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섬 2016. 8. 23. 17:41

解題 해제

 

1. 머리말

2. 지눌스님의 생애

3. 수록된 저술의 개요

4. 지눌스님의 선사상

5.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전통사상총서 『정선 지눌(精選知訥)』은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사상을 알리는 총서로 기획하여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1)를 저본으로

역주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 가운데 불일보조국사

(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스님의 비문과 저술의 대부분을 번역하여

스님이 일생을 통해 실천하고 이끌었던 수행의 정신과 내용을 볼 수 있게 하였다.

1)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이하 韓)』제4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82), pp.698a- 869c.

17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에서 출가교단에 미친 영향이 지눌스님만큼 큰 

고승도 드물다. 지눌스님의 가르침은 출가 입문에서부터 전통강원을 중심으로 한 교육과

선원 생활에 이르기까지 출가자는 물론이고 한국 수행자의 기준이 되어왔다.2) 때문에

지눌스님의 저술들은 지눌스님 당시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간행되고 있다.
2) 보조 지눌스님의 사상이 강원교육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서종범(徐宗梵)의「강원교육에

끼친 보조사상」(『보조사상(普照思想)』3, 보조사상연구원, 1989)을 참고.

지눌스님의 여러 저술이 전서 형태로 간행된 것은 경허(鏡虛)선사의 『선문촬요(禪門撮要)』3)(1908)가 처음이다. 이 책에는『수심결』,『진심직설』,
『권수정혜결사문』,『간화결의론』등이 수록되었다. 이후 한암(漢巖)선사는 『고려국보조선사어록(高麗國普照禪師法語)』(1937)을 현토본(懸吐本)으로 간행하였고,4)『한국불교전서』제4책5)과『보조전서(普照全書)』6)에는 현재 전해지는 지눌스님의 저술이 모두 수록되었다.
3) 이 책은 융희(隆熙) 2년(1908) 금정산의 범어사에서 개간되었으며, 설봉학몽(雪峰學夢)에 의해서 『(현토) 선문촬요』의 유인본(油印本)이 1959년      에 간행되었다. 이후 『(신간 현토) 선문촬요』의 활자본이 1968년에 금정산의 범어사에서 간행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여기에는 이전에 수록되      지 않았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몇 편의 선문 전적이 증보되었다. 이철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1908년의 개간본을 영인본으로 간행하        였다.[경허선사 편 / 이철교 역,『선문촬요』, 민족사, 1999 참조.]
4) 이 책은 불기 2964년(丁丑, 1937)에 오대산의 월정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여기에는『선문촬요』에서 수록되지 않았던『원돈성불론』이 추가되었다.      또 이 책의 말미에는『함허선사현정론』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5) 이 책에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진심직설(眞心直說)』,『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육조법보단경발(六祖法寶壇經跋)』,『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등의 순서로 9종의 저술이 수록되었다.
6) 이 책에는『한국불교전서』에서 빠졌던『염불요문(念佛要門)』,「목우자법어송(牧牛子法語頌)」,「승평부조계산수선사불일보조국사비명병서(昇平      府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 등과 후대의 각종 서문과 발문, 그리고 해제가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지눌스님 저술의 한글 번역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언해본에서 시작된다. 『목우자수심결』,

『법집별행록절요』,『계초심학인문』등이 언해본으로 전해지고 있다.7)
7)『목우자수심결』의 언해본은 혜각존자(慧覺尊者)의 역으로 1467년에 간행된 것이 전하는데,

   여기에는「成化三年丁亥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 라는 간기가 있다.『법집별행록절요』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언해본이며, 이 책은 1522년에 간행된 것이 전하는데, 여기에는

  「嘉靖元年 季春有日」이라는 간기가 있다. 이 책은 성암고서박물관과 남권희가 소장하고

   있으며, 본문의 마지막 장차가 113장으로 되었으나 낙장이 있어 완전한 형태는 알 수 없다.

    『계초심학인문』의 언해본은 1577년에 간행된 것이 전하는데, 여기에는「萬曆五年丁丑夏

    全羅道 順天地 曹溪山松廣寺 留板」라는 간기가 있으며, 원효(元曉)스님의 『발심수행장

    (發心修行章)』과 야운(野雲)스님의 『야운자경서(野雲自警序)』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전집 형태의 한글 번역이 널리 보급된 것은 탄허(呑虛)스님이 현토(懸吐)·역해(譯解)한

『보조법어(普照法語)』(1963)8)이다. 이후 대한불교조계종 역경위원회에서는 동국대학교부설

동국역경원을 통해서 『(한글대장경 153) 한국고승 3』(1971)9)에 지눌스님의 저술을 수록하여 

간행하였고, 김달진(金達眞)이 『보조국사전서』(1987)10)를 출판하였다. 이로써 『화엄론절요』의 

본문을 제외한 지눌스님 저술의 한글 번역이 모두 간행되었다.
8) 이 책은 법보원(法寶院)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이후 회상사(回想社)와 교림(敎林)에서 간행하였다.

    탄허스님은 한암스님의 현토본에 수록된 지눌스님의 저술 전부를 역해하였고, 부록으로 지눌스님의

    비문을 현토하고 역해해서 수록하였다. 한편 지암 이종욱(智庵 李鍾郁)도 한암스님의 현토본을

    번역하여 『(국역) 고려보조국사법어』(오대산 월정사, 1948)를 출판하였다.
9) 이 책에는「보조국사집」과「태고화상어록」이 함께 수록되었으며, 「보조국사집」에는『권수정혜결사문』,

    『수심결』,『진심직설』,『원돈성불론』,『간화결의론』, 『염불요문』이 수록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보조국사집」은 이후『(한글대장경) 보조국사집』(동국역경원, 1995)으로 개정되었다. 개정판에는

    김달진의 번역한 『권수정혜결사문』,『수심결』,『진심직설』,『원돈성불론』,『간화결의론』,『염불요문』,

     『계초심학인문』,「화엄론절요서」,『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10) 이 책은 고려원에서 출판되었으며, 여기에는『염불인유경』,「화엄론절요서」, 『계초심학인문』,

      「법보기단경중간발」,「승평부 조계산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병서」등이 부록으로 실어서

      『화엄론절요』를 제외한 지눌스님 저술의 번역문과 원문이 모두 수록되었다. 이 가운데

      『염불인유경』을 제외한 나머지 저술과 단편의 한글 번역은 이미 탄허스님의 『보조법어』와

      개별 번역서에 수록되어 유통되고 있었다.『염불인유경』은『염불요문』의 다른 이름이다.

지눌스님 저술의 영어 번역은 송광사에서 출가한 경험이 있는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교수에 의해서 The Korean approach to Zen : the
collected works of Chinul (1983)11)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1) 이 책은 하와이대학교출판부(Univ. of Hawaii Press)에서 출판되었으며, 여기에는

      8종의 지눌스님의 저술이 수록되었다. 즉, Encouragement to Practice : The

      Compact of the Samādhi and Prajñā Community (『권수정혜결사문』), Admonitions

      to Beginning Students (『계초심학인문』), Secrets on Cultivating the Mind (『수심결』),

      Straight Talk on the True Mind (『진심직설』), The Essentials of Pure Land Practice

      (『염불요문』), The Complete and Sudden Attainment of Buddhahood (『원돈성불론』),

      Resolving Doubts About Observing the Hwadu(『간화결의론』), Excerpts from the

      Dharma Collection and Special Practice Record with Personal Notes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은 이 가운데 3편만을

     묶어서 Tracing back the radiance : Chinul's Korean way of Zen(Honolulu: Univ. of  Hawaii

      Press, 1991)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지눌스님과 관련한 연구는 이들 한글과 영어 번역본이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근・현대에 이루어진 지눌스님 관련 연구 성과물은 번역서를 포
함한 단행본과 학위논문, 개별 연구논문까지 거의 600편에 가깝다.12) 1960
년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전문적인 연구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
과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학위를 받고 국내로 들어와서 활동하면서 본
격화되었다.13) 1987년에는 전문 연구자들이 함께하는 보조사상연구원의
발족과 학술지 『보조사상(普照思想)』의 창간이 이루어져14) 지눌스님과 관
련한 연구가 풍부해지는 데 크게 기여한다. 1990년대 이후에는 초기 연구
자들의 축적된 연구 성과가 단행본으로 간행되고 새로운 연구자들의 노력
이 결실을 보게 된다.15)
12) 이덕진은 「지눌 연구의 어제와 오늘」(『지눌』, 예문서원, 2002)에서 2000년까지 발
    표된 연구 성과 558편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지눌 관련 연구물 목록」을
    수록하였다. 이전에도 지눌스님 관련 연구 성과물이 정리되었다.[이철교, 「보조
    관계 자료목록」,『보조사상』1(보조사상연구원, 1982) ; 강건기,「부록2. 보조국사 지
    눌 관계 논저 종합목록」,『목우자지눌 연구』(부처님세상, 2001) 참조.]
13) 1960년대의 대표적인 연구논문으로는 박성배의 「‘悟’의 문제: 목우자의 『법집
    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중심으로」(『동국사상』2, 1963)와 김잉석의「불일보조
    국사」(『불교학보』 2, 1964) 등이 있다. 1970년과 1980년대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국외에서 지눌스님의 사상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였으며, 이를 단
    행본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종익(李種益)은 『高麗普照國師の硏究-その思
    想體系と特質』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은 일본에서 『韓國佛敎の硏究
    -高麗普照國師を中心どして』(國書刊行會, 1980)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또
    길희성(Hee-Sung, Keel)은 Chinul, The Founder of Korean Zen Tradition (Mass
    : Harvard Univ., 1977)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은 미국에서 Chinul,
    The Founder of Korean Zen Tradition (L.A. : Univ. of California, International &
    Area Studies, 1984)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심재룡(Jae-ryong, Shim)은 The
    Philosophlcal foundation of Korean Zen Buddhism: the intergration of Son and
    Kyo by Chinul (Honolulu : Hawaii Univ., 1979)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
    은 The Philosophlcal foundation of Korean Zen Buddhism (태학사, 1981)라는 제
    목으로 출판되었다. 강건기(Kun-ki, Kang)는 Thomas Merton and Buddhism :
    A Comparative Study of the Spiritual Thought of Thomas Merton and That of
    National Teacher Bojo (New York : New York Univ., 1979)로 박사학위를 받았으
    며, 이 논문은 Thomas Merton and Buddhism : A comparative study of the spiritual
    thought of Thomas Merton and that of national teacher Bojo (민족문화사, 1986)라
    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법산(李法山)은「普照國師之硏究」(臺灣 : 中國文化大
    學, 1985)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4) 보조사상연구원에서는 1989년에 『보조전서』를 간행하였고, 1990년에는 순천
    송광사에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을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여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불교의 돈점론(頓漸論)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이 내용은
   『보조사상』제4집(보조사상연구원, 1990)에 수록되었다. 한편 백련불교문화재단
    에서는 1990년에 있었던 보조사상연구원의 학술토론회에 대응하여 1993년 10
    월 7일부터 9일까지 ‘선종사에서 돈오돈수 사상의 위상과 의미’라는 주제로 학
    술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내용은『백련불교논집』제3집(백련불교문화재단,
    1993)에 수록되었다.
15) 길희성의『지눌의 선사상』(소나무, 2001), 강건기의『목우자 지눌 연구』(부처님
    세상, 2001), 심재룡의 『지눌연구 보조선과 한국불교』(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등이 그간의 연구 성과를 단행본으로 간행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지눌스님과
    관련해서 1990년 이후에 제출된 국내외의 박사학위논문은 다음과 같다. 박은
    목의「知訥의 敎育思想에 관한 연구」(원광대학교대학원 교육학과, 1990), 김광민
    의「敎育理論으로서의 知訥의 佛敎 修行理論-敎育認識論的 觀點」(서울대학
    교대학원 교육학과, 1998), 이덕진의 「普照知訥의 禪思想 硏究-中國佛敎와 관
    련하여」(고려대학교대학원 철학과, 1999), 김방룡의 「普照知訥과 太古普愚의 禪
    思想 比較硏究」(원광대학교대학원 불교학과, 1999), 김부용(승원)의 「知訥의 禪
    修行體系 硏究」(동국대학교대학원 불교학과, 2006), 최성렬의 「牧牛子 知訥의 圓
    頓觀 硏究」(동국대학교대학원 불교학과, 2006), Sung-do Kang의 The potential
    contribution of Korean Buddhism : Updating Bojo Chinul through mutuak
    transformation with Alfored North Whitehead (Claremont : Claremont Graduate
    School. Ph. D., 1992) 등이 있다.

 

하지만 지눌스님의 저술에 대한 종합적이고 학술적인 번역은 여전히 과
제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지속적인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번
역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집 형태로 이루어진 개정본의 경우에도 기존
의 다른 번역을 수용하는데 그쳤고, 개별 저술의 번역본은 대부분 강설본
형태로 간행되었으며, 일부 저술의 학술적인 역주가 시도되었지만 한두 편
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한국전통사상총서의 하나로 이 책이 간행되는 것은 매우 뜻 깊
은 일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불교전서』를 저본으로 지눌스님의 주요 저술
에 대한 교감과 학술적인 역주를 시도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저술은 저작
시기를 고려하여 순서를 정하였다. 스님의 행장은 『동문선』에 전하는 「불
일보조국사비명」을 역주하여 수록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전통사상을
특히 서구에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총서의 하나이기 때문에 지면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아쉽게도 『법집별행록절요사기』와
『화엄론절요』를 비롯한 일부 저작을 이 책에 수록하지 못하였다. 나머지
저술에 대한 번역은 후일을 기약할 따름이다.
 
