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아라한의 해탈에 관한 고찰 -심해탈과 혜해탈/한상희

실론섬 2018. 8. 21. 15:59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3호(2017.12) pp. 163∼193

아라한의 해탈에 관한 고찰-심해탈과 혜해탈
* 본 논문은 니까야의 교설의 동질성과 본질적 정통성을 인정하며, 교설들을 사상적 정합성을 가지는
단일한 체계로서 이해하는 입장에서 고찰을 진행한다. 4부 니까야를 중심으로 하며 자의적 해석을
피하기 위해 주석서를 비판적으로 참고한다. 빠알리어 원전은 PTS판본을 중심으로 제6차결집판과
비교하며 사용하고(비교에는 Digital Pali Reader를 활용한다), 페이지 수는 PTS를 따른다. 두 판본에
서 서로 다른 표기 및 표현이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원문으로 채택하지 않은 판본의 표현을 옆에
함께 제시한다.

한상희/동경대학교 박사과정 졸업

 

I. 들어가는 말

II. 아라한과 누진지

III. 심해탈과 혜해탈

 

IV. 마치는 말

 

[요약문]

빠알리 문헌상에서의 불교 수행의 목적은 더 이상 생을 받지 않고 윤회에서 벗어

나는 ‘해탈’의 성취이다. 이 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은 여러 성자의 모습

에 의해 구현되는데, 그 궁극의 목적을 이룬 최고의 성자가 바로 아라한이다. 아라한

은 심해탈과 혜해탈이라는 두 종류의 해탈을 성취함으로써 윤회의 종식이라는 최

상의 목적을 달성한다. 본 논문에서는 아라한이 획득하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의미

와 그 내용을 밝히기 위해, 두 해탈이 니까야에서 사용된 용례를 중심으로 이 두 가

지 술어가 가지는 의미와 두 해탈의 성취에 사용되는 수행법 및 관계 등에 대해 고찰

하였다. 

심해탈과 혜해탈은 술어의 유래에서 보듯이 하나의 해탈에 대한 ‘주체’와 ‘수단’

을 의미하며 분리되었으나, 실제의 쓰임에서 반드시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심해탈의 경우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로 표현될 때에만 ‘해탈의 주체’로서

의 의미를 가질 뿐, 단독으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경우 완전한 해탈의 주체로서 기능

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니까야에 아라한으로서 ‘심해탈자’라는 표현은 일반적

이지 않다. 반면, 혜해탈은 언제나 심해탈을 수반하고 그 경우 항상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기 때문에, ‘혜해탈자’는 혜해탈 만이 아니라 심해탈과 혜해탈 모두를 성취한

아라한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심해탈과 혜해탈의 획득을 위한 수행법으로서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각각의 해

탈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능하며, 심해탈에는 사마타가 우세하게 작용하

고 혜해탈에는 위빳사나가 우세하게 작용한다. 또한 심해탈은 ‘탐욕이 제거되어 마

음이 자유로운 상태’이고 혜해탈은 ‘무지가 제거되고 궁극의 지혜가 갖추어진 상태’

로, 번뇌의 소멸 순서에 따라 심해탈이 먼저 성취되고 이어서 성취되는 혜해탈에 이

심해탈의 상태가 유지되어 포함된다. 이와 같이 두 해탈 모두를 갖춤으로써 완전한

해탈이 이루어지며, 둘 중 하나의 해탈만으로는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없다.

 

I. 들어가는 말

 

빠알리 문헌상에서의 불교 수행의 목적은 더 이상의 생을 받지 않고 윤회에

서 벗어나는 ‘해탈’의 성취이다. 이 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은 여러

성자(聖子)의 모습에 의해 구현되는데, 그 궁극의 목적을 이룬 최고의 성자가

바로 아라한(arahant, 阿羅漢)이다. 니까야에는 이러한 해탈을 얻은 아라한의

모습을 나타내는 몇 가지 정형문이 있다. 그 가운데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

여 성취해 있다(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 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라는 정형문은 아라한

의 해탈 성취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아라한

이 성취하는 해탈은 심해탈과 혜해탈이라는 두 종류의 해탈이며, 이 두 해탈은

모든 번뇌를 소멸함으로써 얻어진다.

 

지금까지 심해탈과 혜해탈에 관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고찰・논의

되어 왔다. 해외의 연구로는 De Silva[1978], Gombrich[1996], 舟橋[1952], 雲井

[1982], 渡辺[1982]등이 있으며, 국내에서도 정준영[2006], 이필원[2008]등에 의

해 고찰된 바 있다. 이들 심도 깊은 선행연구에 의해 두 해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부분들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위의 정형문에서 두 종류의 해탈이 구체적

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어떠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실제 수행

도에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지에 대한 연구는 상세히 이루어지지 않

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정형문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아라한

이라는 빠알리 문헌 최고의 성자의 해탈을 이해하고 확립하는 데 있어 매우 중

요하고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위의 정형문을 통한 아라한의 해탈에 관한 해명(解明)의 일환으로

서, 먼저 아라한이 획득하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의미와 그 내용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심해탈과 혜해탈이 니까야에서 사용된 용례를 중심

으로 이 두 가지 술어가 가지는 의미와 구체적 내용, 두 해탈을 얻는데 사용되

는 수행 방법 및 이들의 관계 등에 대해 고찰하고 그 내용에 대한 통합적 이해

를 시도한다. 그리고이 정형문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확정하여 심해탈과 혜해

탈의 의미를 더욱 구체화해줄 ‘번뇌의 소멸’등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지면 관

계상 원고를 달리하여 다루도록 하겠다.

 

II. 아라한과 누진지

 

심해탈과 혜해탈에 대한 고찰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두에 제시한 정형문을 

포함해 니까야에 나타나는 아라한의 정형문을 살펴보고 이 정형문들이 그 내

용을 이루고 있는 육신통(六神通)의 누진통(漏盡通) 혹은 삼명(三明)의 누진지

(漏盡智)를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누진통과 누진지는 번뇌가 모두

소멸되어 해탈한 아라한만이 성취할 수 있는 지혜를 나타낸다. 니까야에는 누

진통과 누진지를 나타내는 두 종류의 정형문이 있는데, 이들의 비교・대조는

아라한의 해탈이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며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대해 보다 뚜

렷한 윤곽을 제시해 줄 것이다.

 

1. 아라한의 정형문

니까야에 나타나는 아라한의 정형문은 아래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아라한 1>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심해탈・혜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있다.1)

1) DN. I, p.156; II, pp.251-2; III, p.108, 132; AN. I, p.232; IV, pp.12-3 etc.

 

<아라한 2>

아라한, 번뇌를 소멸시킨 사람, [범행의]완성을 이룬 사람, 해야 할 일을

마친 사람, 짐을 내려놓은 사람, 최고의 목적에 도달한 사람, 생존에 대한

속박을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 바른 완전지(完全智)에 의해 해탈한 사람

이다.2)

2) DN. III, p.83; MN. I, p.4, pp.141-2, p.226; III, pp.80-1: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vimutto.”

 

<아라한 3>

‘태어남은 끝났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3)

3) DN. I, p.84; MN. I, p.23: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 ti
    pajānāti.”

 

<아라한 4>

그리고 나에게 ‘나의 심해탈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

이다. 이제 다른 생존은 없다’라는 앎(智)와 봄(見)이 생겼다.4)

4) MN. III, p.162; AN. IV, p.56,305: “ñāṇañ 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 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ti.”

