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의 의미와 쓰임에 대한 일고찰/정준영

실론섬 2016. 12. 22. 13:11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의 의미와 쓰임에 대한 일고찰

정준영(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1. 들어가는 말

 

불교수행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에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ā, 止)’은 평온이나 고요함을 목적으로 집중을 계발하기에 ‘사마디 수행(Samādhi-bhāvanā, 定)’이라고 부르며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bhāvanā, 內觀)은 내적통찰과 지혜를 계발하기에 ‘반야수행(Paññā-bhāvanā, 慧)’이라고 부른다.

 

사마타 수행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에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관찰의 대상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동요되는 것을 막는다. 이 과정에서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가 사라지고 선정의 요소(jhānaṅga)를 계발하게 된다. 따라서 사마타(止) 수행은 집중을 통하여 고요함과 평온함을 계발하고 그로 인해 장애가 제거된 선정을 성취하는 수행이다. 또한 이 수행은 마음계발의 다음 단계인 위빠사나(觀) 수행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지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열반을 목표로 하는 위빠사나는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방법이며 불교수행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경전(Pāli-Nikāya)에서 설명하는 불교수행은 이처럼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사마타는 불교뿐만 아니라 불교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던 수행방법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가능한 방법을 활용하셨고 필요에 따라 변화를 주셨다. 이 과정에서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의 방법으로 얻어지는 선정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1) 더 나아가 현상의 생멸을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통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신 것으로 보인다. 즉, 사마타의 장점을 활용하여 위빠사나를 행하셨던 것이다.『법구경(法句經,Dhammapada)』2)은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은 없고 선정을 행하지 않은 자에게 지혜는 없으니, 선정과 지혜가 함께 있을 때 그는 열반에 가까이 있다’라고 말하며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조화가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조화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S. IV. 295. 비고) Vism. 705-707쪽, Winston L King. 1992. 6쪽, 55쪽.
2) Dhammapada, 372.

 

이처럼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초기경전 거의 대부분에 함께 나타나며3)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불교수행의 핵심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불교수행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은 

로 남방의 상좌부 전통에 의해 정립된 방법이다. 남방 상좌부의 수행전통은 초기경전의 해석인 논서와 주석서 전통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결국 오늘날 우리는 남방 상좌부 전통의 경험에 의해 전승된 불교수행법을 익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A. I. 61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는 국내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4) 이러한 연구는 우리나라에 위빠사나 수행이 자리 잡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문헌을 통한 이론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쓰임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4) 김재성.「위빠사나의 이론」불교학연구회 여름워크샵 2002. 7,「순관(純觀)에 대하여」 
   불교학연구 제4호 2002. 6, 임승택.「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
  『인도철학』제11집 2001,「위빠사나 수행의 원리와 실제」『불교연구』제20집 2004, 
   정준영.「대념처경에서 보이는 受念處의 실천과 이해」불교학연구 제7호 2003, 조준호.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한국선학 제1호 2000. 12,「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보조사상 제16집 2001, 등.

 

따라서 본고는 경전에서 설명하는 ‘사마타(samatha, 止)와 사마디(samādhi, 定, 三昧)’, ‘사마타와 선정(jhāna, 禪定)’ 그리고 ‘사마디와 선정’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살펴보고 더 나아가 사마타의 수행주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십업처(四十業處, kammaṭṭhāna)’의 쓰임에 대해 시대에 따른 차이점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위빠사나에 대해서는 오늘날 위빠사나 수행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는 염처(Satipaṭṭhāna, 念處)수행과 위빠사나의 비교를 통해 이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논서와 주석서에 의지하는 상좌부 전통의 수행이 과연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에 얼마나 많은 준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사마타(samatha, 止)에 대해서

 

빠알리어 ‘사마타(samatha)’는 ‘√śam (to be quiet, 고요해 지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의미는 ‘고요함’ 또는 ‘맑음’ 등이며 ‘calm(고요, 평온)’, ‘tranquility(고요함, 평정)’, ‘peace(평

화, 평온)’ 또는 ‘serenity(평온, 맑음, 청명)’등으로 영역된다.5) 수행자가 이처럼 고요한 상태

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집중의 노력을 해야 하기에 일반적인 편안함이라기보다 많은 노

력에 의해 도달한 마음의 고요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모든 해로운 상태(不

善法)가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止’로 옮겼다.

5) [<śam bsk. śamatha] T. W. Rhys Davids & William Stede. 1986. 682쪽, Robert 
   Caesar Childers. 1987. 429쪽, Nyanatiloka. 1987. 157쪽, Bhikkhu Ñāṇamoli. 
   1994. 109쪽, Buddhadatta. A. P. 1989. 264쪽, Monier Williams. 1988. 1,054쪽, 
   전재성. 2005. 645쪽, 雲井昭善. 1997. 901쪽.

 

초기경전에서 ‘사마타’는 ‘사마디’, ‘선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거의 동의

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경전에는 이들의 구분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으나 사용용례를 살펴

보면 이들의 차이점이 보인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수행자는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8가지

선정의 경지(samāpatti, 等持)에 도달할 수 있는데 이들은 네 가지 색계 선정과 네 가지 무

색계 선정이다. 이런 경지는 마음이 대상으로 집중되고 다른 대상으로 인한 흔들림이나 동

요가 사라졌기에 ‘고요함(사마타, cetosamatha, 心寂止)’이라 부른다.6)
6) S. I. 136. 초기경전에서 사마타(samatha)는 사용용례에 따라 ‘제행의 소멸(sabbasaṅkhara 
   samatha)’이라는 의미로 활용되기도 하는데, 이때는 갈애가 제거되고 탐욕에서 벗어난 
   열반을 의미한다. 비고) DhsA. 144, Expos. 191쪽

 

1) 사마타(samatha, 止)와 사마디(samādhi, 定, 三昧)의 관계

‘사마타’와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사마디’는 ‘sam + ā + dhā’가 합성된 것으로, ‘마음을 확고히 세운다’는 의미의 ‘dha’를 어근으로 하여 파생된 여러 용어 중의 하나이다.7) 경전 상에서 이 용어는 마음을 모으는 방법[집중]일 뿐만 아니라 마음이 깊게 모아진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먼저 이 용어를 팔정도의 [8번째]‘바른 집중(正定, sammā-samādhi)’에서 만나볼 수 있다. 초기경전 내에서 바른 집중은 언제나 4가지 선정을 성취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즉, 사마디는 사마타 수행의 결과인 선정과 연결되어 있다. 구체적인 선정과 사마디의 관계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를 통해 사마디는 마음을 모으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서의 상태까지 모두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상윳따니까야(Saṃyutta-Nikāya)』의 설명에 따르면 집중은 수행자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사마디의 계발은 지혜를 계발하는 위빠사나로 발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7) Nyanatiloka. 1987. 157쪽

