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불교의 연기이해/이필원

실론섬 2016. 2. 14. 01:00

초기불교의 연기이해

- 수행론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접근 -

(본 논문은 2012년 화엄사상연구원에서 개최한 ‘제 7회 의상 화엄사상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아울러 본 논문을 논평해 주신 임승택, 이자랑 두 분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이 필 원/동국대학교(경주)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

 

I. 들어가는 말

II. 연기의 기본적 의미

III. 경장에 나타난 연기에 대한 내용

IV. 12지 연기 각 지분의 의미 해석

V. 결론

 

<한글요약>

불교를 흔히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과연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즉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깨달음의 결과를 통해 우리는 붓다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며, 내용상으로는 붓다가 깨달은 바를 깨닫는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이 

달라서는 안 되며, 차이가 있어서도 안 된다. 그 깨달음은 일미(一味)이며, 한 길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을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성제’와 

‘연기’로 제시한다. 이 가운데 본 논문은 ‘연기’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해 보고자 한다.

 

연기는 전통적으로 태생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삼세양중인과설이라든가 상의상관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연기를 번뇌의 소멸에 대한 체계화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문헌적으로 성립이 가장 빠르다고 하는 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연기의 내용을 고찰해 보았다. 숫따니빠따에서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연기의 

내용과는 다소 다르지만, 기본적인 발상이 동일하며, 그 핵심적 내용은 고통의 원인 규명과 

소멸이란 점에 놓여 있다. 그리고 상윳따니까야에서는 고통의 소멸이란 측면에서의 연기 

내용과 연기를 이법(理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병존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은 이후 연기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근거가 이미 경전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맛지마니까야디가니까야에서 기술된 연관된 내용도 연기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빨리율장과 우다나(Udāna)

같은 문헌에서 붓다는 바로 연기를 깨달아 ‘붓다’가 된 것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실 잘 알려져 있듯이, 붓다의 자내증이 연기라고 기록되고 있는 경전이나 문

들은 상윳따니까야와 빨리율장의 「대품」 그리고 우다나 정도이다. 다른 경전들에서는 

자내증으로 사성제나 선정의 성취를 통한 번뇌의 멸진에서 찾는다. 따라서 연기를 자내증으로 

보는 이러한 흐름은 연기를 이법(理法)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논리적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연기의 기본적인 의미는 번뇌의 원인 규명과 소멸이라는 수행론적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고,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연기라는 형식으로 체계화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I. 들어가는 말

 

종교가 세상에서 기능하는 것은 종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사 

속에서 수많은 종교가 새롭게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개중에는 수천년의 기간 동안 

인류의 행복과 슬픔을 같이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종교도 있다. 불교는 그 중의 하나이다. 

2,500년 전, 인도에서 고따마 싯닫따라고 하는 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이 불교의 시작을 알렸고, 

그 이후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안내해 오고 있다. 아마 불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이 더이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할 때일 

것이다. 아니면 그 구원의 길을 사람들이 확신하지 못하는 시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나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불교가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붓다의 

대자대비에 의지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길 희구하는 뭇 생명들의 희망도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믿음의 요소를 또한 발달시켰다. 그래서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스스로 깨닫는 

자력의 길과, 붓다의 대자대비에 의지하여 고난을 건너는 타력의 길이 같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타력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마지막 깨달음은 스스로 열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타력의 

길은 고통의 세계에서 안녕의 세계로 가는 길을 붓다의 힘에 의지하여 가는 것뿐이다. 불교에서 

그 길은 과정일 뿐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그렇기에 타력의 길이라고 해도 결국은 자력의 

길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력의 길은 믿음의 길과는 다르다. 자력의 길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증득(證得)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증득해야 하는 것인가. 증득의 

결과는 붓다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며, 붓다가 깨달은 바를 깨닫는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이 달라서는 안 되며, 차이가 있어서도 안 된다. 그 깨달음은 일미(一味)이며, 

한 길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증득하면 붓다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을 경전에서는 

다양하게 시설해 놓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바로 ‘사성제’와 ‘연기’이다.1) 

이 가운데 본 글에서는 ‘연기’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해 보고자 한다.

1) 붓다의 정각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경전에 따라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는 설과 ‘사성제’를 통해 붓다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을 ‘연기’라고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 논문으로는 권오민(「緣
   起法이 불타자 내증이라는 經證 검토」,「보조사상」제27권, 2007)의 논문이 있다. 한
   편 붓다는 사성제를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는 T.Vetter(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SM, Leiden : E.J. Brill, 
   1988)이란 책이 있다. 그리고 이필원(「Suttānipata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 고찰」, 
  「선문화연구 제6집, 2009,「사성제 팔정도」, 서울 : 민족사, 2010)은 고따마 태자는 
   사정려를 통해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여 붓다가 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
   다. 따라서 필자는 기본적으로 연기를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함을 밝혀둔다. 결국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번뇌의 멸진’이다. 번뇌는 재생
   의 원인이자, 해탈의 방해요소이다. 이를 제거하여 선정상태에 있거나 깨어있거나 상
   관없이 늘 걸림없는 해탈의 경지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다. 수행자 고따마는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여 더 이상 재생하지 않음에 대한 확고한 지혜를 얻어 위대한 붓다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기의 진리성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
   서 본 글 역 시 연기의 내용과 의미를 중심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고자 함을 미리 
   밝혀둔다.

