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선원청규」로부터 본 총림의 식생활 - 율장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이자랑

실론섬 2018. 2. 27. 19:44

[동아시아불교문화] 32집, 2017. 12, 255~282

선원청규로부터 본 총림의 식생활

- 율장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

 

음[NRF-2011-36-A00008].) 

이 자 랑/동국대학교 HK교수

 

Ⅰ. 서론

Ⅱ. 계율에서 청규로 –자각 종색의 계율관

Ⅲ. 호계(護戒) 에 보이는 불응식․비시식

 1. 먹어서는 안 될 음식

 2. 비시식과 재죽이시(齋粥二時)

Ⅳ. 부죽반(赴粥飯) 에 보이는 발우공양의 특징

 1. 정인(淨人)의 역할

 2. 끽식법과 중학법

Ⅴ. 결론

 

<국문초록>

본고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청규로 알려진 자각 종색(自覺宗賾)의

원청규(禪苑淸規)에 나타나는 식생활을 율장과 비교하며, 양자 간의 유사성

및 청규의 특징을 밝힌 것이다.

 

인도와 다른 환경을 가진 중국에서 불교가 정착하면서 인도 성립의 ‘율장’

외에 다양한 규범집이 등장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청규(淸規)’이다. 청

규는 중국의 선종 교단에서 지켜야 할 일상적인 생활 규범 혹은 그러한 규범

들을 모아놓은 규범집을 일컫는다. 선종 교단의 규범집이라는 청규의 기본

적 성격은 마치 청규를 율장과 완전히 다른 규범집으로 오해하게 만들지만,

중국의 승가 역시 불교 승가인 이상, 현실을 고려하면서도 전통적인 율장의 

가르침에 담긴 이념이나 정신은 살리는 방향으로 규범을 조정해가고 있다.

 

본고에서는 ?선원청규?에 나타나는 식생활에 관한 규범 가운데 불응식(不

應食)과 비시식(非時食), 정인(淨人), 끽식법(喫食法)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율장의 해당 내용과 비교하며, 어떤 점에서 청규가 율장의 조문 내

지 이념을 반영하고 있는지 또 어떤 점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들 네 가지 점에 있어서 청규는 율장의 규정이나 이념을 비교적 충실하

게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응식도 비시식도 율장의 기본 입장을 잘

반영하면서, 한편으로 율장보다 한층 더 엄격한 규정을 하고 있다. 특히 불응

식의 경우에는 율장의 규정에 대승불교 내지 보살계의 규정을 추가적으로

고려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정인의 경우에는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정인

을 통해 음식을 보시 받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이 역시 율장의 ‘불수식계’의 이

념을 가능한 한 살려내려 애쓰고 있다. 한편, 끽식법의 경우에는 ?사분율?의

중학법 에 나오는 규정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이에 배가 넘는 규정들을 추

가함으로써 더 엄격하게 음식을 먹는 법을 규정해가고 있다.

 

Ⅰ. 서론

 

불교의 정식 출가자인 비구·비구니가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은 율

(律, vinaya)이라 불린다. 이는 수범수제(隨犯隨制), 즉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 악행을 금지하는 형태로 고따마 붓다가 직접 제정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이들 율 조문을 모아놓은 문헌은 ‘율장(律藏, Vinayapiṭaka)’

이라고 한다. 율장은 비구·비구니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저질러서는 안 될

행동을 모아놓은 부분[經分別]과, 승가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행동을 모아놓은 부분[犍度部]으로 구성되는데, 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조문만 발췌해서 모아놓은 조문집은 ‘바라제목차(波

羅提木叉)’라고 한다. 바라제목차에 담긴 조문의 수는 부파에 따라 약간의 차

이가 있는데, 법장부 전승의사분율계통에 의하면 비구 250·비구니348계

이다. 이는 구족계(具足戒)라고도 불린다. 비구·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반

드시 이 계를 받아야 하며, 이후에는 실천해야 한다.

 

비구·비구니가 되려면 반드시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인도에서

는 물론이거니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동아시아에서도 유지된 것으로 보

인다. 그런데 실천적인 면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얼마나 철저하

게 지켰는가 하는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인도의 경우에는 구족계 내지 이를

포함한 율장의 규정에 따라 각 부파의 승가가 운영되었다는 점에 크게 의문

을 제기할 여지는 없다. 즉, 실천적인 면에서 새로운 규범집의 등장과 같은

이렇다 할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후나 풍토, 문화 등이 다른 중

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율의 실천은 많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중국의 불

교도 역시 구족계 수지를 위한 수계갈마의 정비에 오랜 세월 공을 들였고, 또

한 이를 실현했지만, 인도와는 다른 환경 속에서 율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

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일찍이 도안(道安, 312∼385)이 중국승가

의 독자적인 승제(僧制)로서「승니궤범불법헌장삼례(僧尼軌範佛法憲章三

例)」를 제정하는 등, 중국의 상황을 고려한 규범집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청

규(淸規)’는 이들 규범집 가운데서도 가장 광범위하고 체계적이며, 또한 중국

을 비롯한 한국·일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규범집이라고 할 수 있다.

 

청규란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의 선종 교단[叢林]1)에서 지켜야 할 일상적

인 생활 규범 혹은 그러한 규범들을 모아놓은 규범집을 일컫는다. 최초의 청

규는 당(唐) 중엽에 백장산(百丈山)의 회해(懷海, 720∼814 혹은 749∼814) 2)

