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화합승(和合僧)의 의미와 실현 방법에 관한 고찰/이 자랑

실론섬 2017. 11. 10. 13:30

화합승(和合僧)의 의미와 실현 방법에 관한 고찰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2011-36-A00008])

이자랑/동국대 HK교수

 

I. 서론

II. 화합의 정의

III. 화합의 실현 방법 - 여법화합갈마의 실행

IV. 여법화합갈마의 실행, 왜 화합승의 상징인가?

V. 결론

 

요약문
대소승을 불문하고 불교문헌에서 승가는 종종 화합승(和合僧)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승가를 상징하는 주요 개념이 ‘화합’이며, 화합이야말로 승가 운영에 있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이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화합의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일까? 본 논문에서는 초기불교문헌에 근거하여 화합의 의미, 화합 실현의 방법, 그리고 화합 실현에 있어 여법(如法)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여법화합갈마의 실행이 승가 운영에서 갖는 의미를 고찰하였다.    

화합은 흔히 서로 양보하며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는, 다소 막연한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율장을 비롯한 초기불교문헌에 등장하는 화합의 정의를 검토해보면 화합이란 동일한 현전승가(現前僧伽)에 속한 비구 혹은 비구니들이 각각 여법(如法)한 방법으로 승가갈마를 실행하는 상태를 일컫는 전문용어이다. 따라서 이 정의에 따른다면, 화합 실현의 방법 역시 명확하다. 결계(結界)를 통해 형성된 하나의 현전승가에 속하는 구성원(비구 혹은 비구니)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붓다가 제정한 방법대로 갈마를 실행하는 상태가 화합인 것이다.    

그런데 화합의 반대어인 파승과 관련하여 「파승건도」 등에 나타나는 화합의 개념을 보면, 화합은 ‘여법’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법이란 붓다가 설한 가르침의 내용에 부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절차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내용으로 갈마를 실행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갈마이다. 율장에서는 이를 여법화합갈마라고 표현한다. 여법화합갈마는 현전승가의 구성원 전원이 출석하여, 경과 율에 근거한 여법한 판단에 따라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는 것이 원칙이다. 요컨대, 화합승은 승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올바른 방법을 거쳐 구성원의 납득 하에 결론을 내리고, 나아가 이에 근거하여 승가를 운영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 서론

대소승을 불문하고 불교문헌에서 승가는 종종 화합승(和合僧, samagga-saṃgha)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승가를 상징하는 주요 개념이 ‘화합’이며, 화합이야말로 승가 운영에 있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이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화합의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일까? 본 논문에서는 초기불교문헌에 근거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고자 한다.   

‘화합’, 의미 파악이 어려운 단어는 아니다. 국어사전에서도 ‘화목하게 어울림’이라는 짧은 설명으로 끝내버릴 만큼 이해가 용이한 단어이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본다면 ‘싸우지 않고 서로 배려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상태’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이처럼 화합이란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화합을 실현하고자 했을 때, 실천 역시 간단할까? 간단할 리 없다. 두 세 명이 함께 살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특히 대중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한다면, 갈등이 발생할 여지는 한층 높아진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승가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려는 목적 하에 출가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이다. 붓다가 초전법륜의 대상이었던 5비구와 더불어 공동생활을 했다는 점으로 볼 때 불교는 시작 단계부터 공동체 생활을 지향한 종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공동체 생활은 서로를 격려하며, 상대방을 거울삼아 자신을 완성시켜 갈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다수의 사람이 함께 생활할 때 화합은 필수조건이 된다.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면 공동체 생활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화합을 실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출가자 역시 인간인 이상, 때로는 감정도 욕망도 다스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승가를 화합승이라 하여 ‘화합’을 유독 강조하는 것은 화합이 갖는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공동체 생활에서 화합의 실현이 그만큼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화합승이라 표현할 만큼 승가가 화합을 중시하는 공동체라면 붓다는 화합의 실현을 위해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기존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경장이나 율장을 보면 승가의 화합을 강조하는 기술들이 많이 발견된다. 얼핏 보면 서로 배려하며 사이좋게 지내라는 의미 정도로 보이지만, ‘화합하라’라는 말만으로 화합이 유지될 리 만무하다. 필시 화합을 위한 무언가 보다 구체적인 지침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에 진행한 연구는 의외로 많은 성과를 얻게 해주었다. 연구 결과 얻게 된 핵심적인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 세 가지 정도가 될 것이다. 첫째, 화합이란 동일한 현전승가(現前僧伽, sammukhībhūta-saṃgha)에 속한 비구 혹은 비구니들이 각각 함께 포살 등의 승가갈마를 실행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둘째, 화합을 실현하는 방법은 여법화합갈마의 실행이다. 셋째, 화합은 ‘여법(如法)’을 기반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핵심은 ‘승가의 화합은 여법한 갈마의 실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출가자들의 일상생활을 규정해 놓은 문헌인 율장에서 그토록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갈마 실행에 관한 규정을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합이란 막연히 ‘화목하게 지낸다’고 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닌, 구체적인 지침을 실천하며 현실 속에서 실현해 가야 할 목표인 것이다.   

