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初期佛敎의 사상적 구조와 실천수행 -『테라가타』를 중심으로

실론섬 2017. 1. 1. 12:41

동아시아불교문화」제22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5

初期佛敎의 사상적 구조와 실천수행

-『테라가타』를 중심으로

*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자유과제 학술연구비(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김 용 환(부산대)

 

[국문초록]

본 논문은『테라가타』를 중심으로 초기불교 수행자 일반이 가지고 있

던 불타의 敎說에 대한 인식과 태도 그리고 수행․실천을 조명해 본 것

이다. 초기불교에 있어 智慧는 마음의 煩惱를 제거하여 解脫에 이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요 방법이다. 지혜는 사물과 인생의 實相을

있는 그대로 觀照하는 마음의 작용인데, 敎理上으로는 四聖諦와 無常ㆍ

苦ㆍ無我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지혜에 관한 문헌적

연구는 森章司에 의해 이미 이루어졌는데, 小論에서는『테라가타』의 韻

文經典을 중심으로 특히 승가 내의 있어서의 초기불교 사상과 수행의

초기형태를 검토하려고 한다. 그리고 지혜의 意義를 초기불교의 전반적

인 사상체계 속에서 조명해 보기 위해 특히 번뇌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번뇌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러운 生存의 근본원

인인데 이를 극복하고 제거하는 방법이 八正道와 戒ㆍ定ㆍ慧 三學이다.

초기불교의 사상과 수행은 마음의 지혜와 번뇌의 제거를 중심 과제로

하여 전개된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Ⅰ. 서언

 

초기 불교에 있어 智慧와 煩惱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미 小論1)을 발

표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法句經』(Dhammapada),『숫타니파아타』?

(Suttanipāta),『테라가타』(Thera-gāthā),『테리가타』(Theri-gāthā)에

나타나는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위의 주제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런데

『法句經』과『숫타니파아타』는 佛陀에 의해 설해진 경전이고,『테라가

타』,『테리가타』는 초기 불교 교단에 출가하여 수행을 쌓은 長老와 長

老尼의 게송을 모아 정리한 詩句集이기 때문에 그 내용과 성격이 다르

다. 하지만 兩者를 종합하여 분석하므로 해서 불타의 가르침이 초기 불

교의 교단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실천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료가 너무 방대하여 연구가 미진한 부분이 없지 않

았다. 본 논문에서는 문헌 자료를『테라가타』에 한정하여, 경전의 사상

이 아닌 당시의 불교 수행자 일반이 가지고 있던 불타의 敎說에 대한

인식과 태도 그리고 수행·실천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수행자들의 생생

한 증언을 통해, 수행 현장에서의 초기 불교 사상의 실체와 그 전개를

가름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1) 김용환, 「초기불교에 있어서 智慧(paññā)와 번뇌」,「철학논총」제57집 3권, 새한
   철학회, 2009.

 

『테라가타』는 1360偈의 詩句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타 在世時의 제자

를 비롯한 264명의 長老(thera)가 적게는 하나의 시구로부터 많게는 71

개의 시구를 남긴 것이다. 그런데『테라가타』에 대한 先學의 문헌적 연

구2)에 따르면,『테라가타』의 편찬과 게송의 作者에 대해 의문점이 제기

되고 있고, Tha.429~434, 563~566, 1082~1090은 詩歌의 형식면에서,

Tha.920~948, 949~980은 그 내용면에서 후대의 作일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테라가타는 佛滅 後 5~60년경 까지 완성되

었을 것이라는 赤沼智善의 假說도 있으나 그 성립에 대해 단정하기는

어렵다.

2) 前田惠學,「原始佛敎聖典の成立史硏究」, p.735.

 

2.『테라가타』를 통해 본 초기 불교의 사상적 구조

 

1) 煩惱와 마음의 淨化

초기 불교의 사상이 ‘무엇이 있는가’라는 존재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

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하는 현상적이며 當爲的 실천의 문제를 추구하고 있음은 周知하는

바이다. 그러한 사상적 영향 하에 있는 초기 불교 수행자들의 근본 관심

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마음(心, citta)’이며, ‘마음의 淨化․淸淨

(citta-pariyodapanā)’3)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마음은 형이상학적 원

리로서의 實體的인 心이나,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唯心論的 心이

아니다. 생각에 따라 흔들리며, 번뇌에 물들어 욕망(kāma)에 따라 헤매

는 지키기 어렵고 억제하기 어려운4) 소위 平常心5)으로서의 우리 마음

(citta)이다.

3) Dhp.183.
4) Dhp.33~43.
5)「臨濟錄」, ‘所以古人云平常心是道’.

 

그러한 마음을 淨化하여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번뇌에 의

해 오염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의 오염을 정화하지 않

으면 안 되는 보다 심각하고 근원적인 이유는 그 마음의 오염이 끝없는

生死輪廻와 모든 인간 實存의 유한·불안·고통의 원인이라는 통찰에 근

거한 것이다.

 

“나의 모든 욕망(kāma)은 제거 되었다. 생존(bhavā)은 모두 부수어졌

 

다. 生(死) 윤회는 모두 끝났다. 이제는 생존을 반복하는 일이 없다.”

(Tha. 254)

 

“모든 번뇌(āsava)는 소멸하였다. 이제는 생존을 반복하는 일이 없다.”

(Tha. 546)6)

6) Tha.296 참조.

 

“나의 迷妄(mohā)은 모두 제거되었다. 생존에 대한 渴愛(bhavataṇhā)는

부수어졌다. 生(死) 윤회는 모두 끝났다. 이제는 생존을 반복하는 일이

없다.” (Tha. 344)

 

“나는 번뇌(kilesā)를 태워버렸다. 생존은 모두 근절되었다. 生(死) 윤회

는 모두 끝났다. 이제는 생존을 반복하는 일이 없다.”(Tha. 67)

 

마음을 오염시키는 요소를 욕망(kāma), 번뇌(āsava, kilesā), 迷妄

(mohā), 渴愛(taṇha)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을 제거, 소멸, 태움

에 의해 ‘생존을 반복하는 일(punabhava)’ 즉 ‘생사윤회(jatimaraṇa-

saṃsara)’를 벗어나게 됨을 공통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윤회를 벗어난

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지금 받은 이 몸이 ‘최후의 몸’ 즉, ‘最後身(antima-deha)’7)이 되는 것이

다. 장로 목련(Moggallāna)은 스승인 불타를 “자신을 수양하여 ‘최후의

몸을 가진 사람(sarīrantimadhārinā)’”8)이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 불교에

서는 “善惡의 心”, 染淨의 心, 혹은 특히 번뇌심 등은 정신 현상의 여러

가지 相으로서 반성되고 고찰되고 있지만, 심(心)의 본성을 직접 문제로

하고 있지는 않다.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自性淸淨心’, ‘心性本淨’ ‘客

塵煩惱’라 하여 마음은 본래 맑고 청정한데, 외부로부터 번뇌가 들어와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나타난다.10) 그러므로 번뇌를

제거하기만 하면 청정한 마음이 회복된다고 보는데, 이러한 사상은 마

음과 번뇌를 서로 독립된 별개의 존재로 보는데서 비롯된 것이다.11)

7) Tha.1166.
8) Tha.1164.
9) 勝又俊敎,「佛敎における心識說の硏究」, p.464.
10) AN.1-5,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다(pabhassaram). 이 마음은 또한 客塵
    煩惱에 의해 더렵혀져 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다. 이것은 또한 客
    塵煩惱로부터 해탈한 것이다.”
11) 초기불교의 심성론(心性論)에 대해서는 앞의 책, p.464~473 참조.

 

이러한 경전적 가르침과는 별개로 초기 불교 수행자들에게 있어 번뇌

는 추상적, 이념적, 객관적인 것이 아닌 일상의 ‘마음의 修養(bhāvitaṃ

cittaṃ)’ 가운데서 맞이하게 되는 마음의 구체적, 실존적, 주관적 현실로

마음을 속박하는 ‘心의 작용’ 인 것이다. 테라뿌타長老는 마음을 다루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불타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마음(cittaṃ)은 돌아다니는 것으로 원숭이를 닮았다. 그러므로 욕심

(rāga, 貪)을 떠나지 않으면 잘 다스리기 어렵다.” (Tha. 1111)

 

마음을 탐욕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보며, 탐욕을 끊지 않고서는 제

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마음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것이 불타

이래 초기 불교 수행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실천의 덕목임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감각기관의 대상을 통해 실현되는 욕망(kāma)

은 감미롭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12) 그러므로

욕망하는 마음은 쉬지 않고 감각의 대상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속박(bandha)이다.

12) Tha.1112.

 

미가쟈라長老는 불타에 대해 “(지혜의) 눈을 가지신 태양의 후예인

佛陀는 모든 결박(saṃyojana)을 벗어나고, 모든 윤회를 멸하는 (가르침

을) 잘 설하였다.”13)고 말한다. 따라서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한 수

행자들에게 공통된 출가의 목적은 마음을 속박하는 번뇌의 “모든 결박

을 멸하는 것(sabbasaṃyojanakkhaya)”14)이라 할 수 있다.

13) Tha.417.
14) Tha.136, 176, 380, 605, 657, 699, 793, 996, 1143, 1186.

