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 고찰/이필원

실론섬 2016. 9. 29. 16:04

[불교연구 32집]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 고찰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이필원/청주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선행 연구 검토

  2. 운문 경전에 나타난 사무량심

  3. 산문 경전에 나타난 사무량심

  4. 해탈도로서의 사무량심

Ⅲ. 맺음말

 

요약문

불교에는 많은 종류의 수행법이 존재한다. 그 수행법의 일차적인 목적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diṭṭhe vā dhamme)’에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사무량심을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주지하듯이 사무량심은 사범주라고도 한다. 즉 사후에 브라흐만과 함께 머물게 하는 수행법이란 의미이다. 즉 주안점이 현재가 아닌 사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사범주 혹은 사무량심은 경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고, 그 예도 풍부하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으로서의 사범주 혹은 사무량심의 용례는 배제하였다.


사무량심이 수행법의 한 종류라고 하는 한, 그것의 본래적 목적은 단순히 범천에 태어나는데 있는 것으로 보기에는 불교의 목적-붇다는 어디까지나 해탈에 그 초점을 두었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후에 대한 내용이 비불교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본래 목적이 좋은 곳에 태어나거나 좋은 가문에 태어나는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해탈의 성취방법으로서의 사무량심과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서의 사무량심/사범주 가운데, 전자가 후자보다 본래적 의미였음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초기경전 가운데, 운문경전과 산문경전 속에 설해져 있는 사무량심의 용례 가운데, 번뇌의 소멸을 통한 해탈의 추구, 혹은 사선과 같은 분명한 선정의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지 조사, 검토하였다.

 

1. 들어가는 말

 

불교의 기본 전제가 ‘지금 여기(diṭṭhe vā dhamme)’, 즉 현재라는 시점에서 고통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행법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행법에는 불교사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발달과정이 숨어 있을 것이다.

 

과연 고따마 붇다가 실수했던 수행법은 무엇일까.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어찌 보면 진부한 물음일 수도 있다. 이 물음은 현재 우리들이 불교의 온전한 모습을 담고 있다고, 혹은 전하고 있다고 하는 경전(suttas)을 얼마만큼 신뢰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른바 초기경전군인 아함과 나까야에 기술된 내용은 모두 불설인가 아니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서 개변 혹은 창작된 것인가라는 문제제기가 그것이다.1)

1)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최근 국내에서 의미있는 논의가 있었다. 권오민
   (2009) 교수가 ‘불설과 비불설’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를 계기로 법보
   신문을 통해 불설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지면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
   데 이 주제는 권오민 교수의 논문이 처음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조성택(2009) 교수의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에서도 유사한 내
   용이 언급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최근의 연구물 가운데 Alexander Wynne(2004)와 
   並川孝儀(2005) 등의 논문이 있다. 

 

이것은 수행론을 검토함에 있어서도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수행론의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문헌상으로 -초기불교의 경우- 아함과 니까야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2) 그렇기 때문에 아함과 니까야에 기술되어 있는 수행론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붇다가 수행했던, 혹은 붇다 재세 시에 교단 내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중에는 후대에 체계화가 이루어진 것이나, 받아들여진 것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본 논문은 주제와 관련하여 논서와 주석서는 참조하지 않는다. 논서와 주
   석서는 불교가 이미 확고하게 정착한 이후의 문헌이며, 따라서 정치한 교
   리적 발달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사무량심 혹은 사범주라고도 하는 수행법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수행법은 일단 사범주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라문교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이라기보다는 불교외적인 수행법으로서, 어느 때 어떤 이유에서 불교 수행법으로 정착했다고 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혹은 이 수행법은 단지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다.3)

3) 이와 관련해서 K.R. Norman(1995 : 114)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brahma-vihāra는 본래 바라문의 전문용어였다고 생각되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브라흐만에 머물다. 혹은 범천과 함께 머물다’란 의미가 되는데, 
   산스끄리뜨의 용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이 언어는 brahma-sahavyatā를 
   획득하기 위한 바른 길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던 젊은 바라문들을 상대로 
   했던 (붇다의) 설법 중에서, 그 본래의 의미가 전해진 듯 하다. 문맥에서는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의미하는 듯한데, 붇다는 가벼운 농담 가운데, 범천과 
   합일된 상태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고, 범주(梵住, brahma-vihāra)라고 하
   는 사무량심을 행하는 자는 범천계에 범천으로서 재생한다고 설명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기존의 이해를 바탕으로, 사무량심이 갖는 수행론으로서의 위상이 과연 범천에 태어나는 정도의 수행법으로 이해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니면 다른 수행법-정려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과 마찬가지로 번뇌의 소멸을 통한 해탈을 야기하는 수행법으로 이해되는 것이 정당한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사무량심에 관한 선학들의 견해를 고찰하고, 그 중에서 이 수행을 해탈도의 성격으로 파악한 설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니까야를 통해 검증해보고,4) 그를 통해 사무량의 해탈도로서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재가자들이 사후 하늘나라(梵天)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 설한 사무량심 혹은 사범주의 내용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자 한다. 

