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원효스님

원효스님 - 解題 해제

실론섬 2016. 9. 3. 16:59

 

解題 해제

1. 머리말
2. 원효스님의 생애
3. 원효스님의 저술과 사상
4. 수록된 저술의 개요
5.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전통사상총서 『정선원효(精選元曉)』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한국불교의 전통 사상을 알리는 총서로 기획하여 『한국불교전서』1)를 저본으로

역주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 중에서 신라시대 학승인 원효(元曉, 617~686)스님의 행장과 저술 중 일부를 번역하여, 원효

스님 저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효스님의 수많은 저술에서 핵심을 담고 있는 서문과 대의(大意), 종요(宗要) 그리고 수행과 신행을 강조

하는 단편을 중심으로 발췌 번역하였으므로 원효스님 사상의 핵심과 저술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1)『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제1책,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원효스님은 광범위한 대승 교리에 대해 예리한 통찰과 해박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과 이해를 논리적인 체계성을 통해 문학적으로

도 거의 완벽한 저술을 남김으로써 동아시아에서는 오랫동안 경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원효스님의 저술로 확인된 거의 모든 문헌이 이미 한글로 번역2)되어 있으며, 원효 및 원효 사상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무려 천여 편의 성과들이

발표되어 있다.3) 그런데 연구자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다. 원효스님의 사상 및 저술들이 본격적으로 서구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전후이다. 1997년부터는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와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의 주도로 국제원효학회4)를 창립하고 원효전서 영역 사업을 진행해왔으며 첫번째로『금강삼매경론』을 출간5)하였다.    

2) 원효전서국역간행회에서 전6권으로 원효스님 저술 전체를 번역하여 『국역원효성사전서(國譯元曉聖師全書)』(보련각, 1987)를 간행하였으며,

   한글대장경에도 『대승기신론소별기 외』(동국역경원, 1992)에 원효스님 저술 9편이 번역되어 실려있다.
3) 원효스님에 대한 주목은 이미 스님 당시의 한중일 삼국에서 공통적이었다. 원효
스님에 대한 연구는 입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고려

   의천스님의 재평가 이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근대 시기에 최남선의 「조선불교 : 동양 문화 역사에서 조선불교와 그 위상」(『불교』 74, 1931)이

   스님을 재조명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기영의『원효사상 1 : 세계관』(1967)이 현대적인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 2000년경까지 한국의 원효 관련

   연구 목록은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원효연구논저목록』(1996), 동국대학교 BK21 불교문화사상사 교육연구단 제3교육연구팀,

   『한국불교사상사 연구논저 목록 1 : 불교수용기~통일신라시대』(2002), 예문동양사상연구원·고영섭 편, 『한국의 사상가 10인 : 원효』(예문서원,

   2002)의 부록 등이 참조된다.
4) 국제원효학회는 1997년 5월 30일 ‘원효의 사상체계와 원효전서 영역상의 제문제’란

   주제로 동국대에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 이래 몇 차례의 워크샵을 진행하였다.

   또한 1998년 11월 21일부터 11월 24일까지 진행된 미국종교학회(AAR) 정기발표회

   에서 원효학 연구분과를 설치하여 학술세미나를 갖기도 하였다. 이 세미나에 버스웰

   을 위시한 미국 내 연구분과 위원 5명과, 해주스님과 김용표를 포함한 한국의 학자

   5명 등 총 10명이 참여하였으며 ‘국제원효의 밤’이라는 행사까지 열렸다.
5) Robert E. Buswell, trans.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Wŏnhyo’s Exposition

   of the Vajrasamādhi-Sūtra (Kūmgang Sammaegyŏng Non ),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Wŏnhyo Studies’ Collected Works of Wŏnhyo Volume 1,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이 책은 한국전통사상을 특히 서구에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총서6)의 하나이기 때문에 원효스님 저술을 모두 소개하지는 못하고 한 권으로

압축해서 원효스님의 사상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책에 수록된 저술은 제한된 지면 안에 가능한 한 원효스님 사상의 핵심과 다양한 면

모를 담으려는 의도 하에 선정된 것이다. 이 때문에『대승기신론소』를 비롯하여 기존에 많이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있는 원효스님의 주요 저술이

아쉽지만 제외되기도 하였음을 밝혀둔다.

6) 한국전통사상총서 영역본은 『한국불교전서』를 주 저본으로 하되 한국전통사상 총서 

   한글역을 참조하여 영역하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2. 원효스님의 생애

 

원효스님의 일대기를 적은「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7)는 일부가 파손된 채 몇 조각의 단편만 전해지고 있다. 원효스님의 생애는 비

문 이외에 다른 몇 가지 자료를 통해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현재 부분적으로나마 생애를 알 수 있는 주요 자료로는『삼국유사(三國遺事)』권

4「원효불기(元曉不羈)」,8)『송고승전(宋高僧傳)』권4「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9)「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10)『동사열전(東師列傳)』권1「원효국사전(元曉國師傳)」11) 등이 있다. 이밖에『종경록(宗鏡錄)』12),『임간록(林間錄)』13),『삼국유사』권4「의상전교(義湘傳敎)」14)와 「사복불언(蛇福不言)」15) 등에서도 단편적인 생애를 엿볼 수 있다.16)

7)「고선사서당화상비」는 하단부와 상단부가 깨어져서 따로따로 발견되었다. 하단부는

   1915년 5월 9일에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군(月城郡) 내동면(內東面) 암곡리(暗谷里)

   고선사터에서 3편으로 조각난 채로 발견되었고, 상단부는 1968년 9월 초 경주시 동

   천사지(東泉寺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하단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상단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8) 韓6, pp.347b17~348b19.
9) 大50, p.730a6~b29.
10) 大50, p.729a3~c3.
11) 韓10, p.996b13~c16.
12) 大48, p.477a22~28.
13) 卍148, p.590a2~9.
14) 韓6, pp.348b20~349c22.
15) 韓6, pp.349b23~350a19.
16) 원효스님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전기 자료를 모은 것으로 김영태, 『원효연구사료총록』

    (원효학연구원, 장경각, 1996)이 있다. 이 책은 원효스님에 관한 전기 자료와 목록 자료

    를 싣고 있는데 전기 자료 부분에 원효스님의 생애에 관련한 거의 모든 자료를 소상히

    모아놓았다.

 

원효스님은 진평왕 39년(大業13년, 丁丑, 617)에 태어났다. 속성은 설(薛)씨이며,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 아버지는 담날내말

(談捺乃末, 乃末은 관직 이름)이다. 원효라는 이름은 스스로 부른 것으로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고, 당시의 사람들은 그 고장의 말

로 그를 ‘새벽[始旦]’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효스님의 출가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15세 전후의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17) 일정하게 정해진 스승을 모시지는 않고 여러 스승에

게서 배웠다. 수많은 저술에서 다루고 있는 해박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중국에 유행하고 있던 여러 불교 사상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배웠음도 알

수 있다. 원효스님은 젊은 시절에 당시의 고승 낭지(朗智)스님에게『법화경』을 배웠으며,18) 여러 경전의 소를 지으면서는 혜공(惠空)스님에게 의심

나는 것을 묻기도 했다.19) 또한 의상스님과 함께 보덕(普德)스님에게서도『열반경』과『유마경』을 배웠다.20)

17) 원효스님의 출가 시기를 전하는 기록은『송고승전』권4「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이

    유일하다. 이에 따르면 “관채(丱)의 나이에 슬기롭게 법에 들어갔다.” (大50, p.730a

    7~8. 丱之年, 惠然入法.)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관채’는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하나

    로 묶어 상투를 튼다는 뜻이며, 이에 따라 대체로 원효스님의 출가 시기를 15세 전후로

    이해한다. 남동신의『원효의 대중교화와 사상체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p.62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다.

18)『삼국유사』「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조.
19)『삼국유사』「이혜동진(二惠同塵)」조.
20)『삼국유사』「보장봉노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조.

 

스님의 수학(修學)을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 중의 하나가 의상(義湘, 625~702)스님과 함께 두 차례나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나려고 했던

일이다. 현장(玄奘, 602~664)스님의 신유식학(新唯識學)을 공부하려고 했던 원효스님은 중간에 유학하려는 마음을 그만 두고 되돌아오게 된다. 이

때 마음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스님의 오도(悟道)였다.

 

당나라로 가는 길에 갑자기 궂은비를 만나서 마침 길가의 토굴 사이에서 비바람을 피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그 곳은 오래된 무덤인데다 해골까

지 옆에 있었다. 그러나 그 날도 떠나지 못하고 하룻밤을 더 묵게 되었다. 전날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으나 이 날은 무덤이라는 생각에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때 원효스님은 “마음이 생하므로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

二]”21)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스님은 의상스님에게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으리라[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22)고 말하고는 신라로 되돌아온다. 이후 한동안 저술 활동에 골몰했던 것으로 보인다.

21)『송고승전』권4「당신라국의상전」(大50, p.729a13~14). 한편『송고승전』(988년) 보다

    시대가 약간 앞서는 연수(延壽, 904~975)의 『종경록(宗鏡錄)』(961년)에서는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이다.”(大48, p.477a27. 三界唯心, 萬法唯識.)라는 게송을 전하고

    있고, 덕홍(德洪, 1071~1128)의 『임간록(林間錄)』(1107년)에서는 “마음이 생하면 갖가

    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촉루와 둘이 아니다.”(卍148, p.590a4~5.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髑髏不二.)라는 게송을 전하고 있다.『임간록』의 게송은 그대로 각안(覺岸)이 지은

    『동사열전』(1894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韓10, p.996b19~20) 원효스님이 깨달음을

    얻는 내용이, 단순히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

    다는 것에서 해골물을 마시는 것으로까지 변한 것이다.
22)『송고승전』권4「당신라국의상전」(大50, p.729a15)

 

원효스님은 요석궁 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칭하고, 이후 대중 교화 활동에도 상당한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
다. 원효스님은 무애박을 두드리고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23)라는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무를 추면서 걸림없이 교화하
였다. 이러한 원효스님의 교화덕분에 민중들까지 부처님 명호를 알고 ‘나무(南無)’를 칭하게 되었다.
23)『화엄경』권5,「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제6(大9, p.429b19)에 나온다. 문수사리

    보살이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승으로 생사를 벗어나셨는데, 어찌하여 지금 보니,

    일체 불세계가 일마다 같지 않습니까?”(一切諸佛, 唯以一乘, 得出生死, 云 何今見,

    一切佛剎, 事事不同.)라고 묻자, 이에 현수보살이 답한 다음 게송의 일부이다.

    “문수여, 법은 항상 그러하여 법왕에게는 오직 한 법뿐이니,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文殊法常爾, 法王唯一法, 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

이처럼 저술 및 대중교화 활동에 전념하던 원효스님은 686년 3월 혈사(穴寺)에서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으며, 아들인 설총이 유해를 빻아서 소
상을 만든 다음 스님이 늘 주석하였던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입적 후 100여년이 지난 애장왕대(800~808)에 스님의 손자 설중업(薛仲業)과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후대의 헌덕왕) 등이 중심이 되어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가 세워졌으며, 1101년 8월에 고려의 숙종은 화쟁국사(和諍國師)24)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하였다.
24)『고려사』권11, ‘숙종 6년 8월 계사조.’ 이때 원효스님에게는 ‘화쟁국사’, 의상스님에게는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와 같이 두 스님에게 시호가 내려진 데에는

    의천스님의 주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김상현, 『원효 연구』, 민족사, 2000, pp.290

    ~291)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고려사』에는 ‘화쟁국사’가 아니라 ‘화정국사(和靜

    國師)’라고 적고 있으며, 이를 그대로 이어『동사열전』에도 ‘화정국사’라고 적고 있다.