 

니까야에 나타나는 네 종류의 아라한 정형문 가운데 <아라한 1>과 <아라한 2>

는 예류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네 종류의 성자(四聖者, 이하 사성자)가 함께

설해질 때 사용되는데, <아라한 1>은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

까야에서 골고루 나타나고, <아라한 2>는 맛지마니까야에서만 보인다5). 또한

<아라한 1>은 누진통과 누진지의 설명에서도 사용되고6), <아라한 2>는 예류

자와 아라한이 대비되어 예류자는 오취온(五取蘊)과 오근(五根)의 생멸 등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아는(yathābhūtaṃ pajānāti)데 머무르는 반면, 아라한은 있는

그대로 알아 집착 없이 해탈한다(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 vimutto hoti)고 설

해질 때의 아라한에 대한 설명으로 주어진다.7)

5) 이것은 사성자 전체가 설해지는 경우이며, 각각의 아라한 정형문은 니까야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아라한 1>이 나타나는 횟수는 DN: 19(디가니까야에 19회 등장함을 의미함. 이하 같음); MN: 20;

   SN: 23; AN: 72, <아라한 2>는 DN: 3; MN: 15; SN: 15; AN: 10이다. <아라한 3>은 DN: 8; MN: 40;
   SN: 90; AN: 30로 가장 많고, <아라한 4>는 MN: 2; SN: 11; AN: 5로 가장 적게 나타나며 디가니까야
   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6) MN. I, pp.35-36, 358; II, p.22; III, p.12; SN. II, p.214; AN. III, p.19; V, p.14.
7) SN. III, pp.160-161; V, pp.193-194.

 

한편, <아라한 3>과 <아라한 4>는 해탈지견을 나타낸다. <아라한 3>은 대부

분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앎이 있다(vimuttasmiṃ vimuttam iti ñāṇaṃ hoti)’라

는 경문(經文)의 바로 뒤에 오고, ‘안다(pajānāti)’혹은 ‘알았다(abbhaññāsi)8)’ 라

는 동사가 문장의 마지막에 반드시 사용되는데, ‘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생을

받지 않는 해탈을 얻었음을 스스로 안다는 것, 즉 해탈지견을 나타낸다. 이 정

형문은 누진통이나 누진지의 내용의 일부로 주로 사용되며9), 오온(五蘊)과 육

처(六處) 등에 대해 ‘혐오하여(厭離) 탐욕이 사라짐으로써(離貪) 해탈하고(解

脱) 해탈했음을 안다(解脱知見)’고 설해지는 용례에서도 사용된다.10) 또한, <아

라한 4>는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sutta)」에서 세존

이 스스로의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용된 표현으로, 흔들리지 않는 해

탈을 얻었음에 대한 앎과 봄이 생겨났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정형문에는 심해

탈의 표현인 ‘cetovimutti’가 사용되고 있는데, PTS에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

으나 제6차결집판(Burmese Chaṭṭhasaṅgāyana edition. BCS)과 각종 사본에는

‘ceto’없이 ‘vimutti’로만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11)

8) SN. I, p.140; II, p.22; III, p.36; AN. II, p.249; III, p.70, 217, 376 etc.
9) DN. I, p.84; MN. I, p.23, 117, 249, 279, 442, 522; II, pp.38-39, p.162, 136.
10) MN. III, p.20, 50, 68, 142, IV, p.383; SN. IV, p.2, 3, 151: “‧‧‧에 대해서 혐오한다. 혐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진다.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
    중략 ‧‧‧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 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 nāparaṃ itthattāyā ti pajānāti).”
11) e. g. SN. II, p.172(BCS omit), III, p.28(S1-3, BCS omit), IV, p.8(B2 omit), p.10(BCS omit), V, p.204,
    p.206, p.423(BCS omit); AN. I. p.259(BCS omit), IV, p.56(Ph. S, BCS omit); Paṭis. II, p.110(BCS 
    omit). 한편, PTS판과 제6차결집판 모두 ‘akuppā me vimutti’라고 표기되어 있는 용례도 있다(e. g. 
    MN. I, p.167). 사본에서의 결여여부는 각 텍스트의 PTS의 각주를 참조하였고, 여기에 제시한 사본의 
    약호는 다음과 같다; B2=Burmese MS. of the India Office Library. S1=MS. of Copenhagen. S2=MS. 
    of the BritishMuseum. S3=MS. of the Dr.Morris. Ph.=Phayre MS.

 

이들 정형문을 통해, 아라한이란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수행자로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함으로써, 이생을 마지막으로 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목

적을 달성한 성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아라한이 성취한 해탈의 양상

은 누진통과 누진지(이하 누진지)의 내용에 의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2. 누진지

위에서 제시한 아라한의 정형문 가운데 <아라한 1>과 <아라한 3>은 니까야

전체에 걸쳐 아라한을 나타내는 문구로 다수 사용될뿐만 아니라, 누진지의 내

용을 이루기도 한다. 편의상 <아라한 1>이 누진지의 내용으로 주어지는 용례

를 <누진지 1>로, <아라한 3>이 누진지의 일부로 설해진 용례를 <누진지 2>로

부르기로 하고 그 내용을 다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누진지1>: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심해탈・혜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

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있다.

 

<누진지2>: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

의 원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있는 그

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번뇌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원인이라고 있는 그

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

는 자는 ‘감각적 대상에 대한 번뇌(kāmāsavā, 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하

고, ‘생존에 대한 번뇌(bhavāsavā, 有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무지라는

번뇌(avijjāsavā, 無明漏)’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것을 안다. 즉, ‘태어남은 끝났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

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12)

12) “so idaṃ dukkhan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ime āsavā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samudayo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o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 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sa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원전의 출처는 
    각주9)참조.

 

이 두 가지 누진지의 정형문은 아래의 표로 나타낸 바와 같이 사용된다. 

 

<표 1> 니까야상의 누진지

 

                               누진지1                                         누진지2                            

DN    육신통 중       DN 34                                           DN 2, 3, 4, 5, 6, 7, 8, 10, 11, 12

MN   육신통 중        MN 6, 12, 73, 77, 108, 119          없음

         삼명 중           MN 53, 54, 71                              MN 4, 19, 27, 36, 39, 51, 60, 65, 76,

                                                                                     79, 100, 101, 125

          사선 후          없음                                              MN 113                               

AN     삼명 중          없음                                              AN IV 178-9

          사선 후          없음                                              AN II 211, III 93, 100                  

 

이 표에서 보듯이 <누진지 2>가 보다 많이 사용되는 경향은 있으나, 육신통

과 삼명의 구분에 따라 정형문이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

로 두 정형문 모두 아라한의 해탈 상태를 나타내며, 그 내용 역시 동일한 의미

를 가진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자의 기술 가운데 내용이 서로

상응하는 부분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누진지 1>: (a)번뇌가 소멸한다→ (a1)번뇌가 없는 심해탈・혜해탈을 성

취한다.

<누진지 2>: (b)사성제를 안다・번뇌를 안다 → (b1)세 가지 번뇌에서 마

음이 해탈한다 → (b2)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것을 안다.

