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불교 공( ) 개념의 수행적 성격/박재은

실론섬 2018. 7. 30. 16:01

인도철학 제52집(2018.4), 209~243쪽

초기불교 공( ) 개념의 수행적 성격

__빠알리 니까야를 중심으로__

박재은/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강사. jaeeun8@daum.net

 

Ⅰ 서론. 

Ⅱ 공의 개념 및 용례. 

Ⅲ 공의 실현 기법. 

Ⅳ 수행에 의한 공의 실현. 

Ⅴ 결론.

 

[요약문]

빠알리어 순냐타(suññatā)는 우리말로 ‘공’, ‘공함’ 또는 ‘공성(空性)’이

라 하는데 무언가 ‘결여’되거나 ‘결핍’되어 있는 상황을 묘사할 때 주로 사

용된다. 공 개념은 기본적으로 수행자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교설되었던

교리와 체험의 장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공 개념이 실수

(實修)에 반영되고 투영된 결과, ‘공에 머물기’나 ‘공의 실현’이 교설되고 권

장된다. 

초기불교 공 개념이 지닌 수행적인 성격에 대한 탐구는 단지 사색을 넘

어 실제적인 차원에 대한 강조이자 본래적인 방향으로의 선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먼저 공의 개념과 용례를 알아보고, 공의 실현이 담지한

의미와 그 실현 기법을 살펴본 다음, 공 개념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실수의

행법들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을 실현하기에 앞서 공과 불공(不空)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가 선행되

어야 한다. 선행 이해를 바탕으로 선정과 선정 삼매의 통찰, 매순간에 대한

분명하고 바른 앎, 대상에 대한 부작의(不作意)와 같은 행법들에 의해서 공

은 실현된다. 그리고 공을 실현하는 전 과정에 있어서 ‘분명하게 알다’, ‘바

르게 알다’, ‘바르게 보다’, ‘수관(隨觀)하다’, ‘관찰하다’, ‘부작의(不作意)하

다’와 같은 정신적인 기법들은 지속적으로 발현 유지되기 때문에 초기불교

공 개념은 강한 실천 체험적인 성격을 가진다.

 

Ⅰ. 서론

 

본고는 Pāli-Nikāya를 통해서 공(suññatā, 空)의 기본 개념 및

용례를 검토해 보고 이를 토대로 공이 지닌 본래의 실천 수행적인

측면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공은 불교의 여러 교

리들 중 우선순위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

면서 빈번하게 회자되고 논의되어 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시공

간적인 전개 과정에서 공의 기본 개념이나 본래의 취지는 일정부

분 희석되기도 하고 때론 체험적인 영역은 저 멀리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성을 두고 이질적이

거나 상반된 방향으로의 전개라고 단정 짓기에 앞서 관심의 영역

이나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성의 산물이라고 하면서 폭넓

게 수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기본 개념이나 취지에서 살펴보면 공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과 이

해가 관념적이거나 현학적이며 심지어 일원론과 유사하다는 일각

의 지적에 대해선1) 한번쯤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1) 이와 관련하여 허인섭은 공 개념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다양한 기원과
   문제점을 분석하고 공 개념의 현대적 해석은 서구 종교와 철학의 관심 하에
   이루어진 새로운 불교 이해 방식을 따라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불교의 이해방식을 분석하는 준거들을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첫째부터 셋째는 턱(Andrew P. Tuck)이 정리한 것으로서 서구의
   관념주의적 관점을 적용한 해석, 20세기 전반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관점을
   적용한 해석,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활용한 해석이다. 넷째는
   도가(道家)적 관점을 적용한 해석이며 다섯째는 깔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의 공 개념 이해방식에 필자의 해석을 가미한 것이다. 이러한
   준거들 중에서 특히 서구의 세 가지 방식과 도가적 해석 방식의 영향이 큰
   것으로 추정된 20세기 중후반 동양권 학자들의 공 개념은 낭만주의적
   관념주의자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허인섭
   2010:713-746). 여기서 한 가지, 용수의 중론에 나타난 연기관을 현대적
   해석의 준거로 삼고 있는데 이를 준거로써 일반화하는 문제는 재론의 여지를
   남기지만 공 개념을 둘러싼 다양한 이견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런가 하면, 에드워드 콘즈는 다음과 같이 통시공적인 분석을
   통해서 다양하게 발전 전개된 사례를 지적하기도 한다. 소위 소승불교에서
   공은 원래 열반에 이르는 길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매우 풍부하게
   되었고 다르마(法)들의 자성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개념을 분석하면서 한층
   보강되었다. 또한 공은 유위법과 무위법에 똑같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유위와
   무위는 다르지 않다는 데로 이어졌고 그 결과로서 일원론이 나오게 되었다. 
   한편, 유럽철학에서 공은 변증법의 논리형식에 의해서 강화되었고 비슷한
   형식을 한 유럽의 형이상학적 체계들과 많은 유사성을 보여준다(Conze
   1973:61). 본고에서 말하는 공에 대한 변용은 주로 허인섭이 파악한 20세기
   중후반 동양권학자들의 해석과 이해방식을 염두 해 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초기불교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공 개념에 대한 수행적인 성격을 논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대승불교에도 존재하는 수행적인 성격을 상대적으로
   배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공의 기본 개념은 ‘빔(虛)’, ‘없음(無)’이나 ‘부재(不在)’로 무언가

‘결여’나 ‘결핍’되어 있는 상황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개념은 수행자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한 체험의 장으

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다. 일찍이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도 강조한 바 있듯이, 공이라는 것은 구제(salvation)의 과

정에 그 진의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순수한 지성적인 개념으로 받

아들인다거나 존재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순수한 가능성을 의미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유출되는 잠재적인 가능태나 모든 것은 공에서 나오고 공으로 돌

아간다는 우주론적인 시도들도 본래 공이 의도하는 바는 아니다. 

그것은 실천적인 기반을 벗어나는 순간 곧 왜곡되어 버린다. 따라

서 이 용어의 의미는 지혜를 통한 실제적인 과정 안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2)

2) Conze(1973) pp. 61-62.

 

빠알리 니까야에는 공의 추상명사형인 ‘순냐타(suññatā)’에 비

해서 형용사형인 ‘순냐(suñña)’가 훨씬 더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초기불교에 있어서 공에 대한 관심이 철학적인 차원, 즉 공성(空

性)으로서의 추상적인 면보다 ‘공의 실현(being empty)’이라는 현

상적인 차원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3)

3) Weeraratne(2007) p. 195. 실제로 니까야에서 ‘순냐’와 ‘순냐타’의 비율은 약 
   4: 1 정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실체적인 공을 포기하는 대신 공의 실현이라는 본래적

인 성격에 더 직접적인 주의를 돌리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4) 공

의 실현이란 수행자가 탁발하는 시간조차도 허비하지 않고 행하

는 감관의 대상에 대한 탐욕을 성찰하는 명상에서부터 37보리분

법을 위시한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이르기까지 불선한 법들을 제

거하기 위한 전(全) 노력의 과정이자 그 결과에 머무는 상태를 포

괄하는 등 총체적인 수행을 의미한다.5)

4) Anālayo(2015) p. 75.
5) MN Ⅲ pp. 294-297.

