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아비달마불교에서의 마음에 관한 몇 가지 쟁점/권오민

실론섬 2017. 5. 30. 15:00

[동아시아불교문화] 28집, 2016. 12, 

아비달마불교에서의 마음에 관한 몇 가지 쟁점

권 오 민/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Ⅰ. 서언

Ⅱ. 마음의 정의

Ⅲ. 마음의 생기

   1. 유부의 심․심소 상응구기(相應俱起) 설

   2. 경량부의 심․심소 차제계기(次第繼起) 설

Ⅳ. 심․심소의 생기조건

   1. 소의(所依)와 소연(所緣)

   2. 소연(所緣)과 행상(行相)

   3. 상응(相應)

Ⅴ. 결어

 

<국문초록>

마음이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에서의 마음은 만물의 근원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불교철학의 최초의 전개라고 할 만한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다만 인간

/세계존재의 한 조건, 인식이나 사유의 주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대개는 존

재론적 차원이 아닌 인식론적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그럴 경우 마음은 그 자

체로서는 설명될 수 없고, 인식 혹은 심리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그 밖의 다른

제법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본고에서는 설일체유부 비파사(毘婆沙)의 심식론(心識論)의 대강을 제시

구사론근품 제34송에 근거하여 설일체유부와 경량부가 마음의 정의

를 비롯한 소의(所依, āśraya)·소연(所緣, ālambana)·행상(行相, ākāra)과 심

·심소의 상응(相應)관계와 관련하여 제기된 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였는

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의 주요쟁점은 마음(心識)과 심소, 소의(근)·소연(경) 등의 제법의 생

기가 동시(同時)인지, 이시(異時, 즉 차제생)인지 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소연과 행상의 성격을 달리 이해하였다. 이를테면 유부에서는 이러한 제법

의 동시인과를 주장함으로써 마음을 다만 객관의 인식대상을 전체적으로 파

악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경량부에서는 이시인과를 주장함으로써 인식

대상을 전 찰나의 외계가 아닌 마음 상에 나타난 형상(ākāra: 행상)으로 이해

하였고, 이에 따라 마음을 인식대상을 비롯한 염정(染淨)의 일체법의 토대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를 일심이라 하였다.

 

Ⅰ. 서언

 

마음이란 무엇인가? 유식에서는 우주만물(三界)의 근원으로 여기기도 하

고,기신론에서는 세간(유위)과 출세간(무위)의 일체법을 포섭하는 존재,

선종에서는 본각진성(本覺眞性)으로 간주하지만, 불교철학의 최초전개라고

할 만한 아비달마 예컨대 설일체유부 비파사(Vibhāṣā)에서는 다만 인간/세계

존재의 한 조건(因緣), 인식(지식)이나 사유의 주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대

개는 존재론적인 차원이 아닌 인식론적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물론 인식과 사유에 수반되어 심리적, 언어·육체적 활동(業)이 일어나고, 이

는 어떤 식으로든 유정개인과 그 터전인 세간의 생기원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

에, 마음은 아함(āgama)에서도 세계의 주체, 만법의 근본으로 간주되었다.

 

무엇이 세간을 유지해가며 무엇이 세간을 이끄는 것인가?

무엇을 세간을 제어하는 하나의 법이라 하겠는가?

마음이 세간을 유지해가며 마음이 세간을 이끄는 것이라네

마음이 능히 세간을 제어하는 하나의 법이라네. (잡아함제1009경)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되니,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부린다네.

그 마음속에 악을 생각하여 그대로 말하고 행하게 되면

괴로움의 과보가 저절로 따르니, 마치 바퀴자국이 바퀴를 따르는 것과

같다네.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되니,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부린다네.

그 마음속에 선을 생각하여 그대로 말하고 행하게 되면

즐거움의 과보가 저절로 따르니, 마치 그림자가 본체를 따르는 것과 같

다네. (법구경제1 雙要品 1-2,증일아함경T2, 827b)

 

그러므로 마음에 대해서 잘 사유하고 관찰해 보아야 한다. [마음은] 오랜

세월 동안 탐욕·진에·우치에 물들어 있다.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중생도

괴로운 것이며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도 청정한 것이다. 비유하면

화가나 화가의 제자가 흰 종이에 온갖 채색으로 생각대로 종종(種種)의

형상류를 그려내는 것과 같다. (잡아함제267경)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중생도 괴롭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도 청

정하다(心惱故衆生惱, 心淨故衆生淨)”는 말은유마경에서도 인용되는 유

명한 문구(“心垢故衆生垢, 心淨故衆生淨”: T14, 541b)이며, 화가의 비유는

엄경』「야마천궁품의 유심게--“마음은 화가처럼 온갖 5온을 그려내니, 일체

의 세간 중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마음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것이 없다.(心

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T9, 465c)--를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함에서 마음 자체가 산하대지를 조작한다거나 본래

의 완전한 존재(本覺眞性)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화가는, 색 등의 5온에 대해

여실히 알지 못하여 이에 악저(樂著)하고, 낙착하기 때문에 다시 미래의 온갖

색 등의 5온을 낳는, 그리하여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의 비

유일 뿐이다. 마음이 만법의 근본(心爲法本)이라 한 것 역시 신·구·의 3업

의 본말(本末)이나 경중(輕重)(성실론T32, 307b9)에 대해 논의하면서였다.

 

흔히 ‘마음’ 혹은 ‘의식’이라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일상표현일 뿐, 불교전통

에서 마음은 심(citta)·의(manas)·식(vijñāna)의 세 명칭으로 일컬어진다. 아

함에서는 세 명칭을 대개 동일한 의미로 함께 사용한다. 예컨대『잡아함』제

322경에서는 의내입처(意內入處)를 ‘색이 아닌 심·의·식으로서 부가견무

대(不可見無對)’로 규정하기도 하였고,1) 동 제35경에서 “비구들이여, 이러한

심과 이러한 의와 이러한 식으로 응당 이러한 [색 등의 무상·변역의 정주]를

사유하고, 이러한 [색 등의 상·불변역의 정주]를 사유하지 말라.--”2)고 설하

였으며, 제290-291경에서는 “어리석은 무문의 범부들은 사대의 색신에 대해

서는 싫어하여 이욕(離欲)·배사(背捨)할지라도 심이나 의 혹은 식에 대해서

는 그렇지 못하다”고 논설하고 있다.3)

1) “意内入處者, 若心意識非色, 不可見無對. 是名意内入處.”(T2, 91c8-10)
2) “比丘! 此心·此意·此識, 當思惟此. 莫思惟此. 斷此欲, 斷此色, 身作證具足住.” (T2, 8a8-10)
3) “世尊告諸比丘. 愚癡無聞凡夫於四大身, 厭患·離欲·背捨而非識. 所以者何? 見四大身, 有增·
   有減·有取·有捨, 而於心意識, 愚癡無聞凡夫不能生厭·離欲·解脫. 所以者何? 彼長夜
   於此保惜繫我.--” (T2, 81c5-9); “若心·若意·若識, 彼愚癡無聞凡夫, 不能於識生厭·離欲·
   習捨. 長夜保惜繫我.--” (동 82a4-6)

 

그런데 유부 비파사(vibhāṣā)에서의 마음은 사실상 어떠한 구체적 내용도 갖

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양태(혹은 의식작용)로 생각되는 지각(受)이나

판단(慧)과 같은 지식현상, 사랑과 믿음, 증오와 불신과 같은 심리현상은 마음

과는 별체인 그러한 제법(心所)이 마음과 관계할 때 드러나는 현상으로, 마음은

다만 경계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인식)하는 것일 뿐이다.4) 따라서 마음 자체

(心性, cittasvabhāva)의 도덕적 성질 또한 무기성으로, 이것의 선·불선성은 이

러한 심리현상에 의해 결정된다. 마음의 염오와 청정, 속박과 해탈 역시 그 밖

의 다른 제법(번뇌나 무루혜)과의 관계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불교(일반)에서

는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비달마불교의 요체는, 마

음이 어떤 상황과 단계(3界9地)에서 유루·무루의 어떤 심리/지식현상으로 생

기·상속하는가? 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구사론」권1(T29, 4a21-22), “各各了別彼彼境界. 總取境相故名識蘊.”; 그러나 원문에는 ‘경계대
   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總取境相: upalabdhi)’에서 ‘전체적으로’라는 말이 없다. AKBh.,
   p.11. 7. viṣayaṃ viṣayaṃ prati vijñaptir upalabdhir vijñānaskandha ity ucyate.(각각의 경계대상을
   了別하는 것, 즉 이해하는 것이 識蘊이다.). 카지야마 유이치, 권오민 역,「인도불교철학」, p.62
   참조.;「입아비달마론」권하(T28, 988a12-13), “識句義者, 謂總了別色等境事故名爲識.”

 

이에 따라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마음과 관련하여 명칭은 물론이고 그것의

생기에 대해서조차 매우 복잡한, 그리고 매우 다양한 이론을 제시한다. 일체

(sarvam)가 ‘알려진 것(jñeyatva: 所知性)’이라 한 이상, 혹은 존재(astitva: 有相)

란 ‘경계대상이 되어 지각을 낳는 것(爲境生覺)’이라 한 이상 마음은 그 밖의

다른 제법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유부

비파사의 심식론의 대강을 제시하고 있는구사론근품 제34송을 축으로

삼아 마음에 관한 논의를 진행해 보려고 한다.