    (韓10, p.996c16) 하지만 고려시대 김부식(1075~1151)은『화쟁국사 영찬(影贊)』을 남겼

    으며 『분황사화쟁국사비(芬皇寺和諍國師碑)』(명종 20년, 1190, 동국대박물관 소장)에서

    도 원효스님을 화쟁국사라고 불렀음을 볼 수 있다.

 

3. 원효스님의 저술과 사상

 

1) 저술과 그 체제

원효스님은 민중교화뿐 아니라 저술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최근까지 확인된 것만 80여부 200여 권25)이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다음의

22종26)이다.

25) 김상현,『역사로 읽는 원효』(고려원, 1994), pp.186~189. ; 石井公成, 「新羅佛敎

    における〈大乘起信論〉の意義 : 元曉の解釋お中心として」(平川彰 編,『如來藏と

    大乘起信論』, 東京 : 春秋社, 1990), pp.551~553. ; 남동신, 『원효의 대중교화와

    사상체계』, pp.111~116. ; 石井公成, 『華嚴思想の硏究』(東京 : 春秋社, 1996), pp.

    195~197(再收錄). ; 福士慈稔, 「저술을 통해서 본 원효의 사상」(『신라문화제학술

    발표회 논문집 20집 분황사의 재조명』, 신라문화선양회, 1999), pp.113~138. ;

    福士慈稔, 『원효저술이 한중일 삼국불교에 미친 영향』(원광대 박사학위논문, 2001),

    p.21 등이 참조된다.
26)『한국불교전서』 제1책에 수록된 저술의 제목을 따랐다.『한국불교전서』에는『대승

    기신론소』와『대승기신론별기』를 합한『대승기신론소기회본』을 포함하여 총 23종의

    저술이 완본 혹은 단편 형태로 수록되어 있다. 1.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1권,

    2. 『법화종요(法華宗要)』 1권, 3. 『화엄경소병서(華嚴經疏幷序)』 10권 중 서와 권3 일부, 

    4. 『보살영락본업경소병서(菩薩瓔珞本業經疏幷序)』 3권 중 서(序)와 권하(下), 5. 『열

    반종요(涅槃宗要)』 1권, 6.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1권, 7. 『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 3권 중 서(序), 8.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1권, 9. 『불설아미타

    경소(佛說阿彌陀經疏)』 1권, 10.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1권, 11. 『보살계본지범

    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1권, 12.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1권, 

    13.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3권, 14.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2권, 

    15.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2권, 16. 『이장의(二障義)』 1권, 17. 『판비량론(判

    比量論)』 1권의 일부, 18.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4권 중 3권, 19.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 2권 중 일부, 20.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1권, 21. 『대승육정참회(大

    乘六情懺悔)』 1권, 22. 『미타증성게(彌陀證性偈)』 1편

 

이러한 저술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 저술 사이의 인용 관계와 현장(玄奘, 602~664)·지엄(智儼, 602~668) 등이 저술한 문

헌 인용 관계를 통해 현존 저술의 선후관계를 살펴 보면 『기신론별기』 → 『이장의』 → 『기신론소』 → 『미륵상생경종요』 → 『중변분별론소』·『대혜도경종요』·『판비량론』(671) → 『무량수경종요』 → 『열반종요』·『금강삼매경론』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화엄경소』·『화엄경종요』·『보법기』 등 화엄 관련 저술은 670년 이후의 저술인 것으로 보인다.27)

27) 원효 저술에서의 상호 인용관계와 저술 시기 등에 대해서는, 李箕永,「經典引用에

    나타난 元曉의 獨創性」, 『崇山朴吉眞博士華甲記念論叢 韓國佛敎思想史』 (원광대

    학교, 1975). ; 申賢淑,『元曉의 認識과 論理 : 판비량론의 연구』(민족사, 1988). ;

    석길암,『원효의 보법화엄사상연구』(동국대 박사학위논문, 2003) 등이 참조된다.

 

이러한 원효스님의 저술목록을 살필 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토대가 된 사상의 다양성이다. 원효스님은 당시 중국불교계에서 연구되었던

불교사상 중 밀교 계통을 제외한 대승경전 대부분에 대해 주석하고 있다. 반야·삼론·열반·여래장·법화·천태·계율·정토·유식·화엄·인명 등을 망라하고 있다. 원효스님은 당시까지 동아시아에서 유통되었던 대부분의 대승불교 경론과 사상적 조류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원효스님의 저술형식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으로 ‘종요(宗要)’라는 이름을 가진 저술형식과 ‘대의(大意)’라는 저술체재 내에 나타나는 독특한

형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종요’는 여러 경론의 핵심 내용을 집약해서 밝힌 것이다. 종요에서는 먼저 글의 첫머리에 ‘대의’를 밝히고, 그 다음으로 해당 경의 근본 뜻을 드러

내는 ‘종치(宗致)’를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에 경의 문장을 따라가면서 주석하는 ‘수문석(隨文釋)’을 두었으나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생략되고 있다.

그 사이에 경론에 관련된 주요 사항을 선택적으로 제시하는데, 예를 들면 경명을 해석하는 ‘석제명(釋題名)’, 경에 대한 교판의 내용, 경이 일어난 연

기, 경과 관련된 핵심 내용과 원효스님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경종(經宗)’ 등 경에서 다루는 여러 내용을 주제별로 선택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원효스님의 다른 주석서나 논서처럼 종요에서 다루는 논의 역시 명백히 특정 종파의 입장을 벗어나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원효스님이 특

정 불교 종파의 교학적 입장을 증명하거나 옹호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당시 교학자들이 모든 문제를 두고 벌

이던 논쟁을 드러내, 그 다양한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밝히고 교학자마다 주장하려는 강조점을 이해하면, 이런 입장들은 대부분 서로 회통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해당 경론의 근본 뜻을 드러내어 각각의 주장을 회통하고 있다.

 

‘대의(大意)’는 대부분의 원효스님 저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으로, 이야기하려는 문헌의 ‘전반적인 의미’ 또는 ‘중심이 되는 요지’라는 뜻이다. ‘대의’에서 원효스님은 자신의 독창적인 경론에 대한 입장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원효스님의 ‘서’ 6편을 수록하고 있는『동문선』28)에서 ‘서’

라고 표현한 것은 대부분 본래의 저술에서는 ‘초술대의(初述大意)’ 혹은 ‘약술대의(略述大意)’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동일한 양식에 해

당하는 것이『기신론소』에서는 ‘표종체(標宗體)’로 나타난다. 일종의 ‘현담(玄談)’에 해당하는 양식인데, 그 서술이 대단히 간략한 것이 특징이다.

28)『동문선(東文選)』은 1478년(성종 9)에 성종의 명을 받아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양성지(梁誠之) 등 23인이 참여하여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이다. 130권 45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라를 비롯, 고구려, 백제, 고려 및 편찬 당시 조선의 작가들까지 대략 500여 인이 지은 작품 4,302편을 55종의 분류법에 따라 모았다. 1478년에 을해자(乙亥字)로 펴낸 초간본이 있고, 1482년 갑인자(甲寅字)로 찍은 재인본이 있으며, 연대를 알 수 없는 을해자본(乙亥字本) 번각본(飜刻本)도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이전에 찍은 판본들이 거의 손실되어 1615년(광해군 7)에 다시 간행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전하고 있다. 1914년에는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번인본(翻印本)을 출판하였고, 이우성(李佑成)의 가장본(家藏本)을 경희출판사에서 1996년에 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68~1970년 12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대의는 일종의 서문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서문과는 다르다. 대의는 매우 전형적이고 언제나 시적이며 문학적이다. 또한 대의는 한국불교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원효스님의 사상과 형식의 전반적이고 분명한 특징을 보여준다. 원효스님에 대한 연구자들이 스님의 해석학적이고 종합적인 접근법의 특징을 개합(開合), 또는 융통(融通, 상호융통), 또는 체용(體用) 등으로 설명할 때 대상 문헌의 주요 주석 부분이 아니라 거의 모두 대의 부분을 인용한다.29)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전체 문헌에 대한 주석은 많지 않기 때문에 대의가 더욱 중요시된다.

29) 이런 접근의 예로, 박종홍,「원효의 철학사상」,『한국사상사』(일신사,1976), pp.59~88. ;

    Sungbae Park, “Silla Buddhist Spirituality”, Buddhist Spirituality:  Later China, Korea,

    Japan and the Modern World, Takeuchi Yoshinori, ed. (NY: Crossroad Publishing), pp.

    57~78. 등을 들 수 있다. 박종홍의 글은 Robert Buswell이 “Wonhyo’s Philosophical

    Thought”(Assimilation of Buddhism in Korea Religious Maturity and Innovation in the

    Silla Dynasty , pp.47~103)란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하였다.

 

2) 논리와 수사적 형식

원효스님의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논리의 첫 번째 형태는 도교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 특히 원효스님의 주석서 서문, 즉 대의에서

특히 널리 쓰이는 이 형태는 『도덕경』 첫째 장의 형식이 두드러진다. 물론 대의에 나타난 표현을 보면 노장의 용어를 가져와서 일견 도교적인 영향30)을 볼 수는 있으나 그 뜻까지 그대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논리로 재해석한 동양의 전통적인 문장 형식31)이라고 할 수 있다.

30) 도교의 영향에 대해서는 Jörg Plassen의 “Entering the Dharma-gate of Repeated  

    Darkening”, Geumgang Center for Buddhist Studies, Korean Buddhism in East

    Asian Perspectives, Geumgang University(2007) 참조.
31) 한 예로 청량징관(淸凉澄觀)의『화엄경소(華嚴經疏)』의 ‘서’에서 법계의 상(相)을

    “중묘를 머금었으나 남음이 있다.”(大35, p.503a3. 含衆妙而有餘.)고 표현하고 있는데,

    징관 스스로『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중

    묘(衆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묘라는 두 글자는 『노자』의 뜻이다.

    저『도덕경(도경)』에 … ‘현하고 또 현함이여! 중묘의 문이로다.’라고 하였다. …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은 빌렸으나 그 뜻을 취한 것은 아니다. 뜻은 일진법계(一眞法界)로 현묘의

    체(體)를 삼고 체에 즉(卽)한 상(相)으로써 중묘를 삼았다.”(大36, p.2b2~11)

 

원효스님의 대의에서는 독특한 시적 형식을 통해 거의 예외없이 공간과 시간을 예로 들어 불가사의한 대승 교의의 특징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

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특정한 구체적인 교리를 논쟁하려는 의도는 담고 있지 않다.

