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율장의 불탑 기술에 관한 일고찰 불탑=붓다의 관점을 중심으로/이자랑

실론섬 2016. 9. 19. 18:48

율장의 불탑 기술에 관한 일고찰

불탑=붓다의 관점을 중심으로

「불교연구」제43집(2015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1-36-A00008].
이자랑/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Ⅰ. 서론

Ⅱ. 발조탑의 의의

Ⅲ. 불탑에 대한 예경과 공양

Ⅳ. 불탑 공양물=불물(佛物)로의 인식 변화

Ⅴ. 결론

 

[요약문]

불탑은 석가모니의 유골인 사리를 봉안한 분묘(墳墓) 내지 그 종

교적 건축물을 의미한다. 불멸 후, 불탑은 붓다를 대신하는 가장 중

요한 신앙 대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때 히라카와 아키라

의 ‘대승불교 재가 불탑 기원설’의 영향으로 출가자와 불탑 신앙은

무관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동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이 설을 재검토함으로써, 부파교단의 출가자와 사

리 내지 불탑 공양의 밀접한 관련성이 증명되었다. 불탑은 경전이나

논서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율장은 출가자들의 일상생활을

규정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불탑의 실제적 신앙 모습을 비교적 정확

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이제 율장에 나타나는

불탑 기술을 보다 세밀하게 검토함으로써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이 불

탑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신앙했는지 그 구체적인 실태를 파악해

갈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제율에 나타나는 불탑 기술 가운데 특히 ‘불탑=

붓다’의 관점이 확인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부파교단에서의 불탑 신

앙 형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이런 관점에서 불탑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논한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그레고리 쇼펜과 시모다 마사

히로가 있다. 이들 연구로부터 알 수 있듯이, 불탑은 살아있는 붓다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불탑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도 중요한 시점이다. 부파교단은 이러한 인식 하에 불탑을 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불탑=붓다라는 인식을 어떻게

갖게 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인식은 어떤 형태로 조문화되어 실천되

고 있었던 것일까? 본고에서는 이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부파교단

에서의 불탑 신앙 형태를 고찰하였다.

 

제Ⅱ장에서는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모신 발조탑(髮爪塔)에

관한 전승을 검토하며, 붓다의 신체 일부가 붓다 그 자체로 인식되

고 있던 현상을 소개하였다.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을 모신

발조탑은 붓다 재세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붓다의 신체 일부가 붓

다의 현존을 실현한다는 의식은 초기 교단에서 이른 시기에 형성되

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는 머리카락을 성스러운 물건으

로 취급하는 율장의 여러 기술로부터 추측 가능하다. 또한 공간적으

로 떨어져 있는 붓다와 항상 함께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모시는 소

박한 이동형 용기의 용도로 탑이 처음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나 습속은 불멸 후, 붓다가 사리만

을 남기고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불교도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고 불

탑=붓다라는 인식 하에 적극적으로 불탑 신앙에 몰입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머리카락이나 손톱과 같은 신체 일부가 붓다의 현

존을 약속했듯이, 한층 더 확실하게 붓다의 현존을 보증하는 것으로

사리를 인식했던 것이다.

 

불탑=붓다라는 인식은 실제 생활에서 다양한 율 조문을 통해 현

실화되었다. 특히 불탑에 대한 예경과 공경은 살아있는 붓다를 대하

는 태도와 다름없으며, 불탑에 바쳐진 공양물은 승단에 바쳐진 공양

물과 명확하게 구분되며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본고의 제

Ⅲ장에서는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불탑을 대하는 출가자들의 모습을

예경․공양과 관련된 조문을 통해 살펴보고, 제Ⅳ장에서는 생전에

사방승가(四方僧伽)의 일원으로 파악되었던 붓다가 불탑 공양물=불

물(佛物)이라는 시각에서 불탑을 통해 독립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현상을 다루었다.

 

Ⅰ. 서론

불탑은 석가모니의 유골인 사리1)를 봉안한 분묘(墳墓) 내지 그
종교적 건축물을 의미한다. 불탑의 기원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은
사리팔분(八分) 및 십탑(十塔) 건립 전승이다. 붓다의 마지막 여행
을 다룬 빨리 장부(長部)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다비 후 남은 붓
다의 사리는 8개 나라의 부족에게 분배되었으며, 또한 사리를 담
았던 병과 남은 탄(숯)2)을 가져간 부족도 있어, 각지에 모두 10개
의 탑이 건립되었다고 한다.3) 즉, 붓다의 사리를 넣은 8개의 사리
탑과 병탑(甁塔), 탄탑(炭塔)이다.4) 이후 불탑신앙의 구체적인 상
황은 알기 어렵지만, 붓다 열반 후 100년(혹은 200여년) 후에 등
장한 마우리야 왕조의 아육(阿育, Aśoka)왕이 위의 사리탑을 열어
사리를 꺼내 세분한 후에 인도 각지에 8만 4천 개의 탑을 세웠다
는 전승5)을 고려할 때, 불멸 후 불교교단에서 불탑 신앙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1) 사리는 산스끄리뜨어 śarīra(Pāli. sarīra)의 음역으로, 붓다 혹은 성자의 유
   골을 말한다. 신체의 의미이지만, 복수형은 유골을 의미한다. 中村元[1981:
   602] 舎利항.
2) 杉本는 일반적으로 이 부분이 회탑(灰塔)으로 표현되곤 하지만, 경전에서
   는 ‘재는 남지 않았다’라고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재를 가져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杉本卓洲[ 2007: 14]. 빨리 대반
   열반경의 해당 부분을 보면, 분명 “다비 후 재(chārikā)도 재 가루(masi)
   도 남지 않았다” (DN. ⅱ. 164)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 분
   배가 끝난 후 뒤늦게 도착한 모리야 족은 炭(aṅgāra)을 가져갔다고 명기
   하고 있다. (DN. ⅱ. 166) 따라서 이는 설득력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된다.
3) Mahaparinibbāna-suttanta, DN. ⅰ. 164-166. 한편, 장아함의『유행경』에
   서는 髮塔을 넣어 11탑으로 기술하고 있다. 『유행경』 (T22, 30a14).
4) 여기서 언급되는 탑의 원어는 스뚜빠(stūpa)이다. 스뚜빠는 원래 두발(頭
   髮), 머리카락의 방(房), 머리의 상부(上部), 집의 대들보 내지 정상, 나아가
   퇴적(堆積), 흙이나 점토 더미 등을 의미하는데, 나아가 불교의 기념비, 유
   골의 봉안처, 뼈 상자 등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杉本卓洲[2007: 21].
5) 『아육왕전』 권1(T50, 102a16); 아육왕경 권1(T50, 135a11).