 

‘누진지’의 원어로 볼 수 있는 ‘āsavānaṃ khayañāṇa’는 <누진지 2>의 바로 앞

에 설해진 경문에서 찾을 수 있는데,13) 이 문구는 ‘khayañāṇa’의 해석에 따라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이 복합어를 Dative Tatpuruṣa로 해석하면 ‘āsavānaṃ

khayañāṇa’라는 문구의 의미는 ‘번뇌의 소멸을 위한 지혜’가 되어 구체적으로

(b)의 ‘사성제에 대해 아는 것’을 가리키게 되고, Genitive Tatpuruṣa로 해석하면

‘번뇌의 소멸에 대한 지혜’가 되어 (b1)의 ‘번뇌로부터의 해탈’과 (b2)의 ‘해탈

했음을 아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문맥상 이 복합어는 두 가지 의미를 다 아우

르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 타당해 보이며, 따라서 누진지란 사성제에 대한 지

혜를 통해 번뇌에서 해방되어 해탈했음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13) e.g. DN. I, p.83: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해지고 깨끗해져 오점이 없고 더러움이 없
    으며 유연해지고 준비가 되고 확립되어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얻으면, 누진지로마음을 향하게 하
    고 기울인다(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이 두 종류의 누진지에 대한 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a1)과 (b1)은 동일하게 해탈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어 그 의미하는 바

가 같다고 할 수 있으므로, 아라한이 소멸하는 번뇌에는 세 종류가 있으며 지

혜에 의해 이 번뇌들에서 마음이 해탈한 상태가 심해탈과 혜해탈이 성취된 상

 

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두 해탈의 의미를 확정함에 중요하게 작용하

는데, III. 2에서 이 점과 관련하여 다시 언급하도록 한다. 한편, (b2)는 해탈지견

을 의미하는데 해탈지견은 해탈의 완성에 반드시 수반되는 앎이기 때문에

(a1)에 직접적인 기술이 없다고 하더라도 심해탈・혜해탈에 해탈지견의 의미

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한다.

 

둘째, (a1)과 (b1)의 내용이 상응하기 때문에 각각의 원인이 되는 (a)와 (b)도

서로 다르지 않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b)의 ‘사성제를

알고 번뇌를 아는 것’이 바로 (a)의 ‘번뇌의 소멸’을 의미한다. (b)에서 번뇌를

아는 것은 사성제를 아는 것과 같은 패턴으로 나타나 있으며, 괴로움이 곧 번

뇌라는 이해의 방식에 의해 그와 같이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경험을 통한 앎을 의미하고, 번뇌를 안다는 것 역

시도 번뇌의 소멸의 경험을 통한 앎을 의미한다. 따라서 (a)의 번뇌의 소멸은

근본적으로 사성제를 아는 것, 즉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아라한의 해탈이란 사성제에 대한 지혜에 의해 세 가지

번뇌를 소멸함으로써 얻은 마음의 해탈 혹은 심해탈과 혜해탈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 가운데 ‘번뇌의 소멸’에 관련된 논의

는 원고를 달리하도록 하고 이하 ‘심해탈과 혜해탈’에 대해 고찰한다.

 

III. 심해탈과 혜해탈

 

1. 심해탈과 혜해탈의 원의

‘심해탈’로 번역되는 ‘cetovimutti’는 ‘마음’을 의미하는 ‘ceto’와 ‘해탈’을 의

미하는 ‘vimutti’에서 만들어진 복합어로, 마음이 해탈의 주체를 나타내는 말

로 이해되어 ‘마음의 해탈’로 해석된다. 그리고 ‘혜해탈’로 번역되는 ‘paññāvimutti’

는 ‘지혜’를 의미하는 ‘paññā’가 해탈의 수단으로 이해되어, ‘지혜에 의한 해탈’

 

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심해탈・혜해탈이란 ‘마음이

지혜에 의해 해탈되는 것’으로, 동일한 해탈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부터의 명

칭이며 이 경우 양해탈간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할 수 있다.14) 실제로 마

음이 지혜에 의해 해탈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용례를 니까야에서 찾을 수 있는

데 그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15)

14) 이와 같은 견해는 舟橋一哉, 原始仏教思想の研究, (京都:法蔵館, 1952), p.207; Gombrich, R. F. 
    How Buddhism Began: the conditioned genesis of the early teachings(London : Athlone Press, 
    1996), p.112등에 나타나 있다.
15) 아래에 제시한 것은 마음이라는 해탈의 주체와 지혜라는 수단이 함께 보이는 용례만을 나타낸 것
    으로, 이외에도 ‘마음이 해탈함’과 ‘지혜에 의해 해탈함’을 의미하는 문구가 각각 등장하는 용례
    도 보인다. e.g. SN. I, p.233: “그리고 너의 마음은 잘 해탈하였다(cittaṃ ca te suvimuttaṃ).”; MN. I,
    p.235: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이와 같이 이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에 의해 보아 집착 없이 해탈했다(n’ etaṃ mama, n’ eso ’ham asmi, na
    meso attā ti eveṃ 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naññāya disvā anuppādā vimutto hoti).”

 

① 지혜가 원만하게 계발된 마음은 바르게 여러 번뇌에서 해탈한다. 즉 감각

적 대상에 대한 번뇌, 생존에 대한 번뇌, 무지라는 번뇌이다.16)

16) DN. II, p.81, p.84, p.91, p.94, p.98, p.123, p.126: “paññāparibhāvitaṃ cittaṃ sammadeva 
    āsavehi vimuccati, seyyathidaṃ kāmāsavā, bhavāsavā, avijjāsavā.” 이 문장은 제6차결집판을 
    따랐다. PTS에는 ‘사견에 의한 번뇌(diṭṭhāsavā, 見漏)’가 포함되어 있으나, 이 번뇌는 4부 
    니까야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아비담마에서 세 가지 번뇌에 이 번뇌를 더하여 네 가지로 설해지는 
    경우가 많다. cf. Sv.III, p.989: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가지 번뇌이다. [즉] 감각적 대상에 대한 번뇌, 
    생존에 대한 번뇌, 무지라는 번뇌가 세 가지이다. 아비담마에서 그[번뇌]들은 사견에 의한 번뇌와 함께 
    네 가지이다(tayo’ me bhikkhave āsavā. kāmāsavo bhavāsavo avijjāsavo ti tayo. abhidhamme te 
    yeva diṭṭhāsavena saddhiṃ cattāro).”

 

②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에 의해 보는 사람의 마음은 탐

욕에서 벗어나 집착 없이 여러 번뇌에서 해탈한다.17)

17) SN, III, p.45: “evam 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cittaṃ virajjati vimuccati 
    anupādāya āsavehi.”

 

③ 오취온에 대해서 생멸을 관찰한 사람은 머지않아 집착 없이 여러 번뇌에

서 마음이 해탈했다.18)

18) DN. II, p35: “tass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vyayānupassino viharato na cirass’eva 
    anupādāya āsavehi cittaṃ vimucci.” cf. DN. II, p.42; MN. III, p.287; SN. III, p.68, p.132 etc: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u.”

 

④ 비구들이여, 비구는 무상(無常)인 형색을(이하 오온의 각 요소에 대하여

동일) 무상이라고 본다. 이것이 정견(正見)이다. 바르게 보는 자는 혐오한

다. 기쁨의 소멸로부터 탐욕의 소멸이 있고, 탐욕의 소멸로부터 기쁨의

소멸이 있다. 기쁨과 탐욕의 소멸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것이 잘 해탈한

것이라고 불린다.19)

19) SN. III, p.51: “aniccaññeva bhikkhave bhikkhu rūpaṃ aniccanti passati. yāyaṃ〔BCS sāssa〕
    hoti sammādiṭṭhi. sammā passaṃ nibbindati. nandikkhayā rāgakkhayo, rāgakkhayā nandikkhayo. 
    nandirāgakkhayā cittaṃ vimuttaṃ suvimuttan ti vuccati.”

