스님들이었을 것이다. 


전자의 부류는 가능한 한 인도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중국에 이식하고자 했을 것이다. 반면 후자의 大乘戒經에 의한 보살계를 수지한 부류도 나름대로 출가 수행자의 신분을 보장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범망경』이 역출된 이후에는 『범망경』에 의한 보살계를 수지한 사람들은 「사분율」ㆍ「십송율」 등에 의한 구족계를 소승계라고 폄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소승계를 받지 말라고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받았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도 구족계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百濟의 敎學은 謙益(526년 入竺)의 律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彌勒佛光寺 事蹟에 의하면, 謙益은 제28대 聖王(523-553) 4년(526)에 律을 구하러 海路로 중인도 常伽那大律寺에 이른다. 그곳에서 5년간 梵文을 익힌 뒤 梵僧 倍達多 三藏과 함께 梵本 ‘阿毘曇藏ㆍ五部律文’을 갖고 귀국하였기 때문에(531), 王은 그들을 맞아 興輪寺에 있게 하고, 국내 名僧 28人을 불러 함께 律部 72卷을 번역케 한다. 이에 曇旭과 惠仁은 ‘律疏’ 36권을 지어 바치니 王은 ‘毘曇ㆍ新律序’를 지어서 台耀殿(태요전)에 모시고, 剞劂(기궐)하고자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왕이 薨(훙)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謙益이 인도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五部律은 小乘 20部派 중의 ① 說一切有部(Sarvāstivādin) ② 法藏部(Dharmaguptaka) ③ 大衆部(Mahāsaṅghika) ④ 化地部(Mahīśāsaka) ⑤ 飮光部(Kāśyapīya)의 5부에 전해지는 律藏(Vinayapiṭaka)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러한 五部律의 梵本이 당시의 백제에 전부 齎來(재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大書特筆할 만한 일이다. 중국에서도 아직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五部律 전부가 5세기 초에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겸익은 그에 그치지 않고 다시 백제승 28인과 함께 律部 72권을 번역하였다. 72권이라는 분량으로 봐서 五部律 전부가 아니라 그 중의 어느 한 부(有部?)의 것이 번역되었을 것으로 본다. 거기에 다시 曇旭과 惠仁이 律疏 36권을 짓고, 聖王이 新律序를 지었다는 것은 실로 警嘆을 금할 수가 없다. 중국에서 ‘律宗’이 성립하는 것은 唐 道宣(596-667)이 終南山에서 「四分律」을 講說하고 저술하는 데에서(624-) 시작되는데 겸익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律學은 그에 앞서기 1세기에 가까운 것이다. 중국을 훨씬 능가하는 백제의 이러한 律學은 하나의 學派를 상정하기에 충분하다. 謙益은 그러한 ‘百濟律宗의 鼻祖’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의 교학은 謙益의 律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현상을 新羅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智明(생몰년 미상)은 眞平王 7년(585) 陳에 들어갔다가 同王 24년(602) 入朝使와 함께 귀국하는데, 王은 ‘그의 戒行을 존중하여 大德을 삼고’ 뒤에 다시 ‘大大德을 加하였다.’ 眞平王이 智明을 특히 그렇게 尊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술로 「四分律羯磨記」(1권ㆍ失)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율장이 번역되기 시작하여 梁代에까지 주로 행해진 것은 有部의 「十誦律」이었고 나머지는 별로 행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受戒作法, 즉 羯磨(Karma)만은 「四分律」(法藏部)에 의했던 것이니, 당시에 受戒作法에 관한 傳譯으로는 「四分律雜羯磨」(1권, 曹魏 唐僧鎧譯?)와 「四分律羯磨」(1권, 曹魏 曇諦譯)가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智明은 바로 그런 「四分律羯磨」(1권)에 註記를 달고 있는 것이다. 眞興王 5년(544) 興輪寺의 落成과 더불어 新羅人의 출가가 허용된 이래 受戒羯磨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智明은 그런 문제에 學的인 뒷받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智明을 이어 眞平王 11년(589) 陳에 들어갔다가 그보다 2년 전에, 즉 同王 22년(600)에 귀국한 圓光도 戒學에 밝았다. 貴山과 箒項(추항)이라는 두 젊은이가 그에게 ‘終身의 誡로 삼을 만한 一言’을 구하였을 때 圓光은 ‘世俗五戒’를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圓光은 梵網菩薩戒에 특히 관심이 깊었다.


智明의 四分律學과 圓光의 이러한 大乘戒 정신을 아울러 계승한 것이 慈藏의 律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慈藏이 설한 것은 菩薩戒本(梵網菩薩戒로 생각됨)이므로 智明이 「四分律」에 의한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는 圓光의 菩薩戒 정신을 이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慈藏의 律學을 大乘戒 一色의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十誦律木叉記」(1권ㆍ失)와 「四分律羯磨私記」(1권ㆍ失)의 저술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율학은 智明의 四分律學과 圓光의 菩薩戒 정신을 함께 계승하여 행한 것이라고 표현함이 낫다.


