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불교에서 오정심관(五停心觀)의 위치/김재성

실론섬 2017. 1. 27. 16:04

《불교학연구》제14호(2006.8)

초기불교에서 오정심관(五停心觀)의 위치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Ⅰ. 머리말

 

인도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선정 수행의

기초적인 방법으로 제시된 오정심관이라는 수행법이 인도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본 논고의 목적이

다.

 

오정심관이라는 용어의 어원적인 의미와 각 항목의 개념에 대한 이

해, 그리고 인도초기불전의 용례를 검토하면서 인도불교에서의 오정

심관의 위치에 대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살펴본다. 이러한 고찰을 통

해서 오정심관이라는 수행법이 부파불교나 대승불교에서 그리고 중

국불교 전통에서 기초적인 단계의 수행법으로 정립되기 이전에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수행법의 측면이 있다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오정심관에 대한 연구로는 사쿠타베 하지메의 연구,1) 釋惠敏의 연

구,2) 大谷信千代의 연구3) 등이 있다. 이러한 논문들이 오정심관의 인

도대승불교와 중국불교를 중심으로 한 연구 성과라면, 본고는 초기불
교의 오정심관에 초점을 맞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1) Sakurabe Hajime, “On the Wu-T'ing-Hsin-Kuan,” Etienne Lamotte, Indianisme 
   et Bouddhisme, Mélanges offerts à Mgr Étienne Lamotte (Louvain: Universite 
   catholique de Louvain, Institut orientaliste, 1980). 
2) 釋惠敏, 聲聞地 における所緣の硏究 (東京: 山喜房,1994),191-247쪽. 
3) 大谷信千代, 法と行の思想としての仏教 (京都: 文営堂, 2000).

 

Ⅱ. 어원적 근거

오정심관(五停心觀)이란 다섯 가지 번뇌의 장애를 가라앉히는 수행
법을 말한다. 오정심관은 오종관법(五種觀法)4), [五種] 법문(法門)5), 
오문선(五門禪)6), [五種] 정행소연(淨行所緣, carita-viśodhana-ālambana),7)
[五種] 소취입문(所趣入門, avatāramukhāni)8), [五種]도문(度門)9), 오종치
행경계(五種治行境界)10)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11) 하지만, ‘오정심관’
이라는 용어 자체는 인도불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12) 정영사(淨影
寺) 혜원(慧遠, 523-592)의 大乘義章 을 위시로 하여, 천태 지의(智顗,
538-597)의「마하지관」등의 저술, 화엄종 지엄(智儼, 602-668)의「화엄
경공목장」등의 중국 문헌에서 사용되고 있다.
4) 四教義 ( 대정장 46, 733b19-20), “五種觀法者, 一數息觀. 二不淨觀. 三慈心 觀. 四因緣觀. 
   五界方便觀.” 5) 坐禪三昧經 ( 대정장 15, 614, 271c2-5), “若多婬欲人不淨法門治, 
   若多瞋恚人 慈心法門治, 若多愚癡人思惟觀因緣法門治, 若多思覺人念息法門治。若多等分 
   人念佛法門治, 諸如是等種種病, 種種法門治”; 修行道地經 ( 대정장 15, 191c17), 
   “假使行者情欲熾盛, 為說人身不淨之法”; (191c20), “假使瞋怒而熾多者 為說慈心”; 
   (192a19-20), “修行道者設多愚癡, 當觀十二因緣分別了之”; (192a26), “修行道者設多想念, 
   則為解說出入數息”; (192b1-6), “修行道者設多憍慢為說此 義, 人有三慢.一曰言我不如某, 
   二曰某與我等, 三曰我勝於某, 有念是者為懷自 大, 當作此計城外塚間, 棄捐骨鎖頭身異處, 
   無有血脈皮肉消爛, 當往觀此貧富 貴賤.” 
6) 五門禪經要用法 ( 대정장 15, 325c), “坐禪之要法有五門. 一者安般, 二不淨, 三慈心,四觀緣, 
   五念佛.” 

7) 瑜伽師地論 , 聲聞地 ( 대정장 30, 428c18-19), “云何名為淨行所緣, 謂不淨, 慈愍, 
   緣性緣起, 界差別, 阿那波那念等, 所緣差別”; Karunesh Shukla, ed., Srāvakabhūmi 
   of Aacārya Asaṅga (Patna: Kashi Prasad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73), 
   Part I, 202.3-5, “tatra carita-viśodhanam ālambanaṃ katamat. tadyathā aśubhā-
   maitrī, idaṃ pratyayatāpratītyasamutpādaḥ dhātuprabhedaḥ ānāpānasmṛtiś ca”; 
   大乘阿毘達磨集論 ( 대정장 31, 687a4-7), “淨行所緣復有五種. 謂多貪行 者緣不淨境, 
   多瞋行者緣修慈境, 多癡行者緣眾緣性諸緣起境, 憍慢行者緣界差 別境,尋思行者緣入出
   息念境”; Abhidharmasamuccaya, 瑜伽行思想研究会 梵藏 漢對校 E-Text Abhidharm-
   asamuccaya( 大乗阿毘達磨集論 ) and Abhidharmasamuccayabhāṣya( 大乗阿毘達磨
   雑集論) (2003), Vol III, 622쪽((http://www.shigamed.ac.jp/public/yugagyo/AS.html), 

 “ritaviśdhanālambanaṃ pañcavidham. bhūyorāga-caritānām aśubhaviṣyālambanam, 
   bhūyodveṣacaritānāṃ karuṇābhāvanāviṣayālambana, bhūyomohacaritānāṃ 
   nikāyapratyayatā-pratītyasamutpādaviṣayālambanam, madamānacaritānām 
   dhātuprabhedaviṣyālambanam, vitarkkacaritānām avatārā- prativāṇismṛtiviṣyālambanam.” 
8) 瑜伽師地論 , 菩薩地 ( 대정장 30, 504b11-16), “如其所應隨其所宜, 示現種 種所趣入門
   令其趣入 謂或修不淨 或復修慈 或修種種緣性緣起 或修界差別 或 修阿那波那念. 如其所
   應隨其所宜, 示現種種所趣入門令趣入已. 為說能治常邊 邪執處中之行, 為說能治斷邊邪執
   處中之行”; Unrai Wogihara, ed., Bodhisattvabhūmi (Tokyo: 山喜房仏書林, 1930-1936), 
   110-111쪽, “anuśayaṃ paryeṣya yathāyogaṃ yathā'rham eva vicitreṣv avatāra-
   mukheṣv avatārayati. yadi vā aśubhayā yadi vā maitryā yadi vā idaṃ-pratyayatā-
   pratītya-samutpādena yadi vā dhātu-prabhedena yadi vā ānāpāna-smṛtyā 
   yathāyogaṃ yathā'rhaṃ avatāra-mukheṣv avatārya śāśvatāṃtā-sad-graha-
   pratipakṣeṇa madhyamāṃ pratipadaṃ deśayati. ucchedāṃta-sad-graha-pratipakṣeṇa 
   madhyamāṃ pratipadaṃ deśayati.” 
9) 菩薩地持經 ( 대정장 30, 905b21-23), “隨其所應種種度門,而度脫之. 所謂不淨, 慈心, 
   緣起, 界分別, 安那般那念”( 瑜伽師地論 本地分, 第十五菩薩地의 異 譯). 
10) 三無性論 ( 대정장 31, 876c11-13), “治行境界者自有五種, 一不淨觀, 二無量 心, 
    三因緣觀, 四分別界, 五出入息念.” 
11) 佛光大辭典 (高雄市: 佛光出版社, 1989), 1144쪽. 
12) 따라서 앞서 제시한 유식관련 논서를 제외한 인도불교 전통의 경전이나 논서 그리고 
    산스크리트-티베트 번역용어집인 번역명의대집 에도 다섯 항목이 함께 정리되 어 있지 않다. 

 

특히 중국의「구사론」에 대한 주석문헌13)에서는 구사론「현성품」
의 7가지 준비단계 수행(七加行)의 첫 번째인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삼
현(三賢)의 첫 번째로 오정심관을 들고 있지만,「구사론」본문에서 나
타나는 수행법은 부정관(不淨觀)과 입출식념(入出息念) 두 가지14)이다.
따라서 ‘오정심관’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인도의 전통이라기보다는,
혜원 등에 의해 비롯된 중국 전통에 의한 것이며,15) 이를 중국의 경론
주석가 및 종파의 스승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16)
13) 普光述, 俱舍論記 卷第二十二( 대정장 41, 339b23-24), “此下第二明五停位, 七加行
    中五停心觀也”; 法寶撰, 俱舍論疏 卷第二十二( 대정장 41, 729c14- 21), “論. 如是已
    說修所依器. 自下第三明七加行. 文即有七. 此一行頌, 第一明五停心位, 文中有二. 先總
    明入修二門, 後別釋二門, 此文初也. 論曰至能正入 修, 略說二要門也, 入修要門有多種故. 
    諸有情類行別眾多故, 入修門亦有多種. 廣即眾多, 次有五種, 謂多貪不淨, 多瞋慈悲, 多
    癡緣起, 著我六界, 尋伺持息, 然就多分最略二門, 一不淨觀, 二持息念.” 
14) AKBh 337.8-8, “그런데 이와 같이 [聖道로 향하는] 근기가 된 그에게는 어떻게 그 
    수행에의 진입(들어가는 것)이 있는가? 그것(수행)에의 진입은 부정(不淨)과 입출식념에 
    의한다”(tasya tv evaṃ pātribhūtasya katham tasyāṃ bhāvanāyām avatāro bhavati. 
    tatrāvatāro 'śubhayā cānāpānasmṛena ca); 俱舍論 , 玄奘 譯( 대정장 29, 117b4-5), 
    “由何門故能正入修. 頌曰 入修要二門 不淨觀息念”; 俱舍論 , 眞諦譯 ( 대정장 29, 269c
    8-9), “於修中緣何法門, 得入修觀偈曰. 入修由二因, 不淨觀息 念; 桜部建․大谷信千代, 
    俱舍論の原典解明―現聖品 (京都: 法藏館, 1996), 76쪽. 
15) Sakurabe Hajime(1980), 308쪽; 釋惠敏(1994), 129쪽, n. 2; 大谷信千代(2000), 
    137 쪽 이하. 
16) 대정장 1-55권과 85권(CBETA Taisho Tripitaka 사용)에서 五停心 으로 검색한 결과 
    권33-39 경소부 에서 57개를 위시로 논소부 , 제종부 등의 18책에서 총 190개가 검색
    되었다. 이 문헌들은 중국에서 제작된, 경론의 주석서류와 천태, 화엄 교학의 전적 등이다.

