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니까야와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四念處)의 비교/임승택

실론섬 2017. 2. 18. 17:41

[보조사상 40집(2013.8)]

니까야와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四念處)의 비교

임 승 택 / 경북대학교 철학과

* 이 논문은 2012학년도 경북대학교 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이 논문은 동국대학교 개교 100주년(2006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불교학개념

사전’의 ‘사념처’ 항목으로 최초의 집필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해당 원고를 작성하여 제출한 이후 

7년이 지난 현재 사전 발간 작업이 중단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원고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보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논의의 범위를 니까야와 구사론이라는 두 문헌에 

한정하고, 다시 이 범위 안에서 기존에 다루었던 내용을 대폭 수정하는 방식으로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목 차

Ⅰ. 시작하는 말

Ⅱ. 니까야의 사념처

Ⅲ. 구사론의 사념처

Ⅳ. 구사론의 사념처와 수행의 위계 

Ⅴ. 니까야와 구사론의 사념처 비교

Ⅵ. 마치는 말

 

[국문 요약] 

본고는 니까야와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를 분석․비교한다. 니까야에서는 지식념과 부정관을 사념처의 세부 항목으로 분류한다. 또한 사념처의 와중에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시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구사론에서는 지식념과 부정관을 사념처가 아닌 사마타 실천법으로 간주한다. 또한 사념처 자체에 대해서는 위빠사나 일변도의 수행으로 규정한다. 

 

사념처에 관한 두 문헌의 차이는 수행의 위계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대념처경 등의 니까야 문헌에는 사념처를 통해 아라한이라는 궁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그러나 구사론은 수행의 위계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구분하지만 정작 궁극의 경지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삼간다. 따라서 니까야의 사념처와 구사론의 그것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러한 차이가 니까야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사념처 관련 경전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특히 대념처경의 사념처는 니까야 도처에 산발적으로 묘사되는 잡다한 부류의 실천 유형을 총괄하는 성격을 띤다. 구사론의 사념처는 이러한 분위기가 아비달마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변용은 아비달마라는 시대적 과제를 반영하면서 전래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Ⅰ. 시작하는 말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는 초기불교 이래의 대표적인 명상법이다. 이것은 마음지킴(念, sati)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이라는 심리적 기능을 통해 진행되며,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隨觀, anupassin)을 요체로 한다.1) 사념처라는 명칭은 이들 

‘4가지 대상에 대한 마음지킴의 확립(處, upaṭṭhānā)’을 의미한다. 니까야의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에서는 이것을 통해 5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든가 여섯 터전(六入處) 등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고 기술한다. 나아가 사성제(四聖諦)를 

실현하고 궁극적으로는 아라한의 지혜(完全智, aññā)를 얻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1) 임승택, 「위빠사나의 수행의 원리와 실제」,「불교연구」20집, 한국불교연구원, 
   2004, pp.188-210; 임승택, 「대념처경의 이해」,「근본불교학술대회자료집」, 
   근본불교 수행도량 홍원사, 2002, pp.16-45; 한편 주석 문헌에 근거하여 대념
   처경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실제를 자세히 밝히는 문헌들로는 다음을 참고할 만
   하다. 각묵스님,「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초기불전연구원, 2003; Venerable 
   U Sīlānada, The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Boston: Wisdom Publications, 
   1990.

 

그런데 이러한 사념처는 애초 단일한 형태의 명상법이 아니었다. 이것은 맥락을 달리하는 여러 기법들을 취합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니까야의 입출식상응(入出息相應, Ānāpānasaṃyutta)에 따르면 입출식념(入出息念)과 부정관(不淨觀)은 원래 별개로 행해지던 방법이었다.2) 특히 입출식념은 부정관의 실천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다스리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런데 대념처경에서는 이들 모두를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 kāyānupassin)의 세부 항목으로 배속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대념처경의 사념처가 하나의 단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2) SN. V. pp.320-322 참조; 임승택, 「Paṭisambhidāmagga(無碍解道)의 수행관 연구」, 
   동국대학교박사학위청구논문, 2000, pp.14-15 각주 참조. 

 

본고는 니까야(Nikāya)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bhāṣya, 이하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비교를 목적으로 한다. 주지하듯이 니까야는 남방 상좌부권에서 전해 내려온 초기불교의 문헌이고, 구사론은 주로 북방에서 전해지는 전형적인 부파불교의 문헌이다. 전자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정되는 반면에 후자는 이후 발달된 아비달마의 교리체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문헌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비교는 초기불교 원래의 양상에서 이후의 변화된 모습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니까야의 사념처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을 우선시한다. 즉 실제적으로 포착되는 안팎의 현상들에 대한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통해 교리적 내용을 체득해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점은 니까야 도처에 등장하는 사념처 관련 내용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반면에 구사론의 사념처는 아비달마의 체계적 분류 경향을 뚜렷이 반영한다. 즉 직접적인 통찰보다는 교리적 내용과의 관련성이 두드러지며 실천의 과정 역시 교리체계와 엮이어 복잡한 위계로 서술된다. 이점에서 구사론의 사념처는 초기불교의 그것으로부터 멀어진 느낌이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아비달마시대에 이르러 사념처가 비로소 불교수행의 한 근본으로 격상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3)

3) 이와 관련하여 최봉수는 사념처 수행이 부파불교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수행의 
   한 근본으로 격상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다. 본고의 후반부에서 분명해지겠지만 구사론에서 묘사되는 사념처 수행의 범위는 
   오히려 좁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의 위상 또한 니까야에 묘사되는 정도에 미치
   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봉수, 「부파불교시대의 사념처설에 대하여 
   -유부와 남방상좌부를 중심으로-」,「불교학보」제32집,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
   원, 1995, pp.261-287 참조. 

 

그러나 니까야와 구사론의 사념처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점도 존재하지만 사성제의 실현이라는 공통된 목적도 존재한다. 사념처의 실천은 초기불교 당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구사론의 사념처는 이와 같은 분위기가 아비달마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변용은 아비달마라는 시대적 과제를 반영하면서 전래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본고의 취지는 이 두 문헌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피면서, 시대적 변천에 따른 실천적 변화상을 규명해 보는 데 있다.  

 

Ⅱ. 니까야의 사념처 4)

4) 본 II장에서는 구사론의 사념처와 비교를 위한 목적에서 니까야에 등장하는 사념
   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니까야의 사념처는 필자의 기존 연구에서 이미 충
   분히 다루어졌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본 장은 기존의 연구를 요약하는 정리․수준
   에서 기술하기로 한다. 임승택, 앞의 논문(2004), pp.183-213; 임승택, 앞의 논
   문(2002), pp.11-45. 

