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간화선 위빠사나 논쟁/오용석

실론섬 2016. 6. 27. 17:48

간화선 위빠사나 논쟁

-간화선에의 선정과 사띠(sati) 개념의 적용 문제를 중심으로-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제46호(2016.03) pp. 217∼248]

오용석/연세대 인문학연구원

barabogi1014@naver.com

 

1. 들어가는 말

II.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배교연구의 흐름과 과제

III. 간화선은 선정을 부정하는가

IV. 간화선에 있어서 사띠 개념의 적용 문제

V. 맺는 말

 

[요약문]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불교 수행법은 크게 전통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간화선과 현대에 들어와 유행된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수행법은 각각 동아시아의 북방 대승불교와 남방 상좌부불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단순히 수행방법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주로 간화선의 입장에서 그동안 쟁점이 되었던 주제에 대하여 논의해 보았다. 첫째는 간화선에 있어서 선정이 갖는 위상에 대한 논의이다. 간화의 공부법은 지나친 좌선의 배격이나 선정 무용론을 주장하는 파격의 입장에 서기 보다도 언제 어느 때나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의 계발이었다. 당대 조사선이 가진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극복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간화선은 선정의 바탕 없이 지혜만을 추구한다거나 혹은 반드시 4선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행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간화의 방법은 선정의 배격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선정의 추구에 있지도 않다. 간화선은 정혜등지의 입장에서 선정과 지혜의 문제를 중도적으로 수용하였다. 둘째는 사띠에 대한 광의적인 해석을 선불교의 핵심 사상인 정념(正念: 無念)과 직접 연관시킨다거나 간화선의 수행론에 적용할 때에는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초기․ 상좌부 불교의 정념(正念: sati)은 그 자체가 지혜를 계발하는 수단임에 비하여 선불교의 정념은 결과에 가까운 것으로 이 둘을 등치시키는 것은 현대 심리학에서 사띠 개념을 조작적 정의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개념 해석의 재고가 필요하다. 특히 사띠에는 어원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기에 선종의 ‘자연지(自然知)’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I. 들어가는 말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불교 수행법은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간화선과 현대에 들어와 유행된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수행법은 각각 동아시아의 북방 대승불교와 남방 상좌부불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단순히 수행 방법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 간화선이 가지고 있는 활발발한 기상과 직관 그리고 위빠사나가 가지고 있는 섬세함과 분석적 통찰은 모두 260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불교의 개혁성과 전통성을 보여준다. 중국 남송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에 의하여 제창된 간화의 수행은 고려의 보조지눌(1158∼1210)을 통하여 수용되어 현대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록 중국 불교라는 틀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을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게 수용하고 토착화 시킨 것은 한국 불교의 뛰어난 점으로 800여년을 우리와 함께 해온 수행의 역사는 전통을 넘어 한국 불교 수행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지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위빠사나 수행은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1904∼1982) 수행법을 중심으로 30여 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한국 불교 수행의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위빠사나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이며, 심리치료적이며, 대중성이 강한 특징들이 간화선보다는 뚜렷하기에 기성의 불교에 대하여 제도적 한계를 경험했던 불자들이나 기존 불교의 문제점을 인식했던 사람들이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1)

1) 오용석, 「명상과 선, 그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일고」, 「한국불교학」 제74호(서울: 
   한국불교학회, 2015), pp.300-305 참조.

 

위와 같은 흐름 속에서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이 가진 특징을 비교하고,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200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이끈 장본인들은 주로 간화선 수행자나 선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아니라 초기․상좌부 불교를 수행하고 연구하였던 사람들에 의하여 주도 되었다. 

 

본 논문은 위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먼저 현재까지 진행된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비교한 선행 연구를 정리․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현재까지 진행된 대부분의 연구들이 위빠사나를 중심에 두고 간화선의 문제를 살펴본다거나 둘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파악하는데 역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이 소통과 상생을 통하여 서로의 장단점을 수용하고 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다양성과 그것이 우리 사회와 현실에 반영된 개별적인 차이를 보여주는데 까지는 진전되지 못하였다. 간화선 수행의 근거를 비교적 부처님의 원음과 가까운 교설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 둘이 가지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인 측면들을 그냥 지나치거나 무시하기에는 많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우선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비교한 연구의 흐름과 과제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중요 쟁점으로 남아 있는 선정과 사띠의 문제를 간화선의 입장에서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즉 초기․상좌부 불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간화선의 선정에 대한 논의가 타당한지 등을 간화선의 입장에서 논구하려는 것이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의 사띠(正念, sati)를 선불교의 정념(正念: 無念)과 일치하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선(禪)학자들의 주장이 타당한지 등도 검토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을 통하여 불교 수행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상적 지평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

 

II. 간화선과 위빠사나 비교 연구의 흐름과 과제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비교한 연구는 2001년 ?불교평론? 6호에서 기획한 ‘간화선 논쟁의 몇 가지 관점’에서 이병욱, 송위지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2003년 제7차 선우논강에서 각묵스님이 발제한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로 촉발 되었다. 

 

이병욱은 「천태 4종삼매, 그리고 간화선․위빠사나」에서 천태의 4종 삼매인 상좌삼매, 상행삼매, 반행반좌삼매, 비행비좌삼매를 소개하면서 위빠사나 수행의 4념처 수행과 간화선이 4종삼매 가운데에 비행비좌삼매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비행비좌삼매에 대한 투철한 이해는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접점을 제시해 줄 있으며, 모든 수행법은 한 맛이라고 주장하였다.2) 송위지는 「위파사나와 간화선의 교집합적 접근」에서 2000년 10월 24일 개최된 간화선 대토론회에서 진제스님이 간화선만이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하여 간화선 뿐 아니라 묵조선, 위빠사나 모두 훌륭한 수행법으로서 간화선만을 최고로 볼 수 없다고 역설하면서 간화선 지상주의를 경계하였다.3) 이병욱과 송위지는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모두 공통점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2) 이병욱, 「천태 4종삼매, 그리고 간화선․위파사나」, 「불교평론」 6호(서울: 불교평론사, 
   2001), pp.264-268.
3) 송위지,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교집학적 접근」,「불교평론」 6호(서울: 불교평론사, 
   2001), pp.244-247.

 

인경스님은 「위빠사나와 간화선」에서 남방불교의 위빠사나가 초기불교의 법(法)이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북방불교의 간화선은 대승불교의 성(性)이라는 개념에 철학적인 기반을 두고 있음에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초기불교가 현상으로서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인무아(人無我)의 관점에 놓여 있다면, 상대적으로 대승불교는 현상 자체마저 부정하는 법무아(法無我)의 입장에 서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실천적인 입장에서 위빠사나는 대상을 인정하고 그것과 하나 됨을 추구함으로써 번뇌를 극복하려는 입장에 놓인다면, 간화선은 대상관계를 배제하고 견성을 강조한 점에서 번뇌 자체를 부정한 것에 차이가 있다고 논하였다.4) 인경스님은 위 논문에서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차이점에 주목하였다.
4) 인경, 「위빠사나와 간화선」, 「보조사상」 제19집(서울: 보조사상연구원, 2003), 
   pp.129-156.

