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돈(頓)과 점(漸)/임승택

실론섬 2016. 7. 7. 13:59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돈(頓)과 점(漸)

( 이 논문은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설 성철선사상 연구원과 동국대학교 불교학술 원 종학연구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5차 학술포 럼(2012년 3월 29일)’에서 발표되었던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임.)

『불교학연구』 제32호(2012. 8.) 

임승택/경북대 철학과 교수

 

Ⅰ. 시작하는 말

Ⅱ. 깨달음의 사전적 의미

Ⅲ. 깨달음의 돈(頓)과 점(漸)

Ⅳ. 깨달음의 다양한 양상들

Ⅴ. 사성제의 실천 순서와 돈점

Ⅵ. 마치는 말

 

[요약문]

이 논문은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돈점 문제를 다룬다. 깨달음이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에 이르게 해준다. 초기불교에서는 이것이 발현되는 양상에 관해 근기에 따른 차이를 인정한다. 정형화된 하나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체험되는 깨달음의 사례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돈점을 둘러 싼 편 가르기 방식의 경직된 논쟁은 바람직하지 않다.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바로 그러한 다양성이야말로 오히려 본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아래 필자는 깨달음에 해당하는 다양한 용어들을 살펴보았다. 깨달음(bodhi), 완전한 지혜(aññā), 반야(paññā), 지혜(ñāṇa), 두루한 앎(pariññā)과 체험적 앎(sacchikiriyā), 뛰어난 앎(abhiññā), 밝은 앎(vijjā), 깨어있음(anubodha)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궁극적인 완전한 깨달음을 지칭하며 다른 일부는 일상적인 차원에서 발현되는 인식의 전환을 묘사한다. 또한 필자는 초기불교를 대표할 만한 깨달음 사례로서 붓다가 밝힌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 anuttara-sammā-saṁbodhi)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전법륜품에서는 이것을 사성제의 실현으로 풀이하며, 또한 고성제·집성제·멸성제·도성제에 이르는 점차적인 과정으로 묘사한다.

 

필자의 고찰에 따르면 고성제의 실현은 두루한 앎(pariññ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깨달음의 차원에 속하고, 집성제의 실현은 끊음(pahāna)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닦음의 차원에 배속된다.

또한 멸성제의 실현은 체험적 앎(sacchikiriy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깨달음의 영역에 속하고, 도성제의 실현은 그 자체로서 닦음(bhāvanā)의 영역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성제의 실현 과정이 확립된 절차로 나타나며, 더불어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을 통해 필자는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란 점오이며, 반복되는 선오후수(先悟後修) 혹은 두 겹의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구조를 취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필자는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은 한국불교만의 고유한 사정을 반영하며, 한국불교의 강인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건전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초기불교 당시의 가르침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은 “깨달음 이후 또 닦아야 하는가.”이다. 이것에 대해 보조지눌은 “몰록 깨달음을 얻고서 차례로 닦아 나간다.”라는 돈오점수를 내세웠고,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참된 닦음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지눌의 주장은 사성제를 실제 내용으로 하는 초기불교의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사례에 형식적으로 일치한다. 

 

Ⅰ. 시작하는 말

 

초기불교는 니까야와 아함경을 통해 전해지는 붓다의 가르침과 행적을 중심으로 한다. 일부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니까야와 아함경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시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들로 인정된다. 따라서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붓다의 원음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들 문헌을 바탕으로 깨달음의 문제에 관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흔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면 붓다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고 그 절차는 어떠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논의와 답변은 초기불교 이래의 교리사적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몰록 깨달음을 얻고서 차례로 닦아 나간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 “점차적으로 닦고서 몰록 깨닫는다.”는 점수돈오(漸修頓悟), “몰록 깨달음을 얻어 닦음까지를 한꺼번에 완성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깨닫는다.”는 점수점오(漸修漸悟) 등의 주장들 또한 이러한 교리사적 과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문제는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서 가장 본래적인 영역에 속한다. 다양한 교리적 가르침은 결국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해서 깨달음이란 불교의 궁극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관문에 해당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유는 깨달음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변화에 있을 것이다. 깨달음이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실현하는 데 최종 목적을 둔다고 할 수 있다.

 

‘괴로움을 소멸하고 즐거움을 얻는 것(離苦得樂)’은 초기불교 이래로 모든 불교적 가르침에서 유지된 모토(motto)라고 할 수 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내용으로 하는 초기불교의 사성제(四聖諦)는 바로 이것을 정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고성제를 통해 괴로움의 양상을 밝혔고 집성제를 통해 그 원인을 규명하였다. 또한 멸성제를 통해 괴로움을 극복한 경지를 드러냈고 도성제를 통해 그것의 완성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성제의 실현은 시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나면서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 이유를 밝혀 왔다고 할 수 있다.

 

Sacca-samyutta에는 과거세·미래세·현세를 막론하고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있는 그대로 바르게 원만히 깨닫는다면 그것은 모두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니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를 힘써 닦으라는 구절이 등장한다.1) 또한 붓다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견해(ñāṇadassana)가 청정해진 연후에 비로소 신과 인간들에 대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āsaṁbodhi)을 선언을 하였다는 언급도 등장한다.2) 한편 『대상적유경』에 따르면 사성제는 코끼리 발자국과 같은 것으로 단편적으로 설해지는 여타의 모든 교설을 포섭한다.3)

1)   SN v. pp.416-417: “비구들이여, 과거세·미래세·현세를 막론하고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있는 그대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닫는다면 그것은 모두 이 사성제를 바르고 원만하게 깨닫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은 괴로움(苦)이 다.’라는 실천을 행해야 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集)이다.’라는 실천을 행해야 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滅)이다.’
   라는 실천을 행해야 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道)이다.’라는 실천을 행해야 한다.” 
2)  SN v. pp.422-423. 
3)  MN i. pp.184 이하.

 

깨달음에 관한 초기불교의 입장은 사성제와 별개일 수 없다. 초기불교에서 사성제는 깨달음의 내용이자 목적에 해당된다. 도대체 무엇을 깨닫고, 또한 어떤 목적을 위해 깨닫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이 사성제에서 찾아질 수 있다. 또한 사성제는 붓다가 이룬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의 직접적인 사례로 나타난다. 나아가 사성제는 괴로움을 소멸하고 즐거움을 얻는 절차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듯 사성제는 깨달음의 내용이자 목적이며 사례이자 절차로서의 의의까지를 겸한다. 초기불교의 돈점사상을 주제로 하는 본 논문 또한 이 사성제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될 것이다. 

 

Ⅱ. 깨달음의 사전적 의미

 

깨달음(悟)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고 궁리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4) 이것을 통해 얻어진 진리는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것의 구체적 사례는 어떠할까. 남녀의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야릇한 감정이 막 피어날 무렵 어렸을 적 헤어졌던 친남매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모르는 상태에서라면 억지로 말리더라도 그러한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알게 된다면 그와 같은 이성 간의 감정은 누그러질 것이다. 어젯밤에 마신 시원하고 달콤했던 물이 해골에 담긴 빗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삽화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깨닫는 순간 해골에 남겨진 물의 느낌은 더 이상 유혹거리가 되지 못한다.

4)  민중서림 편집국 편,『민중 엣센스 국어사전』(경기도 파주: 민중서림, 2008), p.391

 

깨달음이란 삶에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는 매혹적인 대상을 접하게 되면 마치 꿀통에 빠져드는 파리처럼 무력해진다.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한 번 경험한 그 맛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잊으려는 몸부림마저 그쪽으로 다가서기 위한 술책이 되고 만다.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대안은 깨달음이다.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의 본질을 꿰뚫어 그 허구성을 확연히 알게 될 때 초연해질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깨달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꿔 놓을 수 있다.

