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불 (肉身佛) 9

육신불(肉身佛) - 천태 지의(天台智의.538-597)

천태종의 개종조인 천태대사(538-579)는 휘를 지의(智의), 자는 덕안(德安)으로, 그는 중국 불교사상 제일의 선지식으로 동방의 작은 석가모니로 불리운다. 서기 538년 7월에 형주(荊州) 화용현(華容縣) 곧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湖北省 當陽縣)에 진(陳)씨의 집에 태어 났다. 아버지는 진기조(陳起祖), 어머니는 서(徐)씨로서 부형(父兄)이 모두 양무제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 7세때 부모를 따라 어떤 사찰에 가서 여러 스님들의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을 독경하는 것을 옆에서 한번 듣고 그것을 따라 외울 정도로 그의 지혜는 출중했다. 그때는 마침 양자강 북쪽에 있는 위(魏)나라의 흥망이 있었고 남쪽 양나라에도 난리가 일어나서 천하가 혼란 하였다. 특히 그의 고향인 화용현은 위나라와 양나라의 전쟁터가 ..

육신불(肉身佛) -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운문선사는 소주(蘇州) 가흥(茄興)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장(張)씨다. 유년때 부터 이미 속세의 삶을 싫어 하였고 집안이 매우 가난해 일찌기 공왕사(空王寺)의 지징율사(志澄律師)에게 출가 하였다. 자질이 총명하여 책을 한번 읽으면 뜻이 모두 깨달아 두번다시 읽을 필요가 없었고 특히 언변(言辯)에 뛰어났다. 20세 때 강소성 비능단(毘陵壇)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다시 수년간 지징율사를 시봉 하였는데 이때 그는 특히 율장에 전념 했으며 또한 계율을 지키는데 엄정 하였다. 계(戒)로써 수행의 기초를 튼튼히 다진 그는 그 후 정(定)과 혜(慧)를 닦고자 목주(睦州) 도종선사(道從禪師)를 찾았으나 그는 황벽의 법사(法嗣. 이을 사)로써 강남인(江南人)이며 속성이 진(陳)씨였다. 따라서 진존숙(陳尊宿)이라고 불렸고..

육신불(肉身佛)- 오조 홍인(五祖弘忍. 602-675)

홍인대사의 성은 주(周)씨이며 출생지는 기주의 황매(黃梅) 라는 곳에서 태어 났다. 그는 태어나면서 부터 영리하고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 파두산(破頭山)에 주석 하면서 선(禪)을 지도하고 있었던 4조 도신대사가 하루는 황매현으로 볼 일이 있어서 가던 중 길에서 한 어린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의 골상(骨相)이 남달리 빼어났으며 보통아이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당시 홍인대사는 마을사람이 무성(無姓)이라고 불렀다. 이때 도신대사는 무성이라는 아이를 보고 말 하시기를 "너의 성(姓)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무성이는 대답하길 "불성(佛性)입니다" 라고 하였다. 도신대사는 기특하게 여기면서 다시 말하기를 "너는 무성(無性)이 아니더냐"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무성은..

육신불(肉身佛) - 설봉 의존(雪峰義存.822-908)

설봉대사의 휘(諱)는 의존이며 천주남안(泉州南安)땅 증씨(曾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독실한 불자 집안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사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 하였으며, 모든 냄새나는 음식이나 불교에서 금하는 오신채를 아주 싫어 했다고 한다. 갓난아기적에 부모가 그를 안고 절에 가면 범종소리를 듣거나 불상을 보면 반드시 거의 모습이 숙연해 졌다고 하는 걸로 보아도 그가 과거의 숙세(宿世)부터 어느정도 불법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를 대략이나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의 나이 열두살이 되자 아버지를 따라 포전에 있는 옥간사(玉澗寺)를 유람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경현율사(慶玄律師)를 뵙더니 문득 예배하고 말하길 "저의 스승님 이시군요." 하더니,..

육신불(肉身佛) -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석두 희천스님의 속성은 진(陳)씨이며 광동성 단주(端州)의 고요현(高要縣) 출신으로 어머니가 태기가 있으면서 부터 마늘을 먹지 않았으며 심심을 정결하게 하고 편안히 가지는 등으로 태교에 힘썼다. 나면서 그 모습이 빼어나고, 어려서부터 그 뜻이 고매(高邁)하였으며 어질고 협기가 있어 바르지 않는 것을 보면 원수처럼 여겼다. 스님의 출생지인 고요현은 오령산맥(五嶺山脈) 대유령(大庾嶺) 서남의 변두리로 유명한 깊은 산중이다. 이 산 가운데에는 묘요(苗僚)인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 있어서 풍습이 아주 토속적이고 미신적이었다. 특히 그들은 황소을 잡아 신에게 제물을 바치곤 했었는데, 스님이 10세때에 죽기 직전의 황소를 빼앗아 살려주었으므로 진씨 일가와 묘요족 사이에 시비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15세..