 

하지만 연기가 갖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모두 다루는 것은 본 글의 성격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필자는 한 가지 측면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즉 연기를 태생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삼세양중인과설의 연기이해는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2) 또 하나의 대표적인 

이해는 상의상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해이다.3) 상의상관적 관점의 경우는 연기의 지분간의 

관계에서도 도출되며, 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와 같은 

연기의 기본적 형식에서 상의상관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에 

대해서는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본문의 3.2에서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필자의 주된 관심은 

상의상관적 관점보다는 연기를 번뇌의 소멸에 대한 체계화라는 관점에서 해명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논지가 산만해지지 않고 연기에 대한 필자의 이해를 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 태생학적 연기설이란 생명의 윤회를 연기설로 해명한 것을 말한다. 즉 존재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인 것이다. 이러한 태생학적 연기설의 내용이 부파의 논서
   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경전에서도 그 전거를 찾을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맛지마니까야』(MN. no38)에 나오는 Mahātaṇhāsaṅkhaya sutta(「갈애의 소멸
   에 대한 커다란 경」)이다. 
3) 상의상관적 이해란 12지의 모든 지들이 서로 상의적 관계에 있다는 이해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들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어 왔다. 적어도 초기불교의 연기 이해는 
   이러한 관점에 서 바라볼 수 없다는 견해들이 우세한 편이다. 각주 2번에서 언급한 태
   생학적 연기설을 비롯한 다양한 연기설에 대해서는 각묵스님,「초기불교이해」(울산 : 
   초기불전연구원, 2011)과 松本 史朗,「연기와 공」, 혜원 역(서울 : 운주사, 1994) 등
   의 견해를 참조하길 바란다. 아울러 우동필 은 「십이연기에서 오온」, 「불교학보」 
   제63집 (서울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2)이란 논문에서 삼세양중인과설과 
   태생학적 연기설, 무시간적 연기설, 분위연기설 등 연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의 의미
   를 정리하고 있다. 

 

II. 연기의 기본적 의미

 

연기(緣起)는 빠띠짜삼무빠다(Paṭiccasamuppāda)의 번역어이다. 이 말은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의미로, 영역에서는 ‘dependent arising(의존적 발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4) 그리고 이러한 

연기의 기본적인 특성을 한 마디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5)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이해를 포함한다. 하지만 붓다의 연기의 가르침이 처음부터 

이러한 존재론적 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까라는 점은 면밀히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이해는 연기를 불변의 이법(理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연기의 

법칙은 붓다의 출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존재의 참된 모습을 밝히는 진리로서 제시된다.6) 

이러한 연기에 대한 이해는 창조신과 같은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도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 흥기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창조신의 관념에 바탕을 두고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였지만, 연기법에 따르면 창조신을 요청하지 않아도 된다.

4) 달리 dependent origination도 사용되고 있다. 두 표현 모두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5) Anālyo는 “연기는 마치 사건들이 서로 얽혀 있는 거미줄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현상의 
   조건적 상호연관을 뜻하며 … 중략 … 각각의 조건 짓는 요소들은 동시에 조건 지어지며, 
   따라서 어떤 요소도 독립적이거나 초월적일 가능성은 배제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Anālyo의 연기 이해는 상의상관성에 가까우며, 아울러 ‘이법’으로서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아날요 스님,「Satipaṭṭhāna-깨달음에 이르는 알아차림 
   명상수행-」, 이필원, 강향숙, 류 현정 공역(서울 : 명상상담연구원, 2014), pp.124ff.을 
   참조하라. 
6) 이러한 이해에 대해서는 비판의 시각이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3장을 참고하라.

 

하지만 연기가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상의 논의는 

연기의 기본적 이해가 발전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면 연기의 기본적 이해는 무엇일까.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점은 붓다의 출가 목적을 살펴보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태자 고따마는 ‘늙음과 죽음’이라는 가장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고통을 극복하고자 출가하였다. 즉 고통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7) 그렇기에 

붓다는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8) 따라서 연기를 존재론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결과적으로 붓다의 출가 목적에 부합하는 이해방식이 

연기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는 고통이 생기는 원인과 그 원인을 소멸

시킴으로서 고통을 종식시키는 내용을 체계화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붓다의 근본사상을 표현한 ‘무상, 고, 무아’와 연기는 완전히 동일한 표현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9) 따라서 연기의 법칙은 고통이 생기는 원인과 그 원인을 소멸시킴으로서 고통을 종식

시킬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7) Sn. 574, 575게송에서는 이러한 붓다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 다.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있는 존재들
   은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 니다.”(전재성, 『숫타니파타』(서울 : 한국
   빠알리성전협회, 2005), p.320의 번역을 참조하여 약간 수정을 하였다.) ; Sn.937 
   등도 참조하라.
8) 대표적으로 말룽키야뿟따의 일화를 들 수 있다. MN.I. pp.429-431.를 참고하라.
9) 연기가 무상과 연결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AN.V. Upāsaka-Vagga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 내용은 급고독 장자가 다른 외도의 유행자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세상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몸과 정신은 
   동일하다, 다르다’와 같은 형이상학적 견해는 “조건지어진, 의도되어진, 연기되어진 
   것들이고, 조건지어진, 의도되어진, 연기되어진 것들은 무엇이든 그것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고통이다”라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연기의 법칙은 경전에서 9지(支)연기, 10지연기, 12지연기 등 다양한 형태가 

기술되어 있다. 이 가운데 12지연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2지연기의 경우는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식이 있으며 …중략… 생을 조건으로 노사(老死)가 있는 

12단계의 구조를 나타낸 것이다. 늙음과 죽음이 현실적인 고통의 내용이라면,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연기법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번뇌의 소멸을 통한 열반의 획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연기를 순관, 역관을 통해 철저히 투득하게 되면 번뇌를 소멸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생로병사우비고뇌(生老病死憂悲苦惱)라고 하는 고통의 근원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아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아를 체득한 이에게는 무명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연기에 의한 고통이 발생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무아와 연기는 자성이 없이 공한 세계와 인간의 실상을 설명하는 붓다의 핵심교설10)로 

보는 경우가 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 ‘나’란 타자와의 의존적 관계속에서

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11) 결국 연기를 이해/자각하게 되면 ‘자아’관념이 뿌리째 뽑히게 

되고,12) 그럴 때 비로소 연기의 이치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10) 안옥선,「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서울 : 불교시대사, 2002), p.144. 
11) 앞의 책, p.145. 이러한 관점이 연기의 존재론적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 앞의 책, p.73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라는 인식주관과 우리
    밖의 대상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세계와 
    관계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나의 접촉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내가 지각하는 세계가 
    세계 자체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우리의 자각과 별도
    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전제 되어 있다. 붓다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의 세계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붓다의 핵심교설인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세계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한 교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방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아를 체득한 성자에게는 연기의 연쇄적 

