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빨리 조문 불음주계에 대한 재고/김한상

실론섬 2016. 7. 5. 14:44

빨리 조문 불음주계에 대한 재고: 

그 어원학적 분석과 계의 두 가지 측면들을 중심으로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43호(2015.06) pp. 245∼268

김한상/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Ⅰ. 들어가는 말

Ⅱ. 수라메라야맛자(surāmerayamajja)

Ⅲ. 빠마다(pamāda)와 압빠마다(appamāda)

Ⅳ. 멀리함(vāritta)과 실행(cāritta)으로 살펴본 불음주계

Ⅴ. 나가는 말

 

요약문

본 논문은 빨리 조문 불음주계를 새롭게 조망하고 이를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모색한다. 이를 위해서 그것을 어원학적으로 분석하고서, 멀리함(vāritta)과 실행(cāritta)이라는 계의 두 가지 측면들로 나누어 고찰한다. 전통적으로 불음주계는 재가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늘 지켜야 하는 5계(五戒, pañca-sīla)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이 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불교인들 사이에서 부족한 실정이다. 한역 조문 ‘不飲酒戒’는 부정적으로 언급되며 오직 알코올과 술만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반면에 빨리 조문 불음주계는 “수라메라야맛자 빠마닷타나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로서, “(나는) 방일의 원인이 되는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빨리 조문 불음주계는 수라(surā), 메라야(meraya), 맛자(majja)라는 세 종류의 취하게 하는 물질들을 언급하고 있다. 맛자(majja)라는 단어는 알코올과 술뿐만 아니라, 방일(pamāda)의 원인이 되는 마약, 아편, 마리화나, 대마, 각성제와 같이 의료 이외의 목적으로 쓰이는 환각성 물질들도 뜻한다. 다른 계들과 마찬가지로, 불음주계는 멀리함과 실행이라는 두 가지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불음주계의 근본정신은 취하게 하는 물질들을 섭취함으로써 생기는 방일을 방지하고, 테라와다 불교의 구원론에서 강조되는 불방일(appamāda)을 계발하는 것이다. 불음주계는 수행자가 사띠(sati)와 함께 하는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초석을 놓아주며, 도덕(戒, sīla), 집중(定, samādhi), 지혜(慧, paññā)의 삼학(三學, tisso sikkhā)을 계발하여 마침내 열반(涅槃, nibbāna)을 얻는데 이바지한다. 

 

Ⅰ. 들어가는 말

 

불음주계(不飮酒戒)는 재가 신자가 지켜야 하는 불교 윤리의 초석인 5계(五戒, pañca-sīla)1) 가운데 다섯 번째 계이다.2) 또한 재가 신자가 우뽀사타(uposatha)나 집중 명상 기간에 지켜야 하는 8계(八戒, aṭṭha-sīla)3)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불음주계는 술 마시는 나쁜 습관 때문에 정신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다. 그래서 불음주계는 개인과 사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다른 네 가지 계와 다르게, 개인과 그 개인의 몸과 마음과의 관계를 다룬다.4) 물론 음주는 그것을 행하는 개인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기는 해도 말이다. 술에 취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통제력을 잃게 되고 그 때문에 다른 네 가지 계들마저도 쉽사리 어기게 된다는 점에서 불음주계는 다른 네 가지 계들의 초석으로 다른 네 가지 계들을 지켜주는 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음주계는 오늘날 대승과 테라와다를 막론하고 다른 네 가지 계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으며, 재가 신자들 사이에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1) 5계(五戒, pañca-sīla)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pāṇātipāt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갖지 않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adinnād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 
   “성적 불륜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 습니다(kāmesu micchācāra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
   “거짓말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musāvāda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surā-meraya-majja-
   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2) 빨리 조문 불음주계가 5계(五戒, pañca-sīla)의 하나로 언급될 때는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인 반면, 
   출가자를 대상으로 한 바일제(波逸提, pācittiya) 51조로 언급될 때는 “Surāmerayapāne 
   pācittiyaṃ”이다. (Vin.IV, p.110) 본 논문은 양자 가운데 전자를 고찰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출가자의 불음주계는 다루지 않는다. 
3) 테라와다 불교에는 두 가지 버전의 8계(八戒, aṭṭha-sīla)가 있다. 하나는 우뽀사타 
   8계(aṭṭhaṅgika uposatha sīla)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생계를 여덟 번째로 하는 8계 
   (ajivaṭṭhamaka-sīla)이다. 8계는 5계에 다음의 세 가지 계를 더한 것이다. ① “제 
   시간이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vikāla bhoja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 ② “춤과 노래와 오락을 즐기거나 화환․ 향수․ 화장품․ 
   장신구를 두르는 것을 멀리 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nacca-gīta-vādita-
   visūkadassanā-mālāgandha-vilepanadhāraṇa-maṇḍana-vibhūsanaṭṭh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 ③ “높고 호화로운 침상의 사용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uccāsayana-mahāsaya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 
4) Bodhi, Bhikkhu, Going for Refuge & Taking the Precepts,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2009, p.34.

