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화엄경

화엄경(華嚴經)이란 어떤 경전인가

실론섬 2022. 2. 27. 11:28

1. 화엄경의 위치  

화엄경은 부처님을 말한다.
화엄경의 자세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범어(산스크리트어)로는 <마하 바이푸트라 붓다 아바탐사카 수트라(Maha vaipulya buddha avatamsaka sutra/Maha-vaipulyabuddhaganda-vyuha-sutra)> 라고 하는데 이것을 번역해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다. 이것은 <법화경>의 자세한 이름이 <묘법연화경(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인 것과 같다.Mahavaiplya-buddha-ganda-vyuha-sutra  

<화엄경>과 <법화경>은 대승불교 경전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경전이 한마디로 무엇을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화엄경(華嚴經)>은 부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방광불(大方廣佛)'이란 곧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법화경(法華經)>은 무엇을 설하고 있느냐 하면 '묘법(妙法)'이라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묘법연화경>에서 묘법이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하는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의 불(佛)은 대비로자나불(大毘盧遮那佛)이다. 그래서 옛부터 <화엄경>을 불(佛)을 말하는 경, <법화경>은 법(法)을 말하는 경이라고 구분해 왔다.

'대방광불(大方廣佛)'의 의미
그러면 먼저 '대방광(大方廣)'이란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부처님에게 붙인 형용사로 '광대하다''크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대방광불이란 '광대한 부처님'이란 의미가 된다. 이 부처님은 우리들이 지성이라든가 시간 또는 공간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한정되지 않는 무한한 부처님, 무한대의 부처님이다. 이 부처님의 설법을 말하는 것이 <화엄경>이다.

'화엄(華嚴)'의 의미
그 다음 '화엄(華嚴)'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 보기로 한다. 범어로 '간다비하(Ganda-vyuha)'라는 말이 있는데 '간다(Ganda)'는 잡화(雜華)라는 뜻이고, '비하(vyuha)'는 엄식(嚴飾)이라 번역된다. '잡화.엄식(雜華嚴飾)'이란 여러가지의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는 것이 화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아름다운 꽃이라고 해도 장안이나 낙양에 가보면 중국인이 즐기는 것은 목단꽃이다. 물론 목단꽃으로 장식된 것은 보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름없는 잡초로 장식돼도 그것 또한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잡화이지만 가지각색의 꽃으으로 장식하든 아름다운 목단꽃으로 장식하든 그것은 모두다 훌륭한 것이다. 벗꽃처럼 순간적으로 활짝 피었다 지는 꽃을 장식해도 훌륭하다.  

그러므로 이 잡화라는 것은 목단꽃도 좋고 벗꽃도 좋고 들꽃도 좋다는 것이다. 그런 꽃이 열심히 자기의 생명을 꽃피우고 있는 것이 잡화엄식이다. 꽃은 어떤 꽃이라도 개성을 가지고 있다. 목단은 목단대로 탐스럽고 들꽃은 들꽃대로 조촐하며 남몰래 그러나 힘껏 우주의 생명을 피고 있는 그것이 잡화엄식이라는 뜻이다. 즉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의 의미
화엄경의 부처님의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이란 어떤 부처님인가. 비로자나불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 를 소리나는대로 음사한 것이다. 그 의미는 '광명변조(光明邊照)'이다. 광명변조란 무한한 광명을 말한다.

불상의 뒷면을 보면 무한한 비치 도상화(圖相化)되어 있다. 바로 그 무한하게 비추는 빛은 광명변조라 부르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곳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광명 그 자체이다. 무한한 광명이 바로 바이로차나이고 그처럼 광채가 빛나는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화엄경> 변상도(變相圖. 부처님의 일대기등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를 보면 본존인 비로자나 부처님 배후에 많은 작은 부처님 (小佛.소불)이 묘사돼 있다. 이것은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나타낸 것인데 이 작은 부처님도 후광이 있다. 이것은 무한광명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2. 화엄경의 구성