 

원효스님의 저술에서 확인되는 또 한 가지 논리적 특성은『금강경』에서 흔히 보이는 역설적인 논리와 부정의 부정을 구사함으로써 중관 논리의 특

성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논리적 특징은 화쟁이다.『십문화쟁론』32)의 제목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화쟁이라는 말은 쟁론들을 하나로 회통(會

通)시킨다는 의미로서 교의들 사이의 정확한 차이점을 찾아낼 때까지 철저하게 탐구하고 나서 ‘기본적인 배경, 동기부여, 또는 교파적인 편견’에서

의 차이가 어떻게 그러한 격차로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화쟁은 경론과 경론 사이에 나타나는 이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동일한 사안을

두고서 각 사상 조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해석 혹은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원효스님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 논리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보통은 각 주장이 가지는 시비를 논한 다음, 각 주장들이 취하고 있는 나름의 관점이 가지는 입장

에서의 타당성을 긍정하는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전적으로 옳다고 하는 입장은 취하지 않으며, 취하고 있는 관점 내에서의 타당성만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 취사선택의 관점에 의하여 원효스님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형태로 주장이 전개된다. 그러나 화쟁은 논리적 특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효스님 사상 전체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32) 韓1, pp.838a~840c.「고선사서당화상비」에는 원효스님의 저술 중에서『십문화쟁론』과

    『화엄경종요』의 명목만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Robert E. Buswell 은 “On Translating

    Wonhyo”, A Philosophical Structure of Wonhyo’s Thought & Problems in Translating His

    Texts into English (Dongguk Univ., 1997), p.72에서 신라인들은 원효스님 사상의 요지가

    이 두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음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즉『화엄경종요』는『화엄경』

    이 그 당시 철학사상을 지배했기 때문이고,『십문화쟁론』은 원효스님이 한국불교사상에

    기여한 가장 주요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회통철학의 구조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

    라고 한다. 이 『십문화쟁론』은 경남 합천 해인사의 사간장경판에 유일하게 5장(제9·10·

    15·16·31장)의 판목이 남아 있다.

 

3) 사상적 특징

(1) 화쟁과 통불교

원효스님이 태어나 수학하고 교화를 펼친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 전후기이다. 오랜 전란으로 민심이 피폐하고 갈등이 심화되었던

당시에, 원효스님이 고민하고 신라사회에 끼쳤던 영향은 바로 갈등의 화해와 고통의 소멸이었다. 그가 화쟁국사(和諍國師)라 불리게 된 데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그의 사상과 덕화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빛이 감소되지 않고 있다.33)

33) 전호련(해주),「원효의 화쟁과 화엄사상」(『한국불교학』제43집, 한국불교학회, 1998), pp. 155~156.

 

원효스님은 개인적으로 소속된 교파가 없이 당시의 빠르게 발전하는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원전에 기초한 자료를 해석하려는 노력 속에서 당시 크

게 영향을 미친 대승불교의 거의 모든 문헌에 주석서를 지었다. 이러한 원효스님 저술에 보이는 전반적인 사상의 특징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화쟁과 통불교이다.34)

34) 앞에서도 언급한 박종홍의「원효의 철학사상』에서는 원효스님의 사상을 일련의 연결된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그 출발점을 ‘화쟁’으로 삼고 나서 개합과 종요, 부정과 긍정, 통불

    교라는 원효스님의 주요 개념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잇고 있다. (pp.59~88)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저술 중 하나인 『십문화쟁론』은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화쟁의 내용을 10문으로 분

류한다. 그러나『십문화쟁론』은 전문이 다 전하지는 않으므로 그 10문에 대해서는 전후 내용과 다른 저술들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그것은 삼승일

승(三乘一乘)·공유이집(空有異執)·인법이집(人法異執)·삼성이의(三性異義)·오성성불(五性成佛)·이장이의(二障異義)·열반이의(涅槃異義)·불신

이의(佛身異義)·불성이의(佛性異義)·진속이집(眞俗異執)의 화쟁문 등으로 간주된다.35) 원효스님은 삼승과 일승, 공과 유, 인과 법, 진과 속 등의 이

집(異執)과 이쟁(異諍)을 화해시키고 회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십문의 10이라는 수는 화엄에서 온전히 다 포함하고 있는 원만수이니 무진(無盡)

의 의미이다.

35) 십문을 추정하여 복원한 것으로 (1) 이종익의「원효의 십문화쟁사상연구」(『동방사상』,

    제1집 :『원효연구논선집』제9, 중앙승가대학 불교사학연구소, 1993, p.283 재수록)와

    (2) 김운학의「원효의 화쟁사상」(『불교학보』 제15집, p.177), (3) 이만용의『원효의 사상 :

    원효대사의 십문화쟁론』(전망사, 1983), p.85, (4) 오법안, 『원효의 화쟁사상연구』(홍

    법원, 1988), pp.83~108 등 여러 가지 예가 있다.

 

그런데 원효스님의 화쟁정신은 이 『십문화쟁론』만이 아니라 원효스님 저술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36) 특히 각 경론의 대의를 밝히는 부분에

서부터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을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열반종요』에서 『열반경』의 핵심내용인 열반을 드러내는 방편 역시 화쟁을 통해서임을 볼

수 있다. 원효스님은 『열반경』의 대의를 밝히는 부분에서, 『열반경』은 백가의 이쟁 즉 모든 이설의 쟁론을 화해시킨다[和百家之異諍]는 것이다.37)

36) 佐藤繁樹,『원효의 화쟁논리』(민족사, 1996), p.14에서는 화쟁사상서로 꼽을 수 있는

    원효스님의 저서로,『대승기신론소』·『별기』·『열반종요』·『법화종요』·『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이장의』·『대혜도경종요』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외에『화엄경소』

    등을 비롯한 다른 저술도 원효스님의 화쟁적인 기본입장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37)『열반경종요』(韓1, p.524a17).

 

『대승기신론별기』에서는『대승기신론』의 대의를 밝히는 부분에서『중관론』·『십이문론』 등은 파할 줄만 알고 『유가론』·『섭대승론』 등은 세울 줄만 아는 데 반해, 『대승기신론』은 세우고 파함이 자재해서 모든 논서의 조종(祖宗)이고 다양한 논쟁의 평주(評主)가 된다고 한다.38)

38)『대승기신론별기』(韓1, p.678a18~19).

『금강삼매경론』에서 천명하고 있는 원효스님의 실천 수행관39) 역시 화쟁의 논리로 전개되고 있다. 경의 대의는 일심의 근원[一心之源]과 삼공의

바다[三空之海]를 밝힌 것이니 그것은 유·무, 진·속이 둘이 아니면서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음을 보인 것이다.40) 그리하여 원효스님은 성상(性相)

을 융섭해 밝히고 고금을 포괄하여 백가이쟁(百家異諍)의 막힌 생각을 화해(和解)하였다41)고 추앙되었던 것이다.42)

39) 고익진은 원효스님의 이론은『대승기신론소』,『별기』, 실천수행은『금강삼매경론』이라고

    하고 있다. 고익진, 「원효의 사상의 실천 원리 : “금강삼매경론”의 일미관행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사상사』(숭산 박길진 박사 회갑기념 논문집), 원광대학교, 1975.
40)『금강삼매경론』 상(韓1, p.604b8~9). 佐藤繁樹의 『원효의 화쟁논리』는『금강삼매경론』에서

    말하는 무이불수일(無二不守一) 사상에 입각하여 원효스님의 화쟁 논리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41) 대각국사,「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韓4, p.555a18).
42) 전호련(해주),「원효의 화쟁과 화엄사상」, pp.157~159.

 

이에 의거하여 많은 현대 학자들은 화쟁이라는 원효스님의 불교 이해를 통불교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43) 원효스님 사상의 이해에 사용한 통불교

라는 용어 속에 함축된 것은 원효스님이 경론을 이해하는 데서 보여준 비범할 정도의 공명정대함이다. 스님의 이러한 편견 없는 경향은 모든 대승

불교 전통에 관하여 매우 균형있게 저술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43)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을 통불교로 처음 이해한 것은 최남선,「조선불교 : 동양문화 역사에서 

    조선불교와 그 위상」(『불교』 74, 1931), pp.248~250이다.

 

(2) 화쟁의 근거, 일심

그러면 통불교로 이해되기도 한 원효스님의 화쟁이 성립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일심(一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일심 역시 원효스님

저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원효스님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유식·여래장·열반44)·화엄 등은 유심설이 그 주종을 이루는 것이

다. 그것은 원효스님의 깨달음의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다. 원효스님의 저술에서 보이는 사상과 실천행은 그의 깨달음의 힘에 의해서일 것임은 추정

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44)『열반종요』에서 화쟁논리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일미(一味)이며, 이 일미는 열반문과

    불성문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이 일미 역시 일심의 다른 표현이니 무이(無二)의 참된 성품이

    라고도 언급하고 있다.

 

『송고승전』45)에 언급되어 있는 그의 깨달음의 계기와 내용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원효스님은 당 현장(602~664)의 유식사상에 뜻을 두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가 심생법생(心生法生)의 이치를 깨닫고 유학의 뜻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효스님이 읊은 “마음이 생하므로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라는 내용은 『기신론』에 보이는 일심설에 의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이는 『대승기신론』의 “마음이 생하므로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므로 갖가지 법이 멸한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種種法滅]”46)에서 연유하는 게송이다.『기신론』에서는 여래장인 중생심 가운데 생멸심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이라 하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일화는 원효스님의 일심관이 유식에서 여래장으로 바뀌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45)『송고승전』권4「당신라국의상전」(大50, p.729a13~14). 원효스님의 입당(入唐) 시도에

    관한 기사는『삼국유사』의「의상전교(義湘傳敎)」와「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도

    보인다.
46) 大32, p.577b22.

 

원효스님이 깨달아 읊어낸 심(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生滅)’과 화합한 심으로서 이는 여래장심(如來藏心)과 다른 것이 아니다. 『별기』에서도 생멸심에 대하여 소의(所依)의 여래장(如來藏)과 능의(能依)의 생멸심(生滅心)을 함께 취하여 합해서 심생멸문(心生滅門)이 된 것이니, 심생멸이라는 것은 여래장에 의한 까닭에 생멸심이 있으며, 여래장을 버리고 생멸심을 취하여 생멸문을 삼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47)

47)『기신론별기』(韓1, p.681b).

 

원효스님은『이장의』48)에서 은밀문에 현료문을 내속(內屬)하고 있다.49) ‘이장’은 번뇌장과 소지장이니 현료문에서는 이장이 되고 은밀문에서는 번뇌애(煩惱碍)와 지애(智碍)의 이애(二碍)가 된다. 현료문에서는 유식적 입장에서, 은밀문에서는 여래장적 입장에서 각각 이장과 이애라 부르고 있

다.50)『기신론소』51)에서도 이애를 설명하면서 이는『이장장』설과 같다고 『이장의』에 그 설명을 미루고 있다. 이 점에서도 원효스님의 일심관은 유

식에서 여래장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48) 韓1, pp.789c~814b.
49) 이평래,『신라불교여래장사상연구』(민족사, 1996), pp.344~355.
50)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Charles Muller, “The Yogācāra Two Hindrances and their

    Reinterpretations in East Asia,”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

    vol.27(2004-1), pp.207~235 참조.
51)『기신론소』(韓1, p.717c).

 

이같은 원효스님의 일심관은 그의 실천행을 야기시키는 원동력임을 볼 수 있는데, 그 실천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저술은 만년의 『금강삼매경

론』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그『금강삼매경론』 역시『금강삼매경』의 내용을 화쟁의 방편으로 서술하고 있음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또한 일심

에 의하고 있다.52)

52)『금강삼매경론』상(韓1, p.604b).