 

깨달음(覺, bodhi)이란 √budh(to awaken, to understand)에 기원을 둔다. 이것을 옮기면 ‘깨닫다’혹은 ‘알게 되다’이다. 한역에서는 이것을 보리(菩提)로 음사하고 영역에서는 awakenment 혹은 enlightenment로 옮긴다. 이 용어에는 다양한 접두어가 첨가되어 그러한 경지를 꾸미곤 한다. 예컨대 원만한 깨달음(正覺,saṁbodhi), 올바른 원만한 깨달음(現等覺, abhisaṁbodhi),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正等正覺, sammāsaṁbodhi),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 anuttara-sammāsaṁbodhi) 등이 그것이다. 특히 붓다의 원만한 깨달음은 제자들의 깨달음(sāvaka-bodhi)이라든가 홀로 닦아 성취한 깨달음(pacceka-bodhi) 등과 따로 구분되기도 한다.5)

5)  Rhys Davids T. W.,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 (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86), p.491.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불교의 개조인 붓다(Buddha)라는 인물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붓다의 원어에 해당하는 buddha는 √budh의 과거수동분사로서 ‘깨달은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깨달음의 성취를 통해 범부로서의 고따마싯닷타(Gotama Siddhattha)가 붓다로 불리게 되었다.

 

붓다라는 명칭은 어머니가 지어 준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지어 준 것도 아니다. 형제가 지어 준 것도 아니고 자매가 지어 준 것도 아니다. 친구가 지어 준 것도 아니고 친척이 지어 준 것도 아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지어 준 것도 아니고 하늘의 신이 지어 준 것도 아니다. 이것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해탈을 이루어 일체를 아는 지혜(sabbaññutañāṇa)와 함께 얻은 진실한 명칭이다.6)

6)  Ps i. p.174.

 

이렇듯 깨달음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준다. 깨달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보통의 인간이 붓다로 탄생하는 것이다. 불교(Buddhism)라는 종교의 명칭 또한 이 깨달음으로부터 유래한다. 불교라는 종교는 붓다의 가르침 아래 깨달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불교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깨달음(bodhi)에 상응하는 또 다른 표현으로 완전한 지혜(完全智, aññā)가 있다. 이 용어는 주로 아라한(Arahant)의 경지를 나타낼 때 사용되며,7) 또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할 때에도 빈번한 용례를 보인다. 예컨대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파괴하였고,…. 바르게 완전한 지혜로써(aññā) 해탈을 이룬 이이다.”라는 경문이 그것이다.8) Tilmann Vetter에 따르면 완전한 지혜란 주로 붓다의 제자들에 의한 사성제의 통찰을 의미한다.9) 즉 어떤 제자가 사성제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경우 완전한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깨달음(bodhi)과 마찬가지로 이 용어 또한 일시적인 견해의 성취에 한정되지 않으며, 번뇌(āsava)를 완전히 소멸한 경우에 한해 주로 사용된다.

7)  Rhys Davids, 앞의 사전, p.14; 한편 완전한 지혜(aññā)가 아라한(Arahant)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그에게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삶에서 완전한 지혜(aññā, =Arahant)[를 기대할 수 있거나] 혹은 집착
   이 남아 있는 경우 불환의 경지(不還位)[를 기대할 수 있다](tassa dvin 
   naṃphalānaṃaññataraṃphalaṃpāṭikaṅkhaṃdiṭṭheva dhamme aññā, sati vāupādisese 
   anāgāmitā)(DN ii. p.314 등).” 
8)  MN i. p.235. 
9)  김성철 옮김(Tilmann Vetter 지음), 『초기불교의 이념과 명상』(서울: 씨·아이·알, 2009), 
   p.80, p.111. 

 

지혜란 정신적 기능(function) 혹은 능력(faculty)에 속한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인식의 전환을 표현하는 깨달음과는 용법상의 차이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지혜 역시 깨달음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순간에 홀연히 발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아가 그것이 발현되고 난 이후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언급된다.

 

존자여, 나는 7일간 번뇌를 지닌 채 국가의 보시물을 먹었다. 그런데 8일째 되는 날 나에게 완전한 지혜(aññā)가 생겨났다. [그 후 나에게는 출가한 이래로 80년에 걸쳐 단 한 번도 감각적 쾌락에 관한 지각(saññā)이 일어나지 않았다…… 분노에 관한 지각과 폭력에 관한 지각도 일어나지 않았

다… 감각적 쾌락에 관한 생각(vitakka)도…… 분노에 관한 생각과 폭력에 관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10)

10)  MN iii. pp.125-127.

 

이상과 같은 깨달음(bodhi) 혹은 완전한 지혜(aññā)는 궁극적인 인식의 전환을 나타낸다. 이들을 성취함으로써 범부로서의 삶은 종식되고 진리의 세계에 계합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들 이외에도 깨달음에 상응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사용된다. 먼저 반야(般若, 慧, paññā)라는 용어를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반야란 무상·괴로움·무아에 대한 통찰을 의미한다.11) 이것 역시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예컨대 “반야로써 보고 나면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다.”라든가,12) “욕심 따위는 몸이나 말로써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반야로써 관찰하여 버려야만 한다.”라는 언급이 그것이다.13) 그러나 반야의 획득이 반드시 아라한과의 증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대념처경』에는 사념처의 실천과 관련하여 이 용어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14) 그러나 이것을 통해 아라한 혹은 불환의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pāṭikaṅkhaṃ)고 언급될 뿐이다.15)

11)  Tilmann Vetter에 따르면 반야(paññā)란 물질현상·느낌·지각·지음·의식 따위의 
    오온을 무상·괴로움·무아로 통찰하는 것을 가리키며, 특히 사성제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는 완전한 지혜(aññā)와는 분명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 김성철 옮김, 앞의 
    책, pp.59-60, p.111 등.
12)  MN i. p.160, p.175, p.204, p.477 등.
13)  AN v. p.39 이하.
14)『   대념처경』에 등장하는 반야(paññā)의 용례는 주로 동사형이다. 예컨대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린다(pajānāti)(DN ii. pp.299 이하).”
    라는 문장이 그러하다. 이 경우 ‘알아차린다’로 번역된 pajānāti는 반야로써 알아차린
    다는 의미이다.
15)  DN ii. p.315. 

 

반야(慧, paññā)와 유사한 뜻을 지니는 지혜(智, ñāṇa)라는 용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혜란 √jñā에서 유래한 말로 ‘알다’ ‘인식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Rhys Davids에 따르면 전자의 반야는 주로 사물의 궁극적 본성을 꿰뚫는 통찰(insight, wisdom)에 해당하며, 후자의 지혜는 일상의 경험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앎(knowledge, intelligence) 혹은 앎의 능력(faculty of understanding)을 가리킨다.16) 따라서 용어 자체의 쓰임만을 고려한다면 지혜의 사용 범위가 더 넓지만 궁극적인 진리의 실현에 초점을 모은다면 반야 안에 지혜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16)  Rhys Davids, 앞의 사전, p.287.

 

반야가 주로 구체적인 실천 과정에 밀접한 용례를 보인다면, 지혜란 그것을 통해 얻는 일반화된 지식과 관계된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귀 기울임에 관련된 반야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혜(聞所成智)가 있다. 듣고 난 후 지킴에 관련된 반야로서 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지혜(戒所成智)가 있다. 지키고 난 후 선정에 관련된 반야로서 선정의 닦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혜(修定所成智)가 있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17) 이러한 용례는 반야와 지혜가 실질적으로 동의어 관계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18)

17)  Ps i. p.1: “sotāvadhāne paññāsutamaye ñāṇaṁ. sutvāna saṁvare paññāsīlamaye 
    ñāṇaṁ. saṁvaritvāsamādahane paññāsamādhibhāvanāmaye ñāṇaṁ.” 
18)  한편 Paṭisambhidāmagga(Ps i. p.3)에는 73가지 종류의 지혜(ñāṇa)가 일괄적으로 등장
    하며, 그 중에서 67가지는 아라한 제자들도 지닐 수 있지만 나머지 6가지는 오로지 붓다
    만이 지닐 수 있다고 설명된다.

