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 시기와 경로/한상길
[불교학연구 30호]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 시기와 경로
(이 논문은 2011년 8월 10일 강화군과 강화역사문화연구소 등이 주관한「고려대장경과 강화도」학술회의(강화역사박물관)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한상길/ 동국대학교
Ⅰ. 머리말
Ⅱ. 이운의 배경과 과정
Ⅲ. 이운 시기
Ⅳ. 이운 경로
Ⅴ. 맺음말
[요약문]
지금까지 대장경에 관한 논문과 저술, 조사 보고서 등은 3백편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이운 시기와 경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는 거의 없었다. 그 원인은 이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는 데 있다.『태조실록』의 단편적이고 불명확한 기사에 의존하다보
니 대장경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 어떠한 경로로
해인사에 도착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연구자들
은 아예 실록의 기사를 인정하지 않고, 그 시기를 고려말 또는 세조
대로 추정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어 왔다. 그런데 일찍이 한 용운과
김 영수는 고려대장경판 중에서 새로운 기록을 발견하고 이운 시기
에 대한 卓見을 제시하였다. 均如가 주석한『釋華嚴敎分記圓通鈔』
에 음각된 1405년의 冲玄의 기록에 따라 판전의 조성 등 예비 작업
은 이미 1397년에 시작되었고, 1398년 5월 10일에 강화도를 출발하
여 1399년 1월 이전에 이운이 완료되었다고 하였다. 필자 역시 사료
를 검토하고 연구자의 견해를 종합한 결과 이러한 결론에 동감한다.
이운 경로 역시 이운 시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이운 경로에
요약문 대해서는 그동안 육지길과 바닷길이 제기되었지만 물길과 육지길을
모두 거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강화에서 배를 타고 한강에 도착
하였다가 다시 한강을 떠나 충주에 이르고, 육지길을 통해 문경새재
를 넘어 남하한다. 낙동강에 이르러 다시 배를 타고 고령의 개경포
에 도착하여 육지길로 해인사에 도착하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대장경의 판각지와 보관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충현의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충현은 즉 “丁丑
年 出陸時 此闕失 與知識道元 同願開板入上”이라고 하였는데 이 가
운데 ‘出陸’이라는 의미는 대장경이 섬에서 ‘육지로 나왔다’는 뜻이
다. 대장경의 판각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고 남해와 강화도뿐만
아니라 해인사, 下鋸寺, 斷俗寺, 東泉寺 등의 여러 지역이 판각에 참
여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동안 정설이었던 남해나 강화도를 부정
하고 판각지를 해인사 자체 및 인근 지역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
러나 충현의 기록은 대장경이 해인사에 도착한 지 불과 7년 뒤의 기
록으로서 사료로서의 가치와 신뢰성이 높다. 즉 대장경은 분명히 섬
에서 육지로 나왔다는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I. 머리말
대장경이 지닌 가치와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
실들은 너무도 적다. 그나마 잘 안다고 굳게 믿었던 사실조차도 잘
못된 지식인 경우도 있다. 일찍부터 경판의 원목을 자작나무라고 이
해하였으나, 오히려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는 실
증적 연구는1) 우리의 앎이 얼마나 부족한 것임을 새삼 깨달게 한다.
대장경 조성에 참여했던 인물, 판각 과정, 판각 장소, 봉안처 등 많
은 사실들이 여전히 의문부호로 남아있다. 올해는 초조대장경 조성
을 시작한 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국제학
술대회가 개최되어 큰 관심을 받았다.2) 그런데 10개국의 학자가 27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도 고려대장경 조성을 둘러싼 의문과 역
사적 사실 등을 규명하려는 주제는 보이지 않는다. 지나온 천년 보
다 다가올 천년을 더 중시한 듯하다.
1) 박 상진·강 애경,「팔만대장경판의 수종」,『목재공학』제24-3호(서울: 한국목재공학
회, 1996)
2)「大藏經 : 2011年 高麗大藏經 千年 記念 國際學術大會」(서울: 고려대장경연구소·금
강대, 2011 6. 26~29)
다행히 최근에 강화군청과 불교학연구회에서 각각 고려대장경의
역사적 사실과 문화사적 의미에 관한 여러 논문이 발표되어 대장경
의 올바른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3) 미래는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현재의 점검을 통해서 예측하고 준비해야 한다.
3) ① 강화군청·(사)진단전통예술보존협회,「고려 초조대장경 판각 1000년과 재조대장
경 강화판당 봉안 760년 기념 학술회의, 고려대장경과 강화도」(2011. 8. 10. 강화역사
박물관 세미나실) ② 불교학연구회 2011 추계학술회의「고려대장경 천년의 재조명-고
려대장경의 가치와 의의 -」(2011. 11. 12. 서울대 43-1동 201호).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글은 대장경의 과거, 특히 강화도를 떠나 해인
사에 이르기까지의 이운 과정과 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대장
경은 해인사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강화도에서 언제 어떠한 경로로
옮겨갔는가에 대한 명확한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태조실록』에
전하는 강화 대장경의 한강 도착에 관한 짧은 기사와『정종실록』의
해인사 대장경 인출에 관한 사실이 이와 관련한 기록의 전부이다.
