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라고 말할수 없는 것들
기도 즉 기복적인 기도를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를 논의하면 기복을 옹호하는 측에서 맨먼저 나오는 말이 각각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근기라는 말을 내세워 이를 강변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근기론이나 대기설법에 따른 기복 신앙에 대한 각각의 주장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는 교리적·경전적 근거에 의해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둘째는 기복신앙을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덕을 지을 수 있는 작복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기도 자체를 불교의 교리인 인과율에 어긋난다고 부정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도를 권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다시 살펴보면 첫째의 주장은 상근기(上根機)를 위한 것이고, 둘째의 주장은 중근기(中根機)를 위한 것이며, 셋째의 주장은 하근기(下根機)를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도(祈禱)’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 보면 ‘빈다’는 뜻 입니다. 그리고 불교사전에 의하면, “기도란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을 빌어서 불·보살의 가피(加被)를 구하는 것. 흔히는 재앙을 없애며, 질병이 낫기를 비는 등 현세에 대한 행복을 구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빈다’는 의미의 ‘기도’라는 말은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어떤 절대자를 상정해야만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신(神)이나 어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만일 불교에서 절대자를 인정한다면 유신론(有神論)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맹목적·무속적·미신적 기도는 불교의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원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절대자에게 복을 구하기 위해서 빈다' 는 뜻의 기도는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불교사전에서는 기도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기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부처님이나 신에게 적극적으로 빌어 그 초자연적인 위신력을 기계적으로 구하는 것으로 현세이익적인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부처님 등의 숭배 대상에 귀의하여 믿음을 가지고 참회하여 죄를 소멸하고 감사·보은·찬탄·숭앙 등을 위하여 부르는 비공리적(非公利的)인 기도 등이다.”
이러한 사전의 해석 대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첫번째 기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두번째 기도는 허용되고 있다는 의미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의 기도가 불교에서 비판하는 기복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나 보살을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복을 빈다. 이것은 명백히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의 것은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신행 방법들 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 하나의 수행법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는 것들 입니다. 예를 들면 참회기도나 참회정진기도가 그러한 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경 대상으로부터 현세 이익적인 차원의 보수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신앙행위를 말한다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같은 기도라는 단어를 사용 하더라도 무속적·미신적 기도와 대승불교의 각종 수행법들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찬탄·발원·참회·주력·칭명 등은 맹목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수행법 들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면 기원하는 자와 기원을 들어주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불보살을 신이나 절대자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따라서 ‘빈다’는 의미의 기도라는 말이 붙으면 이미 불교가 아닌 것입니다.
즉 다시 강조하자면 불상을 신으로 이해하고 예배한다면 타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러나 불상이라는 형상을 통해 자성불(自性佛)에 귀의한다면 올바른 신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에 대해 좀더 부연 설명 한다면, 기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똑같은 행위일지라도 거기에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는 무속적·미신적 기도로서 예배의 대상을 신이나 절대자로 이해하고, 그 절대자에 매달려 복을 달라고 비는 행위 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정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비록 돌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에 예배하더라도 본래의 자기불(自己佛)에 돌아가는 행위이다. 후자의 경우는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선업(善業)을 닦는 행위 입니다. 그리하여 그 닦은바 공덕을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해 회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무속적·미신적 기도까지 불교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불교의 정체성은 찾을 길이 없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은 불교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 없이 기도가 마치 중생들의 온갖 질병을 치료해 주는 만병 통치약 혹은 모든 소망을 이루게 해주는 여의주(如意珠)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인 것 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무속적. 미신적 기도야말로 이 시대 불자가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잘못된 견해(邪見)가 아닐 수 없습니다다.
붓다는 영험·기적 등 신비주의적 미신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 입니다. (범망경(梵網經)에서 부처님은 이러한 견해는 축생명(畜生明), 즉 비천한 기술 혹은 사이비 과학이며, 그러한 견해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는 행위를 사명(邪命) 즉 삿된 생활방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모름지기 불교도들은 동물의 지식’에 불과한 이러한 것들을 믿고 행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불교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종교에 있어서 기적이나 영험 등을 전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를 믿는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불교도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도 흔히 경험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해할 뿐 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기도의 가피나 영험 등에 주로 의존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영험을 추구하게 됩니다. 어떤 절에 가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몰리다가 또 다른 절에 영험이 있다면 그곳으로 몰려 갑니다. 그러다가 어떤 불상을 보고 기도를 해서 난치병을 치료했다면 또 그곳에 갑니다. 영험이나 기적을 쫓는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이교도로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점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입니다.