두개의 화엄경
<화엄경>구성은 경전에 따라 다른데 번역에는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하나는 동진(東晉)시대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Buddhabhadra, 359~429)라는 사람이 408년에서 420년에 걸쳐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보통 <60 화엄경>이라고 말한다. 동진시대에 번역했기 때문에 <진역(晉譯)화엄경>이라고도 한고 또 가장 오래전에 번역했기 때문에 구역(舊譯)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하나는 당(唐)나라 시대의 서역에 있었던 코탄(지금은 화전(和田)국의 석학이었던 실차난타(實叉難陀. Silstamamda)가 695-699년에 걸쳐서 4년동안 변역한 것으로 80권으로 돼 있으므로 <80 화엄경>, 당나라 시대에 번역 했으므로 당역(唐譯)의 <화엄겸> 그리고 새로운 번역이기 때문에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법장(法藏, 643-712 .중국 당(唐)나라 때의 승려로 법호는 현수대사(賢首大師)이고 국일법사(國一法師)라고도 한다. 그는 중국 화엄종의 제3조로 이 종파의 교리를 집대성 하였다)의 화엄교학은 이 중 <60화엄경>에 의해 조직되었고 징관(澄觀.  738~839 .화엄종(華嚴宗) 제4대조. 청량대사(淸凉大師) ·화엄보살(華嚴菩薩)로 호칭된다)은 <80화엄경>에 의해 이루어졌다. 60화엄과 80화엄은 장소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령 80화엄은 <화엄경>을 설했던 장소가 여덟군데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이것을 팔회(八會)라고 한다. 이 경은 34장으로 구성돼 있어서 34품이라 부른다.

[화엄경]은 부처님 자신이 직접 설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주위에 모인 수많은 보살들이 삼매에 들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감득한 후,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부처님의 세계와,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닦아야 할 보살의 수행 과정(보현행)을 나타내는 데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7처 8회 (60권 화엄경. 일곱군데 장소에서 여덟번의 법회를 열었음을 의미함)로 나누어 화엄경의 무한한 내용들을 지상과 천상으로 다시 지상으로 장소를 옮겨 가면서 구상의 웅대함을 초우주적으로 펼쳐가고 있다.

[화엄경]의 구성은 60권 화엄경에 의하면 7처 8회 34품이고, 80권 화엄경에 의하면 7처 9회 39품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60권 화엄경의 7처 8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적멸도량회 - 마가다국적멸량장 (1. 세간정안품 2.노사나불품)
2)보광법당회 - 보광법당 (3.여래명호품 - 8.현수보살품)
  (이상의 2품은 지상에서의 설법이다)
3)수미산정회 - 수미산정의 제석천 (9.불승수미정품 - 14.명법품)
4)야마천궁회 - 야마천의 보장엄전 (15.불승야마천궁자재품 - 18.보살십무진장품)
5)도솔천궁회 - 도솔천궁의 일체보장엄전 (19.여래도솔천궁일체보전품 - 21.금강당보살십회향품
6)타화천궁회 - 타화자재천궁의 마니보전 (22.십지품 - 32.보왕여래성기품)
  (이상은 모두 천상에서의 설법으로서, 불교의 세계관에서 보면 낮은 천계에서 높은 천계로 옮겨가게 구성되어 있다)
7)보광법당중회 - 보광명전 (33.이세간품)
8)중각강당회(서다원림회) - 기수급고독원의 중각강당 (34.입법계품)
  (마지막 2회의 설법은 재차 지상에서 열린다. 제7의 보광법당중회는 제2회와 같은 장소이므로 법회가 열린 것은 8회
   이지만 법회장소로는 7회가 되는 것이다)  