 

니까야의 사념처 관련 경전들로는 앞서 언급한 대념처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것 외에도 염처경(念處經, Satipaṭṭhānasutta),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Ānāpānasatisutta), 신지념경(身至念經, Kāyagatāsatisutta), 염처상응(念處相應, Satipaṭṭhānasaṃyutta), 입출식상응

(入出息相應, Ānāpānasaṃyutta) 등을 사념처 관련 경전으로 꼽을 수 있다.5) 그런데 이들 가운데 대념처경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경전들은 대체로 단편적인 내용들에 치중해 있다. 예컨대 염처경은 사성제(四聖諦)에 관련된 부분의 설명이 대념처경에 비해 상세하지 않다. 또한 입출식념경은 입출식념(入出息念) 하나만을 다루면서 이것을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이라는 사념처 전체에 걸친 과정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취한다.

5) MN. I. pp.55-63; MN. III. pp.78-88; MN. III. pp.88-99; SN. V. pp.310-325.

 

한편 신지념경은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 하나만으로 궁극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한다. 이 경우는 몸 하나만을 대상으로 하는 까닭에 사념처가 아닌 일념처(一念處)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염처상응과 입출식상응은 사념처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수행법에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포함한다. 특히 염처상응은 사념처를 설하게 된 경위라든가 수행의 사례 등을 독립된 경전들로 엮어 제시한다. 따라서 사념처가 설해진 배경이라든가 이것이 가져오는 효력 등에 관해서는 폭넓게 살펴볼 수 있지만 사념처 자체에 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이들 중 대념처경과 입출식념경의 사념처에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이들은 니까야에 등장하는 사념처 관련 가르침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자는 단편적으로 전해지던 여러 사념처 기법들을 포괄적으로 망라하며, 사념처에 배속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천양상을 종합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들 중에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이질적인 방법들이 혼재한다. 한편 후자는 호흡이라는 단일한 현상을 통해 몸․느낌․마음․법으로 이어지는 통찰의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특정한 하나의 대상을 중심으로 통찰의 지혜를 증장시켜 나가는 원리를 체계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념처경의 세부적 구성은 어떠한가. 이것은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隨觀, anupassin)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들 4가지는 또 다른 하위의 항목들로 나누어진다. 예컨대 최초의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 kāyāynupassin)은 다음의 14가지 대상으로 갈라진다. 즉 ①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②동작에 대한 알아차림, ③행동에 대한 알아차림, ④32가지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⑤4대 요소(四界)에 대한 알아차림, ⑥~⑭시체의 부패 과정에 대한 9단계의 관찰 등이 그것이다.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은 이러한 14가지의 개별적 대상들에 대한 통찰로 이루어진다.6)

6) 임승택, 앞의 논문(2002), pp.18-19.

 

한편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受隨觀, vedanānupassin)는 다음의 9가지로 분화된다. ①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②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③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④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⑤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⑥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⑦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⑧육체적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⑨정신적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따위가 그것이다. 이들 9가지 느낌은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느낌에서부터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미세한 느낌들까지를 망라한다.7)

7) 임승택, 앞의 논문(2002), pp.19-20.

 

세 번째의 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心隨觀, cittānupassin)은 16가지 유형의 마음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①탐욕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②탐욕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③분노가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④분노가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⑤어리석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⑥어리석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⑦산란함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⑧산란함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⑨넓은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⑩넓은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⑪우월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⑫우월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⑬고요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⑭고요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⑮해탈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⑯해탈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그것이다.8) 

8) 임승택, 앞의 논문(2002), pp.20-21.

 

마지막으로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法隨觀, dhammānupassin)은 다음의 5가지로 나뉜다. ①다섯 장애(五蓋)에 대한 알아차림, ②다섯 집착된 온(五取蘊)에 대한 알아차림, ③여섯 터전(六入處)에 대한 알아차림, ④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에 대한 알아차림, ⑤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그것이다.9) 이들 5가지는 사념처의 실천을 통해 터득하게 되는 체험적 앎에 해당한다. 이들 각각은 앞서 언급한 몸에 속한 14가지 대상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통찰의 대상이 된다. 특히 이들 5가지 가운데 마지막의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에 해당한다. 이것에 대한 실천을 통해 대념처경의 사념처는 최종 완성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9) 임승택, 앞의 논문(2002), pp.21-22.

 

이러한 방식으로 대념처경은 몸․느낌․마음․법에 관련하여 44가지 혹은 21가지의 세부 항목들을 통찰의 대상으로 상정한다.10) 또한 대념처경에서는 이들 각각에 대한 통찰을 통해 진리를 체득해 나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0) 여기에서 44가지란 몸(身)에 관련된 14가지 대상, 느낌(受)에 관련된 9가지 대
    상, 마음(心)에 관련된 16가지 대상, 법(法)에 관련된 5가지 대상을 합한 숫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에서 언급하듯이 느낌과 마음에 관련한 대상은 
    별도의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각기 하나씩으로 간주될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사념처의 실제 세부 관찰 항목은 도합 21가지로 줄어든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몸[․느낌․마음․법]에 관련하여 몸[․느낌․마음․법]에 관련된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隨觀, dhammānupassī)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느낌․마음․법]에 관련하여 몸[․느낌․마음․법]에 관련된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느낌․마음․법]에 관련하여 몸[․느낌․마음․법]에 관련된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머문다. 혹은 몸[․느낌․마음․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samudayadhamm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머문다. 혹은 몸[․느낌․마음․법]에서 사라지는 현상들(vayadhamm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머문다. 혹은 몸[․느낌․마음․법]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samudayavayadhamm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머문다.

DN. II. pp.292 ff; 임승택, 앞의 논문(2002), p.36 재인용: iti ajjhattaṃ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Samud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tissatimattāya.

 

인용문은 몸․느낌․마음․법을 관찰하면서 일어나는 현상(samudayadhammā), 사라지는 현상(vayadhammā),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samudayavayadhammā)을 포착하는 양상을 묘사한 정형구이다. 특히 이 인용문은 사념처의 실천이 위빠사나(vipassanā)로 전향되는 과정을 밝힌다고 할 수 있다.12)

12) 임승택, 앞의 논문(2002), pp.32-37. 

 

그런데 대념처경에서는 앞서 언급한 44가지 세부 대상들 가운데 21가지에 대해서만 이 정형구를 배대한다. 즉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에서 14차례,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受隨觀)에서 1차례, 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心隨觀)에서 1차례,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法隨觀)에서 5차례이다. 몸의 영역에 관련하여 14차례, 법의 영역에 관련하여 5차례씩 반복되는 지속적인 관찰(隨觀)은 몸과 법의 영역에 속한 각각의 현상들이 독립적이며, 그들에 대한 통찰 또한 자체적으로 완결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더라도 일어남(集)과 사라짐(滅)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몸과 법의 영역에 관련한 19가지 통찰의 과정은 독자적인 수행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컨대 입출식념 혹은 지식념에 해당하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과 부정관에 속하는 ‘32가지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혹은 ‘시체의 부패 과정에 대한 관찰’ 따위는 모두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에 포함되지만 실제로는 별개의 독립된 방법이다. 그러나 느낌의 영역에 속한 9가지와 마음의 영역에 속한 16가지는 개별적인 대상이 아니다. 즉 느낌이라든가 마음에 해당하는 세부 현상들은 일어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전체 과정을 지켜볼 때라야 비로소 무상의 진리에 대한 통찰로 연결될 수 있다. 예컨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따위는 명목상으로만 구분될 뿐 단일한 느낌이 변화하는 양상에 불과하다. 느낌과 마음의 영역에 속한 세부 대상들은 실제로는 하나에 불과하며 그들에 대한 구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 각각을 별개의 독립된 현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한편 법에 대한 지속적 관찰(法隨觀)에 해당하는 5가지 대상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13) 여기에 속한 다섯 장애(五蓋),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 여섯 터전(入處),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사성제(四聖諦) 등은 각기 독립된 항목들로서 개별적인 통찰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들은 몸․느낌․마음이라는 세 영역에 대한 통찰을 통해 체득하는 내용을 일괄 나열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몸․느낌․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 5가지 양상의 법에 대한 통찰로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법의 영역에 속한 5가지는 사념처 자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는 동시에 세 영역에 대한 통찰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로서의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13) 임승택, 앞의 논문(2002), pp.37-45. 