2. 지눌스님의 생애와 저술

 

1) 출가와 수학
지눌스님의 생애를 전하는 자료는 김군수(金君綏)가 찬술한「조계산
수선사불일보조국사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이하「지눌비
문」)16)과 최선(崔詵)이 찬술한「대승선종조계산수선사중창기(大乘禪宗曹
溪山修禪社重創記)」(이하「수선사중창기」)17)가 근본이 된다.18) 그리고『권수
정혜결사문』을 비롯한 지눌스님의 저술에서 전하는 생애 관련 기록과 지
눌스님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고승들의 비문과 전적도 참고할 수 있다. 이
들 자료를 통해서 지눌스님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16) 『동문선(東文選)』 권117, pp.22-28.
17) 이능화(李能和), 『조선불교통사』 권하(新文館, 1918), pp.346-349.
18) 「수선사중창기」와 지눌스님의 비문에 대한 연구는 허흥식의「修禪社重創記의
    史料價値」(『韓國中世佛敎史硏究』, 일조각, 1994)과「普照國師碑文의 異本과 拓本
    의 接近」(『韓國中世佛敎史硏究』, 일조각, 1994)이 참고된다.

스님의 법명은 지눌(知訥)이며,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고 불렀다. 스
님은 고려 의종 12년(1158)에 개경의 서쪽 동주(洞州 : 지금의 서흥)에서 태
어났다. 성은 정(鄭)씨이고, 아버지 광우(光遇)는 국학 학정(學正)의 관직
을 살았으며,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인 조(趙)씨였다. 태어나서는
병이 많아 온갖 의술로도 고치기 힘들었지만, 부모님이 불전에 나아가 병
이 나으면 출가시킬 것을 서원하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스님은 8세의 어린 나이에 사굴산문(闍崛山門)에 속해 있던 종휘(宗暉)
선사를 스승으로 출가하여 그 아래서 구족계를 받는다. 지눌스님이 출가한
사굴산문은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梵日, 810~889)국사19)에 의해서 강릉
의 굴산사(崛山寺)에서 개창되었다. 범일이 입적한 후에는 그의 법을 이은
개청(開淸, 834~930)20)과 행적(行寂, 832~916)21)에 의해서 강릉과 영서 지
방으로 확대되어갔다. 지눌스님이 태어날 즈음의 사굴산문은 혜조국사(慧
照國師) 담진(曇眞),22)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23) 지인
(之印, 1102~1158)24) 등의 활동으로 선문의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25) 하지
만 지눌스님이 출가해서 수행을 이어가던 1170년에는 무신정변에 이은 무
신집권기가 시작되어 무신간의 권력 다툼과 이에 편승한 불교계의 혼란이
극에 달했고, 이후 20여년에 걸친 무신간의 권력 다툼을 종식시킨 최충헌
(崔忠獻)은 탄연의 대표적인 제자였던 대선사 연담(淵湛)을 비롯해서 10여
명의 스님을 영남으로 유배시킨다.26) 이와 같은 사굴산문의 급격한 변화와
불교계 안팎의 혼란은 지눌스님의 수학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
이다.27)
19) 『조당집(祖堂集)』권17,「명주굴산고통효대사(溟洲崛山故通曉大師)」.
20) 최언휘(崔彦撝),「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오진탑비」,『(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가산문고, 1994), pp.132-157.
21) 최인연(崔仁渷),「봉화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교감역주) 역대고승비
    문 고려편 1』(가산문고, 1994), pp.364-403.
22) 혜조국사 담진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의 송(宋)나라 유학
    에 동행하였고, 정인도진(淨因道臻, 1014~103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왕명
    을 받들어 요(遼)본 대장경 3부를 구입하여 온다. 왕사에 책봉된 후에는 예종의
    아들 지인(之印)을 제자로 맞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과
    의 교유도 깊었다.[김상영,「고려중기의 선승 혜조국사와 수선사」,『(이기영박사
    고희기념논총) 불교와 역사』(한국불교연구원, 1991) 참조.]
23) 이지무(李之茂),「산청단속사대감국사탑비」,『(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3』(가산문고, 1994), pp.398-419.
24) 임종비(林宗庇),「광지대사 지인 묘지명」,『(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3』
    (가산문고, 1994), pp.348-358.
25) 김상영,「고려시대 선문연구」(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pp.114-130.
26) 『고려사(高麗史)』 권129, 「열전(列傳)」42,「반역(叛逆)」3의 최충헌(崔忠獻).
27) 지눌스님도 『권수정혜결사문』의 첫머리에서 ‘불법을 빙자해서 이양의 길에 구
    구하고 풍진의 세상에 골몰한다’고 하면서 권력에 편승한 당시의 불교계 비판
    하였다.(韓4, p.698a16-20) 지눌스님 당시의 고려 사회 및 불교계의 혼란상과 지
    눌스님의 관계에 대해서는 채상식의 「고려후기 수선결사 성립의 사회적 기반」
    (『한국전통문화연구』 6, 효성여자대학교한국전통문화연구소, 1990)와 진성규의「정
    혜결사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보조사상』 5・6, 보조사상연구원, 1992) 등이 참
    고된다.

 지눌스님의 출가 이후의 수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스님의 비
문에서는 배움에는 항상하는 스승이 없었고, 오직 도만을 좇았다고 할 뿐
이다. 다만 『권수정혜결사문』을 통해서 스님이 어려서 출가하여 선원을 두
루 다니면서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탐구해서 그 요점을 정리할 정도로
공부가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8)
28)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698a9-12.

지눌스님은 25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한다. 그리고 스님은 같은 시기에
있었던 담선법회(談禪法會)29)에 참석했던 스님들 가운데 10여 명에게 정혜
결사를 제안한다. 지눌스님의 제안은 항상 정(定)을 익히고 혜(慧)를 고르
게 함을 본분으로 삼고, 예불하고, 경을 읽고, 노동하고, 울력하는 데 이르
기까지 각자 소임에 따라 경영하는 결사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오랜 토론
끝에 모두가 지눌스님의 제안에 동의하고, 다음날 결사를 하게 되면 ‘정혜
(定慧)’라고 이름하자고 약속하고 맹세하는 글까지 만들어서 뜻을 맺었다.
하지만 승과의 결과에 따라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맹세를 실행으로 옮기
는 못하였다.
29) 담선법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동국이상국집』 권25의 「용담사총림회방(龍潭寺
    叢林會牓)」과 이만의「담선법회에 관한 연구」(『한국불교학』10, 한국불교학회,
    1985)가 참고된다.

 

2) 깨달음과 교화
지눌스님은 담선법회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1182) 남쪽으로 내려
가 창평(昌平)의 청원사(淸源寺)에 머무른다. 스님은 3년 정도 지낸 이곳에
서『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다음의 구절에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체
험한다.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진성은 항상 자재하다."30)
30)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大48, p.353b4-5.

지눌스님은 이 구절을 보고 놀라 기뻐하며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未曾
有]을 얻었다. 스님은 일어나 불전을 돌면서 그 구절을 외우고 생각하며 스
스로 그 뜻을 깨달았다.

스님은 1185년 가을에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자리를 옮긴
다. 이곳에 살면서도 항상 선문에서 가르치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도리
를 마음에 새기면서 수행을 멈춘 날이 없었다.31) 하지만 한편으로는 ‘화엄
교에서는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을 어떻게 설했을까?’라는 의문이 가시지
를 않았다. 화엄강사를 찾아가 물어보기도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얻
지 못하였다. 그래서 산으로 돌아와 부처님의 말씀이 마음의 근본[心宗]
에 계합하는 이치를 구해서 대장경을 열람하며 3년을 궁구하였다. 그러
던 어느 날 지눌스님은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서 한 티끌이 대천경
(大千經卷)을 담고 있다는 비유에 이어서, 여래의 지혜도 중생의 몸 가
운데 구족해 있지만, 다만 모든 범부와 어리석은 이들이 알지 못하고 깨
닫지 못할 뿐32)이라고 한 말씀에서 경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33) 
「여래출현품」의 이 가르침은 이전에 깨달았던 『육조단경』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31) 「화엄론절요서(華嚴論節要序)」, 韓4, p.767c4-6.
32)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大10, p.272c22-25.
33) 「화엄론절요서(華嚴論節要序)」, 韓4, p.767c4-17.

그런데 지눌스님은 이 구절에서는 지금의 범부가 최초로 믿음에 들
어가는 문이 자세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시 이통현(李通玄,
635~730)의 『신화엄경론』을 열람하였다.34) 그 가운데 십신(十信)의 초위
(初位)를 해석하면서 각수(覺首)보살의 각(覺)을 세 가지로 해석한 부분35)
과 범부가 십신에 들기 어려운 것은 자기 마음이 부동지불(不動智佛)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36)이라고 한 등의 구절을 보고 다시 한 번 선(禪)과 교
(敎)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였다.37) 그래서 지눌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은 교
(敎)가 되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 되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의 마음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설파하게 되었다.38)
34) 이통현의 화엄사상에 대해서는 임상희의「李通玄의 華嚴思想 硏究」(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와 小島岱山의 「李通玄の根本思想: 一眞法界の形成
    とその思想史的意義」(『印度學佛敎學硏究』 31-2, 日本印度學佛敎學會, 1983),「韓
    國佛敎における華嚴思想の展開: 『華嚴論節要』を中心として」(『理想』 606, 理想
    社, 1983),「新華嚴經論の文獻學的竝びに注釋學的硏究」(『佛敎學』, 1984) 등이 참
    고된다.
35)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大36, p.815a1-10.
36)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大36, p.819a29-b2.
37) 지눌스님은 80권본『화엄경』의「여래출현품」에서 여래출현의 갖가지 모습 가
    운데 여래심(如來心)의 열 번째 모습을 보고서 감격을 했다. 이 부분은 60권
    본『화엄경』의「보왕여래성기품」가운데 여래의업(如來意業)에 해당하는 여래
    성기(如來性起)에 대응된다. 또 지눌스님은『신화엄경론』의 각수(覺首)보살에
    대한 해석에서 계합하였는데, 이는 성기(性起)에 바탕한 수행문이다.[전해주,
  「의상 성기사상이 보조선에 끼친 영향」,『의상화엄사상사연구』(민족사, 1993),
    pp.227-232 참조.]
38) 「화엄론절요서(華嚴論節要序)」, 韓4, pp.767c17-768a9.

지눌스님은 31세 되는 해(1188) 봄에 정혜결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거조
사(居祖寺)로 자리를 옮긴다. 담선법회에서 함께 결사를 약속했던 득재(得
才) 선백이 거조사에 살면서 지난날의 약속을 실천하자는 요청을 여러 차
례 간곡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눌스님은 거조사로 와서 한편으로는『권
수정혜결사문』을 저술하고, 한편으로는 지난날 함께 약속했던 스님들을
모으며 결사를 시작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죽거나, 병들고, 명
리를 구하는 등의 이유로 오지 못하고, 결국 서너 명이 모여 결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1190년, 지눌스님은 『권수정혜결사문』을 배포하면서 정혜
결사를 시작하였다.39) 거조사의 정혜결사는 밤낮으로 정(定)을 익히고 혜
(慧)를 고르게 하는 수행으로 일관하였고, 8년이 지난 후에는 더 이상 수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지눌스님은 장소를 옮
기기로 결정하고, 제자 수우(守愚)를 시켜 강남의 좋은 도량을 찾게 하였
다. 그리고 지눌스님은 일부 수행자들과 함께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
無住庵)으로 옮겨 정진을 계속하였다.
39) 정혜결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는 김방룡의「정혜결사의 연구현황과 과제」
   (『보조사상』 20, 보조사상연구원, 2003)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연구
    로는 이지관의「지눌의 정혜결사와 그 계승」(『한국선사상연구』, 동국대학교출판
    부, 1984), 고익진의「보조선의 정혜결사」(『한국의 사상』, 열음사, 1984), 최병헌의
   「정혜결사의 사상사적 의의」(『보조사상』 1, 보조사상연구원, 1987), 강건기의 「지
    눌의 정혜결사」(『목우자지눌연구』, 부처님세상, 2001) 등이 참고된다.

지눌스님은 상무주암에서 바깥 인연을 모두 끊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
하였다. 그러던 중『대혜어록』에서,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
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
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는 것이니, 홀연히 눈이 열리면 비로소 모두가 집안 일
[屋裏事]임을 알 것이다.’40)라고 한 가르침에서 계합하여 알고는 더 이상
답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편안하고 즐거웠다고 한다. 지눌스님은 지난날
보문사에서 지낸 이후로 10여 년 동안 정견(情見)이 없어지지 않아서 가슴
에 뭔가 걸려 있는 것처럼 답답했는데『대혜어록』의 이 가르침에서 계합하
고는 더 이상 답답하지 않고 마음이 안락(安樂)해졌다는 것이다. 비문에서
는 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혜해(慧解)가 더욱 높아지고 대중들이 스님을
종사(宗師)로 우러렀다고 하였다.
40) 『대혜어록(大慧語錄)』, 大47, pp.893c28-894a2.

