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초기전래설의 재검토 -「단속사신행선사비문(斷俗寺神行禪師碑文)」의 분석
[불교학연구 41호]
선종 초기전래설의 재검토
-「단속사신행선사비문(斷俗寺神行禪師碑文)」의 분석-
최병헌/서울대학교 명예교수
Ⅰ. 머리말
Ⅱ. 「신행선사비문」과 신행의 생애
Ⅲ. 북종선의 전래
Ⅳ. 맺음말
[요약문]
법랑과 신행은 보리달마 계통 선종의 최초 전래자로서 한국선종사의 첫머리
를 장식하는 인물들이다. 법랑은 4조 도신(580~651)에게 선법을 배우고 귀국
하여 신행(704~779)에 전하였고, 신행은 다시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을 전수해
온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학계 일각에서 법랑의 스승 도신과 신행 사이의 생존
연대상의 차이로 인하여 법랑의 전법 사실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
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법랑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인 「신행선사비문」에 의거하는 한 법
랑이 신행의 스승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당에 유학하거나 도신의
선을 전수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가 이러한 진부한 문제를 새삼스럽게 다시 검토하게 된 동기는 단
순히 역사적 사실 여부를 밝혀보려는 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불교사학계의 안이
한 연구자세와 자료비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성을 촉구하려는 의도이기도 하
다. 거시적인 불교사의 흐름은 도외시한 채로 인물 개인이나 단편적인 사건에만
매달려 쉽게 결론을 내리는 안이한 연구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자료의
해석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고려하지 못하고 단편적 문구에만 매달려 편의적인
해석을 주저하지 않는 연구가 횡행하고 있음은 연구방법상의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법랑과 신행에 관한 이해는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연구방법상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라는 점에서 본고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한국선종사의 출발점이 되는 법랑과 신행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을 일으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자료상의 문제에 기인한다. 이 문제에 관한 자료로서는 「신
행선사비문」(813년)과 「지증대사비문」(893년 무렵) 두 편의 비문이 전부인데,
각기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인 「신행선사
비문」에 의거하는 한 신행은 법랑에게서 공부한 다음에 당에 가서 북종선을 전
수해 왔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그런데 80년 뒤에 찬술된 「지증대사비문」에서는
법랑이 당에 유학하여 도신의 선법(동산법문)을 전수한 사실을 새로 추가하고,
또한 신행의 북종선 전법 사실을 빠뜨리는 대신에 「신행선사비문」에서 없었던,
신행과 당 숙종의 사이에서 시문을 교환한 사실을 추가하는 등 내용상의 차이점
을 나타내 줌으로서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문제점으로 지적하려는
것은 두 비문 내용 사이의 차이점은 고려하지 않고, 안이하게 양자의 내용을 혼
합하여 전법계보설을 구성하는 것으로 그치는 학계의 안이한 연구자세이다.
한편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에서는 최초의 선법 전래자로는 법
랑이 아닌 신행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그 연대는 경덕왕 원년(742) 무렵으로 추
정된다. 신행은 704년 출생하여 733년 30세 즈음에 출가하여 운정율사(運精律
師)에게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그리고 735년 32세 때에 호거산의 법랑에게 찾
아가서 3년 동안 수업하고, 법랑이 입적하자 738년 35세로 당에 유학가서 북종
선의 신수의 손제자인 지공(志空) 문하에서 3년 동안 수업하여 인가받고, 742년
무렵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한 뒤 혜공왕 15년(779) 단속사에서 입
적할 때까지 37년 동안 북종선의 기본사상인 좌선간심(坐禪看心)과 ?대승무생방
편문(大乘無生方便門)?의 방편법문(方便法門)을 홍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그런데 「신행선사비문」에서 그의 귀국 이후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 소략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에 의한 북종선의 전래와 행화(行化)는 당
시의 신라 불교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
행이 입적한 뒤 34년이 지나서 그의 사법제자인 삼륜선사(三輪禪師)에 의해 현
창사업으로서 영당과 부도, 그리고 비석이 수립되고 있었던 것을 보아 북종선은
그의 문도들에 의해서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석이 수립되는 헌덕왕 5년(813) 무렵 신라 불교계에서 북종선을 전
승하고 있던 인물들은 신행의 문도 이외에도 더 있었던 것 같다. 최치원이 찬술
한 「낭혜화상비문」에 의하면 신행선사비가 수립되기 1년 앞서 낭혜화상 무염이
13세로 출가하여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수업하고 있었는데, 그 법성은 일찍이
당에 유학하여 능가선, 즉 북종선을 전수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염은
법성의 당 유학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석사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게 찾아
가 화엄학을 배우고, 뒤에 당에 가서도 화엄종의 본거지인 지상사를 찾아가 계
속하여 화엄을 공부하였던 것을 보아 법성의 북종선은 화엄종과 구별되는 정체
성을 확립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북종선이 원래 교학불
교인 화엄종에서 남종선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과도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더욱이 800년 전후의 신라불교계는 화엄종이 주류적인 종파로서 크
게 융성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무염이 뒤에 화엄종의 교학불교로서
의 한계를 깨닫고 남종선으로 개종하였던 것과 궤를 같이하여 헌덕왕 13년(821)
도의가 남종선 계통의 홍주종을 전수받아 귀국하면서 교종에서 선종으로 불교계
의 주류가 바뀌는 일대 파문이 일어나게 되었다.
Ⅰ. 머리말
신라에 선법을 가장 먼저 전해 온 사람은 법랑(法朗)이라고 한다. 법랑은 당
나라에 언제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 580~651)
에게서 선법을 배워 돌아 왔다고 하는데, 귀국 연대 또한 알 수 없다. 그가 돌아
온 뒤의 행적도 알 수가 없으며, 단지 신행(神行, 704~779)에게 법을 전했다
는 사실만 전할 뿐이다. 그리고 법랑에게 선법을 배운 신행은 신라에 아직 선법
이 행하여지지 않았으므로 당으로 건너가서 북종선의 신수(神秀, ?~706)의 제
자인 보적(普寂, 651~739)의 문인 지공(志空)에게서 법을 받았다. 신행은 귀국
하여 교화하다가 혜공왕 15년(779)에 76세로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서 세상
을 떠났다. 4조 도신의 선법과 함께 신수 계통의 북종선을 전해 받은 신행의 선
법은 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 824~882)으로 전승되어 희양산문(曦
陽山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말 고려초에 성립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문만은 남종선 계통의 다른 산문들과 달리 4조 도신의 동산법문과 신수
의 북종선 계통에 속하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단속사신행선사비문」1)과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문」2) 등
2편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설정된 전법계보설인데, 이러한 계보설은 「신행선
사비문」에서 주장하는 신수-보적-지공-신행으로 이어지는 북종선(北宗禪)의
계보와 「지증대사비문」에서 주장하는 도신-법랑-신행-준범-혜은-도헌으로
전승되는 동산법문(東山法門) 계통이라는 전혀 다른 두 법계를 신행의 스승이
신라인 법랑이었다는 사실을 매개로 하여 결합하여 만들어진 근대불교사학계
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법계설에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없지 않
다. 우선 법랑에 선법을 전해 주었다는 도신과 법랑에게 선법을 배운 신행 사이
에 생존 연대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즉 651년에 입적한 도신과 704
년에 출생한 신행의 연대 차이가 53년이나 되어 상식적으로 도신-법랑-신행
으로 이어지는 전법과정은 역사적 사실로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1) 단속사 신행선사비의 原題는 「海東故神行禪師之碑幷序」이다. 이하 「신행선사비문」으로 약칭한다.
2) 봉암사 지증대사비의 原題는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이다. 이하
「지증대사비문」으로 약칭한다.