 

그러므로 공 개념이 지닌 수행적인 성격에 대한 탐구는 단지 사

색을 넘어 실제적인 차원에 대한 강조이자 본래적인 방향으로의

선회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초기불교에

있어서 공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이거나 주로 사상사적인 측면에

서 이루어져왔고 공 개념이 지닌 수행적인 성격에 대한 전반적이

고 체계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6) 이에 따라 먼저, 공

의 기본 개념과 용례를 알아보고, 공의 실현이 담지한 의미와 그

실현 기법을 살펴본 다음, 개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 행법

(行法)들을 검토해 봄으로써 초기불교에 말하는 공 개념의 실천

수행적인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6) 초기불교의 공과 관련된 최근의 국내 연구들 중에 이은주(2010) pp. 29-63이
   있다. 이글은 위빠사나(사념처수행)의 주된 행법을 ‘sati와 ’sampajañña‘로
   보면서 MN의 Cūlasuññatāsutta와 Mahāsuññatasutta에 나타난 공성과
   사념처의 위빠사나 수행과의 연관성을 검토한다. 공성을 수행적인 맥락에서
   이해한 시도는 주목할 만하지만 공에 대한 명료한 개념적인 이해나 관련
   행법에 대한 보다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담마끼띠(2014 pp. 297-325)는 MN의 Cūlasuññatāsutta와
   Mahāsuññatasutta를 토대로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의 공관에 기초가 되었다고
   강조하면서 이 두 경전에 있어서 공의 실현 단계를 소개한다. 그러나 아공과
   법공의 교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공 개념이 지닌 수행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그의 박사학위논문(2016)은
   초기경전의 공사상의 개념적인 이해와 사상사적인 전개과정 및 수행적인 
   측면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비교적 참고할 만하지만 이 역시도 아공과
   법공 및 사상사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실천적인 성격을 지닌 공 개념 및
   행법에 대한 좀 더 집중된 논의는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Ⅱ. 공의 개념 및 용례

 

공은 빠알리(Pāli)어로 순냐타(suññatā)라고 하는데 이것은 순냐

(suñña)나 순냐타(suññata)라는 형용사형에 추상명상형 어미 ‘-tā’

가 붙어서 이루어진 여성명사이다. 우리말로는 주로 ‘공(空)’이나

‘공함’ 또는 ‘공성(空性)’으로 옮긴다. 그 뜻은 ‘텅 빔(虛)’이나 없음

(無), 부재(不在) 또는 비실체성(非實体性) 등이며 영어로는 empti- 

ness, voidness, unsubstantiality로 표기한다.7)

7) Rhys Davids & Stede(1986) p. 717; Nyanatiloka(2004) p. 207.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요소는 사물이나 존재의 고유한 성격

(guṇa, 性)을 의미하므로 ‘공성’이라 하면 성격적인 특성에 무게를

둔 역어가 될 것이다. 어원의 형태는 √śū, √śvā, √śvi인데 흥미

롭게도 이들은 ‘자라다’, ‘증가하다’, ‘부풀어 오르다’의 뜻이 있

다.8) 이는 마치 풍선에 공기를 주입시키면 풍선이 부풀어 오르면

서 그 안은 텅 비게 되는 현상을 연상시킨다. 흔히 어떤 것의 외형

이 증가하면 상대적으로 그 내부는 빈 공간으로 남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형태의 어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8) 전재성 편저(2002) p. 697.

 

명사형 ‘순냐타’보다 경전에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형용사형 ‘순

냐’는 형태상으로 서로 구분되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으며 이들은

문맥에 따라 서로 혼용된다.9) 이 두 가지 형태가 쓰이는 몇 가지

용례들을 통해서 개념적인 이해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주목할 만한 것은 오온이나 자아가 지닌 비실체적인 성격에

관한 것이다. 

9) ‘순냐’와 ‘순냐타’는 동일한 의미이며 문맥에 따라서 형용사형과 명사형으로
   구분된다. 한편, 전재성은 MN의 Cūlasuññatāsutta에 나타난 공 ⇄
   불공(不空)으로의 지각의 변화를 인과적 과정으로 보고, 형용사형 ‘순냐’는
   이러한 지각 현상의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일상 회화적 문맥에서 상황의
   변화나 지각 내용의 변화를 의미하는 세속적인 진리를 대변하는 반면에
   명사형 ‘순냐타’는 공 ⇄ 불공의 인과적 과정을 여실지견하는 절대적 의미의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 말한다. 전재성(2002) pp. 225-227.

 

자아는 주관적인 관념을 지닌 영혼이나 에고로서 어떤 것을 소

유하거나 일어나는 현상을 뜻대로 통제하려는 성향을 지닌 일종

의 힘(power)이다. 자아 관념이 생긴 배경에는 변하지 않는 영원

이나 실체에 대한 견해가 존재한다. 실체라는 환상은 즐거움

(sukha)을 갈망하는 심리적인 충동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다

시 에고라는 환상으로 유지된다.10)

10) Bhikkhu Ñānananda(1997) pp. 101-103.

 

그러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고 경험되는 존재[오온]은 비어

있기(空) 때문에 견고한 실체(實体)를 지니고 있지 않다.11) 깔루빠

하나(D. J. Kalupahana)는 이러한 자아의 비실체성을 일러 비토대

주의(non-foundationalism)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인식

과 개인의 본성에 있어서 불변의 토대를 인정하기 어렵고 경험의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지속성도 없기 때문이다.12)

11) 中村元(1981) p. 42.
12) Kalupahana(1992) p. 64; p. 186. 아날라요는 연기에 대한 교설을 배경으로, 
    붓다가 자아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자아의 존재를 단순히 
    ‘nothingness’로 부정하면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결국
    업의 책임이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답변들 모두 거부한 것처럼, 자아의 존재를 부정할 때는 ‘empty’와
    단순한 ‘nothingness’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하여(Anālyo 2012:211) 자아의
    비실체성을 단순한 ‘無’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오온이나 자아의 비실체적인 성격을 말할 때는 ‘순냐’나 ‘순냐

타’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육근은 ‘텅 빈(suññā) 마을’이나 ‘빈

(suññā) 집’, ‘빈(suññā) 그릇’과 같고 아무 것도 없고(ritta) 공허

한(tuccha) 상태와 같으며, 오온은 항상하지 않고 괴로움이고 질

병이며 자아가 아니고 무너지기 때문에 텅 빈(suññā) 것이라거

나13) 자아에 대한 사견을 버리고 세상[근・경・식]을 빈 것(suññatā)

으로 보아야 한다는 식의 표현과 같은 것들이다.14) 또한 오온이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변하고 괴롭고 질병이고 무너지고 비었으

며(suññato) 자아가 아니라고(anattato) 하는 경구도15) 마찬가지

경우이다.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 것을 두고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16)

13) AN Ⅱ p. 128; p. 130; Ⅳ p. 423; MN Ⅰ p. 500. 이때 ritta와 tuccha는
    suññā와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14) Sn p. 217; SN Ⅳ p. 54.
15) MN Ⅰ pp. 435-436.
16) SN Ⅳ pp. 54-55; pp. 296-297.

 

오온이 ‘순냐’나 ‘순냐타’가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지닌

조건성, 즉 변화하는 성질 때문이다.17) 오온에 영원하거나 절대적

인 자아가 없다[무아, 無我]는 견해는 변화하는 성질을 보았기 때

문이며 이러한 견해는 이내 자아에 대한 집착의 제거로 연결되고

고(suffering)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18) 오온이 지닌 속성은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순냐’나 ‘순냐타’이고 ‘순냐’나 ‘순냐타’이기 때

문에 실체로서의 자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오온이나 자아의

성격은 그래서 비실체적이다. 

17) SN의 Kaccānagottasutta(Ⅱ p. 16)는 세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바른
    지혜로써 보면 세상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관념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연기하는 조건적인 존재의 무상성을 설한다. 
18) Choong Mun-keat(1999) p. 31.

 

다음은 장소와 관련된 것으로서 임의의 공간에 사람이 머물지

않는(empty)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무도 살지 않

는 곳은 ‘suññāgāra’이고19) 중생이 살지 않는 빈 범천의 궁전은

‘suññā brahmavimāna’이며 비어 있는 쎄리싸까 궁전을 ‘suññā

Serīsaka’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suññā-vana’라고 하면 빈숲이

된다.20) Dhammapada는 아무도 없는 빈 장소인 ‘suññāgāra’로

들어가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수행하도록 권고한다.21) 동

떨어지고 한적한 장소는 외부 세상의 방해로부터 자유롭고 마음

의 고요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머물면서 명상하기 적

합한 환경이 되어준다.22)

19) DN Ⅱ p. 291; AN Ⅴ p. 88; MN Ⅰ p. 519; SN Ⅳ p. 173.
20) DN Ⅰ p. 17; Ⅱ p. 356; Ⅲ p. 26.
21) Dhp p. 105.
22) Choong Mun-keat(1999) p. 9

 

이와 같이 임의의 공간이 텅 빈 채로 남아 있는 상태를 묘사할

때도 있지만 그 외에, 특정한 자질이나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했

을 때도 사용된다. 만일 사문이나 아라한인 자에게 팔정도가 있다

면 그것은 ‘아순냐(asuññā, 不空)’이고 반대로 없다면 ‘순냐’인데

팔정도를 갖추지 못한 그러한 자를 일러 사문이나 아라한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23) 경구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가능성이나 기회가 없을 때도 쓰이는데 일례로, 붓다가 유행자 왓

차곳따(Vacchagotta)에게 설법 한 내용이 이에 해당된다. 