 

대념처경에서는 사념처의 의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이것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것이며,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며, 괴로움과 근심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며, 올바름에 이르기 위한 것이며, 열반(nibbāna)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기술한다.14) 또한 종결 부분에서 사념처를 닦으면 현생에서 아라한의 지혜(完全智, aññā)를 얻거나 혹은 집착이 남은 경우에는 불환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15) 이것은 사념처의 실천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었음을 드러낸다. 이상과 같은 대념처경의 사념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 DN. II. pp.290: Ekāyano ayaṃ bhikkhave maggo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da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15) DN. II. pp.314-315.

 

<도식 1> 대념처경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실천 과정
사념처 실천의 동기(괴로움을 소멸, 열반의 실현)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14가지)                       ̄↓         
↓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1가지)                   ̄↓
       ↓    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1가지)                  ̄↓
             ↓  현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5가지)          ↗

                                                                      ↓
                                                           아라한의 지혜 혹은 불환의 성취

 

도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념처경의 사념처는 몸․느낌․마음에 대한 관찰과 이들 셋을 통한 법에 대한 관찰이라는 방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다시 거기에 이들 4가지 각각을 통한 현상(法, dhamma)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이중의 통찰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아라한의 지혜 혹은 불환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또한 이러한 성취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현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은 몸․느낌․마음에 대한 관찰을 걸친 연후에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의 단계로 이어지는 점진적인 방식에 의할 수도 있고, 몸이나 느낌 따위에 대한 개별적인 관찰과 더불어 곧바로 이루어지는 다소 급진적인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이제 입출식념경의 사념처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문헌에 묘사되는 사념처는 들숨(āna)․날숨(apāna)에 대한 마음지킴으로 이루어진다. 앞서의 대념처경에서는 들숨․날숨이 몸의 영역에 속한 14가지 대상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으로 배속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바로 이것이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사념처 전체로 확대되는 방식을 취한다. 물론 호흡이라는 현상 자체는 몸의 영역에 국한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집중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느낌이라든가 마음현상까지를 포착하게 된다. 바로 이들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느낌과 마음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통찰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입출식념이 닦이는가? 어떻게 많이 닦으면 사념처가 원만해 지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게 들이쉴 때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린다. 길게 내쉴 때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육체적 상카라를 가라앉히면서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몸에 관련하여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을 지닌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기쁨을 느끼면서 들이쉴 것이라고 익힌다. 기쁨을 느끼면서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마음의 상카라를 가라앉히면서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느낌에 관련하여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受隨觀)을 지닌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을 느끼면서 들이쉴 것이라고 익힌다. 마음을 느끼면서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마음에 관련하여 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心隨觀)을 지닌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無常隨觀) 들이쉴 것이라고 익힌다. 무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탐냄의 떠남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離貪隨觀) 들이쉴 것이라고 익힌다.…  버림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捨離隨觀)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법에 관련하여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法隨觀)을 지닌다.

MN. III. pp.83-84(Vin. III. p.70 이하; SN. V. p.311 이하; AN. V. p.111 이하): Kathaṃ bhāvitā ca 
bhikkhave, ānāpānasati. kathaṃ bahulikatā cattāro satipaṭṭhāne paripūreti: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ū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kāye kāyānupassī 
bhikkhave,…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pīti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vedanāsu vedanānupassī bhikkhave,…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citt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e cittānupassī bhikkhave,…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anicc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dhammesu dhammānupassī bhikkhave,…   


인용문은 호흡에 대한 통찰 하나만으로 사념처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이러한 입출식념경의 사념처는 간단하면서도 체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사념처의 구조와 관련하여 대념처경에서 보았던 특징적인 내용이 나타난다. 즉 몸(身)․느낌(受)․마음(心)에 해당하는 내용과 법(法)에 해당하는 내용 사이에 간극이 발견된다. 몸․느낌․마음의 세 영역에 해당하는 세부 대상들은 호흡의 양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포착되느냐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한 관찰대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의 영역에 해당하는 무상․탐냄․소멸․버림은 통찰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내용을 다시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대념처경의 법에 대한 지속적 관찰(法隨觀)이 몸․느낌․마음에 대한 관찰의 결과에 해당한다는 사실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입출식념경에서는 사념처의 의의와 관련하여, 이것을 닦고 익히면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를 원만히 하게 되고, 또한 ‘밝은 앎(明, vijjā)에 의한 해탈’을 원만히 하게 된다고 언급한다.17) 또한 이것을 계승하는 소부니까야(Khuddaka-Nikāya)의 Paṭisambhidāmagga(無碍解道)에서도 이 방법을 통해 계의 청정(戒淸淨), 마음의 청정(心淸淨), 견해의 청정(見淸淨), 해탈, 밝은 앎(明), 다해 없어짐의 지혜(盡智), 일어남을 여읜 지혜(無生智)를 얻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입출식념에 의한 사념처 역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8)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 MN. III. pp.87-88: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사념처를 닦고 익히면 일곱 깨달음의
    요소를 원만히 하게 된다.… 또한 비구들이여 일곱 깨달음의 요소를 닦고 익히면 
    ‘밝은 앎(明, vijjā)에 의한 해탈’을 원만히 하게 된다(Evaṃ bhāvitā kho bhikkhav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evaṃ bahulīkatā satta sambojjhaṅge paripūrenti.… Evaṃ 
    bhāvitā kho bhikkhave, satta bojjhaṅgā evaṃ bahulīkatā vijjāvimuttiṃ paripūrenti).
18) Ānāpānasatisutta와 동일한 방식의 사념처를 설명하는 Paṭisambhidāmagga(無碍
    解道)의 Ānāpānakathā(入出息論)에서는 입출식념을 통해 발현되는 지혜(ñāṇa)를 
    220가지 양상으로 열거한다. 거기에는 다섯 기능(五根),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여덟의 거룩한 길(八支聖道),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신통의 요소(四神
    足), 계의 청정(戒淸淨), 마음의 청정(心淸淨), 견해의 청정(見淸淨), 해탈, 밝은 앎
    (明), 다해 없어짐의 지혜(盡智), 일어남을 여읜 지혜(無生智) 등이 망라된다. 이러한 
    내용은 아비달마적 경향의 진전과 더불어 초기불교의 사념처가 어떠한 방식으로 달
    라지는가를 보게 하는 최초의 사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PS. I. pp.
    180-182 참조.