 

「대승의장」에 의하면 오정심관의 내용은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
悲觀), 인연관(因緣觀), 계분별관(界分別觀), 안나반나관(安那般那觀)이
다.17)「대승의장」에 제시된 오정심관의 다섯 가지 항목은 주로 인도
대승불교 유식(唯識) 계통의 문헌에서 보이며, 坐禪三昧經 (「대정장」15, 217c)
이나 五門禪經要用法 ( 대정장 15, 325c) 등의 선경류(禪經類) 또는 삼매경류
에서는 계분별관(界分別觀), 대신에 염불법문(念佛法門)이 들어가 있다.18) 
먼저 대승의장 에 보이는 오정심(五停心)에 대해서 살펴본다.
17)「大乘義章」12(「대정장」44, 693c)
18) 선경류와 삼매경류의 수행론에 대한 연구로는 大谷信千代(2000), 175-203쪽; 김호 귀, 
    禪觀思想의 考察―禪觀經典의 분류를 중심으로 , 동국사상 27․28집 (1996), 65-87쪽 참조.

"이 다섯 가지는 경 가운데19)에서 오도문(五度門)이라고 하며, 또한 정심(停心)이
라고도 한다. 도문(度門)이라고 말할 때, 도(度)는 벗어남[出離]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 다섯 관을 닦아서 탐욕 등의 다섯 가지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어 열
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름하여 도(度)라고 한 것이다. 또한 번뇌를
끊고 생사를 건너 여의므로 또한 이름하여 도(度)라고 한 것이다. 지나는 사람이
들어오기 때문에 문이라고 한다. 정심(停心)이라고 할 때 정(停)은 가라앉고 멈
추어 편안하게 머문다는 뜻이다. 탐욕 등을 가라앉혀 여의고 마음을 다스려, 부
정(不淨)등의 수행법에 머물기 때문에 정심(停心)이라고 한다."20)
19) 여기서 말하는 경(經)의 한 예로 瑜伽師地論 本地分, 第十五菩薩地의 異譯인 菩薩地持經 
    (A.D. 414-426 역출, 國譯一切經 瑜伽部 1 瑜伽師地論解題, 11 쪽)에는 도문(度門)이라는 
    용어가 나온다(「대정장」30, 905b21-23): “隨其所應種種 度門, 而度脫之. 所謂不淨, 
    慈心, 緣起, 界分別, 安那般那念.” 
20)「대정장」44, 697c11-16, “此五經中名五度門, 亦曰停心. 言度門者 度是出離至 到之義. 
    修此五觀能出貪等五種煩惱到涅槃處 故名為度. 又斷煩惱度離生死亦 名為度. 通人趣入 因
    之為門. 言停心者 停是息止安住之義. 息離貪等制意住於 不淨等法 故曰停心.”

하지만「대승의장」에서는 ‘오정심관’의 ‘관(觀)’에 대한 해석은 보이
지 않는다. 오정심관에서 관(觀)은 지관(止觀)의 지혜를 의미하는 관
(觀, 팔리어 vipassanā, 범어 vipaśyanā) 또는 수관(隨觀, anupassaī,
anupassan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수행 또는 수습(修習)을
의미하는 bhāvanā에 해당하는 용어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앞서
지적했지만, 유가사지론 성문지 의 정행소연(淨行所緣)으로 제시된
다섯 항목과 보살지 의 산스크리트어와 한역에서는 ‘관(觀)’이라는
용어가 없이 사용되었다. 즉, aśubhā(不淨), maitrī(慈愍) 또는 慈, idaṃ-
pratyayatāpratītyasamutpādaḥ(緣性緣起), dhātuprabhedaḥ(界差別), 
ānāpānasmṛti(阿那波那念)이다.

「대승의장」에서 말하는 안나반나관(安那般那觀)의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는 안반염(安般念)21)이라고도 한다. 이는 입출식념(入出息念)인
ānāpānasati(팔리) ānāpānasmṛti(범어)를 가리키므로 이때의 관(觀)은 일
단 염(念)의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염이 생략되고 bhāvanā의 
의미를 살려서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정심관’의 ‘관(觀)’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각 항목에 대한 개념풀이에서 
설명한다.
21)「대정장」44, 699b20, “安般念者, 五地所攝.”

오정심관은 각각 다섯 가지 번뇌, 즉 탐욕, 분노, 어리석음, 아만, 분
별을 다스려 가라앉히는 수행법이다.22)「유가사지론」「성문지」에 인용
된 레와타(Revata)23)에 대한 가르침에 제시된 번뇌와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22)『중아함경』에 의하면 不淨(惡露)을 닦아서 욕망을 끊고, 慈를 닦아서 분노를 끊으며, 
    出入息을 닦아서 산란한 마음을 끊고, 無常想을 닦아서 아만을 끊는다고 한다.「대정
    장」1, 491c15-17, “復修四法. 云何為四? 修惡露 令斷欲, 修慈 令斷恚, 修 息出息入 
    令斷亂念, 修無常想 令斷我慢”; 「대정장」 1, 492b23-27, “當知必修惡 露 令斷欲. 
    修慈令斷恚, 修息出息入令斷亂念, 修無常想令斷我慢. 若比丘得無 常想者, 必得無我想. 
    若比丘得無我想者 便於現法斷一切我慢.” 
23) 팔리 니까야에서「성문지」에 인용된 레와타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다. 레와타 
    장로는 사리풋타 존자의 막내 동생으로 숲 속 수행(아랸냐)의 제 1인자라고 한다. AN i, 
    24, s.v. DPPN II 752, “āraññikānaṃ yad idaṃ revato khadiravaniyo.” 레 와타 존자의 
    수행생활에 대한 면모는 중간길이의 가르침 (中部) 32經, 고싱가 큰 경 (Mahāgosiṅga-
    sutta, MN i, 216)에 나온다. 大谷信千代(2000), 137쪽

"어떻게 적절한 대상에 마음을 고정(또는 안정)시키는가? 레와타여, [만일 그]
요가행을 닦는 수행자(yogī yogacāra)인 비구가 다름 아닌 탐욕의 성향이 있는
자(rāgacarita)라고 한다면, 그는 부정(不淨)한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킨다. 이와 같
이 적절한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킨다. 하지만 분노의 성향이 있는 자(dveṣacarito)
라면, 자애(慈愛)에, 또는 어리석음의 성향이 있는 자(mohacarito)라면, 이것을 조
건으로 하는 연기(緣起)에, 또는 아만의 성향이 있는 자(mānacarito)라면 요소의
구별에, 레와타여, 만일 그 요가행을 닦는 수행자인 비구가 다름 아닌 분별의 성
향이 있는 자(vitarkacarita)라고 한다면,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챙김(入出息念)
에 마음을 고정시킨다. 이와 같이 적절한 대상에 마음을 고정(또는 안정)시킨
다.24)
24) Śbh 198.12-19, “katham anurūpe ālambane cittam upanibadhnāti. [sa ce] revata 
    bhikṣur yogī yogācāraḥ (so) rāgacarita eva, sa na śubhālambane cittam upanibadhnāti. 
    evam anurūpe ālambane cittam upanibadhnāti. dveṣacarito vā punar maitryāṃ, 
    mohacarito vā idaṃ pratyayatāpratītyasamutpāde, mānacarito dhātuprabhede, sa 
    ced revata, sa bhikṣur yogī yogācāre vitarkacarita eva ānāpānasmṛtau cittam 
    upanibadhnāti evaṃ sonurūpe ālambane cittam upanibadhāni”;「대정장」30, 428a
    11-16, “云何比丘勤修觀行是瑜伽師. 於相稱緣安住其心. 謂彼比丘若唯有 貪行 應於不淨
    緣安住於心. 如是名為於相稱緣安住其心. 若唯有瞋行 應於慈愍 安住其心. 若唯有癡行 應
    於緣性緣起安住其心. 若唯有慢行 應於界差別安住其 心. 若唯有尋思行 應於阿那波那念安
    住其心. 如是名為於相稱緣安住其心.” 大 谷信千代(2000), 137쪽.

이 경전을 통해서 ‘정심(停心)’은 “마음을 고정시키다(cittam upanibadhnāti,
安住其心)”라는 표현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upanibadhnāti(upa-ni-bandh)는
‘글을 쓰다’ ‘작문하다’라는 뜻이 있고, 어원적으로 '가까이 묶어 두다', '고정시키다', 
'안정시키다'는 의미를 가지고있다.25) 따라서 오정심관 이라는 용어 자체가 
인도에서는 술어화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인도불교 문헌인「성문지」등의 
내용을 근간으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26)
26) 현장이 번역한「유가사지론」보다 혜원의「대승의장」의 성립이 1세기 정도 앞섰기 
    때문에, 혜원이「성문지」의 이와 같은 표현을 근거로「오정심」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였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혜원 이전에 번역되어 소개된
  「유가사지론」의 이역본들과 여러 가지 선관류의 경전 등의 내용을 종합하면서「오정심」 
    이라는 용어를 선택할 때, 인도불교적인 이해도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을 
    것이다. 이 점은 아직 연구의 여지가 남아 있다. 

 

Ⅲ. 오정심관의 개념에 대한 이해

오정심관을 이루는 다섯 가지 수행법에 대해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아비달마 논서를 보조적인 문헌으로 삼아 해석해 본다.