23) DN Ⅱ p. 151.

 

한때 왓차곳따는 아지와까(Ajīvaka), 일명 사명외도(邪命外道)인

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지 붓다에게 묻는다. 이에 대해 붓다

는 그가 만약 사명외도라면 천상에 태어날 수 없다(suññā)고 하

여24) 성취 가능성이 없는 상황을 설명할 때 쓰이기도 한다. 그 밖

에 다음의 사례들처럼 번뇌가 남아 있지 않는 상태를 묘사할 때도

있다. 모든 무량한 마음의 해탈 가운데 아라한이 성취한 부동심해

탈(panākuppā cetovimutti)은25) 최상의 해탈인데 탐・진・치는 심

상(nimitta, 心像)을 만들지만 이 해탈은 심상을 만드는 탐・진・치

가 남아 있지 않다(suññā). 해탈한 자는 번뇌가 없고(suññata) 모

든 심상에서 자유롭다.26) 열반을 성취한 장로니 웃따마(Uttamā)에

게는 심상이 남아 있지 않으며(suññata),27) 해탈한 자의 경우는

번뇌를 제거하고 음식에 집착하지 않고 심상이 남아 있지 않아서

공하다(suññato).28)

24) MN Ⅰ p. 483.
25) 부동심 해탈은 확고해서 더 이상 동요하지 않는 아라한의 해탈한 마음이다. 이 마음이 
    무량심해탈(appamānacetovimutti)과 무소유심해탈(ākiñcaññācetovimutti)과 
    공심해탈(suññatācetovimutti)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에 최상이라고 한다(Ps Ⅱ p. 354).
26) MN Ⅰ p. 298; SN Ⅳ p. 297; Dhp. p. 26.
27) Thī p. 128.
28) Dhp p. 26. 

 

이들과 유사하게 번뇌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용례로 ‘순냐타 빳

싸(suññata passa)’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상수멸(想受滅)에서 나

올 때 나타나는 탐욕이 없는 마음인데 무상(animitta, 無相)접촉, 

무원(appaṇihita, 無願)접촉과 함께 경험하는 것으로서 일명 ‘공한

접촉’이라고 부른다.29) 상수멸에서 나온 초기의 상태는 열반을 대

상으로 과(phala)를 증득한 상태이다. 따라서 탐욕이 없는

(suññata) 감각 접촉이고 탐욕에 대한 심상이 없는 감각 접촉이며

탐・진・치를 원치 않는 감각 접촉이다30)

29) MN Ⅰ p. 302.
30) Ps Ⅱ p. 367. 

 

이상과 같이, 명사형 ‘순냐’와 형용사형 ‘순냐타’는 오온이나 자

아의 비실체적인 성격을 말할 때, 공간이 텅 비어 있는 상태를 나

타낼 때, 특정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때,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

한 가능성이나 기회가 없을 때 그리고 탐・진・치와 같은 번뇌가 남

아 있지 않은 상황 등에 사용된다. 요컨대, ‘순냐’와 ‘순냐타’는 문

맥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데,31)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없거나 결여되어 있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술어라는 점

이다. 

31) 그 외에 “tuvaṃtuvapesuññamusāvādā”라는 합성어는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AN Ⅳ p. 401; MN Ⅰ p. 110; p. 410),
    ‘pesuñña는 ‘중상모략’을 의미하기도 한다(DN Ⅲ p. 69)

 

Ⅲ. 공의 실현 기법

 

공은 실제적인 체험의 과정을 통해서 실현된다. 공의 실현을 다

른 말로 표현하면 “공을 통해서 과(果)의 성취에 머무는 것”이며32)

이때 ‘공에 머물다(suññatā viharati)’33)라거나 ‘공을 성취하여 머

물다(suññataṁ upasampajja viharati)’라고34) 표현한다. MN의

Piṇḍapātapārisuddhisutta를 통해서 공에 머물기나 공의 성취, 즉

공의 실현이 담지한 의미를 규정해 볼 수 있다. 

32) Ps Ⅳ p. 160; Ⅴ p. 105. "suññatā phala samāpatti vihāra"
33) MN Ⅲ p. 104; p. 294; Vin Ⅱ p. 304.
34) MN Ⅲ p. 111.

 

공을 실현하려면 감관의 대상을 통해서 발생하는 불선법들을

잘 성찰해야 하고(paṭisañcikkhitabba) 오개(pañca nīvaraṇā, 五

蓋)와 오취온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기 위해(pariññāya) 노력해야

하며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위시한 37보리분법을 닦고 명지와 해

탈(vijjāvimutti)을 성취하기 위해서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

다. 또 성취의 결과에 대해서는 기뻐하며 선법에 머무는 등 초기

불교 전(全) 수행의 과정과 결과 모두가 언급된다.35) 공의 실현 범

위에는 이처럼 수행법들의 실천이 총망라되기 때문에 만일 그것

이 불선법은 제거하고 선법을 성취,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

이라면 그리고 궁극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모두 공의 실현

에 해당된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 이러한 수행법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이상을 실행하고 있거나 이미 그 결실을 얻었다면 그들을

일러 모두 ‘공을 실현하는 자’ 또는 ‘공에 머무는 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35) MN Ⅲ pp. 294-297. 

 

그럼 구체적으로 공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다음에 제시된 술

어들은 그 실제적인 성취 가능성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공의

실현을 설하는 장면에서 직접 언급되는 술어들은 대부분 ①

pajānāti, ②sampajānati, ③samanupassati, ④anupassati, ⑤

paccavekkhati, ⑥amanasikāroti들이다.

 

그럼 먼저 ①빠자나띠(pajānāti)에 대한 사전적인 이해부터 살펴

보자. 이 동사는 jānāti에 강조형 접두사 ‘pa’가 붙은 형태로 ‘있는

그대로를 진실하게 알다’, ‘이해하다’, ‘식별하다’ 등의 뜻이 있다. 

보통 우리말로는 ‘분명하게 알다’로 옮기는데36) 특히 괴로움, 괴

로움의 발생과 소멸, 소멸하는 길을 ‘빠자나띠’하는 자를 일러

paññavā, 즉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것처럼37) 보통 지혜(paññā)

를 수반한다. 

36) Rhys Davids & Stede(1986) p. 387; 전재성 편저(2005) p. 449.
37) MN Ⅰ p. 292. 

 

‘빠자나띠’와 매우 유사한 ②쌈빠자나띠(sampajānati)는 pajānati에

접두사 ‘sam’이 붙여진 형태인데 이때 ‘sam’은 ‘올바른’, ‘같

은’, ‘공평한’과 같은 뜻이 있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바르게 알다

로 옮긴다.38)

38) Rhys Davids & Stede(1986) p. 681; 전재성 편저(2005) p. 653. 이 동사는
    특히 ‘사띠-쌈빠잔나(sati-sampapajaññaṇa)’처럼 사띠와 짝을 이루어 자주
    등장하는데(AN Ⅱ 198; Sn p. 95; p. 167; MN Ⅲ p. 221) 이때는 보통
    ‘분명한 알아차림’이나 ‘올바른 알아차림’ 또는 한자로
    ‘정념정지(正念正知)’라고 부른다. 

 

그리고 ③쌈아누빠싸띠(samanupassati)의 경우는 ‘sam + anu-

passati’인데 sam은 앞의 경우처럼 ‘올바른’, ‘같은’, ‘공평한’이고, 

anupassati는 ‘보다(to see)’, ‘지각하다(perceive)’이기 때문에 ‘바

르게 보다’가 된다.39)

39) Rhys Davids & Stede(1986) p. 683. 