이하 본고에서는 빨리율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한역율이나 경장의 내용 등도 참조하며, 화합에 관한 용례 분석을 중심으로 위에서 기술한 세 가지 점을 다시금 확인해보고자 한다. 먼저 제2장에서는 화합에 관한 정의를 검토하여 ‘화합’이란 여법화합갈마를 실행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이어 제3장에서는 여법화합갈마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기준을 고찰하고, 제4장에서는 여법화합갈마가 왜 승가 화합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II. 화합의 정의 

‘화합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헌에 나타나는 화합이라는 말의 용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합의 원어는 산스끄리뜨어로는 사마그라samagra, 빨리어로는 사막가samagga이다. 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being in unity, harmonious1) 혹은 all, entire2) 등으로 정의된다. 사전적 정의에서는 특별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없다. 하지만 초기불교문헌에 나타나는 화합의 용례를 확인해보면 다르다. 물론 사전적인 의미 정도로 가볍게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화합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될 경우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전문용어(technical term)로 등장한다. 전문용어로서의 화합의 구체적인 의미는 그 반대 개념인 파승(破僧, saṃghabheda)과 더불어 학계에서도 상당히 연구가 진행된 상태이다3) 먼저 몇몇 광율(廣律)에 나타나는 화합 내지 화합승에 관한 정의를 보자.   
1)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 ed., Pali-English Dictionary, p.681의 samagga 항; Edgerton,
   F., Buddhist Hybrid Sanskrit Grammar and Dictionary, p.560의 samagra 항. 
2) Sir Monier Monier-Williams ed., 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1153의 samagra 항.
3) 화합, 그리고 이의 반대 개념인 破僧(saṃghabheda)이 전문용어로서 율장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은 베햣트가 아쇼까왕의 ‘분열법칙’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와 빨리율에 나타나는 전문용어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발견하고, 빨리율을 중심으로 파승의 의미를 밝히면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Bechert, H., 
   “Aśokas ‘Schismenedict’ und der Begriff Saṅghabheda”, Wiener Zeitschrift für die Kunde Süd-
   Ostasiens, vol.5, 1961, pp.18-52.  

① “Samaggo nāma saṃgho samānasaṃvāsako samānasīmāya ṭhito.”화합승이란 동주자(同住者)가 동일한 계(界, sīmā) 안에 있는 것이다.(『빨리율』) 4)     

② “和合者 同一羯磨同一說戒 僧者四比丘若五若十乃至無數”화합이란 동일갈마․동일설계이다. 승이란 4명의 비구, 혹은 5명, 혹은 10명, 내지 무수이다.(『사분율』) 5)  
③ “和合者 同布薩自恣羯磨常所行事 僧者從四人已上”화합이란 포살・자자・갈마・상소행사(常所行事)를 같이 하는 것이다. 승이란 4명이상이다.(『오분율』) 6)  
④ “和合僧者 不別衆 諸比丘雖復鬪諍更相道說 但一界一衆一處住 一布薩自恣故 名爲和合僧”화합승이란 무리가 분열하지 않은 것이다. 설사 비구들이 투쟁하고 서로 싸운다하더라도, 하나의 계・하나의 무리・하나의 주처에 살며 포살이나 자자를 함께 실행한다면 화합승이라고 한다.(『마하승기율』) 7)
4) Vin. II, p.173.
5)「사분율」卷5(『大正蔵』22, p.595上)
6)「오분율」卷3(『大正蔵』22, p.20下) 
7)「마하승기율」卷7(『大正蔵』22, p.282下)

이들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며 또한 서로 일치한다. 특히 ②, ③, ④ 한역율의 정의는 ‘4명 이상으로 구성된 각 승가에서 포살 등의 갈마를 함께 하는 상태’를 화합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①에서 든 빨리율의 정의 역시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한역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빨리율의 정의에 의하면, 화합승이란 ‘동주자’가 ‘동일한 경계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8) 즉, 화합승의 조건으로 ‘동주자’와 ‘동일한 경계 안에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있다. 여기서 ‘동주자’라고 번역한 말의 원어는 사마나상와사까samānasaṃvāsaka이다. 이 말은 사마나samāna(같은, 동일한)+상와사[까]saṃvāsa [ka](共住[하는 자])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말로 ‘공주를 같이 [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주(共住)’, 즉 함께 머무른다는 의미를 갖는 상와사saṃvāsa가 가리키는 바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빨리율에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8) 이 두 가지 표현이 갖는 의미에 관해서는 이자랑, 「승가화합의 판단기준에 관하여」, 「불교학 연구」
   제20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8), pp.7-33를 참조.  

 

공주(共住, saṃvāsa)란 갈마를 하나로 하고, 설계(說戒)를 하나로 하며, 함께 배우는 것, 이것을 공주라고 한다.9)
9) “saṃvāso nāma ekakammaṃ ekuddeso samasikkhātā, eso saṃvāso nāma.” (Vin. III, p.28).

이 정의에 따르면 공주란 단순히 함께 산다는 의미가 아닌, 동일갈마・동일설계・함께 배운다고 하는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동일갈마와 동일설계는 갈마를 함께 실행하고 포살을 함께 실행하는 것이며, 함께 배운다는 것은 붓다가 제정한 학처(學處), 즉 율 조문을 함께 배우는 것이다.10) 그렇다면 사마나상와사까, 즉 공주를 같이 하는 자란 이 세 가지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는 한역율에서 언급했던 포살 등의 갈마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10) Smp. I, p.260.