1. 부정관(不淨觀) asubha [bhāvanā](팔리), aśubhā [bhāvanā](범어)
초기경전이나 아비달마논서에서는 부정수관(不淨隨觀, asubānupassī)
또는 부정상(不淨想, 팔리 asubhasaññā, 범어 aśubhasaṃjñā)이라는 명칭
으로도 자주 사용된다.27) 부정(不淨)이 수행을 의미하는 bhāvanā와 복
합어를 이루거나 동사형인 bhāveti의 목적어로 쓰인 예도 있다.28) 부
정상(不淨想)의 상(想, saññā, saṃjñā, )은 정(定 samādhi)을 이루는 수행
법을 의미하거나 선정의 동의어로 보아도 좋다.29) 따라서 부정관(不
淨觀)이라는 용어는 부정수관(不淨隨觀)의 준말이거나 부정상(不淨想)
을 의미하며, 부정(不淨)을 닦는 수행(asubha-bhāvan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7) 팔리 니카야에서 부정(不淨, asubhā)이 수관(隨觀, anupassī)과 함께 사용된 예는
   『법구경』1회(Dhp 8), 『이렇게 하신 말씀』(여시어경) 3회(It 80.11, 80.14, 81.4),
   『하나씩 더해지는 가르침』(증지부)에서 10회(AN ii 150.34, 151.8, 155.32, 156.9; 
    iii 83.9, 83.19, 84.6, 142.27, 143.13; v 109.26) ,『중간길이의 가르침』(중부)에서 
    2회 (MN i 336.22, 336.27) 총 16회 사용되었다. 
    부정(不淨, asubhā)이 상(想 saññā)와 함께 사용된 예는 38회가 검색되었다. ( It 93.6; 
    Th 594게(61쪽20행); Nidd i 143.10, 212.13, 338.2, 345.26, 481.1; AN i 41.24, iii 
    79.13, 277.10, iv 24.8, 46.12, 46.22, 46.25, 46.28, 47.5, 47.9, 47.12, 47.14, 47.18, 
    47.20, 148.9, 148.16, 387.8, 465.4, v 105.24, 107.19, 108.5, 109.1, 109.18, 109.27, 
    309.20: DN ii 79.30, iii 253.3, 283.7, 291.8: SN v 132.11) 
    대정장 아함부 (「대정장」1, 2)에서 ‘不淨觀’은 20회, ‘不淨想’은 53회. 비담부 ( 대정장 
    26-29)에서는 ‘不淨觀’은 519회, ‘不淨想’은 255회 검색된다(CBETA Electronic Tripitaka 
    Series: Taisho Electronic Edition Vol. 1-55 & 85 사용). 아함 부 나 비담부 에서 ‘不淨觀’
    으로 사용된 말은 ‘不淨隨觀’, ‘不淨’, ‘不淨想’ 또는 aśubha-bhāvanā의 의미라고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Étienne Lamotte, Le Traité de la Grande Vertu de Sagesse de Nagarjuna, Tome III 
    (Louvain: L'Institut Orientaliste de Louvain, 1970), 1311-1313쪽에는「대지도론」의 
    不淨想에 대한 설명에 앞서 초기경전의 여러 가지 상(想) 가운데 不淨想에 대한 부분과 
    팔리아비담마(Dhammasaṅgaṇi, Visudhimagga, Vimuttimagga 등)의 十不 淨想(dasa-
    asubhā-saññā)과 유부아비달마(「구사론」,「순정리론」등) 및 대승 경전(『대품반
    야경』,『대반야경』등)에 보이는 九(不淨)想의 용례를 제시하고 있다. 
    平川彰 編, 佛敎漢梵大辭典 (東京: 靈友社, 1997), 55쪽에 부정관(不淨觀)에 대한 범어
    의 예로 aśubha-bhāvanā, aśubha-pratyavekṣā, aśubha-samāpatti, aśubhā, 
    aśubhākāra를 들고 있다.  
   「대비바사론」에서 부정관의 자성(自性)은 지혜(慧)도 싫어함(厭)도 아니라, 탐욕이 
    없는 선의 뿌리(無貪善根)라고 하면서도 관(觀)이 혜(慧)와 관계가 있다(慧相 應)는 
    경전의 해석(如契經說, 眼見色已隨觀不淨, 如理思惟乃至廣說。觀是慧故) 도 받아들
    이고 있다(「대정장」27, 206c11-16). 
   「대비바사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契經說, 眼見色已隨觀不淨, 如理思惟”에 가까운 
    아함경의 문구는 설일체유부 전승 中阿含經 의 “比丘, 眼見色護眼根者 以 正思惟不
    淨觀也. 不護眼根者, 不正思惟以淨觀也”(「대정장」1, 432b6-8)라고 할 수 있지만, 
    한역『아함경』에서 정확하게 부정을 거듭 관한다(隨觀不淨, 팔리 *asubhānupassana)는 
    용어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契經說, 眼見色已隨觀不淨”은「대비바사론」(「대정장」
    27, 439a28-29; 439a27-28)과「아비달마순정리론」(「대정장」29, 507a18),
   「아비달마현종론」(「대정장」29, 845b29-c1) 등에 보인다.
28)『중간길이의 가르침』(중부)에 ‘부정 수행의 실천에 전념하며 머문다.’(MN iii 82.11) 
    라고 나오며, SN v, 320에도 제시되어 있다. 법구경 에는 “그는 항상 마음 챙기고 부정
    을 닦는다”(Dhp 350게b)라고 하여 ‘닦는다’는 동사의 목적어로 asubha가 사용 되었다. 
    MN I, 424.35, “라훌라야, 부정 수행을 닦아라”(asubhaṃ rāhula bhāvanaṃ bhāvehi); 
    s.v. asubha, CPD I 512-3쪽
28)『중간길이의 가르침』(중부)에 ‘부정 수행의 실천에 전념하며 머문다.’(MN iii 82.11) 
    라고 나오며, SN v, 320에도 제시되어 있다.『법구경』에는 “그는 항상 마음 챙기고 
    부정을 닦는다”(Dhp 350게b)라고 하여 ‘닦는다’는 동사의 목적어로 asubha가 사용 
    되었다. MN I, 424.35, “라훌라야, 부정 수행을 닦아라”(asubhaṃ rāhula bhāvanaṃ 
    bhāvehi); s.v. asubha, CPD I 512-3쪽.
29) 藤田宏達, 原始仏教における禅定思想 , 佐藤博士古希記念 仏教思想論叢 (東京: 山喜
    房佛書林, 1972), 302쪽.

부정관은 탐욕의 성향이 있는 사람(貪行, rāga-carita)의 탐욕 또는 감
각적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수행이다. 외적으로는 타인의 육체(시체)
가 부패하여 백골로 변해가는 9가지 모습(九想) 혹은 10가지 모습(十
想)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난 후 상기(想起)하는 방법과 내적으로는 자
신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31가지 또는 32가지)를 상기(想起)하면서 부
정(不淨)하다고 생각하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부정관 수행의 목적이다.30)
30) MN I, 424.35-36, “라훌라야, 부정 수행을 닦아라. 왜냐하면, 라훌라야 부정 수행을 
    닦는 자는 감각적 욕망이 끊어진다”; AN iii, 446.1; iv, 353.9, 358.15, “감각적 욕망
    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부정을 닦아야 한다.”

 

2. 자비관(慈悲觀) mettā(팔리), maitrī(범어)

자비관에 사용된 ‘자비(慈悲)’라는 용어는 정확하게는 ‘자(慈)’, ‘자

민(慈愍)’, 또는 ‘자애(慈愛)’를 말한다. 자비(慈悲)는 자(慈, mettā,

maitrī)와 비(悲, karuṇā)로 이루어진 말이지만, 오정심관의 ‘자비관’의

‘자비’는「유가사지론」등에 의하면 일단 ‘자’만을 가리키고 있다. 현

재 남방불교의 수행법에서 ‘자관(慈觀)’이라고 할 때, 자애를 ‘보는 것’

이 아니라, 자애수행(慈愛修行, mettā-bhāvanā)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

며, ‘자애를 닦는 수행’을 의미한다.

 

자비관은 분노의 성향이 있는 사람(瞋行, dosa-carita)31)이 분노, 악의

(惡意)를 제어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자(慈)의 가장 간략한 의미는 ‘(중

생들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한 상태가 되기를.’

32)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31)「聲聞地」(「대정장」30, 429c24-26), “若有瞋行補特伽羅, 於諸有情修習慈愍令瞋 
    微薄, 名於瞋恚心得清淨.” 
32) Sn 145, Khp 8, “sukhino vā khemino hontu.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Suttanipāta의 게송 73에 대한 주석에서 四無量心을 해석하는 가운데

mettā(慈)와 karuṇā(悲)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는 방식(naya)으로, [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려고 하는 마음상태(hita-sukhupanayana-kāmatā)가 慈(mettā)이다.

‘[사람들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이라는 방식으로, 해로움과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는 마음상태(ahita-dukkhāpanayana-kāmatā)가 悲(karuṇā)이다."33)

33) Harvey B. Aronson, Love and Sympathy in Theravāda Buddhism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6 reprint), 16쪽; Pj ii, 128, “tattha sabbe sattā sukhitā hontū" 
    ti ādinā nayena hitasukhupanayanakāmatā mettā "aho vata imamhā dukkhā 
    vimucceyyu" ntiādinā nayena ahitadukkhāpanayanakāmatā karuṇā.”

 

이 주석을 통해서, 자(慈)는 다른 존재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주

려는 마음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처럼 자(慈)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기원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분노(dosa, dveṣa 瞋)나 나쁜 의도(vyāpāda 惡意)를 없애기 위해서

자애를 닦는다.34)

34) AN iii, 446.1-2, “dosassa pahānāya mettā bhāvetabbā”; AN iv, 353.10, “mettā 
    bhāvetabbā vyāpādassa pahānāya.” 

 

mettā-bhāvanā라는 용어가 초기경전에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닦

아야 한다.’(bhāvetabbā: bhāveti의 미래수동분사)라는 동사의 주어로

mettā가 사용되었기 때문에35), 의미상으로 mettā가 bhāveti의 목적어가

된다. 따라서 자비관, 또는 자관이란 자비 또는 자애를 닦는 수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35) AN iii, 446.1-2, “dosassa pahānāya mettā bhāvetabbā.”

 

3. 인연관(因緣觀) idappaccayatāpaṭiccasamuppāda(팔리) 

   idaṃ pratyayatāpratītyasamutpādaḥ(범어)

‘인연관’에 대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의 정확한 한역어는 차연성

연기(此緣性緣起)이며, 연성연기(緣性緣起) 또는 종종연성연기(種種緣

性緣起), 십이인연(十二因緣), 인연관(因緣觀) 등으로 한역된다. 차연성
연기(此緣性緣起)의 의미는 ‘이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라는 조건에
의한 발생’이다.

차연성(此緣性, 팔리 idappaccayatā, 범어 idaṃ pratyayatā)이라는 용어
는 12연기와 함께 사용되는 용어로 연기(緣起, 팔리 paṭiccasamuppāda,
범어 pratītyasamutpāda)와 동격어 내지 동의어로 사용되거나36), 연기의
도리의 진리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사용되는 말이다.37) 따라서 ‘이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라는 연기’ 즉 구체적으로 12지연기38)에 대
한 관찰이 인연관의 내용이다.
36) 三枝充悳,「緣起の思想」(京都: 法藏舘, 2000), 13쪽, 223-231쪽; 藤田宏達, 原始 
    佛敎における因果思想 , 佛敎思想 3, 因果 (京都: 平樂寺書店, 1997[1978]), 99 쪽, 
    107쪽 n. 55; Vin i, 5.1; DN ii, 36; MN i, 167; SN i, 136: “idaṃ idappaccayatā 
    paṭiccasamuppādo”; Edgerton, BHSD, 114쪽, s.v. idaṃpratyayatā.
37) 藤田宏達(1978), 100쪽. 
38) 연기(緣起)는 곧 12지연기를 말하는 경전은 많다.『함께 묶은 가르침』(상응부)의 
    nidānasaṃyutta의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SN ii 1.18-27, “세존은 다음과 말씀
    하셨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연기란 어떤 것인가? 어리석음(無明)을 조건으로 해서 
    지음(行)이 있다. 지음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이 있다.... (bhagavā etad avoca. 
    katamo ca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avijjāpaccayā, bhikkhave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naṃ....).” 후지타 박사가 지적하는 것처럼(藤田宏達, 1978, 
    102쪽 n. 7) 팔리 니카야에는 12연기, 12지연기, 12인연에 해당하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용상 12지가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12지연기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인연관을 12지연기에 대한 관찰이라고 했을 때, 산스크리트 자료나
팔리 자료를 통해서 ‘보다’ 또는 ‘관찰하다’는 의미의 관(觀)에 해당하
는 용어로는 ‘passati'가 있다.

 

‘연기를 보는 자, 그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 그는 연기를 본다.’39)
39) MN i, 190.37-191.2,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행위[業]를 보는 현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고 업의 과
보를 잘 아는 자이다.’40)
40) Sn 653, “evam etaṃ yathābhūtaṃ kammaṃ passanti paṇḍitā paṭiccasamuppādadasā 
    kammavipākakovidā.” 

 

‘비구들이여, 이렇게 성인의 제자들에게 이 연기(緣起)와 이 연기에 의해 생겨

난 법들[緣已生法]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에 의해서 잘 보여 졌다(또는 체험되

었다).’41)

41) SN ii, 26.25-27.