4)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T.Vetter(1988)의 글과 藤田宏達(1972)의 
   논문에 의한 것이다. 이들은 사무량심이 적어도 어느 시기까지는 해탈도로
   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나까무라 하지메,
   미즈노코겐 등도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들 선학들의 견해가 타당한지를 니까야와 아함을 중심으로 검증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 논문은 Suttanipāta(이하 Sn.)의 Mettā-sutta(143∽152G)와 73G를 검토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기존의 연구 검토5)
5) 사무량심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필자가 찾아 
   본 논문으로는 최기표(1999)의 ‘四無量心의 수행체계’가 유일하며, 간
   단하게나마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는 조준호(2000 : 331-332) ‘초기불
   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의 기술뿐이다. 최기표의 경우 사무량심을 천
   태의 교설에 입각하여 논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아함의 내용에 한 장
   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입장은 사무량심은 수행론이기는 하지만 어디
   까지나 세간선이자 범부선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조준호의 경우는 
   사선 가운데나 또는 사선 전후의 Vipassanā 수행을 위한 방편적이며 보
   조적인 수행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필자가 밝히고자 하는 사무량 수행
   의 위상에 대한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에 대한 논의는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는 외국 학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
   지임을 밝혀둔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콘제(1986)의 ‘慈・悲・喜・捨에 
   관하여’가 있다. 이 논문 역시 사무량심은 불교의 핵심적인 수행이 아닌 
   종속적인 수행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인도의 다른 종교전통에서 
   유래한 수행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K.R. Norman(1995)의 견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만의 논문에 대해서는 각주 3)을 참조하라.
 

 

우선 본 연구주제에 관한 선학들의 연구를 주요 학자를 중심으로 개괄 내지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의 연구는 본고를 서술하는데 있어 중요한 해석학적,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무량심을 선정적인 특징을 갖는 수행법으로서, 즉 해탈도의 특징을 갖는 점을 지적한 학자로는 T. Vetter가 있다. 그는 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m(1988)란 책에서 Chapter 7을 사무량심에 할당하고 있다. 사무량심이 주류적 수행법의 위치에서 밀려났다고 하는 견해를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me cetovimutti(나의 심해탈 ; 내 마음의 해탈)란 붇다가 처음 정각을 성취했을 때 표현했던 ‘나의 심해탈은 부동이다’와 비교하면서 사무량심이 본래는 해탈을 성취케 하는 주요한 수행법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中村元 ?原始仏教の思想?上(1970 : 286ff)은 사무량심이 단순히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 인식되게 된 과정에 대해서 나름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사무량의 ‘자비’가 붇다의 ‘대비(mahākaruṇā)’와 구별되면서 사무량심의 위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brāhma vihāra가 본래는 ‘숭고한 경지’를 가리키는 복합어였지만, 후대에 brāhma는 ‘청정한/숭고한’이란 형용사가 아닌 ‘독립명사’로 간주되어 ‘범천’으로 해석되게 되면서 사무량심이 사범주라고 하는 낮은 단계의 의미를 갖는 덕목으로 간주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brāhma vihāra를 통해 사무량심의 위상 변화를 지적한 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이 부분은 본문에서 고찰될 것이다. 

 

水野弘元 ?仏教教理研究?(1997 : 52)은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사범주)는 四禪에 관련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자비희는 앞의 3선에 속하고, 捨무량은 제 4선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범부가 닦는 사무량을 유루로, 성자가 닦는 사무량심을 무루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사무량심의 각 支가 왜 사선에 배대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또한 범부의 사무량을 유루로 성자의 사무량을 무루라고 한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특별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견해는 아마도「청정도론」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6)
6) 金亨俊(1999 : 508) 참조.

 

藤田宏達는 「原始仏教の禅定思想」(1972 : 301)라는 논문에서 사무량심을 ‘마음’의 계열에 속하는 선정설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특히 捨(upekhā)를 사선의 제 3선과 제 4선의 捨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정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울러 ‘자・비・희’의 경우 반드시 선정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이해할 경우, 선정의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 수행법은 불교외부에서 기원했지만 불교가 채용하여 불교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사선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시각에서도 충분히 그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7)
7) 사선의 경우도 불교외부, 즉 당시의 사문전통(samaṇa tradition)에 공통하는 
   수행법이었으나, 붇다에 의해 불교적으로 체계화 된 것으로 이해한다. 藤田
   宏達(1972), Bronkhorst(1981), T.Vetter(1988) 등을 참조하라. 

2. 운문경전에 나타난 사무량심
2.1. 사무량심8)은 다양한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불교 전통에서 수행이란 기본적으로 ‘번뇌’의 소멸을 통한 ‘고통’의 해결을 추구한다. 사무량심이 수행법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이러한 범주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기본 전제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경전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8) 본 논문에서는 사범주란 용어대신 사무량심이란 용어를 택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범주는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법을 언급할 때, 대표
   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Sn.에서 사무량심과 관련한 내용은 앞서 언급한 대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Mettasutta(慈經, 이하 Ms)에 나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Khaggavisāṇasutta10) (코뿔소 뿔의 경, 이하 Ks)의 73G이다. 전자는 이른바 사무량심 가운데, mettā(자애)만을 언급하고 있고, 후자는 사무량심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10) Bronkhorst(1993 : 124)는 Khaggavisāṇa sutta는 의심의 여지없이 고층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Culla Niddesa에 이 경전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경전이 일부 학자들은 석존 이전의 문헌일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그는 분명히 석존 이후의 문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Sn.54cd의 내용을 들고 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책 p.125를 참조하라.

