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열반경의 이해 (3)

실론섬 2006. 4. 26. 20:07


일체중생은 모두가 유불성

 

그런데 이 [열반경]에는 또 한가지의 특색이 있다. 그것은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중생 실유불성)'는 말로 이것은 [열반경]안에 여러번
나온다. 이것이 이른바 [열반경]의 제2의 기둥인데 필경 '自燈明(자등명)' 이라는 말에서
연유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법을 설교하는 쪽의 문제가 아니고 법을 듣는 중생들 쪽의 문제이다. 더욱이 그것이
어래쪽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如來常住 無有變易(여래상주 무유변이)' 라는 것과
자연스럽게 결부되어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의 금강보주

 

이 불성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비유가 동원돼 설명이 가해지고 있다. 이 경의 34권에는 지금까지
설명되었던 것을 추리고 또 거기에 수반되는 의문점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부분이 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선남자여, 나는 중생에게 불법이란 또한 가난한 여인의 집안에 보배창고와 같고 힘센 사람

(力士. 역사)의 '金剛寶珠(금강보주)'와 같으며 전륜성왕의 甘露(감로)의 샘과 같다고 말하느니라"

 

즉 다시 말하자면, 어떤 힘센 사람(力士. 역사)이 있었다. 그는 이마에 금강보석을 달고 뻐기면서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와 부닥치게 되면서 보석이 이마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되자 그는 그 보석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머리가 아팠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의사에게 갔다. 그 의사는 X레이로 조사한 것도 아니면서
'당신은 금강보석을 가지고 있군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의사는 그 힘센 사람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으니 그는 깜짝 놀라 '어찌 아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요'하면서 이마를 가리켰다.

 

중생은 이처럼 보석이 자기 안에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모를뿐 아니라, 오히려 괴로워
하고 있다. 이것이 중생의 모습인 것이다.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生死(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다. 여래는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불성은 상주불변

 

불성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부처의 성품' 이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여래와 같은 성품이다.
여래와 같은 성품이란 여래가 법신이니까, 결국은 여래의 법신과 같다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 전체라 하여도 좋다. 그 진리의 세계 전체가 본래 우리들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여래는 상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본질도 상주이다. 佛性常住(불성상주)' 인 것이다.
중생은 무상이지만 불성은 상주이다. 여래는 80세에 입멸을 시현 했지만 법신은 상주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들쪽으로 적용해 보면 중생은 무상하지만 중생의 본질은 여래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중생의 불성도 상주불변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불성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되는
바탕이다.

 

중생은 부처가 아니다. 그러나 불성이 있으므로 깨달을 수 있다. 즉 불성이 있으므로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발심을 한다. 그리고 수행도 하는 것이다. 수행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 그대로가 부처님이 아님은 물론이다.

 

불교의 근원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누군가가 깨달았을 터이고 미래에도 누군가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미래의 가능성을
중생 누구나에게 확대한 것이 바로 [열반경]의 가르침이고 그 이유는 불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여인의 집안의 보배창고

 

[열반경]에 나오는 또하나의 유명한 비유는 '가난한 여인의 집에 보배창고'라는 것이다.

 

이것은 '땅속의 보배창고' 라고도 불리는데 지하에 매장돼 있는 보물금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 7권에 있는데 佛性(불성)의 비유로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그곳을 보면 어느 가난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집안에 금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면 큰 부자가 되었겠지만 모르기 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지혜 있는 남자가 찾아와서 당신을 고용할테니 풀더미와 쓰레기를 치워 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런 일은 싫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자식들을 위해서 金藏(금장)을
보여 준다면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지혜 있는 남자는 현실의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순금을 파내서 보이니 그 여인은 그 남자를 무조건 존경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어래는 광부이다. 광부라 해도 자기 멋대로 하는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 소유자에게 가르쳐 줄 뿐이다. 그래서 여래는 '훌륭한 방편을 쓰는 사람' 이고
그로 인해서 가난한 여인의 경우처럼 일체중생을 '환희하고 귀의'케 하는 것이다.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방편에 의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법한다. 그것으로써 중생은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자각한다. 그러하여 중생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으로'고 하는 것은 초기 불교도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은 가르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째서 자기가 소중한가. 중생은 그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직 부처님뿐이라는 것을 [열반경]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님

 

'일체중생 실유불성'은 대승불교의 모든 종파에서 통하는 기본 개념이다. 이 생각이 발전한 것이
'중생은 본래 부처님이다' 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잘못되면 '우리가 본래 부처님이라면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엉뚱한 길로 불도를 가거나 타락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성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道元(도원) 스님은 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왜 수행을 하였는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부처님도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불성은 불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모습이 그대로 부처님의 모습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열반경]을 보면 '불성이란 大信心(대신심)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원점에 서서 신심에서
불성의 현상을 똑바로 지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