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불교 문헌에서 자비의 문제/윤영해

실론섬 2016. 7. 29. 14:54

초기불교 문헌에서 자비의 문제

-그 실천 이유와 근거-

윤 영 해/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과 교수

 

Ⅰ. 머리 말

Ⅱ. 열반으로 가는 수단

Ⅲ. 자신에게 비춘 타자

Ⅳ. 증오의 해독제

Ⅴ. 맺는 말

 

[요약문]

자비의 실천은 불교에서 더없이 강조되는 덕목이다. 이 논문은 자비실천의 

이유에 대한 논구이다. 이유가 분명할수록 실천의 요청에 대한 설득력은

강할 것이다.

 

초기불교 문헌에서 나타나는 자비실천의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이유는 그것이 열반으로 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 자비의

실천은 이타적 실천이 아니라 자리적 실천으로 설정된다. 지혜를 먼저 성취

한 다음에 자비의 실천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함양해야만 지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타자를 자신에게 비추고 자신을 

타자에게 비추어 본다면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보고 남을 이해하고 남을 보고 자신을 이해한다.

만일 우리가 남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기만한다면 누구나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성냄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탐진치의 극복이 필수인 바, 탐욕은 베풂, 어리석음은 

지혜, 성냄은 자비로써 극복한다. 자비는 성냄이라는 독약을 위한 유일한 

해독제이기 때문이다.

 

자비의 실천은 대승불교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그릇된 통념이다. 자비는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야 실천한다는 생각도 역시 통념에 불과하다. 다만 

기불교에서의 자비행은 타자를 위한 실천만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자신을 

한 실천일 뿐이다.

 

Ⅰ. 머리말

 

불교는 자비의 실천을 강력히 권고한다. 타자를 향한 헌신의 강조는 어짊, 

사랑, 평등 등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타자에의 헌신을 실천해야만 하는 이유는 각 종교마다 다르게

설명한다. 또한 아무리 타자에의 헌신을 권고하거나 명령한다 해도 그것을 

실천할 가능성으로서의 근거가 없다면 실천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타자에의 헌신을 위한 이유는 그 실천의 촉발과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유와 근거가 확실할수록 촉발과 성공의 가능성은 높아지고, 그것이 

부실할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타자에의 헌신에 있어 성패의 

관건은 창시자나 지도자들의 권고나 명령의 강도가 아니라, 그 실천을 

위한 이유와 근거가 확보하는 설득력일 것이다.

 

붓다가 자비를 실천하러 나서게 된 동기나 이유는 무엇인가? 梵天의

勸請을 동기로 본다면 너무 피상적이고 소박한 판단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 레토릭(rhetoric)으로 읽혀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이해는

붓다 자신의 자비실천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강력히 권고하는 이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논문은 자비실천의 이유와 근거에 대한 논구이다. 자비행의 이유는 

‘불자들은 왜 자비를 실천해야만 하는가, 왜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대답이며, 불자들은 ‘어떻게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가, 

무엇이 불자들로 하여금 자비를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가?’하는 자비실천의 

동력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다. 이는 불교가 역사적으로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해왔는가 아닌가의 문제와 별개로 불교를 자비의 종교1)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필요한 이론적 논리와 근거를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 中村 元(1961) pp.10-19. 일반적으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 즉 지혜의 종교라고 하지만, 
   나까무라 하지메는 불교의 종교로서의 특징을 자비에서 찾는다.

 

자비의 실천은 대승불교 신행의 중심주제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논구의 

범위를 초기불교의 문헌으로 한정하려고 한다. 상대적으로 자비의 실천에 

소극적이었다고 간주되어 온 초기불교의 문헌인 니까야(Nikāya)나 

아함(Āgama)에서 그 이유와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이미 자비가 중심 

주제가 된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보다 훨씬 더 큰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의 문헌에서 자비라는 주제, 특히 그 이유와 근거라는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문헌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논자의 주장을 위한

恣意的 수집이라는 비판의 위험을 무릅쓰고, 논지에 맞는 자료들을 

까야와 아함에서 섭렵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자비실천의 이유나 근거에

대한 기성연구는 찾지 못하였으며, 자비 일반에 관한 자료와 이해는 

기불교의 연구자들인 리챠드 곰브리치(Richard F. Gombrich)2), 

타찌바나(Shundo Tachibana)3), 길희성4), 이필원5) 이자랑6) 김재성7) 

등의 연구에 의존하였다.