흔히 기도는 불·보살의 가피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성취 원리는 자기의 정화를 통해 얻게 되는 자기발현(自己發顯) 혹은 자기계발(自己啓發)이라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만 불보살의 칭명을 통해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무한한 능력을 재확인 한 것에 불과 한 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자기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일심으로 정신을 통일함으로써 놀라운 능력(기적)을 체험하거나 스스로 내적인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은 곧 지계(持戒)를 뜻하며 그리고 일심으로 정신을 통일한다는 것은 곧 삼매(三昧) 혹은 선정(禪定)을 말한다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불가사의한 능력 혹은 초월적 지혜(智慧)를 얻게 되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 역시 계·정·혜 삼학(三學)의 원리에 의해 성취되는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교리적 이해 없는 무속적·미신적·맹목적인 기도는 불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행법의 하나인 정근(精勤), 즉 칭명(稱名) 등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정화한다면 이는 불교적 교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봅니다.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교 교리의 이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사성제의 법문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것을 뜻 합니다. 이른바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지는 길이다’라고 바르게 아는 것을 말 합니다. 이러한 사제의 법문에 대한 확신에 기초해서 재가로 있으면서도 고의 원인인 욕망을 절제하고 욕망의 발동에 기초한 번뇌를 억누르며, 악을 그치고 선을 닦음(止惡修善)과 함께 끊임없이 자기의 마음을 맑혀 가는 것이 곧 재가자로서의 수행의 핵심이었던 것 입니다.
붓다는 《깔라마경》에서 깔라마인들에게 “눈으로 보거나 전통, 소문이나, 경전의 권위, 논리나 추론, 겉모양의 고려, 사변적 견해에 대한 기쁨, 외관상의 가능성, ‘이것이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관념 등에 이끌리지 말라. 다만 스스로 어떤 일들이 불선(不善)이며, 잘못되고, 나쁜 것임을 알았을 때는 그것을 과감히 버려라. 그리고 스스로 어떤 일들이 선(善, kusala)하고, 좋은 것임을 알았을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나아가서 제자는 붓다 자신조차 시험해 보아야만 그가 따르는 스승의 진정한 가치를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아무리 자신의 말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붓다가 살아 계시지 않는 지금 불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로운 스승의 역할 입니다. 스승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맹목적인 기도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도해 줄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교리적인 바탕없이 무조건 맹목적인 기도를 가르치는 스승은 마치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들을 결코 밝은 빛으로 인도해 줄수 없습니다. 물 밖에 있어야만 밧줄을 던지든 다른 부유물을 던져 구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방편법은 이미 강을 건너간 자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자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방편법을 잘못 쓰면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게 됩니다.
기복 신앙이 불교가 아니라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새겨 놓은 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붓다는 처음부터 당시 인도 사회에서 널리 성행되고 있던 각종의 기복행위 등을 강력히 비판하였습니다. 붓다에 의해 창시된 불교는 처음부터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진리를 바르게 보는 지혜의 눈으로 출발했습니다.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중요시하고 있는 종교 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보고·알고·이해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언제나 앎과 봄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라고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지, ‘와서 믿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기복적인 기도는 불교가 아니다’라는 것은 붓다 가르침에 근거하는한 틀림없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상근기인(上根機人)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불교 발전의 큰 장벽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붓다께서도 이러한 중생들의 마음이나 현실적인 세간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법을 망설였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붓다 가르침의 핵심을 정확히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불자들은 많지 않다고 봅니다. 붓다의 근본 주장들을 펼치는 사람들이 비난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인 것 입니다.
유사 이래 오늘날까지 인간 사회에서 기복적인 현상은 있어 왔습니다. 세계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기복적인 신앙형태는 존재 합니다.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기복적인 요소는 현존 합니다. 아마 이러한 기복적인 현상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먼 미래에도 존재할 것 입니다. 인간의 무지, 즉 무명(無明)이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모든 유정(有情)들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증득할 때까지 기복신앙의 형태는 존속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갠지스 강가에 가서 목욕한다고 해서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갠지스 강가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목욕을 통해 죄업을 씻겠다고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뿌리깊은 민간 신앙은 어느 누가 주장한다고 해서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뿌리 깊은 민간신앙 혹은 기복신앙은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진정으로 삼보에 귀의한 불자라면 중근기와 하근기의 불자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신앙을 되돌아 볼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근기론에 따르면,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높으면 높을수록 정법의 수행으로 나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그 반대일 경우에는 기복적인 신앙으로 기울 경향이 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복이 성행하면 불교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고 맙니다. 맹목적인 기복신앙으로는 불교의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기복 신앙의 극복만이 한국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한국에 상근기의 불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불교의 기반은 튼튼할 것입니다. 반면 저급한 낮은 수준의 기복 신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 불교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위해 기복을 부추기거나 묵인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멸을 방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 지성인들은 앞장서서 기복신앙 극복을 위해 잘못된 부분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지적해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잘못된 신앙들을 수정해 나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지성인들이 기복을 부추기고, 역사적 변천을 통해 한국불교에 스며들어 있는 기복적인 요소까지 불교의 전통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도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붓다는 비록 자신의 가르침일지라도 시험해보고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법(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사
실 우리 주변에는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것이 불교 신앙의 전부인 양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외면하는 것만이 최선이냐?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들을 감싸안아서 기복에서 작복으로, 다시 작복에서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 불교를 먼저 공부한 사람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기복이 불교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낮은 근기의 사람들을 높은 근기의 불교도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고민은 전체적인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행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이글의 대부분은 마성님의 글을 기초로 하여 제가 허락도 없이 임의로 수정 하였음을 알려 드리오며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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