가 제정한 일명백장청규(혹은고청규(古淸規))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

은 814년에 제정되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3) 현존하는 최

고(最古)의 청규는 북송 숭녕(崇寧) 2년(1103)에 자각 종색(自覺宗賾)이 지은

선원청규(禪苑淸規)이다.4) 종색은 원부(元符) 2년(1099)부터 숭녕 2년까지

5년여에 걸쳐 널리 각지의 총림을 방문하고, 거기서 본 여러 생활규정을 망

라하여선원청규를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서문에 의하면, 종색은 당시

백장청규가 소실되고 많은 변용이 가해진 점을 안타까워하며 백장의 뜻을

되살리고자 이 청규를 새롭게 제정하였다고 한다.선원청규는 성립 이후

중국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아시아 선림(禪林)에서 생겨난 수많은 청규의

근원을 이루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1) 선종교단을 흔히 叢林이라고 표현하는데,「대지도론」(T25, 80a)에서는 “승가는 중국말로 衆이
   라고 한다. 많은 비구가 한 곳에서 화합하는 것을 승가라고 하니, 마치 많은 나무가 모인 것을
   숲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하나의 나무를 숲이라 부르지 않고, 하나하나의 나무가 없으면
   숲이 없듯이, 이처럼 한명 한명의 비구는 승가라고 부르지 않는다.(僧伽秦言衆 多比丘一處和
   合是名僧伽 譬如大樹叢聚是名爲林 一一樹不名爲林。除一一樹亦無林 如是一一比丘不名爲
   僧)”라고 하여, 총림을 승가에서 유래하는 말로 보고 있다.
2) 백장회해의 생몰연대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송고승전」(T50, 771a)이나 ?景德傳燈錄?
   (T51, 250c)에 의하면, 백장회해는 元和 9년(814)에 95세로 죽었다고 하지만, 陳詡의 ?塔銘?
   (T48,1156b)에 의하면, 원화 9년에 세랍 66세, 승랍 47세로 죽었다고 한다. 따라서 전자의 설을 
   채용한다면, 그의 생몰연대는 720년∼814년이 되며, 후자에 의하면 749년∼814년이 된다.
3)「백장청규」의 내용은「송고승전」10권의 百丈懷海傳 ;「경덕전등록」권6의 禪門規式 ;「선
   원청규」권10의 百丈規繩頌 ;「칙수백장청규」권8의 古淸規序 ; 陳詡의 唐洪州百丈山故
   懷海禪師塔銘 등을 통해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실제로「백장청규」가 성문
   화된 형태로 존재했는가, 그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나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는 林德立(2010), 648-652를 참조.
4)「선원청규」10권, 宋賾集,『卍續藏經』臺灣판 제111책, 438-471.

 

선종 교단의 규범집이라는 청규의 기본적 성격은 마치 청규를 율장과 완

전히 다른 규범집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중국의 승가 역시 불교 승가

인 이상, 현실을 고려하면서도 전통적인 율장의 가르침에 담긴 이념이나 정

신은 살리는 방향으로 규범을 조정해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5) 본고에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율장과 비교하며선원청규에 나타나는 식생활의 특

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는선원청규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청규가 편

찬될 때 선승들이 갖고 있던 계율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한

작업이 될 것이다. 특히 식생활에 주목하는 이유는 종색이 성문율인사분율

과 대승보살계인 ‘보살계’ 양자를 모두 고려하여 청규를 제정하고 있음을 서

술한 후, ‘수계(受戒)’ 및 이어 수계 후 계율에 근거한 나날의 생활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작이 바로 식생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종색은 호계(護戒)를

실천하는 첫걸음이 식생활에 있다고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5) 율장과 청규의 관련성 및 이를 기반으로 총림의 식생활을 다룬 대표적인 연구로는 신공(2007),
   1-20; 신공(2008a), 124-177 ; 신공(2008b), 395-438 ; 신공(2008c), 63-89 등이 있다. 본고 
   역시 전체적인 논지는 이들 선행 연구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청규에 등장하는 식생활과 관련된 
   규정들이 율장의 어떤 규정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를 좀 더 상세히 고찰함으로써, 청규와 율장
   의 관련성을 좀 더 명확하게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선원청규는 6종의 이본(異本)이 남아 있으며, 이 중 초간본이 어느 것인가

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다.6) 본고에서는 이본 중에서도 각 권의 항목 배열순

서가 가장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고려판본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

개한다.7)

6)「선원청규」의 異本 및 그 특징에 관해서는 鏡島元隆·佐藤達玄·小坂機融(1972), 1-25의 ‘解
   說’ 부분에서 상세히 다루어진다. 이에 따르면, 고려판본은 南宋 寶祐 2년(1254)의 中雕本이
   라고는 해도, 그 저본은 북송 政和 원년(1111)의 판본에 근거한 것이므로「선원청규」간행 후
   불과 8년 후의 판본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古形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7) 본고에서는 최법혜 편(1987)을 텍스트로 사용한다. 이 외, 번역 등은 최법혜 역주(2001)을 참
   고한다.

 

Ⅱ. 계율에서 청규로 –자각 종색의 계율관

 

불교의 정식 출가자인 비구·비구니는 ‘율장’이라고 하여, 고따마 붓다가

제정했다고 전해지는 율 조문들을 모아놓은 규범집에 근거해서 사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은 인도의 경우에는 초기나 부파, 그리고 대승에 이르기까

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중국 역시 3세기 중반 경에 담가가라(曇柯迦羅 혹

은 曇摩迦羅, Dharmakāla)가 ?승기계본?을 역출하고, 이어 위의 정원(正元,

254∼256)에 낙양에 온 안식국의 담제(曇諦)라는 승려가담무덕갈마(曇無德

羯磨)를 번역함으로써 수계갈마에 필요한 ‘계본(戒本)’과 ‘갈마문(羯磨文)’이

갖추어지고 이에 근거한 수계식이 이루어지면서, 이후 율에 대한 관심이 증

가해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안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포살(布薩)을 실

시하고 승가를 형성하여 운영했으며, 제대로 된 계본의 입수를 위해 많은 노

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5세기 전반 경에는 4대 광율(廣律)이

모두 번역되고, 이어 광통(光統)율사 혜광(慧光, 468∼537)이 법장부의사분

에 의거하여 수계할 것을 제자들에게 권유함으로써 6세기 이후에는

분율수지자가 늘어나고, 나아가 도선(道宣, 596∼667)이사분율에 근거

하여 율을 확립함으로써 이후 불교의 출가수행자는 반드시 율에 따라 250계

를 수지하고, 이로 인해 계체를 얻어 비구가 되어 수행하게 된다. 이처럼 율

에 근거하여 수행하는 곳이 바로 ‘율사(律寺)’이다. 열반종·성실종·천태

종·화엄종 등 수행하는 교리의 내용은 달라도 250계를 수지하고 수행한다

는 점에서 모두 ‘율사’라 불린다.8)

8) 平川彰(1995), 5-6

 

한편, 5세기 후반 경에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에 의해 중국에

선종이 출현하게 되는데,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그 후 제6조 혜능(慧能, 638∼

713)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교단으로서 자립하지 못한 채 선승들 역시 율사에

기거하였다. 이러한 사정은선문규식의 다음 기술로부터 유추 가능하다.