화엄경의 성립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 두 가지다.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은 <화엄경>의 가장 오래된 모양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십지경(十地經>이라는 단독의 경전으로 존재했다.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은 중관 철학을 확립한 용수 이전에 성립된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화엄경>은 입법계품과 옛것이 점점 정지된 형태를 띄다가 나중에 다른 품이 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34품의 <화엄경>이 성립된 것은 4세기 중엽쯤에 중앙 아시아의 코탄(지금의 和田(화전)에서 집대성되고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입법계품이나 십지품은 인도 문화권에서 성립되었다고 보여지지만 그외 다른 경전은 또 다른 지역에서 성립되어졌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신강의 위구르 자치구에 가면 대단한 불교유적이 있다. 옛탈 코탄은 엄청난 불교사원이 많이 있었던 곳인데 중국의 현장법사도 인도로부터의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코탄을 지나가고 있다. 여기에서 4세기 중엽까지 대화엄경이 편찬되어 그것이 실크로드를 지나 돈황.옥문을 지나서 장안으로 돌어온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의 편찬은 각각의 품벼로 대단히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4세기에 하나의 경전으로 집대성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십지품(十地品)
십지품과 입법계품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 한다면 십지품은 주로 보살의 수행 단계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범어 원본이 전해져 오고 있다. 왜 10지라 하느냐 하면, 열 가지 단계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지(地)란 어머니와 같이 무한한 공덕이 그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땅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이 10단계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초환희지(初歡喜地)라는 단계이다. 종교적 환희가 마음에 솟구쳐 오는 상태를 말한다. 이 경지는 단순히 기쁘다는 정도가 아니다. 깊은 기쁨, 종교적인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최초의 종교적 전환이 일어났을 때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 깊은 종교적 환희가 아니라도 일상 속에서도 뭔가 기쁨을 얻게 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환희지의 기쁨은 그런 차원의 기쁨이 아니다. 종교적 진리으 길을 찾아 나섬으로써 비로소 환희를 맛보는 경지다. 이것이 제일 환희지이다.

중요한 것은 제6 현전지(現前地)다. 이것은 정녕 문자 그대로 비로서 여기에서 근본지(根本智)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근본지라는 것은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해도 좋다.

깨달음과 지혜가 여기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무분별지만으로는 별도리가 없다. 무분별지만으로 안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ㅅ헤간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돌아와서 완성되는 것이 제 10 법운지(法雲地)이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에 의해 나오는 것은 후득지(後得智)다.

입법계품(入法界品)
입법계품이란 뒤에서 다시 설명을 드리겠지만 선재동자(善財童子)라는 젊은 구도자의 구도의 길을 서술한 것이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스승)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가는 매우 드라마틱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화엄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성기품(性起品)
또 한가지 성기품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불성(佛性)에 관한 <화엄경>의 입장을 나타낸 품이다. 이 품은 부처님의 생명을 설명하고 있다. 즉 아무리 윤회하고 있는 중생들일지라도 부처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이 품의 내용이다. 이것 역시 이 경에서는 중심이 되는 매우 중요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3. 화엄경의 세계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화엄경)의 세계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일즉다(一卽多)와 그리고 그 반대인 다즉일(多卽一)이라는 생각이다. 경전은 이것을 한 티끌 속에 일체의 세계가 들어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 작은 먼지속에 일체의 세계가 들어간다, 또는 모든 것은 부처님의 한 털구멍(毛孔.모공)속에 넣어도 넉넉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털구멍 속에 모든 세계가 들어가 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이 경에서는 보리(菩提)를 구하는 마음을 발한다면 미세한 세계가 곧 큰 세계이며 큰 세계가 즉 미세한 세계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소세계가 대세계이며 대세계가 소세계이고 광대한 세계는 협소한 세계이며 오염된 세계도 깨끗한 세계이며 깨끗한 세계도 오염된 세계라는 것이다.

처음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므로 아무래도 이것을 설명하는데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간적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먼지와 같은 세계는 무한한 세계를 포함한다. 또 시간적으로 말한다면 한 생각(一念)에 무한한 시간 일체의 시간이 들어간다. 또는 일념 속에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전부가 구비된다.

일미진즉(一味塵卽) 무한세계
하나의 작은 미세한 것 중에 무한한 세계가 들어간다는 것이 일즉다(一卽多)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 우리들 쪽에서 본다면 작은 한 먼지는 어디까지나 먼지이고 커다란 세계는 어디까지나 커다란 세계이다. 따라서 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런 경지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인삼매(海印三昧)
부처님 눈으로 보면 이 한순간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조명되어 온다. 흔히 영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두가 비춰온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들 눈으로 본다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 눈이 아니면 안 보인다.

