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한국 불교계 삼보사찰의 성립과 지정/황인규

실론섬 2017. 2. 21. 15:34

[보조사상 41집]

한국 불교계 삼보사찰의 성립과 지정

황 인 규 /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목차

1. 머리말

2. 고․ 중세 불보사찰과 법보사찰의 성립

   1) 신라 통도사의 불사리 봉안과 불보사찰  

   2) 조선초 해인사의 대장경판 봉안과 법보사찰

3. 조선후기 승보사찰의 성립과 삼보사찰의 지정 

   1) 조선후기 승보사찰의 성립과 송광사 18주지

   2) 조선말 불교계의 삼보사찰의 지정

4. 맺음말 

 

[국문요약]

본고는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가 언제부터 삼보사찰로 부르게 되었는가 그 과정과 의의를 밝히고자 한 논고이다. 통도사는 신라 자장에 의해 불사리가 모셔져 불보사찰, 해인사는 고려대장경판이 모셔져 불보사찰이라고 불린다. 송광사는 고려후기이래의 16국사가 배출되어 승보사찰이라고 하지만, 이 세 사찰을 묶어 삼보사찰로 부르기 시작한 시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통도사는 신라 자장에 의해 불보사찰이 되었지만 해인사는 고려 대장경판이 이안된 시기인 조선초이후일 것이다. 송광사는 고려후기 수선사 결사를 전개했던 보조국사 지눌이후 15국사가 하나로 묶여 추념된 이후에야 비로소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게 된다.

 

통도사는 신라 자장에 의해 불사리를 봉안한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자장에 의해 봉안된 불사리는 황룡사 탑, 태화사 탑 등 사찰에 봉안되었으나 고려중기 혹은 조선초에 폐사되었다. 황룡사는 대표적인 국찰이었으나 용신신앙을 대표하는 위상 보다 상위인 불사리 신앙과 계율종의 중심인 통도사가 불보적 전통을 지녔다. 여말선초와 조선 중기 임란시 통도사의 불사리가 개성과 한성을 비롯하여 태백산 정암사와 경북 달성 용연사, 금강산 건봉사 등에 분산 봉안되기도 하였으나 조선후기 불사리 신앙의 중심으로 이루면서 불가의 종찰로서 위상을 유지하면서 조선말 삼보사찰로 지정되었다. 

 

해인사는 신라시 창건되어 화엄종의 북악파의 본산이었으며, 고려시대 국찰로서「고려실록」과 대장경이 봉안되었다. 고려 원 간섭기 국사 설산 천희의 제자인 경남도 해인사 주지에 재임하면서 강화도에 봉안되었던 재조대장경판을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한성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이안되었다. 해인사에 봉안된 재조대장경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 인경되었으며, 조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으며, 세조의 삼화상 혜각존자 신미와 묘각왕사 수미 등과 해인사 주지 죽헌과 학조 등에 의해 인경불사가 이루어져 전국의 대표적인 50 여 사찰에 봉안되는 등 조선시대에도 법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지속되었으며, 조선말 삼보사찰로 지정되었다.  

 

송광사는 고려후기 수선사 결사를 전개했던 보조국사 지눌이후 15국사가 하나로 묶여 추념된 이후에야 비로소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게 된다. 송광사 제 16국사인 고봉법장이 입적한 세종 10년이후 조선중기 국사로 추증이 된 듯하며, 그를 포한 16국사로 추념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임란후 송광사가 재건되면서 비롯된 듯하다. 그리고 이전의 시기에 확립된 불보사찰 통도사와 법보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한국 사찰을 대표하는 삼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었다. 송광사 16국사의 추념에 이어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이 16국사와 더불어 송광사 18주지로 추념되었다.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은 인도승 지공선현과 더불어 여말선초 삼화상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의 증명법사였다. 이렇듯 송광사는 조선시대 이후 사세의 부침이 있었지만 18주지의 추념을 통해 승보의 전통을 정립 계승하여 갔다.

 

현재 삼보사찰로 정립된 시기는 조선후기 문신 淵泉 洪奭周(1774~1842)의 문집에서 처음 보이고 있으며, 개화기 문인 김윤식도 그러한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續南遊錄」등과 같은 저술류에서는 금산사가 불보사찰이라고 특기된 바 있다. 그러한 가운데 석왕사의 고승 龍嶽 慧堅과 그의 제자 九河 天輔, 특히 송광사 주지 錦溟 寶鼎, 통도사 강주였던 海曇 致益(1862~1942)과 만해 한용운 등이 삼보사찰의 지정을 특기하였다. 특히 한국불교를 집대성한 이능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삼보사찰을 그의 저술류에 특기하면서,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머리말

 

삼보사찰로 알려진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 삼보사찰은 현행 일부 중등교과서에서도 실려 소개되는 등 일반화된 상식이다.1) 삼보사찰의 성립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 조선말이후에야 성립된 것이다. 통도사는 신라 자장에 의해 불사리가 봉안되면서 불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지녀왔으며, 해인사는 조선초 법보인 팔만대장경판이 안치되면서 부터이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 결사운동을 전개하면서 그의 문도들이 16국사2) 가 배출된 이후이다.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이 확립된 것은 빨라야 제 16국사로 추념된 고봉법장의 입적 이후이지만 16국사로 묶이여 승보사찰로 지정된 것은 그 이후이다.3)

1) 정재정 외, 「중학교 역사」상, 지학사, 2011, 147쪽.
2) 송광사 16국사에 대해서는 菅野銀八과 이지관이 비정한 16국사를 정리한 바 있다.(菅野銀八, 
   「高麗曹溪宗十六國師の繼承に就いて」,「靑丘學叢」9, 1932.; 이지관 , 「지눌의 정혜결사와 
   그 계승」,「한국선사상연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84.) 
3) 송광사에 관련된 연구성과 가운데 승보사찰과 관련된 논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최근에 송광사에 대한 종합 검토가 고영섭, 김방룡 교수 등에 의하여 이루어져「보조사상」
   39집에 게재된 바 있다.송광사에 대한 연구성과는 앞의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 동안 삼보사찰에 대한 연구는 학술적 천착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필자는 송광사 16국사의 위상이나 승보종찰로서의 송광사를 중심으로 논의한 바 있으며,4) 본고에서는 송광사와 통도사와 해인사를 포함해 삼보사찰이 성립되는 과정과, 특히 가장 늦게 승보사찰로 확립된 송광사의 16국사의 추념과 18주지에 대하여 살펴본 후 삼보사찰로 지정된 사실에 대하여 천착하고자 한다.

4) 황인규, 「수선사 16국사의 위상과 추념 : 송광사의 승보종찰 설정과 관련하여 試攷함」, 
  「보조사상」34, 2010.

 

2. 고․중세 불보사찰과 법보사찰의 성립 

   

1) 신라 통도사의 불사리 봉안과 불보사찰 

통도사가 불보사찰의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은 신라 고승 자장이 불사리를 봉안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통도사에 불사리를 봉안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國史」에 이런 기사가 있다. 진흥왕 때인 太淸 기사(549)에 양나라에서 沈湖를 시켜 사리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여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부처의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백 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왔다.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戒壇에 두었다. 그 나머지는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5)

5)「삼국유사」권3, 塔像4 前後所藏舍利.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549년(진흥왕 10)에 남조 양나라에서 沈湖를 시켜 사리 몇 알을 보내왔다는 것이다.6)「삼국사기」에 ‘(진흥왕) 10년 봄에 梁나라에서 사신과 신라의 留學僧 覺德을 시켜 佛舍利를 보내니,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興輪寺 앞길에서 이를 맞아들이게 하였다’7)고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불사리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최초의 일이며, 진흥왕은 이를 계기로 출가하여 法雲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통도사에 불사리를 봉안한 것 보다 61년이 앞선 일이다. 그 후 진지왕 1년(576) 신라 최고 지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던 安弘이 수나라에 들어가서 법을 구하고 胡僧 毗摩羅 등과 함께 귀국할 때『능가경』과『승만경』등의 경전과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8)

6) 조선말 독립운동가이자 義兵 軍帥 許蔿의 아우 舫山 許薰(1836~1907)이 지은 대구 동화사
   「금당탑기」에 의하면 ‘중국에서 들여온 사리는 신라 진평왕 4년(582) 대구 동화사에 1천 
   200과가 안치됐고, 863년(경문왕 3년)에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리 7과를 
   봉안하여 석탑을 세웠는데, 875년(헌강왕 1년)에 삼강대사가 탑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석탑을 
   세워 다시 봉안했다. 이어 이 탑은 876년 지금의 동화사 금당선원 앞으로 옮겨졌다.’ 경문왕이 
   봉안한 불사리를 담았던 사리구가 1958년에 발견돼 ‘민애대왕 사리호’로 불리고 있다.
7)「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4 진흥왕 10년 봄, ‘‘十年春 梁 遣使與入學僧 覺德 逸佛舍利 
   王使百官奉迎興輪寺前路’ 
8)「삼국사기」卷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576), ‘安弘 法師入 隋 求法與胡僧毗摩羅 等二僧廻上 
   稜伽勝經 及 佛舍利’

 

636년(선덕왕 5)에 당에 들어간 慈藏은 오대산 太和池 가에서 문수보살로부터 佛頂骨과 齒牙사리 등을 받아서 645년(선덕왕 14)에 귀국하였다. 자장이 가져온 사리는 통도사 외에 황룡사 탑, 태화사 탑 등지에 봉안하였다. 