2004년「불교평론」19호에서 다시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접점과 경계’를 기획하여 각묵스님, 김재성, 조준호가 참여하였다. 각묵스님은 2003년 제7차 선우논강의 발제문을 다시 정리하여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른가」를 발표하였다. 스님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같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같은 점으로 첫째 둘 다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하며, 둘째로는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법 각각 화두나 법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수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이 둘은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간화선은 ‘오직 직관’을, 위빠사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하고 있다고 논의하였다. 또한 간화선에서 말하는 견성과 위빠사나에서 지향하는 해탈열반의 실현은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것으로 같은 현상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 모두 돈오의 길이며,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서로 모자란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관계임을 역설하였다.5)
5) 각묵,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른가」, 「불교평론」 19호(서울: 불교평론사, 2004), 
   pp.133-143.

김재성은 「위빠사나와 간화선, 다른 길 같은 목적」에서 주로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수행법을 위주로 위빠사나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소개하였다. 그는 초기불교의 사상을 보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파불교의 입장을 초선을 포함하는 사선을 미리 닦지 않아도 대상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집중할 때 깨달음의 체험이 가능하다는 순수 위빠사나의 입장에서 『청정도론』과 주석문헌을 강조하는 찰나삼매를 강조하였다. 또한 위빠사나가 이론적인 교(敎)의 입장보다는 수행에 의하여 얻어지는 지혜를 강조하는 것에 비하여 간화선은 일차적으로 화두라고 하는 의심을 일으키는 ‘언어적 개념’에 집중하는 선정의 측면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또한 간화선은 인도의 위빠사나 수행에서 마음에 대한 집중과 관찰을 부각시킨 수행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마음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법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였다.6)
6) 김재성, 「위빠사나와 간화선, 다른 길 같은 목적」,「불교평론」 19호(서울: 
   불교평론사, 2004), pp.148-152.

조준호는 「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간화선과의 연결고리를 위한 비판적 검토-」에서 먼저 위빠사나 수행이 ‘초선 이전부터 가능하다’는 견해나 또는 ‘초선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가 이루어진다’거나, 아니면 ‘처음 시작부터 관(觀)을 할 수 있다’거나 심지어 ‘선정의 바탕 없이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의하여 화두선 우위론에 상대적으로 위빠사나 열등론이 제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은 특정 부파의 위빠사나 행법으로 개량된 것일 뿐 아니라 초기불교의 위빠사나인 것처럼 소개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위빠사나와 화두선은 근본적으로 다른 행법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불교경전의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선정체계인 4선을 통하여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조준호는 4선의 선정론을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주장하고 있으며 4선에 해당되는 내용이 화두선에도 등장한다고 말한다. 또한 초기불교의 ‘염의 확립’은 성성적적한 가운데 간단없이 ‘화두에 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며, 차이가 있다면 위빠사나가 신수심법과 같은 모든 상황에 간단없는 대면을 강조한다면, 간화선은 ‘특정한 화두만의 집중적인 대면’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간화선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위빠사나를 한정적으로 전문화.특성화시킨 행법으로 수행의 결과 또한 일치한다고 말하였다.7) 조준호의 간화선에 대한 선정에 대한 입장은 각묵스님과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간화선의 선정에 대한 관점이 어떠한지 등에 대해서 좀 더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띠의 행법과 화두에 드는 행법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는 각묵스님과 일치하면서도 이것을 다시 선정과 연계시키고 있는 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7) 「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간화선과의 연결고리를 위한 비판적 검토-」, 
   「불교평론」 19호(서울: 불교평론사, 2004), pp.155-160.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시기의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 논쟁은 당시 초기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사띠 개념을 중심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관한 다양한 논의의 흐름과 함께 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김재성, 「순관에 대하여-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임승택,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사나」; 조준호, 「사띠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염의 교설에 대한 재검토-」; 임승택, 「vitakka(尋) 개념의 수행론적 의의에 대한 고찰」; 정준영,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의 의미와 쓰임에 대한 일고찰」 등의 많은 논문이 발표되어 논쟁이 이어졌으며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 논의는 주로 초기․상좌부 불교 전공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2010년 이병욱은 「불교평론」 44호에서 기획한 ‘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의 제하에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를 발표하였다. 위 논문에서는 남방 상좌부불교에 대한 인식이 바뀐 점을 중심으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대립 현상에 주목하여 두 수행법의 공통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으로서 간화선의 화두는 ‘법념처’의 한 요소에 속한다는 것과 ‘칠각지’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분모로 가능하다는 관점을 피력하였다.8) 물론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화합과 공존이 중요하다는 입장도 가지고 있으나 2001년도에 비하여 간화선의 위상이 위축되었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8) 이병욱,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 「불교평론」 44호(서울: 불교평론사, 2010), 
   pp.172-176.

 

인경스님은 2012년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공존할 수 없는가?」를 통하여 본인의 앞선 논의인 「위빠사나와 간화선」과는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스님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존’이 중요한 것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당위와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2001년부터 평론지, 신문 등에서 시작된 논의를 정리하면서 그동안의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연구가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평론적인 연구였다면, 간화선자들이 초기․상좌부 불교의 수행론에 대하여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와 더불어서 양자에 대한 ‘유기적인 통합’에 대한 대안 제시를 시도하였다. 특히 영성심리학의 개념을 간화선의 심성론에서 찾으려 한다거나 사띠(sati)와 간화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으나9) 문헌의 인용과 적용의 문제에 있어서 적지 않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9) 인경,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공존할 수 없는가?」, 「보조사상」 제38집(서울: 
   보조사상연구원, 2012), pp.69-89.

월암스님은 직접적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박태원의 「정념(正念, Samma-sati)과 화두(話頭)」에 나타난 ‘정념’의 개념을 수용하여 초기․상좌부 불교의 정념, 즉 사띠(sati) 수행과 선종이 설하고 있는 정념(正念: 無念)의 개념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방의 사띠(혹은 위빠사나)수행을 통한 해탈열반과 화두 타파로 얻어지는 견성성불이 똑같이 정념의 실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라고 주장하고 있다.10)
10) 월암, 「친절한 간화선」(서울: 담앤북스, 2012), p.281.

