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백운경한 어록

백운 경한과 임제종

실론섬 2016. 9. 23. 12:06

백운 경한과 임제종

( 이 글은 2004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 인문사회분야 일반연구비

(과제번호 :KRF-2004-072-AM3024, 과제명 : 한국 구법승들의 중국내 활동에 

관한 연구)지원에 의해 수행되었음.)

鄭 柄 朝 / 韓國佛敎硏究院長, 東國大 敎授

 

目次

Ⅰ. 백운 경한(1298~1374)의 생애

Ⅱ. 백운 경한의 求法

Ⅲ. 백운 경한의 사상적 경향

    (1) 無心禪의 의의

    (2) 백운과 太古

    (3) 임제종풍의 한국적 전개

Ⅳ. 남기는 말

 

1. 백운 경한(1298~1374)의 생애

 

백운 화상은 고려 말의 선사였다. 그는 독특한 선풍과 탁월한

학식으로 사양의 길을 걷던 당시 불교계에 큰 활력소가 된 분이

었지만 태고와 나옹의 그늘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스님이

었다. 그의 행적에 관한 두드러진 자료가 없었다는 점도 백운

화상이 알려지지 않게 된 이유의 하나일 수 있다. 백운의 시자

釋璨이 기록한 ?白雲和尙語錄?만이 유일한 자료로 남아 있는데,

그 안에는 李穡과 李玖가 쓴 서문 및 화상의 설법, 게송, 시문

등을 상하 양 권에 기록하였다.1)

1)「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불교학연구회편 및,「한국고승집」권 3
   및「한글대장경」154, 한국고승 제 4 「백운화상집」상하권 참조.

 

백운은 고려 충렬왕 2년(1298) 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났다. 그

러나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모친이 89세까지 살았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출생이나 성장과정은 알려진 바가 없다. 대략 10

세 전후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호를 景閑이라고 했고, 출가 후

일정한 스승이 없이 천하를 유행하였고, 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

에 간 일도 있었다. 중국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행적이나 수행에

관해서도 특별한 기록이 없다. 다만 충목왕 2년(1346) 5월 왕명

에 따라 기우제를 주관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명망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 그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2)

2)「高麗史」권 54, 오행지 8. 二年五月辛卯 命僧白雲 祈雨.

 

중국에 건너가서 지공에게 법을 묻고 석옥에게서 법을 전해

받았다. 일년 남짓 중국에 머물다 귀국하였는데, 공민왕 6년

(1357)에 태고의 천거로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그로부

터 8년 후인 공민왕 14년에 다시 나옹의 천거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해주 신광사의 주지가 되어 개당설법을 하기도 했으나3), 두

달 뒤에 국왕에게 글을 올려 주지 사퇴를 간청하였다. 공민왕 17

년에는 왕비 노국공주의 원당으로 세워진 흥성사의 주지를 맡았다.

3)「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p.638~640.

 

공민왕 19년에는 공부선의 시관을 맡았고, 그 후 여러 암자를

순방하면서 한거하였다. 공민왕 27년(1374) 여주 취암사에서 77

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백운화상어록상하권과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발

견된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상하권 등이 남아있다.

 

“이르는 곳, 모두가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 모두가 고향일세.

어찌 나룻배를 몰아

빼어난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랴.

나 자신이 본래 없거늘

마음 또한 머물 곳이 없네.

재를 만들어 사방에 뿌리어

시주의 땅을

범하지 않으리.

頭頭是故鄕 處處皆歸路

何須理舟楫 特地欲歸鄕

我自本無有 心亦無所住

作灰散四方 勿占檀那地“4)

4)「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68.

 

이 시는 백운 화상의 임종게이다. 여기에는 투철한 선승으로

서 살다 간 백운의 삶이 담담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나옹, 태고

등과 같은 시대를 호흡했지만 그들과 같이 빛나는 이름을 남기

지 않았다. 오직 수행을 당부하며 일체가 공한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그것으로 곧 불법을 깨닫게 된다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

겼을 뿐이다. 명성과 立身의 유혹을 물리친 담백하고 고결한 기

품 때문에 그의 수행자로서의 본래 면모는 감추어져 버린 것이다.

 

Ⅱ. 백운 경한의 求法

 

백운은 충정왕 3년(1351) 5월 入元하여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임제종의 18대 법손 석옥 청공을 찾았다. 이 때 백운은 이

미 53세의 나이였고 더욱이 국내에서도 국가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그 주관자의 임무를 맡을 만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서 석옥을 찾았다는 것은 백운

의 入元 동기가 순수한 구법에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보

인다. 백운의 入元 이전이나 당시에도 승려들의 중국방문 목적

이 순수한 구법이기 보다는 중국에 들어가 본분종사로부터 인가

를 받아 오는데 있었던 경향이 있다. 백운은 세 가지 의문을 가

지고 석옥을 만났다. 첫째는 육조 혜능이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요 그대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