그러면 부처님 입장이라는 것은 어떤 입장인가.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로 표현한다. 큰 바다와 같은 크고 깊은 삼매라는 뜻인데 이것은 절대무(絶對無)의 세계다. 절대무의 세계에서 그것은 비칠 수 밖에 없다. 왜 비칠수 밖에 없느냐 하면 절대무의 세계는 마치 거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반영하지만 거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거울 자체는 어디까지나 청정하다.

진짜 해인삼매란 부처님의 삼매라야 한다. 부처님의 삼매란 무엇인가. 일체의 아집이 없어진 삼매, 자기의 견해가 없어진 삼매다.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보는 일이 없어진 모습이기 때문에 거울과 같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비춰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순간의 생각 속에 과거도 미래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맑은 곳에 비춰지는 것이다. 이런 것이 <화엄경>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깊은 선정에 들어가면 미래와 과거가 보인다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므로 이것은 '영원한 지금'이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 하지만 영원을 반영해 주는 것이 지금인 것이다. 옛 선사의 말을 빌리면 '지금 여기 나타나는 것'이다.  

일즉다(一卽多)와 상호 의존성
해인삼매는 일체의 것이 각각 독립돼 있찌만 서로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깊은 관계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간다는 뜻에서다. 이를테면 숫자를 생각해 보자. 여기에 1,2,3,4 라는 숫자가 있다고 하자. 그 1 이라는 숫자를 생각할 경우 우리는 2,3,4,5,6... 이라는 수를 예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 안에는 2에서 무한대수까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2,3,4,5,6... 이렇게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하나에 모든 수가 여기에 들오 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책상 다리를 생각해 보자. 책상에는 다리가 4개 있다. 그렇지만 다리 하나가 없으면 쓰러지게 된다. 그러니까 이 한개는 다른 3개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A 각 안에는 B,C,D 각이 없으면 안된다. B 각 안에는 A,C,D 각이 없으면 안된다. C 각 안에는 A,B,D 각이 없으면 안된다. 어느 하나를 빼버려도 이것은 안된다. 이런 상호의존성을 공간적으로 일즉다(一卽多)로 표현한 것이다.

4. 유심사상(唯心思想)

유심게(唯心偈)
<화엄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또 이런 말도 있다.
"삼계는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극락은 다만 마음이 만든 것이다. (三界虛妄 但是一心作. 삼계허망 단시일심작)"

특히 후자는 '유심게'라 불리우고 있는데 이것이 화엄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이다.

앞서 인용한 구절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다. 여러가지 오음(五陰)을 그리고 일체의 세계 속에 법으로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님 또한 그러하다. 부처님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님 그리고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모든 부처님은 모두를 이미 알고 있다. 일체는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고. 만일 그렇게 이해 한다면 그는 진정한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원문인데 마음이라는 것은 훌륭한 화가와 같다는 것이다. 마음은 시롤 모든 다양한 세계를 묘사해 낼 수 있다. 마음처럼 부처님도 같다. 부처님처럼 중생도 마찬가지라 하는 것이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일체 어떤 것이라도 만들어 낼 수 가 있다. 이것을 유심소조(維心所造)라 한다. 이 의미는 마음의 작용에 따라 어떤 식으로라도 자기의 세계라는 것은 바꿔질 수가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원효, 의상의 이야기
이것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원효와 의상이 구도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이 두 사람은 중국으로 유학가고자 마음먹고 경주를 떠나 도중에 노숙을 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고 비가 쏟아져 어디 들어갈 곳이 없는 찾다가 문득 보니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두 사람은 그 동굴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머문곳은 동굴이 아니라 시체를 묻어진 무덤이었다. 두 사람이 깨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해골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어제 저녁에 캄캄한 어둠속에서 동굴안에서 잠을 청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를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그곳이 무덤이고 해골이 있다 생각하니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때 원효는 일체가 유심소조(維心所造) 라는 의미를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중국으로 가서 화엄종의 법장(法藏)스님 밑에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경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의상은 중국으로 유학하고 오겠다며 떠났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간단하게 말하면 마음가짐 하나로 세계가 변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세계를 마음이 만들었다 것이 아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세계는 바뀐다는 것이 유심소조의 참뜻이다.