부족한 자료로 인해 대장경의 이운 시기와 경로에 관한 명확한 이해
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본고는 선학들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고 종합하면서 대장경의 이운 시기와 경로에 관한 역사적 이
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Ⅱ. 이운의 배경과 과정
1. 이운 배경
조성 이후 강화 서문밖 판당에 봉안되었던 대장경은 1398년(태조
7) 5월 10일 선원사를 떠나 한양의 支天寺를 거쳐 해인사로 이운되
었다. 150년 가까이 잘 보관돼있던 대장경을 왜 해인사로 이운하였
을까? 무엇보다도 당시 강화도는 왜구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는 위험
한 곳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선박을 이용한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은 고려말부터 계속되어 조선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1360
년(공민왕 9)에는 왜구의 침탈에 선원사 등이 큰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
"윤5월에 왜구가 강화를 침범하여 선원사·용장사 두 절에 들어가서 3
백여 명을 죽이고, 쌀 4만여 석을 빼앗았다. 이때 심몽룡이란 사람이 왜
적 13명을 베었으나 마침내 왜구에게 죽고 말았다(『고려사절요』권27,
공민왕 9년 윤5월)"
이처럼 왜구들이 침범하여 선원사와 용장사의 3백여 명을 살해하
는 등 강화도는 항상 왜구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십여 년간 국
력을 동원하여 어렵게 조성한 대장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에 이운을 결정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왜 많은 사찰 중에서 해인사가 선택된 것일까. 정확한 자
료가 남아 있지 않으나 대략 몇 가지 배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해인사가 경판을 보관하는데 적합한 지리적, 환경적 조건을 갖추었
다는 사실을 감안하였을 것이다. 해인사는 풍수지리상 三災八難이
침범하지 못한다는 요새지라고 한다. 특히 절은 내륙 깊숙한 가야산
의 심산유곡에 자리잡고 있어 외적의 침탈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해인사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고려왕조의 실록을 보
관했던 史庫地였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고려시대부터 해인사는 많
은 경판을 판각, 소장하고 있었던 불교사적 배경이 작용했던 것이라
보인다. 해인사에는 대장경 도착 이전에 이미 여러 경판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寺刊板 혹은 雜板이라고 한다. 1098년(숙종 3)의 간
기가 있는『화엄경』을 비롯하여 1349년(충정왕 원년)에 간행된『화
엄경약신중』등 고려시대 경판 54종 2,835장이다. 이 가운데『화엄
경』과『시왕경』의 변상도 등 전통 판화 자료와 원효·의상·대각국
사의 문집 등 고승들의 저술은 불교사와 사상의 연구뿐만 아니라 한
국 전통문화의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4) 이와 같이 해인사는 지리적
으로 안전한 위치였고, 이미 오래전부터 사간판을 소장한 경험이 있
었으므로 대장경의 이운처로 결정된 것이라 생각된다.
4) 서 수생, ①「海印寺 寺刊藏經板 硏究」,『국어교육연구』5(서울: 국어교육연구회,
1973) ②「大藏經의 補遺藏經板 硏究(1)」,『경북대 논문집』22(대구: 경북대, 1976)
2. 이운 과정
대장경의 해인사 이운에 관한 사료는 아주 소략하다. 당시의 실록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① 임금이 龍山江에 거둥하였다. 대장경의 목판을 강화의 선원사로부
터 운반하였다.5)
② 隊長과 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6)
③ 검교 참찬문하부사 兪 光祐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맨 앞에 서게
하고, 오교·양종의 승도들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
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7)
5) “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禪源寺”『태조실록』7년 5월 10일.
6)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태조실록』7년 5월 12일.
7) “命檢校參贊門下府事兪光祐行香, 五敎兩宗僧徒誦經, 儀仗鼓吹前導”『태조실록』7년 5
월 12일.
대장경 이운에 관한 자료는 이 짤막한 기사가 전부이다. 즉 1398년
음력 5월 10일 용산강에 도착하였다.(자료 ①) 용산강은 지금의 원효
대교 부근으로 추정되는데 이 날은 장마철이라 계속 비가 내리고 있
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11일까지 이틀을 이 곳에서 머물던 대장경은
12일 지천사로 운반하였다.(자료 ②) 지천사는8) 고려시대부터 국가
의 재난이나 기상의 이변이 있을 때, 재앙을 물리치는 소재법회를 자
주 열었던 소재도량으로 유명하였다. 조선초에도 星變을 祈禳하는
법석을 몇 차례 개설하였고, 태조가 두 차례나 행향하기도 하였다.
8) 支天寺를 興天寺의 오기로 보기도 하지만(문 명대,「大藏都監 禪源寺址의 發見과 高麗
大藏經板의 由來」,『한국학보』17, 서울: 일지사, 1976, p.204) 근거가 부족하다.
그런데 절 옆에 太平館이라는 외국사신의 숙소가 있어 절은 수행
원의 처소로 자주 이용되다가 1408년(태종 8년) 결국 폐사되고 말았
다. 오늘날의 시청 앞, 프라자호텔 자리로 추정한다.
3. 해인사 도착
이후 대장경이 언제 어떠한 경로로 해인사까지 이운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대장경이 다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
는 1399년(정종 1년) 1월이다.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불경을 인쇄하는 승도에게 해인사에서 供饋하
게 하였다. 태상왕이 私財로 대장경을 인쇄하여 만들고자 하니, 東北面
에 저축한 콩과 조 5백 40석을 端州·吉州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
고, 해인사 근방 여러 고을의 米豆와 그 수량대로 바꾸게 하였다."9)
9) “命慶尙道監司, 飯印經僧徒于海印寺. 太上王欲以私財, 印成大藏經, 納東北面所畜菽粟
五百四十石于端, 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諸州米豆如其數”『정종실록』1년 1월 9일.