과정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연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무아로 이끈다는 점에서 이 둘이 전연 상관없는 교설이라고 볼 수는 또한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내용은 본고의 핵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기에, 더 이상의 논의는 본문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상 연기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아래에서는 초기불교의 연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숫따니빠따상윳따니까야와 빨리 율장 등에서 연기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III. 경장에 나타난 연기에 대한 내용

 

1. 『숫따니빠따』에 나타난 연기

『숫따니빠따』는 문헌학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체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고, 5품 가운데 제 4품과 제 5품만이 그러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 4품인 Aṭṭhaka-vagga13)에 연기와 관련된 내용이 기술되어 있고, 아울러 제 3품인 

Mahā-vagga에도 연기의 내용이 전하고 있다.14) 따라서 연기의 가르침은 붓다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설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5) 우선 본 장에서는 

제 4품의 「kalavivādasutta(투쟁과 논쟁의 경)」에 나타난 연기에 대해서 그 내용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방식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3) 한역으로는 義足經으로 전한다. 
14) 나미까와 타카요시(並川孝儀)는 제 4품의 내용을 최고층 자료에 보이는 연기, 제 3품의 
    내용을 고층 자료에 보이는 연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並川孝儀, 「スッタニパータ」
    (東京: 岩波書店, 2008))
15) 문헌의 성립을 고려한다면,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된 문헌(경전)에 연기법이 기술되어 
    있다는 것은 붓다의 45년 설법 시기 가운데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미 연기에 대
    한 설법이 이루어져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문헌의 성립이 빠르다고 해
    서 그 사상의 성립이 원초적인 것이라고 등식화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투쟁과 논쟁의 경」의 경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경은 ‘투쟁과 논쟁은 어디에서 일어

나며, 비탄과 슬픔, 인색, 자만과 오만, 중상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설명해 달라

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 바로 연기의 가르침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질문 : 투쟁과 논쟁, 비탄, 슬픔, 인색, 자만과 오만, 중상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세존 : 그러한 것은 좋아하는 대상에서 일어납니다. 투쟁과 논쟁에는 인색이 따르고,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이 뒤따릅니다.

 

질문 : 좋아하는 대상들은 무엇을 인연으로 하고, 또 무슨 인연으로 탐욕이 일어납니까?

        사람이 내세에 대해서 가지는 소망과 그 성취는 무슨 인연으로 합니까?

세존 : 좋아하는 대상들은 욕망을 인연으로 하고, 또 탐욕도 욕망으로 일어납니다. 사람이 

        내세에 대해서 가지는 소망과 그 성취는 욕망을 인연으로 합니다.

 

질문 : 욕망은 무엇을 인연으로 하고 독단은 무엇에서 생겨납니까? 분노와 거짓말, 의혹과 

        수행자(사문)가 말하는 가르침들은 무엇에서 일어납니까?

세존 : 쾌락과 불쾌로 인해서 욕망이 일어납니다. 형상들 가운데 존재와 비존재를 보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독단을 일으킵니다. 분노와 거짓말과 의혹들은 쾌락과 불쾌가 있을 때 

        나타납니다.

 

질문 : 쾌락과 불쾌는 무엇을 인연으로 일어납니까? 무엇이 없을 때 이것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존재와 비존재라는 그 현상도 무엇을 인연으로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 : 쾌락과 불쾌는 접촉을 인연으로 일어납니다. 접촉이 없을 때 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존재와 비존재라는 그 현상도 바로 접촉을 인연으로 합니다.

 

질문 : 접촉은 무엇을 인연으로 일어납니까? 집착의 대상은 무엇에서 생겨납니까? 무엇이 

        없을 때 아집이 없어집니까? 무엇이 소멸했을 때 접촉을 없앨 수 있습니까?

세존 : 명색으로 인해 접촉이 일어납니다. 집착의 대상들은 욕구에 의해 생겨납니다. 욕구가 

        없을 때 아집도 없으며, 형상이 소멸했을 때 접촉도 없어집니다.

 

질문 : 어떻게 행하는 자에게 형상이 소멸됩니까? 즐거움과 괴로움이 어떻게 소멸됩니까?

세존 : [여러 가지] 생각을 생각하는 자도 없고, 잘못된 생각을 생각하는 자도 없고, 생각하지 

        않는 자도 없고, 소멸된 생각을 지닌 자도 없습니다. 이렇게 아는 자에게는 물질적 존재

        (rūpa)가 소멸합니다. 왜냐하면 허망하게 구별을 하여 대상을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생각에 의하기 때문입니다.

 

위 내용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연기의 형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 기본적 구조는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즉 생기와 소멸의 구조를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기문과 환멸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제 3품에 나오는 「두 가지 관찰의 경」에 나오는 연기의 내용은 제 4품과는 다소 다르다. 

그 내용이 다소 길지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6)

16) 이 내용은 쿠모이쇼젠,「붓다와의 대화」, 이필원 역 (서울 : 심산, 2005), pp.241-
    242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다. 

 

(1) “대개 고통이 생기는 것은 모두 (=생존의) 토대(=upadhi)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것이 하나의 관찰[법]이다. “그러나, 토대가 남김없이 떨어져 소멸해 버리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관찰[법]이다.

(2) “어떤 고통이 생겨도 모두 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 하나의 관찰[법]

     이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떨어져 소멸해 버리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관찰[법]이다.

(3) “대개 고통이 생기는 것은 모두 잠재적 형성력(=행)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것이 

     하나의 관찰[법]이다. “그러나 잠재적 형성력이 남김없이 떨어져 소멸해 버리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관찰[법]이다.

(4) “대개 고통이 생기는 것은 모두 식별작용(識)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것이 

     하나의 관찰[법]이다. “그러나 식별작용이 남김없이 떨어져 소멸해 버리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관찰[법]이다.

(5) 고통이 생기는 것은 접촉(=触)에 기인한다.(첫 번째 관찰). 접촉이 소멸하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두 번째 관찰).

(6) 고통이 생기는 것은 감수(=受)에 기인한다(첫 번째 관찰). 감수가 소멸하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두 번째 관찰).

(7) 고통이 생기는 것은 망집(愛執=taṇhā)에 기인한다(첫 번째 관찰). 망집이 소멸하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두 번째 관찰).