지눌스님은 1200년에 제자 수우가 불사를 하고 있던 송광산(松廣山)의
길상사(吉祥寺)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1205년에는 길상사의 중창 불사
가 마무리되어, 10월 초하루부터 120일 동안 이를 축하하는 경찬법회(慶讚
法會)를 열었다. 이 법회는 개당(開堂)의 성격을 띠었고, 지눌스님은 낮에
는『대혜어록』을 설하고 밤에는 선을 닦으며 낙성을 축하하였다. 이전부터
지눌스님을 존경하던 왕은 산 이름을 송광산에서 조계산(曹溪山)으로, 절
이름을 길상사에서 수선사(修禪社)로 바꾸는 것41)을 허락하고 어필(御筆)
로 사액하여 축하한다. 지눌스님은 또한 이 법회 기간에『권수정혜결사문』
을 다시 간행하여 배포하고,『계초심학인문』을 간행한다. 이 법회는 중창
불사의 낙성법회인 동시에 수선사 결사의 시작을 알리는 개당법회였던 것
이다.
41) 『권수정혜결사문』에서는 정혜사(定慧社)를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다고 하였
   다.(韓4, p.707c15-16)

지눌스님은 수선사에서『금강경』,『육조단경』,『화엄론』,『대혜어록』 등
의 경론을 의거해서 가르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
解門), 경절문(徑截門) 등의 삼문(三門)을 열어서 수행을 지도하였다. 이러
한 스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믿음에 드는 사람이 많았으며, 선학의 융성
함이 비교할 수 없었다.

지눌스님은 1210년 3월 27일에 수선사에서 입적한다. 비문에 따르면, 스
님은 이 해 2월에 어머니 천도를 위해 수십 일 동안 법연을 베풀었고, 3월
20일에 병을 보였으며, 입적하기 전날에는 목욕을 마치고 시자와 더불어
방장에서 밤새 묻고 답하였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법복을 갖추고 양치를
마친 후 법고를 울려 대중을 모이게 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법당에 올라 향
을 올리고 법상에서 설법하였다. 스님은 전날 방장에서의 문답을 들어서
묻고 답하며 설법을 하고, 마지막으로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몇 번 내려치
고는, “천 가지・만 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주장자
를 짚은 채 그대로 입적하였다. 스님이 입적한 후 다비하고 사리를 수습하
여 수선사 북쪽 기슭에 부도로 모셨다.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
師),’ 탑호는 ‘감로(甘露)’이며, 세수는 53세, 법랍은 36세였다. 그리고 스님
이 입적한 이듬해(1211) 사법(嗣法) 제자 혜심선사가 행장을 갖추고, 김군
수가 비문을 지었다.42)
42) 「지눌비문」, 『동문선』 권117, pp.25左6-28右1.

 

3) 저술과 영향
지눌스님은 수선사에서 많은 전적을 간행하고 아울러 다양한 저술을 남
겼다. 그리고 혜심(慧諶, 1178~1234)에게 법을 전하여 수선사를 이끌게 하
였다.

지눌스님의 비문에서는 스님이 남긴 저술이『결사문』,『상당록(上堂
錄)』,『법어가송(法語歌頌)』이 각 1권이었고, 임종 전후의 사정을 담은 『임
종기』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지눌스님의 저술은『권수정
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1권,『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1권,『수심
결(修心訣)』1권,『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3권,「육조법보단경발(六祖法
寶壇經跋)」,『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並入私記)』1권,『원
돈성불론(圓頓成佛論)』1권,『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1권 등 8부 9권 1편
이 있다.43) 아쉽게도 비문에 전하는 지눌스님의 법어집은 지금 볼 수 없다.
43)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韓國佛敎撰述
    文獻總錄)』(동국대학교출판부, 1976, pp.108-120)에서는 비문에 이름만 전하는 책
    을 포함하여 스님의 저술을 14부 15권으로 파악하였고, 현존 저술은 10부 11권
    으로 밝혔다. 하지만『한국불교전서』제4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82)에서는 9부
    를 수록하였고, 보조사상연구원의『보조전서』(불일출판사, 1989)에는『한국불교
   전서』제4책의 지눌스님 저술 전부를 수록하고, 부록으로『염불요문』1권과「목
    우자법어송」1부 등 전체 11부을 수록하였다. 이 책에서 현재 전해지는 저술을 8
    부로 파악한 것은 이미 일실된 저술 이외에『염불요문』,「목우자법어송」,『진심
    직설』은 논외로 하였기 때문이다.『염불인유법문』또는『염불인유경』으로도 불
    리는『염불요문』은 이미『한국불교전서』에 수록되지 못하였고, 이후의 연구에
    서 지눌스님의 저술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었다.[고익진,「보조선맥의 정토사상
    수용 -새로 나온『염불인유법문』을 중심으로-」,『불교학보』23(불교문화연구원,
    1986) 참조.]「목우자법어송」은 지눌스님의 비문에서 언급된『법어가송』의 일부
    일 수도 있겠지만 이름 없는 단 한편의 게송으로 진위를 확정지을 수 없는 상황
    이다. 또한『진심직설(眞心直說)』은 널리 알려진 저술이지만 이전에도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최근에는 이 책의 저자를 다르게 추정하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하였다.[최연식,「『진심직설』의 著者에 대한 재고찰」,『한국도서관・정보학
    회지』31-2(한국도서관・정보학회, 2000) ; 김방룡,「『진심직설』의 著書에 대한 고찰
    -『진심직설』은 보조지눌의 저서이다-」,『보조사상』15(보조사상연구원, 2001) ; 최연
    식,「『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진단학보』94(진단학회, 2002) 참조.]
    지눌스님의 저술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임영숙,「지눌의
    찬술선서와 그 소의전적에 관한 연구」,『서지학연구』1(서지학회, 1986) ; 이종익,「보
    조 저술의 서지학적 해제」,『보조사상』3(보조사상연구원, 1989) ; 종진,「보조지눌의
    선사상에 대한 재조명」,『(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 한국불교문화사상사』상
    (가산문고, 1992) 참조.]

현재 전해지는 지눌스님의 저술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에 이루어진 것은
『권수정혜결사문』(1190)44)이다. 이후『계초심학인문』(1205),45)『화엄론절
요』(1207, 1월),46)「육조법보단경발」(1207, 12월),47)『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
기』(1209)48) 등의 순서로 저술이 이루어졌고, 이들 저술은 서기(署記)를 남
기고 있어서 지눌스님의 찬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수심결』,『원돈성불
론』,『간화결의론』은 서기가 전하지 않아 저술 시기를 분명하게 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수심결』은『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이전에 저술되었고,
『원돈성불론』과『간화결의론』은『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이후에 저술
된 것으로 여겨진다.
44) 『권수정혜결사문』에서는 1190년과 1205년 이후에 이 책을 간행한 사실을 밝히
    고 있다.(韓4, p.707c13-18) 두 번째의 간행 기록은 승안 5년 경신(1200)이라고 밝
    히고 있어서 혼동될 수 있지만, 이 기록은 결사를 옮긴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기록에 이어서 결사의 이름을 정혜사에서 수선사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있
    으므로 수선사로 이름을 바꾼 1205년 이후에 책의 간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
    정할 수 있다. 이 해 가을에 있었던 경찬법회는 개당법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
    므로 이 법회에서 수선사 결사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이 책을 간행하여 배포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5) 『계초심학인문』이 1205년에 간행된 것은,「大明崇禎十四年(1640)庚辰 六月日
    天冠山天冠寺 重刊」의 간기가 있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 합철된 『계초심학
    인문』의 서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泰和乙丑(1205)冬月 海東曹溪
    山老衲 知訥誌」라는 명문이 있다.
46) 『화엄론절요』는 1207년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丁卯正月八日 海東曹溪山沙門 知訥 序」(韓4, p.768b7-8)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47) 지눌스님은 이 발문의 첫머리에서 태화(泰和) 원년(元年, 1207) 11월에 이 발문
    을 부탁받은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에 「海東曹溪山修禪社沙門 知訥跋」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韓4, p.739b-c)
48) 이 책의 말미에는「大安元年己巳(1209) 夏月日 海東曹溪山 牧牛子 知訥私記」
   (韓4, p.766b3-4)라는 기록이 있다.

『수심결』에는『대혜어록』이 인용되고 있어서 상무주암에서의 깨달음 이
후에 저술된 것을 알 수 있으며, 경절문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이전에 저술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원돈성불론』,『간화결의론』등에서 볼
수 있는 삼현(三玄)의 해석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수심결』은『법집별행
록절요병입사기』이전에 저술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수심결』에는
돈오점수의 수행이 간명하게 설해져 있어서『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대의를 요약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49) 현재 한국에 전하는『수심결
(修心訣)』의 가장 오래된 판본인 언해본은『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1467)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그 이후에 간행된 대부분의 판본도 이
책의 제목을『목우자수심결』 또는『보조국사수심결(普照國師修心訣)』등
으로 지눌스님의 법호를 밝혀서 간행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저자와 책이름
을 제목으로 함께 표기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의 구성과 내용, 사용된 문체
도 지눌스님의 다른 저술과 대체로 유사하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 책
이 지눌스님의 저술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49) 이종익,「보조저술의 서지학적 해제」,『보조사상』3(보조사상연구원, 1989),
   p.154.

『원돈성불론』과『간화결의론』의 두 책에는 이를 처음 간행한 혜심선사
가 책의 발견 경위와 간행 과정을 발문 형식으로 남기고 있어서50) 지눌스
님의 저술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혜심선사의 발문에서는, 이 두 책을 지눌스
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유고의 형태로 발견하였으며, 당시 석령
(錫齡社) 사주였던 희온(希蘊)이 듣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힘써 유통시킬
것을 청하여, 홍주(洪州)의 거사 이극재(李克材)에게 권하여 재물을 보시
하게 해서 판에 새겨 유통시켰다고 하였다.
50)『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7b13-24.

「육조법보단경발」은 1207년의 저술 기록이 있는 단편이다. 지눌스님이
이 발문을 지은 것은 당시 수선사 결사에서 정진하던 담묵(湛黙)이라는 스
님이 1권본『법보기단경』을 가져와서 이 책의 간행을 발원하고 발문을 청
하였기 때문이다. 지눌스님의 이 발문은 당시에 담묵스님과 주고받았던 대
화를 옮기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내용 가운데는 지눌스님 자신이『법보
기단경』을 평생 동안 종승(宗承)하며 수학의 귀감으로 삼았음을 밝히면서,
이 책의 간행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귀감으
로,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국사가 남종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몸은 생
멸하고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설한 『단경』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는
것을 비판한 내용을 소개하고,『단경』의 본뜻을 일러준다. 지눌스님은 담
묵스님에게 “먼저 반드시 몸 가운데 보고 듣는 성품을 돌이켜 관하여 진여
를 요달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조사의 신심일여(身心一如)의 비밀한 뜻을
볼 것이다”라는 등으로 가르치고 혜충국사가 꾸짖은 본뜻을 살필 것을 가
르쳤다.51)
51)「육조법보단경발(六祖法寶壇經跋)」, 韓4, p.739b-c.

서기가 전하는 저술 가운데 가장 만년에 이루어진『법집별행록절요병
입사기』는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의『법집별행록』52)을 절요하고 지
눌스님의 사기를 아울러 붙여서 간행한 책이다. 지눌스님이『법집별행록』
에서 절요한 내용은 하택종(荷澤宗)을 중심으로 선의 사종(四種)을 해석한
부분과 선의 특징을 법(法)의 수연불변(隨緣不變)과 인(人)의 돈오점수(頓
悟漸修)로 해석한 부분이다.『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는 전체 내용의 7할
이상이 돈오점수의 해석에 대한 지눌스님의 사기로 이루어져 있다. 지눌스
님은 돈오점수에 대한 사기에서 종밀의『선원제전집도서』와 청량징관(淸
凉澄觀, 738~839)의『정원신역화엄경소』(이하 『정원소』)53)에서 밝힌 돈점론
의 특징을 비교하고,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의『만선동귀집』과『종
경록』을 이끌어서 선문 돈점론의 특징을 보완한다. 지눌스님이 청량의 수
증론을 인용하여 같이 보인 것은 교(敎)를 배우는 사람들이『정원소』의 수
증론으로써 선법에 온전히 수용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바로잡아 바른 믿음
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였다.54) 지눌스님은『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말미에 종밀이『법집별행록』에서 언급하지 않은『대혜어록』의 경절문 어
구를 인용하여 붙였다.
52) 지눌스님이 절요한『법집별행록』은 전해지지 않지만,『권수정혜결사문』에서
    이 책을 인용하고 있으며,(韓4, pp.702c15-703a2)『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
   서는『권수정혜결사문』에서 인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韓4, p.745b10) 현재
   『 법집별행록』은 종밀의『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
    圖)』(卍110, pp.866a1-875b12)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宇井伯
    壽,『禪宗史硏究』3(岩波書店, 1966), pp.477-510 ; 鎌田茂雄,『宗密敎學の思想史的硏
    究』(東京大學出版會, 1975), pp.391-410 ; Yun-hua Jang,「『법집』과 지눌의 宗密觀」,
   『보조사상』 2(보조사상연구원, 1988), pp.186-192 참조.] 한편, 지눌스님은『법집별
    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에서 결락된 부분을 보충
    하기도 하였다.(韓4, pp.746b13-747a12)
53)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 권2, 「제오변수증천심(第五辯修證淺
      深)」, 卍7, pp.502c-504c.
54)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747c11-13.

 지눌스님의 제자 가운데 이름이 전하는 선사는 수우(守愚)와 혜심(慧諶)
뿐이다. 수우는 남쪽으로 결사를 옮길 때 장소를 정하고 중창불사를 담당
했던 기록만 전한다. 혜심은 지눌스님의 법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님이
입적한 후 스님의 행장을 갖추어 비문을 짓게 하고,『원돈성불론』과『간화
결의론』을 간행하여 지눌스님의 덕화를 알렸던 대표적인 제자였다.