 

깨달음에 해당하는 또 다른 용어로 두루한 앎(遍知, pariññā)이 있다. 이것은 번뇌를 소멸한 상태에서 지니는 앎으로 풀이된다. “비구들이여,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 있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두루한 앎이라고 한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19) 따라서 이것 역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와 관련됨을 알수 있다.20) 한편 이 용어는 사성제의 고성제를 깨닫는 과정과 관련하여 빈번한 용례를 보인다. 예컨대 “‘고성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pariññeyya)’혹은 ‘고성제를 두루 알았다(pariññāta)’라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21)

19)  SN iii. p.26 등.
20)  여기에서 두루한 앎(遍知, pariññā)의 실제 내용으로 언급된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은 그 자체로서 열반의 경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다음의 경문이 그것이
    다. “사리불이여! 열반, 열반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열반입니까?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SN iv. p.251).”
21)  SN v. p.422 등.

 

깨달음에 해당하는 용어로는 뛰어난 앎(證智, abhiññā)도 빠뜨릴 수 없다. 이것은 선정의 실천을 통해 얻어진 초자연적인 신통의 지혜를 포함한다. 예컨대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지혜(宿命智, pubbenivāsānussatiñāṇa), 하늘과 같은 눈의 지혜(天眼智, dibbacakkhuñāṇa), 번뇌를 소멸한 지혜(漏盡智, āsavakkhayañāṇa) 따위가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6가지 뛰어난 앎(六神通,chaḷabhiññā)에 포함되어 함께 언급되곤 한다.22) 그러나 마지막의 번뇌를 소멸한 지혜(漏盡智)를 제외한 나머지는 궁극적 깨달음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분류된다. 특히 반야의 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을 성취한 아라한의 경우는 신통의 능력을 지니지 않는 것으로 언급된다.23)

22)  Vin ii. p.161. 
23)  SN ii. pp.121-124.

 

한편 체험적 앎(作證, sacchikiriyā)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sa-ākṣi√kṛ에 기원을 두며 원래의 의미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다’이다. 따라서 특정한 경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초점을 모은 용어라고 할 수 있다.24) 특히 이것은 열반의 체험과 밀접한 용례를 보인다. 예컨대 “두발을 지닌 이들 중에서 가장 수승한 분이 체험적으로 안 열반을 얻을 지어다.”라는 경문이 그것이다.25) 또한 이것은 사성제의 멸성제와 관련하여 정형적으로 사용된다. “‘고멸성제를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sacchikātabba)’혹은 ‘고멸성제를 체험적으로 알았다(sacchikata)’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26)

24)  뛰어난 앎(abhiññā)과 체험적 앎(sacchikiriyā)은 동일한 문장 내에서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다음의 경문이 그러하다. “그대는 그 법에 대해 스스로 뛰어난 앎을 지니고서 체험
    적으로 알아 도달하여 머문다(taṃtvaṃdhammaṃsayaṃabhiññāsacchikatv āupasampajja 
    viharasi)(MN ii. p.94).” 
25)  Therīp.166(432게). 
26)  SN v. p.422 등.

 

깨달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포괄적 용어로서 밝은 앎(明, vijjā)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용어는 깨닫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 무명(明, avijjā)의 반대어이다. 초기불교에서 무명의 대표적인 용례로는 “무명을 조건으로 지음(行)이 있고, 지음을 조건으로 의식(識)이 있고,….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老死),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등이 있다.”라는 정형구가 있다.27) 그런데 이 무명이란 사성제에 대해 모르는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28) 따라서 이것의 반대어인 밝은 앎이란 사성제에 대해 아는 것을 가리킨다.29) 즉 무명의 제거란 사성제에 대해 밝은 앎을 성취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27)  SN ii. p.2 등.
28)  SN ii. p.4; MN i. p.55 등. 
29)  초기불교 경전에서 무명(avijjā)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사성제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밝은 앎(vijjā)이란 당연히 사성제에 대해 아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이것은 종종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다음의 문구가 그것이다. “즐겁거나 괴
    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발생하는 그것을 무상(無常)으로 알거나(jānato) 보면
    (passato) 비구의 무명이 제거되고 밝은 앎이 발생한다(SN. iv. p.50).”

 

마지막으로 깨어있음(隨覺, anubodha) 또한 언급할 만하다. 이것은 anu√budh에서 유래하며 bodhi와 동일한 어원을 지닌다. 이것은 어떠한 느낌이나 상황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곤 한다. “나는 홀로 선정에 잠겨 즐거운 [느낌에] 깨어 있었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30) 한편 이것은 진리(sacca)에 대한 자각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한에서 진리에 대한 깨어있음이 있다. 그러한 한에서 진리에 대해 깨어있다. 나는 그러한 한에서 진리에 대한 깨어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지는 못한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31) 그런데확인할 수 있듯이 이 용어는 궁극의 진리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30)  AN v. p.46. 
31)  MN ii. p.173.

 

이상의 용어들은 각기 세분화된 용도로 깨달음의 양상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궁극적인 완전한 깨달음을 지칭하며 다른 일부는 일상적 차원에서 발현되는 깨달음의 양상을 묘사한다. 특히 두루한 앎(pariññā)과 체험적 앎(sacchikiriyā)은 그 자체로서 최종의 경지를 나타내는 용례를 지니지만, 사성제의 일부를 깨닫는 세부적 과정을 묘사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들 둘은 사성제 전체에 대한 궁극적인 앎을 의미하는 깨달음(bodhi), 완전한 지혜(aññā), 밝은 앎(vijjā) 등에 비해 적용의 범위가 협소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반야(paññā), 지혜(ñāṇa), 뛰어난 앎(abhiññā), 깨어있음(anubodha) 따위는 온전한 의미의 깨달음과 상관이 없는 용례를 보이기도 한다.

 

Ⅲ. 깨달음의 돈(頓)과 점(漸)

 

사실 깨달음의 돈점(頓漸) 문제는 초기불교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초기불교의 일관된 관심은 괴로움의 극복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돈점의 문제에 대한 초기불교의 대체적인 입장은 근기의 차이를 인정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깨달음의 돈점 여부는 동북아시아불교,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불교에서 부각된 쟁점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다양한 깨달음의 방식을 용인하였던 초기불교의 입장을 벗어난다고 판단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초기불교의 시각에서 돈점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돈(頓)이란 ‘갑자기’혹은 ‘문뜩’을 의미한다. 따라서 돈오(頓悟)란 ‘갑자기 혹은 문뜩 어떠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돈오는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특징적 측면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모르던 것을 깨우치는 과정은 항상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은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구분되게 한다. 이렇듯 모든 깨달음은 돈오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을 고려할 때 돈의 의미는 ‘갑자기(suddenly)’라기보다는 ‘한꺼번에(all at once)’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32) 깨달음이란 한꺼번에 통째로 얻어진다. 이것은 비단 붓다나 조사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으며 깨달음이 지니는 본래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은 이것을 ‘햇빛이 만물을 단번에 비추는 것’에 비유한다.33) 일단 태양이 뜨고 나면 더 이상 시야를 가리는 어둠이란 존재할 수 없다. 태양 앞의 어둠은 한꺼번에 몰록 사라진다. 동일한 맥락에서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은 왜 돈오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32) 심재룡,「돈점론으로 본 보조선의 위치」,『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
    (서울: 민족사, 1992), p.144.
33) 전해주,「징관과 종밀의 돈점관 비교」,『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서울: 
    민족사, 1992), pp.103-104.

 

"마치 어떤 대신이 꿈에 감옥에 갇혀 몸에 형틀을 쓰고 갖가지로 괴로워하면서 백방으로 벗어날 길을 찾다가 어떤 사람이 그를 불러일으키면 홀연히 깨어나 자신이 본래 자기 집에 있고 안락함과 부귀가 조정의 여러 동료 대신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비로소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34)

34)  길희성,『지눌의 선사상』(서울: 소나무, 2001), p.145 재인용.