(8) 고통이 생기는 것은 집착(=取)에 기인한다(첫 번째 관찰). 집착이 소멸하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두 번째 관찰). 

(9) 고통이 생기는 것은 동기(=악착. ārambha)에 기인한다(첫 번째 관찰). 동기가 소멸하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두 번째 관찰).

(10) 고통이 생기는 것은 음식(=āhāra)에 기인한다(첫 번째 관찰). 음식이 소멸하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두 번째 관찰).

(11) 고통이 생기는 것은 [망집의] 동요(=iñjita)에 기인한다(첫 번째 관찰). 동요가 소멸하면 

      고통의 발생은 없다.(두 번째 관찰).

 

‘무명-행-식-촉-수-애-취’의 일련의 내용을 보면, 연기법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확히 연기법을 설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고통이라는 사실이 생겨나는 의지처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내용은 연기법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17)

17) 쿠모이쇼젠은 “사성제와 연기설의 원형이 보이지만, 이른바 연기의 계열을 나열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고통의 원인으로서 여러 항목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쿠모이쇼젠, 앞의 책, p.240 참조.

 

2. Saṃyutta Nikāya에 나타난 연기사상

Saṃyutta Nikāya(이하 SN)에는 Nidānasaṃyutta(「인연의 모음」)라는 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니다나(nidāna)는 연기를 나타내는 말이다.18) 연기 사상을 고찰하는데 있어『상윳따니까야』가 

주목되는 이유는 바로 「니다나상윳따」에 연기를 설하는 93개의 경전이 망라되어 있기 때문

이다. 이들 경전을 통해 연기의 다양한 형식을 우리는 모두 볼 수 있다.19) 그 가운데 연기의 

기본적 의미로 잘 알려진 경전의 표현이 있다.

18) nidāna는 원래 인도 고대어에서 널리 원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던 말이다. 이 단어는 
   『경집』 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고 또한『상응부니까야』나『중부니까야』『장부
    니까야』에서 널리 원인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전재성,「初期佛敎의 緣起思想」(서
    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p.67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자세한 내용은 전재성
    의 책을 참조하라.) 
19) 각묵스님, 앞의 책, pp.228-229은 이들 93개의 경전은 72개의 가르침으로 축약될 수 
    있다고 한다. 아울러 2지부터 12지에 이르는 다양한 연기법의 형식을 경전별로 정리
    하고 있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존재한다. 이것의 발생으로부터 이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있지 않을 때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의 소멸로부터 이것이 사라진다.

SN. II, p.28 ; p.65 ; p.70 등.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a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위의 내용에서 앞의 ‘이것’과 뒤의 ‘이것’은 동일한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한국어 

표현에 맞게 풀이하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존재한다.’라고 보면 된다.21) 위의 경문을 언뜻 

보면 어떤 현상 혹은 사태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관계로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상의상관적 연기이해가 된다.22) 기존의 연기에 대한 

해석 가운데 일반적인 연기 이해이다. 이에 따라 연기를 이해하면, 연기는 관계를 떠나 독자적

으로 존재하는 ‘개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독립적으로 스스로 자족적인 

‘절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혹자는 현실의 세계는 

그러할지 몰라도 진리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불교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속제에서는 ‘절대’가 부정되어도 진제에서는 ‘절대’가 긍정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현실 세계이든 진리의 세계이든 ‘절대’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관계를 

떠난 ‘절대’는 존재한다고 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라는 말에는 이미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21) 전재성, 앞의 책,「初期佛敎의 緣起思想」, p.83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기하므로 저것이 생기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게 되며, 이것이 소멸함
    으로 저것이 소멸한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는 한문 번역본과 범문『연기경』
    (Pratātiyasamutpādasūtra) 에서 ‘이것(idam)’과 ‘저것(asau)’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빨리문에서 전후의 ‘이것’은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해야 함을 밝히고 있
    다. 필자 역시 이러한 견해에 동감한다. 한편 松本史朗, 앞의 책, p.63는 “이것이 있다
    면 저것이 생한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매우 철학적이고, 해석학적
    이며, 언어학적이다. 참고로 그는 연기를 ‘인과이시(因果 異時)’로 보고 있으며, ‘인과
    동시(因果同時)’적 해석을 비판한다. 필자는 인과이시든 인과동시든 해석은 모두 가능
    하다고 본다. 다만 필자는 연기의 의미는 ‘관계’에 방점이 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
    하튼 자세한 것은 그의 책을 참조하도록 하라. 또한 각묵스님, 앞의 책, pp.227-228도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22) 이러한 이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문이 SN. II, p.112에 나온다. Naḷakalāpasutta
    (「갈대묶음의 경」)가 바로 그 경인데, 여기서는 사라뿟따 존자와 꼿티따 존자의 문답을 
    전한다. 이때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사리뿟따 존자가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두 갈대묶
    음이 서로 의존하여 서있는 것처럼 명색과 의식(識)은 서로 의존관계, 즉 상의적 관계
    에 있음을 설한다. 하지만 다른 지분들은 상의적 관계로 설명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이러한 붓다의 존재관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12연기 지분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3) 그 예로 SN에서는 위의 연기법칙을 설한 뒤에 바로 

이어서 12연기를 설하고 있는 경전이 많다.24)

23) 각묵스님, 앞의 책, p.232. 
24) SN.II,12:61, 62번 경등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SN에는 다른 어떤 니까야보다 연기에 대한 많은 경전을 전승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SN.II, 제 6품 Rukkhavagga(나무의 품)은 연기가 고통의 소멸을 위한 가르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 6품은 총 10개의 경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경전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전명                         경전번호                                내용

Parivīmaṃsanasutta         12:51       노사의 원인을 탐색하여 무명으로 이어지는 12연기. 

                                                          무명이 사라지면 명지(明知)가 생겨나고, 이로서 

                                                          노사의 괴로움이 사라짐

 

Upādānasutta                 12:52         온갖 집착의 대상으로부터 갈애가 늘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4지 연기.

 

Paṭhamasaññojanasutta    12:53      온갖 결박의 대상으로부터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4지 연기.