그런데 mettā란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경전의 성립사를 바탕으로 보면, 최고층에 속하지 않으며, 고층 가운데에서도 그 성립이 늦은 편에 속하는 Sn. 제1장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자비’가 하나의 말로 경전 내에서 빈번히 사용되게 되기까지는 생각보다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 우선 Ms에서 기술되고 있는 자애 수행(mettābhāvanā)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자애 수행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게송은 148G∽151G이다. 

na paro paraṃ nikubbetha, nātimaññetha katthacinaṃ kañci,
vyārosanā paṭighasaññā nāññamaññassa dukkham iccheyya. (Sn.148)
누구든 다른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된다. 어디에서든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분노와 증오의 생각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서는 안 된다. 

mātā yathā niyaṃ puttaṃ āyusā ekaputtam anurakkhe,
evam pi sabba-bhūtesu mānasam bhāvaye aparimāṇaṃ. (Sn.149)
마치 어머니가 목숨으로 자신의 외아들을 지키려고 하듯이, 이와 같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한량없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

mettañ ca sabba-lokasmiṃ  mānasam bhāvaye aparimāṇaṃ
uddhaṃ adho ca tiriyañ ca asambādhaṃ averaṃ asapattaṃ (Sn.150)
모든 세상에 대해서, 한량없는 慈의 마음(mettañ mānasam)을 닦아야 한다(bhāvaye). 위로, 아래로, 횡으로, 장애 없이, 원한 없이, 적의 없이

Tiṭṭhaṃ caraṃ nisinno vā  sayāno vā yāvat’ assa vigatamiddho
Etaṃ satiṃ11) adhiṭṭheyya brahmam etaṃ vihāraṃ idham āhu (Sn.151)
서있거나, 가고 있거나, 앉은 [상태]이거나, 누워 있거나, 그가 잠에서 떠난 상태(잠자지 않는)에 있는 한, 이 사띠를 확립해야한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청정한 경지[라고] 말한다.
11) 여기에서 sati란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경우의 싸띠는 위빠사나 수행체계의 
    싸띠가 아닌, 자애 수행을 의미하는 것, 즉 선정 수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용경문에서 보듯이,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다른 이를 속이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버려야 함을 알 수 있다.12)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위로 아래로 횡으로 장애 없이, 원한 없이, 적의 없이, 서있거나, 가고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자애의 마음을 굳건히 확립해야만 한다. 
12) I.B. Honor(1979 : 198)는 ‘비록 아라한의 특성 중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사범주의 자애mettā는 친밀함, 우호와 같은 덕을 심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역시 Sn.의 내용을 통해 자애라는 것이 해탈자liberator에게 
    발견되는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후대의 아라한들의 경우에는 
    자애의 덕은 나타나지 않고 다만 보살bodhisattva의 덕으로 간주된다는 
    맥락에서 자애를 잠시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애 수행이란 것이 단순히 다른 이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나 증오, 적의와 같은 정서적 번뇌를 제거 혹은 억제함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붇다가 제자들에게 제시한 수행법의 요체이다. 

그런데 Ms에서는 자애심만이 언급될 뿐, 다른 세 가지-Karuṇā, Muditā, Upekkhā-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사무량심이 본래부터 네 가지로 이루어진 체계가 아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13) 즉 본래는 자애수행만 있었던 것이 어느 때인가 다른 항목이 부가되어 네 가지로 정형화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3) 中村元(1970 : 305)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慈’가 예부터 
    ‘숭고한 경지’(brahma vihāra 梵住, 梵堂)라고 불렸기 때문에, 나중에 앞에서 
    든 네 가지가 또 사범주로 정리된 것이다. 또 ‘慈’가 ‘무량’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 네 가지도 ‘사무량’ 또는 ‘사무량심’으로 정리되기에 이르
    렀다.” MN. III(pp.81-82)에서는 14종의 수행법을 열거하면서, 사념처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은 하나의 수행체계로 분류하면서, 사무
    량심의 경우는 그것을 단일한 수행체계가 아닌, 지분 각각을 수행법으로 제시
    하고 있다. 즉 mettābhāvana, karuṇābhāvanā, muditābhāvanā, upekhāvhāvanā로 
    각기 달리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네 가지가 연관되어 있는 수행법
    으로 인지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을 하나의 수행체계로 정리할 
    만한 용어 - 즉 사무량심이 되었든 사범주가 되었든 - 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들이 흔히 불교의 덕목으로 말하는 ‘자비(mettā-karuṇā)’란 말도 불교 초기에는 없었던 셈이 된다. 다음으로 Ks.의 73G의 내용을 살펴보자.

 

Mettaṃ upekhaṃ karuṇam vimuttiṃ āsevamāno muditañ14) ca kāle
sabbena lokena avirujjhamāno15) eko care ..... (Sn.73)
자애, 평정, 연민, 해탈, 그리고 기쁨을 항상(알맞은 때에) 닦으면서, 모든 세상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면서,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14) 전재성(2005 : 98)은 이것을 “해탈로 이끄는 자애와 연민과 기쁨과 평정”
    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주석서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주석서가 제작된 시기에도 여전히 사무량심은 해탈도로서 인식되고 있었
    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5) K.R. Norman(1984)은 “not clashing with all the world”(세상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게송에서는 당연히 자애, 평정, 연민, 해탈, 기쁨이란 말에 눈이 간다. 특히 사무량심이라고 할 때,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이라고 하는 순서와는 상관없이 용어들이 나열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해탈(vimutti)이 이들 용어와 같이 기술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만약 전재성(2005)과 같이 해석한다면, 이는 사무량(자비희사)이 해탈로 이끄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이렇게 해석해도 좋을 것인가. 물론 필자는 이와 같은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다.16) 그러나 본 게송만으로는 해탈과 나머지 네 가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자애, 평정, 연민, 해탈, 기쁨의 다섯 가지는 수행자가 닦아야 할 것으로써, 이들 다섯 가지 사이에서 선후가 구분되어 있다거나 우열이 나뉘어져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16) 中村元(1970 : 303)은 “… ‘해탈’은 궁극의 목적으로 생각되어 나중에는 
    제외되고, 나머지 네 개만이 정리되어 설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해탈과 나머지 네 가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필자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가능한 주
    석서의 해석을 참조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재성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주석서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5세기 무렵의 상
    좌부의 이해이며, 아비담마의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桜部建(1975 : 27)은 네 항목을 해탈로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시 어떤 설명도 없다.