 

‘비구들이여, 집중을 계발하라! 비구들이여, 집중된 비구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8)

8) S. III. 13

 

‘사마타 수행’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사마디’는 점차 불교수행의 특정 용어로서 자리 잡는 경향을 보인다.『맛지마-니까야(Majjhima-nikāya, 中部)』의『출라웨달라경(Cūḷavedalla sutta)』9)에 따르면 비구니 담마딘나(Dhammadinnā)는 재가자 위사카(Visākha)에게 ‘사마디는 마음의 한 정점(cittassa ekaggata, 心一境性, 마음의 집중)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전의 설명은 다른 두 개의 용어인 ‘사마디’와 ‘마음의 한 정점’이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들은 밀접성보다 대치가 가능한 동의어로 쓰이기 시작했다.10) 
9) M. I. 301, Vism 84쪽
10) L.S. Cousins, 1973, 122쪽

 

이러한 쓰임은 아비담마(Abhidhamma, 論藏) 전통에 와서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되는데『담마상가니(Dhammasaṅganī)』는 ‘마음의 한 정점’을 ‘사마디’의 요소로 설명하며11)『위방가(Vibhaṅga)』역시 선지의 요소로 ‘ekaggata’를 설명한다.12)한 주석서인『앗따살리니(Atthasālinī)』에서 붓다고사(Buddhaghosa)는 ‘마음의 한 정점은 마음이 하나로 집중된 것으로 이것이 사마디(집중)의 이름이다.’라고 설명한다.13) 그리고 후대 논서인『아비담맛타상가하(Abhidhammattha saṅgaha)』는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얻는 선정의 요소를 5가지로 구분하고 ‘[마음의]한 정점(ekaggata)’을 ‘사마디(samādhi, 집중)’에 대신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에 첫 번째 선정의 선지요소는 ‘일으킨 생각(尋, vitakka)’, ‘머무는 생각(伺, vicāra)’, ‘희열(喜, pīti)’, ‘즐거움(樂, sukha)’, ‘[마음의]한 정점(ekaggata)’으로 나타난다.14) 여기서 ‘[마음의]한 정점’을 제외하고 ‘일으킨 생각’, ‘머무는 생각’, ‘희열’, ‘즐거움’은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선정의 요소와 같다. 즉, 후대에 들어와 ‘사마디’를 대신하여 ‘[마음의]한 정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15) 그러나 ‘사마디’와 ‘한 정점’을 동의어로 보는 것은 약간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11) Dhammasaṅgani. 10, 11, 24, 28쪽
12) Vibhaṅga. 257 : Jhānan ti. vitakko vicāro pītisukhaṃ cittassa ekaggatā. Vism. 147 : 
   『청정도론』은 ‘ekaggata’가 선지의 요소에 해당하는 이유를 경장이 아닌 논장
    [Vibhaṅga]에서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3) Atthasālinī. 118쪽. 비교) Patis. I. 31쪽, 45쪽, 64쪽, 97쪽, Dhammasaṅgani. 10, 11, 
    24, 28쪽, Vism. 464
14) Abhidhammatthasaṅgaha. 1983. 3쪽, Vism. 139
15) 비고) Paul Griffiths, 1981. 609쪽

 

먼저 ‘한 정점’, ‘에까가따’는 ‘하나(eka)’를 ‘최정점(agga)’으로 가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비담마에서 선정의 요소로 제시하는 ‘에까가따’는 의심할 여지없이 정신적인 성질의 것이다.『아비담맛타상가하』는 ‘에까가따’를 첫 번째 선정의 요소로 설명하는 동시에 52가지 마음부수들 중, 모든 마음에 반드시 공통되는 마음부수(sabbacitta-sādhārana) 7가지 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의식의 모든 형태에 공통16)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선정의 상태뿐만 아니라 마음이 다른 여러 대상들로 산만하게 분산되는 것에 저항하여 오직 한 가지 대상만을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에까가따’의 기본적인 의미만을 고려했을 때 이는 모든 주의,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된 의식 등의 시작을 말하며, 이러한 작용은 모든 존재들의 개별적 능력에 따라 선정의 성취 없이도 나타나는 것이다. 즉, 선정의 요소로 나타나는 ‘에까가따’가 모든 마음에 반드시 나타나는 마음부수로 소개되는 것은 선정을 얻지 않고도 ‘에까가따’가 활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첫 번째 선정을 얻음으로 ‘에까가따’가 선지(禪支)로써 나타나는 설명은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16) 위의 책. 6쪽, Bhikkhu Bodhi. 1999. 80쪽

 

초기경전에서 사선(四禪)을 설명하는 경우 ‘에까가따’는 첫 번째 선정(初禪)의 요소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에꼬디바와(ekodibhāva, 心一境相)’가 두 번째 선정부터 언급될 뿐이다.17) 이 용어는 ‘[마음을] 한 점에 고정시킨 상태(心一境相)’라는 의미로 ‘에까가따’와 동의어처럼 이해된다.18) 하지만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이 상태는 초선(初禪)보다 집중이 더욱 강해지는 두 번째 선정을 얻어야만 나타난다.19)『앙굿따라니까야(Anguttara-nikāya)』20)는 어떠한 형태로든 ‘일으킨 생각(vitakka)’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에꼬디바와’와 같은 집중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즉, ‘에꼬디바와’는 ‘에까가따’와 다르며 ‘일으킨 생각’과 ‘머무는 생각’이 사라지는 두 번째 선정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디라는 용어는 ‘에까가따’ 뿐만 아니라 ‘에꼬디바와’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에까가따’는 ‘사마디’를 정의 내리기 위한 특별한 의미 중의 하나이지 완전한 동의어라고 보기 어렵다. 21) 그러므로 ‘에까가따’가 첫 번째 선정의 요소로 쓰이는 경우는 초기경전이 아닌 논서와 후대 문헌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22)
17) 물론 초기경전인 Mahāvedalla sutta(M. I. 294)를 통하여 ‘에까가따’가 第一禪의 선지로 
    설명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전은 四禪의 모든 과정이 아닌 第一禪의 특징만을 
    언급한다. 또한 Anupada sutta(M. III. 25)의 ‘에까가따’ 역시 모든 선정에 공통되는 요소
    이기에 장애를 제거하고 나타나는 第一禪의 선지로 보기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18) Max Muller. 1885, 36쪽, 비교) ed. G.P. Malalasekera. 1990. 51쪽
19) D. I. 182, M. I. 159, M. I. 347, M. I. 399, M. III. 93, 비교) M. I. 294
20) A. I. 254
21) S. V. 21
22) Vism. 147, Vbh. 257

 

