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虛堂行狀 청허당행장
淸虛堂行狀 청허당행장
금강산퇴은1) 국일도대선사2) 선교도총섭3) 사자4) 부종수교5) 겸등계6) 보제대사7) 청허당행장
金剛山退隱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賜紫扶宗樹敎兼登階普濟大師淸虛堂行狀
1) 金剛山退隱. 금강산으로 물러나 은거한다는 말. 서산은 1549년(명종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이후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로 있던 1556년에
수행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려는 생각에 모든 직위를 버리고 물러난 다음 금강산·두
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주석했다. 그 주석처 중 하나였
던 금강산과 조계퇴은(曹溪退隱)이라는 별호를 합한 호칭이다.
2) 國一都大禪師.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위대한 선사라는 말. 조선시대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스님에게 내린 존호이다. 문종이 신미(信眉)에게 내린 적이 있으며, 선조도 1593
년에 서산에게 이 존호를 하사했다. 당시 서산이 받은 호의 정식 명칭은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이다.
3) 禪敎都摠攝. 이 승직은 고려 말(1370년) 공민왕이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에게
내린 것이 최초이다. 나옹 이후에는 보이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의승군(義僧
軍)이 조직되자 선조는 서산에게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이라는
승직을 제수하여 전국의 의승군(義僧軍)을 지휘하도록 했다. 서산의 제자 사명유정(四
溟惟政)이 도총섭직을 이었다.
4) 賜紫. 임금으로부터 자색가사(紫色袈裟)를 하사 받았다는 말. 당송시대부터 자색의 관복
은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입는 관복의 색이었다. 조선시대 당상관은 붉은색 관복을 입
었지만 자색과 상통한다. 선조는 의승병 활동에 대한 공로로 서산에게 정2품의 품계를
제수(除授)했다.
5) 扶宗樹敎. 종지를 떠받치고 가르침의 방편을 세웠다는 뜻. 부종수교(扶宗竪敎)·부종입교
(扶宗立敎)·부종창교(扶宗唱敎) 등이라고도 한다.
6) 兼登階. 최고의 계위에 올랐다는 말. ‘兼’은 위의 여러 칭호와 더불어 아래와 같은 칭호를
겸한다는 뜻이다.
7) 普濟大師. 보제라는 말은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나옹혜근도 ‘보제존자(普濟尊
者)’라는 칭호를 받았다. ‘대사’는 불보살부터 고승(高僧)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덕을 갖
추어 중생들의 스승이 될 만한 걸출한 인물을 일컫는 존칭이다.
선사의 휘는 휴정(休靜)이고 호는 청허(淸虛)이며 오랫동안 묘향산에서 주석했기 때문에 서산(西山)8)이라고 부른다. 속성은 완산 최씨9)이다. 부친 최세창은 기자전감10)을 사양하고 향관11) 벼슬로 생을 마쳤다. 일찍이 고조부12)는 태종 대에 용호방13)에 올라 창화(昌化)14)로 옮겨가서 살았기 때문에 또한 창화를 고향이라고 하기도 한다.
師諱休靜, 號淸虛, 久住香山, 故稱西山. 俗姓崔氏, 完山人. 父世昌, 辭箕子殿監, 卒任鄕官. 曾高祖, 得龍虎榜於太宗朝, 移居昌化故, 亦以昌化爲鄕.
8) 묘향산의 별명.
9) 서산 자신의 행적을 적은 편지「上完山盧府尹書」에 보면, “부친의 시조는 완산 최씨
입니다.”(父之始祖, 本完山崔氏也.)라고 술회하고 있다.
10) 箕子殿監. 평양에 있었던 기자 사당을 관리하는 벼슬. 기사전은 숭인전(崇仁殿)·기자
사(箕子祠)라고도 한다. 기자전은 세종대 이후로 참봉(종9품)이 관리했으며, 광해군
4년(1612)에 이르러서야 정6품의 전감(殿監)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 그러므로 이「행
장」의 저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가 스승의 부친을 치켜 세우기 위해 전감이라는 직
위를 썼으며, 실제로 최세창이 제안 받은 벼슬은 종9품의 말단직이었다.