2.2. Dhammapada(이하 Dhp.)에서는 자애(mettā)에 관한 단 한 용례만이 확인된다. 그러나 자애수행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mettāvihārī yo bhikkhu pasanno bhuddhasāsane
adhigacche padaṃ santaṃ saṃkhārūpasamaṃ sukhaṃ.(Dhp.368)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굳건히 신뢰하고, 자애에 머무는 비구는 적정(santa)17)한 경지, [모든]행위가 고요한 경지, 행복한 경지를 얻을 것이다.
17) Nārada(1978 : 283)는 이것을 ‘열반’으로 해설하고 있다. Sn.1065~1066G
    에는 santa/santi에 대한 문답이 나온다. 여기에서 santa(적정)는 있는 그대로 
    알고 바르게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diṭṭhe dhamme anītihaṃ yaṃ viditvā sato 
    caraṃ) 세상에 대한 집착을 극복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붇다에 대한 굳건한 신뢰는 삼보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하여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삼보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애를 닦아 자애심에 머무는 비구, 즉 수행자는 온갖 행위가 고요해진, 적정하고 행복한 경지를 획득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2.3. Theragāthā(이하 Th.)에서 사무량심과 관련된 내용은 647∽649G에 이르는 세 게송에 불과하다. 그 외의 게송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게송은 우리에게 자애 수행의 특징을 살펴보는데 충분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우선 게송의 내용을 보자.

mettañ ca abhijānāmi appamāṇaṃ subhāvitaṃ 
anupubbaṃ paricitaṃ yathā buddhena desitaṃ.
나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대로, 자애무량을 잘 닦았고, 순서대로 지속적으로 실천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Th.647)
 
sabbamitto sabbasakho sabbabhūtānukampako 
mettaṃ cittañ ca bhāvemi abyāpajjharato sadā.
나는 모든 이들의 친구이며, 동료이며, 모든 생명체를 동정하는 자이다.
항상 해치지 않음을 즐거워하며, 자애심을 닦는다.(Th.648)

asaṃhīram asaṃkuppaṃ cittaṃ āmodayām ’ahaṃ, 
brahmavihāraṃ bhāvemi akāpurisasevitaṃ. 
나는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뻐한다.
나는 악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청정한 경지’를 닦는다.(Th.649)

위의 게송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애무량은 붇다의 가르침으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불상해不傷害를 바탕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649G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brahmavihāra는 일반적으로 번역되듯이 ‘범주梵住’로는 번역되지 않고, ‘청정한 경지’로 번역됨을 알 수 있다.18) 이것은 中村元가 언급했듯이 brahma란 단어가 명사로 쓰이지 않고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자애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brahmavihāra는 죽은 후에 가는 브라흐마梵의 세계가 아닌,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재에서 얻어지는 ‘청정한 경지’인 것이다. 여하튼, 이들 게송을 통해서 자애무량은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asaṃhīram asaṃkuppaṃ cittaṃ)을 가능케 하는 수행임을 알 수 있다. 
18) 中村元(1984 : 140)은 ‘清らかな安住の境地(청정한 안주의 경지)’라고 번역
    하고 있다. 사실 649G에 나오는 brahmavihāra는 앞서 Sn.151게송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왜 이렇게 번역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내용상 이 게
    송은 레와따Revata장로가 자신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수행에 대한 내용을 노
    래하고 있는 것이기에, 죽은 뒤에 갈 수 있는 범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Sn. 151G와 비교해 볼 때, brahmaṃ vihāraṃ이 
    brahmavihāraṃ이란 복합어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해
    석은 K.R. Norman(1984)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Sn. 151G를 보라.

 