 

자장은 황룡사에 탑을 건립하게 하여 목탑의 청동8각 사리소탑에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찰주본기」에는 이 탑을 재건할 때『無垢淨光陀羅尼經』에 의거하여 철반 위에 작은 석탑 99기를 만들고 작은 탑마다 사리 1립과 다라니 4종을 넣어 안치했다고 한다.9)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 25)에 몽골의 침입시 화재로 불타버렸다.10) 

9) 「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Ⅲ, 1992,; 박순교,「황룡사 9층탑의 
   역사적 허실」『淸溪史學』16·1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2002.
10) 최근에(2006년) 경주 황룡사 진신사리 5과와 사리를 담았던 팔각 모양의 사리그릇(사리
    갖춤)을 공개된 바 있다. 

 

그리고 자장은 태화지에서 만났던 신인을 위하여 울산 태화사를 창건하고 세운 태화탑에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하지만 그 후의 역사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11) 다만 고려 명종 때의 金克己가 지은「太和樓詩序」12)와 충숙왕 때 울주에 있었던 鄭誧( 1309~1345)의 「태화루시」13), 그리고 權近(1352~1409)의 「太和樓記」와 李原(1368∼1429)의「태화루시」14)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태화사가 아마도 고려말까지 존속되다가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15) 따라서 자장이 가져온 불사리는 황룡사탑과 태화사 탑에 봉안되었는데 황룡사 탑은 몽골 침략기에, 태화사 탑은 조선초에 폐사되었던 것이다.  

11) 성종이 16년(997) 9월에 경주에 내려왔다가 9월에 울산의 태화루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었다.「고려사」卷3, 성종세가 성종 16년 9월, ‘遂幸興禮府, 御太和樓, 宴群
    臣. 捕大魚於海中.’; 최자,「補閑集」권상.
12)「新增東國與地勝覽」권22, 蔚山郡 樓亭. 
13) 鄭誧, 「太和樓送海峯」,「雪谷集」下, 詩, ‘尊酒相逢地 秋風欲盡頭 江山淸似畫 光景疾如流 
    吾意何由滿 君行不少留 斜陽照執袂 共倚大和樓’
14) 李原, 「次蔚州太和樓詩」,「容軒集」卷2, 詩, ‘官解初尋寺 僧閑不閉門 山光水色映晴軒 
    詩景自成繁 古調聞瑤瑟 高吟倒綠尊 歸來長笛月明昏 前路曲通村’, ; 李原, 「次太和樓詩」, 
  「容軒集」卷2, 詩, ‘公餘隨意上高樓 地暖冬天却似秋 山聳奇峯分萬點 江交巨海自東流 
    梅花初發雪晴岸 草色遙看雨後洲 待得春來增景槩 會將詩酒此重遊’ 
15)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태화사지 12지상부도(보물 
    441호 울산 중구 학성동 100)는 태화사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적으로 
    부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울산의 학성공원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부도가 유일하다. 신라
    시대 사찰 태화사의 부속건물로 태화강변에 太和樓라는 큰 누각이 있었다. 태화루는 조선시대 
    영남의 3대 누각(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 태화루)으로 임진왜란때 불 타 없어졌는데 불에 
    타고 남은 누각의 골격은 일제시대(1940년)때 완전히 철거하였다고 한다. 김성진, 「蔚山 太和樓와 
    그 題詠詩文에 대하여」,「한국민족문화」5,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992. 

 

이 반하여 통도사의 불사리는 자장이 봉안한 이후 현재까지 그 일부가 전해오고 있다. 즉, 자장은 황룡사 탑에 불사리를 봉안한 이듬해인 646년 통도사를 창건하고 戒壇을 수축하여 佛舍利를 藏置하였다.16) 자장이 菩薩戒本을 강설하자 7일 동안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17) 이에 戒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이가 열 집중에 여덟아홉 집이 되었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해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불어갔다고 한다.18)

16)「삼국유사」권3, 황룡사 9층탑.
17)「삼국유사」권4, 의해5 자장정률.
18)「동사강목」제3하, 계묘년 신라 선덕여주 12년, 고구려 왕 藏 2년, 백제 의자왕 3년(당 태종 
    정관 17, 643) 3월.

 

그 이후 신라의 대표적인 국찰은 황룡사 탑과 더불어 新羅三寶 중에서 2寶인 丈六尊佛이 있었던 황룡사였으나 중대이후 성전사원으로 등장한 사천왕사와 봉덕사로 인해 그 사격이 낮아졌다. 중대 말이후 황룡사의 사세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지만 용신신앙을 상징하는 황룡사 보다 상위에 있었던 불사리 신앙의 중심을 이루었던 통도사의 위상이 더 높았다.19) 

19) 채상식, 「신라사에 있어서 황룡사의 위상과 추이」,「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22, 2001.

 

이렇듯 통도사는 자장 이후 불사리를 봉안한 대표적인 계율종의 중심 사원이었지만 고려 국초이후 그 사격이 전보다 축소되었다. 후삼국 통합기에 창건된 국도인 개경의 개국사가 계율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현이 지은 기문에 의하면, 개국사가 개국율사로 불리었으며, 태조 왕건의 아들 정종은 개국사에 불사리를 봉안하였다.20) 태조 왕건의 손자 현종은 개국사 탑을 수리하고 계단을 설치하여 3200여명을 득도하였다.21) 

20)「高麗史」卷2, 定宗世家 定宗 12年(946) 1월, ‘王備儀仗 奉佛舍利 步至十里所開國寺 安之 
    又以穀七萬石 納諸大寺院 各置佛名經寶 及廣學寶 以勸學法者.’
21)「고려사」권4, 현종세가 현종 9年(1018) 윤4월, ‘是月 修開國寺塔 安舍利 設戒壇 度僧三千
    二百餘人’ ;「고려사」권4, 현종세가 현종 12年 5월 무자(14일), ‘命尙書左丞 李可道 往取慶
    州 高僊寺金羅袈裟佛頂骨 昌林寺佛牙 並置內殿.

 

고려 중기이후 다시 통도사가 계율종과 불사리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1085년(선종 2) 통도사 극락전 앞에 배례석22)과 戶部에서 공문을 내려 사역 주변에 국장생표23)가 설치되는 등 통도사에 대한 국가적인 시책이 전개되었다. 1235년(고종 22) 상장군 金利生과 侍郞 庾碩이 왕명으로 불사리를 예배하였던 사실24)에서 알 수 있듯이 통도사 불사리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1264년에 원나라의 사신이 다투어 불사리에 예배하고 사방의 행각승들이 몰려와서 참례하였다.25) 특히 인도승 지공은 1326년(충숙왕 13) 금강산 법기보살을 참배하고 통도사에 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고 석가의 가사와 사리를 친견하고 舍利袈裟 戒壇法會를 열었다.26) 이는 당시 부처의 후신이라고 존경 받았던 지공의 위상으로 보았을 때 통도사의 사격이 그 만큼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간섭기에 定慧妙圓慈行大師 木軒丘公이 통도사를 중수한 바 있으며27), 특히 공민왕은 속리사에서 통도사의 부처의 뼈와 사리를 구경하기도 하였다.28) 공민왕의 추념시 필적이 뛰어났던 一上人이 남산종을 대표해서 대장경을 쓰는 書員으로 참가하였다.29)

22) 통도사 극락전 앞에 설치된 拜禮石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고, 명문에 “太康十一年
    乙丑二月日造”라는 끌씨가 새겨져 있다.黃壽永,「금석유문」,; 許興植, 韓國金石全文』中
    世上,; 장충식,「太康11年銘 通度寺拜禮石考」『美術史學硏究』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23)『韓國金石全文』中世下, 通度寺 孫仍川 國長生一坐段 寺所報 尙書戶部 乙丑五月日牒 
    前判兒如改立令 是於爲了等以立 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 
24)「삼국유사」권3, 탑상4 前後所藏舍利.
25) 위와 같음.
26)「통도사지」,‘泰定丙寅春始到亰城時人謂之達磨来也 上自公侯乃至庶民莫不欣躍競先瞻禮聞説
    戒法皆發正信益断薫腥師以參見本師袈裟舎利 …西天指空和尚為舎利袈裟戒壇法會記’
27) 이제현, 「開國律寺重修記」,「익재난고」권6, 記,:「동문선」권69,;「신증동국여지승람」권5,
    開城府 下 고적.
28)「고려사」卷40, 공민왕세가 공민왕 11년(1362) 8월 정해(15), ‘幸俗離寺 取觀通度寺所藏佛骨 
    設利 袈裟’,;「고려사」卷41, 공민왕世家 恭愍王 15年(1366) 4월 戊寅(27), ‘王率百官, 幸王輪寺, 
    觀舍利, 施黃金·綵帛, 賜僧布八百匹.’
29) 이색, 「一上人爲僕淨書 亂道間被選書大藏 追福玄陵也 僕欲請於提調諸公 得一上人 以畢吾稿 
    而旣自念曰 追福玄陵 穡日夜望之者也 不能助之 而反擾之 非穡之志也 書員出於各宗 一上人不
    出 則南山無人矣 書僕稿 雖勞而無所報 書大藏則國家必錄其功 此雖上人之所不以爲意 然在僕
    則亦不可徑情而直行也 於是 不敢發一言於提調所 但勖上人加工書大藏 以副國家追福玄陵之意 
    吟成一首以誌」, ?목은시고? 권22, 시, ‘南山戒壇具威儀 筆蹟傑出當今稀’; 서윤길, 「高麗 瑜伽·
    律·神印 等 諸宗의 性格과 그 展開」,「한국사론」20, 1990.