 

"심(citta)·의(manas)·식(vijñāna)은 동일한 것으로, 심과 심소는 다같이

유소의·유소연·유행상·상응으로 불리며, 상응은 다섯 가지 방식으로 이

루어진다." 5)

5) cittaṃ mano 'tha vijñānam ekārthaṃ. cittacaitasāḥ /sāśrayālambanākārāḥ saṃprayuktāś
   capañcadhā. (AK. Ⅱ-v.34); “心意識體一 心心所有依 有緣有行相 相應義有五.”(玄奘역, T29,
   21c) : “心意識一義 心及餘心法 有依境界相 相應義有五.”(眞諦역, T29, 180c3; 7; 12) The
   names mind (citta), sprit (manas), and consciousness (vijñāna) designate the same thing. The
   mind and its mental states “have a support”, “have an object”, “have an aspect”, and are
   “associated” in five ways.(L. de La Vallée Poussin, Abhidharmakośabhāṣyam, vol.Ⅰ. English
   Translation by Leo M. Pruden,, p.205f. 

 

Ⅱ. 마음의 정의

 

전술한대로 불교전통에서 마음/의식은 심(citta)·의(manas)·식(vijñāna)이

라는 세 명칭으로 일컬어진다.대비바사론에서는 이 세 가지를 ① 말/소리

(聲, śabda)만 다를 뿐 그 자체 의미상으로는 차별도 없다, ② 명칭(名, nāma)

상의 차별, ③ 과거(意)·미래(心)·현재(識)라는 삼세의 차별, ④ 계(心)·처

(意)·온(識) 등 시설(施設, 쓰임새)에 따른 차별, ⑤ 종족(gotra)·생문

(āya-dvāra)·적취(rāśi)라는 소속된 3과의 명의에 따른 차별, ⑥ “심은 능히 원

행하고 독행한다”, “제법에는 의가 선행한다”, “모태에 식이 들 때--”라는 등의

경설에 따른 원행(=심업)·전행(=의업)·속생(=식업)이라는 업(작용)의 차별,

⑦ 또 다른 경설에 따른 채화(=심업)·귀취(5근 각각의 소행과 경계의 귀취=

의업)·료별(=식업)이라는 업의 차별, ⓼ 자장·사량·분별이라는 업의 차별

등으로 설명한다.6)

6)「대비바사론」권72(T27, 371a19-b29). 참고로 脇尊者(Pārśva)는 ⓼의 해석을 확대하여 “滋長과
   分割은 心業이고, 思量과 思惟는 意業이며, 分別과 解了는 識業”이라 규정한 후 ‘자장’은 유루
   심(心), ‘분할’은 무루심, ‘사량’은 유루의(意), ‘사유’는 무루의, ‘분별’은 유루식(識), ‘해료’는 무
   루식의 업(작용)이라고 설명하였다.

 

성실론에서 심·의·식은 명칭 상으로만 다를 뿐 동일한 실체로서 능연(能

緣)이 되는, 다시 말해 경계대상(所緣)을 갖는 법, 혹은 경계대상을 了別하는 인

식의 주체를 심이라 하였다.7) 법구의잡아비담심론에 이르면바사론상에

언급된 명칭·작용(⑥)·삼세·시설 상의 차별과 함께 의미(義) 상의 차별이 언

급되는데,8) 이는 마침내구사론에서 어의에 따른 차별로 논설된다.

7) “心意識體一而異名. 若法能緣, 是名爲心.”(T32, 274c19); “正以了爲心.”(동 279b21)
8) “[六入中]意入者, 是心意識, 名義業世施設, 彼名等所作差別, 應當知. 名者, 名爲心; 名爲意;
   名爲識. 義者, 集起是心義; 思量是意義; 別知是識義. 業者, 遠知是心; 前知是意; 續生是識.
   世者, 過去世是意; 當來世是心; 現在世是識. 施設者, 界施設心; 入施設意; 陰施設識.” (T28,
   872b10-15)

 

"쌓기(cinoti, 集起) 때문에 心(citta)이며, 사유하기(manute, 思量) 때문에

意(manas)이며, 식별(인식)하기(vijānāti, 了別) 때문에 識(vijñāna)이다." 9)

9) AKBh., p.62. 21, cinotīti cittam. manuta iti manaḥ. vijanātīti vijñānam.; “集起故名心. 思量故名
   意. 了別故名識.”(?구사론? T29, 21c20f; ?순정리론? T29, 394c17); “心以增長爲義. 能解故名
   意. 能別故名識.”(?구사석론?T29, 180c4f). 

 

심(citta)·의(manas)·식(vijñāna)은 각기 ci(‘쌓다’ ‘모으다’)와 man(생각하

다)과 vi-jñā(分·離-알다)에서 유래한 말로,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 心 등을

해설한 세 말, 집기(集起)·사량(思量)·료별(了別, 혹은 別知)은 이에 따른

것이다. citta은 cit(‘알다’, ‘이해하다’)라는 어원도 가능하지만(주7의성실론

정의는 이에 따른 것), 유부에서는 ‘쌓는 것’ 즉 선·불선을(=稱友), 혹은 선·

불선 등의 제심소(諸心所)와 사업(事業, *kriya)을 쌓는 것(=普光)으로 이해하

였다. 요컨대 유부 아비달마에서의 마음이란 ‘오늘 날씨가 좋다’(요별=識),

‘이 좋은 날 무엇을 하면 좋을까’(사량=意), ‘[수업을 그만두고] 소풍을 가야겠

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풍을 나서게 하는 존재(집기=心)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구사론에서는 이와는 다른 어떤 이(apare)의 정의도 인용되는데,

프라단의 범본과 현장역 사이에 차이가 있다.

 

"淨·不淨界(정․부정계)가 쌓인 것(cita)이기 때문에 心(citta)이며, 이것

(心)이 [다른 마음에] 所依止(āśrayabhūtaṃ)가 될 때가 意(manas)이며, 能依

止(āśritabhūtaṃ)가 될 때가 識(vijñāna)이다." 10)

10) citaṃ śubhāśubhair dhātubhir iti cittam / tad evāśrayabhūtaṃ manaḥ / āśritabhūtaṃ vijñānam ity
    apare /(AKBh., p.61.23-62.1). 진제 역: “善惡諸界所增故名心. 或能增長彼故名心.”(T29,
    180c4-6)

 

"淨·不淨界(정․부정계)의 種種의 차별(citra)이 있기 때문에 心(citta)이라

말한 것으로, 이것(心)이 다른 마음에 소의지(所依止)가 되기 때문에 意라고

말한 것이며, 능의지(能依止)가 되기 때문에 식(識)이라 말한 것이다." 11)

11)「구사론」권4(T29, 21c21-23), “復有釋言: 淨不淨界種種差別故名爲心. 卽此爲他作所依止故
    名爲意, 作能依止故名爲識.”

 

그러나구사론의 광박(廣博)한 비판 해설서인 중현(衆賢)의순정리론

에서는 이를 “혹은 종종(種種, citra)의 뜻이 있기 때문에 심(心, citta)이라 말한

것으로--”12)라고 하여 유부의 별설로 전하며, 보광 또한 이 같은 사실에 근거

하여 현장 역(주11)을 유부의 두 번째 해석으로 평석하였다.(T41, 83b10ff) 즉 ‘다

른 마음의 소의지가 된다’고 함은 전 찰나의 마음이 현행의 마음에 근거가 된다

는 말로서, 이러한 전 찰나의 마음(안식 내지 의식)을 ‘의(意)’라 하고, ‘능의지가

된다’고 함은 현행의 마음이 전 찰나의 마음인 의(意)에 의지한다는 말로서, 이

러한 현재찰나의 마음을 ‘識’이라 한다는 것은 유부의 정설이기 때문에13) 마음

을 ‘종종(種種, citra)’의 뜻을 갖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14)

12)「순정리론」권11(T29, 394c18-19), “或種種義故名爲心. 卽此爲他作所依止故名爲意. 作能依
    止故名爲識.” 범본의 校訂者 각주에 의하면 원래의 寫本에도 citra(種種)로 되어 있었던 것을
    眞諦 역(所增長)과 티베트 역(bsaga pa, citam)에 근거하여 citam으로 정정하였다고 한다. 이
    에 櫻部建은 범본의 cita를 직전(유부)의 해석 cinotīti cittam(集起故名心)과의 중복을 피하여
    현장역어인 citra를 취하였다.(「俱舍論の硏究」, p.301 주1) 그러나 兵藤一夫는 티베트 역과
    眞諦 역, 稱友釋으로 볼 때, 또한 유가행파 전통에서는 마음을 √ci의 과거수동분사로 해석
    하기 때문에, 安慧와 滿增의 釋에서도 모두 bsaga Pa(citam)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현장 역의
    citra는 사본의 書寫人이나 현장 자신의 오독의 가능성을 고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순정
    리론」(T29, 394c)과「현종론」(동, 803a)에서 ‘種種’으로 번역하고 있고,「대비바사론」에서도
    citra 즉 彩畵(種種雜色)로 해석하는 異說이 있으며(주5의 ⓻), 팔리 아비달마(「앗타 사라니」,
    p.63: 본고 주14)에서도 그러하기 때문에 현장도 이에 따랐든지, 혹은 직전의 유부해석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citram이라 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무튼 兵藤一夫는 cinoti와 cita는
    다같이 √ci에서 파생된 말이지만, 전자는 마음을 행위의 주체자 능동자로 본 반면, 후자는
    마음을 행위[에 기인한 잠세력, 종자]의 축적자로 본 것으로, 후자의 사유방식은 칭우가 이
    논설의 說者로 해석한 유가행파와 경량부에 타당하며, 이 같은 관점에서 다른 어떤 이의 마
    음의 해석은 citram보다 citam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고 하였다. ( 心(citta)の語義解釋 ,
    pp.24-27)
13)「구사론」권1(4b4-6), “卽六識身無間滅已, 能生後識故名意界. 謂如此子卽名餘父. 又如此果
    卽名餘種.”
14) 마음을 了別(vijānāti), 集起(cinoti), 혹은 種種(citra)의 뜻으로 해석하는 유부의 논의는 팔리
    아비담마의「法聚論」주석인「앗타사리니」에서의 정의와도 상통한다.: “心(citta)이란 소연
    (ārammaṇa)을 사고하기(cinteti) 때문에 심(citta)이니, 인식한다(vijānāti)는 의미이다. 혹은 心
    이라고 하는 이 말은 모든 心에 공통되는데, 이 경우 世間心·善心·不善心·大所作心은 일
    련의 인식과정(javanavīthi: 速行路)에 의해 자신의 상속(santāna)을 축적하기(cinoti) 때문에
    心이다. 異熟이 업과 번뇌에 의해 축적되기(cita) 때문에 心이다. 또한 모든 [心]은 상응/수순
    하는 대로 種種의 차별(cittatā: skt. citratā)이 있기 때문에 心이며, 種種의 원인의 차별
    (cittakaraṇatā)이 있기 때문에 心이니, 이와 같은 [‘種種(citta)’의] 뜻도 여기서의 의미임을 알아
    야한다.: cittan ti ārammaṇaṃ cintetī ti cittaṃ; vijānātī ti attho. yasmā vā cittan ti
    sabbacittasādhāraṇo esa saddo tasmā yad ettha lokiyakusalākusalamahākiriyacittaṃ taṃ
    javanavīthivasena attano santānaṃ cinotī ti cittaṃ. vipākaṃ kammakilesehi cittan(citta→cita:
    B.O.S版) ti cittaṃ. api ca sabbam pi yathānurūpato cittatāya cittaṃ cittakaraṇatāya cittan ti evam
    p’ ettha attho veditabbo.”(Atthasālinī, P.T.S. ed. p.63) 兵藤一夫, 앞의 논문, p.24.; 각묵,「아비
    담마 길라잡이(상)」, p.98-99 참조.

