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보살 보살...()...
[보살은 空(공) 의 경지에 몸을 두어야 하나, 거기에 주저앉는 일이 없이
여러 선(德本.덕본)을 행해야 한다.] - 유마경
여기서 말하는 而殖衆德本(이식중덕본)중의 德本(덕본) 이란 善行(선행)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는 데서 덕본이란 말을 사용했다.
또한 是普薩行(시보살행) 이라 하여 보살행이란 중생의 제도 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것이 空 이라는 것은 그것이 緣起說(연기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로
의존하고 상관함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의 고정성.독립성은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상식이 생각하고 인정하고 있는 실체성을 모든 존재에서 박탁함으로써 어떤
사물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서 설해진 것이 空 이지만, 그러나 [공] 이라는 말
자체를 관념적으로 받아 들인다면 오히려 [공]에 얽매여 일종의 허무.허탈의 상태에
빠질 여지가 전혀 없는게 아니다.
하지만 [공]을 내세워 일체의 실체성을 부정한 것은 일체의 노력의 필요성마저
부정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불교도이라면 그것은 모든 집착과 미망을 떠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른 생활을 살아가는 윤리적 실천과 직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空 을 뒤집으면 [자비]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공] 의 불교적 의미가 있다.
깨닫기 위하여는 일체의 것을 버릴 필요가 있다. 깨달음이란 현실에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응시하고 직시하며 알아채고 그 알아챈 것을
마음챙김(觀.관. 위빠사나) 을 함으로써 끝내는 그 마음까지 뚫고 나와야 하는
경지이다.
그러나 일단 깨달은 다음에는 붓다의 일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을 정토종의 용어로는 還相(환상. 돌아올 환)이라 한다.
이렇게 돌아옴으로써 일상적인 중생의 세간사 속에서 끝없는 중생 구제 사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위의 말을 다른 말로 이해해 보면 보살의 경지란 만물에 대해서 空性(공성)을
경지로 하면서, 모든 선행을 하는 것(중생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현실의 구제사업
즉 다시말하자면 [불국토건설]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또다른 가르침을 [반야이취경] 에서 보기로 하자.
[普薩勝慧者(보살승혜자)는 생사를 다할 때 까지 항시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해서
열반에 들지 않는다.]
지혜에 있어서 뛰어난 보살은 생사에 얽힌 세상의 迷惑(미혹)을 모두 없앨때 까지
언제나 중생제도에 힘쓸 뿐 열반에는 들어가지 않는것이다.
17 단계로 나뉘어진 [반야이취경]의 말미는 위에서 인용한 일구로 시작되는
百子 의 偈(게)로 끝나는데 여기에 설해진 취지는 이 중생의 세간사 속에서 붓다의
모습을 발견하는 "지혜의 길" 을 요약해서 가르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食(식). 色(색)의 욕망조차 그 자체로는 아무 탓할 것이
없는 것이며, 그것을 목적화 하지 않는 한, 즉 我執(아집)을 가지고 욕망을 추구만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淸淨(청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긍정적으로 보았다.
즉 大慾淸淨(대욕청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욕망에 사로 잡히고, 욕망을 목적화 하고, 자기의 아집으로 욕망을 보는 한 그 욕망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小慾(소욕)으로써 이것은 당연히 불교도로써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욕망을 생존의 기초로써 인식하고 또한 추잡한 아집을 떠나 남에게까지
미치는 착한(善) 행동 원리로써 이루어지는 경우는 그 욕망의 많고 적음을 떠나
大慾(대욕) 이라고 하였다.
인류 전체의 행복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과제를 자각하고 이 과제를 실현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불교적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이상적 인간상으로써 제시한 보살의 모습 이기도 하다.
보살이 열반에 들어가 붓다가 되지 않는 것은 반드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제를 요하는 중생이 남아 있는 한 스스로 열반에 들기를 원치
않는 것 뿐이다. 이러한 보살의 정신이야말로 보살이 지니는 가장 이상적 양상이라고
대승불교에서는 강조 되었다.
[능가경] 에는 이런 보살을 [大悲闡提(대비천제)의 보살]이라고 불렀다.
[천제]는 一闡提(일천제)의 약어이며, 원래 극악무도해서 성불의 가능성이 전무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중생을 위해 열반을 외면하고 포기하는 보살을
표현 하는데 사용 되었다.
이런 보살은 [능가경]이나 [이취경]에 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승경전
전반에 깔린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은 無緣(무연)의 중생들을 위해 스스로 六道(육도)
윤회에 머물면서 구제 사업에 종사하고 스스로는 열반에 들지 않는 보살들이다.
또 천수관음이나 마두관음의 존재는 한 사람이라도 구제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인간뿐만 아니라 말이나 소라도 구제 하도록 애쓰는 보살의 誓願(서원. 맹세할 서)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또한 해야 할 일을 끝마치고 팔십세가 되어서야 任意捨命(임의사명.
역사적 사실로써의 붓다의 죽음을 대승에서는 붓다가 자신이 자기 뜻에 따라 목숨을
버린 것이라고 해석함.) 하신 붓다의 생애와도 통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불교도들이 굳이 경전에 나타나는 보살님들의 면면을 살펴 볼
필요도 없이 우선 먼저 우리 스스로가 과연 어떤 자세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하며 또한 나를 먼저 철저하게 자각하고 깨달은 다음에 나 아닌 다른
이웃에게 무엇을 베풀어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볼 일이다.
[이글은 이원섭님의 색.시.공 이라는 책에서 옮겨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