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궁극목표에 관한 고찰/임승택

실론섬 2016. 7. 7. 15:27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궁극목표에 관한 고찰

(이 논문은 2007년도 경북대학교 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본 연구는 “밝은사람들(소장: 박찬욱)”이 주관한 학술연찬회에서 ‘초기불교의 깨달음과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예비적인 발표의 과정을 거쳤으며 당시 지적되었던 몇 가지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토론을 통해 기존의 글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을 언급해 주신 미산스님(중앙승가대)과 김성철 교수(금강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임승택/경북대학교

 

I. 시작하는 말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초기불교의 수행론에 관련한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1) 그들 대부분은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의 내용을 규명하는 데에 초점을 모았고, 특히 이들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2) 필자 또한 거기에 관여하여, 사마타의 단계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속한 ‘첫 번째 선정(初禪)’과 위빠사나의 친화성에 관한 주장을 펼쳤다. 그러한 입장은 지혜에 의한 통찰을 내용으로 하는 위빠사나의 관점에서 초기경전에 접근해 들어간 귀결이었다.

1) 이와 관련하여 그간 발표된 국내의 성과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준호,「초기불교에 
   있어 지·관의 문제」,『한국선학』제1호 (서울: 한국선학회, 2000); 조준호,「사띠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인도철학』제16집 (서울: 인도철학회, 2004); 김재성,「순관
   (純觀, suddha-vipassana)에 대하여」,『불교학연구』제4호 (서울: 불교학연구회,2002); 
   정준영,「대염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불교학연구』제7호 (서울: 불교
   학연구회, 2003); 임승택,「마음지킴(sati)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보조사상』
   제19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 2003); 임승택,「첫 번째 선정의 의의와 위상에 대한 
   고찰」,『불교학연구』제6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3) 등.
2) 이와 관련하여 조준호는 위빠사나 수행이란 ‘네 번째 선정(四禪)’ 단계를 거친 이후라야 
   비로소 가능하며, 선정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위빠사나 또한 완성된다는 입장을 제시하
   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위빠사나에는 언어적 사유(vitakka)에 의한 분별의 기능이 수반
   되어야 하며,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선정의 상태인 ‘첫 번째 선정’이 위빠사나를 위한 
   최상의 조건이 된다는 반론을 펼쳤다. 한편 김재성은 남방불교의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위빠사나가 예비적인 집중수행이 없이 행해지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사마타를 배제한 상태에서 행하는 위빠사나의 문헌적 근거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준영은 위빠사나의 경전적 근거인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의 
   수념처를 중심으로, 사념처의 실천이 선정의 단계에 따른 깊이와 위계로써 행해지는 
   과정을 조명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논의가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론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아내지 못했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궁극의 경지에 대한 언급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그러한 반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뒤늦게나마 정작 중요한 불교의 궁극 목표를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이것을 통해 기존의 주장들이 과연 어떠한 갈래와 위치에 속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산의 정상에서는 거기에 이르는 여러 등성이와 골짜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듯이, 궁극의 경지에 대한 조명을 통해 수행론에 관한 여러 이견들을 다시금 조망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궁극 목표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깨달음(saṁbodhi) 혹은 열반(nibbāna)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나 열반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중도(majjhima-paṭipadā)를 깨닫는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연기(paṭiccasamuppāda)를 깨닫는다고 할 것인가, 혹은 사성제(cattāri ariyasaccāni)를 깨달아 열반을 성취한다고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중도는 팔정도(aṭṭhaṅgikamagga)를 가리키는데, 이 팔정도는 사성제의 고멸도성제(dukkhanirodhagāminī-paṭipadā-ariyasacca)에 포섭된다.3)

3) SN. V. 420-423쪽 참조.

 

또한 일체의 번뇌가 소멸한 상태인 열반의 경지는 다름 아닌 고멸성제(dukkhanirodha-ariyasacca)와 동의어로 풀이된다.4) 나아가 연기의 교리는 고통스러운 현실의 발생과 소멸 과정을 밝힌 것으로, 고성제(dukkha-ariyasacca)와 고집성제(dukkha-samudaya--ariyasacca) 및 나머지 항목들에 유기적으로 관련지을 수 있다.5) 이러한 방식으로 깨달음이나 열반을 나타내는 용어들은 서로 중첩된다. 따라서 동일한 경지에 대해 각기 다른 명칭이 사용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4) Piyadassi,『붓다의 옛길』, 한경수 옮김 (서울: 시공사, 1996), 77쪽 이하 참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고의 3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5) 연기와 사성제의 상관성에 관한 문제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었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본고를 진행해 나가면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일단 연기
   의 교리가 후대에 이르면서 사성제를 보완하게 되었거나 혹은 심지어 대체하게 되었
   다고 보는 Schmithausen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L. Schmithausen, “On Some Aspects of Descriptions or Theories of ‘Liberating 
   insight’ and ‘Enlightenment’ in Early Buddhism,” Studien zum Jainismus und 
   Buddhismus (Wiesbaden: Steiner-VerlagWiesbaden-Gmbh,1981), 211쪽 참조.