 

또한 연기가 훌륭한 이치에 맞는 사고[sādhukaṃ yoniso manasikaroti,

*善如理作意]의 대상으로 제시된 경전도 있다.42)

42) SN ii, 65.3-8.

 

이처럼 ‘인연관’ 또는 ‘연기관’이라는 용어는 찾아볼 수 없으나 ‘연

기를 본다.’ ‘연기와 연이생법(緣已生法)이 바른 지혜에 의해서 잘 체

험되었다.’ ‘연기에 대해서 이치에 맞게 사유한다.’라는 표현에서 ‘연

기관’의 ‘관’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성문지」에서 보았듯이 인연관은 어리석음의 성향이 있는 사

람[癡行, moha-carita]이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한 수행법이다. 초기경전

에서는 어리석음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는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

다43). 유부의 아비달마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행단계에서 오정심관의

위치가 수행의 입문에 해당하기 때문에, 유부 아비달마체계에서 연기

관은 초보적인 단계의 지혜를 닦는 수행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43) AN iii, 446.2, “mohassa pahānāya paññā bhāvetabbā.”

 

4. 계분별관(界分別觀) dhātuppabheda(팔리)44), dhātuprabhedaḥ(범어)

44) Vism 352.20. 팔리 주석 전통에서는 dhātumanasikāro, dhātukammaṭṭhāna, 
    catudhātuvavatthāna라고도 한다. Vism 347, “dhātumanasikāro dhātukammaṭṭhānaṃ 
    catudhātuvavatthānan ti atthato ekaṃ.

 

계분별관은 계차별관(界差別觀)이라고도 하며, 설일체유부의 논서인「대비바사론」에서는

계방편(界方便)45)이라고도 한다.

45)「阿毘達磨大毘婆沙論」 卷第十二(「대정장」27, 58b12-13), “先起持息念界方便亦 爾”; 
    阿毘曇毘婆沙論 卷第六( 대정장 28, 44a1), “安般觀界方便亦如是”; 阿 毘曇毘婆沙論 卷
    第二十一(「대정장」28, 154.a9-12), “問曰. 何以說不淨觀繫念 在前, 不說阿那波那念
    觀界方便耶. 答曰, 或有說者此說初起方便. 如說不淨觀 繫念在前. 亦應說阿那波那念觀界
    方便, 而不說者.”

여기서 말하는 계는 기본적으로는 4계(四界)46) 또는 6계(六界)47)를
말하며 때로는 18계48) 를 의미하기도 한다. 4계의 경우에는 네 가지
물질의 근본요소(四大)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하며, 6계의 경우에
는 4계에 공간[ākāsa, 空과 의식[viññāṇa, 識을 더한다. 18계의 경우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을 말한다.
46) DN ii, 294; MN i, 57; MN iii, 91: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이 육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구성되어진 그대로 (네 가지)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땅의 요소
    (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가 있다’라 고.”『大般若
    波羅蜜多經』(「대정장」5, 298b12-13; 대정장 7, 78a26, 458b24), “以無所得而為
    方便, 審觀自身, 如實念知四界差別, 所謂地界水火風界.” 
47)『中阿含経』卷第二十 観身諸界에 해당하는 부분: “復次比丘修習念身.比丘者, 観身
    諸界.此身中有地界水界火界風界空界識界”(「대정장」1, 556a26-7). 瑜伽 師地論 
    卷第二十七(「대정장」30, 430b14-15), “云何界差別所緣. 謂六界差別, 一 地界二水
    界三火界四風界五空界六識界.” 
48)「阿毘達磨大毘婆沙論」(「대정장」27, 367c4-6), “又佛於彼多界經中, 說界差別有 
    六十二, 彼亦攝在此十八界, 即所依等三事攝故”; 『大般涅槃經』卷第三十六(「대정장」
    12, 576c24), “著我多者當為分析十八界等.”

자신의 육체 또는 육체와 마음을 구성요소인 4계 또는 6계 등으로
분석해서 관찰하는 수행법을 계분별관 또는 계차별관이라고 한다. 이
수행법은 초기경전『대념처경』등의 염처경류에 간략하게 제시되어
있고,『중간 길이 가르침』(中部) 140경인「계분별경」등49)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49)「계분별경(Dhātuvibhaṅga-sutta)」에서는 지수화풍에 공간과 의식을 포함한 6계를 
    제시하고 있다(MN iii, 240).『중간 길이 가르침』62경「라훌라에 대한 큰 가르침」
    (Mahārāhurovāda-sutta) 에서는 내적, 외적인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四界)와 
    공간의 요소(ākāsa-dhātu, 空界)만을 제시하고 있다(MN i, 421.27-423.17). 팔리어
    의「대념처경」(DN ii, 295)과「염처경」(MN i, 57-58)에서는 지수화풍의 4계만이 
    제시되며, 한역 『중아함경』의「염처경」에서는 지수화풍에 공과 식이 추가된 6계
    가 제시 되어 있다(『中阿含経』卷第二十四,「대정장」1, 582b-584b, 특히, 583b
    17-9, “復 次,比丘,観身如身比丘者, 観身諸界.我此身中有地界水界火界風界空界識界.”)

 

계분별관은 아만의 성향이 있는 자[mānacarito]의 아만을 극복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즉 육체[rūpa 色]나 정신[nāma 名]을 ‘나’라고 생각하
는 아만을 극복하기 위해 4계나 6계 등의 요소로 분석해서 관찰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5. 안나반나관(安那般那觀) ānāpānasati(팔리), ānāpānasmṛti(범어)
아나반나관은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 入出息念]을
의미하며, 수식(隨息)50), 수식(數息) 또는 수식관(數息觀)51), 안반염(安
般念)으로 번역되었다. ‘입출식념’에 ‘수행’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어, 
입출식념수행을 닦는다52), 입출식념 수행의 실천[ānāpānasatibhāvanānuyogam]
53), 입출식념수행54)이라고 사용된 용례가 있고, 입출식념에 의한 삼매55)라는 
표현도 사용된 것으로 볼 때, 안나반나관 또는 수식관은 입출식념을 닦는 
수행을 의미하며 그 결과로 삼매를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0) ‘따른다(隨)’라는 말은 일부런 힘을 들이지 않고, 들숨과 날숨의 진행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AKBh 340.2, “anugamo nāma anabhisaṃskāreṇāśvāsapraśvāsānāṃ 
    gatim anugacchati”;「대정장」29, 118b2-3, “隨謂繫心緣入出息不作加行隨息而行.” 
51)「阿毘曇甘露味論」(「대정장」28, 975b11-12), “趣涅槃道二種.一觀身不淨, 二念數 息”; 
    攝大乘論釋 (「대정장」31, 217c5-6), “謂凡夫位 修戒乃至得不淨觀及數息 觀。以隨順
    顛倒故.” 
52) MN i, 421.18-19, 425.3, “ānāpānasatiṃ rāhula bhāvanaṃ bhāvehi.” 
53) MN iii, 82.16-17. 
54) MN iii 84.24, “ānāpānasatibhāvanaṃ.” 
55) SN v, 316-341, “ānāpānasatisamādhi.”

 

들숨과 날숨[入出息]에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는 수행법으로 초기
경전에 의하면 색계 4선(四禪) 등을 이루는 방법으로 제시되기도 하
고56), 4념처를 통해서 7각지를 이루어 지혜와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
으로 제시되기도 한다.57) 앞서「성문지」에서 보았듯이 분별의 성향이
있는 자[vitarkacarita]가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챙김[入出息念]을 통해
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56)『함께 묶은 가르침』(상응부)의 ānāpāna-saṃyutta 8번째 경(dīpo, 등불)에 의하면,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입출식념에 의한 마음집중(ānāpānasati-samādhi)에 
    주로 머물렀다고 하며, 입출식념에 의한 마음집중에 의해서 사선과 사무색계선 및 
    상수멸정(想受滅定)에 이르는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얻는다. 더 나아가 입출식념에 
    의한 마음집중에 의해서 즐겁고(樂), 괴롭고(苦),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不苦不樂) 
    느낌(vedana, 受)의 무상함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며, 즐거워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SN v, 316-320). 
57)『중간 길이 가르침』(중부) 제118경 ānāpānasati-sutta에 의하면 입출식념을 닦으
    면 4념처가 갖추어지고, 사념처가 갖추어지면 7각지가 갖추어지며, 7각지가 갖추어
    지면 지혜와 해탈[vijjā-vimutti 明解脫]이 갖추어진다고 한다(MN iii, 82.17-22)

6. 오정심관의 다양한 구성
오정심관에서 자비관 대신에 사무량심을 넣은 예58), 계분별관 대신
에 염불법문 [buddhānusmṛti, 佛隨念]을 넣은 예59), 계분별관이나 염불
대신에 골쇄관(骨鎖觀)이 제시된 예60)도 있듯이 다섯 가지 항목은 문
헌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61)
58) 鳩摩羅什譯「思惟略用法」(「대정장」15, 298a)과 眞諦譯 「無性論」(「대정장」
    31, 876c). 
59) 鳩摩羅什譯 「坐禪三昧經」(「대정장」15, 217c)과 曇摩蜜多譯「五門禪經要用法」
    (「대정장」15, 325c).
60) 竺法護譯 「修行道地經」(「대정장」15, 191c).
61) 大谷信千代(2000), 137-138쪽.

曇無讖譯의『대반열반경』에서는 인연관이 제외된 4 가지 수행법이
제시되어 있고, 계분별관에서 계가 18계로 제시되어 있다.62)
62)「대정장」12, 576c20-24, “善男子. 智不具足凡有五事. 是人知已求近善友. 如是 
    善友當觀是人貪欲瞋恚愚癡思覺何者偏多. 若知是人貪欲多者即應為說不淨觀 法. 
    瞋恚多者為說慈悲. 思覺多者教令數息. 著我多者當為分析十八界等.” 

 

Ⅳ. 초기불전의 용례를 통해본 오정심관의 의미

 

팔리 삼장이나, 한역 아함경에서 오정심관에서 제시된 다섯 가지

수행법이 한 세트로 제시된 예는 보이지 않는다. 초기 경전에서는 개

별적이거나 몇 가지 항목이 오정심관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수행법들

과 함께 제시되었다.63)

63) Sakurabe Hajime(1980), 308쪽. 

 

『이렇게 하신 말씀』(如是語經) 과『하나씩 더하는 가르침』(增支部) 에

의하면, 세 가지 좋지 않음의 뿌리[三不善根: 貪瞋痴] 가운데 부정상

(不淨想)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rāga]을 다스리고 자애(慈愛)를 통해서

분노[dosa 또는 vyāpāda, byāpāda]를 다스리며, 지혜[paññā, prajñā]에

의해서 어리석음[moha 또는 avijjā(팔리) avidyā(범어)]를 다스린다64)고

한다.

64) AN iii, 446.1-5. 

 

또한 부정관[asubhānupassī]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rāgānusaya]을 다스리고, 입출식념[ānāpānasati]을 통해서 분별의 잠재

성향[vitakkāsaya]을 다스리며, 무상관[aniccānupassī]을 통해서 어리석음

[avijjā]를 끊는다고 제시된 예도 있다.65)

65) It 80.14-81.3.