이처럼 다양한 자료를 통해 더욱더 선명해지는 것은 ‘사마디’라는 용어가 ‘사마타’라는 용어에 비하여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23) 기본적으로 이 용어는 수행이라는 실천적인 의미와 그 실천을 통해 얻어진 결과로서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실천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모든 정신 상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역할로 ‘집중’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이것이 실천을 통하여 도달된 정신 상태나 결과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높은 수준의 정신적 평온함, 고요함 등과 같은 사마타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사마디는 ‘마음의 집중’과 ‘그것으로 인해 도달되는 정신적 평온함(samatha)’ 모두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23) S. II. 95, Dhammasaṅgani 10

 

2) 사마타(samatha, 止)와 선정(jhāna, 禪定)의 관계

사마타와 선정의 관계를 살펴보면 사마타가 왜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로 중국에서 ‘止’로 옮겨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수행자는 지속적인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고 첫 번째 선정에 들게 된다.『보장가 상윳따(Bojjnaṅgasaṃyutta)』24)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장애는 마치 맑은 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려는 자에게 ‘염료가 섞인[kāmarāga]’, ‘불에 끓는[byāpāda]’, ‘수초로 덮인[thīna-middha]’, ‘바람에 물결치는[uddhacca-kukkucca]’, ‘진흙으로 탁한[vicikicchā]’ 물과 같아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분명히 보거나 알지 못한다고(na pajānati) 설명하고 있다.25) 따라서 수행자의 마음에 이러한 다섯 가지 장애가 나타나지 않을 때, 맑은 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 수 있다. 

24) S. V. 63, 140
25) S. V. 121, A. III. 230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는 1)감각적 욕망(kāmacchanda), 2)성냄(byāpāda,악의), 3)혼침과 졸음(thīna-middha), 4)들뜸과 회한(uddhacca-kukkucca) 그리고 5)회의적 의심(vicikicchā)이다. 수행자가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첫 번째 선정에 들게 되면 이들 5가지 장애들은 중지하고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선정요소들이 나타난다.26) 이들은 ‘일으킨 생각(尋,vitakka)’, ‘머무는 생각(伺, vicāra)’, ‘희열(喜, pīti)’, 그리고 ‘즐거움(樂, sukha)’이다. 즉, 장애들이 중지함으로써(止) 수행자는 선정의 요소와 함께 더 깊은 수행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26) 청정도론(Vism. 141)에 따르면 5가지 선정의 요소는 5가지 장애와 상충하여 나타난다.

 

따라서 선정의 요소도 선정의 상태에서 항상 하는 것은 아니라 수행이 발전될수록 점차적으로 중지(止)한다.『까싸빠 상윳따(Kassapasaṃyutta)』,『깐다라까 경(Kandaraka sutta)』,『까야가따사띠 경(Kāyagatāsati sutta)』등의 경전은 선정의 성취에 따른 선정요소(禪支,jhāna-aṅga)의 중지(止)를 보여준다.

 

‘그는 마음의 번뇌이며 또 지혜를 약화시키는 이 다섯 가지 장애들을 버리고, 1)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고 불선한 법으로부터 떠나서, 일으킨 생각(vitakka)이며 머무는 생각(vicāra)이며, 벗어남(viveka)에서 일어난 희열(pīti)과 즐거움(sukha)인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2) 일으킨 생각(vitakka)과 머무는 생각(vicāra)이 가라앉음(止)으로써 내적인 고요(sampasāda)와 마음이 한곳으로 집중된(ekodibhāva), 일으킨 생각과 머무는 생각이 없는 집중(samādhi)에서 생겨나는 희열(pīti)과 즐거움(sukha)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3) 희열(pīti)이 사라짐으로써(止), 평정(upekhā)과 마음챙김(sati, 주시, 마음지킴, 새김, 수동적 주의집중, 기억)과 바른 알아차림(sampajāno)으로 머문다. 그리고 몸으로 즐거움(sukha)을 느낀다. 성인들은 이것을 일컬어 ‘평정(upekhā)과 마음챙김(sati)이 있는 즐거움으로써 머무는 자’라고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4) 즐거움(sukha)과 괴로움(dukkha)이 끊어짐(止)으로써 그리고 예전의 정신적인 즐거움

(somanassa)과 정신적인 괴로움(domanassā)이 제거됨(止)으로써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adukkhaṃ asukhaṃ), 맑고 청정한 평정(upekhā)과 마음챙김(sati)인27)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28)
27) ‘upekhāsatipārisuddhiṃ’은 분석에 따라 다른 해석을 가질 수 있다. ‘청정한 평정과 
    청정한 마음챙김’(Vasubandhu, Asanga) 그리고 ‘평정하여 일어나는 청정한 마음챙김 
    ’(Visuddhimagga, Vibhaṅga)혹은 ‘평정에 의해서 마음챙김이 정화된’ 등으로 해석한다.
28) S. II. 211, M. I. 347, D. I. 71, M. III. 94

 

이와 같이 선정의 진행과정은 첫 번째 선정에서 나타난 선정의 요소들이 수행의 발전에 따라 점차적으로 상승했다 소멸하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선정에서 나타난 즐거운 느낌(sukha)은 두 번째 선정에서 집중(samādhi)을 통하여 부각되고 세 번째 선정에서 온 몸으로 느껴지는 절정의 시기를 지나 네 번째 선정에서 소멸하게 된다.29) 특히 네 번째 선정은 느낌의 다섯 가지 요소들 중에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의 네 가지 느낌이 모두 소멸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웨다나상윳따(Vedanāsaṃyutta)』는 색계의 4선뿐만 아니라 무색계까지 이어지는 중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수행자가 두 번째 선정을 얻음으로 구행(口行, vacisaṅkhāra), 네 번째 선정을 얻음으로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 그리고 무색계선정들을 거쳐 마지막으로 상수멸정을 얻음으로 의행(意行, cittasaṅkhāra)이 중지한다.