 

꿈으로부터 깨어나 의식을 차리는 순간은 찰나이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면 꿈일 것이고 의식을 차렸다면 그것은 이미 깨인 상태일 것이다. 이렇듯 순간적이지만 깨달음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만든다.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에는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변수가 개입될 수 있다. 예컨대 때가 무르익지 않으면 당연한 사실들에 대해서도 줄곧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가 문뜩 어떠한 계기를 만나 무릎을 치면서 알게 된다. 더불어 완고하게 고집했던 기존의 주장이나 생각들이 한꺼번에 물거품처럼 내려앉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한편 점오(漸悟)란 ‘점차로 혹은 단계적으로 얻는 깨달음’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언급했듯이 깨달음이란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본래부터 돈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점오라는 용어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점오라는 표현은 돈오적 체험이 일회에 그치지 않는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돈오의 깨달음이 주어졌다고 하자. 거기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전환은 갑작스러운 방식을 취하며 이후의 경험에 의해 달라지거나 수정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 평생에 걸쳐 단 한번만 일어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한 체험은 충분히 반복될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일련의 반복을 포섭하는 거시적 차원의 깨달음이 존재할 수 있다.

 

점오란 바로 그와 같은 거시적 차원의 깨달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돈오와 점오는 상반된 의미가 아니며 하나의 점오적 과정에 다수의 돈오적 체험이 포섭된다. 이러한 점오는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35) 발을 내딛는 위치가 수직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보이는 범위가 단계적으로 확산된다. 이렇듯 점오란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깨달음의 지평이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35) 청량징관은 이러한 경우를 두고 점오점수(漸悟漸修)로 분류한다. 또한 이것을 전망대에 
    올라가는 과정에 비유하여 발을 내딛는 위치가 높아지면 그만큼 보이는 범위가 더 넓어
    지는 것과 같다고 해설한다. 전해주(1992), 앞의 논문, p.104 재인용.

 

바로 이와 같은 점차적인 깨달음은 초기불교 당시의 일반적 입장이었던 듯하다. 이와 관련된 전형적인 경문으로 다음을 꼽을 수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ññā)의 성취가 단번에(ādikena)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는 점차적인 방식의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다.36)

36)  MN i. pp.479-480: “Nāhaṃbhikkhave ādiken’eva aññārādhanaṃvadāmi. Api ca bhikkhave 
    anupubbasikkhāanupubbakiriyāanupubbapaṭipadāaññārādhanāhoti.”

 

이렇듯 완전한 지혜(aññā)는 점차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필자는 이것을 성취하는 구체적 사례로서 안냐따꼰단냐(aññāta-Koṇḍañña 혹은 aññā-Koṇḍañña)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37) 안냐따꼰단냐는 초전법륜 당시 붓다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었던 이다. 『율장 대품』에 따르면 붓다는 다섯 비구들에게 어렵싸리 설법을 허락받고서 사성제의 가르침을 펼친다. 한참의 설법이 진행되고 난 후 꼰단냐에게 “모든 생겨나는 법은 소멸하는 법이다.”라는 법의 눈(dhammacakkhu)이 생긴다. 이것을 안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그대 꼰단냐가 완전히 알았구나(āññāsi). 참으로 그대 꼰단냐가 완전히 알았구나.”라고. 그렇게해서 꼰단냐의 이름이 안냐따꼰단냐(aññāta-Koṇḍañña, =깨달은 꼰단냐)로 바뀌게 되었다.38)

37) Vin i. pp.11 이하; Malalasekera, G. P.,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74), pp.43-44. 
38)  Vin i. p.12; Malalasekera G. P., 앞의 사전, p.43.

 

꼰단냐가 얻은 최초의 깨달음 역시 돈오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경험이 있기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되는 질적 도약의 형태를 취한다. 꼰단냐의 깨달음은 붓다의 깨달음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붓다 자신의 깨달음이 다른 이들의 깨달음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최초로 입증된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여러 천신(天神)들이 나타나 찬탄한다. “바라나시의 사슴동산에서 세존께서 굴리신 최상의 진리의 바퀴는 사문, 바라문, 데바, 마라, 범천 등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퇴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39)

39)  Vin i. pp.11-12.

 

그런데 이러한 꼰단냐의 사례는 점차적인 깨달음을 언급했던 앞서의 인용 경문과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분명 꼰단야의 깨달음은 특정한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신들의 찬탄 또한 그와 같은 특정 순간의 사건에 대한 축하의 노래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꼰단냐의 깨달음은 명백히 돈오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앞서의 인용문에서처럼 초기불교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점차적인 깨달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일견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은 꼰단냐의 깨달음 사례를 좀 더 살펴보면 해소된다. 최초로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안냐따꼰단냐는 비로소 정식으로 출가하기에 이른다. 붓다는 그에게 구족계를 주면서 “법이 잘 설해졌도다. 괴로움을 끝까지 종식시키기 위하여 범행을 잘 닦아라.”라고 당부한다.40) 이 당부는 최초의 깨달음 이후로도 후속적인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안냐따꼰단냐가 아라한이라는 최종의 경지를 인정받은 것은 구족계를 받고서도 이후의 일이다.41)

40)  Vin i. p.12.
41) Vin i. pp.12-14: 안냐따꼰단냐가 법의 눈(dhammacakkhu)을 얻고 나서 최종적으로 
    아라한의 경지를 인정받기까지 대략 다음의 과정이 언급된다. 꼰단냐의 법안 성취 ⇒ 
    안냐따꼰단냐의 구족계의 수지 ⇒ 나머지 비구들의 법안 성취 ⇒ 나머지 비구들의 구
    족계 수지 ⇒ 오온에 대한 가르침 ⇒ 무상·괴로움·무아의 가르침 ⇒ 오온에 대한 싫어
    함(nibbidā) ⇒ 무집착·해탈·해탈지견의 성취 ⇒ 붓다를 포함한 여섯 아라한의 공표.

 

초기불교의 돈점 문제는 안냐따꼰단냐의 사례를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돈이라는 표현은 깨달음의 본래적 특징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안냐따꼰단냐가 최초로 얻은 법의 눈(dhammacakkhu)은 진리의 세계로의 도약이며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또한 천신들의 찬탄에서 드러나듯이 한번 얻어진 그것은 번복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얼음과 물의 본성을 한번 알고 나면 그것으로 그 둘을 다르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시에 해소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자명한 앎은 추가적인 경험에 의해 달라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냐따꼰다나에 대한 붓다의 당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기불교에서는 최초의 깨달음 이후로도 더욱 깊어지는 경지를 인정하였다. 특정한 사건으로서의 깨달음이란 돈오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새로운 차원의 닦음과 완성의 과정이 존재한다면 돈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깨달음 이후 지속되는 심화의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점오라는 표현이 더 타당하다. 점차로 숙성되는 깨달음이라는 의미에서의 점오이다.42)

42) 앞서 언급했듯이 안냐따꼰단냐가 얻은 법의 눈은 “모든 생겨나는 법은 소멸하는 법이다.”
    라는 자각을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각은 위의 각주 42)에 나타나듯이 그 이후
    에 설해진 무상·괴로움·무아의 가르침과 사실상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법의 
    눈을 통해 깨달은 내용과 그 이후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내용이 실제적으로 다르지 않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차이는 충분히 숙성된 깨달음이냐 혹은 그렇지 못한 깨달음이
    냐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점오란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망라하는 깨달음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점오를 내세우는 초기불교의 입장을 이해한다. 다음의 경문은 이와 같은 점오의 깨달음을 더욱 강조한다.