 

위의 용례들은 모든 번뇌를 소멸한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고, 마음은 그 완전

한 해탈의 주체로서 기능하며 지혜는 해탈에 이르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이 해탈한다(cittaṃ vimuccati)’에서 ‘심해탈(cetovimutti)’이, ‘바른

지혜에 의해 해탈한다(sammappaññāya vimuccati)’등에서 ‘혜해탈(paññāvimutti)’

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되어, 각각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이라고

해석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이 용례들을 통해 해탈의 수단이 되는 ‘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위 용례들 가운데 ①과 ②에 드러나 있는 ‘지혜(paññā)’는 이 경문이 설

해진 문맥에 따르면 각각 ‘계・정・혜 중의 혜’와 ‘오온의 무아에 대한 지혜’를

의미한다. 한편, ③과 ④에는 ‘지혜’를 의미하는 직접적인 단어나 어구가 나타

나 있지 않지만, ③은 오취온의 생멸에 대한 관찰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됨이 의

미상 내포되어 있고, ④는 무상인 오온에 대하여 그것을 무상이라고 보는 정견

인 지혜를 통해 마음이 해탈했음이 나타나 있다. 이들 용례를 통해 ‘오온 혹은

오취온의 무상에 대한 지혜’와 ‘오온의 무아에 대한 지혜’가 마음의 해탈로 이

끄는 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누진지 2>에 나타나듯이 사성제에 대한

지혜 역시 마음의 해탈로 이끈다. 이처럼 번뇌를 소멸하여 마음의 해탈을 성취

하게 하는 지혜는 ‘오온 혹은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그 내용으로 하며, 혜해탈

은 이러한 지혜에 의한 해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탈의 수단을 나타내

는 혜해탈의 의미는 III. 2에서 보듯이 혜해탈의 의미가 보다 구체화되어도 함

의되어 유지된다.

 

그런데 혜해탈과는 달리, ‘마음이 지혜에 의해 해탈한다’는 해석에 의해 심

해탈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심해탈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마음이 해탈한다(cittaṃ vimuccati)’라는 표현은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는 데 비해, ‘심해탈’이라는 술어는 항상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20) 빠알리 문헌에서의 양해탈의 용법을 보면, 심해탈은 단독

으로 사용되거나 혜해탈과 함께 나타나며 혜해탈은 단독으로 사용되는 일이

없이 항상 심해탈과 함께 쌍을 이루어 나타난다. 심해탈과 혜해탈은 함께 번뇌

를 완전히 소멸한 깨달음의 상태를 나타내므로, 이 용법으로만 사용되는 혜해

탈은 항상 완전한 해탈을 의미한다. 반면, De Silva도 지적하고 있듯이21) 심해

탈은 단독으로 수식어를 동반하여 나타나는 ‘일시적이고 즐거운 심해탈

(sāmāyikaṃ kantaṃ cetovimuttiṃ)’22)과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akuppā cetovimutti)’

이라는 두 가지 형태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로 표현되는 경우에만 완

전한 해탈을 의미한다. 이처럼 심해탈은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로 나타나는 경

우와 혜해탈과 쌍을 이루어 함께 나타나는 경우에만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며,

이것에 의해 심해탈이라는 술어 자체는 단독으로 해탈의 주체로서의 마음이

완전히 해탈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 ‘cetovimutti’가 ‘cittaṃ vimuccati’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심해탈이라는 술어의 용법을 고려하
     지 않고 많은 연구에서 ‘심해탈 = 완전한 해탈’로 해석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경우 ‘심해탈 = 양
     면해탈(ubhatobhāgavimutti)’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e.g. Gombrich, R. F. op. cit., pp.117-118; 
     舟橋一哉, 앞의 책, pp.222-223; 雲井昭善, 「原始仏教における解脱」, 仏教思想8 解脱 (京都:
     平楽寺書店,1982), pp.110-112; 渡辺文麿, 「パーリ仏教における解脱思想」, 仏教思想8 解脱 (京都:
     平楽寺書店,1982), pp.130-131.
21) De Silva, L. “Cetovimutti, Pannavimutti and Ubhatobhagavimutti”, Pali Buddhist Review Vol.3, 
    No.3, (Ilford: Pali Buddhist Union, 1978), p.120. 이어 이 논문에는 니까야에 나타나는 해탈 가운데 
    일시적인 해탈을 의미하는 cetovimutti와 달리,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는 해탈로서 akuppā cetovimutti,
    paññāvimutti, paññāvimutti and cetovimutti, ubhatobhāgavimutti의 네 가지 형태가 제시되어 있다
    (p.121).
22) MN. III, p.110.

 

여기에서 <아라한 4>에서 언급했던 설명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PTS외에 제6차결집판과 다른 각종 사본들에는 ‘akuppā cetovimutti’가 아닌

‘akuppā vimutti’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심해탈’과 ‘해탈’이 서

로 대치 가능한 의미를 지닌 술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

본과 판본에서 ‘해탈’이라는 술어가 사용된 만큼 ‘심해탈’이라는 술어는 완전

한 해탈을 의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TS의 한 곳에서 그렇게 나타나듯이 만약 PTS에도 ‘vimutti’로 표기되었다면,

실질적으로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는 심해탈의 용례는 없는 것이 된다.

 

한편, 니까야에 나타나는 심해탈의 실제 용례는 선정과 관계된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마하웨달라숫따(Mahāvedallasutta)」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심해탈

가운데 공성(suññatā, 空性)심해탈을 제외한23) 나머지 심해탈은 모두 선정의 성

취와 관련되어 있다.24) 즉, 불고불락(adukkhamasukhā, 不苦不樂)심해탈은 제4

선의 성취를 조건으로 하며, 네 가지 무량(appamāṇā, 無量)심해탈은 자애(mettā,

慈)・연민(karuṇā, 悲)・함께 기뻐함(muditā, 喜)・평온(upekkhā, 捨)의 사무량심의

수습(修習)을 의미하는데, 상윳따니까야의 「멧따숫따(Mettāsutta)」에 의하면,

자애의 수습은 청정한 해탈(subha vimokha)을 궁극으로 하고 연민의 수습은 공

무변처(ākāsānañcāyatana)를, 함께 기뻐함의 수습은 식무변처(viññāṇañcāyatana)

를 평온의 수습은 무소유처(ākiñcaññāyatana)를 궁극으로 한다.25) 또한 무소유

(ākiñcaññā, 無所有)심해탈은 무소유처를 성취하는 것이며 무상(animittā, 無相)

심해탈은 무상의 마음의 삼매(animitta cetosamādhi)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들

심해탈의 ‘마음’은 완전한 해탈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선정에 의해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는 주체로서 기능한다.26) 이렇듯 선정을 성취한 상태와 관련되어 있

는 심해탈 역시 번뇌를 모두 소멸한 완전한 해탈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23) De Silva, L. op, cit., p.130에는 공성 심해탈이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에 속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하웨달라숫따」의 각종 심해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같은 논문 pp.122-130를 참조하라.
24) MN. I, pp.296-298. cf. SN. IV, pp.296-297.
25) SN. V, pp.119-121.
26) 마음과 선정의 관계는 증상계학(adhisīlasikkhā, 増上戒学)・증상심학(adhicittasikkhā, 増上心学)・
    증상혜학(adhipaññāsikkhā, 増上慧学)의 경우와 같이, 삼매(samādhi, 定)가 마음(citta, 心)으로 
    대체되어 있는 술어에 의해서도 잘 나타난다.