 

일심(一心)은 유무(有無)를 떠나 있으며, 그래서 진속(眞俗)이 둘이 아니고 일(一)·이(異), 염(染)·정(淨)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한다. 진속원융의 화쟁은 일심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금강삼매경론』의 일심설 또한 『대승기신론소』·『별기』의 여래장일심과 무관하지 않다. 원효스님은『기신론』의 여래장설 역시 유식과 중관을 화해시키는, 세우고 파함이 걸림없고[立破無礙] 열고 닫음이 자재한[開合自在] 원리라고 하여『기신론』을 쟁론의 평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와 생멸이 모두 일심의 이문(二門)이기 때문에 대립적으로 보이는 진여문과 생멸문을 화해시킨 것으로 간주된다. 즉, 진여문과 생멸문이 대립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점에서는 다를 수가 없다. 일심에 의해 이문이 있으므로 이문이 화합된 일심은 궁극적인 본원에서 두 문의 상호작용[立·破]을 통해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를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53)

53) 고익진,「원효의 화엄사상」(『한국화엄사상연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pp.55~63. ;

    박성배,「원효의 논리구조」(『원효의 사상체계와 원효전서 영역상의 제문제』, 동국대,

    1997), p.45에서 “원효스님은『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 사상에서 화쟁의 원리를 발견

    했다. 여기서 이문이란 진여문과 생멸문인데 진여문은 체이고 생멸문은 용으로서 체와

    용이 둘이 아니듯이 진여문과 생멸문도 둘이 아니다.『대승기신론』이 체상용을 원용하

    고 있기 때문에 원효스님도 보조를 맞추고 있으나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골격은 체용

    설이다. 다시 말하면 기신론의 상과 용이 합쳐 용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문과 생멸문은 떨어질 수 없고 이 떨어질 수 없는 대목을 확인할 때 거기서 자재가

    나오고 무애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중관이 파하기만 하고 유식은 세우기만 하는데『기신론』의 여래장은 세우고 파함이 자재하다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원효스님의 화쟁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일심이고, 화쟁의 원리인 일심은 『기신론』의 여래장심이라고 주장되어 온 것54)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54) 최유진,『원효의 화쟁사상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8 :『원효연구논선집』19,

    pp.176~177) ; 石井公成,「新羅佛敎における大乘起信論の意義 : 元曉の解釋 を中心

    として」(『如來藏と大乘起信論』, 春秋社, 平成 2年), p.546 등.

 

그러나 원효스님의 일심관은 이 여래장심에 머물지 않고 다시 화엄의 유심설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스님은『별기』에서『기신론』이 이문을 일심에 열어서 여러 경전의 핵심[肝心]을 꿰뚫고 있다고 하면서 『화엄경』도 포함시키고 있다.55) 유식의 일심이 망심(妄心)이고 여래

장심이 진망화합심(眞妄和合心)이라면, 화엄일심은 진심(眞心)이니 여래성기심(如來性起心)이다. 원효스님의 일심이 진망화합의 여래장심에서 여

래성기의 화엄일심으로 전환되었다고 하겠으니, 그것은 원효스님의 화엄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55)『기신론별기』(韓1, p.678a23~b1).

 

원효스님은 분황사에 머물면서『화엄경소』를 찬술하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하였다. 그러고는 화엄적 실천을 위해서 중생 속으로 회

향하러 뛰어 들었다. 그때 원효스님이 외친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56)는 물론『화엄경』57)에 교설된 게송이다. 원효스님은 무애박을 두드리고 무애가를 부르고 무애무를 추면서 천촌만락을 다니며 교화행을 펼쳤다.58) 중생계로 뛰어들어 일승 화엄의 무애정신을 몸소 실천한 원효스님의 실천행은 화엄보살행이며 나아가 그것은 바로 여래출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여래출현은 여래성기이니59) 원효스님의 일심은 화엄의 여래성기심이라 볼 수 있다고 하겠다.60)

56)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 조.
57)『화엄경』권5,「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제6(大9, p.429b19).
58) 박성배,「원효의 화쟁논리로 생각해 본 남북통일문제 : 원효사상의 현실적 전개를

    위하여」(장봉 김지견박사 사우록『동과 서의 사유세계』, 민족사, 1991), pp.383~384

    에서는, 이 걸림없는 무애야말로 원효스님이 싸움을 말리는 화쟁의 이론을 전개하

    면서 가장 즐겨 썼던 화쟁의 원리로 보고 있다. 원효스님에게 있어서 화쟁이론과

    무애행을 절연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59) 전해주,『의상화엄사상사연구』(민족사, 1993), p.26.
60) 전호련(해주),「원효의 화쟁과 화엄사상」, pp.159~164.

 

(3) 일심의 발현

화쟁의 근거가 되는 이러한 일심에 의하여 화엄의 무장무애법계(無障無礙法界)뿐만 아니라, 정토의 구현이라든지 참회와 발보리심, 그리고 대승

보살계 수지 등 원효스님 불교 세계의 같으면서 다르고 다양하면서도 동일한 특징이 드러나기도 한다.

 

원효스님이『화엄경소』,『본업경소』,『해심밀경소』,『금강삼매경론』등의 서문과『열반종요』,『법화종요』등의 서문, 그리고『대혜도경종요』의 대의 등에서 해당 경론의 세계를 펼치는 근본 도리만 보더라도 다 동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화엄법계를 “막힘없고 걸림 없는 법계의 법문은 법이 없으나 법 아님도 없고, 문이 아니나 문 아님도 없다.”61)고 한 것이나, 열반을 “열반의 도(道)

란 도가 없지만 도(道) 아님도 없으며, 머무름이 없지만 머무르지 않음도 없다.”62)고 한 것, 본업(本業)의 이제중도(二諦中道)를 “도(道) 없는 도는

도 아님이 없으며, 문(門) 없는 문은 곧 문 아님이 없다. 문(門) 아님이 없기 때문에 일마다 다 현묘한 데로 들어가는 문이 되며, 도(道) 아님이 없기

때문에 곳곳마다 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다.”63)고 한 것, 그리고 ‘대혜도’를 “아는 바가 없으므로 알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혜(慧)’라고 하

고, 이르는 바가 없으므로 이르지 못하는 바도 없기 때문에 ‘도(度)’라고 한다.”64)라고 한 것 등등65)에서 무애원융한 원효스님의 일관된 중심사상을 볼 수 있다.

61)「화엄경소서」(韓1, p.495a3~4. 原夫無障無碍法界法門者, 無法而無不法, 非門而無不門也.)
62)「열반종요서」(韓1, p.524a5~6. 原夫涅槃之爲道也, 無道而無非道, 無住而 無不住.)
63)「본업경소서」(韓1, p.498a7~a10. 無道之道, 斯無不道, 無門之門, 則無非門. 無非門故,     

    事事皆爲入玄之門, 無不道故, 處處咸是歸源之路. 歸源之路.)
64)『대혜도경종요』「대의」(韓1, p.480b10~12. 由無所知無所不知, 故名爲慧, 無所到故無所不到, 

    乃名爲度.)
65)『해심밀경소』와『금강삼매경론』의 서문에서도 양 경론의 세계를 같은 안목으로 펼치고 있다.

    “무릇 불도(佛道)의 ‘도(道)’란 담담하여 깊고 현묘해서 틈 없는 것보다 현묘하고, 태연하여 너

    르고 멀어서 가없는 곳보다 멀다. 이에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환화(幻化)와 같아서 둘이

    없으며, 무생(無生)과 무상(無相)은 안팎을 포괄하여 다 없다. … 그러므로 능히 삼세에 노닐

    어 평등하게 관하고, 시방에 유행하여 몸을 나투며, 법계에 두루하여 중생을 구제하고, 미래

    가 다하도록 온통 새롭다.”(「해심밀경소서」, 韓1, p.553a3~9) ; “대저 일심의 근원은 ‘유’와

    ‘무’를 여의어 홀로 청정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眞)과 속(俗)을 융합하여 깊고 고요하다.

    깊고 고요하여 둘(眞·俗)을 융합하였으나 하나가 아니며, 홀로 청정하여 양변[二邊]을 여의었

    으나 중간도 아니다. 중간이 아니면서 양변을 여의었으므로 ‘유’가 아닌 법이 ‘무’에 나아가 머

    물지 아니하며, ‘무’가 아닌 상(相)이 유(有)에 나아가 머물지 아니한다. 하나가 아니나 둘을

    융합하였으므로, 진(眞)이 아닌 사(事)가 비로소 속(俗)이 된 것이 아니고 속(俗)이 아닌 리(理)

    가 비로소 진(眞)이 된 것이 아니다. 둘을 융합하나 하나가 아니므로, 진(眞)과 속(俗)의 자성이

    세워지지 않음이 없고 염(染)과 정(淨)의 상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 양 변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유(有)와 무(無)’의 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바가 없고, 옳음[是]과 그름

    [非]의 뜻이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다(「금강삼매경론서」, 韓1, 605b5~14).

 

또『법화경』은 방편설(方便說)과 삼승(三乘)을 돌이켜 일승(一乘)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원효스님은 이에 대해 “무엇이 셋이고 무엇이 하나인가”라면서 “하나를 빌려서 셋을 깨뜨리고 셋이 제거되자 하나마저 버렸다”66)고 설파하고 있다.

66)『법화종요』(韓1, p.488a3~8. 何三何一, … 斯乃借一以破三, 三除而一捨.)

원효스님은 “중생의 심성(心性)이 융통하여 걸림이 없어서 크기는 허공과 같고 깊이는 거대한 바다와 같다. … 예토와 정토[淨國]가 본래 한마음 이며 생사와 열반이 마침내 두 경계가 없다.”67) “무릇 중생마음의 마음이란 상(相)을 여의고 성(性)을 여의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 … 예토와

정토[淨國]가 본래 한마음이며 생사와 열반이 마침내 두 경계가 없다.”68)등으로 무량수, 아미타불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67)『무량수경종요』「대의」(韓1, p.553c6~13. 然夫衆生心性, 融通無礙, 泰若虛空, 湛猶巨海. … 

    穢土淨國, 本來一心, 生死涅槃, 終無二際.)
68)『불설아미타경소』대의」(韓1, p.562c6~12. 夫衆生心之爲心也, 離相離性, 如海如空. … 

    穢土淨國, 本來一心, 生死涅槃, 終無二際.)

 

여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원효스님의 정토신앙 역시 아미타불 일불(一佛)에 대한 신앙의 절대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일심의 세계로 돌아감[歸一

心源]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 같은 정토관에 의한 대중교화활동을 통하여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열반 세계를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원효스님은 법계에 유행하고 보리를 이루는 것 역시 보리심을 일으켜 참회하고 발원함으로써 가능함을 보이고 있다. 부처님의 경계는 생사

와 열반이 다르지 않으며, 하나가 일체이고 일체가 하나이다. 그리하여 법계에 두루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자재하게 중생을 교화함에 휴식도 없는

부처님과 같이 되고자 부처님의 보리마음을 일으켜 참회하고 수행하도록 권하는 것이다.69)

69)『대승육정참회』(韓1, pp.842a1~843a7),『발심수행장』(韓1, p.841a1~c6).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 밝히고 있는 원효의 대승보살계 사상 역시 보리심 일심에 근거하고 있다. “보살계란 흐름을 돌이켜 본원으로 돌아오는

큰 나루이며,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 데로 나아가는 핵심 문”70)이라면서 모든 부처의 과위(果位)가 반드시 계를 원인으로 하므로 계는 모든 부처의

근원이라고 하며, 계는 반드시 보리의 마음을 원인으로 하므로 보살의 근본71)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70)『보살계본지범요기』(韓1, p.581a3~4. 菩薩戒者, 返流歸源之大津, 去邪就正之要門也.)
71)『보살계본지범요기』(韓1, p.585b17~20. 諸佛果, 必藉戒因. 故言諸佛之本原也. 戒爲果性, 

    雖不可得, 而戒要藉菩提心因. 故言菩薩之根本也.)