2) Gombrich(2005), pp.136-153. 곰브리치는 이 논문에서 ‘깨달음이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는 2000년 넘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견해에 매우 급진적인 반론을 
   제기하며, 慈와 悲 역시 열반에 이르는 수단으로 이해한다.
3) Tachibana(1994).
4) 길희성(1994) pp.121-153.
5) 이필원(2010) pp.9-38. 그에 의하면, 자비(mettā-karuṇkā)라는 단어는 불교 초기에는 
   없던 말이며 심지어 사무량심 중에서 慈를 제외한 悲‧喜‧捨도 후대에 부가되어 네 가지 
   항목으로 정형화된 것이다. 그는 Dhammapada에서는 mettā가 단 한 번만 언급되며, 
   Sutta Nipada의 Metta Sutta에서도 metta만 언급될 뿐, Karuṇrā, Muditā, Upekkhād는 
   언급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pp.17-18 참조.
6) 이자랑(2011) pp.253-282.
7) 김재성(2010) pp.19-46. 이 논문은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분노의 발생 원인을 찾고 그 
   치유 방법을 자애의 수행에서 찾는다.

 

만일 자비의 이유와 근거에 대한 논거들을 확보한다면, 불교의 자비

실천에 대한 요청이 더욱 설득력을 확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작업은 이 논문의 이러한 주목적 외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자비실천에 대한 이유와 근거가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라는 비교연구를 

위한 하나의 자료로서도 기능하게 될 것이다.

 

Ⅱ. 열반으로 가는 수단

 

불자라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을 고통의 굴레로 인식하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신의 해탈을 추구해야 한다. 자신의 해탈을 

해서는 열반이 필요하고 열반을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깨달음의

성취를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한데 초기불교에서 자비의 실천은 열반을

위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그러니까 자비의 실천은 남을 위한

실천이기 전에 먼저 자신의 해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요 수단

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300가마솥의 밥을 중생에게 보시하고 점심과 저녁에도 

그렇게 했다. [반면] 다른 사람은 소젖을 짜는 만큼의 잠깐 동안이나마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자애로운 마음을 닦아 익혔다. 그렇다면 앞 사람의 

보시공덕은 [자애심을 닦은] 그 공덕의 백 분, 천 분, 수억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요, …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잠깐 동안이라도 모든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이다.8)

8) 雜阿含經(T.2) p.344b-c.

 

300가마의 밥을 중생에게 보시함은 몸으로 하는 실천이다. 여기서 붓다는 

몸의 실천보다 마음의 수행을 더욱 중요시하여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마음의 수행은 보시처럼 남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몸의 실천에 

비해 상대를 설정하는 의미가 약하다. 자애심의 수행은 몸의 실천처럼 

반드시 남이 구체적으로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과의 

구체적인 관련과 상관없이도 그저 자신의 마음 속에 자애심을 품을 수 

있다. 남과의 구체적 상관없이도 자애심을 품음은 자신을 위한 수행, 

즉 열반을 위한 수행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애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반드시 남을 위한 실천이라는 고정관념이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자료 중에는 이런 고정관념에 반하는 기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초기불교에서 자애의 수행은 慈 ‧ 悲 ‧ 喜 ‧ 捨의 四無量心9)의 실천

덕목 중 하나로 제시되는 바, 사무량심은 자신을 위한 수행, 열반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수행임을 알 수 있다.