 

먼저 동아시아의 대승 불교권을 살펴보자. 이 지역 불교인들의 술에 대한 명칭들을 살펴보면, 불음주계를 경시하거나 음주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풍조가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일본의 불교인들은 술을 지혜의 물이란 뜻의 ‘한야또(般若湯)’라고 부르며5), 우리나라 불교인들도 술을 ‘곡차(穀茶)’6)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이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밀교(密敎)와 일본의 정토교(淨土敎)에서는 승려의 음주 행위가 용인된다.7)

5)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석오진 옮김,「붓다 안의 예수, 예수 안의 붓다: 비교
   사상의 측면에서 본 불교」, 서울: 운주사, 2008, p.171. 
6) 곡차(穀茶)란 말 그대로 곡식으로 만든 차이다. 요즘엔 곡차라는 단어가 술 마시고 
   싶은 출가자와 재가 신자에게 편리하고 그럴싸한 빌미를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우
   리가 빨리 조문 불음주계를 면밀히 분석해 본다면 곡차라는 말 자체가 난센스(non
   -sense)이며, 음주의 자기 합리화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7) Jack S. Blocker, David M. Fahey, Ian R. Tyrrell, Alcohol and Temperance in 
   Modern History: An International Encyclopedia, Vol I, Santa Barbara, CA: ABC-
   CLIO, Inc., 2003, p.121. 

 

사정은 테라와다권도 크게 낳지는 않은 듯하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음주계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비세속적이고 엘리트답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되며 음주가 상류 사회의 호사(豪奢)로 여겨지고 있다.8) 전통적으로 미얀마도 술 마시는 풍습이 보편적이진 않았으나 최근 들어 도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음주 습관이 급속히 유행하고 있다. 

8) ibid, p.121.

 

이와 같이 오늘날 대승과 테라와다를 막론하고 불음주계가 잘 지켜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 이른 데에는 무엇보다도 불교계 내부에서 불음주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가 결여된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조문 불음주계에 담긴 의미(attha)와 글자(pada)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승 불교권에서는 5계와 8계 가운데 다섯 번째 계가 ‘불음주계(不飮酒戒)’라는 한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술에 대한 개념과 불음주계의 근본 취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불음주계가 경시되고 있는 지금의 위기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   

 

빨리 조문 불음주계가 5계와 8계의 하나로 언급될 때는 “수라메라야맛자 빠마닷타나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이다. 그 대략적인 뜻은 “(나는) 방일의 원인이 되는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을 멀리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로서 한역 조문 불음주계와는 세부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빨리 조문 불음주계를 어원적으로 상세히 분석하고, 계의 두 가지 측면들인 ‘멀리함(vāritta)’과 ‘실행(cāritta)’으로 불음주계를 대별해서 살펴봄으로써 그동안 경시되어온 불음주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 현대적 적용 방법을 모색해본다. 

II. 수라메라야맛자(surāmerayamajja)

우리가 보통 ‘술’이라고 일컫는 것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에 대한 총칭이다. 그러나 빨리 조문 불음주계에서는 이것이 ‘수라메라야맛자(surāmerayamajja)’로 세분되어 설명되고 있다. 수라(surā)는 √su(증류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9) 이러한 어원적 분석을 고려해본다면, 수라는 증류과정을 통해서 술의 강도와 향이 증가된 ‘증류주(distilled liquor)’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인도의 전통은 수라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리그웨다(Ṛgveda)」는 취하는 음료들로 소마(soma)와 수라(surā)를 언급하고 있다.10) 즉 소마는 신들의 음료로, 수라는 인간의 음료로 각각 묘사하고 있다. 소마는 희생제(犧牲祭)에 음용되었고 그 음용에 종교적 신성함이 부여된 반면에 수라는전적으로 세속적이었으며 독한 술이었다.11)  
9) Monier Monier-Williams, A Sanskrit-English Dictiona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899, p.1235. 
10) RV.129.10. 
11) Basham, A.L, The Wonder That Was India, New York: Grove Press, Inc., 1959, p.37.

테라와다 불교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술을 인간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 술의 시작이라고 본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제512번째『자따까(Jātaka)』인 「꿈바 자따까(Kumbha-jātaka)」에서 산림 감독관(vana-caraka)인 수라(Sura)와 고행자(tāpasa)인 와루나(Varuṇa)가 히말라야(Himālaya)에서 술을 처음 발견했기 때문에 술이 수라(surā)라고도 불리고 와루니(vāruṇī)라고도 불리게 되었다고 해석한다.12) 한편 붓다고사는『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에 대한 주석서인 「사랏타빡까시니(Sārattha-ppakāsinī)」에서 아수라(Asura)와 관련시켜 수라를 해석하기도 한다. 마가라는 이름의 바라문 학도(Magho nāma māṇavo)가 32명의 동료들과 함께 나중에 도리천(忉利天, Tāvatiṃsa)이 되는 아수라의 세계에 삭까(Sakka)로 태어나자, 아수라들은 간다빠나(gandapāna)라고 하는 술을 준비하였다. 삭까는 동료 신들에게 그것을 마시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술에 취한 아수라들을 수미산(須彌山, Sineru) 아래로 내동댕이 쳤다. 중간에 아수라들은 의식을 회복하고는 다시는 수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기 때문에 아수라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13)  
12) Ja.V, p.13, “Iti Surena ca Varuṇena ca diṭṭhattā tassa pānassa surā ti ca 
    vāruṇīti ca nāmaṃ jātaṃ.”
13) Spk.I, p.338, “Te Sineru-vemajjha-kāle saññaṃ labhitvā, tātā, na suraṃ 
    ti āhaṃsu. Tato paṭṭhāya Asurā nāma jātā.”