 

보리심은 보리를 이루려는 보살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보리를 이루신 부처님의 마음이기도 하다. 원효스님이『화엄경소』에서 화엄경을 일

승만교에 배속72)한 것에서도 다양하게 펼쳐지는 원효스님의 불교 세계가 보리심, 즉 여래성기일심의 발현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하겠다.

72) 원효스님의 교리분류체계인 교판설이『법화종요』(韓1, p.493a13~b9),『열반종요』

    (韓1, p.529b9~c12),『대혜도경종요』(韓, pp.486b12~487b16),『화엄경소』에 보인다.

    『화엄경소』의 교판론은 표원의『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권4(韓2,

    p.385b10~13) ; 법장,『화엄경탐현기』권1(大35, p.111a16~18) ; 혜원,『간정기』권1

    (卍5, p.18a3~9) ; 징관,『화엄경소』권2(大35, p.510a20~27) 등의 인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교판을 원효스님이 교리 분류의 연구에 몰두했다거나 대승경전

    내의 심천과 우열을 논하는 일종의 도그마화된 태도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화엄을 일승만교에 배속한 원효스님의 안목이 스님의 무애회통행을 가능하게 한 것

    으로 볼 수 있다.

 

4. 수록된 저술의 개요

 

원효스님의 현존 저술 가운데 이 책에 수록된 것은「진역화엄경소서」·「본업경소서」·해심밀경소서」·「금강삼매경론서」·「열반종요서」·『불설

아미타경소』 「대의」·『미륵상생경종요』 「대의」·『대혜도경종요』 「대의」와 『법화종요』·『무량수경종요』·『보살계본지범요기』·『발심수행장』·『대승

육정참회』의 전문이다. 그리고 원효스님의 행장 관련 자료 중『삼국유사(三國遺事)』, 『송고승전(宋高僧傳)』, 『동사열전(東師列傳)』을 뽑아 함께 편

집하였다.

 

1) 서(序)

‘서’에 해당하는 것은 「진역화엄경소서」·「본업경소서」·「해심밀경소서」·「금강삼매경론서」·「열반종요서」의 5편이다. 「금강삼매경론서」는 실

제로는 『금강삼매경론』의 ‘대의’이나 원효스님의 ‘서’를 수록하고 있는 『동문선』73)에 따라 「금강삼매경론서」로 하였다.
73)『동문선』에는 지금 언급한 5편 외에「법화종요서」까지 모두 6편이 원효스님의 ‘서’로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법화종요』의 전문을 ‘종요’ 부분에 실었기 때문에「법화종요서」는 ‘서’에서 제외하였다.

 

(1) 「진역화엄경소서(晋譯華嚴經疏序)」 : ‘진나라 때 번역된『화엄경』’의 주석서에 대한 서문74)

74) 韓1, p.495a1~b19.

「진역화엄경소서」는 원효스님의『진역화엄경소』의 서문이다. ‘진역『화엄경』’은 동진(東晋) 시대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Buddhabhadra)에 의

해 번역(418~420)된 60권본『대방광불화엄경』으로,『진경(晋經)』 또는『육십화엄(六十華嚴)』이라고도 불린다. 이에 대해 원효스님이 주석을 한 것이

『진역화엄경소』이며,『화엄경소』라고도 한다.

 

『화엄경소』는 원효스님의 화엄 관련 저술 7부 15권75)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원래 8권이었는데『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와 합해 10권

으로 새롭게 편집되었다고 전해진다.76) 그런데 지금은 모두 산실되고 서문과 제3권의「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에 대한 주석만 남아 있다.『삼

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원효스님은 분황사에 머물면서『화엄경소』를 집필하였는데「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절필하였다.77)

75)『화엄경소(華嚴經疏)』8권,『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1권,『화엄강목(華嚴綱目)』1권,

    『화엄경입법계품초(華嚴經入法界品抄)』2권,『보법기(普法記)』1권, 『일도장(一道章)』

    1권,『대승관행(大乘觀行)』1권의 총 7부 15권. 이와 같이 원효 스님의 화엄 관련 저술

    들은 7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징관(澄觀)스님이『칠처구회송석장(七處九會頌釋章)』

    (大36, p.712c13~14)에 인용하고 있는『화엄관맥의(華嚴關脈義)』를 포함하면 8종이

    된다. 그러나『화엄종장소병인명록(華嚴宗章疏并因明錄)』에서는 이를 법장(法藏)스

    님의 저술(大55, p.1133c8)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76)『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권1(大55, p.1166b4).
77)『삼국유사』「원효불기」(韓6, p.348b7) 조.

 

「진역화엄경소서」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원효스님의 화엄경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서 원효스님은『화엄경』을 막힘없고 걸림

없는 법계의 법문[無障無碍法界法門]이며, 원만하고 위없는 돈교 법륜[圓滿無上頓敎法輪]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어서『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

華嚴經)』이라는 일곱 자의 제목에 대해 풀이하고 있다.78) ‘대방광불화엄경’이란 법계가 무한함이 ‘대방광’이고, 행덕이 무변함이 ‘불화엄’이라 하여,

대방광을 증득할 법으로 보고, 불화엄을 증득하는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어서 대방이 아니면 불화를 널리 두루하게 할 수 없고, 불화가 아니면

대방을 장엄할 수 없다고 하여, 대방과 불화를 쌍으로 들어서 광(廣)과 엄(嚴)의 종(宗)을 표현하고 있다.79)

78) 韓1, p.495b12~19.
79) 해주스님,『화엄의 세계』(민족사, 1998), p.274.

 

(2)「본업경소서(本業經疏序)」 : ‘보살의 본업을 설한 경전’의 주석에 대한 서문 80)
80) 韓1, p.498a1~b9.

 

「본업경소서」는『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 대해 원효스님이 주석한『본업경소』의 서문이다.『보살영락본업경』은 요진(姚秦)의 축불념

(竺佛念)이 번역(376~378)한 것으로,『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본업경(本業經)』,『영락경(瓔珞經)』,『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이라고도 한다.81)

『보살영락본업경』에서 영락이란 몸을 장식하는 보배 구슬이니, 보살의 영락은 보살의 본업(本業)인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

(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마음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81)『보살영락본업경』은『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의 실역잡경록(失譯雜經錄) 속에

    기재(大55, p.21c20)되어 있으며,『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에는 축불념의 번역

    이외에 유송(劉宋)의 지엄(智嚴)이 번역한 것도 있다고 기록(大49, p.89c11)하고

    있다.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서는 이 경을 대승율(大乘律) 속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수(隋)나라의 천태(天台) 대사는 대승계를 알리는 중요한 경

전으로 주목하였다. 그 후 이 경은『범망경(梵網經)』에서 빠진 대승계를 보충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존하는 이 경의 유일한 주석서가 바로 원효

스님이 지은『본업경소』이다.

 

『본업경소』는 고려시대에 의천(義天)스님이 편찬(1090년)한『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는 3권으로 기록82)되어 있고, 일본의『동역

전등목록(東域傳燈目錄)』에는 2권으로 기록83)되어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본업경소』는 서문과 하권만이 남아 있어서 정확한 권수는 알 수 없다.

82) 大55, p.1173b15.
83) 大55, p.1152b29.

 

원효스님은「본업경소서」에서 ‘모양이 있음’에 집착하는 자와 ‘공하여 없음[空無]’에 막힌 자가 불도에 들 수 있게 하기 위해 두 권의 영락법문을 설하셨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 복과 지혜의 두 노를 갖추어 불법의 대해를 건너고, 지(止)와 관(觀)의 두 날개를 함께 움직여 법성의 허공에 높이 나

는 일이 바로 보살의 본업의 대의라고 밝히고 있다.

 

(3) 「해심밀경소서(解深密經疏序)」 : ‘깊고 비밀스러운 이치를 풀이한 경전’의 주석서에 대한 서문84)

84) 韓1, p.553a1~b1.

「해심밀경소서」는 원효스님이『해심밀경』을 주석(註釋)한『해심밀경소』의 서문이다.『해심밀경』은 현재 범본은 전해지지 않고, 티베트본85)과 한역

본만 전해지고 있다. 한역(漢譯)은 총 5차례86) 이루어졌으며,해심밀경소』는 이 중에서 현장스님이 번역(647)한『해심밀경(解深密經)』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85) 티베트본 명은 ‘Dgon3 s-pa n3 es-par h3 grel-pa’이다. 티베트역은 영어로 번역되어

    있으며(John Powers tr., Wisdom of Buddha: the Sam3 dhinirmocana Mahāyāna Sūtra,

    Berkeley: Dharma Publishing, 1994), 현장역을 영어로 번역한 것도 있다(John P. Keenan,

    The Scripture on the Explication of Underlying Meaning: translated from the Chinese of

    Hsuan-tsang, Berkeley, Calif: Numata Center for Buddhist Translation and Research,

    2000). 현장역과 티베트역을 바탕으로 한 불어번역도 있다(Étienne Lamotte, Sam

    dhinirmocana-ūtra: l’ Explication des Mystères, Louvain: Université de Louvain, 1935).
86) 완역으로는 북위(北魏)의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가 번역(514)한『심밀해탈경

    (深密解脫經)』 5권과 당(唐)의 현장(玄奘)이 번역(647)한『해심밀경(解深密經)』5권이

    있고, 부분역으로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n3 abhadra)가 번역(435~443)한 『상속

    해탈지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1권과『상속해탈여래소작수순처요의경

    (相續解脫如來所作隨順處了義經)』1권,진제(眞諦, Paramārtha)가 번역(557)한『해절경

    (解節經)』1권 등이 있다.

 

『해심밀경』은 모든 언설(言說)과 분별(分別)을 여읜 것으로서의 승의제(勝義諦)를 밝히고,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의해 일어난 모든 존재를 삼성

(三性)·삼무성(三無性)을 통해 설한 후, 이러한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을 바르게 증득할 수 있는 지관수행법(止觀修行法)과 보살의 계위 및 여래

의 법신을 유식(唯識)의 입장에서 교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식학파에서는 이 경을 주요 소의경전으로 삼았다. 현재 『해심밀경소』 전체는 전해지

지 않지만 『동문선(東文選)』 제83권에 서문이 실려 있고, 일본의 선주(善珠, 723~796)가 지은 『유식의등증명기(唯識義燈增明記)』에 본문 일부분이 수록되어 있다.87)

87) 또한 고려 의천스님의『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해심밀경소』가

    소개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기록은『대일본고문서(大日本古文書)』의「나라조현

    재일체경목록(奈良朝現在一切經目錄)」의 승보(勝寶) 3년(751) 기사에 “『해심밀경소』

    3권 원효 술(述)”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후 일본의 여러 경소목록에 계속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도 일찍부터 꾸준히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심밀경소서」에서 원효스님은 『해심밀경』을 요의(了義)의 법륜(法輪)이라고 설하며, 이 경의 주요사상으로 유무의 모습을 여읜 승의제와 지관
법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러한 지관법을 통해서 증득한 전의(轉依)의 법신은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법계에 두루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경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는 여래의 비밀스러운 장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4)「금강삼매경론서(金剛三昧經論序)」 : ‘금강삼매를 설하는 경전’의 주석서에 대한 서문 88)
88) 韓1, p.604b1~c1.

 

『금강삼매경론』은 원효스님이『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주석한 것이다.『금강삼매경』은 7세기 중반 신라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경전으로

역자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본래 한국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89) 양대(梁代) 승우(僧祐, 445~518)의『출삼장기집(出

三藏記集)』에 실린 도안(道安, 312~385)의『신집안공량토이경록(新集安公凉土異經錄)』에 경전의 명칭이 기록90)되어 있다. 이후에도 여러 목록집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널리 알려진 경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9) Robert Buswell,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y in China and Korea: The Vajrasamādhi-sūtra, 

    A Buddhist Apocryphon, Princeton UP, 1989.
90) 大55, p.18c6.