 

그러나 “정·부정계가 쌓인 것이기 때문에 (혹은 淨·不淨界의 種種의 차

별이 있기 때문에) 심(心)이다”고 할 경우 문제가 달라진다. ‘계(界, dhātu)’는

원인이나 종자의 뜻으로, 칭우(稱友)는 이에 따라 이 정의를 ‘心(citta)=훈습

(熏習)의 안주처(bhāvanāsaṃniveśa)’로 해석한 경량부나 유가행파의 견해로

평석하였다. (AKVy., p.141. 18f) 중현에 의하면 상좌 슈리라타(경량부 조사)

역시 자신의 종자(bīja) 개념인 구수계(pūrvānudhātu)를 ‘종종법(업과 번뇌)이

훈습하여 이루어진 계(종자)’로 해석하고(T29, 440b15), 이는 일심 중에 훈습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심(一心)은 종종계(種種界)를 갖추고 있다. 일심 중에 다수의 계가 훈습

되어 있다.-- 마음 자체는 단일할지라도 그 안에는 다수의 계가 존재한다." 15)

15)「순정리론」권18(T29, 442b1f; 4), “又彼上座如何可執言: 一心具有種種界. 熏習一心多界? --
    若言, ‘有心其體雖一, 而於其內界有衆多.’--” 이에 대해서는 권오민,「상좌 슈리라타와 一 
    心」;「상좌 슈리라타의 일심과 알라야식」참조.

 

경량부(상좌)의 이 같은 심(心)의 정의와 논의는 심을 제법 종자의 집적처

(=제8 알라야식)로 간주하고 “알라야식 중에 종종계가 존재한다.--알라야식

중에 다수의 계가 존재한다”16)고 논설한 유가행파와 궤를 같이한다. 상좌 또

한 심을 비록 유가행파와 같은 별체(즉 알라야식)는 아닐지라도 제식(諸識)

의 본질(體)로 간주하였다.(주21)

16)「유가사지론」권51(T31, 581b19-21), “薄伽梵說, ‘有眼界色界眼識界 乃至 意界法界意識界’, 由
    於阿賴耶識中有種種界故. 又如經說惡叉聚喩, 由於阿賴耶識中有多界故.” 이처럼「유가론」
    에서는 이 두 문구를 세존께서 眼界 내지 意識界의 種種界(18界)와 惡叉聚(*akṣarāśi: 구역은
    眼藥丸)의 비유를 설하게 된 이유로 제시하였다.(「성유식론」에서도 종자본유설의 논거로 惡
    叉聚의 비유를 설한 경을 인용한다. “如契經說, ‘一切有情, 無始時來, 有種種界. 如惡叉聚法
    爾而有. 界卽種子差別名故.”: T31, 8a22-24) 이 두 법문은 현존『중아함』제181 多界經 (혹
    은『잡아함』제451경 界經 )과『잡아함』제444경( 眼藥丸經 )에 상응한다. 유가행파의 알라
    야식 종자설의 사상사적 자취를 이러한 아함의 諸經에서 찾을 수 있다(山部能宣, 初期瑜伽
    行派に於ける界の思想について: Akśarāśi-sūtraをめぐって ,「待兼山論叢」, 哲學編 21,
    1987, pp.32-33)고 한다면, 상좌의 一心 종자설 또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법문에 대해
    서는 袴谷憲昭,「唯識思想論考」, 2001, 제2부 제1장 三乘說の一典據: Akśarāśi-sūtraと
    Bahudhātuka-sūtra 참조.

 

Ⅲ. 마음의 생기

 

1. 유부의 심·심소 상응구기(相應俱起)설

제법종연기(諸法從緣起). 불교에서는 어떠한 존재(法)도 그 자체 단독으로

생겨날 수 없고 반드시 그 밖의 다른 다수의 법(衆緣)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

난다. 그렇다면 마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안(眼)과 색(色)을 연(緣)하여 안식(眼識)이 생겨나고, 삼사화합(三事和

合)이 촉(觸)으로 수(受)·상(想)·사(思)와 구생(俱生)한다.17)---이·비·

설·신(耳·鼻·舌·身) 내지 의(意와 법(法)을 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겨나

고---."

17) “緣眼色生眼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cakṣuḥ pratītya rūpāṇi cotpadayate
    cakṣurvijñānam. trayāṇāṃ saṃnipātaḥ sparśaḥ sahajātā vedanā saṃjñā cetanā. 이 경설의 현존의
    경은『잡아함』제273경(일명『合手聲譬經』혹은『撫掌喩經』T2, 72c9f)과 제306경(일명『人
    經』T2, 87c26f)으로, 赤沼智善의「互照錄」에 의하면 니카야에는 전하지 않는다. 이 경설은
    유부의 相應俱起說의 기본논거일 뿐만 아니라(「대비바사론」T27, 79b20f;「성실론」T32, ; 
    275a23ff;「구사론」T29, 53b14f) 상좌 슈리라타의 受·想·思 3심소 실유설의 논거로 제시되
    는데(주22), 상좌는 제273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중현 역시 이 경을 유부에서만 전
    승한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권오민,「상좌 슈리라타와 경량부」, pp.589-591 참조) 불교논
    서 상에서 언급되는 이 경설은 제306경일 것이다. 이 경설은「구사론」에 두 번 인용되며(T29,
    53b14f; 154a25ff; AKBh., p.146. 11f; p.465. 11f), 멸정무심설의 논거로 간접인용되기도 한다.
    (동 26a2f; p.72. 27f) 참고로 유가행파 또한 5遍行心所(作意·觸·受·想·思) 중 작의를 제
    외한 네 심소의 상응구기의 경증으로 인용하며(T31, 28a3-5), ‘觸俱生受想思等’의 경문은「유
    가론」에서 심소를 부정하고 마음의 실유만을 주장하는 이(窺基에 의하면 經部師: T43,
    427c27-28)의 비판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T30, 609a22-23) 

 

이에 따르는 한 안식(眼識)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안(所依)과 색(所緣), 그

리고 [眼]觸과 수·상·사(受·想·思) [등]과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다 안식의 생연(生緣으로, 4연(緣)설에 따라 분별하면 안 등의 5근은 증상연

(增上緣)이고, 의근은 등무간연(等無間緣)이고, 색(色 등의 6경은 소연연(所

緣緣)이고, 촉(觸) 등은 인과(因緣, 상응인)이다.

 

앞서도 말하였지만,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마음(心·意·識)과 지식현상

혹은 심리현상으로서의 의식작용(心所)을 別體로 간주하였다. 5온은 개별적

인 실체로서, 식(識)은 색(色)은 물론이고 受·想·行(=思)과 당연히 구별된

다. 그리고 이 모두는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 예컨대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을

경우, 이 때 ‘분노하는 마음’은 어떤 대상(境)에 대한 지각(受)·표상(想)·확

인(勝解)·판단(慧), 나아가 탐욕(貪)·증오(瞋)·무지(癡) 등과 더불어 분노

(忿)라는 의식작용이 각기 별도의 실체로서 마음과 동시에 함께 생겨난 현상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작용을 心所(caitta, 혹은 caitasika, p. cetasika)라고 한다. 그렇

지만 이는 다만 말 그대로 ‘마음에 소유된’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마음과 동등

(samatā: 平等)한 조건으로 절대적으로 관계하는데, 이러한 양자의 관계를 ‘상

응(相應, saṃprayukta)’이라 한다. 심·심소의 상응구기설(相應俱起說)은 유

부 心識론의 기본이 되는 핵심이론이다. 유부에서는 아함에 산설된 제 심소

법을 상응의 관계에 따라 여섯 범주로 정리하였다.

 

① 대지법(大地法, 선·불선 등 일체의 마음과 상응하는 10가지 심소):

   受·想·思·觸·欲·慧·念·作意·勝解·三摩地.

② 대선지법(大善地法, 선심과 상응하는 10가지 심소): 信·不放逸·輕安·

   捨·慚·愧·無貪·無瞋·不害·精進.