 

그러나 이들 모두가 과연 완전히 동의어인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많다. 명칭이 다른 만큼 강조하는 개별적 측면들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 역시 달라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바른 말(sammāvācā)이라든가 바른 행위(sammākammanta) 등으로 구성된 팔정도는 붓다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제자들의 올바른 실천을 유도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또한 연기의 교리는 깨달음을 얻고 난 연후에 비로소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며,6)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일반 범부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라는 언급들이 도처에 나타난다.7) 나아가 깨달음 자체에 대한 명칭도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 예컨대 상좌부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을 특별히 sammā-sambodhi(正覺)로 부르면서, 제자들의 깨달음인 sāvaka-bodhi(聲聞覺)라든가 홀로 깨달은 이(pacceka-buddha)의 그것인 pacceka-bodhi(獨覺)와 구분한다.8)

6) 붓다의 깨달음이 연기라는 주장의 논거로 활용되곤 하는 Vinaya의 Mahāvagga와 Udāna의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연기에 대한 통찰은 깨달음 자체가 아닌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 행
   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Vin. I. 1쪽; Ud. 1쪽: “그 무렵 세존 붓다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 우루벨라의 나란자 강둑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보리
   수 아래에 7일 동안 결가부좌 자세로 해탈의 즐거움을 음미하면서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
   께서는 초저녁 무렵에 연기를 순서대로 그리고 역으로 마음속에서 비추어 보셨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7) 이와 관련하여 권오민 교수는 연기법을 형용하는 甚深難見이나 甚深難知 따위의 수사에 
   특별히 주목한다. 그가 지목한 초기경전의 사례들에 따르면 연기란 오로지 깨달은 자들
   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일 가능성이 높다「. 4성제와 12연기」,『한국불교학』제47집 (서
   울:한국불교학회, 2007), 34-41쪽 참조.
8) Nyanaponika, ed., Buddhist Dictionary: Manual of Buddhist Terms and Doctrines
   (Singapore: Buddhist Meditation Center, 1946), 34-35쪽 참조.

 

한편 최근의 문헌학적 연구에 따르면,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가르침은 단일한 체계가 아닌 여러 맥락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9) 이것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서 붓다 개인에게 귀속시키기에는 이질적인 내용들이 혼재해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거기에는 연대기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구체화된 새로운 내용들도 포함된다. 즉 원래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후대에 이르러 추가된 것으로 보이는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근의 초기불교 연구 동향은 다원주의적 관점과 방법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방법론에 따르면, 이제까지 단일한 가르침으로 인정되었던 사성제와 그것을 전하는 주요 경전들은 이질적인 기원의 내용들을 합성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10)

9) 최근 서구에서 진행된 초기불교의 수행론에 관한 문헌학적 연구 동향에 관해서는 이영진의
   다음 논문에 잘 소개되어 있다.「초기불교 텍스트에서 나타난 상수멸의 불일치와 모순」,
   『인도철학』제19집 (서울: 인도철학회, 2005), 89-117쪽.
10) L. Schmithausen, 앞의 논문, 202-203쪽, 214-219쪽 참조.

 

이러한 연구 추이는 불교의 최종 목표와 함께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정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예고한다. 여러 관점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맥락의 가르침들이 병존한다는 사실은 구체적인 목적지와 실천 방법을 확정하는 데 있어서 난관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이상과 같이 다양하게 제시되는 초기불교의 궁극 목표에 대한 이제까지의 이해를 종합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의 실현 방법에 관련한 나름의 해결책을 구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는 실천론에 관해 제기되었던 여러 이견들을 통시적으로 조망케 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실천·수행의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분명해 질 때라야 비로소 올바른 실천을 위한 지침들이 그 효용을 발하게 될 것이다.

 

II. 깨달음에 관한 이견들

 

붓다 자신은 과연 어떻게 깨달았으며 그 내용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일본의 宇井伯壽는 15종의 이설이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11) 그의 연구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붓다의 깨달음에 연관된 모든 내용을 망라한 것으로, 이 문제에 관한 후속 연구들에 대해 하나의 기점이 되고 있다. 이후 藤田宏達은 이러한 15종의 이설을 다음의 4가지로 재분류하였다.12) ⑴ 四聖諦·12緣起와 같은 理法의 증득에 의했다는 설, ⑵ 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와 같은 수행도의 완성에 의했다는 설, ⑶ 五蘊·十二處·四界와 같은 제법의 여실한 관찰에 의했다는 설, ⑷ 四禪·三明의 체득에 의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11) 宇井伯壽,「阿含の成立に關する考察」,『印度哲學硏究』第3 (東京: 岩波書店, 1965), 
   394-414쪽.
12) 藤田宏達,『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권오민 옮김 (서울: 민족사, 1989), 41쪽.

 

이러한 재분류는 각각의 내용이 지니는 교리적·실천적 특징을 감안할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개개의 내용들이 특정한 맥락에서 상호 일치하는 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⑴의 내용은 공히 초기불교의 중심 교리에 해당하며, ⑵와 ⑶과 ⑷에 기술되는 실천 사항들을 하위의 개념으로 포섭한다. 한편 ⑵는 보다 구체적인 실천 항목들을 열거해 놓은 것으로 37조도품의 세부 목록을 구성한다. ⑶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서두에서 언급했던 위빠사나(觀)에 상응한다. 마지막의 ⑷는 사선이라는 선정 체험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까닭에 사마타(止)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藤田宏達은 깨달음의 내용이 이러한 방식으로 구분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듣는 자의 됨됨이에 따라 각기 다른 가르침을 펼쳤다는 사실을 지적한다.13)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사성제라든가 사념처는 서로 중첩되는 내용을 지닐 뿐만이 아니라, 공히 팔정도·오온·십이처·사선 등과도 겹친다. 이러한 사실은 藤田宏達의 해명에 대해 그 설득력을 감소시킨다고 할 수 있다. 

13) 藤田宏達, 앞의 책, 41쪽 참조.

 

한편 平川彰은 이들 중에서 사성제와 12연기 그리고 사선·삼명을 깨달았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지적한다.14) 그러나 그는 사성제는 남에 대한 설법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까닭에 붓다 자신의 깨달음으로 보기 곤란하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14) 平川彰,『인도불교의 역사』, 이호근 옮김, 상권 (서울: 민족사, 1991), 45-48쪽 참조.