빨리율의 정의에서 동주자에 이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조건인 ‘동일한 경계 안에 있다’는 것은 결계(結界)를 통해 형성된 하나의 현전승가에 속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포살이나 갈마, 율 조문을 함께 배우는 자들이 같이 산다고 할 때 이들이 머물게 되는 공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역율에서 언급된 4명 이상으로 구성된 각 승가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빨리율 역시 동일한 현전승가에서 포살 등의 갈마를 함께 하는 상태를 화합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현존하는 광율에서의 화합 내지 화합승은 단지 사이좋게 지내는 상태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닌, 결계를 통해 형성된 동일한 현전승가에 속한 비구들이 함께 포살 등의 갈마를 실행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승가의 화합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동일한 현전승가에 속한 비구들이 함께 포살 등의 갈마를 실행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합의 정의는 율장 소품 「파승건도」에 나타나는 승가화합의 정의와 비교해보면 그 배경에 한 가지 더 중요한 조건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파승건도」는 붓다 재세 당시의 대표적 파승사건 가운에 하나인 데와닷따(Devadatta, 제바달다)의 파승 사건을 전하는 장이다. 이 건도에는 우빨리와 붓다 간에 오고 간 화합에 관한 대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존자시여, 승가화합, 승가화합이라고 합니다만,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승가는 화합했다고 하는지요? 우빨리야, 여기에 비구들이 있어 법이 아닌 것을 법이 아니라고 설하고, 법을 법이라고 설하며, 율이 아닌 것을 율이 아니라고 설하고, 율을 율이라고 설한다. 여래가 이야기하지 않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라고 설하며, 여래가 이야기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래가 이야기하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한다. 여래가 행하지 않으신 것은 행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행하신 것은 여래가 행하신 것이라고 설한다. 여래가 제정하지 않으신 것은 여래가 제정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제정하신 것은 여래가 제정하신 것이라고 설한다. 무죄는 무죄라고 설하며, 죄는 죄라고 설한다. 가벼운 죄[輕罪: 바라이와 승잔 이외의 죄]는 가벼운 죄라고 설하고, 무거운 죄[重罪: 바라이와 승잔]는 무거운 죄라고 설한다. 유여죄(有餘罪: 참회하거나 일정한 벌을 받으면 청정해질 수 있는 승잔 이하의 죄)는 유여죄라 설하고, 무여죄(無餘罪: 복권의 가능성이 없는 바라이죄)는 무여죄라고 설한다. 추죄(麤罪=중죄)는 추죄라고 설하고, 비추죄(非麤罪=경죄)는 비추죄라고 설한다. 그들이 이 18가지 일을 가지고 유혹하지 않고, 제외하지 않으며, 함께 하지 않는 포살을 하지 않고, 함께 하지 않는 자자를 행하지 않으며, 함께 하지 않는 승가갈마를 행하지 않는다. 우빨리여, 이를 가지고 승가는 화합했다고 하느니라."11)   

11) “saṃghasāmaggī saṃghasāmaggīti bhante vuccati. kittāvatā nu kho bhante saṃgho samaggo        
    hotīti. idh’ Upāli bhikkhū adhammaṃ adhammo ’ti dīpenti, dhammaṃ dhammo ’ti dīpenti, avinayaṃ   
    avinayo ’ti dīpenti, vinayaṃ vinayo ’ti dīpenti, abhāsitaṃ alapitaṃ tathāgatena abhāsitaṃ alapitaṃ  
     tathāgatenā ’ti dīpenti, bhāsitaṃ lapitaṃ tathāgatena bhāsitaṃ lapitaṃ tathāgatenā ’ti dīpenti, 
    anāciṇṇaṃ tathāgatena anāciṇṇaṃ tathāgatenā ’ti dīpenti, āciṇṇaṃ tathāgatena āciṇṇaṃ tathāgatenā  
    ’ti dīpenti, apaññattaṃ tathāgatena apaññattaṃ tathāgatenā ’ti dīpenti, paññattaṃ tathāgatena 
    paññattaṃ tathāgatenā ’ti dīpenti, anāpattiṃ anāpattīti dīpenti, āpattiṃ āpattīti dīpenti, lahukaṃ 
    āpattiṃ lahukā āpattīti dīpenti, garukaṃ āpattiṃ garukā āpattīti dīpenti, sāvasesaṃ āpattiṃ sāvasesā 
    āpattīti dīpenti, anavasesaṃ āpattiṃ anavasesā āpattīti dīpenti, duṭṭhullaṃ āpattiṃ duṭṭhullā āpattīti 
    dīpenti, aduṭṭhullaṃ āpattiṃ aduṭṭhullā āpattīti dīpenti. Te imehi aṭṭhārasahi vatthūhi na apakāsanti, 
    na avapakāsanti, na āveniṃ uposathaṃ karonti, na āveniṃ pavāraṇaṃ karonti, na āveniṃ 
    saṅghakammaṃ karonti. ettāvatā kho Upāli saṃgho samaggo hotīti.” (Vin. II, p.204)


이 문답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붓다의 가르침을 잘못 설하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법・율・여래가 이야기하고 말씀하신 것・여래가 행하신 것・여래가 제정하신 것・무죄와 유죄・경죄와 중죄・유여죄와 무여죄・추죄와 비추죄의 총 9가지로 나눈 후, 법인 것을 법이라 하고 법이 아닌 것을 법이 아니라고 한다는 등의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며 총 18가지의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올바른 판단이 먼저 필요하다.12) 이어 후반에서는 이러한 올바른 판단에 근거하여 포살이나 자자, 갈마를 함께 실행할 것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본다면, 승가화합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여법한 판단을 하고, 이에 근거하여 포살 등을 함께 실천할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2) 이 문답에 앞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동일한 경계 안에서 따로 따로 포살 등의 
    갈마를 하는 행위를 화합이 깨진 상태, 즉 破僧(saṃghabheda)이라 한다고 기술한다. Vin. II, p.204.