혜심선사가 지눌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어머니의 별세가 계기가 되었다.
혜심선사는 1202년에 수선사에서 지눌스님 아래에 출가한다. 혜심선사의
비문55)에 전하는 지눌스님 관련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혜심선사는
120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지만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듬해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어머
니를 수선사에서 천도하고, 자신은 지눌스님 아래에 출가하였던 것이다.
55) 이규보(李奎報),「조계산제이세고단속사주지수선사사주증시진각국사비명병서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幷序)」(『동국이상국집』 
    권 35 ; 『조선금석총람』 권상, pp.462-463).

혜심선사는 1205년에 지눌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는다. 혜심은
이 해 가을에 억보산(億寶山)에서 정진하는 지눌스님을 찾아가게 된다. 이
때 산 아래서 잠깐 쉬는 동안 지눌스님이 멀리서 시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
고 얻은 바가 있었다. 지눌스님을 만난 혜심은 얻은 바를 게(偈)로써 보였
다. 이에 지눌스님은 여러 날을 함께 지내면서 묻고 답하였다. 마지막에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와 대혜의 간화 십종병 등을 들어서 한참을 묻
고 답하였다. 문답이 끝난 후 지눌스님은 혜심을 얻어서 죽어도 한이 없다
고 칭찬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1208년에는 지눌스님이 혜심을 불
러 수선사를 물려주고 규봉(圭峯)으로 가서 안거하려는 뜻을 비추었다. 하
지만 혜심은 이를 고사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정진한다. 그리고 1210년에
지눌스님이 입적하자 왕명에 따라 수선사에서 개당하였다.

혜심이 갖춘 행장을 바탕으로 세워진 지눌스님의 비문에서는 ‘잠들었던
선풍을 다시 떨치게 하고 어두웠던 조사의 달빛을 다시 밝힌’56) 분으로 지
눌스님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후대의 선문에서는 『선문조사예참문』을 만들
어서 일상의 예참(禮懺)에서 인도와 중국의 33조사와 신라의 대덕, 그리고
구산문의 조사와 나란히 지눌스님을 예경하였다. 그 예참문에는 “원력으로
생을 받아 조사의 도를 중흥시킨 해동의 불일보조국사”57)라고 하였다.
56) 『동문선』 권117, p.23右3.
57)「선문조사례참(禪門祖師禮懺)」,『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
    儀梵音刪補集)』 권중(韓11, p.493a18-19).

지눌스님의 덕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베풀어지고 있다. 혜심선사를 이어
서 수선사에서는 16국사가 배출되었고,5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불교정책
은 지눌스님이 세운 규범을 기준으로 삼았다.59) 지금도 전해지는 한국 출
가자의 강원교육은 지눌스님의 사상과 저술로써 그 기초를 삼았으며,60) 경
허의 결사를 비롯해서 최근의 선우도량결사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에 나
타나는 수행가풍을 회복하려는 노력에는 반드시 지눌스님의 정신을 본받
고자 하였다.61) 지눌스님은 지금도 한국불교의 수행가풍을 중흥시킨 조사
로 존숭되고 있는 것이다.
58) 이지관,「지눌의 정혜결사와 그 계승」,『한국선사상연구』(동국대학교출판부,
    1984).
59) 김영태,「조선조불교와 목우자사상」,『보조사상』3, 보조사상연구원, 1989.
60) 서종범,「강원교육에 끼친 보조사상」,『보조사상』3(보조사상연구원, 1989) ; 전해
    주,「『도서』가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보조사상』14(보조사상연구원, 2000) 참조.
61) 김호성,「결사의 근대적 전개양상 : 정혜결사의 계승을 중심으로」,『보조사상』
    8(보조사상연구원, 1995) ; 강건기, 「현대결사운동에 미친 지눌의 정혜결사」, 보
    조사상』5・6(보조사상연구원, 1992) 참조.

 

3. 수록된 저술의 개요

 

이 책에는 현재 전해지는 지눌스님의 저술 가운데『법집별행록절요병입
사기』와『화엄론절요』 및 단편을 제외하고,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수록하
였다.『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화엄론절요』를 제외한 것은 너무 많
은 분량이 가장 큰 이유이다. 또한『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는 전통강원
의 교과목으로 가르쳐지고 있으며, 별책으로 다양하게 유통되고 있다.『화
엄론절요』는『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이 책에 수록한 모든 저술을 포
함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이며, 서문과 사기(私記) 형태의 일부 내용 외에는
이통현의『신화엄경론』을 절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화엄론절요
서」만을 수록하였으며, 여기에는 보문사에서 선교일치를 확신한 지눌스님
의 깨달음 기연이 서술되어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1)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 정혜 닦는 결사를 권하는 글
『권수정혜결사문』은 지눌스님이 33세(1190)에 지은 최초의 저술로, 정혜
결사의 시작을 알리고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행하기를 권하기 위해서 지
은 ‘권수문(勸修文)’이다.62)
62) 이 책은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할 때와 수선사로 장소를 옮겨서 결사를
    다시 시작할 때 각각 간행되었다.(韓4, p.707c18-23) 지눌스님 이후 근대에 이르
    기까지『권수정혜결사문』을 비롯한 지눌스님 저술의 고간본에 관한 서지학적
    내용에 대해서는 이종익의「보조저술의 서지학적 해제」(『보조사상』 3, 보조사상
    연구원, 1989)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권수정혜결사문』의 학술적인 번역과 주
    석은 강건기의『정혜결사문강의』(불일출판사, 2006)가 참고된다.

이 책은 서언, 본문, 결어 형태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 부분
에서는 지눌스님이 25세에 참여하였던 보제사 담선법회에서 여러 사람과
모여서 정혜결사를 제안하게 된 배경과 제안의 내용이 서술되었고, 본문에
서는 제안에 따른 질문과 대답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결어 부분에서는 문
답을 마친 후 다 함께 정혜결사를 약속하면서 맺었던 서원, 거조사에서 결
사가 시작되기까지의 사정, 결사의 참여를 권하고 불보살께 축원하는 내용
등이 덧붙여졌다. 7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형식은 25세에 참여했
던 담선법회에서 있었던 문답을 정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책에서 서술
된 내용은 지눌스님이 이미 『육조단경』과 화엄을 통해서 깨달음을 체험한
이후에 이루어진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지눌스님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한 마음[一心]이 중생의 미혹과 부처님
의 깨달음의 근본임을 밝히고, 마음을 여의고 부처를 구하는 것은 옳지 않
다고 정의한다. 이에 따라 7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본문에서는 정혜 수행
이 바로 이 마음을 깨닫고 마음을 닦는 수행이라고 역설한다. 정혜는 성성
적적(惺惺寂寂)의 마음을 닦는 수행이며, 성성적적의 마음은 누구나 지니
고 있는 미묘한 자기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눌스님은 발심에서부
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수행의 계위에 따라 이지(理知)・지관(止觀)・정혜
(定慧)・보리열반(菩提涅槃) 등으로 이름이 다르지만 적(寂)과 지(知)를 여
의지 않으며, 적지(寂知)는 바로 성성적적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첫 문답에서는 말법론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토 수행을 주장하는 사람
들에 대해, 지혜 있는 사람의 수행으로 대답한다. 지혜 있는 사람의 수행은
근본을 궁구하는 수행이며, 이는 자기의 성품인 자기의 마음을 신해(信解)
하고 성품을 의지해서 선을 닦는 것이다. 신해가 바르지 못하면 공행(功行)
도 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 문답부터 다섯째 문답까지는 자기의 마음을 반조하여 신해
하고 정혜(定慧)의 두 문에 의지하여 마음의 허물을 다스리는 정혜 수행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논한다. 지눌스님은 먼저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 이 깨
달음을 의지하여 닦는 수행을 득의수(得意修), 의해훈수(依解薰修), 신해이
수(信解而修), 의오이수(依悟而修) 등으로 표현하고, 먼저 깨닫고 닦는 수

행이라야 정혜를 함께 닦으며 온갖 수행을 가지런히 닦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지눌스님은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정혜는 계・정・혜 삼학을 닦는 수
행이며, 이는『육조단경』의 가르침처럼 자성을 여의지 않고 닦는 돈문의
칭성삼학과 각각의 뜻에 따라 차례대로 닦는 점문의 수상삼학이 있다고 하
였다. 이러한 지눌스님의 수행론은 이후의 저술에서 선오후수(先悟後修)
로 설명되는 돈오점수(頓悟漸修)론으로 나타난다.

여섯째와 일곱째 문답은 이타 설법과 정토 수행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
도 정혜가 근본임을 역설한다. 스님은 이타 설법을 하는 사람 가운데 부처
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근본을 밝히는 사람을 진실한 수행자라고 하고,
명리를 구하는 마음으로 설법하는 사람을 세간의 문자법사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미 다른 이를 제도할 원을 내었다면 먼저 정혜를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스님은 염불로써 정토를 구하는 수행도 먼저 부처님의 뜻
을 알고 닦는 것[先知佛意而修]이어야 바른 수행이며, 이 수행도 먼저 진여
인 자기의 마음을 믿고 정혜를 오로지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지눌스님은 이 책에서 부처를 구하는 근본은 자기의 마음을
닦는데 있으며, 정혜를 닦는 것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은 성성적적의 자기
마음을 닦는 것임을 밝혀서 정혜결사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한편 지눌스
님은 문답의 말미에 조종문하(祖宗門下)에서 이심전심으로 비밀스럽게 전
하는 수행을 언급하고 있다.63)
63) 이 책의 문답을 통해 드러나는 지눌스님의 수행관은『육조단경』과『신화엄경
    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또 법안종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의 영
    향도 받았다.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저술이 인용되기는 하지만『목우
    자수심결』이나『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 정혜
    수행과 관련해서는『능엄경』의 인용도 주목되며, 성성적적의 수행은『선종영가
    집』의 내용에 의거하고 있다. 한 마음[一心]을 근본으로 하는 수행의 요체와 관
    련해서는『대승기신론』의 뜻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2)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 처음 발심하여 배우는 사람에게 경계하는 글
『계초심학인문』은 48세(1205)에 지어진 저술로, 수선사 정혜결사의 청규
(淸規)로 찬술된 책이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책에서는 처음 발심
하여 입문한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경계하고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범을
밝혔다.

글의 전체 구성은, 처음 발심하여 배우는 사람의 입문 절차와 기본규범
[夫初心之人~常須遠離], 일상생활 규범[無緣事~須肅恭廻避], 대중공양하
고 법당에서 예불할 때 경계해야 할 사항[辦道具~影響相從], 중요(衆寮)에
거처할 때 경계할 일[居衆寮~豈爲有智慧人也], 사당(社堂)에 머무를 때의
태도와 마음가짐[住社堂~以道爲懷者歟], 참회와 정진당부[無始習熟~切須
勉之] 등의 여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계초심학인문』에서 설해진 이러
한 규범은 예불·전경·집로·운력 등을 소임에 따라 경영한다고 간략히 밝
혔던 『권수정혜결사문』에서의 일상 수행이 구체적인 청규의 형태로 발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64) 이 글의 마지막에서 이와 같은 모든 수행이 결국은
정혜를 밝히고 깨달음을 이루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은
특히 주목된다.65)
64) 최법혜,「보조 정혜결사와 수선사 청규」,『보조사상』5・6合(보조사상연구원,
    1992) 참조.
65) 『계초심학인문』은 원효(元曉, 617~686)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야
    운(野雲)선사의 『자경문(自警文)』과 함께 『초발심자경문』으로 합본되어 처음
    발심한 학인의 교과서로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계초심학인문』은 일찍
    이 중국과 일본의 대장경에 수록되어 전해졌다.[이종익,「보조저술의 서지학적 해
    제」,『보조사상』3(보조사상연구원, 1989) 참조.]

3)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 목우자의 마음 닦는 글
『목우자수심결』은 저술 시기가 분명하지 않지만, 지눌스님의 41세(1198)
이후부터『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저술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66) 책의 내용 가운데『대혜어록』이 인용되었고, 삼현(三玄)
과 경절문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6) 『목우자수심결』은『수심결(修心訣)』,『고려보조선사수심결(高麗普照禪師修心
    訣)』등의 제목으로 전해졌으며, 이 책은 일찍이 중국과 일본의 대장경에도 수
    록되었다.[이종익,「보조저술의 서지학적 해제」,『보조사상』3(보조사상연구원,
    1989) 참조.]『목우자수심결』의 학술적인 번역과 주석은 강건기의『수심결 강의
    -마음 닦는 길-』(불일출판사, 1990)이 참고된다.

이 책은『권수정혜결사문』처럼 서언, 본문, 결어 형태의 세 부분으로 구
성되었다. 서언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닦아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윤회를
면하고자 하면 부처를 구해야 하며, 부처는 곧 마음이기 때문에 부처를 구
하고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9
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마음을 깨닫고,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는 법을 설명
하였다. 결어에서는 이상의 가르침에 따라 게으름과 물러남이 없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아울러 목숨을 돌보지 않는 용기 있는 수
행을 바라고 있다.