라고 한육조단경법문의 義旨이다. 眞心이 一切處에 遍滿하

니 諸相이 그대로 自心이라고 보는 백운 자신의 견해에 대한 決

疑를 구한 것인데, 이에 대해 석옥은 ‘眞心은 不動’이라고 답하였

다.5) 이어 마음을 관조할 때 모든 법은 진심이 나타난 것으로

모두 꿈이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자신의

견해가 진실한 것인지 묻자, 석옥은 ‘相好에 집착하지 말라’는 한

마디로 답하였다. 백운이 석옥에게 물은 세 번째 의문은 趙州의

狗子無佛性에 관한 것이었다. 조주의 無는 있고 없음의 무도 아

니고, 허무의 무도 아닌 살아있는 무, 活無일 것이라는 백운 자

신의 생각을 내놓자 석옥은 침묵으로 답하였다. 석옥의 ‘黙決’에

백운은 게를 올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6)

5)「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56.
6) 백운과 석옥의 첫 만남은 보우와 석옥의 만남과 대조를 이룬다. 백운과 석옥
   사이는 心疑와 決擇으로 이어지지만 보우와 석옥 간에는 다분히 印可가 중
   심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석옥의 의결을 구한 후 백운은 燕京 法源寺7)로 指空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며 존경의 뜻을 전하는 글을 올렸으며 지공으로부

터 설법을 듣고 나서 시를 지어 올려 자신의 소회를 피력 하였다.8)

7) 法源寺의 기원에 관해서는 「指空浮屠碑銘」 참조. 현재 北京 宣武區에 있는
   法源寺는 元代에 大憫忠寺라고 불렸고, 淸代에 法源寺로 賜額되었으며 지공
   이 머물던 곳이 아니다. 祁慶富, 「指空의 中國遊歷考」,「伽山學報」5, 1996,
   伽山學會. 田奇編著,「北京的佛敎寺廟」, 書目文獻出版社, 1993.
8) ‘辛卯年上指空和尙頌’,「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59.

 

그 후 백운은 중국의 강남․북을 찾아다니며 선지식들을 만나

고 그들에게서 화두를 배우거나 澄心入定 등으로 진심을 구하고

자 하였다.

 

“산승은 지난 해 江南과 江北을 돌아다니면서 善知識만 있으면 모

두 찾아뵈었소. 그 善知識들은 사람들을 가르치되, 趙州의 無字를

쓰기도 하고, 萬法歸一을 쓰기도 하며, 父母未生全面目을 쓰기도

하고, 去心外照攝心內照를 쓰기도 하고, 혹은 澄心入定을 쓰기도

하였으니 마침내 별다른 가르침은 없었소.”9)

9)「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49 中.

 

백운은 석옥과 지공을 참례한 경우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이

렇다할 가르침을 얻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백운

은 다시 하무산 천호암으로 석옥을 再參했다. 이 때는 석옥이

입적하기 6개월 전이었고, 백운은 며칠을 천호암에 머물며 禪旨

를 구하다가 마침내 無上妙道의 깨침을 얻게 되었다.

 

“최후에 霞霧山 天湖庵의 석옥화상을 찾아뵙고, 여러 날 모시고 나

서 다만 그 無心의 眞宗을 배워 부처님의 無上妙道를 원만히 깨쳤

소. 이 道는 有心으로도 구할 수 없고, 無心으로도 얻을 수 없으

며, 말로도 이룰 수 없고 침묵해도 어긋나, 침묵과 말, 그 밖에 한

길이 있다고 한 것이오. 노승은 그 경지에 이르러 그저 말문이 막

혔으므로 그 네 구절에 대하여 마음 쓸 곳이 없어진 뒤에야 비로

소 그 消息을 알 수 있었소.10)”

10) 위의 책, p.649 中.

 

요컨대 석옥으로부터 이어받은 要決이 ‘無心’이라는 것과, 그때

의 ‘무심’은 상대적 차별성을 벗어난 초월적인 절대무심이라는

설명이다. 종래의 임제종이 看話 위주의 法談으로 일관한 것과

는 대조를 이룬다. 이후에도 白雲의 法門은 주로 無心에 관한

설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위에서 말한대로 백운의 無心은 話

頭를 넘어선 변증법적 無心이라고 볼 수 있다.

 

백운은 이 때를 또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壬辰 正月 상순에 나는 다시 천호암에 계시는 스승님 곁으

로 가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아침저녁으로 여쭈어 의심을 풀었다.

상원 삼삼일 전에 무심과 무념의 참뜻을 혼자 깨닫고 평상에서 내

려와 세 번 절한 뒤에 제 자리에 서 있었더니, 스승님은 ‘그대 마

음이 매우 기쁜 것 같구나.’하셨다. ‘매우 기쁩니다.’고 대답하였더

니, ‘어떤 도리를 얻었기에 그대 마음이 그처럼 기쁜 것이냐?’하고

물으셨다. ‘그것이 어떤 것인 줄 알고 마음이 매우 기쁩니다.’고 대

답하였더니, 스승님은 ‘내가 그대의 기쁨을 도와주리라. 그대가 기

뻐하니 나도 기쁘고, 내가 기뻐하니 시방의 제불보살들께서도 기뻐

하고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세 번 말씀하시고 세 번 찬탄하셨다.

내 마음에 맺혔던 의심이 모두 얼음처럼 풀리고 무심과 무념의 참

뜻을 깊이 믿게 되었다.”11)

11) 위의 책, p.657 上.