11) 鄕官. 고을에 소속된 관리.「上完山盧府尹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기성(평양)에 있는 영전(影殿)을 담당하는 미관말직을 천거하였습니다. 관인이 와서
가기를 청하며 떠날 날을 부친께 말씀드리니, 부친은 웃으며 ‘고향 산천의 은은한 달
빛과 탁주 한 병, 처자식들과 어울려 사는 기쁨, 내 분에 족하지 않은가!’라 하시고는
허리띠를 풀고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 시 몇 수를 유장하게 읊으시니, 관인은 곧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고을에 의심쩍은 일이 있으면 곧 해결해 주시고 송사(訟事)가
있으면 곧 그치게 하셨으므로 향관직을 맡아 수행하신 지 13년에 고을 사람들이 ‘덕
로(德老)’라 불렀습니다.” (有人擧爲箕城影殿之微官. 官人來而請行, 卜日以告父, 笑曰,
‘舊山烟月, 一壺白酒, 妻子歡心, 分亦足矣!’ 卽解帶南首而臥, 長嘯數聲, 官人卽退. 凡
鄕邑有疑者則決, 有訟者則止故, 遂任鄕官者, 十三年, 而邑人猶號曰, 德老云.) 이 기사
에서 나타나듯이 앞에 말한 기자전감은 미관말직임을 알 수 있다.
12)「上完山盧府尹書」에는 ‘현고조(玄高祖)’라고 되어 있다.
13) 龍虎榜. 용방(龍榜)과 호방(虎榜)을 아울러 부르는 말. 용방은 문과 급제, 호방은 무과
급제를 가리킨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燃藜室記述別集』권10「官職典故」
에 따르면, “태종 8년에 무과를 시설하여 용호방을 갖추니 국가의 무과가 여기에서 비
롯되었다”라고 하였다.
14) 현재 경기도 양주.
외조부인 현윤15) 김우(金禹)가 연산군에게 죄를 얻자 함께 안릉16)으로 귀양을 가 서관17)의 이주민18) 신세가 되었다.19) 스님은 정덕(正德) 경진년(庚辰年:1520)에 태어났다. 이보다 앞서 기묘년(己卯年:1519)에 모친 김씨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파가 공손하게 몸을 굽히며 “사내대장부를 잉태하셨기에 축하드리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꿈대로 임신하였는데, 낳고 보니 기골은 맑고 환했으며 총명함은 보통 아이와 달랐다. 나이 겨우 아홉에20) 시와 문장에 능하여 고을 수령 이공(李公)21)이 한양으로 데려가 반궁22)에 취학시킨 뒤로 삼 년 동안 지내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23) 거듭 낙방했다.
外祖金縣尹禹, 得罪燕山, 謫居安陵, 遂爲西關之氓. 師生於正德庚辰. 先是己卯, 母金氏夢,
一老婆揖曰, “胚胎丈夫男子, 故來賀.” 因以有娠, 及生肌骨淸徹, 機神異常. 年纔九歲, 能爲辭章,
邑倅李公, 携徃京師, 就泮宮, 居三年, 戰藝于舘下, 再屈於人.
15) 縣尹. 현(縣)의 수장.
16) 평안도 안주. 서산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17) 西關. 서도(西道)라고도 한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18) 맹(氓). 다른 지방에서 온 이주민을 뜻한다.
19)「上完山盧府尹書」에, “부모님도 외조부의 일에 연루되어 식솔들이 객관(客館)을 돌보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父母連外祖, 家口沒爲舘吏.)라고 술회한 글이 보인다.
20)「上完山盧府尹書」에, “소자 불행하여 나이 겨우 아홉에 모친께서 갑자기 먼저 세상을
등지시고, 이듬해 봄에는 부친마저 뒤따라 돌아가셨습니다.”(『淸虛集』권7 韓7 p.720
b10. 小子不幸, 年纔九歲, 母忽先背, 又過一春, 父亦繼逝.)라고 하였다.
21) 이사증(李思曾)을 말한다.「上完山盧府尹書」에 따르면,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자 서산
은 움막을 짓고 부모의 무덤을 지켰다. 이를 전해들은 이사증이 서산을 불러들여 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에게 뛰어난 점이 보이자 후원하게 된다.
22) 泮宮. 학궁(學宮)이라고도 한다. 과거를 준비하는 아동들이 입학하여 생원(生員)으로서
공부하던 학교를 말한다. 원래는 주나라 때 제후국의 대학을 일컫는 말이었다. 여기에
서는 성균관을 말한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淸虛堂碑銘」에는
‘반재(泮齋)’로 되어 있다.