마음이 일체를 만든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라는 것이 일체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또 일체의 것을 만든다. 부처님이란 보통 일체의 것을 만들지 않으며 깨끗한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부처님 또한 극악의 중생에게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깨끗한 세계에만 있어서는 안되므로 고민하고 있는 중생의 마음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들 중생도 미혹의 세계만이 아니라고 문득 눈을 뜨면 깨달음의 세계를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마음은 모든 세계를 만들고 있다. 부처님도 모든 세계를 만들어 가신다. 중생도 모든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도 부처님도 중생도 모두 같은 것이 된다.

부처님과 중생은 같다
마음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부처님과 중생이 같다고 하는 것은 큰 문제중의 하나이다. 옛날 어떤 스님이 '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다. 그것은 물과 얼음이 같은 것과 같다. 물을 떠나 얼음이 있을 수 없듯이 중생을 떠나 부처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이 육도를 윤회하며 미혹에 빠져 있어도 일단 발심을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중생의 원심(願心)에 감응하여 중생 속에 들어가 구제해 주시는 것이다. 이런데서 종교적인 생명이 발동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존귀한 분이고 중생은 어디까지나 틀렸다고 한다면 구제란 있을 수 없다.

대승불교란 중생을 부처님이 구제한다는 사상이기도 하다. 이 말 자체는 매우 무미건조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그 속의 의미는 깊은 종교적인 생명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보통 삼계(三界)라 하면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 이 세가지를 말한다. 그리고 불교학에서는 이에 대해 어려운 정의를 내린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모든 세계, 이 현실의 모든 세계라는 의미이다.

그런 '모든 세계'는 허망하다. 환상이고 무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가 오직 하나의  마음(一心) 이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했던 것과 같은 말이다. 세계는 모두 마음의 작용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음에 불과하다. 모두가 환상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분명히 모든 것은 한차례 꿈을 꾸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열반이 바로 진실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실유(實有)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연(緣. 인연)이 없어지면 없어져 버린다.

불교에서는 근본 진리를 세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삼법인(三法印)이라는 것이다. 그 맨 첫번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두번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세번째는 일체개고(一切皆苦) 또는 후세에서  말하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공간적으로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어서는 안된다. 열반적정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설정하는 것이다.

열반이라는 것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 절대무(絶對無)의 세계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 즉 부처님의 세계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몽환 속에 부처님의 생명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 변화하는 것, 굼과 같은 것, 환상과 같은 것의 배후에 깨달음의 세계, 즉 부처님의 열반의 경지가 한 줄기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라는 종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모든 세계는 모두가 허망, 꿈, 환상과 같은 것으로 진실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진실한 것은 바로 열반뿐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불교에서 진실이라 할 때에는 이 열반을 말한다. 다른 것은 모두가 가정의 모습, 모두가 가공의 모습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겨우 70년 80년의 거짓의 모습으로 나타나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닌다. 그리고 몽환처럼 사라져간다. 환화(幻華)라는 말도 있는데 인생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 영원한 진실로서의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이다. 이것을 아미타불로 바꾸어 놓아도 좋고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바꿔 놓아도 좋다.

이런 생명이 훗날에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또는 좌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형태를 바꾸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들어가기 쉬운 것부터 하면 된다. 어떤 길에서 들어가도 좋지만 어쨌든 영원한 진실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있고 그 위에 거짓의 세계 허망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5.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라는 것
<화엄경>에서 유달리 중시되고 있는 것으로 믿음(信)이다. 이 믿음에 관해서는 현수품(賢首品)에서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범행품(梵行品)에서는 '비로서 믿음이 생길 때 즉 깨달음을 이룬다'라는 유명한 말도 있다. 이렇게 보면 <화엄경>만큼 믿음을 강조하는 경도 드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 믿음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본래의 뜻은 마음을 맑게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맑게 한다, 깨끗하게 한다라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해 나간다는 것은 불교 수행의 근본이다. 그곳에서 무한한 공덕이 탄생된다. 그것은 또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의미라 하여도 좋다.