 

하지만 고려말 왜구의 침탈로 통도사의 불사리의 일부는 처음으로 개경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1377년(우왕 3) 무렵 통도사가 왜구의 침탈을 받자 1379년에 南山宗 통도사 주지인 圓通無礙辯智大師 月松이 석가여래의 頂骨 하나와 舍利 넷, 毘羅石窟의 금박 袈裟 하나와 菩提樹 잎사귀에 쓴 약간의 佛經 등을 받들어 모시고 개경에 오자 太后와 우왕의 비 謹妃 李氏가 예배를 하고 개경 龍首山 성안 松林寺 사리탑에 봉안하도록 하였다.30)

30)「신증동국여지승람」권4, 개성부 상 불우, ‘松林寺 龍首山 성안에 있다.’; 이색, 「松林寺가 
    있으므로, 들어가서 舍利塔에 예배하고 산을 내려가니, 그곳이 唐寺泉洞이었다. …」,「목은
    시고」권26, 詩,; 이색,「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牧隱文藁」권3, 記,:「東文選」
    卷73, 記.;이색,「書通度舍利記後」,「牧隱詩藁」卷24, 詩. 참고로 544년(진흥왕 5) 陳나라에
    서 귀국한 明觀이 가지고 온 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한 칠곡 松林寺와는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6년(태조 5) 태조는 송림사에 있었던 부처의 두골 사리 등을 가져오게 하여 興天寺에 석탑을 세우고 안치하였다.31)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죽자 궁 북쪽에 影堂과 불당에 석가여래 치아사리를 이안하였다.32) 1463년(세종 9) 통도사 주지 德寬은 분신한 사리를 세종에게 바쳤다.33) 이렇듯 여말선초 숭유억불기에 고려의 국도인 개성과 조선의 국도인 한양에 통도사의 불사리가 봉안되기도 하였다. 

31)「태조실록」권9, 5년(1396) 2월 22일(경술),‘佛頭骨捨利 菩提樹葉經 舊在通度寺 因倭寇移
    置留後司松林寺 遣人取來’;「세종실록」권5, 1년(1419) 9월 1일(계묘).
32)「세종실록」권5, 1년(1419) 9월 2일(갑진). 통도사는 1407년(태종 7) 자복사로 지정되었다. 
33)「세조실록」권30, 9년(1463) 6월 15일(계유), ‘慶尙道梁山郡通度寺住持德寬與郡事羅裕善進
    分身舍利 議政府上箋稱賀 下敎 赦强竊盜外罪’

 

특히 조선중기 임란시 통도사 금강계단이 왜구의 침탈을 받게 되자 태백산 정암사와 경북 달성 용연사, 금강산 건봉사 등에 보관되었다.34) 조선 중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사명유정이 스승 청허휴정의 승인하에, 통도사의 불사리는 전국에 분산되었던 것이다. 청허휴정은 통도사의 불사리가‘천 사람의 집이 善에 들게 하였고 한 나라가 仁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세상의 존귀한 보배라고 할 만하다’35)고 하여 국가의 법보였다고 인식하였다. 

34) 청허휴정, 「普賢寺釋迦如來舍利碑」,「청허집」보유편,: 조선총독부,『조선금석총람』하. 
    權瑎,「龍淵寺釋伽如來浮屠碑」,「조선금석총람」하,; 月峯雙式, 「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 
   「조선금석총람」하. 또한 경주 북쪽 비학산 법광사 고승 明玉과 曉軒 등이 진평왕의 願堂
    이었던 법광사 탑을 중건시 발견된 석가불사리를 1747년에 탑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불사리도 아마 통도사 불사리인 듯하다.申維翰, 「法廣寺釋迦佛舍利㙮重修碑」,「靑泉集」
    하,; 조동원,「한국금석문대계」3, 원광대학교출판국, 1982.
35) 청허휴정, 「普賢寺釋迦如來舍利碑」, 조선총독부,『조선금석총람』하.

 

그 후 숙종대 고승 桂坡 聖能은 통도사의 불사리탑을 보수하면서 통도사의 불사리가‘만세의 영원한 동국의 큰 보배’였다고 하였으며,36) 조선 말기의 고승 고승 應雲 空如(1794~ ?)와 문신 李繩永(1837∼1907)도 통도사가 불교의 宗家가 된다고 하였다.37) 이미「여지도서」에서도 통도사가 전국 8도 가운데 宗刹이라고 하여 통도사의 법보전통을 조선후기 대표적인 읍지에서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38) 따라서 통도사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선말에 이르러 삼보사찰로 지정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36) 위와 같음.
37) 應雲空如(1794~ ?), 「通度寺記」, ?遺忘錄?,; 이헌영(1837∼1910), ?日槎集略?(1881년 작) 
    地 윤 7월 8일(무술).
38)「여지도서」補遺篇 (慶尙道) 梁山郡邑誌 佛宇, ‘通度寺 在鷲捿山 中唐貞觀十七年 新羅善德王時 
    創建也 事蹟具在牧隱 李穡記文中 而佛殿不設金像殿 後鍊石爲壇中 有石龕 僧傳釋迦如來眞身頂骨
    舍利四放一片牙齒指節所藏云 是以八道諸剎推稱宗剎’

 

2) 조선초 해인사의 대장경판 봉안과 법보사찰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의상의 10대 문도 神琳의 제자 順應이 802년(애장왕 3) 창건되기 시작하여 利貞이 완성하였다. 신라 애장왕 때 당나라에서 수입한 팔만대장경을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유포되기도 하였으나,39) 실학자 이덕무가 지적했듯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40) 오래 전부터 해인사의 법보사찰의 연기사실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39) 李裕元(1814∼1888), 「伽倻山」, ?林下筆記」 권13, 文獻指掌編. 李德懋, 「海印寺 八萬大藏經
    事蹟記」,「靑莊館全書」권3, 記.
40) 이규경, 「우리나라 佛法에 대한 변증설」,「오주연문장전산고」경사편 3,- 석전류 2 釋典雜說; 
    이덕무, 「海印寺의 藏經」,「靑莊館全書」권55, 盎葉記 2,; 이규경, 「釋敎ㆍ梵書ㆍ佛經에 대한 
    辨證說 附 釋氏雜事」,「五洲衍文長箋散稿」釋典總說 八萬大藏經.

 

해인사는 신라말 북악파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앞서 언급한 신림과 이정과 더불어 三師41)로 존경되었던 希朗이 고려의 공산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여 田 500결을 헌납을 받는 등 國刹로서의 위상을 지녔다. 따라서 해인사는 고려시대에도 대장경과 역대의 실록을 보관하였던 국가 史庫로 지정되었다.42)

41) 조위, 「해인사 중창기」,「梅溪集」卷4, 記.
42)「신증동국여지승람」권30, 경상도 합천군 불우.

 

고려 중기에 왕자출신 대각국사 의천이 해인사에 우거한 한 바 있으며, 인종 때 의천의 자취가 서려있는 지리산에서 유가종의 수정사 결사가 전개되었을 때 해인사 주지 翼乘도 참여하였다.43) 무신집권기인 고종대 대장경 불사에 해인사 주지 天其는 개태사 승통 守其와 함께 재조대장경 교열에 참여한 바 있으며, 均如(923~973)의 ?一乘法界圖圓通記?를 詳正하여 大藏都監에서 3권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44)

43) 權適, 「智異山水精社記」,「동문선」권64, 記,;「대각국사문집」권19, ‘奉先寺翼乘大師 好學不倦’
44)「一乘法界圖圓通記」卷下 跋文.

 

원 간섭기 후반이후 화엄종 고승 體元과 그의 문도인 忍源과 性之 등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승들이 현세 구원적 신앙을 전개하였는데,45) 체원의 문도 千凞(1307~1382)46)의 제자 敬南은 스승 천희에 이어 1383년 무렵 부석사의 주지에 재임하였다.47) 그 무렵 1381년(우왕 7)에 여주 신륵사 대장각 건립 낙성식시48) 불교계의 고승이 거국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화엄종을 부석사의 고승 경남이 동참하였으며, 그 후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체원의 영향을 받은 천희와 경남이 해인사 주지로서 화엄종을 주도하면서49) 대장경 불사들이 이루어졌다. 문인 이숭인이 ‘睡菴文長老가 해인사에서 장경을 찍었다기에 우스개 시를 지어 증정하였다’거나 ‘淸凉長老가 睡菴의 글을 전하기에’이색이  문집에 ‘大藏經을 印出하러 海印寺로 떠나는 懶翁의 제자를 보내면서’, ‘乳上人은 普濟의 門徒로서, 大藏經을 印行할 때에도 참여하였고, 대장경을 轉讀할 때에도 참여하였다’는 등등의 기록이 그것이다.50) 이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제경판인 듯하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해인사 주지 경남이 재임하였으므로 대장경 인경불사도 海印寺住持이면서 禪敎都摠攝 通判僧錄司事 海印寺住持 國一都大師였던 敬南의 주관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51) 