<도식 2> 입출식념경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실천 과정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지킴
              ↕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4가지)                   ̄↓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4가지)          ̄↓
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4가지)  →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4가지)
                                                    ↓
                                            일곱 깨달음의 요소
                                                    ↓
                                            밝은 앎에 의한 해탈

 

앞서 대념처경의 사념처는 몸․느낌․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 현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일련의 과정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순차적․점진적 방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 혹은 일부 단계를 건너 뛰어 곧바로 몸에 대한 관찰에서 현상에 대한 관찰로 넘어가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입출식념경의 사념처는 몸․느낌․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 자연스럽게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로 이어진다. 이점에서 입출식념의 사념처는 한결 단순하면서도 체계적인 면모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입출식념경은 입출식념이라는 단일한 기법을 통해 사념처 전체를 닦아나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런데 차후 살펴보게 될 구사론에서는 이러한 입출식념 자체를 사념처에서 배제하며 오로지 마음의 안정을 위한 사마타 기법으로만 취급한다.  

 

Ⅲ. 구사론의 사념처

 

구사론에서는 수행(修習, bhavanā)의 과정을 사마타(止, śamatha)와 위빠사나(觀, vipaśyanā)라는 두 차원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사념처를 후자의 위빠사나에 배속시킨다. “사마타(止)를 닦아 성취하고 난 연후에 위빠사나(觀)를 성취하기 위해 염주(念住, smṛty-upasthāna)를 닦아야 한다.”라는 언급이 곧 그것이다.19) 이러한 언급은 사념처를 다루는 첫 대목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 수행법의 위상에 관한 독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 依已修成止 爲觀修念住『大正藏』29권, p.118c; 여기에서 염주란 곧 ‘마음지킴의 
    확립(smṛty-upasthāna)’으로서 사념처의 ‘념처(sati-upaṭṭhānā)’를 달리 옮긴 것
    이다. 이들은 산스크리뜨(구사론)와 빨리어(니까야)라는 차이가 있을 뿐 실제로는 
    동일한 용어이다. 

 

한편 구사론에서는 위의 분류에 앞서 부정관(不淨觀, aśubhā)과 지식념(持息念, ānāpānasmṛti)을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2가지 문으로 규정한다.20) 그리고 바로 이들에 대해 사마타를 닦기 위한 것이라는 언급을 덧붙인다.21) 그런데 앞장에서 보았듯이 대념처경에 따르면 부정관과 지식념은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의 세부 내용에 해당한다. 특히 지식념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의미하며, 부정관은 ‘32가지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과 ‘시체의 부패 과정에 대한 관찰’에 해당한다. 더욱이 입출식념경의 사념처는 ‘호흡에 대한 마음지킴’ 즉 지식념 자체만으로 구성된다.

20) 入修要二門 不淨觀息念『大正藏』29권, p.117b. 
21) 由此二門心便得定. 心得定已復何所修.『大正藏』29권, p.118c.

따라서 구사론에서 바라보는 사념처는 니까야의 그것으로부터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까야에서 부정관과 지식념은 사념처의 실제 방법에 해당한다. 그러나 구사론에 따르면 이들은 사마타의 영역에 배속되며 사념처는 물론 위빠사나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구사론의 사념처는 부정관과 지식념을 배제하며 사마타와 대비를 이루는 위빠사나 일변도의 실천법이다. 따라서 구사론의 사념처는 니까야의 그것에 비해 협소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사론에서는 니까야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해석을 추가함으로서 사념처의 과정에서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맨 먼저 등장하는 내용은 자상(自相, svalakṣaṇa)과 공상(共相, sāmānyalakṣaṇa)에 의해 사념처를 닦아 나간다는 언급이다.

 

"사념주는 어떻게 수습하는 것인가. 이를 테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써 몸․느낌․마음․법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몸․느낌․마음․법의 각기 차별되는 자성을 일컬어 ‘자상’이라고 하며,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항상하지 않은(非常) 성질이고, 일체의 유루법은 모두 괴로움(苦)의 성질이며, 아울러 일체의 법은 공(空)과 비아(非我)의 성질이라는 것을 일컬어 ‘공상’이라고 한다."22) 
22) 謂如何修習四念住耶. 以自共相觀身受心法. 身受心法各別自性名爲自相. 一切有爲
    皆非常性. 一切有漏皆是苦性. 及一切法空非我性名爲共相.『大正藏』29권, p.118c

인용문에서는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자상과 공상으로 나누어 관찰한다고 기술한다. 여기에서 자상이란 개별적 관찰대상 자체를 가리키고 공상이란 그러한 관찰을 통해 알게 되는 보편적 진리를 의미한다. 즉 몸이나 느낌 따위의 자상에 대한 관찰을 진행하다 보면 공(空), 비아(非我) 따위의 공상을 통찰하게 된다.     
 
구사론은 자상으로서의 4가지 대상을 하나씩 관찰할 수도 있고 혹은 한꺼번에 관찰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몸․느낌․마음의 3가지에 대해서는 ‘뒤섞이지 않는 개별적 관찰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부잡연(不雜緣, asaṃbhinnālambana)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마지막의 법은 앞서의 3가지와 ‘함께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잡연(雜緣, saṃbhinnālambana)으로 달리 부른다. 물론 마지막의 법이라는 대상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관찰대상(不雜緣)도 될 수 있다. 따라서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은 잡연과 부잡연이라는 명칭을 함께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사[념주] 중에서 [앞의] 세 종류만 [소연(所緣)이 섞여 있지 않는] 부잡연(不雜緣)이며, 네 번째 [염주는] 잡연(雜緣)과 부잡연이라는 두 가지에 해당한다. 즉 만약 오로지 법만을 관찰하는 경우라면 부잡연이라고 하며, 몸 등에 대해 2가지나 3가지 혹은 4가지를 모두 관찰하는 경우라면 이를 일컬어 잡연이라고 한다."23) 
23) 四中三種唯不雜緣. 第四所緣通雜不雜. 若唯觀法名不雜緣. 若於身等二三或四. 
    總而觀察名爲雜緣.『大正藏』29권, p.119a.

몸이나 느낌 혹은 마음 따위를 선택하여 그들 중 어느 하나만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부잡연에 해당한다. 그러나 몸을 관찰하는 동시에 법을 통찰하는 경우는 2가지 대상이 뒤섞인 것으로 잡연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사론은 3가지 혹은 4가지 대상 모두를 동시에 관찰할 수 있다고 기술한다. 
 
앞서 보았듯이 대념처경에도 몸이나 느낌에 대한 관찰이 법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내용이 나타난다. 또한 입출식념경은 호흡이라는 단일한 대상을 중심으로 하면서 느낌이라든가 마음으로까지 관찰의 범위가 넓어지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인용문에 나타나는 잡연(雜緣)과 부잡연(不雜緣)에 의한 관찰은 니까야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는 여기에서와 같은 다수의 대상들에 대한 동시적인 관찰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잡연이라든가 부잡연과 같은 용어의 사용도 없다.   
 