『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와 주석서들에서는 수라(surā)가 삣타수라(piṭṭha-surā), 뿌와수라(pūva-surā), 오다나수라(odana-surā), 낀나빡킷따(kiṇṇa-pakkhittā), 삼바라상윳따(sambhāra-saṃyutta)의 다섯 가지로 나열되고 있다.14) 삣타수라(piṭṭha-surā)에서 삣따(piṭṭha)는 밀가루를 뜻한다. 그래서 이 용어는 ‘밀가루로 만든 술’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뿌와수라(pūva-surā)에서 뿌와(pūva)는 뿌빠(pūpa)와도 동의어인데, 이 두 용어들은 떡이나 빵을 뜻한다. 그래서 뿌와수라는 ‘떡이나 빵을 원료로 만든 술’을 뜻한다. 오다나수라(odana-surā)에서 오다나(odana)는 쌀이나 쌀밥이다. 그래서 오다나수라는 ‘쌀을 원료로 만든 술’을 뜻한다. 낀나빡킷따(kiṇṇa-pakkhittā)에서 낀나(kiṇṇa)는 효모나 이스트(yeast)를 뜻한다. 빡킷따(pakkhittā)는 ‘넣다, 투입하다.’라는 뜻의 동사 빡키빠띠(pakkhipati)의 과거분사이다. 그래서 낀나빡킷따는 ‘효모를 넣어 만든 술’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삼바라상윳따(sambhāra-saṃyutta)에서 삼바라(sambhāra)는 재료, 요소 성분을 뜻한다. 상윳따(saṃyutta)는 saṃyujjati(결합하다, 묶다, 상응하다)라는 동사의 과거분사이다. 그래서 삼바라상윳따는 ‘재료들을 한데 섞어 만든 술’을 뜻한다. 이러한 설명들을 종합해 본다면, 대체로 수라는 밀가루, 빵, 쌀, 효모, 각종 재료들을 원료로 한 일종의 ‘곡주(穀酒)’로 추측된다. 한편 호너(I.B.Horner)는 이를 ‘발효주(fermented liquor)’로 해석하고 있다.15) 그러나 빅쿠 보디(Bhikkhu Bodhi)는 수라의 어원적인 해석을 보다 중시하여 이를 술의 강도와 맛을 높이기 위해 증류 과정을 거친 ‘증류주’로 보고 있다.16) 
14) Khp-a, p.26; Vin. IV, p.110; Vv-a. p.73. 
15) Horner, I.B, The Book of the Discipline Volume II, London: PTS, 1959, p.385.
16) Bodhi, Bhikkhu, op.cit., p.33. 본 논문은 빅쿠 보디의 해석을 따르기로 한다.

 

메라야(meraya)는 보통 수라와 결합되어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위나야 삐따까」와 다른 빨리 주석서들에서 메라야는 뿝파사와(pupphāsava), 팔라사와(phalāsava), 굴라사와(guḷāsava), 마다사와(madhāsava), 삼바라 상윳따(sambhāra-saṃyutta)의 다섯 가지로 나열되고 있다.17) 뿝파사와(pupphāsava)는 ‘꽃’을 뜻하는 뿝파(puppha)와 ‘주정(酒精)’을 뜻하는 아사와(āsava)의 복합어로서 ‘꽃으로 만든 술’을 뜻한다. 팔라사와(phalāsava)는 ‘과일’을 뜻하는 팔라(phala)와 아사와(āsava)의 복합어로서 ‘과일로 만든 술’을 뜻한다. 굴라사와(guḷāsava)는‘당밀(糖蜜)’이나‘설탕’을 뜻하는굴라(guḷa)와 아사와의 복합어로서 ‘당밀이나 설탕으로 만든 술’을 뜻한다. 마다사와(madhāsava)는 ‘꿀’을 뜻하는 마다(madha)와 아사와의 복합어로서 ‘꿀로 만든 술’을 뜻한다. 삼바라삼윳따(sambhāra-saṃyutta)는 앞서 언급한 대로 ‘재료들을 한데 섞어 만든 술’을 뜻한다. 그래서 메라야는 꽃, 과일, 당밀이나 설탕, 꿀, 재료들을 배합하여 만들어진 ‘발효주’라고 볼 수 있다.   
17) Khp-a, p.26; Vin. IV, p.110; Vv-a.p.73

맛자(majja)는 √mad(취하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술’로 번역되어 왔다. 예컨대 T.W.Rhys Davids & William Stede는 「빨리․ 영어사전(PED)」에서 ‘intoxicant, intoxicating drink, wine, spirits’라고 정의하고 있다.18) 그러나 사실은 술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쿳다까빠타(Khuddakapāṭha)』에 대한 주석서인 「빠라맛타조띠까(Paramatthajotikā)」에서 붓다고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9)
18) Rhys Davids, T. W. and Stede, W. ed. Pāli-English Dictionary, London: PTS, 
    1921-1925, p.514. 
19) Khp-a, p.26.

‘수라메라야맛자 빠마닷타나’에서 수라는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삣타수라, 뿌와수라, 오다나수라, 낀나빡킷따, 삼바라상윳따이다. 메라야도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뿝바사와, 팔라사와, 굴라사와, 마다사와, 삼바라상윳따이다. 둘(수라와 메라)은 취하게 하는 의미에서 맛자이다. 또는 미치게 하거나 방일하게 하는 것을 마심으로써 취하는 것은 모두 맛자라고 부른다.20)  
20) Khp-a, p.26,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an ti ettha pana surā ti pañca surā: 
    piṭṭhasurā pūvasurā odanasurā kiṇṇapakkhittā sambhārasaṃyuttā cā ti, merayam 
    pi pupphāsavo phalāsavo guḷāsavo madhvāsavo sambhārasaṃyutto ti pañca 
    vidhaṃ majjan ti taññāyam eva madanīyaṭṭhena majjaṃ, yaṃ vā pan’ aññam 
    pi kiñci atthi madanīyaṃ, yena pītena matto hoti pamatto. idaṃ vuccati majjaṃ.” 