 

이 法談에서 나타나듯이 백운의 득도과정과 시점의 해석에 있

어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종래 석옥의 적사가 태고인지

백운인지와 관련하여 백운의 득도가 귀국 후에 이루어 졌고 백

운은 천호암에서 석옥의 인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통적인

계승자라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어왔다.12) 그러나 석옥과 백운

사이의 전법은 석옥이 백운에게 남긴 辭世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사세송을 태고가 아닌 백운에게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두 화상 사이의 전법에 있어 매우 결정적인 사실임에 분명하지

만 거기에 더해 한 가지 더 의미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두 화상

이 서로 만나 가르침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석옥의 사세송 마지

막 구에 보이는 ‘丙丁童子’를 백운으로 본다면, 석옥은 백운과의

만남을 마치 ‘丙丁求火’13)에 빗대어 본 것은 아닐까 한다.

12) 徐閏吉, 「高麗末 臨濟禪의 受容」,「韓國禪思想硏究」, 東國大學校, 1984.
    pp.212~230.
13)「碧巖錄」第七則,「禪門拈頌」1299 참조.

 

이틀 후 백운은 석옥과 눈물로 이별하고 산을 내려와 사흘 만

에 平江府 杭州의 休休庵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본래 몽산덕이

화상이 머물던 곳으로 당시 이미 몽산의 眞堂이 있었고, 2년 전

에 나옹 혜근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이 때 元에서는 紅巾이

곳곳에서 일어나 혼란스러워 水路와 陸路가 모두 막힌 상황이라

백운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머물다가 3월 고려로 돌아왔다.

 

Ⅲ. 백운 경한의 사상적 경향

 

(1) 無心禪의 의의

백운화상은 나옹, 태고 등과 함께 임제선에 속하는데14) 그 선

풍은 조금 특이한 편이다. 여말의 선승 나옹, 태고 등은 새로운

선풍의 확립을 위해 임제선을 도입하였고 또 전통적인 간화선의

입장을 주창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백운은 간화를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究竟智的 무심무념을 제창하였다.

이는 參學에 대해 설하는 법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 懶翁을 指空(Śūnyadisya)의 후계로 본다면 나옹은 임제선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공은 스스로 그의 法系를 達磨의 계통이 아닌 左陀瞿那
    의 계통이라고 하고 자기가 그 108代孫임을 주장하였다. 즉 大迦葉으로부터
    22조에 摩拏羅가 있는데 그에게 두 사람의 弟子가 있어서 한 사람은 鶴勒那
    로서 菩提達磨에 이르고, 또 한 사람은 左陀瞿那로서 그로부터 107祖가 三
    曼陀毘提 즉 吉祥山 普明이며 자기가 바로 그 후계자라는 것이다.(李穡撰, 「
    楊州檜巖寺薄陀尊者指空浮屠碑」「朝鮮金石總覽」卷下 pp.1284~1288 참조) 
    그러나 나옹은 평산처림에게도 사사하였고, 그의 간화선이나 사상경향은 임제
    선적이기 때문에 그를 임제선맥으로 본 것이며, 이 문제는 상론을 피한다.

 

“參學이란 반드시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화두를

바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말로 대신하는 것도 아니고 반

드시 따로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경전을 보아야 하는

것도 아니요, 반드시 논을 짓거나 疏를 연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

다. ...... 진실한 참학이란, 진실한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라

야 하고, 깨침은 반드시 진실한 깨침이어야 하니,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침인가? 하루 내내 四威儀 안에서 생사의 대사

를 생각하되 심의식을 떠나 凡聖의 길을 참구해 내야 한다. 무심과

무위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항상 無念하면서 不眛하여 마

침내 의지할 데 없이 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道에 합한 것

이다. 옛 사람도 이르기를, 무심이라야 바야흐로 본래의 사람을 본

다고 하였소.”15)

15)「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52.

 

그가 공부선의 시관을 맡았을 때, 그는 조주의 무자화두, 만법

귀일 등 대신에 가장 오묘한 방편으로서 무심과 무념을 말하였다.

 

“나는 천만의 사람들이 조주의 도에서 부처를 찾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중 하나라도 무심도인을 얻기 어려운 것도 보았다. ……

또한 가장 묘한 한 방편이 있는데 무심, 무념으로써 하는 것이다.”16)

16) Ibid. ,「韓國佛敎全書」6, p.656.

 

백운은 승려들의 공부를 시험하는 방법으로 여섯 가지를 설명

하고 그 중 가장 묘한 방법은 무심과 무념이라고 강조하여 조사

들의 무심에 대한 가르침을 예로 들었다. 이렇게 백운은 선을

수행하는 방법에서 뿐만 아니라 그 수행정도를 시험하는 방법으

로도 무심과 무념을 최고로 생각하였다. 간화선 일변도의 임제

종풍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禪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어서 황벽, 육조혜능 등의 글귀를 인용하여 무념무심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육조 스님이 말하기를, 일체의 선악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으면 자

연히 청정심체에 들어가서 담연하고 常寂하여 妙用이 항하의 모래

와 같다고 했다. 황벽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무심

에 이르지 못한다면 몇몇 겁을 수행한다하더라도 끝내 이루지 못

하리라고 했다. 또 장졸상공이 말하되, 한 생각이 생기지 않으면

전체가 나타난다고 했다.”17)

17)「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56.