23) 전예(戰藝). 재주를 다툰다는 말.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분한 마음에 남쪽 지리산을 유람하며 산천을 누비다가 불교서적을 열람하던 중 ‘마음을 비우고 급제24)한 자가 틀림없는 대장부’라는 구절에 이르러 비로소 종전에 배웠던 것들이 한낱 허명에 지나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에 숭인(崇仁)25)장로 밑에서 삭발하고 영관대사(靈觀大師)26) 밑에서 교법을 들었다.
發憤南遊智異, 窮盡山川, 因覽釋氏書, 至心空及第者, 須大丈夫漢, 乃覺從前所學, 徒一虛名.
於是, 削髮於能27)仁長者, 聽法於靈觀大師.
24) 심공급제(心空及第). ‘마음을 텅 비우면 급제한다’라는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에 나오는
구절에 따른다. 과거 급제를 목표로 공부하다가 실패한 서산에게 숭인이라는 노숙이 적
절한 전기(轉機)로 제시한 말이다.「上完山盧府尹書」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과
거 낙방 후 남도를 유력할 때) 하루는 숭인(崇仁)이라는 노숙이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그대 기골이 맑고 빼어난 것을 보니 반드시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구나. 뜻을 심공급제
에 두는 것이 옳을 듯하니, 세상의 명리를 좇는 마음일랑은 완전히 끊어버려라. 서생의
업이란 종일토록 애쓰고 골몰하여 한평생의 소득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하나
의 허명일 뿐이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다!’”(『淸虛集』권7 韓7 p.720b14. 一日有一
老宿〈諱崇仁〉, 尋余曰, ‘觀子氣骨淸秀, 㝎非凡流. 可回心於心空及第, 宜永斷乎世間名
利心也. 書生之業, 雖終日役役, 百年所得, 只一虛名而已. 實爲可惜!’)
25) 서산의 은사이나, 자세한 전기가 전하지 않는다.
26)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 서산이 지은「芙蓉堂靈觀大師行蹟」이 韓7 pp.754
a 5~755b21에 전한다.
30세(1552) 때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판사(判事)를 겸하다가28) 하루는 “내가 출가한 본래 뜻이 어찌 이런 것들에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며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홀로 미륵봉 밑에서 지내다가 산에 걸쳐 있던 달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천지가 모두 빛나는 듯 기쁨 속에서 스스로 체득하였다. 그 기틀에 부합하는 시를 지어 ‘삼족금오(三足金烏)가 한밤에 날아가는구나!’라는 구절의 시29)를 남겼다.
年三十, 中禪科, 兼判禪敎兩宗事, 一日歎曰,“ 吾出家本志, 豈在於此乎?” 去入金剛山.
獨居彌勒峯下, 見山月昇空, 天地晃然, 怡然自得. 作投機詩, 有三足金烏半夜飛之句.
28)「上完山盧府尹書」에 따르면, 서산이 30세(명종7) 되던 가을에 선교 양종 제도가
부활하자 여러 사람의 간곡한 청으로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 후 대선(大選) 1년,
절의 주지 2년, 전법(傳法) 석 달, 교판(敎判) 석 달, 선판(禪判) 3년 등의 직위와
세월을 보냈다.
29)「金剛山彌勒峰偶吟」이라는 제목의 시 마지막 구절이다. 삼족의 금오는 전설상의
신조(神鳥)로 태양 속에 산다고 하며 태양을 상징하는 말로도 쓴다. “누구도 앉아
보지 못한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노라니, 허다한 생성과 소멸은 결국 어디로 돌아
갔단 말인가? 날리는 먼지 자물쇠 구멍을 막도록 참선한 지 오래고, 푸른 풀이 계
단에 이어지도록 절 밖을 나온 적 드물다. 천지인들 어찌 대용(大用)을 가두어 둘
수 있겠는가? 귀신일지라도 현묘한 기틀을 찾을 곳 없다네. 천 개의 조각으로 누
빈 하나의 납의(衲衣) 속을 누가 알리오? 삼족의 금오가 한밤에 날아가는구나!”
(『淸虛集』권1 韓7 p.675b12. 坐斷諸人不斷頂, 許多生滅竟安歸? 飛塵鎻隙安禪
久, 碧草連階出院稀. 天地豈能籠大用? 鬼神無處覔玄機. 誰知一衲千瘡裏? 三足金
烏半夜飛!)