빅쿠 보디는 이러한 설명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취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맛자는 수라메라야에 의해서 한정되거나 여기에 덧붙여짐으로써 구절의 나머지와 관련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에 전체 구문은 취하게 하는 것들인 증류주와 발효주를 뜻한다. 두 번째 경우에는 증류주, 발효주, 다른 취하게 하는 것들을 뜻한다. 만약이 두 번째 읽는 방법이 수용된다면, 불음주계는 아편, 대마, 환각제와 같이 의료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환각성 약물들을 명확히 포함할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읽는 방법으로도 불음주계는, 취하게 하는 물질들을 섭취함으로써 방일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지도 목적에서 이러한 약물들을 암묵적으로 금지한다."21) 
21) Bodhi, Bhikkhu, op.cit., pp.33-34.

이와 같이 맛자는 읽는 방법에 따라서 수라와 메라에 종속되는 술의 일종으로도, 술과는 별개의 환각성 물질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읽든지 간에, 수라메라야맛자는 우리가 통속적으로 일컫는 ‘술’이라는 개념 이상으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名色, nāma-rūpa)을 방일(放逸, pamāda)에 빠뜨리는 모든 종류의 먹거리와 마실 거리를 포함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사실 오늘날에는 술도 문제지만 마약, 마리화나, 대마초, 환각제, 각성제, 흥분제, LSD 등도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골칫거리로 부각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이러한 환각성 물질들이 빨리 조문 불음주계에 구체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붓다 당시의 고대 인도에 이러한 환각성 물질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음주계의 의미(attha)에 비추어볼 때 의료 이외의 목적으로 이러한 환각성 물질들을 복용하는 행위는 불음주계를 깨뜨리는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III. 빠마다(pamāda)와 압빠마다(appamāda)

이제 “수라메라야맛자 빠마닷타나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라는 빨리 조문에서 ‘빠마닷타나(pamādaṭṭhāna)’를 살펴보자. 이것은 빠마다(pamāda)와 타나(ṭhāna)라는 용어가 서로 결합된 것이다. 빠마다(pamāda)는 접두사 pa(앞, 먼저)와 √mad(취하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22) 이러한 어원적인 설명이 뜻하듯이, 빠마다의 뜻은 방일, 나태, 부주의이다. 그리고 그 반대말인 압빠마다(appamāda)는 불방일(不放逸), 나태하지 않음, 주의 깊음, 마음챙김, 정근(精勤)이다. 타나(ṭhāna)는 장소, 지역, 곳, 거처, 지방을 뜻하지만, 기회, 조건, 원인을 뜻하기도 한다.23)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빠마닷타나는 ‘방일의 원인’을 뜻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전적 정의들만 가지고는 테라와다 불교의 수행론(bhāvanā-vāda)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압빠마다(appamāda)와 그 반대 개념인 빠마다(pamāda)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상 테라와다의 전통은 압빠마다를 ‘사띠를 잃어버리지 않음(satiyā avippavāsa)’24) 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압빠마다와 사띠(sati)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 점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이 용어들이 나타나는 빨리 성전25)의 구체적인 문맥과 그에 대한 주석서들의 설명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2) 이 용어는 빨리 성전에서 출가자가 식사할 때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을 묘사하는 
    정형구인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만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치장을 위해서도 
    아니며(n’eva davāya na madāya na maṇdanāya na vibūsanāya)”에서 사용
    되고 있다.(MN.I, p.355; AN.I, p.114, 145; Dhs. p.231; Pug. p.21; Vbh. p.249). 
    그리고 ① 젊음에 대한 도취(yobbana-mada), ② 건강에 대한 도취(ārogya-mada), 
    ③ 삶에 대한 도취(jīvita-mada)의 세 가지의 도취로 정형 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AN.I, pp.145-146) 
23) Rhys Davids, T. W. and Stede, W. ed. op.cit., p.289. 
24) 예를 들면 Sv.I, p.104; Spk.II, pp.213, 223; Dhp-a.IV, p.26 등.

 

붓다는 『상윳따 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압빠마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태양이 떠오를 때 여명이 앞장서고 전조가 되듯이, 비구에게 팔정도가 생길 때에는 압빠마다의 구족이 앞장서고 전조가 된다.26)
26) SN.V, p.30, “Suriyassa bhikkhave udayato etam pubbaṅgamam etam pubbanimittaṃ 
    yad idam aruṇuggaṃ evam eva kho bhikkhave bhikkhuno ariyassa aṭṭhaṅgikassa 
    maggassa uppādāya etam pubbaṅgamam etam pubbanimittam yad idam 
    appamādasampadā l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땅 위에서) 걸어 다니는 생명체들의 발자국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코끼리 발자국에 포함되나니,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가 으뜸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선한 법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압빠마다를 뿌리로 하고 압빠마다로 모이고 압빠마다가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불린다.27)
27) SN.V, p.43, “Seyyathāpi bhikkhave yāni kānici jaṅgamānaṃ pāṇānaṃ padajātāni 
    sabbāni tāni hatthipade samodhānaṃ gacchanti. hatthipadaṃ tesam aggam 
    akkhāyati yad idam mahantattena. evam eva kho bhikkhave ye keci kusalā dhammā 
    sabbe te appamādamūlakā appamādasamosaraṇā. appamādo tesaṃ dhammānam 
    aggam akkhāyati.”

