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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환과와 극락은 같은 것이다

실론섬 2006. 8. 1. 14:15
수행을 통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동안에 순차적으로 아래와 같은 네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그 네가지 단게란 다음과 같습니다.

 

1) Sotapatti(소타빳티. 수다원. 예류과) : 수행시 맨 처음 이르는 경지로 이것을 성취 하면 일곱번

    이상  윤회하지 않고 그안에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 한다고 합니다. 흔히 깨달음의 道에 들어 섰다고 해서 預流(미리 예. 흐를 유) 라고 합니다. 2) Sakadagami(사카다가미. 사다함. 일래과) : 두번째 경지로 이것을 성취하면 한번이상 윤회하지 않고 열반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一來 (일래) 라고 합니다. 3) Anagami(아나가미. 아나함. 불환과) : 세번째 경지로써 이 과를 성취하면 다시는 중생계에 돌아 오지 않고 그 이상의 경지에서 그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不還(불환) 이라 합니다. 4) Arahat(아라하뜨. 아라한) : 마지막 경지로써 이 경지에 이르면 해탈을 성취하고 두번다시 육도 윤회를 도는 生(생)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타마 붓다께서 말씀하신 이 네가지 경지는 절대로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력에 따라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현생에서 실현되는 佛道(불도)의 경지 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네가지 성인의 경지를 세분하여 그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Magga. 道 또는 向(향))과, 이미 그경지를 성취한 (Phala.팔라. 果(과)) 분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여덟부류의 성인이 있게 됩니다. 이를 총칭하여 흔히들 四雙八輩(사쌍팔배), 四向四果(사향사과), 八部聖人(팔부성인) 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 佛道 를 제대로 걷고 있고 올바른 길로 가는 성인들이기에 모든 불자들이 예배 드릴만 하며 공양 드릴만 하며 재가자들의 참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중에서 "승" 에 해당하는 분들 입니다. 지금은 "승" 이란 개념에 대해서 넓게 모든 수행승들을 가르켜 부르고 있지만 경전상의 엄격한 구분은 바로 이런 팔부성인들을 가르켜서 삼보중의 하나인 "승" 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네가지 단계의 수행단계는 그 과정을 거침에 따라서 총 10가지의 족쇄를 부수고 깨트려야 합니다.열가지 족쇄가 무엇인지는 지면상 생략 합니다. 네 단계[四果]를 알아보는 척도는 수행의 과정에서 떨쳐버려야 할 갖가지 번뇌들이 얼마나 닦아 졌는가를 통해서이며 이 네 단계에 걸쳐서 떨쳐내야 할 이 번뇌들을 붓다께서는 열 가지로 나누어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붓다께서는 그것들을 족쇄 (足鎖, samyojana)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들 네 부류의 성스러운 수행승들이 걷는 네 단계가 어떤 경우에는 순차적으로 간격을 둘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바로 뒤이어 지는 수도 있다고 합니다.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단계를 뛰어 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즉 예류과에서 일래과와 불환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아라한과를 획득하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수행자는 일체의 의혹을 넘어 자신이 성취한 경계의 성격을 알며 더 닦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한 분들은 한결같이아래와 같은 게송으로 佛道(불도)의 완성을 노래 합니다. 나의 삶은 이제 다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모두 완성했고 할 일을 다 마쳤으니(고결한 삶이 완성 되었으니)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 대승경전은 비록 그것이 후대에 찬술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붓다의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승운동은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지 결코 새로운 수행법을 내세운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정토삼부경이 붓다의 원음과 전혀 다른 진리를 내세웠거나 전혀 다른 사상을주장 했다면 그것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어렵습니다. 정토교나 극락교등등의 이름이 적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토종을 우리는 불교라고 부르며 그리고 그속에 담겨있는 모든 사상은 붓다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정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정토교에서 주장하는 극락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위에서 설명한 네단계중 극락은 어디에 속할까? 과연 정토삼부경을 찬술한 사람들은 초기경전의 어느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사상을 전개 했을까? 극락이라는 암호를 풀기 위해서 필요한 열쇠는 초기경전의 아함경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깨달음의 세번째 단계인 '불환과' 입니다. 복잡한 교리상의 이야기를 굳이 여기서 길게 펼치지 않아도 지각있는 불자라면 금방 알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불환과는 중생계는 물론 삼악도에 더이상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좀더 수행을 하면 바로 성불을 이룰수 있는 곳 입니다. 