먼저 우리는 불도(佛道)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불도를 만든다는 것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믿는다는 것이다. 즉 불도를 만든다는 것은 또 우리들의 유한한 세계의 배후에 영원한 진실, 열반이 있는 것이라고 믿는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그러니까 믿음은 불도의 근본이고 거기에서 무한한 공덕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믿음을 일으킬 때 즉 정각을 이룬다'는 것도 중요한 사상이다.

맨 먼저의 발심(發心)에 의해 도를 수행하고 그리하여 마지막에 성불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중요성이다. 누구든 처음에 발심을 한 뒤에 차차로 수행을 쌓아나가 최후에 성불하게 된다. 이것이 기존의 이해방식이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맨 처음 발심했을 때 그것이 정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발심하면 그것이 정각이라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뒷날 이런 사상은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曺洞宗)에 의해 '다만 좌선하고 있으면 좋은 것이다. 깨달음을 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과도 연결되고 있다. 어쨌거나 이 경에서는 처음으로 발심할 때 그것이 정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불도를 찾고자 발심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자신안에 부처님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종자가 자신의 과거세계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 와서 그 종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발심이라는게 성립 된다.그러니까 발심이라는 것은 즉 성불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佛心)이 있다. 그것이 그 어떤 인연으로 나오게 되었다면 그것은 깨달음,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묻혀 있었던 부처님 마음의 씨앗이 싹을 트고 나왔따고 생각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발심이라는 것이 즉 정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정녕 혁명적인 사고방식이다.

기존의 불교 사람들은 오랜 동안의 수행의 단계를 설정해 놓고 있었다. 거듭 태어나고 다시 죽으면서 수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열반을 획득 할 수 없다고 생각 했다. 특히 부처님이 되려면 대단히 긴 무한한 시간의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은 혁명적인 말을 한 것이다. 즉 초발심의 시기가 정각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수행의 단계가 전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중생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깊은 산속 절에서 명상하고 열심히 불교학문을 하며 좌선만을 해야만 깨닫게 된다는 그런 불교가 아니고 세속의 일상사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대승불교다운 것이다.

불도를 믿는다는 것
불교에서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발심했을 때 이미 그것은 깨달음이 열렸다는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용수의 대지도론을 보면 '불교라는 큰 바다(大海)는 믿음으로서 능히 들어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또 어느 옛 선사는 믿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불도를 수행하는 자는 먼저 불도를 믿어야 한다. 불도를 신봉한다는 것은 자기가 불도 안에 있으므로 미혹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음을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불도를 닦는 사람의 기본이다."

즉 불도를 수행하는 자는 먼저 불도를 신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불도를 신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자기가 본래 애당초 불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세계다. 즉 자기는 본래 불도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어야 비로소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역시 깊은 관계가 있다.

6. 구도의 여로

입법계품과 선재동자
입법계품(入法界品)안에 설명되고 있는 이야기는 구도의 여로(旅路)다. 구도의 여로, 도를 추구하는 여행길이 선재동자의 이야기다.

선재동자가 찾아간 스승은 53명이나 된다. 이들의 직업을 본다면 바라문. 외도. 장자. 왕. 야차. 비구니. 창녀등 많은 종류의 직업인이 있다. 그중에서 여성이 20명이나 된다. 이것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보통이면 불법을 구하는 길이니까 먼저 성자에게로 가야 한다. 진리를 성자에게 물으러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발상이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여러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을 찾아 다닌다. 여기에 입법계품의 흥미가 있다. 직업적인 종교가만이 아니고 다양한 직업인 풍부한 인생 경험을 거친 사람, 그러한 사람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입법계품이 의도하는 바에의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라는 것은 직업에 관계가 없다. 또 남성이나 여성이나 관계가 없다. 하늘사람(天人). 보살. 외도에도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이라도 나름대로 인생을 산다면 나름대로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좋은 것을 자기가 얻는다면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뭔가 좋은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끄집어내면 배울 만한 것이 있다. 흔히 결점은 눈에 잘 띄지만 좋은 점을 보는 눈은 가지기가 어렵다. 그런데 구도자는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결점을 찾는 것은 간단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타인의 결점을 들추어도 자기에게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타인의 중요점을 보고 그것을 자기에게 받아 들이고자 선재동자는 53명의 스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가 만난 사람은 각각 달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 여러가지 일을 배우려고 생각했다. 물론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망해도 좋다. 또 실망하지 않아도 좋다. 어쨌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얻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마음의 양식으로 하겠다는 것이 선재동장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선재동자는 마지막에 미륵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찾아가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 깨달음을 얻고 싶어서였다. 선재가 미륵보살에게 가서 그 앞에 합장하고 이렇게 말한다.


