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중국 선종사에 등장하는 비구니의 수행

실론섬 2017. 1. 3. 16:04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5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2013

중국 선종사에 등장하는 비구니의 수행

- 續比丘尼傳 을 중심으로 -

민 명 숙(벽공/조계종교수아사리)

 

[국문초록]

본 논문은「속비구니전」을 중심으로 중국 비구니의 선 수행 성립과

발달 그리고 종파 형성과 쇠퇴기로 구분해 정리한 것이다.

 

초기불교 교단 내에서 비구니 수행자들은 석존의 가르침에 의지하면서

근기에 따라 자유롭게 수행하였다.그러나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달마선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종파가 형성되는 등,중국 전통의 수행

풍토가 정착되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비구니들은 간화선을 비롯한 다양

한 수행법을 수용하면서 수행자로서 혹은 전법자로서의 일생을 보냈다.

속비구니전 은 약 200여명의 비구니들의 수행과 전반적인 생활을

시대별로 소개하고 있으며,「조동종니승사」는 선수행 비구니의 득법기

연과 종파계도를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속비구니전」권1은 선종의 성립기라고 볼 수 있는 양나라 달마의 제

자인 총지비구니를 시작으로 해서 당 시대 북종선사 법완선사의 제자인

적연 비구니의 수행이력을 소개하고 있다.

 

권2는 구지화상과 인연이 있었던 실제비구니를 비롯해 약 18명의 선

수행 비구니의 이력을 소개하였다.당 중기 이하 송대에는 5가7종의 종

파가 형성되고 소멸되기도 했던 시대이다.비구니들은 이러한 과정 속

에서 기연이 있는 선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각 종파에 속하여 수행한다.

이 시대 비구니는 높은 구도열정과 깨달음으로 비구 선지식의 인정을

받았으며,사부대중 앞에서 상당법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Ⅰ. 서 언

 

비구니 교단은 형성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행자들을 배

출하였다.비구니 수행자들은 구참제일 마하파자파티를 시작으로 불교

가 전파되는 곳이면 어느 시대,어느 사회에서나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다수 비구니들의 활동은 기록부재로 인하여 세월 속에 묻혀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석존의 재세시에 활동한 비구니 수행자는『앙굿따라니까야』속에 13명

이 언급되고 있다.1)이들은 모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으며, 각 분야에

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중생교화에서도 큰 공헌을 남긴 것으로 알

려져 있다. 그들 중에서도 순다리난다(SundariNandā)는 “선을 얻은 자

들 가운데서 으뜸”혹은 “선정에 드는 님 가운데 제일”2)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큰 통찰지를 가진 케마, 신통력을 가진 우빨라완나, 천안을

가진 사꿀라, 설법제일의 담마딘나 등도 수행력이 뛰어난 비구니 수행

자들이었다.

1) 대림스님 옮김,『앙굿따라니까야』제1권,초기불전연구원,2006,pp.132~
   137.여기서 언급되는 비구니 수행자로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케마, 웁
    빨라완나, 빠따짜라,담마딘나, 난다, 소나, 사꿀라,밧다, 밧다까삘라니, 밧
   다깟짜나, 끼사고따미, 시갈라마따 등이다.
2) 전재성 역주,『앙굿따라니까야』1권,한국빠알리성전협회,2007,pp.201~
   202.

 

초기불교 교단 내에서 비구니 수행자들의 수행법은 케마의 부정관 수

행,우빨라완나의 광명까시나 수행, 순다리난다의 선정수행, 밧다 꾼달

라께시의 정견수행 등 다양하다. 초기불교 교단 내에서 비구니 수행자

들이 이와 같은 다양한 수행법들을 실천하게 된 것은 출가자의 근기 및

수행풍토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교단 설립 초기에는 정

해진 수행법이 없었으며 다만 석존의 가르침에 의지하면서 근기에 따라

자유롭게 수행법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종파가 세분화되고 중국 선종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비구니 수행자들은 선종의 수

행체계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달마 이후 약 1,300여 년간

시대를 따라 변화해 온 수많은 중국 선종사는 비구 중심의 역사였다. 그

에 비해 중국 선종의 비구니 역사는 비구에 비해 사전(史傳)의 기록이

나 그 사실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수는 적지만 수

행과 깨달음에 있어서 비구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로 득법한 비구니가

적지 않다. 도에 있어서는 성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선종사에서는 증명

해 보이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 비구니 선종사를 중국 왕조의 변화를 기준으로 4

기로 구분하여 분석하고자 하였다. 구분의 기준은 각 종파의 활동과 시

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삼았다. 각 시기별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는 중국선종의 성립기로 초조 달마대사의 전법과정에서부터 육

조혜능(638~713)에 이르기까지의 250여년간의 시대에 해당한다. 중국

왕조사를 중심으로 본다면 양무제부터 수와 당대 전기에 속하며, 이 시

기에도 활동한 비구니 수행자들이 있었다. 달마대사의 전법기에 중국은

양나라 무제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각종 경전이 번역되어 교학이 발전

하던 시기였다. 양무제(464~549)의 재위기간 중에는 사원을 건축하고

황제가 세 번이나 동태사에 몸을 의탁할 정도로 불교가 번성하였다. 그

리고 수와 당으로 이어지는 전환기에 불교는 중국화의 길을 걷기 시작

하였다.

 

제2기는 중국선종의 발전기로 남악회양과 그 제자들로 전법이 이루어

진 때부터 당대 말기까지의 약 250여년의 기간이다. 이 시기는 중국선

의 발전기로 오가의 종파가 형성되었다. 오가는 당대에 형성된 선종(禪

宗)의 다섯 종파를 말하는데 무종(武宗)의 폐불사건(845-846)이후, 남

악의 법손들인 석두(石頭)와 마조(馬祖)의 문하에서 갈라진 위앙종(潙仰

宗)·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등이

다.

 

제3기는 중국선종의 보존기로 북송의 흥기에서 남송의 멸망까지의 시

기를 말한다.송나라 시대의 불교는 왕실불교와 선종이라는 두 가지 특

징을 내포하고 있다. 즉 왕실의 외호 속에 사찰들이 번창하고,출가를

장려함으로써 많은 출가자들이 배출되었다.3) 그러나 이 기간 중에는 오

가중 위앙종과 법안종, 그리고 조동종 등은 침체하거나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다만 운문종과 임제종이 번성하였으며, 황룡혜남(1002~1069)과

양기방회(992~1049)등의 활동으로 황룡파와 양기파가 서로 쌍벽을 이

루는 종파를 형성하였다.

3) 마찌하다 료오슈 저,계환 옮김,「중국불교사」,우리출판사,2007,p.229.
   “송의 태종이 즉위하면서 불교부흥을 위하여 노력하고 동자승 17만명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제4기는 중국선종의 쇠퇴기로 원나라 건국부터 청나라 말기까지의 시

대를 의미한다. 원나라(1271~1368)시기에는 라마교가 전래되어 그 폐

해가 나타났으며 명대에는 과도한 불교 보호가 승니의 질적 저하와 사

회적 위상이 낙후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나라 건국 이후초기의 불

교는 외적으로 6만여개의 사찰과 10만여명의 승니4)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백련교비와 홍수전의 난 등으로 박해를 받으면서 쇠퇴하는 양

상을 보였다.