 

그런데 불탑신앙이 불교교단의 구성원 가운데 누구를 중심으로
성행했는가, 출가자는 불탑신앙에 관여했는가, 관여했다면 어느
수준인가(운영 주체인가 아닌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그간 학계
에서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어 왔다. 논란의 본격적인 시발점은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가 제시한 대승불교의 기원에 관한 일련
의 연구라고 생각된다.6) 히라카와는 1968년에 출판한「초기대승
불교의 연구」7)라는 저작에서 ‘대승불교 재가불탑기원설’을 제시한
다. 이는 대승불교를 만든 사람들이 전통적인 부파승단의 출가자
들이 아닌, 불탑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신행 활동을 하고 있던 재
가자들이라는 내용의 가설이다. 이 가설의 논증을 위해 히라카와
가 주목한 문헌은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의 일상생활을 규정한 ‘율
장(律藏, Vinayapiṭaka)’이다. 히라카와 이전의 연구자들이 대승의
기원을 고찰할 때 주로 전통부파교단과 대승의 교리적 유사성 내
지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히라카와는 율장의 세밀한 검토를
통해 전통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의 일상생활과 대승불교 문헌에 나
타나는 대승교도들의 생활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대두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불탑 공양’이다. 히라카
와는 대승경전에서 불탑 공양의 한 방법으로 빈출하는 가무(歌舞)
공양이나 금은화만(金銀華鬘)에 의한 장식이 율장에서는 사미십계
(沙彌十戒)에 포함되어 출가자에게 금지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불탑 공양을 부파교단에 속한 출가자들과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행위로 파악하였다. 또한 제율(諸律) 가운데 가장 오래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되는 빨리율에 불탑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도 부파교단의 출가자와 불탑신앙이 본래 무관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8)
6) 히라카와 이전, 바로는 불탑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
   문은 제율에 나타나는 불탑 규정을 상세히 정리, 소개한 것으로 특별히 논
   쟁을 일으킬 만한 요소는 없었다. Bareau[1962: 229-274].
7) 그 후 새로운 연구 성과를 더하여 平川彰[1989]와 平川彰[1990]로 재 출판
   되었다.
8) 平川彰[1960: 604-657] 및 平川彰[1990: 272-277]. 히라카와는 이 외, 빨리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비구들아, 너희들은 여래의 사리공양(Tathāgatasarīra
   -pūjā)에 관여하지 말거라”(DN. ⅱ. 141)라는 구절 역시 부파교단의 출가자가 
   불탑공양과 원래 무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서는 쇼펜이『대반열반경』에 나오는 sarīra의 용례를 모두 검토한 후, 이 구절
   에서 말하고 있는 sarīra-pūjā는 사리공양이 아닌, 붓다의 유체를 다비하는 등의 
   葬儀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쇼펜에 따르면, 이 경전에 나
   오는 sarīra는 단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몸, 즉 신체를 의미하지만, 복수로 사용되
   면 유골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쇼펜의 해석에 의하면, 붓다가 출가제자들에게 
   금지한 것은 장의이지, 사리공양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Schopen[1997b: 99-113].

 

히라카와의 대승불교 재가불탑기원설은 한 동안 대승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가설로 받아들여졌지만, 한편에서는 반론
역시 꾸준히 제기되었다. 근년에는 그의 가설이 지니는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황이다.9) 이들 연구에 의해 부파승
단의 출가자들이 사리 내지 불탑 공양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근거
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10) 따라서 이제 율장에
나타나는 불탑 기술을 보다 세밀하게 검토함으로써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이 불탑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신앙했는지 그 구체적
인 실태를 파악해 갈 필요가 있다. 불탑은 경전이나 논서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율장은 출가자들의 일상생활을 규정한 문
헌이라는 점에서 불탑의 실제적 신앙 모습을 비교적 정확하게 확
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9) 그 중 율장과 불탑신앙에 국한하여 본다면, 사사키와 시모다의 연구가 주
   목된다. 먼저 사사키는 諸律에 나오는 伎樂觀賞에 관한 기술을 검토하여,
   출가자의 기악관상에 대한 교단의 입장이 ‘비구는 기악을 보아서는 안 된
   다’는 규정이 아직 없는 상태 (비구니의 기악 관상은 처음부터 금지) →
   첫 번째 단계의 불완전성을 시정하기 위해 나중에 금지조항이 삽입 → 불
   타 공양을 위해서라면 기악관상도 허용한다는 특례의 마련이라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변화해 갔음을 논증하고 있다. 佐々木閑[1991: 1-24]. 한편, 
   시모다는 바로[1962]나 쇼펜[1997a, 1997b] 등의 선행 연구를 참조하면
   서도 한층 심도 있게 율장이나 비문 등의 불탑 기술을 재검토하여 부파교
   단의 출가자와 불탑 공양의 밀접한 연관성을 논하고 있다. 下田正弘[1997:
   100-128].
10) 출가자들의 불탑 관여는 기원전 2∼1세기경에 建造된 것으로 알려지는
    바르후트 탑과 산치 대탑에 새겨져 있는 비문에서도 읽을 수 있다. 바르후
    트 탑의 경우, 남성 출가승려 25, 여성 출가승려 15의 사례가 보인다. 비구
    라는 호칭을 사용한 경우는 하나이지만, 성자나 대덕, 경전 암송자, 經師,
    삼장에 정통한 자, 오부 경전에 정통한 자, 집착을 여윈 자, 造營監督者, 음
    식 분배자 등의 호칭이 寄進者로 나타난다. 조영감독자란 승원이나 불탑을
    건립할 때 설계나 건축 지휘를 맡았던 승려를 말한다. 한편, 여성 출가자
    는 모두 비구니로 표현되고 있다. 한편, 재가자의 직종에서 명확한 것은
    왕, 왕의 처, 왕자, 장자, 마부, 조각사의 여섯 사례뿐이다. 산치 대탑의 경
    우에도 출가승이 84, 여자승이 93의 사례로 재가자보다 훨씬 많다. 杉本卓
    洲[2007: 81-82]. 다만, 처음부터 출가자들이 불탑공양에 적극적이었는가,
    아니면 처음에는 재가자의 몫이었다가 후에 이런 일반적인 경향을 승단에
    서도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검토의 여지가 있는 것 같
    다. 안양규[1999: 229-248]