다음의 3가지 관점 역시 니까야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사념처의 본질에 대한 입체적으로 규명의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념주의 본질(體, svabhāva)에는 각기 3가지가 있다. 자성(自性)과 상잡(相雜)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성염주는 혜를 본질로 하는데, 이러한 혜에도 3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문(聞) 등에 의해 성취되는 혜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3종 염주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상잡염주는 이러한 혜와 그 밖의 구유하는 법을 본질로 하며, 소연염주는 이러한 3가지 혜의 소연이 되는 제법을 본질로 한다."24)
24) 此四念住體各有三. 自性相雜所緣別故. 自性念住以慧爲體. 此慧有三種. 謂聞等所成. 
    卽此亦名三種念住. 相雜念住以慧所餘俱有爲體. 所緣念住以慧所緣諸法爲體.『大正藏』
    29권, pp.118c-119a.

인용문에 따르면 사념처의 본질은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맨 먼저 거론되는 자성염주(自性念住, svabhāva -smṛty-upasthāna)는 혜를 내용으로 한다. 사념처에 대해 미리 배우거나 알지 못하면 이것을 닦아 나갈 수 없다. 또한 실제 수행에 들어가더라도 그때그때 분명한 앎과 지혜가 전제되어야만 원만한 실천이 가능하다. 자성염주는 이러한 지혜의 작용에 근거하여 사념처의 원리를 드러낸다. “모든 지속적인 관찰(循觀, 隨觀)은 오로지 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니 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몸 등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의 작용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설명 또한 동일한 맥락이다.25) 
25) 諸循觀 名唯目慧體. 非慧無有循觀用故.『大正藏』29권, p.119a.

또한 위의 인용문은 사념처의 원리인 혜 자체에 대해서도 세분화한다. 이들을 온전히 제시하면 문소성혜(聞所成慧), 사소성혜(思所成慧), 수소성혜(修所成慧)이다. 이들 3가지에 근거하여 자성염주는 문소성염주(聞所成念住), 사소성염주(思所成念住), 수소성염주(修所成念住) 등으로 다시 구분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사론은 사념처의 원리를 세 가지 혜로 설명하며, 바로 이와 같은 혜에 근거하여 염주라는 명칭이 뒤따른다고 설명한다. “이치상으로 혜가 마음지킴(念)을 확립한다(住)고 마땅히 말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혜에 대해 염주라는 이름을 내세운 것이다. 혜에 따라 관찰한 것을 명확히 하는 까닭이다.”라는 언급이 바로 그것이다.26)

26) 理實應言慧令念住. 是故於慧立念住名. 隨慧所觀能明記故.『大正藏』29권, p.119a. 

두 번째의 상잡염주(相雜念住, saṃsarga-smṛty-upasthāna)는 “혜와 더불어 그 밖의 함께 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以慧所餘俱有爲體)”으로 설명된다.27) 이것은 혜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수반되는 여러 심리적 작용(心所)이 함께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28) 이 상잡염주는 사념처의 실천에 필요한 심리적 구성요소 전체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의 원리적 측면은 자성염주라는 혜의 작용만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의 과정은 혜는 물론 그것 이외의 여러 심리적 요인들이 함께 작동하는 가운데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잡염주는 수행의 실제적 측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 相雜念住以慧所餘俱有爲體.『大正藏』29권, p.119a.
28) 권오민 옮김,「아비달마구사론」3권, 서울: 동국역경원, 2002, p.1034 참조.

세 번째의 소연염주(所緣念住, ālambaṇa-smṛty-upasthāna)란 “혜의 소연이 되는 제법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29) 이것은 다름 아닌 몸․느낌․마음․법이라는 4가지 관찰대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소연염주는 앞서의 자성염주와 상잡염주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토대가 된다. “먹거리(食)와 접촉(觸)과 정신․물질현상(名色)과 마음기울임(作意)이 발생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몸․느낌․마음․법이 발생하며, 먹거리와 접촉과 정신․물질현상과 마음기울임이 소멸하기 때문에 몸․느낌․마음․법이 소멸한다. 이것은 곧 소연염주를 설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는 언급은 소연염주의 의미를 분명히 해준다.30) 
29) 所緣念住以慧所緣諸法爲體.『大正藏』29권, p.119a.
30) 食觸名色作意集故. 如次令身受心法集. 食觸名色作意滅故. 如次令身受心法滅. 
    應知彼說所緣念住.『大正藏』29권, p.119a.

자성염주는 사념처의 원리를 나타내고 소연염주는 관찰의 대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자성염주의 혜만으로는 번뇌의 발생과 소멸이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소연염주의 몸이나 느낌 역시 사념처의 여건은 될 수 있지만 실제 과정을 규명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상잡염주로 표현되는 심리적 작용(心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사념처의 실제 과정은 혜의 작용에 수반되는 여러 심리적 요인들과 더불어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문헌에서는 오직 상잡염주에 의해서만 번뇌를 단절할 수 있다고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31) 이상과 같은 3가지 본질에 관한 언급은 사념처의 구조에 관한 새로운 입체적 조명으로서 전형적인 아비달마의 분류 경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31) 예컨대「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Abhidharma-mahāvibhāṣā-śāstra」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잡염주에 의해서만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기술한다. “이 3가지 
    염주 가운데 어느 것이 번뇌를 끊는가 하면 오로지 상잡염주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끊지 못한다(問此三念住誰斷煩惱。答唯相雜念住
    能斷煩惱非餘).”『大正藏』27권, p.937b.

한편 구사론은 소연염주의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순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대상이 거친 것부터 마땅히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혹은 온갖 욕탐은 몸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사념주는 몸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지만 몸을 탐하는 것은 느낌에 대해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느낌에 대해 즐거워하는 것은 마음이 조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마음이 조화되지 못한 것은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낌 따위에 대해 이와 같은 순서로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32)
32) 隨境麤者應先觀故. 或諸欲貪於身處轉. 故四念住觀身在初. 然貪於身由欣樂受. 
    欣樂於受由心不調. 心之不調由惑未斷. 故觀受等如是次第.『大正藏』29권, p.119a.

인용문에 따르면 몸․느낌․마음․법은 거친 것에서부터 미세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대상은 결과와 그 원인이라는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실천․수행의 과정을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재고가 필요할 듯하다. 니까야의 사념처가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순서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경우에 이와 같은 순서가 엄격히 지켜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예컨대 수상응(受相應, Vedanāsaṃyutta)에서와 같이 몸에 대한 관찰이 생략된 채 느낌에 대한 관찰만이 강조되는 경우도 있다.33)  
33) SN. IV. pp.205 ff.; 또한 이점은 오늘날 남방권의 상좌부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위빠사나(vipassanā) 명상이 대념처경에 근거를 두고 있음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예컨대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
    가 보급한 위빠사나는 좌선과 경행을 중심으로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
    에 치중한다. 반면에 고엔까(S. N. Goenka, 1924- )의 위빠사나는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受隨觀, vedanānupassin)을 특징으로 한다. 임승택, 앞의 논문
    (2004), 201-204.