 

부정(不淨, asubha)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을 끊고, 자애(慈愛)를 통해

서 악의(惡意, byāpāda)를 끊고, 입출식념(入出息念)을 통해서 분별

[vitakka]를 잘라버리고, 무상의 지각[無常想, aniccasaññā]을 통해서 

만(我慢, asmimāna)를 끊는다고 제시된 경도 있다.66)

66) Ud 37.16-18.

 

『하나씩 더하는 가르침(增支部)』의 [다섯] 덮개를 끊어 버림의 장

[nīvara.na-pahāna-vagga]에 의하면 다섯 덮개인 감각적 욕망에의 욕구

(kāmachanda)는 부정의 모습(asubhanimmitta, 不淨相)으로, 악한 의도

(vyāpāda, 惡意)는 자애(mettā, 慈)로, 혼침과 수면(thīna-middha)는 세 단

계의 정진67)으로,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는 마음의 평안(cetaso

vuupasama)으로,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은 이치에 맞는 사유(yoniso

manasikarota)로 끊어 버린다고 한다.68)

67) AN i, 4.22-27. 
68) AN i, 3.1-5.5

 

『중간 길이 가르침』(中部) 62경 라훌라에 대한 큰 가르침 (Mahā-

rāhurovāda-sutta)에서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 부

정(不淨), 무상상(無常想), 입출식념(入出息念)이 제시되어 있다. 자애

(mettā, 慈)는 악의(byāpāda, 惡意)를, 연민(karuṇā, 悲)은 해치는 마음

(vihesā, 傷害)를, 더불어 기뻐함(muditā, 喜)은 불쾌(arati)를, 평온

(upekkhā, 捨)은 대립(paṭigha)을, 부정(不淨)은 감각적 욕망(rāga)을, 무

상상(無常想)은 아만(asmimāna)을 없애주며, 입출식념을 닦으면 큰 결

실(mahāpphala)과 큰 이익(mahānisaṃsa)이 있다고 한다.69) 큰 결실과 큰

이익이란『입출식념경』에서 설해진 4념처와 7각지를 갖추어 지혜와

혜탈을 이루는 것70)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69) MN i, 424.27-425.4
70)『중간 길이 가르침』(중부) 제118경 Ānāpānasati-sutta(MN iii, 82).

 

한역『증일아함경』의 羅雲 이라는 경에는 입출식념(安般之法)을 닦

으면 슬픔과 근심의 생각[愁憂之想]을 제거하고, 부정상을 닦으면 탐

욕을, 자심(慈心)을 닦으면 분노[瞋恚]를, 연민의 마음[悲心]을 닦으면

해치려는 마음[害心]을,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喜心]을 닦으면 질투하

는 마음을, 마음을 지키는 수행[行護心]을 닦으면 모든 교만을 없애버

린다고 한다.71)

71)「대정장」2, 581a15-21, “當修行安般之法. 修行此法, 所有愁憂之想皆當除盡. 汝今
    復當修行惡露不淨想, 所有貪欲盡當除滅. 汝今, 羅雲, 當修行慈心. 已行慈 心, 所有瞋
    恚皆當除盡. 汝今, 羅雲, 當行悲心. 已行悲心, 所有害心悉當除盡. 汝今, 羅雲, 當行喜
    心. 已行喜心, 所有嫉心皆當除盡. 汝今, 羅雲, 當行護心. 已 行護心, 所有憍慢悉當除盡.” 

 

1. 부정관에 대한 초기불전의 용례

앞서 ‘부정관’의 개념풀이의 각주에서 밝혔듯이 라모트는 대지도

론 의 不淨想에 대한 설명에 앞서 초기경전의 여러 가지 상(想) 가운

데 不淨想에 대한 부분과 팔리 아비담마의 十不淨想(dasa-asubhā-

saññā),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및 대승경전에 보이는 九(不淨)想의 용례

를 제시하고 있다.72) 부정상에 대해서는 라모트와 하야시마의 글 등

을 참조하여 정리해본다.

72) Lamotte Étienne(1970), 1311-1313쪽. 부정관에 대한 연구로는 早島鏡正, 初期佛 
    敎の社会生活 (東京: 岩波書店, 1964), 第四編 不淨觀の意義とその修習 (335-404쪽) 
    참조.

 

초기 경전에 보이는 부정(不淨)

팔리경전 가운데 不淨(asubha)이라는 경명이 붙은 예73)와 不淨

(asubha) 또는 不淨想(asubhasaññā)이 경전에서 다른 수행법과 함께 열

거되어 나타난 예, 부정관이 시체의 해체 과정을 관찰하는 것으로 제

시된 예74) 등이 있다.

73) SN v, 132; AN ii, 150-152; It 80-81.
74) AN i, 42; ii, 17; v, 310;『雜阿含』(「대정장」2, 221b27-28); 增一阿含 ( 대정장 2,
    780a19-21, 789b2-5.

 

부정(不淨)이 경전에서 다른 수행법과 열거되어 나타난 예를 살펴

본다.

 

먼저 3법으로 제시된 예75)에서는 부정(asubha), 자애(mettā), 지혜

(paññā)가 각각 탐욕(rāga), 악의(vyāpāda), 어리석음(moha)을 끊어버린

다.

75) AN iii, 446.1-5.

 

4법으로는 부정(asubha), 자애(mettā), 입출식념(ānāpānasati), 무상상

(aniccasaññā)이 제시되고, 무상상(aniccasaññā)에 의해서 무아상(anattasañña)이

갖추어지고, 무아상에 의해서 아만심이 제거(asmimānasamugghāta)되어

지금 여기서 열반을 이루게 된다.76)

76) AN iv, 353.9-14, 358.15-20. 中阿含 ( 대정장 1, 492b23-27), “當知必修惡露令 斷欲. 
    修慈令斷恚. 修息出息入, 令斷亂念. 修無常想令斷我慢. 若比丘得無常想 者, 必得無我想. 
    若比丘得無我想者 便於現法斷一切我慢 得息滅盡無為涅槃.” 

 

5법 또는 5상(想)으로는 부정수관(不淨隨觀), 음식에 대해 싫어하는

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모든 행에 대한

무상상(無常想), 죽음에 대한 상(死想)이 제시되는 예가 있고77), 부정

상(不淨想), 사상(死想), 혐오상(嫌惡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이 제시되는 예가 있다.78)

77) AN ii, 150.34-38, 151.8-12, 155.32-156.1; iii, 83, 142-143. 
78) AN iii, 79.13-14, 277.10.11

 

7상(想)으로는 무상상(無常想), 무아상(無我想), 부정상(不淨想), 혐오

상(嫌惡想), 사단상(捨斷想), 이욕상(離欲想), 멸상(滅想)이 제시된 예79)

와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

워하지 않는 상(想), 무상상(無常想), 무상에 대한 고상(苦想), 고에 대

한 무아상(無我想)이 제시된 예가 있다.80)

79) DN ii, 79.29-33; iii, 253.3-4; AN iv, 24.4-10, 148.8-9. 
80) AN iv, 46.91-14, 148.14-16.『長阿含』(「대정장」1, 11c26-29), “佛告比丘復
    有七法, 則法增長, 無有損耗. 何謂為七法. 一者觀身不淨, 二者觀食不淨, 三者不樂
    世間, 四者常念死想, 五者起無常想, 六者無常苦想, 七者苦無我想.”

 

9상(想)으로는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

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무상상(無常想), 무상에 대한 고상

(苦想), 고에 대한 무아상(無我想), 사단상(捨斷想), 이욕상(離欲想)이 제

시되어 있다.81)

81) DN iii, 289.27-290.1; AN iv, 387.8-10, 465.4-6.『長阿含』(「대정장」1, 56c22
    -24), “謂九想. 不淨想, 觀食想, 一切世間不可樂想, 死想, 無常想, 無常苦想, 苦無我想, 
    盡想, 無欲想.”

 

10(想)으로는 위의 9상(想)에 멸상(滅想)이 추가된 예82)와 무상상(無

常想), 무아상(無我想), 부정상(不淨想), 혐오상(嫌惡想), 사단상(捨斷想),

이욕상(離欲想), 멸상(滅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모든 행에 대한 무상상(無常想), 입출식념이 제시된 예83) 등이 있다.

82) DN iii, 291.7-10; SN v, 132-133; AN v, 105.24-26, 309.20-22.『반야경』의 
    十想: 無 常想, 苦想, 無我想, 食不淨想, 一切世間不可樂想, 死想, 不淨想, 斷想, 
    離欲 想, 盡想(『大般若波羅蜜多經』 卷第三,「대정장」5, 12a21-23;「대정장」
    7, 7c1-3, 429c22-24; 『摩訶般若波羅蜜經』 卷第一,「대정장」8, 219a1113; 
  「大智度論」 初 品中 十想釋論 第三十七(卷二十三), 대정장 25, 229a6-7. 
83) AN v, 109.1-3.

 

이상의 여러 가지 상(想)이나 수관(隨觀) 가운데 설해진 부정상 또는

부정수관은 수행법의 하나로 고, 무상, 무아 등의 수행법과 밀접한 관

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고, 무상, 무아는 초기불교의 세 가지 수관(隨

觀)을 이루는 핵심적인 수행법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법구경』(法

句經; Dhammapada) 277-279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영원하지 않다(無常)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괴로움(苦)이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법들은 영원한 자아가 없다(無我)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이 말은 바로 세 가지 법의 특성(三法相)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이 바로 청정(열반) 에 이르는 길임을 설하고 있
는 것이다. 이 법구경에서 말하는 지혜로써 관찰한다(passati)84)는 말이
다름 아닌 관(觀) 수행인 위빠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관찰과 함께 설해지는 부정관 수행의 중요성을 반증
해 준다고 할 수있다.85)
84) 관찰에 대한 좋은 설명의 예로 가장 오래된 경전인『숫타니파타』의「대품」12경 
    두 가지 관찰에 대한 경(Dvayatānupassanāsutta) (Sn 724-765) 참조.
85) 早島鏡正(1964), 344쪽.

2. 자비관에 대한 초기불전의 용례

초기불교의 자애수행86)
86) 자비관에 대해서는 김재성, 초기불교에 있어 mettā 수행의 위치 (「인도철학회」
    발표 논문, 2003)를 기초로 하여 정리하였다. 자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 中村元, 
   「慈 悲」(京都: 平樂寺書店, 1997[1956]) 참조.

초기불교의 자비관 또는 자애(慈愛) 수행은 계정혜 삼학의 모든 과
정과 일반 재가자에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권해진
수행이었다.

먼저 계학과 자애수행의 관계를 살펴본다. 계와 관련된 자애의 실
천은 불살생계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長部의 두 경전인 「梵網
經」과 「沙門果經」의 小戒에 대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87)
87) Brahmajāla-sutta(DN i, 5); Sāmaññaphala-sutta(DN i, 63).

 

"대왕이여, 비구는 어떻게 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대왕이여, 비
구는 살생을 버리고 살생에서 떠나 있습니다. 막대기를 버리고, 칼을 버렸습니
다. 마음으로 부끄러워하고[lajjī] 자애심이 있고[dayāpanno]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sabbapāṇabhūtahitānukampī]. 이것이 
비구의 계입니다."