 

“(수행자는) 외진 곳에서 기거하는 것을 익혀라. (번뇌의) 결박 ˙ ˙ (saṃyojana)

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자.” (Tha.142)

 

“탐욕(rāga)과 증오(dosa)와 무지(avijjā)를 버린 사람들은, 끈을 잘라 속 ˙

되지 않으므로(abandhana) 그들을 즐기지 않는다.” (Tha. 282)

 

“모든 결박(saṃyojana)을 벗어나 숲(번뇌)으로부터 숲(번뇌)이 없는 경

지에 이르러, 욕망(kāma)에서 떠남을 즐긴다.” (Tha.691)

 

“愛欲(kāmacchando)과 害心(byāpādo), 昏沈과 睡眠(thīnamiddhañ), 掉

擧(uddhaccaṃ)와 의혹(vicikicchā), 이 다섯 가지가 比丘에게 있어 마음

의 번뇌(kilesā)이다." (Tha.1010)

 

이와 같이 마음을 속박하여 윤회의 생존을 반복하게 하는 번뇌를 神

話적인 표현을 빌려 ‘악마의 속박(mārabandhana)’15)이라고 부르기도 한

다. 그러면 이와 같은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

까? 그것은 이미 前述한 바의 ‘마음의 修養’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마

음을 수양해야 하는지, 어떻게 수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요청되는 것이 ‘불타의 가르침(buddhassa sāsanan)’이다.『法句經』에는

“마음을 수양하지 않으면(abhāvitaṃ) 탐욕(rāga)이 마음에 침입한다.”16)고 

설해져 있으며, 라도장로17)가 이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5) Tha.298, 680.
16) Dhp.13.
17) Tha.134.

 

밧디야장로는 “戒蘊에 안주하여 念(sati)과 지혜(pañña)를 닦아, 나는

모든 속박의 소멸을 얻었다.”18)고 자신의 수행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번뇌의 속박을 멸하는 방법으로써의 戒蘊과 念, 지혜는 불타의 가르침

의 要體인 戒·定·慧 三學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제자들에게 있어서

는 실천을 통해 이룩해야 하는 목표인 것이다.

18) Tha.865.

 

2) 佛陀 가르침의 성격

초기 불교의 수행자들에게 있어 불타의 말씀(vacana)이나 가르침

(sāsana)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획득하기 위한 인식의 수단도 아니며 절

대적 믿음이 요구되는 초월적 진리가 아니다. 불타의 시봉을 25년여 동

안 한 제자 아난장로가 죽기 전에 읊었다고 전하는19) 유명한 게송이 남

아 있다.

19) 中村元,「佛弟子の告白」, p.283.

 

“나는 스승(불타)에게 봉사하였습니다. 불타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kataṃ buddhassa sāsanaṃ). 무거운 짐을 내렸습니다. 생존(bhava)에

이끄는 것을 제거하였습니다.” (Tha.1050)

 

이 게송은 다른 長老20)들에 의해서는 똑같이 차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로 아난 개인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 교단의 수행자들이 널리 공

감할 수 있는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

의 핵심은 불타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생존에 이끄는 것(bhavanetti)’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초기 불교 수행의 중심이 불타

의 가르침을 실천․수행하여21) 마음을 淨化하고 이를 통해 윤회의 생

존으로 이끄는 번뇌의 속박을 제거하는 데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후대

佛滅 후에 정리되어 전승을 통해 확립된 經․律․論이 아직 체계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敎學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거나 조직하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0) Tha.604, 656, 687, 792, 891, 918, 1016, 1088.
21) “釋尊의 敎說은 어떠한 것도 행위에 관한 것이고, 따라서 수행에 관계하지 않은
    교설은 없다고 하여도 좋다.” 高崎直道,「佛敎․インド思想辭典」, p.199~200.

 

특히 앞에 인용한 게송 가운데 “불타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katam

buddhassa sāsanaṃ).”라는 구절은 많은 장로들의 게송에도22)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많은 例文들은 불타의 가르침

의 성격과 내용들이 얼마나 실천․수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

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훗날 중국의 禪宗이 “不立文字 直指人心”이

라 하여 經論의 敎學的 연구를 중시하지 않고 祖師의 가르침과 話頭에

의지하여 오로지 수행․精進에 몰두하는 태도의 原型이 아닌가 한다.

22) Tha.332, 270, 274, 302, 319, 410, 465, 224, 314, 515, 349, 562, 639, 886, 903,
    1260.

 

1. 불타의 말씀을 실천하여라(karotha buddhavacana). (Tha.403, Dhp.315)

 

2. 神들을 능가한 자(불타)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

   (vacanakarenātidevassa) ……. (Tha.489)

 

3. 거기서 나는 홀로 숲속에 살며, 노력하여, 승리자(불타)가 나에게 가

   르치신 그대로 스승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akāsiṃ satthu vacanaṃ).

   (Tha.626)

 

4. 이 교설과 계율(dhammavinaye)에 게으르지 않는 사람은(appamatto)

   生(死) 윤회를 버리고 苦의 끝에 이를 것이다. (Tha.257)

 

5. 나는 放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의 가르침에 있어서(tava sāsane)

   실천(sikkhā)은 잘 배웠습니다.(Tha.333)

 

6. 스승의 가르침을 행하는(satthu-sāsanakārinā) 불제자가 체득하는 것

   은 그가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여(shikkhato) 도달한 것이다. (Tha.

   1247)

 

7. 잘 설해진 것을 실천하여라(subhāsitassa sikkhetha). (Tha.239)

8. 마음에 게으름이 없이 智慧道(monapathesu)를 실천하는(sikkhato)

   者(muni), 항상 寂靜에 들어 具念하는(satimato) 자에게는 근심이 없

   다. (Tha.68)

 

9. 그는 목적을 이루고, 법에 안주하여 불타의 말씀과 가르침

   (vākyānusāsaniṃ)을 실천하여(katvā) 그 사람은 행복을 얻었다.

   (Tha.746)

 

여기에 실천 수행으로 번역된 原語 katam, karotha, katvā, akāsiṃ과

karoṇa, kārina 등은 모두 동사 語根 kṛ에서 변형된 동사 활용이거나 명

사이며 sikkhā, sikkhato, sikkhetha는 어근 śikṣ에서 변형된 명사와 동

사활용이다. 동사 sikkhati는 ‘배우다’, ‘훈련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데23), 후대에 불교 수행의 기본적 덕목을 Tisso sikkhā(三學)라는 術語

로 부르는 것은 위와 같은 용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sikkhati를 단순히 ‘배운다’는 뜻의 ‘學’으로만 이해하면 原意를 그르치기

쉽다. 붓다고사는「淸淨道論」24)에서 sikkhati를 ‘힘쓰다’, ‘노력하다’는

뜻의 ghaṭati, vāyamati로 주석하고 있다. 三學의 내용이 戒․定․慧이

므로 이를 힘쓰며 노력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25)

23) Rhys Davids and stede,「Pali-English Dic.」, p.708.
24) Vism. 274.
25) Tha.837에는 세라 長老에 대한 불타의 가르침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세
    라여! ‘청정한 수행(brahmacariyam)’은 잘 설해져 있다. 그것은 즉시에 (과보를
    가져옴을) 自見할 수 있다. 以下”

 

반기사장로는 釋尊 뿐만 아니라 모든 如來의 가르침도 이와 같음을

말하고 있다.

 

“실로 如來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sāsanakārakā)’ 많은 남녀의

이익을 위해 출현하신다.” (Tha.1256)

 

코시오장로는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는 수행자의 內面化, 主體

化의 과정을 “說해진 바의 의미를 알고, 의미를 안 그대로 실천하는

(karoti) 사람”26)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이러한 실천에 의해 “그

는 ‘內心에 의미를 체득 한 사람(atthantaro)’27)이 되며, 현명하고 諸法

 

(dhammesu)에 관해 알며,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다.”28)라고 한다. 이는

수행자에게 설해진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는 단계와 이를 실천을 통해

자기의 것으로 內面化시켜 체득하는 단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그 결과

현명하며(paṇḍito) 諸法에 관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실천 수

행을 수반하지 않은 이론적 인식의 한계가 명확히 자각되고 있으며, 실

천을 통해 諸法의 實相이 비로소 통찰되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26) Tha.374.
27) 中村元의 번역 참조. 앞의 책, p.93.
28) Tha.374.

 

3) 諸法實相과 지혜에 의한 自內證

이러한 諸法實相에 대한 內的 체험이 곧 自內證이라 할 수 있는데, 많

은 長老들이 이와 유사한 체험을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으며, 또 그 경지

에 이르기를 發願하고 있다.

 

1. 전해 듣지 않은 法(Dhamma)을 나는 스스로 證得하였다(anuppatto

   sacchikato sayaṃ). 지혜는 청정하고(visuddhañāṇo), 의혹은 떠났다

   고 당신 앞에서 明言합니다. (Tha.331)

 

2. 잘 설해진 불타의 말씀인 ‘法과 이익을 갖춘(dhammatthasahitam)’ 語

   句를 듣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道理(tathaṃ yathāvakaṃ atthaṃ

   yoniso)’를 관찰하였습니다(paccavekkhisaṃ). (Tha.347)

 

3. 아! 諸佛시여. 아! 諸法이시여. 아! 우리 스승의 具足함이여. 거기에

   서 (佛)弟子는 이러한 법 (dhamma)을 깨닫게 될 것이다(sacchikāhiti).