 

Dutiyasaññojanasutta       12:54      온갖 결박의 대상으로부터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4지 연기.

 

Paṭhamamahārukkhasutta  12:55      온갖 집착의 대상으로부터 갈애가 늘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4지 연기.

 

Dutiyamahārukkhasutta     12:56      온갖 집착의 대상으로부터 갈애가 늘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4지 연기.

 

Taruṇarukkhasutta            12:57     온갖 결박의 대상으로부터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4지 연기.

 

Nāmarūpasutta                12:58    온갖 결박의 대상으로부터 명색이 전개되고, 명색을 

                                                      조건으로 6입처가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8지 연기.

 

Viññāṇasutta                   12:59    온갖 결박의 대상으로부터 의식이 전개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6입처가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절망 등이 생겨나는 

                                                     9지 연기.

 

Nidānasutta 25)              12:60    온갖 집착의 대상으로부터 갈애가 늘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결국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생겨나는 4지 연기

 

25) DN에 Mahānidānasutta(『대인연경』)라는 경전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SN의 
    Nidānasutta와 DN의 Mahānidāna sutta는 모두 아난존자의 연기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기 위한 붓다 의 설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Nidānasutta에서
    는 4지 연기만이 설해져 있는 반면, Mahānidānasutta에서는 9지 연기가 설해져 
    있는 것이 다르다. 9지 연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 다. ‘識↔名色→觸→受→渴愛→
    取→有→生→老死’. 『대인연경』에 보이는 식과 명색의 상의적 관계에 대해서는 
    각주 19번을 참조하시오.

 

위의 내용을 보면, 4지연기, 8지, 9지, 12지 연기의 형식이 보이며, 그 내용은 모두 고통의 소멸을

설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전들은 후반부에서는 반대로 온갖 집착/결박의 대상이 

해로움을 보게 되면, 결과적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절망 등이 소멸한다는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들 경전 가운데 특히 첫 번째 경인 12:51경의 경우는 12지연기의 각 지분을 한결같이 

고통의 소멸이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제 6품의 모든 연기에 대한 설명은 

존재론적인, 혹은 삼세양중인과적인 관점에서 연기가 해석되고 있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12:51경에서는 무명이 사라져 명지가 생겨나게 되면, ‘무상-고-무아’를 분명히 자각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다른 경전에서는 연기란 중도라고 표현되며26),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고 그 소멸

을 제시한 체계로서도 설명된다.27) 연기가 곧 중도라는 표현에서 초전법륜의 내용을 전

하는『율장』 「대품」의 내용을 떠 올리게 된다.

26) SN. II, pp.75 ․ 77 등. 예를 들어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의 동일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 붓다는 “바라문이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는 것은 또 다른 
    극단입니다. 바라문 이여, 이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
    이 생겨납니다.”(전재성,『쌍윳따니까야』2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6), 
    p.276의 번역) 27) SN. II, p.80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에 의해서 이들 두 가지 극단이 

실천되어져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욕망의 대상에 대해서 욕망과 쾌락에 사로잡히는 

것은 열등한 것이며, 비천한 것이며, 속된 것이며,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고행을 실천하는 것은 고통이며,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실로 비구들이여, 이들 두 가지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여래에 의해서 잘 깨달아졌으며, 

깨달음의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드는 중도는 적정을 향해, 뛰어난 지혜를 향해, 정각을 향해, 

열반을 향해 작용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여래에 의해 잘 깨달아졌으며, 깨달음의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드는 저 중도가 적정, 승지, 정각, 열반으로 이끄는가? 실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 적정, 승지, 정각, 열반으로 이끈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Vinaya I, Māhavagga, p.10)

 

위 인용문에서는 연기란 표현은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중도란 곧 적정, 뛰어난 지혜, 정각, 

열반을 향해 작용하는 것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팔정도임을 밝히고 있다.28) 연기와 팔정도가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을 보여주는 경전의 예가 있다. 그것은 SN. II, p.56에 나오는 

Paṭhamañāṇavatthusutta(「앎의 토대에 대한 경」)이다. 이 경에서는 각각의 연기의 지분의 

소멸로 이끄는 것이 바로 팔정도임을 제시하고 있다.29)

28) 이와 관련해서 폴 윌리엄스 ․ 앤서니 트라이브,「인도불교사상」, 안성두 역(서울 : 
    씨아이알, 2009), pp.91-92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비록 붓다가『전법륜
    경』에서 연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자신의 깨달음의 내용을 형성하
    는 사성제의의미가 (무아처럼) 인 과적 행위와 같은 비인격적 법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하면서(선정을 하면서) 무아와 연기에 대해 이해 하게 되었을 것이다.” 
29) 각묵스님, 앞의 책, p.271은 연기가 염오-이욕-소멸을 성취하여 고를 소멸한다고 
    할 때, 그 방법이『상윳따니까야』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 방법은 
    아마도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일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SN.II 12:33경에 소멸의 방식으로 팔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한편『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이상과 같은 연기 이해와는 매우 이질적인 내용도 제시

된다. 그것은 연기를 이법, 즉 정해진 원리로 보는 관점이다. 고통의 발생과 소멸의 과정

을 보여주는 것과 그 체계 자체를 이법으로 보는 것은 매우 다른 입장이다. 결국 연기를

이법으로 보게 됨으로써, 경전에서는 붓다가 이러한 연기의 이법을 ‘발견’으로 표현하

기에 이른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

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

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올바로 깨닫고 꿰뚫었으

며, 올바로 깨닫고 꿰뚫고 나서,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

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보라’로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비구들이여, 여기서 여실한 것, 허망하지 않

은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30)

30) SN. II, p.25 ; 전재성, 앞의 책,『쌍윳따니까야』 2, p.143.