45) 채상식, 「체원의 저술과 화엄사상­14세기 화엄사상의 단면」,「한국 화엄사상연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82 ;「고려후기불교사연구」, 일조각, 1991 재수록).
46) 李穡, 「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조선금석총람」상, 529~533쪽.
47) 李智冠, 「伽倻山海印寺事蹟碑文」,「海印寺誌」, 690쪽.경남은 1383년(우왕 9)에 건립된
    「신륵사대장각기」 음기에 浮石寺 고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李崇仁, 「神勒寺大藏閣記」, 
   「陶隱集」부록.
48) 이 때 睡庵長老가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한데 대한 헌정시가 이숭인의 문집에 남아 있다
    (李崇仁, 「睡庵長老印藏經于海印寺獻呈」,「陶隱集」).
49) 권적, 「智異山水精社記」,「東文選」卷64. 신총이 해인사 주지였다는 사실은「首楞嚴經」
    寫經 尾書에 ‘功德花嚴海印寺住持大師信聰’이라는 글로써 알 수 있다(권희경, 앞의 책, 435쪽.). 
    그리고 신총에 대하여 지은 다음의 시가 전하고 있다. 黃瑾, 「將起沃州漢江船上用華嚴信聰師韻」,
   「동문선」권 21.
50) 이숭인, 「睡菴文長老印藏經于海印寺戲呈」,「도은집」권3, 詩, 이숭인, 「清涼長老傳睡菴書」, 
   「도은집」권2, 시,‘忽見然禪者 云從海印來 袖中書札出 世上笑談開 宴坐翻經子 良緣閱劫灰 
    相違僅咫尺 問法日千回’,; 이색, 「送懶翁弟子印大藏海印寺」,「목은시고」권28, 詩,; 이색, 
    「雪牛說」,「목은문고」권10, 說. 雪牛에 대한 설. 
51) 이능화,「조선불교통사」상, 252쪽.

 

이러한 해인사의 법보 불사의 전통은 해인사에 재조장경을 보관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잘 알져 있듯이 고종 30년(1243)부터 분사대장도감에서 재조대장경 판각사업이 시작되었으며, 1251년(고종 38) 9월에 강화도 대장경판당에서 봉안되었다.52)「고려실록」과 대장경은 왜구의 침탈이 있게 되자 재조대장경판도 해인사로 이안되게 된다. 해인사 주지 敬南과 이성계와 각별했던 화엄종 都僧統 雪悟가 고려시대 국가 史庫였던 합천 해인사로 移安하게 되었다. 즉, 1398년 5월 선원사의 대장경판을 都僧統 雪悟가 머물고 있던 거주하고 있었던 한양 지천사53)에 이안되었다가 해인사로 移運되었던 것이다.54) 조선 건국 직후 태조 이성계가 잠저시 해인사에서 건국을 위해 기도를 하고 55) 조선건국 직후인 1393년 海印寺의 古塔을 수리하여 대장경을 안치하였으며, 「願成大藏御製文」을 친히 지었다.56) ‘우리 태조대왕 2년에 세자 및 7대군이 함께 원을 세워 금탑을 중수하고 대장경을 인경하여 法殿에 안치하였는데 특별히 敬南에게 명을 내려 큰 불사를 하게 하였다’고 하여 해인사 고승 경남이 불사의 책임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57) 이렇듯 해인사 주지 경남은 화엄종을 대표하여 조계종의 無學 自超와 천태종의 神照 등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건국사업에 참여한 것이라고 하겠다.58)

52) 이규보, 「大藏刻板君臣祈告文(丁酉年行)」,「東國李相國全集」卷25, 雜著.
53) 임금이 支天寺에 거둥하니 都僧統 雪悟가 金剛山에서 왔다.「태조실록」권13, 태조 7년(1398) 
    1월 22일(경오) 
54)「태조실록」권14, 태조 7년(1398) 5월 10일(병진), ‘임금이 龍山江에 거둥하였다.『大藏經』의
    木版을 江華의 禪源寺로부터 운반하였다.’;「태조실록」권14, 태조 7년(1398) 5월 12일(무오), 
    ‘隊長과 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왕사로 
    책봉된 무학의 고향이 합천이었다. 아마 해인사가 대장경 보관장소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해인사 
    대장경 이안시기에 대해서는 조선초로 보고 있지만(강순애, 「고려 팔만대장경의 판각, 봉안 및 
    판가구성에 관한 연구」,「서지학연구」46, 2010,; 한상길,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 시기와 
    경로」,「불교학연구」30, 2011,; 최연주, 「조선시대 『고려대장경』의 인경(印經)과 해인사
    (海印寺」,「동아시아불교문화」10,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2.) 최근에 고려말 설도 대두되
    고 있는 실정이다.(임득균,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봉안과 사원의 위상」,「석당논총」54, 2012.)
55) 이러한 사실은 1483년 仁壽大妃와 仁惠大妃가 明禮宮(현 덕수궁)에서 11조의 完文을 해인사의 
    승려에 내린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完文節目」 ?海印寺誌? 75쪽 “… 曁我太祖大王 龍潛時
    親設百日禱佛 卽登寶位 宜此爲宗願刹 潛心大乘 印經十件 劃標內耕 結卑爲香供之資 … ”.
56) 이능화,「조선불교통사」상, 348쪽.
57) 楓溪明察, 「伽倻山海印寺大藏經印出文」,「海印寺誌」, 1992, 293쪽. “…入我朝太祖大王卽位
    二年 與世子及七大君 同發大願重修金塔印大藏經用安于法殿 命特持僧敬南 大作佛事”.
58) 황인규,「무학대사연구­여말선초 불교계의 혁신과 대응」, ; 황인규, 「중등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고려후기 불교사 서술과 문제점」,「역사와 교육」9, 역사와 교육 학회, 2000.; 황인규, 「여말선초 
    화엄종승의 동향」,「불교학연구」1, 2000.; 황인규, 「고려말 이성계의 불교계 세력기반」,「한국
    불교학」28, 2001. 

 

그 후 1399년(정종 1) 1월 9일에 태조의 명으로 재조대장경을 인출하였는데 아마도 해인사의 재조대장경의 첫 인경이 아니었는가 한다.59) 특히 세조대에는 세조의 삼화상 혜각존자 信眉와 해인사 주지 竹軒 등이 재조대장경 50부를 인경 대불사를 하였다.60) 해인사를 비롯하여 삼보사찰인 통도사와 송광사 등 당시 주요사찰인 50여사에 분산 봉안하였는데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妙覺王師 守眉와 해인사 주지 竹軒이 주도하였다.61) 뿐만 아니라 세조는 藏經閣을 확장 개수하고자 하였으며, 세조의 비 貞熹王后가 1483년(성종 14) 해인사 중건하고자 하였으며, 그녀에 이어 仁粹大妃와 仁惠王妃 등이 후원하여 전 주지 죽헌에 이어 주지의 재임을 맡은 慧覺尊者 信眉의 제자 學祖 등이 1488년 大藏經 板堂을 중건하였다. 조선후기에도 해인사 대장경판은 여러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장경각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62) 후술하듯이 해인사는 조선말 삼보사찰로 지정되기에 이르며, 현재 장경판전과 그 안에 봉안된 재조대경판은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유산이다. 

59) 세종 6년 선교양종 체제시 해인사는 敎宗 18개 사찰로 지정 받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60)「東閣雜記」上, 本朝璿源寶錄, ‘.;「燃藜室記述」별집 제13권 政敎典故 僧敎.
61) 이규경, 「釋敎ㆍ梵書ㆍ佛經에 대한 辨證說 附 釋氏雜事」,「五洲衍文長箋散稿」釋典總說.
62)「湛軒書」내집 권2, 桂坊日記 8월 26일.

 

3. 조선후기 승보사찰의 성립과 삼보사찰의 지정

 

1) 조선후기 승보사찰의 성립과 송광사

송광사 社主가 16국사에 추념된 시기는 빨라야 高峰 法藏(1351~1428)이 입적한 1428년(세종 10) 이후인 듯하다.63) 고봉은 1395년(태조 4)부터 1420년(세종 2)무렵까지 주지에 있으면서64) 송광사를 중건하였다. 즉, 고봉은 1399년(정종 1) 궁궐로 들어가 송광사의 중창을 허락받고 수륙사를 개최하였다. 그 이듬해 7월 고봉은 왕의 교지를 받들어 大木․ 雲庇․ 尙濟 등 30여명의 승려를 이끌며 중창하였다. 고봉이 수선사 16국사로 추증된 것은 퇴락한 송광사 당우를 중창하였기 때문이다. 태조의 왕사인 무학이 용문사로 퇴거하여 있을 때였지만 나옹의 추념사업을 전개했던 무학의 동문으로서 중창불사에 인식을 같이 하여 후원하였던 듯하다.65) 여기에는 태고 보우의 문도로서 송광사 주지를 역임했던 상총도 불교계를 대표하여 나섰다.66) 

63) 覺宏 「普濟尊者三種歌」 「나옹화상어록」;「한국불교전서」6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한국불교문헌찬술총록」동국대출판부 1976 153쪽 ; 허흥식 「제7장 중세 조계종의 
    기원과 법통」「한국중세불교사연구」일조각 1994 391쪽. ; 한성욱, 「 順天 曹溪山 松廣寺 
    慈靜國師·高俸和尙 舍利器」,「佛敎考古學」5, 위덕대, 2005.
64) 송광사에 수륙사로 지정된 것이 정종이라고 하였으나<「세종실록」권26, 세종 6년(1424) 
    10월 25일(병인)> 상왕인 이성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65) 覺宏 「普濟尊者三種歌」「나옹화상어록」;「한국불교전서」6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한
    국불교문헌찬술총록」동국대출판부 1976 153쪽 ; 허흥식, 「제7장 중세 조계종의 기원과 법
    통」,「한국중세불교사연구」, 일조각, 1994, 391쪽.
66)「태조실록」권14, 태조 7년(1398) 5월, 13일(기미),; 황인규, 「여말선초 선승과 불교계의 
    동향」,「백련불교논총」9, 1999,: 황인규,「고려후기․ 조선초 불교사연구」, 혜안, 2003.