구사론은 4가지 대상 각각이 지니는 수행론적 의의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이러한 사념주는 순서대로 그것이 청정하고(淨, śuci), 즐겁고(樂, sukha), 항상하고(常, nitya), 자아(我, ātma)라는 4가지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오로지 4가지만 존재하여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것이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34) 이 언급은 4가지 전도된(顛倒, viparyāsa) 견해를 4가지 대상에 연결시켜 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인위적인 조합으로서 재고의 여지가 많다. 예컨대 대념처경에 따르면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은 단순히 부정관의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느낌에 대한 그것(受隨觀)은 괴로움(苦)에 대한 자각만을 의도하지 않는다. 전자에는 부정관만이 아니라 호흡이라든가 동작 따위에 대한 관찰이 포함되며, 후자에는 괴로운 느낌만이 아니라 즐거운 느낌에 대한 관찰도 포함된다. 
34) 此四念住如次治彼淨樂常我四種顚倒. 故唯有四不增不減.『大正藏』29권, p.119a.

Ⅳ. 구사론의 사념처와 수행의 위계 
 
구사론에 기술되는 사념처의 독특성은 수행의 위계에 관한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니까야에서는 살펴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아비달마의 정교한 교리체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의 위계에 관한 구사론의 언급은 몸 따위의 4가지에 대한 개별적․순차적 관찰이 그들 모두에 대한 동시적 관찰로 확대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과 연관시켜 말하자면 잡연(雜緣)을 통한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法隨觀)이 그것이다. 바로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비상(非常, anitya), 고(苦, duḥkha), 공(空, śūnya), 무아(無我, anātma)라는 4가지를 분명히 자각하게 된다.35) 
35) 彼觀行者. 居緣總雜法念住中. 總觀所緣身等四境修四行相. 所謂非常苦空非我. 
   『大正藏』29권, p.119b.

이러한 체험과 더불어 수행자는 순결택분(順決擇分)의 난법(煖法, uṣmagata)으로 일컬어지는 상태에 도달하여 사성제(四聖諦) 전체를 통찰하게 된다. 난법이란 번뇌라는 땔감을 태우는 거룩한 도(道, mārga)의 불길이 생겨나기 직전의 따스한 상태로 묘사된다.36)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사성제 각각을 4가지 방식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즉 고성제에 관해서는 앞서의 비상, 고, 공, 무아로 관찰하고, 집성제에 대해서는 인(因, hetu), 집(集, samudaya), 생(生, prabhava), 연(緣, pratyaya)으로, 멸성제에 대해서는 멸(滅, nirodha), 정(靜, śānta), 묘(妙, praṇīta), 리(離, niḥsaraṇa)로, 도성제에 대해서는 도(道, mārga), 여(如, nyāya), 행(行, pratipatti), 출(出, nairyāṇika)로 통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성제에 대한 통찰의 방식은 도합 16가지에 이르게 된다. 
36) 是能燒惑薪聖道火前相. 如火前相故名爲煖.『大正藏』29권, p.119b.

이러한 난법의 단계는 다시 정법(頂法, mūrdhan)의 단계로 이어진다. 정법에서는 난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성제를 16가지로 관찰하는 수행을 닦는다. 이러한 정법은 물러남이 있는 근기(動善根) 중에서는 가장 최후의 수승한 단계로 설명된다.37) 즉 정법이라는 명칭은 아직 퇴보의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범부의 상태로서는 가장 으뜸이 되는 경지라는 의미이다. 이 단계를 통과하고 나면 마침내 사성제의 이치를 확정적으로 터득하여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경지인 인법(忍法, kṣānti)의 단계에 도달한다.
37) 動善根中此法最勝如人頂故名爲頂法.『大正藏』29권, p.119b.


인법이란 사성제의 이치를 스스로 인가(忍可)한다는 의미와 함께 이 이후로는 더 이상 물러남이 없다(無退墮)는 의미로 풀이된다.38) 다시 인법은 하인(下忍), 중인(中忍), 상인(上忍)의 셋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가운데 앞의 둘은 정법의 단계와 실제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언급된다.39) 그러나 상인의 경우는 관찰의 범위가 좁혀져 ‘욕계의 영역(kāmāvacara)에 속한 고성제’를 비상(非常)으로 통찰하는 것에 한정된다.40) 이 상품의 인법은 오로지 1찰나만을 닦는 것으로 언급되며, 이 1찰나의 분명한 통찰과 더불어 세제일법(世第一法, laukikāgradharma)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41) 세제일법 역시 아직 번뇌를 지닌 유루(有漏)의 세계에 속하지만, 세간(世間) 중에서는 최고로 뛰어난 경지인 까닭에 그러한 명칭으로 일컬어진다.42) 
38) 於四諦理能忍可中此最勝故. 又此位忍無退墮故名爲忍法.『大正藏』29권, p.119c.
39) 然此忍法有下中上. 下中二品與頂法同. 謂具觀察四聖諦境及能具修十六行相.『大正
    藏』29권, p.119c.║
40) 上品有異. 唯觀欲苦與世第一相鄰接故.『大正藏』29권, p.119c.
41) 從此位無間起勝善根一行一刹那名上品忍. 此善根起不相續故. 上品忍無間生世第一法. 
   『大正藏』29권, p.119c.
42) 此有漏故名爲世間. 是最勝故名爲第一. 此有漏法世間中勝. 是故名爲世第一法.『大正
    藏』29권, p.119c.

세제일법에 도달하면 곧바로(無間) 번뇌가 다한 무루의 법인(法忍, dharmakṣānti)과 법지(法智, dharmajñāna)을 얻게 된다.43) 그리고 이 법인(혹은 類忍)과 법지(혹은 類智)로써 ‘욕계의 영역에 속한 사성제’와 ‘욕계를 떠난 영역(色界, 無色界) 속한 사성제’를 2단계로 통찰하는 16찰나의 마음이 발생한다.44) 바로 이 16찰나의 마음으로 사성제를 전체를 통찰하는 것을 일컬어 사성제에 대한 명료한 앎(聖諦現觀, satyābhisamaya)이라고 부른다.45) 이러한 명료한 앎이 진행되는 16찰나의 마음 가운데 선행하는 15찰나는 견도(見道, darśanamārga)에 해당하고, 마지막 16번째의 마음은 수도(修道, bhāvanāmārga)로 분류된다.46) 
43) 世第一無間卽緣欲界苦 生無漏法忍 忍次生法智.『大正藏』29권, p.121a. 
44) 16찰나의 마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욕계의 영역에 속한 고성제’를 대상으로 
    하는 ① 苦法智忍, ② 苦法智, ‘욕계의 영역을 떠난 고성제’를 대상으로 하는 ③ 苦
    類智忍, ④ 苦類智, ‘욕계의 영역에 속한 집성제’를 대상으로 하는 ⑤ 集法智忍, ⑥ 
    集法智, ‘욕계의 영역을 떠난 집성제’를 대상으로 하는 ⑦ 集類智忍, ⑧ 集類智, ‘욕
    계의 영역에 속한 멸성제’를 대상으로 하는 ⑨ 滅法智忍, ⑩ 滅法智, ‘욕계의 영역을 
    떠난 멸성제’를 대상으로 하는 ⑪ 滅類智忍, ⑫ 滅類智, ‘욕계의 영역에 속한 도성제’
    를 대상으로 하는 ⑬ 道法智忍, ⑭ 道法智, ‘욕계의 영역을 떠난 도성제’를 대상으로 
    하는 ⑮ 道類智忍, ⑯ 道類智가 그것이다.『大正藏』29권, pp.121b- 121c.
45) 如是次第有十六心. 總說名爲聖諦現觀.『大正藏』29권, p.121c.
46) 苦法智忍爲初. 道類智忍爲後. 其中總有十五刹那. 皆見道所攝. 見未見諦故. 至第
    十六道類智時. 無一諦理未見今見. 如習曾見. 故修道攝.『大正藏? 』29권, p.122a.