즉 태조가 사재를 출연하여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1398년 5월 10일 용산강에 도착한 대장경은 이틀 후에 지천
사로 옮겨졌고, 이듬해인 1399년 1월에는 해인사에 도착해 있었다.
이 7개월 사이의 대장경에 관한 자료가 전혀 없어 이운 경로에 대한
명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Ⅲ. 이운 시기
이상에서 살펴 본 실록의 3건의 기사가 대장경의 해인사 이운을
살필 수 있는 전부이다. 숭유억불을 국가시책으로 표방한 조선왕조
라 하더라도 고려인의 국운을 건 大役事임을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인색한 기록이다. 이러한 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인해 이운 시기와
경로에 관한 제반사항이 모두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연구자
에 따라서는『태조실록』의 기록조차도 부인하는 등, 이운 시기에 대
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대표적 인물이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 이 능화, 한 용운, 김 영수, 문 명대 등이다.
1. 다카하시 토오루의 견해
다카하시는 대장경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이운된 시기를 1318년
(고려 숙종 5)에서 1381년(우왕 7) 사이의 63년간이라 주장하였다.10)
고려말에 여주 신륵사에는 대장경 간행본을 봉안한 2층의 大藏閣
이 있었다. 당시 李 崇仁이 지은「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에 대장경
과 대장각에 관한 자세한 조성기가 전한다.11) 이 기록은 李 穡이 죽
은 부친의 뜻에 따라 대장경을 간행하고 신륵사에 대장각을 건립, 봉
안한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다카하시는 이 대장경이 해인사에서
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이 색은 혼자 힘으로 대장경을 간행하기
어려워 나옹 제자들의 힘을 빌렸는데,12) 이 숭인이 쓴 ‘睡庵長老가 해
인사의 장경을 간행하여 봉정하다’13)라는 詩가 있고 여기에 등장하
는 수암장로가 나옹의 제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색이 대장경을
간행하기 위해 나옹에게 도움을 청하자, 나옹은 제자인 수암장로에
게 간행을 명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륵사의 간행본이 곧 해인사의
대장경이었고, 이미 1318~1381년 사이에 강화도의 대장경이 해인사
에 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10) 高橋 亨,「海印寺大藏經板に就いて」,『哲學雜誌』29권-327호(東京: 岩波書店, 1914)
11)『 동문선』 제76권,「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12) “스스로 계획하여 보니 내 힘으로는 부족하였다. 힘입어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
는 오직 나옹의 무리뿐이기에 즉시 편지를 보내 의사를 말하였다. 호가 無及, 琇峯이
라고 하는 두 승려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격려하였다.”「驪興郡神勒寺大藏閣
記」, 앞의 책.
13)「睡菴文長老印藏經于海印寺 戲呈」,『陶隱集』권3.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즉 ‘장경’이란 말
은 경·율·론 삼장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 일부의 경전을 지칭하기
도 한다.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보다 연대가 오래된『三本華嚴經』
과『금강경』등 여러 고려판 경전이 봉안되어 있었으므로 반드시 시
의 ‘장경’이 팔만대장경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태조실
록』의 기록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으니 더욱 믿을 수 없는 주
장이라고 한다.14)
14) 서 수생,「세계의 성보 팔만대장경」,『월간 해인』41호(합천: 해인사, 1985. 7)
이후 신륵사 간행본은 1414년(태종 14) 7월에 모두 일본으로 건너
갔다.15) 최근에 이 간행본이 일본 大谷大學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
는 사실이 밝혀졌다.16) 2006~2007년 직접 조사에 참여한 朴 相國은
각 함의 마지막 권에서 “蒼龍辛酉(1381)九月 日 …… 韓山君李穡跋”
등의 발문과 시주질을 확인하였다.17) 이로써 이 색과 廉 興邦 등이
간행하여 신륵사에 봉안한 대장경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졌다. 대곡
대학의 대장경은 모두 5,605帖인데 이 가운데 고려판이 4,995첩으로
90% 이상을 차지하며, 異本(일본판)이 65책(7첩·58권), 寫本이 541
첩이다. 이러한 대곡대학의 고려판은『大藏目錄』에 포함된 경전 전
체의 규모와 거의 같으므로 1381년 당시 고려대장경의 거의 전체를
인경한 것이라고 한다.18)
15) “예조에 명하여 여흥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일본 국왕에게 보내고, 寧山 任
內 豊歲縣 廣德寺에 소장된 대반야경 전부를 圭籌에게 내려 주게 하였다.”『태종실
록』 태종 14년 7월 11일.
16)『海外典籍文化財調査目錄-日本 大谷大學 所藏 高麗大藏經-』(서울: 국립문화재연구
소, 2008)
17) 박 상국,「大谷大學의 高麗版大藏經」, 『海外典籍文化財調査目錄-日本 大谷大學 所
藏 高麗大藏經-』앞의 책, pp.371~380
18) 최 영호,「高麗國大藏都監의 조직체계와 역할」,『고려대장경과 강화도』학술회의 자
료집(강화: 강화군·진단전통예술보존협회, 2011. 8), pp.82~83.