 

선종은 처음 소실(少室: 달마)로부터 시작하여 조계(혜능)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율사(律寺)에 기거하였다. 비록 별원으로 되어 있었지만, 설법(說

法)·주지(住持)에 있어 [율사의] 법도에 부합하지 못하였다.9)

9)「경덕전등록」제6권 禪門規式 (T51, 250c) “以禪宗肇自少室 至曹溪以來 多居律寺 雖別院
   然於說法住持未合規度”

 

찬영의대송승사략권상 별립선거(別立禪居) 에서도 “달마의 가르침이

이미 실천되고 있었지만, 근기가 서로 맞는 자들은 서로 화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교화하는 대중들은 오직 사원에 따라 별원에 거주하여 특별히 다른

제도는 없었다.”라고 한다.10) 이들 기록으로 볼 때 선승들은 율사 안의 일정

한 주처에 거주하면서 함께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선종의 승려 역시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되어 율사에 머물며 250계를 지키는 생활을 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성립한 선종은 제자 양성법이나 수행 방법 등에 있어 인도

에서 성립한 계율로는 다스리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불

편함이 발생하였고, 결국 선종의 독자적인 사원 건립이나 수행 규범이 절실

하게 요청된다. 이렇게 해서 8세기 말에 탄생한 것이 백장 회해에 의한고청

이다. 회해는 혜능의 제자인 남악 회양(南嶽懷讓)의 제자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제자이다. 백장청규의 출현은 단순한 규범의 출현에 머무는 것이 아

닌, 선종의 교단적 독립의 계기를 제공해 준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0)「대송승사략」(T54, 240a) “達磨之道既行 機鋒相遘者唱和 然其所化之衆唯隨寺別院而居且
    無異制

 

백장청규는 제정 후 널리 실천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북송시대에 이

르면 많은 변화가 더해져 그 본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상실해 간다. 이에 숭

녕 2년(1103)에 자각 종색이 백장의 의도를 살리고자선원청규(혹은숭녕

청규라고도 함)를 제정하게 된다.선원청규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종

색은 당시 백장에 의해 제시된 규범이 변형되어 감을 아쉬워하며, 그 원래 모

습을 되살리려는 의도 하에선원청규를 편찬하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입장은백장청규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단지백장청규가 편찬된 당과

선원청규가 편찬된 북송이라는 시대적 차이에 의한 주변 상황의 변화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내용에서 항목 상 차이가 보일 뿐이다. 종색의 계율관은

백장을 이어받아 성문율과 대승계를 함께 수지하며, 청규에도 그 중요한 이

념을 반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종색은선원청규권1의 수계 항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삼세의 제불(諸佛)이 모두 출가하여 도를 이루셨다. 인도의 28대 조사와

중국의 6대 조사들이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했는데 모두 사문이었다. 모두

계율을 엄정히 지녀 두루두루 삼계에 커다란 모범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

로 참선하며 도를 묻는 데는 계율이 첫 번째가 된다. 허물을 여의고 잘못을

막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처를 이루며 조사가 되었겠는가.11)

11)「선원청규」제1권 수계 “三世諸佛皆曰出家成道 西天二十八祖 唐土六祖 傳佛心印 盡是沙
    門 蓋以嚴淨毘尼 方能洪範三界 然則參禪問道戒律爲先 卽非離過防非 何以成佛作祖” (최법
    혜 편(1987), 19)

 

이와 같이 종색은 여법한 지계지율의 정신이 불도를 배우는 요체임을 확

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율의 내용은 수계 마지막 부분에서 “성문계

를 받고 난 뒤에는 반드시 보살계를 받아야 하니, 이것이 불법에 들어오는 순

서이다.”12)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문·대승의 두 계를 가리킨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수계제도는 당대에 성립한 남산 율종의 소의 율

장인사분율의 구족계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대승의 보살계를 수지하

는 것이 통례였다. 북송(北宋) 진종(真宗)의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 무

렵에 중국 전토의 72주(州)에 계단이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도선율사의

계단도경(戒壇圖經)에 의한 구족계였다고 한다.13)

12)「선원청규」제1권「수계」“旣受聲聞戒 應受菩薩戒 此入法之漸也” (최법혜 편(1987), 20)
13) 小川貫弌(1968), 48-70.

 

이어 호계(護戒) 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계 후에는 항상 수호해야 한다. 차라리 법 있어 죽을지라도 법 없이 살

지 아니한다. 소승의사분율은 4바라이·13승가바시사·2부정·30니살

기·90바일제·4바라제제사니·100중학·7멸쟁이며, 대승의 범망경은 10

중 48경[계]이다. 모두 모름지기 독송 통리하되 지범개차를 잘 알지니라.14)

14)「선원청규」제1권「호계」“受戒之後常應守護 寧有法死 不無法生 如小乘四分律 四波羅夷·
    十三僧伽婆尸沙·二不定·三十尼薩耆·九十波逸提·四波羅提提舍尼·一百衆學·七滅諍
    大乘梵網經十重四十八輕 竝須讀誦通利 善知持犯開遮” (최법혜 편(1987), 20)

 

종색에 의하면, 선문에서 수행자의 참사문법(參師問法)은 모두 계율에 의

거한 생활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성문계·보살계를 수지하는 것이 불도 입문

의 첫걸음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사분율에서 규정한 4바라이를 비

롯한 구족계 및 대승범망경에서 설하는 10중 48경계를 잘 알고 그 지범개

차를 아는 것이다. 이로 보아 종색은 성문율인사분율과 대승보살계인 ‘보

살계’ 양자를 모두 고려하여 계율에 근거한 청규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는 백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기본으로 주장하는 바는 대소승에 국한하지 않고, 또한 대소승과

다른 것도 아니다. 마땅히 박(博)과 약(約)을 절중하여 새로운 규범을 제정

하여 수행에 힘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적 인 뜻[創意]으로 

선종의 처소를 따로 건립하게 되었다.15)

15)「경덕전등록」제6권「禪門規式」(T51, 250a) “吾所宗非局大小乘 非異大小乘 當博約折中設於
    制範務其宜也 於是創意別立禪居”

 

이처럼 회해를 비롯하여, 그의 뜻을 이어받은 종색 역시 성문율과 보살계

를 잘 절충하는 방식으로 청규를 제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의도 하에 제정된선원청규제1권에서는 수계 에 이어 호계

에서 수계 후에 항상 계율을 잘 지키며 살 것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 중 나날

의 생활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불응식(不應食)과 비시식(非時

食)이라는 식생활의 문제이다. 이하, 이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청규와 율

장 사이에 발견되는 공통점 내지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 호계(護戒) 에 보이는 불응식·비시식

 

1. 먹어서는 안 될 음식

선종사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본격적인 정착 집단생활은 달마 이후 혜가

(慧可)·승찬(僧粲)을 거쳐 제4조 도신(道信, 580∼651)에 이르러서라고 알려

져 있다.16) 도신은 무덕 연간(618∼626) 초기에 파두산(破頭山) 즉 쌍봉산(雙

峰山)으로 옮겨가, 이후 500명의 대중과 더불어 30여 년 동안 집단생활을 했

다. 그리고 도신이 651년에 입멸하고 나면, 이어 제5종 홍인(弘忍, 601∼674)

역시 쌍봉산 동쪽에 있는 빙묘산(憑墓山)으로 옮겨가 500명의 대중과 더불어

20여 년 동안 집단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2대에 걸친 산에서의 집단생활로

인해 이들은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양식과 더불어 질서 유지를 위한 나

름대로의 규율이 필요해졌던 것으로 보인다.17) 이 이후의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이때 집단생활과 자급자족의 필요성 내지 실천의 경험은 이후

선종 교단이 교단으로서 자립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나아가 회해

에 이르러 본격적인 규범을 제시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16) 增永靈鳳(1953), 277-278; 김호귀(2013), 69-70 등을 참조.
17) 增永靈鳳(1953), 277-278.