 

한 생각이 생긴다고 할 때의 그 일념은 분별견을 가리킨다.

그 분별의 일념이 대립과 갈등을 유발시키는 씨앗이 된다고 보

았다. 따라서 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백운의 간화였던

것이다. 간화는 말 그대로 깨침에 이르는 수단일 뿐, 간화 그 자

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더구나 간화를 위한 간화는 형식주의며

敎條主義에 불과하다.

 

백운의 上堂說法은 거의가 無心에 관한 것이었고, 자신이 깨

친 것이 無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癸巳 정월 17일 낮에 端坐를 하고 있는데 영가대사의 ?증도가??

중의 ‘망상을 버리려 하지도 말고 진실을 구하려 하지도 말라. 무

명의 실상이 곧 불성이요 幻化의 空身이 즉 법신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그 말을 깊이 음미하였을 때 홀연히 無心이 되었다. 한 생

각도 일어나지 않고 前後가 아주 끊겨서 조금도 의지할 곳이 없어

뚜렷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삼천세계가 온통 하

나, 자기 자신임을 보았다.”18)

18) Ibid.,「韓國佛敎全書」6, p.657.

 

백운은 무념무상을 궁극적 경지로 보았고 또 화두가 그 본래

의 뜻 보다는 오히려 또 다른 집착을 일으키는 장애로 되어가는

당시 선가의 그릇된 선풍을 바로 잡기 위해 무심의 선풍을 일으

켰던 것이다.

 

임제 정통으로서 석옥 청공 화상의 법사를 이었다고 믿어지는

태고의 가풍도 간화선 일변도였다. 평산 처림을 계승한 나옹의

선풍도 역시 간화선이었다.19) 특히 태고 보우는 석옥 청공과의

師資관계로 인하여 임제 법맥의 正嗣가 됨으로써 한국불교사상

에 새로운 흐름을 들여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를 개조로 하는

한국 임제종의 법맥을 주장하는 일련의 후계자들이 출현한다.

19) 懶翁과 太古의 思想 경향은 거의 일치한다. 宇宙를 覺界로 삼고 萬有를 佛
    身으로 보며 天地日月 山川草木을 法과 心으로 본다. 그들의 공부방법은 주
    로 趙州의 ‘狗子還有佛性也無’의 無字話頭의 參究에 있었던 것 같다. 李箕永,
    「蒙古族支配下의 高麗佛敎」,「韓國民族思想史大系」, pp.104~109.

 

淸虛堂集에는 太古 普愚 - 幻庵 混修 - 龜谷 覺雲 - 碧溪

淨心 - 碧松 智嚴 - 芙蓉 靈觀 - 淸虛 休靜의 순으로 내려오는

法系가 명기되었다.20) 이와 같이 보우를 중심으로 하는 眷屬意

識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은 후대 조선왕조 시대에 더욱 현저해

진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20)「淸虛堂集」권2, pp.2~5.

 

첫째 보우 당대의 대선사들을 부르는 호칭에 ‘曹溪宗師’21)라는

것이 있는데 이때의 조계가 보조국사의 정혜결사를 칭하는 것

이냐 아니면 육조혜능을 지칭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고, 둘째

는 이와 같은 사자계승의 문중의식이 과연 불교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 이것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

라도 태고 보우가 과연 석옥 청공의 사법제자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21) 普愚의 門人 維昌은 그기 지은 스승의 行狀題名 ‘大曹溪嗣祖傳佛心印 云云’
    하였고 李穡이 지은 師의 碑銘에도 ‘大曹溪宗師’라 하였고, 行狀을 쓴 門人
    覺宏도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이라 하였다.「白雲和尙語錄」을 쓴 侍者 釋
    璨도 스승을 가리켜 ‘曹溪大禪師’라고 함으로써 前代의 세 분이 모두 ‘曹溪’
    라는 尊稱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보우가 원나라에 들어간 것은 충목왕 2년(1346) 그의 나이

46세 되던 해였다. 그 해 호주 하무산의 천호암의 석옥 청공을

찾아 그 깨달은 바를 말하고 태고암가를 바쳤다. 석옥은 보우의

깨달은 바를 인가하여 가사와 주장자를 주어 그 표시로 삼았다.

귀국 후에도 보우와 석옥 청공 사이에는 書狀의 왕복이 빈번

하였다. 보우는 ‘한결같이 교훈에 의지하고 분수를 따라 두 가지

를 이롭게 하겠다’고 말한다. 즉 첫째 ‘불법을 천하에 팔지 않을

것’, 둘째 ‘후세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종자가 끊이지 않게 할 것’

을 약속하고 있다. 석옥 화상의 보우에 대한 배려 각별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세상에 나아가 사람을 위할 때는 반드시 본

분의 일로써 어리석은 이들을 격려해줄 것이요, 부디 아첨의 유

혹에 빠지지 말라. 대가의 풀 속에서 그것을 굴린들 무엇을 도

모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22)