4) 앞의 책,pp.319~320

 

비교적 청대 초기에는 비구니 선수행자들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기록

을 속비구니전 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속비니전 권4의 내용을 보면,

임제할과 덕산방을 자유로 사용하면서 제자들을 제접하고 선사들과 문

답하는 비구니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비구니가 등장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로 추정할 수 있으

나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비구니는 동진 성제의 함강(咸康)연중(335~

342)에 생존했던 정검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정식으로 비구니 계단이

설치되고 수계가 시행된 것은 송나라 원가 10년(433)경을 전후하여 구

나발마(367~431)5)와 승가발마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이때부터

비구니 수계법이 갖추어졌으며,비구니 교단은 점차 확대되었다.

5) 구나발마(guṇavarman)은 공덕개(功德鎧)라고 번역하는데 북인도 계빈국
   (罽賓國)출신으로 20세에 출가하여 스리랑카를 경유하여 자바 섬에 이르
   러 불교를 전파하고,424년에 광동성(廣東省)광주(廣州)에 온 것으로 알
   려져 있다.431년에 강소성(江蘇省)건강(建康)기원사(祇洹寺)에서 보살
   선계경(菩薩善戒經)․사분비구니갈마법(四分比丘尼羯磨法)․우바새오계
   상경(優婆塞五戒相經)등 10종 18권을 번역하고 그 해에 입적하였다.곽철
   환,「시공사불교사전」,시공사,2003.참조.
6) 釋寶唱撰,「比丘尼傳」권1(『대정장』50,p.934下).

 

비구니 교단이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알려져 있

다. 이때에는 비구니 승관이 설치되었고, 비구니만을 위한 사찰들도 건

립되었다. 송나라 명제 원년(465)에 황제의 조칙으로 비구니 보현이 보

현사의 주지로 임명되었으며,7) 466년에는 도읍승정에 임명되었다는 기

록이 있다.8) 그리고 같은 해에 비구니 법정(法淨)은 경읍도유나에 임명

되었다.9)

7) 중국의 사찰은 황제의 칙령으로 건립되었을 경우 勅令寺刹, 개인의 원력
   으로 건립되었을 경우에는 私建寺刹등으로 구분하였다.위의 책,pp.10
   9~110.
8) 앞의 책,p.941上.
9) 위의 책,p.941下.

 

양나라 보창10)은「비구니전」을 저술하면서 당시 비구니 65명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였다. 진화법사에 의해 기록된「속비구니전」11)은 양나라

의 총지비구니를 비롯해 민국시대까지의 비구니 약 206명의 삶과 수행

을 소개하고 있다.「비구니전」과「속비구니전」이 중국 비구니의 수행과

포교 등,전반적인 활동 부분을 서술한 기록이라면「조동종니승사」에서

정리한 비구니 선종사는 선수행을 중심으로 엮은 비구니 역사 자료

다.12) 그러나「조동종니승사」의 기록은「속비구니전」에 비해 생략된 부

분이 더러 있다. 특히 청대 이후의 비구니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소개되

지 않고 있다.따라서 본고에서 주로 분석한 비구니들의 선 수행 활동

은「속비구니전」을 중심으로 하되「비구니전」과「조동종니승사」등을

참고로 하였다.

10) 보창은 양나라때 승려로 18세에 장엄사로 출가하여 천감(天監)4년(505)
    경사로 돌아와 왕명으로 신안사(新安寺)에 주석하면서「비구니전」등 다
    수의 책을 저술하였다.
11) 眞華編述,「續比丘尼傳」(民國28년 4월),國家圖書館分館編.
12)「조동종니승사」의 선종사는 참선 수행했던 비구니에 대해 시대를 다르게
    록하거나 비구니를 득법시켜준 선사의 이름을 틀리게 소개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경우는「속비구니전」에 의거해 시정하였다.

 

Ⅱ. 중국선종기의 비구니 활동 분석

 

1. 선종 성립기의 비구니

달마 대사에게 최초로 인가 받은 비구니 총지 선사는「속비구니전」

권1과 조동종니승사 에 그 풍격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총지는 그의 호

이며 양의 호주(湖州) 법화사니(法華寺尼) 도적전(道蹟傳)으로 그 이름

이 거론되고 있다.「속비구니전」에 의하면,그의 본명은 도적 혹은 명련

(明練)이며 오흥(吳興)출신으로 사람들이 양무제의 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달마대사의 제자로서 인가받을 때 대사의 ‘肉을 얻었다’는 이야기

가 유명하다. 뒤에는 호주의 변령봉(弁嶺峯)에 은둔하면서 법화경 을

독송하면서 노년을 보냈으며 입적 후에는 제자들이 그의 탑을 조성했다

고 한다.13)

13)「속비구니전」권1,p.佛19~530上.

 

「조동종니승사」는 총지 비구니가 경덕전등록 제3 「달마전」에 득법

제자 4명(道副․尼總持․道育․慧可)가운데 1명으로 거론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14) 이러한 기록 등을 통해 우리는 총지 비구니가 선종의

최초 비구니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14)「曹洞宗尼僧史」,曹洞宗尼僧史編纂會,東京:曹洞宗尼僧團本部,1955,
    pp.77~78.

 

총지 외에「속비구니전」권1에는 비마암(祕魔巖)에서 선혜(禪慧)를

열심히 수행했다고 하는 북제(北齊)시대의 법비(法秘) 비구니를 비롯

해 약 12명의 선 수행자를 소개하고 있다. 법비는 오대산에서 거의 50년

을 물만 마시며 고행했으며, 그가 살던 비마암에는 당나라 때 비마화상

이 마조의 도를 얻고 또한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15) 수의 지선(智仙)

은 문제(文帝)의 도움으로 선관(禪觀)을 하고 입적 후에는 황제가 사리

탑을 세워주었다고 한다.16)

15) 앞의 책,p.佛19~530中.
16) 위의 책,p.佛19~530中.

 

당의 정혜사(淨惠寺)에서 거주했던 신상(信相)은 수관(水觀)을 했다.

본인의 집을 사찰로 하여 정혜사라 하였다. 어느 날 어떤 승려가 그 절

에 와서 화강삼매에 드는 것을 보고 신상은 수관을 하게 되었다고 한

다.17) 법징(法澄)은 지상사(至相寺)의 강천사(康薦師)에게 청법하고 깨

달음을 얻었으며, 장안 안국사의 지법(持法), 제도사(濟度寺)의 혜원(惠

源), 낙양 안국사의 혜은(惠隱)비구니 등도 참선 수행했음을 알 수 있

다. 그 외에 무진장(無盡藏), 원기(元機), 실제(實際), 요연(了然) 비구니

등이 있다.

17) 위의 책,p.佛19~531上.

 

「비구니전」에 의하면 승개(僧蓋)·법전(法全)·정규(淨珪)·정수(淨秀)·

도귀(道貴) 비구니가 참선 수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누구의 제자인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18)

18) 벽공,「동아시아 비구니 교단의 역사」,조계종출판사,2012,p.96.

 

「조동종니승사」에는 우두선수행자로 명오(明悟) 비구니를 소개하고

있다. 달마선의 4조인 도신의 제자 가운데 혜충(慧忠,683~769)은 36명

의 제자를 두었으며, 그 가운데 비구니가 1명 있었다. 바로 명오 비구니

로 우두선을 전승한 유일한 비구니다. 명오 비구니는「경덕전등록」제4

혜충의 밑에는 ‘니명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기연의 내용은 설명하지

않았다.「선등세보」제1에는 도견(道堅)·혜섭(慧涉)과 함께 혜충-유칙

(惟則)-운거지(雲居智)-명오니의 전승을 밝혀 명오 비구니의 스승을

운거지로 밝히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19)

19) 앞의 책,p.79.