 

니까야에서 심해탈은 단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심해탈자’를 의미하는

과거분사형 ‘cetovimutta’는 찾아볼 수 없다.27) 반면 혜해탈은 단독으로는 쓰이

는 일 없이 언제나 심해탈과 쌍을 이루어 나타나지만, ‘혜해탈자’를 의미하는

‘paññāvimutta’는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심해탈・혜해탈이 함께 완전한

해탈을 의미한다는 두 가지 사실로부터 다음의 사항을 알 수 있다. 즉 심해탈

만으로는 완전한 해탈의 성취가 불가능하며, 혜해탈을 함께 갖춤으로써 비로

소 해탈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해탈자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심해탈자

라는 술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혜해탈은 언제나 심해탈을 수반하므로 혜

해탈자라는 술어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를 함의한다. 그러므로 혜해탈자

는 완전한 해탈자를 나타내는 용어로서 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28)

27) 니까야에서 ‘심해탈자’라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준영, 「두 가지 해탈의 
    의미에 대한 고찰: 니까야를 중심으로」, 불교학연구 제31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06), p.74
    에도 지적되어 있다.
28) 니까야에는 혜해탈자와 관련해 양면해탈자(ubhatobhāgavimutta)라는 또 다른 한 종류의 아라한이
    등장한다. 본 논문에서는 양면해탈자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생략하겠지만, 두 아라한의 차이에 대
    해 간략히 말하면 양면해탈자는 반드시 무색정 이상의 선정을 성취하고 지혜에 의해 번뇌를 소멸
    하는 아라한이고, 혜해탈자는 사선 혹은 선정의 성취 없이 지혜에 의해 번뇌를 소멸하는 아라한이
    다. 디가니까야의 「마하니다나숫따(Mahānidānasutta)」(DN. II, p.71)의 설명에 의해 양면해탈자만
    이 심해탈과 혜해탈 모두를 성취하는 아라한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두 가지 해탈은 ‘아
    라한’이 얻는 해탈이므로 양면해탈자 만이 이를 성취하고 혜해탈자에게서는 배제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cf. De Silva, L. op, cit., pp.140-142. 

 

2. 탐욕의 소멸과 무지의 소멸

니까야에 심해탈과 혜해탈은 병렬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 술

어들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보이지 않지만, 유일하게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두 해탈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심해탈과 혜해

탈의 의미는 서로 분리된 형태로 더욱 구체화되어 설명된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법이 명지(明智)에 도움이 된다. 두 가지[법이]란

무엇인가? 사마타와 위빳사나이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마음이 닦인다. 마음이 닦이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탐

욕이 버려진다. 비구들이여, 위빳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지

혜가 계발된다. 지혜가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무지가 버려진다.

비구들이여, 탐욕에 물든 마음은 해탈되지 않고, 무지에 물든 지혜는

계발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실로 이처럼 탐욕이 사라짐으로부터 심해탈
이 있고 무지가 사라짐으로부터 혜해탈이 있다.29)

29) AN. I, p.61: “dve’me bhikkhave dhammā vijjābhāgiyā. katame dve. samatho ca vipassanā ca. 
    samatho[PTS add ca〕bhikkhave bhāvito kam attham anubhoti. cittaṃ bhāvīyati. cittaṃ bhāvitaṃ 
    kam attham anubhoti. yo rāgo so pahīyati. vipassanā bhikkhave bhāvitā kam attham anubhoti. 
    paññā bhāvīyati. paññā bhāvitā kam attham anubhoti. yā avijjā sā pahīyati. rāgupakkiliṭṭhaṃ vā 
    bhikkhave cittaṃ na vimuccati, avijjupakkiliṭṭhā vā paññā na bhāvīyati. iti〔PTS imā〕kho 
    bhikkhave rāgavirāgā cetovimutti avijjāvirāgā paññāvimuttī ti.”

 

이 내용을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2> 명지에 도움이 되는 법

                           수행법①          ①에 의해                      ②에 의해                     ③에 의해
                                                       얻어지는 이익②           얻어지는 이익③           얻어지는 해탈
명지에 도움이      사마타               마음이 닦임                   탐욕이 버려짐              심해탈
되는 법                위빳사나            지혜가 계발됨                무지가 버려짐              혜해탈           
 
이 경전에는 심해탈과 혜해탈이 어떠한 수행법에 의해 얻어지며, 어떠한 상
태를 의미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심해탈이란
사마타에 의해 마음이 닦임으로써 탐욕이 버려진 상태이며, 혜해탈이란 위빳사
나에 의해 지혜가 계발되어 무지가 버려진 상태이다. 그런데 각 해탈에 관련된
요소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심해탈의 마음과 탐욕의 관계와 혜해탈의 지혜
와 무지의 관계는 동일하지 않다. 심해탈의 경우 마음이 정화되어감으로써 그
마음에 있던 탐욕이 사라져 가는 반면, 혜해탈의 경우 지혜와 무지는 서로 대치
관계에 있어 지혜가 계발되어 감에 따라 무지가 제거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에
심해탈은 ‘마음이 탐욕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를, 혜해탈은 ‘무지가 제거되고 지
혜가 갖추어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혜해탈은 앞서 제시했던 ‘지
혜에 의한 해탈’이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해탈로 이끄는 수단 자체 보다는 그 수
단인 지혜가 완성되어 갖추어진 상태에 초점이 맞추어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경전에서 설명되고 있는 심해탈과 혜해탈은 아라한이 성취하는 두 가지

해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위에서 살펴본 아라한의 해탈이 의미하는 바

와 그 내용이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서로 관련된 다른 교설들을 통해

몇 가지 사항을 보완하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II. 2에서 니까야에 나타나는 두 종류의 누진지의 내용을 비교하여 얻

은 결과, 즉 사성제에 대한 지혜에 의해 세 가지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는 것

이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

다. 아라한이 소멸하는 세 종류의 번뇌 가운데 두 가지(kāmāsava, bhavāsava)는

탐욕과 관련되어 있고30) 나머지 한 가지(avijjāsava)는 무지와 관련되어 있는

데, 이 세 가지 번뇌에서 해탈하는 주체는 동일하게 ‘마음’이다. 그러므로 심해

탈과 혜해탈을 각각 탐욕과 무지가 소멸된 상태로 보았을 때, 심해탈만이 탐욕

이 소멸된 ‘마음의 해탈’이 아니라 혜해탈 역시도 무지가 소멸된 ‘마음의 해탈’

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30) kāmāsava는 kāmarāga와, bhavāsava는 rūparāga, arūparāga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cf. Ps. I, p.67: “여기에서 kāmāsava란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의 요소를 가진 
    탐욕이다. bhavāsava란 색[계]와 무색[계]의 생존에 대한 욕구와 탐욕이다.(ettha ca kāmāsavo ti
    pañcakāmaguṇiko rāgo. bhavāsavo ti rupārūpabhave chandarāgo).”

 

또한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로 이끄는 수단은 지혜이므로, 이 지혜는 무

지 뿐만 아니라 탐욕의 소멸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탐욕이 소멸된 상태인 심해탈의 성취에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

미한다. 만약 이러한 심해탈이 사마타만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면, 번뇌를 전

혀 소멸하지 못한 범부도 이와 같은 심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물론

고디까(Godhika) 비구의 예에서 보듯이31) 일시적인 심해탈은 주석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간적 [선정의]성취(lokiya-samāpatti)’로 분류되기 때문에32), 성자의

과를 얻지 못한 사람도 심해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혜해탈과 더불어 완전

한 해탈을 의미하는 경우의 심해탈은 이 세간적 심해탈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

고, 이 두 심해탈의 차이는 지혜에 의한 번뇌 소멸의 유무에 있는 것이다.

31) 「고디까숫따(Godhikasutta)」 (SN. I, pp.120-122)에 따르면, 고디까 비구는 일시적인 심해탈
    (sāmayika cetovimutti〔PTS sāmādhika cetovimutti〕)을 얻지만, 거기에서 몇 번이나 벗어난다. 
    여기서 고디까 비구가 얻는 심해탈에 대해 PTS와 제6차결집판은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주석서에 ‘sāmayika cetovimutti’에 대해 설명되고 있는 점을 따라 제6차결집판의 
    용어를 채택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심해탈이 선정과 관련된 심해탈을 의미할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32) Spk. I, p.182-183: “일시적 심해탈을이란, [마음이]집중된 순간에 반대되는 법들에서 해탈하고 
    대상에 확고하기 때문에 [이러한]세간적 [선정의]성취가 일시적 심해탈이라고 불린다.(sāmayikaṃ
    cetovimuttin ti appitappitakkhaṇe paccanīkadhammehi vimuccati, ārammaṇe ca adhimuccatī ti
    lokiyasamāpatti sāmayikā cetovimutti nāma).”