이와 유사한 정의가『앙굿따라 니까야』「승가화합의 경」에도 보인다.13) 다만 여기서는 위에서 인용한 「파승건도」의 18사 가운데 “법이 아닌 것을 법이 아니라 설하고, … 여래가 제정하신 것을 여래가 제정하셨다고 설한다.”는 부분까지만 거론하여 18사가 아닌 10사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지만,14)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이처럼 파승과 관련하여 율장과 경장에 언급되는 화합에 관한 정의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올바른 판단이며, 또 하나는 이를 기반으로 한 갈마의 공동 실행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승가는 화합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13) AN. V, pp.74, 76.
14) 여기서 생략된 나머지 8사는 “무죄와 유죄・경죄와 중죄・유여죄와 무여죄・추죄와 비추죄”라는, 이른바 
    율 조문에 근거하여 죄목을 판정하는 내용이므로 경장에서는 생략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그 
    반대로 원래 10사였던 것이 율장에서 8사가 추가되면서 18사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화합승의 실현에 있어 ‘여법’과 ‘갈마의 공동 실행, 즉 화합’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앞서 광율에서 확인한 화합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화합이란 동일한 현전승가의 비구(혹은 비구니)들이 함께 포살 등의 갈마를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갈마의 실행이라는 화합의 상징적인 행위만이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파승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화합의 정의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갈마는 반드시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근거하여 내려진 여법한 판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여법이 화합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제 조건인 것이다. 이 때문에 율장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종합하여 ‘여법화합갈마’라고 표현하며, 여법화합갈마의 실행을 승가 화합의 구체적인 실현 방법으로 제시한다.     

III. 화합의 실현 방법 - 여법화합갈마의 실행 

율장이나 경장에 나타나는 화합의 정의를 검토해 본 결과, 화합이란 현전승가 단위로 여법화합갈마를 실행하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이로부터 본다면 여법화합갈마를 실행하는 것이 곧 화합을 실현하는 방법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여법화합갈마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고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갈마의 의미를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갈마란 산스끄리뜨어 까르만(Ⓢkarman, Ⓟkamma)의 음사어이다. 까르만은 행위의 결과 남게 되는 잠재적인 힘을 의미하는 업(業)의 원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계율 용어로 사용될 때는 승가에서 의사 결정을 위해 실행하는 회의 내지 그 회의법을 가리킨다. 혹은 수구(受具, upasampadā)의식이나 포살(布薩, uposatha), 자자(自恣, pavāraṇā)의식 역시 수구갈마, 포살갈마, 자자갈마라고 하는데, 이는 이들 의식 역시 율장에서 규정하는 갈마의 형식과 절차를 밟아 실행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갈마란 승가에서 크고 작은 모든 안건을 처리하는 일종의 회의 혹은 회의법이자 의식까지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갈마는 하나의 현전승가를 기준으로 실행되며, 사안에 따라 갈마의 형식은 달라지지만, 동일한 현전승가 구성원의 전원참석과 만장일치라는 이대 원칙하에 진행된다는 점은 변함없다.    

그렇다면, 여법화합갈마란 무엇일까? 이는 여법과 화합이라는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하여 갈마를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율장에는 여법화합갈마와 관련하여 많은 규정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첨파건도」에 나오는 다음 정의는 여법화합갈마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비구들아, 무엇을 여법화합갈마라고 하는가? 만약 백이(白二)갈마에서 ① 먼저 백(白, 안건)을 고하고 나중에 한 번 갈마설을 하고 갈마를 한다면, ② 갈마에 와야 할 비구들이 이미 도착해있고, ③위임[欲]을 해야 할 자들의 위임이 이미 전달되었으며, ④ 그 자리에 모인 [비구들이] 비난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여법화합갈마이다. 비구들아, 만약 백사(白四)갈마에서 ① 먼저 백을 고하고 나중에 세 번 갈마설을 하고 갈마를 한다면, ② 갈마에 와야 할 비구들이 이미 도착해있고, ③ 위임을 해야 할 자들의 위임이 이미 전달되었으며, ④그 자리에 모인 [비구들이] 비난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여법화합갈마이다.15)   

15) “katamaṃ ca bhikkhave dhammena samaggakammaṃ. ñattidutiye ce bhikkhave kamme paṭhamaṃ 
    ñattiṃ ṭhapeti, pacchā ekāya kammavācāya kammaṃ karoti, yāvatikā bhikkhū kammappattā te 
    āgatā honti, chandārahānaṃ chando āhaṭo hoti, sammukhībhūtā na paṭikkosanti, dhammena 
    samaggakammaṃ. ñatticatutthe ce bhikkhave kamme paṭhamaṃ ñattiṃ ṭhapeti, pacchā tīhi 
    kammavācāhi kammaṃ karoti, yāvatikā bhikkhū kammappattā te āgatā honti, chandārahānaṃ 
    chando āhaṭo hoti, sammukhībhūtā na paṭikkosanti, dhammena samaggakammaṃ” (Vin. I, p.319)    

「첨파건도」의 이 정의에서는 백이갈마와 백사갈마라는 갈마의 두 유형을 들어 기술하고 있다. 백이갈마는 간단한 사안을 결정할 때, 백사갈마는 중대한 의사결정이 필요하거나 포살이나 자자처럼 중요한 승가 행사일 경우에 적용하는 갈마의 형식이다. 승가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의사 결정은 반드시 이 둘 중 하나의 형식을 거쳐 이루어진다. 이 둘은 모두 여법화합갈마의 형식으로 실행되어야 하며, 그것은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각각 ①②③④의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갈마 진행의 절차상의 문제이다. 반드시 안건을 먼저 고지한 후 찬반 여부를 묻는 갈마설(羯磨說)을 읊어야 한다. 안건의 고지란 지금 열리는 갈마가 무엇을 결정하기 위해 열리는 것인지 그 자리에 모인 대중에게 명확히 알리는 것을 말한다. 안건을 먼저 고하지 않고 나중에 결과 여부에 따라 적당히 아무 의제나 가져다 붙일 수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반드시 ‘안건의 고지→갈마설’을 강조하는 것이다. 백이갈마의 경우에는 안건 고지 후 한 번만 갈마설을 읊으면 되지만, 백사갈마에서는 안건 고지 후 세 번에 걸쳐 갈마설을 해야 한다. 즉,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는 백사갈마의 경우에는 세 번에 걸쳐 구성원에게 찬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갈마에서 내려진 결정은 무효이다.   