 

一千 비구니는 제5조인 홍인의 문하의 제자였다가 뒤에는 동문의 선

집(宣什), 온옥(蘊玉)등과 함께 염불문선(念佛門禪)을 했다고 한다. 그

러나 일천이 어떤 염불문선수행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단지 종밀이「원각경대소초」제3에 남산염불문 선종을 언급한 내용과,

선집이 전향(傳香), 인성염불 등 특이한 의식방법으로 수행했다는 기록

을 통해 일천도 같은 의식방법으로 염불선을 폈으리라 추측할 수 있

다.20)

20)「조동종니승사」, pp.79~80취의.

 

무진장 비구니는『대열반경』을 항상 독송하였으며, 그로 인해 육조

혜능과 인연을 맺는다. 혜능이 그 마을에 왔을 때 무진장이『열반경』을

한 편 독송했는데, 그것을 듣고 그 묘의를 알게 되었으며 그 뜻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감동한 무진장은 위 무후의 손자인 조숙량과 주민들을

혜능에게 예배하도록 시켰으며, 보림사를 세워 혜능을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21) 즉 무진장은 혜능이 돈오하게 되는 기연을 제공한 위대한 인

물이라 할 수 있다.22)

21)「속비구니전」권1, p.佛19~533上.
22) 앞의 책,pp.80~81.이 외에 덕이본, 종보본「육조단경」,「禪林類聚」제8, 
   「전광록」등 에도 소개되고 있다함.(「조동종니승사」,p.138.각주34참조).

 

정거사(淨居寺)는 육조 혜능 이후 중국 선종 사찰 가운데 최초의 비

구니 사찰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선등세보」제1과「불조종파세보」

계도 가운데 혜능 아래에 ‘정거니(淨居尼) 현기(玄機)’라는 기록 때문이

다. 따라서 현기 비구니는 청원행사, 남악회양 등과는 법 형제다. 어떤

전거에 따라 계도에 수록됐는지 분명하지 않으며, 정거니에 대한 전기

도 알 수 없다. 단지 정거사에 거주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이다.23)

23) 위의 책,p.81

 

「속비구니전」에는 온주(溫州) 정거사 출신의 비구니로 설봉의존(雪峯

義存)과 문답하고 깨달음을 얻은 원기 비구니를 소개하고 있다. 비구니

는 영가대사(永嘉大師,665~713)의 제자로 임종 할 때는 거꾸로 서서

입적했다고 한다.24)

24)「속비구니전」권1, p.佛19~533 中.

 

육조 혜능 계통을 남종선이라 부르며, 신수 계통을 북종선이라고 부

르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종선의 법완(法玩,715~790)선사의 제

자 가운데에 적연(寂然)이라는 비구니가 있다. 적연에 대해서는「보리달

마숭산사적대관(菩提達磨嵩山史蹟大觀)」가운데 인용되어 있으며, 법완

선사의 탑명에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적연이 북종선 수행

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25)

25) 앞의 책,p.82.

 

적연 외에 법완 선사의 비에는 명전(明詮), 임단계일(臨壇契一), 지원

(志元), 혜응(惠凝)등의 비구니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전

부가 법완의 제자라고 밝힌 것은 아니지만 감화를 받은 것만은 확실하

다고 볼 수 있으니 제자라 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따라서 북종선의

비구니는 적연․명전․계일․지원․혜응 등 5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 않다.26)

26) 상동.

 

이상 살펴 본 선종 성립기의 비구니들의 수행은 달마선을 이어 선혜

수행이나 수관 수행 등을 했다. 그리고 남종선이나 북종선의 수행과 염

불선을 수행했던 비구니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선종 발달기의 비구니

「비구니전」의 뒤를 이어 저술 된「속비구니전」은「비구니전」에 소개

되지 않은 양의 총지 비구니를 비롯하여 고대의 양․진․북제의 비구니

와 수․당․송․원․명․청 및 근대 민국의비구니 약 206명의 생활과

수행을 기록하고 있다.

 

당의 무주(婺州) 금화산(金華山)의 구지화상(俱脂和尙)과 기연이 있는

실제(實際) 비구니는 그 출신이 불명확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소개된

내용을 보면 구지화상이 깨달음을 얻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정도의 상

당한 법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7)

27) 앞의 책, p.佛19~534中.

 

「조동종니승사」에도 실제 비구니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선리에 통

한 비구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경덕전등록」제11,「오등

회원」제4,「선림류취」제11,「벽암록」제19,「종용록」제84등에 기록

되어 있다고 한다.28)

28)「조동종니승사」, p.89.

 

묘신(妙信) 비구니는 회수(淮水)지방에서 태어나 앙산 혜적(807~883)

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 이외에 어떤 자료도 없다. 다만 도원선사의 정

법안장 제28 「예배득수」편에 그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어떤 기

록이 전거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묘신은 육조 혜능과 관계있는 바람과

깃발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두 비구가 다투는 것을 듣고, 그에 대한 답

을 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앙산이 해원주(廨院主)의 소임을 맡길

정도로 지기를 인정받았으며 신뢰를 받았다.29)

29) 위의 책,pp.84~85.

 

당의 서주(瑞州) 말산요연(末山了然) 비구니는 고안(高安) 대우(大愚)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어느 날 임제의현 선사

의 제자인 관계지한(?~859)을 만나 선문답을 하였으며, 지한 스님은 요

연 비구니를 스승으로 예배한 것으로 유명하다.30)

30) 앞의 책, p.佛19~535下.

 

「조동종니승사」에 의하면 지한은 요연 비구니와 함께 임제 가풍을 선

양하였다. 그 기연에 대한 내용은「경덕전등록」제11,「오등회원」제4,

「선림류취」제9,「종문통요속집(宗門統要續集)」제8등에 기록되어 있

다. 또한「선등세보」제2및「불조종파세보」제2의 계도에 그 이름이 올

라 있다고 한다.31)

31) 앞의 책, p.87.

 

「조동종니승사」는 남악 법계의 위산영우(?~901)제자 가운데 유철마

(劉鐵磨)라는 비구니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혹은 위산의 제자 경산홍

인(徑山洪諲~901)의 법을 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32) 비

구니는 출가하여 담주위산(潭州潙山)이 거주하는 곳에서 10리 떨어진

작은 암자에서 살았다. 항상 위산의 영우선사를 참례해서 대오했으며,

기개가 출중하였다.「벽암록」제24칙 및「종용록」60칙의 ‘철마도위산

(鐵磨到潙山)’, ‘철마자우(鐵磨牸牛)’라는 공안으로 유명하다.33)「선등세

보」제3및「불조종파세보」제2의 계도에는 위산 영우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로 앙산 혜적 선사와 함께 올려져 있다고 한다.34)

34) 위의 책,p.84.

 

「속비구니전」은 유철마 비구니를 송 시대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비구니는 구주(衢州) 정신암(淨信菴)에서 삭발하였으며 선 수행하기를

좋아하였다. 여러 사찰을 돌며 선지식을 찾다가 구주의 자호선사(子湖

禪師)를 만나 참구하여 법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5) 그러나 이 외

의 행상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자호선사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35)「속비구니전」권2, p.佛19~539中~下.

 

「속비구니전」의 기록에는 없지만, 영우선사의 제자이며 남대(南臺)

낭자로 알려진 비구니를「조동종니승사」는 소개한다. 남대 낭자는 12세

에 노 비구니를 따라서 위산의 영우선사를 참례하여 문답했으며, 출가

하여 장경대안사(長慶大安師)에게 법을 받았다.「선림류취」제9 비구니

조에 기록이 있으며, 앞의 묘신니․ 유철마와 함께 위앙종 계통에 속하

는 비구니라고 한다.36)

36)「조동종니승사」, p.86.