 

하지만 태종대에 이루어진 불교탄압시책은 나옹과 무학의 문도들이 주석하였던 송광사의 사세에도 적지 않이 영향을 끼쳤던 듯하다. 즉, 고려말 동방제일도량67) 이었던 송광사의 사세를 빌어 회암사를 본산으로 삼아 불교를 중흥시키려했던 나옹과 무학은 태종의 불교계에 대한 탄압시책의 전개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1407년(태종 7) 88 자복사 설정시 송광사가 제외 되었던 것이다.68) 

67) 이색, 「普濟尊者諡禪覺塔銘 幷序」,「牧隱文藁」卷14, 碑銘.:「동문선」권119, 비명.
68)「태종실록」권14, 태종 7년(1407) 12월 2일(신사).

 

세종대 초반인 1420년(세종 2) 무렵 고봉의 제자인 대선사 중인이 송광사 주지에 취임하여 1427년(세종 9)까지 재임하였다. 고봉의 제자 홍수와 상제 등 10여인과, 문도인 尙愚 등 10여인이 참여한 가운데 1420년(세종 2)부터 1428년(세종 10)까지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그 기간에 송광사는 선종 18사에 포함되었다.69) 당시 선종계는 고봉의 문도인 判事宗事 都大禪師 雲谷이 주도하고 있었으며,70) 아마도 운곡이 고봉법장을 16국사로 추념한 듯하지만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69)「세종실록」권26, 세종 6년(1424) 10월 25일(병인).
70)「송광사지」에 의하면 ‘1431년(세종 13) 송광사 住持 前 判事宗事 都大禪師 雲谷, 1448년
    (세종 30)‘前松廣寺住持 大禪 弘義 性悟’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유재란시 왜군이 절에 불을 질러 송광사의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주지였던 應禪이 지리산에 머물렀던 浮休를 초빙하여 중창하였다. 응선은 1608년(선조 41)부터 1618년(광해군 10)까지 만 10년 동안 송광사 주지에 재임하였는데 ?송광사지?에 의하면, 1601년(선조 34)년부터 水閣이, 1604년에 天子庵이, 그리고 1606년에 普照庵이, 1608년에 臨鏡堂 등이 중건되었는데,71) 부휴 선수는 1609년에 6월에 문도 400여명을 거느리고 송광사에 들어와 불사를 마무리 하였다.72) 부휴 선수는 1619년(광해군 11) 중국에서 진신사리를 이안하고 그 이듬해인 1620년 봉인사 부도암에 봉안하였으며,73) 특히 1622년(광해군 14) 廣州 淸溪寺에서 재를 설하였을 때, 그의 문도인 孤閑 熙彦과 碧巖 覺性이 증명사로 참여했다.74) 연산군 이후 명종대 허응 보우가 선교양종이 복립될 까지 본산의 역할을 하였던 청계사 불사75)를 주도하였던 부휴선수와 문도들이 송광사 중창으로 전각을 다시 일으켰던 것이다. 그 무렵 송광사 고승 待價 熙玉은 1621년(광해군 13) 9월에 송광사 주지 性訔과 思舜 등과 함께 16국사의 진영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76) 이러한 사실을 조선시대 4대 문장가였던 谿谷 張維(1587∼1638)가 기문으로 남기고 있다. 즉, ‘절에 牧牛派 계열에 속하는 16祖師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퇴색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에 스님이 새로 초상화를 만들어 봉안하면서 나를 위해서도 그려 주고 싶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77)

71) 임석진,「大乘禪宗 曹溪山 松廣寺誌」, 17∼18쪽.
72) 임란이후 송광사에는 부휴선수계가 장악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의 참고할 것. 
    최병헌, 「조선후기 浮休善修系와 松廣寺」,「同大史學」1, 동덕여대 국사학과, 1995,; 김용태,
    「조선후기 華嚴寺의 역사와 浮休系 전통」,「지방사와 지방문화」12-1, 역사문화학회, 2009.
73)「광해군일기」권138, 광해군 11년(1619), 3월, 11일 갑오조.
74) 「孤閑大師行狀」,「대각등계집」권하.:「한글대장경-대각등계집」270쪽,;「賜報恩闡敎圓照國
    一都大禪師行狀」,「대각등계집」권하.:「한글대장경-대각등계집」262~263쪽. 청계사는 고려말 
    無學自超와 그의 문도 鐵虎祖禪이 머물렀던 趙仁規家門의 원찰이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되었다.황인규, 「趙仁規家門과 水原 萬義寺」,「수원문화사연구」2, 1998.: 황인규,「고려후기․ 
    조선초 불교사연구」, 혜안, 2003.
75)「연려실기술」권7, 中宗朝故事本末, 승려가 유생들의 옥사를 속여 꾸미다 경오년(1510) ;「연려
    실기술」별집 권13, 政敎典故, 僧敎. ;「陰崖日記」「漢山李耔」 “연산조 이후로 서울에 있는 사찰
    들을 모두 폐하여 관청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兩宗이 헛이름만 淸溪寺에 의탁하여 이름을 禪宗이
    라 하였다..”; 황인규,「조선전기 선교양종의 本山과 判事」,「한국선학」12, 한국선학회, 2005.
76) 待價, 「十六國師眞影記」,「송광사지」.
77) 張維(1587~1638), 「贈寫眞僧思舜 寺有牧牛派下十六祖師影子 歲久損晦 師爲新之 且欲爲余寫眞
    云」,「谿谷集」卷26, 七言古詩, 47首, ‘十六祖師歸西天 世人不識眞面目 闍梨筆端天眼通 一掃神
    光滿殿屋 前身定是顧虎頭 宿債曾留瓦棺閣。他時訪我丈室來 須信靑蓮是金粟’ 현재 남아 있는 
    송광사 16조사 진영은 1780년 작품이다.

 

송광사 고승 부휴선수의 손제자이자 벽암각성의 문도인 翠微 守初(1590~1668)는 ‘지눌을 동방의 대성인이고 송광사는 동방의 대도량’이라고 하면서 ‘지눌이 도로써 사격을 높이고 그에 의지하여 당시의 기강과 도덕이 빛났다’고 하였다.78) 취미수초의 제자인 栢庵 性聰(1631~1700)은 문인 조종저에게 시켜 지은 「昇平曹溪山松廣寺嗣院事蹟碑」에 송광사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78) 김군수, < 순천송광사불일보조국사비 >,「조선금석총람」하, 음기.

 

"호남의 사찰 중에 크고 아름답다고 칭해지는 것은 이루 다 손꼽을 수 없으나 曹溪山 松廣寺는 동방제일도량이니, 인도(蔥嶺)의 雙林과 중국(震朝)의 廬阜(廬山)과 같다. 16國師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 절에 머물지 않고 명승이 된 자는 있지 않다. 고려 때에 산의 이름을 빌려 曹溪와 始興을 세움에 이르러 두 宗에 한 나라의 이름난 사찰을 나누어 속하게 하고 本社로 하였다. 대개 王師로 명명된 이는 반드시 이 절에 머물렀다."79)

79) 趙宗著(1631∼1690), 「昇平曹溪山松廣寺嗣院事蹟碑」,『조선금석총람』하, 일한인쇄소, 
    1919.; 大圓鏡, 「昇平曹溪山松廣寺嗣院事蹟碑」,「해동불보」3, 해동불보사, 1941.

 

송광사는 동방제일도량으로 인도의 쌍림과 중국의 여산과 같고 조계종의 본산이 되었다고 하였다. 백암성총의 제자였던 無用 秀演(1651∼1719)은 ‘송광사는 해동의 명찰로서 온 나라 사람이 귀천이 없이, 이것을 한 번 못 보는 것을 일생의 한으로 삼는다. 그것은 오직 16聖의 옛 자취가 아직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80)라고 하였다. 이렇듯 송광사를 중흥시켰던 부휴선수의 문도들은 송광사의 16국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80) 無用秀演(1651∼1719), 「조계산 송광사 함청각 모연설」,「무용집」권하.:『한글대장경』157쪽.

 

"보조가 입적한 후 眞覺․ 淸眞․ 眞明․ 晦堂․ 慈精․ 圓鑑․ 湛堂․ 妙明․ 慈圓․ 慧覺․ 覺儼․ 淨慧․ 弘眞․ 高峯․ 弘眞에게 전해지니 이상은 모두 국사였다. 무릇 16대가 법을 계승하고 사원을 이어받아 끊이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총림의 드물고도 우연한 성대한 자취이다."81)

81) 위와 같음.