 

빠하라다여, 마치 큰 바다가 점차로 기울고 점차로 비탈지고 점차로 경사를 이루어 갑작스럽게 절벽이 되지 않는 것처럼, 빠하라다여, 실로 이 법과 율에는 점차적인 익힘과 점차적인 실천과 점차적인 닦음이 있다. 완전한 지혜(aññā)를 통한 꿰뚫음(paṭivedho)이 갑작스럽게 있는 것은 아니다. 빠하라다여, 실로 이 법과 율에는 점차적인 익힘과 점차적인 실천과 점차적인 닦음이 있을 뿐이고, 완전한 지혜를 통한 꿰뚫음이 갑작스럽게 있는 것은 아니다. 빠하라다여, 이것이 이 법과 율에서

으뜸가는 경이롭고 놀라운 진리이다….43)

43) AN iv. pp.200-201: “Seyyathāpi pahārāda mahāsamuddo anupubbaninno anupubbapoṇo 
    anupubbapabbhāro na āyatakeneva papāto. evameva kho pahārāda imasmiṃdhammavinaye 
    anupubbasikkhāanupubbakiriyāanupubbapaṭipadā. Na āyatakeneva aññāpaṭivedho. Yampi 
    pahārāda, imasmiṃdhammavinaye anupubbasik khāanupubbakiriyāanupubbapaṭipadāna 
    āyatakeneva aññāpaṭivedho. Ayaṃpahārāda, imasmiṃdhammavinaye paṭhamo acchariyo 
    abbhuto dhammo.”

 

인용문은 점차적인 닦음이 있을 뿐이고 갑작스러운 꿰뚫음(通達, paṭivedho)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44) 심지어 그러한 사실이야말로 ‘으뜸가는 경이롭고 놀라운 진리(paṭhamo acchariyoabbhuto dhammo)’로 묘사한다. 굳이 ‘돈오냐 점오냐’라는 문제만을 놓고서 따지자면 초기불교의 입장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44) 여기에서 꿰뚫음(通達)으로 번역된 paṭivedha는 paṭi√vyadh를 어근으로 한다. 문자 
    그대로를 옮기자면 ‘꿰뚫다’ ‘통달하다’ ‘실현하다’이다. 이 용어 또한 깨달음(bodhi)
    과 유사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경문에서 그러한 의미가 분명히 드러 
    난다.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두루한 앎을 통해 꿰뚫는 것으로 꿰뚫으면서 끊는다. 
    일어남의 진리(集諦)는 끊음을 통해 꿰뚫는 것으로 꿰뚫으면서 끊는다. 괴로움의 소
    멸의 진리(滅諦)는 체험적 앎을 통해 꿰뚫는 것으로 꿰뚫으면서 끊는다(dukkhasacc 
    aṁpariññāpaṭivedhaṁpaṭivijjhanto pajahati, samudayasaccaṁpahānappaṭivedhaṁpaṭ 
    ivijjhanto pajahati, nirodhasaccaṁsacchikiriyāpaṭivedhaṁpaṭivijjhanto pajahati)
    (Ps i. pp.26-27).”

 

Ⅳ. 깨달음의 다양한 양상들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깨달음의 양상은 어떠한가.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한 기존의 연구에서 Schmithausen과 Vetter의 견해를 소개한 적이 있다.45) 그들에 따르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초기불교의 방식은 다음의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①사선을 성취하여 삼명을 깨닫거나 혹은 최소한 그 중 하나인 ‘사성제에 대한 앎(=누진명)’을 얻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유형, ②색계의 사선과 무색계의 사선을 걸쳐 멸진정을 성취함으로써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유형, ③선정을 배제한 반야(paññā)의 성취에 의해 무상함과 고통을 통찰하고 모든 갈망으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유형이 그것이다.

45) 김성철 옮김(Tilmann Vetter 지음), 『초기불교의 이념과 명상』(서울: 씨·아이·알, 
    2009), pp.38-43; Tilmann Vetter, 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sm (E. J. Brill, Leiden, 1988), pp.xxi-xxiii. 임승택,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궁극 목표에 관한 고찰」,『불교학연구』19집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8), pp.58-59. 

 

이러한 3가지를 구체적인 사례에 연결시키자면 ①은 붓다 자신의 깨달음에, ②는 멸진정을 최상의 목적으로 삼았던 선정수행자(jhāyin)에게, ③은 무상·고·무아에 대한 통찰을 주된 방법으로 하였던 일반 제자들(sāvakā)에게 배대할 수 있다. Schmithausen과 Vetter는 기원과 배경을 달리하는 이들 사례가 초기불교의 경전들에 뒤섞여 나타난다고 언급한다. 특히 Vetter에 따르면 ②의 유형은 ①과 ③에 비해 후대의 어느 시기에 편입된 것이라고 한다.46) 즉 멸진정에 의한 해탈의 성취는 자이나교를 비롯한 외도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상당히 늦은 시기에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초기불교의 깨달음 사례가 다원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46)  Tilmann Vetter, 앞의 책(1988), p.xxii.

 

초기불교 문헌에 등장하는 깨달음 사례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다. 일찍이 일본의 宇井伯壽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15종의 이설이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47) 즉 초기불교 문헌에서 붓다가 깨달은 내용 혹은 깨달은 방식으로 묘사되는 사례를 일괄 나열하면 도합 15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성제·십이연기·사념처·사정근·칠각지·팔정도 따위를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47) 宇井伯壽, 「阿含の成立に關する考察」,『印度哲學硏究』 第3 (東京: 岩波書店, 1965), 
    pp.394-414; 임승택, 앞의 논문(2008), pp.54-55. 

 

그러나 이들 15가지는 문헌상에 기술된 내용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열거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서로 중복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사념처라든가 사정근 따위는 37조도품의 하위 항목들로서 이들 모두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깨닫는 과정에 해당한다. 따라서 藤田宏達은 이러한 15종의 이설을 다음의 4가지로 재분류한다.48) ⑴사성제·12연기와 같은 이법의 증득에 의해 성도를 이루었다는 설, ⑵사념처·사정근·사여의족·오근·오력·칠각지·팔정도와 같은 수행도의 완성에 의했다는 설, ⑶오온·십이처·계와 같은 제법의 여실한 관찰에 의했다는 설, ⑷사선·삼명의 체득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48) 권오민 옮김(藤田宏達 지음),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민족사, 1989), p.41; 
    임승택, 앞의 논문 (2008), p.54.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재분류 또한 서로 중첩되며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대념처경』에 따르면 사념처의 실천은 사성제라든가 팔정도·오온·십이처·사선 등을 포함한다.49) 따라서 이들 각각을 독립적인 깨달음의 사례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상을 통해 초기불교의 깨달음 사례에 관한 논의가 그다지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통해 깨달음의 방식이 획일적이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진다. 초기불교에서는 개개인의 능력과 역량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으며, 또한 그것에 따라 각기 다른 깨달음의 방식을 가르쳤다. 특정한 방법에 의한 깨달음만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의 획일적 모델을 애초부터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49)  임승택, 앞의 논문(2008), pp.54-55.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오히려 그러한 다양성이야말로 본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붓다의 깨달음을 재현하고자 했던 제자들 사이의 갈등으로도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서는 삼매의 닦음(samādhi-bhāvanā)과 반야의 닦음(paññā-bhāvanā)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 관계를 언급한 Griffiths의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50) 그의 연구에 따르면 초기불교 당시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련하여 삼매의 닦음을 우선시했던 그룹과 반야의 개발을 중요시했던 그룹이 별도로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긴장과 갈등이 존재했었다. 실제로

Dammika-Vagga에는 교법에 전념하는 수행자(dhammayogin)와 선정을 닦는 수행자(jhāyin) 사이의 갈등과 화해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묘사된다.51)

50) 이영진,「초기불교 텍스트에서 나타난 상수멸의 불일치와 모순」,『인도철학』 제19 집 
    (서울: 인도철학회, 2005), pp.94-96 재인용; 임승택, 앞의 논문(2008), p.59. 
51)  AN iii. p.355 이하.

 

또한 이와 같은 양상은 아난다(Ānanda) 존자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언급에서도 확인이 된다.