 

음식의 조달 방법이 탁발에서 자급자족으로 바뀌면, 승가의 식생활은 여

러 가지 면에서 변화를 겪게 된다. 무엇보다 음식 재료의 취사선택이 가능해

진다. 율장에서는 탁발이나 청식(請食)처럼 재가자로부터 보시 받은 음식만

을 허용하기 때문에 사실상 음식 재료의 선택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율장에

서는 음식 재료 자체를 문제 삼아 금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는 물과

양지(楊枝)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재가자의 보시를 통해 공급받아야 한다는 원

칙과 무관하지 않다. 즉, 보시 받는 음식에 대해 좋고 싫음을 드러내거나 요

구 혹은 거부해서는 안 된다. 율장에서 삼종정육(三種淨肉), 즉 자신을 위해

죽이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의심 가는 상황의 고기가 아니라면 수용해도 좋

다고 하는 것은 탁발 등으로 인해 재료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이 배경으로 작

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18) 그런데 재료를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면,

보다 적극적으로 음식 재료의 취사선택이 가능해져서 어떤 이유에서든 피하

고 싶은 식재료는 적극적으로 피할 수 있게 된다. 불응식, 즉 먹어서는 안 될

음식에 대해선원청규제1권 호계護戒 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8) 탁발로 인해 식재료의 선택이 불가능했던 것이 물론 육식 허용의 하나의 배경으로 거론될 수
    있지만, 이 보다는 붓다가 음식보다 그 사람의 身口意가 청정한 것에 더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 육식 허용의 직접적인 배경으로서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불응식으로 파[蔥]·부추[韮]·염교[薤]·마늘[蒜]·고수[園荽]·술과 고기

[酒肉] 및 생선과 토끼[魚兎]·유병(乳餠)·소락(酥酪)·굼벵이즙[蠐螬汁]·

돼지와 양의 기름[猪羊脂]을 쓰는 것은 모두 불응식이다. 병연(病緣)을 만날

경우 오히려 신명을 버릴지라도 끝내 술과 고기의 속된 맛으로 금계를 깨뜨

리지 말지어다.19)

19)「선원청규」제1권「護戒」“不應食(蔥韮薤蒜園荽·酒肉·魚兎及乳餠·酥酪·用蠐螬汁·猪
    羊脂竝不應食 如遇病緣 寧捨身命終不以酒肉俗味毁佛禁戒)” (최법혜 편(1987), 20)

 

먼저 ‘파[蔥]·부추[韮]·염교[薤]·마늘[蒜]·고수[園荽]’20)는 오신채(五辛

菜)라 불리는 식재료를 가리킨다. 오신채를 구성하는 다섯 식재료는 문헌마

다 약간씩 명칭에 차이가 보이지만,21) 강렬한 맛과 냄새를 지니는 식재료라

는 점에서 공통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오신채는 탐심과 분심(憤心) 등을

일으킨다 하여, 인도에서 편찬된 대승경전을 비롯하여 중국 찬술 경전인

망경등에서 육식과 더불어 엄격하게 섭취를 금지하고 있다. 술 역시 율장

에서도 보살계에서도 금지되는 음식이다. 청규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이어받

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오신채와 육식, 술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본고에서 새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

다.

20)「선원청규」에 보이는 오신채를「불조통기」(T49, 323a)의 “此方言五辛 當云葱韭薤大蒜小蒜”
    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파·부추·염교·큰 마늘·작은 마늘로 이해하기도 한다. 鏡島元隆·
    佐藤達玄·小坂機融(1972), 18-19. 
21) 심준보(1996), 4-5

 

본고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음식들, 즉 생선[魚]과

토끼[兎]․유병(乳餠)․소락(酥酪)․굼벵이 즙[蠐螬汁]․돼지나 양의 기름[猪

羊脂] 등이다. 이들은 왜 불응식으로 거론되는 것일까? 생선은 고기와 유사한

이유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토끼는 육식의 범주에 들어갈 것으로 보

이는데, 왜 여기서 별도로 거론되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유독

토끼가 고기 섭취를 위한 대상으로서 쉽게 살생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22)

아니면 어토(魚兎)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편, 유병은 우락

(牛酪)의 일종으로, 소젖을 끓인 후 초(醋)를 더하여 두부 모양으로 굳힌 것이

라고 한다.23) 소락은 소나 산양 등의 젖으로 만든 우유 내지 요구르트와 같은

음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굼벵이 즙이라고 번역한 ‘제조즙(蠐螬汁)’은

다른 판본에서는 ‘제조란(蠐螬卵)’이라고 되어 있어,24) 굼벵이를 삶은 물인지

아니면 유충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굼벵이와 관련된 음

식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돼지나 양의 기름은 말 그대로 이들 동물로

부터 얻어낸 기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25)

22)「莊子」「外物篇」에는 ‘생선을 얻은 다음에는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얻은 다음에는 창애
    를 잊어버린다.(得魚而忘筌 得兎而忘蹄)’라고 하여 이미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 수단을 잊
    어버린다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 나온다. 통발[筌]이란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도구를, 창[蹄]은 토끼를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를 각각 가리킨다. 이 표현으로 보아도 토
    끼는 사람들이 쉽게 잡아서 육식을 하게 되는 대표적인 동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23) 鏡島元隆·佐藤達玄·小坂機融(1972), 19.
24) 鏡島元隆·佐藤達玄·小坂機融(1972), 16
25) 율장에 의하면, 동물이나 생선의 기름 등은 약으로 사용되고 있다. 

 

생선이나 토끼 혹은 나아가 굼벵이와 돼지·양의 기름은 육식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유병과 소락은 왜 불응식으로 거론되는지 의아하다.

기존의 관련 연구에서도 이 점은 별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율

장에서 말하는 ‘미식(美食, paṇīta-bhojana)’의 개념과 연결시켜 보면 의외로

쉽게 이해가 된다. 미식이란 맛나고 영양가 많은 음식을 일컫는다. 그 구체적

인 종류로는 기름(tela)·꿀(madhu)·설탕(phāṇita)·생선(maccha)·고기

(maṃsa)·숙소(熟酥, sappi)·생소(生酥, navanīta)·우유(khīra)·요구르트

(dadhi) 등의 유제품이 언급된다. 율장에서는 이들 음식의 섭취 자체를 금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요구해서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다만 병

중(病中)일 경우에는 예외이다.26) 율장에서 미식에 대해 이런 규정을 두는

이유는 이들이 맛나고 영양가 많은 음식들이기 때문에 탐착할 가능성이 높

기 때문이다.

26)『사분율』(T22, 664b) 

 

선원청규」「호계 항에서 언급하는 불응식의 종류 역시 그 내용을 잘 살

펴보면, 오신채와 술 외에는 모두 율장에서 말하는 미식의 내용과 일치한다.