 

선종의 발달과 종파의 성립에 따라 비구니들도 임제종이나 위앙종 등

의 선사들을 참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실제․요연 등 깨달음을 얻은

비구니들은 스승의 뒤를 이어 제자들에게 법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3. 종파형성과 비구니

청양문익(凊凉文益)선사가 멸한 후 2년(960)북송의 흥기 이후에서

남송의 멸망(1280)까지 320년은 선의 보존시기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황용과 양기의 분립, 묵조와 간화의 대립, 삼교 일치, 선교 융합 등이 등

장하며 선은 점차 그 본질을 상실하고 있었다. 임제종은 의현에서 황용

혜남에 이르러 황용파, 양기방회의 양기파로 나뉘었다.37) 이러한 변화

는 당시 비구니들의 수행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득법의 기연에 따

라 자연스럽게 나름의 가풍을 이어갔다.

37) 벽공,앞의 책,p.99.

 

「속비구니전」제2권에 소개된 비구니 30명 가운데 선 수행자는 소동

파와의 문답으로 유명한 송의 근초(勤超) 비구니를 비롯해 약 18명이

있다. 즉 기록된 비구니 중 과반수이상이 선 수행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

는 것이다. 그런데 근초 비구니는 소동파와의 문답 내용과 제자들에 대

한 가르침 외에 깨달음에 대한 기연과 거주사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38)

38)「속비구니전」권2, p.佛19~536下.

 

서축사(西竺寺)의 법해(法海) 비구니는 법운(法雲) 법수(法秀)화상에

게 참예하고 양주(襄州) 석문의 법진(法眞)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

음을 얻었다.39)

39)상동.

 

호가 공실도인(公室道人)인 지통(智通) 비구니는 출가를 원했으나 부

모의 반대로 좌절된다. 부모가 돌아간 후 사심(死心) 선사에게 도를 묻

고 깨달음을 얻었다. 도를 이룬 뒤 삭발하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

다.40)

40) 앞의 책, p.佛19~537上~中.

 

「조동종니승사」에 의하면 공실지통(公室智通) 비구니는 황용혜남―

회당조심(晦堂彫心)―공심오신(孔心悟新,1044~1115)으로 법맥이 이어

지는 가운데, 공심오신의 제자이며 용도범순(龍圖范峋)의 딸이다.즉 지

통 비구니는 임제종 황룡파의 니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1) 그러나 역

사적으로 회당조심의 제자는 사심오신이다.「조동종니승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41) 앞의 책, p.92

 

양기파는 양기방회―백운수단―오조법연―원오극근―대혜종고로 이

어진다. 건영(建寧) 복국암(福國菴)의 각암(覺菴) 비구니는 원오(圓悟)선

사를 참방하고 깨달음을 얻은 후 복국암에서 많은 대중을 가르쳤다고

한다.42)「조동종니승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이는데, 속성은 祖씨이며

「가태보등록」43)에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44)

42) 상동.
43)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에 기록된 등사의 하나. 선림고경총서는「경
    덕전등록(景德傳燈錄)」등 송대에 발간된 다섯 가지 선종사서(禪宗史書)
    를 압축한 선종의 통사(通史)이다. 책명은 ‘다섯 가지의 등사(燈史)를 회
    통(會通)하여 하나로 엮었다’는 뜻이다. 다섯 가지 책은 ① 도원(道原)이
    1004년에 지은「경덕전등록」(전30권), ② 이준욱(李遵勖)이 1036년에 지은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전30권), ③ 불국유백(佛國惟白)이 1101년에 지
    은「건중정국속등록(建重靖國續燈錄)」(전30권), ④ 오명(悟明)이 1183년에
    지은「연등회요(聯燈會要)」(전30권), ⑤ 정수(正受)가 1201∼1204년 간행
    한「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전30권)을 말한다. 이를 모두 합하면 150권
    이나 되는데, 20권으로 축약하여 선의 대의를 밝힌 입문서로 평가된다.
44)「조동종니승사」, pp.92~93.

 

온주의 정거사에 출가한 혜온(慧溫)은 용문(龍門)의 청원(淸遠,1067

~1120)선사에게 참예하고 깨달았다.45) 불안청원(佛眼淸遠)은 원오극

근․불감혜근(佛鑑慧懃)과 함께 5조 법연 아래 법을 이은 三佛의 한 사

람으로 유명하다.「운와기담」下에는 궁중의 승좌문답(陞座問答)에서

혜온이 보여준 법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선등세보」제9와「불

조종파세보」제6에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46) 따라서 혜

온 비구니는 임제종 양기파의 비구니라고 할 수 있다.

45) 앞의 책, p.佛19~537中.
46) 앞의 책, p.97.

 

대혜스님의 비구니 제자에 자수사의 무착묘총(無著妙總)과 정거사의

묘도 비구니가 있다. 무착은 20세에 출가하여 경산의 대혜 밑에서 수행

하였으며, 석두와 마조를 참예하여 공안 드는 것을 듣고 활연히 깨달았

다. 무착에 대한 기록은「속비구니전」47),「속전등록」제32 48)등 기연의

내용이 다수 보인다.

47)「속비구니전」권2, p.佛19~537下~538上.
48)「續傳燈錄」제32,(『大正藏』51),pp.692中~693上.

 

「속비구니전」에 의하면, 혜조의 자는 무제(無際)이고 무착과 함께 경

신의 대혜에게 법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49) 혜조는 무착 스님에게

삭발하였으며 깨달음을 얻지 못하던 중, 무착을 따라 경산의 혜고(慧杲)

스님을 만나 도를 얻었다. 무착은 깨달음을 얻은 혜조에게 대중을 지도

하라고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법을 따랐다고 한다.50)

49) 위의 책 권2, p.佛19~537中.
50) 앞의 책 권2, p.佛19~537中.

 

「조동종니승사」는 무제 혜조와 초종(超宗)비구니를 함께 소개하고 있

다. 두 비구니는 대혜종고(1089~1163)의 제자로, 혜조와 초종 사이의

문답이「운와기담」下에 수록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51)

51)「조동종니승사」,p.93.

 

관서의 진여(眞如) 비구니는 일찍 황궁에 들어가 교귀비를 돌보았는

데, 귀비가 불자였으므로 출가를 허락받는다. 사방으로 다니면서 구도하

다가 민(閩)에서 대혜스님을 만나 법을 받았다고 한다.52)「속전등록」

제29에는 진여와 제천(濟川)거사의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조동종

니승사」는 진여가「증집속전등록(增集續傳燈錄)」제1에 大鑑(大鑑) 아

래 제17세 대혜의 법을 받았다고, 단지 이름만 거론되어 있지만「운와

기담」下에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53)

52) 앞의 책, p.佛19~537中~下.
53) 앞의 책, p.94.

 

묘도 비구니도 대혜의 제자로 알려졌는데, 온주(溫州)의 정거사에 거

주했으며 개당법문과 모 비구니와의 문답 내용이「속비구니전」에 소개

되어 있다.54)「속전등록」제32 55)에 기연의 내용이 보이며,「선등세보」

제5에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고 한다.56)

54) 앞의 책, p.佛19~538上.
55)『대정장』51,p.692上.
56) 앞의 책,p.93.

 

또한「대혜보각선사보설」에 비구니 자명대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

다. 이것은 자명 비구니가 틀림없이 대혜스님의 제자라는 증거라고「조

동종니승사」에 설하고 있다.57)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대혜의 비구니

제자는 무제․초종․자명․묘도․묘총․진여 등 6명의 비구니가 있다. 특히 

묘도 이하 3명의 비구니는불조종파세보제2의 계도에 그 이름

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58)

57) 상동.
58)「조동종니승사」, p.97.