둘째, 동일한 현전승가에 속하는 비구들의 전원 출석 및 각 갈마에 필요한 인원수의 확보 문제이다. 이는 현전승가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법화합갈마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갈마를 실행할 인원수를 명확히 한정하고 또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이는 현전승가라 불리는 승가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현전승가란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승가라는 의미이다. 동서남북으로 일정한 표식을 정하여 경계를 설정하는 결계(結界)라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승가라고 하면, 불(佛)・법(法)과 더불어 삼보(三寶)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지는 승보, 즉 불교수행자들로 구성된 공동체 전체를 떠올리게 되지만, 율장의 조문들이 적용되는, 말하자면 율장이 전제로 하는 승가는 현전승가이다. 율장의 조문들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현전승가의 구성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전승가를 단위로 갈마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동일한 현전승가에 속한 비구 혹은 비구니들은 단 한명도 예외 없이 갈마에 참석해야 한다.   

현전승가의 구성은 갈마 실행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자, 현전승가를 만드는 목적 자체가 바로 갈마의 실행에 있다. 이 점은 다음 기술에서 잘 드러난다. 빨리율 「첨파건도」를 보자.   

다섯 [종류의] 승가가 있다. 4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 5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 10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 20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 20명 이상으로 구성된 비구승가이다. 비구들아, 이 중에서 4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는 세 가지 갈마, 즉 구족계・자자・출죄(出罪)를 제외하고 여법하게 화합한 모든 갈마에 있어 갈마를 획득한다. 비구들아, 그 중에서 5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는 두 가지 갈마, 즉 중심 지역에서의 구족계, 출죄를 제외하고 여법하게 화합한 모든 갈마에 있어 갈마를 획득한다. 비구들아, 10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는 하나의 갈마, 즉 출죄를 제외하고 여법하게 화합한 모든 갈마에 있어 갈마를 획득한다. 비구들아, 그 중에서 20명으로 구성된 비구승가는 여법하게 화합한 모든 갈마에 있어 갈마를 획득한다. 비구들아, 그 중에서 20명 이상으로 구성된 비구승가는 여법하게 화합한 모든 갈마에 있어 갈마를 획득한다.16)    

16) “pañca saṃghā, catuvaggo bhikkhusaṃgho pañcavaggo bhikkhusaṃgho, dasavaggo 
    bhikkhusaṃgho, vīsativaggo bhikkhusaṃgho, atirekavīsativaggo bhikkhusaṃgho. tatra bhikkhave 
    yvāyaṃ catuvaggo bhikkhusaṃgho ṭhapetvā tīṇi kammāni upasampadaṃ pavāraṇaṃ abbhānaṃ, 
    dhammena samaggo sabbakammesu kammappatto. tatra bhikkhave yvāyaṃ pañcavaggo 
    bhikkhusaṃgho ṭhapetvā dve kammāni majjhimesu janapadesu upasampadaṃ abbhānaṃ 
    dhammena samaggo sabbakammesu kammappatto. tatra bhikkhave yvāyaṃ dasavaggo 
    bhikkhusaṃgho ṭhapetvā ekaṃ kammaṃ abbhānaṃ dhammena samaggo sabbakammesu 
    kammappatto. tatra bhikkhave yvāyaṃ vīsativaggo bhikkhusaṃgho dhammena samaggo 
    sabbakammesu kammappatto. tatra bhikkhave yvāyaṃ atirekavīsativaggo bhikkhusaṃgho 
    dhammena samaggo sabbakammesu kammappatto.” (Vin. I, pp.319-320) 이 내용은 波羅提木叉
    (pāṭimokkha)의 주석 「깡카위따라니(Kaṅkhāvitaraṇī)」에도 보인다. Kkv, p.3.

이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4명 승가 – 구족계갈마(10명 이상 필요)․자자갈마(5명 이상 필요)․출죄갈마(승잔죄를 저지른 
   자가 청정비구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하는 갈마, 20명 이상 필요)를 제외한 모든 갈마
② 5인 승가 – 중심 지역에서의 구족계 갈마(10명 이상 필요)․출죄갈마(20명 이상 필요)를 제외한     

   모든 갈마
③ 10인 승가 – 출죄갈마(20명 이상 필요)를 제외한 모든 갈마
④ 20인 승가 – 모든 갈마
⑤ 20인 이상의 승가 – 모든 갈마 17)