3. 산문 경전에 나타난 사무량심

3.1. 산문 경전 가운데 MN.의 Vatthūpamasutta19)에는 마음의 더러움(번뇌)에 대한 버림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고,20) 그를 바탕으로 사무량심을 닦아 해탈을 성취한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이 다소 길지만,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 MN. I, 7번 경(pp.36-40)이다. 이에 상응하는 한역 경전은 중아함경 93번
    경인 水淨梵志經이다. 水淨梵志經은 MN의 기술과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
    상 삼귀의 부분이 없고, 마지막에 해탈과 해탈지를 획득한다고 하는 내용
    도 없다. 또한 水淨梵志經에서는 마음의 더러움心穢을 21가지로 제시하며, 
    이러한 마음의 더러움이 없으면, 천상天上에 태어난다(T1, 575b14)고 기
    술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사무량을 잘 닦는 것善修이야 말로 마음
    을 닦는 것(是謂, 洗浴內心 ; 非浴外身. 575c16)이라고 한다. 따라서 MN의 
    Vs와 중아함경의 水淨梵志經에서 사무량에 대한 위상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주지하듯이 MN는 상좌부 소전이고, 중아함경은 설일체유부 소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두 경전의 기술 내용만을 가지고 두 부파의 사무량심에 
    대한 이해를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니까야에서도 사무량을 해탈
    과 연결짓지 않고 있는 기술이 여기저기 산재(예를 들면, MN.II, p.82 ; AN.III, 
    p.225등)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MN의 Vs는 이미 사무량심의 전형적인 기술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신층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
    리는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에서 MN의 Vs를 굳이 선택한 
    이유는 일단 사무량을 번뇌와 해탈이란 구도 속에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것은 적어도 신층의 단계에서도 사무량심을 해탈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 DN.III, Udumbarikasīhanādasutta(pp.49-50)에는 오개pañca nīvaraṇa를 
    버리고서 마음의 수번뇌cetaso upakkilesa를 지혜로서paññāya 약하게 할 때
    dubbalī-karaṇe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을 수반한 마음에 머물게 된다고 기술
    되어 있다. 내용상 Vatthūpamasutta의 출발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마음의 더러움인가? ①욕심과 ②바르지 않은 탐욕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③성냄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④원망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⑤원한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⑥악의가 마음의 더러움이고, ⑦적의가 마음의 더러움이고, ⑧질투가 마음의 더러움이고, ⑨인색함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⑩거짓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⑪기만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⑫고집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⑬격정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⑭자만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⑮지나친 자만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⑯교만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⑰방일이 마음의 더러움이다. 실로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욕심과 바르지 못한 탐욕이 마음의 더러움이라고 알고 나서, 욕심과 바르지 못한 탐욕을, 마음의 더러움을 버린다. … 중략 … 라고 알고서, 마음의 더러움인 방일이 포기된다. 그는 붇다에 대해서 확실한 앎에 근거한 신뢰에 의해서21)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갖추어진다. : “그 분 세존께서는 아라한, 정등각자, 지혜와 덕행을 갖춘 분, 잘 가신 분, 세상에 대해서 잘 아는 분, 가장 높은 분, 사람을 길들이는 분, 하늘과 인간들의 스승이신 분, 깨달으신 분, 세상에서 존귀한 분이다.”라고. 
… 중략 … 
그에게 [마음의 더러움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까지22) 버려지고, 놓아지고, 끊어지고, 포기된다. [그 때] 그는 “나는 붇다에 대해서 확실한 앎에 근거한 신뢰를 갖추었다.”라고 그는 진리의 이해를 통해23) 야기된 환희를 얻고, 가르침의 이해를 통해 야기된 환희를 얻고, 가르침과 관계된 희열을 얻는다. 희열이 있는 자에게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의 마음을 지닌 자에게 몸은 안정된다. 안정된 몸을 지닌 자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자는 마음이 집중된다. 
… 중략 … 
그는 자애를 갖춘 마음으로 한 방향을 채우고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를, 그처럼 세 번째를, 그처럼 네 번째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위로, 아래로, 횡으로, 모든 곳으로, 전체적으로 모든 세계를 크고 넓은, 무량하고 원한 없는 평화로운 자애를 갖춘 마음으로 채우고 머문다. 
… 중략 … 
그는 “이것이 있고, 저열한 것이 있고, 뛰어난 것이 있고, 이 생각을 이해한 자에게 뛰어난 멀리 떠남이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있는 그에게 모든 욕망의 번뇌로부터 마음은 해탈되고, 존재의 번뇌로부터 마음은 해탈되고,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은 해탈되고, 해탈된 자에게 있어 [자신은 이미] 해탈되었다는 지혜24)가 있다. 태어남은 파괴되었고, 청정한 행위는 성취되었고, 해야 할 바는 행해졌으며, 더 이상 이와 같은 생존의 상태로 이끌리지 않는다고 그는 분명하게 인식한다. 25)
22) 전재성(2002: 177)은 “그가 어느 정도”라고 번역하고 있다. 각주 134에서는 
    그 근거를 주석서에서 찾고 있다. 필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까지”라고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뒤에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닦음으로써 나머지 마음의 
    더러움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해탈에 이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경전
    의 앞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마음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알고 나서viditvā’ 그것
    들을 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자기 
    마음에 대한 일상적인 관찰로만으로 어느 정도 제거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
    로 이해된다. 그리고 남아 있는 마음의 더러움은 보다 깊은 선정의 단계에서 
    제거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통해 제거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23) CPD, attahveda, s.v. “the joy caused by understanding or comprehension 
    of the truth.”
24) 여기서 ‘ñāṇa’는 ‘해탈지解脫智’로 번역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해탈했음을 
    아는 지혜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장아함경?(T1, 12a23-24) 등과 같은 한역 
    경전에서는 ‘已得解脫, 生解脫智, 生死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辦, 不受後有.’라고 
    번역하고 있다. 
25) 숫자는 필자가 임의로 붙여놓은 것이며 원문은 너무 길어 생략한다.

 

다소 긴 위의 인용문은 MN.에 있는 Vatthūpamasutta(옷감에 대한 비유의 경, 이하 Vs)으로, 네 가지 무량한 자비희사의 전형적인 기술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사무량심을 닦기 위한 전제조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우선 이 경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17가지 마음의 더러움 → 마음의 더러움을 버림 → 삼보에 대한 확고한 신뢰 → 환희・희열・기쁨의 몸을 지니고 마음은 안정됨 → 행복감으로 마음이 집중됨 → 자애・연민・기쁨・평정을 사방으로 가득 채움 → 욕망의 번뇌・존재의 번뇌・무명의 번뇌로부터 해탈과 해탈지의 획득