9) 안옥선은 초기불교에서 자애의 수행을 포함하고 있는 사무량심에 대해 매우 명쾌하게 
   번역하고 정의 내린다. 그는 사무량심을 자애(mettā, 慈, loving-kindness), 자비(karuṇā, 
   悲, compassion), 공감적 기쁨(muditā, 喜, empathetic/sympathetic joy), 평정(upekkhā, 
   捨, equanimity)으로 번역하고, ‘자애’는 모든 존재들을 이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려는 열망, 
   ‘자비’는 이롭지 않은 것과 고통으로부터 존재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열망, ‘기쁨’은 타인의 
   기쁨에 대해 같이 기뻐하며 타인의 행복에 대해 같이 행복해 하는 것, ‘평정’은 자신과 타
   인의 성쇠, 인생의 대소사,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동요되지 않는 고요한 마음으로 정의
   한다. 안옥선(2002) pp. 242-244. 그러나 karuṇā를ㅠ자비로 번역한다면, 지금까지 자
   (mettā)와 비(karuṇā)를 합쳐서 자비로 이해해 온 기성의 용법과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아난다여, 그대는 이 사무량심을 모든 나이 어린 비구들에게 설하고

가르치라. 만일 그리한다면 그들은 안온함을 얻고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10)

10) 中阿含經(T.1) p.563b.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자애의 수행이 다름 아닌 자신의 평온과 

행복을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자애심의 수행은 남의 평온이나 행복과 

상관없이 먼저 자신의 평온과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즉, 자애행은 

자신을 위한 수행이고 자신을 위한 수행이란 결국 지혜와 해탈의 성취가 

목적이다.

 

여기서 붓다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특히 어린 비구를 지목하여 가르치라 

부탁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아마도 사무량심의 수행이 

초심자에게 특히 필요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법하다. 불교의

수행 길에 들어선 사람이면 누구나 먼저 자와 비의 수행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심자와 관련한 자비수행에 관한 기사는 「淸淨道論」

서도 찾아볼 수 있다.

 

"慈愛를 닦고자 하는 수행자는 만일 그가 초심자라면 장애를 끊고 명상주제를 

배워 공양을 마친 뒤 식곤증을 떨쳐 버리고 한적한 곳에서 잘 마련된 자리에 

편안히 앉아 먼저 성냄의 위험과 인욕의 이익을 返照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수행으로 성냄을 버려야 하고 인욕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11)

11) 붓다고사(2004) pp.137-138.

 

붓다고사 역시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자애의 수행이 성냄을 이기고

인욕을 얻는 수행이라고 직설한다. 성냄은 생사윤회고(苦)의 원인인 

진치의 하나다. 탐진치의 극복은 바로 해탈을 의미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지혜의 힘으로 가능하다.

 

『잡아함경』에 따르면, 자애는 비구가 실천해야 할 수행의 한 단계로

설정된다. 비구는 初禪, 第二禪, 第三禪, 第四禪, 慈悲喜捨, 空入處, 

識入處, 無所有處, 非想非非想處의 순서로 수행을 해 나아가야 한다.12) 

즉, 色界 四禪을 수행한 다음에 無色定을 닦기 바로 전에 사무량심을 닦도록 

배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자비의 실천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12) 雜阿含經(T.2) p.209c.

 

서 있거나, 걷거나, 앉거나, 깨어 있는 한, 이 마음[자애심]을 굳게 지켜라. 

세상에서는 이 상태를 거룩한 삶이라고 부른다.13)

13) Sn 「Metta Sutta」 vs. 151.

 

이[자애]는 善에 대해 능숙한 이에 의해 평정의 상태를 얻기 위해 

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14)

14) Gombrich(2005) p.143에서 재인용.

 

초기불교의 자비에 대한 연구자들은 불교의 자비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향하고 자신을 위한 수행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저명한 초기불교 

연구자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곰브리치(Richard F. Gombrich)는 깨달음을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인정해 온 기성의 주장에 대한 급진적인 반론이 

될 이론을 제기한 바 있다.15) 그는 그간 당연시 되어 온 기성의 결론과 

달리 자애를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본다.16) 그는 『Sutta Nipata』의 

이 부분 이 ‘거룩한 삶’ 혹은 ‘범주(brahmam-etaṁ vihāraṁ; the Divine 

Living; 梵住)’를 다른 곳, 즉 떼비자 밧짜곳따 숫따(Tevijja Sutta)17)에 

대한 해석을 통해 열반이라고 확정하고, 결론적으로 자경(metta sutta)도 

열반을 목표로 삼는 자애수행의 강조라고 본다. 붓다가 범주라는 용어를 

썼지만 이는 붓다에게 물으러 온 두 사람이 바라문인 탓에 소위 방편을 

써서 그들에게 맞는 은유(metaphor)를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바라문의 