9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본문에서 지눌스님은, 깨달아야 할 마음에서
부터 깨달음을 의지하여 자성문과 수상문의 정혜로 닦는데 이르기까지, 모
든 성인들의 법칙이라고 일컬었던 돈오점수의 수행을 자세하게 밝혔다. 첫
째 문답에서 셋째 문답까지는 불성인 자기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깨달음과
신통의 관계를 밝히고, 돈오점수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넷째 문답에서 여
섯째 문답까지는 자기의 마음을 깨닫는 견성과 견성하는 법, 그리고 깨달
아야 할 마음인 공적영지심을 논하였다. 일곱째 문답에서 아홉째 문답까지
는 깨달음 이후에 점수가 필요한 이유와 돈문의 자성문과 점문의 수상문
정혜수행으로 오후수(悟後修)를 해석하였는데, 수상문이라 할지라도 깨달
음을 의지하여 닦는 수행은 결국 자성문과 다름없이 성인을 이룬다고 하였
다. 특히 아홉째 문답에서 깨달음 없이 닦는 것은 오염수(汚染修)며, 닦음
이 깨닫기 이전이라면 참된 닦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4)『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 원돈으로 성불하는 논
『원돈성불론』은『간화결의론』과 함께 지눌스님이 입적한 후 유고가 책
상자에서 발견되었고, 5년 후(1215) 제자 혜심(慧諶)에 의해 간행된 저술이
다.67) 이 두 책은 질문과 대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68)
67) 『원돈성불론』의 학술적인 역주는 인경의「원돈성불론 역주」(『화엄교학과 간화
    선의 만남』, 명상상담연구원, 2006)을 참고할 수 있으며, 이외에 심재룡의「보조국
    사 지눌의『원돈성불론』상석 : 그의 선교일치체계를 중심으로」(『보조사상』13,
    보조사상연구원, 2000)도 참고된다.
68)『원돈성불론』과『간화결의론』은 지눌스님의 다른 저술과 달리 문답으로만 구
    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책을 완성된 저술이 아니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왜냐
    하면『권수정혜결사문』과『목우자수심결』은 서언・문답으로 이루어진 본문・결
    어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눌스님은『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도 서
    언・본문・결어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원돈성불론』은 전부 5개의 질문과 이에 대한 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눌
스님은 ‘먼저 자기 마음의 무명분별(無明分別)의 종자로써 모든 부처님의 부
동지(不動智)로 삼은 연후에 그 성품에 의지해서 선을 닦아야 비로소 미묘
함이 된다’라는 평소의 주장을 문답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하고 있다.

『원돈성불론』은 이통현의『신화엄경론』에서 밝힌 성불론을 근거로 설
해져 있다. 이 책에서는 이통현이 화엄의 대의를 분석하여『신화엄경론』을
저술한 근본 뜻이 말세의 대심범부로 하여금 생사하는 그 가운데서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를 단박에 깨달아, 그것으로써 처음 깨달아 발심하는 근원
을 삼게 한 것에 있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이해는 보문사에서『화엄경』의
「여래출현품」과『신화엄경론』을 통해서 화엄의 가르침이 선문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했던 지눌스님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동지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보광명지(根本普光明智)이
고, 이 근본지가 모든 부처님의 과지(果智)이다. 그리고 이 근본지는 이치
와 현상·성품과 모양·중생과 부처·자기와 남·더러움과 깨끗함·원인과
결과 등 모든 것의 체성(體性)이다. 화엄에서 하나의 이름에 따라 모든 부
처님을 갖추는 것도 근본보광명지 가운데 본래 모두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
라고 한다.

『원돈성불론』에서는 선종의 집착을 타파하는 말이 돈교의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선문의 가르침이 돈교와 같다고 주장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선문에서는 이념상전(離念相傳)이 단박에 법계를
증득하는 곳이므로 돈교의 이언절려(離言絶慮)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아
울러 지눌스님은 돈증법계처로서의 법문을 의상과 원효의 설로써 그 본뜻
으로 삼았다.

또한 지눌스님은 『신화엄경론』에서는 다만 일생에 공(功)을 마친다고
하였지, 일만 겁을 닦아서 성불한다는 글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일생성
불(一生成佛)을 강조한다. 초심의 범부가 깨달음을 얻는 것은 연(緣)을 만
나서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를 요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점수
의 공력이 다다른 연후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5)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화두를 들어 의심을 해결하는 논
『간화결의론』역시『원돈성불론』과 함께 유고로 발견되어 혜심스님에
의해서 처음 간행된 책이다. 이 책에서는『대혜어록(大慧語錄)』에 의거하
여 5개의 문답으로 간화선의 특징을 논하고 있다.

『간화결의론』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열 가지 병을 들
고, 이를 가려내는 이유를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근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교학에서 갖가지 뜻과 이치로 설명하는 것들도 결국은 알음
알이이며, 선문에서 교학의 가르침을 사구(死句)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알
음알이의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화두는 이러한 알음알이
를 타파하는 무기와 같기 때문에 다만 화두만 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
서 화두에 전제(全提)니 파병(破病)이라는 뜻을 붙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
라고 비판한다.

 

지눌스님은 계속해서 선문에서 알음알이를 타파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돈교와 원교의 이언절려(離言絶慮)의 가르침과 선문의 파집현종(破執現
宗)의 가르침이 다른 이유를 밝힌다. 또한 지눌스님은 삼문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서 삼문의 시설이 병을 타파하는 뜻이라고 결론짓는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대혜종고의 화두 드는 법을 소개한다. 그리고 선문에서 화두를
참구해서 뿜는 순간에 한 번 깨달으면 그 자리가 무장애법계를 몸소 증득
한 곳이라고 설명하고, 이 경지는 돈교의 말을 여읜 경계와는 다르다고 강
조한다.

끝으로 『간화결의론』에서는 화엄원교와 간화선의 차이를 논하고, 화두
를 참구하는 데 참의(參意)와 참구(參句)의 두 가지가 있음을 든다. 참의는
일부분 원돈문의 바른 이해를 낸 사람과 같다. 그러나 선문의 경절문을 닦
는 사람은 활구를 참구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6)「화엄론절요서(華嚴論節要序)」 :『화엄론절요』의 서문

『화엄론절요』는 당나라의 화엄학자인 이통현(李通玄)의『신화엄경론(新
華嚴經論)』40권을 3권으로 절요하고 간략히 사기를 붙인 책이다. 이 책은
논주도서(論主都序)와 수문해석절요(隨文解釋節要)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다. 논주도서(論主都序)는『화엄론절요』3권 가운데 제1권에서 제2권
의 전반부까지로서 이통현이『화엄경』의 특징을 열 가지 문으로 나누어 서
술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수문해석절요(隨文解釋節要)는 제2권의 후반
부에서 제3권까지로서, 80권본『화엄경』에 대한 이통현의 해석을 지눌스님
의 견해로 절요한 것이다.

이 서문은『화엄론절요』를 간행하면서 붙인 서문이다. 서문에는『신화
엄경론』을 만나게 된 인연과『신화엄경론』이 고려에 유통되지 못했던 이
유를 밝히고, 마지막에 이통현의 전기를 간략하게 남기고 있다.『신화엄경
론』을 만나게 된 인연을 소개한 내용 가운데는 지눌스님이 하가산 보문사
에서 화엄을 통해서 깨달음을 체험한 내용이 자세히 서술되고 있어서 더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지눌스님은 서문의 끝에 ‘정묘 정월 팔일 해동조계
산사문 지눌 서(丁卯 正月八日 海東曹溪山沙門 知訥 序)’라는 서기를 남겼
다. 이로써 이 책이 1207년의 저술임을 알 수 있다.69)
69) 일실되었던 『화엄론절요』는 일본의 금택문고(金澤文庫)에서 필사본으로 발견
    되어 1909년에 학계에 소개되었고, 1943년 이종익(李鍾益)에 의해서 한국에 알
    려졌으며, 김지견(金知見)이 이를 영인・출판(1968)하였다. 3권으로 이루어진
   『화엄론절요』의 필사본은 일본의 원종(圓種)이라는 사람이 1295년에 필사하였
    고 여러 차례 교정을 하였으며, 구두점을 붙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김지견,
   「지눌에서의 禪과 華嚴의 위상」,『보조사상』1(보조사상연구원, 1987) 참조.]

 

7)「조계산수선사불일보조국사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 : 
     조계산 수선사 불일보조국사의 비문

「조계산수선사불일보조국사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은 고
려시대 문신이었던 김군수(金君綏)에 의해서 찬술된 지눌스님의 비문이
다. 김군수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손자이다.
이 비문은 유신(柳伸)이 글씨를 쓰고, 1211년 12월에 보창(寶昌)이 새겼으
며, 왕명을 받든 김진(金振)에 의해 1213년 4월에 수선사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어 파손된 비석은 1678년 10월에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 스님의 지휘 아래 설명(雪明)스님이 일을 맡아
서 새로 건립되었다. 하지만 이 비는 비용과 관련한 사정으로 원래의 비문
이 완전하게 수록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원래 비의 음기는 전혀 수록되지
않았고, 대신 새로 건립할 때의 사정과 건립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
진 음기가 수록되었다.

김군수가 지은 원래의 비문은『동문선(東文選)』70)과『조선불교통사(朝鮮
佛敎通史)』71)에 수록되어 전하고, 조선시대에 새로 건립된 비문은『조선금
석총람(朝鮮金石總覽)』72)에 수록 되었다.『동문선』에 수록된 비문은 분명
하게 편찬 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며,『조선금석총람』에 수
록된 비문은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동문선』의 비문과『조선금석총람』의 비문은 각
각 원래의 비문과 다시 세워진 비문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73)
70) 『동문선(東文選)』 권117, pp.22-28.
71) 이능화(李能和),『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하(新文館, 1918), pp.337-342. 이
    자료에서는 비문을 지은 이의 관직, 비문을 쓴 사람, 새긴 인물, 비를 세운 사람,
    건립 연대 등『동문선』에서 누락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72)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하(조선총독부, 1919), pp.949-954.
73) 지눌스님의 비문의 여러 이본(異本)과 탁본에 대해서는 허흥식의「보조국사 비
    문의 이본과 탁본의 접근」이 참고된다.[『서지학보』 9, 1993 ; 『고려중후기불교사연
    구』, 일조각, 1994 ; 『지눌』, 예문서원, 2002 참조.]


비문에는 지눌스님의 탄생에서부터 출가와 오도(悟道), 정혜결사, 그리
고 입적(入寂)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가 순서대로 서술되었고, 입적할 당
시의 전후 사정과 입적 후에 있었던 지눌스님의 좌탈에 대한 논란까지도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특히 비문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육조단경』과『대
혜어록』을 통한 오도기연(悟道機緣)과 입적 당시의 설법에 관한 기록은 귀
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지눌스님의 비문은 지눌스님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4. 지눌스님의 선사상

지눌스님은 일찍이『육조단경』을 보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킨다는 법어에서 미증유의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화엄경』의「여래출
현품」과『신화엄경론』의 가르침에서 계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敎)와 조사의 마음을 전하는 선(禪)이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그리
고 10년 후, 스님은『대혜어록』의 법어에서 정견(情見)의 장애를 없애고 마
음의 안락을 이룬다. 이와 같이 계속된 깨달음의 체험은 각종 저술을 비롯
해서 지눌스님이 수선사에서 베풀었던 교화의 바탕이 되었다.

지눌스님의 저술에서 볼 수 있는 중심 내용은 선교일치와 돈오점수이며,
돈오점수를 바탕으로 하는 실제의 수행은 정혜수행과 간화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울러 그 모든 수행은 인연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보살
도의 구현으로 회향된다.

1) 선교일치
지눌스님은 깨달음의 법을 설하는 데 있어서 선(禪)과 교(敎)가 다르지
않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다. 스님은 당시의 수행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
를 치선(癡禪)과 광혜(狂慧)라고 표현하였다. 선을 닦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이 본래 원만하다는 말만 믿고 걸림 없이 자재한 행을 본받아 바른 수
행을 내버리고 헛되이 침묵만 지키고 앉았으며, 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경
론의 법상과 방편의 말에 집착하여 먼저 들은 것만 고집하고 스스로 물러
나고 굽히는 마음을 내어 수고스럽게 문자만 탐구한다는 것이다. 지눌스님
은 당시 수행자들이 이와 같이 잘못된 수행에 빠진 이유는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공함을 신해하고 이 신해를 의지하여 익히고
닦는 바른 수행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74) 수행자들
이 먼저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의지하여 익히고 닦으면, 언제
나 본래 깨끗하고 번뇌 없는 마음을 여의지 않고 수행하는 가운데 온갖 공
덕의 신통광명이 저절로 드러날 것인데, 도를 구하면서도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4)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700b5-23.

지눌스님이 선교일치를 확신한 것은『화엄경』의「여래출현품」과『신화
엄경론』의 가르침에 계합하면서였다. 지눌스님은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구족해 있다는「여래출현품」의 가르침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
로 마음의 근본을 가르치는 선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고, 범부가 최초로
믿음에 들어가는 입문처를 『신화엄경론』의 가르침에서 다시 확인하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와 조사의 마음을 전하는 선이 다르지 않다고
선언한다. 지눌스님이 선교일치를 선언한 것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선문의 가르침과 ‘중생의 무명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곧 모든 부처님의 근
본보광명지’라고 하는 교문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지눌스님의 이러한 확신은 실제 수행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여실하게 드
러난다. 선으로 입문한 사람은 교를 함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계합하
며, 교로써 입문한 사람은 선으로써 체험하도록 가르친다. 지눌스님은 스
스로를 지나치게 낮추어 수행에서 물러나는 생각을 일으키는[自屈] 수행
자에게는 자성의 문[性門]을 따르게 하며, 자기 마음이 본래 원만하다는 믿
음에 지나치게 안주해 있는[自恃] 수행자에게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
하는 문[修門]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가르친다.75) 성문(性門)과 수문(修門)
모두 먼저 자기의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본래 근원임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하여 닦는 수행문임은 물론이다.
75)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703c1-9.