이러한 연대상의 모순에 대하여 일찍부터 의문을 제기한 학자들이 없지 않았
으나,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는 아직 명확한 해답은 얻지 못한 실정이다. 처음
으로 의문을 제기한 학자는 권상로인데, 그는 도신과 신행의 생존 연대가 너무
떨어진 점을 들어 법랑에게 선법을 받은 ‘신행(信行)’3)과 신수의 손제자인 지공
의 법을 받은 ‘신행(神行)’을 같은 사람으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하였다.4) 이러
한 권상로의 견해에 대하여 김영태는 “연대상의 무리가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지증대사비의 신행(愼行)과 신행선사비의 신행(神行)을 전혀 별인으로는 볼 수
없다. 즉 지증대사비에 신행대사가 법랑에게 법을 받고 다시 당의 숙종대, 즉
신라 경덕왕대에 입당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신행이 호거산(䠒踞山)에서 법
랑의 법등을 전해 받고 당에 간 연대나 그 사실이 부합하므로 동일인이라고 하
지 않을 수 없다.”5) 고 하여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런데 김영
태도 “신행이 법랑에게 수법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인지, 혹은 법랑이 가공인물
이 아니라면 그의 스승이 도신 아닌 다른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법랑과 신행에 대해서는 현존 사료로는 그 정확한 역사를 알 수 없으
며, 몇 가지의 모호한 점을 확실하게 해결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법랑에 의하
여 남돈북점(南頓北漸) 분리 이전의 달마 선법이 들어 왔다는 것과 신행에 의하
여 신수의 북점선(북종)이 전래되었다는 것만은 알 수가 있다”6) 고 하여 또 다
른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문 내용 자체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검토는 포기하고 종래의 설을 그대로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해결
의 문제로 남기고 말았다.7) 오늘날 불교사학계에서의 문헌비판의 부족이라는
이해방법상의 문제를 그대로 노정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 信行은 愼行의 誤記이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것은 李能和가「朝鮮佛敎通史」권상(1918,
p.127)에서 「지증대사비문」을 전재하면서 愼行을 信行으로 잘못 표기한 결과이다. 이후 權相老의
「朝鮮禪宗略史」(1959) · 金映遂의 「曹溪禪宗에 對하여」(1938) ․ 忽滑谷快天의「朝鮮禪敎史」(1930)
등 여러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朝鮮金石總覽」상권(1919)과「孤雲先生
文集」(1926) 등의 판본에는 愼行으로 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표기상의 혼란은 이미
이능화 이전의 필사본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예를 들면 愼行으로 표기된 것은「新羅國四山碑
銘」․ 「覺岸梵海本四山碑銘」등이며, ‘信行’으로 표기된 것은「桂苑遺香」 ․ 「文昌集」등이다. 오늘
날까지 鳳巖寺 경내에 보존되어 있는 지증대사비에 새겨진 ‘愼行’이 올바른 표기이다. 그러나 지증
대사비보다 연대가 앞서고 신행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신행선사비에 새겨진 ‘神行’이 가장 정확한
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로써 통일되어야 할 것이다.
4) 權相老, 「韓國禪宗略史」,「白性郁博士華甲記念佛敎學論文集」, (서울: 백성욱박사송수기념사업
위원회, 1959), p.266.
5) 金煐泰, 「曦陽山禪派의 成立과 그 法系에 대하여」,「韓國佛敎學」4, (한국불교학회, 1979), p.12.
6) 金煐泰,「한국불교사」, (서울: 경서원, 1997), p.137.
7) 呂聖九는 “지증대사가 신행의 증손제자였던 만큼 최치원의 찬술은 정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 하면서 「지증대사비문」의 내용에 따라 도신-법랑-신행으로 이어지는 전등설을 사실로서 받아들
이고, 법랑의 생존 연대를 120~130세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 추정은 상식적으로 납
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며, 안이한 연구자세와 편의적인 자료해석의 방법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지 않
을 수 없다. (呂聖九, 「神行의 生涯와 思想」,「水邨朴英錫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上, (서울:
수촌박영석교수회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2, p.345.) 이밖에 여성구의 논문 이후에도 신행의
북종선의 전래 문제를 주제로 하여 鄭善如·곽승훈·최홍조 등에 의해 연이어 논문들이 발표되어 오고
있으나, 1990년대 이후의 연구경향의 공통적인 문제점으로서 문헌비판 의식의 부족과 편의적인 해
석이라는 이해방법상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서 이전의 오류를 시정하고 이해 수준을 진
전시키는 성과를 거둔 업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논문 목록은 본고 말미의 참고문헌 항목
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상에서 장황하게 도신-법랑-신행으로 이어지는 법계설의 모순점과 그것
에 대한 학계에서의 문제제기 상황을 언급하였는데, 이러한 의도는 우리 학계
에서의 문제의식의 부족과 자료비판의 안이한 자세를 반성하기 위한 것이다.
법랑과 신행에 관한 자료가 당시대의 금석문인 「단속사신행선사비문」(813년)과
「봉암사지증선사비문」(893년 무렵)이라는 점 때문에 비문 내용 자체에 대해서
는 전연 의문점을 갖지 않고, 맹목적으로 신빙하려는 자세를 갖게 되었으며, 더
욱 두 비문 내용 사이의 차이점과 모순점은 제대로 검토되지 못하였다.8) 특히 「지
증대사비문」의 경우 그 찬술자가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신라말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는 명성에 가려서 비문의 내용을 전연 의심하지 않은 것도 자료의 비
판적인 검토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8) 필자의 지견으로는 「신행선사비문」과 「지증대사비문」의 신행에 관한 내용을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지적한 것은 淨光의「智證大師碑銘小考」(서울: 경서원, 1992, pp.451-52)가 유일한 것 같다. 이
책은 「지증대사비문」을 주석하면서 관련 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하여 정리하여 준 역작인데, 그 동안
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비석의 수립은 원래 고승에 대한 문도들의 현창 사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며, 그 비문은 왕명에 의해 문인들이 찬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 내용
은 문도들이 작성해 준 행장에 의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고승에 대한 평가는 찬
술자의 견해만이 아니고, 그 문도들의 의사와 요구가 더욱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고승의 개인적인 행적의 미화나 사실의 누락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특정 종파나 사찰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윤색이나 조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특히 선종에서는 교종보다 전법계보를 더욱 중요시하기
때문에 특정 산문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법계를 조작한 경우가 종종 발견
되고 있다. 신라말기의 선종사에서도 각 산문의 개조들이 거의 모두 입적하는
진성여왕대(887~897)에는 파벌의식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그에 따
라 산문의 정체성과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전법계보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었
다. 그러므로 아직 전법계보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신행
선사비문」(813년)과 구산선문의 파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에 만들어진
「지증대사비문」(893년 무렵) 사이의 계보에 대한 의식의 차이점과 계보의 변
조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불교사의 연구에서 선승의 행적과 전법계보설 등 비문 내용 자체의
윤색과 조작 가능성의 문제점은 전연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하고, 비문 내용을
그대로 신빙하고 해설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점은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연구방법상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우선 비문의 이해에서 개별 문구 자
체의 엄격한 해석과 함께 비문 전체의 맥락에서 의미를 추구할 것이며, 나아가
비문 작성 시기의 불교계 상황과 해당 인물이나 산문의 입장을 감안한 비판의
식과 접근방법이 요구된다.
특히 선종의 초기전래설에 관한 이해의 혼란은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 보여
주고 있는 연구방법상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라는
점에서 진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주제로 선택하여 본고를 집필
하게 된 것인데, 우선 선종의 최초 전래자로 전해오는 법랑과 신행에 관한 자료
를 철저하게 재검토하려고 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두 사람에 관한 유일
한 자료인 「신행선사비문」과 「지증대사비문」의 내용을 비교 분석함으로서 선
종의 전래과정과 전법계보설의 변조 가능성을 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먼저 「신
행선사비문」의 분석을 통해 중국의 도신-홍인 계통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전래 여부와 신수 계통의 북종선(北宗禪)의 전래과정을 추적해 보려고 하며, 다
음에 「지증대사비문」의 분석을 통해 혜능 이후의 남종선(南宗禪)의 전래과정과
전법계보설의 변조 가능성을 검토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학술지
지면 분량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논문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
고에서는 우선 「신행선사비문」의 분석 내용만을 수록하고, 「지증대사비문」의
분석 내용은 별고로 발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 편의 논문 내용을 종합해
서 보지 않으면 필자의 문제의식과 주장을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없지 않
을 것이다. 이점 널리 양해를 구하면서 기탄없는 비판을 기대한다.
Ⅱ. 「신행선사비문」과 신행의 생애
「신행선사비문」은 신행이 입적한지 34년만인 헌덕왕 5년(813)에 찬술된 것
인데, 비문의 분량은 29행에 각 행 63자, 총 1,820여자로써 나말여초 다른 선
승들의 비문의 분량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리고 내용도 비교적 단순하고 문장
도 평이하여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북종선을 전래한 신행의 행
적에 관한 자료로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며, 달마 계통의 동산법문을 도신으로
부터 전해온 것으로 알려진 법랑이 신행의 스승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신
행의 선법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신라의 초기
선종 전래와 구산선문 성립의 연구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신행선사비문」의 구성은 승려비문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라 “서(序)”와 “명
(銘)”으로 구분되었고, 서문은 다시 다섯 문단으로 단락되었다. 서문 가운데 첫
째 문단에서는 도입부로서 선수행의 공덕과 그 선법 전등의 수기를 받은 사람
이 신행임을 명기함으로써 신행의 선법 전래자로서의 위상을 강조하였다. 그리
고 이어 제2~4 문단에서는 신행의 생애를 연대순으로 서술하였다. 먼저 제2
문단에서는 신행의 가계와 출가 수행의 행적을 구체적이면서도 간명하게 서술
하였다.