 

위의 인용한 내용은 백암 성총이 부탁하여 조종저가 기술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16국사 중 제 8세 자각이 빠져있고 제 6세 자정과 제 7세 원감이 바뀌었다.82) 부휴 선수의 제자 벽암각성의 5세손인 鏡巖 應允(1743~1804)이 지은 「松廣山松廣寺記」에 의하면, 16국사를 普照․ 眞覺․ 淸眞․ 眞明․ 慈眞․ 圓鑑․ 慈靜․ 慈覺․ 湛堂․ 慧鑑․ 慈照․ 慧覺․ 覺圓․ 淨慧․ 覺眞․ 高峰을 들고 있다.83) 이렇듯 부휴선수의 문손 들 뿐만 아니라 청허 휴정의 문손인 사암 채영과 화악 지탁 등도 16국사에 대하여 추념하였다. 즉 獅巖 采永이 1764년 간행한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에 의하면 曹溪山十六祖師를 ‘佛日普照名知訥 號牧牛子 應化大聖 元順帝國師ᅠ眞覺․ 淸眞․ 沖鏡眞明․ 晦堂慈眞․ 慈靜․ 圓鑑․ 慈覺․ 湛堂․ 妙明慧鑑․ 妙嚴慈圓․ 慧覺․ 覺嚴․ 復庵淨慧․ 弘眞․ 高峰和尙  散聖終’84)이라 하였다. 三峯 華嶽 知濯(1750∼1839)도 그의 저서에서 송광사가 보조국사 지눌의 도량이라고 하면서 16국사를 추념하였다.85) 이렇듯 불교계가 송광사 16국사를 추념하면서 나옹과 그의 문도 무학을 송광사 18주지로 추념하여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조선초 불교계는 무학과 그의 문도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나옹의 문도이자 무학의 도반인 고봉이 다시 송광사 주지에 재임하게 된다. 이는 무학의 문도였던 함허당 기화가 보조의 유풍을 강조한 사실에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으며,86) 송광사가 중창되어 水陸社로 지정되었다. 무엇보다도 나옹과 무학이 16국사의 범주에 오르지 못했지만 태고 보우의 문도와는 달리 18주지에 포함된 것은, 나옹과 무학의 위상이 그 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미 나옹은 생전에 생불로 추앙된 고려 불교계의 거목으로, 조선 건국 후에도 그의 위상은 드높았다.87) 이는 17세기 중엽 무렵 부터 청허 휴정과 그의 문도가 태고 보우와 그의 문도를 조계종의 종조와 종맥으로 삼은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82) 菅野銀八, 「고려 조계산 송광사 십육국사의 계승에 관하여」,「청구학총」9, 경성: 청구학회, 
    1932.; 한국불교연구원,「송광사」, 일지사, 1975. 78~79쪽.
83) 鏡巖應允(1743 ~1804), 「松廣山松廣寺記」,「경암집」99 ~101쪽, ‘ 十六祖師影殿額曰慈
    蔭堂 以普照爲主壁 而眞覺淸眞眞明慈眞圓鑑慈靜慈覺湛堂慧鑑慈照慧覺覺圓淨慧覺眞高峰
    十五祖師配享昭穆 竝懶翁無學 爲十八住持至如臨鏡堂凌虛閣水石亭 特風流之最 不與此錄云爾’ᅠ
84) 사암채영, 「曹溪山十六祖師」,「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1764年 刊), 191쪽 
85) 華嶽知濯(1750∼1839), 「贈別華峰宇晟大師之湖南松廣寺竝小序」,「三峰集」.「한국불교전서」
    10, 31쪽, ‘曾聞曹溪山聖僧牧牛子道場 至今寂光凝仁者 所以往也 往已爲我入定 觀十六國師 燒香
    頂禮恨別難爲忍 傷心不自持’ 
86) 己和,「함어당화상어록」「住懸燈 因不煮炙 感普照淸風 (懸燈寺에서 밥을 굶으면서 普照의 
    淸風을 느끼다.)」「涵虛堂得通和尙語錄」(「한국불교전서」권7, 248하~249상) “穿林激石
    潺湲嚮 載月撑天㟮屼容 / 裏有懸燈千古殺 依俙普照昔年蹤 又 溪聲岳色兩奇絶 旦暮淸烟染白
    雲 / 普照淸風傳自古 至今厨絶赤鹽焄 又 塔立亭亭山影裏 鍾搖落落水聲中 / 有時散策閑回首 
    頻憶當年普照風 又 靜聽溪流嚮幽谷 回看明月掛西峯 / 時中無限好消息 却恨傍無可與通.” 
87)「세종실록」권85, 세종 21년 4월 18일(을미),; 金淑子,「江湖先生實記」卷1,; 丁克仁,
   「不愚軒集」에 같은 내용이 보이고 있다. 徐宗梵, 「懶翁禪風과 朝鮮佛敎」,「한국불교문화
    사상사」상, 가산불교문화원, 1992. 1147쪽.;황인규, 「나옹혜근과 그 대표적인 계승자 무학
    자초」,「동국역사교육」5, 1997,: 황인규,「고려후기․조선초 불교사연구」, 혜안, 2003. 

조선후기 제 2의 건국운동이라고 할 ‘國家再造’가 활발히 진행될 때 태조와 더불어 무학의 위상이 다시 드높아졌다. 국가나 전국의 사찰의식에서는 여말선초 삼화상인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이 가장 신통한 영험을 보이는 證明法師로 간주되면서 현재까지 한국 불교계의 삼화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불교계의 동향이나 불교의식집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지공․ 나옹․ 무학으로 이어지는 삼화상이 불교계에 부각되고 있었다.88) 즉,「동국승니록」89)「월저집」발,90)「禪門祖師禮懺文」,「범음집 梵音集」,「造像經」91) 등이나, 오늘날 불교의식의 전범으로 사용되고 있는 ?釋門儀範?에도 삼화상의 위상이 돋보인다. 특히 정조 때에는 지공과 나옹, 무학의 삼화상에게 三和尙敎書가 내려져 국가적인 추념이 이루어졌다.92) 이러한 가운데 송광사에서는 법맥을 초월하여 송광사 16국사 외에 나옹과 무학을 송광사 18주지에 포함하여 추념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백암 성총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지게 된 조종저의 「松廣寺嗣院事蹟碑」나 경암 응윤의 기문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88) 황인규, 「제 3절 불교계에서의 위상」,「무학대사연구-여말선초 불교계의 혁신과 대응」, 
    혜안, 1999.
89)「東國僧尼錄」,「續藏經」150.
90) 월저도안,「月渚集」跋,「韓國佛敎全書」9.121쪽.
91) 華嶽知濯,「造像經」, 金剛山 楡岾寺, 1824.
92) 雙荷子, 「敎諭書(釋王寺寄本)」,「朝鮮佛敎月報」2-6(通卷 17號), 1913, 6, 25.

"근세에 浮休善修가 있어 이 절에 이어서 주석하였고 碧巖覺性, 翠微守初에게 법을 전하였다. 세 선사는 모두 道法을 밝히고 드날렸으며, 절의 건물을 늘리고 꾸몄으니 보조국사 때에 비해 더욱 성대하였다. 하지만 종파는 달랐으니 臨濟의 18대 전법제자는 石屋淸珙으로 고려조 太古普愚가 청공의 법을 전해 받았다. 또 6대를 전해진 것이 부휴였으니, 이것이 여래의 正眼이며 보조(牧牛)의 법이 전수된 것은 아니다. 또한 나옹과 무학이 이 절에 기대어 탑을 세운 것과 같다. 취미의 적전은 栢菴性聦이었는데 사원을 다스리는 일을 이어 전수받았다. 본성을 깨닫고 문자를 이해함에 근래의 조사에게 훈습을 받고 멀리는 보조의 기풍을 접하였다."93)
93) 趙宗著(1631∼1690), 「昇平曹溪山松廣寺嗣院事蹟碑」,『조선금석총람』하, 일한인쇄소, 
    1919.; 大圓鏡, 「昇平曹溪山松廣寺嗣院事蹟碑」,「해동불보」3, 해동불보사, 1941.

"十六祖師影殿額曰慈蔭堂 以普照爲主壁 而眞覺․ 淸眞․ 眞明․ 慈眞․ 圓鑑․ 慈靜․ 慈覺․ 湛堂․ 慧鑑․ 慈照․ 慧覺․ 覺圓․ 淨慧․ 覺眞․ 高峰十五祖師 配享昭穆 竝懶翁無學 爲十八住持至如臨鏡堂凌虛閣水石亭 特風流之最 不與此錄云爾"94)
94) 鏡巖應允(1743 ~1804), 「松廣山松廣寺記」,「경암집」99~101쪽.ᅠᅠ

조선중기이후 부휴 선수와 벽암 각성, 취미 수초 등 송광사의 고승들은 보조국사 지눌 당시 보다 그 사세가 더 흥성했다고 자부하면서 임제종의 정맥을 이은 석옥 청공의 법사 태고 보우에게 법통을 연결시켰으며,95) 한편으로는 나옹과 무학도 16국사와 버금가는 고승으로 추념하였다. 그 후 龍岳 慧堅(1830~1908)은 1899년에 해인사의 대장경 4부를 인출하여 삼보사찰에 각기 1부씩 모시고 1부는 전국의 유명한 사찰에 나누어 모셨으며, 송광사가 說法殿의 18國師道場96) 이라는 사실을 특기하였다. 이와 같이 송광사는 조선초 이래 고봉 법장을 제 16국사로 추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란 직후 송광사를 중창하면서 16국사를 승보로 받들었다. 나아가 조선 후기 나옹과 그의 상수제자 무학을 송광사 18주지에 포함시킴으로서 송광사를 18국사의 승보도량으로 그 위상을 정립해 나갔던 것이다.
95) 황인규, 「수선사 16국사의 위상과 추념 : 송광사의 승보종찰 설정과 관련하여 試攷함」,
   「보조사상」34, 2010.
96) 龍岳蕙堅(1830~1908),「登說法殿十八國師道場」「龍岳堂私藁集」.「한국불교전서」11, 119쪽. 