이상이 Vs에서 기술하고 있는 사무량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사무량은 단순히 범천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해탈도로서 기술되어 있다. 즉 사무량을 닦음으로서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해탈을 얻어, 다시는 윤회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3.2. 니까야의 또 다른 산문경전 가운데 AN. IV권의 Saṇkhittadesitasutta의 내용 역시 사무량심을 사선과의 관계 속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경전은 T.Vetter가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기위해 인용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Mettā me cetovimutti bhāvitā bhavissati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 ti. Evaṃ hi te bhikkhu sikkitabbaṃ. Yato kho te bhikkhu ayaṃ samādhi evaṃ 
bhāvito bhoti bahulīkato, tato tvaṃ bhikkhu imaṃ samādhiṃ savitakkam pi savicāraṃ 
bhāveyyāsi, avitakkam pi vicāramattaṃ bhāveyyāsi, avitakkam pi avicāraṃ bhāveyyāsi, 
sappītikam pi bhāveyyāsi, nippītikam pi bhāveyyāsi, sātasahagatam pi bhāveyyāsi, 
upekhāsahagatam pi bhāveyyāsi. Yato kho te bhikkhu ayaṃ samādhi evaṃ bhāvito hoti 
subhāvito, tato te bhikkhu evaṃ sikkhitabbaṃ.(AN. IV : 300)
자애에 의한 나의 심해탈26) 은 닦아지고, 많이 수행되고, 수레가 되고, 기초가 되고, 실행되고, 지속적으로 실천되고, 잘 수행될 것이다.
실로 비구여, 그대에 의해 이 삼매가 잘 닦아지고, 많이 수행되면, 비구여 다음에 그대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갖춘 이 삼매를 닦아야 한다. 또한 거친 사유가 없고, 미세한 사유만 지닌 삼매를 닦아야 한다. 또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또한 기쁨을 갖춘 삼매를 닦아야 한다. 또는 기쁨이 없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또한 사띠를 수반하는 삼매를 닦아야 한다. 또한 평정을 수반하는 삼매를 닦아야한다. 비구여, 다음에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26) 전재성(2007 : 271)은 “나는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대림스님(2007 : 278)은 “나는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로 번역
    하고 있다. 이에 반해 T.Vetter는 me를 소유격으로 보고 me cetovimutti는 
    ‘나의 심해탈’이라고 하는 하나의 관용적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애에 의해 심해탈이 성취된다는 내용이며28), 아울러 자애 수행이 바로 사선의 수행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내용이다.29)
28) 사무량심을 심해탈로 기술하고 있는 경전은 이외에도, AN. I, p.4 ; 
    DN.III, p.248 ; SN. V, pp.118-121등이 있다. 
29) T.Vetter(1988 : 26)는 “이 느낌은 삼매와 동일시되고 계속적으로 정려
    dhyāna의 단계에 공통하는 마음의 단계, 즉 심사, 숙고, 기쁨, 행복, 그
    리고 평정과 함께 닦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3.3. 한편 SN. V, Bojjhaṅga-Saṃyuttam에 있는 ‘Mettā’에는 자애수행의 두 가지 과보에 대한 기술이 보인다. 두 가지 과보란 지금 여기에서 완벽한 앎을 얻거나, 집착이 남아 있으면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되는 과보를 말한다.30) 해당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30) 이것은 Sn.의 Dvayatānupassanāsutta의 내용과 동일하다.

비구들이여, 자애가 닦여지고, 많이 수행되면, 두 가지 과보 가운데 하나의 과보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에서 완벽한 앎이 [성취되거나], 혹은 집착이 남아 있으면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된다].
31) SN. V : 131 mettā bhikkhave bhāvitā bahulīkatā dvinnam phalānam 
    aññataram phalam pāṭikaṅkhaṃ diṭṭheva dhamme aññā sati vā upādesese 
    anāgāmitā. 필자가 본 PTS본 1976년판에는 ‘Mettā bhikkhave bhāvitā.’만이 
    나온다. 이것은 앞의 백골관(aṭṭhikasaññā)의 내용과 동일하기 때문에 생략한 
    것으로, 필자가 각주에 인용한 경문은 나머지 부분을 앞의 내용으로 채워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완벽한 앎, 즉 aññā는 아라한을 의미한다.32)  물론 SN. V. Bojjhaṅga-Saṃyuttam에는 백골관, 시체관상, 수식관 등의 수행으로도 동일한 과보를 얻을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 방법으로는 칠각지의 수행에 입각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필자는 이 경전을 통해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애수행 및 연민, 기쁨, 평정의 수행 역시 지금 여기에서의 해탈이 수행의 기본적 맥락이 아닌가 생각한다.
32) Sn.의 Dvayatānupassanāsutta를 참조하라. 아울러 Jan T. Ergardt(1977 : 13)은 
    ‘Aññaṃ vyākaroti는 아라한과(arahantship)를 드러내거나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3.4. 한역 아함 가운데에서는 중아함경 제47경인 「獵師經」에 사무량심을 사선과의 관」에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경전은 사선, 사무량심, 사무색정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33) 즉 마왕과 마왕의 무리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로 이들 수행법이 언급獵師經있다. 사무색정의 부분을 제외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33) 이러한 수행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비단 이 경만이 아니다. 이에 대
    해서는 藤田宏達(1972 : note64)가 자세히 전거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
    르면, “유부계열의 아함에서는 사선→사무량→사무색정이라는 계열을 
    설하고, 사무량을 수행항목 속에 넣고 있다.『중아함경』권47, 권48(대
    정장 1권, 720상, 730중),『잡아함경』814경, 815경, 964경, 1042경, 
    1142경(대정장 2권, 209상중하, 247중, 273상, 302상) 등”에 동일한 
    수행구조가 설해지고 있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이와 같이 의지할 바를 배워야 한다. 마왕과 마왕의 무리들로 하여금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 무엇이 마왕과 마왕의 권속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가? 비구가 욕망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못한 법을 떠나,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마왕과 마왕의 무리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 말한다. 또, 무엇이 마왕과 마왕의 무리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가? 비구가 마음에 자애를 구족하여, 한쪽 방향을 가득 채움을 성취하여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방향을 4유(維-좌우전후-)로, 위로 아래로, 일체에 널리 두루한다. 마음에 자애를 갖추면, 번뇌・원한・성냄・다툼이 없어지고, 매우 넓고 크고, 한량없이 잘 수행하여 일체 세계를 가득 채워 성취하여 머문다. 이와 같이 연민・기쁨과 평정을 구족하면, 번뇌・원한・성냄・다툼이 없어지고, 매우 넓고 크고, 한량없이 잘 수행하여 일체 세계를 가득 채워 성취하고 머문다. 이것을 일러 마왕과 마왕의 무리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한다.
比丘! 當學如是所依. 住止令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何者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謂比丘離欲, 離惡不善之法. 至得第四禪成就遊. 是謂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復次, 何者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謂比丘心與慈俱, 遍滿一方成就遊. 如是二三四方, 四維上下, 普周一切. 心與慈俱, 無結・無怨・無恚・無諍, 極廣甚大, 無量善修, 遍滿一切世間成就遊. 如是悲・喜心與捨俱, 無結・無怨・無恚・無諍, 極廣甚大, 無量善修, 遍滿一切世間成就遊. 是謂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T1, 720a07~18)