"선사는 속성이 김씨이고, 동경 어리(御里) 사람이다. 급간 상근(常勤)의
아들이며, 선대의 승려인 안홍(安弘)의 형의 증손이다. 선행을 쌓고 마음
을 훈습하였으며, 예전에 감성(感性)에 인연하여 나이 30세 무렵에 출가
하여 운정율사(運精律師)를 받들어 섬겼다. 바리때 하나와 누더기 한 벌
로 2년 동안 고행을 닦았다. 다시 법랑(法朗)선사가 호거산(䠒踞山)에서
지혜의 등불을 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그곳으로 찾아가서 심오한 뜻
을 삼가 받았다. 아직 7일을 지나지 않아서 (스승이) 시험삼아 이치의 옳
고 그름을 묻자, ‘마음이 그대로 무심(無心)’이라는 말로써 미묘하고 그윽
하게 대답하였다. 화상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옳도다. 마음 등불의 법이
모두 네게 있구나” 하였다. 부지런히 구하기를 3년만에 선백이 돌아가시
자, 통곡하기를 몸을 부수듯 하였으며, 사모함을 지극히 하였다. 마침내
삶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고, 죽음은 물거품과 같음을 알게 되었다." (신행
선사비문) 9)
9) 禪師 俗姓金氏 東京御里人也 級干常勤之子 先師安弘之兄曾孫 積善薰心 曩因感性 年方壯室 趣於
非家 奉事運精律師 五綴一納 苦練二年 更聞法朗禪師 在䠒踞山 傳智慧燈 則詣其所 頓受奧旨 未
經七日 試問之曲直 微言冥感 以卽心無心 和上歎曰 善哉 心燈之法 盡在於汝矣 勤求三歲 禪伯登
眞 慟哭粉身 戀慕那極 遂以知生豊燭 解滅水泡 (神行禪師碑文)
다소 장황한 인용이 되었는데, 종래의 연구에서 나타난 단편적인 문구를 자
의적으로 해석해 오던 잘못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사실을 좀더 정확하
게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신행선사비문」의 해당 문단을 전부 적기한 것이다.
제2 문단에 의하면 신행의 가계는 속성이 김씨, 경주 출신이며, 아버지 상근(常
勤)의 관등은 9위인 급간에 머물렀으나, 그의 종증조부인 안홍(安弘)이 이찬 시
부(詩賦)의 손자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진골 가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행
의 출생 연대는 대력(大曆) 14년(혜공왕 15년, 779) 입적 때 나이인 76세로부
터 계산하면, 성덕왕 3년(704)이었다. 그는 30세 무렵에 출가하여 운정율사에
게서 2년 동안 수업하고, 이어 호거산(䠒踞山)10)의 법랑을 찾아가서 수행하였
는데, 3년만에 법랑이 입적함으로써 생사의 무상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신
행의 출생 연도인 704년부터 계산하면 출가하는 30세 무렵은 성덕왕 32년
(733), 운정율사에게 2년 동안 수업한 뒤 법랑을 찾은 때는 성덕왕 34년(735)
무렵이 되고, 그리고 그 3년 뒤인 법랑의 입적 때는 신행의 35세 때인 효성왕 2
년(738) 무렵으로 추산된다. 이로써 법랑이 신행의 스승으로서 738년 무렵까
지 생존했던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11) 그리고 이 기록에 의거하는 한 법랑은
당에 유학한 사실은 없으며, 더욱 651년에 입적한 달마 계통 선종의 제4조 도
신(道信, 580~651)을 만날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연대상으로도 불가능한 사
실이지만, 당시 당으로의 유학과 중국 승려로부터의 전법은 특기할만한 사건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랑에 관한 가장 이른 자료인 「신행선사비문」에서 전연 언
급이 없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일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10) 호거산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淸道 雲門寺가 자리한 虎踞山으로 추정되며, 일찍이 진평왕 22
년(600) 圓光이 수에서 귀국하여 주석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11) 법랑의 입적 연대는 효소왕 2년(738) 무렵으로 추산되며, 그의 출생 연대는 당대 고승들의 일반적
인 생존 연대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대략 670~8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다소 막연한 추측이지만,
법랑은 문무왕대 후반인 670~80년대에 출생하여 효성왕 2년(738) 무렵 입적한 사람으로서 당에
유학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일단 추정하고자 한다. 당에 유학하여 4조 도신의 선법을 전수해 왔
다는 사실은 훨씬 후대인 893년 무렵에 찬술된 「지증대사비문」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다음 「신행선사비문」의 제3 문단에서는 신행의 당 유학과 북종선의 전수 사
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는데, 그 앞서 신라에서의 수행과정의 기록보다 2배
이상의 분량을 할애한 것을 보아 북종선의 전법 사실을 대단히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멀리 큰 바다를 건너 오로지 부처의 지혜를 구하려고 위험한 파도를 탔으
나, 안심(安心)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험난한 바다를 대해서도 계
율을 지키겠다는 뜻을 더욱 채찍질하여 서원을 굳건히 하였다. 부처의 신
령스러운 위력에 힘입어 조각배로 곧장 나아가 저편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변경을 어지럽히자, 여러 주부(州府)에 칙명
을 내려 모두 잡아들이게 하였다. 관리가 (선사를) 만나서 힐문하자, 선
사는 부드럽게 대답하기를, “빈도는 해동에서 태어나 불법을 구하고자 왔
을 뿐입니다” 하였다. 관리는 마음대로 놓아줄 수가 없어서 240일 동안
구금하였다. 이때 함께 구금되어 있던 무리들은 감시인이 없는 것을 틈타
서 쇠사슬을 풀고 쉬면서 모두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 하지 않
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슬프도다. 나는 예전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 하고 끝내 사슬을 풀고 쉬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곧 욕됨을 참고 더러움을 받아들인 자취이며, 빛을 감
추고 드러내지 않은 행적이었다. 사건이 해결되자, 지공화상(志空和尙)에
게 찾아갔다. 화상은 곧 대조선사(大照禪師)의 제자였다.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 모시기를 3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열어 인가를 해주었다.
미세한 티끌을 허물지 않고서 문득 모든 경전의 요점을 포착하였으며, 마
음을 쓰지 않고서 무수한 부처의 세계에 두루 노닐었다. 항상 본성의 바
다 깊은 근원에서 헤엄치고 노닐었으며, 항상 진공의 그윽한 가에까지 날
아다녔다. 화상이 돌아가시려고 할 때가 되어서 관정하고 수기하며 말하
기를, “가거라. 훌륭한 인재여. 너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서 미혹된 나
루를 깨치게 하고 깨달음의 바다를 높이 드날리게 하라” 하였다. 말을 마
치자 입적하니, 이때를 당하여 마음이 확 트이면서 미증유의 것을 얻었
다. 지혜의 등불이 허공에 돋우어 밝히고 선정의 물이 선의 바다로 모였
다. 그래서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거나 듣고 나서 (선사를)
존중하고 우러러 받든 일을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행선사비문) 12)
12) 遠涉大陽(필자주: 洋의 오자) 專求佛慧 乘危碧浪 不動安心之念 對險滄洲 逾筞護戒之情 誓願堅
固 承佛神威 孤帆直指 得到彼岸 時屬凶荒 盜賊亂邊 勅諸州府 切令捉搦 吏人遇而詰之 禪師 怡
然而對曰 貧道生緣海東 因求法而至耳 吏不得自放 檢繫其身 卄有四旬矣 於是同侶 候其無人 時
說桎梏而息焉 僉語之曰 汝盍如此耶 答言吁 我於往昔 造罪業 故今見罹苦 甘心受之 竟不脫休 斯
則忍辱納汙之迹 和光匿曜之事也 事解 遂就于志空和上 和上卽大照禪師之入室 朝夕鑽仰 已過三
年 始開靈府 授以玄珠 不壞微塵 便撮大千經卷 非舒方寸 遍遊百億佛刹 常遊泳於性海之深源 恒
翱翔乎 眞空之幽際 洎于和上 欲滅度時 灌頂授記曰 往欽材 汝今歸本 曉悟迷津 激揚覺海 言已歸
寂 應時豁尒 得未曾有 挑慧燈於虛室 凝定水於禪河 故遠近見聞 尊重瞻仰 不可殫載矣 (神行禪師
碑文)
신행은 법랑이 입적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당에 유학한 것으로 보이는데,
도적의 난리로 인하여 240일 동안 구금되는 고난을 겪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
술한 점이 주목된다. 그 사건이 해결된 뒤 신행은 북종선의 대조선사(大照禪師)
보적(普寂, 651~739)의 제자인 지공(志空)을 찾아가서 그가 입적할 때까지 3년
동안 수행하여 인가를 받고 곧 신라로 돌아왔다. 이 비문의 내용에 의해 추산하
면 신행이 당으로 출발한 때는 35세 때인 효성왕 2년(738) 무렵이고, 당에 체
류한 기간은 대략 4년 정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공이 입적할 때가
되어서 인가해 주면서 신행의 귀국을 당부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귀국한 때는
신행의 39세 때인 경덕왕 원년(742) 무렵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안록산의 전
란 중인 756년 7월에 즉위한 당의 황제 숙종(肅宗)을 만날 수 없었음은 분명하
다.13) 이로써 「신행선사비문」에 의거하는 한 법랑이 당에 유학하여 도신의 선
법을 전수받았다거나, 신행이 당 숙종을 면담하고 시문을 교환하였다고 서술한
「지증대사비문」의 내용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13) 신행의 당 유학의 출발 시기를 秋萬鎬는 52세 때인 755년, 呂聖九 ․ 鄭善如 등은 756년으로 추정
하였으며, 또한 귀국 시기를 759년 무렵으로 추산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행의 출가 시
기도 48세 때인 751년 무렵으로 추정하였다. (秋萬鎬,「羅末麗初 禪宗思想史」, (서울: 이론과 실
천, 1992, pp.12-13 ; 呂聖九, 앞의 논문, p.347. ; 鄭善如, 「新羅 中代末·下代初 北宗禪의 受
容」,「한국고대사연구」12, 1997, pp.289~317.) 그런데 이들이 추정한 근거는 신행이 당 肅宗
(756~762)의 詩句를 받았다는 「지증대사비문」의 내용인데, 좀더 신빙성이 높은 「신행선사비문」
(813년 찬술)보다 후대의 자료인 「지증대사비문」(893년 무렵 찬술)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신행의
당 유학 시기를 임의로 추정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나아가 여성구는 「신행선사비문」
의 출가 사실의 표현인 “年方壯室 趣於非家”라는 구절도 “30세를 전후하여 한차례 출가의 뜻을 가
지고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20여 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출가했다” 고 하여 자료를 자의적으로 확
대 해석하여 허구를 창작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壯室’은 ?曲禮?上 “三十曰壯 有室”에서 유래한 표
현으로 30세를 넘어 가정을 이룰 나이라는 뜻으로서 위 구절은 신행이 30세 무렵에 출가한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음 「신행선사비문」의 제4 문단에서는 신행이 귀국하여 단속사(斷俗寺)에
서 입적할 때까지 37년 동안 전법 교화하였던 사실을 서술하였는데, 다른 문단
에 비하여 분량이 가장 적고 내용도 대단히 소략하다.