 지눌스님은「화엄론절요서」에서도 선교일치 내지 선교겸수의 가르침을
보인다. 이 서문에서 지눌스님은,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이 본
래 미묘해서 문자에 얽매이지 않음을 조사의 도로써 알고, 다음으로 『신화
엄경론』의 가르침으로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법계의 본성이며 모양임을
파악하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교학자들이 말하는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
는 덕과 동체의 지혜와 자비의 공덕이 자기 분수 밖이 아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76) 먼저 자기의 마음을 알고, 다음으로 경론을 통해서 그 이치까지
도 알아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기의 마음이 둘이 아님을 분명히 하라는
가르침이다.
76) 「화엄론절요서(華嚴論節要序)」, 韓4, p.768a10-14.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는 경절문을 들어서 교와 선을 아울러
닦아야 하는 이유를 가르쳤다. 선문에 출가하였지만 부처님과 조사의 가
르침을 통해서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러준 법어이다. 지눌스님
은 ‘먼저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잘 살펴서 자기 마음의 참되고 허망함,
나고 죽음, 근본과 지말을 자신의 지해(知解)로 분명하게 밝히고, 다음으로
사량분별이 끊어진 언구, 즉 경절문 활구를 참구하여 자세히 하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몸을 벗어나는 곳이 있다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고 죽는데 자재를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77)고 가르
친다. 경절문이라고 해서 교를 배척하고 닦는 수행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
르침을 익힌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분별의 장애를 끊는 수행을 함께
가르친 것이다. 수행의 순서가 바뀌었을 뿐 앞에서 가르친 것과 다르지 않
다. 실제의 수행에 있어서도 선과 교가 둘일 수 없다.
77)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766a1-6.

지눌스님은 조사의 설법으로 도를 깨닫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근본을
밝혀서 법을 가리는 안목을 갖춘 수행자를 진실한 수행자라고 하였다.78)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이해는 이
미『권수정혜결사문』에서 설해지고 있다. 지눌스님은『권수정혜결사문』의
서두에 어려서 출가하여 선원을 다니면서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탐구
하면서 이해한 요지를 정리하였다. 그 내용의 마지막에,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보고 듣고 외우고 익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가르침을 만나기
어렵다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지혜를 써서 관조하여 부처
님과 조사들이 가르친 바와 같이 닦는다면, 스스로 부처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님의 도를 이루어 몸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79)라고 하였다. 결론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로 정리되었지만,
요지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닦아서 부처님의 도를 이루는 것이다. 부처님
의 가르침대로가 아니면 부처님의 도를 이룰 수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수행의 길이 따로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가 아니면 바른 수행
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78)『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p.703c21-704a2. 지눌스님의 이와 같
    은 이해는 달마조사가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으로 깨달음의 길을 가르친 내용
    가운데 ‘가르침을 빌려서 근본을 깨닫고, 벽관을 닦아서 고요하여 함이 없는 것’
    이라고 한 가르침과 통한다.[『경덕전등록』 권30,「보리달마략변대승입도사행(菩提
    達磨略辨大乘入道四行)」, 大51, p.458b21-28 참조.]
79)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698a13-16.

지눌스님의 선교일치에 대한 이와 같은 의지는 『원돈성불론』과 『간화결
의론』을 저술한 뜻에서도 나타난다. 이 두 책은 지눌스님의 법을 이은 혜심
(慧諶, 1178~1234)스님이 발견하여 간행하였다. 혜심스님의 발문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가 부처님의 말씀이며, 교가 선
의 그물이고 선이 교의 벼리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선가와 교가가 만
나면 원수처럼 다투어 한 가지 진실한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였으므로 지
눌스님은 평소에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워서 이 두 책을 저술하였다80)고 한
다. 혜심스님의 이 발문은 지눌스님의 선교일치를 가르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더욱 분명히 알게 한다. 이와 같이 지눌스님의 모든 저술
은 선교일치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80)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7b14-22.

2) 돈오점수
돈오점수는 먼저 깨닫고, 그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는 수행이다. 지눌스
님은 모든 수행자들에게 반드시 먼저 깨닫고, 그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아
야 한다고 역설한다. 깨달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이후의 수행도 깊어질 수
없으며,81) 먼저 깨달은 돈오를 의지하여 닦는 수행이라야 번뇌 망념에 물
든 오염수(汚染修)에 떨어지지 않는다.82) 그래서 지눌스님은 종밀(宗密,
780~841)선사의 말을 빌려서 “닦음이 깨달음 이전이면 참된 수행이 아니
다”83)라고 하였다. 반드시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81)『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699c7-8.
82)『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3a9-10.
83)『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권상(大48, p.407c21) ;『목우자수심결(牧牛子
    修心訣)』, 韓4, p.713a16-17.

또한 지눌스님은 도에 들어가는 수행문이 많지만, 모든 수행문이 그 요
점은 돈오점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돈오돈수가 최상의 근기가 닦
는 수행문이라고 말하지만, 이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 생을 거듭
하면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으며 점차 익혀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
자 깨달아 한 순간에 단박 마쳤을 뿐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돈오돈수도 먼

저 깨닫고 뒤에 닦은 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눌스님은 돈오점수가 모
든 성인들의 법칙[千聖軌轍]이라고 하였다.84) 이러한 돈오점수의 의미를
『목우자수심결』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84)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09b6-12.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할 때에는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
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신령스러운 앎이 참 부처임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
결 따라 떠다니다가, 홀연히 선지식이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보임을 입
어서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 성품
은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성(無漏智性)이 본래 스스로 구족해서 곧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고 한다.
점수는, 비록 본래 성품이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
만, 비롯함이 없는 습기는 갑자기 단박 제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
음에 의지하여 닦아서 점차 훈습하는 공을 이루고[漸熏功成] 성인의 태
를 기름[長養聖胎]이니, 오래 오래하면 성인을 이루기[久久成聖] 때문
에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면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난 날에 모든 감관이
구족해 있음이 다른 사람과 다름없지만,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해서
자못 세월이 지나야만 바야흐로 성인이 되는 것과 같다."85)
85)『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p.709c13-710a3.

돈오는 자기의 마음이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점수는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서 점차 공덕을 쌓는 것이다.
지눌스님은 깨달아야 할 마음을 공적영지의 마음[空寂靈知之心]이라고
하였다. 이 공적영지의 마음은 자심(自心), 자성(自性) 등으로 표현되는 한
마음[一心]이다. 스님은,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은 변화이다. 그
러므로 망념은 본래 고요하고[妄念本寂], 티끌 경계는 본래 공하며[塵境本
空], 모든 법이 다 공(空)한 그곳에서 신령스러운 앎은 어둡지 않다[靈知不
昧]. 곧 이 공적영지의 마음이 그대의 본래면목이며, 또한 삼세의 모든 부
처님과 역대의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이 비밀스럽고 비밀스럽게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다”86)라고 공적영지의 마음을 설명한다. 지눌스님은 이 마음
을 『대승기신론』의 중생심(衆生心)87)과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성

인에게 있어도 늘어나지 않고 범부에게 있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성인
의 지혜에 있어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도 어둡지 않다’88)고 하
였다. 또한 지눌스님의 저술에서 큰 마음의 범부[大心凡夫], 큰 마음의 중
생[大心衆生] 등으로 표현된 큰 마음[大心]도 같은 의미이다. 돈오는 이 마
음을 깨닫는 것이다.
86)『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0a12-16.
87)『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大32, p.575c21.
88)『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1a3-5.

 이미 깨달았지만 점수가 필요한 것은 시작도 없이 오랜 시간동안 무명의
종자를 훈습해 온 습기 때문이다. 비록 돈오해서 부처님과 같아졌다 하더
라도 이 오랜 습기는 갑자기 없애기 어렵기 때문에 깨닫고 난 뒤에도 무명
을 다스리는 수행이 계속되어야 한다.89)
89)『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711a16-23.

지눌스님은 깨달음 이후의 수행을 오후목우행(悟後牧牛行)이라고 하였
다. 타고난 근기가 뛰어난 사람들이 한 때의 깨달음에 빠져서 깨달음 후의
수행을 오랫동안 방치하면 이전처럼 번뇌습기에 휩쓸려서 윤회에서 벗어
나기 힘들다. 그러므로 깨달음 이후에도 반드시 계속 비추고 살펴서 망념
이 일어나면 버리고 또 버려서 무위(無爲)에 이르면 비로소 구경에 이르는
데, 지눌스님은 이것을 오후목우행(悟後牧牛行)이라고 하였다.90) 오후목우
행은 이미 먼저 깨달은 돈오를 의지하여 닦기 때문에 비록 닦는다고 하지
만, 악을 끊고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고 닦아도 닦음이 없는 참된 닦
음과 참된 끊음이다. 무위(無爲)에 이르는 오후목우행은 무념(無念)을 근
본으로 삼는 수행인 것이다.91)
90)『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1b4-7.
91)『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711b7-10. ‘무념을 근본으로 한다’는 말은
   『육조단경』(大48, p.353a21-28)에서 설해졌고, 종밀의『선원제전집도서』(大48,
    p.403a6)에서도 강조되었다. 지눌스님은『권수정혜결사문』에서도 오후수(悟後
    修)를 ‘무념위종(無念爲宗), 무작위본(無作爲本)’으로 표현하였다.(韓4, 7020a19)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눌스님은 무념을 근본으로 삼는 오후수(悟後修)
의 뜻을 임운수(任運修)와 무념수(無念修)로 해석한다. 임운수는 자기 마
음이 부처임을 단박에 깨닫고 이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는 것이니, 모든 삼
매의 근본인 진여삼매이다. 무념수는 근본삼매로부터 온갖 행을 일으키는
것으로 백천 가지 삼매를 닦고 익혀서 노사나불과 같이 널리 온 중생을 이
롭게 하는 원점(圓漸)으로서 원수(圓修)이다. 점수이지만 점원(漸圓)이 아
니라 원점(圓漸)이기 때문에 이를 오후(悟後) 무념수(無念修)라고 한다는
것이다.92) 깨달음 후의 목우행은 임운수이고 무념수이며, 동시에 무념수의
구경은 이타행으로 보현행을 성취하는 원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결
국 오후목우행은 보현행을 구경으로 삼는 수행인 것이다.93)
92) 지눌스님은『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자기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원
    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지혜의 성품을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어서 필경에는 다름이 없음을 단박에 깨닫고, 이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는 것은 최상승선이며 여래청정선이며 진여삼매라 이름하니, 이것이 모든 삼
    매의 근본이다. 만약 생각마다 닦고 익히면 자연히 점차 백천 가지 삼매를 얻을
    수 있다. 달마문하에서 계속 서로 전해온 것이 이 선이다”(『선원제전집도서』, 大
    48, p.399b17-12)라고 한 종밀의 글을 인용하고, ‘깨달음에 의지하여’부터 ‘모든
    삼매의 근본이다’까지는 임운수(任運修)이며, 그 이하는 무념수(無念修)를 설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韓4, pp.749c24-750a17) 또한『법집별행록절요병입
    사기』에서는 이 내용에 앞서 돈오에 대한 사기에서도 먼저 돈오하고, 이 깨달음
    을 의지하여 닦는 오후수를 원점이라고 하였다.(韓4, p.746c8-9)
93) 지눌스님은『원돈성불론』에서도 오후수(悟後修)의 구경을 보현행이라고 하였
    다.(韓4, p.730a22-b4)

지눌스님은『목우자수심결』에서 돈오 후의 점수를 성인의 태를 기르는
것이라 하고, 이를 오랫동안 하면 성인을 이룬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성인은 바로 대각세존(大覺世尊)이다. 대각세존은 자신의 수행이 구경에
이르고 이타의 덕용이 저절로 드러나서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함에 즐거울
뿐 근심이 없는 분으로 설명되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각・각타・각
행원만의 보현행이 성취된 이상적인 부처님이시다.94) 지눌스님의 돈오점
수는 이와 같이 구경의 대각세존을 이루는 수행인 것이다.
94)『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1c2-9.

3) 정혜수행과 간화선
지눌스님의 수행과 관련한 기록은 정혜결사와 연관되어 있다. 지눌스님
은 담선법회에서 정(定)을 익히고 혜(慧)를 고르게 함을 본분으로 삼는 정
혜결사를 제안하였고, 8년에 걸친 거조사의 결사에서도 정(定)을 익히고
혜(慧)를 고르게 함을 오로지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수선사의 정혜
결사에서는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간화경절문 등의 삼문을 열어서 수
행을 지도하였다. 따라서 수선사 결사에서 이루어진 모든 수행은 정혜수행
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다.95)
95) 김호성의「돈오점수의 새로운 해석」(『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 민족
    사, 1992)에서는 보조사상의 근본은 돈오점수와 정혜쌍수이며 경절문은 그 보완
    으로서 시설된 것이라고 하였고, 전해주의「의상성기사상이 보조선에 끼친 영
    향」(『의상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3)에서도 경절문이 성적등지문에 이르기
    위한 참고적인 수행문이라고 하였다.