 

또한 12연기는 연기설의 완성된 형태로서 한층 소박한 연기설이 설해지기 때문에 원래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사선·삼명 또한 사성제와 실제적으로 동일하며 그러한 이유에서 늦은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이라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그는 붓다의 깨달음을 특정 교리와 연관 지워 해명하려 했던 그간의 시도들이 성공적이지 못했고, 초기경전 전체를 통해 붓다의 근본 입장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듯이, 권오민에 의해 최근 발표된 일련의 논문들은 이 문제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유발한다.15) 그는 붓다의 깨달음을 사성제와 연기로 압축하고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경전적 근거들을 세밀하게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제까지 시도되었던 특정 교설에 대한 선·후의 구분들이 문헌고증을 빙자하여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단초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깨달음의 내용을 연기로 보는 일부의 입장이 초기불교 자체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스크린을 거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논의의 결론으로서 “붓다의 깨달음은 광의로 말하자면 사성제이며 협의로 말하자면 번뇌를 소멸한 열반 즉 누진명”이라는 입장을 제시한다.16)

15) 권오민, 앞의 논문, 7-49쪽; 권오민,「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는 경증 검토」,
   『보조사상』제27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 2007), 411-449쪽.
16) 권오민,「4성제와 12연기」,『한국불교학』제47집 (서울: 한국불교학회, 2007), 10쪽.

 

이러한 권오민의 지적은 엄밀한 학문적 검토 없이 붓다의 깨달음을 연기로 파악하는 국내 학계의 안이한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17) 특히 그의 주장은 대승불교의 연기설과 초기불교의 그것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대승불교에서 시도된 연기 해설을 붓다의 깨달음에 소급하여 적용할 수 없다고 한 점에서 적극 공감할 만하다.  
17) 한편 해외 불교학계의 연구 동향은 이러한 국내의 분위기와 대조적이다. 예컨대 일본의 
    松原秀道라든가 佐藤密雄 등은 아함에서 보이는 사선·삼명이 시대를 내려 갈수록 서서히 
    약해지고, 특히 삼명 중에서 누진명이 연기로 치환되는 문헌사적 과정을 밝힌 사례가 
    있다. 이점은 본고의 각주 5)에서 언급했듯이, 연기의 교리가 후대에 이르면서 사성제를 
    보완하게 되었거나 혹은 심지어 대체하게 되었다고 보는 Schmithausen의 주장과 일치
    한다. 김준호,「초기불교 선정설의 체계에 관한 연구」(부산대학교철학과박사학위논문, 
    2008), 71쪽 참조; L. Schmithausen, 앞의 논문, 211쪽 참조.

 

그러나 필자는 그의 주장에도 간과할 수 없는 취약점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실제 내용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성제를 단일한 가르침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 소절에서 언급했듯이, Schmithausen은 사성제를 전하는 경전들에 이질적인 기원의 내용들이 반영되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한 주장대로라면 문헌상에 나타나는 사성제는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내용이 될 수 없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Dhammacakkappavattanasutta(轉法輪經)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사성제에 관한 지혜와 견해(ñāṇadassana)가 청정해진 연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sammāsambodhi)을 선언했다(paccaññāsiṃ)”는 언급이 나타난다.18) 이 구절은 깨달음의 내용이 사성제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될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깨달음 자체보다는 깨달음의 선언에 초점을 모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연후에, 그러한 체험을 온전한 형태의 사성제 체계(三轉十二行相)로 확립하고 나서, 완전히 깨달았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 이점은 Sacca-Saṁyutta(SN. V. 414쪽 이하) 전체에 걸쳐 완성도를 달리하는 여러 유형의 사성제가 병존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설득력을 더한다. 이러한 분석이 타당하다면 붓다의 깨달음에서 ‘광의의 사성제’와 ‘협의의 누진명’은 엄격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18) SN. V. 422-423쪽: “비구들이여, 나는 이러한 사성제에 관련하여 3회에 걸친 12가지 
    양상으로 있는 그대에 대한 지혜와 견해가 청정하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연후
    에 비로소 나는 신들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브라흐마가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 세계,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선언하였다.”

 

이쯤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약간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Schmithausen과 Vetter의 견해로 옮겨가고자 한다.19) 그들은 초기불교의 기본 성격을 재생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구체적인 실천 양상을 다음의 3가지 유형으로 정리한다.

19) Tilmann Vetter, 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sm (Leiden: E. 
    J.Brill, 1988).

 

① 사선을 성취하여 삼명을 깨닫거나 혹은 최소한 그 중의 하나인 ‘사성제에 대한 앎(=누진명)’을 얻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유형, ② 물질영역의 사선(色界四禪)과 비물질영역의 사선(四無色定)을 걸쳐 멸진정을 성취함으로써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유형, ③ 선정을 배제한 지혜(paññā)의 성취에 의해 무상함과 고통을 직시하고 나아가 모든 갈망으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유형이 그것이다.

 

이러한 3가지 유형은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이질적인 실천 방법을 정리해 놓은 것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20) 즉 듣는 이의 됨됨이에 따라 동일한 내용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기원과 배경을 달리하는 이질적인 가르침들이 텍스트 편집 과정에서 한데 모아진 결과라는 것이다. 특히 Vetter에 따르면, 이상의 3가지 중에서 ②의 유형은 ①과 ③에 비해 후대의 어느 시기에 편입된 것이라고 한다.21) 즉 멸진정에 의한 해탈의 성취는 자이나교를 비롯한 외도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상당히 늦은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면, 초기불교 고유의 것은 ①과 ③에 국한된다고 할 수 있다. 