"그런 뒤에 계림에 돌아와서 여러 몽매한 이들을 인도하였는데, 도의 근기
가 있는 자들은 위해서는 ‘마음을 보라(看心)’는 한마디 말로 가르치고,
그릇이 익은 자를 위해서는 여러 방편(方便)을 보여 주었다. 일대의 비전
(秘典)에 통하고 삼매의 밝은 등불을 전하였으니, 실로 부처의 해가 동쪽
에서 다시 떠오르고 법의 구름이 해돋는 곳에서 다시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설사 세 가지 신통력을 가지고 온 세상을 포괄하도록 그 자취를
서술하고 그 공적을 베낀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일부분의 덕인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도의 몸이 땅처럼 유구하고 지혜의 목숨이 하늘처럼 유장하
기를 바랐는데, 슬프도다. 감응의 주체가 이미 다하였으니, 감응되는 바
가 바야흐로 옮기려고 하는구나. 이는 곧 인도하는 스승이 그 모습을 감
추고 드러내는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까닭이다." (신행선사비문) 14)
14) 然後 還到鷄林 唱導群蒙 爲道根者 誨以看心一言 爲熟器者 示以方便多門 通一代之秘典 傳三昧
之明燈 寔可謂佛日再杲自暘谷 法雲更起率扶桑 設欲括三達罩十方 書其迹寫其功 庸詎能記 一分
之德耳 所冀 道身地久 慧命天長 於戱 能感已盡 所感方移 此則 導師隱顯理必然 (神行禪師碑文)
신행의 교시 내용이 “간심(看心)”과 “방편다문(方便多聞)”이었다는 것을 보아
당에서 지공으로부터 전수한 북종선의 기본사상인 좌선간심(坐禪看心)과「대승
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의 방편법문을 널리 홍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
처의 해와 법의 구름이 다시 떠올랐다”는 서술은 새로운 선법이 전해지고 있었
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교화 사실에 대한 언
급이 없이 수사적인 표현에 그친 것을 보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이 융성
했던 당시 신라의 불교계에서 신행의 전법활동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
던 것 같다.
끝으로 제5 문단은 신행의 입적과 신이한 현상, 사법제자인 삼륜(三輪)에 의
한 현창사업과 비석 수립 경위, 그리고 끝으로 비문 찬술자의 심정을 서술한 내
용인데, 비문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먼저 신행의 입적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나이 76세 때인 대력 14년(혜공왕 15
년, 779) 10월 21일 남악(지리산) 단속사에서 입적했음을 분명히 밝혀 주었다.
신행이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경위로 단속사에 주석하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단속사는 8세기 중반 경덕왕의 측근인 이순(李純), 또는 신충
(信忠)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전한다.15) 또한 이 절에는 유마거사의 초상이 있었
는데, 솔거가 그린 것으로 신의 작품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이 절은 조선후
기 어느 때인지 폐사가 되어 현재 절터에는 동삼층석탑(보물 72호)과 서삼층석
탑(보물 73호) 2기가 있는데, 8세기 중엽의 불국사 삼층석탑과 유사한 전형적
인 신라 양식의 석탑으로서 신라 전성기의 불교미술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로
보아 단속사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남악, 즉 지리산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신라왕실이나 중앙귀족과 직결된 사찰이었으며, 전통적인 교학불교에 속한 사
찰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신행이 새로운 선법인 북종선을 전래하여
왔으나, 말년 즈음에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불교에서 벗어
나 독자적인 선풍을 펼치지는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5) 단속사는 경덕왕 7년(748) 大奈麻 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경덕왕 22년(763) 信忠이 창건하였
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경우이든 신행이 당에서 귀국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해당된다.
신행선사비의 수립은 「신행선사비문」에서 신행이 입적한 뒤 삼기(三紀), 즉
36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실제 건립된 때는 34년 만인 헌덕왕 5년
(813) 9월 9일이었다. 비석의 건립은 신행의 문도들에 의한 현창사업의 일환으
로 추진되었는데, 그 사업을 주도한 인물은 그의 사법제자인 삼륜선사(三輪禪
師)이었다. 삼륜은 신행의 영정, 부도와 함께 비석을 조성하였는데, 조정의 관
리, 도인, 왕실부인, 문도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6) 왕
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되었으나, 아직 시호(諡號)나 탑호(塔號)는 내려
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석의 원제목은 “해동고신행선사지비병서(海東故神行禪師
之碑幷序)”로만 일컬어졌다. 비석을 수립할 때 왕명으로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문인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하는 것은 뒷날 남종선을 받아와서 독립된 산문을
개창하는 선승들부터였다. 비문의 찬술자는 원성왕의 손자이자 희강왕의 아버
지로서 807년 정월부터 810년 정월까지 집사부의 시중을 엮임하였던 김헌정
(金獻貞)17)이었으며, 각자는 동계사문(東溪沙門) 영업(靈業)으로서 역시 신행의
귀족적인 성향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18) 비석을 수립하게 되는 800
년대 전후에 신행의 북종선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는 사정은 다음 절에서 다루
게 될 것이다.
16) 「신행선사비문」에서는 현창사업의 후원자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有若 大隱明朝之賢 栖心
道境之士 策念韋提之貴 亞迹圓寂之徒 相顧誓言 我等數人 共承沙佛 齊念塵僧”
17) 「신행선사비」에 새겨진 金獻貞의 관직과 관등은 “皇唐衛尉卿國相兵部令兼修城府令伊干”으로써
최고의 진골귀족이었음을 나타내준다.
18) 단속사에 세워졌던 비석은 조선시대 후기에 망실되어 전하지 않으나, 탁본이 여러 본 전해지고 있
으며,「海東金石苑」에 의하면 높이 5척 6촌, 폭 2척 5촌이었다고 한다. 글씨는 東溪沙門 靈業이
었는데, 서체는 行書로서 書風이 왕희지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찍부터 비문의 내용보다는 글씨가
주목을 받아 탁본이 유행되었다.