물론 구체적인 종류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고기나 생선, 토끼를 비롯하여 유

제품과 관련된 유병과 소락, 단백질원인 굼벵이 즙(혹은 유충)과 돼지·양의

기름 등은 모두 율장에서 말하는 미식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불응식을 제시하는데 있어 청규가 율장과 다른 점은 율장의 경우에는 이

런 미식들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데 비해 청규는 완전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 다시 말해 금지 내지 규제하는 이유나 강도가 좀 더 명확하고 강하다. 이

배경에는 대승 교리나 보살계의 발전이 있을 것이며, 또한 자급자족으로 인

해 미식과 관련된 유제품이나 단백질 공급 차원의 맛나고 영양가 많은 음식

을 탐하고 또 실제로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등장하게 되는 본

능적 차원의 문제가 존재할 것으로 생각된다. 

 

2. 비시식과 재죽이시(齋粥二時)

불응식과 나란히 거론되는 것은 ‘비시식(非時食)’이다. 비시식이란 비시

(非時, vikāla), 즉 때가 아닌 때에 취하는 식사를 말한다. 비시란 한낮부터 다

음 날 날이 밝기 전까지를 가리키는 말로,27) 율장에 의하면, 정오까지 식사를

마쳐야 하며 비시에는 음식물을 섭취해서는 안 된다.28) 율장에서 왜 식사 시

간을 정오까지로 정했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음식물의 조달이 탁발

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일반사회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규정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무더운 인도의 경우, 남자들은 이른 시간에 나

가서 일을 하고, 여자들은 집에서 오전 중에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

었으며, 오후는 쉬는 시간이고, 저녁에는 모임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무

렵이므로, 일반사회의 생활 패턴을 고려하여 탁발 시간이 오전으로 지정되었

을 가능성이 높다.

27) “非時者 從日中乃至明相未出 (비시란 한낮부터 날이 밝기 전까지이다.)”『사분율』(T22,
    662c)
28) 바일제법 제37조 ‘非時食戒’. 걸식이든 청식이든 식사는 오전 중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사
    분율』(T22, 662c ; Vin.Ⅳ, 85-86) 

 

여하튼 식사는 정오까지 마쳐야 하며, 그 이후의 비시에는 목구멍에 찌꺼

기가 걸리지 않을 정도로 묽은 주스만이 허용된다. 이것이 율장의 기본 입장

이며, 식생활의 경우 율장 안에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확인되지만,

이 원칙만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29) 이 비시식의 문제에 대해 ?선원청규?

에서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29) 이자랑(2011), 289-323

 

비시식이란 소식(小食)·약석(藥石)·과자·미음·콩죽[荳湯]·야채죽[荽

汁] 류 등 재죽이시(齋粥二時)가 아니면 이는 모두 비시식이니라. 모두 엄

금한다.30)

30)「선원청규」제1권「護戒」“非時食(小食·藥石·與菓子·米飮·荳湯·荽汁之類 如非齋粥二
    時竝是非時食也 竝冝嚴禁)” (최법혜 편(1987), 20)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시식이란 정오가 지난 때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말한다. 이 문장에서는 소식(小食)·약석(藥石)·과자·미음·콩죽[荳湯]·

야채죽[荽汁] 류가 비시식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이 중 소식이란 정식이 아닌,

말하자면 묽은 죽처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말한다. 약석은 일반적

으로 선원에서 저녁에 먹는 죽을 말한다. 과자 이후의 것들은 말 그대로의 의

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비시식으로 언급되는 것들은 죽이나 간식류

등 간단하게 요기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음식으로, 정식 식사는 아니지만 가볍

게 허기를 달랠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이다. 율장에서 비시장(非時漿)이라고

하여 음료용 장류(漿類)를 비시식으로 언급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차이가 있

음을 알 수 있다. 장이란 과일이나 곡물 등으로 만든 건더기가 목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묽게 만들어진 음료를 말한다.31) 율장에서는 이들 장류를

비시식으로서, 다시 말해 비시에 마시는 음료로서 허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위의 인용문에서는 비시식의 종류를 언급한 후에 ‘모두 엄금한다.’고 기술하

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응식과 더불어 이들 비시식도 금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경이 되면 약석 등이 허용된 것으로 보이는데,32) 그 이전에는 이

를 포함하여 비시식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1) 장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김미숙(2013), 297-318을참조. 
32) 약석은 1209년에 無量壽가 편찬한「日用淸規」를 시작으로, 그 이후의 청규에서는 모두 허용
    된다고 한다. 즉, 재죽이시에 더하여 하루 세 번의 식사가 허용된 셈이다. 鏡島元隆·佐藤達
    玄·小坂機融(1972), 19.

 

한편, 이 문장에서 주목되는 것은 ‘재죽이시’라는 표현이다. 재죽이시란 점

심과 아침의 이시(二時)에 각각 먹는 밥[齋]과 죽(粥)을 의미한다. 즉, 아침에

는 죽을 먹고, 점심에는 밥을 먹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달마대사 도래 이후

에 선승들의 식생활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는가는 알 수 없지만, 백장이

청규를 편찬한 당나라 시대부터는 아침과 점심의 하루 두 번의 식사가 허용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재죽이시이다. ?선원청규?에서도 이를 이어받고

있다. 한편, 율장에서는 오전 중에 먹는 한 번의 식사가 기본이다. 이는 시식

(時食), 말하자면 올바른 때에 먹는 정식 식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아침에 죽을 먹는 행위가 중국 선종에서 새롭

게 시작된 습관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죽이시라는 표현 속에는 

아침에 먹는 죽을 정식 식사로 헤아린다는 점에서 분명 율장의 입장과는 다

르다. 하지만, 율장에서도 정오에 이루어지는 정식 식사 전에 소식(小食) 내

지 전식(前食)으로서 죽을 먹는 행위를 전제로 하는 기술이 발견된다는 점에

서 볼 때 중국 선종 교단의 독자적인 습관이 아닌, 율장의 규정을 이어받아

실행된 습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3) 예를 들어 율장 수계건도 에는 제자

가 화상을 모시는 내용을 기술하는 가운데 “비구들아, 제자는 화상을 올바르

게 모셔야 한다. 올바르게 모신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른 아침에 일

어나 신발을 벗고 상의를 오른 쪽 어깨에 걸친 후 양지를 건네고 물을 건네고

좌구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죽이 있다면 그릇을 씻은 후에 죽을 드려야 한

다. 죽을 다 마신 후에는 물을 드리고, 그릇을 받아 밑에 두고, 상하지 않도록

잘 씻어서 넣어두어야 한다.”라는 내용이 등장하며, 이는 제자가 아플 경우에

화상이 제자를 돌보는 경우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설해진다. 탁발에 대한 규