22)「石屋和尙答書」의 原文은 다음과 같다. 出世爲人 要以本分事 激引來蒙愼
    句以機境上遞相孤媚 大家草裏輥 斯何圖哉 云云.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 보우를 석옥의 사법제자라고 단언

할 수는 없다고 본다. 入室과 師資를 엄밀히 분리하는 선가의

가풍을 따를 때 과연 보우가 석옥의 적손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백운이 석옥 청공을 찾은 것은 아마도 태고가 입실한 이후의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공민왕 2년(1353) 대오한 백운 화상에게

석옥의 제자 法眼이 임종 때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와 辭世

偈를 전하였다. 이것은 공민왕 3년(1354)의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석옥의 선풍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석옥은 무심무념의

진종을 강조한다. 백운화상이 공안과 화두를 버리고 무심의 진

종을 깨칠 것을 강조한 것은 스승과 의기투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석옥 화상의 嫡嗣를 논함에 있어서 태고

보다 오히려 백운이 더욱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看話란 일반적인 선의 방법이었다. 즉 모든 의혹의 凝結을 딛

고 일어서 그 언어의 길이 끊어진 곳에 大悟가 있다는 입장에서

公案과의 필사적 대결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운의 선

풍은 ‘無心一道’로서 究竟地에 안정을 얻게 하는 목표였다. 공안

과 화두마저도 던져버린 그 무심의 경지 속에 대오는 얻어진다

고 그는 믿었다. 따라서 그의 선풍은 無心禪이라고 부를 수 있

다. 물론 이러한 무심선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에 의해

제창된 독특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이미 반야부계통의 경전들,

예컨대金剛經을 비롯한維摩經등의 여러 경전들은 모두

無相을 宗體로 삼고 있고, 혜능의육조단경, 永嘉의證道歌,

보조국사의 십종공부23) 등에서 무념무상의 논리는 언급되고 있

었다.

23) 普照國師,「眞心直說」중 眞心息妄 참조. 說做無心工夫 類各不同 令總大意.
    略明十種.

 

그러나 당시의 선가에서는 무상을 이념으로 삼았으면서도 화

두나 공안을 내세움으로써 하근기의 납자들로 하여금 또 하나의

집착을 유발시킬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情識으로 헤아리고 통발(筌)을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의 무덤을 파

는 까닭에 마음의 근원을 밝히지 못하고 만다.”24)

24)「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51.

 

불립문자라고 하여 문자를 무시함이 당위가 아니고 직지인심

이라고 하여 곧 면벽을 능사로 삼을 일은 아니다. 언어와 사려

의 길이 끊어진 곳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그 불합리한 수단들을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딛고 넘어서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와

선을 대립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한

입장에서 궁극의 진리는 발현된다는 말이다. 화두가 화두로서만

이어질 때 그것은 이른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 밖에

못하게 된다.

 

백운의 무심선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무척 깊은 뜻을 내포하

고 있다. 그의 ‘無’는 있다없다 하는 차별적 단계의 무가 아니다.

 

“세간에 있는 흙이나 나무, 기와나 돌처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無心이 아니다.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면 천리가 어긋나게 되는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25)

25)「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49.

 

모든 물든 집착심과 번뇌망상을 떠났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무’일 수 있지만 온갖 아름다움과 깨끗함을 모두 갖추었다는 의

미에서 보면 그것은 ‘유’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무심은 유와 무

에 상통하여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하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

니다. 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일체가 圓融無碍하고 平等自

在하게 된다.

 

“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바로 가리킨 그 마음은 다만 평상시의 일

없는 마음으로서 아무런 깊은 뜻이나 이치의 길이 없다. 無心과 無

爲에 契合하면 天機는 저절로 열려 어떤 구애나 집착이 없게 된다.

천지와 그 덕이 같고, 일월과 그 광명이 합하여 털끝만한 견해의

가시도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탕탕하고 크게 통할 것이다.”26)

26)「白雲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645.

 

그것이야 말로 大宗이며 선의 진미이다. 이러한 살아 움직이

는 무 즉, ‘活無’의 증득이 백운의 과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

의 변증법적 진리 把持이다. 부정의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이 바

로 백운이 말하고 있는 ‘無’이다. 깨침의 경지는 圓融無碍라고 표

현되지만, 그 ‘모든 것을 융섭(긍정)하고 매사에 자유자재로운

경지’를 얻게 되려면 반드시 현실부정이 선행 되어야 한다. 그

현실 부정에 安住해 버리면 이른바 허무寂滅의 空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白雲의 無心은 空空이며 畢竟空의 의미를 지닌다.

평산처림을 만났을 때 말했던 ‘活無’이다. 그런 의미에서 白雲의

無心禪은 간화선이면서도, 화두라는 집착을 벗어나게 하는 독특

한 선풍을 나타내고 있다.