경지(梵住)’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는 ‘최고의 경지(summum bonum)’를 

지칭하는 것이고, 불교 수행자에게 있어 최고의 경지란 다름 아닌 열반이라는

것이다.18) 불교의 기성전통은 四無量心으로는 궁극적 경지인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고 보지만, 그는 자경 전체가 열반을 이미 ‘성취한’ 사람의 

실천덕목이 아니라 앞으로 열반을 성취할 사람의 수행덕목이며, 떼비자 

숫따의 ‘평정의 상태를 얻기 위해’ 역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9) 또한 사무량심이 성취하는 경지 역시 한계가 있는

(pamāṇa kataṃ; finite) 경지가 아니라 업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윤회의 

한계를 넘어서 다시는 환생하지 않는 경지이다. 해탈에는 심해탈(ceto-vimutti), 

혜해탈(paññā), 양분해탈(ubhatobhāga-vimutti)등 해탈의 경지에 대한 

다양한 수준이 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지만20), 곰브리치는 해탈이란 결국 

하나의 해탈, 즉 열반의 실현으로서의 해탈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21)

15) 그는 물론 자비만이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라는 주장은 아니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지혜와 함께 자비도 분명히 열반에 이르는 수단이며, 이점이 경전적 근거에 의한 사
    실일 경우 초기불교가 전통적 이해처럼 자기중심적 가르침이 아님이 분명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Gombrich(2005) pp. 136-137.
16) Gombrich의 이러한 파격적 주장에 대해 저명한 불교학자인 Bhikhu Bodhi는 Junal 
    of Buddhist Ethics(no.4, 1997)에서 그의 논문에 대한 Review를 통해 전통적 입장에 
    서서 즉각적인 비판을 제기했다.
17) DN의 71번째 경으로서 Paribbajaka vagga(普行者品)에 속해 있다. 漢譯 大藏經에서는 
   『三明經』이다. 梵天 혹은 梵住에 이르는 길에 대한 바라문들의 논란과 이에 대한 붓다
    의 답변을 내용으로 한다. 붓다는 여기서 사무량심을 중요한 수행으로 제시한다.
18) Gombrich(2005) p.146. 곰브리치는 이 대목에 대한 세 가지 해석 중에 열반으로 보는 
    견해를 주장한다.
19) Gombrich(2005) p.143.
20) 정준영(2006)은 「두 가지 해탈의 의미에 관한 고찰: 니까야를 중심으로」에서 해탈의 
    세 가지 경지와 그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종류 및 그들의 관계에서 조화가 중요함을 
    밝힌다.21) Gombrich(2005) p.147.

 

이필원에 의하면, 베터(Tilmann Vetter)가 ‘초기불교의 이상과 禪定的

실천’22)에서 사무량심이 禪定的인 특징을 갖는 수행법으로서 解脫道의

특징을 갖는 점을 잘 밝혔다고 평가한다. 베터은 사무량심이 원래는 불교의 

주류적 수행법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주도적 위치를 상실했다고 보며, 

특히 베터은 ‘나의 심해탈(내 마음의 해탈; me cetovimutti)을 붓다가 

처음 정각을 성취했을 때 표현했던 ‘나의 심 해탈은 부동이다.’와 비교

하면서 사무량심이 본래는 해탈을 성취케 하는 주요한 수행법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제시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23)

22) Vetter(1988).
23) 이필원(2010) p.14.

 

길희성 역시 불교의 慈心수행은 제일 먼저 자신을 위하고 자기를 향하는 

수행이라고 지적한다. 붓다는 자비의 실천은 자신을 위한 수행이고 그 

결과는 자신의 안락이라고 설파하고 제자들에게 자비의 실천을 권고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명상법은 사람을 네 부류로 구분해서 慈心을 점차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을 가르친다. 즉 자기 자신, 가족이나 친구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적대적이고 미워하는 사람들의 네

부류다. 그리고는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하여 慈心을 낼 것을 권한다.24)

24) 길희성(1994) pp.135-136.