Ⅲ. 북종선의 전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행선사비문」의 주인공인 신행이 중국 달마 계통
의 선법을 4조 도신에게서 전법해온 법랑에게 전수받고, 다시 당나라에 건너가
서 신수 계통의 북종선을 전수해옴으로써 두 계통의 선법을 계승하였다는 종래
의 학설은 일부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행의 행적과 불교에 대해 가
장 신빙할 수 있는 자료인 「신행선사비문」에 의거하는 한 법랑이 신행의 스승
인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법랑이 당에 유학하였다거나, 더욱 도신에게서
선법을 전수해 왔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신행이 법랑에
게서 3년 동안 수업한 뒤 35세 즈음에 당에 유학하여 신수 계통의 북종선을 전
수해 왔다는 점은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는데 전연 무리가 없다.
신행이 당에 유학한 738년 즈음 당의 장안과 낙양의 양경을 중심으로 하는 불
교계는 신수 계통의 북종선이 한창 전성기를 넘기고 있었다. 신수(606?~706)
에 의해서 도신-홍인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선불교로
서 대성된 북종선은 보적(普寂)·의복(義福)·경현(敬賢)·혜복(惠福) 등 뛰어난 제
자들의 교화활동에 의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의복(658~736)과 함께
신수 계통의 북종선을 대표하는 보적(651~739)은 스승 신수의 뒤를 이어 양경
을 중심으로 제도(帝都)에서 약 20년 동안 활약하여 “양경(兩京)의 법주(法主),
삼제(三帝)의 문사(門師)”로 존경받은 인물이었으며, 그의 문도가 1만인, 개당
하여 법을 홍포한 제자가 63인이나 되었다고 전하는 것처럼 그의 교화는 스승
신수 이상이었다고 전한다.19) 그런데 732년부터 시작된 하택신회(荷澤神會)의
신수계의 북종 공격과 남종의 독립운동, 안사(安史)의 대란이후 급변하는 시대
와 선사상의 변천, 그리고 남종선 계통의 뛰어난 인물들의 활약 등으로 말미암
아 북종선의 교세는 위축됨으로서 선종의 주류가 북종선에서 혜능(慧能) 계통
의 남종선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미 신행이 당에 도착한
738년을 전후하여 의복과 보적 등이 차례로 입적함으로써 북종선은 3세대를
맞아 전성기를 지나게 되었지만, 9세기 중반까지는 아직 여세를 유지하고 있었
다. 보적의 문하에는 동광(同光)을 비롯한 다수의 뛰어난 인물들이 알려지고 있
는데, 신행에게 북종선을 전수해 주었다는 지공(志空)은 오직 신라의 「신행선
사비문」에만 보이고, 중국 측의 기록에는 일체 나타나지 않아 그 행적은 전연
알 수 없다. 다만 「신행선사비문」에서 신행은 지공의 문하에서 수업한지 3년이
지나서 인가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지공은 신행에게 관정하고 수기하면서 귀국
을 권유하는 말을 마치고 입적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신행이 귀국하는 742년 무
렵에 세상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19) 宇井伯壽,「禪宗史硏究」, (東京: 岩波書店, 1935), pp.296-315
신행은 귀국하여 혜공왕 15년(779) 입적할 때까지 북종선을 홍포하는 활동
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선사상의 핵심 내용이 간심(看心)과 방편다
문(方便多門)이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신행선사비문」에서는 그것에 관한 설명
이 전연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는 북종선의 기본 사상
인 좌선간심(坐禪看心)과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의 방편법문을 계
승한 것으로 보인다.20) 그러나 「신행선사비문」에서 신행의 귀국 이후 37년 동
안의 교화 활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실의 언급이 일체 없고, 더욱 해당 문단
의 분량이 4년 동안의 당 유학 시기의 서술 분량의 3분의 1 남짓에 불과한 것을
감안할 때 당시의 불교계에서 주목받을 만한 뚜렷한 행적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행이 입적한지 34년이 지나서 그의 사법제자인 삼륜
등에 의해 신행의 영당과 부도, 그리고 비석 등의 조성을 통한 현창운동이 전개
되고 있던 사실로 보아 북종선의 법맥은 그의 사법제자들을 통해 단속사를 중
심으로 8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 북종선 사상은 근대 敦煌 出土 禪文獻 가운데 神秀 계통 북종선의 기본 자료로 간주되는「觀心論」.
「大乘無生方便門」등의 문헌에 의해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宇井伯壽, 앞의 책, pp.446-517. 참
조) 북종선은 한마디로 看淨禪이라고 할 수 있는데, 道信-弘忍의 東山法門의 一行三昧로서 주
장된 坐禪의 실천과 그 守心說을 더 발전시켜 허공과 같이 無物이며 청정한 淨心의 體를 간하라고
주장하는 淸淨禪을 확립한 것이다. 그리고 方便法門은 5종의 대승경전에 의거한 다섯가지의 방편
문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大乘起信論」․「法華經」․「維摩經」․「思益經」․「華嚴經」등 5종의 경전
을 소의로 하여 각각 그 특질을 활용하여 북종선의 사상체계를 만들어 도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삼
아서 부처의 본질인 體와 지혜의 用, 그리고 부처의 行化의 作用과 불가사의한 解脫의 세계, 諸法
存在의 본질이 空無生임을 깨달아 無碍解脫道를 성취할 것을 설하는 것이다. (鄭性本,「中國禪宗
의 成立史 硏究」(서울: 민족사, 1991), pp.395-439. 참조)
그런데 800년대 초반 신행의 법손들에 의해 북종선이 이어지고 있던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안홍(安弘)에 대한 추앙 분위기이다. 「신행선사비문」에서는 신
행의 가계를 언급하면서 특별히 종증조부인 안홍을 명기하고 있는데, 직계조상
이 아닌 방계 조상의 인물을 예외적으로 명기한 것은 그가 진평왕~선덕여왕의
시대에 활약한 고승이었기 때문이겠지만, 800년대 전후하여 왕명으로 설모(薛
某:薛仲業?)가 안홍비문을 지었던 사실을 보아 그에 대한 추모 분위기와도 무
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안홍(579~640)은「해동고승전」의 저자 각훈(覺訓)이
추정한 바와 같이 안함(安含)과 동일인으로 보이며, 진평왕과 선덕여왕대의 고
승이었다. 그는 이찬 시부(詩賦)의 손자이며, 신행의 종증조부가 되는 사람이
었다. 그는 진평왕 23년(601) 수나라에 유학가서 4년 뒤에 서역승인 비마진제
(毘摩眞諦) ․ 농가타(農加陀) 및 중국승려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는 황룡
사에 머물면서 수 문제의 불교치국책의 도입을 추진하였던 바, 뒷날 800년대
즈음에는 흥륜사 10성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그런데「삼국사기」진흥
왕조에는 진흥왕 37년(576) 수나라에 가서 불법을 구하였으며, 서역승 비마라
(毘摩羅) 등과 함께 돌아와『능가경(楞伽經)』․『승만경(勝鬘經)』과 함께 불사리
를 바쳤다고 하여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진흥왕 37년은 원광이 중국
에 유학한 연대의 착오라는 견해가 있는데,21) 이 기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안홍이 두 경전을 가져왔다는 내용이다. 이 두 경전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가 433년 즈음에 번역한 것인데, 특히 4권『능가경』은 초기 선종사에서 중요
시되어 동산법문이 “능가종(楞伽宗)”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북종선
계통의 선종사서인「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서는 보리달마에 앞서 구나발
타라를 선종의 제1조로 들고 있는데,「능가사자기」라는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상응한다.22) 이로써 북종선을 받아들인 신행의 제자들이 안홍을 명
기한 것은 단순히 신행의 선조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고, 800년대 초반「능가
사자기」에서 주장하는『능가경』의 전통에 대한 북종선의 전법계보 의식이 작
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1) 辛鍾遠,「신라 최초의 고승들」(서울: 민족사, 1998), p.122.
22) 淨覺이 지은「楞伽師資記」는 스승 玄賾의「楞伽佛人法志」를 이어 발전시켜『楞伽經』의 전통에
의한 師資 사이의 傳法의 사실을 강조한 책인데, 찬술연대는 700년대 초반(708년, 또는 713~716
년설)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찬술된 것으로 추정되는「傳法寶紀」에서는
求那跋陀羅를 제외하고 菩提達摩를 초조로 꼽는 전법계보를 주장하고 있어서 같은 북종선 계통에서
도 다른 전법계보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종류의 선종사서는 모두 敦煌에서 출토된 것으로
여러 이본이 있다. (柳田聖山,「初期の禪史」I, p.30. ; 柳田聖山,「初期禪宗史書の硏究」(京都,
法藏館, 1967), p.90. ; 關口眞大,「禪宗思想史」(東京, 山喜房佛書林, 1964), pp.169~188. ;
鄭性本, 앞의 책, pp.460~495. 참조)
한편 신행이 귀국하는 8세기 중엽에는 의상계의 화엄종이 불국사와 석굴암
의 창건을 계기로 진골귀족이나 왕실과 연결되면서 경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와
서 중앙불교계의 주류적인 위치를 확보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불교계 상황에
서 진골귀족 출신으로서 언제부터인지 단속사에 주석해 있다가 입적한 신행이
보여준 귀족적인 행적은 화엄종 같은 교종과 구분될 수 있는 정체성을 확립하
기 어렵게 하였던 것 같다. 또한 북종선이 화엄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점도
그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북종선 신수의『화엄경』주석 및 저술
이 있었다고 하는 견해23)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북종선의「대승무생방편문」에
는『화엄경?에 의거한 제5의 방편문을 설정하고 있으며, 신수 및 그 제자 보적
등이 ?화엄경』의 교학에도 통달하고 있었고, 특히 지공의 스승인 보적은 “화엄
학자”라고 불리어졌다는 사실 등으로 보아, 보적의 법손에 해당되는 신행의 북
종선도『화엄경』과 무관할 수 없었던 것 같다.