 

또한, 앞의 ‘쌈아누빠싸띠’에서 ‘sam’이 없는 형태인 ④아누빠

싸띠(anupassati)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anu’ + ‘passati’의 합성

어인데 이때 접두사 ‘anu’는 방향을 지시하는 ‘~ 따라서(along)’라

는 의미로 가장 빈번하게 쓰이며 그 외에 ‘반복해서’라는 뜻이 있

다. passati는 ‘보다(to see)’인데 보는 행위는 단순히 바라보는 것

을 넘어 ‘아는(to know, recognise)’ 차원을 말한다.40) 여기서 앞

의 ‘쌈아누빠싸띠’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anu’의 의미를 살리자면

정적(靜的)인 것이 아닌, 주시를 옮기면서 보는 동적(動的)인 차원

의 따라가면서 보는 수관(隨觀)이 되어야 한다. 

40) Rhys Davids & Stede(1986) p. 33; p. 447; 전재성 편저(2005) p. 117; p. 125.

 

한편, ⑤빠짜웩카띠(paccavekkhati)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paṭi’ + ‘ava’ + ‘ikkhati’의 형태인데 이때 ‘paṭi’는 ‘~에 반대해서’,

‘~을 향해서’이고 ‘ava’는 ‘아래로’, ‘밑으로’이며 ‘ikkhati’는 ‘보다

(to see)’의 뜻이 있다. 따라서 관찰하다(to look upon), 검토하다

(review), 고찰하다(consider), 심사숙고하다(contemplate) 따위로

해석한다.41)

41) Rhys Davids & Stede(1986) p. 384; 전재성 편저(2005) p. 447; p. 453.

 

끝으로 ⑥아마나씨까로띠(amanasikāroti)가 있다. 이 동사는 부

정접두어 ‘a’에 ‘manasikāra’ + ‘ti’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manasikāroti는 ‘주의(attention)를 기울이다’, ‘숙고(pondering)하

다’, ‘생각을 고정(fixed thought)시키다’의 뜻이며 한자로 옮길 때

는 ‘작의(作意)하다’이다.42) 따라서 ‘amanasikāroti’는 그것의 부정

형이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 ‘생각을 고정시키지 않다’, ‘부

작의(不作意)하다’가 된다. 

42) Rhys Davids & Stede(1986) p. 521; 전재성 편저(2005) p. 537. 

 

이상의 ‘분명하게 알다’, ‘바르게 알다’, ‘바르게 보다’, ‘수관하

다’, ‘관찰하다’, ‘부작의하다’와 같은 기법들은 대상, 즉 근・경・식

의 현상을 마주할 때 늘 취해야 할 정신적인 태도들로서 공을 실

현하는 길과 직결된다. 

 

이들은 피상적으로 보면 서로 이질적인 것처럼 보일런지 모르

지만 ⑥아마나씨까로띠(amanasikāroti, 부작의 하다)를 제외하고

는 대상에 대한 ‘분명하고 올바른 앎’과 ‘관찰’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아마나씨까로띠’의 경우는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다른 술어들과 각도를 조금 달리하는데, 후자가 공

통적으로 대상들과의 직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전

자는 애초에 그것으로부터 관심을 거두고 멀리 한다는 점에 있어

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지만 불선법을 제거하고 선법을 닦기 위한

노력이자 공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라는 점에선 이들 모두 동일한

위치에 선다. 그리고 좀 더 상세히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정신적

인 기법들은 선정과 위빠사나 수행 현장에서 발현되고 또 지속적

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들로서 공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적인 역

할을 담당한다.

 

Ⅳ. 수행에 의한 공의 실현

 

1. 공과 불공의 이해

수행을 통한 공의 실현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공’과 ‘불공

(asuññatā, 不空)’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공은

주요하게 선정과 선정의 통찰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실현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 두 가지 형태의 공은 전면에 등장하면서 빈번하게

활용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공’의 기본 개념은 무언가 결여되

어 있는 상태로 ‘없거나 존재하지 않음(natthitā, 不在)’를 의미한

다. 반대로 그 부정형인 불공은 ‘있거나 존재함(atthitā, 在)’이다. 

영어로 전자는 ‘void’이고 후자는 ‘non-voidness’로 옮긴다.43) 예

를 들어, 현재 지시하는 특정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공’이고 그

와 반대로 현재(現在)하면 ‘불공’이 된다.44) 그런데 여기서 한 가

지, atthitā(在)는 단순히 현재성에 대한 것인데도 만일 이것을 실

체성과 연관지으려한다면 이것은 실제 공의 기본 개념과 맞지 않

을뿐더러 본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논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한다. 

43) Bhikkhu Ñāṇamoli & Bhikkhu Bodhi(1995) p. 965.
44) 이와 관련해서 마쯔모또 시로우(松本史郞)는 공을 표현하는 양식을 다음과
    같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구분하면서 공간적인 해석에서 공은
    단지 ‘A는 B에 대해서 공이다’로 표현되고 A, B 두 항의 존재가 구조적으로
    필요하지만, 시간적인 해석(연기)에서 공은 단지 ‘A는 공이다’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여(松本史郞 1990:338} 공과 불공의 개념은 상대적인 공간성을
    전제로 성립한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전한다. 

 

그럼, 공과 불공의 개념을 명시하는 다음 경구의 예를 살펴보

자. 한때 붓다는 미가라마뚜(Migāramātu) 강당에서 아난다(Ānan- 

da)에게 공에 머무는 것(suññatā vihāra)에 대한 설법을 시작하기

에 앞서 먼저 ‘공’과 ‘불공’을 설명하면서 아난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미가라마뚜 강당과 같다. 이 미가라마뚜 강당에는

코끼리들, 소들, 말들, 암말들이 없고(suñño) 금이나 은, 여자와 남자

들의 모임도 없다(suñño). 그러나 없지 않은 것(asuññataṃ) 한 가지

가 있다. 그것은 이 비구 승가를 조건으로 하는 하나이다. 이와 마찬가

지로 …”45)

45) MN Ⅲ p. 104. “Seyyathāpi Ānanda, ayaṃ migaramātupāsādo suñño
    hatthigavāssavaḷavena, suñño jātarūparajatena, suñño
    itthipurisasannipātena,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bhikkhusaṅghaṃ paṭicca ekattaṃ. evam eva kho ··· .

 

곧 이어 선정에 드는 자는 ‘공’과 ‘불공’을 구분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속행되는데 이와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내

용은 다음 장에서 논의될 것이다. 위의 경구에서 ‘미가라마뚜’라는

장소에는 현재 코끼리, 소, 말, 암말, 금, 은, 여자와 남자들의 모

임은 없고 그 대신 있는 것은 단지 비구 승가뿐이다. 그러면 코끼

리부터 여자와 남자들의 모임까지는 현재하지 않기(不在) 때문에

‘공’이고 비구 승가는 현재하기(在) 때문에 ‘불공’에 해당한다. 

 

앞서(각주 44) 마쯔모또 시로우(松本史郞)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끼리, 소, 말, 암말, 금, 은, 여자와 남자들의 모임(A)은 비구 승

가(B)에 대해서 ‘공’이고 비구 승가(B)는 코끼리, 소, 말, 암말, 금, 

은, 여자와 남자들의 모임(A)에 대해서 ‘불공’이다. 즉, A는 B에 대

해서 ‘공’이고, B는 A에 대해서 ‘불공’이다. ‘공’과 ‘불공’의 개념은

복잡한 수식어가 필요하지도 고도의 지적인 이해도 도모하지 않

는다. 오히려 이처럼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다. 이제 이후의 수행

은 ‘공’과 ‘불공’의 상태를 파악해서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아는

정신적인 태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전개된다.