20) Tilmann Vetter, 앞의 논문, xxi 참조.
21) Tilmann Vetter, 앞의 논문, xxii 참조.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개개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사례에 따라 달리 취급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예컨대 이러한 3가지 유형을 구체적인 수행 사례에 적용할 경우, ①은 붓다 자신의 깨달음에, ②는 멸진정을 최상의 목적으로 삼았던 선정수행자(jhāyin)에게, ③은 무상·고·무아에 대한 통찰을 주된 방법으로 하는 일반 제자들(sāvakā)의 경우에 배대할 수 있을 것이다.22) 한편 이와 관련하여 La Vallée Poussin은 Dammika-Vagga(AN. III. 355쪽 이하)에 나타나는 ‘교법에 전념하는 사람(dhammayogin)’과 ‘선정을 닦는 사람(jhāyin)’ 사이의 긴장 관계에 주목한 적이 있고, Griffiths 또한 ‘삼매에 의한 수행(samādhi-bhāvanā)’과 ‘지혜에 의한 수행(paññā-bhāvanā)’ 사이의 긴장과 조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23) 이러한 선행 연구는 개개의 가르침이 구체적인 사례에 따라 달리 적용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22) 이와 관련하여 Vetter는 붓다의 깨달음을 모든 대상에 대한 평정심(upekkhā)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선에서 발생한 번뇌의 소멸(āsavakkhaya, 漏盡明) 자체로 본다. 또한 ③의 유형
    과 같은 통찰의 방법은 붓다 스스로 해탈을 체험한 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과정에서 구
    체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영진,「초기불교 텍스트에서 나타난 상수멸의 불일치와 
    모순」(2005), 96쪽 재인용; Tilmann Vetter, 앞의 논문, xxxiv-xxxvii, 14-29쪽; L. 
    Schmithausen, 앞의 논문, 203-207쪽, 299-214쪽 등 참조.
23) 이영진,「초기불교 텍스트에서 나타난 상수멸의 불일치와 모순」,『인도철학』제19집
    (서울: 인도철학회, 2005), 94-96쪽에서 재인용.

 

필자는 이상의 논의를 근거로 깨달음에 관한 획일적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Paṭpadāvagga에 나타나는 아난다(Ānanda) 존자의 언급에서도 확인되듯이, 아라한의 경지(arahatta)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24) 즉 선정 수행위주의 사마타를 먼저 행할 수도 있고, 무상·고·무아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를 먼저 행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이들 양자를 한꺼번에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각은 똑같이 아라한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동등한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불교 당시부터 여러 이질적인 방법들이 행해지고 있었고, 또한 그들 모두를 하나로 융섭해 내고자 하는 시도들도 이미 행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III. 깨달음과 열반

 

여기에서는 깨달음과 열반의 성격 및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집중하고자 한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역사적인 붓다의 깨달음에 관해서는 여러 입장이 존재하며 아직 논의의 와중에 있다. 그러나 어떠한 주장을 수용하든 그것이 사성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최소한 사성제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Dhammacakkappavattanasutta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관한 여러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단 주요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⑴ 고성제이다. 즉 태어남도 고통이요, 늙음도 고통이요, 병듦도 고통이요, 죽음도 고통이요, 슬픔·비탄·괴로움·불쾌함·번민도 고통이다. 또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고통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며,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 요컨대 5가지 집착된 온(五取蘊)이 고통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⑵ 고집성제이다. 즉 그것은 갈망으로서, 또 다른 태어남으로 통하는 것이고, 즐기고 탐내는 것이며, 여기저기에서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있음에 대한 갈망·있지 않음에 대한 갈망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⑶ 고멸성제이다. 즉 그러한 갈망에 대한 남김 없는 욕망의 소멸·포기·버림·해탈·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⑷ 고멸도성제이다. 즉 거룩한 8가지 길이다. 예컨대 바른 견해·바른 의도·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이다.25)

25) SN. V. 421-422쪽.

 

인용문은 사성제에 관한 전형적인 서술로서 ⑴은 고통에 속박된 현실 세계를 ⑵는 그것의 원인을 ⑶은 그것이 극복된 경지를 ⑷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일부 언급했듯이 붓다는 바로 이것에 관한 지혜와 견해가 청정해진 연후에 완전한 깨달음(sammāsambodhi)을 얻었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 선언은 깨달음의 문제에 관해 여러 방식의 이해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들 모두가 사성제로 통한다는 신념의 근거가 된다.

 

필자는 위의 문구에서 깨달음이 지니는 일단의 성격에 주목한다. 그것은 고통의 발생 원인이 갈망(taṇhā)이라는 정서적(emotional)요인이라는 점이며, 그것이 소멸된 경지인 고멸성제 또한 욕망의 소멸(asesavirāganirodha)이라든가 포기(cāga) 등과 같이 정서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은 초기불교의 깨달음이 이지적인 능력(intellectual capacity) 보다는 심리적 안정(mental stability)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Brahmasaṃyutta에 나타나는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가르침을 깨닫기 어렵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이것을 보기 어렵다. 어둠에 싸여 욕망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한다.”26)라는 유명한 경구 또한 심리적인 문제가 깨달음에 우선하는 차원의 것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내용은 심리적 안정에 비중을 두는 사마타(止) 위주의 수행에 대해 그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6) SN. I. 136쪽.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내용이 열반(nibbāna)에 관한 설명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예컨대 “라다여, 갈망의 소멸이 열반이다.”27)는 언급을 비롯하여, “갈망을 버리는 것이 열반이다.”28)는 표현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열반이라는 것이 앞에서 인용한 ⑶의 고멸성제와 동일한 맥락이며 또한 동의어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들 문구대로라면 깨달음의 내용으로 지목되는 사성제와 그것의 귀결에 해당하는 고멸성제로서의 열반은 공히 정서적·심리적 차원으로 귀속됨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Nidāna-saṁyutta의 다음 구절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존자여,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임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았지만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은 아니다.”29)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언급은 열반을 실현한 아라한의 경지가 바른 지혜(sammapaññā) 즉 이지적인 능력과 전혀 별개일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까닭에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제공한다.

27) SN. III. 190쪽. 
28) SN. I. 39쪽. 
29) SN. II. 118쪽.

