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구법승의 기록 34

당나라 의정법사

의정법사(Yijing 義淨 635〜713)는 중국 당나라 때 승려이다. 속명은 장문명(Zhang Wenming 張文明)이다. 25년간 스리위자야 왕국에서 머무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스리위자야 왕국 뿐 아니고 중국과 인도 날란다 대학 사이를 오가면서 여러 왕국들에 대한 정보도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그는 다수의 산스크리트어 텍스트를 중국어로 번역했으며, 인도 날란다 학풍을 중국에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중국에서는 그의 공식 칭호를 삼장법사의정(Tripiṭaka Dharma Master Yijing三藏法師義淨)이라고 부른다. 의정삼장법사(義淨 635〜713)는 약 60권에 달하는 텍스트를 중국어로 한역(漢譯)했다. 그가 한역한 경전은 《물라사르바스티와다 위나야(Mūlasarvāstivāda V..

남해기귀내법전 제4권

31. 관목존의(灌沐尊儀) 三十一灌沐尊儀 수행하고 공경하는 근본으로 삼존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계상(契想)의 원인이 어찌 사제(四諦)를 넘어서겠는가? 그런데도 진리는 그윽하고 깊으며 일은 거친 마음과는 거리가 있다. 성의(聖儀)에 물부어 씻겨 주는 것은 실로 모든 것을 제도하는 일이다. 큰 스승님은 비록 멸도하셨지만 그 형상은 아직 남아있어 마음을 지극히 하면 살아계시는 것과 같으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따르고 공경하여야 한다. 혹 향화를 늘 마련하여 청정한 마음이 생길 수 있게 하여도 되고, 또 항상 불상을 씻겨서 혼침한 업을 쓸어버려도 된다. 이렇게 마음을 두드린다면 드러나지 않은 이익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게 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권장한다면 유작(有作)의 공덕으로 아울러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니, ..

남해기귀내법전 제3권

19. 수계궤칙(受戒軌則) 十九受戒軌則 서쪽 나라에서 출가의 법도는 모두가 성인의 제도를 갖추고 있는데 상세한 것은 백일갈마(百一羯磨)에서 밝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간략하게 그 단면만을 지적하겠다. 西國出家軌儀,咸悉具有聖制,廣如百一羯磨,此但略指方隅。 발심한 바를 따라 출가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마음으로 즐거워하는데 한 스승 옆에 이르러 그의 본뜻을 말하면 그 스승은 곧 방편으로 그에게 어려운 일을 물어 본다. 즉 부모를 살해하지 않았는가라는 등의 질문을 한다. 전에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없을 경우 허락하여 거두어 드리겠다고 말한다. 諸有發心欲出家者,隨情所樂到一師邊陳其本意,師乃方便問其難事,謂非害父母等。難事旣無許言攝受。 이 거두어 드림을 받고 나서 혹 열흘에서 한 달까지 그로 하여금 마음..

남해기귀내법전 제2권

남해기귀내법전 제2권 南海寄歸內法傳卷第二 10. 의식소수(衣食所須) 무릇 의지함이 필요한 누추한 몸은 옷과 음식의 도움을 빌려야 비로소 생명을 건져갈 수 있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묘한 지혜는 적멸(寂滅)의 진리에 의거해야만 비로소 흥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것이 율의에 어긋난다면 곧 걸음걸음마다 죄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투명하게 맑은 마음이 궤도(軌道)를 잃게 되면 생각생각마다 미혹됨을 이루게 될 것이다. 原夫有待累形,假衣食而始濟;無生妙智,託滅理而方興。若其受用乖儀,便招步步之罪;澄心失軌,遂致念念之迷。 이런 이유 때문에 의식(衣食)을 수용하는 가운데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성인의 말씀에 순응해서 수용하여야 하며, 투명하게 맑은 마음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아 진리를 실현하는 사람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1권