2) 조선말 불교계의 삼보사찰의 지정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통도사와 해인사에 이어 송광사가 삼보사찰의 위상을 확립해 가고 있었지만 19세기 전반에도 삼보사찰에 대한 지정에 이견이 있었던 듯하다. 김제 금산사가 불보사찰이라고 밝힌 기록이 찾아지기 때문이다. 즉, 1828년(순조 28)에 호남 12군현을 유람하고 쓴 저자 미상의 기행록인「續南遊錄」97)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즉, ‘東國寺刹有三寶 金山寺有丈六佛 故曰佛寶 海印寺有龍藏 故曰法寶 此寺謂之 僧寶以出普照以下十六國師也’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즉,  海印寺는 法寶‚ 松廣寺는 僧寶寺刹이라 하여 우리나라의 三寶寺刹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다. 762년(경덕왕 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중창되고 彌勒丈六像을 조성되어 主佛로 모셨고, 金堂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兜率天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이 그려졌다.
97)「續南遊錄」.「續南遊錄」은 1828年(순조 28)에 湖南 12郡縣을 유람하고 紀行錄으로‚ 
    1冊 14張의 筆寫本이다. 규장각 古4790-20 1책 14장. 판본 필사본 사이즈 37.1×24.2cm.) 
    저자는 호남 지방에서 수령으로 있는 친구와 인척들의 초대로 여행을 하게 되었으며 12개 
    군현 1700여리를 다녔다고 하였다. 9월 2일에 출발하여 華城·成歡·參禮院 등을 거쳐 전주에 
    도착하였고 그후 金構·泰仁·長城·興德·玉果·淳昌 등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松廣寺에 가서는 
    이 절이 僧寶寺刹임을 말하면서 普照庵·羽化閣·三淸閣 등 건물들의 모습과 보조국사 지눌의 
    행적과 일화 등 송광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강문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 http://e-kyujanggak.snu.ac.kr

"師(진표)는 교법을 받기를 마치자 金山寺를 창건하고자 산에서 내려왔다. 大淵津에 이르자 갑자기 용왕이 나타나 옥으로 된 가사를 바치고 8만 권속을 이끌고 시위하며 金山藪로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다시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 진표에게 계법을 주었는데 하여 檀縁에게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또 금당의 남쪽 벽에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威儀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甲辰年 6월 9일에 조성되어 丙午年(766년) 5월 1일에 금당에 안치되었으니 이해는 大曆 원년이다."98)
98)「三國遺事」卷4, 義解5 關東楓岳鉢淵藪石記, ‘師 受教法已欲創金山寺下山而来至 大淵津 
    忽有龍王出献玉袈裟将八萬眷屬侍徃 金山藪 四方子来不日成之 復感慈氏従兠率駕雲而下與 
    師 受戒法師勸檀縁鑄成弥勒丈六像 復畫下䧏受戒威儀之相於金堂南壁□ 於甲辰六月九日鑄
    成丙午五月一日安置金堂 是嵗大暦元年也’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진표에게 계법을 주자 이에 미륵 장육상을 조성하였고 그림을 그려 모셨다는 것이다. 금산사는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시면서 유가종(法相宗)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99) 이처럼 금산사를 불보사찰로 간주하여 주목되고 있는데, 그 밖에 삼보사찰로 간주한 사례는 더 이상 찾아지지 않는다. 
99) 그 후 왕사 慧德이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절의 남쪽에 廣敎院을 설립하여 看經·法席 
    등을 주관하였다. 당시 금산사는 창건 이후 가장 규모가 큰 대도량이 되었다. 


현재 삼보사찰이라 불린 기록은 조선 후기 성리학에 정통한 10대 문장가로 꼽혔던  淵泉 洪奭周(1774~1842)가 1832년(순조 28)에 지은, 아래와 같은 「淵泉翁遊山錄」의 기록이 가장 빠른 것인 듯하다.

“불가에서 말하기를 동국사찰에는 三寶가 있으니, 通度寺에는 佛頭骨이 있어 佛寶이고 海印寺에 있어서 龍藏이 있어 法寶다. 또한 이 절을 僧寶라하는데 이곳에서 普照이래 16國師가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100)
100) 洪奭周(1774~1842), 「淵泉翁遊山錄」.: 임석진,「조계산송광사고」「건물부」.“佛氏言 
     東國寺刹 有三寶 通度寺有佛頭骨故曰僧寶 海印寺有龍藏故曰法寶 此寺謂之僧寶以出普
     照以下十六國師也.”이 내용은 송광사 우화각 현판에 새겨져 있다. 

그 후 1863년(철종 14)에 雪竇 有炯(1824~1889)이 간행한「山史略抄」(혹은「山中史記」)에 의하면, 자장은 중국에서 석가사리를 중국에서 모시고와 통도사 등지에 봉안하였다. 문수보살이 그려준 대로 통도사에 전각을 짓고 계단을 만들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불보사찰로 추숭한다고 하였으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여 이안하여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 하였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16국사가 배출되어 중생을 제도하였으므로 승보사찰로 추숭한다는 것이다.101)
101) 雪竇有炯(1824~1889),「山史略抄」, ‘曹溪山松廣寺 高麗普照禪師所剏 以 十六祖師次第而出 
     普利群品故 推 爲僧寶寺刹’ 一依文殊指畫 建寺築壇 名曰通度 後人推爲佛寶寺刹 高麗顯宗 
     刊八萬藏經於巨濟島 移鎭于此寺 是爲法寶寺刹(曹溪山松廣寺 高麗普照禪師所剏 以十六祖師
     次第而出 普利群品 故 推爲僧寶寺刹)’ 

그 후 개화기 중도우파의 인물로 알려진 雲養 金允植(1835~1922)은 ‘海東三寶刹 松廣獨擅奇(通度海印及松廣爲三寶刹) 二祖鉢衣地(懶翁住是寺 以衣鉢付無學)’102) 라고 海東三寶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02) 金允植(1835~1922), 「松廣寺」,「雲養集」卷1, 詩 昇平舘集.

당대 선지식으로 소문난 龍嶽 慧堅(1830~1908)은 1899년 도총섭의 직책으로 7백여 명의 스님들을 지휘하여 해인사 경판으로 대장경 세 부를 인출하고, 이를 해인사와 송광사 그리고 통도사에 차례로 봉안하며 삼보사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103) 그리고 용악의 제자이자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 교장과 통도사 주지를 지내게 되는 九河 天輔(1872~1965)도 1901년에「龍岳堂私藁集」서문을 쓰면서 역시 三寶寺刹을 언급하였다.104) 송광사 주지 錦溟 寶鼎(1861~1930)도 1902년에 쓴 해인사 금강계단 계첩서에서 해인사를 大法寶宗刹이라 부르고, 통도사를 佛宗刹이라고 하였다.105) 통도사 강주였던 海曇 致益(1862~1942)은 1915년에‘曰夫佛宗刹 朝鮮之一也(佛宗刹通度 法宗刹海印 僧宗刹松廣寺)’106) 라고 하여 삼보사찰을 언급하였다. 만해 한용운(1879~1944)도 ‘梁山之通度 陜川之海印 昇平之松廣 爲佛法僧三寶之宗家 而通度卽釋迦如來之頂骨舍利安塔 故曰佛寶 海印卽八萬經板之所藏 故曰法寶 松廣卽十八國師繼出廣布佛法 故曰僧寶也’라고 삼보사찰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 바 있다.107) 특히 李能和(1869~1943)는 1919년에 쓴「원감국사어록」「圓鑑國師語錄重刊序」에서 다음과같이 삼보사찰을 정립하였다. 
103) 龍岳慧堅, 「大藏經各邑地境遞罷信地奉安記錄」,「龍岳堂私藁集」,:「한국불교전서」11, 
     三月初七日 點淸齋 發印經之時 余關北太祖王祠院 都摠攝之官佩印 率彼此僧徒 又接諸山
     碩德 合七百餘員 忘夜精進供佛 印出二萬卷 奉安三寶寺刹 先奉安海印寺 次全羅道順天松  
     廣寺 … 奉安于本寺藏經閣’
104) 九河天輔, 「龍岳堂私藁集序」,「龍岳堂私藁集」,:「한국불교전서」11, ‘曰若吾師 關北釋
     王寺 思拔群伍 智出寂情 誦金剛經 日用鍊業 一僧寶也 … 亦接于諸山碩德 參禮監役 合二
     萬卷印出 三寶寺刹奉安’ 
105) 錦溟寶鼎, 「해인사 금강계단 계첩서」,「다송문고」권1, :「한국불교전서」12, ‘就靈鷲山
     佛宗刹金剛戒壇 請萬化和尙 欽受三壇大戒 晦名塵外 藏光壺中 今於勅建大法寶宗刹金剛戒
     壇 七衆軿埴 三壇圓備 依律結界 開演寶戒’. 그는 범해각안의 행장에서 ‘芿參曹溪伽耶鷲嶺
     之宗刹’이라 하여 세 사찰이 종찰이라고 하였다. 참고로 송광사의 근대 고승인 九山秀蓮
     (1909~1983)은 通度寺 金剛戒壇에서 海曇致益을 戒師로 具足戒를 受持하였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도 「山松廣寺蹟」에서 佛法僧三寶之宗家라는 표현으로 삼보사찰을 소개하였다.
106)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寶相庵律部新設引」, 아세아문화사 1983.
107) 만해 한용운(1879~1944), 「제 2부 松廣寺事蹟」,「曹溪山松廣寺史庫」아세아문화사, 
     1977, 44~45쪽.