17) 이들 숫자가 현전승가를 구성하는 인원수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갈마를 하는 자리에 실제로 몇 명이 
    모이는가 하는 점을 가리키는지 명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율장에서 부득이한 경우의 위임을 
    허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전승가의 실제 인원이 아닌 갈마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인원, 다시 
    말해 각 갈마에 필요한 인원수를 여기서는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빨리율 「포살건도」에서는 “비구들아, 4명의 비구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한 명의 청정을 전달하고 
    3명이 바라제목차를 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읊는다면 악작죄이다.(tatra bhikkhave yattha cattāro 
    bhikkhū viharanti, na ekassa pārisuddhiṃ āharitvā tīhi pātimokkhaṃ uddisitabbaṃ. uddiseyyuṃ ce, 
    āpatti dukkaṭassa.)”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현전승가의 구성원은 4명이지만, 그 중 한 명이 
    위임을 하면 실제로 갈마에 참석하는 자는 3명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안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Vin. I, p.125.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현전승가는 최소 4명의 비구가 있으면 구성 가능한데(4명 이하로 구성된 승가는 별중(別衆, gaṇa)), 승가의 인원수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 갈마와 실행할 수 없는 갈마가 있다. 위의 「첨파건도」에서 여법화합갈마의 두 번째 조건으로 언급한 것은 바로 현전승가 구성원의 전원 출석, 그리고 갈마의 내용에 따른 인원수 확보의 문제이다. 율장에서는 승가를 막연히 출가자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범위나 인원수 등에 엄밀한 제한을 더하여 명확한 개념 규정 하에 사용하고 있다. 이는 화합의 확인, 다시 말해 여법화합갈마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부득이한 사정으로 갈마에 참석할 수 없을 경우의 위임 문제이다. 만약 병 등으로 갈마에 출석할 수 없는 자는 다른 비구를 통해 승가에 여욕(與欲)을 전달해야 한다. 여욕이란 일종의 위임장을 보내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병자라 해도 들것에 실어 나르거나 혹은 승가가 병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갈마를 실행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으로 보아18) 갈마에는 가능한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며, 위임은 특별한 경우에만 인정되는 것 같다. 갈마는 현전승가의 구성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실행해야 하며, 이렇게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18) Vin. I, p.120.  

넷째, 범계 비구의 참석 여부 문제이다. 갈마에 범계비구가 참석하고 있어 다른 비구들이 이를 비난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안 된다. 갈마에는 현전승가의 구성원이 모두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범계 후 일정한 복죄(服罪) 과정이나 참회 등을 거쳐 청정비구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자(특히 승가로부터 징벌갈마를 받고 근신 중인 비구)는 참석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첨파건도」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비구들아, 별주인(別住人)을 네 번째로 하여 별주를 주고, 본일치(本日治)를 하고, 마나타(摩那埵)를 주고, 그를 스무 번째 사람으로 하여 출죄(出罪)를 한다면 갈마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며, 한 것이 아니다. 19)  
19) Vin. I, p.320.

별주나 본일치, 마나타 등은 승잔죄를 저지른 자에게 부과되는 벌칙이다. 이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런 벌칙을 결정하는 것은 4인 승가에서도 가능하지만, 그 4인 가운데 별주인, 즉 승잔죄를 저지르고 근신 중인 범계자를 넣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승잔죄를 저지르고 일정 기간 근신한 후 출죄를 할 때는 20인 승가가 필요한데, 이때 역시 범계자를 포함하여 출죄갈마를 실행해서는 안 된다. 이는 청정비구로서의 자격을 회복하지 못한 비구에게는 의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또한 비구․비구니 외에 사미・사미니・식차마나・우바새・우바이 등 교단의 다른 구성원도 참석해서는 안 된다. 포살을 하고 승가의 일을 결정하는 갈마는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이들 만의 참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상, 「첨파건도」의 정의에 근거하여 여법화합갈마의 실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갈마의 진행 절차와 구성원의 문제가 중시되고 있는데, 첫째로 든 갈마의 진행 절차는 여법(dhammena)에 해당하며, 둘째・셋째・넷째에서 든 구성원의 문제는 화합갈마의 조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20) 이를 종합해 보면 여법화합갈마란 절차상으로도 또한 갈마에 참석하는 구성원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0) 여법화합갈마를 설명하기 전에 비법갈마・별중갈마・화합갈마・似法별중갈마・사법화합갈마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비법과 여법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갈마의 종류에 따른 절차상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Vin. I, pp.317-319).