 

그러나 깨달음 혹은 열반의 실현 과정에서 지혜(paññā)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Johansson은 지혜가 지닌 정화의 능력에 주목한다.30) 즉 “지혜로써 정화된다”31)는 언급이라든가, “비구들이여, 욕심 따위는 몸이나 말로써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지혜로써 관찰하고 관찰하여 버려야만 한다.”32)는 구절이 그것이다. Johansson은 이것을 통해 이지적 능력이 정서적인 안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지혜로써 보고 나면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다.”33)는 어구를 비롯하여, “지혜로써 바르게 닦인 마음은 모든 번뇌로부터 바르게 해탈한다.”34)는 언급이라든가, “번뇌의 소멸은 지혜로써 체득되어야 한다.”35)는 경구들도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한다. 이들 경구는 지혜에 의한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觀)의 실천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0) Rune E. A. Johansson,『불교심리학』, 박태섭 옮김 (서울: 시공사, 1996), 229쪽 이하. 
31) SN. I. 214쪽. 
32) AN. V. 39쪽 이하.
33) MN. I. 160쪽, 175쪽, 204쪽, 477쪽 등. 
34) MN. II. 81쪽, 84쪽, 91쪽, 98쪽 등.
35) DN. III. 230쪽.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Johansson은 궁극의 지향점인 해탈(vimutti)이 마음의 해탈(cetovimutti)과 지혜의 해탈(paññāvimutti)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도 한다.36) 그에 따르면 전자는 심리적 안정을 통해 얻어지는 경지이며 후자는 이지적인 능력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듯하다. 이러한 2가지 해탈 개념은 이상에서 언급한 특정 측면들의 독자적 개발을 통해 얻어지는 궁극의 경지로 묘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대조적인 특성을 지니지만, 양자 모두는 분명한 실천적 지향점으로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양자는 스스로에게 친화적인 각각의 실천적 과정에 대해 고유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36) Rune E. A. Johansson, 앞의 책, 239쪽. 한편 정준영은 초기불교의 해탈이 마음의 
    해탈(cetovimutti)과 지혜의 해탈(paññāvimuttim) 그리고 양자를 구비한 해탈 
    (ubhatobhāgavimutta)이라는 3가지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 3 가지 중에서 지혜의 해탈과 양자를 구비한 해탈은 최종 목표인 열반을 의미
    하지만, 대부분 의 마음의 해탈은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기불교의 해탈에 
    관한 연구」,『2006년한국불 교학결집대회논집』제3권 1호, 한국불교학결집대회
    조직위원회, 2006, 145쪽 이하).

 

그런데 초기경전에는 그러한 해탈 개념들뿐만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종합하는 경지 또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Khanda-Saṁyutta에 나타나는 다음의 반복구에 주목한다. 즉 “이와 같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하나니,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듣는 거룩한 제자는 물질현상(色)에 대해 싫증을 낸다. 느낌(受)에 대해… 의식(識)에 대해 싫증을 낸다. 싫증을 내면서 욕심으로부터 떠난다. 욕심으로부터 떠나면서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게 된다…. ”37)는 언급이 그것이다. 이 문구는 있는 그대로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37) SN. III. 68쪽, 71쪽, 83쪽, 84쪽, 90쪽 등.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에서 Sampasādaṇīya-suttanta 등에는 ‘양자를 구비한 해탈(俱分解脫, ubhatobhāgavimutta)’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38) 이것은 선정과 지혜를 아우르는 통합적 해탈 개념으로서, 앞에서 인용한 Khanda-Saṁyutta의 2가지를 종합한 이상적 경지라 할 수 있다. 한편 이것은 앞 소절의 Paṭpadāvagga에 묘사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eti)” 방법과도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통해, 깨달음에 관한 묘사에는 ‘이지적인 능력’과 ‘심리적 안정’ 중에서 어느 한 쪽을 특별히 강조하는 양상과 함께, 다시 양자 모두를 통합적으로 수용하는 경향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8) DN. III. 10쪽.

 