 

이에 본고에서는 제율에 나타나는 불탑 기술 가운데 특히 ‘불탑
=붓다’의 관점이 확인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부파교단에서의 불탑
신앙 형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이런 관점에서 불탑의 가
치를 본격적으로 논한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쇼펜과 시모다가 있
다.11) 이들 연구로부터 알 수 있듯이, 불탑은 살아있는 붓다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불탑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도 중요한 시점이다. 부파교단은 이러한 인식 하에 불탑을 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불탑=붓다라는 인식을 어떻
게 갖게 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인식은 어떤 형태로 조문화되어
실천되고 있었던 것일까?12) 본고에서는 이 두 가지 점을 중심으
로 부파교단에서의 불탑 신앙 형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제Ⅱ장
에서는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모신 발조탑(髮爪塔)에 관한
전승을 검토하며, 붓다의 신체 일부가 붓다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던 현상을 소개하였다. 제Ⅲ장에서는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불탑
을 대하는 출가자들의 모습을 예경․공양과 관련된 조문을 통해
살펴보고, 제Ⅳ장에서는 생전에 사방승가(四方僧伽)의 일원으로
파악되었던 붓다가 불탑 공양물=불물(佛物)이라는 시각에서 불탑
을 통해 독립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현상을 다루었다.
11) Schopen[1997a: 114-147]. 쇼펜은 이 논문에서 주로 비문이나 대소승 경
    전류에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불탑=붓다의 현상을 논하고 있다. 한편,
    시모다는 바로[1962]나 쇼펜[1997a]의 연구 성과를 고려하며 좀 더 폭 넓
    은 문헌을 대상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 있다. 下田正弘[1997].
12) 후자에 관해서는 Bareau[1962]와 下田正弘[1997]가 직간접적으로 많은 정
    보를 제공해 준다.

 

Ⅱ. 발조탑의 의의

일반적으로 불탑이라 하면 붓다 입멸 후 그의 유골 등으로 만
들어진 사리탑이 거론되지만, 제율의 전승에 따르면 붓다 재세 당
시에 이미 탑이 조성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가섭불탑․사리
불과 목련의 탑․붓다의 발조탑 등을 들 수 있다.13) 이 중 가섭불
탑은『마하승기율』,『오분율』,『사분율』등에 나타나는 전승이
다.14) 가섭불이란 붓다 이전의 과거육불 가운데 마지막 제6불에
해당하는 부처이다. 설명이 상세한『마하승기율』에 의하면, 꼬살
라국에서 한 바라문이 토지를 경작하다가 제자들과 더불어 유행
하는 붓다를 보자 갖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후 예를 갖추었
다. 그러자 붓다는 미소를 지으며 “저 바라문은 지금 2불(佛)을 예
배한 것이다. 한 명은 나이며, 또 한 명은 가섭불이다. 그가 지팡
이를 꽂은 그 땅 밑에는 가섭불의 불탑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어
붓다는 가섭불의 칠보탑을 현시(現示)하고, 나아가 직접 가섭불의
불탑을 그곳에 만들며 제자들에게도 조탑 행위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어 조탑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하며 불탑 건립 및 공양
에 관한 구체적인 조문들을 제정해 간다.15) 한편, 사리불과 목련
의 탑은『사분율』,『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등에서 확인된다.
이 둘은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쌍벽을 이루는 붓다의 대표적인
제자들이었는데, 모두 붓다보다 먼저 입멸하였다. 이에 한 단월이
이들을 위한 사리탑을 만들기를 원하자, 붓다는 이를 허락하며 조
탑법을 상세히 규정한다.16) 한편,『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
서는 사리불과 관련해서만 언급하는데, 급고독장자가 사리불의 신
골(身骨)을 가져가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17)
13) 이들 전승의 내용은 杉本卓洲[1984: 249-297]; 平川彰[1990: 282-289]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14)『마하승기율』권33(T22, 497b18-c10);『오분율』권26(T22,
    172c25-173a5);『사분율』권52(T22, 958a25-b7).
15)『마하승기율』권33(T22, 497b18-c10). 아쇼까왕이 관정 14년에 과거불
    중 제5불인 꼬나가마나(Konākamana)의 불탑을 두 배로 증축하였다는 전
    승을 고려할 때 과거불을 모신 불탑신앙 역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불교교
    단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塚本啓祥[2008: 186].
16)『사분율』권52(T22, 956c1-23). 한편,『오분율』에서는 붓다 외에 성제자,
    벽지불, 전륜성왕의 4種人을 위해 탑을 세울 것을 허용하고 있다. 권26(T22, 
    173a6-7). 이는 빨리『대반열반경』에서도 확인된다. DN. ⅱ. 142.
17) 이 율에서는 이어 급고독장자가 여래의 탑을 만들 것을 붓다에게 청하
    고, 이에 붓다는 “여래의 탑을 한 가운데 두고, 여러 대성문의 탑을 양쪽
    으로 배치하고, 다른 존자들의 것은 대소에 따라 안치하며, 凡夫善人의 것
    은 절 밖에 두라”고 지시하고 있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권
    18(T24, 291a17-c16).

 

마지막 하나는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손톱․발톱을 모신 발조탑
이다. 이에 관한 전승은『십송률』,『사분율』,『비니모경』등에 
나타난다. 이 전승에 따르면, 붓다 생전 시에 이미 그의 신체 일부를
넣어 만든 탑이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 과거불탑․불제
자탑․발조탑 등은 붓다의 사리탑 제작 후 이를 모방하여 만들어
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불교 발생 이전에 이미 인도에서
스뚜빠라는 말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사실18)을 고려할
때, 일찌감치 이 말이 불교에 도입되어 불교적으로 응용되었을 가
능성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발조탑의 경우, 탑의 건축 여
하는 모르겠지만, 붓다 재세 당시 공간적으로 붓다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붓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추구했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따라서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이를
소지하기 위한 간단한 형태의 스뚜빠도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
다.
18) 이 점에 대해서는 杉本卓洲[1984: 51-84]를 참조.