이 외에도 최근에는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직접 비교한 연구는 아니지만, 남종선의 하택신회의 선사상을 간화선의 계보적 원류로 전제하여 사념처의 주요 개념을 비교한 연구로 전무규의 「하택 신회의 선사상과 사념처수행론에서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비교 고찰」을 들 수 있다. 논자는 논문에서 마음챙김 즉 사띠를 모든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상태, 즉 비출 아무런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비추고 있는 거울처럼 존재하는 본성인 자연지로 배대하여11) 사띠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11) 전무규, 「하택 신회의 선사상과 사념처수행론에서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비교 고찰」, 
   「한국선학」 제41호(서울: 한국선학회, 2015), pp.160-161.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기는 2001년의 논의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에 주목하였다. 이 때의 시점은 위빠사나에 비하여 간화선의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시기로 위빠사나의 입장에서 공통점을 의식하려는 입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의 시기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 보다는 차이점을 인식하였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초기․상좌부 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사띠와 선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세 번째 시기는 2010년과 2012년의 논의로서 위빠사나와 간화선 수행의 통합적 접근을 시도하여 공존을 모색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2010년부터는 이미 위빠사나 수행의 위상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간화선 수행과 더불어 불교의 수행법으로 자리 잡은 시기로 오히려 간화선이 대중화의 문제에 직면하여 반성적 입장을 취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위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1>
시기(년) 연구자 특징
2001 이병욱, 송위지 등 공통점 주목
2003∼2004 인경스님, 각묵스님, 김재성, 조준호 등 차이점 인식
2010∼현재 이병욱, 인경스님, 월암스님, 전무규 등 공통점 주목

 

논자는 위와 같은 일련의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 연구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선 대부분의 논의가 위빠사나의 입장에서 이루어졌고, 둘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주목하였으며, 더 나아가 선(禪)학자들이 초기․상좌부 불교의 연구 성과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간화선의 입장에서 선학자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더 나아가 간화선의 입장에서 쟁점이 되었던 문제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논점은 주로 조준호에 의하여 제기되었던 문제로 간화선에 있어서 선정이 갖는 위상에 대한 논의이다. 조준호는 간화선과의 연결고리를 위한 비판적 검토로 4선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나 각묵스님은 이러한 의견과 반대로 간화선은 선정보다는 지혜를 중시한다고 하였다. 논자는 간화선의 선정에 대한 입장을 육조혜능의 「단경」에서 제시된 ‘정혜등지’와 마조, 임제, 대혜 등의 어록 등을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논점은 사띠와 간화선의 관계이다. 이 문제는 주로 월암스님 등에 의해 제기된 문제로 위빠사나의 사띠와 선불교의 정념(正念: 無念)을 같은 의미로 해석한 것 등에 대한 것이다. 논자는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뿐만 아니라 간화선에서 정념(正念) 갖는 의미를 정혜등지(定慧等持)의 입장 등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III. 간화선은 선정을 부정하는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성장한 불교는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가 및 도가와 끊임없이 충돌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중국적인 불교로 변모되어갔다. 비록 기원후 401년 구마라즙이 장안에 도착하여 대규모의 역경사업을 펼친 이후 노장적, 격의적 불교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고 본격적인 불교사상이 퍼지게 되었으나 노장사상은 그 후로도 불교와의 접촉을 이어나가 불교의 중국화를 추진하여 마침내 중국인의 체질에 맞는 불교이자 중국적 색채가 농후한 선종을 이루게 되었다. 선종의 근본 특색은 언어문자를 매개로 하는 이론보다는 진리의 체험적 직관을 중시하는 것이다.12)

12) 森三樹三郞 지음, 오진탁 옮김, ?불교와 노장사상?(서울: 경서원, 1992), pp.37-48.

 

이러한 선종은 수행 방법과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역시 중국의 전통 사상과 융합하여 발전되었다. 선종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유식불교 등의 다른 불교의 종파들에 비하면 참으로 단순하며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밀종처럼 만다라와 진언,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정신집중법이나 호흡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그 외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수행법들 일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때로는 좌선도 거부한다. 자각은 한 순간에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정신집중이나 호흡법 내지는 상상력을 이용해서 마음을 맑게 하거나 고요하게 하는 데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기나긴 과정이 있지만 선종에서 중시하는 자각은 특별한 단계가 없고 즉각적인 것이다.13) 그러면 이러한 선종의 문화 사상적 바탕위에서 간화선의 선정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자.

13) 박석, 「“大巧若拙”의 심미관과 선종의 깨달음」, 「中國文學」 제66호(서울: 한국중국어
    문학회, 2011), pp.257-258.

 

각묵스님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른가」에서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근본적으로 같은 점은 둘 다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하는 점이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스님은 ?육조단경?의 “오직 견성만을 논하지 선정을 통한 해탈은 논하지 않는다[唯論見性 不論禪定解脫]”를 인용하여 간화선이 지혜로써 돈오견성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스님의 선정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성격을 4선(禪)과 같은 선정에서 찾기도 하고 그 교두보 역시 선정에서 확보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물론 선정은 초기경전 곳곳에서 부처님이 강조하고 계신다. 그러나 선정수행은 깨달음을 위한 필수 요소는 아니다. 초기경전 곳곳에서 선정체험 없이 5온과 12처와 18계의 무상․고․무아와 연기법 등을 철견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자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정을 중시하는 초기경전들에서도 선정을 깨달음이라고 설한 곳은 결코 없다. (…) 그래서 선정을 강조하는 경들에서도 4선-3명, 4선-6통, 4선-4처-상수멸로 해탈열반 혹은 깨달음을 설명하지 4선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설한 곳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정체험을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만나는 교두보로 이해하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14)

14) 각묵,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른가」,「불교평론」19호(서울: 불교평론사, 2004), pp.133-134.

 

각묵스님은 또한 화두를 챙겨 의정을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는 수행은 흑산귀굴에 앉은 것으로 표현되는 묵조사선(삼매)이며, 간화선 수행자들이 좌선 지상주의에 빠져 화두를 단순히 집중을 위한 대상쯤으로 여긴다면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15)

15) 각묵, 앞의 논문, pp.134-135.

 

그러면 각묵스님의 말과 같이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성격을 4선과 같은 선정에서 찾으며 그 교두보 역시 선정에서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조준호의 주장을 살펴보자. 조준호는 「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간화선과의 연결고리를 위한 비판적 검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렇게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연결고리는 바로 선정사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법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대략적으로 선정사상을 통해 양자간의 공통점과 연결고리를 살펴보면, 화두선과 함께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 또한 좌선을 강조한다. 위빠사나는 적어도 제4선과 같은 높은 수준의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립문자 언어도단’의 화두선은 위빠사나의 바탕인 사선(四禪) 가운데 초선에 ‘말과 언어의 그침’, 그리고 다시 화두선에서 ‘분별(사량)을 쉬는 것’이나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지는 그대로 제2선의 ‘언어가 쉬는 것에 따른 분별사유(尋伺)의 쉼’과 통한다. (…) 마찬가지로 사선은 제행(諸行)의 순차적인 쉼을 보여 주는데 이는 화두선에서 ‘조작심을 쉬는 것’과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화두선에서 강조하는 성성적적 또한 본래 ‘지극한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제3선의 정지(正智, sampajana)와 또한 ‘지극한 평정심이나 고요함’을 의미하는 제4선의 사(捨, upekha)와 내용면에 있어 그대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16)

16) 조준호, 「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간화선과의 연결고리를 위한 비판적 검토-」, 
    불교평론」 

 