③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염오심과 상응하는 6가지 심소): 癡·放逸·

   懈怠·不信·惛沈·掉擧.

④ 대부선지법(大不善地法, 불선심과 상응하는 두 가지 심소): 無慚·無愧.

⑤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癡와 상응하여 일어나는 10가지 심소): 忿·

   覆·慳·嫉·惱·害·恨·諂·誑·憍.

⑥ 불정지법(不定地法, 어떠한 마음과도 상응할 수 있는 8가지 심소):

   尋·伺·睡眠·惡作·貪·瞋·慢·疑.

 

이에 따르는 한 어떤 마음의 도덕적 성질은 전적으로 상응하는 심소에 의

해 결정된다. 선의 심소와 상응하면 선심(善心)이고 불선의 심소와 상응하

면 불선심(不善心)이다. 유루심과 무루심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심

소 또한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경향성(?)이 동일한 이러한 여섯

갈래의 심소끼리 함께 일어난다. 따라서 마음(=識)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일

찰나에 반드시 10가지 대지법과 상응해야 하며, 선한 마음이 생겨나기 위해

서는 10가지 대지법과 10가지 대선지법, 그리고 뭔가를 추구하려는 의식작용

인 부정지법의 심·사(尋·伺) 등 도합 22가지 심소와 상응해야 한다. 나아가

여기에 그것들 각각을 생성시키는 힘인 생상(生相)과 생생(生生)의 상(相)인

수상(隨相), 그리고 주체로서의 마음 자체를 고려한다면 그 수는 훨씬 증가하

여 68가지가 되며, 찰나 찰나에 걸친 상속 변이를 고려하게 될 경우 심소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18)

18) 유부 비파사사(毘婆沙師)는 이처럼 지극히 난해한 심·심소의 관계에 대해 이 같이 탄식하
    고 있다.: “온갖 心·心所의 각기 다른 상은 너무나 미세하여 그 하나하나의 상속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거늘 하물며 일찰나 구유(俱有)하는 그것에 있어서랴!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有色)
    약을 감관(혀)으로 파악하여 맛의 차별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어떤 구체적 형태도
    갖지 않은 추상적인 존재(無色法)를 오로지 관념(覺慧)만으로 파악함에 있어서랴!” (「구사론」
    T29, 19a22-25; 「입아비달마론」 T28, 984b21-23)

 

2. 경량부의 심·심소 차제계기(次第繼起)설

그러나 비유자(譬喩者, 유부 내부에서는 覺天)나 하리발마(성실론저자)

는 삼사화합의 촉(觸)은 물론이고,19) 수(受)·상(想)·행(行=思) 등의 심소도

별도의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마음의 시간적인 변화 차별상

에 지나지 않는다.20) “제식(諸識)의 본질은 바로 심(心)이다. 그리고 受 등의

제법은 바로 이러한 심(心) 자체의 종류, 혹은 양태(bhāva: 類)로서 심상속(心

相續) 중에 이러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소’라고 이름하였다.”21) 이같이

심소의 개별적 실체성을 부정할 경우 심·심소의 상응구기(相應俱起) 자체

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심·심소의 차제계기(次第繼起)설을 주장하였다.

19)「대비바사론」권149(T27, 760a28-b2), “謂譬喩者說: 觸非實有. 所以者何? 契經說故. 如契經
    說, ‘眼及色爲緣, 生眼識. 三和合觸’等. 離眼色眼識, 外實觸體不可得.” 제 심소 중 가장 불분
    명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觸(sparśa)이다.「구사론」이나「입아비달마론」에서는 “觸이란
    根·境·識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과 접촉하게 하는 것, 혹은
    그렇게 함으로써 능히 心所를 養活(양생 활동)하게 것”(T29, 19a19; T28, 982a9-11)으로 규정
    하지만,「성유식론」에서는 “觸이란 三事의 和合으로 變異를 分別하는 것(觸에도 三事가 심
    소를 낳는 功能인 變異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것의 자성은 심·심소로 하여금 경계대상
    과 접촉하게 하는 것이고, 작용은 受·想·思 등의 所依가 되는 것”이라 해설한다.(T31,
    11b19-20) 이 같은 구체적 相用으로 인해 따라「구사론」과「순정리론」에서는 유부 毘婆沙
    師와 觸假有論者(上座) 사이에 대대적인 논쟁이 전개되며,「성유식론」에서도 촉이 다만 [觸
    가유론자가 주장하듯] ‘三事의 화합’이 아님을 강조한다. (”然觸自性是實非假. -- 如受等性,
    非卽三和.“ T31, 11c4-5)
20)「성실론」권5(T32, 274c21ff), “受想行等皆心差別名. --(중략)-- 如是心一, 但隨時故, 得差別
    名.”;「순정리론」권11(T29, 395a1-4), “有譬喩者說. 唯有心, 無別心所.--”
21)「순정리론」권11(T29, 395c3-5), “若謂, ‘諸識體卽是心, 受等諸法, 是心體類. 心相續中, 有此法
    故, 名心所’者,--

 

한편 상좌 슈리라타는잡아함제306경(주17)을 경증으로 삼아 10대지법

중 수(受)·상(想)·사(思)의 세 심소만을 인정하고, 촉(觸)과 삼마지(三摩地)

는 심(心)의 분위차별(分位差別)로, 그 밖의 혜(慧)나 작의(作意) 등의 제 심

소는 모두 思의 차별로 이해하였다.

 

"상좌는 말하였다.: [유부 毘婆沙師가] 분별한 바와 같은 열 가지 대지법

(大地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대지법에는 단지 세 종류만이 존재

할 뿐이니, 경에서 “[삼화합의 촉은] 수·상·사와 함께 일어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22)

22)「순정리론」권10(T29, 384b12f), “彼上座言: 無如所計十大地法. 此但三種, 經說‘俱起受想思’
     故.”

 

그렇더라도 그 역시 심·심소의 차제계기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좌

설은구사론에서 다른 어떤 이(apare)의 설로 인용된다.

 

다른 어떤 이는 설하였다.: 촉(觸) 이후에 비로소 애(受)가 생겨난다. 즉

근(根)과 경(境)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식(識)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화합(和合)을 이름하여 촉(觸)이라 하며, 제3찰나(tṛtīyakṣaṇa)에

촉(觸)을 연(緣)하여 애(受)가 생겨난다.23)

23) AKBh, p.145. 17-19, sparśād uttarakālaṃ vedanety apare. indriyārtho hi pūrvānto vijñānam. so
    'sau trayāṇāṃ saṃnipātaḥ sparśaḥ. sparśapratyayāt paścād vedanā tṛtīyakṣaṇa iti.; “有說: 觸後方
    有受生. 根境爲先次有識起. 此三合故卽名爲觸. 第三刹那緣觸生受.”(?구사론?, T29, 53a19-
    21), 여기서 ‘다른 어떤 이(apare)’를 稱友(Yaśomitra)는 大德 슈리라타(Bhadanta Śrīlāta)로, 安
    慧(Sthiramati)와 滿增(Pūrṇavardhana)은 ‘軌範師(Ācārya) 슈리라타’로 평석하였고, 普光은 ‘經
    部 중의 上座’로, 法寶는 ‘經部宗의 上座’로 해설하였다.(권오민,「상좌 슈리라타와 경량부」,
    pp.191-192 참조).

 

세친은 이에 대해 “심(識)과 촉·수 등의 계기(繼起)를 주장할 경우 그것들

은 각기 대상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후술)뿐만 아니라 “일체의 마음

은 대지법과 구기한다”는 아비달마의 규정을 파괴하고 “근·경·식 삼사화합

이 촉으로 수·상·사와 구생한다”는 경설(주17)에도 위배됨을 지적하고서,

이에 대한 다른 어떤 이의 항변을 이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經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 이들(sūtrapramāṇakā)’로 ‘[아비달마]론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 이

들(śāstrapramāṇakāḥ)’이 아닌데, 그것을 파괴한들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세

존께서도 ‘경을 의지처로 삼는 이(sūtrāntapratisaraṇair)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

였다.”(AKBh, p.146. 3f; T29, 53b2f) 이는 고래로 경량부(Sautrātika)의 정체성

을 밝힌 정형구로 취급되었다.

 

유부와 경량부에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심·심소의 상응구기와 차제계기

를 주장하게 되었던가? 유부의 경우 일차적으로 소연의 문제에 기인하지만

(주27), 근본적으로는 법체 실유/가유론를 비롯한 그들 교학전체와 결부된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부 아비달마 논서 상에서 심법(심·심소)의 조

건으로 제시된,24) 그리하여구사론상에서 심법의 이명의 조건으로 간주

된 소의(āśraya)·소연(ālambana)·행상(ākāra)·상응(saṃprayuktā)(주5)에 대

한 유부와 경량부의 논의를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재고해 본다.

24) 예컨대「대비바사론」에서는 법으로서 상응하고 소의를 갖고, 행상을 갖고, 경각을 갖고, 소
    연을 갖는 것을 등무간연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색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되
    지 않음을 논의한다.(T27, 52a8-10).

 

Ⅳ. 심·심소의 생기조건

 

1. 소의(所依)와 소연(所緣)

 

1) 근(根)·경(境)·식(識)과 제 심소의 시간적 관계

“심과 심소는 다같이 [6]근에 의존하기(indriyāśritatva) 때문에 유소의

(sāśrayā)로 불리며, 경계대상을 파악하기(viṣayagrahaṇa) 때문에 유소연

(sālambanā)으로 불린다.”25) 예컨대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겨나고, 삼사

화합이 촉으로 수·상·사와 구생한다”는 경설(주17)에서 안[根]과 色[境]은

안식(心)을 비롯한 촉·수 등 제심소의 소의(āśraya)와 所緣(ālambana)이다.