 

발조탑을 불탑의 기원으로 설명하는 것은『십송률』이다.19)『십
송률』에서는 ‘기탑법(起塔法)’이라 이름붙인 항목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급고독(給孤獨)장자는 붓다를 찾아가 예를
갖춘 후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세존께서 여러 국토를 유행
하며 교화하실 때에도 저는 늘 부처님을 뵙기를 갈망합니다. 원컨
대 세존께서는 저에게 약간의 물건이나마 남겨 주시어 공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붓다는 즉시 머리카락과 손톱을 내어
주며 이것들을 공양하라고 한다. 이에 장자는 “세존이시여,제가
이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시는 탑을 세울 수 있도록 청허해 주십
시오”라고 말했고, 붓다는 이를 허락하였다.20)『십송률』에서는 
이에 이어 탑을 세우는 방법이나 공양, 장엄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
이 이어진다.
19)『오분율』에서는 가섭불탑을 염부제에 처음 나타난 탑이라고 설명한다.
    권26(T22, 173a5).
20)『십송률』권48(T23, 351c11-15).

“세존께서 여러 국토를 유행하며 교화하실 때에도 저는 늘 부
처님을 뵙기를 갈망합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카락과
손톱은 붓다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붓다
라는 존재를 대신해 주는 성스러운 물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
한 물건들이 탑에 모셔져야 한다는 생각은 후대에 이루어졌을지
도 모르지만, 붓다의 신체 일부를 소유함으로써 붓다와 함께 한다
는 생각은 붓다 재세 당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부
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율장 곳곳에 나오는 붓다의 머리카
락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붓다가 살아 있을 때 이런 생각이 교단
내부에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이는 원시부족
들이 숭배 대상으로 죽은 자의 유물 속에 유골 외에 머리카락이
나 손톱을 함께 넣거나, 생존 시라도 머리카락이나 손톱은 버리지
않고 그대로 신묘(神廟)나 묘지, 나무 밑에 매장하는 등 특별한 의
미 부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21)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필요
가 있을 것이다.
21) 小口偉一, 堀一郞 감수[1973: 33]

 

『사분율』의 다음 전승은 붓다의 머리카락에 부여되었을 특별한
의미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가 왕사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우바리(優波離)라는 한 어린아이가 붓다의 머리를 깍아
주었다. 붓다에 대한 공경심에 그 누구도 감히 머리를 깍아 드리
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이 아이는 두려움을 몰랐기에 자처
하고 나선 것이다. 다 깍은 후에 아난이 머리카락을 담는 낡은 그
릇을 가져와 붓다의 머리카락을 담자, 붓다는 “헌 그릇에 붓다의
머리카락을 담지 말고 새 그릇에 담거나, 새 옷이나 비단 혹은 발
사짐남바(鉢肆酖嵐婆) 옷이나 두두라(頭頭羅) 옷에 싸서 담으라”고
지시한다. 그 무렵 왕자이자 장군인 구바리(瞿婆離)장군은 서쪽으
로 가서 정벌할 일이 있었는데, 붓다의 머리카락을 달라고 요청하
였다. 그러자 붓다는 주라고 하면서 “금탑 속이나 은탑, 보석 탑,
혹은 여러 가지 보석 탑에 두되, 비단이나 발사짐남바 옷이나 두
두라 옷에 싸서 두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코끼리나 말, 수레, 손
수레, 가마에 싣거나 머리 위 혹은 어깨 위에 매라”고 한다. 구바
리는 붓다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서 정벌하는 곳마다 이겼고, 환
국하자 그는 붓다를 위해 발탑(髮塔), 즉 머리카락 탑을 세웠다고
한다.22)
22)『사분율』권52(T22, 957a20-b17).『사분율』에서는 이 전승을 소개한 후
    “이것이 붓다가 세상에 살아계실 때의 탑”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승에서는 붓다의 머리카락이 사리 못지않은 성스러운 물
건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사리는 비단 등과 같은 고급스러운 옷감
에 쌓은 후 다시 금이나 은, 보석 등과 같이 화려한 장신구로 장
식된 탑에 넣어 가지고 다녀야 할 정도로 특별한 것이다.23) 여기
서 탑이 붓다의 신체 일부분인 머리카락을 담아 이동할 때 가지
고 다니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른바 휴대용
탑이다.『사분율』에서는 이 사건 이후로 비구들 역시 붓다의 머리
카락을 가지고 다니고 싶어 했고, 붓다는 이를 허락하고 있다. 그
리고 구바리 장군에게 지시한 것과 똑같이 발사짐남바 등의 옷감
에 싸서 금탑 등에 넣어 다니라고 한다.
23) 바로는 율장에 나타나는 불탑 관련 규정을 검토한 후 스뚜빠의 기원과
     의미를 둘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죽은 자의 묘에서 발전한 ‘묘로서의 탑’
     이며, 또 하나는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손톱(발톱)을 모신 ‘성유물聖遺物
     stūpa reliquaire’로서의 탑이다. Bareau[1962: 230-231]. 이 의견에 대해 
     시모다는 탑의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는 후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발조
     탑이 지니는 의미나 역할 등을 고려할 때 매우 타당한 의견이라고 생각된
     다. 下田正弘[1997: 101]. 다만, 양자 모두 ‘묘로서의 탑’의 예로 거론하는 
     『비나야』의 기술은 해석상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적절한 예는 아닌
     것 같다. 양자 모두 “보통 사람이 죽으면 흙을 쌓은 묘를 만드니, 하물며
     세존에 대해서는 당연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가섭불
     을 다비한 후 執鞞왕과 사대용왕이 가섭불을 위해 탑을 조성하고자 이야
     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오는 말이다. 가섭여래의 탑을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까 사대용왕이 왕에게 질문하자, 왕은 흙을 쌓아 만들겠다고 대
     답한다. 이에 대해 사대용왕은 ‘보통 사람들이 죽으면 흙을 쌓아서 무덤을
     만들거늘, 하물며 세존의 탑을 흙으로 쌓으신단 말씀이십니까?’라고 반문
     하고, 결국 금, 은, 유리, 수정의 귀한 네 가지 보배로 만들게 된다. 따라서
     일반인은 흙을 쌓아 묘를 만들지만, 여래는 금 등의 보배로 탑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되므로, ‘묘로서의 탑’을 보여주는 예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비나야』권10(T24, 897c23-898a10).