 

이 경문의 내용은 연기란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나타내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내용이

다. 따라서 누구든지 연기에 대한 이치를 깨닫게 되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도

언급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는 학자도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

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필자 주 : 바로 위에 든 경문을 말한다) 들었던 『상응부』(Saṃyuttanikāya)의 문

장은 이러한 위험을 눈치채지 못하고 실재론으로 전락해 버려서, 이미 불교다운 점이 없어

져 버린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를 보편적인 이법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제불이 나

타나도, 나타나지 않아도 그 진리는 존재한다. 이미 석존은 필요치 않다. 붇다는 필요하지

않다. 다만 ‘연기’의 진리(理法)만 있으면 좋다. 석존은 단지 우연히 고성(古城)을 발견한

여행자와 같이 이 진리를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석존보다도 이 ‘이법’을 존

중하는 태도를 나는 불교도로서 부끄러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불이 출세(出世)해

도, 하지 않아도’란 도대체 무슨 폭언인가? 그럼에도 이것이 폭언임을 느끼지 못할 만큼 신

앙이 결여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31)

31) 松本史朗, 앞의 책, p.71. 

 

마츠모토의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충분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고따마 붓다를 생

각지 않고 불교를 생각할 수는 없다. 고따마 붓다를 절대시하고 신격화 하는 것에 대해

서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붓다의 존재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

만이란 식의 이해와 접근은 문제가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연기법을 불교의 핵심적

교리로 보고자 하는 후대의 불제자들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32)

32) 하지만 이러한 理法을 중시하는 입장의 등장은 바로 후대에 법신불 사상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연기를 이법으로 간주하는 전통이 생김으로써, 수행자 고따마는 이제

연기를 깨달아 붓다가 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논

리적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출현여부와 관계없이, 그리고 모든 붓다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성(古城)으로 난 길을 발견함으로써 붓다가 된 것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불교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 될 것이다.

 

이제 붓다의 깨달음을 전하는 문헌에서는 바로 연기를 깨달아 붓다가 되었음을 선포

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3. 연기를 깨달아 붓다가 되다

『쿳다까니까야(Khuddakanikāya)』에 속한『우다나(Udāna)』를 비롯하여, 빨리 율장에서 

전하는 붓다의 깨달음은 바로 앞서 말한 연기의 깨달음에 기인한다. 빨리 율장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때, 불세존은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변에 머무시면서,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으로 현등각

(現等覺, abhisambuddho)했다. 그리고 세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7일간 결가부좌로 앉아서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 때 세존은 초야에 이 연기(paṭiccasamuppāda)되는 것을 순역으로 

작의(作意, 주의를 기울이는 것)한다.

즉 무명이라는 연으로부터 제행(諸行)이 생긴다. 제행이라는 연으로부터 식(識)이 생긴다. 

식이라는 연으로부터 명색(名色)이 생긴다. 명색이라는 연으로부터 육처(六處)가 생긴다. 

육처라는 연으로부터 촉(觸)이 생긴다. 촉이라는 연으로부터 수(受)가 생긴다. 수라는 연으로

부터 애(愛)가 생긴다. 애라는 연으로부터 취(取)가 생긴다. 취라는 연으로부터 유(有)가 생긴다. 

유라는 연으로부터 생(生)이 생한다. 생이라는 연으로부터 늙음과 죽음, 시름(愁), 슬픔(悲), 

괴로움(苦), 근심(憂), 번민(惱)이 생긴다. 이렇게 하여 이 순수한 괴로움의 쌓임(苦蘊)의 일어남이 

생긴다. 그러나 무명만이 남지 않고 이욕의 멸로부터 행(行)의 멸이 있다. 행의 멸로부터 식의 

멸이 있다. … 유의 멸로부터 생의 멸이 있다. 생의 멸로부터 늙음과 죽음, 시름, 슬픔, 괴로움, 

근심, 번민이 멸한다. 이렇게 하여 그 순수한 괴로움의 쌓임의 멸이 생긴다 라고.

여기에서 세존은 이 의미를 알고서, 그 때 다음과 같은 감흥게를 읊으셨다.

참으로 열심히 선정을 닦는 바라문에게 제법이 현현할 때, 그의 모든 의혹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는 인(因)을 갖는 법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33)

33) Vin. I, pp.1-2. 이 번역은 松本史朗, 앞의 책, pp.85-86의 번역을 다소 수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한편 같은 내용을 전하는 우다나(Udāna 1.1.)에서는 ‘7일이 지나고 난 뒤에’ 그 삼매에서 나와 

초저녁 무렵 순간의 연기법을 깨닫고 이어 한밤중에 역관의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전한다. 

역관의 연기법은 무명의 소멸을 통해 노사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즉 역관으로 

연기법을 깨달음으로 인해 늙음과 죽음이라는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열반을 

성취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즉 현등각의 성취를 통해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는데, 다시 연기를 관했다는 것은 앞의 해탈이 궁극적 해탈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연기를 관하여 모든 의혹이 사라졌다는 표현은 무명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임으로, 이 때에 비로소 완전한 해탈이 성취되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연기법은 이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연기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게 되면 결국은 붓다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필자가 마츠모토의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연기 이해는

적어도 고따마 붓다의 입장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좀 더 교학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뒤의 해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하튼 본래 연기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소의 해석의 차이가 있

지만,34) 분명한 것은 연기법은 괴로움의 소멸과정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괴로움의

소멸이 바로 해탈이며, 열반이라는 점에서 연기법을 분명히 자증(自證)하면 해탈/열반

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35) 이것은 앞서 보았듯이 연

기법을 이법으로서 보더라도 적용되는 내용이다.
34) 폴 윌리엄스 ․ 앤서니 트라이브는 “연기에 관해 설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명확하지만, 그럼에도 12지 연기 형식이 실제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
    치 않다.”(앞의 책, p.94) 라든가 “12연기 공식 전체에 대한 원래의 논리가 의도한 
    바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만 족스럽게 파악한다는 것은 현재의 학문적 단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앞의 책, p.100)라고 밝히고 있다. 
35)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붓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붓다는 번뇌의 완전한 절멸
    과 그에 대한 바른 앎으로 깨달음을 완성한 것이고, 그 후에 연기의 형식으로 설법을 
    한 것으로 필자 는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연기를 자증(自證)하면” 이란 표현
    은 붓다 이후의 수행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기법이 붓다의 자내증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필자의 관점은 어디까지

나 붓다는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 깨달음의 눈으로 통찰한 결과 번뇌 발생의 과