위의 두 가지 의견의 가장 커다란 쟁점은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지혜’라는 결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필수 요소로 ‘선정’이 가진 위상과 가치에 대한 문제이다. 각묵스님은 선정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17)하는 반면에 조준호는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경지와 초선에서 4선까지 나타나는 경계를 상호 비교하여 이 둘이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17) 각묵스님이 주장하는 선정의 체험 없이 해탈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입장은 김재성이 
    주장하는 “이처럼 혜해탈을 통해 아라한이 된 붓다의 제자가 붓다 시대에 많이 존재했
    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 가운데는 4선을 전혀 닦지 않고 찰나정에 의지해서 관행(觀行)
    을 닦아 아라한이 된 순관행자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순관행자란 (네 가지)선정을 
    얻지 못한 건관행자를 말한다. 이처럼 순관(純觀)에 의해 아라한과의 성취가 가능하다
    는 것을 초기경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순관에 
    대하여-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불교학연구」 제4호(서울: 불교학연구
    회, 2002), pp. 277-278 참조.] 그러나 정준영은 “오늘날 상좌부 전통에서 진행하는 
    순수위빠사나 수행은 『청정도론』과 주석문헌에서 나타나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 집중은 세분화되어 위빠사나를 위한 찰나집중이 만들어졌고, 사마타 없
    이도 위빠사나 만으로 깨달음을 얻는 숙카위빠사카도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의
    미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새 오늘날 위빠사나 수행의 
    대표자리를 차지하게 된 숙카위빠사카는 초기불교가 아닌 주석문헌과 상좌부불교 
    전통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수행방법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 안에서 사마타 없는 
    위빠사나는 가능하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분리는 불가
    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정준영, 「사마타(止) 없는 위빠사나(觀)는 가능한가?」,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서울: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연구원, 2010), p.592 참조.]

 

그러면 선정과 관련된 간화선의 입장을 크게 당대의 조사선과 송대의 간화선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우선 육조혜능은 「단경」에서 정혜의 관계와 삼매에 대하여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선지식들이여. 나의 법문은 定慧를 근본으로 한다. 우선 定과 慧가 다른 것이라 말하지 말라. 定慧의 體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즉 定은 慧의 體이며, 慧는 定의 用이다. 慧가 있을 때에는 定이 慧에 있으며, 定이 있을 때에는 慧가 있다. 선지식들이여. 이것이 바로 定과 慧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定이 있은 후에 나중에 慧가 계발되거나 먼저 慧가 있은 후에 定이 계발된다는 식으로 定과 慧를 나누지 말라.18) 一行三昧라고 하는 것은 일체시 가운데에서 행, 주, 좌, 와에 항상 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淨名經?에서 말씀하시기를 ‘直心이 바로 도량이다’, ‘直心이 정토이다’고 하였다. 마음과 행동을 왜곡되게 하지 말라. 입으로 法의 바름을 말하고, 입으로 一行三昧를 설하더라도 直心을 행하지 않으면 불제자가 아니다. 단지 直心을 행하고 일체법에 있어서 집착이 없는 것을 一行三昧라고 한다. 미혹한 사람들은 法相에 집착하고 一行三昧에 집착하여 바로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망념을 제거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一行三昧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無情과 같은 것으로 도리어 도에 장애가 되는 인연이 된다.19)"

18) 唐 慧能著 郭朋校釋, ?壇經校釋?(北京: 中華書局, 2007), p.26. 인용된 원문은 다음과 
    같다. “善知識 我此法門 以定惠為本 第一勿迷 言惠定別 定惠體一不二 即定是惠體 即惠
    是定用 即惠之時定在惠 即定之時惠在定 善知識 此義即是定惠等 學道之人作意 莫言先
    定發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19) 唐 慧能著 郭朋校釋, 앞의 책, pp.27-28. 인용된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一行三昧者 
    於一切時中 行住坐臥 常行直心是 淨名經云 直心是道場 直心是淨土 莫心行諂曲 口
    說法直 口說一行三昧 不行直心 非佛弟子 但行直心 於一切法上 無有執著 名一行三
    昧 迷人著法相 執一行三昧 直言坐不動 除妄不起心 即是一行三昧 若如是 此法同無
    情 却是障道因緣.”

 

「단경」에서는 정과 혜를 나눌 수 없는 동시적인 것으로 본다. 이 둘은 시간적 공간적 선후의 관계가 아닌 것으로 마치 등불의 등과 빛의 관계와도 같은 부즉불리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에 대한 입장은 각묵스님이나 김재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선정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필수요소가 아니라는 입장보다도 오히려 “초기경전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분리는 불가능하다”는 정준영의 주장에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20)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선정’이 아닌 ‘삼매’를 깨달음의 실천적 모습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혜능이 말하고 있는 ‘일행삼매(一行三昧)’의 내용만 보아도 깊은 선정의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실천하는 모습 즉 ‘직심(直心)’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비교적 선정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나 삼매라는 용어를 보다 긍정적으로 소화시키고 있는 모습은 중국선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혜능 이후 조사선의 지평을 연 마조의 선정관을 살펴보자.

20) 정준영은 초기경전의 설명을 통해 위빠사나는 선정을 필요로 하며 독립적으로 진행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지혜제일로 잘 알려진 사리뿟따가 초선에서부터 
    상수멸정까지의 모든 단계를 성취했으며 각각의 선정 안에서 위빠사나를 진행했음을 보
    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조화는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이상적
    인 수행법이라는 것이다.[정준영, 「사마타(止) 없는 위빠사나(觀)는 가능한가?」,「불교
    사상과 문화」제2호(서울: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연구원, 2010), pp.18-19.] 논자는 
    이러한 입장을 「단경」에 결부시켜 오장애가 제거되는 선정의 성취 없이 위빠사나가 
    진행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은 정과 혜를 동시에 닦는 입장인 ?단경?과는 다
    르다고 할 수 있으나 정(定, Samādhi)을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서는 일치한다고 본다.

 

“자네가 지금 좌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좌불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혹시 좌선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이 아니며, 혹시 그대가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머무르지 않는 법을 놓고 취사선택을 해서는 안 되네. 그대가 혹 좌불을 흉내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행위와 다름이 없네. 보잘 것 없는 앉음새에나 휘둘리게 되면 정작 깊은 이치에는 이를 수가 없는 법이라네.” 회양의 가르침을 듣고 난 마조는 마치 醍醐를 마시고 난 듯한 환희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곧 회양에게 큰절을 올리고 나서 다시 물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면 無相三昧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회양이 말했다. “자네가 지금 심지법문을 익히고 있는 것은 마치 스스로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그 법의 요지를 말해주는 것은 마치 하늘이 내려주는 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대에게 이미 기연이 닿아 있으므로 꼭 도를 보게 될 걸세."21)
21)「馬祖道一禪師廣錄」 卷1(『續藏經』 69, 2a), “汝為學坐禪 為學坐佛 若學坐禪 禪非坐臥 
    若學坐佛 佛非定相 於無住法 不應取捨 汝若坐佛 即是殺佛 若執坐相 非達其理 師聞示誨 如
    飲醍醐 禮拜問曰 如何用心 即合無相三昧 讓曰 汝學心地法門 如下種子 我說法要 譬彼天澤 
    汝緣合故 當見其道.”