 

벗이여,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사나를 닦는다…. 벗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위빠사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다…. 벗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다…… 벗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법에 의한 고양됨을 붙잡는 마음을 지닌다…… 벗이여, 비구 혹은 비구니로서 나의 앞에서 아라한을 얻었노라고 말하는 이들은 모두 이 네 가지 방법에 의해서거나 혹은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이다.52)

52)  AN ii. pp.156-157; Ps ii. p.92. 

 

인용문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식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선정을 위주로 한 사마타(止, samatha)가 먼저일 수도 있고, 무상·괴로움·무아에 대한 통찰을 중심으로 하는 위빠사나(觀, vipassanā)가 먼저일 수도 있으며, 또한 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닦아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는 ‘법에 의한 고양됨을 붙잡는 마음(dhammuddhaccaviggahītaṃmānaṃ)’이라는 다소 이질적이고 급진적인 방법까지 포함된다.53) 이러한 내용을 통해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단순하게 돈오냐 점오냐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으며 여러 복합적인 계기들을 망라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54)

53)  ‘법에 의한 고양됨을 붙잡는 마음(dhammuddhaccaviggahītaṃmānaṃ)’이란 예비적인 
    선정의 닦음 없이 곧바로 위빠사나를 닦는 경우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하여 후대의 주석
    문헌인 Saddhammapakāsinī에는 다음의 해설이 등장한다. “메마른 위빠사나(乾觀)를 
    행하는 이는 아라한에 이르기 위해 법에 의한 고양됨을 먼저 행한다 (sukkhavipassakassa 
    hi arahato dhammuddhaccapubbaṅgamaṁ(PsA. 584).”이 해설에 따르면 ‘법에 의한 
    고양됨’이란 사마타를 배제한 ‘메마른 위빠사나’이다. 이처럼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위빠사나 일변도의 방법까지도 포함된다. 김 재성,「순관에 대하여」,『불교
    학연구』제4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2), pp.255- 280; 임승택,「선정의 문제에 관한 
    고찰」,『불교학연구』제5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2), p.264(각주 29) 참조. 
54) 사마타(止, samatha)란 내면의 안정과 집중을 위주로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선정 
    (jhāna)의 상태를 얻기 위한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전제로 한다. 깨달음의 실현에서 
    사마타란 결국 점수(漸修)의 우회적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과 사마타 사이
    에는 구체적인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위빠사나(觀, vipassanā)란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며 반야(paññā)라든가 지혜(ñāṇa)를 
    개발하기 위한 직접적인 방법에 해당한다. 이러한 위빠사나에 사마타가 병행되어
    야 하느냐의 여부는 돈점의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마타를 배제
    한 위빠사나는 급진적인 깨달음의 방법이라 할 수 있고, 사마타와 위빠사나 모두
    를 구비한 실천은 온건하면서도 점진적인 깨달음의 여정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초기불교 당시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다양한 양상과 방식이 용인되었다. 심지어는 그들 각각의 방식에 대한 화해와 조화의 시도마저 이미 행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된 아라한의 경지는 결국 괴로움을 소멸하고 즐거움을 얻는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시작하는 말’에서 언급했듯이 초기불교에서 인정하는 모든 깨달음의 양상은 사성제의 실현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성제에는 돈점의 문제에 관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더욱 자세하게 추론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이 담겨 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Ⅴ. 사성제의 실천 순서와 돈점

 

이제 논의의 범위를 좁혀 Sacca-samyutta 의 전법륜품에 나타나는 붓다의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āsaṁbodhi)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경전에는 사성제 각각에 대해 12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깨닫는 양상(三轉十二行相)이 묘사된다.55) 예컨대 고성제에 대해서는 두루 알았고 집성제에 대해서는 끊었으며 멸성제에 대해서는 체험적으로 알았고 도성제에 대해서는 닦았다는 언급이 세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붓다는 사성제에 관한 지혜와 견해(ñāṇadassana)가 청정해진 연후에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선언하였다. 

55)  SN v. pp.420-424.

 

그런데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붓다의 깨달음이 과연 사성제이었던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필자의 기존 연구에서 다루었듯이 Sacca-samyutta의 해당 경문은 깨달음 자체보다는 깨달음의 선언에 초점을 모으는 경향이 있다.56) 즉 완전한 깨달음의 선언은 실제적인 깨달음이 이미 종료되고 난 이후의 일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사성제라는 시스템 자체의 유래에 관해서도 이견이 존재한다. 사성제는 붓다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고대인도의 의학에서 통용되던 치료 절차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러하다.57) 거기에 따르면 사성제는 당시 유행하던 의학적 방법을 깨달음의 과정에 엮어 재구성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56)  임승택, 앞의 논문(2008), pp.57-58. 
57)  Erich Frauwallner에 따르면 사성제는 고대인도의 ‘의학적 방법’으로부터 차용된 
    것이다.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고성제는 질병의 증후에 대한 파악으로, 집성제는 
    질병의 원인에 대한 분석으로, 멸성제는 치료가 지향하는 온전한 상태로, 도성제는 
    구체적인 치료의 방법으로 각각 배대될 수 있다. 박태섭 옮김(Erich Frauwallner 
    지음),『원시불교』(서울: 고려원, 1991), pp.120-121. 

 

사성제를 둘러 싼 이러한 이견들은 사성제를 중심으로 붓다의 깨달음을 규명하려는 본고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들을 수용하더라도 붓다의 깨달음이 사성제로 통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함경과 니까야에 근거하는 한 사성제를 배제하거나 혹은 사성제와 관련되지 않은 또 다른 깨달음을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58) 또한 Nagara-Sutta에 기술되듯이 붓다의 깨달음은 원래부터 독자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59) 거기에서 붓다의 깨달음은 오랜 옛적 이전의 붓다들이 다녔던 길과 도로를 다시 발견한 것에 비유된다.

58) 이와 관련하여 “붓다의 깨달음은 광의로 말하자면 사성제이며, 협의로 말하자면 번뇌를 
    소멸한 열반 즉 누진명”이라고 한 권오민의 주장은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특히 그는 
    붓다의 깨달음에 대해 사성제가 아닌 연기(緣起)에 비중을 두는 일부의 시각을 강하게 
    비판한다. 더불어 그러한 시각 자체가 초기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의 연기 해석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주장은 붓다의 깨달음이란 사성제를 벗어 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필자의 입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같은 권 오민의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12
    연기를 가리키며, 그것은 곧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하는 논리로서 사성제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볼 수 없다. 이점은 12연기 전체를 사성제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 
    묘사하는 Aṅguttaranikāya-Mahāvagga(AN i. p.177)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Ambaṭṭha-sutta(DN i. pp.83-84) 등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듯이 
    누진명 즉 번뇌가 다한 지혜 역시 다름 아닌 사성제에 대한 앎으 로 규정된다. 이러
    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붓다의 깨달음은 광의로 말하든 협의로 말 하든 사성제일 
    수밖에 없다. 권오민, 「사성제와 12연기」, 『한국불교학』제47집 (서 울: 한국불
    교학회, 2007-a), pp.10 이하; 권오민,「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는 경증 검토」, 
    『보조사상』제27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2007-b), pp.418-419; 김준 호, 
    「초기불교 선정설의 체계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대학원 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 p.71. 임승택, 앞의 논문(2008), pp.51-56; AN i. p.177; DN i. pp.83- 84, 
    p.100, p.209. 
59)  SN ii. p.106.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붓다의 깨달음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성제의 실현으로 집약될 수 있다는 데에는 특별한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대해 초기불교를 대변하는 깨달음 사례로 규정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전법륜품에서는 바로 이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12단계로 나누어 기술한다.