29) M. III. 299f

 

‘비구들이여, 나는 점진적인 행(saṅkhā)의 중지(소멸, nirodha)를 설한다. 첫 번째 선정을 얻은 자에게 언어는 중지(소멸)되었다(niruddhā honti). 두 번째 선정을 얻은 자에게 일으킨 생각(vitakka)과 머무는 생각(vicāra)은 중지되었다. 세 번째 선정을 얻은 자에게 희열(pīti)은 중지되었다. 네 번째 선정을 얻은 자에게 들숨과 날숨은 중지되었다. 공무변처정을 얻은 자에게 물질에 대한 지각은 중지되었다. 식무변처정을 얻은 자에게 공무변처정은 중지되었다. 무소유처정을 얻은 자에게 식무변처정은 중지되었다.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은 자에게 무소유처정은 중지되었다. 상수멸정을 얻은 자에게 지각과 느낌은 중지되었다. 번뇌를 제거한 비구에게 탐심(rāga)은 중지되었다. 성냄(dosa)은 중지되었다. 어리석음은 중지되었다(moho niruddho hoti). ··· 30)
30) S. IV. 217, 294

 

즉, 선정의 과정을 통해 언어적인 일으킨 생각과 머무는 생각, 육체적인 느낌과 호흡, 그리고 의식(意識, 意行)의 활동마저도 점차적으로 중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을 통한 점진적 중지의 과정은 결국 탐, 진, 치의 중지로 이어진다.31) 그러므로 사마타 수행을 통한 선정의 성취과정은 불교 수행의 최종 목표인 탐, 진, 치의 중지(소멸)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마타와 선정의 관계를 비교해 보았을 때 사마타가 왜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止’로 옮겨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32)
31) M. I. 302, D. III. 233, Papañcasūdanī. II. 365, Vimuttimagga, 323
32) 정준영 2004, 246쪽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팔정도의 바른집중(sammā-samādhi, 正定)은 언제나 색계 사선정을 설명한다.33) 그런데 사마타와 선정의 관계에 있어서 흥미로운 사실은 초기경전과 후대문헌 사이에 네 가지 선정의 요소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경전에서 수행자에게 나타나는 사선(四禪)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33) Bhikkhu Bodhi. 2001. 41쪽, S. V. 10

 

一禪 : 일으킨 생각(vitakka), 머무는 생각(vicāra), 희열(pīti), 즐거움(sukha)

二禪 : 고요(sampasāda), 한 곳에 집중(ekodibhāva), 집중(samādhi), 희열(pīti), 즐거움

三禪 : 평정(upekhā), 마음챙김(sati), 바른 알아차림(sampajāno), 즐거움

四禪 : 평정, 마음챙김

 

하지만 아비담마나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설명하는 색계선정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一禪 : 일으킨 생각, 머무는 생각, 희열, 즐거움, 한 정점(ekaggata, 집중)

二禪 : 희열, 즐거움, 한 정점

三禪 : 즐거움, 한 정점

四禪 : 평정, 한 정점. 34)
34) Abhidhammatthasaṅgaha. 1983. 3쪽. 참고) 아비담맛따상가하는 vitakka와 vicāra의 
    구분에 따라 第五禪까지 설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같은 색계 선정의 과정을 놓고 초기경전과 후대문헌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색계사선은 선정마다 나타나는 특징이 다양하게 설명되는 반면에 후대문헌에서 나타나는 색계사선은 보다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점진적인 선지의 사라짐을 강조하고 있다.35) 이와 같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 선정의 요소 역시 쉽게 간과할 수는 있는 부분은 아니다.

35) L.S. Cousins, 1992, 151쪽

 

3) 사마디(samādhi, 三昧)와 선정(jhāna, 禪定)의 관계

‘사마디’는 종종 ‘선정(jhāna)’과 동등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선정은 산스크리트어 ‘dhyāna’와 같은 용어로 ‘생각하다’, ‘숙고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어근 ‘dhi’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리고 빠알리 용어 ‘jhāna’는 ‘숙고하다’, ‘명상하다’, ‘생각하다’의 의미를 지닌 ‘jhāyati’라는 동사형에서 나온 중성명사이다.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을 통하여 이 용어의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을 설명한다.

 

‘첫 번째로 일어나기 때문에 처음이라 했다. 대상을 정려(靜慮, upanijjhāna, 고요히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되는 것을 태우기(jhāpana) 때문에 선(禪, jhāna)이라고 한다.’36)
36) Vism. 150, 대림, 2004. 1권 387쪽

 

청정도론의 번역서를 통하여 냐냐몰리(Bhikkhu Ñāṇamoli)는 이 문장을 ‘대상을 빛내기 때문에, 반대를 태우기 때문에 선정(jhāna)이라고 부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37) 냐나몰리가 ‘upanijjhāna’를 ‘빛(lighting, 조명)’으로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앎의 상징으로 빛을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빛이나 조명을 만드는 불과 연관을 짓기 위해 빛을 사용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또한 붓다고사의 위와 같은 정의에 대해 헤네폴라 구나라타나(ven. Henepola Gunaratan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37) Bhikkhu Ñyāṇamoli. 1976. 156쪽

 

‘위대한 주석가 붓다고사는 빠알리어 jhāna를 두 가지 동사의 형태로 추적하고 있다. 하나는 ‘생각하다’, ‘명상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jhāyati’에서 어원적으로 바르게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원적인 의미보다는 ‘밝게 비춘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jhāna는 ‘관찰’, ‘응시’와 ‘태우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들은 수행의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수행자가 마음을 대상에 고정시킴으로 수행자는 다섯 가지 장애와 같은 낮은 정신적인 장애를 줄여나가거나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에 더욱 마음을 전념할 수 있도록 선정의 요소라는 높은 요소들이 계발된다. 또한 위빠사나를 통하여 현상의 특징을 관찰함으로 수행자들은 결국 네 가지 과(果)라는 출세간의 선정에 도달하게 되고, 이 선정으로 오염들을 태워 제거하여 해방의 경험을 얻는다.’38)
38) Henepola Gunaratana, 2002. 35쪽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붓다고사의 어원적 설명의도가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이나 ‘jhāna’가 ‘태우다’, ‘불 위에 놓다’의 의미를 지닌 ‘jhāyati’[kṣāyati]의 동사형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붓다고사의 이와 같은 설명은 어떤 용어에 대한 새로운 논의뿐만 아니라 활기 있는 의미를 유추하는 좋은 시도가 되었다. 

 

‘선정(jhāna)’이라는 용어가 ‘생각하다’, ‘숙고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형 ‘jhāyati’[dhyāyati]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디가니까야(Dīgha-nikāya, 長部)』의『악간냐 경(Aggañña sutta)』을 통하여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39) 따라서 ‘선정(jhāna)’이라는 용어가 ‘수행’을 의미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사마디(samādhi, 집중)라는 용어 역시 ‘수행’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두 용어는 다르지만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이 두 용어의 연결성에 대해서는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 sutta)』에 자세히 설명된다. 부처님께서는 바른 집중을 4가지 선정의 얻음과 같다고 설명하신다.