위와 같은 내용들을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마조는 좌선을 통하여 공을 관하고 선정에 드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이라는 것과 둘째로 무상삼매와 해인삼매 등을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자성이 본래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선정에 든다는 것은 조작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혜능이「단경」에서 말하는 ‘좌선’과 ‘선정’의 내용과 일치한다. 혜능은 “이 법문 가운데서 일체에 장애가 없어 밖으로는 일체 경계에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좌(坐)’이며,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禪)’이다. 무엇을 선정(禪定)이라고 하는가? 밖으로 상을 떠나는 것이 ‘선(禪)’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 밖으로 상에 집착하면 내심이 어지럽게 되고, 밖의 상을 떠나면 내성이 어지럽지 않다. 본성이 스스로 깨끗하고 고요한데 다만 경계에 반연하여 접촉하면 어지럽게 되며, 상을 여의어 어지럽지 않으면 고요하게 된다. 밖으로 상을 여읜즉 선(禪)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즉 정(定)인 것으로 밖으로 선(禪)이며 안으로 정(定)인 까닭에 선정(禪定)이라고 한다.”22)고 하여 본성에 입각한 좌선과 선정을 설하고 있다. 
22) 唐 慧能著 郭朋校釋, 앞의 책, p.37. “此法門中 一切無礙 外於一切境界上念不起爲坐 
    見本性不亂爲禪 何名爲禪定 外離相曰禪 內不亂曰定 外若着相 內心卽亂 外若離相 內
    性不亂 本性自淨自定 離緣觸境 觸卽亂 離相不亂卽定 外離相卽禪 內不亂卽定 外禪內
    定 故名禪定.”

또한 이러한 자성의 선정은 상이 없는 ‘무상삼매(無相三昧)’이며, ‘해인삼매(海印三昧)23)’이다. 이러한 삼매 역시 혜능이 말한 ‘일행삼매’와 그대로 통하는 것으로 모든 상에 대한 집착을 여의었으나 애써서 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삼매의 실현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입정과 출정이 자유로울뿐더러 활달하고 자재하며 자연스럽다. 깊은 고요함이 있으나 외경에 흔들리지 않으며, 외경이 다가올 때 자연스럽게 따라 흘러가기도 한다. 이러한 선정의 모습은 뒤에 「임제록」에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23)「馬祖道一禪師廣錄」卷1(『續藏經』 69, 2c), “自性本來具足 但於善惡事中不滯 喚作脩
    人 取善捨惡 觀空入定 即屬造作 (……) 前念後念中念 念念不相待 念念寂滅 喚作海印三昧 
    攝一切法 如百千異流 同歸大海 都名海水 住於一味 即攝眾味 住於大海 即混諸流.”

"임제스님이 선방 안에서 졸고 있을 때 황벽스님이 와서 보고는 주장자로 坐禪床의 판자를 ‘탁’ 한 번 쳤다. 임제스님은 머리를 들어 황벽스님인 줄 알면서도 다시 졸았다. 황벽스님은 또 다시 좌선상의 판자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웃간에 가서 수좌가 좌선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랫간의 젊은 후배는 좌선하고 있는데 그대는 여기 앉아 망상만 일으키니 그래서 무엇하겠느냐?” 그러자 수좌는 말했다. “이 노인네가 무엇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황벽스님은 좌선상의 판자를 ‘탁’ 한 번 치고는 바로 나가 버렸다."24)
24)「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卷1(『大正藏』 47, 505a), “師在堂中睡 黃蘗下來見 以拄杖
    打板頭一下 師舉頭見是黃蘗 却睡 黃蘗又打板頭一下 却往上間 見首座坐禪 乃云 下間後
    生却坐禪 汝這裏妄想作什麼 首座云 這老漢作什麼 黃蘗打板頭一下 便出去.”

이와 같은 자유자재한 삼매의 모습은 차제적인 선정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본성의 깨침을 전제로 한 선정이기에 거부할 것도 추구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달리 말하면 좌선 자체를 부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좌선에 대한 집착을 버려 자유자재한 좌선이 가능해졌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좌선에 대한 극단적 부정은 또 다른 집착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혜능, 마조, 임제에게서 보이는 선정관은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에게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러나 대혜는 간화선이라는 수행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 사람으로 좌선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 보다는 간화선의 보조적 방편으로 권장하기도 하였다. 먼저 대혜가 조사선의 기본 입장을 계승한 선정관을 살펴보자.

"옛 성인이 말하기를 “도는 닦음을 필요치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산승은 말합니다.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하는 것은 오염이며, 그윽함과 오묘함을 설하는 것도 오염이며, 좌선하고 선정을 닦는 것도 오염이며, 뜻에 집착하여 사유하는 것도 오염이며,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더 오염된 것입니다. 이것 밖에 다시 착실하게 힘을 얻을 곳이 있겠습니까? 금강의 보검으로 닥치는 대로 베어버릴 뿐, 인간의 시와 비를 관여치 마십시오. 묘총선인은 다만 이렇게 참구하세요!"25)
25)「大慧語錄」 卷24(『大正藏』 47, 916b), “古聖云 道不假修 但莫污染 山僧道 說心說
    性是污染 說玄說妙是污染 坐禪習定是污染 著意思惟是污染 只今恁麼形紙筆 是特地污染 
    降此之外 畢竟如何是 著實得力處 金剛寶劍當頭截 莫管人間是與非 總禪但恁麼參.”

위에서 “금강의 보검으로 닥치는 대로 베어버려라[金剛寶劍當頭截]”는 구절은 원오의 「벽암록」제98칙인 천평양착(天平兩錯)의 수시(垂示)에 나오는 구절이다.26)  여기서 금강의 보검은 모든 집착과 사유를 베어버리는 참구의 태도와 방법을 말한다. 간화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활구를 참구하는 것에 해당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화두에 의심이 살아있는 활구의 참구야말로 모든 번뇌망상과 상대적 분별 심지어는 수행 자체에 대한 집착까지도 녹여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혜는 기본적으로 좌선, 닦음, 선정 등 모든 집착을 부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또한 현실적인 입장에서 좌선 등을 통하여 열심히 수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불각에서 본각으로 회귀하는 시각문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27) 그러면 수행과 관련된 대혜의 입장을 살펴보자.
26)「佛果圓悟禪師碧巖錄」卷10(『大正藏』47, 221a), “一夏嘮嘮打葛藤 幾乎絆倒五湖僧 
    金剛寶劍當頭截 始覺從來百不能 且道作麼生是金剛寶劍 眨上眉毛 試請露鋒鋩看.”
27) 오용석,「대혜종고 간화선 연구」(서울: 해조음, 2015), pp.64-65.

"진정 시끄러운 곳에 있을 때라도 平床 위에 방석을 깔고 참구하는 일을 잊지 마세요. 평상시에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는 것은 진실로 시끄러운 곳에서도 쓰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곳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이는 오히려 고요함 속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28)
28)「大慧語錄」卷25(『大正藏』 47, 918c), “正在鬧中 不得忘却竹椅蒲團上事 平昔留心
    靜勝處 正要鬧中用 若鬧中不得力 却似不曾在靜中做工夫一般.”