 

(2) 白雲과 太古

백운과 태고는 모두 석옥의 임제선을 전해 받았음에도 불구하

고 그들이 귀국하여 전개한 선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색이 찬한백운화상어록의 서문에는 백운화상이 중국에 있

을 당시에 지공에게 법을 묻고 석옥에게서 법을 전해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그가 석옥의 嫡嗣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태고를 석옥의 적사라고 말하고 있

다. 아마도 왕사로서 각광을 받은 태고의 후광 때문에 영화를

등지고 천하를 주유하였던 백운의 고고한 기품이 감추어지게 되

지 않았나 생각한다. 태고가 석옥 화상에게 입실하였다는 단순

한 사실만으로 태고를 석옥의 적사로 보는 데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 즉 태고의 행장에 의하면 처음 석옥 화상을 만났을 때 석

옥은 태고에게 “화두를 버리라” 했는데, 태고는 “이미 버린 지 오

래이다”라고 답변했다.

 

“그 때 석옥은 ‘그대의 깨달은 바를 보니 공부한 것이 바르고 지견

이 분명하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놓아 버리시오’라고 하였고, 태

고는 ‘놓아버린지 오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27)

27) 維昌, 「太古和尙行狀」,「韓國佛敎全書」6, p.697.

 

그러나 귀국한 이후 태고는 趙州無字의 화두로 후학을 지도하

였다. 석옥의 종풍이 간화선이 아니라 무심무념이었음을 상기하

면 태고가 그 종풍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적어도 사상적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일에 틀림없다. 반면 백운 화상은 무심선을 주

창하고 그 상당설법의 대부분은 이 무심무념에 관한 것들이었

다. 앞서 인용한 백운의 임종게에서 그는 죽은 후에 ‘재를 만들

어 서방에 뿌리어 시주의 땅을 범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와 같

은 백운 화상의 임종게는 석옥 화상의 辭世偈, “주검의 시해는

청산을 집착하지 않는데, 죽은 뒤에 어찌 땅을 파고 묻히랴”라고

한 것과 의기투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석옥의 무심선

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그 유풍까지도 이어받아 그 진면목을 살

리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계승은 석옥과 백운의 어록을 대비시켜 볼 때

거의 명백히 드러난다. 또한 백운이 석옥의 후계자임을 밝혀주

는 결정적 확증은 석옥이 백운에게 전한 遺偈이다. 석옥은 태고

에게 전하지 않은 유게를 백운에게 전하였다.

 

“家産을 뿌리고 다하여 窮함이 뼈에 사무친데

淸風을 팔아 白雲을 샀네.

한 칸의 茅屋에 머물 수 있어

임종을 당하여 丙丁童子에게 부촉하네.

白雲買了賣淸風 散盡家私澈骨窮

留得一間茅草屋 臨行付與丙丁童”28)

28)「白雲和尙語錄」권상,「韓國佛敎全書」6, p.657.

 

석옥은 보우보다도 뒤늦게 알게 된 백운을 보다 더 자신의 법

에 적합하다고 여기고 임종을 맞아 사세송을 보내면서 心印을

전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의 병정동자는 물론 백운을 가리킨다.

석옥의 제자 法眼이 임종 때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와 백운

에게 전한 사세게를 통해 백운이 석옥의 법을 이어받았음은 거

의 확실하다 하겠다. 따라서 흔히 태고를 임제정통 18대의 直傳

으로 인정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백운이 그 진정한 법통

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태고와 백운 사이

에서 법통의 전승을 택일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불교사상사를 해

석하는 바람직한 태도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여기서 굳이

백운을 적사로 보는 것은 외면적 형식을 넘어서 가르침의 진정

한 계승, 그리고 그것이 전해지는 맥락의 진정성에서 볼 때 석

옥의 법이 백운에게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백운은 스

승의 법을 받음에도 무심의 종지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법은 본래 형상이 없고 마음은 본래 자취가 없는데, 전하

는 것은 무엇이고 받는 것은 무엇이고, 사는 것은 무엇이고 파는

것은 무엇인가? 허허! 모두 털어버리고 赤裸裸하니 설명할 법이

없고 전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설명할 법이 없다고 하는

것이 곧 설법이요, 전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것이 곧 전하는

것이며 곧 얻는 것이요.”29)

29) 앞의 책, p.658.

 

백운은 이렇듯 말없이 전해지며 전할 것 없이 전해져 師資相

承하는 心印을 강조했다. 印可라는 「형식」보다 법의 계승이라는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을 백운은 가졌다고 보아야 한

다. 육조혜능의 傳法이 七祖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은 결국 법의

계승이라는 「형식」이 편협한 宗派主義로 떨어지게 되고, 다툼과

갈등의 원인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방지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

다. 적어도 白雲에게는 太古에 대한 法統的 라이벌 의식은 없었

던 것이라고 본다. 태고 보우를 한국선맥의 中興祖로 보려는 경

향은 조선후기, 특히 西山門下의 문중 의식이 빚은 결과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3) 임제종풍의 한국적 전개

충렬왕대를 거치며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 麗元關係는

양국간에 활발한 교류를 이루어지게 하였고, 불교 또한 서로 많

은 영향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불교교류, 특히 임제선의 수용이 가장 두드러진다 하겠다. 麗末