 

「속전등록」제33에는 혜온(慧溫) 비구니에게 법을 받은 무상 비구니

에 대한 내용이 있다.59) 이 내용은 임제종의 중국 비구니계의 전계와

법을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60) 무상법등의 상당법문에 대한 내용도

「속전등록」제33에 기록되어 있다.61)

59)『대정장』51, p.697下.
60)「조동종니승사」, p.95.
61)『대정장』51, p.697下.

 

「속비구니전」 ‘정거사 법등전’에 의하면 혜온 비구니를 정거사의 대선

지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법등이 혜온 선사를 모시고 대중들과 함께 수

행하다가 깨달음을 얻었으며, 혜온의 허락을 받고 법석에서 설법했다는

기록이 있다.62)

62)「속비구니전」권2,p.佛19~538中~下.

 

이상 소개한 비구니 가운데 각암에서 법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비

구니는 임제종 양기파 소속이다.

 

조동종의 부용도해의 뒤를 이은 제자 가운데 단하자순(丹霞子淳,?~

1119)과 석문원역(石門元易,1053~1137 혹은 1073~1157), 정인법성이

있다.

 

묘혜사(妙慧寺)의 혜광(慧光) 비구니는 정인법성(淨因法成)의 제자다.

정지(淨智)대사로도 칭하는 혜광(慧光) 비구니는 성도 범范(씨)의 여식

으로, 당감(唐鑑)은 그의 숙부다. 政和3년(徽宗,1113)에 황제가 여러

선사들에게 법문을 청하자 마지막에 법상에 오른 혜광이 “여러 선사들

이 이미 말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자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후에 정인법성선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묘혜사(妙慧寺)에 거주했다고

한다.63)

63) 앞의 책, 권2, p.佛19~537上.

 

「조동종니승사」는 혜광의 명성은 매우 높았으며 그의 상당법문에 대

한 기록이「속전등록」제17,「가태보등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법성의 전기는 분명치 않은데, 스스로 枯木이라 부르며 여주향산

(汝州香山), 동경정인선원(東京淨因禪院) 혹은 초산에 거주하였다. 제자

가 11명이었으며 혜광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한

다.64)

64) 앞의 책, pp.96~97.

 

「속전등록」권17 정인성선사법사(淨因成禪師法嗣)편에는 東京 묘혜

사의 혜광 비구니가 상당하여 조주(趙州)의 감파화(勘波話)를 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65)』

65)『大正藏』51, p.581上.

 

석문원역의 제자에 향산(香山)불통(佛通) 비구니가 있는데, 어릴 때

삭발하고 늘『묘법연화경』을 독송했으나 스스로 인정할 수가 없어 석문

원역 선사를 찾아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불통은 뒤에 영향산(寧香

山)에 머물면서 대중에게 법을 전했다고 한다.66)「속전등록」제17에 석

문과의 기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67)

66) 위의 책, p.佛19~538中.
67)『대정장』51,p.382中.

 

조동종은 당대에는 활약을 많이 했지만 송대에 이르면서 점점 미약해

진다. 따라서 비구니의 전기도 빈약하다. 조동종은 동산양개―운거도응

(雲居道膺)―동안동비(同安同丕)―동안관지―양산연관―태양경현―투

자의청―부용도해(芙蓉道楷,1043~1118)로 이어지는데, 부용도해의 제

자 가운데 도심(道深)이라는 비구니가 있다.68) 도심은「속전등록」제12

에 수록되어 있으나 기연의 내용은 없으며 오직 서경(西京)의 도심이라

는 법명만 보일 뿐이다.69)

68) 벽공,앞의 책, p.101.
69)『대정장』51, p.536上.

 

「조동종니승사」에 의하면,「선등세보」제9와「불조종파세보」제6에는

도심의 법을 이은 비구니로 봉성소재(奉聖紹才)와 묘혜지안(妙慧智安)

의 법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전거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

다고 설명하고 있다.70) 이상 조동종의 비구니는 혜광․불통․도심 등을

꼽을 수 있다.

70)「조동종니승사」,p.95.

 

평강(平江) 서축사(西竺寺)의 법해(法海) 비구니는 처음 법운법수(法

雲法秀)에 참구했으나 그 뒤에는 양주(襄州) 석문의 법진 본각수일(法

眞本覺守一)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의 법다움을 알게 된

많은 유학자들이 법을 청했지만 응하지 않고 서축사에 조용히 머물면서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다만

임종시에는 임종게를 남겼다는 정도가 전해질 뿐이다.71) 본각수일과의

기연에 대한 기록은「속전등록」제18에 보인다.72) 본각수일은 운문종의

스님으로 그에게는 1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법해는 그 가운데 한 사람

이다.「선등세보」제7과「불조종파세보」제8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

다고 한다.73)

71) 위의 책 권2, p.佛19~536下.
72)『대정장』51, p.588上.
73) 앞의 책, pp.98~99.

 

운문종은 운문문언(雲門文偃)―향림등원(香林燈遠)―지문광조(智門光

祚)―운두중현(雲竇重顯)―천의의회(天衣義懷,982~1053)―혜림원조

(慧林圓照)―법진(본각수일)으로 이어진다.

 

법해와 더불어 운문종의 비구니로 감로중선(甘露仲宣)의 법을 받은

문조(文照)를 꼽을 수 있다. 평강(平江)의 묘심사(妙湛寺)에 거주했던

문조는 17세에 출가하여 여러 곳으로 구도를 하러 다니던 중 감로중선

을 만나 인정을 받는다. 묘심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5번이나 도량을 옮

기면서 율종사찰을 모두 선종사찰로 바꾸는 등 선종을 알리는데 열정을

기울였다. 따라서 비구니 사찰로서 禪林은 바로 문조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공덕으로 태제(太帝) 정거인(鄭居仁)은 황제

에게 청하여 자감(慈鑑)이라는 법호와 자금란 가사를 하사하게 하였

다.74)

74) 앞의 책 권2, p.佛19~538中.

 

문조는「속전등록」제18에 감로중선의 유일한 제자로 기록되어 있

다.75) 또한「가태보등록」에 기연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선등세보」

제7과「불조종파세보」제8에도 그의 이름이 보인다. 문조는 대감 아래

의 14세로 기록되어 있다고「조동종니승사」는 전한다.76)

75)『대정장』51, p.589下.
76) 앞의 책, p.99.

 

소주의 이씨암(李氏菴)에 거주했던 조근(祖懃)은 윤주초산(潤州焦山)

혹은 암선사(庵禪師)에게 대사를 청하였으며, 밤낮으로 정진하여 법을

얻었다. 어떤 관원에게 게송을 써 주었다는 것과 이씨암에서 입적했다

는 기록 외에는 전하지 않지만 선수행자로 일생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77)

77) 앞의 책, p.佛19~538下.

 

정각(正覺)비구니는 법운사(法雲寺)에 거주하면서 매일 정좌하고 참

선했다고 한다.78) 어느 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등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조근 비구니와 같은 맥락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상주 정혜사(淨

慧寺)의 덕영(德英) 비구니는 자가 진정(真淨)이다. 경산(徑山) 불조(佛

照)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소주 주명사(朱明寺)에서 설법하기도 하였

다.79)

78) 상동.
79) 상동.

 

덕주(德州) 양수암(楊樹菴)의 백불(白佛) 비구니 3자매는 어릴 때부터

불교를 신앙하다가 출가하여 여러 곳을 다니며 참학하고 용맹 정진하여

각기 법을 얻었다고 한다.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제자들은 그들

을 삼성(三聖)이라 칭하였으며, 좌화 임종했다고 한다.80)

80) 위의 책, p.佛19~539中.