 

비록 수선사 낙성법회에서『대혜어록』을 강의하고 선을 닦았다고 하였지
만, 정혜수행은 정혜결사의 본무로 삼았던 결사 이념으로서의 수행일 뿐만
아니라 지눌스님의 저술 가운데 가장 만년에 이루어진『법집별행록절요병
입사기』에서 비로소 경절문이 언급되고 입적 후에 간행된 『간화결의론』에
서 집중적으로 설해진다. 그리고 지눌스님의 비문에서도 지눌스님이 법을
설할 때는 성적등지문과 관련되는『육조단경』을 근본으로 삼고『신화엄경
론』과『대혜어록』을 두 날개로 삼았다고 하였다. 아울러 원돈신해문의 오후
수(悟後修), 즉 신해(信解)를 의지하여 닦는 수행 역시 정혜수행이다.96)
96)『권수정혜결사문』에서는 자기 마음을 신해하고 이를 의지하여 닦는 수행을 정
    혜로써 하였,고(韓4, p.700b16)『원돈성불론』에서도 오후수(悟後修)는 정혜를 닦
    는 것으로 보고 있다.(韓4, p.725b4 ; p.730a24 등)

지눌스님은 정혜를 계・정・혜 삼학을 닦는 수행과 성성적적의 마음인
공적영지의 마음을 닦는 수행으로 설명하였다. 삼학을 닦는 수행은 계・정
・혜 삼학을 그 이치에 따라 차례대로 닦는 수상(隨相)과 자성에 합하는 칭
성(稱性)의 수행으로 나뉜다. 수상의 삼학은, ‘계는 그릇됨을 막고 악을 그
침, 정은 이치에 맞게 산란을 거둠, 혜는 법을 가려서 공(空)을 관함’ 등의
이치에 따라 차례로 삼학을 닦는 것이며, 칭성의 삼학은『육조단경』의 자
성삼학97)처럼 이치가 본래 나가 없고 이치가 본래 어지러움이 없으며 이치
가 본래 어리석음 없음에 합하는 수행이다.98)
97)『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大48, p.358c12-13.
98)『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700c3-7. 지눌스님은 이 해석을『익
    진기(翼眞記)』라는 책에서 인용하였지만, 이 책은 현존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칭리섭산(稱理攝散)’과 ‘택법관공(擇法觀空)’으로 밝힌 정과 혜의 의미는『목우
    자수심결』(韓4, p.712b2-4)과『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韓4, p.748c21-22)에서
    도 그대로 사용된다. 지눌스님이 수행문과 관련해서 정과 혜를 개념적으로 설
    명할 때는 반드시 이 해석을 따랐다.

공적영지의 마음을 닦는 수행으로서의 정혜는 자성의 체(體)와 용(用)을
닦는 수행이다. 지눌스님은 수행에 들어가는 이치가 천 가지라 해도 정혜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혜가 자성의 체(體)와 용(用)이기
때문이며, 공적영지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즉, “정(定)은 체이고 혜(慧)
는 용이다. 체 그대로인 용이므로 혜가 정을 여의지 않고, 용 그대로인 체
이므로 정이 혜를 여의지 않는다. 정이 곧 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혜가 곧 정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99) 공적영지는 자성의 체와 용이
며, 정혜가 바로 이 자성의 체와 용을 닦는 수행이므로 정혜를 닦는 것은
공적영지의 마음을 닦는 수행인 것이다.
99)『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1c13-18. 지눌스님의 이러한 이해는
   『육조단경』(大48, p.352c13-24)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공적영지의 마음은 부처님과 중생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마음이다. 하
지만 이를 닦는 수행은 한결같을 수 없는데,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
이다. 정혜수행을 자성문과 수상문으로 다르게 설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치로 말하면, 자성문은 돈문(頓門)의 수행이며 수상문은 점문(漸門)의
수행이다. 정혜를 닦는 수행에서 점문의 수상문을 설하는 것은 돈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사람이 있고 근기가 낮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
기에서 설하는 수상문은 돈오를 의지하여 닦는 오후수(悟後修)이다. 돈오
를 의지하여 닦기 때문에 수상문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정혜등지(定慧等
持)에 이른다. 수상문은 이름과 방법만 빌렸을 뿐이다.

 돈문의 수행은 ‘마음에 어지러움 없음이 자성의 정(定)이며 마음에 어리
석음 없음이 자성의 혜이다’100)라고 하는『육조단경』의 가르침대로 자성을
여의지 않고 정혜를 함께 닦는 것이다. 자유로이 고요하면서 알며, 번뇌를
막고 지혜를 비춤이 둘이 없는 자재를 구현하는 수행이다. 점문의 수행은
먼저 적적(寂寂)으로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으로 성성(惺惺)으로
혼침에 머묾을 다스려, 전후로 서로 상대해 다스려서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조화시켜 고요함에 드는 것이다. 점문의 수행을 점문의 하열한 근기가 행하
는 바라고 낮추는 것은, 비록 이와 같이 수행해서 성적등지(惺寂等持)라고
말하지만, 고요함을 취해서 수행으로 삼은 것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101)
100)『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大48, p.358c12-13.
101)『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p.711c18-712a4.

자성정혜를 닦는 사람은 돈문의 공력 없는 공력을 써서 공적영지의 마음
을 아울러 움직이고 함께 고요하게 하여 스스로 자성을 닦아 스스로 불도
를 이루는 사람이다. 수상문 정혜를 닦는 사람은 앞에서 보았듯이 아직 깨
닫기 이전의 점문의 하열한 근기가 상대해 다스리는 공력을 써서 마음마
다 미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해서 수행으로 삼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은
목적지를 가는데 길도 빌리고 의탁할 곳도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점문
의 수행을 방편으로 빌린 것이다.102) 이 사람은 먼저 돈오했지만 번뇌가 두
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고 연(緣)을 만나면 혼침과 산란에 빠져
고요함과 앎이 항상하지 못하다. 그래서 번뇌와 망념을 상대해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먼저 돈오하였기 때문에 오염수(汚染修)에
는 떨어지지 않는다.103)
102)『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2c12-19.
103)『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3a4-10.

수상문의 수행은 연려(緣慮)・도거(掉擧)로 불리는 들뜨고 산란한 마음
과 혼침(昏沈)・무기(無記)로 불리는 졸리고 멍해지는 마음을 상대해 다스
리는 수행이다. 지눌스님은, “만약 도거가 치성하면 먼저 정(定)의 문으로
써 이치에 맞게 산란을 거두어 마음이 연을 따르지 않게 하여 본래의 고요
함[本寂]에 계합하게 하라. 만약 혼침이 더욱 많아지면 다음으로 혜(慧)의
문으로써 법을 가려서 공을 관하여 비추고 봄이 미혹이 없게 하여 본래의
앎[本知]에 계합하게 하라. 정으로써 산란을 다스리고 혜로써 무기(無記)
를 다스려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함께 없어지고 상대하여 다스리는 공력을
마치면,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마다 근본으로 돌아가고[歸宗] 연을 만나도
마음마다 도에 계합하여[契道] 자유로이 함께 닦을 것이니, 바야흐로 일 없
는 사람[無事人]이 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참으로 정혜를 함께 닦아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 할 것이다”104)라고 가르친다.

104)『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2, b1-9.

 

지눌스님은『권수정혜결사문』에서도 수상문으로 들어가서 무념(無念)
에 이르는 정혜수행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에 고요히 연을 잊고 우뚝하게 단정히 앉아
바깥 모양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추어야 한다. 먼저 적
적(寂寂)으로써 반연하는 생각[緣慮]을 다스리고, 다음으로 성성(惺惺)
으로써 혼침(昏沈)을 다스려라.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조화하여 취하고
버리는 생각이 없이 마음을 분명하고 분명[歷歷]하게 하면 확연히 어둡
지 않아 망념 없이 안다. 거기서 들은 바가 아니라면 모든 경계를 결코
취해서는 안 된다. 만약 세상의 연을 따라서 베풀어 짓는 바가 있다면,
모두 마땅히 지어야 할 것과 짓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서 온갖 행을
어긋남이 없이 하라. 비록 짓는 바가 있더라도 텅 비고 밝음을 잃지 않
아서 담연히 항상 머물러야 한다."105)
105)『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701b8-15.

이와 같이 수상문은 점문의 수행이라고 말하지만 먼저 돈오한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기 때문에 결국 무념을 이루어 무사인이 되는 것이다.

특히, 지눌스님은 달인(達人)의 분상에서의 정혜등지의 뜻은 공용에 떨
어지지 않는다[不落功用]고 한다. 원래 스스로 함이 없어서[元自無爲] 다
시 특별한 경지의 시절이 없다106)는 것이다. 앞에서 자성정혜를 닦는 사람
은 ‘공력 없는 공력을 쓴다[用無功之功]’고 하였는데 달인의 분상에서는 쓸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달인은 보고 들을 때도 단지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도 단지 그러하고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
두가 단지 그러할 따름이다. 일상의 모든 일이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서 자
유자재하다.107)
106)『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2a7-9.
107)『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2a9-19.

이처럼 정혜수행으로 성취된 달인의 경지에서는 무심이라서 공용에 떨
어지지 않고 자유자재하다. 하지만 혹 공력을 쓰는 공용의 자취에 걸려서
무심에 들지 못하고 알음알이의 장애를 일으키는 사람을 위해서 지눌스님
은 무심합도(無心合道)에 드는 수행 방편으로 간화경절문을 시설하였다.
경절문 간화선 수행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이다. 지눌스님의 저술에서 경
절문 간화선이 언급된 것은『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원돈성불론』,『간
화결의론』 등이다. 지눌스님이『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간행한 목적
은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마음을 깨닫는 사람에게 관행의 귀
감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108) 그리고 맺는말에서도 ‘이와 같이 본말을 분
명하게 알아서 수행자들로 하여금 미혹하지 않고 진실로 나아가 빨리 보리
를 증득하게 하였다’109)고 밝힌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가르침만
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108)『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741a4-6.
109)『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764a3-9.

그런데 지눌스님은 책의 말미에 굳이 경절문 언구를 첨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말을 의지해서 알음알이를 내고 몸을 바꾸는 길을 알지 못하는 사
람은 아무리 수행해도 마음을 쉴 때가 없기 때문에 몸을 벗어나는 길을 알
게 하기 위해서110)라고 하였다.『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설하는 돈
오점수를 바탕으로 정혜수행을 닦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알음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뜻과 이치를 배우는 사
람은 뜻과 이치의 작용에 걸리고 알음알이의 장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다. 이는『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종경록』의 무심합도문(無心合道
門)을 이끌어 오면서 설명했던 내용111)과 유사하다. 스님은 『종경록』에서
정혜수행 이외에 가장 간략하고 요긴한 수행문으로 무심의 수행이 있다고
소개한 내용을 발췌하여 제시하고 간단한 설명을 붙여서 무심합도문이 경
절문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112) 지눌스님은 자성정혜에서도 의용(義用)의
자취에 떨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지해(知解)에 얽힘, 의리(義理)에 막
힘, 지견(知見)의 병 등과 같은 내용이다. 또한『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이후의 저술에서는 이를 해분(解分), 해애(解碍) 등으로 표현하였다.113) 이
모두는 알음알이로 인해 나타나는 장애이다.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
玄)・현중현(玄中玄)의 삼현 법문에서도 구중현의 경절문은 체중현에서 나
타날 수 있는 알음알이의 장애를 타파하는 수행으로 설명되었다.114)
110)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764a9-16.
111)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748b24-c19. 지눌
    스님의 인용문은 『종경록』(大48, pp.679c-680b)의 내용을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
    로 발췌한 것이다.
112)『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p.748c21-749a8.
113)『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는 해오한 사람의 차별지로서의 장애를 해애(解
    碍)라고 하였고,(韓4, p.752c1-3)『원돈성불론』에서는 법애(法愛)를 일으킨 해분
    으로서의 장애(韓4, p.728b6-8)와 십신(十信)에 올라서 이지(理智)가 나타났지
    만 색심을 아직 완전히 없애지 못한 장애(韓4, p.730a19-21) 를 해애라고 하였다.
   『간화결의론』에서는 원돈신해문의 항하사와 같은 가르침을 사구(死句)라고 하
    는 이유도 이 가르침들이 해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韓4, p.733a15-17)
    또한『원각경』의 경문을 들어서 법계정을 증득했다는 생각까지도 해애라고 하
    였다.(p.733b14-17)
114) 지눌스님은『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韓4, p.766a9-b2),『원돈성불론』(韓4,
    p.728b16-c3), 『간화결의론』(韓4, p.734b15-c2) 등에서 체중현(體中玄)・구중현
    (句中玄)・현중현(玄中玄) 등의 삼현(三玄) 법문을 들어 원돈문과 경절문의 차이
    를 설명한다. 『간화결의론』의 해석에 따르면, 경절문은 삼현 가운데 구중현에
    해당한다. 구중현의 경절문으로 체중현의 원돈문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법의
    지견(知見)을 타파한다. 구중현에서 타파하는 지견은 지해(知解)로서 해애이다.
    사실 지눌스님이 삼현 법문을 인용한 것은 선문에도 여러 종류의 근기가 있어
    서 근기에 따라 입문처가 다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韓4, p.734b15)
 

부연한다면, 경절문은 정혜수행의 자성문에서 남는 의용(義用)의 자취
를 없애고 무심합도에 드는 수행이며, 원돈신해문에서 남을 수 있는 해애
의 장애를 타파하는 수행이다. 삼현의 구중현 경절문도 체중현에서 남는
해애를 타파하는 수행이었다. 『간화결의론』에서도 선문의 화두를 참구하
여 자세히 하는 경절문에서는 하나하나 불법의 지해(知解)의 병을 온전히
가려낸다고 하였다.115) 그래서 지눌스님은, 선문에서 원돈문의 항하사와
같이 많은 가르침을 활구(活句)가 아닌 사구(死句)라고 타파하고 물리치는
이유가 사람들에게 해애(解碍)를 일으키게 하기 때문116)이며, 처음 발심하
여 배우는 사람들이 경절문 활구를 참구하여 자세히 하지 못하게 하기 때
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절문은 알음알이의 장애를 타파하는 수행으로 설명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5)『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3a3-4.
116)『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3a18.