의 三師라 일컬어지는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백운 경한 그 각각

의 嗣法과 상호 연관을 살펴보아도 그 가운데 임제종풍이 핵심

을 이루고 있다. 어찌 보면 여말의 불교는 이 세 화상을 중심으

로 하나의 지형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한 가운데

임제의 선맥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굳이 지형도라 표현한 까닭

은 세 화상이 모두 당시 강남 임제선과 깊은 관련을 맺었고 이

를 바탕으로 고려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하게 되었지만, 一家

로 포섭되기 보다는 각기 하나의 봉우리로 우뚝 선채 서로 이어

져 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백운과 태고는 석옥과 깊은

관계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백운과 국내에서 가까이 교유한 나

옹은 평산 처림에게서 법을 받았으면서 지공의 법을 또한 잇고

있다. 그리고 백운이 가장 높이 존경한 인물의 하나가 지공이었

으니 세 화상을 단순히 임제종풍만으로 연결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종래 여말 삼사라 하여 세 화상을 불교사에서 높이 평가하여

왔지만, 상대적으로 백운은 태고나 나옹에 비해 적극적으로 조

명되지 못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보우와 마찬가지로 석옥에게

서 법을 받았음에도 적사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후대의 법통설

에 따라 무반성적인 해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통

을 중심으로 하는 편협한 시각으로는 여말의 불교를 정확히 바

라볼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임제종의 수용과 전개

라는 맥락에서도 一師一承으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하여 보는 것

은 문제가 있다.

 

태고와 백운은 석옥 청공의 법을 받아 왔고, 나옹은 指空과

평산 처림의 법을 이어 왔다. 그런데 나옹 혜근이 법을 이은 지

공 화상은 인도인으로 임제선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석옥

청공과 평산 처림은 臨濟 義玄(787~866)의 18대 법손30)으로,

원오 극근의 법맥을 잇고 있다. 석옥 청공과 평산 처림은 사형

사제 간으로 그들의 스승이 及庵宗信이다. 급암 종신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석옥 청공31)은 霞霧山에 올라가 天湖菴이란 암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참선하며, 틈틈이 시를 짓고, 때로는 땔나

무를 직접하며, 채소를 길러서 먹고 살았다. 이와 같이 석옥 청

공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은둔적인 삶을 살았는데, 이는

석옥 뿐만이 아니라 그가 속해있던 祖先系32)의 공통적인 경향성

이었다.

30) 初祖 菩提達磨→二祖慧可→三祖僧瓚→四祖道信→五祖弘忍→初祖 曹溪慧能
    → 南嶽懷讓→ 馬祖道一 → 百丈懷海→ 黃檗希運 → 臨濟義玄 → 興化存獎
    → 南院慧顒 → 風穴演紹 → 首山省念 →汾陽善昭 → 慈明楚圓 →楊岐方會
    → 白雲守端 → 五祖法演 →圓悟克勤 → 虎丘紹隆 → 應庵曇華 → 密庵咸傑
    → 破庵祖先 → 無準師範)→ 雪庵祖欽 → 及庵宗信 → 石屋淸珙․平山處林
31) 공종원,「석옥 청공 선사의 선풍과 한국선」(대륜불교문화연구원, 1998,
    pp.214~224.), 차차석,「석옥 청공과 태고 보우의 선사상 비교」(한국선학회,
   『한국선학』제3호, 2001, pp.203~234), 이영무역,『석옥청공선사어록』(불교
    춘추사, 2000) 참조.
32) 祖先系는 破庵祖先의 제자들을 말한다. 이들 조선계는 元代의 禪宗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一派였다. 이 시기 조선계의 대표적인 승려로는 高峰原
    妙, 及庵宗信, 中峰明本, 天如惟則, 千巖元長 등이 있다.

 

보우는 ‘무자’ 화두를 중시하여 큰 의심으로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버리고, ‘이럴까 저럴까’하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또렷하게

‘없다’라는 화두만 들되, 하루 24시간 行住坐臥, 語黙動靜 중에

오직 화두를 목숨처럼 치밀히 참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

한 경향은 나옹의 경우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나옹은 깨달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그러한 측면에서 화두의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무자’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보우와 나옹이 제시한 화두

참구법은 ‘무자’화두를 중시하고, 깨달음의 체험을 중시하는 것으

로서 정형화되어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면은 보우

가 화두 참구에서 의심을 강조하면서 ‘큰 의심이 있는 곳에 커다

란 깨달음이 있다’라고 하는 “몽산법어”의 표현을 직접 인용한다

든지, 나옹이 몽산의 「無字十節目」을 모방하여 「工夫十節目」을

편찬하고, 몽산의 「休休庵主坐禪文」을 중시하는 것 등에서 몽산

의 사상적 영향력이 잘 드러난다.33)

33)「懶翁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6, p.722, pp. 703~709. 조명제, 「고려말 원
    대 간화선 수용과 그 사상적 영향」,「보조사상」23집(2005.2), p.168~172 참조.

 

태고와 나옹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태고 보우의 경우 몽산 덕이의 사상에 충실하다. 수증론에

있어서 몽산을 답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산이 주장한 염불

화두선을 주장하고 있다. 원나라의 왕실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중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온 사실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도 하다. 반면 나옹 혜근의 경우 몽산의 수증론의 전체적인 체

계는 수용하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의

흐름을 잇고 있으며, 입문삼구, 공부십절목, 삼관어 등을 통하여

볼 때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주장을 볼 수 있다. 염불․정토에

관련해서도 지눌이 주장하였던 자심미타․자성미타를 주장할 뿐

몽산이 주장한 ‘염불화두선’에 대한 언급이 없다.34)

34) 김방룡, 「여말 삼사의 간화선 사상과 그 성격」,「보조사상」23집(2005. 2),
    pp.182~221 참조.