육신불(肉身佛) - 사조 도신(四祖道信. 580-675)

중국 선종의 제 4조인 도신대사. 중국 선종의 정착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여섯 봉우리 가운데 네번째 봉우리가 되었던 도신대사(道信大師). 선종 승려 가운데 최초의 육신불(肉身佛. 肉身菩薩)로 모셔졌던 도신대사. 그분이 비록 선종 최초의 육신불이 되셨지만, 그 분의 참뜻은 육신불로 남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도신대사의 진정한 뜻은 중국 선종의 정립과 중생의 해탈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達摩大師)로 부터 6조 혜능대사에 이르까지의 여섯분 고승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생소한 스님이 제4조 도신 대사이다. 그러나 도신 대사는 다섯분 못지 않게 큰 도력을 갖추신 분이었고, 선종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크게 공헌한 분이었다. 그분은 황하 유역의 북방 선풍과 양자강 유역의 남방 선풍을 통합..

육신불(肉身佛) - 해옥 무하(海玉無瑕. 1513-1639)

[송고승전]에 기록된 5백 33인의 고승들 가운데, 우리나라 승려로는 10분이 당당하게 중국의 고승들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김지장 스님을 비롯한 원측(圓測).순경(順璟).의상(義湘).원효(元曉).대안(大安).진표(眞表).현광(玄光).무상(無相).원표(元表)등 열분의 고승들 가운데 원측(613-696) 법사와 김지장(696-794)스님은 중국내에서 그 높은 도력을 드날리신 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김지장 스님이 75년간의 긴 수행생활을 하셨던 구화산은 오늘날 중국불교의 4대성지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는 유명한 곳이다. 구화산은 안휘성(安徽省) 청양현(靑陽縣)에 있는데 높이가 1342M 로 결코 대단한 고산(高山)은 아니지만, 중국의 강남을 대표하는 가장 큰 산일 뿐 아니라 김지장 스님으로 인해, 오늘날..

육신불(肉身佛) - 김 교각 스님( 지장법사(地藏法師. 696-794))

지장법사(김 교각 스님)는 중국 불교사에 찬연히 빛나는 고승중의 한분이다. 김교각 스님(지장법사)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 보기가 어렵지만 중국 문헌에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송고승전] [구화산지(九華山誌(] [동승운집(東僧雲集)] [중국불교명찰 안휘구화산]등에 지장법사에 대한 기록 등이 있으며 현재 구화산 역사박물관에 지장법사에 관한 문헌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김지장의 속성은 김(金)씨이고 이름은 교각(喬覺)이며 신라 35대 경문왕 김 헌영(金憲英)의 가까운 친족 또는 신라왕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고승전] 18권에는, 지장은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왕가의 사람이다. 마음은 자비로우나 얼굴이 무섭게 생겼고 영오(穎悟)가 천연스럽다고 기록되어 있다. 키는 칠척 거구였으며 머리는..

육신불(肉身佛) - 감산 덕청(감산 德淸. 1546-1623)

덕청(德淸)은 명말 4대사중의 한 사람이다. 연지주굉(蓮地株宏), 자백진가(紫柏眞可), 감산덕청(감산德淸), 우익지욱(우익旨旭)을 세상에서는 명대의 4 고승이라 한다. 감산덕청은 속성은 채씨(蔡氏)이고 안휘(安徽)의 금능(金陵)에서 태어 났다. 20세에 남경 보은사(報恩寺)에서 출가 하였다. 주지스님 서림명법(西林命法) 손준공(孫俊公)이 그에게 [법화경]을 독송하게 하였는데 4개월만에 능히 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림(西林)은 그의 총명함을 보고 사서역경(四書易經)및 고문시부(古文詩賦)등을 배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젊은 나이인데도 능히 시를 쓰고 작문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외의 황로지학(黃老之學) 에도 박통(博通) 하였다. 1564년 그는 운곡(雲谷 法谷)을 섭산(攝山)의 서하사(栖霞寺)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