 

세세한 점에서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내용의 전승은『비니모경』
에서도 발견된다. 우바리라는 어린아이가 머리카락을 깍아 드리
자 붓다는 머리카락을 헌 옷이나 낡은 그릇에 담지 말라고 한다.
이때 구바라(瞿婆羅)왕자가 붓다가 있는 곳에 왔다가 붓다에게 머
리카락을 가져가 본국에 돌아가 공양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
러자 붓다는 허락하며 칠보로 만든 그릇에 담아서 공양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코끼리나 말이 끄는 수레 혹은 사람의
어깨나 머리 가운데 올리고 이동하되, 단지 여러 가지 악기를 연
주하면서 가도록 하라고 한다. 왕가는 붓다의 지시대로 가지고 가
던 중 다른 나라의 도적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가던 길에 큰 탑을
세우고 붓다의 머리카락을 공양했으며, 이 탑이 곧 불발탑(佛髮搭)
이라고 한다.24) 이 기술에서는 머리카락을 담는 용기로 탑이 언급
되고 있지 않으며, ‘칠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라고 하고 있다.
24)『비니모경』권3(T24, 816c3-26).

구바리 혹은 구바라 왕자가 왜 붓다의 머리카락을 달라고 했는
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이 역시 위에서 소개한 「십송률」의
급고독장자의 예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머리카락이라는 신체
의 일부가 붓다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붓다와
떨어진 공간에 머물 때에도 붓다의 신체 일부를 지님으로써 붓다
와 함께 하고 있다는, 다시 말해 붓다의 현존(現存)이 실현된다는
의식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25) 감염주술(感染呪術, Contagious Magic)이라는 술어로 설
명되는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감염주술이란
감염법칙, 즉 한 번 접촉한 사물은 물리적 접촉이 끊어진 후에도
계속 서로 작용을 미친다는 법칙에 따라, 주술사는 한 번 어떤 사
람과 접촉한 물체에 대해서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 물체가
그 사람 신체의 일부든 아니든 간에 그 사람에게 똑같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추론에 근거한 주술을 말한다.26) 붓다와 공간적으
로 떨어져 있지만, 붓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신체 일부를 지니
고 있으면 붓다와 함께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평생 유행 생활을 관철했던 붓다였기에 곳곳의 신심 깊은 재
가불자들은 자신의 지역에 머물다 떠나가는 붓다를 아쉬워했고,
출가자들 역시 유행생활로 인해 곁에서 스승을 항상 뵐 수 없다
는 아쉬운 마음이 이러한 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사분율』의 구바리
장군이 정벌을 나서며 붓다의 머리카락을 가져갔다는 사실로부터
본다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붓다의 힘을 빌
려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고도 볼 수 있다.
25) 下田正弘[1997: 102].
26) Frazer[2003: 83].

 

일반적으로 탑은 붓다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으로 ‘사리 혹은 불
탑=붓다’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발조탑에 관한 이러한 예들은 머
리카락이나 손톱과 같은 붓다의 신체 일부가 붓다와 동일시되는
의식이 붓다 생전에 이미 교단 내에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런 것들이 붓다와 동일시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에 부여되
는 특별한 의미나 감염주술 같은 정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편, 머리카락의 가치를 붓다의 첫 우바새 제자 및 연등불 수기 등
과 관련시켜 서술한『사분율』의 다음 전승도 주목할 만하다.

 

붓다가 정각을 이룬 후 아직 보리수 근처를 돌며 해탈의 기쁨
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조(爪)와 우바리(優波離)라는 이
름의 두 상인이 붓다에게 꿀과 보리를 보시한 후 귀의를 표명하
였다. 이 둘은 아직 승가가 형성되기 전, 즉 불(佛)과 법(法), 이보
(二寶)에만 귀의하였다고 하여 보통 최초의 이귀의 우바새라 불린
다. 이들은 공양을 마친 후 붓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희들이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려하는데 거기에 가서 어떻게 복을 지으며
무엇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좋습니까.” 그러자 붓다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주며 “너희들이 이것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복 짓고 예경
하고 공경하라.”27) 그러자 그들은 “이 머리카락과 손톱은 세상 사
람들이 천히 여기어 끊어 버리는 것인데 어찌하여 부처님은 저희
에게 주시면서 공양하라고 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
27) 정각 직후 만난 두 상인에게 붓다가 머리카락 혹은 손톱을 주었으며, 이 
     를 모신 발조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 중 흥미
     로운 것은 현장의「대당서역기」에서 縛喝國(고대의 Bactria)을 서술하는 
     가운데 나오는 기술이다. 붓다는 자신에게 공양물을 올린 두 사람에게 머리
     카락과 손톱을 주었다.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공양 예경하는 방법을 묻자 
     여래는 대의를 사각으로 접어 맨 아래 놓고 이어 상의, 그 다음 하의를 두고

     이어 발우를 엎어 錫杖을 세워 두었다. 이렇게 스뚜빠를 만들었 다. 두 사람
     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배운 대로 훌륭하게 스뚜빠를 세웠 는데, 이것이 
     최초의 스뚜빠라고 한다.「대당서역기」권1(T51, 873a)

그러자 붓다는 머리카락과 손톱에 대한 공양이 광대함을 상세
히 설하는 가운데, 연등불 수기와 관련하여 머리카락의 의의를 설
명한다. 연등불 수기란 석가보살이 과거생에 바라문 소년으로 태
어났을 때 연등불을 친견하고 자신도 연등불처럼 위대한 붓다가
되어 중생을 구제하고 싶다는 서원을 세우는 이야기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보살로서의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붓다는 과거세에
자신이 미각(彌却)이라는 소년으로 태어났을 때 정광(正光)여래,
즉 연등불을 위해 진흙땅 위에 머리를 풀어 헤아릴 수 없는 아승
지겁을 지난 후 붓다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
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 연등불의 수기를 듣자 소년은 허공으
로 높이 솟아올랐는데, 머리카락은 여전히 땅에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정광여래는 좌우를 돌아보며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밟지 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의
머리는 온갖 성문, 벽지불 모두 밟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그 때 수천억만 사람이 모두 꽃을 흩고 향을 피우면서 그 머리카
락을 공양하였다고 한다.28) 이어 붓다는 “보살의 도를 배워 손톱
과 머리카락에 공양하면 반드시 위없는 도를 이룰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29)
28)『사분율』권31(T22, 781c15-785c27).
29) “學菩薩道 能供養爪髮者 必成無上道” 『사분율』권31(T22, 785c22-23).