견도와 수도에 이르러 수행자는 ‘거룩한 이(ariya)’의 반열에 들게 된다. 구체적으로 ‘첫 번째 결과를 향하는 이(初果向, prathamaphalapratipannaka)’ 즉 예류도(預流道, srotāpattimārga)에서부터 ‘세 번째 결과를 향하는 이(第三果向, tṛtīyapratipannaka)’ 즉 불환도(不還道, anāgāmimārga)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수도에 이른 수행자는 ‘결과에 머무는 자(住果, phalastha)’라는 명칭과 함께 예류과(預流果, srotāpattiphala), 일래과(一來果, sakṛdāgāmiphala), 불환과(不還果, anāgāmiphala) 등의 경지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사론의 사념처는 견도와 수도에 관한 언급을 끝으로 일단락된다. 이상의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식 3>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실천 과정과 수행의 위계
사마타(부정관.지식념)
   |
     →  위빠사나(사념주 = 자성염주.상잡염주.소연염주)
                 ↕↕
          부잡연의 관찰   →      잡연의 관찰   ̄
                                                     ↓
          자상의 관찰  →   공상의 관찰  →     난법  →  정법
                                                                 ↓
 무학도  ← …    수도  ←   견도   ←  세제일법   ←   인법

이상과 같이 사념처를 통한 수행의 위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도식에 나타나듯이 구사론의 사념처는 4가지 대상에 대한 언급이 간략한 방식으로 축소된다. 반면에 수행의 위계에 관련한 내용은 매우 상세하게 구분되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난법에서부터 시작하여 정법이라든가 인법 등을 통과하여 수도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이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도의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인 무학도(無學道, aśaikṣamārga)만이 남게 된다. 즉 무학도에 도달할 때 비로소 아라한(阿羅漢, arhat)이라는 궁극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나 사념처 관련한 구사론의 기술은 수도의 단계에서 그치며 아라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 또한 구사론의 사념처에서 살펴볼 수 있는 간과할 수 없는 독특한 측면이다. 

 

Ⅴ. 니까야와 구사론의 사념처 비교 

 

이상과 같이 니까야와 구사론에 묘사되는 사념처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비교는 사념처의 위상, 관찰대상, 관찰의 과정, 목적과 결과라는 네 측면에 걸쳐 논의될 수 있다. 먼저 사념처의 위상에 관해 언급하자면 두 문헌의 입장 차이는 매우 크다. 니까야의 사념처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모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47) 그러나 구사론에서는 사념처를 오로지 위빠사나를 닦기 위한 수행으로 분류한다. 또한 대념처경에서는 부정관과 지식념을 사념처의 주요 방법으로 언급하는 반면에 구사론에서는 이들을 오직 사마타를 닦기 위한 것으로 간주한다.

47) 앞서 II장에서 보았듯이 대념처경에서는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受隨觀)과 
    관련하여 느낌의 양상을 9가지로 세분화된다. 그 중에서 ‘정신적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일상의 거친 느낌이 가라앉은 상태에 해당한다. 이것
    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은 사념처의 과정에 사마타의 상태가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정준영, 「대념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
  「불교학연구」7집, 불교학연구회, 2003, pp.195-221 참조.

 

관찰대상을 비교하자면 두 문헌 모두 몸․느낌․마음․법이라는 4가지를 통찰의 대상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일단 공통적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부분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확인했듯이 대념처경에는 전체 44가지에 이르는 세부적 관찰대상에 관한 묘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구사론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관찰대상에 관한 구사론의 기술은 다음으로 한정된다. 

 

"몸(身)의 자성은 대종(大種)과 조색(造色)이며, 느낌(受)과 마음(心)의 자성은 자신의 명칭에 의해 드러난 바와 같다. 법(法)의 자성은 이 3가지를 제외한 그 밖의 법을 말한다. 경전에서 가르치길, 선정에 머물면서 극미와 찰나로써 각기 개별적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을 일컬어 신념주가 원만히 성취되었다고 하며, 그 밖의 세 염주의 원만한 모습도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48)

48) 身自性者. 大種造色. 受心自性如自名顯. 法自性者. 除三餘法. 傳說. 在定以極微刹那.
    各別觀身名身念住滿. 餘三滿相如應當知.『大正藏』29권, p.118c.

 

대종(大種, bhūta)과 조색(造色, bhautika)이란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라는 4가지 요소(四大)와 이들 4가지로부터 파생된 물질현상(四大所造色)을 가리킨다. 확인할 수 있듯이 구사론에서는 바로 이들을 극미(極微, paramāṇu)와 찰나(刹那, kṣaṇika)로써 관찰한다고 기술한다. 극미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단위이며 찰나 또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시간의 최소단위이다. 따라서 극미와 찰나로써 관찰한다는 것은 일상을 뛰어넘는 고도의 집중과 전문적인 기법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은 구사론에서 가리키는 관찰(隨觀) 대상으로서의 몸(身)이 있는 그대로(yathātaṁ)의 신체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Ⅱ장에서 보았듯이 대념처경에 묘사되는 관찰대상은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호흡이나 동작 혹은 신체적 행위 등이다. 그러나 구사론의 사념처는 고도의 전문적인 관찰기법을 필요로 하는 대상들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념처경에도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의 다섯 번째 세부 내용으로서 땅의 계(地界), 물의 계(水界), 불의 계(火界), 바람의 계(風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49) 그러나 극미라든가 찰나로써 관찰한다는 따위의 표현은 대념처경은 막론하고 니까야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을 수 없다.