알음알이의 장애를 타파하는 경절문의 수행은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
으로 실천된다. 지눌스님은 무자(無字) 화두를 가르친다. 스님은, ‘무자 화
두는 한 덩어리 불과 같아서 가까이 하면 입[面門]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불법의 알음알이가 붙을 곳이 없다’고 하고, ‘이 무자는 나쁜 알음알이를
부수는 무기이다’117)라고 한 대혜선사의 말로써 증명을 삼는다. 그리고 스
님은 ‘화두에 대해서 타파하는 주체와 타파할 대상, 취하고 버림과 가려내
고 택함 등의 견해가 있다면, 곧 이것은 말의 자취를 잘못 집착해서 스스로
마음을 흔드는 것이어서 뜻을 얻고 화두를 참구하여 자세히 하며 다만 한
결같이 화두를 드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118)고 경계한다. 그래서 지눌스님
은 당시 선종에서 전제(全提)니 파병(破病)이니 화두의 뜻을 논의하는 것 자
체를 비판한다. 한 번이라도 전제니 파병이니 헤아리면 그 순간 생각 속에서
헤아리는 병에 떨어져버려서 활구를 참구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119)
117)『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3a6-7 ;『대혜어록(大慧語錄)』권26,
   「답부추밀 계신」(大47, p.921c8-9).
118)『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3a7-9.
119)『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3b6-11.

지눌스님이 근본으로 삼는 대혜선사의 간화선은 삼현 법문처럼 이전의
수행에서 남는 장애를 타파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전제니 파병이니 의미
를 따지는 것도 아니다. 대혜선사의 간화선은 이들과 완전히 다르다120)고
한다. 지눌스님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20)『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4c18-22.

"대혜선사가 보이는 뜰 앞의 잣나무, 삼 세근,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등의 화두는 전혀 명백하게 보이는 법이 없다. 다만 아무 재미도 없고
더듬어 찾을 것도 없는 화두를 준다. 대혜선사는 화두를 준 연후에 다음
과 같이 경계하는 말을 일러 준다고 한다. 즉, “정식(情識)을 타파하지
않으면 마음의 불이 선명할 것이니, 바로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단지 의
심하는 화두를 한결같이 들어야 할 뿐이다. 마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
께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했다. 「없다」’와
같은 것을 단지 한결같이 들고서 챙겨야 한다. 왼쪽으로 와도 옳지 않고
오른 쪽으로 와도 옳지 않다. ‘있다·없다’로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참
으로 없는 것으로서의 없다’로 헤아려서도 안 된다. 도리로 알려고 해서
도 안 된다. 의근 아래의 생각으로 헤아리려 해서도 안 된다. 눈썹을 치
켜뜨고 눈을 깜박이는 곳을 향해서 헤아려서도 안 된다. 말길을 향해서
살길을 지어서도 안 된다. 일 없이 껍질 속에 있으면서 천천히 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 들어 일어나는 곳을 향해서 알려고 해서도 안 되며, 문
자 가운데로 이끌어 증명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어리석음을 가지고 깨
달음을 기다려도 안 된다. 바로 모름지기 마음을 쓸 바 없고 마음이 갈
바도 없을 때에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가 도리어 좋은 곳
이니, 갑자기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문득 꺼꾸러져 죽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121) 대혜선사는 이와 같이 설명을 붙여서 화두를 준다. 그러
므로 배우는 사람은 열두 때 가운데와 사위의 안에서 다만 화두를 한결
같이 들어서 챙길 뿐이다. 그 심성의 도리에 대해서는 이름을 여의고 모
양을 끊었다는 견해도 전혀 없고, 또한 연기가 걸림 없다는 견해도 없다.
겨우 한 생각이라도 불법의 알음알이가 있다면 문득 열 가지 알음알이
의 병에 걸려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하나 놓고, 또한 놓았다·놓지 않
았다거나, 병에 걸려 있다·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헤아림도 없으면, 홀
연히 아무 재미도 없고 더듬어 찾을 것도 없는 화두 위에서 뿜는 순간에
한 번 깨달으면 한 마음의 법계가 환하게 밝고 분명하다. 그러므로 심성
에 갖추어진 바 백 천 가지의 삼매와 한량없는 뜻의 문을 구하지 않아도
원만하게 얻는다. 이전까지의 한쪽으로 치우친 뜻과 이치를 들어 앎으
로 얻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선종 경절문의 화두를 참구해서 자
세히 하여 증득해 들어가는 비결이라 한다."122)
121)『대혜어록(大慧語錄)』 권30,「답장사인장원 안국(答張舍人狀元 安國)」(大47, p.941
     b10-18).
122)『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p.734c21-735a18.

 이상이 지눌스님이 일러주는 화두 드는 법이다. 화두를 드는 법은 따로
있지 않으며, 다만 한결같이 화두를 들어서 챙길 뿐이다. ‘단제시(但提撕)’
그것 외에는 없다. 지눌스님은 “엎드려 바라건대, 관행으로 세상을 벗어나
려는 사람은 선문의 활구를 참구하여 자세히 해서 빨리 보리를 증득한다
면, 다행이고 다행이겠다.”123)라고 하여 『간화결의론』을 마친다.
123)『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韓4, p.737b10-11.

 

4) 대승보살도의 구현
지눌스님은 이상적인 수행자를 지혜 있는 사람[有智者], 또는 일을 마친
사람[了事人]이라고 하였다. 또한 구경의 부처님을 대각세존이라고 하였
다. 정혜결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수행자들이 성취하기를 서원했던 것은 자
신과 타인이 깨달음을 성취하고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은혜
를 갚는 일었다. 수선사에서 삼문(三門)을 열고 많은 전적을 의거해서 가
르치고 지도했던 것도 이를 위해서였다. 이 모두는 바른 수행으로 바른 깨
달음을 이루어서 구경의 대각세존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지눌스님이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몸과 마음을 채찍질해서 자기의 허
물을 알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아 뭇 고통을 빨리 벗어버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말씀을 의지하여 거울로 삼아 자기의
마음을 비추어 보고 다시 부지런히 수행하여 깨달음의 지혜가 항상 밝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청정한 행을 부지런히 닦고 커다란 서원을 세
워서 널리 온 중생을 제도하는 사람이다. 자기 한 몸을 위해 홀로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124)
124)『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699a22-b6.

 일을 마친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온갖 경계를 만나도 근본 연유를 잘
살펴서 치우치지 않고 온 몸을 바르게 하고 마음의 성(性)을 잘 지키면서
관조하는 수행을 늘려 나가면, 고요하고 편안함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러
한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쁜 것은 없어지고 좋은 것은 늘어나서 온갖
번뇌가 다하며 나고 죽음이 없어지며 고요함과 비춤[寂照]이 앞에 나타나
서 응용(應用)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 이것이 일을
마친 사람[了事人]의 분상에서 점차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 없는 가운
데 공용이다.125)
125)『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韓4, p.699b14-22.

일을 마친 사람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더 이상 끊어야 할 악
도 닦아야 할 선도 없는 사람이다. 이미 일을 마쳤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
여도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상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지눌스님은 일을
마친 사람의 점차 없는 가운데 점차, 공용 없는 가운데 공용의 궁극은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수행의 궁극은 자신의 깨달음은
물론이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가 깨달음을 이루어 불도를 성취하는 것
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돈오점수로써 이루는 성인은 대각세존(大覺世尊)이다.
지눌스님이 말하는 대각세존은 돈오점수에 의해서 정혜를 등지(等持)하고
이타의 원행을 성취하는 구경의 부처님이다.

"만약 이와 같이 생각 생각마다 닦고 익히며 비추어 돌아봄을 잊지 않
아서 정과 혜를 고르게 지닐 수 있다면, 좋고 싫음이 자연히 담박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더욱 밝아지며, 죄업이 자연히 끊어져 없어지고,
공행이 자연히 더하여 나아가서 번뇌가 다할 때에 나고 죽음이 곧 끊어
진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이 영원히 끊어지고 원만한 깨달음의
큰 지혜가 밝고 환하게 홀로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시방의 국토
가운데 나타내어 간절함에 나아가고 근기에 응함이 마치 달이 하늘[九
霄]에 나타나면 그림자가 온갖 물에 비치는 것과 같아서 상응하여 작용
함이 끝없으며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우며 근심
이 없는 분을 대각세존이라고 한다."126)
126)『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韓4, p.711c2-9.

즉, 인연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여도 마음에 걸림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기쁘고 즐거운 분이 부처님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타의 행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눌
스님은 반드시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눌스님은『법집별행록
절요병입사기』에서 오후수(悟後修)를 설명하면서, 먼저 깨닫고 이 깨달음
에 의지하여 닦는 오후수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갖 행을
익히고 닦아서 자신과 타인을 아울러 제도한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당시의
선을 닦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성을 밝게 본 연후에는 이타의
행원이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목우자(牧牛子) 지눌스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이어서 견성과 이타행에
대해서, ‘견성하여 불성을 밝게 보면 다만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고 저와 내
가 차별이 없을 뿐이다. 만약 자비와 원력을 내지 않으면 적정에 빠질까 걱
정이다’127)라고 그 뜻을 분명하게 밝힌다. 견성하면 이타의 행원이 저절로
이루어져서 중생제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눌
스님은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히려 고요함만을 즐기는 적정의
병에 빠질까 우려하고 있다. 견성이 없다면 이타행을 하더라도 번뇌 망념
에 물들어 바른 행이 되지 못하겠지만,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해도 자비와
원력이 없다면 이타의 행원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타의
행원을 실천하는 대승보살의 이상은 자비와 원력이 그 시작인 것이다.
127)『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韓4, p.755b23-c4.

돈오를 의지하여 닦는 오후수가 보현행을 성취하는 수행인 것은 『원돈
성불론』에서도 볼 수 있다. 지눌스님은 초심의 범부가 인연을 만나서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를 깨닫고, 이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아서 정혜가 뚜렷
이 밝은 것을 발심주(發心住)라고 이름하는데, 발심주에 들어서 보광명지
로써 항상 세상에 머물면서 인연 따라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공덕을 계속
쌓아나가면 결국 보현행을 성취한다고 가르친다.128) 자기의 무명이 부동지
임을 깨닫고 정혜가 뚜렷이 밝아서 발심주에 들어간 후 보광명지로써 근기
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므로 결국에는 보현행을 이룬다고 한 것이다. 이것
이 원돈신해문의 돈오원수이며, 지눌스님의 선을 화엄선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129)
128)『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韓4, p.730a22-b4.
129) 전해주,「보조선의 특징과 화엄성기관」(『의상 화엄사상사 연구』, 민족사, 1993)
     참조.

 

5. 맺음말

지눌스님은 자신이 체험했던 깨달음을 바탕으로 성적등지문・원돈신해
문・간화경절문 등의 삼문을 열어서 수행을 지도하였다. 이 가운데 경절문
은 지눌스님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정견(情見)의 장애를 없애고 안락을
체험하였던 수행문이며, 만년의 저술에서 강조되고 있어서 지눌스님 선사
상의 귀결처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경절문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으로, 화두는 일체의 알음
알이를 타파하는 무기라고 하며, 화두를 참구하는 법은 단지 화두를 드는
것, 그것 외에는 없다고 한다. 간화선이 경절문의 수행이라는 것 때문에 정
혜수행과 다르고, 성적등지문이나 원돈신해문보다 수승한 수행문으로 비
교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눌스님은 그의 저술에서 간화선을 정혜수행과 비
교하거나 다른 수행문과 비교한 예는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다만 경절문
의 특징을 서술하는 가운데 다른 수행문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알음알이를
타파하는 수행으로 경절문 또는 간화선을 언급한 경우는 있다.

지눌스님은 선교일치와 돈오점수를 바탕으로 수행을 가르친다. 돈오점
수는 모든 성인의 법칙이며, 모든 수행의 이치가 정혜 아님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지눌스님은 정혜결사에서 수행의 본무를 정혜로 삼았다. 지눌스님
은 종밀의 말을 빌려서 ‘모든 수행은 무념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돈오점수의 구경은 이타의 보현행이 구현되는 임운수・무념수라고 하였
다. 그러므로 정혜라고 하든지 간화라고 하든지 지눌스님에 있어서는 무념
에 이르는 수행일 뿐이다.

지눌스님은 정혜수행을 설하면서 무애자재한 달인분상의 경지를 말하
였고, 이타의 보현행도 정혜로써 성취된다고 하였다. 또한 지눌스님은 정
혜가 삼학을 닦는 수행이며, 모든 수행이 정혜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였
다. 지눌스님의 이러한 견해를 빌리면, 간화선도 삼학을 닦는 수행이며 무
심의 정혜를 닦는 수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눌스님의 비문에서 스님
이 법을 설할 때『육조단경』을 근본으로 삼고『신화엄경론』과『대혜어록』
으로 두 날개를 삼았다고 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지눌스님은 언제나 바르고 참된 수행의 근본을 탐구하고 실
천하였으며, 아울러 근기에 맞는 수행의 방법과 저술로써 깨달음의 길을
베풀었다. 조사의 말씀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중생의 어리석음과 부
처님의 깨달음이 한 마음에서 말미암는다는 깨달음을 체험하였고, 이 깨달
음은 선교일치와 돈오점수로써 펼쳐졌으며, 정혜수행과 간화선으로 가르
쳐지고 실천되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자신과 타인이 함께 깨달음을 이루
어서 인연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보살도를 구현하는 교화행으로
베풀어졌다.

 지눌스님은 잠들었던 선풍을 다시 떨쳐 일어나게 하였고 조사의 달빛을
다시 밝혔던 큰 스승으로 추앙되었다. 그리하여 열반하신 뒤에는 부처님의
해를 널리 비추는 나라의 스승[佛日普照國師]으로 존경되었다. 여기에 수
록된 지눌스님의 법어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영원히 이어가는 좋은 안내서
가 되기를 바란다. 아쉽게도 지면상의 제약으로 인해 지눌스님의 법어를
전부 수록하지 못하였다. 간혹 부족한 이해로 잘못 번역되거나 주석된 곳
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눈 밝은 선지식들의 많은 질정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