39) D. III. 94

 

‘비구들이여, 바른 집중(Sammā-samādhi, 正定)이란 무엇인가?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고 불선한 법으로부터 떠나서, 일으킨 생각이며 머무는 생각이며, 벗어남에서 일어난 희열과 즐거움인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 두 번째 선정 … 세 번째 선정 …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이것을 바른 집중이라고 한다.’40)
40) D. II. 313

 

이 경전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전을 통해 네 가지 선정을 바른 집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선정과 집중이 부분적으로 공통성을 보인다고해서 이 두 용어를 동의어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오해의 소지가 있다. 위 경전을 기준으로 선정과 사마디를 동일시한다면 집중(samādhi)을 [마음의]한 정점(ekaggata)과 동의어로 보는 좁은 견해와 같다. 따라서 경전에서 사용된 설명이 그 용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미를 포함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불교경전 내에서 사마디(定)는 선정에 비해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경전에서 부처님은 사마디의 일반적인 의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팔정도의 [8번째 요소인] ‘바른 집중(Sammā-samādhi)’을 선정과 비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마디와 선정을 사용하는 문맥에 대한 고려 없이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바른 집중’은 불교경전에서 사용되는 사마디란 용어의 한 쓰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마디는 선정보다 더 넓고 다양한 범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삼학(三學, tisikkhā)’은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를 말하고 이는 팔정도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정(定)’의 범위 안에는 다시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집중(正定)’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정의 요소를 설명하는 ‘바른 집중’은 ‘사마디(定)’라는 커다란 범위 안에 속한다. 더 나아가『암밧타경(Ambaṭṭha sutta)』41)에 따르면 ‘사마디’는 ‘행위(caraṇa)’라는 말로 대체하여 사용될 수 있다. 여기서 ‘행위’는 ‘감관에 대한 보호(indriyesu guttadvāratā)’, ‘마음챙김과 알아차림(sati-sampajañña)’, ‘만족(santuṭṭhi)’, ‘다섯 가지 장애(nīvaraṇa)에 대한 극복’, 그리고 ‘4가지 선정(jhāna)’의 계발이다. 이는 ‘사마디’라는 용어가 ‘선정’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넓게 활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마디와 선정은 완전한 동의어로 사용될 수 없으며 선정이 사마디의 한 형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41) D. I. 87

 

하지만 이와 같이 넓은 의미를 지닌 사마디(samādhi)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되어졌다. 청정도론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예비-사마디(parikamma samādhi, 豫備定, preparatory concentration)’, ‘근접-사마디(upacāra samādhi, 近接定, accessconcentration)’ 그리고 ‘몰입-사마디(appanā samādhi, 安止定, absorption concentration)’이다.42) ‘예비-사마디’는 정신적 활동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집중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때에 일어나는 집중력과 유사하다. ‘근접-사마디’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모두에 이용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에는 ‘근접-사마디’와 ‘찰나-사마디(khaṇika samādhi, 刹那定)’로 구분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이 사마디는 집중의 대상에 강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경우는 ‘찰나-사마디’만으로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43) 하지만 사마타 수행에 사용되는 경우, 이 사마디는 첫 번째 선정을 얻기 직전까지만 활동한다. 그리고 선정의 성취와 함께 ‘몰입-사마디’로 이어져 나간다. ‘몰입-사마디’는 선정의 성취와 함께 유지되는 사마디로 수행자는 이를 통해 색계와 무색계정을 얻는다.44) 
42) Vism. 85
43) L.S. Cousins, 1996, 43쪽, 48쪽
44) Vism. 126, Bhikkhu Ñyāṇamoli. 1976. 131쪽, Atthasālinī 162-179쪽, The Expositor 
    216-239쪽.

 

하지만 이러한 사마디의 구분은 초기경전에서 보이지 않으며 청정도론 등의 후대문헌과 주석서 전통에서부터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후대에 이러한 사마디의 구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방법, 즉 선정의 성취 없이도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순수 위빠사나(suddhavipassanā)를 지원하게 되었다.45)
45) Jun Young, Jeong. 2002. 245쪽, 김재성. 2002 불교학연구 제4호.

 

4) 사마타 수행의 주제 (業處, kammaṭṭhāna)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는 사마타 수행의 관찰대상으로 40가지 주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46) 사마타의 ‘수행주제’로 알려져 있는 빠알리어 ‘깜맛타나(Kammaṭṭhāna)’는 수행의 주제뿐만 아니라 그들을 실천하는 방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깜맛타나’라는 용어가 어떻게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후대 문헌인 청정도론과 주석서의 전통에서부터이다. 초기경전에서 ‘깜맛타나’가 사마타를 위한 수행주제로 사용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깜맛타나’라는 용어는 ‘kamma’와 ‘(t)ṭhāna’의 합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본래의 의미는 ‘행위(kamma)’의 ‘장소, 조건, 위치(ṭhāna)’이다. 이 용어는 초기경전인『수바경(Subha sutta)』47)을 통해 ‘gharāvāsa(집에서 삶)’와 ‘pabbajjā(출가)’와 합성되어 ‘직업’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gharāvāsa kammaṭṭhāna(가장의 직업)’는 농업(kasī)이나 상인(vaṇijjā)과 같은 재가자의 직업을 의미한다.

46) Vism. 110
47) M. II. 197

 

비록 ‘깜맛타나’가 네 가지 주요 니까야(四部)에서 수행의 주제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소부(小部, Khuddaka Nikāya)』의 『자따가(Jātaka, 本生譚)』에서는 비교적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경전은 ‘깜맛타나에 종사하는 자는 곧 아라한을 성취하게 된다’48)라고 설명한다. 깜맛타나를 통한 아라한의 성취는 성인이 되기 위해 수행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깜맛타나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수행의 실천(kammaṭṭhāne anuyutto)이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48) Jātaka. III. 36

 

청정도론과 주석문헌의 전통에서 깜맛타나라는 용어는 그 일반적인 의미를 잃고 수행의 주제를 나타내는 기술적인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깜마’는 ‘행위’라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행위[수행]’로 의미가 확장되어진 것 같다. 따라서 이 용어는 수행의 실천을 통하여, 정신적인 진보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사마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요와 평온을 이끄는 수행에서 40가지 짜여진 방법으로 진행되는 수행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49)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40가지 주제라는 사마타 수행의 진행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법하신 가르침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49) Vism. 97, 187, 277, DhpA. I. 248, 336

 

지금까지 초기경전과 후대문헌에서 설명하는 사마타(samatha, 止)와 사마디(samādhi, 定) 그리고 ‘선정(jhāna, 禪定)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 과정을 통하여 초기경전에서 사용되는 사마디와 선정의 의미가 논서와 주석전통의 후대문헌에서 다르게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마타 수행의 주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십업처(kammaṭṭhāna)’ 역시 초기경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후대에 정립된 수행체계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오늘날 우리나라의 불교수행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살펴보겠다.