그러기 위해 이들 제법, 즉 능의와 소의, 능연과 소연은 동시에 함께 생겨나

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동시(同時)인과는 유부(또한 유가행파)교학의 기

초적 전제이다.

25)「구사론」권4(T29, 21c26-27), “謂心心所, 皆名有所依, 託所依根故. 或名有所緣, 取所緣境
    故.”; AKBh., p.62. 5f. ta eva hi cittacaittāḥ sāśrayā ucyante indriyāśritatvāt / sālambanā
    viṣayagrahaṇāt.

 

안 등의 5根은 반드시 현재의 대상만을 취하며, 이에 근거한 안 등의 5식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반드시 동시여야 한다.26) 심소(心所) 또한 유부의 경

우 심과 별체이기 때문에 각기 별도의 생(生)·주(住)·이(異)·멸(滅)의 4상과

화합하여 생겨날지라도(이 경우 심·심소는 각기 다른 화합이다) 동일한 근에

의지하고 동일한 대상(境)을 파악하기 때문에 반드시 함께 생겨나야 한다.27)

근·경·식과 심소가 이시계기(異時繼起)한다고 할 경우 소연이 된 경계대상은

찰나멸하기 때문에 심과 제심소는 소연을 달리한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동

일대상에 대한 단일한 인식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6) 眼 등의 5根과 5境·5識은 그러할지라도 意根(과거)·法境(三世 혹은 離世)·意識(현재)의
    경우 동시가 아니다. 이에 대해 유부의 毘婆沙師는 三事의 ‘和合’을 동시에 일어나 서로 분
    리할 수 없는 것(俱起不相離)과, 서로 모순되지 않으면서 동일한 사태(즉 觸이라는 同一
    果)를 성취하는 것(不相違同辦一事)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하여 5識 상응의 觸은 두 
    가지 뜻에 근거하여, 意識 상응의 觸은 후자의 뜻에 근거하여 ‘화합’이라 말한 것이라고 해
    명한다.(T27, 984a1-6; T29, 52b11f; T29, 505a14-16) 즉 意·法·意識의 경우 서로 모
    순되지 않으면서 동일한 사태(즉 觸이라는 同一果)를 성취한다는 점에서 ‘和合’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7)「대비바사론」권16(T27, 79c12-18), “阿毘達磨諸論師言: 心心所法有別因故, 可說衆緣和合有
    異.; 有別因故, 可說衆緣和合無異. 謂心心所各各別有生住異滅和合而生. 是故可說和合有
    異.; 同依一根, 同緣一境, 而得生故, 可說一切和合無異. 是故一切心心所法, 隨其所應俱時
    而起.” 동론 권52(T27, 270a15-20)에도 동일한 내용의 아비달마논사의 설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각기 비유자의 相應因 비판과, 상응구기설 비판과 관련된 大德(Bhadanta)의 코멘트에
    대한 아비달마 논사의 비평이다.

 

이에 반해 상좌 슈리라타(경량부)는 앞서 언급한대로 근·경(제1찰나)-식

(제2찰나)-수(제3찰나)는 시간을 달리하는 인과적 관계로서 일어난다는 차제

계기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부(혹은 유가행파)의 관점에서 볼 때 이시인

과는 과미무체(過未無體)를 주장하는 경량부로서는 치명적 난점이다. 근과

경이 존재할 때 식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식이 생겨났을 때 근과 경은 이

미 소멸하였을 뿐더러 그들에 의하는 한 미생·이멸의 미래·과거법은 실유

가 아닌데, 어떻게 삼사 사이에 화합(혹은 인과관계)이 가능하겠는가? 중현

은 이같이 힐문한다.

 

"만약 색이 존재할 때 안식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면, 안식이 이미 존재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무엇이 능연(能緣)이 될 것이며, 안식이 존재할 때

색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색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무

엇이 소연(所緣)이 될 것인가?" 28)

28)「순정리론」권19(T29, 447b20-22), “譬喩者宗, 理必應爾,-- 若色有時, 眼識未有, 識旣未有, 誰
    復能緣? 眼識有時, 色已非有, 色旣非有, 誰作所緣?

 

"[안과 색이 존재할 때 안식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며] 안식이 생겨났을

때 안과 색이 이미 소멸하였다면 안식은 그 때 무엇과 화합할 것인가?" 29)

29)「순정리론」권15(T29, 421a11-12), “若眼識生, 眼色已滅, 眼識爾時, 與誰和合?”

 

"나아가 “이렇듯 5식의 대상이 전 찰나의 과거법이라면, 이를 어찌 직접지

각(現量覺, *pratyakṣa-buddhi)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30)

30)「순정리론」권8(T29, 374b12-c3). “有執: 五識境唯過去. 應告彼言. 若如是者, -- “若五識唯緣
    過去, 如何於彼有現量覺?” 이에 대한 비유자/상좌의 해명은 권오민,「상좌 슈리라타와 경량
    부」, pp.368-374 참조.

 

이에 대해 상좌는 根·境·識의 和合을 전 찰나의 根·境이 후 찰나의 識

에 대해 원인이 되고 후 찰나의 識이 전 찰나의 根·境에 대해 결과가 되는

인과적 관계(因果性, hetuphalabhūta)로 이해하였고, 심·심소의 구생 또한 무

간생의 의미로 이해하였다.31) 그럴 경우 그들은 앞서 유부가 제기한 심·심

소의 소연(인식대상)차별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는가?

31)「순정리론」권10(T29, 384c8), “[上座]旣許三法互爲因果名爲和合.”; 동(T29, 386b19f), “由彼義
    宗, 根境無間, 識方得起. 從識無間, 受乃得生.” 비유자도 하리발마도 역시 이같이 이해하였
    다. 스승과 제자가 앞뒤로 가더라도 ‘함께 간다(俱行)’고 하듯이 심·심소의 俱起 또한 이러
    한 의미라고 해석한다.(「순정리론」, T29, 403b2-4);「성실론」, T32, 277c13-19) 보다 자세한 내
    용은 권오민, 불교철학에 있어 학파적 복합성과 독단성(2): 陳那의「觀所緣緣論」에서의 외
    계대상 비판의 경우 , pp.55-59 참조.

 

2) 유색처(有色處, 5근·5경)의 가실(假實)문제

안 등 5식(識)의 소의·소연에 대해 논의하면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의 가실(假實)문제이다. 그것이 안식 등의 생연(生緣, 생기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체(dravya)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주지하

듯이 안 등의 5근과 색 등의 5경은 사대소저(四大所造, 촉처의 경우 4大와 4

大所造)로 극미의 집합체(聚集: 和集과 和合)이고, 집합체는 이를 구성하는

제 요소(事)와는 별도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통설이었다. 5온의 집

합체인 자아가 그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였다.

 

“극미로서 화집(和集)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모든 극미는 항상 화집

하여 안포(安布, 배열)될 때 비로소 5식을 낳는 소의와 소연이 된다.”32) 중현

의 말이다. 그러나 5식은 무분별(자성분별)이기 때문에 집합체(共相/보편상,

sāmānya- lakṣaṇa)를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자상(自相, sva-lakṣaṇa)만을 대상

으로 삼을 뿐이다. 이에 따라 유부에서는 색 등의 5경(境)(즉 所造色,

bhautika)을 4대종(mahābhūta)과는 다른 별도의 실체로 인정하였고, 안 등 5

근(根) 역시 자상(自相)을 갖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즉 비파사사는 자상을 인

식영역(處)으로서 자상(āyatana-svalakṣaṇa=總相)과 실체(事)로서의 자상

(dravya-svalakṣaṇa=別相)이라는 두 층위로 나누고, 동일한 인식영역인 경우

다수의 극미 집합(즉 處)과 함께 개별적 극미(事)의 동시 인식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事 즉 극미에 대한 인식은 불명료하다.) 33)

32)「순정리론」권4(T29, 350c24-25), “卽諸極微, 和集安布, 恒爲五識生起依緣. 無有極微不和集故.”
33)「대비바사론」권13(T27, 65a2-16).;「구사론」권1(T29, 3a9-11), “若爾, 五識總緣境故, 應五識身
    取共相境, 非自相境. 約處自相, 許五識身取自相境, 非事自相. 斯有何失.”.; AKBh., p.7.
    22-24 …āyatanasvalakṣaṇaṃ praty ete svalakṣaṇaviṣayā iṣyante na dravyasvalakṣaṇam ity
    adoṣaḥ.;「대비바사론」권127(T27, 665b1-7).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의 경우 5근과 5경은 극미和合의 假有이다.: “5식의

소의(즉 5근)와 소연(즉 5경)은 다 같이 실유가 아니니, 극미(paramāṇu) 하나

하나는 소의와 소연이 되지 않기 때문으로, 다수의 미(aṇu)가 화합하여 비로

소 소의와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34)

34)「순정리론」권4(T29, 350c5-7), “此中上座作如是言. 五識依緣俱非實有. 極微一一, 不成所依
    所緣事故, 衆微和合, 方成所依所緣事故.” 극미는 물질의 최소단위로 중앙의 한 극미가 사방
    상하의 6개의 극미와 최초 결합한 것이 微(혹은 微塵, aṇu)이다.

 

5식의 소의(5根)와 소연(5境)이 극미 和合의 가유라고 한다면, 그 작용 또

한 진실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다 ‘허위의 망실지법’이다.(T29, 350c7

-13) 중현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이같이 전하고 있다.