 

비구들이여, 이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법에 의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불선법들이 버려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압빠마다이다. 비구들이여, 압빠마다를 지닌 비구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불선법들이 버려진다.28)
28) AN.I, p.11, “Nāhaṃ bhikkhave aññaṃ ekadhammam pi samanupassāmi yena     anuppannā vā akusalā dhammā uppajjanti uppannā vā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yathayidaṃ bhikkhave pamādo.

 

빠세나디 꼬살라(Pasenadi Kosala) 왕은 붓다에게 “세존이시여, 참으로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성취하여 확고하게 하는 하나의 법이 있습니까?”29)라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29) SN.I, p.86, “Atthi nu kho bhante eko dhammo yo ubho atthe samadhiggayha tiṭṭhati 
    diṭṭhadhammikaṃ c-eva atthaṃ samparāyikaṃ cā ti?”

 

대왕이여, 압빠마다라는 하나의 법이 참으로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성취하여 확고하게 합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땅 위에서) 걸어 다니는 생명체들의 발자국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포함되나니,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가 으뜸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압빠마다라는 하나의 법이 참으로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성취하여 확고하게 합니다.30)
30) SN.I, pp.86-87, “Appamādo kho mahārāja eko dhammo ubho atthe samadhigghayha 
    tiṭṭhati diṭṭhadhammikaṃ c-eva atthaṃ samparāyikaṃ cā ti. Seyyathāpi mahārāja yāni 
    kānici jaṅgamānam pāṇānam padajatāni sabbāni tāni hatthipade samodhānaṃ gacchanti. 
    hatthipadaṃ tesam aggam akkhāyati yad idam mahantena evam eva kho mahārāja eko 
    dhammo ubho atthe samadhiggayha tiṭṭhati diṭṭhadhammikaṃ c-eva atthaṃ samparāyikam 
    cā ti.”

 

『담마빠다(Dhammapada)』의 「압빠마다왁가(Appamāda-vagga)」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시작된다.

압빠마다는 불사에 이르는 길이요, 빠마다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니 압빠마다를 지닌 사람은 죽지 않으며, 빠마다를 지닌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31)
31) Dhp.21게, “Appamādo amataṃ padaṃ Pamādo maccuno padaṃ,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상기 게송에 대해 붓다고사는 “빠마다란 태만한 상태와 사띠를 잊고 사띠를 버린 상태를 말한다.”32)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이와 같이 압빠마다는 사띠를 지닌 상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점은 붓다가 알라와까(Āḷavaka)라는 약카(yakkha)에게 읊은 다음 게송과 이에 대한 붓다고사의 주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32) Dhp-a.I, p.228, “Pamādo ti pamajjanabhāvo muṭṭhasaccasaṅkhatāssa satiyā 
    vossaggas’ etaṃ nāmaṃ.”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아라한들의 법에 믿음을 가지고 방일하지 않고 사려 깊은 자는 배우고자 함을 통해 지혜를 얻느니라.33)
33) SN, I,p.214, “Saddahāno arahataṃ. dhammaṃ nibbānapattiyā sussūsā labhate paññaṃ.
    appamatto vicakkhaṇo.”

 

붓다고사는 이 게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34)
34) Sv.I, p.104; Spk.II, pp.213, 223, Dhp-a.IV, p.26 등

"그리고 그는 사띠를 잃어버리지 않아서 방일하지 않고,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려 깊음을 얻어 지녀야 한다. (중략) 방일하지 않음을 통해서 배운 것을 잊지 않게 된다. (중략) 방일하지 않음을 통해서 배운 법을 호지한다. 사려 깊음을 통해서 호지한 법들의 뜻을 숙고한다."35)
35) Spk.I, p.332, “Evam sussūsam pi ca sati-avippavāsena appamatto subhāsitadubbhāsit’ 
    aññutāya vicakkhaṇo eva labhati, na itaro. Ten’āha appamatto vicakkhaṇo ti. Evaṃ yasmā 
    saddhāya paññāya lābha-saṃvattanikaṃ paṭipadaṃ paṭipajjati, sussūsāya sakkaccaṃ 
    paññādhigam’ūpāyaṃ suṇāti, appamādena gahitaṃ na pamussati. Vicakkhaṇatāya 
    anūnādhikaṃ aviparītañ ca gahetvā vitthārikaṃ karoti. Puna sussūsāya vā ohita-soto 
    paññā-paṭilābha-hetuṃ dhammaṃ suṇāti, appamādena sutvā dhammaṃ dhāreti, 
    vicakkhaṇatāya dhatānaṃ dhammānaṃ attham upaparikkhati.”