 

3. 위빠사나(Vipassanā, 觀)에 대해서

 

‘위빠사나(vipassanā. Skt. vipaśyana, 觀)’는 ‘위(vi)’와 ‘빠사나(passanā)’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여성명사이다. 접두사 ‘vi’가 ‘paś’라는 어근을 가진 동사 ‘passati(보다)’와 결합하여 ‘분명하게 봄’, ‘통하여 봄’, ‘꿰뚫어 봄’ 등으로 강조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본다는 의미가 강조된 ‘통찰(insight)’, ‘직관적 통찰(intuition)’, ‘내적관찰(inward-vision)’, ‘내적성찰(introspection)’ 등으로 영역되어 사용된다.50) 때때로 ‘위(vi)’가 접두사로 사용될 때에는 ‘다양한(vividha)’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위빠사나’의 ‘위(vi)’는 ‘다양하다’는 의미보다는 ‘뛰어나다(visesa)’는 의미로 ‘빠사나(passanā)’와의 합성을 통해 ‘뛰어난 봄’, ‘특별한 관찰’ 등을 나타내는 불교적 전문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50) Rhys Davids, T. W. and Stede, William. 1993 627쪽, Caesar Chilbers, Robert. 1987. 
    580쪽, 565쪽, 전재성. 2005. 598쪽, Nyanatiloka. 1987. 197쪽. 雲井昭善. 1997. 809쪽, 
    Bhikkhu Ñāṇamoli. 1994. 96쪽, Buddhadatta. A. P. 1989. 239쪽, Monier Williams. 
    1951. 974쪽, Mahesi Tiwary 81쪽, D. Andersen, A Pali Glossary, vol.Ⅱ. 232쪽

 

‘위빠사나’는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불교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사마타’와 조화를 이루어 ‘사마타-위빠사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불교 안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수행자는 고요함을 계발하는 사마타 수행과 내적통찰을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조화를 이루어 수행한다. 사마타 수행을 이끄는 사마디(집중)가 없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는 생기지 않는다. 집중은 지혜를 이끄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수행자는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잠정적으로] 번뇌를 누르고, 또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지혜와 함께] 번뇌를 잘라버리게 된다. 위빠사나의 목적은 발생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지혜를 얻는 것이다(yathābhūta-ñāṇadassana).51) 즉,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법구경 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51) Paul Griffiths, 1981. 611쪽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영원하지 않다(無常)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괴로움이다(苦)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법은 영원한 자아가 없다(無我)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52)

52) Dhammapada. 277

 

법구경은 세 가지 법의 특성(三法印)인 무상, 고, 무아를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이 바로 청정[열반]에 이르는 길임을 설명하고 있다. 지혜로써 관찰한다는 말은 다름 아닌 위빠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현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위빠사나를 위해서는 사마디가 기본조건(upanis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앙굿따라 니까야』는 바른 집중이 없으면 수행자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내적 통찰로 이끌지 못해 결국 해탈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고 설명한다.53) 또한『상윳따니까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의 가장 가까운 원인은 사마디이다’라고 설명한다.54) 
53) A. III. 200, III. 19
54) S. II. 30

 

그러므로 위빠사나(Vipassanā)는 사마디를 통해 ‘지혜’라고 불리는 경험적 내적 통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를 계발하기 위해 수행자 스스로의 신중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은 체계적으로 분석되고 설명될 수 있기에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가정에도 준하지 않으며, 정신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외부의 힘에 의지하는 신비적인 성향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스스로의 내적 통찰을 통하여 번뇌로부터 해방으로 이끄는 불교만의 수행체계이다.

 

1) 위빠사나(Vipassanā, 觀)와 염처(Satipaṭṭhāna, 念處)의 관계

오늘날 우리에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수행방법으로 잘 알려져 있는 위빠사나 수행(觀)은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anā)와 더불어 그 방법을 전개해나간다. ‘염처 수행’은 불교에서 깨달음과 지혜를 얻기 위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가운데 첫 번째 수행 방법이다. 

 

이 수행은 『대념처경』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55)『대념처경』은『염처경(念處經, Satipaṭṭhāna sutta)』과 함께 수행자가 청정을 이루고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벗어나 결국 열반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네 가지 수행방법을 설명하고있는 경전이다.56) 이 경전은 비교적 구체적인 방법을 통하여 수행자가 자신의 몸(身, kāya), 느낌(受, vedanā), 마음(心, citta), 법(法, dhamma)의 네 가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분에 의해 사념처라고 불린다. 경전은 네 가지의 염처수행 범주 안에 총 21가지의 수행방법을 제시한다. 

55) D. II. 290
56) M. I. 55

 

첫 번째로 신념처(身念處, kāyānupassanā)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에 대해 14가지 방법을 들어 수행자가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두 번째로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인 수념처(受念處, 受觀,vedanānupassanā)는 9가지 느낌을 대상으로 [1가지 방법으로] 관찰한다고 설명한다. 세 번째로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인 심념처(心念處, cittānupassanā)는 16가지 마음을 대상으로 [1가지 방법으로] 관찰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네 번째로 ‘법에 대한 마음챙김’인 법념처(法念處, dhammānupassanā)는 5가지 방법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사념처는 수행자가 자신의 몸, 느낌, 마음, 법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함으로서 현상의 생멸을 통해 무상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수행방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수행은 팔정도의 [7번째]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ā-sati)’의 수행방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위빠사나 수행과 사념처 수행 사이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위빠사나는 ‘직관적 통찰’ 또는 ‘내적 관찰’을 의미하며 지혜를 계발하는 ‘반야수행(Paññā-bhāvanā, 慧)’이다. 따라서 팔정도를 ‘계’, ‘정’, ‘혜’의 ‘삼학’으로 구분했을 때 ‘계’와 ‘정’의 갖춤으로 얻어진 ‘혜’ 안에 해당한다. ‘혜’의 범주 안에 해당하는 팔정도의 요소는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57)와 ‘바른 생각(正思惟, sammā-saṅkappa)’58)이다.『바른 견해의 경(Sammādiṭṭhi sutta)』은 바른 견해와 위빠사나의 유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57) D. II. 311f, A. I. 27 참고) D. II. 66f, M. I. 486, M. III. 71f, S. III. 68, S. III, 139, A. I. 286
58) D. II. 312

 

‘존자여, 고귀한 제자가 이와 같이 번뇌를 분명히 알고, 번뇌의 발생을 분명히 알고, 번뇌의 소멸을 분명히 알고[無常, anicca], 번뇌의 소멸로 이르는 길을 분명히 알면, 그는 모든 탐욕[貪]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성냄[瞋]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라는 견해의 잠재성향을 제거[無我, anattā]하고 무지[痴]를 제거하고 명지를 일으켜 지금 여기에서 고통(苦, dukkha)의 끝을 얻습니다. 이처럼 고귀한 제자는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를 지니고, 견해를 바르게 세우고, 법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진정한 법을 얻습니다.’59)
59) M. I. 55

 