한편 Schmithausen은 Dhammacakkappavattanasutta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분위기가 사성제 자체에도 반영된다는 사실을 조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성제 관련 언급들 사이에는 상당한 연대기적 간극이 존재하며, 또한 이질적인 기원의 내용을 종합·반영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39) 즉 고성제와 고집성제는 무상·고·무아에 대한 통찰 수행을 위주로 하는 일반 제자들의 실천과 친화적이며, 고멸성제와 고멸도성제는 열반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내용으로 하는 선정 위주의 신비주의적 흐름에 부합한다는 분석이 그것이다.40) 이것은 사성제의 구조적 측면에 이질적인 내용이 중첩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39) L. Schmithausen, 앞의 논문, 203쪽, 208쪽, 209쪽 참조; 특히 203쪽 중반부와 
    209쪽의 각주 35)에 드러나듯이, 사성제를 기술하는 Dhammacakkappavattanasutta의 
    각 부분에 이질적인 기원의 내용들이 중첩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Schmithausen의 분석이 사성제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독립적 체계들’을 용인하는 
    수준으로까지 나갔다고 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사성제 안에 
    2가지 독립된 체계가 중첩되어 있다.”는 확정적인 방식으로 요약·기술하였던 필자의 
    기존 발표는 재고가 필요하다「( 초기불교의 깨달음과 실천」2007, 25-26쪽 참조). 
    이점 과 관련하여 “밝은 사람들”이 주관한 학술연찬회에서 김성철 교수가 제기했던 
    반론은 온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후술하는 각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Schmithausen의 분석에는 사성제 안에 반영된 2가지 대조적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40) L. Schmithausen, 앞의 논문, 212-222쪽 참조; 특히 214쪽 중반의 “…the cessation 
    of Craving could be achieved either by realizing the negative, disgusting character 
    of mundane existence (i.e. by realizing duḥkhasatya) or by realizing the positive, 
    peacaful or blissful character of the cessation of mundane existence (i.e. Nirvāṇa, 
    which could easily, and in fact has, become the meaning of nirodhasatya)”라는 
    기술과, 212쪽 각주 45)의 “But such a negative contemplation is not easily seen to 
    be appropriate or spiritually purposeful in the case of mārgasatya, still less so in 
    the case of nirodhasatya”라는 언급, 그리고 222쪽의 “But in the case of Liberating 
    Insight of Disciples, especially if its content was narrowed down to the 
    psychologically most relevant aspect of the negative nature of mundane existence
    . . . , such supernormal mental faculties, [viz. the remembrance of one’s own former 
    lives, pubbbenivāsānussatiññāṇa etc.] as well as the extraordinary level of meditative 
    absorption presupposed for their attainment, could easily come to be regarded as 
    unnecessary”라는 표현은 Schmithausen의 입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세간적 존재의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특성에 대한 자각(realizing the negative, 
    disgusting character of mundane existence)’이란 세간적 존재에 대해 무상·고·무아로 
    파악하는 이지적 통찰로서 위빠사나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세간적 존재의 
    소멸에 의한 긍정적이고 평화롭고 축복스러운 특성에 대한 자각(realizing the positive, 
    peacaful or blissful character of the cessation of mundane existence)’은 선정 위주의 
    신비주의적 수행으로서 사마타의 영역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인용한 구절
    들은 용이한 이해를 위해 다음의 셋으로 재정리할 수 있다. ① 갈망의 소멸은 부정적 특
    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거나 혹은 평화롭고 행복한 열반 상태의 실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 ② 부정적 통찰 방식은 고멸성제(nirodhasatya) 및 고멸도성제(mārgasatya)에 
    대해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즉 그러한 수행은 고성제와 고집성제에만 적절해 보인다.) 
    ③ 제자들의 해탈적 통찰이 세간적 존재의 부정적 특징이라는 측면에 한정된다면 숙명
    통과 같은 초월적 능력이라든가 사선(四禪)과 같은 고도의 집중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이 분석이 앞에서 언급했던 깨달음의 과정에 관련한 2가지 측면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음을 주목한다. 즉 이지적인 능력을 우선시하는 경향은 지혜에 의한 통찰로서 위빠사나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고성제와 고집성제 및 그것에 입각한 수행에 연결시킬 수 있다. 한편 심리적인 안정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경향은 선정 위주의 사마타 수행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또한 그것은 고멸성제와 고멸도성제에 배대할 수 있다. 이러한 Schmithausen의 분석은 사성제라는 단일한 가르침 안에 서로 다른 맥락의 실천법이 통합적으로 사유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깨달음과 열반의 과정에 있어서도 한 가지 답안만이 존재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IV. 열반의 2가지 측면

 

사성제의 귀결이라 할 수 있는 고멸성제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그런데 이미 확인했듯이, 그것에 대한 체험의 당사자들은 다른 부류로 갈라질 수 있다. 즉 초기경전에서는 궁극에 이르는 길에 관해 여러 가능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한 이들에 대해서는 동일한 인격성을 부여하였던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Vaṅgīsatherasaṁyutta의 다음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사리뿟따여, 나는 이들 500명의 비구가 몸이나 말로써 행한 것에 대해 어떠한 것도 비난할 수 없다. 사리뿟따여, 이들 500명의 비구 중에서 60명의 비구는 삼명(tevijjā)을 지녔고, 60명의 비구는 육신통(chaḷabhiññā)을 얻었으며, 60명의 비구는 양자를 구비한 해탈(ubhatobhāgavimutta)을 지녔고, 나머지는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ā)에 도달한 자들이다.41)

41) SN. I. 191쪽.

 

여기에서 지혜에 의해 해탈한 아라한은 320명이라는 절대 다수를 이룬다. 그들은 비록 삼명이나 육신통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다른 아라한들과 동일한 인격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했던 이질적인 방법들 모두에 대해 경전적 권위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궁극적 존재인 아라한은 수행의 방법이라든가 신통력의 소유 여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초기경전 내에서는 아직 궁극의 존재에 대한 이견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열반 자체에 대한 획일적 이해를 요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궁극의 경지인 열반에 대해서도 다원주의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다. 실제로 초기경전 내에는 그것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의 내용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라한의 위상에 관한 문제를 놓고서 부파간에 치열한 쟁론이 발생했다는 역사적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Johansson이 지적하듯이, 열반에 관한 견해의 일치는 그것이 불교의 궁극 목표라는 점과 그것을 성취한 사람을 아라한으로 부른다는 2가지에 국한될 뿐이다.42) 즉 고래로부터 이 개념에 관해서는 여러 상반된 입장이 출현하였고,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서로 다른층의 문헌들에 근거한 상충된 견해들이 잡다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열반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확정적인 답안은 제시되지 않았으며, 개념적 분석의 차원을 떠난 것이라는 따위의 애매한 주장들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으로는 학문적 호기심에 대한 충족은 고사하고, 올바른 실천을 위한 의지마저도 희석되어 버리는 결과가 야기될 것이다.

42) Rune E. A. Johansson, The Psychology of Nirvana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1969), 9쪽.

 

필자는 궁극 목표로서의 열반이란 반드시 실천 가능한 그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부터는 경전상에 나타나는 열반 묘사의 유형들에 대한 분류·고찰과 함께,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이상적인 열반의 모델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 필자는 우선 La Vallée Poussin이 언급했던 ‘행복한 상태로서의 열반(Nirvāṇa as a happy state)’과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열반(Nirvāṇa as a negative conception)’을 차용하고자 한다.43) 이들 2가지는 열반에 관한 상이한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판단된다.

43) L. de La Vallée Poussin, “Nivāṇa,” Encyclopæ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 9 
    (New York: T. & T. Clark, 1981), 376-379쪽.

 

초기경전 내에서 전자에 해당하는 열반의 묘사는 ‘불멸의 상태(amata-pada)’라든가 태어남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경지(nissaraṇa)’ 따위의 수식어를 부가하여 열반 자체를 이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후자 경우는 열반에 대해 욕망(rāga)이라든가 분노(dosa) 따위의 번뇌가 소멸된 경지로만 언급하고 더 이상의 설명을 자제한다. 필자는 이러한 구분에 대해 일단 동의하며, 이것을 2장에서 언급했던 ‘3가지 유형의 해탈’ 및 3장에서 살펴보았던 ‘사성제의 분석’과 연계시켜 생각해 보고자한다.