 

사실 두 상인이 말한 바와 같이 머리카락과 손톱 등은 일반인
도 불필요하다고 여겨 잘라내는 것이자, 출가자에게 있어 삭발은
모든 번뇌를 끊고 출가를 단행한다고 하는 상징적 행위로 여겨질
만큼 번거롭고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데사분율을 전지한 법장
부(法藏部)에서 붓다의 머리카락은 ‘석가보살’로서의 삶이 시작되
는 인연 내지 공덕이 되어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더불어 손톱 역
시 보살도를 이루기 위해 공양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이
전승은 보살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등 분명 후대의 요소를 포함
하고 있지만, 붓다가 첫 우바새 제자인 두 명의 상인에게 머리카
락을 예경의 대상으로 주고, 나아가 보살의 서원과 연관시키는 등
불교교단에서 붓다의 신체 일부가 지니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전
승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Ⅲ. 불탑에 대한 예경과 공양

발조탑의 경우에서 확인되는 이른바 ‘붓다의 신체 일부를 소지
하거나 혹은 이를 모셔 탑을 세움’으로써 붓다와 함께 하고 있다
는 의식을 갖는다’고 하는 현상은, 불멸 후 붓다의 사리 내지 그
사리를 모신 탑을 접하는 불교도의 의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
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탑을 붓다의 현전으로 인식하는 현상이 대
소승 경전류나 율장, 비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이미
선행 연구에 의해 밝혀져 있다.30) 이하, 본고는 제Ⅲ장과 제Ⅳ장
에서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이 이를 어떻게 조문화하여 실천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본장에서는 불
탑에 대한 예경과 공양에 관한 규정을, 다음 장에서는 불탑 공양
물이 불물(佛物)로 여겨지면서 승물과 구별되어 가는 모습을 살펴
보겠다.
30) Schopen[1997a]; 下田正弘[1997].

 

먼저 불탑에 대한 예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리 내지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취급하는 단계에서부터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는데, 위에서도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사분율」에서는 붓
다의 머리카락을 탑에 모실 때는 비단 등의 좋은 옷감으로 싼 후
금․은, 보석 등으로 만들어진 탑에 모셔야 하며, 탑을 가지고 이
동할 때는 코끼리나 말, 수레, 연, 가마에 싣거나, 어깨 위나 머리
위에 올리라고 한다.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행동은 엄격히 금지
된다. 코끼리 등의 이동 수단이 당시 인도에서 상류층이나 고귀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 규정에서는
붓다의 사리나 머리카락을 모신 탑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읽을
수 있다.

또한 탑을 가지고 다닐 때 옷을 걷어붙이거나 목에 걸거나 머
리를 싸매거나 양 어깨를 모두 옷으로 덮거나 가죽신을 신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내고 가죽신을 벗고 머리에
이거나 어깨 위에 불탑을 올린 채 다니라고 한다.31) 율장에는 비
구의 올바른 삼의(三衣) 착용 방법에 관한 조문이 많은데, 이는 비
구의 위의와 직결되는 문제이자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도 무관하
지 않다. ‘중학법(衆學法)’에 의하면, 탁발 등에 나설 때 엉성하게
둘러서 노출되는 부분이 있거나 소매를 걷어 올리는 등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소매를 걷어 올렸거나 옷을 목에 건 자에
대한 설법 금지 조문이 있을 정도로 올바른 착의법에 주의를 기
울인다.32) 소매를 걷어 올리거나 옷을 목에 걸거나 혹은 머리를
덮거나 감싸거나 혹은 가죽신을 신은 자는 출가자의 설법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른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1)『사분율』권52(T22, 957b17-26).
32) 이 점에 관해서는 平川彰[1995: 502-531]를 참조.

 

또한『사분율』중학법33) 제84조에서는 탑을 향하여 다리를 뻗
고 앉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외, 탑 아래서 코를 풀거나 침
을 뱉는 행위, 탑을 향하여 코를 풀거나 침을 뱉는 행위, 탑 주위
에서 코를 풀거나 침을 뱉는 행위 등이 금지된다. 또한 하품하는
행위도 금지된다.34) 이 넷은 청결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
고,35) 성역이라는 특정 구역에 대한 경외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적극적인 예경은 아니지만, 적어도 붓다 그 자체
인 불탑에 대한 공경심에서 나올 수 있는 규정이라고 생각된다.
이 외, 불탑을 오른쪽으로 돌며 예배하는 우요(右繞)를 설하는 율
도 있다.36) 우요란 불탑을 끼고 시계 방향으로 한 번 혹은 세 번,
혹은 일곱 번 도는 것을 말한다. 이 우요는 천체에 있어 태양의
운행에 따른 것으로 태양 숭배와 관련하는데, 성(聖)․청정․길상
한 것에 대한 의례적 행위라고 한다.37) 우요는 붓다 생전 그의 제
자들이 일반적으로 붓다에게 행하던 예경법이다.
33) 제 부파의 波羅提木叉 가운데 불탑에 관한 내용을 조문으로 제정하고 있
    는 것은 법장부의『사분율』이 유일하다. 히라카와는『사분율』중학법에만
    불탑 조문이 나오는 것에 대해『사분율』을 전지한 법장부가 특히 불탑 숭
    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平川彰[1995: 467, 598].
34)『사분율』권52(T22, 958a17-22).
35) 시모다는 이들을 ‘정화의 관점에 근거한 금지 사항’으로 분류한다. 下田正
    弘[1997: 115].
36)『십송률』권41(T23, 298c9-10);『비니모경』권5(T24, 825c3-4);『사분율』
    권52(T22, 957c27).
37) 杉本卓洲[2007: 54-55].

또한 휴대용 탑과 관련하여 제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붓다의
탑은 좋은 방에 두고 자신은 좋지 않은 방에서 자야 한다”, “붓다
의 탑은 윗방에 두고 자신은 아랫방에서 자야 한다”라고 하여,38)
탑에 대한 존숭의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다.
38)『사분율』권52(T22, 957b28-c4).