기축년(1589)에 난적(亂賊)30)에게 무고를 당하게 되었으나, 임금께서 해명하는 글[招辭]에서 한 점의 죄도 없음을 아시고 “상인31)께서는 깊은 산에 은거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요망한 일을 했겠는가?”라고 하시며 시집을 직접 살펴보신 다음 어필로 대나무를 그려 주시며 위로하셨다.
歲在己丑, 誤被賊援, 旣至上見招辭, 無毫毛罪曰,“ 上人豈以雲林之客, 爲此妖妄事乎?”
取詩集親覽, 御筆賜竹以慰之.
30) 정여립 모반 사건에 가담한 무업(無業)을 말한다. 무업은 서산과 유정(惟政)도 모반에
가담하였다고 무고하였다.
31) 上人. 누구보다 높은 덕을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
임진년(1592)에 왜적(倭賊)이 삼경32)을 함락하자 대가(大駕)33)가 서쪽 용만34)으로 옮겨갔다. 임금께서 스스로 기억하시고 좌우의 대신에게 물었다. “아무개 상인(上人)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나를 잊었단 말인가! 빨리 불러서 오게 하라.” 스님이 와서 주렴 밖에 앉자, 지시를 내려 “시국이 이처럼 위태로우니 어려움에서 구해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시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捴攝)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 말을 타고 순안 법흥사에 이르러 승도(僧徒)를 모아 천병35)을 도왔다.
際壬辰, 倭賊陷三京, 大駕西幸龍灣. 上忽自憶, 問左右曰, “某上人今在何處? 豈忘我耶! 亟使召來.”
來則坐簾外傳諭, “時危如此, 幸相急難.” 卽拜八道十六宗禪敎都攝. 師泣而辭退, 馳傳至順安法興寺,
聚僧徒助天兵.
32) 三京. 남경(南京)인 한양, 중경(中京)인 개성, 서경(西京)인 평양 등 세 도시를 말한다.
33) 임금의 수레. 또는 임금 자체를 가리킨다.
34) 龍灣. 평안도 의주.
35) 天兵. 제후국이 천자의 장병을 일컫는 말. 곧 여기서는 명나라 군사를 가리킨다.
임금의 군대[王師]가 서경(西京)36)을 회복하고 왜적은 남쪽으로 도주하자 송도(松都)37)까지 추격하기에 이르렀다. 군대 간에 호응하며 서로 도와서 남쪽으로 한진(漢津)38)을 건너고 안성(安城)39)에 진을 치게 되었는데, 스님 스스로 몸이 늙어 왕성한 기세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문도인 유정(惟政)과 처영(處英)40) 등의 무리를 불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나의 마음은 비록 화살과 돌을 맞아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나이 80세로서 어찌 장수의 지위를 맡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그대들이 장수의 지위를 대신하여 무리를 나누어 맡고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싸워라!”고 당부했다. 곧이어 임금으로부터 받은 총섭의 인장(印章)을 반납하고 물러나 묘향산의 예전 은거처로 들어갔다. 난을 평정하고 그 공과를 따진 다음 조정에서 의론하여 “비록 출가한 스님[山人]일지라도 공이 있으면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한 끝에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 등계(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라는 직호(聀號)를 내렸다.
王師復西京, 及賊南走, 追進松都. 聲勢相助, 南渡漢津, 陣安城, 自思年老, 不能乘銳,
召其徒惟政處英, 付以徒衆曰, “吾爲國之心, 雖死矢石無所恨, 但年將八十, 豈可任將! 故代將而,
須戮力爲之!” 乃封攝印上納, 退入香山舊隱. 旣平難論功, 朝廷議曰, “雖山人, 有功不可無賞.”
賜號, 國一都大禪師禪敎都攝扶宗樹敎普登階.
36) 현재의 평양.
37) 현재의 개성.
38) 현재의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일대 아산만에 있었던 나루. 한나루·대진(大津)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군사 요충이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39) 현재의 경기도 안성. 아산만과 아산호를 거슬러 오르면 안성에 이른다. 한진과 연계된 군사 요충지이다.
40) 서산의 제자. 임진왜란 때 서산의 뜻을 받들어 호남에서 승병장으로 활약했다.