 

2. 선정 수행: 청정한 공

공과 불공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공은 선정 수행에

의해서 실현된다. 공의 실현, 즉 공에 머물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

요하게 안정시키고 통일시켜서 삼매에 들어야 한다.46) 선정 삼매

는 통일된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의 대상으로 향

하게 하고 몰두하게 한다.47)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동안

지각의 영역에는 오로지 그 대상만이 현재한다. 이때, 지각의 영

역에 대상은 현재하므로 ‘불공(不空)’이고 그와 반대로 현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공’이다. ‘공’ 또는 ‘불공’에 대한 파악은 다

음과 같이 색계정과 연이은 무색정 모두에서 매우 주요하다. 

46) MN Ⅲ p. 111. Tasmātiha Ānanda, bhikkhu ce pi ākaṅkheyya: ajjhatt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Tenānanda, bhikkhunā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tabbaṃ, sannisādetabbaṃ, ekodi kātabbaṃ,
    samādahātabbaṃ.
47) SN Ⅰ p. 136. 

 

MN의 Cūḷasuññatasutta는 각 선정 단계에서 현재 주의를 집중

하는 지각의 대상이 공인지 아니면 불공인지 바르게 보고

(samanupassati) 분명하게 아는(pajānanati) 것이 공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설한다. 선정의 전(全) 단계는 숲과 땅을 대상으로 한 지

각을 계발해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 이후 숲과 땅에 대한 지각

을 제거하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로 집중

의 대상이 옮겨가면서 다음과 같이 순차적으로 상향 진행된다. 먼

저 숲에 대한 지각(saññā)48)에만 주의를 집중한다. 숲은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으면서 정신적인

고요함과 집중력을 계발하기 위한 은둔의 삶을 상징한다. 

48) ‘산냐(saññā)’는 보통 ‘지각’이나 ‘인식’, ‘생각’ 등으로 옮기는데 대상의
    특질을 파악해서 분별하는 심상이나 표상작용을 하거나(SN Ⅲ p. 87) 심상에
    대해 적극적인 언어적 사유화 작용을 하기도 한다(MN Ⅰ p. 292). 오온의
    상온인 경우는 대체로 표상작용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망상이나
    희론하는 인식이 된다(Sn p. 173). 역으로 망상이나 희론이 없는 최상의
    인식(saññāvimokhe parame)을 나타내기도 한다(Sn p. 206). 여기서의
    산냐는 심상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화나 망상, 희론 또는 최상의 인식보다는
    대상의 특질을 분별하는 심상이나 표상작용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숲에 대한 지각은 마을이나 사람처럼 세속적인 관심사

로부터 숲이라고 하는 더 안정적인 방향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의

미하는데 순차적인 명상 과정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일반적

인 집중의 대상이라고 볼 수 없는 숲에 대한 지각의 계발은 집중

력을 기르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49) 오로지 숲에 대한 지

각에만 주의를 집중하면 숲에 대한 지각이 확립되면서 점차 삼매

에 깊이 들어가고, ‘지금 마을이나 사람에 대한 지각으로 생긴 근

심(darathā)은 없다. 단지 숲에 대한 지각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분명하게 안다(pajānāti).

49) Anālayo(2015) p. 86; p. 90. 

 

“이와 같이 현재 거기[지각]에 없는 것은 공이고 있는 것은 불공이

라고 바르게 보고(samanupassati) 분명하게 안다(pajānāti). 그러면 전

도되지 않은 청정한 공(parisuddhā suññatā)이 실현된다.”50)

50) MN Ⅲ pp. 104-105. “ ··· Iti yaṃ 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현재 사라지고 없는 공한 지각의 대상과 현재하는 불공한 지각

의 대상을 바르고 분명하게 파악해서 알아야 한다. 숲에 대한 지

각에 이어 더 상향된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이번엔 땅에 대한

지각에 주의를 집중한다. 오직 땅에 대한 지각에만 집중하면 땅에

대한 지각이 확립되고 점차 삼매에 깊이 들어가면서, ‘지금 숲에

대한 지각은 없다. 오직 땅에 대한 지각만 있다’라고 분명하게 안

다(pajānāti).51) 여기서 땅에 대한 지각은 땅의 까시나(kasiṇa, 遍

處)를 말하는데 이것은 땅을 조건으로 해서 생긴 지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숲에 대한 지각을 제거하고 땅에 대한 지각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숲에 대한 지각을 통한 수행은 어떤 성취

도 이룰 수 없고 완전한 선정의 집중에도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

다.52) 땅의 까시나는 숲에 대한 지각보다 더 깊은 삼매의 집중으

로 이끈다.53) 땅에 대한 지각을 계발한 후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

소유처, 비상비상처에 대해서도 각각 동일한 방식으로 사라지고

없는 공한 지각의 대상과 현재하는 불공한 지각의 대상을 분명하

게 알고 바르게 본다.54)

51) MN Ⅲ p. 105.
52) Ps Ⅳ p. 153.
53) Anālayo(2015) p. 89.
54) MN Ⅲ pp. 106-107. 

 

지금까지 살펴본 Cūḷasuññatasutta는 무색계선정에 앞서 색계

선정의 성취 과정은 별도로 상세하게 설하지 않지만, 공의 실현을

말하는 또 다른 주요 경전인 MN의 Mahāsuññatasutta는 마음을

고요하게 통일시키고 집중시키기 위해 첫 번째부터 네 번째 색계

선정의 성취를 명시한다.55)

55) MN Ⅲ p. 111.

 

그리고 이 경전은 선정의 각 단계에서 지각의 대상이 공인지 불

공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보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선정 삼매에 든 마음 상태도 함께 파악해서 알도록 하고 있다. 이

를테면, 안과 밖으로(ajjhattabahiddhā)56) 공에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 즉, 마음을 고요하게 통일시키고 삼매에 드는 동안에 만일
마음이 공에[삼매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고 확립
하지 못하고 [삼매에 의해서] 해탈하지 못하면57) 다음과 같이 분
명하게 알고(pajānanati) 바르게 안다(sampajāno hoti). ‘지금 안
과 밖으로 공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에 마음은 공에 깊이 들어가
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고 확립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
고. 그와 반대인 경우라면 ‘공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에 마음은
공에 깊이 들어가고 신뢰하고 확립하고 해탈한다’라고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안다. 다시 말해, 삼매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마음의 변화들도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56) Ps Ⅳ p. 161는 ‘안으로’는 자신의 오온에 대한 것이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의 오온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57) MN Ⅲ p. 112. Tassa ajjhattabahiddhā suññataṃ manasikaroto suññatāya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지금까지가 색계선정에 대한 부분이라면 다음은 무색계선정이
이어지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방식이 이어진다. 만일 부
동(ānañja, 不動)에58)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에 마음이 부동에 깊
이 들어가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고 확립하지 못하고 [부동에 의
해서] 해탈하지 못하면 ‘부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에 마음은 
부동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고 확립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분명하게 알고(pajānanati) 바르게 안다

(sampajāno hoti). 만일 그와 반대인 경우라면 ‘부동에 주의를 기

울이는 동안에 마음은 부동에 깊이 들어가고 신뢰하고 확립하고

해탈한다’라고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안다.59) 확고한 삼매를 얻기

위해 다른 것은 배제하고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선정 수

행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공과 불공에 대한 바른 앎과 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58) ‘부동’은 무색계선정을 말한다(Ps Ⅳ p. 229; Sv Ⅲ p. 998). 그런데, MN의
    Laṭukikopamasutta는 ‘네 번째 선정은 부동에 속한다’라고 하지만(MN Ⅰ p.
    455), Ānañjasappāyasutta는 네 번째 선정, 공무변처, 식무변처가
    부동이며(MN Ⅱ p. 263), Sunakkhattasutta는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가
    부동이라고 명시한다(MN Ⅱ pp. 254-255). 이와 같이 경전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는 공히
    무색계선정이므로 재론의 여지없이 부동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에 네 번째
    선정도 포함된다면 그것은 이 선정에서 발현되는 선지(禪支)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네 번째 선정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 선정이 ‘부동’ 즉, 동요하지
    않게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선지인 우뻬카(upekkhā, 平靜)가 확고하고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경우에 따라 네 번째 선정도
    ‘부동’의 영역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59) MN Ⅲ p. 112. 