 

번뇌의 소멸에 사용되는 지혜는 단순히 지적인 앎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수행이라는 실천을 통해 갖추어지는 지혜이며, 그 실천이란 이 경전에도 제시

되어 있듯이 다름 아닌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수행이다. 이 두 수행법은 마음의

집중과 지혜의 계발이라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실천법이지만, 여러 종류의

번뇌의 소멸에 함께 기능하여 최종적으로 무지의 소멸을 통해 해탈로 이끄는

궁극적 지혜를 갖추게 한다. 이 경전에는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심해탈과 혜해

탈에 각각 대응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확실하게

구분된 형태로 각각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에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

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심해탈을 위한 탐욕의 소멸에도 지혜가 필요하므로 심해

탈을 얻기 위해서는 사마타뿐만 아니라 지혜를 계발하는 위빳사나 역시 닦아

야한다. 또한 열 가지 속박(saṃyojana)33)에서 보듯이 무지는 번뇌 가운데에서

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것으로, 번뇌가 소멸하는 순

서에 따라 보았을 때 탐욕이 먼저 버려지고 최종적으로 무지가 버려지면서 해

 

탈이 성취된다. 따라서 무지가 소멸됨으로써 지혜가 갖추어진 상태인 혜해탈

은 탐욕이 소멸된 상태인 심해탈 후에 얻어지면서 이 심해탈의 상태를 포함하

고 있다고 할 수 있고,34) 이를 통해 혜해탈의 성취를 위해서도 사마타와 위빳

사나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3) 열 가지 속박은 다섯 가지 낮은 속박(pañc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五下分結)과 다섯 가지 높은
    속박(pañca uddhambhāgiyāni saṃyojanāni, 五上分結)으로 이루어진다(DN. III, p.234; AN. V, p.17).
    다섯 가지 낮은 속박은 ①오온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sakkāyadiṭṭhi, 有身見), ②불‧법‧승
    등에 대한 의심(vicikicchā, 疑), ③계율과 종교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 戒禁取), ④감각
    적 대상에 대한 욕구(kāmacchanda), ⑤악의(byāpāda)이고, 다섯 가지 높은 속박은 ⑥색[계]에 대한
    탐욕(rūparāga), ⑦무색[계]에 대한 탐욕(arūparāga), ⑧아만(māna), ⑨[마음의] 들뜸(uddhacca, 掉
    挙), ⑩무지(avijjā, 無明)이다. 사성자는 열 가지 속박의 소멸정도에 따라 구분되는데, ①에서 ③까
    지의 속박을 소멸함으로써 예류자가 되고, 거기에 더하여 ④와⑤를 옅게 하면 일래자가 되는데,
    문헌상에는 탐욕(rāga, 貪)‧성냄(dosa, 瞋)‧어리석음(moha, 痴)가 옅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①
    에서⑤까지의 낮은 속박을 전부 소멸하면 불환자가 되며 아라한은 ⑥에서 ⑩까지의 높은 속박까
    지 모두 소멸한다. 
34) cf. 정준영, 앞의 논문, p.75-76. 이 논문에는 열 가지 속박 가운데 ‘낮은 속박의 감각적 욕망은 심해
    탈을 통하여 벗어나고 높은 속박의 무지는 혜해탈을 통해 벗어날 수 있다. 즉 혜해탈을 통해 무지
    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심해탈보다 높은 위치라는 것이다’라고 하며 ‘낮은 속박의 욕망은 심해탈
    을 통해서, 높은 속박의 욕망과 무지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조화를 통하여 벗어난다고 유추할 수
    있다’라는 견해가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경전에 명지(vijjā)에 도움이 되는 두 가지 법으로서 사마

타와 위빳사나가 제시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명지는 무지와 대

치되기 때문에 위빳사나만으로도 명지가 얻어진다고 볼 수 있음에도, 사마타

와 위빳사나가 모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명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

수행법 모두를 닦아야 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명지를 얻었다는 것은 무지의 소

멸만이 아니라 탐욕의 소멸을 함께 얻어 심해탈과 혜해탈이 모두 성취된 상태

와 같고, 따라서 무지가 소멸된 혜해탈이 탐욕이 소멸된 심해탈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혜해탈이 심해탈을 포함한다는 말은 혜해탈의 성취에 심해탈의 성

취가 내포되어 있음, 즉 혜해탈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심해탈과 혜해탈 모두가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혜해탈에 심해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혜해탈만이 최종적인 해탈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해

탈은 서로 다른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먼저 성취된 심해탈의 상태는 혜해탈

이 성취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탐욕과 무지가 소멸된 두 가지 상태

가 모두 갖추어진 것이 완전한 해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심해탈과 혜해탈의 각각의 성취에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모두 사

용되나, 이 경우 단지 각 해탈에서 버려지는 번뇌의 제거에 주로 기능하며 우

세가 되는 수행법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탐욕은 정서와 관련

된 번뇌이기 때문에 그 소멸을 위해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화시키는 사마

타 수행의 역할이 크고, 무지는 지적인 부분에 관계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그 

소멸을 위해 지혜를 계발하는 위빳사나 수행의 역할이 큰 것이다. 번뇌를 소멸

하고 성자의 과를 성취함에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함께 기능하는 양상은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다.

 

3.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결합

지금까지 심해탈과 혜해탈은 짝을 이루어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고, 심해탈

은 단독으로 완전한 해탈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심해탈자라는 술어가 니까

야에서 보이지 않지만, 혜해탈은 언제나 심해탈을 수반하므로 혜해탈자는 심

해탈과 혜해탈 둘 다를 성취한 아라한이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에 유일하게 ‘심해탈을 가진 자’와 ‘혜해탈을 가진 자’라는 두 명칭이 등장하는

경전이 있다. 앞으로 보아가겠지만, 여기에 나타나는 두 해탈자의 명칭은 사마

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함께 닦아감에 있어 각각 마음의 집중과 지혜의 뛰어남

에 따라 구분되어 부여된 이름으로, 심해탈과 혜해탈 가운데 한 가지 해탈만을

성취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경전은 심해탈자와 혜해탈자라는 명

칭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아라한이 되기 위한 실제의 수행에

서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어떻게 결합된 형태로 기능하는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하다.

 

두 종류의 해탈자의 명칭은 「마하말룽끼야숫따(Mahāmāluṅkyasutta)」의 마

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이 경전에는 다섯 가지 낮은 속박(pañc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五下分結)을 제거하기 위한 길(magga)과 실천(paṭipadā)에 대한 세

존의 설법이 나타나 있는데, 설법의 마지막에 아난다와 붓다는 다음과 같은 대

화를 나눈다.

 

세존이시여, 만약 다섯 가지 낮은 속박의 제거를 위해 이것이 길이고 이

것이 실천이라면, 왜 여기 어떤 비구는 심해탈을 가진 자이고 어떤 비구

는 혜해탈을 가진 자입니까?

아난다여, 이 경우 그들에게 능력(indriya)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나

는 말한다.35)

35) MN. I, p.437: “eso ce bhante maggo esā paṭipadā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hānāya, atha kiñcarahi idhekacce bhikkhū cetovimuttino ekacce bhikkhū paññāvimuttinoti. 
    ettha kho tesāhaṃ〔BCS panesāhaṃ〕ānanda, indriyavemattataṃ vadāmī ti.” 