   (Tha.201)

 

4.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諸佛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信心

   (saddha)과 戒(sīla)와 맑은 마음(pasāda)과 法見(dhamma dassana)

   에 정진해야 한다. (Tha.204)

 

5. 沙弥인 그 수마노는 寂靜(santiṃ)에 도달하여 부동의 경지를 깨닫고

   (sacchikatvā)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도록’ 원하고 있다. (Tha.434)

 

6. 生存(bhava)으로 인도하는 (渴愛를) 멸하여 ‘法을 여실히 볼 때에

   (diṭṭhe dhamme yathātathe)’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Tha.708)

    

이상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諸法實相에 대한 내적 체험은 理性에 의한

합리적, 객관적 思惟의 과정이 아니라 사유를 매개하지 않은 直觀的 통찰,

깨달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1, 3, 5의 인용문에서 法(Dhamma)과 부동

의 경지에 대한 ‘깨달음’의 原語인 sacchikato, sacchikāhiti, sacchikatvā

는 모두 스스로의 눈으로 본다, 깨닫다, 스스로 체험하다를 의미하는

‘sacchikṛ’의 활용 혹은 연속체(gerund)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

한 도리를 관찰했다의 paccavekkhisaṃ29)과 法見(dhamma- dassana)의

dassana, ‘법을 여실히 볼 때에(diṭṭhe dhamme yathātathe)의 diṭṭhe는

모두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일한 語源 dṛś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에

본다는 의미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존

재의 진실(諸法實相)을 통찰하는 방법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본다는

것은 肉眼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心眼으로 ‘존재의 진실(Dhamma)’을 

관하는 것이므로 이를 法眼(dhammesu cakkhumā)30) 혹은 法見者(dhamma 

dasa)31)라 부르기도 한다.

29) paccavekkhisaṃ은 paccavekkhati의 aor.인데 이는 pati-avekkhati의 변형으로,
    avekkhati에는 to look at, to consider, to see의 뜻이 있다.
30) 라후라長老는 자신에게 두 가지 행운이 있음을 말하는데, 그것은 불타의 아들
    이라는 것과 法眼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 (Tha.295)
31) Tha.1221.

 

그런데 法(Dhamma)을 깨닫든, 또는 道理(attha)를 관찰하든지 간에

그것은 결국 존재의 진실에 관한 인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인

식이 主觀의 思惟에 의한 개념적 판단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다는 점

이다.『테리가타』에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게송이 소

마長老尼에 의해 설해져 있다.

 

“마음이 깊은 禪定에 들어(cittamhi susamāhite) 智慧(ñāna)가 지금 생겨

날 때, 법을 바르게 觀하는데(sammā dhammam vipassato) 여자라는 것

이 어찌하여 장애가 되겠는가?” (Thi.61)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法을 바르게 觀하는 것이 지혜32)라는

것과 그 지혜는 思惟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 가운데 일체의 사유

작용을 멈추는 깊은 禪定(susamāhite)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法

句經』가운데 “실로 마음이 통일되면(yogā) 지혜(bhūri)가 생긴다. 마음

이 통일되지 않으면(ayogā) 지혜가 소멸한다.”33)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의 생각은 소마長老尼의 개인적인 私見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2) 지혜와 法觀에 대해서는 김용환, 「초기불교에 있어서 智慧(paññā)와 번뇌」,
    p.417~421 참조.
33) Dhp.282.

 

따라서 법을 관한다는 것은 主觀이 恣意的으로 思惟에 의해 존재를

규정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禪定을 통해 일체의 先入見이나,

편견, 先驗的 사유가 배제된 가운데 존재가 如實하게 마음에 통찰되고

보여 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다름 아닌 지혜이다.

라타파라長老에 따르면, 지혜(paññā)에 의해서만 이 세상에서 완성

(vosāna)에 도달하며 더 이상의 생존을 받아 윤회하지 않으나, 지혜가

적어(appapaññā) 어리석은(mohā) 사람은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

함을 말하고 있다.34)

34) Tha.785.

 

長老들 가운데는 출가하고 나서 念(sati)과 지혜(paññā)가 증대하였다

거나(vuḍḍhā)35) 가르침을 들음으로 지혜가 증대하였다36)고 고백하는

경우도 있고, 불타가 법을 설할 때(dhamme desiyamānamhi) 지혜

(ñaṇa)가 생겨났다(udapajjatha)37)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소위 가

르침과 법을 들음으로 해서 지혜가 생긴다는 聞慧(sutamayā-paññā)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35) Tha.46.
36) Tha.141.
37) Tha.1044.

 

전술한 게송에서 소마長老尼는 “마음이 깊은 禪定에 들어 지혜(ñāna)

가 지금 생겨날 때, 法을 바르게 觀하는 데(sammā dhammam vipassato)

··· ”라 하여 지혜와 法의 正觀이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

다. 즉 지혜에 의해서만이 법을 바르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하

춘다長老는 “듣는 것은 지혜를 증대한다. 지혜에 의해 도리를 안다

(paññāya atthaṃ jānati)"38)고 말하는데 여기에 ‘도리를 안다는 것’이 앞

의 지혜에 의해 법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과 다른 내용으로 생각되지 않

는다. 다시 말하면 지혜에 의해 도리를 아는 것이 다름 아닌 法을 바르

게 관찰하는 것이다.

38) Tha.141.

 

4) 佛陀가 깨달은 法과 敎法

그렇다면 존재의 진실[諸法實相]로서의 法과 도리는 구체적으로 무엇

을 말하는 것일까? 아디무타장로는 “불타에 의해 설해진 것처럼 그와˙

같이 그것을 아는 사람(yo taṃ thatā pajānāti yathā buddhena desitaṃ)

은 어떠한 생존도 받지 않는다.”39)고 말하고 있다. 불타에 의해 설해진

것은 가르침으로써의 法[敎法]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듣고 앎으로

해서(pajānati) 어떠한 생존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앎이 단순히 지

식․분별의 차원이 아닌 지혜(paññā)의 차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이 말은 “지혜에 의해 불타의 가르침을 알고

觀하는 사람은 어떠한 생존도 받지 않는다.”고 바꾸어 말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타의 가르침[敎法] 가운데 존재의 진실로서

의 법[諸法實相]과 도리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들음으로 해서

지혜가 생기기도 하고 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지혜에 의해 볼

때에만 교법이 전하려는 眞意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부터 우리는 초기 불교 수행자들의 깨달음의 原型이 불타에게 있으며

지혜에 의해 불타가 깨달은 그 법을40) 재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9) Tha.714.
40) “내가 깨친 이 法(Dhamma)은 깊고 깊으며(gambhīro), 보기 어려우며(duddaso),
    깨닫기 어렵다(duranubodho). 寂靜(santo)하며, 思考의 영역을 넘어(avitakkāvacaro)
    미묘하여(nipuṇo) 단지 賢者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SN.Vol.1.,p.136.)

 

불타의 대표적인 두 제자인 사리풋타장로와 마하카사파장로는 불타

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있다.

 

“지혜의 완성(paññāparamita)에 달하여 大智慧(mahābuddhi)가 있는 위

대한 聖者(mahāmuni)는 바보 같지만 바보가 아니다.”(Tha.1015)

 

“그 위대한 聖者, 위대한 智者(mahāñāni)는 (四)念處(satipaṭṭhāna)를 목

으로, 信心(saddhā)을 손으로, 지혜를 머리로 하여 언제나 열반에 들어

생활한다.” (Tha.1090) 41)

41) 우다인장로도 이와 유사한 게송을 남기고 있다. (Tha.695.)

 

이러한 지혜에 의해 알고 통찰되는 대상으로서의 법과 도리에 대해

많은 長老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생각을 표명하고 있다.

 

1. “선한 사람으로 賢者이며 도리를 보는 사람들(atthadassibhi)과만 교제

   하여라.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며 밝은 눈이 있는 현자들은 ‘깊고 깊으

   며(gambhīram), 보기 어렵고(duddasaṃ), 미묘하며(nipuṇam) 미세

   한(aṇuṃ) 큰 도리(atthaṃ)’를 증득한다.” (Tha.4)

 

2. “태양의 후예인 佛陀의 잘 설하신 말씀을 듣고, 나는 미묘한 (法)

   뚫었습니다. 마치 화살로 털끝을 맞히는 것처럼.” (Tha.26)

 

3. “매우 미세하고 미묘한 도리를 보고(susukhumanipuṇatthadassinā) 사

   려가 뛰어나며 겸손하여 부처님의 戒를 닦는 사람에게 열반은 결코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Tha.71, 210)

 

4. “……선한 사람이 좋은 불타의 가르침에 있어 나아가는 것은 쉽다.

   우 순수하고 희며(susukhasukhaṃ), 미묘하고(nipuṇaṃ), 보기 어려

   운(sududdasaṃ) 그 최상인 不死의 경(uttamam accutampadan)

   다가가세.” (Tha.212)

 

5.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正等覺, sammāsambuddha)을 얻은 (佛)弟子

   는 思惟할 수 없는(avitakkaṃ)(경지)를 증득하였다. 그는 성스러운

 

   침묵을 항상 행하고 있다.” (Tha.650, 999)

 

6. “諸佛들 자신의 경지는 참으로 깊고 깊으며(gambhīro) 뛰어나다. 우

   리들이 비록 화살로 머리카락을 맞히는 활량들의 모임이라고 해도 우

   리들은 알지 못한다(ye mayaṃ nābhijānāma).” (Tha.1085)

 

도리(atthaṃ), 不死의 경지,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 諸佛의 경지 등으

로 표현되고 있는 경지는 당시의 불교 수행자들이 공통적으로 證得하기

를 기원하는 수행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목표가 ‘깊

고 깊으며(gambhīram)’, ‘보기 어렵고(duddasam)’, 미묘하며(nipuṇam),

미세한(anuṃ), 그리고 매우 미세하고(susukkuma), 思惟할 수 없는

(avitakkam) 것으로 수식되고 있다.