또한『칸다상윳따(Khandhasaṃyutta)』는 ‘바른 견해(正見)’를 오온(五蘊)이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바른 견해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탐욕을 제거하고 해탈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무상한(無常) 물질(色)을 [무상한 느낌(受)을..., 무상한 인식을(想)을..., 무상한 형성(行)을..., 무상한 의식(識)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는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바르게 보아 혐오하여 멀리하게 된다. [오온에 대한] 기쁨의 제거가 탐욕의 제거로, 탐욕의 제거가 기쁨의 제거로 이끈다. 기쁨과 탐욕의 제거로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이는 바르게 해탈된 것을 말한다···’60)
60) S. III. 51

이처럼 경전은 팔정도를 통하여 얻어진 ‘바른 견해’를 지니면 무상(無常, anicca), 고(苦,dukkha), 무아(無我, anattā)를 터득하고 탐(貪), 진(瞋), 치(痴)를 소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위빠사나는 삼학의 구분 중 ‘계’, ‘정’의 갖춤으로 얻어진 ‘지혜’의 범주[正見, 正思惟] 에 가깝다. 하지만 오늘날 위빠사나의 수행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념처는 ‘지혜’의 범주라기보다 ‘집중(samādhi, 定)’의 범주 안에서 시작된다. 물론 팔정도를 삼학으로 구분하고 사념처를 어느 범주 안에 국한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경전은 팔정도의 집중 안에 ‘바른 마음챙김(sammā-

sati, 正念)’으로 사념처를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상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법에서 법을 따라... 세상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머문다. 이것을 바른 마음챙김이라고 한다.’61)

61) D. II. 313

 

불교수행의 길을 계정혜로 구분해 보았을 때, 계를 갖추고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한 초행자도 집중의 범주 안에 속하는 사념처를 수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체를 가지고 그를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그가 [경전의 설명에 따라] 몸의 호흡이나 느낌을 통해 몸에서 몸을,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관찰 속에서 [무상, 고, 무아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은 아직 키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위빠사나를 위해서는 ‘계’, ‘정’ 뿐만 아니라 ‘혜’를 포함하는 팔정도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념처 수행 자체만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보는 데는 다소무리가 있다.

 

우리는 후대문헌으로 오면서 사념처(四念處) 수행이 위빠사나 수행의 길로 표현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위빠사나 수행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마하시 사야도(ven.Mahasi Sayadaw)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념처와 위빠사나는 동의어처럼 사용된다.62) 그리고 고엔카지(S.N. Goenka)는 ‘위빠사나 수행은 사념처 수행과 같다’63)고 설명한다. 이들 마하시 사야도와 고엔카지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많은 명성을 얻고 있는 수행지도자이다. 이 의미는 오늘날 많은 수행자들이 이들의 가르침에 따라 사념처 수행 자체를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는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62) Mahasi Sayadaw, 1984, 1990.
63) Goenka. S. N. 1993. 69쪽, introduction. xi, xiii

 

2) 유사점과 차이점

첫 번째 유사점은 사념처의 ‘아누빠사나(anupassanā)’와 ‘위빠사나(vipassanā)’ 사이의 언어적 연계성이다.『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 sutta)』의 수행방법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염처는 빠알리어로 [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한] ‘아누빠사나’이다. 즉, ‘염처(마음챙김의 확립)’는 ‘아누빠사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누빠사나’는 ‘~을 따라서, ~와 결합하여’ 등의 의미를 가진 접두사 ‘anu’와 ‘보다’라는 뜻의 ‘passati’가 결합된 ‘anupassati’로부터 나온 명사형으로 ‘따라가며 보기, 관찰, 응시’64)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한 ‘아누빠사나’는 이들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의미로 ‘따라가며 보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위빠사나 역시 ‘분명하게 봄’, ‘통하여 봄’, ‘꿰뚫어 봄’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아누빠사나’와 ‘위빠사나’는 모두 지금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주의깊은 관찰을 의미한다.

64) Rhys Davids, T. W. 1993. 33쪽, 38쪽, 627쪽

 

『청정도론』65)에서 붓다고사는 18가지의 ‘주요한 위빠사나(mahā-vipassanā)’를 설명한다. 이들은 ‘아누빠사나’ 16가지와 ‘여실지견’ 하나, 그리고 ‘위빠사나(vipassanā)’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1) 무상을 따라 관찰하여(aniccānupassanā) 영원하다는 인식을 버림, 2) 고통을 따라 관찰하여(dukkhānupassanā) 즐겁다는 인식을 버림, 3) 무아를 따라 관찰하여 (anattānupassanā) 자아라는 인식을 버림, 4) 혐오를 따라 관찰하여 (nibbidānupassanā) 기쁨을 버림, 5) 탐욕 없음을 따라 관찰하여(virāgānupassanā) 탐욕을 버림, 6) 소멸을 따라 관찰하여(nirodhānupassanā) 일어남을 버림, 7) 포기를 따라 관찰하여 (paṭinissaggānupassanā) 가짐을 버림, 8) 제거를 따라 관찰하여(khayānupassanā) 빽빽하다는 인식을 버림, 9) 사라짐을 따라 관찰하여(vayānupassanā) [업의] 축적을 버림, 10) 변화를 따라 관찰하여(vipariṇāmānupassanā) 일정하다는 인식을 버림, 11) 표상 없음을 따라 관찰하여(animittānupassanā) 표상을 버림, 12) 욕망 없음을 따라 관찰하여(appaṇihitānupassanā) 욕망을 버림, 13) 공(空)을 따라 관찰하여(suññatānupassanā) [집착의]경향을 버림, 14) 뛰어난 지혜의 법을 위빠사나하여(adhipaññā-dhamma-vipassanā) 실재가 있다는 [집착의]경향을 버림, 15) 여실지견을 하여(yathā-bhūta-ñāṇadassana) 혼동의 [집착의]경향을 버림, 16) 위험을 따라 관찰하여(ādinavānupassanā) [형성에]집착하는 경향을 버림, 17) 숙고를 따라 관찰하여(paṭisankhānupassanā) 숙고하지 않음을 버림, 18) 전환을 따라 관찰하여(vivaṭṭānupassanā) 속박의 경향을 버림이다.