 

이러한 붓다고사의 주석에서 알 수 있듯이 압빠마다를 통해서 사띠는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압빠마다는 단순히 ‘방일하지 않음’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을 구분할 줄 아는 도덕적 분별력을 가리킨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사띠(sati)라는 말은 √smṛ(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예를 들면 아눗사띠(anussati), 빠띳사띠(patissati) 등이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들이다. 그러나 수행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띠는 깨어있는 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각성, 명료한 마음 등을 뜻한다.36) 『디가 니까야
(Dīgha-Nikāya)』의 제16번째 경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sutta)」에 붓다의 유훈으로 나오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사라지는 법이니 방일하지 말고 성취하라(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ti).”37)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을 살펴보자. 붓다가 45년에 걸쳐 설한 방대한 가르침은 사실상 이 유훈으로 모두 집약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붓다고사는 “방일하지 말고 성취하라appamādena sampādetha).”라는 문장을 “사띠를 잃어버리지 않음으로 해야 할 모든 바를 성취하라(sati-avippavāsena sabbakiccānisampādeyyātha).”38)라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디가 니까야』에 대한 복주서인 「린앗타완나나(Līnatthavaṇṇanā)」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36) Rhys Davids, T. W. and Stede, W. ed. op.cit., p.672. 
37) DN.II, p.156. 
38) Sv.II, p.593. 

 

"그런데 이것은 뜻으로는 지혜를 수반한 사띠이다. 여기서 사띠의 작용은 굉장한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수반한 사띠라고 설명하였다. 전체 붓다의 말씀을 다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압빠마다라는 단어에 담아서 주었다."39)  
39) DAṬ.II, p.239, “so pana atthato ñāṇūpasaṃhitā sati, yasmā tattha satiyā vyāpāro 
    sātisayo, tasmā sati-avippavāsenāti vuttaṃ. Appamādapade yeva pakkhipitvā adāsi, 
    atthato tassa sakala-Buddhavacana-saṅgaṇhanato.”

이와 같이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이해되는 압빠마다는 사띠를 잃어버린 상태이며, 그 반대 개념인 압빠마다는 사띠를 지닌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붓다고사는 압빠마다와 사띠는 마음을 방호하기 위해서 함께 실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40) 이외에도 빨리 문헌들에서는 빠마다와 압빠마다에 대한 언급들이 상당히 많지만 더 이상의 인용은 생략한다.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인용들을 통해서 압빠마다가 불선(不善, akusala) 즉 악(pāpa)을 피하고 선(善,kusala)을 행하는 데 늘 방심하지 않음 즉 ‘늘 깨어 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점에서 사띠의 의미를 확실하게 드러낸다는 점, 그리고 그 반대 개념인 빠마다는 단순한 나태나 부주의가 아니라 ‘마음이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들 사이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40) Spk.II, pp.390-391, “압빠마다와 사띠는 마음을 수호하기 위해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감각 장소가 이해되면, 압빠마다와 사띠가 행해야할 바가 없게 된다(yathā cetaso ārakkh’ 
    atthāya appamādo ca sati ca kātabbā ti, yasmā tasmiṃ āyatane vidite appamādena 
    vā satiya vā kātabbaṃ n’atthi).”

 

그러면 빠마다라는 용어가 빨리 조문 불음주계에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불음주계의 근본 취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다른 네 가지 계들이 주로 남들과의 관계에 역점을 두는 데 비해서 불음주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는 빠마다와 압빠마다라는 두 용어들을 통해서 불음주계에는 적극적인 측면과 소극적인 측면의 두 가지 측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불음주계의 소극적 측면은 몸과 마음을 방일에 빠뜨리는 어떠한 먹거리나 마실거리도 멀리하는 것이며, 그 적극적 측면은 몸과 마음이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빠마다와 압빠마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비추어지는 불음주계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실천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Ⅳ. 멀리함(vāritta)과 실행(cāritta)으로 살펴본 불음주계

빨리어(pāli-bhāsā) 실라(sīla)는 √śīl(실행하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그래서 실라는 어원학적으로 성질, 습관, 성격, 행동 등을 뜻한다.41) 하지만 수행의 문맥에서는 도덕적 습관, 좋은 성격, 도덕적 덕목 등을 뜻한다. 아무튼 이러한 실라의 어원적인 분석에서 드러나듯이, 계는 율(律, vinaya)과 같은 타율적 규범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결의인 덕스러움이나 선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계는 단순한 금지적인 조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악을 멀리하는 정신력을 가리킨다.  
41) 예를 들면, 복합어 아비와다나실라(abhivādana-sīla)는 남을 존경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을 뜻 한다. [Dhp.109게] 꾹꾸라실라(kukkura-sīla)와 고실라(go-sīla)는 각각 
    개의 행실과 소의 행실을 의미한다. [MN.I, pp.387-388] 수실라(su-sīla)와 두실라
    (du-ssīla)라고 하는 형용 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도덕을 지닌 선한 
    성격의 사람을 가리키고, 후자는 도덕이 결여된 나쁜 성격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실라는 원래 긍정적인 성질, 습관, 행실뿐만 아 니라 부정적인 성질, 습관, 행실
    도 가리킨다. 

 

계가 타율적 규제가 아닌 자율적 정신력이라는 점은 『담마빠다(Dhammapada)』의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지으며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붓다들의 가르침이다.”라고 하는 게송42)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계에는 소극적인 측면인 ‘멀리함(vāritta)’과 적극적인 측면인 ‘실행(cāritta)’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적시되어 있다.43) 그래서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계는 멀리하는 계(vāritta-sīla)와 실행하는 계(cāritta-sīla)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다. 멀리함 즉 와릿따(vāritta)는 불선 또는 악을 삼가는 것으로 계의 소극적인 측면이고, 실행 즉 짜릿따(cāritta)는 선을 열심히 행하는 것으로 계의 적극적인 측면이다. 붓다고사는 「위숫디막가(Visuddhimagga)」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2) Dhp. 183게, “Sabba pāpassa akaraṇaṃ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 pariyodapanaṃ. 
    Etaṃ buddhāna sāsanaṃ.” 
43) Bodhi, Bhikkhu, The Noble Eightfold Path: The Way to End of Suffering,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2006, p.26.