대혜의 법문은 기본적으로 모든 수행이 일상 속에서 이루어져야하며 또한 시끄러운 환경과 고요한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좌선이라고 하는 공용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경계에서 쓰기 위한 방편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병욱은 “비행비좌삼매는 송대 이후에 크게 일어난 간화선 수행과 적어도 간접적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분석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인 비행비좌삼매와 일상생활의 어떤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화두를 의심하는 간화선은 적어도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실질적 수행법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일치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비행비좌삼매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간화선의 등장이 비행비좌삼매의 직접적 영향은 아니라 할지라도 간적접인 영향은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고 하였는데 타당한 유추라고 할 수 있다. 이병욱은 비행비좌삼매가 가진 특징을 중심으로 간화선과 위빠사나와의 연결점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선정관은 조준호가 4선정과 간화선을 직접 연결시켜 위빠사나와의 연결고리를 모색하려는 시도에 비하여 훨씬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대혜가 정좌할 때 제시한 일단의 공부 방법을 살펴보자.

"고요하게 좌선하고 싶을 때에는 오직 향 한 자루만 태우면서 고요히 앉으십시오. 앉아있을 때에는 혼침에 떨어져도 안 되고 도거의 상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혼침과 도거는 옛 성인들이 경계한 것입니다. 고요하게 앉아있을 때 이 두 가지 병이 나타나면 단지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만 드십시오. 그러면 이 두 가지 병은 물리치지 않아도 가라앉게 됩니다. 오래오래 하다보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힘을 얻는 곳입니다."29)
29)「大慧語錄」卷26(『大正藏』 47, 922b), “要靜坐時 但燒一炷香靜坐 坐時不得令昏沈 
    亦不得掉舉 昏沈掉舉先聖所訶 靜坐時纔覺此兩種病現前 但只舉狗子無佛性話 兩種病不
    著用力排遣 當下怗怗地矣.”

이러한 간화의 공부법은 의도적으로 혼침과 도거를 대치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되는 공부가 아니라 혼침과 도거라는 마음이 활동하는 자리를 화두를 드는 공부로 대신하면 된다는 것이다. 

간화선은 당대 조사선이 가진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극복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지나친 좌선의 배격을 주장한다거나 선정 무용론을 주장하는 입장에 서기 보다도 언제 어느 때나 공부가 가능한 간화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간화의 방법은 선정의 배격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선정의 추구에 있지도 않다. 화두에 대한 의심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마음의 집중과 지혜의 계발은 그 자체가 정과 혜가 어우러진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간화선은 선정의 바탕 없이 지혜만을 추구한다거나 반드시 4선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간화선은 정혜등지의 입장에서 선정과 지혜의 문제를 중도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V. 간화선에 있어서 사띠 개념의 적용 문제

최근 상좌부 전통의 위빠사나가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으면서 서양의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중국 선종의 출현과 만개 이후 한국과 중국 등의 대승불교권에서는 오랫동안 이를 소승의 수행법으로 폄하하며 선의 주류에서 제외시킨 경향이 짙다. 그러나 최근 상좌부 전통의 수행법이 국내외적으로 호응을 얻게 되면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 연구가 진행되어 양자 간의 소통을 시도하게 되었다.30) 특히 선 연구자들 가운데에 초기․상좌부 불교의 사띠(sati) 개념을 통하여 선불교와 일치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가운데 월암스님은 초기․상좌부불교의 중요 교설인 정념(正念: sati)과 조사선에서 주장하고 있는 정념(正念: 無念) 개념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31)
30) 전무규, 「하택 신회의 선사상과 사념처수행론에서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비교 고찰」, 
   「한국선학」 제41호(서울: 한국선학회, 2015), pp.141-142 참조.
31) 월암스님은 “간화선 수행의 사상적 연원은 혜능의 선법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초기불교의 사띠 개념과 선종의 ‘무념’을 연계시키고 있다.[월암, ?친절한 간화선?
    (서울: 담앤북스, 2012), p.268.]

"초기불교의 중요한 교설이자 수행법인 정념(正念: Samma-sati)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에 눈을 떠서 그 자리를 ‘지키고 서는’ 멈춤인 동시에, 그 자리에 서서 가공과 왜곡을 일삼던 세계를 더 이상 조작하지 않고 ‘그저 보는’ 혹은 ‘단지 볼 뿐인’ 관찰이다. 그리고 이 멈춤과 관찰의 연장선상에서 지(止)와 관(觀)의 두 국면이 수립된다.” 다시 말하면, 바깥 경계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물든 분별 망념에 끄달리지 않고 일체가 공한 그 자리에서 서서 보는 것이 정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면, 초기불교의 정념, 즉 sati 수행과 선종이 설하고 있는 정념의 개념은 완전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무명에 오염된 허망한 분별적 사유인 번뇌망념을 여읜 그곳이 견성에 눈뜨는 자리이며, 망념이 사라진 순일한 정념의 본래심에 계합한 마음이 즉심(卽心)이기에 “즉심이 부처(卽心卽佛)”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즉심이 바로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인 sati인 것이다."32)
32) 월암,「친절한 간화선」,(서울: 담앤북스, 2012), pp.280-281.

월암스님은 박태원의 정념(正念: sati) 개념과 선종에서 말하는 정념 즉 무념의 개념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33)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띠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3) 선종의 무념과 관련된 최근 논의로 서왕모(정도)의 다음과 같은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즉 「기신론」에 의해 무념은 진여본각에는 본래 무명망념이 일어난 적이 없는 무생(無
    生)의 뜻이 추가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중생의 본래 마음은 염불기(念不起), 심불기(心
    不起), 부동심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아 본래 마음인 진여에 계합하면 바로 부처의 지위
    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념의 제2차 목적지인 불지(佛地)와 돈오성불법
    인 무념돈오법이 성립된 것이다.”[서왕모(정도), 「『단경』에 나타난 무념(無念)의 의미
    에 관한 소고」, 「한국선학」 제42호(서울: 한국선학회, 2015), pp.226-227.]

초기불교의 사띠는 크게 ‘오근과 오력’, 팔정도, 칠각지에서 사용된다. 오근(五根, pañca-indriyāni)은 수행자가 지녀야 하는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이며, 오력(五力, pañca balāni)은 오근이 강화된 힘으로 오근의 정진력의 힘에 의해 생겨날 수 있으며 오력의 반대되는 힘들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힘을 말한다. 특히 사띠는 오력의 중간(세 번째)에 자리 잡고 있어 두 번째의 노력과 네 번째의 집중 사이에 힘의 균형을 유지해준다. 특히 사띠는 계정혜 삼학 가운데에 정학(定學)의 정정진(正精進)과 정정(正定)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 주고 있다. 따라서 사띠라고 하는 요소는 계학(戒學)인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이 잘 갖추어진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띠는 깨달음의 일곱가지 요소인 염각지(念覺支), 택법각지(擇法覺支), 정진각지(精進覺支), 희각지(喜覺支),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사각지(捨覺支) 가운데에 첫 번째 요소로 나머지 여섯 가지 요소를 이끌어 준다.34)
34) 정준영․박성현, 「초기불교의 사띠(sati)와 현대심리학의 마음챙김(mindfulness): 마음챙김 
    구성개념 정립을 위한 제언」,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제22호(서울: 한국
    심리학회, 2010), pp.4-6.