49) DN. II. p.294: 다시 비구들이여, 한 비구가 있어, 그의 몸에 대해 있는 그대로에 
    열중하여, 계(界)로서 관찰한다. 즉 ‘이 몸에는, 땅의 계(地界), 물의 계(水界), 불
    의 계(火界), 바람의 계(風界)가 있다.’고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암소를 도살해서, 네거리의 큰 길에 부위별로 나누어 놓고
    서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바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한 비구가 있어, 그의 몸에 
    대해 있는 그대로에 열중하여 계(界)로서 관찰한다. 즉 ‘이 몸에는, 땅의 계(地界), 
    물의 계(水界), 불의 계(火界), 바람의 계(風界)가 있다’고 [관찰한다.](puna ca 
    paraṃ bhikkhave bhikkhu imameva kāyaṃ yathāṭhitaṃ yathāpaṇihitaṃ dhātuso 
    paccavekkhati: atthi imasmiṃ kāye paṭhavīdhātuāpo 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 
    ti. Seyyathāpi bhikkhave dakkho goghātako vā goghātakantevāsī vā gāviṃ 
    vadhitvā cātummahāpathe bilaso paṭivibhajitvā nisinno assa,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imameva kāyaṃ yathāṭhitaṃ yathāpaṇihitaṃ dhātuso 
    paccavekkhati: atthi imasmiṃ kāye paṭ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ū ti.)

 

한편 구사론에서는 느낌․마음․법 따위의 3가지 관찰대상에 대해서는 매우 간략하게 처리한다. 즉 느낌과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세부적 구분도 없이 명칭이 지시하는 그 자체로 묘사하고, 법에 대해서는 앞서의 3가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기술한다. 이점은 대념처경에서 느낌의 영역을 9가지로, 마음의 영역을 16가지로, 법의 영역을 5가지로 구분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사실 위의 인용문만으로는 구사론에서 가리키는 느낌․마음․법이 과연 어떠한지 분명히 알 수 없다. 이것은 다른 대목에서 볼 수 있는 상세한 기술방식과는 대조적이다. 관찰대상이라는 측면에 한정할 때 구사론의 사념처는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관찰의 과정에 관한 두 문헌의 언급은 매우 유사한 양상이다. 대념처경과 입출식념경에서는 공통적으로 몸․느낌․마음의 세 영역과 마지막의 법의 영역 사이에 간극을 둔다. 앞의 셋은 단순한 관찰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마지막의 법은 수행의 결과로서 체득하게 되는 교리적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조는 몸․느낌․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법의 체득으로 나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니까야는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병렬적으로 일괄 나열할 뿐 앞의 셋과 맨 후자 사이의 간극에 관한 별도의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이상과 같은 전체 내용을 숙지한 연후라야 가능하다.  

 

그런데 구사론에서는 이 부분에 관련하여 잡연(雜緣)과 부잡연(不雜緣)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몸․느낌․마음․법이 개별적인 관찰 대상이 될 때에는 부잡연이라는 명칭을 적용하고, 통찰의 깊이 깊어짐에 따라 몸․느낌․마음의 셋과 법의 영역이 동시적인 관찰 대상이 될 때에는 잡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한 개별적인 관찰대상에 대해서는 자상(自相)이라는 명칭을, 그러한 관찰을 통해 알게 되는 보편적 진리에 대해서는 공상(共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용어의 도입은 통찰의 진전되는 과정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 사념처의 진행 양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돕는다. 

 

사념처의 목적과 결과 그리고 수행의 위계에 대한 기술은 어떠한가. Ⅱ장에서 보았듯이 대념처경과 입출식념경에 기술된 해당 내용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는 사념처를 닦음으로써 현생에서 아라한의 완전한 지혜(aññā)를 얻거나 혹은 불환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한편 후자는 이것을 통해 ‘밝은 앎(明, vijjā)에 의한 해탈’을 원만히 한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들이 서로 다른 경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밝은 앎이란 사성제를 깨달아 무명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며 아라한이 지니는 완전한 지혜와 연결될 수 있다.50) 따라서 대념처경과 입출식념경 모두에서 사념처의 실천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50) 임승택,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돈(頓)과 점(漸)」,「불교학연구」32집, 불교학
    연구회, 2012, pp.90-98.

 

그러나 이 부분에 관련한 구사론의 언급은 견도와 수도의 단계에서 그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구사론에 나타나는 수행의 위계와 결과에 대한 서술은 니까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양상이다. 난법, 정법, 인법, 세제일법으로 이어지는 수행의 위계에 대한 정교한 논의는 니까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전형적인 아비달마의 형식적 분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념처에 관한 구사론의 기술에서는 아라한의 경지를 언급하는 대목을 찾을 수 없다. 이점에서 니까야의 사념처와 구사론의 그것 사이에는 돌이키기 힘든 간극이 자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Ⅵ. 마치는 말

 

초기불교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념처의 실천 양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으며 획일적이지 않았다. 수많은 이론가와 실천가들이 등장하여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것을 해석했고 또한 실천․수행해 왔다. 필자는 니까야와 구사론에 나타나는 사념처의 차이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구사론의 사념처는 여러 측면에서 니까야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아비달마라는 시대적 과제를 반영하면서 전래의 가르침을 재해석한 결과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수행법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사념처에 관해서는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사념처를 둘러싸고 파생된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의 관계 문제는 수차례에 걸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51) 특히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사념처의 실천이 선정(禪, jhāna) 혹은 사마타(止, samatha)와 어떠한 관련을 맺는가 하는 문제였다. 일부에서는 일정한 단계의 선정 체험을 거친 연후에 사념처로 옮겨간다는 주장을 하였고, 다른 일부에서는 사념처 안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시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는 입장을 펼쳤다. 현재 이러한 논의는 뚜렷한 결론 없이 표류하는 듯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51) 2000년대 초반 초기불교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띠 논쟁’ 혹은 ‘위빠사
    나 논쟁’이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물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김준호, 「사띠 논쟁의 공과」,「불교학 리뷰」4호, 금강대학교문교문화연구소, 
    2008, pp.187-206.

 

본고는 니까야와 구사론의 사념처를 비교․대조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논의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사념처는 사마타의 단계를 거친 연후의 것으로 위빠사나 일변도의 실천법이다. 따라서 이 문헌에 근거하는 한 일정한 단계의 선정 체험을 거친 연후에 사념처로 옮겨간다는 주장이 타당하다. 그러나 니까야의 사념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모두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구사론에서 사마타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거론되는 지식념과 부정관이 니까야에서는 사마타가 아닌 사념처(=구사론의 위빠사나) 자체에 배속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니까야에서는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몸(身)을 지속적인 관찰(身隨觀)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반면에 구사론에서는 몸에 대한 관찰과 관련하여 극미(極微)라든가 찰나(刹那)로써 관찰한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것은 구사론의 사념처가 고난도의 전문적인 실천기법으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구사론의 사념처는 관찰의 과정이라든가 목적 그리고 결과의 측면에서도 니까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정교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구사론의 사념처 관련 내용에서는 니까야에서와 달리 아라한의 경지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구사론의 사념처는 아비달마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교리적 가르침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려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사념처라는 실천법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사론에 기술된 사념처가 실제로 어떠한 방식으로 행해졌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4가지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의 양상이 상세하게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미(極微)와 찰나(刹那)로써 관찰한다.’는 언급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정교한 교리체계를 바탕으로 전문화된 기법이 동원되어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소수의 엘리트 학승들에 의해 폐쇄적인 방식으로 실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구사론의 사념처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실천법이 아니었던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