 

이상 언급한 조문들은 불탑이 단지 신성한 ‘건축물’에 그치는
것이 아닌,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특별한 인격, 즉 붓다 그
자체가 존재하는 장소로 생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공양에 대한 조문이다. 제율에서는 꽃이나 향료, 등불,
음악, 보석 등의 다양한 불탑 공양이 확인된다.39) 그런데 그 중에
서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음식이나 물 등의 먹거리를 공
양하는 행위는 불탑의 인격화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행위
이다. 다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율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운
데, 위에서 소개한『사분율』의 사리불․목련의 사리탑 건립 전승
을 보면 탑에 음식을 공양하는 목적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다.
사리불과 목련이 열반에 들자 한 단월은 붓다의 허락을 받아 이
들을 위한 탑을 세운다. 이어 이들은 “저 두 분이 살아계실 때는
내가 항상 음식을 공양했는데, 이제는 열반하셨다. 만약 부처님께
서 허락하신다면 우리들은 맛난 음식을 보내 탑에 공양 올리리
라”고 생각하며 그 뜻을 붓다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붓다는 “금․
은 발우나 보석 그릇, 여러 보석의 그릇을 사용해서 하라”고 하며,
운반할 때는 “코끼리와 말, 수레에 싣거나 가마나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짊어지고 가라”고 한다.40) ‘저 두 분이 살아계실 때는 내
가 항상 음식을 공양했는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월은
사리불․목련의 사후, 이들의 사리탑을 대상으로 마치 살아있는
사리불과 목련에게 바치듯이 음식 공양을 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즉, 두 사람이 살아있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은 행위가 이들의 사리
탑에 대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41) 불탑에 먹거리나
물, 의복, 수레 등을 바치는 행위 역시 이와 동일한 생각에 근거하
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음식을 공양할 때는 금․은 발우나 보
석 그릇 등에 담아 코끼리와 말, 수레에 싣거나 가마나 머리에 이
거나 어깨에 짊어지고 가라고 한다.42) 존경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
에게 행하는 것과 동일한 특별한 대우가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
39) 이 점에 대해서는 Bareau[1962: 242-247] 및 下田正弘[1997: 103-108]에
    상세히 정리, 소개되어 있다
40)『사분율』권52(T22, 956c1-958c9).
41) 下田正弘[1997: 106]에서도 이 전승을 소개하며, 탑이 살아있는 인격으로
    파악되고 있는 증거라고 해석하고 있다.
42)『사분율』권52(T22, 956c26-29).

 

Ⅳ. 불탑 공양물=불물(佛物)로의 인식 변화

불탑을 살아있는 붓다로 대하는 태도는 불탑 공양물에 대한 특
별한 배려에서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초기교단은 출
가자의 생산 활동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입에 넣는 모든 것은
물과 이쑤시개를 제외하고는 재가자의 보시를 통해 해결하는 것
이 원칙이다.43) 한편, 재가자들은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행위가 곧
자신의 공덕과 직결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기꺼이 출가자의 의식
주를 책임졌다. 이들은 여래에 대한 보시보다 사방승가(四方僧伽)
에 대한 보시의 과보가 훨씬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붓다도 사
방승가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붓다 한 사람에
대한 보시보다 붓다를 포함한 승단 전체에 보시하는 공덕이 당연
히 광대하다고 여긴 것이다.
43) 이 점에 대해서는 이자랑[2009: 177-202]을 참조

그런데 불탑 신앙이 발전하게 되면, 초기교단의 이러한 입장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이부종륜론』에는『사분율』을 전지한 법
장부의 설로 “붓다가 승단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따로 붓다에게
보시하면 그 공덕의 결과는 크지만 승단은 그렇지 않다. 불탑에
공양하면 광대한 과보를 얻게 된다”라는 주장을 전하고 있다.44)
불탑에 대한 공양의 결과가 승단에 대한 공양보다 훨씬 광대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승단에 보시된 승물(僧物)과 불탑에 보
시된 불물의 구분이 명확해지면서 불물의 취급에 세심한 배려가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탑에 공양된 보시물은 승단이 사용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마하승기율』의 다음 기술이 이러한 상황
을 잘 보여준다.
44)『이부종륜론』(T49, 17a23-25

"만약 비구가 마마제가 되어 탑을 만들고자 하는데 재료가 없고 여
러 비구에게 물건이 있기에 생각하기를 ‘천인이 여러 비구를 공양하는
것은 다 부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은
바로 여러 비구에게 공양하는 것이다’라며 여러 비구의 물건을 가져다
탑을 보수하면 이 마마제는 바라이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탑에는 재료가 있고 여러 비구에게는 물건이 없기에 생각하기를 ‘비구
에게 공양하는 것은 부처님도 그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라며 탑의 물
건을 가져다가 여러 비구를 공양하면 사용한 마마제는 바라이죄를 범
하는 것이다."45)
45)『마하승기율』권3(T22, 251c22-27). “若比丘作摩摩帝塔無物 衆僧有物 便作
    是念 天人所以供養衆僧者 皆蒙佛恩 供養佛者便爲供養衆僧 即持僧物修治塔者
    此摩摩帝得波羅夷 若塔有物衆僧無物 便作是念 供養僧者佛亦在其中 便持塔物
    供養衆僧 摩摩帝用者得波羅夷”

 

마마제(摩摩帝)란 사원 경영을 담당하는 비구를 말한다.46) 마마
제가 탑을 조성하면서 승물을 가져다 사용해서도 안 되며, 탑물을
가져다 비구들에게 제공해서도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율
가운데 최대 중죄로 헤아려지는 4바라이죄 중 하나, 즉 5전 이상
의 도둑질인 도죄(盜罪)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바라이
죄는 한 번 저지르면 다시는 비구의 지위로 돌아갈 수 없는 극중
죄이다. 불물을 훔치는 것을 바라이죄로 규정한 것에서 불물과 승
물의 명확한 사용 구분을 규정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46) 平川彰[1990: 296].

이 외에도 마하승기율에서는 “탑의 원림이나 연못에 있는 꽃
은 탑을 장엄하기 위한 화만으로 사용해야 하며, 남는 것은 기름
이나 향으로 바꾸어 부처를 공양하거나, 혹은 부처 즉 불탑을 위
해 축적해 두어야 한다”47)라고 하여 불탑지에 속한 원림이나 연
못에서 나는 꽃조차도 승단이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하
고 있다. 탑에 속한 것을 훔치면 붓다에게 도계를 저지르게 된다
고 하는 의식은 분명 탑물(塔物)=불물에 근거한 것으로, 탑=붓다
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48)
47)『마하승기율』권33(T22, 498b13-15).
48) 이는 쇼펜이 제시한 산치 스뚜빠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산치
   스뚜빠에는 “어떤 사람이든 이 산치로부터 석상을 훔치거나, 훔치게 하거
    나, 혹은 다른 스승(=붓다)의 집으로 이전시킨다면, 그는 오역죄를 범하여
    곧 業熟하는 길로 향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즉 탑을 붓
    다의 집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여기서 무언가를 훔치는 행위는 오역죄 가
    운데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Schopen[1997a] 주 64).