여기에서 사무량심을 구족하게 되면, 번뇌・원한・성냄・다툼이 없어진다는 내용이 주목을 끈다. 여기서 번뇌로 번역한 단어는 結인데, 結은 보통 五下分結이나 五上分結과 같이 번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한역어이다. 원한, 성냄 등도 역시 번뇌의 한 종류인데 따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자애수행과 연민수행의 대표적인 특징이 증오나 원한 등과 같은 번뇌의 대치로서의 기능이 탁월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하튼 이 경전에서 사무량심이 - 사선과 사무색정도 마찬가지이지만 - 해탈이란 구조속에서 서술되지 않지만, 대표적인 수행법으로서 언급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4. 해탈도로서의 사무량심

이상 1과 2에서 살펴본 것은 운문경전과 산문경전 속에 기술되어 있는 사무량심의 내용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해탈도로서의 사무량심에 대해 고찰해 보자. 우선 사무량심이 해탈도로서의 위상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바로 번뇌를 제거하여 해탈로 이끄는 것의 가능여부일 것이다. 본고는 사무량심을 선정 수행법이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선정 수행법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사선의 내용을 검토한 뒤에, 사무량심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사무량심이 해탈도로서 이해되기에 필요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가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우선 사선의 해탈도적인 특징을 먼저 살펴보도록 한다. 

4.1. 사선은 고따마 태자가 깨달음을 성취하여 붇다가 된 수행법으로 간주된다.35) 따라서 사선은 해탈도로서의 특징을 명확히 보여주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36) 본 절에서는 사선의 대략적인 내용을 고찰하여, 해탈도로서의 특징으로 무엇이 언급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사선의 내용을 살펴보자. 
35) MN I, Mahāsaccaksutta(p.246)에 붇다와 악기베사나 사이의 대화에서,
    붇다가 기존의 수행법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어렸을 때 
    경험했던 초선의 경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관
    련해서는 Bronkhorst(1993 : 24)와 히라까와 아끼라(이호근 역, 1994 : 
    44-46), 水野弘元(1997 : 51) 등을 참조하라. 아울러 붇다의 반열반을 
    기술하는 내용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붇다는 이른바 9차
    제정의 선정의 단계에서 색계 4선, 즉 사선의 4번째 선정 단계에서
    반열반을 이룬다.(DN. II, p.156 ;『장아함경』T1, p.26c7) 
36) Dhp.386G에서도 선정자(jhāyin)는 “[번뇌의] 티끌을 떠난 자(virajaṃ)이고 
    해야 할 바를 행한 자(katakiccaṃ)이며, 번뇌가 없는 자(anāsavaṃ)”로 기술
    되어 있다. 

제 1정려 : 욕망의 대상과 모든 선한지 못한 현상들로부터 떠난 뒤에,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있는, 멀리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행복을 갖춘 제 1정려에 머문다.
제 2정려 : 모든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고요해짐으로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집중상태에 도달하여,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없는 삼매에서 생기는 기쁨과 행복을 갖춘 제 2정려에 머문다.
제 3정려 : 기쁨과 이탐virāgā으로부터 고요해져 머문다. 그리고 바른 알아차림과 바른 지혜를 갖추고, 몸으로 행복을 느낀다. 이것을 성자들은 평정과 바른 알아차림을 갖춘 사람은 행복하게 머문다고 말한다. 제 3정려를 갖추고 머문다.
제 4정려 : 즐거움과 고통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이전의 기쁨과 근심의 소멸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평정과 바른 알아차림에 의한 청정인 제 4정려를 갖추고 머문다.37)
37) SN. II, pp.210-211.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이 외에도 MN. I, 
    pp.21-22 ; SN. IV, pp.263-264 등에도 나온다. 빨리어 원문은 생략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초선의 전제조건이 되는 ‘욕망의 대상과 모든 선하지 못한 현상들로부터의 떠남’이다. 이것은 물론 선정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번뇌의 극복이나 초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완전한 번뇌의 소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번뇌의 소멸은 제 4선에서 성취된다. 위의 요약에서 알 수 있듯이, 제 3선까지는 갈애(rāga)와 같은 욕망의 극복이 계속된다. 물론 선정상태에서의 욕망은 매우 미세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럼 욕망의 대상과 모든 선하지 못한 현상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들은 전통적으로 오개로 요약된다.38) 즉 감각적 욕망(kāma), 성냄(vyāpāda), 태만과 무기력(thīna-middha), 근심과 동요(uddhacca-kukkucca) 그리고 의심(vicikicchā)의 제거를 통해 초선에 들어가게 된다.39) 
38) DN. I, p.73에는 오개(pañca nīvaraṇa)가 제거될 때, 기쁨(pāmujjaṃ)이
    생겨나고, 몸이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갖춘 자는(sukhino) 마음을 취한
    다(cittaṃ samādhiyati)고 하면서, 그 뒤에 초선의 이야기로 이어진다.이 
    때 마음(citta)는 선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MN. I, pp.308-
    309에는 삼독(rāga, dosa, moha)에 사로잡히지 않아 각각에서 생겨나는 
    고통과 근심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기술 다음에 초선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 Martin Stuart-Fox(1989 : 81), 田中教照(1993 : 249)를 참조하라. 초선
    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 즉 오개를 제거하는 방법
    에 대해서는 Akira Fujimoto(2006)의 ‘How to Enter the First Jhāna’(JIBS, 
    Vol.54, No.3)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SN. V, Āvaraṇanīvaraṇasutta에는 
    오개가 마음을 오염시키고, 지혜를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오개를 없애는 방법으로 칠각지(satta bojjhaṅgā)를 말한다.
39) MN. I, pp.294-295 참조.