이와 같이 신륵사의 간행본은 고려대장경이 분명하지만 간행 당
시 대장경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이 색이 쓴 시가 주목을 받는다. 즉 이 색은「대장경
을 인출하러 해인사로 떠나는 나옹의 제자를 보내면서(送懶翁弟子
印大藏海印寺)」19)라는 시를 썼다. 싯구 중에 ‘가야산의 해인사에서
대장경 전체를 인경(伽倻海印印全藏)’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여기서 나옹의 제자는 이 숭인의 시에 보이는 수암
장로일 가능성도 있다. 대곡대학의 대장경에는 간기가 여럿 보이는
데 이 중에는 간행에 참여한 승려들의 이름이 있다. 華嚴大禪師 尙
聰, 陽山大禪師 行齊, 寶林社主 覺月, 禪洞社主 達劒, 惠宗, 智正20) 등
인데 수암장로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승려의 호칭은 법명, 법
호, 당호 등 다양하게 사용하므로 이들 가운데 누군가 수암장로라는
이름을 지녔을 수도 있다.
19) 李 穡,「送懶翁弟子印大藏海印寺」『牧隱詩藁』 권28, 詩. “舍利光芒照刹塵 門生幹事
有精神 伽倻海印印全藏 自道無爲閑道人 天闊春光方浩蕩 雲收山勢更嶙峋 歸來明效非
難見 九五箕疇獻紫宸”
20) 박 상국, 앞의 글, p.374. 다른 간기에 尙聰은 華藏寺 주지, 行齊는 陽山寺 주지로 표
기되어 있다.(p.375)
이처럼 이 색의 대장경 간행은 다카하시의 말처럼 나옹의 도움으
로 이루어졌고, 그 제자들이 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을 간행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이 규명되어야 한다. 먼저 앞의 간기에 보이는 인물들의 분석을
통해 이들이 나옹의 제자라는 사실이 규명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
숭인의 대장각기에 서술된 “임술년(1382) 정월에 화엄종 靈通寺에서
거듭 교열하고 4월에 배에 실어 여흥군 신륵사에 이르니 나옹이 입
적한 곳이다.”라는 내용이 해결되어야 한다. 만약 대장경이 해인사
에서 간행되었다면, 교열을 하기 위해 굳이 영통사까지 갈 일이 아니
다. 왜냐하면 영통사는 개성에 있는데 해인사에서 출발한 인출본을
여주를 지나쳐 북쪽의 개성까지 가지고 올라가 교열하고, 다시 신륵
사로 가져오는 불합리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2. 이 능화의 견해
이 능화는 1917년 한국불교사의 최대 역작인『조선불교통사』를
집필하고 이듬해에 발간하였다. 이 가운데「大法寶海印藏經板」이
라는 항목에서 대장경의 조성과 이운 등에 관해 자세히 고찰하였다.
조성 시기에 관한 우리 민족 최초의 고찰이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
면 다음과 같다.
"이 고려장경 판본을 살펴보면 곧 고종 24년(1237)부터 조성을 시작하여
16년이 지난 뒤 비로서 불사가 완성되었다. 대개 북송본과 거란본 등을
참조한 것이다. 사문 守其가 왕명을 받아 교감하였다. 처음에는 강화부
선원사에 두었다가 후에 조선 태조 7년(1398)에 이르러 선원사에서 경
성의 지천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한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겼는데
다만 어느 해인지는 알지 못한다. 일본인 高橋 亨은 일찍이 해인사 대
장경 판본의 내력에 대하여 서술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 원고를 구해
보았다. 대장경 판본이 완성된 후 어느 곳에 보관하였는지는 사서에 기
록이 없다. 다만 충숙왕 5년(1318)에 강화도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충숙왕 원년(1314)에 보면 천태종스님으로 국통인 無畏가 영봉산
龍巖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5년에 왕이 이 절을 중창하고 구 대장경이
부식되었으므로 다시 새로 인출하여 봉납한 일이 있었다. 또『고려사』
를 살펴보면 곧 경인년부터 왜구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해가 지나 임진
년에는 교동 甲山倉을 불지르기도 하였다. 당시 장경판본이 만약 강화
도에 있었다면 분명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판본을 해인사
로 옮겨 봉안한 것이다. 이상에서 여러 가지를 고증해 보니, 대장경판본
은 강화에서 해인사로 옮겨온 것은 고려조의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
문이 남는다. 즉 태조 2년(1393) 계유년 7월 해인사의 옛탑을 중창하면
서 ‘대장경을 완성하여 이 탑에 안치하기를 비옵니다’라는 태조 어제(御
製)의 발문이 있으므로, 대장경을 완성하였을 때는 강화경판이 해인사
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즉 分司에서 조성한 경판을 해인사
에 안치하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21)
21)『역주 조선불교통사』 5권,「하편 이백품제2(서울: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2010),
pp.85~98.
이 능화는 주지하듯이 한국불교에 대한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
를 통해 불교사의 거목으로 평가받는다. 대장경의 이운 시기에 관해
서도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여 1398년 이운설을 수용하면서도 고려
시대의 대장경 인출 사례 또한 중시하였다. 즉 우왕 7년에 이미 해인
사에서 대장경을 인출하였으므로 남해의 분사도감에서 조성한 대장
경이 이미 해인사에 와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3. 한 용운의 견해
한 용운은 일찍이 1932년「海印寺巡禮記」에서 대장경의 이운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그 시기를 추정하였다. 그는 1932년 8
월 해인사 장경각을 참배하다가 음각의 기록이 있는 경판 하나를 발
견하였다.