 

궁극의 경지를 이와 같이 수식하게 된 原流는 경전에 전하는 다음과

같은 불타의 말씀과 불가분의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불타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成道]을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할지 설법을 주저하게 되는

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내가 깨친 이 法(Dhamma)은 깊고 깊으며(gambhīro), 보기 어려우며

(duddaso), 깨닫기 어렵다(duranubodho), 寂靜하며(sante) 思考의 영역

을 넘어(avitakkāvacaro), 미묘하여(nipuṇo) 단지 賢者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망을 좋아하고 욕망에 빠져 욕망을 즐거워하

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존재하는 것은 緣에 의한다(idappaccayatā)고 하

는 緣起(paticcasamuppāda)의 도리는 보기 어렵다. 만약 내가 法을 설한

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피로해져 나에게는 우려

가 있을 뿐일 것이다.”42)

42) SN.Vol.1., p.136; 김용환, 「梵天勸請について」, p.107, 註4 참조.

 

이상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불타가 설법을 주저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1. 자신이 깨달은 法의 난해함과 賢者만이 이를 알 수 있다는 점.

2.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자질의 문제.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불타는 자신의 교설을 사람들이 이해하

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 내용의 事實性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법의 난해함

에 대한 불타의 견해와 표현은 앞에서 본 것처럼 초기 불교 수행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대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아누루다長老와 반기사長老는 불타가 깨달은 법과 관련 있는 각각 다

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있다.

 

“내가 생각(saṃkappo)에 젖어 있을 때, 그것 보다 위의 것을 설하셨다.

戱論하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는 佛陀는 戱論하지 않는(nippapañcaṃ)(경

지)를 설하셨다.” (Tha.902)

 

“(세상을) 비추는 사람은 통달하여 모든 見地를 넘어선 것(sabbaṭṭhitīnam

atikkamam)을 보았다. 그는 최고의 것을 알고(ñatvā) 깨달아(sacchikatvā)

그것을 다섯 명(의 比丘)에게 설하였다.” (Tha.1244)

 

이 두 명의 佛弟子는 佛陀가 戱論하지 않는(nippapañcam)43) 경지와

모든 見地를 넘어선 것(sabbaṭṭhitinam atikkamam)을 제자에게 설한 것

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타의 이러한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

적인 설명이 없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표현은 불타가 깨

달은 思惟할 수 없는(avitakkam) 法의 난해함과 관계있으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다섯 명의 최초 제자를 비롯

한 많은 출가 수행자들에게 가르침을 설하였고, 그것이 불타가 깨달은

이러한 법을 반영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3) 사리풋타長老는 “희론(papañcam)을 버리고, 희론하지 않는 길(nippapañcapathe)
    을 좋아하는 자, 그는 무상의 涅槃과 安穩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Tha.990.

 

5) 불타의 敎法과 지혜

“智見(ñāṇadassana)을 얻기 위해 法의 거울(dhammādāsam)을 가지고 이

신체의 內外가 空虛함(tucchaṃ)을 관찰하였다.” (Tha.395)

 

여기에서 ‘법의 거울’은 智見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지견

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법의 거울’은 다름 아닌 불타의 敎法을 가

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교법을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거울이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이, 교법도 諸法實相을 如實하게 反映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佛

弟子들에게 있어 불타의 교법은 ‘지혜와 直觀(ñāṇadassana)’44)을 얻기

위한 수단이며 지혜에 의해 그 깊은 奧義가 통찰되어야할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44) 이 번역은 中村元의 것을 차용하였다. 中村元,「佛弟子の告白」, p.47.

 

그런데 전술한 ‘설법주저’의 경전에는 이 법이 緣起임을 명시하고 있

다. 초기 경전에 불타가 如實知見하여 깨달은 법이 연기임을 설하는 경전

이 매우 드문데45) 미가쟈라長老는 불타가 설한 八正道(ariyo aṭṭhaṇgiko

magga)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45) 森章司,「原始佛敎から阿毘達磨への佛敎敎理の硏究」, pp.107~117.

 

“그것은 業을 業이라고 알고, 과보를 과보로 알며, 緣에 의해 생겨난 諸

法(paṭiccuppannadhammāna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이고, 커다

란 安穩으로 이끌며, 寂靜하여 최후에는 吉祥하게 되는 것이다.” (Tha. 421)

 

여기에서 미가쟈라長老는 八正道의 수행을 통해 如實知見하게 되는

경지를 ‘緣에 의해 생겨난 諸法’이라 하는데 이는 緣生의 法(paṭicca-

samuppanna)으로 緣起法에 의해 생겨난 일체의 사물을 가리킨다. 따라

서 미가쟈라장로는 불타가 깨친 法의 내용을 연기로 하는 전술한 경전

의 계보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불타는 그가 깨달은 法을 단일한 한 가지 방식으로만 설한 것

이 아니라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對機說法을 하였다. 따라서 법을 깨

닫지 못한 佛弟子는 불타가 설한 敎法을 매개로 하여 불타가 깨달은 그

법을 볼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1. “2․4의 단계[四向四果]로 이끌고 일체의 번뇌(kilesa)를 청정하게 하

는 吉祥한 최상의 길을 ‘지혜에 의해 보아(paññāya passitvā)’ 念(sato)

하며 禪定에 든다. 그것보다 최상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Tha. 520)

 

2. “바람에 의해 일어난 먼지를 구름이 잠재우는 것처럼, 지혜에 의해 볼

때에(paññāya passati) 여러 가지 생각(saṃkappā)이 잦아든다.” (Tha. 675)

 

3.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無常하다고 지혜에 의해 볼(pannāya passati)

때, 사람은 苦에 대해 厭離한다. 이것이 淸淨에의 길이다.” (Tha. 676)

 

4.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苦(dukkhā)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사람은

苦에 대해 염리한다. 이것이 청정에의 길이다.” (Tha.677)

 

5. “모든 法(dhammā)은 我가 아니다(anattā)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사

람은 苦에 대해 염리한다. 이것이 청정에의 길이다.” (Tha.678)

 

6. “내가 위대한 仙人(佛陀)이 아신 매우 보기 어려운(sududdasāni) 四

(聖)締(cattāri saccāni)를 선정에 들어(samāhitatto), 具念하여(satimā)

지혜에 의해 證得하는 것(agacchaṃ paññāya)은 언제일까?” (Tha. 1098)

 

7. “내가 奢摩他에 의해(samathehi) 헤아릴 수 없는 물질, 소리, 향기,

맛, 촉감, 생각하는 대상[法]을 불타고 있는 것으로 지혜에 의해 보

는 것(paññāya dakkham)은 언제일까?” (Tha.1099)

 

8. “세상(loka)을 풀과 땔나무와 같이 지혜에 의해 볼 때(paññāya

passati), 그는 나의 것(mamattaṃ)이라는 집착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

 

에, 나에게 없다고 하여 근심하지 않는다.” (Tha.717)

 

이상의 인용문들은 지혜에 의해 보는 것(paññāya passatvā, passati,

dakkham)과 증득하는 것(agaccham)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마음의 변

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① 최상의 즐거움(ratiṃ paramataraṃ)

② 여러 가지 생각이 잦아든다.(sammanti saṃkappā)

③ 苦에 대한 厭離(nibbindatī dukkhe)와 (心)淸淨(visuddhiyā)

④ 我所執을 일으키지 않음(mamattaṃ so asaṃvindaṃ)

 

이 내용을 단순화시켜 요약 정리하면, 지혜에 의해 煩惱·妄想을 끊고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 오는 최상의 즐거움으로 인해 苦의 세계에 대

한 끝없는 渴愛(taṇha)로부터 벗어나게 되는(厭離) 마음의 상태를 가리

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혜에 의해 보거나 증득하게 되는 법에 대해서는, 일체의 번뇌를 청

정하게 하는 길상한 최상의 길(magguttamam), 諸行無常․苦, 諸法無我

와 四聖諦 그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인 六境을 불타는 것, 세상

을 풀과 땔나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불타의 교법

인 八正道, 四法印46), 四聖諦와 불타가 象頭山(Gayāsīsa)에서 迦葉 삼형

제와 천명의 제자에게 설한 ‘일체가 불타고 있다. 以下’47)고 하는 설법

과 出典未詳의 설법으로 되어있다.

46) 四法印이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는 없으나 아래의 게송들에는 無常․
    苦․空․無我 등이 다양한 형태로 散見된다. Tha.111, 121, 260, 594, 1091, 1117,
    1131, 1133, 1215, 1224.
47) 이것과 유사한 내용이 Tha.1101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풀과 땔나무는 세계가
    無常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한다. Tha.1131 참조.