23) 대각국사 의천의「新編諸宗敎藏總錄」에 神秀의 저술로 수록되어 있는 “「大華嚴經疏」三十卷,「妙
理圓成觀」三卷” 등 2종을 북종선 신수의 저술로 간주하는 견해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폭넓게 제기
된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부정적인 의견이 우세한 편이다. 화엄종 法詵의 제자인 會稽의 神秀의
저술로 추정하는 주장이 새로 제기되어 지지를 넓혀가고 있다.
821년에 귀국하는 도의(道義) 이후 신라 선승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보면, 선
승들 대부분이 처음에 화엄을 공부하다가 뒤에 선종으로 개종하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800~888)은 북종선으로 출가하여 화엄종으로 옮겼다가 다시 남종선으로 돌
아감으로써 당시 선종과 화엄종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열두 살을 넘기고 나서(13세) 여러 학문(九流)을 비속하게 여기고 불도에
들어가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중략) 이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입으로는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이 절에 법성선사(法性禪師)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일찍이 중국에 가서 능가선(楞伽禪)을 배웠었다. 대
사는 수년 동안 배웠는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탐색하였으므로
법성선사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빠른 발로 달린다면 뒤에 출발하더라도
먼저 도착한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서 증험하였다. 나는 만족한다. 너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으니, 너와 같은 사람은 중국으로 유학하는 것
이 좋을 것이다." (후략) 24)
24) 跨一星終 有隘九流 意入道 (中略) 遂零染 雪山五色石寺 口精嘗藥 力銳補天 有法性禪師 嘗扣騣
伽門(필자주: 楞伽門)于中夏者 大師師事數年 撢索無孑遺 性歎曰 迅足駸駸 後發前至 吾於子驗
之 吾悏矣 無餘勇可賈於子矣 如子者宜西也 大師曰惟 夜繩易惑 空縷難分 魚非椽木可求 兎非守
株可待 故師所敎 已所悟 互有所長 苟珠火斯來 則蚌燧可棄 凡志於道者 何常師之有. (大朗慧和
尙碑文)
최치원이 찬술한 「대낭혜화상비문」에 의하면 무염은 13세 때에 설악산의 오
색석사에서 출가하여 공부하던 중 법성선사(法性禪師)를 만나서 여러 해 동안
배우게 되었는데, 법성선사는 일찍이 중국에 유학가서 능가선을 배워온 사람이
었다는 것을 보아, 무염의 13세 때인 헌덕왕 4년(812) 무렵에 앞서의 신행 이
외에도 당에 유학 가서 북종선을 전수해 온 법성선사 같은 인물들이 더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25)
25) 북종선 계통에서는「楞伽佛人法志」․「楞伽師資記」등의 저술이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楞伽
經』을 宗要로 삼아서『楞伽經』의 전승을 주로 하는 禪宗史書를 편찬하여 4권『楞伽經』의 번역자
인 求那跋陀羅를 선종의 제1조로 꼽고 있었다. 선종은 道信-弘忍 때에 비로소 한 파를 형성하여
“東山法門”, 또는 “東山宗”이라 칭하였으며, 北宗禪의 神秀 문하의 한 문파에서 道信-弘忍으로
부터 소급해서 僧璨-慧可-達摩-求那跋陀羅의 付法祖統을 세우고,『楞伽經』의 전승자라는 의미
에서 “楞伽宗”, 또는 “楞伽門”이라고 칭하였다. 「大朗慧和尙碑文」에서 法性禪師가 중국에 가서
공부했다는 “楞伽門”은 北宗禪 계통의 “楞伽宗”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런데 荷澤神
會(668~760)에 내려 와서는 達磨 이후 累代에 걸쳐 傳心法要로 삼은 것은『金剛般若經』이었다
고 주장하였으며,「六祖壇經」에서는『金剛般若經』에 의한 般若三昧를 見性의 인연으로 삼고, 그
스승인 弘忍이 이미 널리『金剛般若經』에 의지했다고 서술하기에 이르렀다. (關口眞大, 앞의 책,
pp.43-74, pp.169~188 참조)
그런데 무염과 법성선사에 관한 자료는 천책(天頙)의「선문보장록(禪門寶藏
錄)」권중에도 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먼저 「무염국사행장(無染國師行狀)」에서
인용한 자료는 선과 교의 차이를 묻는 무염의 질문에 대해 법성이 제왕과 백관
의 비유로써 선이 교보다 훨씬 우월한 것임을 주장한 내용이다.26) 그리고 「해
동칠대록(海東七代錄)」에서 인용한 자료는 무염이 항상『능가경(楞伽經)』을 공
부했지만, 조사의 종지가 아님을 알고 경을 버린 뒤 당나라에 가서 조사의 마음
을 전하여 왔다는 내용이다.27) 이 두 편의 자료는 모두 선교(禪敎)의 교판론(敎
判論)으로서 선이 교보다 월등하게 우월하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하여 고려시대
이후 선종 측에서 사실을 왜곡시킨 설화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목되는 사실은
무염이 법성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는 점과 무염이 국내에서 한때『능가경』
을 공부하다가 버리고 당나라에 가서 선종을 전수해 왔다는 점이다. 이 자료는
후대에 심하게 윤색된 것이지만, 무염이 일찍이 법성에게 능가종, 즉 북종선을
배웠으며, 뒤에 당에 가서 남종선을 전수해 왔다는 「대낭혜화상비문」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의 의미는 있다고 본다.
26)「韓國佛敎全書」卷6, p.474 上 (「禪門寶藏錄」卷上) : 無染國師가 法性禪師에게 “禪과 敎는 어떻
게 다릅니까?”라고 질문하니, (법성선사가) 대답하기를 “百僚가 阿衡하여 각자 職能을 다하는 것
이 敎요, 帝王이 廟堂 위에서 拱黙하고 萬百姓이 그로써 편안한 것이 禪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無染國師行狀)
27)「韓國佛敎全書」卷6, p.474 上 (「禪門寶藏錄」卷上) : 溟州崛山의 梵日祖師는 신라 眞聖大王이
禪과 敎의 兩義에 대해서 묻자 이에 답하여 말씀하셨다. “우리 本師이신 釋迦牟尼佛의 出胎說法
에 각 방향으로 七步를 걸으시고 말씀하시기를 ‘唯我獨尊’이라 하셨습니다. 뒤에 踰城出家하시어
雪山 중에서 因星悟道하셨지만, 그 깨달은 법이 아직도 極致에 이르지 못했음을 느끼고 수십 개월
을 遊行한 끝에 祖師 眞歸大師를 방문하게 되어 비로소 玄極한 宗旨를 전해 받게 되었으니, 이것
이 바로 敎外別傳인 것입니다.” 그래서 聖住和尙이 항상『楞伽經』을 연구했지만 祖師의 宗旨가
아님을 알고 버린 뒤 入唐하여 祖師의 마음을 전하였으며, 道允和尙 역시『華嚴經』을 探究하였으
나, “圓頓의 宗旨가 어찌 祖師心印의 法과 같으랴” 하시고 역시 入唐하여 祖師의 心法을 전하였습
니다. 祖師의 법은 그만한 根機가 아니면, 그것은 能信하지 못하는 敎外別傳의 宗旨인 것입니다.