정이 연기라는 형식으로 정리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붓다의 깨달음을 ‘완전한 번뇌

의 절멸’로 인해 ‘더 이상 번뇌에 의해 흔들리거나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자내증’으로 한다는 필자의 관점에서의 이해이다.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뒤에 ‘번뇌로

부터 완전히 해탈되었다’라는 ‘해탈지’를 성취함으로서 깨달음은 완성된 것이다. 그러

한 번뇌를 여읜 청정한 상태에서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방법과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통찰이 바로 사성제라는 체계로 정리된 것이며, 연기의 형식으로 정리되어 설법된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한다.36)

36) 필자와 유사한 생각을 폴 윌리엄스 ․ 앤서니 트라이브, 앞의 책, pp.91-92에서 볼 수 
    있다. “아마도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하면서(선정을 하면서) 무
    아와 연기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 이런 견지에서 무아와 연기는 모두 무
    명(avidyā)을 치유하는 최종적인 명(明, vidyā)의 두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IV. 12지 연기 각 지분의 의미 해석

 

본 장에서는 연기의 형식 중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가장 정연한 발달 형태를 보여주는

12연기의 각 지분의 의미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내용은 SN. II, Vibhaṅgasutta(「분별의 경」),

Parivīmaṃsanasutta(「완전한 탐구의 경」), Naḷakalāpasutta(「갈대묶음의 경」),

그리고 DN의 Mahānidānasutta(「인연에 대한 큰 경」)의 해석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37) 아울러 이러한 해석은 고통의 소멸이란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는

것도 강조해 둔다.

37) 특히 이 「분별의 경」의 해석과 「인연에 대한 큰 경」의 해석에 크게 의지했다. 「분별의 경」은 
    SN의 다른 경전에서 볼 수 없는 각 지분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어, 12지 연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노사(老死, jarā-maraṇaṃ) : 늙음과 죽음.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이며 

경험적인 고통의 내용. 이러한 늙음과 죽음은 생을 조건으로 생겨난다.

 

생(生, jātī) : 늙음과 죽음의 원인[因緣]. 태어남이 고통인 것은 태어남 자체가 고통이라기보다는 

늙음과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있다. 태어남은 신(神), 건달바, 야차, 귀신, 인간, 

동물, 곤충 등의 다양한 모습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태어남이든 그것은 늙음과 

죽음의 고통과 무관할 수 없다.

 

유(有, bhavo) : 태어남의 원인. 존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 세계. 즉 욕계 ․ 색계 ․

무색계이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을 때 욕망의 세계에 태어나는 존재들이 있게 되

고,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을 때 색계의 세계에 태어나는 존재들이 있게 되며,

순수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을 때 무색계의 세계에 태어나는 존재들이 있게 된다. 따

라서 유(有)란 존재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 혹은 존재의 세 가지 유형을 말하는 것으

로 이해된다.

 

취(取, upādānaṃ) : 유(有)의 원인. 집착을 말한다. 세 가지 유형의 세계는 집착을 근거로 한다. 

집착은 욕취(欲取, kāmūpādānaṃ), 견취(見取, diṭṭhūpādānaṃ), 계금취(戒禁取,sīlabbatūpādānaṃ), 

아설취(我說取, attavādūpādānaṃ)의 네 종류가 있다. 욕취는 물질대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가지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욕망의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다. 

견취는 견해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견해란 ‘나/영혼이 있다는 견해(我見)’등의 

형이상학적 견해를 포괄한다. 계금취는 불필요하고 잘못된 규칙이나 계율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고, 아설취란 내가 있다는 견해, 내가 제일이라는 자만에 근거한 집착을 말한다. 이러한 

집착의 정도에 따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계에서 존재의 모습을 취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집착으로 인해 행위(업, kamma)가 이루어지고, 그 업의 결과 세 가지 유형의 존재를 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갈애(渴愛, taṇhā) : 집착의 원인. 번뇌 가운데 가장 강력한 번뇌 중 하나이다.38) 이것은

근원적인 욕망으로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취

(取)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전에서는 갈애를 色愛(rūpataṇhā) ․

聲愛(saddataṇhā) ․ 香愛(gandhataṇhā) ․ 味愛(rasataṇhā) ․ 觸愛(poṭṭhabbataṇhā) ․ 法愛

(dhammataṇhā)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 다른 정의로는 욕애(欲愛kāma-taṇhā), 유애

(有愛bhava-taṇhā), 비유애(非有愛, vibhava-taṇhā)라고도 한다.39)

38)『숫따니빠따』에서 갈애는 윤회의 원인이자 해탈과 열반의 성취를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본다. 이필원의 논문 「Suttanipata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 고찰」, 
   「선문화연구」 6집, (서울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09)를 참조하라. 그런데 연기의 
    체계에서는 무명이 가장 근본 번뇌로 제시된다. 이는 관법(vipasanā)의 계발과 보급
    에 따른 관점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이 해된다. 갈애가 중시되는 것은 4정려 수행에
    서 중시된다. 붓다는 4정려 수행을 통해 갈애를 비롯한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그러
    한 번뇌의 제거에 대한 확신[智慧]을 통해 완전한 해탈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39) Vin. I, p.10.에서는 사성제의 집성제를 설하면서 갈애를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수(受, vedanā) : 갈애의 원인. 느낌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시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청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후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미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촉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 정신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이다. 경전
    에서는 이 느낌에 의해서 다양한 不善法이 생겨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략
    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느낌→갈애→욕구→획득→결정→욕탐→집착→소유→인색→보호→폭력과 다툼, 비방, 중상모략, 

거짓40)

40) DN. I, pp.58-59. 이필원, 「초기불교의 정서 이해」, 인문논총」 제67집(서울 : 서울대학교인 
    문학연구원, 2012), pp.61-62의 내용도 참조하라.