"이 경판을 해인사에 봉안한 시일은 아직 분명하지 못하나 조선역대실록
에 “太祖七年 戊寅五月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禪源寺. 戊午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라 한 것이 있고, 본 장경판 중 華嚴
交分記 第十卷 十張板의 輪廓外에 “丁丑年 出陸時 此闕失 與知識道元
同願開板入上 乙酉十月 日 首座 沖玄”이라 음각하여 있으니, 이로써 보
면 장경판을 조성한 후에 강화 선원사에 안치하였다가 이태조시에 이를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에 이안한 것인데 강화에서 移輸한 연
대에 대하여 실록에는 戊寅이라 하였고, 沖玄의 記刻 중에는 ‘丁丑年 出
陸’이라 하여 1년의 차가 있으나 正史인 실록을 따름이 마땅하고 충허의
記刻末에 ‘乙酉十月 日 首座 沖玄’이라 하였으니, 乙酉까지에는 이 경판
이 해인사에 이안된 것이 확실한즉 이 장경판의 해인사에 이안한 연대
는 이태조 7년 戊寅 5월로부터 그 후 乙酉年까지의 8년간에 있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22)
22) 萬 海,「海印寺巡禮記」,『佛敎』100(경성: 佛敎社, 1932. 10. 1), p.112.
한 용운이 본 華嚴交分記는『釋華嚴敎分記圓通鈔』이다. 고려초기
의 화엄학승인 均如가 당나라 法藏이 쓴『華嚴敎分記』 3권을 주석한
책으로 전10권이다. 균여가 959년(광종 10)에서 962년까지 摩訶岬
寺·法王寺 등에서『華嚴五敎章』을 강설한 것을 제자 그의 現原·
惠藏 등이 기록하였다. 이후 고종 때 天其가 개태사의 方言本, 光敎
寺本, 가야산 法水寺의 削方言本 등의 사본을 발견하여 교정하였고,
다시 제자들이 1251년(고종 38)에 대장도감 강화본사에서 개간하였
다. 후에 원본이 발견되어 충현의 補入板은 현재 고려대장경 보유판
의 ‘涵’ 函으로 옮겼다.
한 용운은 이 화엄교분기의 10장 왼쪽에 음각되어있는 정축년
(1397)은『태조실록』의 무인년(1398)과 맞지 않으므로 잘못되었다
고 지적하였다. 또한 충현이 이 陰刻記를 표기한 때가 을유년(1405)
이므로 이운 시기는 1398년~1405년 사이라고 단언하였다.
사찰의 사적기 등을 비롯한 고문서에서 간기의 오류는 흔한 일이
다. 한 용운의 판단대로 충현은 8년 전의 사실을 기록하면서 간기를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음각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간기 보
다 ‘出陸時’라는 표현이다. 즉 ‘육지로 나올 때’라는 사실은 착오가 될
수 없다. 이 짧은 구절은 그동안 많은 논란이 되어왔던 대장경의 판
각 장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대장경이 해인사에 온
시기를 ‘육지로 나올 때’라고 하여 대장경이 섬에서 나온 것임을 의
미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맺음말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4. 김 영수의 견해
包光 金映遂는 1937년에「海印藏經板에 就하야-移安은 丁丑年
用材는 白樺木」라는 글을 통해 이운 시기와 경판 판목에 대한 자세
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먼저 다카하시와 이 능화의 의견을 요약하
면서 두 사람의 견해는 막연한 추정에 불과하다고 비평한 후, 대장
경은 “1398년 5월 10일에 강화도로부터 지천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해인사로 이안된 것”23)이라고 하였다.『태조실록』의 “輸經板于支天
寺”라는 기사를 전면 부인하는 주장이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
음과 같다.
"균여의『釋華嚴敎分記圓通鈔』는 해인사 대장경판 총목 중에는 없지만,
누락된 전적이 여럿 있는 사례를 보면 대장경판 정본임이 분명하다. 만
약 정본이 아니고 해인사 전래의 판본이라고 한다면, ‘丁丑年 出陸時’의
음각기에서 보듯이 ‘出陸’이라고 쓸 이유가 없다. 다음으로 ‘丁丑年’은 여
말선초 사이에 두 시기, 즉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97년(태조 6)이
있지만 1397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337년 이전에는 대장경을 이
운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왜구의 침탈이 군산 이북의 경기지방까지 미
치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후인 우왕(1375~1389)대의 일이었다.
대장경의 해인사 이운 과정을 기록한『태조실록』의 기사에는 착오가 있
다. 먼저 “大藏經板, 輸自江華禪源寺”라는 구절이다. 대장경은 강화부의
서문밖 板堂에 있었고, 이곳의 수호사찰로 龍藏寺가 출현하였다. 대장경
은 판당, 즉 용장사에서 선원사로 옮겨간 사실이 없는데 실록에서는 대
장경판을 선원사에서 옮겨왔다고 하였으니 오류이다. 다음으로 용산강
에 도착했다가 지천사로 옮겼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다. 1399년 1월
대장경은 분명히 해인사에 도착해 있었다. 서울로 나온 지 불과 8개월만
인데 이 짧은 기간에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로 이운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원사에서 옮겨왔다거나 지천사
은 異論의 여지없이 1397년부터 1398년 5월까지 완료되었다." 24)
24) 金 映遂, 앞의 글, pp.7~19.
김 영수는 당시의 잡지글로서는 13쪽에 달하는 장문의 기고를 통
해 대장경의 이운과정을 자세히 탐구하였다. 그는 화엄교분기의 음
각기를 토대로 이운 시기를 글의 부제에서 보듯이 실록보다 앞선
1397년으로 추정하였고, 실록 기사가 원래의 史草와 다르게 생략하
면서 출발지인 용장사와 도착지인 해인사를 누락시켰다고 하였다.