정토교에서 말하는 극락과 전혀 다르지 않는 설명임을 금방 알아 챌 수 있습니다. 극락에 가더라도 우리들은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행결과에 따라서 궁극적으로 성불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환과와 극락은 같은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토종에서 말하는 극락은 초기불전의 네가지 깨달음의 단계중 불환과를 무한한 상상력과 방편을 이용하여 좀더 쉽게 중생들이 알 수 있도록 펼친 사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법장보살의 48원중에서 극락세계의 성격을 이야기 해놓은 것은 제1, 2 그리고 제16에 나타 납니다.거기에서 서방 극락정토는 삼악도가 없는 세계라고 말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극락이란 세계는 지옥이라든가 아귀라든가 축생도가 없는 세계를 말 합니다. 고통이 없는 세계 입니다. 즉 깨달음의 세계인 것 입니다. 흔히들 우리들은 극락에 대해서 착각을 하곤 합니다. 그것이 지도상에 나와 있는 뉴욕이나 도쿄나 서울처럼 어느 특정지역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가중의 착각 입니다. 극락이란 오직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 것 입니다. 하지만 경전은 중생들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총천연색으로 현상화시키고 시각적으로 쉽게 와 닿게 설명해 놓았을 뿐 입니다. 48가지의 본원중에서 18번째 본원을 사람들은 가장 중요시 합니다. 명호만 부르기만 해도 정토에 왕생하여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이 된다는 것을 맹세한 것이 18번째 본원 입니다. 이를 흔히들 본원중의 본원이라고 해서 왕본원이라 합니다. 그럼 나머지 47본원은 전부다 헛된 것이고 18번째만 죽어라고 붙들고 있으면 된다는 뜻일까? 그럼 47개나 되는 본원은 왜 만들어 놓았을까? 필요없다면 지금이라도 버리는게 옳지 않을까? 훌륭하신 정토교 스승님들은 제11,12,13 원을 '진실의 원'이라고 하고 또 제19,20 원을 '방편의 원'이라고 하여 이 다섯가지를 '5원' 이라고 특별히 중요시 했습니다. 여기서 길게 정토교에서 말하는 '진실'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할 공간이 부족해서 생략은 하지만, 정토교에서 말하는 진실이란 사람이 걸어야 할 진실한 길(道) 즉 부처님의 길 (불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도란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걸어가면 반드시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의미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극락이라는 목적지에 도달 할려면 불도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불도라는 것은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길이 아니라 반드시 가지 않으면 안되는 길 입니다. 정토교에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철저한 반성과 참회 그리고 자각을 무엇보다 먼저 요구 합니다.무조건 아미타불을 부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자신의 철저한 반성과 자각 입니다.그러한 자각없이 무조건 극락가게 해 달라고 매달리면 미신이요 무당이지만, 철저한 자각이 앞서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 입니다. 오탁악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삼독심으로 인해 苦 에 허덕이며 육도 윤회를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이라는 자각이 분명히 하게 되면 그리고 언젠가 삼악도에 떨어질 '번뇌가 가득찬 범부'라는 반성과 자각을 하게 되면, 천하의 바보가 아니라면 우리들은 그것에서 벗어날 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정토교에서 '진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반성을 하며 번뇌에서 벗어나길 바랄 때 우리는 비로소 부처님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붓다이든 비로자나불이든 아미타불이든 상관 없습니다. 부처님을 찾게 되면 우리들은 스스로 부처님의 길을 걸어 갈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남겨 놓으신 발자욱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이며 염리심이며 자리이타의 보살심이며 사홍서원의 실천인 것 입니다. 물을 젖소가 먹으면 젖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듯 정토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서 젖과 독이 되는 것 입니다. 무량수경을 찬술한 훌륭한 스승님들이 미신교나 무당교의 교주로 아미타불님을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왜 부처님을 믿는가? 내가 왜 사찰에 와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는가? 왜??????.... 복받고 극락 갈려고 손금이 달아 없어지도록 무조건 맹목적으로 빌면 그것은 불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미신교나 무당교를 믿는 불쌍한 중생일 뿐 입니다. 하지만 철저한 반성과 자각이 앞서 있어서 .. 내가 이 번뇌에서 벗어나서 좋은 세상에 태어 나겠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 하셨나 한번 알아보고 그대로 따라 가야지... 이렇게 염불을 시작하면 불교 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법장보살의 48본원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가슴에 새기면서 그것들을 힘자라는데까지 行 한다면 아미타불의 존재가 미신교의 교주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을극락으로 이끌어 주는 존재로 그 의미가 새삼 다시 다가 올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길 실론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