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이유미 박사
이유미 박사, 고요한소리 포럼서 생소한 ‘아사와’의 개념 본격 소개
“부처님은 중도를 4성제로 설했고, 4성제는 12연기와 8정도로 전해”
빠알리 니까야에 나타난 중도와 그 관련 단어들을 탐구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인 중도의 바른 이해와 실천을 구하는 데 중점을 둔 논문이 발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이유미 박사(스리랑카 켈라니야대학 불교철학 박사, 사진)는 지난 4월 15일 사단법인 고요한소리가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이 시대의 길, 중도(中道)’를 주제로 주최한 세미나에서 ‘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에서 (보통 불자들이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 법과 진리가 어떻게 다른 지, 중도와 팔정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중도와 팔정도 그리고 사성제의 관계는 어떠한 지, 또한 무아와 중도는 어떤 관계인지를 고찰했다.
이유미 박사는 법은 ‘잘 만들어진 뗏목’에 비유하듯이, 수단을 의미한다고 전제하고, “진리를 전하는 수단인 법(뗏목)은 성도(聖道)를 의미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발제를 시작했다.
이 박사는 “아무리 잘 만들어진 뗏목이라고 할지라도 뗏목이 저편까지 자동으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며 “뗏목으로 급류를 건너려면 자신의 팔다리로 열심히 잘 저어야 표류하지 않고 목적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듯이, 법이 잘 설해져 있다고 해도, 법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면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뗏목의 비유는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연기법과 4성제에 대해 이유미 박사는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에는 ‘걸어서 돌아다니는 모든 생명체들의 발자국은 어떤 것이든 가장 발이 큰 코끼리 발자국 안에 놓여질 수 있도록 유익한 법은 어떤 것이든 모두 4성제에 내포된다’고 설해져 있다”며 “4성제는 진리지만 4성제의 진리는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는 자’라고 했으니, 불법의 법은 크게 보아 연기법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4성제의 진리를 연기법으로 중생들에게 전한 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유미 박사는 중도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정리했다. “진리인 중도는 상대적 세계를 초월한 것인데, 우리가 머무는 세상은 상대적이며, 상호 대립적인 관계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물과 모든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가치판단은 늘 개념과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전제한 이 박사는 “부처님은 이 관념을 허상(虛法)이라고 단정하고 허상이 아닌 것은 열반뿐이라고 하셨다”고 밝혔다. 존재들의 인식 자체가 ‘표현되는 것에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존재들의 인식 허상인 명색(나마루빠)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허상에 의지한 가치판단과 개인의 주관은 항상 올바르지 않다는 가르침이다.
이 박사는 “이런 허상의 관념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처님은 법을 이용하셨으며, 개념에 기초한 언어의 한계를 법어(法語)로 극복하고 연기법을 설한 것”이라며 “중도적 이해는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모두 다 참되게 아는 것이라고 경에 설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해서 중도는 상대적 세계의 체계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도는 보게 하고 알게 하는 것이 그 속성이고, 그러한 속성으로 인해 고요함, 초월적 앎, 깨달음, 열반이 생산된다. 즉 중도를 원인으로 하여 열반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중도와 8정도’를 설명한 이 박사의 논리는 ‘사이다’처럼 명쾌했다. 중도와 8정도는 모두 ‘도’를 의미하지만 다른 면이 있다고 전제한 이 박사는 “중도는 진리(sacca)로, 8정도는 길(magga)로 설해졌다”고 간결하게 정리했다. 즉 진리인 중도에 닿는 방법으로 8정도라는 법(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중도가 곧 8정도’라고 한 것의 의미는 ‘8정도가 중도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의 표현이라는 점, 보게 만들고 알게 만드는 중도의 특성이 8정도를 통해 발현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이 박사는 이어 중도와 8정도의 다른 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중도는 ‘부처님께서 (중도를) 깨달으셨다’고 했는데, 8정도의 직접적 결과는 ‘바른 앎’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앎에서 바른 해탈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유미 박사가 이날 특히 강조한 것은 ‘아사와’이다. 아사와는 그 뜻이 심오하고 용례가 넓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단어다. 그 어원의 뜻은 ‘흘러들다, 흐르기 시작하다’인데 한역은 빠알리 어원을 살려 ‘새다, 스며들다’의 뜻에서 ‘누(漏)’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국어로는 한역을 따라 유루(流漏)라고 하지만 ‘번뇌’라는 번역이 가장 일반적이다. 영어 번역 또한 매우 다양하다. 서구의 일부 학자들은 번역하지 않고 원어 ‘아사와’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아사와와 관련 이유미 박사는 이날 청중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사와와 중도의 실천 부분이라고 말씀드렸다. 아사와는 세간이냐 출세간이냐 구분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핵심이며, 한국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아사와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편”이라고 전제했다.
이 박사는 “따라서 이번 주제발표에서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인 아사와를 크게 강조하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아사와를 소개하는 것이어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사리불은 아사와를 알아야 바른 길에 든다고 말씀하셨다”고 언급했다.