 

『금강삼매경』은 동아시아 불교 특유의 교학과 수행을 발전시킨 중요한 문헌으로서 동아시아 불교 전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본래적인 깨달음

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경은 세속의 모든 더러움과 ‘거짓’을 완전히 초월하여 뚜렷하게 구별되는 인간 의식의 양상이 존재한다는 점을 그 이전의 어느 문헌보다 완전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이런 점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선이 주류 불교가 되는 데 이 경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까지 여겨지고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연기 설화에 의하면, 이 경전의 출처는 용궁이며 신라의 대안(大安)스님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또 원효스님이 이 경에 소

(疏)를 지어 강석(講釋)함으로써 왕비의 병을 낫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이 논이 처음에는『금강삼매경소』라고 불리기도 하였

음을 추정할 수 있다.『금강삼매경』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이 논은 원효스님의 실천적인 불교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저술로 알려

져 있다.

 

『금강삼매경론』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대의를 서술한 것이고, 두 번째는 경의 종지를 밝힌 것이고, 세 번째는 제목을 해석한

것이고, 네 번째는 글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삼공(三空)을 터득하면 일심(一心)의 근원에 도달한다고 설하고 있다. 일심의

근원이 본각(本覺)이라면 삼공은 시각(始覺)이 된다. 원효스님은 이 경의 모든 내용은 결국 일미(一味)의 관행(觀行)으로 회귀함을 밝히고 있다.

 

(5)「열반종요서(涅槃宗要序)」 : ‘열반을 설하는 경전’의 핵심 요지에 대한 서문91)
91) 韓1, p.524a1~b18.

 

「열반종요서」는『열반경(涅槃經)』의 핵심을 간추린『열반종요』의 대의(大意) 부분에 해당한다.『동문선(東文選)』제83권에는「열반경종요서(涅

槃經宗要序)」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열반경』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설법으로 알려져 있는『열반경』92)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며

선근이 끊어졌다는 일천제(一闡提)까지도 다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대승『열반경』이다. 여기에서 언급하는『열반경』은 대승의『열반경』이다. 대승의『열반경』은 중국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번역93)되었는데『열반종요』는 혜엄(慧嚴)과 혜관(慧觀) 등이 번역(420~443)한 남본 『열반경』을 저본으로 하였다.

92) 동진의 법현(法顯)이 405년에 번역한『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3권 등이 이에 해당한다.
93) 421년에 북량의 담무참(曇無懺, Dharmaraks3 ana)이『대반열반경』40권을 번역하였는데,

    이를 보통 북본『열반경』이라고 한다. 그후 혜엄(慧嚴)과 혜관(慧觀) 등이, 처음 번역되었던

    『대반니원경』 6권(418년 법현 역)과 북본『열반경』을 대조하고 교정하여『대반열반경』36권

    을 다시 번역(424~452)하였다. 이것을 남본 『열반경』이라고 한다.

 

원효스님은『열반종요』2권 외에『열반경소(涅槃經疏)』5권을 지었다고 전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열반종요』의 저술 시기는 대략 671~676년 사

이로서『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저술 후『화엄종요(華嚴宗要)』저술 이전인 것으로 추정된다.

 

「열반종요서」에서는『열반경』을 “여러 경전들의 부분을 총괄하여 온갖 흐름을 일미로 귀납시켜서 부처님의 뜻이 지극히 공정함을 열어 보여 백가

들의 서로 다른 쟁론을 화회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열반의 경지를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간 경지로 파악하고 있다.

 

2) 종요(宗要)

‘종요’에 해당하는 것은『법화종요』와『무량수경종요』의 2편이다. 이밖에도 원효스님이 남긴 종요로는『대혜도경종요』,『열반종요』,『미륵상생경

종요』가 있으나 『대혜도경종요』와『열반종요』는 ‘서’만,『미륵상생경종요』는 ‘대의’만 수록하였다.

 

(1) 『법화종요(法華宗要)』 : ‘연꽃과 같은 경전’의 핵심 요지94)
94) 韓1, pp.487c1~494c21.


『법화종요』는 원효스님이『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핵심 요지를 간추린 것이다.『묘법연화경』은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iva)이 406년에

한역한 경전으로 줄여서『법화경(法華經)』이라고도 한다.95)『법화경』의 범본은 주로 단편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이본(異本)들이 남아 있다.『법화경』

은 28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략 2세기 말경에는 모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95)『법화경』은 이외에도 축법호(竺法護)가 286년에 번역한『정법화경(正法華經)』과 사나굴다

    (闍那堀多)와 달마급다(達摩笈多)가 601년에 함께 번역한『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

    經)』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마라집이 번역한『묘법연화경』이 가장 널리 유통되었다.

 

『법화경』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는 인도의 세친(世親)이 저술한『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優波提舍)』이며 줄여서『법화경론(法華經

論)』이라고도 한다.『법화경』은 중국에서도 활발하게 연구되었다.96) 원효스님은『법화경』에 대해서『법화종요』이외에도 『법화경방편품요간(法華

經方便品料簡)』,『법화경요략(法華經要略)』,『법화약술(法華略述)』등을 저술하였다고 전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96) 법운(法雲, 467~529)의『법화의기(法華義記)』, 지의(智顗, 538~597)의『법화현의

    (法華玄義)』와『법화문구(法華文句)』, 길장(吉藏, 549~623)의『법화현론(法華玄論)』과

    『법화의소(法華義疏)』 등이 유명하다.

 

『법화종요』에서는 여섯 문으로 나누어 『법화경』을 해석하고 있다. 처음에는 경의 대의(大意)에 대해서 서술하고, 다음에는 경전에 수록된 교설의

근본 뜻[宗]을 밝히고, 세 번째는 경을 설하는 주체의 작용을 밝히고, 네 번째는 경의 제목을 해석하고, 다섯 번째는 이 경이 어떤 가르침에 포섭되는

지를 드러내고, 여섯 번째는 글의 뜻을 풀이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여섯번째에 해당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원효스님은 『법화경』의 대의를, 여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큰 뜻이며 모든 중생들이 함께 일도(一道)로 들어가는 넓은 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해 삼승방편(三乘方便)의 문을 열어서 일승진실(一乘眞

實)을 보이시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경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은 일승실상(一乘實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타는 사람[能乘人]과 타는 법[所乘法]으로 나누고

있다. 타는 사람은 일승인(一乘人)뿐만 아니라 삼승인(三乘人)까지도 모두 불성을 갖추었고, 반드시 깨달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타는 법을 일승의 이치, 일승의 가르침, 일승의 인(因), 일승의 과(果)의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일승의 이치는 일승실상의 이치로, 일법계(一法界), 법신(法身), 여래장(如來藏)과 같은 의미이다. 일승의 가르침은 일승실상의 가르침으로,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뒤로 열반하실 때까지 설하신 가르침이다. 일승의 인은 일승실상이 되는 원인이며, 일승의 과는 일승실상의 궁극적인 결과인 불과(佛果)이다.

 

세 번째, 경전을 설하는 주체의 작용은 삼승방편(三乘方便)의 문을 여는 개(開)와 일승진실(一乘眞實)의 모습을 보이는 시(示)로 나누어 설하고 있

다. 먼저 여는 뜻[開義]에서는 열어야 할 대상인 방편문과 방편문을 여는 주체인 부처님의 덕용에 대해서 해석한다. 다음으로 보이는 작용[示用]에

서는 보여줄 대상인 진실상과 보여주는 주체인 부처님의 덕용을 나누어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개시(開示)의 작용에서는 부처님이 방편문을 열어서

진실상을 보이는 덕용은 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타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네 번째, ‘묘법연화경’이라는 제목에 대해 묘법과 연화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묘법에 공묘(功妙), 승묘(勝妙), 미묘(微妙), 절묘(絶妙)의 네 가지

의미가 있음을 설하고 있다. 연화에 대해서는 연꽃이 꽃, 수술, 꽃받침, 열매의 네 가지가 합쳐져야 한 송이 꽃이 되듯이, 이 경도 네 가지 의미를 갖

추었기 때문에 묘법이라고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묘법의 네 가지 의미를 각각 백련화(白蓮花), 분타리(分陀利), 온갖 아름다움을 구족함, 더

러움에 물들지 않음에 배대하고 있다.

 

다섯 번째,『법화경』이 요의경(了義經)과 불료의경(不了義經) 가운데 어느 곳에 섭수되는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법화경』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을 소개하고 문답을 통해 회통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이 경전은 근본 도리의 측면에서는 구경요의이지만, 불요의한 말이 있기도 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2)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 ‘한량없는 수명의 부처님을 설한 경’의 핵심요지 97)
97) 韓1, pp.553c1~562b10.

 

『무량수경종요』는『무량수경』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핵심 요지를 가려서 해설한 저술이다. 원효스님이 저본으로 한 『무량수경』은 인도 출신의 강승개(康僧鎧)가 한역(252)하였으며 상·하권으로 되어 있다. 『무량수경』은『대무량수경』·『양권무량수경』·『대아미타경』이라고도 하며 『아미타경』·『관무량수경』과 함께 정토삼부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는 많이 있으나 인도 세친의『정토론』과 원효스님의『무량수경종요』가 유명하다.『무량수경종요』는 일본에서 겸창(鎌倉)시대(1185~1333)에 선림사(禪林寺)에서 간행한 것과 1592년에 간행한 것, 그리고 1711년에 간행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무량수경종요』에서는 경의 근본 되는 핵심 요지를 네 부문으로 열어서 밝히고 있다. 먼저 경의 대의(大意)를 서술하고, 다음에 경의 근본 뜻[宗致]

을 가려내고, 세 번째에 사람에 의거하여 왕생인(往生因)을 분별하고, 마지막으로 경문을 해석하는 순서로 되어 있으나 경문 해석은 생략되어 있다.

대의는, 사바세계와 극락정토가 본래 한마음이며, 생사와 열반이 끝내 둘이 아니나, 생사윤회의 긴 꿈은 단번에 깰 수 없으며 일심(一心)의 근원

에 돌아가는 대각(大覺)은 공을 쌓은 뒤에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경은 보살장(菩薩藏)의 가르침 가운데 본보기이며 불국토 인과를 밝힌 진실한

가르침으로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한량없는 생명으로 돌아감을 노래한 경전’이라고 한다.

 

종치는, 정토의 인과로 그 중심사상을 삼으며, 중생을 거두어 왕생하게 하는 것으로 뜻의 지향점을 삼는다고 하였다. 즉 『무량수경』의 근본 뜻과

지향점을 정토의 과덕(果德)과 인행(因行)으로 드러내보였다.

 

사람에 의거하여 왕생의 인을 설명하는 가운데 먼저 삼취중생(三聚衆生)을 따라 설명하고 다음에 네 가지 의혹을 가진 중생에 대하여 분별하였다. 원효스님은 초지 이상의 보살은 정토를 원하면 언제든지 왕생이 가능하며, 결정되지 않은 삼품(三品) 사람도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면 모두가 왕생하게 된다고 한다. 이들이 진실한 믿음으로 십념염불(十念念佛)을 하면 현세에는 안심을 얻고 고뇌와 죄장이 소멸되며 공덕을 얻고 임종 후에는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

 

네 가지 의혹을 가진 중생을 분별하는 데에는, 의혹의 경계와 그 의혹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네 가지 의혹의 경계는 네 가지 지혜[四智]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의혹하여 믿지 않는 것이다. 『무량수경』에서의 믿음은 식을 전변(轉變)하여 이룬 지혜, 즉 성소작지(成所作智)·묘관찰지(妙觀察智)·평등성지(平等性智)·대원경지(大圓鏡智)의 네 가지 지혜를 믿는 것이며, 믿음의 궁극은 일체의 경계가 일심임을 믿는 것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편문은 칭명염불(稱名念佛)로써 왕생을 하도록 권하고 있다. 특히 십념염불(十念念佛)을 통하여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한량없는 생명을 살게 하려고 인도한 것이 원효스님의 정토관이다.