 

이상「속비구니전」권2와「조동종니승사」등의 자료를 통해 살펴 본

송대 비구니의 선 수행은 중국 역사상 가장 활발한 수행자로서의 모습

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구도열정과 깨달음의 경지는 선지식의 인정

을 받았으며 비구와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비구 선사의 법계제자

로서 기록되었으며, 사부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상당법문도 마다하지 않

았다.

 

4. 중국선종 쇠퇴기의 비구니

「속비구니전」권3은 원과 명 시대 비구니들의 수행과 활동을 기록하

고 있다. 원 이후의 시대를 선의 쇠퇴기라고 하듯이 이 시대,특히 명의

비구니들은 선 수행 보다는 경전 독송 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선의 쇠

퇴로 뛰어난 비구니가 배출되는 일이 지극히 드물었지만, 몇몇 비구니

들은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일생을 보냈다.

 

元의 복수사(福壽寺) 문감은 광복(廣福)의 정묘(淨妙)선사에게 삭발하

고 천목(天目) 중봉본공(中峰本公)에게 가르침을 받고 대법을 깨닫는다.

복진(濮鎮)에 절을 지으니 조정에서 복수선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동안은 광복사(廣福寺)의 주지를 맡으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지만 임

종은 복수사에서 좌화하였다.81)

81)「속비구니전」권3,p.佛19~541上.

 

소흥(紹興) 대경암(大慶菴)의 지오(智悟)는 11세에 출가하여 유마경

의 ‘제불국토(諸佛國土) 역부개공(亦復皆空)’이라는 구절을 독송하다가

확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복주(福州) 설봉산(雪峰山) 북신(北信)

을 찾아 문답하고 득법 인가를 받았다. 뒤에는 대경암에 주석하면서 상

당법문을 하였다.82) 그에 대한 기연은「증집전등록」제3에 수록되어 있

다고 한다.83)

82) 상동.
83)「조동종니승사」, p.100.

 

황암(黃巖) 출신의 각진(覺真)은 호가 축심(竺心)이다. 위우산(委羽山)

에 살면서 삭발하였으며 용천사(湧泉寺) 고우(古愚)스님을 만나 문답

후 인정받았다. 명인사(明因寺)에서 한 승려를 문답을 통해 제접하는 모

습과 규선사(奎禪師)와 문답을 나누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84) 항주

서천목산(西天目山)의 보귀(普貴)는 자가 무위(無爲)이며, 고봉화상(高

峯和尙)에게 법을 얻었다.85)

84) 앞의 책 권3, p.佛19~541上~中.
85) 위의 책 권3, p.佛19~541中.

 

서천 목산의 양묘석(楊妙錫)과 매화(梅花) 비구니도 기록에 의하면 선

수행자로서 생활하고,깨달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양묘석은 출가의

동기가 중봉화상과의 인연에 의한 것이며, 매화 비구니는 불교에 입문

하여 많은 선지식을 찾아 법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화꽃이 피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86) 그러나 두 비구니에게 법을 전해준 스

승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86) 위의 책 권3, p.佛19~541下.

 

明의 길상암(吉祥菴) 적성(寂性)은 어릴 때 삭발하고 名師의 지점(指

點)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다. 사람들은 그를 ‘老佛’이라 부르며 존경했으

며 임종은 길상암에서 좌화했다.87)

87) 위의 책, p.佛19~542上.

 

거주사가 알려지지 않은 소산(蕭山)의 무위(無爲)는 20세에 삭발하고

정토수행을 하였다. 30세에는 여러 곳을 다니며 참학하였으며 병든 이

를 치료해 준 인연으로 무위심선사라는 칭호를 받는다. 임종할 때는 임

종게를 남겼으며 관산(冠山)에 사리탑을 세웠다.88)

88) 위의 책, p.佛19~542上~中.

 

이상으로「속비구니전」권3에 소개된 원에서 명 시대의 선 수행 비구

니 8명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시기의 기록은 전법 등에

대한 선지식과의 기연이나 활동에 대한 내용이 당과 송 시대에 비해 거

의 생략되었다. 단지 소개된 내용을 통해 선 수행자였음을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다. 선 쇠퇴기의 한 단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구니들 자체

도 당시 여건에 따라 조용히 참선 수행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속비구니전」권4는 淸시대 비구니 47명 가운데 선 수행자 27명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대의 비구니는 앞의 원․명 시대보다 활발하게 수

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소개된 비구니의 과반수이상이 수행 정진 하였

다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가흥(嘉興) 복사원(伏獅院)의 행강(行剛)은 자가 기원(祇園)이다. 어릴

때부터 禪靜을 좋아했으며 남편과 사별 후, 밀운(密雲)스님에게 참예하

고 개오한 뒤, 구족계를 받았다. 다시 수년간 밀운의 제자 석차승(石車

乘)에게 참예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호암(胡菴)에서 9년 동안 폐

관(閉關)수행하였으며 매계(梅溪) 복사원에 선원을 설립하고 엄격하게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가 저술한「기원강선사어록」2권이 가흥장(嘉興

藏)에 수록되었다.89)

89) 위의 책 권4, p.佛19~545上.

 

그런데 당시의 폐관수행이 현재 행하고 있는 무문관(無門關) 수행과

같다고는 생각 않는다. 문이 밖으로부터 잠긴 채 1~2평의 좁은 방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추측한다.

 

소미문(蘇美文)은 논문에서 기원이 임제종의 제32세라고 했으며,90)

행강의 제자로 보문수원(普聞授遠), 이연초숙(怡然超宿), 의천초랑(義川

超朗), 의공초가(義公超珂), 일음초견, 고정초진(古鼎超振), 일규초침 등

외 다수가 있다고 소개하였다.91)

90) 蘇美文, 「亂象中有新生:論明末淸初比丘尼之形象與處境」, 中華技術學院
    學報 ,2003,p.238.
91) 위의 책, p.239.

 

기원 행강의 제자인 선호암(善護菴)의 일음초견(一音超見)은 ‘만법귀

일’ 화두를 참구하여 은사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또한 일규초침도 복

사원의 행강 스님을 참례한 후 하안거에 동참한지 27일일 째에 본래면

목을 알게 되었다.92)

92) 위의 책, p.佛19~548下~549上.

 

동향(桐鄉) 덕밀(德密)은 어느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주야로 정진하

여 득오했다93)고 하는데, 거주사와 기연의 스승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

다. 또한 거주사가 일려지지 않은 한양(漢陽)의 심문(心聞) 비구니는 견

월율사(見月律師)와의 대화내용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서 비구니 팔

경계의 내용이 보인다.94) 초기 중국 비구니 교단이 팔경계와는 거의 관

계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후대에 들어오면서 율전의 보급과 함

께 유입이 된 것 같다.

93) 위의 책, p.545下.
94) 앞의 책, p.佛19~546上.

 

자가 계총(季總)인 보도암(普渡菴)의 성철(醒徹)은 생사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원하던 가운데 자통제(茨通際) 선사가 편집한「남악선등록

(南嶽禪燈錄)」을 접하고 더욱 발심했다. 남악에서 출가한 후 진강학림

(鎮江鶴林)의 목운통문(牧雲通門), 죽림약암(竹林箬菴)의 통문(通問), 의

흥(宜興)의 용지만여(龍池萬如)를 참예하고 도를 얻는다. 남악의 정병암

(淨瓶岩)에서 임종을 맞았으며, 그가 저술한「계총철선사어록(季總徹禪

師語錄)」2권이 가흥장에 수록되었다고 한다.95)

95) 앞의 책 권4, p.佛19~546中~下.