 

그런데 위에 인용한 문장 가운데 2는『우다나-바르가』12․2에 相當

하고 3․4․5는『法句經』48)의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들이 이 게

송을 설한 안나콘단노長老의 自作이 아니라 經이나 佛說을 그대로 인용

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혜의 의하여 敎法

을 觀하는’ 行法은 불타의 가르침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거나 또는 최초

기 불교의 교리체계의 확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초기의 불교 교

리 체계는 아마도 佛陀在世時에 불타 자신에 의해 일찍이 확립된 부분

과 불멸후 제자들에 의해 확립된 부분이 있을 것이나 이것을 사상사적

으로 구분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48) Dhp.277, 278, 279.

어쨌든 불타가 初轉法輪時 5比丘에게 설한 가르침의 내용이 四諦八

正道로 公認되게 되고 그것이 敎團의 不文律이 된 이래로, 佛子로서의

入門을 표명하는 三寶歸依의 본질로서 사성제를 설하게 된 것은 필연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불타와 법과 僧伽에 귀의하는 사람은 바른 지혜에 의해 四聖諦를 본다

(cattāri ariyasaccāni samappaññāya passati).” (Dhp,190)

 

따라서 많은 장로들은 수행의 목표로서 四聖諦를 체득하기를 발원하

고 있으며49), 또 일부 장로는 체득을 公言하고 있다.50)

49) Tha.215,493,1098.
50) Tha.88,1258~1260.

 

이상의 논의를 통해 초기 불교 수행자들에게 있어 불타의 교법은,『테

라가타』에 의하는 한 四諦八正道를 중심으로 四法印, 緣起 등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면 ‘지혜에 의해 본다(paññāya passati)’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앞에서도 부분적으로 다루었지만 이를 다시

한 번 종합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paññānavā) 比丘는 불타의 말씀(Buddhavacanam)

을 듣고 그것을 완전히 안다(parījānāti). 왜냐하면 그는 如實하게 보기

때문이다(yathābhūtam hī passati).” (SN.202.)

 

『숫타니파타』의 이 구절은 교법(불타의 말씀)과 지혜의 관계를 잘 보

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면, ‘지혜로운

비구는 교법을 듣고 如實하게 보기 때문에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如實하게(yathābhūtam) 본다는 것은 교법을 인식의 수

단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안다거나, 그것이 불타의 말씀이기 때문에 맹

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yathābhūtam)’를 설한 교법을

통해 듣는 자가 있는 그대로(如實) 보게 될 때 그것을 완전히 안다

(parijānāti)라고 한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實在(Reality)가 불타의 말

씀을 통해 드러날 때 교법이 되며, 그 말씀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의 인

식에 의해 드러날 때 그것이 다름 아닌 지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있

는 그대로(yathābhūtam)’를 매개로 하는 교법(理)과 지혜(智)는 理智不

二의 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가 존재의 측면에서는 法이며,

‘있는 그대로’가 인식의 측면에서는 지혜(paññā)인 것이다. 따라서 ‘지혜

에 의해 본다’는 것은 불타가 있는 그대로를 깨닫고, 설한 교법을 듣고

스스로 있는 그대로를 보아 아는 것이다. 반기사長老에 의해 이러한 경

지가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이들(四聖諦)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설해졌다. 나는 그들을 참으로

있는 그대로 보았다(evam ete thatā vuttā, diṭṭhā me te yathātathā). 나

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불타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Tha.1260)

 

3. 초기불교 수행자의 수행과 실천

 

불타의 가르침의 내용과 성격이 주로 실천․수행을 중심으로 하고 있

다는 것은 이미 검토한 바 있다. 그러면 그 수행․실천의 체계는 어떠한

것일까? 초기 불교의 대표적인 실천론이 三學, 三十七道品이라는 것은

周知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타 당시에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로 확립

되었다고는 보기 어렵고, 아마도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체계적으로 정

립되어 간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테라가타』에 나타

나는 수행론이 특정한 시기의 長老들의 수행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문헌상으로 해결해야만 할 문제들이 많아 단정하기가 쉽지 않

다. 51) 여기에서는 일단 三學의 체계를 중심으로 하여『테라가타』에 나

타나는 수행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51) 게송의 작자 및 성립연대에 관한 先學의 지적을 고려할 때 신중한 검토를 요한
    다. 前田惠學,「原始佛敎聖典の成立史硏究」, pp.732~735.

 

1) 三學(Tisso sikkhā)

불교의 수행이 아마도 일찍이 불타 在世時부터 戒․定․慧를 수행의

기본 基調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敎團이 확장되고 출가자들의 숫자가

늘면서 그 내용이 증가하거나 체계화되어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이다.『테라가타』에는 수행 내용이나 덕목으로서의 戒․定․慧 각각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 三學(tisso sikkhā)이나 增上戒學(adhisīla-sikkhā),

增上心學(adhicitta-sikkhā), 增上慧學(adhipaññā-sikkhā) 등의 術語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이 가운데 增上心(adhicitta)에 대한 언급이 삼학

과 무관하게 나오는 곳이 한 번 있을 뿐이다.

 

“(善行의) 실천과 (惡行의) 금지, 淨心을 일으키는 행동, 禪定(adhicitta)

에 몰두하는 것(āyogo), 이것이 沙門에 어울리는 것이다.”(Tha.591)

 

이 게송은 고타마장로가 소위 沙門五道라고 할 수 있는 사문으로서

행해야 할 수행을 열거하는 것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런데 三學이라는 術

語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이 당시에는 이러한 체계가 성립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에 교학적으로 삼학의 체계가 확립될

때, 여기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adhicitta(禪定)가 定學(adhicitta-sikśa)

의 術語로 채택된 것이 아닐까 한다.

 

고타마장로의 게송52)은 “沙門에게 어울리는 수행(etaṃ sammaṇassa

paṭirūpaṃ)”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2) Tha.588~596.

 

1. 좋은 친구가 있는 것. 실천해야 하는 것을 많이 受持하는 것. 스승에

   게 순종하는 것.

2. 諸佛을 공경하는 것. 법(Dhamma)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僧伽

   (saṃgha)를 존경하는 것.

3. 생활이 청정하여 나무랄 데가 없고, 행하는 바가 적절하며 마음이 안

   정되는 것.

4. (善行의) 실천과 (惡行)의 금지, 淨心을 일으키는 행동, 禪定에 몰두

   하는 것(adhicitte ca āyoga).

5. 聖者는 변두리의 고요한 숲속의 坐臥所를 가까이 할 것.

6. 戒(sīla)와 학식이 풍부한 것, 諸法을 여실하게 고찰하는 것

   (dhammānaṃ pavicayo yathābhūtam), 진리를 체득하는 것(saccānaṃ

   abhisamayo).

7. (모든 것은) 無常하다고 (보아), 非我의 想(anattasaññaṃ), 不淨의

   想(asubhasaññañ), 세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想)을 닦아야 하

   는 것.

8. (七)覺支, (四)如意足, (五)根, (五)力, 八正道.

9. 聖者는 渴愛(taṇha)를 버릴 것, 번뇌(āsava)의 뿌리를 파괴할 것. 해

   탈하여 머무를 것.

 

이들 내용은 戒․定․慧의 수행에 관한 것과 三十七道品에 관한 것으

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가) 戒; 三寶에 대한 공경 등 (善行의) 실천과 (惡行의) 금지, 계

   (sīla).

(나) 定; 禪定에 몰두하는 것, 不淨의 想의 修習.

(다) 慧; 諸法을 여실하게 고찰하는 것, (모든 것은) 無常하다고 (보아)

   非我의 想, 세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想)을 修習하는 것.

(라) 三十七道品; (七)覺支, (四)如意足, (五)根, (五)力, 八正道.

 

비록 三學에 관련한 術語는 없으나 戒․定․慧의 수행이 망라되고 있

으며, 四念處와 四正勤을 제외한 37道品의 수행이 이와 나란히 병렬하

여 거론되고 있다. 이들을 沙門에 어울리는 수행이라고 표현하는 것으

로부터 추론하면, 이 단계에서는 戒․定․慧는 제 각각 실천되었으나

아직 三學, 즉 戒→定→慧라는 단계적․유기적 실천체계로 인식되고 있

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37道品에 관해서는『테라가타』어디에도 이러한 術語는 사용

되고 있지 않으며 또 四念處, 四正勤, 四神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

道로 된 7종의 수행법 전체를 열거하고 있는 게송이 없는 것으로 보아

37道品의 체계가 확립되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불완전 하지만 三學

과 37道品이 沙門에 어울리는 수행으로 일찍부터 함께 수행되었다는 점

은 주목할 만하다.

 

『테라가타』전체에서 戒·定·慧로 볼 수 있는 수행법을 함께 나열하고

있는 게송은 3개뿐인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혜의 힘(paññābalī)이 있고, 戒를 구족하고(sīlavatūpapanno), 入定하

여(samāhita), 禪定을 즐기며(jhānarato), 念을 지니며(satimā), 적당한

음식을 먹는 사람은 탐욕을 떠나(vitarāgo) 이승에서 죽을 때를 기다려야

만 한다.” (Tha.12)

 

“比丘가 교만하고 방종하여 밖의 일을 구한다면 戒와 三昧와 지혜(sīlaṃ

samādhi paññā)는 완성되지 않는다.” (Tha.634)

 

지혜가 있고(paññavantam),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53) 戒行 가운데 잘 入

定하여(sīlesu susamāhitaṃ) 마음의 고요를 이룬 사람(cetosamatha-

saṃyuttaṃ)그를 智者는 칭찬한다.” (Tha.1077)

53)『테라가타』의 P.T.S. 영역본인「Elders' verses」, p.98의 번역 참조.