번역(翻經) 삼장(三藏) 사문(沙門) 의정(義淨) 찬(撰) 의정 지음 이창섭 번역 翻經三藏沙門義淨撰 무릇 삼천세계[三千]가 처음 세워지자 이에 만물을 융성하게 할 기틀이 갖춰졌고, 백억 세계[百億]도 이미 형성되었으나 아직 사람과 만물의 질서는 생성되지 않았다. 세계(世界)는 텅 비어있었고, 해와 달도 아직 운행하지 않았으며, 음양의 순환[慘舒]1)도 실로 고요히 머물러 있어 음양(陰陽)을 분별할 수도 없었다. 이에 정천(淨天)2)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자 신광(身光)3)이 저절로 좇아 이 세상을 비추게 되어, 땅[飡地]이 비옥하게 되었고 중생[生貪]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임등(林藤)4)과 향도(香稻)5)가 잇달아 생겨나 이것을 먹게 되었다. 原夫三千肇建,爰彰興立之端;百億已成,尚無人物之序。旣空洞於世界,則日..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10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10권 10. 현경 3년 1월 거가를 따라 낙양에서 서경으로 돌아와 서부터 인덕(麟德) 원년 2월 옥화궁(玉華宮)에서 사화(捨化)하기까지 현경 3년(658) 1월에 천자는 동도(東都)에서 서경(西京)으로 돌아왔는데, 법사도 역시 따라왔다. 가을 7월에 다시 조칙이 있어서 법사는 서명사(西明寺)로 옮겨갔다. 이 절은 현경 원년(655) 가을 8월 무자(戊子) 19일에 건립된 것인데, 앞서 이런 칙명이 있었다. “연강방(延康坊)의 한왕(漢王)의 옛집에 황태자를 위해 관사(觀寺)1)를 각각 하나씩을 세워라.” 그리고 법사에게 명하여 그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법사가 보고 돌아와서 상주하였다. “땅이 협소하여 도관(道觀)과 불사(佛寺)를 둘 다 지을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서 한왕의 옛집..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9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9권 9. 현경 원년 3월에 자은사비(慈恩寺碑)의 완성을 감사하 는 데서부터 같은 해 3년 1월 거가(車駕)를 따라 서경 (西京)으로 돌아올 때까지 현경 원년(656) 봄 3월 계해(癸亥)에 어제(御製) 대자은사(大慈恩寺) 비문이 완성되었다. 이때 예부상서(禮部尙書)1) 허경종(許敬宗)이 사신을 보내서 비문을 법사에게 전해 주었다. 홍로사(鴻臚寺)2)에서도 역시 절에다 편지를 보냈다. 1) 예의와 제사, 그리고 과거시험 등을 관장하는 관서인 예부(禮部)의 우두머리이다. 2) 참조(參朝)․향연(饗宴)․알현(謁見)을 관장하는 관청(官廳)이다 갑자일(甲子日)에 법사는 절의 대중을 거느리고 조정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진사(陳謝)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홍로사에서 내리신 부(符)..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8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8권 8. 영휘 6년 여름 6월『이문론(理門論)』1)의 번역을 마친 때부터 현경(顯慶) 원년 봄 3월 백관(百官)이 임금이 지은 사비(寺碑)를 보고 감사드리는 데까지 1)『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의하면, “정관(貞觀) 23년(649) 12월 25일에 번역하였다”고 한다. 영휘 6년(665) 여름 5월 경오(庚午)에, 법사는 경전을 바로잡아 번역[正譯]하는 여가에 또『이문론(異門論)』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먼저 홍법사(弘法寺)에서『인명론(因明論)』을 번역했었다. 이 두 논은 각각 1권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는 입(立)과 파(破)의 규칙[方軌]을 분명히 하고, 사유와 논증의 방법[比量]2) 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역경승(譯經僧)들은 서로 다투어 이 경전에 주소(註疏)를 지었다. ..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7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7권 7. 정관 22년 6월 황제가「술성기(述聖記)」를 지은 때부터 영휘(永徽) 5년 2월 법사가 답서할 때까지 정관 22년(648) 여름 6월, 당시 세자로서 춘궁(春宮)1)에 계시던 천황대제(天皇大帝)2)는 성문(聖文)을 받들어 본 후에「술성기(述聖記)」를 지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1) 동궁(東宮)을 말하는데, 태자가 거주하는 곳이다. 보통 태자의 뜻으로 쓰인다. 2) 당(唐) 고종(高宗) 이치(李治)를 말한다. 고종은 그가 죽은 후의 묘호(廟號)이고, 천황대제는 사후에 추증한 존호이다. “대저 바른 가르침[正敎]을 드러내 선양하려면 지혜 있는 사람[智者]이 아니면 그 글을 넓혀 나갈 수 없고, 미묘한 말씀[微言]을 숭앙하여 널리 퍼뜨리려면 현명한 사람[賢者]이 아니고서..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6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6권 6. 정관 19년 봄 정월 서경(西京)으로 돌아와 22년 여름 6월 임금이 지은 경서(經序)에 감사하여 답하기까지 정관 19년(645) 봄 1월 7일에, 경성유수(京城留守) 좌복야(左僕射)양국공(梁國公) 방현령(房玄齡) 등은 법사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우무후대장군후막(右武侯大將軍侯莫)1) 진식(陳寔)2)과 옹주(雍州)3) 사마(司馬)4) 이숙권(李叔眷)과 장안 현령(長安縣令) 이건우(李乾祐) 등을 보내어 받들어 영접하게 하였다. 그들은 운하를 통해 들어와 도정역(都亭驛)5)에서 법사 일행을 쉬도록 했는데, 법사를 따라온 사람이 구름처럼 많았다. 1) 당초(唐初)에 경성(京城)에서 황제의 경위를 맡았던 고급 군관이다. 2) 동한(東漢)의 허(許) 지방, 즉 ..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5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5권 5. 니건자(尼乾子)에게 귀국(歸國)에 관한 점을 친 때부 터 제성(帝城)의 서조(西漕)에 이르기까지 구마라왕(鳩摩羅王)1)의 사신이 오기 전이었다. 맨몸을 드러낸 벌사라(伐闍羅:Vajra)라고 하는 한 니건자(尼乾子)2)가 갑자기 법사의 방으로 찾아왔다. 법사는 전부터 니건자들이 점을 잘 친다는 말을 듣고 있었으므로 자리에 앉게 하고는 즉시 의문되는 것을 물었다. “나는 지나국(支那國) 승려입니다. 이곳에 와서 공부하다 보니 세월이 많이 흘러서 지금 귀국하려고 하는데 뜻대로 될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것과 여기 머무는 것 중에 어느 길이 더 좋은지, 그리고 수명이 긴지 짧은지에 대해 그대가 점을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니건자는 흰 돌 한 개를 찾아오더..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4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4권 4. 첨파국(瞻波國)에서부터 가마루파(迦摩縷波) 국왕의 초청을 받을 때까지 이란나국((伊爛拏國))으로부터 긍가강의 남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첨파국(瞻波國)1)[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가람이 10개 있고 2백여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는데 소승교를 배우고 있었다. 도성(都城)은 벽돌로 쌓았는데 높이는 여러 장(丈)이고 성을 둘러싼 해자는 넓고 깊어서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1) 지금의 Bhāgalpur 근방에 Campanagara와 Campapura라는 두 마을이 있는데, 그곳이 도성지이다. 인도 16대국의 하나인 Aṅga국으로서, 인도지나반도의 점파국(占波國)도 이 나라의 이민(移民)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그 옛날 겁초(劫初)에..