 

직지암(直指菴)의 행현(行玄)은 자가 원감(圓鑑)이고 상숙(常熟) 출신

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보국사(報國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처음에

김속오(金粟悟) 스님에게 참예하여 문답을 통해 도를 구했으며 고남(古

南)에게 법을 얻었다. 황순요진사(黃淳耀進士)에게 ‘방하착’화두를, 전

종백(錢宗伯)의 부인에게는 ‘만법귀일’화두로 가르침을 주었다. 어록과

연보를 남겼다고 한다.96)

96) 위의 책, p.佛19~547上.

 

사선암(思禪菴)의 법정행호(法淨行浩)는 경산의 비은용(費隱容)에게

구족계를 받고 열심히 수행하였다. 사선암에서 살면서 대중들에게 덕산

의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97)

97) 상동.

 

염화사(拈花社)의 여여전혜(如如傳慧)는 남암노인(南菴老人)을 만나

화두를 받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 염화사 총림을 만들고 상당법

어를 하였다.98) 명인암(明因菴)의 각가본심(覺柯本信)은 목진민공(木陳

忞公)에게 법을 얻고 대중에게 임제선을 지도했으며 상당법문을 했

다.99)

98) 위의 책, p.佛19~547上~中.
99) 위의 책, p.佛19~547中.

 

웅성암(雄聖菴)의 유극행치(惟極行致)는 어려서 입도하고 항상 아버

지를 따라 천동에서 밀운(密雲)을 참례하고, 석기운(石奇雲) 스님과의

문답을 통해 법을 얻었다. 임종시에는 제자 越과 마지막 문답을 마치고

입적했으며 황학산(黃鶴山)의 영녕사(永寧寺)옆에 탑이 세워졌다.100)

그러나 행치 비구니를 득법시킨 석기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미

상이다.

100) 위의 책, p.佛19~547中~下.

 

보조암(普照菴) 고원행청(高源行清)은『법화경』가운데 ‘일대사인연’

이라는 내용을 보고 참선을 시작하였다. 밀운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도를 청하였으며 부석현(浮石賢)과 문답 끝에 인가받고 보조암에서 법

을 폈다. 특히 행청은 부석현과의 문답에서 주먹을 쥐거나 소리를 지르

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101)

101) 상동,下.

 

행청의 경우와 같이 청 시대 비구니는 특히 임제선의 특징인 할이나

방을 많이 사용했다. 정락초월(靜諾超越)과 스승 억유극치(憶惟極致)의

문답,102) 벽암(檗菴)의 志스님에게 법을 받은 용호암(龍護菴)의 도우(道

遇),103) 天王寺 수감해(水鑑海)에게 득도한 상기명본(上機明本),104) 28

세 때 출가하여 정진한 후 부석벽(剖石璧)을 만나 문답했던 자등암(自

登菴)의 법우제영(法雨濟瀛) 비구니105)등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구와 더불어 당당하게 도를 겨루는 모습에서 그들의 공부정도를 엿볼

수 있다.그러나 제영 비구니를 제접했던 부석벽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102) 위의 책, p.佛19~547上~中.
103) 위의 책, p.佛19~547上.
104) 상동.
105) 상동.

 

연화암(蓮花菴)의 가도(可度)는 개암(介菴)의 진공(進公)에게 출가 허

락과 ‘만법귀일’화두를 받고 수행하여 인가를 받았으며106), 명인암의 불

음(佛音)도 진공에게 ‘부모미생전’ 화두를 받고 의심을 떨쳤다. 진공은

다시 불음에게 ‘종금식득낭생면(從今識得娘生面),자시출군일장부(自是

出羣一丈夫)’라는 화두를 주어 득오시켰다. 불음은 임종게를 설하고 좌

화했다.107)

106) 위의 책, p.佛19~547下~548上.
107) 위의 책, p.佛19~548上.

 

비구니 제부(濟符)는 호주(湖州)출신이며 자는 조규(祖揆)로 영서암

에 출가하여 영암(靈巖)의 퇴옹저공(退翁儲公)에게 법을 얻었다고 한다.

제부는 깨달은 뒤 상당법문을 하기도 했으며, 입멸한 뒤에「조규부선사

어록(祖揆符禪師語錄)」이 간행되었다.108)

108) 위의 책 권4, p.佛19~548上~中.

 

「조동종니승사」에는 제부에 대해서 영서사에 살았던 임제종 법계의

비구니로 소개하고 있다. 청대 달진편(達珍編)에 의한「정안약집(正眼略

集)」제9에 남악 아래 36세에 영서니 조부(祖符)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109)

109)「조동종니승사」,p.106.

 

그 외에 퇴옹저공에게 입문하여 깨달음을 얻고 상당법문을 했던 비구

니는 영치암(靈峙菴)의 인풍제인(仁風濟印)과 묘담암(妙湛菴)의 보지제

총(寶持濟總)등을 들 수 있다.110)

110) 앞의 책, p.佛19~548中~下.

 

태평암(太平菴)의 일진옥은(一真玉恩) 비구니도 상당법문을 했으

며,111) 항주 청량암(清涼菴)의 각오초조(覺悟超祖)는 남천매신(南泉賣

身)의 인연으로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보이고 소참 법문을 했다.112)

111) 위의 책, p.佛19~548下.
112) 위의 책, p.佛19~548下.

 

정각암(正覺菴)의 불기초원(佛機超元)은 학림중박(鶴林中樸) 밑에서

공부하고 정각암에 은거하였으며, ‘죽비자’화두로 정진하였다.113) 설라

암(薛蘿菴)의 혜공(慧空)은 천동산의 奇스님에게 지도를 받았다고 한

다.114)

113) 위의 책, p.佛19~549中.
114) 상동.

 

대자암(大慈菴)의 부해초제(桴海超濟)는 양주(揚州)의 법음결공(法音

潔公)에게 법을 얻고, 상당법문을 했으며,115) 증복암(增福菴)의 성졸조

지(聖拙兆地)는 산탁재공(山鐸在公)에게 법을 배우고 20여년을 산에서

은거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폈다.116)

115) 상동.
116) 위의 책, p.佛19~549中~下.

 

균암(筠菴)의 상암은혜(象菴隱慧)는 정자(淨慈)의 활당엽(豁堂喦)에게

도를 배웠으며,117) 염화암의 영새상융(靈璽上融)은 천영의 거발긍(巨渤

恆)에게 가르침을 받았고,118) 고척암(古滌菴)의 혜조계련(慧照契蓮)도

거발긍에게 인가를 받았다.119)

117) 위의 책, p.佛19~549下.
118) 상동.
119) 위의 책, p.佛19~549~ 下~550上.