정은 이 이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 탁발하기 전의 상황을 가리키

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3)「선원청규」제1권「부죽반」에서는 “죽의 열 가지 이익은 행하는 이를 饒益하게 하며, 과보로
    생천하며, 究竟常樂이라. 大良藥이니 능히 飢渴을 덜어 없애며 施受淸凉을 얻으며, 함께 無
    上道를 이룬다.(粥有十利 饒益行人 果報生天 究竟常樂 又云 粥是大良藥 能除飢渴消 施受
    獲淸涼 共成無上道)”라고 하여 죽이 갖는 열 가지 공덕을 말한다. 율장에서도 “죽을 시여하
    는 자는 목숨을 시여하고, 色을 시여하고, 즐거움을 시여하고, 힘을 시여하며, 辯을 시여하
    고, 죽을 마시면 굶주림을 멸하고, 갈증을 제거하며, 바람을 순서대로 하고, 배를 정화하고,
    소화를 돕는다.”라고 한다.(Vin.Ⅰ, 221) 이처럼 죽을 바라보는 입장은 청규와 율장 사이에 공
    통점이 많다. 

 

또한 약건도 에 의하면, 부처님이 죽과 밀환(蜜丸)을 먹는 것을 허용하시

자, 사람들이 이른 아침 부드러운 죽과 밀환을 비구들에게 먹였다. 이로 인해

비구들은 배가 불러 그 후의 정식 식사를 충분히 받을 수 없었고, 모처럼 훌

륭한 식사를 충분히 준비한 대신을 화나게 했다. 이를 계기로 “한 사람으로부

터 초대식을 받으면서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제공된 부드러운 죽을 먹어서

는 안 된다.”는 조문이 제정된다. 이 조문이 의도하는 바는 ‘이미 정식 초대를

받은 경우에는 아침에 죽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자

면, 탁발의 경우에는 이른 아침에 죽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율장에서는 죽 자체가 식사로서 헤아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탁발 전에 먹

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선원청규?에서는 재죽이시라고 하여

죽 자체를 식사로 헤아리고 있다. 이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사실상 식사 시

간이나 횟수와 관련하여 율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부죽반(赴粥飯) 에 보이는 발우공양의 특징

 

1. 정인(淨人)의 역할

선원청규제1「부죽반은 죽과 밥을 먹을 때 지켜야 할 규범을 모아놓은

장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총림의 식생활 중 발우 공양에

관한 구체적인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죽반의 좌위(坐位)는 모름지기 계랍의 자차(資次)에 의하여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데,34) 이는 죽이나 밥을 먹을 때 법랍에 따라 좌석 배치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이후 부죽반 에서는 발우 공양을 위해 당(堂)으로 들

어와서 앉는 자세부터 시작하여 매우 상세한 규정을 한다. 그것은 발우 공양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으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중한 의식처럼 진행된다. 이러한 과정은 사실 율장에

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이며, 선종사원 특유의 발우공양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의식 속에는 식생활과 관련하여 율 조문과의 밀접한 관련

성을 보여주는 다음 두 가지 요소가 발견된다. 하나는 ‘행식법(行食法)’에 등

장하는 정인(淨人)의 역할이며, 또 하나는 ‘끽식법(喫食法)’에 기술된 규정이

다. 먼저 전자부터 보자.

34)「선원청규」제1권「부죽반」“粥飯坐位 須依戒臘 資次” (최법혜 편(1987), 30) 

 

‘행식법’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땅히 정인의 손으로 행하여야 한다. 승가는 손수 식을 취하지 말라. 정

인의 행익은 그 예 겸손하고 섬세하여야 한다.35)

35)「선원청규」제1권「부죽반」“當淨人自行 僧家不得自手取食 淨人行益禮合低細” (최법혜 편
    (1987), 34)

 

짧은 내용이지만, 여기서 승가는 직접 음식을 취하지 말고 정인의 손으로

행하라고 지시하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부죽반 에서 묘사된 총림

에서의 발우공양을 보면, 승려들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 그들을 위해 이미 마

련되어 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비구들이 제각각 마을로 나가 탁발로 얻

은 음식을 먹는 것을 전제로 하는 율장과는 달리,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한

곳에 준비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준비된 음식을 스스로 취

하는 것이 아닌, 정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발우에 나누어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다면, 여기 등장하는 ‘정인’이란 누구일까? 선행연구들에서도 이 점에 대

해 언급하는 것은 없는 듯하다.

 

‘정인’은 율장에서는 종종 등장하는 용어이다. 교단 내에서의 이들의 위치

나 역할 등에 관해서는 아직 총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 일부

연구 성과에 의하면, 이들은 사미나 우바새 등이었으며, 주된 역할은 비구가

구족계를 어기지 않도록 곁에서 보조하는 것이었다.36) 예를 들어, 구족계 바

일제 제11조 ‘벌초목계(伐草木戒)’에 의하면, 비구는 풀이나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비구 스스로 승원을 건립해야 할 상황이 되면, 이를 하지 않

을 수 없다. 이럴 경우라도 베면 구족계를 어기는 것이 되므로, 정인에게 “이

것을 아시오, 이것을 주시오, 이것을 옮기시오, 이것을 원하오, 이것을 정(淨)

한 것으로 하시오.”라는 말로 의사를 전달하여 정인으로 하여금 풀이나 나무

를 대신 베도록 한다.37) 설사 형식적일지라도 비구가 율을 어기지 않도록 보

조적인 역할을 해주는 사람을 정인(kappiya-kāraka)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

기서 ‘정’이란 율에 비추어 어긋나지 않는, 요컨대 합법적이라는 의미이다. 따
라서 이와 같은 역할은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미나 우바새 등과 같은 교단의 
구성원이 도맡게 된다.
36) 松田眞道(1981), 137-154 ; 山極伸之(2001), 203-221 ; 이자랑(2014), 291-320 등.
37) “anāpatti imaṃ jāna imaṃ dehi imaṃ āhara iminā attho imaṃ kappiyaṃ karohīti bhaṇati.” (Vin.
    Ⅳ, 35) 

위에서 인용한 ‘행식법’에 등장하는 정인 역시 율장에 나오는 정인과 동일
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38) 바일제 제40조 ‘불수식계(不受食
戒)’에 의하면, 비구는 물과 양지를 제외한 모든 음식을 반드시 보시를 통해
해결해야 하며, 스스로 취해서는 안 된다.39) 길가에 주인 없는 나무에서 떨어
진 과일이 나뒹굴어도 스스로 집어먹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다른 이에게 부
탁하여 그가 집어서 보시하는 형식으로 취해야 한다. 이 점을 고려했을 때,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정인은 발우 안에 음식물을 넣어줌으로써 사실상
‘불수식계’를 지키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38)「선원청규」에서는 여기 외에도 제8「龜鏡文」과 제10「百丈䂓繩頌」에서 ‘정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구체적인 역할이나 실체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특히「구경문」에
    서는 ‘淨頭’라는 말과 함께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39)『사분율』(T22, 663c)