계란 의지[cetanā]로 지니는 자율적인 규범이라고 할 때, 첫 번째 계
인 불살생계는 살생을 피하고, 폭력을 피하며, 살생과 폭력을 부끄러
워하면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 이익을 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불살생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정학(定學)과 자수행(慈修行)의 관계이다. 마음집중을 의미
하는 정[samādhi 定]과 관계가 있는 자수행은 앞에서도 살펴본 사무량
심(四無量心) 또는 사범주(四梵住)와 관련이 있다. 앞서 예를 든「라훌
라에 대한 큰 가르침」에서 붓다는 수행법으로 라훌라에게 사무량심
과 부정(不淨), 무상상(無常想), 입출식념(入出息念)을 제시하고 있다.

자비희사의 네 가지 덕목을 통해서 악의(惡意, byāpāda), 상해(傷害,
vihesā), 불쾌(不快, arati), 대립(對立, paṭigha)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바로 사무량심이라는 수행으로 심해탈(心解脫)을 이루었
다고 볼 수 있다. 장부(長部) 17경「大善見王經」88)에 사선(四禪)을 성취
하고, 다시 사무량심을 좌선의 자세로 수행하는 방법이 설해져있다.
88) Mahāsuddasana-sutta, DN ii 186.

 

"은으로 된 자리에 앉아, 慈를 지닌 마음을 가지고, 한 방향에 가득 채우고서
지낸다. 똑 같이 제 2의 방향에, 제 3의 방향에, 제 4의 방향에 채우고 지낸다. 이
렇게 위, 아래, 옆, 모든 곳을 향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모든 것을 포
함한 세상에 慈心이 있는 넓고 크며 한량없고,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마음으
로 가득 채우고 지낸다."

 

앉은 자세에서 마음속으로 사방사유와 위아래의 모든 방향을 향해

서, 한량없는 慈心을 가득 채우고 수행하는 방법은 바로 선정수행의

한 방법으로 응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정수행법으로 제시된 사

무량심은 「청정도론」89)에서 자세히 해설되고 있다.

89) Brahmavihāra-nidesso(Vism 295-326).「청정도론」에 보이는 자애수행법은 
    상좌불교의 자비관 참조.

 

혜학(慧學)과 자애수행의 관계를 정리해보자. 팔정도에서 혜학에 해

당하는 덕목으로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를 들 수 있다.90) 정견이란

사성제에 대한 이해를 말하고, 바른 사유[sammā saṃkappa, 正思]는 감

각적 욕망[kāma]을 버리는 원리(遠離, nekkhamma), 성냄을 버리는 불악

의(不惡意, avyāpāda), 남를 해치려는 마음을 버리는 불상해(不傷害,

avihiṃsā)를 의미한다. 불악의는 바로 자심을 의미하며, 불상해는 비심

을 의미하므로, 혜학에도 자비의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혜와 자비는 상보적이어서 한 쪽이

결여되면 다른 한 쪽도 결여된다고 볼 수 있는 경전이 있다.『상응부』의 

「念處相應」의 한 경전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90) Nyanatiloka,「붓다의 말씀」, 김재성 옮김, 3판(서울:「고요한소리」, 2006), 76쪽. 
    Gethin, The Buddhist Path to Awakening: A Study of the Bodhi-Pakkhiyā 
    Dhammā (Leiden: E. J. Brill, 1992), 194쪽에서는 증지부의 한 경전(AN ii, 76)을 
    인용하면서, 正思는 正見의 보조적인 덕목으로 해석하고 있다. 증지부에서 번뇌의 
    소멸[漏盡]을 위한 네 가지 법으로, 正見(sammā-diṭṭhi)과 遠離(nekkhamma), 
    不惡意 (avyāpāda), 不傷害(avihiṃsā)의 네 가지를 들고 있으며, 正思는 바로 뒤의 
    세 가 지 덕목임을 알 수 있다.

 

자기를 보호할 때, 남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보호할 때,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는 것인가? 많은 수행을 함을

통해서이다. 그러면 어떻게 남을 보호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인가? 인내와

해치려는 마음이 없음(不傷害)과 남의 행복을 바라는 자심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민의 마음를 통해서이다.91)

91) SN v, 169.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혜학으로서 염처수행을 설하면서, 남을 지

키는 방법으로는 자비의 실천을 설하는 이 경전을 통해서 초기불교

수행법에서 지혜와 자비의 상보적인 관계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

다.

 

다음은 성자(聖者)와 자비의 실천에 대해 살펴본다. 붓다는 많은 사

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45년간 법을 폈다. 5비구와 야사의 친구

들로 이루어진 60명의 아라한 제자들에게 선포한 전도의 선언도 세상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법을 설하라는 말씀이었다92). 지혜의

완성에 의해 모든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이 해야 할 일은 바로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자비의 실천이었음을 우리는 전도의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다.

92) 『율장』 대품, Vin i, 21. 

 

앞서 언급한 숫타니파타 (Suttanipāta)와 소송경 (Khuddaka-pāṭha)에

수록되어 있는 慈經 (Mettā Sutta)은 바로 ‘평온의 경지를 깨닫고 나서

(yan taṃ santaṃ padaṃ abhisamecca)’ 행해야 하는 자비행을 설한 경전

이다. 이 경전은 지혜에 의해 자신의 평안 즉 열반에 이른 이는 어머

니가 아들을 돌보듯이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을 자비로서 돌보라는

가르침이다. 아라한의 자비행은 바로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회

향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애수행을 하면 11가지 유익함을 얻게 된다.93)
93) AN v, 342.02-11(Patis ii, 130 = Vism 305-6).

비구들이여, 자애심으로 마음의 해탈이 훈련되고 개발되고 숙달되고 탈 것이 되
고 기초가 되고 확고해지고 견고해지면, 11가지 유익함이 기대된다. 무엇이 11가
지인가? 1. 잠을 편안하게 자고, 2. 편안하게 깨어있고, 3. 악몽을 꾸지 않고, 4.
인간에게 사랑받고, 5.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서도 사랑받고, 6. 천신들이 보호
하고, 7. 불, 독약, 무기로 해침을 받지 않고, 8. 마음이 쉽게 집중되고, 9. 얼굴빛
이 밝고, 10. 혼란 없이 죽고, 11. 출세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범천에 태어난
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의 자애수행은 삼학으로 대표되는 실천체계에
서 시종일관 동반되는 중요한 수행임을 알 수 있었고, 수행의 완성을
이룬 성인들에게도 여전히 강조된 실천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
혜에 의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자비행은 바로 지혜를 나
누는 실천임을 붓다의 삶과 아라한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불교에
서 말하는 궁극적인 행복이란 괴로움이 소멸한 열반이며, 이 열반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의 실천이므로 깨달음
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깨달음을 이룬 후에도 자비행은 초기불교에서
중요한 실천법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3. 인연관에 대한 초기불전의 용례
초기경전에서는 ‘인연관’ 또는 ‘연기관’이라는 용어는 찾아볼 수 없
으나 ‘연기를 본다.’ ‘연기와 연이생법(緣已生法)이 바른 지혜에 의해
서 잘 체험되었다.’ ‘연기에 대해서 이치에 맞게 사유한다.’라는 표현
에서 ‘연기관’은 연기에 대한 체험적 이해 또는 이치에 맞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연기에 대한 체험적 이해에서 빠질 수 없는 두 가지
문구가 있다. 하나는 이른바 초전법륜 을 듣고 콘단냐의 법의 눈
(dhammacakkhu)이 열렸음을 말해주는 게송이다. 법의 눈이 열린 내용
을 경전은 간단하게 ‘생겨나는 성질을 지닌 어느 것이든, 그 모든 것
은 소멸하는 속성을 지닌다.’94)라고 전하고 있다. 이른바 조건에 의한
발생과 소멸을 말하는 연기의 이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법의 눈
이 열리는 이 체험에 의해서 콘단냐는 첫 번째 성인인 소타판나(수타
원, 예류)가 된다. 다른 하나는 사리풋타 존자가 붓다의 제자가 되기
전, 붓다의 최초의 제자인 5비구 가운데 한 명인 아싸지(馬勝) 비구를
만나서 누구를 스승으로 해서 누구의 법을 즐기고 있는가라고 묻자
대답으로 들은 시였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여래께서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것들의 소멸에 대해서 말하셨나니, 이것
이 대사문의 가르침이네.’95) 이 시를 듣고 사리풋타는 그 자리에서 법
의 눈이 맑아져 소타판나가 되었다. 두 번 째 게송은 이른바 연기법송
(緣起法頌)96)이라고 한다. 콘단냐 존자와 사리풋타 존자의 깨달음은
연기에 대한 체험적 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인연관 또는
연기관은 후대 아비달마에서 말하는 예류(預流)의 깨달음을 말하는
견도(見道)와 직결되는 수행법이라고 볼 수 있다.
94) SN v, 423.15-16,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 taṃ nirodhadhamman.”
95) Vin i, 40-41,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m vādi mahā samano”; 「四分律」(「대정장」22, 798c21-23), “如來
    說因 緣生法 亦說因緣滅法 若法所因生 如來說是因 若法所因滅 大沙門亦說此義 此是我師說.”
96) 연기법송이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된 예는 義淨(635-713)의「南海寄歸內法傳」이다.
   「대정장」54, 226.c20-21, “緣起法頌. 其頌曰, 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 因緣盡 是大
    沙門說.”

연기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전은 붓다의 성도 후 1주일이 지난
후의 연기에 대한 사유를 전하는 기쁨에 찬 말씀 (우다나) 첫 번 장
인 깨달음의 장 (bodhivagga)의 처음의 세 게송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깨달음을 얻은 후, 7일간 해탈의 즐거움(vimuttisukha)을 경험한
후, 선정(samādhi)에서 나와서 초야(初夜)에 연기(paṭiccasamuppāda)를
순서대로(anulomam) 훌륭하게 이치에 맞게 사유하였다(sādhukaṃ
yoniso manasākāsi).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의 발생으로부
터 저것이 발생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어리석음(無明)을 조건으로
지음(行)이 있다. 지음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다. 식을 조건으로 정신
과 물질(名色)이 있다.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관(六入)이 있
다. 여섯 감관을 조건으로 접촉(觸)이 있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
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망(愛)이 있다. 갈망을 조건으로 집착(取)
이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
(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老死), 슬픔과 비탄, 육체
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번민이 있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발생이 있
다.’97) 세존은 이 의미를 알고 나서 감흥의 시를 읊었다.
97) Ud 1.12-20. 

 

<初夜의 게>
진실로 열심히 선정을 닦는 바라문에게 법(dhammā 諸法)이 분명히 드러났을 때,
그의 모든 의심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는 원인 있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98)
98) Ud 1.22-23.