대단히 흥미로운 가설이고 또 그럴듯한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위에서 요약하였듯이 이운이 ‘1397년부터 1398년 5월에 완료되었다’
고 하는 등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1398년 5월은 대장경
이 용산강에 도착한 시기이고, 여기서 출발하여 최종 목적지 해인사
까지 가는 데는 적어도 수개월이 소요된다. 또한 해인사가 왜 이운
처가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대장경이 화엄종의 소유물이
고, 조성 작업을 전담한 곳도 화엄종이므로 화엄종의 대표사찰인 해
인사로 결정되었다25)고 하는 등 다소 무리한 억측도 보인다.26)
25) 金 映遂, 앞의 글, p.17.
26) 대장경의 조성에는 화엄종만이 아니라 유가종·천태종·사굴산문·가지산문 등 여
러 종파와 산문이 함께 참여하였다. 최 영호,『江華經板 高麗大藏經의 판각사업 연구』
(서울: 경인문화사, 2009), pp.179~246.
5. 문 명대의 견해
1456년(세조 2)에 이운하였다는 주장이다.『성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경상도 관찰사 朴 楗에게 하서하기를, “도내 합천군 해인사에 소장된 대
장경과 板子는 모두 先王朝 때에 마련한 것이고, 또 客人[외국인]이 구
하는 바이며, 國用에도 없을 수 없으니, 만약 신중하게 지키지 못하여
혹 비가 새어서 썩거나 손실이 된다면 매우 不可한 일이니, 경은 숫자와
물목을 자세히 살펴서 아뢰라.”고 하였다." 27)
27)『성종실록』9년 11월 21일.
위의 내용은 1478년(성종 9) 11월 21일의 기록이다. 이에 따라 대
장경은 先王朝 때 해인사로 옮긴 것이 분명한데, 선조는 예종이지만
그는 겨우 1년 남짓 재위했으므로 선조는 세조로 보는 것이 순리라
는 해석이다. 즉 “세조는 유명한 好佛의 왕이었던 만큼 대장경의 보
관에 각별한 신경을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1478년에 비가
새었다고 한 것을 보면 건물 퇴락의 경과로 보아 아마도 세조 초기인
1456년 경 해인사로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28)이라고 하였다.
성종의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 막연한 추측이
다. 또한『태조실록』등의 다양한 기록을 모두 도외시하였다.
28) 문 명대, 앞의 글, pp.203~205.
이상과 같이 이운 시기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카하시의 고려말 이운설, 이 능화의 조선초기설과 그에
따른 강화대장경과 해인사대장경의 별개 가능성, 한 용운의『태조실
록』에 입각한 1398년 설, 김 영수의 1397년~1398년 설, 그리고 문 명
대의 1456년 설 등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 사실과 맥락에 가장 부합
하는 주장이 실록 등에 입각한 김 영수의 1397년~1398년 설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태조실록』의 기사는 왕이 용산강에 나아가 맞
이하였다는 등의 구체적 신뢰성이 있고,『정종실록』의 인출 사실과
도 시기상의 모순이 없다. 또한 이운에 대한 기록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해인사의 존재를 추정한 점이 탁월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Ⅳ. 이운 경로
대장경은 경판 1장당 평균 무게가 약 3.5kg이다. 모두 81,350장 29)
으로 전체 무게는 약 285톤에 달한다. 8톤 트럭 35대가 필요한 분량
이다. 이처럼 엄청난 무게의 대장경을 옮기는 작업은 기계화된 장비
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말 그대로
의 대장정이었다.
29) 고려대장경의 총 매수는 조사자마다 다르다. 최근 해인사는 대장경판 보존관리 시스
템 구축사업을 통해 경판의 수가 81,350매로 조사되었으며, 이에 대한 경판의 수량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밀조사 연구를 통해 규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태조실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용산강에서 지천사로 이운하는데
2천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봉안처였던
강화도 판당에서 배가 기다리고 있던 갑곶까지 이운하는 과정도 크
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장경을 보내는데 절의 모든 대중과 강
화 사람 수천 명이 참여하여 머리에 이고, 때로는 소달구지에 실어
운반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을 것이다. 8만장이 넘는 대
장경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400기 이상의 소달구지가 필요하다고 한
다. 1915년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대장경 전부를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했으나, 400기의 소달구지를 구하지 못해 포기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398년 5월 10일 갑곶에서 배를 탄 대장경은 한강나루 용산강에
도착하였다. 이 날은 비가 내렸고 11일에도 계속되었다. 12일, 마침
내 비가 그치자 출발하였다.『태조실록』의 기사를 다시 인용해보자.
"隊長과 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支天寺로 운반하게 하
였다. 검교 참찬문하부사 兪 光祐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맨 앞에 서게
하고, 오교·양종의 승도들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
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30)
30) 앞의 주 7)과 같음.