 

이 게송들이 모두 戒․定․慧에 관련된 수행 덕목을 말하는 점에서

공통적인데, 그 가운데서 특히 Tha.634에는 일관된 수행체계로서 계정

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비구 수행의 완

성으로 말하고 있는 점은 수행체계로서의 三學의 확립을 전제로 한 표

현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俱舍論」24에 따르면 戒學은 戒를 수지하여

身口意의 惡業을 방지하는 것을 말하고, 定學은 禪의 실천 등으로 마음

이 산란함을 벗어나 맑아져 見性悟道함을 말하고, 慧學은 지혜에 의해

번뇌를 끊어 본성을 발현함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삼학(tisso sikhā)이라는 술어가 보이지 않는 점 등은 아직 과

도기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음의 게송들은 비록 定

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수행이 戒에서 시작하여 지혜에 의해 완성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戒야 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이고, 또 지혜 있는 사람(paññavā)은 최상이

다. 사람과 신들 가운데서 계와 지혜로 인해(sīlapaññāṇato) 승리를 얻는

다.” (Tha.70)

 

“戒蘊(sīlakkhandhe)에 머물러 念과 지혜(satiṃ paññañ)을 닦으며 나는

차례로 모든 속박의 소멸을 체득하였다.” (Tha.865)

 

이 밖에도 戒→定, 定→慧와 관련된 게송이 있는 것으로부터 戒→定

→慧로 진행되는 三學의 수행 체계가 초기 불교 僧伽 內의 일부 수행자

들 사이에 이미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戒를 지니고(sīlena sampanno) 탐욕을 떠나 入定하여(samāhito), 마음

의 의향이 맑은 사람은 袈裟를 입을 자격이 있다.” (Tha.972)

 

“내가 위대한 仙人(불타)이 아신 매우 보기 어려운 四(聖)諦를 禪定에 들

어(samāhitatto), 具念하여(satimā) 지혜에 의해 증득하는 것(agacchaṃ

paññāya)은 언제일까?” (Tha.1098)

 

2) 戒(sīla)

『테라가타』에는 受戒(upasampadā)에 관한 언급이 소수 나타나는데,

후대에서처럼 수계를 증명하는 三師七證 앞에서 행해졌는지 불확실하

다. 또 교단(saṃgha)이 성립하기 시작하던 초기부터 많은 戒律이 이미

존재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출가자의 증가 및 교단의 확장과 병행

하여 계율의 숫자도 증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초기 受戒

는 후대의 波羅提木叉와 같이 比丘 250戒, 比丘尼 350戒 등과 沙彌 10戒

와 같은 戒를 受持하는 수계 의식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소빠카여! 금일 이후에 나를 보러 오면, 소빠카여 이것이 너의 受戒가

되게 하겠다.” (Tha.485)

 

“그 때 전 세계를 동정하는 자비 깊은 스승은 ‘비구여 오너라’고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수계였습니다.” (Tha.625)

 

여기에서 受戒는 계의 受持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에 의한 출

가의 승인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것이 아마도 최초기 불교 교단의 수

계 형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출가 연령의 제한이 없었는지 위의

소빠카장로54)와 바도장로55)는 모두 7세에 출가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54) Tha.486.
55) Tha.479.

 

실라바장로가 말하듯이 불교의 출가 수행자들에게 있어 “戒는 모든

善함(kalyāṇānañ)의 시작이고, 근저이며, 근원이며, 일체 法 가운데 으

뜸이다. 그러므로 戒를 청정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계가

불교적 수행의 시작이고 토대인 것은 전술한 출가, 入門과 수행자로서

의 자격 부여가 受戒에서 시작되는 점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袈裟를 입을 수 있는 자격(kāsāvam arahati)은 계를 지킴에

있는 것이고, 계의 정신은 ‘調伏과 眞實(damasacca)’에 있다는 푸싸장로

의 게송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汚濁을 제거하고, 戒行(sīlesu)에 전념하는 사람은 調伏과 진실을 갖추

고 있기 때문에 袈裟를 입을 자격이 있다.”(Tha.970)

 

그런데 이 게송과 동일한 내용이『法句經』56)에 있는 것으로 보아 푸

싸장로 개인의 생각이 아니며, 오히려 佛陀의 戒律觀을 잘 나타내고 있

는 것이 아닐까 한다.

56) Dhp.10.

 

전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결국 戒는 惡行(오탁)을 제거하고, 또 그것을

행하려는 의지를 조복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善을 행하는 근원이며 토

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戒行이 지향하는 바는 ‘제법을 있는 그대로

식별하고(dhammānam paricayo yathābūtaṃ), 眞實을 체득하는 것

(saccānaṃ abhisamayo)’57), 다시 말하면 지혜의 증득이라고 할 수 있

다.

57) Tha.593

 

이러한 초기 불교 출가 수행자들의 日常을 다음 게송은 잘 표현해 주

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medhāvī)은 佛陀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信心

(saddhañ)과 戒(sīlañ), 淨心(pasādaṃ), 法을 보는 것(dhammadassanaṃ)에

종사해야 한다.”(Tha.204, 509)

 

이와 같이 출가자들의 수행을 지탱하는 윤리적 규범인 戒는 그것을

지키고 실행하는 사람에게 그 業報로 ①(사람들의) 칭찬 ②재산의 획득

③死後에 天上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58)을 얻게 한다는 世間的 가치

와 연결되는 생각이 일부 나타나 있다.

58) Tha.609. 이 내용과 비슷한 것이『우다나바르가』6․1에 있으므로 그러한 영향
    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리미토長老는 계를 잘 지킨 비구는 死後에 슬퍼하
    는 일이 없다는 게송을 남기고 있다. (Tha.504.)

 

3) 定(Samādhi)

『테라가타』는 禪定에 관한 체계적 교학체계의 기술을 목적으로 한

글들을 모아서 정리한 문헌이 아닌 관계로, 그러한 내용을 찾아보기 어

렵다. 하지만 초기 불교 출가자들의 수행에 있어 禪定의 위치와 수행자

자신이 느끼고 체험하는 보다 생생한 禪定의 여러 측면들을 살펴보는

것은 가능하다.

 

定은 원래 梵語 samādhi의 번역어로 “心을 하나의 대상에 專注하여 산

란하지 않게 하는 정신작용 및 그 상태를 定이라 하고 여기에 반해 心이

산란하여 움직이는 상태를 散이라 하여 定散이라 倂稱한다.”59) 이러한

定의 異名으로 후대 대승불교의 문헌인「唯識了義燈」卷5에는 samāhita

(等引), samādhi(三昧), samāpatti(等至), dhyāna(靜慮), cittaikāgratā (心

一境性), samatha(止), dṛṣta-dharma-sukhā-vihāra(現法樂住)의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교리적 의미에 대해 서술하고 있

다.『테라가타』에도 이들 術語들이 사용되고는 있지만 교리적 의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59) 多屋賴俊,「佛敎學辭典」, 法藏館, p.256.

 

禪定 수행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일반적 術語로는

jhāyati가 있다. jhāyati는 ‘靜慮하다’, ‘禪定을 하다’, ‘思念하다’60), ‘冥想

하다’61), ‘to meditate’, ‘contemplate’, ‘think upon’62) 등으로 번역되며,

그 명사형이 jhāna이다.

60) 水野弘元,「パーリ語辭典」, p.113.
61) 中村元,「佛弟子の告白」, p.20.
62) Rhys Davids and stede,「Pali-English Dic.」, p.287.

 

다음의 인용문은 禪定수행과 관련하여 jhāyati의 구체적 用例를 잘

보여준다.

 

1. 번갯불은 배바라산과 빤다바산의 바위 틈 사이에 떨어진다. 비교할

   수 없는 수행자(佛陀)의 아들은 산의 바위틈 사이에 가서 ‘禪定에 든

   다(jhāyati)’. (Tha.41)

 

2. 나무 뿌리의 덤불 숲 속에 들어가 마음을 고요히 하여 ‘禪定에 들어라

   (jhāya)’. 고오타마여 게을러서 안 된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이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Tha.119)

 

3. 이전의 속박들을 벗어나라. 大依를 걸치고, 삭도로 삭발을 하고, 托

   鉢하여 얻은 음식을 먹는다. 유희와 즐거움, 잠에 빠지지 말고, ‘禪定

   에 들어라(jhiyāya)’. 카티야나여!63) (Tha.414)

63) Tha. 415 참조.

 

4. 苦를 가져오고, 戱論의 무리(papañcasaṃghāta)와 苦를 일으키는 집

착(visattikaṃ)과 渴愛(taṇhaṃ)를 쳐부수고 念(sato)과 ‘禪定에 들면

(jhāyati)’ 그는 그것보다 더 나은 즐거움(ratiṃ)을 알지 못한다. (Tha.519)

 

5. 그런데 지금 다행이 참을성 있는 자가 되어 殘飯이 鉢盂에 찬 것을 즐

기며, 고다의 아들 밧디야는 집착함이 없이 ‘禪定에 든다(jhāyati)’.(Tha.843)

 

6. 부모, 자매, 친척, 형제를 버리고 五慾의 대상을 버린 아누룻다는 禪定에 

   든다(jhāyati). (Tha.892)

 

모든 세속적인 가치의 추구를 버린 불교의 출가 수행자들은 탁발에

의지하여 생존을 유지하면서 ‘禪定의 실천(jhāyati)’을 대단히 중요시 하

고 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禪定을 하는 사람을

jhāyin이라고 하는데, 마하카사파장로는 舍利佛(sāriputta)에 대해 “진리

의 장군(dhammasenāpatiṃ)이며, 賢者(dhīram), 大禪定者(mahājhāyiṃ),

入定者(samāhitaṃ)”64)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jhāyin(禪定者)

의 용례65)가 많이 나타나는 것에서 추정할 때 jhāyati가 초기 불교의 禪

定을 포괄하는 술어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64) Tha.1083.
65) Tha.148, 597, 680, 696, 726, 1108, 1136.