 

그러니까 초기불교에서 자비의 실천은 타자를 위한 어떤 실천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수행이다. ‘자비심 배양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을 청정하게 

하는 데 있고, 심해탈을 이루는 데 있다. 마음의 온갖 불건전한

(akusala) 것들을 없애는 데 그 일차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심의 배양은 일체의 불건전한 심적 에너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수행이다.’25) 또한 ‘초기불교에서 나타난 자비의 개념은 구체적인 

자비행 혹은 타인을 향한 실천에 앞서서 자비의 성품, 성향, 혹은 심성을 

조한다.’26)

25) 안옥선(2003) pp.56-57.
26) 안옥선(2003) p.56.

 

초기불교에서 자비의 실천은 利他的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自利的인

차원이 먼저 강조되고 있다. 지혜를 먼저 성취한 다음에 자비의 실천으로 

나서는 것27)이 아니라, 자비를 함양해서 지혜의 길로 나아가게 되거나 

적어도 자비와 지혜를 동시에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27) 이런 이념은 불자들에게 ‘먼저 깨달음을 추구하고 그런 다음에 중생을 교화한다.
    (上求菩堤下化衆生)’는 정형구로 굳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위와 아래’는 높은 
    가치와 낮은 가치, 즉 선후의 개념으로 읽힌다. 上下를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자비와 지혜는 선후가 아니라 동시에 실천되어야만 할 덕목이다. 자비와 
    지혜의 실천을 동시개념이 아니라 선후개념으로 주장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호는 해석 이전의 읽기로 말하자면 선후를 상정한 태도로 
    읽을 수 밖에 없다.

 

III. 자신에게 비춘 타자

 

불자가 자비의 실천을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는 누구든 자신을 

남에게 비추어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알 수 있는 것은 

나를 통해서이다. 인간은 자신을 보고 남을 이해하고 남을 보고 자신을 

이해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비추어 남을 이해할 수 있다면 누구나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은 폭력을 겁낸다. 누구나 삶을 사랑한다. 자기에게 견주어 

보아 죽여서는 안 된다. 남을 시켜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28)

28) Dhp vs. 130.

 

모든 생명은 죽기를 두려워하고 자비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자기에게 비추어 보면 自明하다. 내가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한다면 

남도 바로 그와 같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그대로 남에게 해줘야 한다. 

이는 孔子가 말한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29)나 晏子와 

朱熹의 ‘자기에게 비추어 남에게 나아간다.’30)는 신념과 정확하게 동일한

개념이다.

29)「論語」제 15, 「衛靈公篇」, 子貢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공이 물었다. 한 마디로 해서 죽을 때까지 행할 것이 있
    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그것은 '용서'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
30)「晏子春秋」, 「內篇」, 「景公衣狐白裘不知天寒晏子諫第二十」춘추시대 齊나라 왕 
    景公과 晏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宋나라의 朱熹가 「與范直閣書」
    에서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나아간다면(推己及人) 더욱 올바를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그들은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는 것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또 남으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31)

31) Sn vs. 705.

 

자기를 지키는 자는 남의 자기도 지킨다. 그러므로 [남의] 자기를 지켜라. 

그런 사람은 언제나 해를 받지 않는 賢者다.32)

32) AN Ⅲ, p. 373.

 

왜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자비수행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비추어 보면 자명하다. 내가 싫어하는 일이라면 남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고 싶지 않다면 남도 마찬가지다. 

러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남을 시켜서 하는 것은 괜찮은가? 물론 안 된다. 모든 산 자들은 자기를 

지키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자기를 지키기 바란다면 남의 자기도 지켜 

주어야 한다. 남에게 어떤 행위를 하든 자신에게 먼저 비추어 보고 싫고 

좋음에 근거하여 행동해야만 한다.

 

"그러한즉 그는 먼저 자신을 예로 하여 慈心으로써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33)

33) 길희성(1994) p.136.