이와 같이 대장경은 지천사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장경
이 지천사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앞서 김 영수의 견해에서 보았
듯이 대장경의 목적지가 지천사였다면, 강화를 출발한 배가 굳이 가
까운 서강을 지나 용산강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었다. 또한 지천사에
옮길 예정이었다면, 국왕이 비를 맞아가며 용산강까지 나가 참관할
필요도 없었다. 지천사는 지금의 서울시청 근처에 있었으므로 궁궐
에서 가까운 곳이다. 지천사에 도착한 후에 편안히 찾아가 볼 수 있
는데 왜 용산강까지 갔는지 의문이다. 결국 김 영수의 추정대로 대
장경의 목적지는 지천사가 아니라 ‘화엄종의 본사격인 지천사에 속
한 해인사’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용산강에 도착한 지 8개월 후에 대
장경이 해인사에 이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대장경을 해인사로 이운하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육
지길이고, 두 번째는 물길, 세 번째는 물길과 육지길을 모두 거치는
방법이다. 육지길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장호원과 충주를 지나고, 다
시 조령·문경·점촌·구미를 통과하여 개경포를 거쳐 해인사에 도
착했다는 추정이다. 두 번째의 물길은 배를 통한 운반으로 한강을
떠나 서해를 거쳐 남해, 그리고 낙동강을 통해 해인사에 이르는 길이
다. 세 번째는 한강에서 배로 충주에 이르고, 다시 육지길로 조령·
문경·구미 등을 거쳐 해인사에 이른다. 지금까지 어떠한 기록에서
도 이운길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오로
지 가능성과 타당성만으로 이운 경로를 추정할 뿐인데, 위의 세 가지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육지길은 전통사회의 일반적인 운송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다. 즉 옛날 사람의 물류의 이동은 일단 물길을 따라 옮길 수 있는 곳
까지 간 다음 최단거리만 수레와 인력을 이용한다고 한다.31) 8만장
이 넘는 막대한 무게의 대장경을 한양에서 해인사까지 300km에 이
르는 먼길을 육로로만 이동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31) 박 상진,『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서울: 김영사, 2007), p.161.
다음으로 물길, 해상운송이다. 대장경이 용산강에 도착한 이틀
후, 태조는 서강에 행차하여 전라도에서 온 조운선을 시찰한 일이 있
었다.32) 짤막한 기사이므로 행차의 목적 등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이
기록이 해상이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즉 전국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각종 공물은 대개가 조운선을 통해 한강으로 집결되었다.
대장경이 도착한 용산강을 비롯하여 서강, 마포 등이 이러한 공물의
집결지로 일찍부터 번성하였다. 태조는 ‘전라도에서 온 조운선’ 을
통해 대장경을 해인사로 이운할 계획으로 이 조운선을 시찰하였다
는 것이다.
32) “幸西江, 觀全羅道漕舶”『태조실록』7년 5월 12일.
해상이운의 또 다른 근거는 해인사 법당에 전하는 벽화에 대한 다
른 해석이다. 벽화에는 동자가 선도하고 스님이 독송하는 뒤로 대장
경을 실은 소달구지와 경판을 지게에 짊어진 사람, 머리에 이은 사람
이 뒤따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벽화에 묘사된 내용이 바로 육상운
송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같은 벽화를 두고 이
모습은 한양에서 운반하는 모습이 아니라, 해인사 인근의 낙동강 포
구인 개경포[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에서 해인사까지 운반하
는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즉 한강에서 출발하여 남해를 거쳐 낙동강
으로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하선했다는 이야기이다. 개포마을의
예전 이름이 經을 풀었다는 의미에서 開經浦라고 했다는 구전의 설
명을 덧붙인다.
이상과 같은 대장경의 해상이운설은 일견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
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먼저 처음부터 해상이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면, 왜 강화도에서 한강까지 옮겨왔을까 하는 의문이다. 강화
에서 직접 해상으로 나아가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으로 향했다
면, 번거롭고 힘든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즉 ‘강화도
⇒ 용산강 ⇒ 서해’의 운반과정은 전혀 불필요한 헛수고가 되는 셈이
다. 강화도에서 용산강 다시 서해의 강화해협으로 되풀이하는 반복
과정은 수천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는 대규모 작업이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해상이운의 또 다른 문제점은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대장경을
인출한 1399년 1월이라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만약 대장경을 해상
으로 이운하였다면, 그 기간은 1개월이면 족하다. 대개 경상도와 전
라도의 조운선이 지방을 출발하여 한강에 도착하는 시일은 20일 정
도 소요된다고 한다. 따라서 1388년 5월 12일 용산강을 떠난 대장경
은 서해와 남해를 거쳐 다시 낙동강으로 올라와 개경포를 통해 늦어
도 7월 이전에는 해인사에 도착했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착
시기에 관한 자료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대장경의 인출을 지시한 1월은 한 해 중에서도 가장 추운 때이고,
더구나 인경작업은 적당한 온도와 바람이 매우 중요함을 감안할 때
한겨울의 인경은 거의 무모한 작업이었다. 왜 태조는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인경을 감행하였을까? 비를 맞아가며 용산강에 나가 대장경
을 참관할 만큼의 정성을 지닌 태조와 1월의 한겨울에 인경을 지시
하는 무모한 태조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조운선으로 해상
이운했다면 대장경은 이미 7월 중에는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
이고, 이후 인경할 수 있는 기간은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듬해 1월에 인경을 감행했던 이유는 이 시기 직전에 대장
경이 해인사에 도착한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즉 도
착하자마자 서둘러 인경작업을 지시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이운 경로로서 가장 사실과 가까운 것은
세 번째의 물길과 육지길을 모두 거치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대장경을 용산강으로 옮겼다”는『태조실록』의 기사가 주
목된다. 용산강은 경상도와 강원도 등의 조운선이 출입하는 곳이었
다.『동국여지승람』 ‘용산강’조에 “경상·강원·경기 등의 上流 漕轉
은 모두 이 곳에 모인다.”33)라고 하였다. 즉 조선시대에 경상도로 가
는 물건은 모두 용산강에서 출발하였다. 해인사로 가기 위한 대장경
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33)『신증동국여지승람』3권, 한성부 산천, 용산강.