 

우선 ‘행복한 상태로서의 열반’을 규명하는 데에 주력한 대표적인 선행 연구로서 Johansson의 The Psychology of Nirvana를 꼽을 수 있다.44) 이 저작은 열반을 심리적 관점에서 접근해 들어가 신비적이고 초경험적인 미분화된 의식 상태(nondifferentiated state of consciousness)로 규정한다. 실제로 Nikāya에는 이러한 이해에 부합하는 사례들이 많은데, 예컨대 Nibbānasukhasutta의 “존자여, 열반이란 행복이나니, …존자여, 이러한 방식으로 열반이란 곧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는 문구가 대표적이다.45) 이러한 서술은 궁극의 경지에 대한 적극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하고, 분명한 수행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궁극의 경지를 특정한 수행 체험에 결부시키는 경향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44) Rune E. A. Johansson, The Psychology of Nirvana.
45) AN. IV. 414-415쪽.

 

예컨대 9단계에 걸친 선정(jhāna)이라든가, 의식의 멈춤(Viññāṇa-nirodha)과 같은 체험을 열반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그러하다.46) 최근 발표된 정준영의「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도 이러한 열반 해석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47) 거기에 따르면 상수멸정 혹은 멈춤의 상태는 무여열반(anupādisesā-nibbāna)과 매우유사하다.48) 그러나 정준영 스스로 지적하듯이, 특정한 경험을 궁극의 이상으로 삼게 되면 그것을 쫓아 새로운 집착이 발생하게 될 우려가 있다. 나아가 열반의 경지를 일시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영역에 한정하는 과오를 초래한다.

46) 열반의 상태를 선정(jhāna) 체험과 결부시켜 언급하는 사례로는 AN. IV. 414쪽 
    이하 참조; 한편 Samaṇavagga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의식의 멈춤에 비유
    하기도 한다. AN. I. 236쪽: 의식의 멈춤에 의해 갈망을 소멸한 해탈을 지닌다. 
    [그것은] 열반으로서 등불[의 소멸에 비유할 수 있는] 마음의 해탈이다(Viññāṇassa 
    nirodhena taṇhākkhayavimuttino, Pajjotasseva nibbāṇaṃ vimokkho hoti cetasoti.) 
47) 정준영,「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불교학연구』제9호 (서울: 불교학연구
    회, 2004), 239-260쪽. 
48) 정준영, 앞의 논문 (2004), 253쪽 참조; 황순일,「무기설을 통해 본 무여열반의 의미」, 
   『불교연구』20집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2004), 234-251쪽 참조;「멸진정과 두 가지 
    열반이론」,『불교학연구』제11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5), 345-361쪽 참조. 초
    기 불교에서 언급되는 열반은 일반적으로 유여열반(saupādisesā-nibbāna)과 무여열
    반 (anupādisesā-nibbāna)이라는 2가지로 구분된다. 전자는 생명기능 혹은 감각기능
    이 원활하게 작용되는 상태에서 아라한에 도달한 이들이 체험하는 열반이고, 후자는 
    생명기능 혹은 감각기능이 중지된 상태의 그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지
    극히 일반적인 정의에 불과하며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듯하다.

 

Kalupahana는 바로 이점에 주목하여 ‘행복한 상태로서의 열반’ 해석에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49) 즉 초기불교의 두드러진 면모는 경험주의에서 찾아야 하며 또한 열반의 성취는 어떠한 초경험적 인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열반에 대한 묘사 역시 욕망이라든가 분노 따위의 소멸과 같은 부정적인 방식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또한 멸진정과 같은 수행 체험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갈망의 완전한 소멸과 연관되는 한에서라고 본다. 갈망이나 집착을 제거한 사람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머물수 있다. 그러나 이 견고함은 ‘분화되지 않은 의식(undifferentiated conscious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부세계와 접촉할때 감정적인 동요 없이 머물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하다.50)

49) David J.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 (Honolulu: The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76), 69-89쪽.
50) 이상과 같은 Johansson과 Kalupahana의 대조적 입장은 Kasulis의 다음 글에 잘 정리
    되어 있다. Thomas P. Kasulis, “Nirvāṇa,”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ol.10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93), 448-456쪽.

 

그렇다면 이러한 상반된 이해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발표된 황순일의「멸진정과 두 가지 열반 이론」을 참조할 만하다.51) 그는 일부 상좌부 문헌에 나타나는 멸진정이 무여열반의 경지와 유사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수긍한다. 그러나 Bronkhorst의 선행 연구를 근거로, 이 선정이 자이나교의 수행 전통에 기원을 둔 것일 가능성을 지적한다. 즉 멸진정 따위의 체험은 선정을 중요시하는 일부 수행자들에 의해 외부에서 도입되었고, 후대에 이르러 불교적 방법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51) 황순일,「멸진정과 두 가지 열반이론」,『불교학연구』제11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5), 345-361쪽.

 

따라서 열반의 경지를 멸진정과 같은 특정한 체험에 결부시키는 경향은 초기불교 본래의 해탈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경향은 선정 수행을 위주로 하는 전문 수행자 집단의 발흥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이점을 고려할 때 열반에 관한 초기불교 고유의 입장은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열반’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리는 듯하다.

 

이상과 같은 상반된 2가지 입장과 관련하여 Johansson과 Kalupahana 등이 취했던 연구 방식은 다원주의적인 그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다시 말해서 양자는 나름의 관점에서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열반에 대해 일관된 해석을 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어느 한쪽의 진실은 자동적으로 다른 한쪽의 거짓을 의미하게 되는데, 실제로 필자 자신의 소견 또한 Kalupahana의 입장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양자 모두가 경증에 입각한 논리 전개의 결과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 모두를 함께 수용할 수 있는 다원주의적 접근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이상의 내용을 2장에서 언급했던 ‘3가지 유형의 해탈’ 및 3장에서 고찰했던 ‘사성제의 분석’과 결부시켜 보고자 한다.