IV. 여법화합갈마의 실행, 왜 화합승의 상징인가?

경장이나 율장의 내용으로 보아, 승가 화합을 실현하는 주된 방법으로 붓다가 ‘여법화합갈마의 실행’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여법화합갈마의 실행이 왜 화합승의 실현 방법인 것일까? 이는 여법화합갈마의 조건으로 제시되었던 요소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법화합갈마는 갈마의 진행 절차와 구성원의 참석 여부 등을 중시한다. 갈마는 반드시 정해진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며, 갈마를 하는 자리에는 현전승가의 구성원이 모두 참석하고, 만약 참석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때는 위임 사실을 승가에 알려야 한다. 또한 부자격자가 참석해서도 안 된다. 이들 조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승가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을 명확한 원칙에 근거하여 구성원 모두의 합의 하에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승가를 운영함으로써 구성원들 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제도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화합’을 막연히 ‘서로 배려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편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받아들이며 ‘화합합시다, 화합합시다.’라고 외친들 이루어질 리가 없다. 평소에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 간에 깊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이다. 고무줄 잣대로 원칙 없는 과정을 통해 납득할 수 없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혹은 일부 권력자의 독단으로 일방적인 결론이 내려진다면, 이때도 화합이 가능할까? 구성원의 마음에 갈등의 씨앗은 뿌려지고 언젠가 이것이 싹을 틔워 승가는 분열에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명확한 원칙을 확보하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승가 운영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화합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이상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붓다가 도입한 것이 바로 ‘갈마’였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출가자를 받아들일 때도, 소임자를 선출할 때도, 쟁사(諍事)를 해결할 때도, 범계 여부를 가릴 때도, 대소사를 불문하고 승가에서는 모든 일을 갈마를 통해 결정한다. 갈마는 동일한 현전승가의 모든 구성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명확한 판단 근거를 제시하며 그들의 만장일치로 결론을 낸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이러한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명확한 원칙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승가는 구성원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으며, 바로 이 신뢰감이야말로 승가 화합을 실현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법화합갈마는 말 그대로 ‘여법’과 ‘화합’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이념이 갈마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화합승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대두된다. 여법의 문제이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화합은 갈마에 참석해야 할 자들이 참석해서 함께 포살이나 갈마 등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해석에 있어 이견의 여지는 없다. 동일한 현전승가에 속한 비구 혹은 비구니 전원의 출석, 출석할 수 없는 경우에는 위임의 전달, 그리고 범계비구나 자격 요건이 안 되는 자의 출석 금지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여 갈마를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갈마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고의든 우연이든 제외시키지 않음으로써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로 마무리 짓고자 하는 것으로 훗날 발생할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여법은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며, 좀 더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위에서 소개한 「첨파건도」의 경우에는 율장의 규정대로 각각 올바른 절차를 거쳐 갈마를 실행하는 것이 여법이었다. 붓다가 제정한 대로 갈마를 진행했기 때문에 여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법의 한 측면이지 전부는 아니다. 요컨대 여법이란 붓다가 남긴 법과 율의 내용에 상치하지 않는 모든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약간 복잡해진다. 사실 「첨파건도」에서 말한 여법의 조건은 절차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실행 여부를 체크하는데 있어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앞서 「파승건도」에서 언급된 것처럼 교리나 범계 여부 등의 문제로 여법성을 가려야 할 경우에는 무엇이 여법한 것인지, 다시 말해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견이 나뉠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어찌 해야 하는가? 이 판단은 누가 하는가? 어떤 판단에 근거해서 함께 갈마를 실행하고 만장일치를 이끌어내는가? 사실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위에서 소개한 「파승건도」에서처럼 “여기에 비구들이 있어 법이 아닌 것을 법이 아니라고 설하고, 법을 법이라고 설하며, … ” 등의 18사를 가지고 의견이 나뉘어 따로 포살이나 자자, 갈마 등을 하지 않는 것을 화합이라고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설하고, 법을 법이 아니라고 설하여 따로 포살 등을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여법을 가리는 문제는 붓다 재세 당시에는 오롯이 붓다의 몫이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21) 붓다 생존 당시에는 승가에서 혹은 교단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붓다의 판단 하에 해결되었다. 하지만, 붓다가 입멸하고 나면 사실상 이 판단은 그의 제자들의 몫이 된다. 붓다는 자신의 입멸 후에는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설하고 제정한 법과 율이 스승이라고 설하였으며,22) 따라서 그의 입멸 후 승가의 최고 권위는 ‘그가 설한 법과 율’이다. 하지만, 결국 이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그 사람이란 당연히 법과 율에 정통한 자들이며,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장로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출가자들이다. 요컨대, 여법화합갈마는 현전승가 구성원의 전원출석과 만장일치가 원칙이지만, 이 원칙을 지탱하는 기반에는 여법이 있고 그 여법의 기반에는 다시 법과 율에 정통한 유능하고 총명한 비구의 판단력과 지도력, 그리고 감화력이 존재한다. 이것이 갈마라는 수단을 통해 승가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23)       
21) 일반적으로 붓다 재세 당시에는 붓다의 판단력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대부분 붓다의 판단과 지시로 
    문제가 일단락되는 것이 기본인데, 데와닷타의 파승사건과 꼬삼비 비구들의 파승사건 만은 예외이다. 
    특히, 꼬삼비의 파승사건은 붓다의 충고조차 무시하며 두 파가 날카롭게 대립해 간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례는 붓다 멸후에는 한층 더 발생하기 쉬우며, 꼬삼비의 파승사건을 전하는 율장 
    대품의 「꼬삼비건도」는 이러한 경우를 대비한 하나의 예로서 율장 속에 남겨진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즉, 붓다의 가르침을 둘러싸고 견해가 대립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자랑, 「율장에 나타난 ‘不同住(nānāsaṃvāsaka)’에 관하여」, ?印度哲學? 11권 2호(서울: 인도철학회,     

    2002), pp.181-200를 참조. 
22) DN. II, p.154.
23)『맛지마 니까야』「고빠까목갈라나 숫따」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내가 입멸한 후에 이 자가 너희들의 
    귀의처가 될 것이다’라고 정해주셨습니까? 존자들이 지금 의지하는 분이 계십니까?”라는 대신 
    왓사까라의 질문에 아난다는 스승은 그런 말씀을 한 적도 없고, 지금 자신들이 특별히 의지하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왓사까라가 ‘그럼 무엇을 근거로 화합합니까?’라고 묻자 아난다는 ‘法
    (dhamma)’이라고 대답하며, 세존은 學處(sikkhāpada)를 정하고 波羅提木叉(pāṭimokkha)를 제정
    하셨으며, 승가의 구성원들은 한 곳에 모여 바라제목차를 잘 아는 비구에게 그것을 외우도록 요청하고, 
    이를 외우는 도중에 바라제목차를 범했거나 위반한 비구가 있다면, 붓다가 가르친 대로 법에 따라 그를 
    처벌하며 화합한다고 설명한다. 왓사까라가 다시 이런 비구가 한 명이라도 있느냐고 묻자 아난다는 
    있다고 말하며, 다음 열 가지 덕성을 갖춘 비구가 바로 그러한 자라고 설명한다. 열 가지 덕성은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라제목차의 조문을 잘 지키며, 올바른 행동을 하고 사소한 잘못도 꺼려 
    범계하지 않는다. 둘째,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잘 호지하며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한다. 셋째, 적은 양의 의식주와 약품으로 만족한다. 넷째, 현세에서 행복하게
    머물게 하는 四禪을 어렵지 않게 얻는다. 다섯째, 神足通을 갖고 있다. 여섯째, 天耳通을 갖고 있다. 
    일곱째, 他心通을 갖고 있다. 여덟째, 宿命通을 갖고 있다. 아홉째, 天眼通을 갖고 있다. 열 번째, 漏盡通
    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열 가지 덕성을 갖춘 자를 자신들은 존경하고 존중하며 의지한다고 아난다는 대답
    하고 있다. (MN. III, pp.7-15) 이자랑, 「초기불교 승가의 운영 원리와 지도자의 역할」,「동아시아불교
    문화」28, 2016, pp.176-177. 