 

자와 비의 실천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수행이든 남을 위한 실천이든 

자신에게 비추어 보아, 즉 자기 자신을 예로 삼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신조는 대부분의 종교들이 다르지 않다. 기독교가 ‘너희는 남에게서 

해 받고 싶은 그대로를 남에게 먼저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34)를 사랑의 실천에 있어 황금률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비추어 남에게 나아가라.’는 유교나 남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면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불교정신과 정확히 일치한다.

짤막한 초기경전인 「말리까경(Mallikā sutta)」은 자신의 중요성과 

께 자기에 비추어 남을 해치지 말라는 메시지를 오롯이 담고 있다. 

의 내용은 코살라(Kosala)국의 빠세나디(Pasenadi) 황제가 황후 

말리까(Mallikā)와 함께 높은 누대(樓臺)에 앉아 오후 한 때를 즐기며 

나눈 대화에 담겨 있다.

34) 마태 7, 12.

 

말리까여, 그대에게 자신보다 더 소중한 다른 어떤 사람이 있소? 

하,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다른 어떤 사람도 없습니다. 페하,

폐하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다른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다른 어떤 사람도 없소.

그 때 황제는 누대에서 내려와 황후와 함께 거룩하신 붓다를 친견하고 

[모든 내용을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이야기를 다 듣고] 이해를 하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하셨다.

사람은 생각으로 어디라도 갈 수 있소.

그러나 어디에 가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하지는 못한다오.

그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오.

그러기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해쳐서는 안 된다오.35)

35) SN Ⅲ, 8.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그런 점에서 자와 비의 

실천은 자기사랑이 출발이다. 그리고 이 출발선에서 나란히 선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붓다는 ?말리까경?의 황제와 황후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사랑을 먼저 확인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확인 위에서 남을 나에게 

대입해 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듯이 

마찬가지로 남에게 있어서 그의 자기는 가장 소중하다. 나 자신 역시 

타자에게 있어서는 남이다. 그 남으로부터 내 자신이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듯이 나 역시 남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이 행복

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자비로워야 한다.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음을 확인할 때, 다른 중생들의 바람도 

그와 똑같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인한 다음에는 자신이 사랑하거나 

존경하거나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떠올려 그들을 향한 자비심을

기르고, 다음에는 무관한 사람을 거쳐 점차 원수나 적에게 까지 자비심을 

확산하여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타자를 자신에게 비추고 

자신을 타자에게 비추어 봄으로써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IV. 증오의 해독제

 

탐욕과 베풂, 무지와 지혜가 양립할 수 없듯이 자비와 성냄은 언제나

대척점에 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있을 수 없다.

성냄을 가진 채로 해탈을 이룰 수는 없으며 증오심을 품은 채로는 마음의 

평화조차 이룰 수 없다. 탐욕과 성냄과 무지는 해탈로 가는 길의 치명적 

장애물이다. 탐욕이라는 번뇌를 베풂으로 이겨내듯이, 무지를 지혜로 

극복하듯이 성냄은 자비로 승화시켜야 한다. 자비는 성냄이라는 독소를 

해소시키는 해독제이다.

 

「불교윤리학」을 쓴 타찌바나는 불교가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한다. 두 번째는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이 윤회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동물을 잡아먹는 살생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전생의 내 부모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셋째는 자신을 남에게 비추어 

본다면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앞 선 Ⅲ 절에서 

이미 논하였다. 그가 말하는 불교에서의 자비실천의 첫 번째 이유는 

자비가 성냄을 이기는 해독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 해매는 

이유는 탐진치라는 세 가지 치명적 독약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그 각각의 

독약을 해소하는 해독제를 복용해야만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열반으로 가는 길의 세 가지 치명적 번뇌 중의 하나인 증오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비의 실천은 필수적이다.36)

36) Tachibana(1994) pp.185-190. 이 논문은 타찌바나가 제시한 세 가지 이유 중 
    첫째와 셋째 아이디어를 원용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이 가장 중요시 하는 이유는 
    첫 번째 ‘열반으로 가는 수행’이며, 논지의 구성 및 텍스트 인용과 설명방식에서 
    그와 다르다.

 

증오는 결코 증오에 의해서 종식되지 않는다. 증오는 자애에 의하여

종식되며, 이것은 영원한 법칙이다.37)

37) Dhp vs. 5.