4.2. 사무량심이 사선수행과 마찬가지로 해탈도적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번뇌소멸의 측면이 주된 특징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앞서 2.와 3.의 운문문헌과 산문문헌의 내용을 통해 살펴본 바를 요약하여 해탈도적 성격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A(운문문헌의 구조)
① 장애, 원한, 적의의 소멸 → 자애수행 → 사띠의 확립 → 청정한 경지의 획득(Sn.148G-151G)
② 자애 수행 → 청정한 경지의 획득 → 불상해 및 악한 마음의 극복(Th.647-649G)
③ 삼보에 대한 굳건한 신뢰 → 자애에 머묾 → 적정한 경지, 모든 행위가 고요해진 경지, 행복한 경    지의 획득

B(산문문헌의 구조)
①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 → 삼보에 대한 확고한 신뢰 획득 → 사무량 수행 → 해탈과 해탈지 획득    (MN.의 Vatthūpamasutta)
② 사선・사무량심・사무색선의 수행 → 마왕과 마왕의 무리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
③ 사무량의 수행 → 사선 수행으로 이어짐(AN. IV권의 Saṇkhittadesitasutta)
④ 사무량의 수행 → 지금 여기에서 해탈하거나 집착이 남아 있을 경우 불환자가 됨(SN. V, Bojjhaṅ    ga-Saṃyuttam)

위의 정리에서 번뇌(정서적 번뇌)의 소멸을 통해 사무량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보이는 것은 각각의 ①에 해당하며, 이 경우에는 그 결과로서 ‘청정한 경지’ 및 ‘해탈과 해탈지’의 획득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A의 ③의 경우는 자애수행을 통해 해탈의 경지를 획득함을 보여주고, B의 ④의 경우는 사무량의 수행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해탈하던가, 만약 집착이 남아있다면 불환자가 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 용례는 사무량심이 단순한 생천사상을 배경으로 설정된 수행법이 아닌, 철저하게 ‘해탈’을 배경으로 하는 수행법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 경전에서는 사무량에 배대되어 어떠한 번뇌가 소멸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애수행의 경우 분노와 증오, 적의 등이 사라진다거나(Sn.148G∽151G) 성냄(vyāpāda)이 끊어진다는 기술이 보일 뿐이다.(AN. I, p.4 ; p.38, 201 등) 그렇지만 B의 ②와 ③에서 보듯이, 사무량이 사선정과 같은 ‘해탈도’의 수행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오개의 지멸이 선행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DN.III, Udumbarikasīhanādasutta의 내용이다.40)
40) 각주 22) 와 金亨俊(1999 : 509) 참조. 한편 안옥선(2002 : 253)은 자비의 
    실천은 탐욕, 성냄/미워함,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과 직접적 비례관
    계에 있다고 한다. 본문에서 고찰했듯이, 사무량이 해탈도로서의 위상을 
    갖는다면 이것은 당연히 삼독심의 제거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Ⅲ. 맺음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본 논문은 사무량을 해탈도로 바라본 선학들의 시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본 논문은 이들의 시각을 검증하는 성격이 강하다. 검증의 방식은 운문 경전과 산문경전 속에서 사무량을 해탈도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을 발췌하여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사무량은 본래 해탈도였다는 시각은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자가 얻은 결과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사무량은 운문경전과 산문경전 모두에서 ‘해탈도’의 성격이 확인된다.
둘째, 운문경전-Sn., Dhp., Th.- 의 경우 생천(生天)을 목적으로 하는 사무량이나 사범주는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오로지 ‘해탈도’로서만 언급되고 있다.
셋째, 운문경전에서는 자애 수행만이 주로 언급되지만, 자비희사가 모두 언급되는 경우에도 이들은 각각 독립된 수행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넷째, 자비희사가 사무량이라고 하는 하나의 수행법으로 체계화된 것은 산문경전이 성립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다섯째, 사무량은 사선과 마찬가지로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로 이끄는 수행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사무량 혹은 사범주가 갖는 재가자를 위한 생천도로서의 의미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예는 경전에서 무수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예가 많다고 해서 생천도가 사무량의 본래적 의미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생천도로서의 사무량은 산문경전 뿐만 아니라 운문경전에서도 발견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운문경전에서는 생천도로서의 사무량 혹은 사범주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무량 수행의 본래 목적은 사후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해탈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재가자가 사후의 복락을 위해 수행하는 생천도로서의 사무량/사범주는 분명 후대의 변형된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