박 상진은 대장경이 강화도에서 이운되었다는 가정 하에 다양한
이운 경로를 추정하였다. 그 중 물길과 육지길을 거치는 경로를 다
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용산나루를 출발한 배는 한강을 따라 양수리까지 간 다음 뱃머리를 남
한강으로 돌려 장호원·여주를 거쳐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稅穀 보관 창
고였던 충주의 가흥창에 도착한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조선시대의 세
곡 운반로로, 배만 확보된다면 경판을 옮기는 데 별 무리가 없다. 이제
경판을 배에서 내려서 문경새재를 넘어 경상도 낙동강으로 가야 한다.
예로부터 새재 길은 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 정도였는데, 수레가 다닐 만
큼 길이 넓어진 것은 조선후기라고 한다. 당시에는 이고 지는 순수 인력
으로 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수백 명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새재를 넘은 경판은 문경·점촌을 거쳐
낙동강 변에 도착한다. 강배에 다시 실려 낙동강을 타고 내려와서 고령
의 장경나루[개경포]에 도착하여 육로로 해인사로 운반한다." 34)
34) 박 상진, 앞의 책, pp.163~164.
충주의 可興倉은 조선초기 전국의 水運倉 5곳 가운데 하나였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운반하는 물자는 모두 배를 타고 와 이곳에 모였
고, 문경새재를 넘어 각지로 퍼져 나갔다. 문경새재는 한강과 낙동
강을 잇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용산강에서 출발한 대장경은 가
흥창에 도착하였고,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으로 향하였을 것이다.
다시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개경포에 도착하였다. 개경포는 낙동강
수로의 중심지였다. 낙동강 연안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물
산의 집산지로서 교통의 중개지였다.35) 개경포에서 해인사까지는
약 40km 거리이다. 여기서부터는 달구지에 실거나 사람이 직접 짊
어지고 옮겨야 했다. 마침내 힘들고 오랜 여정 끝에 해인사에 도착
하였다.
35) 박 진형·이 종필,『고령의 나루터』(고령: 고령문화원, 2003), pp.121~217.
Ⅴ. 맺음말
이상으로 대장경의 이운 시기와 이운 경로를 살펴보았다. 지금까
지 대장경에 관한 논문과 저술, 조사 보고서 등은 3백편에 달하는 방
대한 분량이지만 이운 시기와 경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
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원인은 이에 대한 자료가 절대
적으로 부족하다는 데 있다.『태조실록』의 단편적이고 불명확한 기
사에 의존하다보니 대장경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언
제 어떠한 경로로 해인사에 도착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연구자들은 아예 실록의 기사를 인정하지 않고, 그 시기를
고려말 또는 세조대로 추정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어 왔다.
그런데 일찍이 한 용운과 김 영수는 대장경판 중에서 새로운 기
록을 발견하고 이운 시기에 대한 卓見을 제시하였다. 화엄교분기에
음각된 1405년의 충현의 기록에 따라 판전의 조성 등 예비 작업은
이미 1397년에 시작되었고, 1398년 5월 10일에 강화도를 출발하여
1399년 1월 이전에 이운이 완료되었다고 하였다. 필자 역시 사료를
검토하고 연구자의 견해를 종합한 결과 이러한 결론에 동감한다.
이운 경로 역시 이운 시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이운 경로에
대해서는 그동안 육지길과 바닷길이 제기되었지만 물길과 육지길을
모두 거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강화에서 배를 타고 한강에 도착
하였다가 다시 한강을 떠나 충주에 이르고, 육지길을 통해 문경새재
를 넘어 남하한다. 낙동강에 이르러 다시 배를 타고 고령의 개경포
에 도착하여 육지길로 해인사에 도착하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끝으로 대장경의 판각지와 보관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충현의 기록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충현은 즉
“丁丑年 出陸時 此闕失 與知識道元 同願開板入上”이라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出陸’이라는 서술에 주목하게 된다. 대장경이 섬에서 ‘육
지로 나왔다’는 뜻이다. 대장경의 판각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
고36) 남해와 강화도뿐만 아니라 해인사, 가야산 下鋸寺, 산청 斷俗
寺, 경주 東泉寺 등의 여러 지역이 판각에 참여하였다고 한다.37) 심
지어 그동안 정설이었던 남해나 강화도를 부정하고 판각지를 해인
사 자체 및 인근 지역으로 이해하기도 한다.38)
36) 박 상국,「해인사 고려대장경 간행과 판각장소」,『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인천:
새얼문화재단·인천광역시, 2001). pp.129~161.
37) 최 영호,『江華經坂 高麗大藏經의 조성기구와 판각공간』(서울: 세종출판사, 2009)
38) 박 상진, 앞의 책, pp.179~182.
그렇다면 ‘出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궁금하다. 충현의 기록은
대장경이 해인사에 도착한 지 불과 7년 뒤의 기록으로서 사료로서의
가치와 신뢰성이 높다. 즉 대장경은 분명히 ‘섬에서 육지로 나온’ 것
이다.39)
39) 대장경은 남해도와 그 반대편 해안에 있는 진양군에서 조성되어 강화도로 옮겨간 것
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민 영규,「高麗大藏經新探-바로 잡아야 할, 그리고 새로운 몇
가지 사실들」(서울: 대장경연구소, 1994) 남해도라고 하면 섬이므로 ‘出陸’의 개념에
부합되지만, 해인사로 이운하기 전까지 대장경은 분명히 강화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