스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인 언구(言句)가 임제종(臨濟宗)의 가풍(家風)을 잃지 않은 것에는 뿌리와 근원이 있다. 우리 동방의 태고화상(太古和尙)께서 중국 하무산(霞霧山)41)에 들어가 석옥청공42)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혼수43)에게 법을 전했고 환암은 구곡각운44)에게 전했으며, 구곡은 등계정심45)에게 전했고 등계는 벽송지엄46)에게 전했으며, 벽송은 부용영관(芙蓉靈觀)에게 전했고 부용은 서산등계(西山登階)에게 전했는데, 석옥이 바로 임제의 적통을 이어받은 법손이기 때문이다.47)
凡示人言句, 不失臨宗風者, 有本有原. 吾東方太古和尙, 入中國霞霧山, 嗣石屋而傳之幻庵,
幻庵傳之龜谷, 龜谷傳之登階正心, 登階正心傳之碧松智嚴, 碧松智嚴傳之芙蓉靈觀,
芙蓉靈觀傳之西山登階, 石屋乃臨嫡孫也.
41) 중국 절강성 오흥현에 있는 산. 석옥청공(石屋淸珙)이 주석하던 곳으로 1347년
태고보우(太古普愚)가 머물렀다.
42) 石屋淸珙(1272~1352). 고봉원묘(高峰原妙)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후에 급암종
신(及庵宗信)을 찾아가 화두를 받고 참구하여 인가 받았다. 태고 외에 백운화상
(白雲和尙)도 친견했다고 전한다.
43) 幻庵混修(1320~1392). 공민왕 때 개최된 공부선(功夫禪)에서 나옹의 물음에
유일하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한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환암의 비명
에 는 태고의 수좌로 밝히고 있어 태고와 나옹 모두에게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44) 龜谷覺雲. 생몰연대 미상. 속성은 유(柳)씨. 태고보우의 적손(嫡孫)으로 보는 설
이 있으나, 각운과 직접 교유했던 이색(李穡)은 졸암(拙菴)의 적사(嫡嗣)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설은 휴정을 태고의 법맥에 소속시키기 위해 후세에 가필
한것으로 본다.
45) 登階正心. 생몰연대 미상. 벽계정심(碧溪正心)이라고도 한다. 조선 태종 때 배
불숭유(排佛崇儒) 정책에 의해 종파를 병합하고 승가(僧伽)를 감축시키자 속인
과 같이 머리를 기르고 황악산 물한리(勿罕里)에 은둔하며 수도하다가 벽송지
엄(碧松智嚴)에게 법을 전했다.
46) 碧松智嚴(1464~1534). 야로(埜老)라고도 하며, 서산이 그 비명을 썼다.
47) 동시대에 이 법통설과 다른 주장이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이「陜川海印
寺四溟大師石藏碑文」에서 “보제존자 나옹의 5대 법손이 부용영관인데, 청허
스님은 그의 입실제자라 한다.”(普濟五傳, 爲芙蓉靈觀, 而淸虛老師, 稱入室弟子.)
라고 한 말로 보면 서산은 나옹의 법계에 속한다.
이 8대가 법을 전하는 가운데 오직 스님만이 잘못 흐르는 물결을 돌려놓고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으셨다. 뼈를 바꾸는 신령스러운 처방48)과 각막을 도려내는 금비(金鎞)49)와 같은 수단이 그것이었으니, 선과 교의 혼잡을 옥과 돌을 가려내듯이 분명히 구분한 것, 보검을 마음껏 휘두르면서도 날카로운 칼날50)을 상하지 않은 것, 말없이 고요한 관찰[靜觀]을 하면서도 불씨 없는 잿더미51)와 같은 적멸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은 것, 이러한 것들이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수단52)을 잡고서 여러 인재들을 양성하셨으며, 부처와 조사의 광명을 더욱 빛나도록 씻어주고, 인계와 천계 중생의 눈을 뜨게 하셨으니, 이처럼 종풍이 흥성한 적은 없었다.
此八代中, 唯西山大有回狂瀾, 正頹綱之力. 所謂換骨靈方, 刮膜金鎞, 而禪敎混雜, 剖分玉石者;
寶釰當揮, 不犯鋒鋩者;杜口靜觀, 不落寒灰者, 其誰之功歟! 秉殺活鉗鎚, 陶鑄群英, 洗佛祖光明,
開人天眼目, 無如此之盛也.
48)『碧巖錄』「序」大48 p.139a5에 나오는 말.
49) 인도에서 의사가 맹인의 눈을 고치기 위하여 망막을 도려낼 때 사용했던 의료도구.
‘金篦’라고도 쓰며, 금주(金籌)·금비(金錍)·금배(金拜) 등이라고도 한다. 방편으로
중생의 무지를 도려내어 차츰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해주는 교설을 비유한다.