현장의 인도 구법(求法)과 현장상의 추이 / 남동신

현장의 인도 구법(求法)과 현장상의 추이 / 남동신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수상작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남동신 dsnam@duksung.ac.kr 남동신 교수/덕성여대 사학과 편집자 이 논문은 2003년도 정부 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인문사회 분야 지원사업 과제 :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 불교 유적의 연구” : KRF-2003-072-GS2001).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Korea Research Foundation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MOEHRD)"(KRF-2003-072-GS2001). ―서역기(西域記), 현장전(..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3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3권 3.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이란나국(伊爛拏國)까지 갈약국사국(羯若鞠闍國)에서 동남쪽으로 6백여 리를 가서 긍가강[殑伽河]을 건너 남쪽의 아유타국(阿踰陀國)1)[중인도]에 이르렀다. 여기는 절이 백여 개나 있었고 승려의 수는 천 명이나 되었는데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 큰 성(城) 안에는 오래된 가람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벌소반도보살(伐蘇槃度菩薩)2)[당나라 말로는 세친(世親)이다. 옛날에 바수반두(婆藪槃豆)라 하였는데 천친(天親)이라 한역한 것은 잘못이다.]은 대․소승의 논(論)을 저술하고 대중을 위해 강의하였다고 한다. 1) 범어 ayudhā 또는 ayodhyā의 음역이다. 카노지 동남쪽의 Fatehpur지방을 가리키며, 그 도성(都城)에 대해서는 Oudh, Kā..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2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2권 2. 아기니국(阿耆尼國)에서 갈야국사국(羯若鞠闍國)까지 이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 아기니국 아부사천(阿父師泉)에 이르렀다. 샘은 길 남쪽 모래 언덕에 있었는데, 언덕 높이가 수 길[丈]이나 되고 물은 그 중간에서 솟아났다. 샘에 대해서는 이런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에 장사꾼 수백 명이 길을 가다가 물이 바닥이 났다. 그리하여 피로에 갈증까지 심했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장사꾼 가운데 승려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노자가 없어서 상인들 틈에 끼어서 얻어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상인들이 서로 의논하였다. “이 스님은 부처님을 섬기기 때문에 우리들이 공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 리 길을 오면서도 그에게 한 푼도 내 놓으라고 한 적이 없다. 게다가 지금 우리들은 목이..