 

중야가 되자 붓다는 연기를 역으로(paṭiloma) 이치에 맞게 사유하였
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의 소멸로부터 저것의 소멸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어리석음(無明)의 소멸로부터 조건으로 지
음(行)의 소멸이 있다. 지음의 소멸로부터 식(識)의 소멸이 있다. 식의
소멸로부터 정신과 물질(名色)의 소멸이 있다. 정신과 물질의 소멸로
부터 여섯 감관(六入)의 소멸이 있다. 여섯 감관의 소멸로부터 접촉
(觸)의 소멸이 있다. 접촉의 소멸로부터 느낌(受)의 소멸이 있다. 느낌
의 소멸로부터 갈망(愛)의 소멸이 있다. 갈망의 소멸로부터 집착(取)의
소멸이 있다. 집착의 소멸로부터 존재(有)의 소멸이 있다. 존재의 소멸
로부터 태어남(生)의 소멸이 있다. 태어남의 소멸로부터 늙음과 죽음
(老死), 슬픔과 비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번민의 소멸이 있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中夜의 게>

진실로 열심히 선정을 닦는 바라문에게 법(dhammā 諸法)이 분명히 들어났을 때,

그의 모든 의심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는 조건의 소멸을 알았기 때문이다.99)

99) Ud 2.18-20.

 

후야가 되자 붓다는 연기를 순서대로, 역으로, 이치에 맞게 사유하

였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 이와 같이 괴로움의 발생이 있

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 이와 같이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後夜의 게>

진실로 열심히 선정을 닦는 바라문에게 법(dhammā 諸法)이 분명히 들어났을 때,

그는 악마의 군대를 깨트리며 머물렀다. 마치 허공을 비추고 있는 태양처럼.100)

100) Ud 3.3-5

 

초야의 게에서 원인 있는 법은 바로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법101)이

며, 이것은 바로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법(paṭiccasamuppannā dhammā

緣已生法)이며, 유의법(saṅkhatā dhammā)이다. 이처럼 복수 형태로 사

용된 법dhammā은 기본적으로 유의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102) 특히

위의 게송 앞부분에 나오는 법은 12지연기의 각지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12지 각지가 바로 원인 있는 법들이기 때문이

다.103)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이치에 맞는 사유를 통해 확인한 진

리는 12지연기이며, 이것이 바로 초기경전에 보이는 연기관의 내용이

다. 다마키 고시로 박사는 연기를 순서대로, 역으로, 이치에 맞게 사

유한다는 이 경전은 연기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104). 붓다의

깨달음의 체험 직후의 이러한 사유에서 연기관의 원형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의 체험과 관련해서 볼 때, 초기불교의 연

기관은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초보단계의 수행법이라고 보

기 어렵다.105)

101) AN iii, 440.16, 441.17, 444.11, “hetusamuppannā dhammā.” 
102) 복수 형태로 사용된 dhammā가 유의법은 물론 무위법(無爲法)인 열반까지 포함하고 
     있는 예도 있다. 그것은「염처경」(MN i, 62)이나「대념처경」(DN ii, 310)에서 제시된 
     법념처의 5 범주(① 다섯 가지 덮개[五蓋: 욕망,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우울, 회의
     적 의심], ② 五蘊[色受想行識], ③ 十二處[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 觸法], ④ 七覺支
    [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捨], ⑤ 四聖諦[苦集滅道]) 가운데 마지막 사성제의 멸성
     제를 말할 때이다
103) 12지연기에서 첫 번째 나오는 어리석음(無明)의 원인은 제시되지 않았지만, 다른 경전에 
    의하면 어리석음은 번뇌(āsava, 漏)를 조건으로 하여 생겨난다(MN i, 54.27, “āsavasamu
    -dayā avijjāsamudayo”). 무명도 원인 있는 법이다. 번뇌(āsava, 漏)에는 기본적으로 3가
    지(감각적 쾌락의 번뇌[kāma-āsava, 欲漏], 존재의 번뇌[bhava-āsava, 有漏], 어리석음
    의 번뇌[avijjā-āsava, 無明漏])가 있다(MN i, 7.27-29, 55.10; DN iii, 216.9; SN iv, 256.
    4). 그 외 여러 가지 āsava에 대해서는 CPD II 239쪽 이하 참조. 
104) 玉城康四郎,「縁起の真意―原型への復帰」,「印度学仏教学研究」83(42-1)(東京: 印度
    学仏教学會, 1983), 210쪽. 
105) 아난 존자가 연기의 이치가 깊으며 자신에게 분명하게 파악되었다고 하자 붓다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제지하며, 이 법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들은 괴로움의 윤회를 벗어나
    지 못한다고 한 경전을 보더라도 연기는 쉽사리 파악되는 진리가 아 니다(DN ii, 55.8-18).

 

4. 계분별관에 대한 초기불전의 용례106)

106) 초기불교 및 부파불교의 계분별관에 대한 연구는 김재성, 「界差別について-南北
      両阿毘達磨の修行道における位置づけ-」, 韓國佛敎學 SEMINAR 7(東京, 韓 國留
     學生印度學佛教學會, 1998) 참조.

 

수행도로서 계분별관 또는 界差別 은, 팔리경전에서는 주로 사

념처 가운데 身念処의 한 항목인 四界差別 로 다음과 같이 설해진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름 아닌 이 신체를 있는 그대로, 놓여진 그대로, 요소

(界)로서 관찰한다. 이 신체에는 地의 요소(地界), 水의 요소(水界), 火의 요소(火

界), 風의 요소(風界)가 존재한다고.107)

107) 「大念処経」(DN ii, 294) = 念処経 (MN i, 57) =「身念経」(MN iii, 91).

 

이처럼 신체를 4요소로 관찰하는 수행도를 四界差別 (catudhātuvavatthāna)이라고

이름한 것은 팔리문헌에서는 清浄道論 등의 주석문헌에서이다. 그리고「清浄道論」에서는 

界作意(dhātumanasikāra), 界業処(dhātukammaṭṭhāna), 四界差別(catudhātuvavatthāna)은 

같은 의미이며,108) 界分別(dhātuppabheda)이라고도 한다.109)

108) Vism 347, “dhātumanasikāro dhātukammaṭṭhānaṃ catudhātuvavatthānan ti 
     atthato ekaṃ.” 
109) Vism 352.

 

四界差別 을 설한 3경전은 長部의「大念処経」, 中部의「念処経」,「身

念経」이고, 3경전 모두 身念処의 하나로 제시되어 있다.

 

「清浄道論」에서는, 禅定 수행의 40 주제(kammaṭṭhāna)의 하나로「四
界差別」을 자세히 해설하고 있는데, 먼저 身念処의 하나로 간략하게
「四界差別을 説明한 후, 『象跡喩大経(Mahāhatthipadūpama-sutta)』 (MN i,
184쪽 이하), 『教誡라훌라大経(Mahārāhurovāda-sutta)』 (MN i, 421쪽 이
하), 『界分別経(Dhātuvibhṅga-sutta)』 (MN iii, 237쪽 이하)을 인용하면서
자세하게 「四界差別」을 분석하고 있다.110)이 3 경전의 「四界差別」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머리카락(髪, kesā)․체모(毛, lomā)․손발톱(爪
nakhā)․이(歯, dantā) 등의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을 地界․水界․火
界․風界에 배당하면서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110) Vism 347-370.「清浄道論 」의 「四界差別修習」은「解脱道論」의「観四大」 
     (『대정장』 32, 438b-440b)에 해당한다.「解脱道論」에서는「清浄道論」보다 
     簡略하게 설 명되어 있다. 두 문헌에 대한 상세한 비교연구는 Bapat, Vimuttimagga 
     and Visuddhimagga: A Comparative Study (Poona: P. V. Bapat, 1937), 82-84쪽 
     참조.

 

『中阿含経』을 위시로 한 「界差別」
설일체유부 전승의 『中阿含経』의「身念経」111)과 「念処経」112)에는 지
수화풍 四界에 空界와 識界가 더해져, 六界가 제시되어 있다.113)
111) 『中阿含経』 卷第二十, No. 80(『대정장』1, 554c-557c). 특히, 観身諸界에 該当
     하는 대목인 556a26-27에 “復次比丘修習念身. 比丘者, 観身諸界. 此身中有地界水 
     界火界風界空界識界”라고 제시되어 있다. 
112) 『中阿含経』 卷第二十四, No. 98(『대정장』1, 582b-584b). 특히 583b17-19에 
     “復 次比丘観身如身. 比丘者, 観身諸界. 我此身中有地界水界火界風界空界識界”로 
     제시되어 있다. 
113) 팔리「念処経」과 한역『中阿含経』 의「念処経」의 比較研究는 田中教照, 初期 
     仏教の修行道論 (東京: 山喜房仏書林, 1993), 150-168쪽 参照. 재미있는 것은 所
      属部派가 명확하지 않은 『増一阿含経』에서는 四界를 설하고 있다. 『대정장』2, 
     568a23-29, “復次比丘, 還観此身有地種耶, 水火風種耶. 如是比丘, 観此身. 復次 
     比丘, 観此身分別諸界. 此身有四種... 有地水火風種.” 榎本文雄,「阿含経典の成 立」, 
    「東洋学術研究」 23/1(東京: 東洋哲学研究所, 1984), 102쪽; 水野弘元, 「仏教文
     献研究」, 水野弘元著作選集 第一巻(東京: 春秋社, 1996), 457-9쪽.

 

유부의 아비달마에서 身念処 가운데 界差別 (界方便)의 界 가 모
두 六界를 의미하게 된 것은 中阿含経 의 영향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이다. 예컨데, 유부 아비달마에서 신념처의 계차별을 설명하고 있는
阿毘達磨法蘊足論 은 다음과 같다.

"復次比丘.於此内身, 観察思惟諸界差別.謂此身中, 唯有種種地界水界火界風界
空界識界.如是思惟諸界相時, 所起於法簡択乃至毘鉢舍那, 是循内身観, 亦名身念
住"(『대정장』26, 476a28-b3)

 

「雑阿毘曇心論」에도「不淨観」「 安般念」과 함께 三度門의 하나로 제
시되어 있는「界方便観」은 六界에 대한 관찰이다.114)
114)『대정장』28, 908b10-11, “能於自身界方便. 観此身種種自性種種業種種相, 謂地 
     等六界.”

 

四界의 意味

수행도로서 四界差別 에서 四界의 의미는 팔리문헌과 有部의 아함

경이나 론서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地界는 堅性・固

性, 水界는 結著性・流動性, 火界는 遍熟性・熱煖性, 風界는 支持性・浮

動性이다.115)

115) Vism 351-2. 「大毘婆沙論」 巻第七十五(『대정장』27, 387c-388b), “地界云何. 
     答 堅性... 水界云何. 答濕性...火界云何. 答煖性...風界云何. 答輕等動性.”

 

수행도에서 「界差別」의 위치

初期経典의 界差別

界差別 이라는 수행도는 초기경전에서 사념처 가운데 신념처의 하

나로( 大念処経 等), 또는 五蘊(五取蘊)의 色蘊(色取蘊)으로서 사대에

대한 분석으로( 象跡喩大経 , 象跡喩経 , 대정장 1, 464b-467a), 또는

六界(地水火風空識)로서( 界分別経 , 六浄経 , MN iii, 30-37, 특히 32)

설하였다.