 

3) 대의(大意)

‘대의’는 『불설아미타경소』「대의」,『미륵상생경종요』「대의」,『대혜도경종요』「대의」의 3편을 수록하였다.

 

(1) 『불설아미타경소(佛說阿彌陀經疏)』「대의」 : ‘부처님께서 아미타불에 대해 설하신 경전’에 대한 주석서「대의」98)
98) 韓1, pp.562c1~563a11.

 

『불설아미타경소』는『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을 주석(註釋)한 것으로, 이 글은 그 중 대의(大意)만을 역주(譯註)한 것이다.

 

『불설아미타경』은『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과 더불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고 불리며, 동

아시아불교에서 정토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널리 유포되었다. 경의 내용은 석존(釋尊)이 사리불에게 서방 극락정토의 장엄과 그곳의 주불(主佛)인 아미타불에 대해서 설하고 이 정토에 왕생할 것을 권하시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왕생의 방법으로 복잡한 수행이 아니라, 단지 왕생할 것을 발원(發願)하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일심으로 지니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설하고 있다.

 

이 경은 현재 범본99)과 티베트본100), 한역본이 모두 전해지고 있다. 한역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중 구마라집이 번역(402)한 『불설

아미타경』 1권이 가장 널리 통용되어 왔다.101) 일찍부터 널리 유통된 만큼이 경의 주석서는 여러 시기를 걸쳐서 꾸준히 저술되었다.102)

99) 범본 명은 ‘Sukhāvatī-vyūha-sūtra’이다.

100) 티베트본 명은 ‘Bde-ba-can-gyi bkod-pa’이다.
101) 이역본으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n3 abhadra)가 번역(454)한『소무량수경

    (小 無量壽經)』1권이 있었으나 일찍이 소실되었으며, 현장(玄奘)이 번역(650)한『칭

    찬정토불섭수경(稱讚淨土佛攝受經)』 1권은 현존하고 있다.
102)『불설아미타경』의 주석으로는 원효스님의『불설아미타경소』1권을 위시하여 수(隨)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의『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1권, 중국 정토종의

    제3조인 당(唐) 선도(善導, 613~681)의『아미타경법사찬(阿彌陀經法事讚)』2권, 당(唐)

    규기(窺基, 632~682)의『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1권 등이 유명하다.

 

원효스님의 『불설아미타경소』는 그의 다른 정토계열 저술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소(疏)에서 다루지 못한 많은 세부적인 논의를 『무량

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에 미루고 있으며, 그의 다른 정토 저술과 마찬가지로 세친의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無量壽經優波提舍願生偈)』를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

 

『불설아미타경소』의 구성은 대의와 종치(宗致), 글에 따른 해석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대의에서는 이 경이 바로 석존과 아미타여래께서 세상

에 출현하신 뜻 자체이며, 불제자가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설하고, 또한 정토왕생을 발원할 만한 것이라고 찬탄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토

와 예토는 둘이 아니며, 이 경을 통해서 바로 일승(一乘)에 들어갈 수 있음을 역설함으로써 정토와 일승을 연결시키고 있다. 종치에서는 이 경이 ‘종

(宗)’으로 하는 것이 기세간(器世間)과 중생세간(衆生世間)의 청정(淸淨)이고, ‘의치(意致)’로 삼는 것은 중생이 위 없는 도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글에 따른 해석에서는 경을 서분, 정종분, 유통분으로 나누어서 글에 따라 해석해나간다. 여기에서 원효스님은 경의 용어 해

석과 함께, 이 경과 다른 일반적인 불교 이론과의 표면적인 모순을 해소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2)『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대의」 : ‘미륵보살이 상생함을 설하는 경전’의 핵심 요지「대의」103)
103) 韓1, p.547b1~c17.

『미륵상생경종요』는『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타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陀天經)』의 종지(宗旨)를 간추린 것이다. 이 경은 줄여서 『미륵상

생경』이라고 하며,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104)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미륵계 경전 중의 하나이다.105)『미륵상생경』은 우바리의 질문에 대한 석존의 대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경에서는 먼저 미륵보살이 머무르고 있는 도솔천의 장엄과 복덕에 대해서 설한다. 그리고 그곳에 왕생하여 미륵보살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왕생을 발원하고 십선법(十善法) 등의 청정한 업을 닦으며 도솔천의 장엄과 부처님의 모습을 관하고 미륵보살의 명호를 칭념(稱念)해야 한다고 교설하고 있다.

104)『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105) 이 경에 대한 주석이나 종요서로는 원효스님의『종요』 외에, 중국 길장(吉藏,549~623)의

     『미륵경유의(彌勒經遊意)』, 규기(窺基, 632~682)의『관미륵상생도솔천경찬(觀彌勒上生經

     兜率天讚)』이 있으며, 신라 원측(圓測, 613~696)의 미륵상생경약찬(彌勒上生經略讚),

     경흥(憬, 620~700 추정)의『미륵상생경요간기(彌勒上生經料簡記)』, 태현(太賢, ?~752~?)의

     『미륵상생경고적기(彌勒上生經古迹記)』가 있다.

 

『미륵상생경』은 범본과 티베트본이 전하지 않으며, 한역본도 다른 미륵계 경전과는 달리 유송(劉宋)의 저거경성(沮渠京聲)이 455년에 번역한 본

만 전한다.

 

『미륵상생경종요』는 십문(十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의(大意)는 첫 번째 문에 해당한다. ‘대의’에서는 우선 미륵보살에 대해 찬탄한 후, 경의

제목을 풀이한다. 여기에서 원효스님은 이 경이 중생들에게 ‘관(觀)’을 닦도록 권한 참된 경전이라고 설하면서 이 경의 중심이 ‘관’에 있음을 강조하

고 있다. 두 번째 문인 ‘종치’에서는 이 경의 핵심사상에 대해, 관행(觀行)의 인과(因果)를 ‘종(宗)’으로 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도솔천에 왕생하여 물

러섬이 없도록 하는 것을 ‘의치(意致)’로 삼는다고 밝힌다. 여기에서 ‘행’은 경의 내용 중 ‘십선법’ 등의 청정한 업을 닦는 것이고, ‘관’은 의보인 도솔천의 장엄과 정보인 미륵보살의 수승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어서 청정한 업행과 의보·정보에 대한 관을 내용으로 하는 인(因)에 의해 얻는, 위없는 도에 대한 불퇴전 등의 과보(果報)를 싹, 잎, 꽃, 열매 등의 비유로써 드러낸다. 세 번째 문부터 열 번째 문에서는 미륵경전 및 미륵신앙에 관련된 주요한 논란을 풀어내가고 있다.106)

106) 미륵신앙은『미륵상생경』에 근거한 ‘미륵상생신앙’과,『미륵하생경』 및『미륵성불경』

     계열을 기반으로 하는 ‘미륵하생신앙’의 두 종류가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미륵하생신

     앙이 주류를 이루어갔으나, 도솔천에 왕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미륵상생신앙이

     먼저 일어났다. 원효스님은『미륵상생경』을 중품인(中品人)을 위한 보살장(菩薩藏)으로,

     『미륵하생경』을 하품인(下品人)을 위한 성문장(聲聞藏)으로 판석한 것으로 보아, 하생

     신앙보다 상생신앙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창과 바늘이 모두 필

     요하다는 비유를 통해『하생경』과『상생경』 모두를 보배라고 하면서 이를 다시 회통시

     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미륵사상, 나아가 불교사상 전반을 회통시키려는 원효스님

     사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3)『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대의」 : ‘큰 지혜로 건넘을 설하는 경전’의 핵심 요지「대의」107)
107) 韓1, p.480a1~b19.


『대혜도경종요』「대의」는『대혜도경(大慧度經)』을 주석한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의 대의(大意) 부분만 번역한 것이다.

 

『대혜도경』은 범어『마하프라즈냐파라미타수트라(Mahā-prajñapāramitā-sūtra)』의 번역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마하반야바라밀경』

이라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원효스님이『대혜도경종요』를 저술하면서 사용한 경전은, ‘대의’ 마지막 부분에 “이 경은 모두 육백권 십육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장스님이

663년에 번역한『대반야바라밀다경』600권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원효스님은 제2분(제2회)에 해당하는, 구마라집이 404년에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 27권과 이에 대한 용수(龍樹, Nāgārjuna, 2~3세기)의 해설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많이 의거하여 논리를 전개함을 볼 수 있다.

 

『대혜도경종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본의 영초(永超)가 작성한 목록인『동역전등목록(東域傳燈目錄)』(1094)에 보인다. 그런데 의천(義

天)의『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는 일찍 산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대혜도경종요』는 대체적인 의미[大意], 경의 종지[經宗], 경 제목의 해석[釋題名], 경을 설한 연기[明緣起], 교상판석[判敎], 문장의 해석[消文]

등의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장의 해석은 “논에 의거하여 자세히 해석한다[依論廣釋]”라고만 되어 있을 뿐 주석은 남아 있지 않다.

 

『대혜도경종요』의「대의」에서 반야, 즉 지혜란 “아는 바가 없으므로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고 하며, 바라밀 역시 “이르는 바가 없으므로 이르지

못하는 바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을 대혜도(大慧度)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반야경』은 “말함이 없고 보임이 없으며 들음이 없고 얻음이 없어 모든 희론을 끊는 격언”이라고 평가하였다.

 

4) 기타 단편

‘기타 단편’은 경전의 표준이 될 만한 주석이 거의 없이 전적으로 수행지향적인 저술이라는 점에서 원효스님의 다른 저술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하

는 저술을 모은 것이다. 여기에는『보살계본지범요기』,발심수행장』,『대승육정참회』를 수록하였다.

 

(1)『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 보살계본을 지니고 범함에 대한 핵심을 적은 글108)

『보살계본지범요기』는 보살계본을 지니고 범하는 것에 대한 요점을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살계본’이란 대승보살이 지니는 계(戒)의 근본,

또는 이것을 설하고 있는 경론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지역에서 는 대승보살계본으로서『유가사지론』계열과『범망경』계열의 계본이 두

축을 이루어왔다.

 

두 계열의 계본은 중계(重戒)와 경계(輕戒)의 항목수에서도 차이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도『유가사지론』계열은 부파 계율을 함께 포섭하고 있는

반면, 『범망경』 계열은 순수한 대승보살계의 선양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에서 구별된다. 일반적인 계율사에서는 부파 계율로부터『유가사지론』계

열을 거쳐『범망경』계열의 계로 진행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효스님은 부파 계율로부터 대승보살계본에 이르기까지 계율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저

술을 남기고 있지만, 특히『범망경』계열에 대한 저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면에『유가사지론』계열의 보살계본에 관한 원효스님의 독립된 저술

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효스님의 저술 중 계율에 관한 것으로는『사분율갈마소(四分律羯磨疏)』,『범망경종요(梵網經宗要)』,『범망경소(梵網經疏)』,『범망경약소(梵網

經略疏)』,『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보살계본지범요기』가 목록에 전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뒤의 세 종류뿐이다. 이들을 보면, 원효스님은 초기불교의 율장 전통과 구별되는 대승계의 본질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음109)을 알 수 있다.