 

이는 느낌으로부터 갈애가 발생하고 이 갈애로 인해 다양한 건전하지 못한 심리적 요소들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이것은 여전히 갈애가 번뇌의 근본 원인이자, 폭력과 거짓을 낳은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 느낌은 세 가지가 있다. 즉 락수(樂受), 고수(苦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락수란 즐거운 느낌으로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고수란 괴로운/싫은 느낌으로 괴롭고 싫은 느낌을 주는 대상에 대한 미움/증오/

회피의 경향을 갖게 한다. 불고불락수란 중성적 느낌으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따라서 불고불락수는 어떤 마음작용을 야기하지는 않는다.41)

41) MN.I, p.303. 안옥선,「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서울 : 불교시대사, 2002, p.90. 
    그리고 관련 내용으로 이필원, 앞의 논문, 「초기불교의 정서 이해」, pp.58-60에서 
    느낌(受)와 관련된 논의 를 다루고 있다. 

 

촉(觸, phasso) : 느낌(受)의 원인. 여섯 가지 접촉(六觸身)을 말한다. 즉 시각의 접촉(眼觸), 

청각의 접촉(耳觸), 후각의 접촉(鼻觸), 미각의 접촉(舌觸), 촉각의 접촉(身觸), 정신의 

접촉(意觸)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6근이 대상을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섯 가지 

이외의 접촉은 불가능하다.

 

육입(六入, saḷāyatanaṃ) : 촉의 원인. 여섯 가지 감각이 발생하는 장소, 영역을 말한다. 즉 보는 

감각이 일어나는 장소(眼入), 듣는 감각이 일어나는 장소(耳入), 냄새맡는 감각이 일어나는

장소(鼻入), 맛을 보는 감각이 일어나는 장소(舌入), 촉감이 일어나는 장소(身入), 정신(마음)의 

활동이 일어나는 장소(意入)를 말한다. 이렇듯 감각이 발생하는 장소/영역이 있어야지만이 

그것을 통해 접촉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감각이 발생하는 장소 혹은 영역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눈이나 귀로 한정하지 않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박쥐는 

이른바 눈이 퇴화하여 보는 시각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독특하게 초음파를 이용하여 

대상이 있는 곳이나 형체를 파악하니 이것이 바로 안입(眼入)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태는 

다르지만 각각의 감각이 일어나는 장소/영역은 구분이 된다. 그래서 빨리경전 등에서는 이것을 

장소/영역을 의미하는 āyatana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명색(名色, nāmarūpaṃ) : 접촉의 원인. 명(名)이란 느낌(受, vedanā), 지각(想, saññā), 의

도(思, cetanā), 접촉(觸, phassa), 정신활동(作意, manasikara)이고42), 색(色)이란 사대(四大 :

지 ․ 수 ․ 화 ․ 풍)와 사대소조(四大所造 : 사대에 의해 파생된 물질)를 말한다. 명색은 한마디로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로 생명체는 크게 대별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42) 주석서(Srp. II. 16)에서는 느낌은 수온(受蘊), 지각은 상온(想蘊), 의도와 접촉과 정신
    활동은 행온(行蘊)으로 해석한다. (전재성, 앞의 책,『쌍윳따니까야』2, p.62, 각주 
    20의 내용을 재인 용함.) 즉 오온 가운데 색과 수상행의 네 가지가 명과 색의 내용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오온 중 식이 제외된 것은 연기의 지분으로 따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그렇다면 왜 수는 앞에서 제시되었음에도 名의 
    요소로 언급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한 가지 가능한 이해는 수상사촉작의는 의식의 
    내용으로 표출되고, 색은 육입 등의 감각기관과 관련된 것이기에, 앞의 수 ․ 촉 ․ 육입과 
    뒤에 나오는 식과 행의 내용을 명색이란 개념으로 한 번 정리해 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된다.

 

식(識, viññāṇaṃ) : 명색의 원인. 여섯 가지 의식을 말한다. 즉 시각의식, 청각의식, 후각의식, 

미각의식, 촉각의식, 정신의식을 말한다.

 

행(行, saṅkhāro) : 식의 원인. 형성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으로 구분된다. 신구의의 세 가지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무명(無明, avijjā) : 행의 원인. 무명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 이 무명이 제거되면 바로 

지혜가 드러나게 된다. 즉 명지(明知)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은 나를 둘러싼 세상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어리석음에 근거해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행위를 하게 되면, 

여기에서 다양한 의식적 내용들이 표출되게 된다. 그러한 의식적 내용들은 감각의 장소/영역을 

활성화 시키고 그것이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다양한 느낌을 발생시키게 된다. 이러한 느낌을 

통해 갈애(갈망하는 욕구)가 발생하고, 잘못된 집착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존재의 유형을 갖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라는 현실적 고통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V. 결론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연기란 번뇌의 소멸을 통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나타낸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우선 문헌적으로 성립이 가장 빠르다고 하는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연기의 내용을 고찰해 보았다.『숫따니빠따』에서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연기의 내용과는 다소 다르지만, 기본적인 발상이 동일함을 알 수 있었고, 

그 핵심적 내용은 고통의 원인 규명과 소멸이란 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상윳따니까야』에서는 고통의 소멸이란 측면에서의 연기 내용과 연기를 이법(理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병존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은 이후 연기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근거가 

이미 경전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에서 기술된 연관된 내용도 연기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빨리 율장과 우다나(Udāna)와 같은 문헌들에서 붓다는 바로 

연기를 깨달아 ‘붓다’가 된 것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실 주지하듯이, 

붓다의 자내증이 연기라고 기록되고 있는 경전이나 문헌들은『상윳따니까야』와 빨리 율장의

「대품」 그리고 우다나 정도이다. 다른 경전들에서는 자내증으로 사성제나 선정의 성취를 통한 

번뇌의 멸진에서 찾는다. 따라서 연기를 자내증으로 보는 이러한 흐름은 연기를 이법(理法)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논리적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연기의 기본적인 의미는 번뇌의 원인 규명과 소멸이라는 수행론적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우리가 보고 있는 12연기와 같은 다양한 연기의 형식은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대중에게 설법을 하는 과정에서 정리된 내용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붓다는 이론가가 아니다. 실천적 수행가였기에 처음부터 사성제, 팔정도, 12연기와 같은 이론을 

체계적으로 세운 뒤에 가르침을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설법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알기 쉽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찾던 과정에서 이러한 교설들이 하나하나 체계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논문에서 이루어질 내용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