사띠(sati)란 산스끄리뜨어의 ‘√smṛ(기억하다)’를 어원으로 하는 용어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기억’, ‘인식’, ‘마음의 집중’, ‘마음의 깨어있음’, ‘마음챙김’, ‘초롱초롱함’, ‘마음의 명료함’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35)  ‘기억하다’는 의미를 지닌 팔리어(Pãli) 동사 ‘sarati’의 명사형이다. 초기경전 안에서 사띠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기억’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이라는 의미이다.36) 그리고 ‘마음챙김’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sati’ 자체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초기경전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두 가지 의미의 차이가 있다면, ‘기억’이라는 의미는 이미 경험한 사실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말하고, ‘마음챙김’이라는 의미는 현재의 대상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띠는 염(念), 억념(憶念), 의지(意止), 지념(持念), 수의(守意) 등으로 한역되었고, 현대의 불교학자들에 의해 마음챙김, 주시, 마음집중, 마음지킴, 알아차림, 수동적주의집중 등으로 풀이되었다. 『청정도론(Visuddhimagga)』에 나타난 사띠의 의미를 살펴보더라도 기억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와 함께 대상을 잊지 않고 포착하는 상태, 감각기관을 통해 일어나는 번뇌의 침입에서 마음을 보호하며 대상을 마주하여 잊지 않고 챙기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띠는 표면에 떠있는 마음챙김이 아니라, 물속에 가라앉은 커다란 바위처럼 깊이 있는 마음챙김이며, 불선법(不善法)이 들어올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37)
35) T. W. Rhys Davids, Pali-English Dictionary(London: Henley and Boston, 1986), p.672.
36) 각묵스님, ?초기불교입문?(서울: 이솔, 2014), p.135.
37) 정준영․박성현, 앞의 논문, pp. 8-9.

특히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의 성취를 위한 위빠사나 명상의 내적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① 주의 기울임(manasikāra, 作意, attention), ② 사띠(sati, 念, mindfulness), ③ 알아차림(sampajañña, 正知, awareness), ④ 집중(Samādhi, 三昧, concentration), ⑤ 지혜(pañña,慧, Wisdom)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사띠’의 우리말 번역어와도 혼용되는데, ‘사띠’라는 말에는 어원적으로 ‘안다(jānāti<jñā)’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삼빠잔냐’에는 ‘안다(to know)’의 의미가 포함된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땅을 고를 때 호미의 역할이 사띠에 해당된다면 잡석의 많고 적음을 판단하는 일은 ‘삼빠잔냐(sampajañña)’에 가깝다. 따라서 ‘앎’의 의미를 지닌 ‘알아차림(awareness)’은 ‘사띠’보다 ‘삼빠잔냐’에 가까운 우리말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경전에서 ‘사띠’와 ‘삼빠잔냐’는 서로 쌍을 이루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사띠’와 ‘삼빠잔냐’는 서로 보완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 같은 의미로 활용되지 않는다. 경전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을 지니고 있는데 이 두 개념을 같은 것으로 잘못 보아 양자를 애매하게 혼용하여 사용해버리면 ‘사띠’는 물론 ‘삼빠잔냐’의 성격을 규명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38)
38) 정준영․박성현, 앞의 논문, pp.9-10.

이러한 사띠의 개념을 위의 박태원이 정의한 개념과 비교해 보자. 그가 말한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국면에 눈을 떠서 그 자리를 ‘지키고 서는’ 멈춤인 동시에, 그 자리에 서서 가공과 왜곡을 일삼던 세계를 더 이상 조작하지 않고 ‘그저 보는’ 혹은 ‘단지 볼 뿐인’ 관찰이다.”39) 라는 말에는 약간 오해의 소지가 보인다. “가공과 왜곡을 일삼던 세계를 더 이상 조작하지 않고 ‘그저 보는’ 혹은 ‘단지 볼 뿐인’ 관찰이다.”라는 말은 여실하게 사물을 보아 실상을 파악한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월암스님은 이를 다시 확대 해석해서 “즉심이 부처(卽心卽佛)”, “무명이 주도하는 세계 왜곡과 오염의 인식 체계와 계열에 휘말려 들지 않는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사띠’의 의미와 더욱 멀어진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사띠는 삼학 가운데에 결과인 혜학(慧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정학(定學)의 단계에 속한다. ‘아는 작용’이 없는 기능으로 집중과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해석은 현대 심리학자들이 사띠에 대하여 갖고 있는 조작적 정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은 연구자들에 따라 마음챙김의 정의에 주의, 알아차림, 집중 등의 요소는 물론 마음챙김의 배양에 필요한 태도나 주의 조절의 요소 혹은 마음챙김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인지적 통찰의 요소까지 포함하여 광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40) 월암스님의 해석은 이와 같은 광의적 해석에 가깝다. 초기불교의 수행론에서 본다면 앎의 의미를 지니지 않은 마음 챙김을, 앎의 의미를 지닌 알아차림(正知)이나 수행의 결과인 지혜(智慧)와 혼용하는 것은 자칫 수행의 과정과 결과를 동일시하는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명상 초보자가 명상 훈련을 통해 대상에 주의를 유지하는 능력을 배양했다고 해서 알아차림이나 지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에서 궁극적인 행복으로 가는데 필수적인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계(戒)라고 하는 도덕성의 바탕 위에서 그 역할을 발휘하는 요소 즉 정(定)으로 궁극적인 지혜로 이끌어주는 도구의 성격이 강하다.41)
39) 박태원, ?정념(正念, Samma-sati)과 화두(話頭)?(울산: 울산대학교출판부, 2005), p.44.
40) 정준영․박성현, 앞의 논문, p.23.
41) 정준영․박성현, 앞의 논문, pp.24-25.

월암스님은 더 나아가 “간화선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중도정관의 자리에서 화두를 보는 것(看話)이다. 즉 중도의 자리에서 본 바 없이 화두를 보며, 의심하는 바 없이 화두를 보며, 의심하는 바 없이 의심하게 되므로, ‘이뭣고?’하는 그 첫 자리가 이미 깨달음에 발을 딛고 있는 구경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사선에서 주장하고 있는 정념(正念: 無念)과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중요 교설인 정념(正念: sati)의 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42)고 논의하고 있는데 초기불교의 정념(正念: sati)은 그 자체가 지혜를 계발하는 수단임에 비하여 선불교의 정념(正念: 無念)은 결과에 가까운 것으로 이 둘을 등치시키는 문제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초기불교의 사띠 개념을 조작적 정의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42) 월암, 앞의 책, p.280.