 

여기서 상좌는 “안(眼) 등에는 오로지 세속(*saṃvṛti)으로서의 화합의 작

용만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이같이 말하였다. “안 등의 5근은

오로지 세속유일 뿐이다.” 나아가 상좌는 이같이 말하였다. “5근에 의해 발

생한 식은 오로지 세속유를 반연할 뿐이니, 무분별이기 때문으로, 마치 맑

은 거울에 온갖 색의 영상(像)이 비친 것과 같다. 바로 이 같은 이치에 따라

[5]識은 의지할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불세존께서 ‘지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의식은 세속유와 승의유를

모두 반연하기 때문에 그 자체 의지할만한 것이기도 하고 의지할만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35)

35)「순정리론」권26(T29, 486c18-25), “此中上座, 欲令眼等唯有世俗和合用故, 作如是說: 眼等五
    根, 唯世俗有, 乃至廣說.--謂上座言, 五根所發識, 唯緣世俗有, 無分別故, 猶如明鏡照衆色像.
    卽由此理, 識不任依, 如佛世尊言, ‘依智不依識.’ 意識通緣世俗勝義. 故體兼有依及非依.”

 

상좌는 앞서 5식의 소연은 오로지 과거(전 찰나)법이라 하였고(‘五識唯緣

過去[法]’: 주30), 이제 다시 극미和合의 세속유(가유)라고 하였다. (‘五識唯緣

世俗有’: 주35) 감관지인 5식이 어떻게 과거법과 세속유(개념적 존재)를 인식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인가? 이는 법칭 지각론의 발단이 된 문제이다.

 

2. 소연(所緣)과 행상(行相)

유부와 경량부는 근본적으로 소연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였다. 유부의 경

우 앞서도 언급하였지만(주25) “심·심소에 의해 파악되는 그것(즉 境 viṣaya)

을 소연(ālambana)이라 한다”고 정의하였다.36)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

겨났다”고 할 때 색은 안식을 일으킨 생연이자 안식(과 안촉 등 제 심소)의 인

식대상(즉 소연)이다. 유부에서는 근·경·식이 동시이기 때문에 심·심소의

생연과 소연은 동일한 것이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현장(玄奘)은 앞의 소연의

정의를 “심·심소가 그것을 집지(執持)하여 일어날 때 심·심소에 대해 그것

을 소연이라 한다”고 번역하였을 것이다.37) (그리고 마음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인식대상이 되어 지각을 낳은 이상 소연은 마음과는 별도의 실체로

서 존재하는 것이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유소연식론이다.)

36) AKBh, p.19, 17. yac cittacaittair gṛhyate tad ālambanam. 眞諦 역 “心及心法所取之塵, 名緣緣
    礙”(T29, 167b1f)
37)「구사론」권2(T29, 7a26-28), “心心所法執彼(境)而起, 彼於心等名爲所緣.” 그러나 玄奘 역본
    의 다른 곳에서도 “능히 경계대상을 파악하는 심·심소법을 有所緣法”으로 규정하였다.(“六
    識意界及法界攝諸心所法, 名有所緣. 能取境故.”: 동, 8b13f)

 

그러나 근(根)·경(境)·식(識)의 이시(異時)인과를 주장하는 한 양자를 달

리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식의 생연이 된 색과 소연이 된 색은 찰나를

달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자(譬喩者) 전 찰나에 생연이 된 색을 소연연

(緣緣, ālambana-pratyaya)이라 하였고, 후 찰나에 인식대상이 된 색을 소연경

(所緣境, ālambana-viṣaya)이라 하였다.

 

비유자의 종의에서는 이치상 필시 마땅히 의가 법을 관찰하여 [의식이

생겨날] 때처럼 5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소연연은 소연경이 아니며, 소

연경은 소연연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어째서 그러하다는 것인가? 그들은

이같이 설하였다.: “색 등이 만약 능히 [所緣]연이 되어 안식 등을 낳았다면,

이와 같은 색 등은 반드시 [안식에] 앞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38)

38)「순정리론」권19(T29, 447b16-20), “譬喩者宗, 理必應爾, 如意觀法, 五識亦然. 謂所緣緣, 非所緣
    境. 若所緣境, 非所緣緣. 所以者何? 彼說: 色等, 若能爲緣, 生眼等識, 如是色等, 必前生故.”

 

유부처럼 근·경·식의 동시(同時)인과를 주장할 경우 외계대상이 바로 5

식의 생연(生緣)이자 소연(所緣)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현재의 실유여야

하지만, 이시(異時)인과를 주장하는 비유자/경량부의 경우 식의 생연(즉 所

緣緣)은 현재 실유일지라도 다음 찰나 발생한 그것의 소연(즉 所緣境)은 識

상에 나타난 외계대상의 형상(ākāra: 행상, 구역은 상 또는 취상)이다. 즉 식

을 발생시킨 것은 불가분리의 형태로 和合한 ‘다수의 극미’(실유)이지만, 식

에 나타난 형상은 [다수 극미의] 단일한 화합상(세속유)이다. 각각의 개별 극

미는 극히 미세하여 識을 발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며, 무분별(자성분별)의 5

식은 和合의 소의가 된 다수의 극미(즉 勝義有)를 분별(計度)할만한 힘이 없

기 때문이다.39) 앞서 상좌는 이 같은 사실의 예로서 거울을 들었었다.(주35)

본체(質)는 다수의 부분으로 구성되었을지라도 거울에 비친 영상(像)은 단일

한 화합상이다. 그리고 무분별의 5식은, 거울이 사물의 외양만을 비추듯이

자신에게 나타난 외계대상의 단일한 화합상(즉 세속유)을 나타난 대로 요별

할 뿐이다. 그래서 5식의 소연(경)은 ‘허위의 망실지법’이고, 5식은 의지할만

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39) 박창환은 5식의 ‘무분별(*nirvikalpa)’을 감각지각(5식)이 원래적으로 가지는 지각의 한계성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기능적 한계에 따라 감각의 문을 여는 순간 외부세계는 감
    각기능이 파악할 수 있는 형태 즉 세속에 통용되는 통합된 형상으로 변형되어 지각된다는
    것이다.( 法稱(Dharmakīrti)의 감각지각론(indriyapratyakṣa)론은 과연 경량부적인가? ,「인도
    철학」제27집, 2009, p.25.)

 

유부 역시 형상(行相)의 존재를 인정한다. “심·심소는 소연의 경계대상을

각자의 품류/방식(즉 각자에게 나타난 형상)에 따라(prakāraś) 분별/파악하기

(ākaraṇ) 때문에 유행상(有行相, sākārā)으로 불린다.”40) 비록 후대 불교논리

학서에서 유부의 인식론을 무형상지식론(無形象知識論, (nirākārajñānavāda)

으로 규정할지라도 이들 역시 경량부나 유가행파와 마찬가지로 형상(行相)

으로 인해 외계대상(소연)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 영상이 나타남으로 인해

거울은 ‘능히 비추는 것(能照)’이 되고 외계대상은 ‘비쳐진 것(所照)’이 되듯

이, 형상(行相) 역시 그러하여 이것이 식(識) 상에 나타남으로 인해 심·심소

는 능연이 되고 외계대상은 바야흐로 소연이 된다.41)

40) AKBh. p.62. 6. sākārās tasyaivālambanasya prakāraś ākaraṇāt. 이에 대한 이해는 실로 다양하
    다. 眞諦는 “[심·심소는] 이러한 소연의 경계대상을 품류·차별(prakāra)에 따라 능히 分別
    하기 때문에(ākaraṇāt) ‘유행상(有相)’이라 하였다.([心及心法] 或說有相, 是所緣境, 隨類差別,
    能分別故.)”로(T29, 108c10), 玄奘은 “[심·심소는] 소연에 대해 품류·차별로써 동등하게 行
    相(行解의 相貌)을 일으키기 때문에 ‘유행상’이라 하였다.([心及心法] 或名有行相. 卽於所緣,
    品類差別, 等起行相故.)”로 번역하였다.(T29, 21c28f) 이종철은 “[마음 및 뭇 심리현상은] 각각
    의 방식에 따라(prakāraś) 다름 아닌 그 동일한 인식대상을 파악하기(ākaraṇ) 때문에, ‘유행상
    (sākārāḥ)’이라고 불린다.”(「구사론 계품·근품·파아품」, p.221)로, 櫻部建은 “その所緣に,
    種類に應じて, [それぞれの] 仕方で 作用するから 行相をもつ [といわれ]”(「俱舍論の硏
    究」, p.300)로, 宮下晴輝는 “同一の ālambanaを それぞれの prakāraを もって現わし捉える
    から(ākaraṇāt), sākāraでぁる”로( 心心所相應義におけるākārāについて , p.152), 竹村牧男은
    “その所緣に對し, ぁるprakāraでもって, (所緣を)喚びよせる, 取りこむという“로( 說一切有
    部と無形象知識論 , p.562)로, 福田琢은 “同じその所緣ごとに捉えるから ‘行相をもつ’の
    でぁる”로 번역하였다..( 俱舍論における ‘行相’ , p.980) 참고로 行相은 行解相貌의 준말로,
    마음 상에 나타난 형상(表象: 相貌)은 인식대상을 파악(行解)하는 일차적 근거이다. 그래서
    行相이다.
41)「구사론기」권4(T41, 83c2-5), “然此行相無有別體. 不離心等. 卽心等攝. 非是所緣. 猶如明鏡
    對衆色相皆現鏡面. 此所現像, 而非所照. 然約像現說鏡能照. 此亦應然.” [心法을] 能緣이라
    하는 것은 인식작용(行解) 때문이 아니라 行相 때문이다. 즉 마음이 경계대상에 대면할 때
    영상이 현현하는데, 이에 근거하여 [마음 등을] 能緣이라 하고 경계대상을 所緣이라 한다.
    심·심소가 경계대상을 반연할 때 이는 등불이 빛을 내어 경계대상에 이르는 것과 같지 않으
    며, 젓가락에 힘을 주어 물건을 잡는 것과 같지 않다. [다만] 영상이 나타난데 근거하여 능
    연·소연이라 하는 것이다.(T41, 26c25-29)

 

이에 따라 유부 비파사사들은 무상·고 등의 4체 16행상에 대해 논의하면

서 행상(行相)의 자성을 간택(簡擇, pravicaya)의 혜(慧)로 분별하고서, [아비

달마에서] 일체의 심·심소를 ‘有行相’이라 한 것은 그것이 바로 혜와 상응하

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세친은 “행상의 본질이 혜라면, 혜심소는 또

다른 혜와 상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유행상(有行相)’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비판하고서 다음의 정의를 제시한다.