한편 圓勝은 慈藏에 앞서 唐 貞觀(627-649) 초에 入唐하여 慈藏과 함께 귀국하여 律部의 弘通을 도운 사람이다. 圓光과 慈藏이 梵網菩薩戒를 신라사회에 심으려고 하였지만, 아직 그들에게는 『梵網經』에 관한 저술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圓勝에게는 「梵網經記」(1권ㆍ失)의 저술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다시 「四分律羯磨記」(2권ㆍ失)와 「四分律木叉記」(1권ㆍ失)의 저술이 있다. 여기서 圓勝의 「四分律木叉記」(1권)의 존재는 무엇을 뜻하는가. 戒相은 「十誦律」에 의해 밝히고 受戒는 「四分律」에 의한다는 것은 不合理하여, 어느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이 작업을 최초로 행한 사람은 北魏의 法聰이었고 北齊의 光統律師 慧光(468-537)에 이르러 마침내 「十誦律」은 「四分律」로 代置되기에 이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의 敎學도 律學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百濟의 율학이 전적으로 小乘律에 의했다면, 신라는 小乘律과 大乘菩薩戒를 함께 受持했다는 두드러진 특색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三國鼎立이라는 당시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치열한 정복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大乘菩薩戒와 같은 적극적인 戒律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저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신라의 그런 菩薩戒사상을 알아볼 수 없음이 유감이다. 다만, 元曉(617-686)의 계율관계 저술로 「梵網經菩薩戒本私記」(卷上)와 ?菩薩戒本持犯要記?(1권)가 현존하고 있어, 이를 통해 그런 사상 傳承의 一端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지관 스님은 고려 말부터는 受戒記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고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한국불교의 구족계의 전통(三師二證 혹은 三師七證에 의한 수계갈마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전승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지금과 같이 구족계를 새로 받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近代律風振作의 中興主인 慈雲律師의 誓願과 노력으로 1980년 宗團單一戒壇傳戒와 비구니의 二部僧授戒制度가 完備ㆍ復元되었다. 그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구족계를 전수해 왔다고 하지만 불명확하다. 그래서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이제는 전 세계의 불교가 원래의 초기불교 교단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만큼 승가의 계율 정신이 피폐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Ⅵ. 맺음말


대승불교는 기존의 부파불교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살이라고 불렀지만, 이들은 불탑신앙과 불전문학을 주도한 재가자들이었다. 이들은 부파불교의 계율 전통을 거부하고 십선계를 지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파교단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하나의 교단으로 성장하면서 자연적으로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의 ‘출가보살’은 부파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재가’의 범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기대승불교에 이르면 출가자의 위치가 재가자보다 월등하게 향상된다. 출가보살이 교단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대승의 출가보살들도 성문의 구족계를 받아들였다. 인도라는 토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학자들은 ‘대승교단의 부파교단화’라고 부른다. 요컨대 대승불교의 초기에는 소승계를 배척했지만, 중기에는 다시 소승계를 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재가자 중심의 교단에서 출가자 중심의 교단으로의 복귀 혹은 회귀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도 대승불교의 전통이 일부 중국에 전해져 대승불교권인 중국ㆍ한국ㆍ일본불교에서는 대승보살이라 하더라도 출가하여 비구가 될 때에는 성문과 똑같은 구족계를 받아야 비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중국에서 「사분율」을 중심으로 終南山에서 南山宗(律宗)을 개창한 道宣(596-667)의 저서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도선은 玄奘(600-664)이 번역한 「유가사지론」의 삼취정계에 기초하여 율종을 일으켰기 때문에 소승계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권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것은 상좌불교의 출가자들처럼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구족계를 받아야 출가자 즉 비구ㆍ비구니로서의 戒體가 형성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문계와 보살계는 같은 장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후에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는 모순되거나 상충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승계와 대승계, 혹은 성문계와 보살계는 양립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율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현재 한국불교 승단에서는 「사분율」의 구족계를 먼저 받고, 나중에 다시 『범망경』의 보살계를 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다. 「사분율」의 구족계는 부파불교에서 전승해 온 성문계(소승계)이고, 『범망경』의 보살계는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대승계이다. 특히 『범망경』의 보살계는 「유가론」의 보살계와는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 많은 차이점이 있다. 이를테면 대승계의 특징인 三聚淨戒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르다. 즉 「유가론」의 섭율의계에는 구족계가 포함되지만, 『범망경』의 섭율의계에는 구족계가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분율」의 구족계와 「유가론」의 보살계도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양립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이 있다. 더욱이 중국에서 찬술된 僞經인 『범망경』의 보살계에서는 성문의 가르침 혹은 소승계를 전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나 여러 측면에서 보더라도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분율」의 구족계와 『범망경』의 보살계는 양립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