전무규는 「하택신회의 선사상과 사념처수행론에서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비교 고찰」43) 에서 “마음챙김은 사념처와 사선의 모든 수행과정 전체를 관통하는 과정이며 결과이고, 또한 과정이나 결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면에서 신회의 정(定)과 대응한다 하겠다.”44)는 다소 모호한 해석을 하면서 신회가 제시한 거울의 비유를 통하여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정의하고 있다. 그는 “신회의 ‘거울’이 상징하는 바는 ‘대상이 있든지 없든지 비추는 본연의 능력’이다. 이것은 자연지이고, 이 본연의 능력으로 비추어 아는 작용을 지(知) 또는 지혜라고 하였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모든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상태, 즉 비출 아무런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비추고 있는 거울처럼 그대로 거기 있다. (…) 이런 점에서 마음챙김[念]은 본성인 자연지로, 그리고 알아차림[正知]은 자연지의 아는 작용인 지(知)로 연결 지울 수 있을 것이다.”고 논하였는데 이것 역시 정념(正念, sati)이 가진 원래의 의미를 선불교의 입장에서 격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기․상좌부 불교의 사띠는 자연지와 같이 본연의 능력으로 갖추고 있는 앎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43) 전무규는 남종선 하택종을 간화선의 계보적 원류로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본 논문
    에서는 전무규의 논의를 간화선과의 연계 위에서 이해하였다.
44) 전무규, 앞의 논문, p.159.

그렇다면 어째서 위와 같이 초기․상좌부 불교의 정념(sati)과 선불교의 핵심 개념인 정념[無念]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일치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일까?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소통과 융섭에 대한 자발적 욕구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전과 북전의 이질적인 수행문화의 만남에서 파생되는 외형적 이질성만을 문제 삼아 배타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서로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둘 다 불교 수행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 수행문화라는 공통점을 융회하여 보다 나은 해탈의 방법론을 창출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45) 그러나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을 모색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도 공통점을 지향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공통점은 차이점을 근거로 더욱 가치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차이점에 대한 인식은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 주는 동시에 불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상적 지평을 여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45) 월암, 앞의 책, p.265.


대혜가 「대혜어록」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일단은 간화선의 정념(正念)을 이해하는데 많은 점을 시사해 줄 것이다. 대혜의 말을 살펴보자.

"이미 생사의 일이 마음에 있으면 心術이 바르게 됩니다. 심술이 바르게 되면 일상의 인연을 만나는 곳마다 자연스럽게 맡겨두면 되는 것으로 생각으로 잡념을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어떠한 ‘삿됨’도 ‘그름’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삿됨’과 ‘그름’이 없어지면 오직 正念만 존재하게 됩니다. 오로지 정념만 있게 되면 바로 이치가 사물을 따라 변화하며, 이치가 사물을 따라 변화하면 사물 역시 이치를 얻어 융통하게 됩니다. 사물이 이치를 얻어 융통하게 되면 바로 힘을 더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힘을 덜게 될 때가 바로 도를 배우는 힘을 얻는 곳입니다. 힘을 얻게 되면 무한히 힘을 덜게 되고, 힘을 던 곳에서 무한한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때가 되면 心意識을 억지로 누르지 않아도 자연히 고요하게 될 것입니다."46)  
46) 大慧,「大慧語錄」20(『大正藏』 47, 898a), “既以生死事在念 則心術已正 心術既正
    則日用應緣時 不著用力排遣 既不著排遣 則無邪非 無邪非則正念獨脫 正念獨脫則理隨
    事變 理隨事變 則事得理融 事得理融 則省力纔覺 省力時便是學此道得力處也 得力處
    省無限力 省力處得無限力 得如此時 心意識不須按捺 自然怗怗地矣.”

위에서 생사에 대하여 발심하여 마음의 씀[心術]이 바르게 되었다는 것은 삼학 중에서 계학이 정립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정념(正念)’의 현전은 화두에 대하여 마음챙김이 깊어져 의정이 생겨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47) 간화선의 수행은 이처럼 의정을 통한 정혜겸수가 수행의 기본 구조이며 사띠에 해당되는 정념(正念)은 의정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념은 월암스님이 말한 즉심즉불의 무념(無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선불교에서 사용하는 정념(正念) 개념이 반드시 사띠의 한역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다양한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기에 오히려 선불교라는 구조적 사상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함을 보여준다. 선불교의 정념과 사띠의 정념(正念)이 가진 비교 문제는 후일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47) 5근․5력과 간화3요의 유기적 관계를 미산스님은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간화선에서는
    대의정을 축으로 하며 대신심과 대분심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대의정은 지혜, 삼매, 
    그리고 정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의정은 지혜의 근원지인 자성청정심에 
    계합을 대전제로 한다. 의단이 형성되면 모든 분별경계가 붙을 수 없고, 의단 자체가 
    지혜의 발광체라고 볼 수 있다. 대의정이란 늘 화두와 함께하는 것, 즉 화두챙김이 있
    으므로 가능하며 이것이 정념이다. 정념이 지속적으로 현전하면 자연히 마음이 안정
    되고 삼매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정념은 초기 불교 수행뿐만 아니라 간화선 
    수행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미산스님, 「간화선의 3요체와 37보리분법의 5근․
    5력에 대한 비교 고찰」, 「간화선 수행과 한국禪」, 종학연구소 엮음(동국대학교 출
    판부, 2012), p.138.]각묵스님 역시 같은 맥락에서 “간화선의 의정은 초기불교와 
    상좌부 불교에서 강조하는 마음챙김․삼매․통찰지의 세 가지 심리현상이 극대화된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각묵스님, 앞의 책, pp.171-172.)”고 하면서, 사띠의 개
    념을 간화선에 적용할 때 ‘화두챙김’ 또는 ‘마음챙김’이라고 하여 원래의 의미에 
    부합시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의 적용은 사띠에 대한 조작적 정의에 의지
    하지 않고도 선불교의 맥락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산스님의 ‘대의정은 지혜의 근원지인 자성청정심에 계합을 전제로 한
    다.’는 것과 ‘의단 자체가 지혜의 발광체’라고 하는 설명은 의정이 지혜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인지 다소 모호한 느낌을 준다.

V. 맺는 말

간화선은 당대 조사선이 가진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극복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수행의 방법적인 면에서 일종의 변화와 상승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간화의 공부법이 지나친 좌선의 배격이나 선정 무용론을 주장하는 파격의 입장에 서기 보다도 언제 어느 때나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의 계발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간화의 방법은 선정의 배격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선정의 추구에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우리의 생멸하는 마음 자체를 이용하여 화두에 대한 참구를 통하여 마음의 집중과 지혜를 계발한다. 의심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선정과 지혜는 그 자체가 정과 혜가 어우러진 수행이기 때문에 간화선이 선정의 바탕 없이 지혜만을 추구한다거나 혹은 반드시 4선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간화선은 정혜등지의 입장에서 선정과 지혜의 문제를 중도적으로 수용하여 제시한 것이다. 

또한 사띠의 광의적인 해석을 선종의 핵심 사상인 정념[無念, 卽心卽佛]과 직접 연관시킨다거나 간화선의 수행론에 적용할 때에는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초기불교에서 사띠의 개념은 물속에 가라앉은 커다란 바위처럼 깊이 있는 마음챙김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음집중[定]과 지혜[慧]의 공동의 기반이 되는 수행법으로 수행의 대상에 대해 반복적이며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의미하는 수념(隨念)으로 나타난다.48) 초기․상좌부 불교의 정념(正念: sati)은 그 자체가 지혜를 계발하는 수단인 것으로 선불교의 정념(正念: 無念)과 일대일로 대응하여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사띠에는 어원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기에 선종의 ‘자연지(自然知)’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48) 정준영․박성현, 위의 글, p.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