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지정한 일제의 간계
실론섬
2015. 11. 16. 12:35
조 훈철/전 동국대학교박물관 선임연구원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포석정에 가면 포석정이란 정자가 없다. 다만, 입장료 1,000원을 내고 들어가 보면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다는 ‘유상곡수’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신라 55대 임금 경애왕이 왕비와 궁녀들과 함께 이곳 전복 모양의 물길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잔치를 벌이고 놀다가 후백제 견훤 군대의 침입을 받고 피습된 장소라는 것이다. 결국, 포석정은 신라 멸망의 상징이란 오명만 덮어쓴 채 커다란 고목나무와 함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여 보물, 고적 등으로 지정했다. 보물 1호는 남대문, 보물 2호는 동대문이었다. 그리고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지정했다. 사적이 아니라 고적인 것은 그저 오래된 유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포석정은 고적 1호가 되었을까?
“적이 쳐들어 와 경주가 함락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경애왕은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까 너희 조선인들은 나라가 함락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주연에 빠져있는 민족이니 국가를 운영할 자질이 부족하다. 그러니 식민지로 살 수 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을 편 계략이 포석정 고적1호에 숨겨진 비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삼국사기’였다. 저자 김부식은 집필과정에서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신라의 멸망을 당연시하는 표현들을 사용했다. 특히 ‘경애왕편’을 언급할 때 ‘유포석정(遊鮑石亭)’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때 사용된 ‘유(遊)’자를 ‘놀러갔다’라고 번역을 한 결과, 포석정은 오늘날까지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는 놀이터로 둔갑이 되어 전해내려 오게 된 것이다. 사실 그 문장 앞에 나오는 927년 음력11월 겨울철이란 문구를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한 겨울 어느 정신나간 임금이 야외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겠는가를 유추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글자 ‘유(遊)’자가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하는 것을 ‘유백률사(遊百栗寺)’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 ‘유(遊)’자는 ‘가다’의 의미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글자 한 자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식민사관의 단초를 만들어내는 일본인들의 저의에 새삼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오늘날 새로운 연구결과에 의하면, 포석정은 남산 서쪽자락에 위치한 신라인의 성소로서 국가적 행사나 제사의식을 행하는 장소였다. 주변 1Km 이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이 있고, 박씨 왕들의 무덤인 오릉이 그 일대에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경애왕은 박씨 조상들을 찾아가 간절한 기도로써 국가를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장소가 바로 포석정인 것이다.
한편, 포석정을 생각할 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유적이 있다. 바로 ‘유상곡수’터이다.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유상곡수는 시를 읊으며 연회를 베풀기 위해 흐르는 자연수를 흐르도록 만든 조형물이다. 포석정이 위대한 이유는 인공적으로 자연수의 원리를 재창조했다는데 있다. 이는 자연현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인 것이다. 물길을 따라 물이 한 바퀴 도는 데에는 1~2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시 한 수를 짓기 위해서는 최소한 5~6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와류(회돌이현상)를 일으키도록 구조물을 변경시켜 인공적으로 자연현상인 것처럼 만든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 발명품이다. 오늘날 사적1호인 포석정은 보물이나 국보로 승격 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신라인의 독창성과 과학성이 돋보이는 유적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성소(聖所)로서 제사의식을 행하는 장소에 유상곡수연을 펼치는 신라인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혜로운 우리 후배 학자들이 풀어야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광복 70주년, 단순히 햇수만 70년이 흘러온 것이 아니라 생각도 식민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포석정’ 문화유적의 안내문과 홍보에서 한번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런데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삼국사기’였다. 저자 김부식은 집필과정에서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신라의 멸망을 당연시하는 표현들을 사용했다. 특히 ‘경애왕편’을 언급할 때 ‘유포석정(遊鮑石亭)’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때 사용된 ‘유(遊)’자를 ‘놀러갔다’라고 번역을 한 결과, 포석정은 오늘날까지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는 놀이터로 둔갑이 되어 전해내려 오게 된 것이다. 사실 그 문장 앞에 나오는 927년 음력11월 겨울철이란 문구를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한 겨울 어느 정신나간 임금이 야외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겠는가를 유추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글자 ‘유(遊)’자가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하는 것을 ‘유백률사(遊百栗寺)’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 ‘유(遊)’자는 ‘가다’의 의미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글자 한 자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식민사관의 단초를 만들어내는 일본인들의 저의에 새삼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오늘날 새로운 연구결과에 의하면, 포석정은 남산 서쪽자락에 위치한 신라인의 성소로서 국가적 행사나 제사의식을 행하는 장소였다. 주변 1Km 이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이 있고, 박씨 왕들의 무덤인 오릉이 그 일대에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경애왕은 박씨 조상들을 찾아가 간절한 기도로써 국가를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장소가 바로 포석정인 것이다.
한편, 포석정을 생각할 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유적이 있다. 바로 ‘유상곡수’터이다.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유상곡수는 시를 읊으며 연회를 베풀기 위해 흐르는 자연수를 흐르도록 만든 조형물이다. 포석정이 위대한 이유는 인공적으로 자연수의 원리를 재창조했다는데 있다. 이는 자연현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인 것이다. 물길을 따라 물이 한 바퀴 도는 데에는 1~2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시 한 수를 짓기 위해서는 최소한 5~6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와류(회돌이현상)를 일으키도록 구조물을 변경시켜 인공적으로 자연현상인 것처럼 만든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 발명품이다. 오늘날 사적1호인 포석정은 보물이나 국보로 승격 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신라인의 독창성과 과학성이 돋보이는 유적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성소(聖所)로서 제사의식을 행하는 장소에 유상곡수연을 펼치는 신라인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혜로운 우리 후배 학자들이 풀어야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광복 70주년, 단순히 햇수만 70년이 흘러온 것이 아니라 생각도 식민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포석정’ 문화유적의 안내문과 홍보에서 한번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