 

jhāyati의 명사형이 jhāna인데, 앞의 용례에 비추어 볼 때 jhāna가 초

기 불교의 禪定을 대표하는 술어로 사용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이

나, 八正道의 正定과 戒定慧 三學의 定이 그 原語로 모두 samādhi를 채

택하고 있다. 따라서 교리적으로는 “samādhi는 일반적으로 最廣義의 定

을 가리키며, 有漏世間定, 無漏出世間定, 有心定·無心定·三界諸定 모두

를 포함한다. (거기에 반해) jhāna(dhyāna)는 色界四禪定 만을 포함하고

欲界와 無色界의 定을 포함하지 않는다.”66)

66) 水野弘元,「佛敎の基礎知識」, p.202.

 

실제로『테라가타』에는 jhāna의 복수형인 jhānāni의 用例67)가 보이

는데 이는 色界四禪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한다.

다음의 아누룻다長老의 게송은 jhāna와 samādhi를 병행하여 사용하

고 있다.

67) Tha.199, 1114.

 

“다섯 부분으로 된 三昧(sāmadhimi)에 있어 寂靜하여(sante) ‘마음이

통일되었을 때(ekodibhāvite)’ 나는 安息(paṭippassaddhi)을 얻었습니다.

나의 天眼은 깨끗해졌습니다.” (Tha.916)

 

“다섯 부분으로 된 禪定(jhāne)에 머물러 衆生의 生과 死, 가고 옴, 이

런 상태와 저런 상태의 생존에 머물러 있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Tha.917)

 

다섯 부분으로 된 三昧(sāmadhi)와 禪定(jhāna)을 통해 각각 소위 天

眼通과 宿命通의 신통을 얻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때 sāmadhi와

jhāna가 동일한 어떤 마음(citta)의 경지를 나타내는 異名으로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별개의 경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samādhi의 동사형이 samādahati[定하다, 놓다, (心을) 통일하다]인데,

마음이 선정에 드는 것을 samādahati로 표현하는 경우는 찾아 볼 수 없

다.68) 그 대신에 samādahati의 과거 분사형인 samāhita(等引)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우다인장로는 佛陀의 禪定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

고 있다.

68) Tha.561 참조.

 

“인간인 正覺者(sambuddha)는 스스로를 제어하고 入定하여(samāhitaṃ)

‘브라흐만의 길(Brahmapathe)’에 있어 행동하며 마음의 寂靜(upasame)

을 즐긴다.” (Tha.689)

 

“그 禪定者는(jhayī) 숨을 들이 쉬는 것을 즐기며, 내적으로 (마음이) 잘

통일되어 있다(susamāhito). 나가(nāga)는 걸어 갈 때도 (마음이) 통일

되어 있다. 서있을 때도 역시 통일 되어 있다.” (Tha.696)

 

“나가(nāga)는 누워서도 (마음이) 통일되어 있다. 앉아서도 역시 통일되

어 있다. 나가는 어디에 있든지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다. 이것이 나가의

완전한 모습이다.” (Tha.697)

 

여기서는 佛陀가 行住坐臥에 항상 禪定에 들어 있음(samāhito)을 말

하고 있는데, 이 때 samāhita는 禪定者(jhāyin)인 불타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에 의하면 禪定者(jhāyin)의 禪定(jhāna)

의 內實이 samāhita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용

례는 마하카사파장로가 사리불에 대해 언급한 게송에서도 잘 나타나 있

다.

 

“진리의 장군이며, 賢者이며, 大禪定者(mahājhāyiṃ)이며, 入定에 든

(samāhitaṃ) 사리불에 대해 그들은 합장·예배하며 서 있다.” (Tha.1083)

 

看話禪의 전통에서 “하루 24시의 四威儀 가운데 끊어짐 없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인 時時提撕69)나 “화두가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한결같이 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動靜一如70)와 같은 화두 참구를 통한

三昧의 원점에는 전술한 불타의 삼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장로들

도 불타와 마찬가지로 行住坐臥의 四威儀 가운데 三昧에 들어 있기를

이상으로 하고 또 그러한 경지를 얻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69) 월암,「간화정로」, p.387.
70) 조계종불학연구소 편저,「간화선」, p.327.

 

“만약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자신이 ‘三昧에 들어 있지 않

다면(asamāhito)’, 그 칭찬은 공허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삼매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Tha.159)

 

“피부는 거칠지만 마음이 선량한 모라쟈여! 너는 언제나(satatam) 三昧에

들어 있다(samāhito)以下.” (Tha.207)

 

“사리불이여! 물병을 가지고 여기로 오는 저 소년을 보아라. 내적으로

(ajjhattaṃ) 잘 삼매에 들어있다(susamāhitaṃ).(Tha.431)

 

“四肢를 마찰하고 다시 經行處에 올라 나는 경행처에서 經行을 하였다.

나는 내적으로 잘 삼매에 들어있다. (Tha.272)

 

이 이외에도 禪定을 나타내는 術語로 yoga71), cittassa ekaggam(心

一境性)72), cetosamatha(心寂止)73), cittavūpasama(心寂靜) 등이 소수

사용되고 있으나 특별히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

다. 타라뿌타長老는 그의 게송74) 가운데 samāhita, samatha, jhāyin,

jhāna, jhāyati, yoga 등의 술어를 섞어가며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의

미 상의 차이나 구별을 두고 있지 않다. 그는 禪定에 대해 “튼튼한 밥줄

로 코끼리를 기둥에 묶듯이 나는 그대[心]를 (禪定의) 대상(ārammaṇe)

에 힘으로 묶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마음이 하

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통일된 상태인 心一境性(cittekaggratā)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71) Tha.1142.
72)『테라가타』에는 心一境性의 術語인 cittekaggatā는 보이지 않고, cittassa
    ekaggam, ekagga cittassa(Tha.398), ekaggassa(Tha.920)라는 표현만이 나타나
    있다.
73) Tha.112, 584.
74) Tha.1099~1142.

 

그는 이어서 禪定(yoga)과 智慧(paññ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못된 길을 따라가는 자를 지혜(paññāy)에 의해 자르고(chetvā), 禪定

에 의해(yogena) 억제하여(niggayh), (바른 길에) 들게 하여 존재의 생

성과 소멸을 보아, 최상의 것을 설하는 자(佛陀)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Tha.1142)

 

여기에서 ‘잘못된 길을 따라가는 자’는 이 게송의 전후 문맥에서 볼

때 마음의 번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번뇌와의

관계에 있어 禪定은 번뇌를 억제하고(niggaṇhāti), 지혜는 번뇌를 잘라

서 완전히 제거하는 기능과 작용을 하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반

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따라뿌타長老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戒·定·慧

三學을 수행의 기본 덕목으로 하는 초기 불교 수행자들이 공유했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장로들은 게송에서 禪定에 대해 언급할 때 그와

더불어 번뇌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를 뒷받침 해 준다.

 

1. “…… 나의 생각들은(vitakkā) 고요해지고 나의 마음은(cittam) 잘 入

定하였다(susamāhitaṃ).” (Tha.50)

 

2. “자만심(māna)에 의해 기만 당하고, 형성 된 사물들에 의해 오염되

고, 여러 가지 소득에 의해 마음이 흩어진 사람들은 三昧(samādhi)를

얻지 못한다.” (Tha.102)

 

3. “암바타카園의 저 편에 있는 숲속에서 밧티야(長老)는 渴愛(taṇha)를

뿌리채 뽑아 행복하게 禪定에 들었다(jhiyāyati).” (Tha.466)

 

4. “心一境性(cittassa ekaggam)을 얻지 못하고 欲貪(kāma-rāga)에 의해

괴로워하였다. (Tha.406)

 

5. “…… 여러 가지 맛(rasa)을 탐하는 사람은 마음(manas)이 禪定

(jhāna)을 즐기지 못한다.” (Tha.580)

 

6. “부모․자매․친척․형제를 버리고, ‘五慾의 대상(pañca kāmaguṇe)’

 

을 버리고 아누룻다(長老)는 禪定에 든다(jhāyati).” (Tha.892)

 

7. “내가 전쟁터에서 내달리는 코끼리와 같이 탐욕(kāmaguṇesu chandaṃ)

을 쳐부수고(padālaye), 모든 아름다운 모습을 피하여 禪定에(jhāne)

에 전념하는 것은 언제일까?” (Tha.1105)

 

초기 불교 수행자들에 있어 禪定에 든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

에 집중하여, 마음에 위와 같은 煩惱․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거

나 멈추는 것(止)이라 할 수 있다. 번뇌든 선정이든 그것이 일어나는 곳

은 다 같은 마음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放逸하여 ‘욕망의 즐거움

(kāma-rati)을 쫓게 되지만,75) 마음이 한 곳에 모이게 되면 바른 진리

(sammā dhamma)를 관찰하는 것(vipassato)이 가능해진다.76) 그리고

禪定者들이 경험하는 내면의 즐거움은 욕망의 쾌락과는 차원이 다른 最

上樂(paramaṃ sukham)이다.77) 이러한 확신과 내적 체험이 아마도 장

로들로 하여금 세속을 등지고 열악한 환경에서 수행을 지속하게 한 원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75) Tha.884.
76) Tha.398. yathā ekagga cittassa sammā dhammam vipassato’ti!
77) Tha.854, 884.