 

정리하면, 선정 수행에 의해서 실현되는 공은 청정한 공이라고

부르는데 청정한 공은 색계선정과 무색계선정을 단계별로 성취해

나갈 때 실현된다. 이때 각 선정의 단계에서 사라지고 없는 공한

지각의 대상과 현재하는 불공한 지각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고 본

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각 선정의 단계에서 마음이 삼매를 확립해

서 확고하게 머물러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분명하고 알고 바르

게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전 과정에서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보

고’, ‘바르게 아는’ 일련의 정신적인 기법들은 지속적으로 발현 유

지되면서 해당 선정이 원만히 성취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3. 통찰 수행 : 최상의 공

공은 무상심삼매(animitta cetosamādhi, 無相心三昧)에 의한 무

상(anicca, 無常)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도 실현되는데 이때 성취되

는 공은 ‘청정한 최상의 공(parisudda paramānuttara suññatā

)’60)이라고 부른다. 앞서 선정 수행에 의해서 실현된 공은 청정한 

공인 반면 통찰에 의한 것은 ‘최상의 공’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아

선정보다 통찰에 의한 공이 더 수승한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찰에 의한 최상의 공은 삼매에서 청정한 공을 실현한 다음에 그

와 연계해서 진행된다. 일단 비상비비상처까지 진행하고 난후 비

상비비상처에 대한 지각에서 이번엔 ‘무상심삼매’에 대한 지각에

주의를 기울인다. 

60) MN Ⅲ p. 109. 최상의 공은 아라한이 성취한 공을 말한다(Ps Ⅳ p. 154). 

 

무상심삼매는 위빠사나 통찰을 위한 삼매인데61) 무상심삼매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무상(無常)에 대한 통찰을 진행한다. 무상(無

相)의 원어인 ‘아니밋따(animitta)’는62) 직역하면 ‘상(相) 없음’인데

이것은 영원함(nicca)이나 즐거움(sukka), 자아(atta)에 대한 심상

이나 표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63) 영원함, 즐거움, 자아에 대한 심

상을 완전히 없애려면 선정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이제 통찰

의 힘이 요구된다. 

61) Ps Ⅳ p. 153.
62) ‘무상’으로 옮긴 ‘아니밋따(animitta)’는 ‘a’ + ‘nimitta’의 형태로 부정접두사
    ‘a’와 ‘표식’, ‘형상’, ‘특징’, ‘전조’, ‘속성’, ‘토대’ 등의 뜻을 가진 ‘nimitta’가
    결합한 것이다. ‘니밋따’는 문맥에 따라 몇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특히
    선정에서 언급될 때는 의식에 반영된 심상(心相)이나 표상(表相),
    영상(映相)을 의미한다. Rhys Davids & Stede(1986) p. 367. 니밋따는 특히
    감각의 수호와 관련된 교설에서 외적인 모습이나 형상, 모양 등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아직 생기지 않은 감각적인 욕망을 생기게
    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인 욕망을 더욱 크게 만드는 법은 아름다운
    형상(nimitta)이다’라든가 ‘아직 생기지 않은 분노를 생기게 하고 이미
    일어난 분노를 더욱 크게 만드는 법은 혐오스러운 형상이다’라고 할 때
    등이다(SN Ⅰ p. 3). 그리고 ‘nimitta’가 ‘anuvyañjana’와 함께 쓰일 경우
    ‘anuvyañjana’는 부분적인 세세상이고 니밋따는 전체상이 된다(AN Ⅰ p.
    113).
63) Ps Ⅳ p. 153; Spk Ⅲ p. 90; Horner, I. B.,(2004) p. 151. 무상심삼매는 이
    경전 외에도(SN Ⅳ p. 268; DN Ⅱ p. 72; AN Ⅳ p. 74) 등에 보이는데
    비상비비상처 다음에 오기도 하고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비록
    비상비비상처 다음에 오더라도 무색계선정과는 성격을 좀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Vism p. 289에 보면 선정에서 나올 때 삼매와 함께 한
    마음은 사라질 것이라고 하면서 위빠사나 통찰을 진행하는 동안에 순간적인
    심일경성(khaṇikacittekaggata, 心一境性)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무상심삼매에 의해서 통찰을 진행할 때 발생하는 순간적인 심일경성의 삼매
    때문에 무상심삼매를 두고 왜 ‘위빠사나 통찰에 의한 삼매’라고 부르는지에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다른 것은 배제하고 오직 무상심삼매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마

음이 점차 무상심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신뢰가 생기고 확립되고

[무상심삼매에 의해서] 해탈한다. 그러면 ‘지금 무소유처에 대한

지각은 없고(공)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지각도 없다(공). 그러나 이

생명과 몸을 조건으로 한 감관에 대한 지각은 남아 있다(불공)’라

고 분명하게 알고(pajānati) 바르게 본다(samanupassati). 무상심

삼매로 얻어지는 청정한 공은 현재 지각에 없는(na atthi) 것은 공

이고 남아 있는 것(santaṃ)은 있기에(atthi) 불공이라고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보면 실현된다.64)

64) MN Ⅲ p. 108. 

 

나아가 무상심삼매에 대한 지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면 무상

심삼매가 확고해지면서 이내 본질에 대한 통찰로 연이어진다. 그

러면 이 무상심삼매도 의도적인 것이고 만들어진 것으로서 무상

(無常)하기 때문에 곧 사라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안다(pajānati).65)

이와 같이 [분명하게] 알고(jānato) [바르게] 보면(passato) 감각적

욕망에 의한, 존재에 의한, 무명에 의한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

한다. 해탈하면 ‘이 지각은 감각적 욕망에 의한 번뇌가 없고(공)

존재에 의한 번뇌가 없고(공) 무명에 의한 번뇌가 없지만(공), 이

생명과 몸을 조건으로 한 감관에 대한 지각은 남아 있다(불공)’라

고66) 바르게 본다(samanupassati). 이처럼 무상(無常)에 대한 통찰

과 현재 지각에 없는 것은 없고(공) 남아 있는 것은 있다고(불공)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보면 최상의 공은 실현된다.67) 이를테면, 

청정한 최상의 공은 선정삼매 → 무상심삼매 → 통찰 → 번뇌의

소멸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화 과정을 통해서 실현된다. 

65) 앞서 사성제를 ‘pajānati’하는 자를 일러 ‘paññavā(지혜로운 자)’라고
    하였듯이 이 술어는 대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서
    통찰(vipassanā)하는 지혜의 힘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다. 
66) 번뇌를 제거하면 인식의 내용이 사라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공무(空無)로
    전환된다고 보통 추론하곤 한다. 하지만 이때 극도로 정화된 감관에 대한
    지각과 인식은 청정성을 회복한 것이기에 번뇌로 오염되지 않은 채로
    남아서 여전히 활동을 지속한다. 비구 냐나난다는 무상심삼매에서 감관에 
    대한 지각은 공하지 않다는 위의 경증을 들어 공을 절대화시키거나
    실체시하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Bhikkhu Ñānananda(1997) p. 95.
67) MN Ⅲ pp. 108-109.