 

백탑암(白塔菴)의 조청명광(照清明光)은 선암(仙巖)의 천목 지화상(智

和尚)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120) 쌍정암(雙貞菴)의 통례민경(通禮敏敬)

은 오랫동안 ‘여하시조사서래의’, ‘정전백수자’등을 참구했지만 깨달음

을 얻을 수 없었다. 뒤에 보령(寶寧)에 가서 有스님한테 법을 구하고, 임

종시에는 대중한테 偈를 설하고 좌화하였다.121)

120) 위의 책, p.佛19~550上.
121) 위의 책, p.佛19~550上~中.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속비구니전」권4에 소개된 청 시대 초기의

비구니는 대부분 화두를 받고 정진했다.인가를 받고나서는 제자들에게

임제선을 가르치고 상당법문과 소참법문을 하였다. 어록을 남기고 임종

할 때는 게를 설하고 좌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동종니승사」는 청 시대의 영수(永壽) 자옹성여(子雍成如) 선사를

소개한다. 영수는 어려서 仁화상에게 득도한 후 고율범형(古律範兄) 선

사의 법을 받고 항주 벽하사(碧霞寺)의 청을 받고 선법을 폈다. 법을 이

은 제자 가운데 불증(佛證)과 불량(佛亮)이 뛰어났으며, 그 외에 조원

(祖圓)․경현(鏡縣)․불진(佛震)․용조(用照)․불조(佛照)․제광(際廣)

․제휘(際輝)등 다수의 제자가 있다고 한다. 영수에 의한 상당어․소참

어․詩偈등은 그의 제자 등에 의해「자옹여선사어록」이라는 한권의 어

록으로 집록되었다. 이 어록은 비구니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최초의 어

록이라고 설명하였다.122)

122)「조동종니승사」, p.106.

 

「속비구니전」권5은 청 시대 후기의 비구니 42명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속비구니전」권4,5권의 내용을 보면 청대 전기와 후기의 비구니

수행 형태가 매우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권4의 인물들이 참선 수행을

위주로 한데 비하여 권5의 비구니들은 대부분 경전 독송이나 정토수행

을 위주로 하고 있다. 권5에 소개 된 비구니들 가운데 참선 수행으로 일

생을 마친 대표적인 비구니는 영관암(靈官菴)의 동오명본(東悟明本)을

들 수 있다. 명본은 유마산(維摩山)에 출가하여 비은선사(費隱禪師)의

四世 제자가 되었다.123)

123) 앞의 책, p.佛19~553上.

 

「속비구니전」권6은 중국의 근대인 민국시대의 비구니 27명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대 비구니들의 특징은 첫째,정토신앙을 주로 했다

는 점. 둘째, 제자들의 교육을 중요시 여겼다는 점.법창불학원 등 비구

니 교육도량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 시기의 결과물이다. 셋째,염불 수행

등을 위한 폐관 수행을 많이 했다는 점. 넷째, 자매들이 함께 출가한 경

우가 비교적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상「속비구니전」을 중심으로 기록된 비구니 역사 자료를 통해 살펴

본 비구니들의 선 수행 등의 활동은, 당시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매우

활발하고 당당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들은 비구니들의

득법 기연과 제자에 대한 가르침, 그 내용을 기록한 저술, 그리고 임종

의 모습, 사회의 기여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비구니에 대한 자

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선사로서 교육자로서 뛰어난 모습을 기록한

아주 소중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거주사찰에서의 활동이나 기연

의 내용, 후계자에 대한 내용 등이 자세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Ⅲ. 결어 : 중국선종 비구니활동의 특징과 과제

 

중국불교사에서 비구니 승가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활동했는지를 파

악할 수 있는 전체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비구니와 니사의 수

를 참고하면 시대별로 전체적인 규모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니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북위 낙양에 건립된 요광사(瑤

光寺)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낙양을 대표하는 요광사는 후위의 세종이 세

운 비구니 사찰이다. 당시 낙양에는 소의니사(昭儀尼寺), 명현니사(明懸

尼寺), 위창니사(魏昌尼寺), 경흥니사(景興尼寺)등 다수의 비구니 사찰

들이 건립되었다. 요광사는 강당이 500여칸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며 주

로 황후들이 출가하여 거처하는 사찰로 기능하였다. 양나라 무제 때 건

립된 대지도사는 500명의 비구니가 상주하면서 경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나라 천희 5년(1021)에는 전국의 비구니가 61,240명으로 알려져 있

다. 북송말기의 기록에는 사찰에 4만여 개에 달하였으며, 비구는

397,615명, 비구니는 61,239명으로 나타났다. 원나라 강희제(1654~1722)

때의 조사기록에 따르면 비구니의 수는 8,615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 당

시 비구 승려의 수는 110,29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사회에서 출가 수행자의 수가 급증하였다가 급감하는 것은 삼무

일종의 난과 같은 법난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불교계에 직접적인 타격

을 주는 법난과 훼불사건, 억불정책이 발생할 경우 강제 환속을 당하는

승니의 수가 많았다. 반면에 흥불정책을 펼치는 황제가 나타나면 승니

의 수가 급증하고 사찰이 중건되는 사례가 나타난다. 중국 비구니의 수

는 비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치정자들에 의

한 비구 중심의 국가정책과 유교적 사회 배경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출가 배경이 비구니의 수와 활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선종사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

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선종 비구니의 수행 전통은 당․송대의 영향을 미치는 뛰어난

선승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이어진다. 이와 같은 사례는 달마대사

의 득법제자 중에서 총지 비구니, 홍인대사의 문하의 일천 비구니, 혜능

대사의 문하의 무진장 비구니 등을 비롯하여 이후 청대까지의 수많은

비구니들의 수행은 당․송대 선승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이어받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둘째, 선종 비구니 사찰과 계맥은 일정기간 유지되었으나 독자적인

비구니 법맥이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출가의 연속성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법맥을 이어받는 비구니의 출가가 지속적으로 연계되지 않으면 법맥

의 형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법맥이 이어진 사례가 있지만 기록의 부재

로 알기 어려운 상황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중국 선종의 수행법은 5가 7종으로 일컬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

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선종 비구니의 수행법도 이와 같은 다양성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선종 비구니들의 수행이 간화선

을 비롯한 특정한 수행법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선

맥의 형성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띠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조

동종니승사」 에는 주로 선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비구니들이 소개되고

있지만,「속비구니전」은 그 외에 정토신앙을 중심으로 한 염불선을 비

롯하여 다양한 수행방법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중국이 유교적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서는 비구와 비구

니가 평등한 위치에서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선 수행자로서 법을 전

하는 비구 스님과의 문답 내용,깨달음을 얻은 후 상당법문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 또는 비구니 사찰의 설립과 주지 취임 등에서 볼 수 있

다. 따라서 중국 선종 비구니들의 사회적 활동은 매우 다양하고 적극적

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것은 중국불교사에서 사찰의 사회

적 활동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시대적 요구에 비구니 사찰들도 부응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비구니 승가에서 독자적으로 간행한 저술이나 문헌이 후대,

특히 청대 이후로 내려가면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속비구니전」권5에

기록 된 비구니들은 시문을 비롯해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행강의「기

원강선사어록」, 양해(量海)의「영향집(影響集)」, 영수 자옹성여 선사에

의해 기술된「자옹성여선사어록」,무구(無垢)의「속불재집(續佛齋集)」

과「여혜집(茹蕙集)」124)외에도 다수 있다.

124) 앞의 책, p.佛19~551下~552上.

 

중국불교계에는 선종 이외에도 많은 종파가 활동하였다. 따라서 각

종파에서 활동한 많은 비구니 수행자들이 있었으나 본 논문에서는 이들

의 활동이나 이력은 분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료의 부족과 함께 활

동 이력들이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분석할 내용을 찾지 못하

였던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앞으로 중국불교사에서 비구니 승가의 활

동관련 기록들을 더 찾아내고 분석한다면 더욱 다양한 연구 성과가 나

올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본 연구를 통해서 중국선종사에서 비구니들의 활동은 수행분야

에 한정되지 않고,대사회적인 활동 영역에서도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

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비록 중국불교사에서 기록상의 족적은 많지 않

다 하더라도 사부대중으로서의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각종 문헌

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향후 연구과제는 비구니 승가의 수행체계와 전수방법,비구니 사찰들

의 활동 양태 등이 남아 있다.중국의 각종 기록들을 상세히 분석한다면

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발견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