 

먼저 ‘행복한 상태로서의 열반’은 붓다 자신의 깨달음 사례와 더불어 고원한 선정 체험을 중요시했던 신비적 경향의 수행자들에게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삼명을 내용으로 하는 전자의 사례는 붓다 자신의 체험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본래의 불교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붓다 자신을 비롯한 소수자의 체험에 한정되는 까닭에 초기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방법으로 규정하기 곤란하다.

 

한편 멸진정을 정점으로 하는 후자의 사례는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이질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파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교리사의 발달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 방법은 붓다 자신의 수행 과정이 외도의 그것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도 부합하는 측면을 지닌다.

 

한편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열반’은 어떠한 초경험적 인식 혹은 신통력도 갖추지 못했지만, 무상·고·무아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일체의 번뇌로부터 벗어난 일반 제자들(sāvakā)에게 부합하는 열반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Susīmasutta에는 5가지 신통(abhiññā)이라든가 무색계의 해탈을 체험하지 않은 아라한들이 나타난다.52) 특히 이들은 오온의 무상함과 무아에 대한 통찰 등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로서, 2장에서 언급했던 ‘선정을 배제한 지혜의 성취’ 유형 및 3장에서 다루었던 ‘고성제와 고집성제에 입각한 통찰 수행’에 부합한다. 그리고 앞서의 Vaṅgīsathera-saṁyutta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방법에 의해 아라한에 도달한 이들은 절대 다수를 이룬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열반 및 해탈의 방식은 붓다에 의해 고안된 독자적인 것임과 동시에, 초기불교의 수행을 대변할 만한 영향력을 실제로 발휘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52) SN. II. 121쪽 이하.

 

Kalupahana의 지적에서와 같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열반 해석은 초기불교의 경험주의적 측면과도 상통한다. 즉 열반이라는 이상을 고립무원의 초월적 공간이 아닌 일상적인 삶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게끔 한다. 필자는 이러한 열반관이야말로 점진적인 수행과 점진적인 깨달음을 표방하는 초기불교 수행론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소멸로 얻어지는 열반의 경지는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지난한 삶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노력과 반성의 귀결이어야 할 것이다.

 

Kīṭāgirisutta의 다음 구절은 이와 같이 경험적이고 점진적인 초기불교 수행론의 전형적인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ññā)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53)

53) MN. I. 479-480쪽.

 

V. 마치는 말

 

본고를 통해 필자는 불교의 궁극 목표인 깨달음과 열반의 내용이 과연 어떠한지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불교적 가르침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상이한 의견들이 난무할 뿐 아니라, 뚜렷한 결론조차 내려지지 않은듯 하다. 따라서 필자는 일차적으로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깨달음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제시하였고, 거기에서 부각되는 이질적인 측면들에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깨달음과 열반에 관한 여러 이설들 중에서 가장 불교적인 가르침이 과연 무엇인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필자는 궁극의 목적지와 거기에 이르는 실천 방법을 통시적으로 조망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2장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에 관련한 여러 견해들을 소개하였다. 여기에는 宇井伯壽의 15종의 이설과 그것에 대한 藤田宏達의 4가지 재분류 포함하여, 최근 발표된 권오민의 사성제 혹은 누진명에 의한 성도설, 나아가 Schmithausen과 Vetter에 의한 3가지 유형의 실천 양상 등이 포함된다. 이들 선행 연구를 통해 필자는 깨달음의 과정에 관한 획일적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Paṭpadāvagga에 나타나듯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로는 여러 방법이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불교 당시부터 여러 이질적인 방법들이 행해졌으며, 또한 그들 모두를 하나로 융섭해 내고자 하는 시도들도 이미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3장에서는 깨달음의 성격에 일단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심리적 안정(mental stability)을 우선시하는 경향과 이지적인 능력(intellectual capacity)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Schmithausen의 사성제 분석에 그대로 부합하는데, 그 중에서 고성제와 고집성제는 이지적인 능력의 개발을 중요시하는 일반 제자의 실천 과정에 친화적이고, 고멸성제와 고멸도성제는 열반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의도하는 선정을 위주로 하는 수행자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필자는 깨달음의 성격과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4장에서는 깨달음의 실제 내용이 되는 열반 자체에 치중하였다. 초기경전 내에서 열반에 관한 서술은 대체로 ‘행복한 상태로서의 열반’과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열반’이라는 2가지로 대별된다. 전자는 그러한 경지를 초경험적인 상태로 이상화하는 경향과 연계되는 반면에, 후자는 욕망이라든가 분노 따위의 번뇌가 소멸된 경지로만 보려는 태도에 연결된다. 이러한 상반된 관점들 속에서 필자는 열반의 성취에는 아무런 초경험적 인식도 필요하지 않다는 Kalupahana의 주장을 적극 수용하였다. 또한 그러한 입장이 대다수 아라한 제자들에게 부합하는 열반의 모델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논의가 2장 및 3장에서 논의했던 내용들과도 긴밀한 연관관계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행복한 상태로서의 열반’은 고원한 선정 체험을 중요시했던 신비적 경향의 수행자들에게 친화적이다. 또한 그것은 삼명을 내용으로 하는 붓다 자신의 체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을 통해 아라한에 도달한 이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며, 그 방법 자체가 외도 수행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궁극의 경지를 욕망이라든가 분노 따위의 번뇌가 소멸된 상태로 한정하는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열반’에 적극 공감한다. 나아가 이러한 유형의 열반 및 해탈 방식이야말로 제자들을 위해 붓다가 독자적으로 고안해 낸 가장 불교적인 것임과 동시에, 초기불교 전체의 이상과 실천을 대변할 만한 것으로 결론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