 

비구들이여, [1]‘이것이 고성제이다’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다시 [2]‘이 고성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pariññeyya)’는 ··· 다시 [3]‘이 고성제를 두루 알았다(pariññāta)’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비구들이여, [4]‘이것이 고집성제이다’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다시 [5]‘이 고집성제를 끊어야 한다(pahātabba)’는 ··· 다시 [6]‘이 고집성제를 끊었다(pahīna)’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비구들이여, [7]‘이것이 고멸성제이다’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다시 [8]‘이 고멸성제를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sacchikātabba)’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다시 [9]‘이 고멸성제를 체험적으로 알았다

(sacchikata)’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비구들이여, [10]‘이것이 고멸도성제이다’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다 ··· [11]‘이 고멸도성제를 닦아야 한다(bhāvetabba)’는 ··· 다시 [12]‘이 고멸도성제를 닦았다(bhāvita)’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련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반야가 생겨났고 밝음이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깨달음을 얻기] 이전 이 사성제에 대해 세 번에 걸친 열두 가지 양상(三轉十二行相)으로 있는 그대로를 여실한 지혜와 견해로써 청정하게 보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했던 한 나는 신들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브라흐마가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 [세계], 신과 인간의 [세계에 대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āsaṁbodhi)을 완전히 깨달았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이후 나는 이 사성제에 대해, 세 번에 걸친 열두 가지 양상으로 있는 그대로를 여실한 지혜와 견해로써 청정하게 보았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한에서 나는 신들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브라흐마가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 [세계], 신과 인간의 [세계에 대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완전히 깨달았다.’라고 선언 하였다.60)

60)  SN v. pp.422-423; Vin i. pp.10-11.

 

인용된 내용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āsaṁbodhi)이 일회적으로 단박에 완성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이것은 지난한 여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인용문의 [2]와 [3]에는 두루한 앎(遍知,pariññā)의 미래수동분사인 ‘두루 알아야 한다(pariññeyya)’는 표현과 과거수동분사인 ‘두루 알았다(pariññāta)’는 묘사가 등장한다. 또한 [8]과 [9]에도 체험적 앎(作證, sacchikiriyā)의 미래수동분사인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sacchikātabba)’는 표현과 과거수동분사인 ‘체험적으로 알았다(sacchikata)’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61)

61) 이러한 순차성은 [5]의 ‘끊어야 한다’와 [6]의 ‘끊었다’는 표현 그리고 [11]의 
    ‘닦아야 한다’와 [12]의 ‘닦았다’는 언급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여
    기에서는 깨 달음의 차원에 속한 두루한 앎(pariññā)과 체험적 앎(sacchikiriyā)
    에 초점을 모으고자 하며, [5], [6]과 [11], [12]의 과정은 닦음의 차원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여 논의에서 일단 배제한다.

 

II장에서 언급했듯이 두루한 앎과 체험적 앎은 깨달음에 상응하는 용어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전자는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소멸된 경지의 실현으로, 후자는 열반의 체득에 관련하여 보다 직접적인 용례로 나타난다.62) 이들 양자는 자체적으로 완결적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고성제와 멸성제의 실현을 나타내는 용도로 각기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제는 두루한 앎을 통해 성취되는 깨달음의 경지이고 멸성제는 체험적 앎을 통해 얻는 깨달음의 경지이다.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란 이러한 두 차례에 걸친 반복적 깨달음의 계기들로 이루어진다.63)

62) II장에서 언급했듯이, 두루한 앎(pariññā)에 대해서는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 있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두루한 앎이라고 한다.”라는 
    경문이 있고, 체험적 앎(sacchikiriyā)과 관련해서는 “두발을 지닌 이들 중에서 가
    장 수승한 분이 체험적으로 안 열반을 얻을 지어다.”라는 경문이 있다. 
63) 기존의 연구에서 필자는 멸성도와 도성제의 관계를 중심으로 깨달음과 닦음의 관
    계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있다. 거기에서는 오로지 도성제만을 닦음의 영역에 배대
    하고, 나머지 고성제·집성제·멸성제를 깨달음의 차원으로 귀속시켰다. 그러나 집성
    제에서 ‘갈애의 제거’는 닦음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여 고성제와 멸성제의 둘을 깨달음의 차원에 배대
    하고, 집성제와 도성제의 둘을 닦음의 차원으로 정정·배대한다. 임승택,「위빠사
    나에 비 추어 본 보조 지눌의 수행체계」,『보조사상』제35집(서울: 보조사상연
    구원, 2011- a), p.627. 

 

상식적으로 볼 때 사성제는 고성제와 집성제, 멸성제와 도성제라는 두 차원으로 나뉠 수 있다.64) 앞의 둘은 괴로움의 현실과 그 원인에 해당되며, 뒤의 둘은 괴로움이 극복된 경지와 그것을 완성하는 방법에 해당한다. 거기에서 집성제는 고성제에 대해 원인이 되고, 도성제는 멸성제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집성제가 먼저이고 고성제는 나중이며, 도성제가 먼저이고 멸성제는 나중의 것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사성제의 성립 순서는 집성제로부터 고성제로, 도성제로부터 멸성제로 나가는 형식이 된다. 따라서 일부 경전에서는 도성제에 해당하는 닦음의 절차를 먼저 밟고 난 연후에 멸성제에 해당하는 체험적 앎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뉘앙스의 언급을 하기도 한다.65)

64) 사성제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은 필자 자신의 의견으로, 집성제는 
    고성제의 원인에 해당하고 도성제는 멸성제의 원인에 해당한다는 일반적 이해에 
    기초한다. 한편 이와 유사한 언급으로 Schmithausen은 사성제의 체계안에 이질
    적인 기원의 내용이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을 지적한 사실이 있다. 그에 따르면 고
    성제와 집성제의 실천은 세간적인 존재에 대해 무상·괴로움·무아로 파악하는 이
    지적 통찰에 친화적이며, 멸성제와 도성제의 실천은 선정을 위주로 한 신비주의
    적 수행에 친화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Schmithausen, L., “On Some 
    Aspects of Descriptions or Theories of ‘Liberating insight’and ‘Enlightenment’in 
    Early Bddhism”, Studien Zum Jainismus und Buddhismus (Wiesbaden: Steiner-
    VerlagWiesbaden-Gmbh, 1981), pp.212-222; 임승택, 앞의 논문(2008), pp.66-67.
65) MN iii. p.289: “그는 뛰어난 지혜를 통해 두루 알아야 할 그러한 법들 
    (dhammāabhiññāpariññeyyā)에 대해 뛰어난 지혜를 통해 알아차린다. 뛰어난 지혜
    를 통해 끊어야 할 그러한 법들(dhammāabhiññāpahātabbā)에 대해 뛰어난 지혜를 
    통해 끊는다. 뛰어난 지혜를 통해 닦아야 할 그러한 법들 (dhammāabhiññābhāvetabbā)에 
    대해 뛰어난 지혜를 통해 닦는다. 뛰어난 지혜를 통해 체험적으로 알아야 할 그러한 
    법들(dhammāabhiññāsacchikātabbā)에 대해 뛰어난 지혜를 통해 체험적으로 안다.”
    Mahāsalāyatanika-sutta에 나타나는 이 구절은 두루한 앎(고성제) → 끊음(집성제) → 
    닦음(도성제) → 체험적 앎(멸성제)이라는 순서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절차는 앞서 
    인용했던 전법륜품에 나타나는 사성제의 순서와 다른 것으로, 닦음을 통해 깨달음에 
    나간다는 상식적인 신념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에서 
    제시되는 사성제의 확립된 순서는 변함없이 고성제 → 집성제 → 멸성제 → 도성제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Mahāsalāyatanika-sutta의 관련 내용을 포
    함하여 초기불교 경전 전체를 통해 도성제의 닦음(bhāvanā)으로부터 멸성제의 체험
    적 앎(sacchikiriyā)으로 나간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사성제의 일반화된 실천 순서는 고성제로부터 시작하여 집성제와 멸성제를 걸쳐 도성제에 이른다. 이점은 다음의 경문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누각의 아래층을 짓지 않고서 위층을 짓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하듯이 비구들이여, 고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서,… 집성제를, 멸성제를, 도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서, 괴로움을 바르게 종식시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66)

66) SN v. p.452;『잡아함경』, 권16, 436경 비교: “네 층의 계단이 있는 전당(殿堂)에 
    오르는 것과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첫 계단을 오르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올라 전당에 올랐다’고 말한다면 그럴리가 없다. 왜냐하면 반드시 첫 
    계단을 지난 뒤에야 차례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따라 전당에 오를 수 
    있기 때 문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고성제에 대해 아직 밝게 알지 못하면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밝게 알고자 한다면 그렇게 될 수 없다.”