"오직 바라옵건데 내세누관(來世樓關)의 문을 열으시고 나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소서."

요컨데 문을 열어 주십시오. 자기의 깨달음의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미륵보살이 오른손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니까 문은 저절로 열리고 선재동자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닫혀 버렸다. 그때에 선재동자는 광대무변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아집없는 마음
미륵보살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고 했다. 순수한 마음, 아집이 없는 마음, 집착 없는 마음, 내가 내가 하는 마음을 모두 내버린 마음이 아니면 이곳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정직한 마음, 아집이 없는 마음 그런 것을 가지지 못하면 진실한 종교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선재동자는 최후에 문수, 보현보살을 찾아가서 깨달음의 세계를 본다. 거기서 그는 가장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이 법을 열고 환희라는 마음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자는 신속히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하고 모든 여래와 대등하게 되리라."  

인생이란 것은 끝이 없다. 공부란 것도 끝이 없다. 도를 추구하는 일도 한이 없다. 이제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선재동자도 그와 마찬가지다. 선재동자는 일단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막 들어갔을 뿐이다. 이제부터 무한히 깊은 계단이 남아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대단한 긴 여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정진 이것이 불교
부처님은 항상  '쉬임없는 수행 즉 정진'을 강조하셨다. 이것은 좋은 가르침이다. 정진이라는 것은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 보다는 내일로 전진해 나가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구도의 이야기를 보면 매일 조금씩 쌓아가고 있다. 조금씩 오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 공부도 조금씩 오래 해 나가면 뭔지 저절로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쉬임없는 노력'이다. '한꺼번에 많이' 라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일이라도 조금씩 그리고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계속해 나갈 수 있다. 마치 탑을 쌓듯이 성을 쌓듯 차근차근 쌓아 나가야 한다.  

7. 동아시아에서의 화엄경  

중국.한국의 화엄경
중국의 서안(西安)은 장안(長安)과 더불어 불교문화가 화려하게 꽃폈던 곳이다. 서안은 남족으로 종남산맥이라는 커다란 산맥이 펼쳐져 있다. 현재는 이 서안의 남쪽을 장안현(長安縣)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장안현에서 종남산 쪽으로 향하다가 서편으로 가면 정토교의 선도대사(善導大師)의 묘가 나온다. 이곳은 향적사(香積寺)라는 절터다. 또 동쪽으로 가면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이 현재도 남아 있다. 이 흥교사는 현장삼장의 묘가 있는 곳이다. 흥교사로 가는 앞쪽 민등산 중복에 두 개의 탑이 서 있다. 여기에는 화엄사가 있었는데 현재는 아무것도 없다. 남아 있는 것은 두순탑(杜順塔)과 청량탑(淸凉塔)이라는 두 개의 탑 뿐이다. 이 두순탑은 화엄종의 제1조인 두순의 무덤이고 청량탑이라는 것은 제4조 징관의 무덤이다.  

중국의 화엄종(華嚴宗)의 시조는 두순(杜順 : 557~690) 스님이다. 그리고 제2조인 지엄(智儼 : 602~ 668)스님이고 제3조인 법장(法藏:643-712)스님이며 제4조는 징관(澄觀.738-839)이다. 그런데 제2조 지엄의 제자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법장과 의상(義相)이다. 의상은 신라 사람이다. 그는 신라로 되돌아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펼쳤으며 한국 화엄종의 시조로불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