 

탐욕을 떠나고 증오를 물리칠지어다. 무한한 慈心을 내어 밤낮 끊임없이 

힘써 사방으로 善意를 펼칠지어다.38)

38) Dhp vs. 291.

 

붓다는 자신의 출가나 설법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을 성취함[離苦得樂]에 있다고 하였다. 고통을 부르는 원인은 탐욕과 

진애와 어리석음이다. 이 탐진치는 자신은 물론 남의 고통까지 함께

부른다. 나와 세상의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결국

탐진치가 극복되어야만 한다. 탐진치는 결국 지혜, 즉 깨달음에 의해 

복되는 것이지만 1차적으로 탐욕은 베풂에 의해 성냄은 참음과 용서에

의해 극복된다. 이 베풂과 참음 혹은 용서의 적극적 표현은 결국 자비이다. 

자비가 아니고는 성냄과 증오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 증오로서 증오를 종식시킬 수 없다. 증오는 오로지 자비로만 극복될 수 

있음은 영원한 법칙이라고까지 했다.

 

자신이나 남을 불문하고 무릇 마음을 쓸 때는

모두 크게 두려운 곳을 멀리 떠나기를 추구하라.

만약 남이 나에게 이미 성내고 욕하더라도

그에게 반응하여 도로 성내고 원망하지 말라.

 

만약 자기에게나 남에게나

둘 모두에게 다 이로우려면

남이 성내고 욕함을 당했더라도

당연히 자신의 성남을 소멸시켜야 한다네.39)

39) 起世經(T.24) 350c-09. 若我若他凡起心 皆求遠離大畏處 他人旣已瞋罵我 不應於彼復起
    怨 若於自己若他人 二處皆應作利益 旣知已被他瞋罵 當使自瞋轉得消.

 

내가 남에게 성이 날 때는 물론이거니와 남이 나에게 성을 내어 오더라도 

이를 극복해야만 한다. 증오심을 내는 것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성냄을 극복하는 것은 남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성냄의 

극복은 결국 자신과 남 모두에게 이롭다. 자비는 인욕의 적극적 표현이다. 

붓다의 목표인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의 성취[離苦得樂]를 위해서는 

성냄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남이 자신을 해치려 해도 인욕의 

적극적 실천인 자비로 대해야 한다. 그래야 나와 남 둘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남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보호하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남을 보호하는 것인가? 많은 수행의 실행을 통해서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남을 보호하는 것이다. 

구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인가? 

인욕,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 자애, 연민에 의해서이다.40)

40) Sn vs. 169.

 

분노는 상대방을 향하여 일으키는 감정으로서 상대를 직접적으로 해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정서상태다. 자애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행복

하기를 바라는 정서로 분노와는 반대되는 정서이다.41) 니까야에서 자애는

인욕 혹은 無瞋으로 자주 표기된다. 『담마상가니(Dhammasaṅmgaṇi)』

서는 진에의 소멸, 즉, 無瞋을 3善根 혹은 3善因 가운데 하나로 헤아리며,

이 3선인 가운데 하나인 無瞋因을 자애로움이나 동정, 연민 등과 동의어

로 설명한다.42) 「위슏디막가」에서도 ‘無瞋은 자애에 다름 아니다.’라고

의내리고 있다.43) 이는 분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발, 

거부이자 불쾌감의 정서이므로, 상대방에 대한 자애로움이나 연민과 같은 

감정을 통해 다스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41) 이자랑(2011) pp.268-269.
42) Dhs p.189. 이자랑(2011) p.269에서 재인용
43) Vis p.467. 이자랑(2011)의 같은 곳에서 재인용.

 

분노는 탐욕 및 어리석음과 함께 열반의 성취를 위해서는 반드시 

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번뇌로 설정되어 있고 이것은 반복되는 자애의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분노의 치유를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은 자애

명상이다. 분노라는 정서의 근본적인 치유책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이에 근거한 연민과 동정, 즉 자애의 수행이다.44) 

이처럼 자애의 수행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분노를 다스리고 성냄을 

극복하는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44) 이자랑(2011), p. 277.