 

"이같이 생각하면 도리에 부합한다. 일체의 심·심소가 소연(ālambana)을

파악하는 품류·차별/방식·방법(prakāra, 類別)을 행싱(行相, ākāra)이라 한

다." 42)

42) AKBh., 401. evaṃ tu yuktaṃ syāt/ sarveṣāṃ cittacaittānām ālambanagrahaṇaprakāra ākāra iti.;
   「구사석론」권19(T29, 288c16-18), “若執如此則應道理. 謂一切心及心法, 於境界中取差別名
    行相.”;「구사론」권26(T29, 137c3-4), “由此應言. 諸心心所取境類別皆名行相.”; 櫻部建·小谷
    信千代·本庄良文,「俱舍論の原典解明, 智品·定品」, p.58.

 

보광과 법보는 이를 세친 자신의 해석이라 하였지만(T41, 394a26; 770b6),

중현은 “다른 宗에 근거한 논주의 말(依附他宗 作如是言)”로 전하였으며(T29,

741b4f), 칭우(稱友)는 경량부의 견해(Sautrāntika-mata)로(AKVy., p.629. 6), 안

혜와 만증 역시 경량부 견해로 평석하였다.43)

43) 福田琢, 俱舍論における‘行相’ , p.182.

 

“심·심소가 경계대상을 파악할 때 품류가 각기 차별되는 영상의 상이 존재하

기 때문에 이를 다 행상이라 이름하였다.” 보광의 해설이다.44) 그렇지만 행상의

이러한 정의는 유행상에 대한 유부의 정의(주40)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45)

그럴지라도 행상은, 유부의 경우 인식대상(所緣)이 아니라 인식주관(能緣)에 속

한 것이지만, 경량부의 경우 다름 아닌 인식대상(所緣境)이다.

44)「구사론기」권26(T41, 394a27-29), “諸心心所取境之時, 有影像相類各別故, 皆名行相. 或於境
    中實(→‘言’)類差別, 靑非黃等. 取境類別, 皆名行相. 可得言有.”
45) 이는 “그 밖의 심소법도 행상(즉 慧)과 평등하게 소연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는 俱時이지 前
    後가 아니”라는 중현의 논평(T29, 741a21-26)으로 볼 때 [‘심·심소=유행상’ 설과 ‘행상평등’설
    의 조화를 모색하기 위한 것(福田琢, 俱舍論における‘行相’ )이 아니라] 심·심소 相應俱起
    에 기초한 ‘행상의 자성=혜심소’를 비판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논설하였듯이 비유자(또는 상좌일파의 경량부)는 그들의 이시(異時)

인과설에 따라 소연을 식을 발생시킨 외계의 소연연(所緣緣)과 식에 나타난

형상으로서의 소연경(所緣境)으로 분별하였다. 진나(Dignāga)는 이를 생식과

대상이라 하여 소연의 두 조건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비유자/경량부에게

있어 “형상(ākāra: 行相)이란 소연을 파악하는 방식(ālambanagrahaṇaprakāra)’

으로, “심·심소 상에 서로 유사하게 나타난(相似轉: 주50) 형상으로써 외계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연경(인식대상)이라 하였지만, 이것이 심·심소와 별체는 아니

다. 누차 말한 대로 안식이 생겨났을 때 안식의 생연이 되었던 안과 색은 존

재하지 않는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色의 형상을 띤 안식뿐이기 때문에

소연경은 안식 상에 존재한다.(진제는 이러한 대상으로서의 소연을 ‘식진(識

塵)’이라 하였다) 이에 따르는 한, ‘등불이 자신을 비추듯’ 심·심소 역시 자신

을 소연경(인식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대 불교논리학서

에서는 이를 지식의 자기인식(svasaṃvedana: 自證, 自覺)이라 하였다.46)

46) 이는 물론 상좌 슈리라타에게서도 확인된다. 상좌는 계경에서 설한 ‘識=了別者(요별의 주
    체)’를 세속설로 평가한다.(T29, 484b19-22) 그에 의하면 識 자체는 了別작용을 갖지 않는다.
    다만 전 찰나의 외계대상(=所緣緣)과 유사한 형상(=所緣境)을 띠고 생겨날 때, 그림자가 처
    소를 달리하여 연속적(無間)으로 생겨날 때 ‘그림자가 움직인다’고 가설하듯이 識 역시 [찰나
    찰나] 대상을 달리하여 상속 생기할 때 “識이 대상을 요별한다”고 가설한다는 것이다.(T29,
    342a22-27; 484b17-19). 이러한 생각은「구사론」파아품에서도 확인된다.(T29, 157b20-24).

 

3. 상응(相應)

“심·심소는 [다섯 가지 점에서] 평등하게 결합(prayuktatva: 和合)하기 때문

에 相應(saṃprayukta)으로 불린다.”47) 앞서 논의하였듯이 심과 심소는 동일

(sama: 平等)한 소의(āśraya)와 소연(alāmbana)과 행상(ākāra)을 갖고서 동일

한 시간(時, kala)에 각기 하나의 실체(dravya: 事)가 함께 생겨나는데, 이러한

양자의 관계를 ‘상응’이라 하고, 상호원인을 相應因이라 한다.

47) AKBh. p.62. 6f. saṃprayuktāḥ samaṃ prayuktatvāt.; “[心心所]或名相應, 等和合故.”(T29, 21c29)

 

동시인과를 부정하는 한 상응인 역시 부정할 수 밖에 없다.대비바사론

의 편자는 아비달마본론(本論)(발지론)에서의 상응인의 논의는 비유자의

심·심소의 次第生起說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本論:] 무엇이 상응인인가?

문: 무엇 때문에 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인가?

답: 다른 이의 종의를 비판하고 정리(正理)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즉

어떤 이는 심·심소법은 전후로 생겨나는 것일 뿐 일시에 생겨나는 것이 아

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예컨대 비유자가 그러하다. 그들은 이같이 말하였

다: “심·심소법은 제 인연에 근거하여 전후로 생겨난다. 비유하자면 상인

들이 험하고 좁은 길을 지나갈 때 한 명씩 건너가고 두 명이나 [여럿이] 함

께 가는 일이 없듯이, 심·심소법도 역시 이와 같다. 즉 중연과 화합하여 하

나씩 생겨나니, 각기 근거하는 중연이 다르기 때문이다.”48)

48)「대비바사론」권16(T27, 79c6-12), “云何相應因? 乃至廣說. 問: 何故作此論? 答: 爲止他宗, 顯
    正理故. 謂或有執: 心․心所法, 前後而生, 非一時起, 如譬喩者. 彼作是說: 心․心所法, 依諸
    因緣, 前後而生. 譬如商侶涉嶮隘路, 一一而度, 無二並行, 心․心所法亦復如是, 衆緣和合一
    一而生, 所待衆緣各有異故.”

 

이미 말한 대로 심·심소의 차제생기를 주장하는 경량부는 전멸후생의 인

과적 관계(因果性)를 ‘화합(saṃnipāta)’의 뜻으로 해석하였고, 무간생을 ‘구기

(俱起, sahaja)’의 뜻으로 간주하였다.(주31) 그럴 경우 ?바사론?의 비유자 말

처럼 전후 순서대로 생겨나는 심·심소의 중연 즉 근·경 등의 소의·연도 각

기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럴 경우 어떻게 인식이 가능한가? 중현 또한

이같이 힐난하고 있다.: “두 찰나 전에 이미 소멸한 신근과 촉경이 어떻게 신

수의 생연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T29, 386b20-23)

 

이에 대해 상좌는 이같이 해명한다.

 

"앞서 근·경·식 세 가지가 인과적 관계(인과성)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에

바야흐로 수가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근과 경은 수가 일어

날 때에도 역시 [인과적 관계로서] 전전하며 능생의 공용을 갖는 것이다." 49)

49)「순정리론」권10(T29, 386b24f), “先有根境識三因果性故, 受方得起. 是故根境, 於受起時, 亦
    有展轉能生功用.”

 

혹은 중현은 ‘작의(作意) 등의 제행(諸行)은 사(思)의 차별’이라는 상좌 설

을 비판하면서 이같이 힐난하기도 하였다.

 

그대(上座)들이 “상과 식은 시·소의·행상·소연이 서로 유사하게 일어

나기(相似轉) 때문에 비록 두 법상의 차별을 나타낼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대들의 종(宗, 즉 上座宗)에서는 “이러한 법 자체의 차이는 인정한다”고 빈

번히 말하고 있듯이, 사(思)와 작의(作意) 등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해

야 한다.50)

50)「순정리론」권2(T29, 341c10-12), “又如汝等頻言: 想識時依行緣相似轉故, 雖不能示二相差別,
    而汝等宗許其體異. 思作意等, 應亦如是.”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에 따르는 한 수·상 등 제 심소의

소의와 소연은 대종소조의 근과 경이 아니라 일종의 종자의 형태(能生의 功

用)로 마음(識)을 통해 전전(展轉)상속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능생의 공

용을 지닌 마음은 전법이 후법의 생인(生因, 인연 즉 種子)이 된다. 외계대상

의 형상(行相) 또한 전후 서로 유사한 모습으로, 식의 그것이 수로, 수의 그것

이 상으로 전전상속한다.