앞서 지적한 갈마의 주요 원칙 중 하나는 만장일치이다. 그런데 사실 만장일치로 결론을 낸다는 것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계산이 다르다. A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반드시 싫은 누군가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만장일치가 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갈마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만장일치여야 한다. 만장일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 그것은 다름 아닌 ‘여법’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올바른 판단력과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격의 비구가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제시한 방향성에 구성원은 동의하는 것이다. 전원출석과 만장일치라는 갈마의 원칙은 지도자격의 한 두 비구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승가 운영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는 단지 법과 율에 근거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을 갈마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알리고 이해시키며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갈마는 단순한 의사결정 수단이 아닌, 지도자의 올바른 판단력을 기반으로 구성원들을 지도해 가고 교화해 가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여법화합갈마는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여법한 판단을 내린 지도자의 결정에 개인적인 이익이나 감정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현전승가의 모든 정식 구성원이 동의하고, 그 후의 승가 운영에 지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화합승’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V. 결론

승가라는 음사어의 원어인 상가(saṃgha)는 ‘함께’라는 의미를 지니는 saṃ이라는 접두어와 ‘운반하다, 가지고 오다’라는 의미의 흐리√hṛ라는 동사로 이루어진 말로, 그 의미는 ‘함께 운영하는 집단’이라고 생각되고 있다.24) 언제부터 이 말이 불교의 출가공동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최초기의 불교문헌이라 여겨지고 있는『숫따니빠따』에서 붓다를 ‘상가를 가진 사람(saṃghin)’ 혹은 ‘가나를 가진 사람(gaṇin)’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의 출가공동체를 가리킬 때 상가나 가나라는 말이 일찍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말이 붓다 당시에 상공업자의 조합이나 정치 단체, 종교 단체 등을 의미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25) 상가는 특정한 목적 하에 조직된 단체를 가리키며, 불교의 승가 역시 자연히 형성된 집단이 아닌, 공통된 목적을 지니는 조직체로서의 집단임을 엿볼 수 있다.    
24) 平川彰, ?原始佛敎の佛敎? (東京: 春秋社, 1964), pp.3-10.
25)「사문과경」등을 보면, 六師外道 역시 saṃghin 혹은 gaṇin 등으로 부르고 있다. (DN. I, p.47)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세속생활을 영위하는 일반인에게 있어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은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만, 수행자는 다르다. 초기문헌에서 흔히 출가를 ‘집 있는 상태에서 집 없는 상태로’라는 말로 표현하듯이, 수행자에게 있어 세속적 욕망이나 집착은 끊어야 할 대상이다. 이렇듯 일반사회를 떠나 승가의 일원이 됨으로써 이들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 함께 살아가게 된다. 출가 전,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왔을 이들이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을 때, 얼마나 많은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붓다는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하며 그들이 목표를 향해 잘 나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규정들을 마련했다. 출가하기 전의 신분 등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평등을 강조하고, 법랍에 의한 질서 유지를 강고히 했다. 또한 의식주의 공동 분배를 통해 구성원으로서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보시물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세속적 가치관으로는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삶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붓다가 마련한 이러한 원칙들은 승가의 화합, 그리고 그 화합을 통해 구성원들이 가능한 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들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 바로 갈마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구성원의 평등, 법랍에 의한 질서 유지, 의식주의 공동 분배와 같은 원칙들은 말로만 해서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붓다의 설법을 통해 감화를 받고 누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실천하려 하겠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마음은 느슨해지고, 제어되지 못한 세속적 본능까지 가동하기 시작하면 실천에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틈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바로 갈마이다. 모든 갈마에 구성원 전원이 참석하여 안건을 공유하고, 승가의 지도자격에 해당하는 장로의 여법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갈마를 통해 선정된 소임자가 의식주를 공동 분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은 붓다가 제정한 규정에 따라 진행된다. 한 치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그 갈마는 무효 처리된다.   

‘화합’이란 단어는 곳곳에서 쉽게 사용되는 말이지만, 진정 실현할 의지를 가지고 바라본다면 결코 쉽지 않은 단어이다. 하지만, 실현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비구들아, 또한 화합승가는 서로 기뻐하며 말싸움하지 않고 함께 설계(說戒, 포살)하며 평안하게 머문다. 비구들아, 화합승가는 서로 욕하지 않고 서로 비방하지 않고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청정한 믿음이 없던 자들은 청정한 믿음을 갖게 되고, 이미 청정한 믿음을 갖고 있던 자들은 한층 더 믿음이 증장한다. 26)    
26) “puna ca paraṃ bhikkhave saṃgho samaggo sammodamāno avivadamāno ekuddeso phāsu 
    viharati, saṃghe kho pana bhikkhave samagge na c’ eva aññamaññaṃakkosā honti na ca 
    aññamaññaṃ paribhāsā honti na ca aññamaññaṃ parikkhepā honti na ca aññamaññaṃp
    ariccajanā honti, tattha appasannā c’ eva pasīdanti pasannānañ ca bhīyobhāvo hoti.” 
    (AN. III, p.67)

화합한 승가는 승가 구성원을 편안하게 해 줄뿐만 아니라, 불교에 신심을 이미 갖고 있는 재가신도들의 신심은 증장시키고, 아직 불교에 신심을 갖지 못한 일반인에게도 믿음을 갖게 한다고 설하고 있다. 화합은 승가의 내부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닌, 일반사회에 승가의 위상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