<중부> <범천의 초대경>에 “아사와는 부패타락)하는 속성이 있고, 계속 생성에 드는 것이고, 고난을 품고 있으며, 괴로움으로 결과되고, 미래에 나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박사는 “부처님에게는 이런 아사와가 다 버려졌고, 뿌리가 잘렸으며 다시 생겨나는 법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한 존재에게서 연기가 끝났다다는 선언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다 알다시피 괴로움으로 귀착되고, 계속 생성에 들고, 생노사가 그 미래의 운명이라는 것이 모든 존재가 처한 현실(reality)이다. 그러므로 아사와는 곧 우리의 현실이다. 이 아사와의 결과가 괴로움이니 아사와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이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연기는 계속되어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법을 들은 이들의 궁극의 목적이 아사와에서 벗어나는[解脫] 것이고, 아사와에서 벗어났을 때 마침내 더 이상 연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아사와에 대한 설법은 부처님께서 범천(梵天)에 올라가셨을 때 범천신의 무리 안에 있던 마라에게 하신 것이었다. ‘마라’는 존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신으로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세상의 존재들을 관장한다. 아사와가 있는 존재는 누구나 마라의 영역 안에 있는데, 존재들이 이 영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끔 지키는 것이 마라의 역할이다. 이 경에서 마라는 대범천신을 존재들의 조상이고 지배자며 아버지고 창조주로, 모든 것을 만든 최고의 신이라고 칭한다. 그 대범천신 아사와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에 정반대되는 ‘이것은 영원하고 늙지도 죽지도 다시 태어나지도 않고 여기서 더 다른 벗어남은 없다’는 견해(상주론)를 가진 신이다. ‘범천은 영원하고 그 이상의 해탈은 없다’는 견해를 가진 대범천신에 대해 부처님은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아는 무지한 자’라고 질타했다. 그리고 ‘이것 이상의 벗어남은 없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당신이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존재계가 더 있다’며 그 증거로 대범천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목소리만으로 범천의 신들을 향해 이렇게 설파했다.
존재와 비존재를 찾는 자들 가운데
나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고서
어떤 형태의 존재도 환영하지(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존재의) 어떤 즐거움도 취하지 않았다. (MN I 330)
이유미 박사는 “아사와는 생성에 든 존재의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라면서 “사리뿟따 존자는 <중부> <정견경>에서 연기의 시발인 무지와 아사와의 관계를 ‘아사와의 일어남으로 무지가 일어나고 아사와의 소멸로 무지가 소멸한다’고 천명하였다”고 밝혔다. 즉 연기의 첫째 조건이 무지(無知)일 때 그 원인은 아사와이고, 이 둘은 상호 의존관계로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부처님의 위대성은 존재가 개아성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나는, 즉 재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법을 세상에 알려주었다는 점”이라며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비로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철저한 탐구에 나섬으로써 괴로움을 끝낼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유미 박사는 “아사와가 괴로움의 원인으로 설해졌으니, 괴로움을 없애려면 아사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며 “더구나 8정도의 요소들이 세상을 초탈한 성도의 요소들이 되려면 아사와가 없어야 한다고 했으니, ‘아사와의 버림’을 중도의 실천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아사와의 소진과 중도의 필연적 상관관계를 설파했다.
이 박사는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아사와가 남지 않고 완전히 제거되도록 수행자의 삶 전체에 적용해야 할 아사와에 대처하는 법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 일러주셨다”며 “그 일곱 가지는 ▲보아서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방호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수용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참고 견뎌(참아내어)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피해서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고 ▲계발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가 있느니, △보아서 버려야 할 아사와는 보아야 버려지고 △방호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는 방호해야 버려지고 △수용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는 수용해야 버려지고 △참고 견뎌 버려야 할 아사와는 참고 견뎌야 버려지고 △피해서 버려야 할 아사와는 피해야 버려지고 △물리쳐서 버려야 할 아사와는 물리쳐야 버려지고 △계발하여 버려야 할 아사와는 계발해야 버려 진다”라고 설명했다.
“무아는 중도로 개아성을 타파하여 도달된 경지고, 중도로 도달된 무아는 ‘있다, 없다’를 극복한 것이며, 중도는 존재를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는’ 조건에 따른 생멸의 법으로 알고 보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이유미 박사는 “그러므로 4성제는 ‘개아성을 타파하여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였을 때 괴로움이 소멸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설해졌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즉 무아의 진리는 중도인 연기법으로 도달된 것이고, 연기법은 12연기와 8정도로 설해졌으며, 12연기로는 아사와과 괴로움으로 결과되는 과정이 설명되었고, 8정도로는 아사와가 없어야 도가 된다는 것이 설해졌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이어 “12연기는 개아성이 생겨나는 길이요, 8정도는 개아성이 소멸되는 길이란 의미”라며 “따라서 12연기로는 개아성을 이해하고, 8정도로는 개아성의 소멸을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 4성제의 가르침이며 이것이 바로 중도의 이해와 실천”이라고 정리했다.
이 박사는 “12연기와 8정도를 통해 4성제를 알고 보면서 참사람이 걷는 길이 중도인 것이며, 그러므로 부처님은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 4성제를 설하셨고, 이 4성제를 12연기와 8정도라는 연기법으로 세상에 전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유미 박사는?
스리랑카 켈라니야대학 불교철학 박사.
스리랑카 국립 빠알리 불교대학에서 학사, 스리랑카 켈라니야대학에서 불교철학 석사 및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빠알리 경전에 나타난 괴로움의
뿌리에 대한 이해>가 있고, 논문으로는 <마음의 역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