‘조계종은 옛날 승평부(지금의 승주군)의 송광사에서 창립되었다. 그 절에는 수선사가 있는데 수선사의 사주는 마음과 마음으로 인가하여 수십대를 전하여 국사로 불리는 사람이 16명이고 조사로 불리워지는 사람이 또 16명이었다. 예로부터 이름난 고승들이 송광사에 주석하여 번영하였으므로 송광사만이 오로지 승보종찰이란 훌륭한 이름을 얻었다.(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등을 모시고 있으므로 불보종찰이라 하고, 해인사는 고려대장경판본을 모시고 있으므로 법보종찰이라고 한다. 여기에 승보종찰인 송광사를 합하면 조선의 삼보종찰이 된다.) 그렇다면 송광사가 귀중한 것은 승보에 있고 승보가 귀중한 것은 위대한 자취에 있다’108)
108) 이능화,「圓鑑國師歌頌」「圓鑑國師語錄重刊序」,「한북불교전서」6,‘自古名僧 以住是寺爲榮 
     故松廣 獨得僧寶宗刹之美名焉<通度寺 以藏佛骨袈裟故 號佛寶宗刹 海印寺 以藏高麗藏經板本
     故 號法寶宗刹 合僧寶宗刹松廣寺 共爲朝鮮三寶宗刹’ 이러한 내용은 그의 저술인「조선불교통
     사」에도 남기고 있다. 李能和(1869~1943), 「普照後始設曹溪宗」,『朝鮮佛敎通史』卷下, 374
     ~375쪽, ‘尙玄曰 朝鮮今稱三寶寺刹 一曰佛寶大本山通度寺是也 以新羅時 慈藏律師 入唐得佛
     骨及佛袈裟 還安于本寺故 二曰法寶大本山海印寺是也 以高麗大藏經板本 藏于本寺故 三曰僧寶
     大本山松廣寺是也 以高麗普照國師以後 眞覺 淸眞 冲鏡 眞明 晦堂 慈眞 慈靜 圓鑑 慈覺 湛堂 
     妙明慧鑑 妙嚴慈圓 慧覺 覺儼 復菴 淨慧 弘眞 高峯和尙以上諸人海東佛祖源流作十六國師曹溪
     寶林也 燈燈相續 懶翁王師 幻菴國師 無學王師 亦住本寺 故松廣 在我海東 實爲靈山道場 亦爲’

이렇듯 20세기 불교학의 개척자인 이능화가 삼보사찰에 대하여 정의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109)
109) 조선말 삼보사찰의 지정은 성리학의 보수화와 서양 문화의 유입에 따른 불교계의 위기 
     의식에 따른 불교계의 동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미 임진왜란시 참상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문화적 충격도 컸다. 예컨대 일본 침략군의 주력을 이룬 장수 고니시 
     유키나(小西行長)는 천주교신자 아우구스띠누스(Augustinus)로서 최초로 한국의 땅을 
     밟은 스페인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신부를 대동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는 불교신자로 일본승려 겐소(玄蘇)를 휘하에 두었다. 겐소는 제국주의적 불
     교적 성향의 인물이었으며, 승려 닛신(日眞)도 역시 일본 제국주의적 교리를 담고 있는 
     法華宗系 日蓮宗 승려였다. 그리고 전란중의 흑인의 등장은 ‘海鬼’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조선후기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황인규, 「임진왜란 의승군의 봉기와 
     전란의 충격」,「한국불교사연구」2, 2013.) 조선말 삼보사찰의 지정 배경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별고에서 정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4. 맺음말 

불교가 이 땅에 수용된 이후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어 불교의 가르침의 근본도량으로서 국가 운용의 도량이 되었다. 백성들의 사회와 문화의 중심으로서 사찰 도량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쇠를 달리하였으나 고대 이래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는 사찰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사찰이 바로 삼보사찰 혹은 삼보종찰이라고 불리우는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이다. 통도사는 신라 자장에 의해 불사리가 모셔져 불보사찰, 해인사는 고려 대장경판이 모셔져 불보사찰이라고 불린다. 송광사는 고려후기이래의 16국사가 배출되어 승보사찰이라고 하지만, 이 세 사찰을 묶어 삼보사찰로 부르기 시작한 시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다.

통도사는 신라 자장에 의해 불사리를 봉안한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자장에 의해 봉안된 불사리는 황룡사 탑, 태화사 탑 등 사찰에 봉안되었으나 고려중기 혹은 고려말에 폐사되었다. 황룡사가 대표적인 국찰이었으나 용신신앙을 대표하는 위상 보다 상위인 불사리 신앙과 계율종의 중심인 통도사가 불보적 전통을 지녔다. 고려 전기 개경의 개국사가 계율종의 중심 사찰이 되면서 다소 그 위상이 축소되었으나, 중기이후 배례석과 장생표가 설치 운용되면서 법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커졌다. 여말선초 왜구의 침탈로 인해 통도사의 불사리의 일부가 개경 송림사에 봉안되었으며, 조선 건국후 한성 흥천사에 이안되기도 하였다. 조선중기 임진왜란시 사명유정이 스승 청허휴정의 승인하에 태백산 정암사와 경북 달성 용연사, 금강산 건봉사 등에 다시 분산 보관하였지만 그 일부가 다시 통도사에 봉안되면서 조선후기 불사리 신앙의 중심으로 이루면서 불가의 종찰로서 위상을 지니며 조선말 삼보사찰로 지정되었다. 

 해인사는 신라시 창건되어 신라말 화엄종의 북악파의 본산이었으며, 창건자 이정과 순응과 더불어 삼사로 존경받았던 희랑이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합에 참여하면서 고려시대 국찰로서「고려실록」과 대장경이 봉안되었다. 왕자 출신 대각국사 의천이 잠시 주석하였으며, 인종대 지리산 수정사 결사와 무신집권기 해인사 주지 天其는 개태사 승통 守其와 함께 재조대장경 교열에 참여하였다. 

원간섭기 후반 체원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주도하였는데, 공민왕대 한국의 마지막 화엄종 국사로 책봉되는 설산 천희도 그의 제자였다. 천희의 제자 경남도 해인사 주지에 재임하였으며, 당시 대장경판이 인경되기도 하였다. 이 경판은 해인사 제경판으로 추정되며, 강화도에 봉안되었던 재조대장경판은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한성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이안되었다. 이는 당시 왕사 무학의 주도로 화엄종 고승 설오와, 특히 경남의 주도로 이루어진 듯하다. 해인사에 보안된 재조대장경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 인경되었으며, 조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세조의 삼화상 혜각존자 신미와 묘각왕사 수미 등과 해인사 주지 죽헌과 학조 등에 의해 인경불사가 이루어져 전국의 대표적인 50 여 사찰에 봉안되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 등 왕실의 지원하에 추진되는 등 조선시대에도 법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지속되었으며, 조선말 삼보사찰로 지정되었다.
  
송광사는 고려후기 수선사 결사를 전개했던 보조국사 지눌이후 15국사가 하나로 묶여 추념된 이후에야 비로소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게 된다. 송광사 제 16국사인 고봉법장이 입적한 세종 10년이후 조선중기 국사로 추증이 된 듯하며, 그를 포함한 16국사로 추념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임란후 송광사를 재건하면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면서 이전의 시기에 확립된 불보사찰 통도사와 법보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한국 사찰을 대표하는 삼보사찰로서의 위상이 정립되었다. 삼보사찰은 조선후기 송광사의 승보사찰의 확립과 더불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한국불교사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불교계는 송광사 16국사의 추념에 이어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이 16국사와 더불어 송광사 18주지로 추념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은 인도승 지공선현과 더불어 여말선초 삼화상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의 증명법사였다. 이렇듯 송광사는 조선시대 이후 사세의 부침이 있었지만 18주지의 추념을 통해 승보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삼보사찰로 정립된 시기는 현재로서는 조선후기 문신 淵泉 洪奭周(1774~1842)의 문집에서 처음 보이고 있으며, 개화기 문인 김윤식도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였다.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물론 영조 연간에 간행된 읍지류 ?여지도서?에도 삼보사찰이라는 용어 조차 보이지 않는다. 조선후기 기행문인 ?續南遊錄? 등과 같은 저술류에 의하면, 금산사가 불보사찰이라고 특기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삼보사찰의 정립은 조선말기에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그 후 석왕사 제일의 선지식으로 소문난 龍嶽 慧堅과 그의 제자 九河 天輔, 특히 송광사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노력한 송광사 주지 錦溟 寶鼎과 통도사 강주였던 海曇 致益(1862~1942), 만해 한용운 등이 삼보사찰의 지정을 특기하였다. 특히 한국불교를 집대성한 이능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삼보사찰을 그의 저술류에 기록으로 남기게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조선후기이후 불교계는 불교중흥을 위하여 삼보사찰을 지정 정립하여 유포한 듯하다. 즉, 조선말 삼보사찰의 지정은 성리학의 보수화와 서양 문화의 유입에 따른 불교계의 위기의식에서 불교중흥을 꾀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이러한 조선말 삼보사찰의 지정 배경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별고에서 정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