(海東七代錄)
한편 무염은 중국으로 유학하라는 법성선사의 권유를 받았으나, 중국으로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법성선사와 헤어진 뒤에 부석사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
게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그 뒤 헌덕왕 14년(822)에 비로소 당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무염이 당에 도착해서 먼저 찾아간 곳은 화엄종의 지엄이
주석하였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였음이 주목된다. 무염은 그 곳에서 화엄
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부석사에서 배운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보아 일찍이 의상이 지엄(智儼)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하였던 지상사의 화엄학은
부석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음을 확인하였던 것 같다. 무염은 그때 얼굴이 검
은 한 노인으로부터 “멀리 자신밖의 경계에서 도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그
대에게 있는 부처를 체인하는 것에 비하겠는가?” 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서 경전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불광사(佛
光寺)의 여만(如滿)과 마곡사(麻谷寺)의 보철(寶徹)을 만나서 남종선을 전수받
게 되었다.28) 여만과 보철은 모두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제자들로서
무염은 비로소 6조혜능(慧能)-남악회양(南嶽懷讓)-마조도일로 이어지는 남종
선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마조도일은 강서성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선풍을 크
게 진작하고, 제자들을 육성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홍주종(洪州宗), 또는
강서종(江西宗)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28) 尋迻去 問驃訶健拏 于浮石山釋澄大德 日敵三十夫 藍茜沮本色 顧坳盃之譬曰 東面而望 不見西
墻 彼岸不遙 何必懷土 遽出山竝海 覗西泛之緣 (中略) 洎長慶初 朝正王子昕 蟻舟唐恩浦 請寓載
許焉 旣達之罘山麓 (中略) 行至大興城南山至相寺 遇說雜花者 猶在浮石時 有一䃜顔耆年 言提
之曰 遠欲取諸物 孰與認而佛 大師舌底大悟 自是置翰墨遊歷 佛光寺問道如滿 滿佩江西印 爲香
山白尙書樂天空門友者 而應對有慙色曰 吾閱人多矣 罕有如是新羅子 他日中國失禪 將問之東夷
耶 去謁麻谷寶澈和尙 服勤無所擇 人所難已必易 (後略). (朗慧和尙碑文)
이로써 신행선사비가 수립되는 헌덕왕 5년(813) 무렵에 신라에는 신행의 사
법제자인 삼륜선사를 중심으로 한 북종선의 전승자 이외도 별도로 당에 유학하
여 북종선을 전래해 온 선승들이 더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이때
의 북종선은 화엄종과 확실히 구분될 수 있는 정체성을 갖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염의 수학과정은 특이하게 처음 북종선에서 출발하여 화엄으로 옮
겨갔으며, 당에 가서도 먼저 공부한 것은 화엄학이었다. 그런데 무염은 화엄의
근본도량인 지상사에서 비로소 경전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그곳을 떠나 남종선
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무염의 이러한 수학과정은 신라에 전해진 북종선이 화
엄종 중심의 교학불교의 한계와 모순을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로서의 성격
을 아직 갖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 불교계에서 교학불교에
서 실천불교로의 전환은 절충적인 성격의 북종선의 전래가 아니고, 다음 단계의
철저한 실천불교인 남종선의 도입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29)
29) 700년대 후반 북종선 이외에 牛頭禪이라는 제3의 선종 일파도 전래되고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우두선은 4조도신의 문파 法融(594-657)이 우두산에서 선풍을 선양하고, 智威-玄素-道
欽으로 계승되면서 우두종으로 발전하였는데, 신라의 화엄종 승려 가운데 당에 가서 이 우두선을
전수받아온 인물이 있었다. 의상의 법손인 神琳의 제자 順應이 혜공왕 2년(766)에 당에 유학하여
우두선을 받아왔음이 최치원이 찬술한 「순응화상찬」과 「해인사선안주원벽기」 등의 자료에 의해 확
인된다. 순응은 귀국한 뒤 애장왕 3년(802)에 해인사를 창건하였는데, 그로 인해 가야산이 牛頭山
으로도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순응과 그를 이은 이정(利貞)에 의해 해인사는 화엄종의 중심 사
찰로 발전한 것을 보아 우두선은 독립된 선종의 일파로서 성립되지는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800년을 전후하여서는 이들 북종선 계통의 인물들과는 별도로 이미
당에 유학하여 혜능 계통의 남종선을 전수받은 선승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다
음의 남종선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30) 당에서 유학하고 있던 선구적인 인물
로서 도의(道義)는 선덕왕 5년(784), 혜소(慧昭)는 애장왕 5년(804), 홍척(洪
陟)은 헌덕왕 원년(809) 각각 당에 들어가 홍주종 마조도일의 제자들인 西堂智
藏(735~814)과 당주(唐州)의 운수신감(雲秀神鑑)31) 등의 문하에서 각각 수학
하고 있었고, 마침내 헌덕왕 13년(821) 도의의 귀국을 시작으로 이들이 연이어
뒤따르게 됨으로 신라의 불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면서 교학불교에서 실
천불교인 남선종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30) 당의 불교계에서는 700년대 후반 남종선의 양대 계열인 南嶽-馬祖, 그리고 靑原-石頭 모두 江西
와 湖南의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번성하였으므로 신라의 구법승들도 800년 전후부터는 이 지
역을 찾기 시작하였다.
31) 曺永祿,「구산선문의 원류를 찾아서」1(서울: 동국대출판부, 2014), pp.272-280. 崔致遠이 찬
술한 「雙溪寺眞鑒禪師碑文」에 慧昭의 스승으로 기록된 ‘滄州 神鑑’은 ‘唐州 雲秀山 神鑑’의 오기
임을 고증하였다. (「宋高僧傳」卷20, 「唐唐州雲秀山神鑑傳」. 참조)
Ⅳ. 맺음말
법랑과 신행은 보리달마 계통 선종의 최초 전래자로서 한국선종사의 첫머리
를 장식하는 인물들이다. 법랑은 4조 도신(580~651)에게 선법을 배우고 귀국
하여 신행(704~779)에 전하였고, 신행은 다시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을 전수
해 온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학계 일각에서 법랑의 스승 도신과 신행 사이의
생존 연대상의 차이로 인하여 법랑의 전법 사실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
는 학자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
어 왔다. 그러나 법랑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인 「신행선사비문」에 의거
하는 한 법랑이 신행의 스승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당에 유학하
거나 도신의 선을 전수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가 이러한 진부한 문제를 새삼스럽게 다시 검토하게 된 동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 여부를 밝혀보려는 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불교사학계의
안이한 연구자세와 자료비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성을 촉구하려는 의도이
기도 하다. 거시적인 불교사의 흐름은 도외시한 채로 인물 개인이나 단편적인
사건에만 매달려 쉽게 결론을 내리는 안이한 연구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또
한 자료의 해석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고려하지 못하고 단편적 문구에만 매달려
편의적인 해석을 주저하지 않는 연구가 횡행하고 있음은 연구방법상의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법랑과 신행에 관한 이해는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 보
여주고 있는 연구방법상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라는 점에서 본
고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한국선종사의 출발점이 되는 법랑과 신행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을 일으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자료상의 문제에 기인한다. 이 문제에 관한 자료는「신행선
사비문」(813년)과 「지증대사비문」(893년 무렵) 두 편이 전부인데, 각기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장에서 고증한 바와 같이 「신행선사비문」에
의거하는 한 신행은 법랑에게서 공부한 다음에 당에 가서 북종선을 전수해 왔
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그런데 80년 뒤에 찬술된 「지증대사비문」에서는 법랑
이 당에 유학하여 도신의 선법(동산법문)을 전수한 사실을 새로 추가하고, 또
한 신행의 북종선 전법 사실을 빠뜨리는 대신에 「신행선사비문」에서 없었던,
신행과 당 숙종의 사이에서 시문을 교환했다는 사실을 추가하는 등 내용상의
차이점을 나타내 줌으로서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문제점으로 지적
하려는 것은 두 비문 내용 사이의 차이점은 고려하지 않고, 안이하게 양자의 내
용을 혼합하여 전법계보설을 구성하는 것으로 그치는 학계의 안이한 연구자세
이다. 「지증대사비문」에서 법랑과 신행에 관해 언급한 구절만을 적기하면 다음
과 같다.