 

구사론에서는 심·심소의 구생의 논거로 “수든 상이든 사든 식이든 이

와 같은 제법은 상잡(相雜, saṃsṛṣṭa, 혹은 和雜)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는 경설(중아함제211大拘絺羅經; M.N.43 Mahā-Vedalla S.)을 인용하는

데(T29, 53b18-20), 대론자(觸假有論者, 즉 상좌)는 이같이 힐난한다.

 

"여기서 ‘상잡’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경에

서는 다시 설하기를, “온갖 소수(所受)가 바로 소사(所思)이고, 온갖 소사

가 바로 소상(所想)이며, 온갖 소상이 바로 소삭(所識)이다”고 하였다.51) 즉

[그대들(유부)은] 이 경이 소연에 근거하여 그같이 설한 것인지, 찰나에 근

거하여 그같이 설한 것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 것이다." 52)

51) 인용 경은『중아함경』권58(T1, 791a4), “覺所覺者, 卽是想所想, 思所思. (是故三法合不別).”
    (yaṁ vedeti taṁ sañjānāti yaṁ sañjānāti taṁ vijānāti: MN.I, p.293).
52)「구사론」권10(T29, 53b20-22), “今應審思, 相雜何義? 此經復說: ‘諸所受卽所思. 諸所思卽所
    想. 諸所想卽所識.’ 未了於此 爲約所緣, 爲約刹那, 作如是說.”(yad-vedayate tac-cetayate
    yac-cetayate tat saṃprajānīte yat-saṃprajānīte tad-vijānāti-ti: AKBh,, 146. 16f); ?순정리론?권
    29(T29, 505b7-9), “彼(觸가유론자)作是說: 應審前經! 彼經復言. ‘諸所受卽所思. 諸所思卽所
    想. 諸所想卽所識.’ 未了於彼爲約所緣, 爲約刹那, 作如是說.”

 

즉 느껴진 것(所受)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所思),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이 표상되며(所想), 표상된 것이 인식되기(所識) 때문에, 여기서의 상잡은 찰

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소연(境)에 근거한 것, 따라서 수·사·상·식의 소

연 또한 동일(平等)한 것이 아니라 전후 인과적 관계로서 서로 유사하게 일어

나는 것(相似轉)으로 이해하였다.

 

상좌는 舊隨界(종자)가 제법의 인연성(hetupratyayatva)이라 주장(T29, 440b3f)하

면서 이같이 말하였다.: “법 자체는 비록 겁을 거치면서 소멸할지라도 자상속(自相

續)으로 전전을 거듭하면서 여전히 인성(hetubhāva, 혹은 種子性)이 된다.”53)

53)「순정리론」권18(T29, 442a1-3), “又彼上座執, ‘有法體雖經劫滅, 而自相續展轉相仍, 猶爲因性.’”

 

Ⅴ. 결어

 

결어를 대신하여 본고에서 밝히려고 하였던 바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첫째, 통상 ‘마음’(혹은 ‘의식’)이라 하지만, 불교전통에서 이는 心(citta)·

意(manas)·識(vijñāna)으로 호칭되었다. 세 말은 동의로 엄격한 구분 없이 함

께 사용되기도 하지만,54)「구사론」에서는 어의에 따라 집기(集起, cinoti)·사

량(思量, manute)·료별(了別, vijānāti)로 분별하였다. 그럴지라도 여기서 별

다른 의의를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 심·의·식이라는 말이 제 경론에서 반

드시 이러한 어의에 따라 사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심을 ‘종종

(種種, citra, p.citta)’의 뜻으로 해석한 것이 교리적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심(心)의 여러 다양한(種種의) 측면--능의성의 식(현행식)과 소의성의

의(무간멸의 6식)--을 해명한 것, 다시 말해 심을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이해

한 것이기 때문이다.

54) 水野弘元은 아함과 니카야에서 心(citta)은 대체로 身에 상대되는 말로서 세인이 말하는 總稱
    的 일반적 의미로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意(manas)는 心의 정의적 방면을 나타낸 것,
    또는 意가 意根에서 보듯이 내면적인 심층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면 識(vijñāna)은 외면의
    얕은 인식적 마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パ-リ佛敎を中心とした佛敎の心識論」, p.43).

 

한편 심을 언제부터 집기(集起, cinoti, 구역은 ‘增長’)로 해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심을 훈습의 안주처(bhāvanāsaṃniveśa)로 해석한 경량부나

유가행파 심식론에도 이론적 단초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여전히 전후 내막

은 분명하지 않지만, 상좌는 종자/훈습의 소의처가 되는 이러한 일류항편의

심(즉 一心)을 제식(현행)의 본질로 간주하였다.

 

다른 한편 현장은 cinoti(√ci)를 왜 ‘집기(集起, 구역은 ‘增長’)로 번역한 것일

까? 이미 종자설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닐까?「성유식론」에서는 집기를 ‘종자

의 집적’과 ‘현행의 생기’로 해설하였고 중국의 불교찬술 역시 그러하다.55)

55)「성유식론」(T31, 24c12), “第八名心, 集諸法種, 起諸法故.”,「선원제전집도서」(T48, 401c21-23), 
    “質多耶, 此云集起心. 唯第八識, 積集種子, 生起現行故”

 

둘째, 유부 비파사에서 마음은 사실상 지극히 무내용적인 것이다. 선악 등

의 도덕적 성질을 비롯하여 우리가 마음의 양태(의식작용)로 이해하는 지식

현상이나 심리현상은 모두 마음이 마음과는 별체인 그러한 법(즉 心所)과 관

계할 때 드러나는 현상으로, 마음은 다만 그 모두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뿐이

다. 그래서 先人들은 心을 王에 비유하였을 것이다. 왕은 국무를 총괄할 뿐

구체적 업무를 갖지 않는다.

 

셋째, 유부에서 마음(識)은 소의와 소연이 된 根과 境, 그리고 제 심소와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 근·경·식의 동시(同時)인과와 심(識)·심소의 상응

구기 설은, 유위의 현상세계를 법(dharma, ‘能持自相’)이라 일컬어진 개별적

실체로 분별하려는 유부교학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따라서 마음이 비록 주

체(능의 혹은 능연)로서 그러한 제법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할지라

도 다만 세계를 구성하는 제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넷째, 그러나 경량부의 경우 유부가 분별한 제법의 개별적 실체성도, 항유

(恒有)(過未實有)의 법체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동시인과는 불가

능하다. 그리고 근·경·식과 제 심소의 이시(異時)인과를 주장할 경우, 식이

생겨났을 때 근과 경은 이미 소멸하였기 때문에 심·심소의 생연과 소연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경량부는 인식의 주요조건인 유색처(안 등

의 5근과 색 등의 5경)를 극미화합(和合)의 가유(假有)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안 등 5식의 생연(=소연연)은 불가분의 관계로 화합한 다수의

극미였고, 소연(=소연경)은 자신에게 나타난 외계의 형상(ākāra: 行相)인 단

일한 화합상(相)이었다. 이것이 마음의 상속을 통해 전전(展轉, 前滅後生)한

다. 상좌는 말한다.: “근과 경은 수(제3찰나)가 생겨날 때에도 능생의 공용으

로서 [심상속 상에] 서로 유사하게 전전(展轉, 相似轉)한다.”(주49)

 

물론 일찍이 경험한 종종법(種種法, 업과 번뇌)도 수계/종자의 형태(種種

界)로 마음에 훈습되고 있다. 이는 항상 현재(已生未滅)의 상태로, 존재

(astitva: 有相)라 할 만한 것은 이것뿐이다.(T29, 621c16f) 상좌는 말하였다.:

“法 자체는 비록 겁을 거치면서 소멸할지라도 자상속(自相續)으로 전전(展

轉)을 거듭하면서 여전히 [後法에] 인성(因性)이 된다.”(주53)

 

경량부에서의 유위제법의 인연성은 유부에서 말하듯 개별적 실체로서 삼

세에 걸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능생(能生)의 공능(功能) 즉 종자/(舊)수계

로서 마음(citta: 心) 상에 훈습 상속한다. 이제 바야흐로 마음은 현행하는 제

식의 본질로 간주되었다.(주21)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멸진정에 들 때에도,

무상천에서도 항상 존재하는 동일종류(무부무기)의 마음(일류항편심), 일심

(ekacitta)이다. 이는 일종의 잠자고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상좌는 동일근(根)에 근거한 두 식(識)(현행식과 잠재식)을 전설상의

새인 일신이두(一身二頭)의 명명조(命命鳥)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지면관계상 다루지 못하였지만, 이미 초기부파(婆沙이

전) 시대, 마음은 찰나멸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相으로 상속한다는 또 다른 일

심상속론자가 있었다. “현실의 염오는 객진(客塵)일 뿐 마음은 본래(언제나)

청정하다.” 이른바 心性本淨說이다.바사」「성실」「정리」「유식등의 제론

에서는 다 같이 이를 찰나멸의 입장에서 비판하였고,유식론에서는 현행의

염오심과의 관계로써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주지하듯이 대승(여

래장계통)의 자성청정심의 기원으로 회자된다. 비록대승장엄경론에서 본

정의 심성을 심진여의 아마라식이라 하였을지라도56) 이는 유부 비파사사나

경량부 혹은 유식과는 다른 계통의 심성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심상

속론자(대중부 등)의 전승(아함)이 부재하기 때문에 본정설의 발단이나 전후

의 논리적 맥락은 미상이다.

56) (T31, 623a3-9). 그러나 범문원전에서 心眞如는 dharmatācitta(法性心), 阿摩羅識은 cittatathatā
    (心眞如)이다. (勝又俊敎,「佛敎における心識說の硏究」, p.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