 

붓다는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자애명상(慈觀, mettā bhāvanān)을

제시하였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잘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라는 것이 자애(mettāe)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마음으로 간절하게 생각하면서 ‘모든 존재들이 안락하고, 행복하고, 

화롭기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는 문구를 깊은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마음속으로 반복한다.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는 순서는 자기 자신, 

맙거나 존경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중립적인 사람, 싫어하는 사람

로 넓혀나간다. 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사랑을 느낄 수 

을 때, 자애가 완성된다. 자애는 慈悲喜捨의 四無量心 수행의 일부이다.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바라는 자(慈, mett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라는 연민인 비(悲, karunā), 타인이 잘되고 행복해진 것을 더불어 기뻐

하는 마음인 희(喜, muditā), 평정한 마음인 사(捨, upekkhā)가 사무량심

이다. 이 가운데 자애명상이 분노를 다스리는 행법으로 제시되고 있다.45)

45) 김재성(2010) pp.37-38.

 

『맛지마 니까야』 21, 「톱의 비유경」도 도움이 된다. 도적들이 자신의

사지를 톱으로 자르더라고 분노를 일으키지 말고, “나의 마음은 그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고, 추악한 말을 뱉지 않을 것이며,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미워하지 않고 안녕을 기원하며,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리라. 

그래서 자애의 마음으로 이 사람을 채우리라. 이 사람에서 시작하여

모든 세상을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채우리라.”46)고 수행해야 한다고 붓다는 가르치고 있다.47)

46) MN I, p.129.
47) 김재성(2010) p.37.

 

이들 자비수행의 세 가지 큰 이유 외에도, 타찌바나는 붓다가 자애수행을 

비롯하여 사무량심 전체를 선정수행과 관련지어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48) 다시 말하면 불교는 선정을 수행하는 가르침이고

자비는 선정수행의 내용으로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마음과 

몸으로 자비를 실천하는데 먼저 사무량심 전체가 마음으로 수행하는

선정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붓다뿐만 아니라 붓다 당시의 출가제자

와 재가신자 모두가 한결같이 자애를 비롯한 사무량심을 선정수행의 

용으로 수행했음이 빨리 문헌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49)

48) Tachibana(1994) p.196.
49) Tachibana(1994) pp.196-197.

 

Ⅴ. 맺는 말

 

대승불교는 이타(利他)를 위해 자리(自利)를 유보할 만큼 자비의 실천을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반면 초기불교는 이와 달리, ‘자리, 즉 깨달음을 

성취한 다음에야 자비의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를 이념으로 삼는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후자는 대승불교의 일각에서까지 기본이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한국불교는 上求菩提下化衆生, 즉 ‘먼저 깨달음을 

성취하고 그런 다음에 자비를 실천한다.’를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문헌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다음에야 자비를 실천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해서 자비의 수행이 필요함을 분명히 

여준다. 이 논문은 초기불교 문헌을 근거로 자비실천의 이유를 대략 

세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하였다. 첫째, Ⅱ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비의 

천하는 이유는 그것이 열반으로 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

자비의 실천은 이타적 실천이 아니라 자리적 수행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지혜를 먼저 성취한 다음에 자비의 실천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함양함으로써 지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은 자비수행이 열반을 위한 초기불교의 주요 

실천이었다고 까지 주장한다.

 

둘째,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타자를 자신에게 비추고

자신을 타자에게 비추어 본다면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보고 남을 이해하고 남을 보고 자신을

이해한다. 만일 우리가 남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성냄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탐진치의 극복이 필수인 바, 탐욕은

베풂, 어리석음은 지혜, 성냄은 자비로써 극복한다. 자비는 성냄이라는

독약을 위한 유일한 해독제이기 때문이다.

 

자비의 실천은 대승불교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그릇된 통념이다. 대승

불교뿐만 아니라, 초기불교에도 자비수행에 관한 붓다의 정교한 가르침이 

있다. 자비는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야 실천한다는 생각도 역시 통념에 

불과하다. 후일 대승시대의 불자들이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이 자비에 

있다고 역설한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다만 초기불교

에서의 자비행은 타자를 위한 실천만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자신을 위한

수행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