법의 계보를 보면, 당의 제4조 도신(道信)을 5세부(五世父)로 하여 동쪽으
로 점차 이 땅에 전하여 왔는데, 흐름을 거슬러서 이를 헤아리면, 쌍봉(雙
峰)의 제자는 법랑(法朗)이요, 손제자는 신행(愼行)이요, 증손제자는 준범
(遵範)이요, 현손제자는 혜은이요, 내손제자가 대사이다. 법랑대사는 대
의4조(大醫四祖)의 대증(大證)을 따랐는데, 중서령 두정륜(杜正倫)이 찬술
한 「도신대사비명(道信大師碑銘)」에 이르기를, “먼 지방의 기사와 다른 지
역의 고인으로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않고 진소(珍所)에 이르렀다”고 하였
으니, 보물을 움켜지고 돌아온 사람이 법랑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므로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비밀히 간직해 둔 것을 능히 찾아낸 이는 오직 신행대사뿐이었다. 그러나
때가 불리하여 도가 미쳐 통하지 못한지라 이에 바다를 건너갔는데, 천자
에게 알려지니, 숙종황제께서 총애하여 시구를 내리시되, “용아(龍兒)가
바다를 건너면서 뗏목에 힘입지 않고, 봉자(鳳子)가 하늘을 날면서 달을
인정함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신행대사가 ‘산과 새’, ‘바다와 용’의
두 구로써 대답하니, 깊은 뜻이 담겼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3대를 전하여
대사에게 이르렀으니, 필만(畢萬)의 후대가 이에 증험된 것이다." (지증대
사비문) 32)
32) 法胤 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 朗
大師從大毉之大證 按杜中書正倫纂銘 敍云 遠方奇士 異域高人 無憚險途 來至珍所 則掬寶歸止
非師而誰 第知者不言 復藏于密 能撢秘藏 唯行大師 然時不利兮 道未亨也 乃浮于海 聞于天 肅宗
皇帝 寵貽天什曰 龍兒渡海不憑筏 鳳子冲虛無認月 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 唯深旨哉 東還三傳至
大師 畢萬之後斯驗矣 (智證大師寂照塔碑文)
위 인용문은 지증대사 도헌(824~882)의 법계를 밝혀준 내용인데, 4조 도신-
법랑-신행-준범-혜은-도헌으로 이어지는 법계설은 오늘날 학계에서 그대로
수용되어 법랑 초조설의 유일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법계설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지증대사비문」자체에 대한 철저한 문헌비판이
전제되는 문제가 있음에도 신라말기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의 찬술이라는 점
에서 무조건 신빙성이 높은 자료로써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비문의 서술은 문
도들이 작성한 행장(行狀)에 의거하기 때문에 문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
고, 특히 주인공의 선악에 대한 평가나 전법계보 같은 민감한 내용은 비문 찬술
자의 견해보다도 문도들의 주장이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비문의 문헌비판은 최치원의 견해만이 아니고 문도들의 입장과 불교계의 상황
등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하며, 단편적인 문구의 해석에서 벗어나 비문 전체의
맥락에서 해석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견해는 「지증대사
비문」의 내용은 상당부분 사실과 다르게 변조되었을 것으로 보는데,33) 별고에
서 이 비문의 본격적인 분석을 통하여 선종 수입 이후의 불교계, 특히 북종선에
서 남종선에로의 선종의 변화과정과 전법계보설의 변조 가능성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33) 「지증대사비문」의 법랑의 선법 전래설의 문제는 최치원이 보았다는 杜正輪(587~658)의 「四祖道
信碑銘」의 진위 여부를 중심으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지증대사비문」의 해당 구절을 정
확히 해석하면, 최치원이 그 비명에서 인용한 구절은 “遠方의 奇士와 異域의 高人이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않고 珍所에 이르렀다”고 한 내용뿐이고, 그 구절을 최치원이 “보물을 움켜지고 돌아간 사
람이 법랑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라고 확대 해석하여 법랑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신행의 행적에 관한 부분도 북종선을 전수한 사실은 빼버리고, 「신행선사비문」에 없던
당 숙종과의 시구의 교환 사실을 새로 추가했는데, 이는 명백한 사실의 조작이라고 볼 수밖에 없
다. 필자가 문제로 삼는 것은 사실의 위조 여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실 위조의 이유와 배경이
며, 그 문제에 대한 해명을 통해 신라 선종의 전래과정과 산문의 전법계보설의 변화과정을 이해하
려고 하는 것이다.
한편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에서는 최초의 선법 전래자로는 법
랑이 아닌 신행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34) 그의 귀국 연대는 경덕왕 원년(742)
무렵으로 추정된다. 신행은 704년 출생하여 733년 30세 무렵에 출가하여 운
정율사(運精律師)에게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그리고 735년 32세 때에 호거
산의 법랑에게 찾아가서 3년 동안 수업하고, 법랑이 입적하자 738년 35세로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의 신수의 손제자인 지공(志空) 문하에서 3년 동안 수업
하여 인가를 전해 받고, 742년 무렵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한 뒤
혜공왕 15년(779) 단속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37년 동안 북종선의 기본사상인
좌선간심(坐禪看心)과「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의 방편법문(方便法
門)을 홍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신행선사비문」에서 그의 활동
에 관한 기록이 소략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에 의한 북종선
의 전래와 행화(行化)는 당시 불교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행이 입적한 뒤 34년이 지나서 그의 사법제자인 삼륜선사(三
輪禪師)에 의해 현창사업으로서 영당과 부도, 그리고 비석이 수립되고 있었던
것을 보아 북종선은 신행의 문도들에 의해서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4) 로버트 버스웰은 柳田聖山이 언급한 중국 초기 선종의 사상, 특히 東山法門의 선사상과『金剛三
昧經』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木村宣彰이 제기한 ?금강삼매경?의 신라 성립설을 결합시켜 법랑의
위조설을 제창하였는데, 허구에 架上하여 창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금강삼매경』을
영문으로 주석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장한 법랑의 위작설은 자료의 편의적인 해석과 논리
의 비약으로 전연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가설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Robert E. Buswell, Jr.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y in China and Korea : The Vajrasamādhi-Sūtra, a
Buddhist Apocryphon(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pp.123~181 ;
柳田聖山, 앞의 책, p.27 ; 木村宣彰, 「金剛三昧經の眞僞問題」,「佛敎史學硏究」18-2(京都 : 佛
敎史學會, 1976) ; 鄭性本, 앞의 책, p.265. 참조)
그런데 비석이 수립되는 헌덕왕 5년(813) 무렵 신라 불교계에서 북종선을
전승하고 있었던 인물들은 신행의 문도 이외에도 더 있었던 것 같다. 최치원이
찬술한 「낭혜화상비문」에 의하면 신행선사비가 수립되기 1년 앞서 낭혜화상
무염이 13세로 출가하여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수업하고 있었는데, 그 법성
은 일찍이 당에 유학하여 능가선, 즉 북종선을 전수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러나 무염은 법성의 당 유학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석사의 석징대덕(釋澄
大德)에게 찾아가 화엄학을 배우고, 뒤에 당에 가서도 화엄종의 본거지인 지상
사를 찾아가 계속하여 화엄을 공부하였던 것을 보아 법성의 북종선은 화엄종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북종선
이 원래 교학불교인 화엄종에서 남종선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과도적인 성
격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더욱이 800년 전후의 신라불교계는 화엄종이 주류적
인 종파로서 크게 융성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무염이 뒤에 화엄종
의 교학불교로서의 한계를 깨닫고 남종선으로 개종하였던 것과 궤를 같이하여
헌덕왕 13년(821) 도의가 남종선 계통의 홍주종을 전수받아 귀국하면서 불교
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신행이 선법의 최초 전래자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보리달마 계통
의 선종을 접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행이 귀국하
는 742년 이전부터 당에서 활약하고 있던 신라 출신 선승들이 다수 확인되는
것이다. 한국인 가운데 선종을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로는 고구려 출신의 지덕
(智德)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신수(神秀)·지선(智詵)·혜능(慧能) 등과 함께 5조
홍인(弘忍, 601~674)의 11대(大)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병칭되었던 것을 보
아 중국 선종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는 남
종선 혜능의 제자인 회양(懷讓, 677~744)의 문하에 본여(本如)가 있었는데,
그의 전기는 불명이다. 700년대 당에서 활약한 신라 출신 선승 가운데 대표적
인 인물로는 무상(無相)과 혜각(慧覺)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2인은 최치원이
찬술한 「지증대사비문」에서 특히 뛰어난 인물〔巨擘者〕로 꼽고 있었음을 보
아 신라에도 잘 알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은 성덕왕 27년(628) 당에 가서 홍인-지선(智詵)-처적(處寂) 계통
의 선을 잇고 사천성의 성도(成都) 지방의 정중사(淨衆寺)를 중심으로 활약해서
“익주김(益州金)”으로 불렸으며, 그 계통의 선종사서인「역대법보기(歷代法寶
記)」를 통해 그의 행적은 잘 알려졌다. 그러나 상산혜각(常山慧覺, ?~774)에
대해서는 그의 법계나 행적이 전연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최근 그에 관한 비석
이 발견됨으로써 혜능의 남종선을 이은 하택신회(荷澤神會)의 제자였음이 새로
밝혀지게 되었다.35) 그는 성덕왕대(702~737)에 당에 가서 신회의 남종선을
전수하고 형주(邢州) 칠천사(漆泉寺)를 중심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최치원이「선보(禪譜)」를 인용하여 상산혜각이 진주김(鎭州金)으로 불려졌다고
한 것은 형주 지역인 상산이 당대에 진주로 불려졌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신행이 귀국하기 전부터 당에서 활약하는 선승들이 적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의 선법이 유식학과 화엄학 등 교학불교가 융성했던 신
라 불교계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귀국한 신행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못하였던 것도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