이는 선종교단이 음식물의 조달 방법으로 탁발 대신 자급자족을 선택했다
는 점과 관련시켜 생각해보면 매우 흥미롭다. 엄격한 집단생활을 하며, 음식
물의 조달이나 조리 등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생각했던 선종교단에서는 자
급자족으로 선승들의 끼니를 마련하였지만, 율장에서 강조하는 ‘탁발 혹은
걸식’이라는 기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갈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
종교단의 독립 이전에 율사에서 어떤 형식으로 식생활이 해결되었는지 상세
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만약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40) 그
들이 250계를 받고 이에 근거하여 생활했다면 ‘불수식계’를 무시할 수는 없었
을 것이다. 이 불수식계는 단지 ‘250계 가운데 하나’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차원의 조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행자는 일체의 생산 활동을 금하고 오로
지 수행에만 힘쓰며, 음식물은 재가자의 보시를 통해서만 해결한다고 하는
승가 운영의 엄격한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 만약 부죽반 행식법에서 언급
하는 정인이 본고의 추정대로 율장에 나오는 ‘정인’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
면,41) 선종교단이 자급자족으로 음식물을 조달하면서도 실제로 발우 안에 
음식을 담는 그 순간에는 보시를 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공양에 담긴 중요
한 의미를 살리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0) 平川彰(1995), 5-6.
41) 中村元,「佛敎語大辭典」‘淨人’ 항에서는 정인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로 든다. ①비구에게 적
    합하지 않은 물건을 보관하거나 혹은 적합하도록 비구를 도와주는 給仕者, ②승원에서 일하
    는 사람, ③절에서 아직 출가하지 않고 승려들에게 給仕하는 사람. 이 중 ①과 ②는 율장에
    서, ③은 청규에서 사용되는 정인의 의미로 각각 들고 있다. (中村元(1981), 754-755) 그런데
    사실상 이 셋은 구체적인 역할에서 차이가 있을 뿐, 구족계를 받지 않고 승려들의 일을 도와
    주는 일군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무엇보다 이들이 똑같이 ‘정인’ 즉 율에 부합하는가
    아닌가의 의미를 갖는 ‘정’이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끽식(喫食)법과 중학법

끽식법, 즉 음식을 먹을 때의 행의와 관련해서 부죽반 에서는 다음과 같

이 기술한다.

 

사분율에 이르되 “마음[意]을 바르게 하여 음식을 받으라. 발우를 잘

잡고 국과 밥을 받으라. 국과 밥을 함께 먹어라. 차곡차곡 먹어라. 발우의

중앙을 후벼 파서 먹지 말라. 병이 없는데 자신을 위해 국과 밥을 찾아 얻지

말라. 밥으로 국을 덮고 나서 다시 얻기를 바라지 말라. 다른 이의 발우 안

을 보고 불만스러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마땅히 발우에 생각을 매

어두며 먹어야 한다. 밥을 크고 둥글게 뭉쳐서 먹지 말라. 입을 벌리고 반식

을 기다리지 말라. 음식을 입에 넣고 말하지 말라. 밥을 둥글게 뭉쳐서 입속

에 던져 넣지 말라. 밥을 떨어뜨리며 먹지 말라. 밥을 볼에 넣고 [볼록거리

면서] 먹지 말라. 밥을 씹으며 소리 내지 말라. 밥을 숨 들이쉬며 먹지 말라.

혀로 핥으며 먹지 말라. 손을 흔들며 먹지 말라. 흩어진 밥알을 손으로 뿌리

며 먹지 말라. 더러운 손으로 식기를 잡지 말라.” 위의 율문은 모두 마땅히

존수하라.42)

42)「선원청규」제1권「부죽반」“四分律云 正意受食 平鉢受羮飰 羮飰俱食 以次食 不得挑鉢中
    央食 無病不可得為己索羮飰 不得以飰覆羮更望得 不得視比座鉢中起嫌心 當繫鉢想食 不得
    大摶飰食 不得張口待飯食 不得含食語 不得摶飰擲口中 不得遺落飰食 不得頰飰食 不得嚼
    飰作聲 不得噏飰食 不得舌䑛食 不得振手食 不得手把散飰食 不得汙手捉食器 巳上律文竝
    宜遵守” (최법혜 편(1987), 34)

 

이는 본문에서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사분율중학법(衆學法)에 근

거한 규정들이다. 중학법은 율장에 따라 조문의 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용

은 동일하다.43) 삼의(三衣)의 착용법이나 식사예절 등 일상생활에서 출가자

가 갖추어야 할 위의를 다룬다. 하지만, 단순한 일상적인 위의나 예의범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탁발이나 청식 등으로 재가신도를 만나러 갔을 때 지

켜야 할 행동들에 관한 규정이 주를 이룬다. 특히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여

러 규칙들은 중학법 의 조문 중에서도 탁발할 때 지켜야 할 21가지의 규정

들이다.44)

43) 중학법의 내용은 대략 다음 일곱 가지로 분류 가능하다. ①옷 및 涅槃僧(nivāsana)의 착의법
    에 관한 것, ②속가에 갈 때의 행동거지에 관한 것, ③식사 예절, ④설법 예절, ⑤대소변에 관
    한 예절 ⑥上過人樹戒(사람 키보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는 행위를 금지하는 계), ⑦불탑에
    관한 것.
44) 이들 규정은『사분율』(T22, 702b-709a)에서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순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다만『사분율』의 경우에는 이에 2개가 더해져 끽식법과 관련된 것은 모두 23조이다. ‘발우를
    바르게 하여 국과 밥을 받는다’는 것을『사분율』에서는 ‘발우 안에 알맞게 밥을 받으라’와 ‘발
    우 안에 알맞게 국을 받으라’라고 표현한다. 이 외 ‘차곡차곡 먹어라’와 ‘발우 씻은 물을 함부
    로 버리지 말라’라는 조문이 더 추가되어 있다. 

 

청규에서 제시하는 규정을사분율에 보이는 인연담 등에 근거하여 이해

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음식을 받으라[正意受食]’는 것

은 재가자로부터 음식을 받을 때 정신을 차리고 받으라는 것이다.사분율

에 의하면, 거사들이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는데, 육군비구들이 정신을 차리

지 않고 받다가 국과 음식을 흘린 것을 계기로 이 조문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발우를 잘 잡고 국과 밥을 받으라[平鉢受羮飯]’는 청규의 규범은 중학법 에

서는 정확하게 대응하는 조문을 찾기 어려운데, ‘발우 안에 알맞게 밥을 받으

라’와 ‘발우 안에 알맞게 국을 받으라’라는 조문이 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국과 밥을 함께 먹어라[羮飰俱食]’라는 것은사분율에 의하면,

거사가 밥을 돌린 후 국을 가지러 간 사이에 비구들이 밥을 다 먹어버리고,

다시 밥을 가지러 간 사이에 국을 먹어버리자 거사가 마치 굶주린 이들 같다

고 비난한 것을 계기로 제정되었다고 한다.