 

"두 가지 부분에서 세존이 ‘이것은 해야 한다.’고 제정한 학습계목(sikkhāpada)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실행(cāritta)이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세존이 금지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멀리함(vāritta)이다. 여기서 이들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그 가운데서 행하기 때문에, 즉 계들을 완전하게 갖추어 행하는 자로 실천하기 때문에 실행이다. 그것으로 삼가야 할 것을 피하고 보호하기 때문에 멀리함이다."44)  
44) Vism. p.11, “Duvidhakoṭṭhāse: yaṃ Bhagavatā idam kattabban ti paññattasikkhāpadapūraṇaṃ 
    taṃ cārittaṃ; yaṃ idaṃ na kattabban ti paṭikkhittassa akaraṇaṃ, taṃ vārittaṃ. Tatrāyaṃ 
    vacanattho: caranti tasmiṃ [taṃ samangino] sīlesu paripūrakāritāya pavattantī ti cārittaṃ; 
    vāritaṃ tāyanti rakkhanti tenā ti vārittaṃ.”

 

붓다는 수행의 시작 단계에서는 멀리함(vāritta)을 강조한다. 이는 불선을 삼가는 것으로 충분해서가 아니라 수행의 단계를 순서대로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도덕(戒, sīla), 집중(定, samādhi), 지혜(慧, paññā)의 삼학(三學,tisso sikkhā)으로 구성된 수행론(bhāvanā-vāda)에서 보듯이, 도덕 즉 계는 그 자체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계발하여 지혜를 얻는 예비 단계로서 그 존재 가치와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의 수련에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선을 피해야 하겠다는 결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결의가 없이 선한 자질부터 계발하려고 서둘다가는 결과적으로 그 자질은 뒤틀리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45)   
45) Bodhi, Bhikkhu, op.cit., p.26.

이와 마찬가지로 불음주계도 먼저 소극적 측면인 멀리함부터 지켜나가야 한다. 즉 방일의 원인이 되는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인 수라메라야맛자(surāmerayamajja)의 섭취를 멀리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이것이 빨리 조문 불음주계의 글자(pada)에 따른 해석이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습관이 되어 몸에 배이면, 그 다음 단계는 적극적 측면인 실행(cāritta)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단지 각종 술과 환각성 물질들의 섭취를 멀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압빠마나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빨리 조문 불음주계의 의미(attha)에 따른 해석이다.  

그러면 이제 불음주계를 지키는데 수반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방일의 원인이 되는 각종 술과 환각성 물질을 멀리하여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정진하는 것이 불음주계의 진정한 취지라고 한다면, “몸과 마음이 혼미하거나 취하지 않을 정도의 술을 마시면 괜찮지 않은가?”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은 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원만한 사회적 교제나 친목 도모를 위해서라면 한잔 정도의 술쯤이야 아무 문제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필수적이라는 견해와도 맞물려 있다. 그러나 「위나야 삐따까」는 “술을 마시는 것은 풀잎만큼이라도 마신다면 바일제(波逸提,pācittiya)임을 뜻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46) 다른 빨리 텍스트들에서도 그러한 표현이 상투적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불음주계를 깨뜨리는 문제는 개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주량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술을 마시려는 의도(cetan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불음주계가 제대로 지켜졌는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애당초 개인이 술을 마시려는 또는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는가가 관건인 셈이다.  
46) Vin.IV, p.110, “piveyyā ‘ti antamaso kusaggena pi pivatī, āpatti pācittiyassa.”

뺷쿳다까빠타뺸에 대한 주석서인 뺷빠라맛타조띠까뺸I에 따르면, 불음주계가 어겨지기 위해서는 ① 술, ② 술을 마시려는 의도, ③ 술을 마시는 행위, ④ 실제로 술을 마심이라는 네 가지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방일의 원인이 되는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에는 네 가지 요소들이 있다. 수라로 시작되거나 다른 것들로 시작되는 것들, 취하고자 하는 마음의 존재, 적당한 노력의 만남, 마셔서 들어감이 바로 네 가지이다. 이와 같이 요소에 의해 설명이 알려져야 한다."47)  
47) Khp-a. p.26, “cattāri aṅgāni veditabbāni;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assa pana 
    surādīnañ ca aññataraṃ hoti, madanīyapatukamyatācittañ ca paccupaṭṭhitaṃ hoti, 
    tajjañ ca vāyāmaṃ āpajjati, pīte ca pavisati’ ti imāni cattārī ti. Evam ettha aṅgato (pi) 
    viññātabbo vinicchayo.” 

물론 여기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술을 마시려는 의도이다. 이는 음주가 술을 마시려고 하는 몸의 행동에 이르는 의도로 정의되고 있는 점과 일치한다.  

"방일의 원인(pamādaṭṭhāna)은 마시고 삼키고자 하는 의도(cetanā)이다. 그것은 도취와 방일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그래서 방일의 원인은 몸의 문(kāya-dvāra)에서 일어나는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을 삼키려는 의도라고 알아야 한다."48)  
48) Khp-a. pp.26-27, “pamādaṭṭhānan ti yāya cetanāya taṃ pivati ajjhoharati, sā cetanā 
    madappamādahetuto pamādaṭṭhānan ti vuccati, yato ajjhoharanādhippāyena 
    kāyadvārappavattā surāmerayamajjānaṃ ajjhoharaṇacetanā surāmerayamajja 
    pamādaṭṭhānan ti veditabbā.” 