65) Vism. 694, Bhikkhu Ñāṇamoli. 1976. 813쪽

 

이들 18가지의 ‘위빠사나’를 살펴보면 붓다고사는 다양한 ‘아누빠사나’를 ‘주요한 위빠사나’의 범주 안에 넣었다. 이를 통해 청정도론의 제작시기[AD 5세기]에 ‘아누빠사나’와 ‘위빠사나’는 동의어처럼 쓰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염처의 ‘아누빠사나’와 ‘위빠사나)’는 서로 언어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또 다른 유사성은 열반(nibbāna)으로 향하는 염처와 위빠사나의 목적이다. 월폴라 라훌라(Ven. Walpola Rahula)는 ‘염처’와 ‘위빠사나’를 열반으로 이끄는 불교수행의 핵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할 수 있고, 마음을 완전한 해방으로 이끌며,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 열반으로 이끄는 위빠사나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발견하셨다. 이것은 불교수행의 핵심이며 불교의 정신 계발방법이다. 이것은 마음챙김, 알아차림, 직관, 관찰에 바탕한 분석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교수행에 관한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염처경이다.’66)
66) Walpola Rahula. 1996. 68쪽

 

‘염처’와 ‘위빠사나’는 모두 열반의 성취를 목표로 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수행자가 염처수행을 할 때에는 몸, 느낌, 마음, 법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일어나는 현상과 사라지는 현상 모두를 면밀하게 관찰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가정도 개입될 수가 없다. 이와 유사하게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에도 수행자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에 ‘무상’, ‘고’, ‘무아’의 성질로 보게 된다. 냐나포니까 테라(Nyanaponika Thera) 역시 염처와 위빠사나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염처수행의 주요대상으로 선택된 몸[느낌, 마음, 법]에 대한 관찰은 초행자의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최고 목표에 다다르기까지의 수행 전체를 통해 위빠사나를 체계적으로 계발시킨다.’67)
67) Nyanaponika Thera, 1996. 105쪽

 

이처럼 염처수행과 위빠사나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사띠빳타나 상윳따』는 염처수행의 중요성과 그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벗이여, 네 가지 염처수행이 계발되고 실천되지 않는다면 여래(如來)의 반열반(般涅槃) 후에 참된 법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네 가지 염처수행이 계발되고 실천된다면 여래의 반열반 후에 참된 법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벗이여, 네 가지 염처수행의 계발을 완성한 자는 배울 것이 남아있지 않은 자(無學,arahat)입니다. 무엇이 네 가지입니까? 여기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뭅니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상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 법에서 법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뭅니다. 이 네 가지 염처수행의 계발을 완성한 자는 배울 것이 남아있지 않은 자입니다.’

 

‘한때 세존께서는 우루웰라의 네란자라강 언덕에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첫 번째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머무셨다. 그때 홀로 수행하시는 세존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길은 유일한[최상의 목표로 가는] 길이니 수행자가 청정을 이루고,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벗어나 결국 열반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수행방법으로 그것은 네 가지 염처수행이다.’68)
68) S. V. 172, 175, 167 비고) S. V. 165f

 

또한 『앙굿따라 니까야』역시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는 염처수행의 이로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오계를 지키는데 연약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염처수행을 해야만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여기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 느낌 … 마음 … 법 …’ 69)
69) A. IV. 457

 

위와 같은 방법으로 경전은 1) 다섯 가지 장애(五蓋), 2) 다섯 가지 욕망(五慾), 3) 다섯 가지 취착의 모임(五取蘊), 4) 다섯 가지 낮은 속박(五下分結), 5) 다섯 가지 진행(五趣), 6) 다섯 가지 인색(五慳吝), 7) 다섯 가지 높은 속박(五上分結), 8) 다섯 가지 마음의 쇠약(五心栽), 9) 다섯 가지 마음의 속박(五心繫縛) 등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네 가지 염처수행을 제시하고 있다.

 

경전은 염처수행이 수행자들로 하여금 계율을 잘 지키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염처수행은 매우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염처수행을 통하여 수행자는 결국에 탐, 진, 치를 제거하게 되고, 이는 다시 위빠사나 수행의 역할이기도 하다. 따라서 염처수행과 위빠사나는 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염처수행은 위빠사나를 계발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서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염처 수행자들이 위빠사나 수행자들이라고 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왜냐하면 이전에 설명했듯이 염처수행의 범위는 이제 수행을 시작한 초행자에서부터 높은 단계에 도달한 수행자까지의 넓은 범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염처수행을 통하여 위빠사나 지혜를 얻어 몸, 느낌, 마음, 법을 통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상좌부 전통에 따라 위빠사나와 사념처 수행을 무조건 동일시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대념처경』의 주석서인『수망가라위라시니(Sumaṅgalavilāsinī)』에서 붓다고사는 도입부에 ‘비구들이여, 이 길은 유일한[최상의 목표로 가는] 길이니’(ekāyano ayaṃ bhikkhave maggo)의 ‘유일한 길’70)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념처 수행은 성인(ariyasāvaka)을 위한 수행방법이 아니라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단계의 방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염처수행이 성인에 이르기 전의 수행자들이 행하는 수행법이라는 얘기이다.71) 이처럼 주석서의 설명에서도 보이듯이 염처수행의 범위는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수행을 시작한 초행자에서부터 높은 단계에 도달한 수행자까지 넓은 범위의 대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처수행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과 같다고 보는 것보다는 계정혜를 갖춘 팔정도의 바른 수행이 위빠사나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72)
70) Jun Young, Jeong. 2002. 198쪽
71) 정준영. 2003. 211쪽
72) L.S. Cousins, 1984, 58쪽

 

4. 마치는 말

 

지금까지 초기경전과 후대문헌을 통하여 나타나는 사마타, 사마디 그리고 선정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마타의 수행방법인 ‘사십업처(kammaṭṭhāna)’와 위빠사나의 수행방법인 ‘염처(satipaṭṭhāna)수행’의 쓰임과 그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들의 쓰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마타는 고요와 평온을 이끄는 수행에서 40가지 주제로 진행되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이해되었고, 사마디는 넓은 의미에서 선정의 성취 유무에 따라 특징을 지니는 좁은 의미로 세분화되어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각각 다른 사마디가 적용되었으며, 선정 역시 시대에 따라 그 선지의 요소들이 다르게 나타났다. 또한 위빠사나 역시 팔정도와 함께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에서 후대문헌으로 들어서며 염처수행의 방법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팔정도의 수행이 사념처수행만으로 치우치는 결과를 낳았다. 초기경전을 통하여 넓은 의미로 쓰이던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논서와 주석서 전통의 후대문헌에서 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불교수행의 핵심인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쓰임이 학자들 간의 이견으로 나타나는 해석상의 문제에 한정된다면 염려할 바가 아니나, 여러 수행자가 실천하고 경험하는 불교수행의 길이기에 좀 더 신중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불교수행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은 주로 남방 상좌부전통에 의해 정립된 방법이다. 남방 상좌부의 수행전통은 초기경전 자체보다 경전의 해석인 논서와 주석서를 그 근간으로 삼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는 남방 상좌부 전통의 경험과 시각에 의해 전승된 불교수행법을 익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과 스승의 가르침은 많은 불자들이 불교수행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 의지하기보다 상좌부전통에 의지한 수행방법이라는 점 역시 간과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논자는 본고를 통하여 논서와 주석서[후대문헌]를 토대로 하는 수행전통을 수용하되, 수용과 더불어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가 병행되어야 할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해의 노력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초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PTS Pāli Texts의 약어는 Critical Pāli Dictionary (CPD) Vol. I의 약어(Abbreviation) 기준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