 

초기 불교의 禪定者들은 사원 안에서 집단적으로 모여서 수행을 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이나 밀림78), 시체를 버리는 숲

(sītavana)79), 산 속80), 동굴 속81), 하천 옆82), 나무 아래83) 등에서 주로

머물며 禪定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78) Tha.244, 684, 864, 1136.
79) Tha.6.
80) Tha.680, 1108.
81) Tha.522, 524, 597.
82) Tha.523.
83) Tha.119, 920, 998.

 

4) 慧(paññā)

지혜가 戒․定․慧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것은 지혜에 의해 수

행의 과정이 완성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혜에 의해

마음의 煩惱가 완전히 제거되어 마음이 解脫하게 되면 더 이상의 輪廻

의 생존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生老病死의 반복되는 苦

(dukkha)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변적·이론적 인식이나 특정한 도그마에 대한 맹신을 통해서는 실현되

기 어렵다. 불타가 제시한 그 방법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봄으로(yathābhūta-ñāṇadassana. 如實智見)’ 인해 잘못된 분별과 妄想

등에 의해 오염된 마음의 번뇌와 집착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bhūta)이 諸

法이나, 諸行이라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통찰하고 보는 마

음의 작용이 智慧이며 그 반대가 無明(avijja)인 것이다. 그리고 무명에

의하여 마음에 愛(taṇha)․取(upādāna)의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이 12緣

起의 설명이다. 결국 지혜든 번뇌든 동일한 한 마음 가운데서 일어난 서

로 다른 心의 작용이며, 樣態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에 지혜가 증

대하면 번뇌가 줄어들고 그 반대로 지혜가 줄어들면 번뇌가 증대하게

되는 것이다.

 

“諸法의 生起(dhammasamuppādam)와 諸行의 지속(saṃkhārasantatiṃ)을

순수히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ṃ) 보는 사람에게는(passantassa) 더 이

상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Tha.716)

 

“세계를(lokam) 풀과 나무와 같이 지혜를 가지고 볼(paññāya passati)

때, 그는 ‘나의 것(mamatta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나에

게 (이것이) 없다고 하여 슬퍼하지 않는다.” (Tha.717)

 

아디무디長老가 설한 이 두 게송의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諸法과 諸行, 세계는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일 수도

있으며 禪定에 든 마음에 表象된 觀(vipassanā)의 대상일 수도 있는데,

(1)그것의 ‘생기와 지속을 순수히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풀과 나무와

같이 지혜를 가지고 본다.’ 그러면 그 결과로 (2)두려움과 我所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나의 것이 없다고 하여 슬퍼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1)은 지혜를, (2)는 번뇌의 소멸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생

각된다. 지혜는 生成·변화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先驗的 思惟에 의

해 그 본질을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

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보고 통찰하는 것이다.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은 달리 말하면 의식되어지는 존재이므로 이 때 존재(bhūta)는 의

식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의식과 不可分의 관계에 있다. 따라

서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는 객관적 대상을 관찰하여 主觀(subject)이

대상(object)의 지식을 얻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며, 그 결과로

번뇌의 소멸이라는 내적․심리적 전환을 수반한다.

 

이러한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확신은 초기 불교의 많은 수행자 일

반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그들의 출가 수행의 동기와 목표가 된 것으로

보인다.

 

[A]

1. “五蘊을 완전히 알고(pariññāya), 곧은 길을 修習하여, 최고의 寂靜

   (paramaṃ santim)을 얻어, ‘번뇌 없이(anāsavo)’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될 것이다.” (Tha.369)

 

2. “(모든 것이) 無常(aniccam)하다고 보아 非我의 想(anattasaññaṃ)과 不

   淨想(asubhasaññañ), 세계 가운데의 (모든 것)에 환희하지 않는 想

   (lokamhi ca anabhiratim)을 修習하여야 한다. 이것이 沙門에게 어울리

   는 것이다.” (Tha.594)

 

3. “내가 산 속 동굴에 동반자도 없이 홀로 살며, 모든 존재(sabhabhavam)

   가 無常하다고(aniccato) 觀하는 것(vipassaṃ)은 언제일까?” (Tha. 1091)

 

4. “위대한 仙人(mahasinā)이 알려준 매우 보기 어려운 四聖諦를 禪定에

들어(samāhitatto) 具念(satimā)하여 지혜를 가지고(paññāya) 체득하

는 것은 언제일까?” (Tha.1098)

 

5. “無常한 것은 苦(dukkhan)이다. 空(suññaṃ)은 非我(anattā)이다. 죄

는 살해하는 것이라고 ‘바르게 관찰하여라(vipassa yoniso)’.” (Tha. 1117)

 

[B]

1. “(五)蘊(khandhā)은 있는 그대로(yathābhūtam) 보였다(diṭṭhā). 迷妄

의 생존(bhava)은 모두 부수어졌다. 生(死)輪廻는 멸하였다. 迷妄의

생존을 더 이상 반복하는 일은 없다(n'atthi dāni punabbhavo 'ti).”(Tha.87)

 

2. “五蘊을 완전히 알고(pariññātā), 그 뿌리를 베었다. 나는 苦의 소멸을

얻고 번뇌의 소멸(āsavakkhaya)을 체득하였다.” (Tha.120, 440)

 

3. “어떠한 영원한 생존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형성되어진 것들

(samkhārā)도 역시 常住(sassata)하지 않는다. (五)蘊은 계속해서 생

겼다가 멸한다. 이것이 過患임을 알고(ñatvā) 나는 생존을 구하지 않

았다. 일체의 愛欲으로부터(sabba kāmehi) 떠나 나는 번뇌의 소멸

(āsavakkhaya)에 이르렀다.” (Tha.121, 122)

 

여기에서 [A]에는 깨달음에 아직 이르지 못한 長老들이 수행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내용과 목표가 표명되어 있고, [B]에는 이미 깨달음을

체득한 장로들의 경지가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를 비교해보면 그 내용

이 서로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개체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五蘊, 세

계 가운데의 (모든 것)84), 모든 존재(sabbabhavam), 형성되어진 것들

(samkhārā, 諸行)이 無常․非我․苦․空임을 완전히 알고(pariññāya),

보고(diṭṭhā), 觀하여(vipassam), 이러한 지혜의 心作用에 의해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여(āsavakkhaya) 윤회의 생존으로부터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五蘊의 無常․苦․非我는 周知하다시피 四聖諦와 더불어 불타

의 기본적인 교설인데, 그것에 의지하여, 戒․定․慧의 수행을 통해 불

타가 깨달은 그 경지를 직접 再體驗하는 것에 초기 불교 지혜의 기본적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84) 데라뿌타長老는 이를 산, 바다, 하천, 대지, 四方, 四維 등으로 구체적으로 표현
    하고 있다.(Tha.1133)

 

4. 結語

 

佛陀의 사상은 존재를 本體界와 現象界로 二元論的으로 나누어 현상

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논하거나, 그것에 의해 현상계를 통일적으로 合

目的的으로 해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고 있지 않다. 불타의 근본적

관심은 유한하고 불안전한 實存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苦에 대한 궁극

적인 해결에 있다. 이 苦의 해결과 무관한 어떠한 철학적·종교적 논의도

무의미한 戱論으로 본다. 그는 苦의 生存이 일어나는 원인을 인간 내면

의 마음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마음에서 찾고 있다. 그러

한 점에서 그는 철저한 人本主義者라고 할 수 있다.

 

불타는 인간 마음에 內在된 無智와 煩惱라는 오래된 病因을 발견하고

그 중증의 치료제로 智慧를 처방하였다. 그 방법은 누구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체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敎說

로써 전하였으나 그것은 지혜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의 개념적 윤곽과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 황량한 生의 한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지도 삼

아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지,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것이 戒·定·

慧이고, 八正道라고 할 수 있다.

 

불타가 보여주려고 한 지혜는 현대의 자연과학자들이 어떠한 形而上

學的 원리도 전제하지 않고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보려는 태도와 一見

매우 유사해 보인다. 諸法實相이나 ‘있는 그대로(yathabhūta, 如實)’ 등

으로 표현되는 존재는 불교 사상사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하게 규정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本 論文을 통해 一考한 것에 한정하여 이야기

하면 초기 불교 수행자들에 있어 ‘있는 그대로’는 소위 데카르트流의 정

신으로부터 독립한 실체로서의 물질도 그 반대의 것도 아니다. 깊은 정

신의 집중, 통일 상태인 禪定에서 일상의 先入見이나 妄分別이 멈춰지

고, 그 동안 경험해 왔던 정신적·물질적 제 현상이 그 수행자의 의식 속

에서 彼我와 主客의 대립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 체험되어 나타나는 理

[存在]와 智[智慧]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지혜는 대상적

지식과 달리 마음의 내적․심층적 전환을 초래하여 윤회의 원동력인

‘煩惱의 소멸(āsava-kkhaya)’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