 

한편,『십송률』에서도 보시된 재물을 탑에 올리는 공양물, 사방
승물, 음식물, 개별적으로 보시된 음식물의 4종으로 구분한 후, 이
들은 혼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다음과 같다.

"탑에 올려진 공양물을 사방승물로 전용하거나,음식물로 전용하거
나,나누어야 할 재물로 전용하지 못하느니라. 사방승물도 음식물로
전용하거나,나누어야 할 재물로 전용하거나,탑에 올리는 공양물로
전용하지 못하느니라. 음식물도 나누어야 할 재물로 전용하거나,탑
에 올리는 공양물로 전용하거나,사방승물로 전용할 수 없느니라. 나
누어야 할 재물은 비구들의 의향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49)
49)『십송률』권48(T23, 352b23-26). “塔物者 不得與四方僧 不得作食 不得分
    四方僧物者 不得作食 不得分 不得作塔 食物者 不得分 不得作塔 不得與四方僧
    應分物者 隨僧用”

사방승물이란 사방승가, 즉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모든 승
가에 포함되는 보시물이다. 여기에는 항아리나 도끼, 와좌구 등과
같은 동산(動産)적인 것과 토지나 정사 등과 같은 부동산적인 것
이 모두 포함된다. 이는 구성원들에게 실질적으로 나누어서 분배
할 수 없는 것들로 불교의 모든 수행자가 공유하게 된다. 한편, 음
식물이나 옷감 등의 나눌 수 있는 것들은 현전(現前)승가의 소유
로 현전승가의 모든 구성원에게 분배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는 불물을 사방승가나 현전승가의 구성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
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불물과 승물의 구분은 이미 붓다 당시
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50) 불탑이 조성된 후에는 붓다가 사
방승가의 일원으로서보다는 붓다 개인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
지면서 불물과 승물의 구분이 더 명확해진 것으로 보인다.
50)『사분율』권33(T22, 798b).

 

그렇다면 왜 이렇게 불물과 승물은 엄격하게 구분되기에 이른
것일까? 이에 관해 히라카와는 운영 주체의 차이, 즉 불탑은 재가
자, 승단은 출가자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지만,51)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이 불탑 조성이나 운
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제율의 기술이나 관련 논
문을 볼 때 이는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보다는
불탑에 보시된 물건은 곧 붓다의 것이라는 탑물=불물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지적되
고 있는 바와 같이, 불탑은 붓다나 존경받을 만한 인물과 동일하
기 때문에 보시를 받을 권리나 그 외의 권리가 인격에 대한 것과
똑 같이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52) 한편, 불탑 신앙이
성행하면서 공양물이 늘어나자 비구들이 이를 남용한 것을 계기
로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위에
서 소개한『마하승기율』의 규정은 탑물을 훔치는 행위를 4바라이
죄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불물과 승물이 완전히 다
른 영역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 조문이 제정되기 전에는
혼용되고 있던 양자를 명확히 구분 지으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불멸
후 나타난 붓다 신격화 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
다.
51) 平川彰[1990: 301].
52) Bareau[1962: 253].

Ⅴ. 결론

이상, 제율에 나타나는 불탑 기술 가운데 특히 ‘불탑=붓다’의 관
점이 확인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부파교단에서의 불탑 신앙 형태
를 고찰해 보았다. 먼저 그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
다.

붓다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을 모신 발조탑은 붓다 재세 당시
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붓다의 신체 일부가 붓다의 현존을 실현한다
는 의식은 초기 교단에서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 생각된다. 이는 머리카락을 성스러운 물건으로 취급하는 율장
의 여러 기술로부터 추측 가능하다. 또한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붓다와 항상 함께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모시는 소박한 이동형
용기의 용도로 탑이 처음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나 습속은 불멸 후, 붓다가 사리만을 남
기고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불교도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고 불탑
=붓다라는 인식 하에 적극적으로 불탑 신앙에 몰입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머리카락이나 손톱과 같은 신체 일부가 붓다의
현존을 약속했듯이, 한층 더 확실하게 붓다의 현존을 보증하는 것
으로 사리를 인식했던 것이다. 불탑=붓다라는 인식은 실제 생활에
서 다양한 율 조문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특히 불탑에 대한 예경
과 공경은 살아있는 붓다를 대하는 태도와 다름없으며, 불탑에 바
쳐진 공양물은 승단에 바쳐진 공양물과 명확하게 구분되며 독자
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본 논문의 서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율장은 부파교단의 불탑
신앙 실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수범수제
(隨犯隨制)로 규정되는 율장의 조문 제정의 특징에서 알 수 있듯
이, 교단 내에서 발생한 사안만이 율 조문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불탑에 관한 조문들 역시 기본적으로 교단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계기가 되어 제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경이나 논서 등에
비해 상당히 실태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율장에서 발견되는 불탑 관련 기술을 좀 더 치밀하게 분석하여
그 결과를 다른 자료에서 얻은 결과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
이다.

 

율장은 현재 6종의 광율(廣律)이 전해진다. 그 중 빨리율을 제

외한 나머지 5종은 모두 한역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5세기 초반

무렵,『십송률』,『사분율』,『오분율』,『마하승기율』이라는 4종의

한역 율장이 갖추어졌다. 사리를 모아 탑을 세우는 풍습은 4세기

전반 경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으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53) 그렇다면 5세기 초반에 완비된 율장의 불탑 기술이 이후

중국의 불탑 신앙에 다양하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

각된다.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율장에는 조탑법에 관한 규

정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불탑 조성 자체에 출가자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본고에서 다룬 불탑에

대한 예경이나 공양 방법, 불물의 취급 등을 비롯하여 율장의 불

탑 기술 검토 결과는 동아시아의 불탑 연구에도 기초 자료를 제

공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

53) 주경미[2003: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