 

요컨대, 무상심삼매에서 사라지고 없는 공한 지각의 대상과 남

아 있는 불공한 지각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보고, 더 나

아가 무상심삼매가 지닌 무상성(無常性)마저도 분명하게 알고[통

찰하고] 바르게 보면 결국엔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또 해

탈하면 사라지고 없는 공한 번뇌와 남아 있는 불공한 지각의 대상

도 분명하게 안다. 앞서 선정 삼매에 이어지는 이러한 무상심삼매

에 의한 통찰의 과정을 통해서도 공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게 적

용되며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보는’ 정신적인 기법들 역시 지속

적으로 발현 유지된다.68)

68) 그밖에 공과 관련해서 ‘공한 삼매(suññata-samādhi)’나 ‘공심해탈(suññatā
    cetovimutti)’와 같이 통찰을 가져오는 삼매가 있다. ‘공한 삼매’의 경우는
    무상삼매(animittasamādhi, 無相三昧), 무원삼매(appaṇihita, 無願三昧)와
    함께 나타난다. 이 세 가지 삼매는 탐・진・치의 근본 번뇌와 이로부터 파생된
    번뇌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분노, 원한, 질투, 자만, 방일함을
    지혜(abbiññā)로써 알기 위해 닦아야 한다(AN Ⅰ p. 299; SN Ⅳ p. 360).
    탐・진・치는 불선한 법들의 근본적인 뿌리 역할을 한다(Ps Ⅲ p. 63).
    탐・진・치가 소멸한 상태를 무위(asaṅkhatagāmi, 無爲)라고 하는데 이
    삼매들은 무위로 이끌어 준다(SN Ⅳ p. 360). 탐・진・치가 소멸한 상태를
    궁극(anta), 무루(anāsava), 피안(pāra, 彼岸), 진리(sacca)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공한 삼매, 무상삼매, 무원삼매는 이러한 경지를 가능하도록
    해준다(SN Ⅳ p. 368; p. 369). ‘공한 삼매’는 영원함에 대한 집착이 없고
    무상삼매는 영원함에 대한 심상(nimitta, 오염된 지각)이 없으며 무원삼매는
    영원함에 대한 바람이 없기 때문에 위빠사나 통찰이라고 부른다(Mp Ⅱ p.
    386). 통찰에 의해서 번뇌들을 무아라고 보기 때문에 공하고 상(相)을 만드는
    번뇌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며 고(苦)라고 보기 때문에 
    원하는 바가 없다(無願). 또 탐욕이 없기 때문에 공하고 탐욕의 상(相)이 없기
    때문에 무상이고, 탐욕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무원이다(Sv Ⅲ pp.1003-1004). 
    Vinaya-Piṭaka와 Thera-Therī Gāthā에 의하면 삼매는 공한 삼매와 무상삼매, 
    무원삼매가 있고 성취(samāpatti)는 공성취와 무상성취, 무원성취가 있으며 
    해탈은 공한 해탈과 무상해탈, 무원해탈이 있다고 하여(Vin Ⅲ pp. 92-93; Ⅳ 
    pp. 25-26; Th-Thī p. 14; p. 128), 이들 세 가지 삼매와 성취, 해탈은 동일한 
    의미의 서로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한 삼매를 위시해 공성취, 
    공한 해탈은 통찰에 의해서 영원함에 대한 집착이나 번뇌와의 동일시, 탐욕
    등을 지혜로써 제거한다. 그런가 하면, ‘공심해탈(suññatācetovimutti, 空心解脫)’은
    무량심해탈(appamānacetovimutti, 無量心解脫), 
    무소유심해탈(ākiñcaññācetovimutti, 無所有心解脫), 무상심해탈(animittā
    cetovimutti, 無相心解脫)과 주로 함께 나타난다. 공심해탈은 눈과 형상, 눈의
    인식, 눈의 접촉, 눈의 접촉으로 인해서 생기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과 같이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하다고
    성찰하면(paṭisañcikkhati) 성취된다. 나머지 귀, 코, 혀, 몸, 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MN Ⅰ pp. 298; Ⅱ p. 263; SN Ⅳ p. 54; pp. 296-297). 나머지
    ‘무량심해탈’은 사범주의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고 ‘무소유심해탈’은
    식무변처를 넘어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머무는 것이며
    ‘무상심해탈’은 모든 심상(표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삼매를 성취하여
    머문다는 뜻이다(SN Ⅳ p. 296; MN Ⅰ pp. 297-298). 여기서 동사
    ‘성찰하다(paṭisañcikkhati)’의 명사형 ‘paṭisaṅkhāna’는 중성명사로 ‘주의
    깊음’, ‘사려’, ‘성찰’, ‘고려’, ‘판단’ 등의 뜻이 있는데 지혜를 나타내는 술어
    ‘ñāṇa’나 ‘paññā’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그럴 경우에는 ‘성찰지’, ‘판별지’, ‘
    '사택지(思擇智)’로 불리며 만일 ‘yoniso’와 함께 쓰이면 이치에 맞는
    근본적인 식별이나 성찰을 의미한다. Rhys Davids & Stede(1986) p. 400;
    전재성 편저(2005) p. 460. ‘공한 삼매’와 ‘공심해탈’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이라고 성찰하고 오온의 무아(무상, 비실체성)를 지혜로써
    통찰하지만 실제로 빠알리 니까야는 이 두 가지를 공의 실현과 직접
    연계해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아의 공함과 무상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불선법을 제거하기 때문에 공의 실현 범주에 포섭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한편, 걷거나 서거나 앉아 있을 때 또는 눕거나 말 할 때 심지어

사유할 때와 같이 다양한 일상의 신체 정신적인 활동들도 공을 실

현하는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걷고 있을 때는 그것을(tatta) 바르

게 알아야 하는데(sampajāno hoti), 여기서 ‘그것’은 명상 주제

(kammaṭṭhāna)를 말한다.69) 명상 주제는 마음을 계발시키기 위한

일종의 도구적인 역할을 한다. 

69) Ps Ⅳ p. 162. ‘깜마타나(kammaṭṭhāna)’는 MN의 Subhasutta(Ⅱ p. 196)에
    보면 본래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직업을 의미하였으나 후대에는 마음을
    집중해서 계발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앞서 보았던 각 선정에서 지각의 대상들과 무상심삼매도 곧 마

음을 계발시키기 위한 명상 주제가 된다. 위의 문구에서 바르게

알아야 할 대상인 ‘그것’은 명상 주제로서의 걷고 있는 동작이다. 

서 있거나 앉거나 눕는 동작들도 모두 명상 주제이다. 말할 때는

말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사유(vitakkā) 할 때는 사유하는 것을 바

르게 안다.70) 요컨대, 다양한 신체 행위와 정신적인 사유 활동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 이른바 일상의 ‘매순간에 대한 바른 앎

(abhikkhaṇaṁ sampajāna)’71)이다. 

70) MN Ⅲ pp. 112-114.
71) 매순간에 대한 바른 앎은 DN의 Mahāsatipaṭṭhānasutta에서 일상의 모든
    행위들, 이를테면 걸을 때,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갈 때, 뒤돌아 갈 때, 앞을 볼 때, 뒤를 볼 때, 등을 구부릴 때, 등을 펼
    때, 가사와 발우를 수할 때, 먹을 때, 마실 때, 씹을 때, 맛을 볼 때, 대소변을
    볼 때, 잘 때, 깨어 있을 때, 말할 때, 조용히 있을 때 등 어떠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파악해야 한다고 설하는 부분과 거의 유사하다. 이 경전은
    일상의 모든 행위들을 놓치지 않고 파악하는 것을 일러 ‘분명하게
    알다(pajānāti)’와 ‘바르게 알면서 행동한다(sampajāna-kārī hoti)’라고
    표현한다(DN Ⅱ p. 292). 위의 본문도 이와 동일하게 ‘pajānāti’와
    ‘sampajāno hoti’가 주요 기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매순간에 대한 바른 앎은 감각적인 욕망을 제어하는데 있어서

도 적용된다. 감관으로 인식되는 대상들로 인해서 현재 마음의 동

요가 일어나고 있지 않은지 잘 관찰해 보고(paccavekkhitabba),

만일 동요가 생기면 생긴다고 분명하게 알고(pajānāti) 아직 사라

지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남아 있다고 바르게 안다(sampajāno

hoti).

 

반대로 어떤 동요도 생기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알고 감각적 욕망이 사라졌다고 바르게 안다. 감각적 욕망의 대상

으로부터 생기는 내면의 변화를 매순간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알

고 바르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오취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때는 수관(anupassinā, 隨觀)이 제시되기도 한다. 오취온이 발

생하고 소멸하는 [매순간을] 수관하면 결국엔 오취온을 두고 ‘나는

있다(asmi)’라고 생각하는 자만심이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지면

오취온에 대한 자만심이 사라졌다고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안

다.72)

72) MN Ⅲ pp. 113-115.