 

동일한 목적을 위해 동일하게 실천함에도 어떤 사람을 심해탈을, 어떤 사람

은 혜해탈을 가진 자가 되며, 그 이유는 그 사람이 가진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다섯 가지 낮은 속박이란 사성자 가운데 세 번째 성자인 불

환자가 제거하는 속박으로, 아난다의 질문에서 이 속박들을 제거하는 방법이

심해탈 혹은 혜해탈로 이어지는 실천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전에 설해진

이 속박들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초선을, 제2선을 ... 무소유처[정]을 성취한다.

 

② (선정의 각 단계에서) 그곳에 있는 형색(色)에 속하는 것, 느낌(受)에 속하

는 것, 인식(想)에 속하는 것, 잠재형성력(行)에 속하는 것, 의식(識)에 속

하는 것을(무색정에서는 형색에 속하는 것을 제외함), 무상, 괴로움, 병,

종기, 화살, 불행, 질병, 타인, 파괴, 공, 무아라고 관찰한다.36)

36) Ibid., p.435: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그 법들에서 마음을 돌려 불사의 요소에 마음을 집중한다.37)

37) Ibid., pp.435-436: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i.”

 

그곳에 확립된 사람은 번뇌의 소멸에 도달한다(tattha 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만약, 번뇌의 소멸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다섯 가지 낮

은 속박을 제거하여 불환자가 된다.38)

38) Ibid., p.436.

 

주지하듯이, 이 가운데①의 선정의 성취는 사마타 수행에 의한 결과이고 ②

의 무상・고・무아 등의 관찰에 사용되는 수행법은 위빳사나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수행 방법은 한 단계의 선정을 성취한 후 그 선정 단계에 있는 오온에

속하는 요소들을 무상 등으로 관찰하는 ‘사마타 후 위빳사나’를 초선에서 무

소유처정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앙굿따라니까야에 설해진 ‘네 가지

아라한이 되는 길’ 가운데 세 번째 방법인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는

다(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eti)”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39) 

③은 무상・고・무아라는 특성을 가진 선정 속의 오온이라는 법에서40) 마음을 돌려,

불사의 경지인 열반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번뇌를 모두 소멸하면

아라한이 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다섯 가지 속박을 제거하여 불환자가 된다.

39) AN. II, pp.156-157에 설해진 ‘네 가지 아라한이 되는 길’은 다음과 같다. ①사마타가 선행하는 
    위빳사나를 닦는다(samathapubbaṅgamaṃ vipassanaṃ bhāveti), ②위빳사나가 선행하는 사마타를 
    닦는다(vipassanāpubbaṅgamaṃ samathaṃ bhāveti), ③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는다
    (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eti), ④비구에게 법에 대한 들뜸에 사로잡힌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안으로 확립되고 안정되고 한 곳에 고정하여 집중될 때, 그에게 도가 생겨난다(bhikkhuno 
    dhammuddhaccaviggahitaṃ mānasaṃ hoti. so samayo yaṃ taṃ cittaṃ ajjhattam eva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tassa maggo sañjāyati). 이 가운데 세 번째 방법에 대해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Mp.III, p.143: “쌍으로 닦는다라는 것은 쌍을 이루어 닦는다
    [라는 뜻이다]. 선정에 들고 나서 그 마음으로 상카라들을 파악할 수 없다 ... 초선을 성취한다. 

    거기에서 출정하여 상카라들을 파악한다. 상카라들을 파악하고서 제2선을 성취한다...비상비비상처정을      

    성취한다. 거기에서 출정하여 상카라들을 파악한다. 이와 같이 이러한 [방법]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는다고 불린다(yuganaddhaṃ bhāvetī ti yuganaddhaṃ katvā bhāveti. tattha teneva cittena 
    samāpattiṃ samāpajjitvā teneva saṅkhāre sammasituṃ na sakkā ... paṭhamajjhānaṃ samāpajjati, 
    tato vuṭṭhāya saṅkhāre sammasati, saṅkhāre sammasitvā dutiyajjhānaṃ samāpajjati. ...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māpattiṃ samāpajjati, tato vuṭṭhāya saṅkhāre sammasati. evamayaṃ 
    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eti nāma).”
40) cf. Ps. III, p.146: “그는 그 법들에서란 그는 이와 같이 세 가지 특상이 드러나 보인, 성취[한 선정]
    속의 오온이라는 그 법들에서[라는 뜻이다](so tehi dhammehī ti so tehi evaṃ tilakkhaṇaṃ 
    āropetvā diṭṭhehi antosamāpattiyaṃ pañcakkhandhadhammehi).”

 

이러한 다섯 가지 낮은 속박의 제거법에 관한 교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라

는 서로 다른 수행법이 실제의 수행도에서 어떻게 융합하여 번뇌의 소멸에 기

능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맛지마니까야에는 이와 같은 문맥에

서 설해진 또 하나의 경전이 있다. 「앗타까나가라숫따(Aṭṭhakanāgarasutta)」

에는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해탈하고 소멸되지 않은 번뇌가 소멸에 이르며,

얻어지지 않은 위없는 유가안은(瑜伽安穏)이 얻어지는”41) 하나의 법(ekadhamma)

에 대해 설해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1) MN. I, p.349: “avimuttañceva cittaṃ vimuccati, aparikkhīṇā ca āsavā parikkhayaṃ gacchanti,
    ananuppattañca anuttaraṃ yogakkhemaṃ anupāpuṇāti.”

 

① 초선을 ... 제4선을, 사무량심을, 공무변처를 ... 무소유처[정]를 성취한다.

 

② (각 선정의 단계에서) 그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초선은(이하의

선정 단계에서도 동일) 만들어진 것이며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만들

어진 것, 의식에서 생겨난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무상하며, 소멸하는 성

질을 가진 것이라고 안다.42)

42) Ibid., p.350: “so iti paṭisañcikkhati idam pi paṭhamaṃ jhān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yaṃ kho pana kiñci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tad aniccaṃ nirodhadhamman ti pajānāti.”

 

③ 번뇌를 모두 소멸시키면 아라한이 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더라

도 다섯 가지 낮은 속박을 제거하여 불환자가 된다.

 

두 교설의 다른 부분은, 「앗타까나가라숫따」에 ①의 성취하는 선정의 경지

로서 사무량심이 더해져 있고, ②로서 「마하말룽끼야숫따」에는 선정의 경지

에 속하는 요소에 대한 무상・고・무아의 관찰이 설해진 반면, 「앗타까나가라

숫따」에는 만들어진 것에 대해 무상・소멸법이라고 아는 것이 설해져 있다는

점이다. ②의 경우 기술은 다르더라도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아, 두 내

용 모두 위빳사나와 그에 따른 지혜를 의미한다. 이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수행

법도 마찬가지로 초선부터 시작되는 선정의 각 단계에서의 ‘사마타 후 위빳사

나’의 반복이며,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이렇게 융합된 형태로 번뇌의 소멸에

기능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을 통한 번뇌의 소멸상태에 상응하여 성자의 과

가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심해탈자와 혜해탈자의 구분에 관한 아난다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

답 즉, 그것은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라는 대답에 대해서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사마타에 의해 가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한곳에 집중됨(心一境性, 이하 마