109)『보살영락본업경소』서두에서 원효스님은 ‘두 수준의 진리’와 ‘중도’ 교리를 나타내는

     바다와 하늘의 비유로 계의 본체적인 실체와 현상적인 실체를 논의하고 있다. 하늘에는

     아무런 길이 없는 것처럼 중도에 통달할 수 있는 방법이 미리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정해진 규칙이 없다고 해서 수행자가 따라야 할 길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길이 없다는 말은 무엇이든 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며, 특별한 문이 존재하지 않

     는다는 것은 무엇이든 불교 수행을 향한 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뜻이다.

     보살계를 다루는 또 다른 저술 『범망경보살계본사기』에서 원효스님은 계율의 현상적인

     측면과 본체적인 측면의 또 다른 예로 브라만의 그물 속의 낱낱 매듭과 전체 그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물은 전체 그대로 하나이지만 많은 매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듭 하

     나가 존재하려면 다른 매듭에 의존해야 한다. 그물 속에 있는 매듭의 바로 이런 다양성이

     현상 세계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며, 정해진 규칙을 적용해 이런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보살계본지범요기』는 특정 계본에 대한 주석이나 종요가 아니고, 내용상으로도『범망경』계열과『유가사지론』계열을 모두 이용하고 있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대의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둘째는 본문이고, 셋째는 유통게이다. 또 본문은 계를 지님과 범함에 있어서 가

벼움과 무거움, 얕음과 깊음, 구경의 지님과 범함을 밝히는 세 가지 문으로 나눠진다.

 

첫째,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은 『범망경』을 중심으로 하여 계 자체의 성격에 대한 총괄적인 설명을 한 후, 이어서 『유가사지론』 계열 계본을 인용

하여 개별적으로 계의 특성을 상술한다. 특히 『유가사지론』 계열의 중계(重戒) 중 첫째 항목인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죄’의 경우를 들어서

죄를 범하고 범하지 않음, 물듦과 물들지 않음을 구별하고 있다. 첫째 문이계 자체의 특성을 밝힌 것이라면, 둘째 얕음과 깊음의 문은 대승보살계에

서 특히 중요시되고 또한 문제시될 수 있는 계의 개차법(開遮法), 즉 상황에 따른 계의 허가와 금지의 양상을 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둘째

문에서도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죄’를 들어서 다양한 경우에 있어서 어느 것이 참된 계의 지님이고 범함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셋째 문은 위

의 두 문을 바탕으로 구경의 지님과 범함, 즉 계바라밀을 밝힌다. 원효스님은 여기에서 계는 자성이 없지만 또한 보리심을 인연으로 하기 때문에 없

는 것도 아닌, 모든 부처의 근원이며 보살의 근본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계바라밀은 유·무와 인·과의 양변을 여읜 실천이다. 그래서 원효스님

은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이 계바라밀을 행하여야만 비로소 구족(具足)할 수 있다고 역설함으로써 계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2)『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하는 장110)
110) 韓1, p.841a1~c6.
『발심수행장』은 불교에 처음 입문한 자들에게 발심하여 수행하기를 간절히 권하는 글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원효스님이 한

창 깨달음의 도(道)를 구하고자 수행하던 때이거나 또는 만년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심수행장』은 보조 지눌(知訥)의『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야운(野雲)스님의『자경문(自警文)』을 합본하여『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

文)』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간행되었다.『초발심자경문』은 불교전문강원의 사미과(沙彌科) 교과목으로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발심수행장』의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해인사에서 고종(高宗) 20년(1233)에 간행한 목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111) 언해본도 2종이 있다. 1577년에 전라도 송광사(松廣寺)와 1583년에 경기도 용인 서봉사(瑞峰寺)에서 간행된 책들이다.

111) 국회도서관 사서국 참고서지과 편,『한국고서종합목록』(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68), p.715.

『발심수행장』에서 발심은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과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생각을 함께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

을 일으킨다고 한다. 보리는 범어이고 의역하면 각(覺)이다. 수행은 보리심을 일으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발심수행장』에서는 먼저 수행해야 하는 이유를 부처와 중생의 차이, 천당과 지옥에 가는 자로 나누어 말하였다. 다음에 인연에 따른 수행, 수행자

의 마음·행처·염불·지계·금욕 등 참된 수행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끝으로 젊은 시절에 촌음을 아껴 부지런히 수행해야 함을 당부하고 있다.

 

(3)『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 대승의 육정참회112)
112) 韓1, pp.842a1~843a7.

『대승육정참회』는 육정(六情)으로 참회하는 대승의 참회법을 밝힌 저술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참회수행서로 알려져 있다. 중생이 죄를 짓는 것은

육정(六情 : 六根)을 통해 육진(六塵 : 六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기 때문에 육정의 참회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저지른 죄는 보통

의 인식 기능을 통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을 참회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승육정참회』에서 설명하는 참회의 특징은, 일반적인 참회문이나 당시 신라에서 유행하던『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의 참회법이 구

체적인 참회법을 설명하는 것과 달리 업이나 죄가 본래 무생(無生)임을 깨닫고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회라고 설명하는 점이다. 몸으로 직

접 참회하는 사참(事懺)과, 근본적인 이치를 깨닫는 이참(理懺)으로 참회를 나눌 때『대승육정참회』는 주로 이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법계를 의지하여 비로소 유행하려는 사람이라면 4위의[行住坐臥]에서 한 가지도 헛되이 유행함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공덕

을 마음에 새기고, 항상 실상을 생각하여 업장을 녹이며, 널리 육도의 가없는 중생을 위하여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로 시작하는『대승육정참회』는 ‘법계’, ‘연화장세계’, ‘노사나불’ 등의 표현을 통해, 원효스님의 참회법이 단순히 중생이 잘못된 죄악을 참회하는 정

도에서 머물지 않고 법계에 유행하는 화엄행자의 일심참회법임을 밝히고 있다.

 

5) 원효스님 행장

이상 총 13편의 저술에 이어 원효스님의 행장을 첨부하였다.

 

원효스님 행장은 원효스님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대표적인 네 가지 전기를 번역한 것이다. 이들 중 어느 것도 보통 행장에서 볼 수 있는 자세한

전모를 담고 있지는 않다. 행장은 유명인의 사후에 제자나 가족들이 적은 기록으로서 당시에는 공식적인 전기 자료로 이용되었다. 지금의 자료를 모으면 원효스님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 너머의 원효스님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지 문헌은 다음과 같다.

 

1. 일연(一然, 1206~1289),『삼국유사』권4「원효불기(元曉不羈)」(1281~1283년)

2. 찬녕(贊寧, 919~1001),『송고승전』권4「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988년)

3. 찬녕(贊寧, 919~1001),『송고승전』권4「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 (988년)

4. 각안(覺岸, ?~1896),『동사열전(東師列傳)』권1「원효국사전(元曉國師傳)」 (1894년 탈고)

 

원효스님의 생애와 관련한 자료 중에서는 세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위의「원효불기」와「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과 함께 3대 자료로 간주되는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800~809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고선사서당화상비」는 단편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이번 번역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비문의 연대가 애장왕 때(800~808)로 추정되기 때문에 원효스님의 생애 자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내용이 나머지 두 전기가 전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하지만 비문은 원효스님 전기의 발달과정을 재건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문은 또한 원효스님이 입적할 때의 세수(70세)와 정확한 날짜(686년 3월 30일)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일연이 지은 전기에서 보이는 탄생 연도(617)와 함께 스님의 정확한 생애를 알려준다.

 

그 다음으로 오래된 자료는 찬녕이 지은 전기이다. 하지만 찬녕은 원효 스님의 생애보다는 어떻게『금강삼매경』에 주석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

야기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찬녕은『금강삼매경』이 어떻게 발견되었으며 원효스님이 주석을 하게 된 사정과 관련한 경전의 전파 이야기에 주로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의상의 전기에 덧붙여서 중국 유학을 포기한 사정도 언급하고, 원효스님의 별난 행적도 언급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비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세 번째로, 현재까지 가장 풍부한 자료는 당연히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그러나 일연은 전기에 이미 충분히 공을 들였을 무렵에 글을 지었다. 기본적으로 일연은 이전에 전기를 지은 사람들이 잘 알려진 자료에서 빠뜨린 몇 가지 정도만 추가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낸다기 보다 기존의 것에 의견을 덧붙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행장』을 언급하면 서 독자들이 이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서당화상비」는 고려 시대에 세워진 다른 비문과 함께 온전히 남아 있었고 다른 자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삼국유사』의 다른 곳에서는 원효스님과 관련

한 많은 정보와 전설을 찾을 수 있는데「의상전교(義湘傳敎)」와「사복불언(蛇福不言)」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번역한 또 다른 두 자료는「당신라국의상전」에서 발췌한 것과 상당히 후대에 만들어진 원효스님의 전기이다. 원효스님이 의상과 함께 중

국으로 가던 도중에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가「당신라국의상전」에 포함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원효스님에게 가장 영감을 안겨준 유일하고 강력한

동기로서 동시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밤을 피하려고 찾아들어 간 따뜻한 쉴 곳이 사실은 무덤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는, 지옥도 천당도 이 둘을 모두 벗어나는 일도 모두 마음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원효스님(과 독자들)에게 깊이 깨닫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약간의 변화를 거치면서 결국에는 원효스님이 해골물을 마시는 생생한 모습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런 점은 19세기 후반에 각안이 저술한「원효국사전」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전 시대에 등장한「당신라국의상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연수(延壽, 904~975)의『종경록(宗鏡錄)』(961년), 덕홍(德洪, 1071~1128)의『임간록(林間錄)』(1107년) 등 중국의 선사들이 편집한 많은 문헌에서도 전기를 찾아볼 수 있지만 단순히 이전 자료들을 반복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5. 맺음말

 

이상과 같이 원효스님은 새벽을 열고 무애행(無碍行)으로 대중을 교화하면서도 불교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불교사상이

상충되는 듯이 보이는 쟁론들을 여래성(如來性)의 일심(一心)으로 회통시켜 한국불교에서 화쟁국사로 자리매김되었다.

 

무애자재행으로 펼쳐지는 화쟁정신은 현전하는 설화 속의 원효스님의 모습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원효가 판을 던져 대중을 구한다’는 글을 써서

던져 중국 고찰의 천 명 대중을 위기에서 구했다113)는 것이나, 이어서 신라로 찾아온 천 명의 대중을 천성산 상봉에 모아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현재도 그 곳을 화엄벌이라고 하며, 그 천 명 대중이 거의 도를 깨달았으므로 그 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한다114)는 설화는 원효스님의 대승보살로 서의 면모를 잘 담고 있는 것이다.

113)「척판암사적비(擲板庵事蹟碑)」,「천성산 내원사 유래(千聖山內院寺由來)」,『송고승전』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척반대사적기(擲盤臺事蹟記)」(『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하, pp.162~163).
114)「천성산 내원사 유래」.『동사열전(東師列傳)』권1에는 동래 금정산에 원효암과 화엄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사화(史話)가 천성산 화엄벌 설화이다.

 

신라 통일기를 전후한 당시의 골 깊은 갈등을 화해시키고 민중의 고통을 해결해준 원효스님의 불교사상은, 1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갈등과 모순을 해소시킬 수 있는 핵심 대안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