50) 봉망(鋒鋩). 서슬이 시퍼런 칼끝 또는 그러한 칼날. 날카롭게 절단하거나 찌르는
칼과 같이 번득이는 기봉(機鋒)을 나타낸다. 선사로서의 본분을 드러내는 수단에
해당한다.
51) 한회(寒灰). 고목(枯木)과 동일한 이미지로 쓰인다. 정적인 좌선 수행에 매몰되어
활발한 작용을 상실한 정(靜) 일변도의 선정(禪定)을 비판하는 말이다.
52) 겸추(鉗鎚). 금속을 단련하는 데 쓰는 대장간의 연장. 겸(鉗)은 쇠로 만든 부젓가락,
추(鎚)는 쇠망치. 스승이 제자를 지도할 때 쓰는 엄한 수단을 비유하는 말이다.
스님의 저술로는 「석가여래비문(釋迦如來碑文)」 1통,53) 『선가귀감』 1권, 『선교석』 1권, 『운수단(雲水壇)』 1권, 『선교결』 3지(紙), 그리고 시영(詩詠)·제소(祭疏)·기문(記文)을 모은 3권54) 등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아! 왕실의 안녕을 지키고 부처님과 조사를 거듭 빛낸 공적으로 보면, 조선 개국 이래로 누가 비교될 수 있겠는가!
其所作制, 釋迦如來碑文一統, 禪家龜鑑一卷, 禪敎釋一卷, 雲水壇一卷, 禪敎訣三紙,
詩詠及祭䟽記文, 幷三卷, 行于世. 吁! 保安王室, 重輝佛祖者, 自開國以來, 誰能及之!
53) 통(統)은 비(碑)를 세는 단위.
54) 이「행장」을 쓸 당시에 서산의 시문을 모아 편집한 3권본의 문집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청허당집』 또는 그 모체가 되는 책으로 보인다.
85세에 묘향산에서 입적하시니55) 때는 갑진년(甲辰年:1604) 정월 23일이었다. 입실제자 원준(元俊)과 인영(印英) 등이 다비56)하고 여러 조각의 사리를 수습하였다. 그중 한 조각은 원준 등이 얻은 금강사리 두 과(顆)와 함께 보현산 서쪽 안심사57)에 부도를 세워 봉안했으니 나옹왕사(懶翁王師)와 같은 등급이었다. 다른 한 조각은 자휴(自休) 등이 금강산으로 가져가 분향하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또한 신령한 구슬 여러 매로 응하여 나타났는데, 유점사(楡岾寺) 북쪽에 있는 석함에 모셨다.
年八十五, 入寂于香山, 甲辰正月二十三日也. 入室弟子元俊印英等, 闍維奉骨數片, 一片則元俊等,
乞得金剛舍利二介,58) 樹浮圖安之, 普賢西安心寺, 王師懶翁之級. 一片則自休等, 取來金剛山,
焚香懇禱, 亦以神珠數枚應之, 窆石于楡岾之北焉.
55) 당시 법랍 67세였다.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뒷면에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뒤 지금은 내가 그로구나.”(『淸虛集』 韓7「補遺」p.736c19.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게송을 남기고 앉은 채로 입적했다.
56) 사유(闍維). jhāpita, jhāpana의 음사어. 다비(茶毘)·사비다(闍鼻多)·야순(耶旬) 등으로
도 음사한다. 몸을 태우는 것이므로 소연(燒燃)·소신(燒身)·분소(焚燒) 등으로 한역한다.
“사유는 야순이라고도 하나 바른 음사어는 다비이고 한역하면 ‘분소’이다.”(『翻譯名
義集』 권5 大54 p.1137c25. 闍維, 或耶旬, 正名茶毘, 此云, 焚燒.)
57) 安心寺. 평안남도 영변과 전라북도 대둔산에 안심사가 있는데, 영변의 안심사에 나옹
화상의 사리탑이 있으므로, 영변의 안심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8) 여기서 ‘介’는 ‘顆’와 같은 뜻.
문인 편양언기(鞭羊彥機)59)가 목욕재계하고 삼가 쓰다.
門人, 鞭羊彦機, 盥沐謹狀.
59) 1581~1644. 속성은 장(張)씨. 휴정을 이은 4대파 중 가장 흥성했던 편양파(鞭羊派)의 시조가 된다. 『편양당집(鞭羊堂集)』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