음의 집중)이 주(主)가 되고 그 사람은 심혜탈자라고 불린다. 위빳사나에

의해 가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주가 되고 그 사람은 혜해탈자라고 불린

다. 이것에 대해 [아난다]장로에게 의문은 없다 ・・・ 중략 ・・・ 그러나 사

마타에 의해 가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심혜탈자라고 불리고 어떤

사람은 혜해탈자라고 불린다. 위빳사나에 의해 가는 사람 가운데에서도

어떤 사람은 혜해탈자라고 불리고 어떤 사람은 심해탈자라고 불린다. 이

것에 대해 무엇이 원인인지 질문한다 ・・・ 중략 ・・・

왜냐하면, 사마타에 의해 가는 사람 가운데 어떤 비구에게는 마음의 집

중이 주가 되어 그 사람은 심혜탈자라고 불리고, 어떤 [비구]에게는 지혜

가 주가 되어 그 사람은 혜해탈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위빳사나에 의해

가는 사람 가운데 어떤 [비구]에게는 지혜가 주가 되어 그 사람은 혜해탈

자라고 불리고, 어떤 [비구]에게는 마음의 집중이 주가 되어 그 사람은 심

해탈자라고 불린다. 두 명의 상수제자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주로 하여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들 가운데 담마세나빠띠(사리뿟따)는 혜해탈자

가 되었고 마하목갈라나 장로는 심혜탈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능력의

차이가 여기에서 원인이라고 알아야한다" 43)

43) Ps. III, p.147-148: “samathavasena gacchato cittekaggatā dhuraṃ hoti, so cetovimutto nāma. 
    vipassanāvasena gacchato paññā dhuraṃ hoti, so paññāvimutto nāmā ti ettha therassa kaṅkhā 
    natthi ‧‧‧ pe ‧‧‧ samathavasen’eva [PTS add ca〕pana gacchantesu eko cetovimutto nāma hoti, 
    eko paññāvimutto. vipassanāvasena gacchantesu pi eko paññāvimutto nāma hoti, eko 
    cetovimutto ti ettha kiṃ kāraṇanti pucchati ‧‧‧ pe ‧‧‧ samathavasen’eva hi gacchantesu ekassa 
    bhikkhuno cittekaggatā dhuraṃ hoti, so cetovimutto nāma hoti. ekassa paññā dhuraṃ hoti, so 
    paññāvimutto nāma hoti. vipassanāvasen’eva ca〔PTS omit〕gacchantesu ekassa paññā dhuraṃ 
    hoti, so paññāvimutto nāma hoti. ekassa cittekaggatā dhuraṃ hoti, so cetovimutto nāma hoti. 
    dve aggasāvakā samathavipassanādhurena arahattaṃ pattā. tesu dhammasenāpati paññāvimutto
    jāto, mahāmoggallānatthero cetovimutto. iti indriyavemattaṃ ettha kāraṇan ti veditabbaṃ”.

 

여기에서 ‘사마타에 의해 혹은 위빳사나에 의해 가는 사람’이란, 그 수행법

만을 닦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수행법을 모두 닦으나 그 수행을

먼저 닦는 사람을 의미한다.44) 만약 그 수행법만을 닦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사마타에 의해 지혜가 얻어지고 위빳사나에 의해 마음의 집중이 얻어지는 등,

한쪽의 수행에 의해 다른 한쪽의 수행의 결실이 얻어지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각 수행법의 역할과 그에 따른 결실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는 얻어질 수 없다. 어떠한 수행법을 먼저 닦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닦아 가는 가운데, 그 사람의 주요한 능력이 마음의 집중인가 지혜인가에 따라

심해탈자 혹은 혜해탈자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예에

서 보듯이, 두 상수 제자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통해 아라한이 되었으나, 사

리뿟따는 혜해탈자라는 이름을 얻고 목갈라나는 심해탈자라는 이름을 얻었

다.45) 사리뿟따는 지혜가 뛰어나고 목갈라나는 마음의 집중이 뛰어났기 때문

이다.46)

44) cf. M-ṭīkā. p.70: “사마타에 의해 가는 사람에게란, 사마타에 대한 노력이라는 앞선 실천에 전념
    하는 사람에게[라는 뜻이다](samathavasena gacchato ti samathappadhānaṃ 
    pubbabhāgapaṭipadaṃ anuyuñjantassa).” 
45)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통한 사리뿟따의 해탈에 대해서는 「아누빠다숫따(Anupadasutta)」(MN. 
    III,pp.25-29)참조.
46) cf. AN. I, p.23: “비구들이여, 나의 제자인 비구들 중 큰 지혜를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은 
    사리뿟따이고, 신통을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은 마하목갈라나이다(etad aggaṃ bhikkhave mama 
    sāvakānaṃ bhikkhūnaṃ mahāpaññānaṃ yad idaṃ sāriputto, iddhimantānaṃ yad idaṃ 
    mahāmoggallāno).”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아라한의 해탈은 심해탈과 혜해탈 두 종류의 해탈

을 모두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심해탈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해탈을 의

미하지 않고 혜해탈은 항상 심해탈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의 해탈만

으로는 완전한 해탈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경전과 주석서에서 사용된

‘심해탈자’와 ‘혜해탈자’라는 술어는 그 명칭을 이루고 있는 해탈만을 성취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두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을 모두 닦는 과정 속

에서 특화된 ‘능력’에 의해 구분된 이름으로, 어떠한 ‘해탈’을 얻었느냐에 따

른 것은 아닌 것이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 두 해탈자의 이름 중의 한 이름

을 얻지만, 실제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통해 심해탈과 혜해탈을 모두 얻어

해탈을 이룬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IV. 마치는 말

 

이상,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 성취하는 심해

탈과 혜해탈에 대하여, 니까야를 중심으로 그 의미와 내용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 두 종류의 해탈은 술어의 유래에서 보듯이 하나의 해탈에 대한 ‘주체’와

‘수단’을 의미하며 분리되었으나, 실제의 쓰임에서 반드시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심해탈의 경우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로 표현될 때에만

‘해탈의 주체’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 단독으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경우 선정

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 술어를 이루어 완전한 해탈의 주체로서 기능하지 못한

다. 이러한 이유로 니까야에 아라한으로서 ‘심해탈자’라는 표현은 일반적이지

않다. 반면, 혜해탈은 언제나 심해탈을 수반하여 나타나고 그 경우 항상 완전

한 해탈을 의미하기 때문에, ‘혜해탈자’라는 술어는 혜해탈 만이 아니라 심해

탈과 혜해탈 모두를 성취한 아라한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심해탈과 혜해탈이 함께 아라한의 해탈을 의미할 때, 두 해탈의 주체는 동일

하게 ‘마음’이고 성취 수단 역시 동일하게 ‘지혜’이다. 이 지혜의 획득을 위해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사용되며, 이 두 수행법은 두 해탈 각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각 해탈에 모두 사용된다. 그러므로 경전에 설명된 각 해탈에 사용되는

수행법의 구분은 어떠한 수행법이 주로 작용하는지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한

다. 즉 심해탈의 성취에는 사마타가 우세하게 작용하고 혜해탈은 위빳사나가

우세하게 작용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또한 심해탈은 ‘탐욕이 제거되어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이고 혜해탈은 ‘무지가 제거되고 궁극의 지혜가 갖추어진 상

태’로, 번뇌의 소멸 순서에 의해 심해탈이 혜해탈보다 먼저 성취되고 혜해탈

이 심해탈을 포함하여 성취되면서 완전한 해탈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심해탈

과 혜해탈 중 어느 한쪽 해탈의 성취만으로 완전한 해탈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니까야의 한 경전에 유일하게 쌍을 이루어 나타나는 ‘심해탈자’와 ‘혜해

탈자’라는 술어는, 번뇌의 소멸에 함께 기능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아가

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부여된 이름일 뿐, 하나의 해탈에 

의한 해탈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의 고찰을 통해 밝혀진 심해탈과 혜해탈의 의미는, 번뇌를 소멸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 소멸을 통한 해탈의 성취 과정을 통해 더욱 분명해질 것이

다.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을 통해 아라한의 해탈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은 후속 논문에서 이어서 진행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