 

한편, ‘차곡차곡 먹어라[以次食]’란 발우 안에 담긴 음식을 여기저기 들쑤시

지 말고 한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먹으라는 것으로, 맛난 음식을 찾아 휘저으

며 먹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이다. ‘발우의 중앙을 후벼 파서 음식을 먹지 말

라[不得挑鉢中央食]’라는 것 역시 맛난 것을 먼저 먹기 위해 가운데를 후벼 파

며 먹는 것을 가리킨다. ‘병이 없는데 자신을 위해 국과 밥을 찾아 얻지 말라

[無病不可得為己索羮飰]’라는 것은 먼저 국과 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며, ‘밥으로 국을 덮고 나서 다시 얻기를 바라지 말라[不得以飰覆羮更望得]’

란 국을 더 얻기 위해 밥으로 국을 숨기는 것을 말한다. ‘다른 이의 발우 안을

보고 불만스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不得視比座鉢中起嫌心]’라는 것은 함

께 걸식한 비구의 발우 안에 담긴 음식을 보고, 그 사람의 밥이 자신이 받은

것보다 많다며 불만스러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발우에 생

각을 매어두며 먹어야 한다[當繫鉢想食]’란 발우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이것

은 비구들이 국과 밥을 받아 놓고 좌우로 돌아보는 사이에 곁의 비구가 그의

국을 숨긴 것을 계기로 제정되었다.

 

‘밥을 크고 둥글게 뭉쳐서 먹지 말라[不得大摶飰食]’는 것은 밥이 한 입에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크게 뭉쳐서 먹는 것을 말한다. ‘입을 벌리고 반식

을 기다리지 말라[不得張口待飯食]’는 것은 밥이 오기 전에 입을 크게 벌리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음식을 입에 넣고 말하지 말라[不得含食語]’, ‘밥을 둥

글게 뭉쳐서 입속에 던져 넣지 말라.[不得摶飰擲口中]’, ‘밥을 떨어뜨리며 먹

지 말라[不得遺落飰食]’, ‘밥을 볼에 넣고 [볼록거리면서] 먹지 말라[不得頰飰

食]’, ‘밥을 씹을 때 소리 내지 말라[不得嚼飰作聲]’, ‘밥을 빨아들이면서 먹지

말라[不得噏飰食]’, ‘혀로 핥으며 먹지 말라[不得舌䑛食]’는 음식물을 입에 넣

고 먹을 때 지켜야 할 것들로 표현 그대로이다. 한편, ‘손을 털면서 먹지 말라

[不得振手食]’는 음식에 풀이나 벌레가 있거나 손에 더러운 것이 있을 경우 혹

은 밥을 받기 전에 손에 무언가 묻어서 털어 버리는 것은 괜찮지만, 그 외에

는 손을 털면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흩어진 밥알을 손으로 뿌리며

먹지 말라[不得手把散飰食]’와 ‘더러운 손으로 식기를 잡지 말라[不得汙手捉

食器]는 것도 표현 그대로이다.

 

중학법으로 규정된 이들 조문은 비구가 탁발이든 청식이든 재가자로부터

음식공양을 받을 때 지켜야 할 규정이다. 그런데 이들 조문이 제정되기에 이

른 인연담을 보면, 이러한 행동들은 모두 재가자의 비난을 계기로 금지되고

있다. 즉, 재가자가 보기에 이런 행동은 출가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붓다는 이를 고려하여 이 행동들을 금지한

것이다. 따라서 중학법에 담긴 이들 규정은 재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비구

의 위의와 관련된 것들이다.

 

어찌 보면, 선종교단의 경우에는 승당(僧堂)이라는 일정한 장소에 선승들

이 모여 발우공양을 하기 때문에, 원래 중학법이 제정된 의도를 고려한다면

이런 규정들이 필수불가결하지는 않다. 특히 손으로 음식물을 취하여 먹는

행위는 인도 고유의 것으로 중국의 선원에서 이런 행위를 전제로 한 규정이

필요할 리 없다. 하지만 청규에서는 이를 비구의 ‘위의’라는 면에서 중시하며

?사분율?의 규정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나아가 이에 더하여 ‘머리를

긁어 비듬을 발우 속에 떨어뜨리지 말라’는 등 발우 공양을 마무리 지을 때까

지 지켜야 할 규정을 한층 더 상세히 규정해 간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가 아닌, 발우 공양을 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수행의 한 과정으로 파악하여 의

미를 부여함으로써 보다 완벽한 끽식법을 추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Ⅴ. 결론

 

이상,선원청규에 나타나는 식생활에 관한 규범 가운데 불응식과 비시

식, 정인, 끽식법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율장의 해당 내용과 비교하

며, 어떤 점에서 청규가 율장의 조문 내지 이념을 반영하고 있는지, 또 어떤

점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들 네 가지 규정은 식생활과 관련된 원칙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불응식이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하는 식재

료와 관련된 것이며, 비시식은 ‘언제 먹어야 하는가’라고 하는 식사 시간 및

그 내용물의 문제이다. 정인이란 음식은 재가자의 보시를 통해 받아야 한다

고 하는 음식물 조달 방법과 관련된 것이며, 끽식법에 나타나는 규정들은 실

제로 음식물을 먹을 때 비구가 취해야 할 위의 갖춘 행동과 관련된다. 이들

네 가지 문제는 율장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이며, 시대적 변

화와 더불어 식생활에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면서도 마지막까지 원칙이 유

지되었던 것들이기도 하다.

 

이들 네 가지 점에 대해 청규는 율장의 규정이나 이념을 비교적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응식도 비시식도 율장의 기본 입장을 잘 반

영하면서, 한편으로 율장보다 한층 더 엄격한 규정을 하고 있다. 특히 불응식

의 경우에는 율장의 규정에 대승불교 내지 보살계의 규정을 추가적으로 고

려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정인의 경우에는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정인을

통해 음식을 보시 받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이 역시 ‘불수식계’의 이념을 가능

한 한 살려내려 애쓰고 있다. 한편, 끽식법의 경우에는 ?사분율?의 중학법

에 나오는 규정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이에 배가 넘는 규정들을 추가함으

로써 더 엄격하게 음식을 먹는 법을 규정해가고 있다.

 

선원청규서문에서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종색은 청규에서 율장과 보

살계의 가르침을 적절하게 더불어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한층 더 엄격한 규정들을 추가함으로써 율장과도 보살계와도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총림이라고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생활할 때 빚어질 수 있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나아가 식사작

법을 비롯하여 매순간 하는 행동들이 그대로 불법 수행이라는 선종 특유의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엄격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