 

공은 일상의 신체 정신적인 활동과 감각적인 욕망, 오취온의 현

상들을 매순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수관하는’ ‘분명하게 아

는’, ‘바르게 아는’ 기법들에 의해서 실현된다. 사실상 이러한 실현

기법들은 사념처(四念處) 수행에서 사띠를 확립(satipaṭṭhāna)하기

위해 제시된 행법들과 중복되는 것으로서 무상한 본질을 있는 그

대로(yathābhūtaṃ) 아는 통찰과 직접 연계된다.73)

73) 이와 유사한 내용은 이미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설하는 경전인 DN의
    Mahāsatipaṭṭhānasutta(Ⅱ p. 290)와 MN의 satipaṭṭhānasutta(Ⅰ p. 55)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위의 본문에서 일상의 매순간에 대한 바른 앎은
    사념처 중에 신념처(身念處)에, 사유하는 것에 대한 분명하고 바른 앎은
    심념처(心念處)에 해당할 수 있다. 또 감각적인 욕망의 대상들로 인해서
    발생하는 마음의 현상들과 오취온에 대해서 관찰하고 바르게 알고 분명하게
    알고 수관하는 기법들은 수념처(受念處)와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에
    해당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통찰을 통해서 공의 실현을 설하는 MN의
    Mahāsuññatasutta는 사념처수행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amanasikāroti’를 제외하고 본문에 제시된 ‘pajānāti’,
    ‘sampajānati’, ‘samanupassati’, ‘anupassati’, ‘paccavekkhati’와 같은
    술어들은 사념처수행에서 사띠를 확립하게 해주는 실행 기법들이다. 사념처
    수행의 요지는 각 신수심법(身受心法)의 현상을 ‘수관하면서(anupassati)’ 
    ‘바르게 알아차리고(sampajāno satimā)’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면(yathābhūtaṃ 
    pajānāti)’ 사띠가 확립(satipaṭṭhāna)되면서 현상이 지닌 무상성을 통찰하고 
    집착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머물게 되는 것이다. 아날라요는 사념처의 ‘anupassati’를
    ‘관찰하다(to contemplate)’로 해석하면서 관찰은 무상하고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버려야 할 대상을 잘 조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념처는 
    통찰(insight)을 위한 명상이라고 기술한다. Anālayo(2012), p. 32; p. 272.

 

4. 부작의(amanasikāra, 不作意)

끝으로, 공은 ‘아마나씨까로띠(amanasikāroti)’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다. ‘아마나씨까로띠’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 ‘생각을 고

정시키지 않다’, 한자로는 ‘부작의(不作意)하다’이다. 부작의에 의

한 공의 실현은 붓다가 아난다에게 대중과 함께 섞이지 않고 홀로

고요하게 머물면 큰 어려움이 없이 해탈할 수 있다고 하면서 감관

의 물질적인 대상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는 장면에서 발견된

다.74) 물질(rūpa)은75)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쉽게 변형되고 바

뀐다.76) 감각적인 즐거움이나 애착을 주는 어떠한 물질이라도 결

국엔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신체, 정신적인 괴로움

들이 동반된다. 그러므로 “모든 형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

야”(sabbanimittānaṁ amanasikāra) 한다. 

74) MN Ⅲ p. 110.
75) 물질로 번역한 ‘루빠(rūpa)’는 문맥에 따라 오온의 색(色)일 경우도 있고 눈의
    대상인 형상이나 모습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는데 본문에서는 오온에서의
    색과 안근의 대상인 형상 모두를 의미한다. 
76) SN Ⅲ p. 83

 

붓다는 모든 형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에 머물러 바른 깨

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고 전한다.77)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은 감각적인 욕망을 유발시키는 외적인 형상이나 모습에 흥미를

느낀다거나 관심을 갖고 몰두하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다. 특히 아름다운 형상에 ‘지혜롭지 않게(ayoniso)’ 주의를 기울

이면 탐욕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서 아직 생기지 않은 감각

적인 욕망을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감각적인 욕망은 더욱 크게 
증장시킨다.78)
77) MN Ⅲ p. 111. 여기서의 ‘니밋따(nimitta)’는 SN Ⅰ p. 3의 경우처럼 감각적인
    욕망의 대상을 말하기 때문에 외적의 물질적인 형상이나 모습이 된다. 
78) AN Ⅰ p. 3.

 

‘ayoniso’는 부정접두사 ‘’에 ‘근본적으로’, ‘지혜롭게’, ‘철저하

게’, ‘적절하게’ 등의 뜻을 가진 부사어 ‘yoniso’가 결합된 형태이

다.79) ‘ayoniso manasikāroti’는 부정형이므로 지혜롭지 않게 주

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yoniso manasikāroti’는 근원

을 잘 파악해서 지혜롭게 숙고, 여리작의(如理作意)하는 것이다.80) 

‘부작의’나 ‘여리작의’ 모두 형상이나 물질로 인해 초래된 위험에

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지만 부작의의 경우는 감각적인 욕망의

대상과는 애초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대상과 직

면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여리작의보다 더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대처방식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은 감각적인 욕망을 일으키

기 쉬운 외적인 형상이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부작의

하는 기법에 의해서 실현되기도 한다.

79) Rhys Davids & Stede(1986) p. 560.
80) SN Ⅲ p. 167; p. 168; MN Ⅲ p. 169; Mp Ⅰ p. 31.

 

 Ⅳ. 결론

 

공은 문맥에 따라서 오온이나 자아의 비실체적인 성격, 텅 빈

공간, 특정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때, 어떤 가능성이나 기회가

없을 때, 번뇌가 남아 있지 않을 때 등 무언가 없거나 결여되어 있

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공의 명사형은 ‘순냐타

(suññatā)’이고 형용사형은 ‘순냐(suñña)’나 ‘순냐타(suññata)’인

데 이들은 형태상으로는 구분되지만 동일한 의미로 서로 혼용된

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공에 머물기’는 공을 성취하여 머무는 것, 

공의 실현을 의미한다. 공을 실현하기 위해선 감관의 대상을 통한

성찰을 비롯해서 오개(五蓋)와 오취온을 완전히 알아야 하고 사마

타와 위빠사나를 위시한 37보리분법 그리고 명지와 해탈을 닦기

위해서도 노력해야한다. 공을 실현하기에 앞서 공과 불공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러한 선행 이해를 바탕으로

향후 선정과 통찰 수행은 진행된다. 

 

선정에 의해서 청정한 공은 실현되는데 각 선정의 단계에서 현

재 사라지고 없는 공한 지각의 대상과 남아 있는 불공한 지각의

대상을 바르게 보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청정한 공의 실현에

이어 청정한 최상의 공은 통찰에 의해서 실현된다. 

 

만일 선정 삼매가 지닌 무상성을 분명하게 알고 바르게 보면 번

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하면 번뇌는 남아 있지 않아서 공

이지만 감관에 대한 지각은 여전히 남아서 불공이라고 분명하게

안다. 그러면 그때 청정한 최상의 공이 실현된다. 공의 실현은 비

단 선정과 선정 삼매의 통찰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순

간 생기고 사라지는 다양한 신체・정신적인 현상들을 ‘분명하게 알

고’, ‘바르게 알고’, ‘관찰하고’, ‘수관하는’ 여러 정신적인 기법들

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그 밖에 ‘아마나씨까라’라고 하여 이른바 ‘부작의(不作意)’하는

기법도 동원되는데 이것은 감각적인 욕망을 일으키는 형상에 대

해 관심이나 흥미를 갖지 않고 감관의 대상으로부터 주의를 돌리

는 방식에 의해서 욕망을 제어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공을 실

현하는 과정은 공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분명하게 알

다’, ‘바르게 알다’, ‘바르게 보다’, ‘수관하다’, ‘관찰하다’, ‘부작의

하다’라고 하는 일련의 정신적인 기법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

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들을 지속적으로 발현 유지시켜 나가는 것

이 중요하다. 

 

초기불교 빠알리 니까야에서 말하는 공은 일차적으로 무언가

결여나 결핍되어 있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며 이

기본 개념은 수행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 활용된다. 공의 개념은

그 바탕 위에서 수행자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교설된 체험의 장

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무엇보다 강한 실천

적인 의미와 목적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