 

대체로 고려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중국 불교계는 임제종이

가장 번성하였고, 이들이 고려 불교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다. 특

히 고려의 武臣亂 이후에 상당한 세력의 확장을 보이는 것도 이

들 三師의 임제종 도입과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교종에 비해

상대적 열세에 있었던 선종 부흥의 큰 계기가 될 수 있는 사건

이었다. 그러나 고려말 중국 임제종의 영향을 주로 보우와 나옹

화상에 초점을 두고 봄으로써 그 이전의 교류는 상대적으로 간

과되거나 중요시되지 않았던 면도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이 형

성된 데는 물론 여말이후 전개되는 권력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14세기 이후 태고와 나옹의 문도들이 불교계에서 주

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麗鮮 交替期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불교의 온전한 사상적 전개와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朝

鮮의 건국 이후에도 지속된 정치적 혼란과 탄압 속에서도 불교

는 禪을 중심으로 진리의 등불을 지키며 이어갔다.

 

요컨대 려말의 불교를 역사적, 정치적 사실을 중심으로 하여

해석하거나 후대의 법통설과 관련된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은 당

시 불교의 사상적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

다. 그리고 이 때 요청되는 것이 바로 사상사적 이해와 접근이

다. 려말의 불교를 사상사적으로 볼 때 우선 주목되는 것은 당

시 불교의 사상적, 역사적 과제이다. 려말선초는 정치적 변혁의

시대일 뿐 아니라 사상적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고,

불교는 역사의 격랑을 극복하며 새로운 시대와 조화를 이루며

나아가 발전할 수 있는 정체성을 재확립해야 했다. 이전까지 위

기의 계기가 주로 불교의 내부적 분열이나 사상성의 후퇴였다면

당시는 불교 자체의 位相이 걸린 위기의 시대였다. 이 때 위기

극복의 지침이 된 것이 바로 임제선의 선양이었다.

 

고려 중기 이래 한국 불교사에서 위기극복의 순간에는 언제나

禪, 그 중에서도 임제선이 요청되었음을 알 수 있다. 羅末의 선

문 九山 도입 또한 비슷한 사상적 맥락이었다. 화엄학 중심의

敎學体系보다 心法의 悟道를 내세우는 禪宗이 더욱 다이나믹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사상적 변혁인 셈이다. 抑佛로 일관한 조선의

불교는 철저히 禪 중심적인 경향을 띄워 왔다. 현대의 불교 또

한 조계종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선종적 思考가 主流를 이루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모든 종교는 발전의 끝에 제도화되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종교가 제도화되고 그 획일화된

‘틀’속에 안주하는 것은 곧 생명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한국 불교

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위기의 순간 마다 임제선을 통해 생명력

을 되살려 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이고, 처음의 자리에서 다시 자신을 살펴보고 앞길을 밝히는 노

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Ⅳ. 남기는 말

 

역사의 모든 순간이 필연성과 상징성을 품고 있지만 한국 불

교사에서 여말선초는 벼랑 끝에 선 것과도 같은 위기의 시대였

다. 여말의 三師는 기울어가는 불교의 시대를 예견하고 스스로

선의 기둥이 되고자 하였던 禪師들이었다. 려말의 불교계는 성

리학과 함께 밀려온 역사의 도전을 끝내 물리칠 수 없었으나 세

화상과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아간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선맥은

오늘에 이어지기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백운

은 스스로 우뚝 서 자기를 드러내기 보다는 선의 기둥을 누천년

이라도 흔들림 없이 바쳐주는 주춧돌이 되고자 하였다. 그렇다

고 해서 태고나 나옹 화상의 위상이 격하될 수 없음은 물론이

다.

 

백운의 삶은 시종 고요함을 잃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의 삶이 柔弱하지는 않았다. 그는 겸손하되 뒤로 물러서지 않았

다. 그는 ‘제가 丈夫라면 나도 丈夫인데, 왜 부질없이 스스로 업

신여겨 물러서겠는가!’라며 禪杖으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애석한 것은 백운의 無心禪風을 이어받은 뚜렷

한 후계자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백운은 임종게를 전하며

남긴 스스로의 말대로,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그는 한국불교

사에서 메말라 가는 法의 밭에 촉촉한 비를 내리고 흩어진 구름

이었다. 벽운은 편협한 종파주의의 틀속에서 안주하기를 거부한

인물이다. 또한 임제종의 大脈을 잇는 法孫이라는 형식주의를

거부한 선승이다. 麗末의 三師는 모두 임제종의 사상을 계승하

였다. 또 당시로서는 전통적인 九山선문의 후예와 差別化되는

新學問이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사상의 흐름이 결국 抑佛로 일

관한 조선 5백년의 질곡 속에서 불교의 명맥을 잇게 한 힘의 원

천이 되었다고 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그 한국불교의

특수성을 현대적으로 解釋하고, 현실적 응용을 도모하는 일이라

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