 

이와 같이 불음주계의 관건은 본인의 자발적 의지 즉 쩨따나(cetanā)이기 때문에, 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실수로 술을 마시는 경우에 불음주계가 깨진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의학적인 목적에서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surāmerayamajja)을 섭취하는 것은 불음주계를 깨뜨리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전에 부분 마취나 전신 마취를 받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음식의 맛을 내거나 고기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소량의 술을 음식에 집어넣는 것도 불음주계를 깨뜨리는 것인가?”라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주석가는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불음주계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방일에 빠지기 위한 목적이 아닌 생명을 구하거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불음주계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해서 「위나야 삐따까」는 병이 났을 경우에 한하여 그 색깔이나 향기나 맛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소량의 술을 기름에 넣어서 마시는 것은 허용된다고 설명함으로써 그것이 불음주계에 저촉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49)  
49) Vin. I, p.205; IV.p.110. 하지만 일부 독실한 불교신자는 의료 목적으로 알코올이나 
    마취제가 함유된 약품을 섭취하는 것도 불음주계를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 의 불교 수행자 Francis Story(1919~1971)였다. 그는 골수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정신을 끝까지 맑게 유지하려고 어떠한 약의 복용도 거부하며 
    마음을 챙기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V. 나가는 말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계(戒, sīla)는 불교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브라따(vrata)나 삼와라(saṃvara) 등과 나란히 종교적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로서 인도 전통에서 사용되고 있었다.50) 뿐만 아니라 적어도 5계 가운데 앞의 네 가지 계들은 뺷다르마 수뜨라(Dharma-sūtra)뺸에도 나올 만큼,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종교적 규정이었다.51) 당시 자이나교에서도 출가 수행자를 위해서 오대서(五大誓, pañca-mahā-varata)를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붓다는 이 오대서에서 ‘소유하지 말라.’라는 계를 생략하고 그 대신 불음주계를 집어 넣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술을 마심으로서 수많은 나쁜 행위(惡業, pāpa-kamma)들을 조장하지 않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로는 사띠(sati)를 지닌 깨어있는 마음을 항상 유지시켜서 열반(涅槃,nibbāna)을 얻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붓다가 불음주계를 가르친 것은 정신적 청정이 불교의 구원론52)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당시 인도의 전통과 구별되는 두드러지는 특징이자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50)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석혜능 옮김, 뺷원시불교의 연구뺸, 서울: 민족사, 2003, 
    p.130; 후지타 코타츠(藤田宏達) 외, 권오민 옮김,「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민족사, 1992, p.123. 
51) 기무라 가이켄(木村泰賢), 박경준 옮김,「원시불교사상론」, 서울: 경서원, 1992, p.286.
52) 엄밀히 말해서 ‘구원(salvation)’이란 말은 유일신이나 절대자에 의한 피조물의 구원을 
    뜻하는 기독교의 용어이다. 그리고 ‘구원론(soteriology)’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
    을 연구하는 기독교 신학의 한 영역을 일컫는다. 반면에 테라와다 불교는 그러한 유일
    신이나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수행(bhāvanā)을 통하여 괴로움(苦, dukkha)
    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열반(涅槃, nibbāna)을 추구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기 위한 구
    체적인 수행 방법인 수행론(bhāvanā-vāda) 이 바로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것은 다른 계들을 어기는 것처럼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껏해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뿐이지 남들에게 해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신 사람은 대개 그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한 채 남들의 행복과 평화를 깨뜨린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불음주계는 술을 마시고자 하는 의도가 관건이므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주량이나 술에 취하고 안 취하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풀잎만큼의 술이라도 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신다면 불음주계는 깨뜨려진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만 불음주계를 잘 지키는 데에만 만족해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계에는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즉 멀리함(vāritta)과 실행(cāritta)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에게도 술을 권하거나 강요하거나 남들의 음주를 부추겨서도 안 될 것이다. 이점은 붓다가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 ‘술장사(majja-vaṇijjā)’를 비롯한 다섯가지 장사(pañca-vaṇijjā)를 재가 신자가 종사해서는 안 되는 ‘그릇된 생계(micchājīva)’로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53)   
53) AN.III, p.208, “비구들이여, 재가 신자는 다섯 가지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다섯인가? 무기 장사, 중생 장사, 고기 장사, 술장사, 독약 장사다. 비구들이여, 
    재가 신자는 이러한 다섯 가 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Pañc’imā bhikkhave vaṇijjā 
    upāsakena akaraṇīyā. Katamā pañca? Satthavaṇijjā, sattavaṇijjā, maṃsavaṇijjā, 
    majjavaṇijjā, visavaṇijjā. Imā kho, bhikkhave, pañca vaṇijjā upāsakena akaraṇīyā ti).”

한역 불전들에 나오는 ‘不飮酒戒’나 ‘不飮酒’라는 용어들로만 다섯 번째 계를 해석한다면, 우리
는 복잡하고 다변적인 현대 사회에서 이 계의 진정한 의미(attha)를 제대로 구현하기 어렵다. 증류주, 발효주, 환각성 물질을 멀리해야만 우리는 사띠(sati)를 지닌 깨어 있는 마음을 항상 유지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사(不死,amata)로 표현되는 열반(涅槃, nibbāna)에 이르는 첫 걸음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마음 계발 즉 수행(bhāvan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불교의 정신문화(Buddhist mental culture)에 비추어 볼 때 불음주계가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