 

고성제는 두루한 앎(遍知, pariññā)의 대상이며 멸성제는 체험적 앎(作證, sacchikiriyā)의 대상이다. 또한 집성제는 고성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끊는 닦음의 과정이고, 도성제는 멸성제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닦음을 완성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렇듯 사성제는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깨달음과 닦음이 반복되는 구조를 취한다. 따라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은 점오(漸悟)의 형태를 취한다고 할 수 있으며, 풀어 말하자면 두 겹으로 이루어진 선오후수(先悟後修)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의 순서는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에 관해 중대한 사실을 일깨운다. 닦음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통해 닦음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또한 고성제와 멸성제의 실현은 새로운 차원으로의 비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번복되거나 수정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들 각각은 일회적으로 발생하는 돈오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내부적으로 또 다른 세부적인 계기들을 포함하지 않는다.67) 집성제와 도성제는 바로 이들에 후속하여 행해지는 실천적 닦음(後修)이다. 따라서 고성제에서 집성제로 이어지는 과정과 멸성제에서 도성제로 나아가는 과정은 반복되는 돈오후수(頓悟後修)의 여정으로 규정할 수 있다.

67) 확인할 수 있듯이 전법륜품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은 사성제 
    전체를 망라하며 특히 두루한 앎(pariññā)과 체험적 앎(sacchikiriyā)이라는 세부적인 
    깨달음을 그 안에 포섭한다. 그러나 두루한 앎과 체험적 앎이라는 양자는 자체적으로는 
    또 다른 세부적인 깨달음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집성제의 갈애를 끊기 위해서는 괴로움에 대한 진단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치료의 여정은 괴로움 자체에 대한 분명한 앎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68) 따라서 진단에 해당하는 고성제가 먼저이고 치료적 절차에 해당하는 집성제가 나중이다. 한편 도성제에 해당하는 바른 견해·바른 의도·바른 언어 따위의 팔정도는 탐냄이라든가 성냄에 매이지 않는 상태에서만 온전히 실천될 수 있는 점진적 과정이다.69) 따라서 멸성제를 실현한 연후에 도성제의 원만한 닦음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바로 여기에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표현이 온당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멸성제의 실현이 전제되지 않은 도성제의 닦음은 뿌리를 제거하지 않은 채 돌로 풀을 덮어 누르는 것과 같은 억압적 행위일 수 있다.

68) 이러한 의미에서 “괴로움(苦)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일어남(集)을 보고, 괴로움의 
    소멸(滅)을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본다(SN V. 437쪽).”라는 경문 
    또한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종학연구소 학술대회(2012년 3월 29일)에서 김
    재성 교수가 지적했듯이, Gavampati-sutta의 이 구절은 사성제 전체에 대한 깨달
    음과 닦음이 ‘일시에(ekakkhaṇena)’이루어진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돈오돈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본문에서 인용했던 
    전법륜품의 깨달음과 닦음이 점진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배치된다. 이
    점을 고려 할 때 초기불교의 돈점 문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
    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본고에서는 전법륜품의 사례로 나타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āsaṁbodhi)에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69) Sacca-samyutta의 전법륜품에서 팔정도는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한번은 본
    격적인 사성제의 가르침에 앞서 등장하고, 다른 한번은 사성제의 체계 안에서 멸
    성제를 실현하고 난 이후의 과정으로 등장한다. 전자는 중도(中道, majjhimāpaṭipadā)
    로서의 팔정도를 가리키며 사성제를 실천하기 위한 예비적 가르침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팔정도는 붓다의 다른 모든 교설들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고 언급했던 
    宇井伯壽의 주장은 이 경우의 팔정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후자의 팔정
    도는 이미 멸성제를 성취하고 난 이후의 것으로 이미 범부의 차원을 벗어난 닦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사성제의 맨 마지막 내용에 해당하는 도성제
    로서의 팔정도이다. 도성제의 팔정도는 사성제의 실천을 갈무리하는 차원에서 행
    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SN v. pp.421-422; 임승택,「돈오점수와 초기불교 
    수행」,『인도철학』제31집(서울: 인도철학회, 2011-b), pp.94-110; 宇井伯壽, 
    『印度哲學 硏究』3 (東京: 甲子社書房, 1926), p.9.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닦음(pahāna, bhāvanā)의 완성을 위해서는 깨달음(pariññā, sacchikiriyā)이 선행해야 한다. 이것은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붓다 자신의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āsaṁbodhi) 사례를 통해 얻어진 결론이다. 깨달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암중모색의 실천적 혼란은 그칠 수 있다. 깨달음이 없는 실천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로 만들려는 시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멸성제의 실현이라는 깨달음의 지반 위에 설 때 팔정도의 닦음이라는 도성제의 완성 과정이 뒤따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깨달음을 최우선시하는 불교라는 종교의 본질적 측면일 것이다.

 

Ⅵ. 마치는 말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서 깨달음에 관한 논의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것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지고한 무엇으로 신비화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물론 깨달음에 관한 논의에서 신중한 자세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조심성이 깨달음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목적지가 분명할 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태도는 그것의 성취를 요원한 것으로 만들수 있다. 그리하여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의 존재 이유를 망각케 할 위험성이 있다.

 

불교라는 종교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능가하는 또 다른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확인했듯이 초기불교에서는 이것을 사성제의 실현과 동일시한다. 즉 고성제의 깨달음으로부터 집성제의 닦음으로, 멸성제의 깨달음으로부터 도성제의 닦음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과정으로 언급한다. 이와 같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란 사성제를 구성하는 각각의 내용들에 대한 일련의 깨달음과 닦음으로 구성된다. 이점에서 돈점(頓漸)의 문제에 관한 초기불교의 입장은 점오(漸悟)로 규정할 수 있으며, 풀이하여 말하자면 ‘반복되는 선오후수(先悟後修)’혹은 ‘두 겹

의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구조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성제의 실천적 구조는 한국불교의 돈점논쟁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돈점논쟁의 핵심은 “깨달음 이후 또 닦아야 하는가.”의 질문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일찍이 보조지눌은 “몰록 깨달음을 얻고서 차례로 닦아 나간다.”라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세웠다. 또한 삼문(三門)의 체계를 통해 깨닫는 방식의 다양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참된 닦음이란 있을 수 없다.”라는 언급을 되풀이하였다.70) 경전에 근거하는 한 그의 주장은 초기불교의 깨달음 사례에 형식적으로 일치한다.

70)  길희성, 앞의 책(2001), pp.179-180; 지눌, 앞의 책(1989), p.38.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주요 관심사로 부각된 돈점논쟁은 한국불교만의 고유한 사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와 한국불교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교리적 간극이 존재하며, 특히 보조지눌 이후에 정착된 간화선이라는 수행체계가 철벽처럼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돈점사상을 한국불교에 그대로 적용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유연한 가르침을 펼쳤던 불교 고유의 포교방식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 돈점의 문제에 관한 편 가르기 방식의 논쟁은 매우 우려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은 한국불교만의 강인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500년에 걸친 가혹한 훼불의 시기를 견디어 낸 한국불교의 저력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한국불교라는 특수한 상황 안에서만 가능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이제 현대사회는 더 이상 어떤 하나의 절대적 가치와 신념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소통의 중요성은 현대사회의 주요 코드로 부각되고 있다. 필자는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아니면 도’라는 방식으로 ‘돈이냐’혹은 ‘점이냐’를 놓고 따지는 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도 위배되며 시대적 분위기에도 맞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