 

초기경전의 界差別 이라는 수행도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

(心一境性)하는 선정의 측면보다는, 四大(四界)는 無常, 無我이며, 滅尽

의 성질을 가진 것(khayadhammatā), 壊滅의 성질을 가진 것(vayadhammatā),

変異의 성질을 가진 것(vipariṇāmadhammatā)이라는 것116)등을 아는 지혜의 

측면이 중점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지혜의 측면에서 본다면, 

漢訳阿含과 팔리니까야에 보이는 四界差別 은 観(vipassanā) 修行으로 位置지을 

수 있을 것이다.

116) MN i, 185ff.; MN iii, 32, 240.『대정장』1, 464c27-29, “色法...是破壊法是滅尽法 
     離散之法.” 초기경전에서 五取蘊의 無常, 苦, 無我 等을 설한 経典에 관해서는 森章司, 
    「原始仏教から阿毘達磨への仏教教理の研究」 (東京: 東京堂出版, 1995), 281쪽 이하 
     참조.

 

이상의 고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초기경전에서 界差別은 観(vipassanā) 修行으로 位置지을 수

있다.

 

「清浄道論」을 위시로 한 남방상좌불교의 아비달마 및 주석에서는

観의 측면과 観의 근거가 되는 近行定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位置지을

수 있다. 따라서 純観行者는 四界差別 을 통해서 혜해탈자가 된다.

有部의 아비달마에서는 大毘婆沙論 , 雑阿毘曇心論 을 중심으로

四念住의 예비적 수행(加行)으로서, 不浄観, 持息観과 함께 三方便門으

로 자리 잡게 된다.

 

5. 안나반나관에 대한 초기불전의 용례

초기불교의 입출식념117)

117)「입출식념경」과「청정도론」의 입출식념에 대해서는 대림 스님, 「들숨날숨에 
     마음 챙기는 공부」(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3); 일중 스님,「입출식념경에 나
     타난 초기 불교의 호흡관 수행법」,「한국불교학결집대회논집」 제2집 제2권
     (2004), 1088-1099 쪽; 김재성,「입출식념경 에 나타난 수행법」,「입출식념경의 
     수행이론과 실제」(서울: 홍원사, 2005), 63-86쪽 참조.

 

초기경전에 나타난 입출식념은 여러 곳에서 설해지지만,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이른바 염처계 경전118)이다. 그 가운데『대념처경』에서는

신념처의 첫 항목으로 제시되며, 入出息念經 (MN iii, 78-88)과 「身念

經」(MN iii, 88-99) 등에서 구체적인 수행법을 찾아 볼 수 있다.

118) 염처계경에는 四念處를 전체적으로 해설하고 있는『장부』의 「大念處經」
     (DN ii, 290-313),『중부』 의「念處經」(MN i, 55-63), 『中部』 118경인
    「입출식념경」(MN iii, 78-88)과 119경인「身念經」(MN iii, 88-99), 그리고
    『相應部』 대품의「念處相應」(SN v, 141-192) 등이 있다. 김재성「염처경
     (念處經)에 나타난 수행법」,「한국불교학결 집대회논집」 제1집 하권(2002), 
     91-100쪽 참조.

 

「入出息念經」은 신념처 수행의 처음에 제시되는 호흡에 대한 관찰

부분만을 설한 경전인데, 수행의 단계가 입출식념 → 사념처 → 칠각

지 → 명(明, vijja)․해탈(解脫, vimutti)로 제시되어 있다.「염처경」에서

는 단순히 호흡에 대한 관찰119)만이 제시되어 있는데, 「입출식념경」

에서는 호흡에 대한 관찰이 16 단계로 나뉘어져서 각 4 단계마다, 신

수심법의 사념처를 순서로 적용시키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9) DN ii, 291 = MN i, 56.

 

신념처: (1) 긴 날숨과 들숨에 대한 관찰. (2) 짧은 날숨과 들숨에 대한 관찰, (3)

전신(全身)을 감지하면서(paṭisaṃvedī) 호흡, (4) [호흡이라는] 몸의 작용(身行)을

가라앉히면서(passambhayam cittasaṅkhāraṃ) 호흡.

 

수념처: (1)기쁨(喜, pīti)을 감지하면서 호흡, (2) 행복(樂, sukha)을 감지하면서 호

흡, (3) (느낌이라는) 마음의 작용(心行, cittasaṅkhāra)을 감지하면서 호흡, (4) (느

낌이라는) 마음의 작용(心行)을 가라앉히면서 호흡.

 

심념처: (1) 마음(citta)을 감지하면서 호흡, (2)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abhippampdayaṃ

cittaṃ) 호흡, (3) 마음을 집중하면서(samādahaṃ cittaṃ) 호흡, (4)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vimocayaṃ cittaṃ) 호흡.

 

법념처: (1) 무상(無常, anicca)을 반복해서 관찰하면서(anupassī) 호흡, (2) 이탐(離

貪, virāga)을 반복해서 관찰하면서 호흡, (3) 멸진(滅盡, nirodha)을 반복해서 관찰

하면서 호흡, (4) 버림(捨, paṭinissagga)을 반복해서 관찰하면서 호흡.

 

이처럼 호흡을 하면서 사념처로 진행되는 수행법은「입출식념경」

에서만 제시되고 있는 수행법이다. 호흡에 대한 관찰을 통해 사념처

로 이어지고 사념처의 각 염처 수행은 다시 각각 칠각지로 이어진다

(MN iii 85-88). 마지막으로 칠각지를 수행하여 지혜(明)와 해탈(解脫)

또는 지혜에 의한 해탈을 완성한다. 이처럼 「입출식념경」에 제시된

수행의 목적은 지혜(明)와 해탈임을 알 수 있다.

 

『중부』의「신념경(身念經)」은「대념처경」의 몸에 대한 마음챙김

부분만이 제시되어 있는 독립된 경전이지만, 몸에 대한 마음챙김 수

행이 선정(禪定) 수행으로 이어지는 면이 중심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기본적인 내용은 염처경의 신념처에 해당하는 부분과 동일하지만 각

수행법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이렇게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노력하며 지내는 그에게, 재가(在家)의 기

억과 생각(sarasaṅkappa)이 끊어져 버린다. 이것들이 끊어짐으로써 안으로 마음이

잘 머물고 가라앉으며, 한곳에 집중되고 안정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신념(身念)을 닦는다.120)

120) MN iii, 89.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고 안정된다는 말은 곳 초선을 이룬다는 의

미이다. 초선을 이룬 후 신념경은 계속해서 제 2선, 제 3선, 제 4선을

이루고, 마지막 번뇌가 다한 누진통(漏盡通)을 포함한 여섯 가지 신통

(abhiññā)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신념경 에서는 신념으로 사

선을 이루고 사선으로 6신통을 이루는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신

념경 의 체계에 따르면 입출식념 수행의 결과 4선을 이루게 되고, 4선

을 이룬 뒤에 여섯 가지 신통을 얻어 아라한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

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입출식념으로 네 가지 선정121)을 이
루었고, 이 선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전생을 아는 숙명지(宿命智), 다른
중생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사생지(死生智), 그리고 네 가지 고귀
한 진리(사성제)를 체득함에 의해서 모든 번뇌를 끊어버린 누진지(漏
盡智)를 얻어 붓다가 되었다.122) 한 경전에 의하면 붓다가 완전한 깨
달음을 이루기 전 보살이었을 때, 열심히 닦고 익혔던 수행법은 입출
식념(ānāpānasati)이었고 바로 이 수행법을 통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
했다123)고 한다. 붓다는 깨달은 이후에도 입출식념에 의한 마음집중
(ānāpānasatisamādhi)에 머물렀다. 입출식념에 의한 마음집중은 성인이
머무는 곳 (ariyavihāro)이고 브라마가 머무는 곳(brahmavihāro)이며, 여
래가 머무는 곳(tathagātavihāro)이 되며, 모든 번뇌의 소멸을 이루고
(āsavānaṃ khayāya saṃvattati), 바로 이생에 행복하게 머물게 된다
(diṭṭheva dhamme sukhavihārāya ceva saṃvattati)124). 이렇게 붓다는 깨닫
기 이전부터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룰 때는 수행의 방법으로,
그리고 깨달은 이후에는 이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으로 입출식념
에 의한 마음집중에 들었다는 것을 볼때, 입출식념은 붓다의 기본적
인 수행법이자 머무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125)
121)「사차카경」의 주석서(MN-a ii, 291)에 의하면, 태자시절에 농경제에서 경험한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인 입출식념 ānāpānasati에 의해서 얻은 초선을 바탕으로
     해서 사선(四禪)을 이루었다
122) MN i, 247-249. 
123) SN v, 317.7-11. 
124) SN v, 326.13-25. 
125) 일중스님은「입출식념경에 나타난 초기불교의 호흡관 수행법」에서 붓다는 ‘깨달은 
     이후에도 늘 이 호흡관 수행을 하셨음’이라고 하였는데, 깨달은 이후에는 수행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입출식념에 의한 선정을 즐기셨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아라한
     이나 붓다는 더 이상 수행을 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선정의 상태를 즐겼을 뿐이
     었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입출식념을 붓다가 중시했음은 물론 제자들에게 부작용이
적은 수행법으로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126). 입출식념경 에 제시
된 입출식념은 사념처와 칠각지로 이어져 궁극적으로는 지혜와 해탈
을 이루는 입문적 수행법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
전에서 우리는 사념처의 전 과정에 입출식념 수행이 동반되어 있기
때문에 수행의 도입부분뿐만 아니라 수행이 제자리를 잡고 나서도 계
속해서 입출식념을 닦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출식념을 통해 4선을 이
룰 경우에는 선정 수행의 기본 방법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4선을 이루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입출식념은 4선을 이룬
후에 지혜가 열리는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기반이 되는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126)『율장』에 의하면, 부정관의 부작용으로 수행승들이 자신의 육체를 혐오해서 서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는 부작용이 일어나자 붓다는 입출식념에 의한 마음집중 
     (ānāpānasatisamādhi)를 닦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Vin iii, 68-71).

 

V. 맺는 말

오정심관이라는 다섯 가지 수행법은 중국불교 전통에서 다섯 가지
번뇌를 다스리는 기초적인 수행법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특히
구사론 주석가들과 종파불교의 저술에 반영된 오정심관은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는 준비단계의 수행법으로 간주되었다. 인도불교의 유
부의 교학이나 유식학의 전통에서도 이러한 입장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 전통에서 고찰해본 오정심관의 각 수행법은 준비
단계의 수행만이 아니라 수행의 향상에 따라 함께 깊어지는 수행법으
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문지」등에서 일반적으로 부정관으로 탐심을, 자비관으로 분노
를, 인연관으로 어리석음을, 계차별관으로 아만을, 안나반나관으로 분
별을 다스린다고 한다. 하지만 각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대치되는 번뇌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더 깊은 깨달음의 체험으로 이
어지는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인연관과 계차별관은 그대로 성
인의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수행법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안나반나관
도 지혜와 해탈에 이르는 전 과정의 바탕이 되는 수행법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정심관으로 정리된 수행법을 인도초기불교의 전
통에서부터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불교 수행의 다양성을 풍요롭게 하
는 첫 걸음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